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와 검사 - 죄수들이 쓴 공소장
심인보.김경래 지음 / 뉴스타파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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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죄수들이 쓴 공소장


"죄수란 갇혀 있는 사람이다. 죄수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경우는 질병으로 인한 입원이나 직계가족의 사망 등 특별한 사유에 한한다. 하지만 특별한 사유 없이도 구치소나 교도소 밖에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출정이다. 출정이란 원래 구치소에 수감된 재소자가 재판을 받거나 자신의 사건과 관련한 검찰의 추가 조사를 받으러 구치소 밖으로 나가는 절차를 말한다. 재판이야 정해진 일정대로니 별다른 특혜나 조율이 있을 수 없다. 문제는 검찰 조사를 받으러 나가는 출정이다. 검사가 클릭 몇 번으로 공문 한 장을 보내기만 하면 언제든 죄수를 자신의 검사실로 불러들일 수 있다. 공문에 구체적인 수사 내용을 적시할 필요도 없다. 수사하는 내용의 제목 정도만 적어주고 관련 수사라고만 쓰면 된다. 본래 수용자에 대한 관리의 책임과 권한은 법무부 산하 교정본부, 즉 구치소나 교도소 측에 있지만 검사는 이 방법으로 죄수들을 마음대로 부를 수 있다. 똑같은 수사기관이지만 경찰은 출정을 요구할 권한이 없다."(21-2)


"일단 검사에게 '간택'을 받은 죄수는 구치소 안에서 일종의 권력을 가지게 되고, 그 권력을 악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악용의 결과는 대개 죄수들 사이의 사기 사건으로 귀결되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2차, 3차의 피해를 입기도 한다." "검사나 수사관도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 마찬가지다. 금융 범죄를 저지르고 구속된 죄수는 감옥 밖에 여전히 상당한 재산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몸이 구속되어 궁박한 처지에 놓여있으므로 아주 작은 편의를 받는 데 큰돈을 쓰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검사실에 드나드는 죄수는 누가 재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현재 가장 아쉬워하는 편의는 무엇인지 등 다른 죄수에 관한 정보를 검사나 수사관에게 전달하고 심지어 다리까지 놓아준다." "금전적인 유혹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 바로 성과를 내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고자 하는 유혹이 그것이다. 흔히 '별건 수사'라고 알려진 타건 압박 수사로 재소자를 쥐어짬으로써 원하는 진술과 증거를 얻어내는 수법이다."(33-4)


"서울남부지검은 금융 범죄와 기업 범죄, 조세 범죄를 중점으로 수사한다. 지난 2013년 서울중앙지검에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이 신설됐는데, 이듬해인 2014년 서울남부지검으로 이전했고, 2015년에는 역시 중앙지검에 있던 금융조세조사 1부와 2부가 남부지검으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남부지검은 대한민국의 금융 범죄와 기업 범죄 수사를 총괄하는 사실상의 컨트롤타워가 되었다. 그런데 금융 범죄와 기업 범죄는 내용이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수사가 매우 어렵다. 자본시장 전문가인 죄수를 수사에 활용했다는 주장이 개연성을 갖는 대목이다." "그런데 수사를 하는 검사 입장에서는 수사가 어려울수록 역설적으로 사건을 축소하거나 덮을 수 있는 재량의 범위가 넓어진다. 더군다나 금융 범죄나 기업 범죄 사건은 변호사들의 수입 액수가 일반 사건에 비해 적게는 몇 배에서 많게는 수십 배에 이를 정도로 크다. 바로 이 지점을 전관 변호사들이 파고들어 검사와 유착하고 사건을 은폐한다는 것이다."(37)


