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 3 - 철학적 급진주의(1815~1848)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94
엘리 알레비 지음, 박동천 옮김 / 한국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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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 / 철학적 급진주의(1815~1848)


서언


"벤담은 『정치적 오류들』에서 이렇게 썼다. 공동체에 속한 모든 인간은 항상 두 갈래의 이익에서 영향을 받는다. 〈전체 공동체의 (중략) 행복에 그가 참여한 몫으로써 구성되는〉 공적인 이익과, 〈공동체 전체보다 작은 일부분의 복지에 그가 참여한 몫으로써 구성되는〉 사적인 이익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자신의 사적 이익이 일반이익과 충돌할 때, 일반이익에 등을 돌리고 자기가 소속한 개별적 단체의 이익을 기필고 옹호하길 원할수록 오류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이익이 일치하지 못하는 현실을 드러내고, 그러한 일치의 실현을 위해 일하는 것이 개혁가들이 노력하는 방향이다.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이와 같은 이익의 일치가 이미 달성되었다고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만드는 것이 통치하는 단체에 속한 모든 회원들이 말하는 방향이다. 평화가 회복된 이후로 마침내 얘기를 들어줄 청중까지 생긴 참에, 철학적 급진파는 보수파 세력들의 모든 오류들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한목소리로 공격한다."(3-4)


# 평화의 회복 :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을 가리킨다.


# 보수파의 오류

1. 경제적 오류 : 보호무역주의는 생산자 집단의 사적 이익을 위해 나머지 시민들에게 고통을 부과한다. 따라서 집단이익은 일반이익에 종속되어야 하며, 그 방식은 모든 개인들 사이에 모든 생산물의 자유로운 교환이다.

2. 정치적 오류 : 정치 및 사법제도의 복잡성은 인민의 자유가 아니라 귀족의 특권들을 지켜주는 방호벽이다. 따라서 보통선거를 시행하여 집행자들은 의회에 의존하고, 의회는 인민 다수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3. 철학적 오류 : 귀족제는 희생의 도덕을 가르치고,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상반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이기적으로 수호함으로써 전체의 번영을 실현하라고 안내한다.


1장 / 경제사회의 자연법칙


"리카도는 정치경제학을 이제 더 이상 〈부의 본질과 원인에 관한〉 탐구가 아니라 부가 일단 생산된 다음에 그것을 만드는 데 함께한 계급들 사이에서 그 부가, 교환과는 상관없이, 분배되는 방식에 관한 탐구로 새롭게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따져 물을 때, 리카도의 경제철학 내부에서, 정태적 관점과 동태적 관점을 구분해야 할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 리카도에서 교환이라고 하는 정태적 법칙만을 중시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비록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를 확인해주는 것으로 보이는 가치의 법칙이 실제 작동에서는 수많은 방해 요인들 때문에 한계를 만나며 리카도 자신이 그런 요인들을 엄밀하게 정의하려 애쓰고 있지만, 리카도의 신조가 낙관주의가 된다. 리카도에서 인구와 지대와 임금과 이윤의 동태적 법칙을 분석해내려는 사람이 보기에는, 리카도의 신조는 반대로 상대적 비관주의가 되고, 그러한 비관주의의 근거가 되는 원리는 이익의 자연적 균열 원리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15-6)


"〈상거래에서는 판매자와 구매자가 동등하게 이득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는데, 지주와 일반 공중 사이의 관계는 그런 거래와 같지 않다. 한쪽은 온전히 손해만 보고, 다른 한쪽은 온전히 이득만 본다〉. 리카도의 정치경제학에서 새로운 국면이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여기다." "이제 지대의 운동법칙이 정치경제학의 근간이 된다. 그 법칙이 일정한 〈계급〉 이익들 사이의 괴리에 관한 법칙인 만큼 정확히 그러하다. 우리는 이제 사회 안에서 자기네 노동의 산물을 서로서로 자유롭게 교환하는 개인들만이 아니라 계급들도 고찰해야만 한다. 이러한 계급들은 자연적으로 일치하는 이익들을 정부가 서로서로 맞서게 만들어서 생겨난 결과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이 작용한 결과다. 애덤 스미스가 단지 윤곽만을 그려 놓았던 부의 분배 이론과 조세 부담의 귀착 이론을 리카도가 풀어낸 것은 차액지대의 동태적 법칙을 기반으로 삼고, 그것이 다양한 경제적 〈계급들〉의 형성에 기여하는 경로를 연구한 덕택이었다."(37-8)


# 조세 부담의 귀착 이론 : 조세를 외견상 납부하는 사람 말고, 궁극적으로 조세 부담이 귀착되는 경제 주체가 누군지에 관한 이론. 리카도가 보기에 오직 지대에 비례한 토지세만이 지주들의 부담으로 귀착된다.


"이윤과 임금이 역비례로 변동하게 되는 법칙은 자본가 계급과 임금소득자 계급 사이에 이익의 자연적 괴리를 대변하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카도는 이윤의 축적이 임금 하락의 핵심적 원인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리카도에 따르면, 이윤의 운동법칙은 궁극적으로 인구의 법칙으로부터 도출된다. 지대의 징수는 생산물의 가치 가운데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분배되어야 할 부분을 모든 구획의 토지에 대하여 평준화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와 반면에 인구가 증가하고 더욱 척박한 토지에도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간 생계에 필요한 식량의 가격은 끊임없이 올라가기 때문에, 노동의 자연가격도 동일한 비율로 상승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자본가가 챙길 수 있는 몫은 끊임없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생산물의 '가치'에서 이윤이 차지하는 비중은 언제나 줄어든다. 생산물의 '이윤율'은 더욱 급격한 속도로 하락한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빈곤 덕에 부유해지는 것은 제조업자가 아니라 지주다."(44-6)


