오랜만에 하루키 에세이를 읽으니 기분이 좋다. 아시다시피 이 에세이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관람기 혹은 관전기 비슷한 책으로 2008년에 나왔던 <승리보다 소중한 것>의 개정판이다. 단순하게 올림픽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생은 무척 재미있게 또 감동깊게 읽었다. 책의 구성도 마음에 든다.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두 편의 글은 각각 일본의 남녀 마라토너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96 애틀랜타 여자마라톤에서 동메달을 딴 아리모리 유코와 일본 남자마라톤 기대주인 이누부시의 이야기로 서두를 연다. 본론에서는 각종 경기 이야기외에도 무라카미 사관에 기초한 간략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와 상어와 악어, 코알라와 캥거루 등에 대한 속 깊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도 있다.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두 편의 글은 역시 프롤로그에 등장했던 두 명의 남녀 마라토너에 대한 말하자면 후일담 같은 이야기다. 아리모리는 시드니에 올림픽에 선수로 참가하지 못했고 같은 해 있었던 뉴욕마라톤에서 10위를 기록했다. 이누부시는 시드니에서 레이스 도중 탈수증상으로 4년을 준비한 경기에서 기권을 해야했다. 글의 대가리와 꼬랑지를 이렇게 연결(이걸 수미쌍관이라고 하나?)해 놓은 이유는 아마도 하루키가 승리보다 소중한 그 어떤 그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서 일 것이다. 하루키가 마라톤 메니아라서 그런지 마라톤 경주를 정말 실감나게 중개해 준다. 소생같은 한심한 축생에게 마라톤은 제일 심심하고 밋밋한 스포츠 종목일 것이다. 2시간 동안 그냥 죽으라고 아니면 죽었다하고 달리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42.195km의 굽이굽이마다에서는 어느경기 못지않은 흥미진진한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책 중간에 쉬어가는 코너 비슷하게 등장하는 무라카미 사관 오스트레일리아의 약사부분은 무척 흥미롭다. 소생이 호주의 역사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당연한 이야긴데 내가 이렇게 무식한가 조금 놀랐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에서 온 죄수들이 개척한 나라다. 1788년부터 유형이 폐지된 1840년까지 총 163,000명의 죄수가 영국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강제로 운반되어 노역에 동원되었고 그들 대부분이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햇다. 이 신생국가는 자발적 식민지 비슷한 영연방 국가여서 아버지의 나라인 영국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발벗고 나서서 했다. 죄수들이 세운 나라라는 오명을 씻기위해 더 메달린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이 어린 자식이 믿고 기댈 데라고는 아버지밖에 없는 것이다.

 

신생국 호주는 아버지 나라 영국을 위해서 많은 피를 흘렸다. 효자가 새끼손가락 단지하는 것은 정말 새발의 피다. 호주는 수단 반란에 자비로 의용군을 보내고 보어전쟁에도 파병했다. 의화단 사건 때는 베이징까지 군대를 보냈다. 1차 세계대전 때는 30만명의 병사를 파병했다. 6만가까이 전사했고 15만명 이상이 다쳤다. 당시 호주 인구가 5백만명이었다니 실로 놀랍다. 특히 심했던 것은 갈리폴리 상륙작전으로 안자크 군(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연합군)은 갈리폴리 해안에서 엄청나게 죽어나갔다. 8만명이 전사했다고 한다.(하루키는 8천명이라고 하는데 이는 8만명의 오타인 것 같다.)

 

젊은 날의 풋풋한 멜 깁슨이 주연을 맡고 <죽은 시인의 사회>로 유명한 피터 위어가 감독한 영화 <갈리폴리>는 바로 이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한심한 소생은 금시에 초문이나 유명한 전쟁영화라고 한다. 멜 깁슨이나 피터 위어 모두 호주사람이다. 이 작전을 기획한 영국측 해군 장관은 바로 처칠이었고 당시 오스만 제국(오늘날의 터키) 사령부에는 후일 터키의 국부가 되는 무스타파 케말이 있었다. 갈리폴리에 엄청난 사상자를 남겨둔 채 영국 연합군은 패퇴했다. 명백한 처칠의 오판이었다. 갈리폴리전투에서 죽은 세 아들의 유골을 찾아가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워터 디바이너>가 얼마 전에 개봉했었다. 감독이자 주인공인 러셀크로우는 뉴질랜드 출신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갈리폴리 상륙일을 안자크 기념일로 제정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한 적이 없어 독립기념일도 없다. 안자크 기념일이 그 대용품처럼 됐다고 한다. 아버지 대영제국이 노쇠하여 골골하자 호주는 이제 아버지에게 대들어 독립한 큰 형님 미국에게 의지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미국에 적극 협조했다. 한국전쟁에 파병했고 베트남 전쟁에도 5만명에 이르는 군대를 보냈다. 베트남 파병에서는 반전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국제정세도 냉전체제가 붕괴되면서 호주도 이제 어느정도 아버지와 형님 그늘에서 벗어나 자립을 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한가지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바로 원주민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원주민을 과거 역사 속에서 거의 무시해왔다. 1960년 후반까지 국세 조사에도 원주민을 포함하지 않앗다. 말하자면 원주민은 거의 인간취급을 받지 못했다. 식민지 개척 초기에 엄청난 수의 원주민 인디언들이 학살되었다. 1940년대에 원주민 어린이들은 그 부모와 헤어져 시설에 강제 격리되어 정부가 실시하는 공민 교육을 받았다. 이른바 '도둑 맞은 세대'다. 원주민의 유대를 무너뜨리고 저렴한 노동력 확보을 위한 것이었다. 남자아이는 대부분 벽지 농가의 일꾼으로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백인 가정의 가정부로 일했다. 이런 식으로 끌려가 부모들과 생이별한 원주민 아이들의 수는 십만명 이상에 달한다고 한다.