"죄수 K와 김형준 전 검사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내리 동창이었다 둘은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죄수 K는 반장이었고 김형준은 전교 학생회장이었다." "죄수 K와 김형준 두 사람의 우정이 파탄 나는 과정은, 아무리 우정을 가장하고 있다 해도 돈으로 맺어진 스폰서 관계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죄수 K가 김형준 검사에게 내연녀의 오피스텔까지 알아봐주며 '충성'을 다한 것은 그가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 아니라 유사시에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검사였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유사시'가 되자 당연히 도움을 기대했다. 김형준 검사에게도 죄수 K는 어려울 때 자기희생을 감수해서라도 도와야할 친구가 아니었다. 죄수 K로 인해 자신이 위험에 빠지자 도마뱀처럼 꼬리를 자르고 달아나려 했다. 수사 검사를 만나 했다는 '죄수 K는 법대로 엄정하게 처리하고 자신에 대한 오해만 없도록 해 달라'는 부탁은 죄수 K를 진짜 친구로 생가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43, 55)


"도피 중이던 죄수 K가 한겨레신문에 제보를 하고 이 제보가 기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김형준 측이 긴박하게 움직였던 1박 2일 동안 가장 중요한 장면은 손영배 검사가 신현식 변호사에게 전화를 건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 전화 한 통이 모든 뒷거래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겨레신문 기자에게도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이 다 된 거냐, 내가 알기로 김형준 검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보도를 꼭 해야 하나〉라는 얘기를 했다." "검찰은 죄수 K의 고소 사건에 김형준 검사가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압수수색 영장을 두 번이나 기각했고 결국 경찰에 맡겼던 사건을 다시 빼앗아왔다. 비위 사실을 보고 받은 대검은 언론 보도가 나오기 전까지 사건을 철저히 뭉갰다. 죄수 K가 김형준 검사의 비위를 언론에 제보하자 이번에는 현직 검사가 개입해 사건 무마를 시도했다. 그리고 다시 검찰은 이 같은 현직 검사의 개입 사실을 알면서도 덮었다. '검찰 식구' 전체로 보면 4중 5중의 제 식구 감싸기다."(58-60)


"고교 동창 스폰서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림자처럼 계속 등장했던 인물이 있다. 바로 검사 출신 전관 변호사 박수종이다." "박수종 변호사가 '고교 동창 스폰서 사건'에서 한 일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이렇다. 1) 김형준이 내연녀에게 줄 돈 천만 원을 빌려줬고 2) 김형준의 내연녀가 일하던 술집에 드나들며 김형준에게 회당 수십만 원어치의 술을 사줬다. 3) 일이 터지고 난 뒤 김형준이 죄수 K에게 돈을 갚을 때는 돈 심부름을 했고, 4) 김형준의 내연녀를 찾아가 입단속을 시켰다. 5) 이른바 '셀프 고소' 작전을 기획했고 6) 죄수 K의 언론 제보를 막기 위해 현직 검사 손영배를 끌어들였다. 7) 언론 제보를 막기 위한 뒷거래 비용으로 죄수 K에게 2천만 원을 보냈고 8) 죄수 K와 연락하며 언론 제보를 취소하도록 설득했다. 9) 한때 자신의 의뢰인이던 죄수 K가 체포되도록 죄수 K의 차명 전화 번호를 검찰에 제공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친분만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66, 70-1)


2부 악어와 악어새


"제보자 X 역시 박수종을 알고 있었다 주식시장에서 그의 이름은 제법 유명하다고 했다. 짧은 기간 동안 워낙 큰돈을 벌어 '박 재벌'이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제보자 X 자신이 연루됐던 사건인 스포츠서울 주가조작 사건에서도 박수종은 한 주가조작범의 변호인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제보자 X가 남부지검에서 수사에 참여했던 한 사건에서는 주가조작 혐의자로 등장했다. 그런데 두 사건 모두 수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제보자 X는 그로 미루어, 박수종의 뒷배에 큰 힘을 가진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렇게 어렴풋한 감을 가지고 있던 박수종에게 제보자 X가 분명한 의심을 품게 된 건 바로 고교 동창 스폰서 사건 이후다. 서울남부지검의 증권범죄합수단장을 지낸 김형준 검사가 박수종의 친구라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박수종 변호사에게 분명한 범법 혐의가 있다면, 김형준 검사 스폰서 사건에서 그가 기이할 정도의 저자세로 '견마지로'를 다했던 게 이해가 간다."(79-81)