"지대, 이윤, 그리고 임금의 움직임을 규율하는 법칙들은 이런 식으로 경제적 세계의 세 계급 사이에 이익의 조화가 아니라 이익의 갈등을 산출한다. 리카도의 추상적인 공식들은 그 자신의 시대가 보여주는 광경을 신실하게 표현한 것이었을 뿐이다." "균열은 1815년 이후에 일어났다. 전쟁이 끝나고 대륙에서 산업이 재개되었다. 유럽에서 영국의 산업 생산물은 전만큼 필요하지 않았다. 영국 산업은 전만큼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낮은 임금을 받게 된 노동자들은 빵이 비싼 체제를 더 이상 참아낼 수 없었다. 과거의 토지 귀족과 새로운 상업과 산업과 금융의 귀족들 사이에 궁극적인 융합이 이뤄질 수 있을지 의문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토지 귀족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지와 민중,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의 동맹이 1832년의 정치개혁과 1846년의 경제개혁으로 이어진 운동의 공식이었다. 리카도가 제창한 부의 분배 이론은 영국의 경제사에서 이렇게 획기적인 시기의 표현이었다."(49-51)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카도는 국가가 경제적 관계들에는 가능한 한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바랐다. 신조에 차이점들이 있지만, 이 점에서 그는 케네와 애덤 스미스의 전통에 충실했다." "리카도는 산업화 수준이 높은 나라들에서 심각한 위기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정부의 책략에 의해 그런 위기를 방지하거나 단기에 종식하려 시도하면 안 된다. 〈[그런 위기는] 부유한 민족이 감수해야 하는 악이다. 이에 관해 불평한다는 것은 부유한 상인이 가난한 이웃의 오두막은 그런 위험으로부터 안전한데 자신의 선박은 바다의 위험에 노출된다고 한탄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다〉. 리카도에 있어서, 경제적 자유의 이론은 많은 경우에 자연에 대한 신념의 작용이라기보다는 인간을 공격하는 재앙을 인간이 교정할 수 없다는 무력함의 인정이다. 이것은 낙관론이라기보다는 운명론이다. 정부는 경제적 관계들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가 시도하는 치유책이 그 폐단보다 어쩌면 더 나쁠 수가 있기 때문이다."(51-7)


"리카도는 지주를 농업종사자, 다시 말해, 제조업자처럼 자본가이면서 동시에 노동자인 사람으로 여기고 싶어 했다. 그가 역설한 유일한 이익의 대립은 모두 자기 각자의 생산물을 가급적 비싸게 팔고 싶어 하는 생산자 집단들과 소비자 전부, 다시 말해, 모든 생산물들이 최저가격에 팔리기를 누구나 예외 없이 신경 쓰는 모든 개인들 전체 사이의 대립뿐이었다. 생산자들의 집단 모두의 이익 하나하나를, 서로 모순될 것이 뻔한 일련의 세세한 법률들에 의거해서, 한꺼번에 보호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의 이익, 이런저런 경제적 카스트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개인들로 고찰되는 모든 개인들의 이익을 과녁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학파는 개인주의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이 학파는 일반이익을 서로서로 모순되는 경우가 많은 집단이익들의 총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일치하는 지점에서 개인이익들의 총합으로 보기 때문이다."(58-9)


"사회의 번영에 대해 이토록 순조롭지 않은 여건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물들의 정상적인 진행에 인위적인 수단으로써 대응하여 평형을 잡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교환의 자연적 작동에, 자생적인 분업에 〈공급과 소비〉를 규율하는 필수적인 기능을 맡겨야 하는가? 애덤 스미스 이래 모든 경제학자들의 고전적 명제가 그것이었다. 제임스 밀도 스스로 애덤 스미스의 제자라고 선언했었다. 그러나 여기서 제임스 밀은 분업이 일을 잘 못한다고 꾸짖는다. 그 까닭은 정확히 분업이 〈흔히들 일컫듯이 실천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 우연에 의해서, 개별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개인들이 지내다 보니 알게 된 것들 덕분에 어떤 특정한 이득을 이런저런 분야에서 얻을 수 있겠다고 눈치채는 방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자들이 이 질문을 논제로 올리고, 분석과 종합에 의해서 업무들을 체계적이고 숙고를 거친 방식으로 재분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97)


"제임스 밀은 지주의 이익과 공동체의 여타 모든 구성원들의 이익 사이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괴리를 지대에 대한 과세를 통해 교정하는 가능성을 리카도보다 더욱 명료하게 지각했다." "영국령 인도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그는 거기서 일반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체계가 바로 그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구획되기 이전까지, 토양의 생산력은 공동체의 공동 재산이고, 그러므로 공동의 또는 공통의 목적과 요구를 위해 특별히 맞춰진 하나의 기금이다〉." "그렇다면 제임스 밀은, 자기 아들이자 제자였던 스튜어트 밀도 옹호했고, 헨리 조지 학파의 농업사회주의자들도 옹호했던, 단일토지세를 통한 해결을 옹호했을까? 전혀 아니다. 제임스 밀은, 리카도처럼, 애덤 스미스가 정리한 원리에 끝까지 충실했다. 〈공정하게 작동하는 세금이란 납세하는 여러 계급들 사이의 상대적 조건을 납세 이후에도 납세 이전과 동일하도록 놔두어야 한다〉는 것이, 〈국가의 임무 수행을 위해 요구되는 액수〉와 관련한 〈진정한 분배의 원리〉다."(99-101)