 

호주 정부는 1996년에 원주민에게 공식적으로 유감의 뜻을 표명하고 일부 토지 반환을 실시하는 등 원주민과 화해를 시도했다. 하루키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같은 것이었다. 뚜껑이 한 번 열리자 백인과 원주민 양쪽에서 온갖 문제들이 잇달아 터져나왔다. 이것이 이른바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을 앞둔 호주의 당시 상황이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등장한 사람이 바로 캐시 프리먼이라는 원주민 출신 400m 선수였다. 그녀는 시드니 올림픽 4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캐시 프리먼이 400m에서 우승하는 장면에 대하여, 그날 경기장에 있던 11만 관중이 느꼈던 것에 대하여 하루키는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궁금하시면 한번 읽어보세요. 2008년 호주 정부는, 토착 원주민들에 대하여, 그들 과거의 정부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기타 기억에 남는 내용들>

 

1. 상어는 꼬리지느러미 뒤에 생식기가 두 개 나란히 있다(뒷발처럼 보인다)고 한다. 교미할 때 둘 중에 하나를 사용하는데 하루키는 대체 어떤 기분으로 하나를 선택하는 걸까하며 궁금해 하고 있다. 아무래도 스페어로 그런 것이 하나 더 마련되어 있으며 든든하겠다는 생각은 든다.

 

2. 코알라는 하루에 80퍼센트를 수면으로 보낸다고 한다. 코알라의 주식인 유칼리 잎에는 독성이 포함되어 있어 그 독을 중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만큼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래서 코알라는 되도록 독소가 적은 어린잎만 먹는다. 신선한 유칼리 어린잎을 호주에서 공수해 와야 하기 때문에 코알라 사육이 어렵다고 한다.

 

3. 한중일 3국 스포츠 정세에 대한 하루키의 고견 : 아시아 스포츠 정세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것은 일본은 중국을 상대로 하면 강하고, 한국은 일본을 상대로 하면 강하고 중국은 한국을 상대로 하면 강하다는 것이다. 궁합이란 게 있는 걸까 뭐 그렇게 해서 동아시아 지역 내의 평화가 유지된다면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4. 올림픽 관전기라서 한국이야기가 간간이 나온다. 올림픽 기간중에 호주의 한 감옥을 탈옥한 죄수가 탈취한 차량이 한국 방송국 스탭의 차량이었다는 이야기와 선수촌에 비치된 물품을 선수들에게 선물로 주는 줄로 착각한 한국선수 몇 명이 텔레비전 같은 것을 가져나오다가 제지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이야기는 좀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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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6-01-11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터 디바이너가 개봉할 당시, 관련 배경지식이 없는 관계로 관심 두지 않은 작품이었는데... 붉은돼지님 글 읽고나니 역시 사람은 많이 알고봐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이 글을 먼저 읽었다면 챙겨보았을법 한데요~ ㅎㅎ

붉은돼지 2016-01-11 15:43   좋아요 0 | URL
오로라님, 저도 뭐 갈리폴리 전투, 캐시 프리먼 이런 이름들 <시드니>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멜깁슨 나오는 영화는 꽤 유명한 모양이더군요...언제 한번 챙겨볼 생각입니다. 제가 관심두고 있는 이스탄불과도 밀접한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Mephistopheles 2016-01-11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리폴리는 전투라고 불리기 모호한 일방적인 살육이었어요...2차세계대전의 영웅으로 불리우는 처칠의 어마무시한 ˝흑역사˝지요..

붉은돼지 2016-01-12 09:16   좋아요 0 | URL
처칠에게 그런 흑역사가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멜깁슨 나오는 갈리폴리 한번 보고 싶군요 ^^

Clou:Do 2016-01-11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이렇게 재미있는 서평을 쓰고 싶네요. 술술 잘 읽힙니다. ㅎ

붉은돼지 2016-01-12 09:17   좋아요 1 | URL
술술 잘 읽어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cloudo님 ^^

cyrus 2016-01-11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아공 월드컵 기간 때 남아공의 치안 문제가 알려지니까 원정 응원을 걱정했던 반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언론들이 남아공 치안 문제를 너무 안 좋은 쪽으로 뻥튀기하는 바람에 말도 안 되는 루머도 나왔어요. 사실인지 잘 모르겠는데 월드컵 중계 관계자가 강도를 만나서 털릴 뻔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칼립투스에 있는 물질이 휘발성이 높아서 화재가 잘 나기 쉬워요. 그래서 코알라들이 산불로 많이 희생됩니다.

붉은돼지 2016-01-12 09:23   좋아요 1 | URL
코알라는 서식지를 떠나는 것을 몹시 싫어해서 불이 나도 그냥 타서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하네요 ㅜㅜ
사람들이 코알라를 화재지역에서 억지로 데리고 나온다고 합니다. ^^

서니데이 2016-01-11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은돼지님, 편안한 밤 되세요.^^

붉은돼지 2016-01-12 09:23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덕분에 편안한 밤을 보냈습니다. 너무 편안해서 아침에 일어나기가 좀 어려웠어요 ㅎㅎㅎㅎ

고양이라디오 2016-01-26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 이런 글을 놓쳤었다니. 저도 최근에 <시드니!>를 읽었었는데, 정말 공감 100%의 서평을 만나게 되서 너무 좋네요. 제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들과 감상, 감동들이 다 담긴 서평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