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禁) 커피이야기

밤 11시 39분에 문자메시지가 왔다. 나는 새벽에 좀 일찍 일어나야 한다. 그러니 밤늦은 시간의 전화나 문자메시지는 거의 없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냐며 폰을 열어보고는 나는 명치끝이 저려오는 아픔을 느꼈다.

아들이 보낸 것이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까’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치르기 보름 전이었다. 어미의 뒷바라지도 없이 밤 깊은 시간까지 공부를 하다가 얼마나 외롭고 힘이 들었으면 자기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 어미에게 그런 문자를 보냈을까 싶었다.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남편이 십 년 동안 봉직하던 일을 버리고 자리를 바꿔앉느라 아들은 초등학교를 네 곳, 중학교를 세 곳이나 거쳐서 졸업을 하였다. 아이들 세계에도 엄연히 텃세라는 것이 있다.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축구를 좋아하고 또 잘하는 아들인데 번번이 주장의 자리에서 밀리는 눈치였다. 조심스레 물으니 전학을 온 아이는 주장을 할 수 없단다.
그런 아픔들이 있어서 다시는 전학을 시키지 않으려고 아예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시켰다. 집에 오려면 차를 다섯 번이나 갈아타야 하고, 공부도 벅찬 학교였다.

커피를 끊었다.

아들의 문자메시지를 받고 밤잠을 설쳤다. 어느 부모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내 아들이 저렇게 힘들어 하고 있는데 생각을 하니 가슴이 끓어 넘쳤다. 아마 품에 두고 있지 않아서 더 그랬을 것이다. 어미인 나도 한 가지 ‘힘듦’을 안고 있어야 공평할 것 같았다.
커피를 마시고 안마시고가 무슨 문제이랴 싶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문학청년이었던 세 살 위의 오빠 덕에 나는 일찍부터 커피맛을 알았다. 국산 커피가 널리 보급되기 전까지 쓰디쓴 맛의 미제 커피를 가끔씩 마실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용돈을 받으면 제일 먼저 커피를 샀다. 가장 작은 병이 800원이었다.
밥을 먹고 나선 엄마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셨다. 설탕을 듬뿍 넣어서 마시는 엄마께 커피를 마시는 건지, 설탕물을 마시는 건지 모르겠다고 핀잔을 드리곤 했는데, 그때의 엄마만큼 나이를 먹은 나도 단맛이 혀끝에 감기는 그런 커피를 좋아한다.
시부모님과 세 명의 시동생, 우리 사남매, 서너 명의 일가붙이들과 함께 한 대가족 맏며느리의 고단한 생활 가운데서도 엄마는 커피를 즐기고 글을 쓰셨다. 시집을 가 멀리 떨어져 사는 나에게 한 달에 한두 번 ‘에미 보아라’로 시작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곤 하셨다. 뿐만 아니라 방송국에서 공모한 편지글이 채택되어 편지글의 주인공이었던 군대에 있던 동생이 포상휴가를 나오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동안 참으로 분망한 삶을 살았다. 아픈 몸으로 대학에 다니고 있던 남편과의 결혼, 오랜 투병생활,  집안이 전소되는 화재, 퇴직, 마흔의 나이에 ‘다시 시작하기’, 여러 번의 이사, 갑작스러운 친정어머니의 죽음 등 굽이굽이 어려운 강들을 건너고 여기까지 왔다.
깨어있는 의식과 열린 가슴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인간다운가. 그래서 또 얼마나 힘이 드는가. 그 숱한 강들을 건너면서 발을 헛디디지 않았다고 생각을 한다.

자리를 옮겨 앉은 남편이 자신의 자리에서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지금의 삶도 힘이 든다. 나의 삶은 지극히 객관적이다. 나의 아픔은 뒤로 미뤄 두고 이웃의 한숨소리를 듣고 눈물을 닦아주어야 할 때가 많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통해서 자신들의 모습을 본다. 내가 밝고 정돈된 모습으로 서 있어야 그들은 내게 다가온다. 다가와서 마음을 연다.
그런 생활을 위해서는 내 속에 힘이 충전되어 있어야 한다. 내가 샘의 근원이 되어야 물을 흘려 보낼 수가 있는 것이다. 건강을 다지고 정신적인 내공을 쌓아야한다. 가끔은 한 잔의 뜨거운 커피가 위로가 될 때가 있다. 몸을 내려놓고, 등을 기대고, 생각을 멈추고, 커피 한 잔 마실 동안이면 나 자신을 회복할 수 있다. 다시 출발선에 설 수 있다.

그런 내가 커피를 끊었다.