"우리가 박수종의 진술조서에서 확인한 것처럼, 금융위는 2015년 초부터 박수종의 네 가지 금융 범죄 혐의를 조사하고 있었다. 금융위는 두 차례나 출석을 요구했지만 박수종은 거부했다. 그는 대검 특별감찰팀에 〈죄가 없으니까 (금융위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죄가 없으니 조사를 받으러 가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얘기다. 아마도 일반인이었다면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성실하게 금융위 조사에 응했을 것이다. 금융위는 결국 대검찰청에 박수종을 수사 의뢰했고, 이 사건은 그해 11월 서울남부지검 증권범죄합동수사단으로 배정됐다. 그런데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의 단장은 바로 김형준이었다. 김형준이 죄수 K에게 했던 〈지금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라는 말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형준 사건에서 박수종이 했던 일들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 모든 일들이 '피의자'가 '수사책임자'를 위해 해준 일이 되는 것이다."(84)


"제보자 X는 M&A 시장에 〈검찰이 세 번만 봐주면 누구나 재벌이 될 수 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합법과 불법의 영역이 가깝고 살짝만 불법을 저지르면 큰 수익을 올릴 기회가 널려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검찰은 박수종 변호사가 다스텍 주식을 활용해 수익을 올리는 과정에서 눈을 여러 번 감아줬다(다스텍을 포함한 세 사건은 약식기소, 한 사건은 불기소 처리됐다). 주범 서정기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다스텍을 수사하지 않은 것이 첫 번째다. '다스텍을 수사하지 않는다'는 수사 기밀을 박수종에게 귀띔해준 것이 두 번째다. 김형준 검사가 남부지검 증권범죄합동수사단장으로 재직할 당시 금감원이 수사 의뢰한 박수종의 금융 범죄 혐의를 봐준 게 세 번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16년 9월 김형준 검사 스폰서 사건이 터진 뒤 대검 감찰본부가 직접 박수종을 조사하면서 금융 범죄 혐의를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약식기소를 한 것이 네 번째다."(97)


"한국의 약탈적 주식담보대출은 상상인과 상상인플러스 두 개의 저축은행이 거의 도맡아왔다. 주식담보대출이 그렇게 좋은 사업이라면 상상인 계열의 저축은행들만 도맡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너무 가까워 언제든 쇠고랑을 찰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이 같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상상인을 주식담보대출에 '올인'하도록 이끄는 '용감한' 사람은 유준원 회장이라는 인물이다." "박수종은 유준원의 도움으로 위기에 빠진 상장사를 장악했다. '회사 정상화'라는 명분을 걸고 들어왔지만 상장폐지를 막는 유일한 길인 유상증자를 포기했고 대신 상장폐지 이후 소액주주들의 주식을 헐값에 거두어들였다. 결과적으로 박수종은 천억 원이 넘는 가치를 가진 손자회사를 거느린 비상장회사의 오너가 됐다. 그 사이 회삿돈 360억 원을 빼내 유준원 회사의 주식을 사는 배임 행위를 저질렀다. 반면 모다와 파티게임즈의 소액 주주들은 상장폐지로 천 6백억 원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다."(102, 114-5)


"스포츠서울 주가조작 사건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유준원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단 한 차례의 참고인 조사조차 받지 않았다. 유준원이 스포츠서울 주가조작 사건에서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주식 계좌관리인이었던 브로커 김 씨가 검찰조사에서 끝내 유준원의 공모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주가조작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진술을 한 브로커 김 모 씨의 변호인은 박수종이었다. 그리고 박수종은 이 사건의 수사책임자인 김형준에게 자주 향응을 제공하는 사이였다. 결국 박수종 자신의 금융 범죄 사건도 유야무야됐고 유준원도 무사했다." "스포츠서울 주가조작 사건은 유준원과 박수종 두 사람이 자본시장에서 왜 막강한 '콤비'로 불렸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유준원에게는 자본이라는 무기가, 박수종에게는 검사들과의 네트워크라는 무기가 있었다. 두 사람이 단기간에 쌓아올린 막대한 부는 두 무기의 결합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134-7)


