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 1 - 벤담의 젊은 시절(1776~1789)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92
엘리 알레비 지음, 박동천 옮김 / 한국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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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 벤담의 젊은 시절(1776~1789)


서문


"프랑스 혁명의 백 년은 바다 건너편에서 산업혁명의 백 년에 대응하며, 사법에 주목하면서 영혼을 강조했던 인권의 철학에는 이익의 동질성을 강조한 공리주의 철학이 대응했다. 모든 개인의 이익은 동질적이다─각 개인은 모두 자신의 이익에 관한 최고의 판관이다─그러므로 전통적 제도들이 개인들 사이에 세워놓은 인위적 장벽과, 개인들을 서로로부터 그리고 자신들로부터 보호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 사회적 제약들을 모두 부숴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해방철학이다. 장-자크 루소의 감성적 철학과는 영감이나 원리에서 아주 다르지만, 응용에서는 여러 면에서 흡사한 해방의 철학이다. 대륙에서 인권의 철학은 결국 1848년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는 이익의 동질성을 주장하는 철학이 맨체스터학파에 의한 '자유거래주의'의 승리를 낳았다." "따라서 우리의 연구는 철학의 역사에 들어갈 하나의 장(章)인 동시에 역사의 철학에 들어갈 하나의 장이기도 하다."(5-6)


# 자유거래주의(doctrine of free trade) : 국제 거래만이 아니라 국내 거래도 포함되며, 교환, 유통, 직업선택 등등 포괄적인 경제활동을 가리킨다.


서언


"1789년 초에 이르면, 사법적 논제들에 관한 한, 공리주의 신조는 모든 세목에서 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리주의 신조는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공리주의 정치경제학도, 나중에 맬서스와 리카도가 애덤 스미스의 신조에 첨가한 내용을 제외하면, 가치이론이라든지 상업과 산업의 자유주의 같은 핵심 주제가 거의 같은 시기에 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에 이미 인기를 끌고 있었던 애덤 스미스의 발상들을 벤담은 채택했다. 『국부론』은 미국 혁명이 일어나고 중상주의가 붕괴하던 시점(1776)에 나왔다. 그만큼 당대의 시대정신을 충실하게 표현하는 책이었다. 아울러, 공리주의자들은 정치에 관해서 회의주의적이면서 권위주의적이었다. 편견을 타파하고 개혁을 구현하기 위해서라면 정부가 무슨 수단을 쓰든 개의치 않는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혁명과 소요의 와중에 미래의 급진주의 강령이 이미 형체를 갖춰나가고 있던 시기였다. 정치적 주제에서는 시대가 공리주의 신조를 앞질렀다."(9-10)


1장 / 기원과 원리


"법칙은 오직 일반성을 갖출 때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어떤 관계가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 관계가 항상적이라는 말이다. 외부의 자연에 대해 내가 뭔가 유용한 행동을 하려면, 현상들 사이의 관계를 내가 이해할 필요는 없고, 그 관계가 항상적인 것으로 족하다. 다시 말해, 첫 번째 현상을 일으키면 내가 목표로 삼은 두 번째 현상이 초래되리라고 내가 확신할 수 있다면 족한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에 관한 뉴턴의 사고방식이다." "뉴턴의 물리학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실험적 증거에 입각하면서 동시에 엄밀한 과학의 성격을 갖춘 정신의 과학과 사회의 과학이 구성된 다음이라면, 그러한 새로운 학문을 토대로 도덕이론과 법률이론도 과학적인 형태로 정립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공리주의 또는 철학적 급진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것은 일종의 뉴턴주의라고, 달리 말하자면, 정치와 도덕에 뉴턴주의를 적용하려는 시도라고 자리매김할 수 있다."(12-4)


"흄의 방법 안에는 이중성이 내재한다. 어떤 측면을 보면, 그의 방법은 합리주의적이다. 도덕의 영역에서 만유인력이라는 물리적 원리에 상당하는 법칙과 원인을 확정하려 한다. 그는 도덕과학의 창시자로서, 이 도덕과학은 후일 하나의 학파가 만들어져서 연역적이며 체계적인 형태로 조직해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연상주의─흄에게 연상주의는 추론을 이어가다 보니 추론 자체에 반기를 들게 되는 추론, 곧 하나의 비합리주의였다─라는 교조는 그에게서 비롯되었고, 그와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그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적 신조도 그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는 우주에서 필연성이라는 관념을 추방할 길을 찾아 나섰고, 새로운 과학을 창시하기는커녕 기성의 과학이 취하고 있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겉모습을 파괴하러 온 회의주의자였다고 일반적으로 간주된다. 궁극적으로 보면, 흄은 오히려 행동하는 권능을 마비시킨다는 이유로 성찰을 문죄한다."(25)


