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始) 커피이야기


내가 커피를 즐기고 좋아하는 데 반해 남편은 커피라곤 입에 대지 않는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절대 몸을 움직이지 않는 성격 탓에 살아가면서 민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대대로 딸이 귀한 집안의 외동딸이다. 그러니 남편은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위가 아니겠는가.
신혼여행을 마치고 친정에 갔을 때, 엄마는 상을 잘 차려놓고 사위에게 “좀 더 드시게” 권했는데 이 사위는 밥 한 술 더 먹는 것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목에 칼이 들어와도 더 못 먹는다는 자세로 버텼다.
엄마는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고 방으로 들어온 나는 한바탕 눈물바람을 했다.

나는 밥 한 끼 굶는 것은 쉬워도 마셔야 할 때 커피를 건너뛰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삼천 원짜리 라면을 먹고 육천 원짜리 커피를 마시는 것을 흉을 보곤 하지만 나는 그것은 취향의 문제이지 비난 받아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편의 생각은 다르다. 그것은 ‘끼니’에 대한 모독이라는 거였다.

다른 부분은 말할 것도 없이 음식에 대한 우리 부부의 생각은 이렇듯 다르다.
나는 여름에도 더운 밥 먹기를 즐기는 데 남편은 한겨울에도 적당히 식은 밥이어야 한다. 금방 지어서 더운밥이면 주방 창틀에 얹어서 식히거나 그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으면 냉동실에 넣고 삼십까지 세곤 한다.
나는 편한 시간에 시장기가 느껴지면 먹어도 되는 반면 남편은 시장기와는 상관이 없이 식사 시간도 정확해야 한다.
또 음식은 무조건 그릇에 산처럼 올라오도록 수북이 담아야 된다. 어쩌다 손님이 와서 큰 접시에 보기 좋게 적당히 담아내면 손님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신경을 쓰면서 나를 째려보곤 한다.
나도 질세라 소신껏 밀고나가는 날엔 손님이 가고나면 한바탕 언쟁이 벌어진다. “왜 그렇게 음식을 인심 사납게 담았냐? 아까워서 억지로 주는 것 같지 않느냐?”
그러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조상 중에 굶어서 돌아가신 분이 있냐? 음식을 내면서 얼마든지 더 드시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며 언성을 높이곤 한다.

‘먹고 산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먹는 문제는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우리 부부는 이렇게 걸리는 것도 많고 생각도 다르다.
그동안의 세월의 무게가 얼마인가. 이제는 몸에 잘 맞는 옷처럼 편안하게 생각되다가도 어떤 때는 물에 기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에 공감하지만 세월의 힘은 아무래도 그런 진리를 뛰어넘을 수 있나보다. 도무지 융화라고는 될 것 같지가 않던 남편에게 작은 변화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크고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수많은 강을 건너기도 하면서 오랜 시간 함께 걸어온 세월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학을 온 아이는 아무리 잘해도 주장의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무언의 룰 때문에 내 아들이 축구부 주장의 자리에서 번번이 밀린 것처럼, 뒤늦게 자신의 길을 찾은 남편은 뿌리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사회의 토양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견고하고 배타적이었다. 실력이나 열정, 성실성, 정직함은 제쳐두고 배경을 보자고 하고, 유력자를 내놓으라고 했다. 자신의 명함 외에 내세울만한 그럴듯한 그림이 없는 남편으로서는 한 뼘 뿌리내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흔들리지 않는 나무로 서려면 얼마나 더 외풍에 시달려야 할지는 모르겠다.
사람들은 누구나 직선 코스로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기를 원한다. 우리 부부의 삶도 다를 바 없었다. 목표를 정해두고, 십 년이나 늦게 출발한 것을 만회하려고 얼마나 애를 써왔던가. 조바심을 치며, 곁눈질 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이었다.
남편은 어느 한 순간 마음을 바닥까지 내려놓고 쉰 적이 없었다. 커피를 마시지 않고 차도 즐기지 않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앉아서 마셔야 하는 커피는 어쩌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데 시간낭비일 거라고 생각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신혼시절, 친정어머니를 서운하게 했던 그 소신 그대로 지금까지 살아온 남편에게 작은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체로 여행을 가거나 식사를 할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도 절대 ‘커피로 통일’이 안 되는 것은 순전히 남편 때문이다. 남편은 장(長)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나머지 사람들도 서로 눈치를 보다가 없던 일로 하고 만다. 썰렁한 분위기를 만드는 당사자인 셈이다.
그런 남편이 커피를 마시기를 시작했다.
아직은 커피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옆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겠다는 배려로 보이기는 하지만 언젠가 ‘한 잔의 커피’가 주는 여유와 부드러움을 체득하게 될 것이다.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들을 돌아보며 가끔은 숨고르기를 할 필요성을 남편도 느끼고 있을 터였다.