"이제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할 일이 남았다. 소득이 일단 국가에 의해 몰수되었다고 할 때, 그것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자본으로 전환할 것인가?" "가장 확실한 방법, 시행했을 때 가장 꾸준하게 효과를 보일 것으로 확인되는 방법은, 간접적이며 도덕적인 방법들이다. 입법자는 대중에 의한 제재라는 강력한 무기를 활용할 수 있다." "구빈법은 구걸 상태를 어떤 의미에서 합법화하고 재가해주는 법률이기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한다. 국가가 설립해야 할 것은 이 지구 위에서 심리와 생리와 물리의 법칙들이 결합해서 인간에게 제공한 실존의 조건들에 관해 사람들을 가르치는 하나의 교육체계다. 나아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제임스 밀이 맬서스의 관점에서 이론을 마련해준 저축은행이나 공제조합 같은 기관들도 마찬가지로 결혼 시기를 연기하고, 출산 횟수를 줄이며, 자본을 축적하는 성향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사람들을 신중하고 미래지향적으로 만들기 위한 성격이었다."(102-4)


"그렇지만 제임스 밀이나 플레이스의 신-맬서스주의에서 콩도르세의 낙관론까지는 머나먼 길이다." "콩도르세는 조건의 절대적 평등을 지향하는 항상적인 경향, 그리고 자연의 후원을 받는 경향을 인류의 역사에서 자기가 인지했다고 믿었다. 반면에 공리주의자들은 정치경제학의 자연법칙들이 절대적 평등에 상반되는 방향으로 설치한 난제들을 극복할 수는 없다고 역설했다. 벤담은 언제나 평등을 입법에서 단지 부차적인 목표로 간주했었다." "공리주의자들에 따를 때, 재화의 평등한 분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야말로 정부가 필요한 근거 아니겠는가?" "자연은 조건들을 불평등하게 설정해 놓았고, 경제학자들은 어떤 법칙들이 작용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말해준다. 만약 폭력으로 이 불평등을 파괴한다면, 그 대신에 더 나쁜 불평등 또는 보편적 빈곤이 자리를 잡을 뿐이다. 폭력에 맞서서 재산의 불평등을 보호하는 것이, 애덤 스미스에게서 차용한 벤담의 정의에 따를 때, 정부의 존재 이유이자 본질이다."(108-10)


# 신-맬서스주의 : 건강에 해롭지 않은 임신 방지 예방법을 명확하고, 자유롭게, 공개적으로 적시해야만 인구의 과잉 증가를 제어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이들로 스튜어트 밀과 그의 친구들이 대표적이다.


"경제적 진보에 관해 리카도와 맥컬럭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두 가지 상반되는 사고방식은 어쩌면 두 가지 상이한 심리학, 다시 말해서, 근본적인 경제적 동기를 생각하는 두 가지 상반되는 방식에 기인한다. 맥컬럭은 이렇게 쓴다: 〈올라가려는 야망이 사회에 활력을 주는 원리다. 모든 시대 인류의 커다란 목표는 아버지들의 여건에 만족하며 지내기보다는 그보다 위로 올라가는 것─부의 저울에서 더 높은 곳으로 자신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반면에 리카도와 제임스 밀이 중시한 것은, 일단 획득한 경제적 위상을 향상하려는 욕구가 아니라 유지하려는 욕구로 구성되는 동기다. 제임스 밀에 따르면, 인간은 지적인 존재로서 무한한 진보의 역량이 있다. 인간은 지적인 자본을 무한히 축적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자로서, 인간은 단지 작은 범위에서만 저축하고 축적할 역량이있다." "이와 반대로 맥컬럭에 따르면, 자본의 축적은 쉽고 자연적이다. 그리하여 진보의 철학은 다시 한번 거의 무제한적인 낙관론이 된다."(114)


2장 / 정의의 조직과 국가의 조직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변호인이 될 수 있어야 하고, 누구나 다른 사람의 변호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프랑스 사법기관의 조직을 위한 법률안 초안」(1791)에서부터 벤담이 늘 표명한 바람이었다." "이는 〈개인 각자가 자기 이익의 최고 판관〉이라는 경제적 격률을 떠올리게 하며, 〈사람은 각자가 사제〉라는 루터의 공식과 연결되는 격률이기도 하다. 자유거래의 최초 이론가들이 상업의 자유를 향한 요구에서 일종의 상업적 프로테스탄트주의를 목도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벤담과 그 주변의 반교권주의 집단은 자기네 공리주의에서 16세기에 프로테스탄트주의에 의해 시작된 해방 운동의 마지막 단계를 목도했다. 사제의 자격과 법률가의 자격은 하나다. 판사들에 의해 제작되는 법률은 사제들에 의해 제작되는 종교와 매한가지다." "여기서도 공리의 규칙은 곧 단순성의 규칙이다. 사법개혁을 일궈내려면 기술적 체계의 복잡성에서 자연적이고 가족적인 체계의 단순성으로 탈바꿈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141-2)


"몽테스키외의 증언에 따르면 문명 세계 전체에 걸쳐서 신성시되고 있던, 자유주의적 편견들 또는 자유주의적이라고 간주되던 편견들에 벤담주의자들의 단순주의는 충격을 안겼다. 단순한 제도는 독재국가에 알맞고 자유국가에는 복잡한 제도가 어울린다는 것이 자유주의 파당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절차의 문제에 있어서, 벤담은 증언과 증거를 평가할 때 판사의 의견을 속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든 규칙, 그리고 몽테스키외의 제자들이 보기에는 피고인의 자유를 지켜줄 수많은 안전장치에 해당하는 그 모든 규칙들을 폐기해야 한다고 항상 요구했다. 사법부의 조직에 관해서는, 벤담은 여러 명의 판사가 재판하는 체제를 부정하고, 자신의 책임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한 판사가 단독으로 주재하기를 바랐으며, 영국 자유주의의 자랑거리였던 배심제를 경멸하는 경향을 보였고, 법정 공방의 공개만으로도 판사의 책임감 있는 모습을 구현할 것이라며 만족할 수 있었다."(127-8)