# 연상주의(associationisme) : 하나의 정신 상태가 거기서 이어지는 다른 정신 상태와 결합하는 과정으로 정신작용을 이해하는 발상


"어떤 면에서 보면, 도덕과학 자체를 흄이 이해했던 의미가 후일 공리주의 도덕학자들이 이해했던 의미와 달랐다. 그는 의문의 여지없이 뉴턴주의의 경로를 따라 진행한다. 개인적 장점이라는 관념을 분석하는 데 그는 〈실험적 방법〉을 응용하겠다고 명시적으로 천명한다. 선과 악의 구분과 여타 뚜렷한 심리적 구분 사이에서, 두 구분이 같은 비례로 같은 원인의 영향 아래 함께 변화하고 있다는 공존 관계를 만약 확정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두 구분이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현상들이 서로 달라 보이거나 심지어 모순적으로 보이더라도, 일반법칙은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 라인강과 론강은 같은 산에서 발원하지만, 똑같은 인력의 법칙에 따라 상반되는 방향으로 흐른다. 도덕철학에서는 공리의 원리가 만유인력에 해당한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행위가 사회의 이익에 부응하는 것으로 보이는 정도에 따라 그 행위가 도덕적으로 상찬할 만하다고 말한다."(27-8)


"그러나 순수하게 실험적인 방법을 채택하겠다고 천명했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흄은 명령을 발하는 것은 도덕철학자의 업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찾아다닌다. 대다수 도덕학자들이 같은 경로를 따라왔으면서도 느닷없이, '있어야 할 당위'를 규정하러 나서는 것은 이상한 순환논법에 빠진 탓이다. 만일 여기에 순환논법이 끼어든 것이라면, 반론은 벤담에게도 해당한다. 왜냐하면 공리의 원리 안에서 하나의 과학적 법칙과 동시에 하나의 도덕적 명령도 발견했다는 것이 정확히 벤담의 중심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존재와 당위를 한꺼번에 가르치는 명제가 그것이라는 것이다. 흄에 따르면, 이성은 본질적으로 비활동적이다. 이성의 유일한 목적은 관념들을 비교하는 데 있기 때문에, 행위에서 선과 악을 분간할 능력이 없다. 도덕적 판단이란 관념이 아니라 인상에, 하나의 〈느낌〉에, 기반을 둔다. 도덕학자의 과제는 이 느낌을 분석하고, 도덕적 느낌이 과연 무엇인지 규명하는 데 있다."(28)


# 공리의 원리에서 이기심의 문제

1. 맨더빌 : 다양한 갈래의 이기심들이 나름대로 화합을 이루면서 공동체의 이익에 기여한다(그렇다면 왜 이기심을 미덕이 아니라 악덕이라 명명하는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2. 하틀리 : 다양한 갈래의 이기심들이 조화를 이루는 과정은 점진적이며 누진적이다. 즉 이기적인 것과 공감적인 것의 (무수한) 결합은 '마침내' 순수한 쾌락의 상태로 나아간다.

3. 벤담(입법자의 과제) : 다양한 갈래의 이기심들은 저절로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그렇기에 개인의 이익과 일반 이익을 일치시키려면 인공구조물(훌륭한 헌정구조)이 필요하다.


"엘베시우스는 흄의 선례를 따라 〈도덕학을 여타 모든 과학들처럼 취급하고, 도덕학도 물리학 같은 실험과학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그가 도덕학에 부여한 원리는 〈공공의 이익, 다시 말해 최대다수의 이익〉이었고, 그는 정의(正義)를 곧 〈더 많은 수에게 유용한 행위의 실천〉과 같은 것으로 만들었다." "몽테스키외의 물리적 결정론 또는 지리적 결정론 대신에 엘베시우스는 하나의 도덕적 결정론을 제출한다. 인간은 지리적 정황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정황의 산물이다─가장 넓은 의미의 교육의 산물이다. 〈정신의 불평등의 진정한 원인은 도덕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 이론의 귀결은 인간 본성의 법칙에 관해 획득한 지식 덕택에 인간에게는 인간을 변혁하거나 개혁할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벤담의 제자 제임스 밀과 고드윈의 제자 로버트 오웬 등, 19세기 초의 교육운동가들이 채택하는 이론이 이것이다─교육을 통해 개인들은 자기네 이익을 일반이익과 어떻게 합치시킬지를 배운다."(47-8)