몽골초원을 여행하다 보면 강을 자주 만난다고 한다. 초원을 흐르는 강은 많은 굴곡을 만들며 굽이굽이 흐른다고 한다. 그만큼 더디 흐르고 멀리 돌아갈 수 밖에 없지만 그 영향으로 강 주변에는 더 많은 초원이 형성된다고 한다.
남편이나 나의 삶이 몽골의 강을 닮아 있는 것 같아서 어느 책에서 이 대목을 읽고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진부한 소리지만 목적을 이루는 것보다 그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하루하루의 삶이 각각 다른 무늬의 날줄과 씨줄로 엮이면서 우리의 한 생애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 인생은 고속도로 여행이 아니지 않는가. 고속도로에서는 단시간에 가는 것이 미덕이다. 그러나 인생은 초원에 흐르는 강이다. 굽이굽이 돌아서 느리게 흘러가는 것이다.
비로소 그동안의 우리 부부의 삶이 연민이나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깨달음이 있기 전까지는 이젠 더 이상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미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불안해하고 전전긍긍했었다.

그렇게 살아온 남편이 이제는 한 잔의 커피가 주는 여유를 즐길 줄 알았으면 좋겠다. 삶의 여백이나 내면의 평화는 미래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이다. 더 이상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히는 그런 삶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걸어온 아내의 희망사항이다.  


  
 

 

 

 

 

 

 

 

                                                         내가 갖고 있는 여자 VS 남자

*** 며칠 전 페이퍼로 금(禁) 커피이야기를 올렸었다. 그 이야기는 사실 짝이 있다. 오늘 올린 글이 그것이다.

어제 저녁, 지난 여름에 문을 연 뷔페식당에 갔다. 일인당 삼만 원이었다. 아는 분이 먼저 다녀와서는 우리 내외도 한 번 가보라고 돈을 보내왔다. 남편과 나는 집에서 먹고 그 돈을 횡령하고 싶었다. 사실 밥을 먹고도 횡령할 수 있는 금액이긴 하다. 간단한 감사멘트라도 문자로 날리려면 아무래도 구경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예약을 하지 않고 갔더니 입구에서부터 브레이크가 걸렸다. 2층 대기실에서 좀 기다리란다.
나는 그런 자투리 시간을 땜빵 하는 데는 선수다. 각기 다른 디자인의 대기실을 기웃거리며 사진을 찍었다. 그럴 때면 주로 거울이나 벽에 비친 내 모습을 찍는다. 나중에 이것들만 모아서 앨범을 만들려는 야심찬 계획도 있다. 십여 분 신이 나서 돌아다니다가 문득 그런 시간을 못견뎌하는 남편 생각이 났다. 어디 있나? 찾아다녔더니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자기 손으로 ‘커피’라는 것을 가지고 와서 마시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당연히 증거를 남겼다.
밥은 아주 맛이 있었다. 지금까지 다녀본 뷔페식당으로는 으뜸이었다.
남편은 정말 적당히 먹었고, 나는 다이어트 중임에도 조금 과식을 했다. 좀 소식인 편이므로 그래봐야 다른 사람이 보통으로 먹는 정도였다.

그런데 맛을 못 본 것이 4분의 3은 되는 것 같아서 조금 억울했다.
그 억울한 감정위에 보태어지는 것이 있었는데 민망함이었다. 결코 싸다고 할 수 없는 비용임에도 불구하고 부산 자갈치 시장처럼 붐비고 있었다. 지방의 작은 중소도시 - 거대한 포항제철을 끼고 있으니 전국에서 현금이 제일 많은 도시라는 말은 있다 - 인데 우리는 정말 이렇게 잘사는 나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잘 먹고 살아도 되는 것인가 하는……. 나도 열심히 먹었지만 아무튼 마음은 그랬다.