"공론에 대한 두려움이 개인적 책임감의 핵심을 구성한다. 이는 벤담이 일찍이 도달했고 끝내 버리지 않았던 확신이다. 〈(판사들을 공론으로 통제하는) 공개가 없다면, 여타 모든 견제장치가 헛되게 된다. 공개에 비하면, 여타 모든 견제장치가 보잘것없다. 영국의 절차 체계가 최악이 되지 않고, 지금까지 존재했던 것 가운데 가장 덜 나쁜 체제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여타 모든 사항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도, 더욱 공개의 덕택이다. 사법의 영역에서 프리드리히와 예카테리나가 선의를 가지고 노력했지만 목표로 삼았던 과녁에 그렇게 한참이나 못 미친 채 실패로 끝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원칙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벤담이 『헌법전』에서 사법조직 체계의 기초로 삼은 동기는 40년 전 『파놉티콘』에서 교도소 행정 체계의 기초로 삼았던 동기와 같았다: 〈영향력이 가장 강하고, 가장 지속적이며, 가장 획일적이고 가장 일반적인 동기, 곧 가장 광범위한 공개에 의해서 교정되는 개인적 이익〉이라는 동기였다."(181-2)


"벤담의 신조에 의해 구상되는 판사는 자기 재판정 안에서 홀로 고립된 일종의 군주로서, 공론에 의해 그에게 행사되는 순수한 도덕적 통제 말고는, 결과적인 권력 남용을 예방할 실질적으로 효과가 있는 어떤 통제도 없이, 그리고 어떤 법률적 형식도 없이, 자기 나름의 선고를 내린다. 하지만 이런 신조는 이른바 자유주의적 신조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신조의 어법은 19세기에 카이사르주의자들이 한 인물에 의한 정부를, 그리고 그것이 한 인물에 의한 정부인 만큼만 책임을 지는 정부를, 세우자고 요구했을 때 사용한 어법과 거의 동일하다. 벤담은 가족의 비유 그리고 가정의 다스림에 대한 비유를 호출한다. 17세기에, 로버트 필머 경은 동일한 비유를 기초 삼아 하나의 신정적인 군주정 체제의 이론을 건축했었고, 로크에 의해 반박당했다. 《에든버러 평론》에 따르면, 벤담의 급진주의는, 사법절차와 사법조직의 영역에서, 절대군주제를 옹호했던 로버트 필머가 주창한 가부장 체제의 복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182-3)


# 벤담의 정치철학의 세 가지 원리

1.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원리 : 입법자는 그 정치사회를 구성하는 최대 다수(모든 개인의 최대 행복은 불가능하기 때문에)의 최대 행복을 지향해야 한다.

2. 자기-선호의 원리 : 모든 개인은 본질적으로도 자연적으로도 이기주의자다. 따라서 사적 이익과 일반이익의 일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3. 이익의 연합 원리(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 : 따라서 정부는 정치사회의 구성원들을 사적 이익과 일반이익이 일치하는 여건들 아래에 위치시켜야 한다.


"벤담에 따르면, 모든 쾌락들은 어떤 고통을 대가로 치르고 구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두 개의 악 중에서 더 작은 악을 선택해야 한다〉가 아마도 공리주의 철학의 근본적인 격률일 것이다. 그렇다고 볼 때, (정치 분야에서) 〈행복을 최대한 가져오기 위해서〉는, 또는 벤담의 다른 표현으로는,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오직 두 가지 방법만이 있다: 공직자의 적성이 최대화되어야 하고, 비용이 최소화되어야 한다." "형용사적인 법률의 근본 문제를, 약간 수정된 형태지만, 여기서도 인지할 수 있다. 정부의 기능이 잘 수행되기 위해서는, 보수가 가능한 한 많이 지급되어야 하며, 비용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이 가장 광범위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비용은, 고통을 담고 있거나 쾌락의 박탈을 담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악이다. 그러므로 정부의 비용이 가능한 한 적을수록 바람직하다. 그리하여 문제는 이윤과 손해를 계산하는 수학적인 형태로 환원된다."(188-9)


# 형용사적인 법률 : 벤담은 법률을 〈실체적〉인 법률들과 〈형용사적〉인 법률들로 나눈다. 여기서 형용사적인 법률이란 문법에서 형용사가 실사(實辭, substantive)와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듯이, 실체적인 법률들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절차에 관한 법률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질적인 사안은 통치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권력이 결과적으로 남용되지 않도록 하는 보장책이다. 통치자들이 더욱 지성적이고 더욱 활동적일수록, 남용은 어쩌면 더욱 위험해질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적절한 도덕적 적성의 최대화〉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여야 한다. 정부의 모든 구성원은, 처벌하거나 보상하는, 협박하거나 약속하는, 쾌락과 고통을 분배하는, 두 겹의 권력을 자기가 부여받은 사실을 안다. 그는 이 권력을 악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고 선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그가 이 권력을 선을 위해 사용하고 악을 위해 사용하지 않게끔 만사를 편성하는 것이 과제다. 이 과제의 해결은, 단일한 규칙에 달려있다: 〈신임을 최소화하라〉. 그런데 벤담이 최대행복의 원리에 접목하는 이 규칙은 기실 영국의 모든 자유주의자들에게 익숙한 것이다. 피치자들이 통치자들을 불신해야 한다는 것은 휘그파 중 가장 소심한 부류에서부터 급진파 중 가장 완강한 부류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신념이었다."(189-90)