3부 검찰의 썩은 꽃, 특수부


"전체 검사 2천 2백여 명 가운데 특수부 검사는 불과 5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특수부는 인지수사를 한다. 인지수사를 한다는 건 고소나 고발 없이 수사기관이 자체적으로 범죄를 알아차려서 즉 '인지'해서 수사를 한다는 뜻이다." "구치소나 교도소의 죄수들이 처벌받은 범죄는 그들이 과거에 저질렀던 여러 건의 범죄 중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꼭 자기 사건이 아니라도 죄수들은 범죄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검사는 죄수들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 어떤 죄수의 여죄를 파헤쳐 수감기간을 연장할 수도 있고 반대로 여죄가 드러난 죄수를 봐줄 수도 있다." "검찰의 출세 코스인 특수부, 인지수사의 부담, 범죄 정보의 보고인 구치소, 절박한 죄수들, 그리고 죄수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줄 수 있는 검사의 막강한 권한. 이 모든 조건이 합쳐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검찰 특수부의 하수도에는 오수가 흐르게 되고 그 자양분을 먹고 자라난 독초에서는 썩은 꽃이 피게 된다."(164-6)


"나는 김영일 검사와 죄수 이 씨, 죄수 K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 거래에 '삼각 사건 거래'라는 이름을 붙였다. 삼각형의 첫 번째 꼭짓점인 죄수 이 씨가 두 번째 꼭짓점인 죄수 K에게 돈을 주고 사건을 산 다음 이걸 세 번째 꼭짓점인 검사에게 상납했기 때문이다." "출정 내역에 따르면 죄수 이 씨는 2016년 한 해에만 김영일 검사실에 94번이나 출정을 갔다. 주 1.8회 꼴이다. 주말을 제외하면 닷새의 평일 가운데 이틀 정도를 구치소가 아닌 검사실에서 지낸 것이다. 이 정도면 죄수가 아니라 검사실 직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죄수 이 씨의 혐의는 특가법상 횡령이다. 횡령범에 불과한 죄수 이 씨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방위사업수사부나 특수부 수사에 그토록 자주 출정을 나간 이유는 김영일 검사와 죄수 이 씨가 '특수관계'라는 점을 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즉 죄수 이 씨는 김영일 검사에게 사건 정보를 물어다 주는 역할을 하는 '브로커 죄수'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172-4)


"IDS홀딩스는 투자자들의 돈을 유치해 그 돈을 굴려 수익을 낸 뒤 투자자들에게 원금과 수익을 돌려주는 일종의 투자회사였다. 홍콩의 FX 마진 거래에 투자해 수익을 낸다고 했다. 그러나 홍콩의 FX 마진 거래에 투자해 수익을 낸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검찰 수사로 밝혀진 전모에 따르면 이 사건의 피해자는 만 2천 명, 이들이 투자한 금액은 무려 1조 855억 원에 달했다. 2016년 9월 IDS 홀딩스의 대표였던 김성훈이 구속됐다." "서울중앙지검 별관에 있는 방위사업수사부는 굵직한 방위산업 비리를 전문적으로 수사하는 조직이다. 그런데 지난 2016년 방위산업 비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죄수들이 중앙지검 별관 408호 김영일 검사실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브로커 죄수 이 모 씨, 그리고 IDS홀딩스 사건의 주범 김성훈이 그들이다. 그런데 당시 김영일 검사실에 이들보다 더 자주 드나들었던 죄수가 바로 한 모씨다. IDS홀딩스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스스로를 8천억 자산가로 소개했던 그 한 씨다."(182-3, 194)