"입법자는 교사, 도덕을 가르치는 교사다. 오로지 좋은 법을 통해서만 덕스러운 사람들이 형성될 수 있다." "도덕학자의 모든 연구는 상급과 벌칙에 어떤 효용이 있을지, 그리고 개인적 이익과 일반적 이익을 한데 묶는 데 그것들이 무슨 도움이 되는지를 확정하는 데 있다. 개인적 이익과 일반적 이익의 연합에서 그는 〈도덕학자들이 스스로 목표로 삼아야 할 주된 과제〉를 봤다. 그리고 이보다도 더욱 예리한 문구로 엘베시우스는 벤담이 멀지 않은 후일 실행하려 시도했던 바로 그 설계의 윤곽을 다음과 같이 그린다. 〈법의 탁월성은 입법자의 통일된 견해, 그리고 법률들 사이의 상호의존에 좌우된다. 그러나 이 상호의존을 확립하려면, 모든 법을 어떤 단순한 원리로 축약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공중을 위한 공리의 원리, 다시 말해, 하나의 정부 형태 치하에서 살아가는 최대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공리의 원리 같은 원리로서, 아직 그 범위와 결실이 완전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도덕과 입법 전체를 망라하는 원리다.〉"(49-50)


"엘베시우스의 신조는 영국보다 이탈리아에서 먼저 퍼졌다. 이탈리아의 베카리아는 유명한 저서에서 엘베시우스의 철학을 형법이라는 주제에 체계적으로 적용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범죄와 처벌』은 1764년에 나왔다. 벤담은 엘베시우스의 제자인 만큼 베카리아의 제자이기도 하다. 벤담은 사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리의 원리를 적용하는 작업을 베카리아가 갔던 지점 너머로 연장했다. 그는 하나의 보편적 법전을 구상하고 작성하기 시작해서, 하나의 포괄적인 형법전을 일궈냈다." "벤담은 베카리아의 작은 책 도처에 산재한 여러 가지 관찰들을 활용해서 공리주의 철학에 하나의 수학적 엄밀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베카리아의 책에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식이 엘베시우스에서보다 더욱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강도, 지속성, 근접성, 확실성 등, 고통의 무게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관한 베카리아의 분석에서 그는 자신의 도덕계산법을 구성하게 될 첫 번째 요소들을 발견했다."(50-1)


"그리고 공리주의 신조가 이즈음에 영국에서 인기를 누렸던 두 사람의 저자들에 의해 거의 최종적인 형태로 표현되었다. 두 사람 모두 성직자로서, 한 사람은 비국교도였던 프리스틀리고 다른 한 사람은 국교도였던 페일리다. 프리스틀리는 1768년에 출판된 논문, 『정부의 첫 번째 원리, 그리고 정치적·시민적·종교적 자유』에서, 정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최상위 기준〉으로서 〈국가의 구성원들, 다시 말해, 다수 구성원의 선과 행복〉을 채택하자고 제안했다." "페일리는 1785년에 나온 『도덕정치철학의 원리』에서 공리의 원리를 도덕과 신학의 문제에 적용한다. 그는 쾌락들이 오직 지속성과 강도에서만 차이가 난다고 보면서, 행복을 쾌락의 합계로 정의한다. 더욱 정확하게 말한다면, 쾌락의 합계에서 고통의 합계를 차감한 나머지로 정의한다. 도덕적 행위는 경향에 의해서 부도덕한 행위와 달라지며, 법의 기준은 공리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후 반세기 동안 페일리는 공리주의 도덕의 공식 대변인으로 남는다."(52-4)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은 엘베시우스에서 거의 단어 하나도 바꾸지 않고 베껴온 명제 하나로 시작한다. 〈자연은 인류를 두 개의 주권적 주인, 즉 고통과 쾌락의 다스림 아래 놓았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리키고,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이 두 주인들이다. 한편에서 옳고 그름의 표준도, 다른 한편에서 원인과 결과의 고리도 이 주인들의 왕관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공리의 원리'는 이와 같은 종속 관계를 인지하고, 행복이라고 하는 대구조물을 이성과 법의 손으로 축조하는 목표를 추구하는 그런 체계를 세우기 위해 그러한 종속 관계를 대전제로 삼는다. 공리의 원리라 함은 이익 당사자의 행복을 확장하거나 아니면 축소하는 경향, 같은 뜻을 다른 말로 바꾸면, 그 행복을 증진하거나 반대하는 경향에 따라서 모든 행동을 승인하거나 부정한다는 원리를 뜻한다. 나는 모든 행동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적 개인의 모든 행동만이 아니라, 정부의 모든 조치도 포함된다.〉"(65-6)