# 벤담이 헌법을 제시한 민주국가는 삼권분립의 국가가 아니라, 모든 성인 시민들을 대표하는 기관인 입법부가 〈전능한〉 힘을 발휘하는 국가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도덕적 비관론에 근거한다.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그리고 도시의 진정한 이익이나 개인의 진정한 이익을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모든 정부는 악하다. 가장 덜 나쁜 헌법이란 정부 조치의 집행에 맞서서 장애물을 가장 많이 설치해 놓은 헌법일 것이다. 여기서 혼합헌정 또는 복합헌정이라는 발상이 일어난다." "반면에 벤담의 공리주의에 의해서 정의된 급진적 국가는 주권을 인민에게 부여하는 국가다. 그 후에 인민은 일정한 수의 정치적 기능들을, 인민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제한하거나, 주권의 일부를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의지를 표명하고 이어서 그 집행을 더욱 효과적이고 더욱 집중되게 만들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아니면 간접적으로 선출된, 소수의 개인들에게 위임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임을 깨닫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인민의 대표들이 자기들을 권력의 자리에 앉혀준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주권 전부 또는 일부를 훔쳐가지 못하게 방지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193)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담의 체계에서 인민의 주권은 불가항력적인 장애물에 봉착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인민주권은 모든 시민들의 주권을 의미하고, 만장일치의 투표를 함축한다. 그러나 헌법적으로 최고 권위를 가지는 의견의 분포가 분열되어 나타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되기가 십상이다." "이에 대해 플레이스는 〈공리의 원리는 계몽된 사람들에 의해서만 명료하게 이해되고 실천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제임스 밀은, 다음과 같이 명시적으로 진술한 바 있었다: 〈이성을 소유한 모든 사람은 증거를 저울질해보고, 무게가 더 나가는 쪽으로 인도되고 결정을 내리는 데 익숙하다. 다양한 결론들이 나름의 증거를 가지고 동등한 정성과 동등한 수완에 의해 제출되었을 때, 비록 극소수 몇몇은 잘못 이끌려 갈 수도 있으나, 대다수는 바르게 판단할 것이고, 증거의 가장 강력한 힘이 어디에 있든지 튀어나와 가장 강력한 인상을 산출하리라는 도덕적 확실성이 있다〉. 벤담주의자들은 다수의 주권을 이런 식으로 정당화했다."(194-6)


"벤담은 의회에 진출한 대표들에게 다섯 가지 〈보장〉을, 유권자들과의 관계에서, 요구한다. 이중 둘을 그는 〈일차적 또는 주된〉 보장이라고 보는데, 유권자들에 대한 의존과 왕과 궁정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이차적 또는 도구적〉인 보장도 둘인데, 매년 재선거에 임해야 한다는 조건과 공무원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조건으로서, 이것들은 주된 보장들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복무한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보장은 벤담의 용어로 〈출석의 보편적 항상성〉이다. 다음으로는 의회의 선거인들이 규정되어야 한다. 벤담은 자신의 계획을 네 가지 요점으로 정리한다: 사실상의 보통선거권, 실천적인 평등 선거권, 투표의 자유 또는 진정성, 비밀투표." "벤담은 단순화의 원리를 적용한 결과로 〈세대주 참정권〉에서 〈사실상 보통선거권〉으로 이동하기로 결심했고, 그 뒤로는 그 운동의 공인된 이론가가 되었다. 〈보통선거권〉, 〈매년 의회선거〉, 그리고 〈비밀투표〉가 급진파 모임에서 으레 등장하는 공식이었다."(204-6)


"정치경제학에서, 공리주의자들은 불평등한 여건들을 자연적이고 필연적이라고 간주했다. 그들은 또한 정치적 권리들을 평등하게 만드는 제도를 확립하더라도 경제적 여건의 불평등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며, 부자가 빈자에게 미치는 《필연적이면서 자연적인》 영향이 줄어들지도 않을 것이라고 봤다." "공리주의자들의 요구는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 시장으로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게 하고, 비유적으로 말해서 정치적 시장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도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게 하자는 것으로서, 이는 곧 각자가 자신의 부와 재능과 평판에 의해서 부여받는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수가 사회의 진정한 이익에 해를 입히면서 엄청난 재산을 지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독점이나 특권에 의해 이 자연적 불평등이 인위적으로 악화되면 안된다. 왜냐하면, 경제적 진보를 결정할 자본의 축적에 더욱 역량이 나은 계급, 즉 중간계급이 많이 형성되는 것이 사회에 이익이기 때문이다."(224-5)


"새로운 학파의 경제학자들은 모든 개인은 각자가 자신의 이익에 관한 최선의 판관이며, 모든 개인의 이익은 하나의 일반적 규칙으로서 동일하다고 말한다. 벤담이 추천한 체제는 이 동일성이 발현되는 것을 가로막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체제에서 정부 권위는 인민으로부터 직접 발출되는 것으로 간주되고, 집행권은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의지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헌법전』에서는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만이 끊임없이 적용된다. 벤담은 한편으로 개인들의 이익을 체계적으로 보호할 정부를 조직하고자 권위와 행정권을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자들을 피치자에게 복속시킴으로써 그들의 개별적인 이익을 민족의 이익에서 결코 분리할 수 없도록 예방할 일련의 헌법적 장치들을 처방했다. 벤담이 구상한 국가는 개별적인 존재로 이해되는 개인 각자가 모든 개인들로 이뤄진 집단의 통제로부터 단 한 순간도 벗어나지 못하게끔 잘 축조된 하나의 기계다."(231-2)