"검찰 수사에서 김성훈이 홍콩에 숨겨두었던 27억 원을 한 씨에게 송금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 돈으로 한 씨는 거물 사업가 행세를 하며 피해자들에게 접근했고 다시 한번 사기를 쳤다(김성훈의 채무를 자신이 대위변제 해줄테니 그에 대한 합의서와 처벌불원서를 써달라고 했다). 검찰은 한 씨를 사기 혐의뿐 아니라 범죄수익 은닉 혐의로도 기소했다. 김성훈으로부터 받은 27억 원이 피해자들에게 사기를 쳐서 벌어들인 범죄수익이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기가 막힌 일이다. 애초에 자신들의 돈이었던 범죄수익이 다시 자신에게 사기를 치는 자금으로 사용된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한 씨와 김성훈의 입장에서 보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 '귀인'이었다. 한 씨는 김성훈 덕분에 합의금을 지불한 뒤 출소해 사업가 행세를 하면서 또 한 번 사기를 칠 수 있었고, 김성훈은 한 씨 덕분에 피해자들로부터 합의서와 처벌불원서를 받아냈으니 말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배경이 바로 김영일 검사실이었다."(198-9)


"죄수들에게 돈은 힘이다. 돈이 있으면 그걸 영치금으로 넣어서 음식도 사먹을 수 있고 신문도 마음껏 구독할 수 있다. 내의도 추가로 구매해 교도소 안의 추운 겨울을 그나마 좀 따뜻하게 날 수도 있다. 그보다 돈이 많으면 접견 변호사를 몇 명씩 두고 거의 매일같이 변호사 접견을 나갈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자잘한 효용보다 더 중요한 돈의 효용은 바로 검사와 브로커 죄수들 사이에 벌어지는 '거래'에 한 몫 낄 수 있다는 것이다." "죄수 이 씨를 중심으로 한 '사각(김성훈을 포함한) 사건 거래'와 죄수 한 씨를 중심으로 벌어진 대위변제 사기 역시 김성훈의 돈을 중심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김성훈은 감옥에 갇힌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출정이라는 명목으로 김영일 검사실에 수시로 나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브로커 죄수 이 씨와 한 씨를 자신의 형집행정지나 감형을 위한 '작전'에 마치 아랫사람처럼 동원했다. 힘의 근원은 역시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이다."(202)


4부 한명숙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이 당선됐다. 김대중-노무현, 민주당 계열 정권 10년이 끝났다. 말하자면 세상이 바뀐 셈이다." "정연주 사장을 내보내려면 KBS 이사회가 해임안을 의결해야 했다. 이사회는 모두 11명의 이사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전임 정부 시절 여당 쪽에서 추천된 이사가 7명이다. 7대 4 구조. 새로운 여당 입장에서는 표가 부족했다. 7명 중 2명을 설득해서 정연주 사장 해임안에 찬성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6대 5로 해임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설득이 안 되면 이사 2명을 입맛에 맞는 인사로 교체하는 방법도 있었다. 2008년 5월 이사장이었던 김금수가 돌연 사퇴했다. 김금수는 전임 참여정부 측에서 추천한 인사였다. 김금수는 KBS 사장 교체를 진두지휘했던 최시중 방통위원장에게 정연주의 해임에 반대한다는 뜻을 명시적으로 밝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왜 사퇴했는지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정 사장 해임에 찬성하는 유재천 교수가 이사장으로 들어왔다."(229-30)


"신태섭 이사가 다음 타깃이었다. 신태섭은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적당한 해임 사유가 필요했다. 이명박 정부는 꽤 창의적인 방법을 고안했다. 신태섭은 부산 동의대 교수였다. 먼저 동의대가 움직였다. 동의대는 KBS 이사직을 하면서 겸임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태섭 교수를 해임했다. 그다음 방통위는 신태섭을 KBS 이사에서 해임했다. 교수에서 해임됐으니 국가공무원 결격사유에 해당한다는 이유였다. 2008년 7월이었다. 이렇게 정족수를 채운 KBS 이사회는 2008년 8월 8일 (드디어) 정연주 사장 해임안을 의결했다." "8월 11일 이명박은 이사회 제청을 받아 즉각 정연주를 해임했다. 8월 12일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연주를 체포했다. 배임 혐의였다. (정연주는 2012년 최종적으로 배임 혐의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해임 처분도 취소됐다. 하지만 KBS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세상이 이상했으니까, 한명숙 사건은 당시 벌어졌던 수많은 이상한 일 중 하나에 불과했다."(230-1)