오늘 아침, 끓인 지 사흘이 된 김치찌개를 식탁에 올렸다. 두 식구이고 모임이 잦아서 별로 진도를 못냈더니 작은 냄비에 끓인 것이 아직도 남아서 오늘 아침에는 기어이 끝을 낼 작정이었다.
남편이 말했다 “어제 그것보다 난 이것이 더 좋아.”
이런 ~~~~헐!
아내가 말했다. “이건 편한 거고 좋은 건 어제 그것이지. 얼마나 신선하고 다양했는데?”
남편은 지금 가을을 심하게 타는 중이다. 갱년기 우울증 증세도 약간은 있다.
아내가 덧붙였다. “당신에게 여자가 나 하나 밖에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야 - 이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 하시겠지만 우리 부부만의 암호이다 - 여자가 좋으면 여자가 좋다고 얘기해야지 여자가 붙을 것 아니야? 근데 나는 여자 싫어한다고 얘기하니 어느 여자가 다가오겠어?”
참고로 우리 집안은 콩가루집안은 아니다. 콩가루는 커녕 너무 모범적이어서 문제인 집안이다. 근데 왜 남편에게 여자가 붙으라고 부채질이냐고요?
나는 더 나이 먹기 전에 ‘가슴 아픈 사랑’을 하고 싶다고 나발(?) 불고 다닌다.
결론은 아닌 척 시침을 떼나, 나발을 부나 결과는 뻔하다는 거다.

저녁 무렵이면 어김없이 302호로 찾아든다.
그게 행복이다.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는 우리집 바른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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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0-27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전언니, 커피는 곧 둥글어짐 일까요?
하나의 커피 한잔인데, 참 많은 심상이예요.
저두 그렇게 둥글어지고 싶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모난 곳이 닳아지는 것 같기는 한데.. ^^

저 오늘 벌써 커피 세잔째예요!

gimssim 2010-10-27 21:28   좋아요 0 | URL
저는 커피 한 잔을 두고도 열 편의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인데요.
저도 오늘 진도 안나가는 글 하나 쓰느라 머리 쥐어박으며 커피 두 잔 마셨네요.
젊을 때는 좀 모가 나게 살아도 돼요.그게 젊다는 것이지요.

양철나무꾼 2010-10-27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요,좀 고리타분한 편이라서요.
바른생활 사나이들이 좋아요.

이리저리 통밥 굴리느라 고심하지 않아도 되고 말이죠.
걍 기면기다 아니면 아니다,이런 쿨함이 좋아요.

글구요,내가 해주는 집밥을 맛있게 먹어주는 남자라면 더 더욱이요~

근데요,중전님~
저도 나이 더 먹기 전에 '가슴 아픈 사랑'을 한번 해보고 싶은데 말예요~^^

gimssim 2010-10-27 21:32   좋아요 0 | URL
바른생활들이 좀 단순하기는 하지요.
단순무식이면 살기 편할텐데, 우리 집은 단순유식이어서 문제죠. ㅎㅎ

글쎄요...
사랑은 젊을 때 하는 거라더군요.

페크pek0501 2010-11-15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저는 바른생활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그런 사람, 재밌어서 좋아하게 되거든요.
'가슴 아픈 사랑'이라..., 전 그거 싫은데요. 밤잠 못자게 만드는 일, 질색입니다.
전 불면증이 무서워요. 잠을 아주 달게 자고 싶어요. ㅋ

gimssim 2010-11-15 22:11   좋아요 0 | URL
정말 깜짝 놀랐어요.
오늘 잠시 사진 찍고, 남편 등산로 입구에 떨어뜨려 주고, 친구만나고...
이러느라 운전...잠시 pek0501님이 떠올랐겠지요.
아직도 많이 바쁜가, 논문 준비 중이라 읽은 것 같은데...
그런데 이렇게 방문하셨군요.
돗자리 깔고 어디 나앉아야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