"벤담과 제임스 밀의 〈대의민주주의〉란 단지 순수한 민주주의를 하나의 거대한 민족의 실존적 필요에 맞춰 적응한 결과일 뿐이었다. 영국인들로 하여금 유럽에서 자유로운 인민의 본보기가 되게 만들어준 지방자치제에 영국인들이 긍지를 가지고 있던 그 시기에, 공리주의 급진파들은 대체로 프랑스의 체제에서 영감을 받아 행정적 중앙집권체제를 옹호했다. 개인의 행위든 정부의 행위든, 모든 행위는 두 가지 계기를 함축한다: 행위에 앞서는 숙고와 행위 자체의 집행이다. 권위주의자들은 의회의 일상적 절차를 단순화함으로써, 정부 조치의 집행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만들고자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헌법적 조직들을 복잡하게 편성함으로써, 행위에 앞서는 숙고의 기간을 가능한 한 연장하기를 바랐다. 벤담은 자유주의자였던 적이 없다. 박애주의적 개혁을 위해 항상 안달이 나 있던 그는, 군주적 권위주의에서 민주적 권위주의로, 앵글로색슨의 자유주의에 해당하는 중간 단계에 머무른 적 없이, 곧바로 건너갔다."(128-9)


3장 / 사유의 법칙과 행동의 규범


"철학적 급진주의자들은 사회과학을 하나의 합리적인 과학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들은 모든 사회 현상들이 법칙으로 환원될 수 있고, 사회 세계의 모든 법칙들은 다시 〈인간 본성의 법칙들〉에 의해 해명될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인간 본성의 법칙들은 그 자체로 두 종류다: 물리학자와 지질학자와 생물학자가 정의해 놓은 것을 경제학자와 법학자가 빌려와야 하는 물리적 법칙과, 그런 법칙이 있는지 여부가 아직 질문거리로 남아있는 심리적 법칙이다. 자연과학의 유형에 맞춰서 구성되는 어떤 과학적 심리학이라는 것이 가능한지마저 의문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학적 심리학이 가능함을 보여주기 위해 제임스 밀은 그것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존재하기 시작한 다음이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방식을 취했다." "이 새로운 심리학의 역사에서 제임스 밀이 수행한 역할은,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역사에서 리카도가 수행한 역할(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에 맬서스의 혁신을 포함한)과 흡사하다."(233-4)


"토머스 벨셤이나 프리스틀리 같은 여러 저술가들은 하틀리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심화해서, 그 원리들을 새로운 문제들의 해결에 적용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의식의 상태를 탐구자의 엄밀한 관찰을 통해 포착할 수 있게 해줄 모종의 유형적 등가물을 찾기 위해서, 어떻게든 생각을 물체로 번역해보려는 고유한 경향이 이 철학에는 있었다. 예를 들어, 신경의 요소를 의식 상태의 표식 또는 원인 또는 심지어 본체와 같은 것으로까지 여길 수 있다. 단어 역시도 관념의 표식 또는 어떤 경우에는 관념의 본체인 것으로까지 여길 수 있다. 정신 현상에 관해서 에라스무스 다윈은 하나의 생리학적 이론을, 그리고 혼 투크는 하나의 언어학적 이론을 제시했다. 그들의 두 갈래 이론은 오늘날에는 불신의 대상이지만, 20여 년 동안 영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다윈과 투크는 제임스 밀의 사상이 발전하는 데 영향을 미쳤고, 그를 통해서, 연상주의 심리학의 부활에도 영향을 미쳤다."(245-6)


"제임스 밀은 유명론의 명제를, 로크나 하틀리처럼, 수많은 결합된 관념들을 지칭하는데 〈복합관념〉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원래 구분되는 여러가지 관념들이 하나의 단일한 관념으로 합쳐질 때, 진정한 심리적 결합이 존재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화학은 자연에 관해 관해 뉴턴의 체계가, 데카르트의 물리학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맞다고 확인해줬다. 다시 한번, 인과의 고리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이해할 수 있는 연계가 아닌 것처럼 보였고, 원인을 보고 결과를 예측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산소와 수소의 속성들로부터 물의 속성을 예측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아 보였다. 모든 자연의 법칙들이 인력의 법칙이라는 단일한 법칙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다는 희망을 뉴턴의 과학이 지탱해준다손 치더라도, 한편으로는 원소들과 법칙들의 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한 기계적 과정만으로 원소를 분리해낼 수 없는 경우에, 새로운 물체들이 결합을 통해 생성된다고 인정해야 할 것처럼 보였다."(260-1)


"『인간 정신 현상 분석』에 의해서, 제임스 밀이 인간 정신에 관한 〈해명〉 또는 〈이론〉이라고 부른 것이 벤담주의자들에게 확립되었다. 이론가는 〈관찰되는 사안들을 관찰하고 정확하게 기록하는〉 일에 자신을 국한하기를 그는 바랐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불행히도 이론이라는 단어는 이와 아주 다른 작업을 가리키는 의미로 변질되었다. 살펴보는─관찰하는─부분이 대체되고, 그 대신에 본질적으로 상정(想定)하는 일, 그리고 상정된 사안을을 관찰된 사안들이라고 내세우는 일에 해당하는 작업이 되고 말았다 이론은 기실 가설과 혼동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론〉은 현상들을 관찰하는 데에만 목표를 두고, 생각에서 나오는 자의적인 요구들을 현상에 부과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설〉과 구분된다. 그러나 적어도 관찰된 현상들을 배열하는 과제, 그리고 가급적 손에 쥘 수 있고 활용할 수 있는 형태의 지식이 산출되도록 고안된 계획에 따라서 그것들을 배열하는 과제는 이론 자체의 몫으로 남는다."(266, 272)


