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 이야기
어제 양동마을에 갔었다. 우리 집에서는 자동차로 삼십여 분이면 갈 수 있다.
몇 년 전, 처음 가보고 나는 이 양동마을이 마음에 들었다.
인적이 드물고 고즈넉하여 정말 내가 조선시대 어느 마을길을 걷고 있는 듯했다.
이제 이 마을의 운명도 어떻게 변할는지 알 수가 없어서 ‘보존관리’라는 미명하에 본 모습이 사라져 버리기 전에 가끔씩 와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양동마을은 안동하회마을과 더불어 2010년 8월 1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등재 결의안을 통해 그 등재 사유로서 주거 건축물과 정자, 정사(精舍 : 학문과 휴식의 공간), 서원 등의 전통 건축물들의 조화와 그 배치 방법 및 전통적 주거문화가 조선시대의 사회 구조와 독특한 유교적 양반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이 오랜 세월 동안 온전하게 지속되고 있는 점과 문집, 예술작품과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 및 문화적 성과물과 공동체 놀이, 세시풍속 및 전통 관혼상제 등 주민들의 생활과 신앙에 관계된 무형유산이 세대를 이어 전승되고 있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하였다고 한다.
양동마을은 경주시 중심시가지에서 동북부인 포항 쪽으로 약 16㎞ 떨어진 형산강 중류지점에 있다.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조선시대 양반마을의 전형으로 1984년 12월 24일에 월성양동마을이란 명칭으로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면서 경주양동마을이 되었다. 마을 내에는 보물 3점, 중요민속자료 12점, 도지정유형문화재 4점, 도지정민속자료 1점, 도지정기념물 1점과 문화재자료 1점이 있다.
약 520년 전 손씨의 선조인 손소(孫昭)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 살던 장인인 풍덕 유씨 유복하(柳復河)의 상속자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월성 손씨(月城孫氏)의 종가를 지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풍덕 유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손씨의 딸은 이 마을의 여강 이씨(驪江李氏) 번(蕃)에게 출가하여 조선시대 성리학 정립의 선구적 인물인 이언적(李彦迪)을 낳아 번성하게 되었다. 손씨는 이씨의 외가이면서 상호통혼을 통하여 인척관계를 유지하고 마을 대소사에 협력하여 왔다.
현재 양동마을에는 월성 손씨 40여 가구, 여강 이씨 70여 가구가 남아 양대 문벌을 이루는 동족집단 마을을 계승하고 있으며, 월성 손씨의 종손인 손동만(孫東滿)은 손소의 19대손이고, 여강 이씨의 종손인 이인식은 이언적의 15대손이다.
주요문화재로는 무첨당, 관가정, 향단, 양동강학당, 양동낙선당, 양동수운정, 양동수졸당, 양동심수정, 양동안락정, 양동이동기가옥, 양동이원봉가옥, 양동이원용가옥, 양동이향정, 양동이희태가옥, 경주손동만씨가옥 등이 있다.
그밖에 문화재로는 손소선생분재기, 적기공신논상녹권, 양동대성헌, 양동의 향나무, 손종로정충비각 등이 있다.
양동마을은 실제로 주민들이 거주하여 살고 있어서 이 민속마을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해주고 있다. 역사는 지나간 시절의 산물이 아니다. 오늘이 바로 역사의 현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양동마을은 박제된 역사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면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 고즈넉한 조선시대 마을이 이제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우리 집 주위의 초등학교, 중학교에서도 가을 소풍을 다녀왔다. 어제도 서울에서 관광버스 세 대로 나누어 타고 어느 단체에서 오는 등 작은 시골마을이 사람들로 넘쳐났다.
내가 그리던 양동마을은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 사라져가는 것이 그것 뿐이랴.
아쉬운 마음에 카메라에는 사람사는 냄새가 배어있는 곳을 주로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