어미에게 백일 동안의 정말 힘든 ‘커피 끊기’를 시킨 아들은 내가 원하는 대학은 아니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무난히 들어갔다.
그 때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큰 문제에 부딪혔을 때, 온 마음을 쏟아야만 하는 간절한 바램이 있을 때, 모든 것을 다 그만두고 돌아서고 싶을 때,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속에 놓였을 때, 나 스스로를 바로 세워야 할 필요가 있을 때 마다 백일 동안은 아니지만 한 달이나, 보름 쯤 커피를 끊곤 했다. 일종의 극기훈련 같은 것이다.
마음을 비웠다고 생각했지만 잠시만 방심하면 좀 더 안락한 환경이나 경제적인 여유, 더 나은 지위, 그럴싸한 명예 따위에 마음을 쏟는 욕심은 끝이 없었다. 내가 애를 써도 나이가 들면서 탐욕의 군더더기가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섰다.

얼마동안 커피를 끊는 것은, 내가 치장한 모든 것을 벗고, 욕망을 줄이고, 자아를 내려놓고, 빈 몸으로 서서 내 속의 나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영혼의 깊은 속에 닻을 내리는 작업이다.
그리하면 나는 다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울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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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0-20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달간 끊었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제가 다시 마시고 있었어요. 제가 끊는다고 호언장담했을 때, 벗 한 명이 `웃기지 마라, 중독이 왜 중독인 줄 아느냐. 못 끊으니까 중독이다' 라고 말하길래 `어머 사람을 뭘로 보고!' 생각했는데, 전 헤어나오질 못하겠습니다. 중전 님은 참 강해 보여요. 부럽습니다.

gimssim 2010-10-20 23:30   좋아요 0 | URL
동기가 있으면 좀 쉽지요.
저도 아들 녀석 땜에. 고3일 때도 주말에 전화해보면 빨래하고 있다고...
제가 믿는 신께 우리 아들 좀 잘 봐달라고 땡깡부린 거지요. ㅋㅋ

후애(厚愛) 2010-10-20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 편두통 때문에 못 마시고 대신 코코아를 마십니다.
아주 가끔씩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가 있어요.^^

gimssim 2010-10-20 23:31   좋아요 0 | URL
전 한 끼 밥은 건너뛰어도 커피는 그러지 못해요.
이년 전 콜레스테롤 수치가 좀 높게 나왔는데 혼자 짐작에 커피 프림이 주범인 것 같아서, 좀 줄여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죠.

전호인 2010-10-20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형적인 엄마의 모습과 각별한 내조를 하시는 아내의 따스함입니다.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겁니다.
저렇게 든든한 아들이 있는 데 무슨 걱정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끊고 아들의 힘듦을 공유하려는 우리네 어머니상이 훈훈해요.
다 잘될꺼야~~~! 라는 노랫말이 떠오릅니다. ㅎㅎ

gimssim 2010-10-20 23:32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 잘 될거야~~
그리고 관계없다아~~~
긍정적인 말씀 힘이 됩니다. 감사드려요.

마녀고양이 2010-10-20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커피를 하루에 한주전자씩 마시고 있어요.
너무 좋아해서, 손에서 놓지를 못 하는데....
간절한 바람이 있는 날,

저도 커피를 끊어야겠어요.

gimssim 2010-10-20 23:34   좋아요 0 | URL
히히~ 한 주전자라, 주전자 크기가 얼만하신지요?
기호식품인데 끊을 수야 있겠어요.
습관적으로 마시지 말고 꼭 마셔야 할 때만!

비로그인 2010-10-20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저는 까만 커피에 설탕만 탑니다.
커피 향과 달콤한 맛, 두 가지 쾌락을 동시에 누립니다. 하하


gimssim 2010-10-20 23:36   좋아요 0 | URL
좋은 기호이시네요.
아무래도 설탕보다 프림이 더 해로울 것 같죠?


blanca 2010-10-20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전님, 저도 며칠 씩 커피를 끊어요. 몸에게도 카페인과 설탕에서 떠나 있을 시간들과 그리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멀리할 수 있나, 시험해 보고도 싶어서요. 하지만 결국 언제나 져요. 그래서 분해요--;;

오늘도 참지 못하고 라떼 한 잔을 마셔 버렸어요. 아직 위는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전님의 객관적인 삶에 대한 얘기, 굽이굽이 돌아가는 삶의 얘기...그냥 제 맘 속으로 쓰으윽 밀고 들어옵니다...

gimssim 2010-10-20 23:41   좋아요 0 | URL
라떼는 다른 커피보다 칼로리가 더 높은데?
blanca님 열심히 일하고(놀고) 나서의 커피 한잔은 나에게 주는 상으로 생각해 볼 수도있어요.
자책하지 마시기를 ...
제가 여러분들께 너무 스트레스를 드리는 페이퍼를 쓴 건가 송구스럽사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양철나무꾼 2010-10-21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지대로 스트레스 주시는 페이퍼였어요.
저는 원두커피도 아니고 둘둘둘 삼합을 이루는 봉지 커피를 아침부터 숭늉먹듯 하고 있는데 말이죠.

전 그동안 맹모는 아니어도 한석봉 엄마는 된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왠지 숙연해 지는걸요.

gimssim 2010-10-21 23:1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커피는 아무래도 삼합을 이루는 것이 제맛이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