"〈해체될 수 없는 결합의 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최초로 알리고〉, 의지와 행동의 심리학에 해체될 수 없는 결합의 원리를 최초로 적용한 사람이 바로 제임스 밀이다." "복잡한 쾌락들은 자체의 본질을 가진다. 복잡한 쾌락들은 새로운 쾌락들이고, 인간 본성을 가장 잘 음미해준다. 그것들이 그러함을 우리의 내부적 경험이 말해준다." "단순한 쾌락들은, 서로서로 결합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원인에 관한 관념들과 결합해서, 정감을 생성한다. 정감은 동기를 생성하고 동기는 성향을 생성한다. 만약 우리의 감수성이 풍부해지고 우리의 쾌락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이러한 성향들이 발휘되고 이러한 습관들이 획득되기에 이르는 것이라면, 우리의 사심 없는 느낌들이, 우리에게 자체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우리 안에 자라나는 것을 이기주의 도덕이 왜 방해하겠는가? 제임스 밀의 분석은, 이런 식으로 인식된다면, 복잡한 느낌들을 파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생산할 이유와 방법을 제공해줄 것이다."(296-7)


"제임스 밀은 인류의 진보를 믿었고, 이 진보가 필연적인 법칙들에 맞춰서 일어나는 것으로 여겼다. 이를 최초로 정형화한 사람 중 한 명인 프리스틀리에 의하면, 이 진보의 법칙은 다름 아닌 관념결합(연상)의 법칙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으로, 이 법칙에 따라서 사회에서 쾌락의 총합은 고통의 총합을 능가하는 경향을 항상 보인다. 그러나 제임스 밀은, 『인간 정신 현상 분석』에서, 가장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부모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인류에 대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감의 느낌들이 어떻게 하나의 필연적인 과정에 의해서, 한 느낌이 다른 느낌으로부터, 생성되는지를 보이고자 시도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 관계들이 증가하고 긴밀해짐에 따라, 개인은 자신의 사회적 과업을 수행하도록, 이기적 느낌과 공감적 느낌 사이의 구분이 더 이상 불가능해질 때까지, 그리고 도덕적으로 행동하지 않기가 더 이상 불가능해질 때까지, 사세(事勢)에 의해서 점점 더 빡빡하게 속박을 받을 것이다."(300-1)


"자기 부모와의 긴밀한 관계 안에서, 그들의 행복은 아이에게 욕구의 대상이 되고, 그들의 불행은 기피의 대상이 된다. 제임스 밀에 따르면, 이 자연적 진보를 장려하고, 그만큼 그 아이의 주변에서 우연의 역할이나 개인적 변덕의 역할이 가능한 한 제거되도록, 그리고 공감적 정감들이 아주 세세한 대목에서까지 그 자체의 발전의 일반법칙에 부합해서 이뤄지도록, 제반 사정들을 조합하는 데 교육의 목적이 있다." "개인이 자신의 개인적 보존에서 얻는 이익은 다른 사람의 보존에서 얻는 이익에 비교할 때 무한히 크다. 그러나 그 개인이 자신의 보존을 위해 맘대로 쓸 수 있는 힘은 다른 모든 개인들이 연합해서 그에게 대항해서 쓸 수 있는 힘과 비교할 때 무한히 작다. 그렇다면 자신의 개인적 필요를 자신의 사회적 실존 조건들에 맞추는 것이 그 개인으로서는 현명한 행동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해석한다면, 도덕은 일종의 낙관적 운명론이 되고, 체념과 희망이 대등한 비율로 들어가 섞인 합성물이 될 것이다."(301-2)


#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는, 소수에 비해 다수의 수가 더 많아지는 데 비례해서,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에 근접한다.


"개인적 이익과 집단적 이익을 조화시키려는 공리주의자들의 시도는, 자기희생을 격하하고 이기주의를 복권하려는 시도가 그들의 철학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고 우선했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그대의 선행이 언제나 그대 자신의 이익에 간접적으로 복무한다는 조건 아래에서, 선의를 가지고 선을 행하라─덕에 관한 벤담과 제임스 밀의 이론 전부를 이 공식이 요약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기주의는 도덕의 기초 그 자체에 자리를 잡았다. 연상주의 심리학의 모든 노력은 이기주의가 원초적 동기로서 영혼의 모든 정감들은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이어진 복합물들임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상응하여, 공리주의 도덕학자의 모든 노력은, 이기적이든 아니면 사심이 없든, 감성적인 충동들을 하나의 성찰적 이기주의에 종속시키기 위함이었다. 행복의 총합은 개인적 단위들로 이뤄지기 때문에,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각자가 이기적이기만 하면 충분하지 않겠는가?"(305, 310-1)


"공리주의자들의 도덕은 명령문으로 번역된 그들의 경제심리학이었다. 두 세기 전에 홉스는 공리의 신조 위에 사회적 독재의 완전한 체계 하나를 세웠었다. 그리고 실제로, 벤담의 사법이론의 근거가 된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는 공리주의에 대한 그와 같은 해석을 정당화했다: 이익과 의무의 연관을 개인을 위해 확립해주는 것은 주권자가 강요하는 처벌의 위협이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경제학이 성장하고 승리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그 신조 안에 다른 원리가 주도적인 자리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본성에 부합하는 사회 안에서 이기주의들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원리였다. 이 새로운 관점에서 보면, 공리주의 이론가들에게 도덕의 근본적인 개념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교환의 개념이었다. 도덕적 행동의 동기는 더 이상 공포가 아니라 오히려 신뢰였다. 공리주의 도덕학자는 입법자가, 사회 안에 이기주의들의 조화를 실현하기 위해 챙기는 일 말고는, 그 이상의 개입은 불필요하게 만들었다."(312-3)