"법원행정처는 2015년 5월 6일 한 문건을 작성한다. 문건 제목은 '상고법원 입법을 위한 대 국회 전략'. 한명숙 사건 대법원 판결을 석 달여 앞둔 시점이다. 법원행정처는 대법원에서 한명숙 사건을 전부 무죄 취지로 파기할 경우,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숙원사업이었던 상고법원 법안과 관련해 김무성을 설득하기는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고 문건에 적었다. 또 다른 문건은 법원행정처가 2015년 7월 20일 작성한 '상고법원 추진을 위한 BH 설득전략'이다." "〈향후 예정돼 있는 정치인 형사사건에도 BH의 관심과 귀추 주목될 것, 주요 현안 관련 접점 모색을 위한 유화적 태도 보일 가능성 충분.〉 말을 어렵게 해놨지만 간단하다. 앞으로 정치인이 연루된 형사사건 판결이 많다. 청와대가 관심이 많다. 그래서 청와대가 당분간 법원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 뒤에 주요 정치인 형사사건 목록을 죽 적어 놨다. 첫 번째가 한명숙 사건이었다."(256-7)


"한만호는 분양 사업 실패로 회사가 부도가 나서 2008년 구속됐다. 2010년 1월 형이 확정됐다. 3월 통영교도소로 옮겼다. 형이 확정된 기결수는 통상 구치소에서 교도소로 이감된다. 만기출소는 2011년 6월이었다. 한만호는 출소를 1년 3개월 앞둔 평범한 죄수였다. 통영교도소로 옮긴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던 3월 31일 갑자기 서울구치소로 이감됐다. 한만호는 이유를 몰랐다." "서울구치소 이감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시작이었다는 걸 한만호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이감 다음 날(4월 1일)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에 출정을 나간다." "특수1부에 가자 검찰은 아는 정치인이 있냐고 묻기 시작했다. 한만호는 처음에 검찰이 원하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한나라당 친박계 ○○○ 의원에게 6억 원을 줬다고 진술했다. 〈특수부 소환 첫날 자금이 한나라당 의원 쪽으로 제공되었음을 이야기했다. (조사를) 종료했다. 급히 덮었다.〉" "한만호 주장의 핵심은 검찰이 이미 타깃을 정해 놨다는 말이다."(273-5)


"한만호가 검찰에 협조하기로 마음을 먹자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다음 날부터 한만호는 스스로 '스토리를 구상해' 검찰에 진술하기 시작했다. 4월 5일 1차 조서를 썼고 5월 11일 마지막 5차 조서가 완성된다. 한 달 만에 모든 일이 끝났다. 검사와 수사관들은 한만호에게 편의를 제공하면서 칭찬했다. 한만호는 자괴감을 느꼈다.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검찰에 협조하는 자신과, 그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자의식이 싸움을 벌였다. 공포와 욕망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불안한 심리상태는 스스로를 '강아지'라고 부를 지경이 됐다." "〈매주 불러서 테스트하고 변호인 답변 피해가는 방법 교육하더니 아예 검찰 진술조서도 제공해주고 구치소에서도 공부하라 하며 "시험 본다"라며 테스트했다. 열심히 하는 체했다. 50을 넘기고 머리 허연 놈이 쪼다 짓을 했지만 그래도 20년 넘게 CEO 한 사람을 마치 저능아 취급했다. 그 모멸감은 죽어도 잊지 못할 것. 밖에서였다면 눈도 마주칠 수 없는 한참 동생뻘들이다.〉"(279-80, 284-5)


