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과 그의 첫 부인인 밀레바의 관계가 궁금해서 집에 있는 시공디스커버리총서〈아인슈타인 – 우주를 향한 어느 물리학자의 고찰〉을 대충 훑어봤다. 책의 대부분은 물리학 분야에서의 아인슈타인의 위대하고 놀라운 업적과 반나치, 평화주의 등 그의 명예로운 사회 활동에 대한 것이고 밀레바에 대한 내용은 별로 없다.
밀레바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인으로 그녀를 가르치던 교사들에게 주목을 받아 먼저 남자 중학교에 보내져 중등학교를 마쳤고 다음에는 하이델베르크로 유학갔다가 아인슈타인과 같은 해(1896년)에 스위스 취리히 공과대학(폴리테히니쿰)에 입학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파리공과대학도 1970년대에 와서야 남녀공학이 되었다. 그녀의 전공은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수학과 물리학이었다.
대학에서 아인슈타인과 밀레바는 서로 눈이 맞아 가정을 꾸리려고 마음먹었지만 아인슈타인의 가족의 반대가 심했다. 밀레바는 아인슈타인보다 나이가 많고 신체 결함이 있으며(구체적인 내용이 없어 어떤 결함인지 모르겠다.) ‘여자답지’ 않게 공부를 할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유대인도 아니었다.
밀레바는 1901년 임신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아마도 어린나이에 죽은 것으로 생각된다. 취리히에 돌아온 그녀는 공과대학 졸업시험에 통과하지 못하여 결국 졸업장도 받지 못하고 직업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 책에 나오는 밀레바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그 뒤로는 1914년에 이혼을 했다는 언급정도 밖에 없다.)
정희진이 〈정희진처럼 읽기〉(p134)에서 언급한 다음 내용에 대하여는 소생도 조금 의아하게 생각한다. “밀레바 마리치(아인슈타인의 첫 부인)는 뛰어난 수학자로서 스위스연방공과대학의 홍일점 입학생이었다. 상대성 이론, 광양자 이론, 통일장 이론의 공동 연구자였고, 남편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아인슈타인이 아내와 자녀를 ‘버린 후’ 30여 년간 업적없이 과거의 후광으로 연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학계에서도 정설이다.(조숙경 〈과학동아〉 2002년 5월호 참조)”
밀레바가 아인슈타인의 여러 이론의 공동연구자였고 절대적 역할을 했으며 아인슈타인이 그녀를 버린 후 과거의 후광으로 연명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라니, 2002년 과학동아를 찾아 읽어보진 않았지만 과하다는 생각이다. 다만 한 재능있는 여성이 출산과 육아와 가사에 매몰되어 그 재능을 꽃 피워보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일이다. 아래에 옮긴 부분은 책의 뒤 쪽에 있는‘기록과 증언’이라는 코너에 별도로 언급된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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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 물리학자의 세 가지 운명 (p118)
“아인슈타인 부인은 아직도 잊혀져 있다!” 아인슈타인의 첫 번째 부인이 구멍 난 양말이나 기우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리베라시옹〉지가 붙인 기사 제목이다.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 중에 ‘상대성에 대한 우리의 연구’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편지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들이대며 아인슈타인이 그 천재성 만큼이나 드센 남성중심의 야비함을 가졌다고 비난했다. 마치 그렇게해야 꽉찬 여권옹호자인 양 말이다. 아인슈타인이 정말로 밀레바에게서 상대성 이론을 도용한 것일 수도 있다. 그가 그녀에게 노벨상 상금을 주었다는 사실이 그 혐의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은 아마 덜 극적이지만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고상한 사색의 세계로 도피하고 있는 동안 모든 가정사 – 혼외관계에서 생긴 첫 딸의 출생, 병을 앓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그 아이의 병간호, 아들 에두아르트의 붙임성 있지만 이상한 성격과 관련된 어려움과 걱정 – 의 해결을 아내에게 맡겼다. 이러한 사색을 통해서 아무리 훌륭한 이론이 탄생했다고 하여도 변명은 되지 못한다. 젊었을 때 ‘바라새인들’이라는 사람들의 행동을 혹독하게 몰아치고, 연인에게 자신은 바리새인이 아니라며 호언장담한 아인슈타인이 실상 ‘전적으로 자연적인’ 역할 분담에 안주하는 전형적인 바리새인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 쌍의 유명한 물리학자 부부의 운명은 전혀 달랐다. 마리와 피에르 퀴리, 특히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피에르 퀴리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