4장 / 결론


"벤담과 그 제자들에 따르면, 윤리는 하나의 고된 기예다. 나아가, 우리가 그들을 믿는다면, 윤리라는 기예의 기초는 합리적인 과학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공리주의자들은 〈경험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그렇게 부르는 방식 역시 그들 철학의 근본적 특질과 관련해서 오해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들은 로크 학파에 속했고, 본유적 원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진리는 모두 경험에서 차용되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연역적 또는 종합적 방법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확인하는 데 조금이라도 인색했던 것은 아니다. 만유인력이라는 뉴턴의 법칙은 경험에서 추출된다. 그러나 일단 그 법칙이 공표되면, 단지 그 법칙을 검증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고, 새로운 현상들에 대해 끊임없이 그 법칙의 응용을 종합적으로 확장하는 것이 정당하고 유익하다." "이제, 벤담주의자들의 야심은 모든 사회과학들을 연역적 과학의 모델에 맞춰 확립하는 것이었다."(343)


"진실을 말하자면, 공리주의자들은 그것을 정당화하기보다는 당연한 전제로 여겼다. 하나의 사회과학이 가능하려면, 행복이 쾌락들의 총합으로 여겨지기를, 또는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쾌락들의 총합이 고통들의 총합을 상쇄하고 남는 초과분이 행복이라고 여겨지기를 그들은 원했고, 이러한 쾌락들과 고통들의 계산이 가능하기를 그들은 원했다." "벤담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주체들이 서로 다른 행복을 합산할 수 있을 가능성은 엄밀하게 고찰하면 허구적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모든 정치적 추론이 중단되어야 하는 대전제다〉." "그러나 만일 허구가 성공적이라면, 그것을 하나의 실재로 취급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허구임을 번번이 되새기지 않는 편이 낫다. 벤담에 의하면, 공리주의 신조의 합리주의적 전제는, 만일 수많은 사회적 사실들을 설명하고 과학적 정치의 확립을 초래할 역량을 그것이 진실로 가지고 있다면, 그 결과에 의해서 정당화된다."(345-7)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에 따르면, 각 개인은 자신의 이익에 관한 틀림없는 판관이고, 자신의 이익을 자유롭게 제약 없이 추구할 수 있다.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에 따르면, 개인의 자유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이익의 조화를 확립하기 위해서 입법자의 선의와 역량이 기대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권위주의적 공리주의는, 자체로 모순이 아니라손 쳐도, 실현되기 위해 거의 하나의 기적과 같은 우연을 전제한다. 실지로, 모든 이익들을 조화롭게 만들기에 필요한 지성적·도덕적 적성을 주권자가 가진다는 어떤 보장이 우리에게 있는가? 벤담과 그 친구들이 1807년 이후 채택한 해법의 취지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주권을 인민 전체, 또는 적어도 다수에게 귀속시켰다. 어떤 자유들은 희생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 자유들은 언제나 소수의 자유일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런 권력을 가진 다수는 공리주의 경제학자들의 가르침에 의해서 계몽되어 있어서 보편적 이익을 위해서 국가가 넘지 말아야 할 한계를 알 것이다."(364)


"벤담과 그 제자들의 신조는 이제 우리 앞에서 그 모든 복잡한 실상을 드러냈다. 그것은 분명히 쾌락의 도덕인데, 스스로를 확립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말했던 것처럼 정의된 합리주의와 개인주의를 전제하는 쾌락의 도덕이다. 이 두 가지 기초 위에 세워진 이 신조는, 어떤 의미에서 이 체계 내부에서 서로 경합하는 이 두 가지 상이한 원리에 끊임없이 호소한다. 한 원리에 따르면, 자연적으로 갈라지는 이익들을 일치시키기 위해 입법자의 과학이 간섭해야 하고, 다른 원리에 따르면, 이기주의들의 조화에 의해서 사회 질서가 자생적으로 실현된다. 공리주의자들이 자기네 논리체계에 의해서 이들 두 원리 가운데 한쪽 또는 다른 쪽에 호소할 자격이 얼마나 있느냐가 질문거리다. 공리주의자들은 합리주의자이자 개인주의자라는 점 때문에 비난받을 일은 아니고, 오히려 자신들의 합리주의와 개인주의로부터 필연적인 결론들을 어쩌면 모두 도출하지 않은 점 때문에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367)


"벤담이 사망한 지 20년 후에, 벤담의 제자라기보다는 훨씬 더 애덤 스미스의 제자들로 바뀐 공리주의자들은 이제, 정부나 행정을 통한,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를 더 이상 자기네 신조에 포함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종류의 규제와 법률도 적대시했던 이 새로운 이론가들의 사회적 사고방식은 자유거래의 이념 그리고 이익의 자생적 일치라는 이념으로 요약되었다." "다윈이 맬서스의 법칙을 모든 생물종에게 연장하는 와중에, 버클은 역사의 철학 전부를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의 원리로 환원하고 있었다. 『사회정학』에서 허버트 스펜서는 경제학자들의 자연법칙들과 법학자들의 자연법을 명시적으로 동일시했다. 그리고 법의 원천이 실정법과 정부의 의지인 것으로 만들었던 벤담주의를 반박하는 데서 자기 철학의 기초를 놓았다." "공리주의가 기초로 삼았던 두 가지 원리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이제 명백해졌다. 그때는 이미 영국의 사상사 그리고 입법사에서 철학적 급진주의가 그 힘을 다 소진한 다음이었다."(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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