"한만호가 한명숙에게 돈을 줬든 안 줬든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한 이유는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한만호의 행동이 상식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검찰이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도움을 약속했을 수도 있고, 한만호가 막연히 기대했을 수도 있다. 다만 한만호는 검찰에 협조하고 그 대가로 검찰의 도움을 받아 재기하려고 했다. 한만호는 2011년 6월 출소할 예정이었다. 검찰에서 진술한 대로 법정 증언을 마치면 그만이었다. 검찰이 명시적으로 약속하지 않았더라도 한만호가 검찰에게 협조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밖에서 다시 사업을 일구고 가족과 즐겁게 살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왜 진술을 뒤집었을까."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한) 한만호의 검찰 진술이 모두 진실이었다면 한명숙이 법정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한만호는 돈을 전혀 받은 적이 없다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한명숙 앞에서 일관된 태도로 사죄의 마음을 표시했다. 더구나 위증죄를 무릅쓰고."(297-8)


# 한명숙 사건 타임라인

2010.03.31 한만호 서울구치소로 이감

2010.04.03 한만호, 한명숙에게 9억 제공 검찰 진술 시작

2010.06.02 한명숙 서울시장 선거 낙선

2010.07.21 검찰, 한명숙 정치자금법위반 불구속기소

2010.12.20 한만호, 법정에서 진술 번복

2011.02.21 동료 재소자 김 씨 1차 법정 증언(한만호 진술 번복 탄핵)

2011.03.07 동료 재소자 최 씨 법정 증언(한만호의 진술 번복 탄핵)

2011.03.23 동료 재소자 김 씨 2차 법정 증언

2011.06.09 검찰, 한만호 감방 압수수색, 비망록 압수

2011.06.13 한만호 출소

2011.07.07 검찰, 한만호 위증 혐의 기소


"김 씨는 2010년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 동안 89번 검찰청에 출정을 갔다. 한 달에 평균 15번이다. 주말과 휴일을 빼면 사실상 매일같이 불려나간 셈이다. 최 씨도 비슷하다. 2010년 4월부터 2011년 3월까지 1년 동안 148차례 검사실에 출정을 나갔다. 한 달 평균 12번이다." "한만호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김 씨와 최 씨의 증언이 법정에서 얼마나 설득력 있었는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하지만 검찰은 목적을 달성했다. 언론이 김과 최의 증언을 비중 있게 보도했기 때문이다." "한만호가 진술을 번복한 것은 한명숙의 도움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한만호는 한명숙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재개할 꿍꿍이가 있었다. 증인 김 씨와 최 씨의 논리이고 정확하게 검찰의 입장이었다 언론은 검찰의 계획대로 움직였다. 김과 최의 증언을 확대 재생산했다. 당시 실체적 진실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취재했던 언론은 없다. 이쪽 저쪽 주장만 중계했을 뿐이다. 그래서 검찰의 수고로움은 그리 헛되지 않았다. 목적은 달성했으니까."(315-8)


"2020년 뉴스타파 보도 이후 대검 감찰이 시작됐다. 한동수 감찰부장은 판사출신이다. 법조비리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2006년 김홍수 게이트 이후 2008년부터 감찰부장은 외부 공모를 통해 선발했다. 한동수는 2019년 당시 조국 법무부장관의 제청으로 감찰부장에 임명됐다. 임은정 검사는 평소 SNS나 언론을 통해 검찰 개혁을 강하게 주장해온 인물이다. 검찰 내부에서는 비주류, 정확하게 말하면 왕따로 평가 받는다." "검찰 수뇌부는 한동수와 임은정을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다. 2021년 3월 2일 윤석열 검찰총장은 '한명숙 재판 모해위증 사건'의 주임검사를 허정수 감찰3과장으로 지정했다. 2020년 6월부터 감찰이 시작됐는데 공소시효 나흘을 남기고 담당 검사를 갈아치웠다. 윤석열은 3월 3일 총장직에서 사임했다. 윤석열은 임기 마지막 지시로 검사 모해위증교사 의혹을 덮었다. 3월 5일 허정수 감찰3과장은 사건을 불기소 종결처리했다. '합리적인 의사 결정'으로 내린 결론이라고 기자들에게 설명했다."(3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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