# 쾌락과 고통을 계량화하는 기준

1. 강도(intensity)

2. 지속성(duration)

3. 확실성(certainty) 또는 불확실성(uncertainty)

4. 근접성(proximity) 또는 거리(distance)

5. 생산성(fecundity) : 쾌락 또는 고통이 그것과 같은 종류의 감각으로 이어질 확률

6. 순수성(purity) : 쾌락 또는 고통이 그것과 상반되는 종류의 감각으로 이어지지 않을 확률

7. 범위(extent) : 쾌락이 도달하는 사람의 수, 다시 말해 쾌락의 영향을 받는 사람의 수


2장 / 벤담의 법철학


"벤담은 '단순명령적' 법과 '처벌적' 법을 구분한다. 단순명령적 법은 예컨대, 〈도둑질은 금지한다〉와 같은 형식으로 진술되고, 처벌적 법은 〈도둑질을 한 자는 누구든 교수형에 처한다〉는 형식으로 진술된다. 민법은 여러 권리들의 정의(定義)로 구성된다. 형법은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 다시 말해, 범죄의 정의로 구성된다. 사법 기능을 행사하는 주체로 간주되는 국가는 여러 가지 의무들을 창설하고,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행위는 형벌로써 억누른다. 이제, 범죄의 존재 자체는 이익 융합의 원리도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도 해당 사안에서는 자명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범죄가 저질러질 때마다, 공감의 정서보다 반감의 정서가 주도한 것이기 때문이며, 아울러 개인들이 적어도 겉보기에는 이웃의 이익을 해치는 데서 자신의 이익을 봤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가에게 제기되는 과제는 사적인 이익이 공적인 이익과 인위적으로 일치할 수 있도록 의무와 형벌을 정의하는 일이다."(85)


"벤담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입법자들 그리고 정부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인 철학이다. 다시 말해,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을 위해 쓰인 철학이다. 벤담은 루소의 나라 그리고 심지어 베카리아의 나라에서 팽배하던 인간주의 철학과 영구적으로 구별되는 색깔을 영국의 개혁철학에 이미 칠해놓았다. 엘베시우스의 제자로서 그는 인간을 쾌락과 고통의 능력을 지닌 동물로 여겼고, 입법자를 어떤 법이어야 인간의 감수성이 복종할지를 아는 현자로 여겼다. 그는 고통을 종식시키기를 희망하지 않았고, 차라리 이익의 인위적 일치를 이룩해내기 위해서 형벌을 가할 권력을 몰수하여 무엇이 유용한지를 알고 있는 입법자의 손아귀에 맡겼다. 최종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쾌락의 합계가 고통의 합계를 능가하도록 만드는 일은 입법자가 독재적으로 그리고 엄밀한 절차에 따라 고통을 개인들에게, 그들의 본능적이거나 감상적인 저항은 무시하면서, 부과함으로써 꼼꼼히 살피도록 입법자의 이성에 맡겨진다."(159-60)


"법을 자기들끼리만 알고 공중은 모르며, 따라서 법이 성문화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법률가 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다. 영국에서 법의 압도적인 대부분이 법률가들의 용어로 보통법이라 불리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불문법, 옛날부터 내려오는 법정의 법학 이론들로 구성되는 까닭이 이것이다. 불문법은 〈기억할 수 없도록 아득한 옛날부터 오랫동안 사용됨으로써, 그리고 왕국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구속력과 법적 효력을 획득했다〉고 블랙스턴은 썼다." "법률가 집단의 구성원들이 공공이익과 상반되는 자기네끼리의 이익을 찾아내는 지점이 바로 이 모호함 안에서다. 모호함 덕분에 그들은 법에 관한 지식과, 새로운 사건이 등장할 때마다 번번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자의적으로 정의할 권력을 독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시민의 보호자인 법이 국가를 구성하는 다양한 인간들의 계급보다는 개별적인 개인 각자에게 우호적이기〉를 원한다면, 법은 성문화되어야 한다."(163-5)


"이 당시 영국에서는 체계화된 성문법전에 대한 요구가 없었다. 그렇지만 유럽 전역의 개혁가들이 모방해야 할 모델로 계속해서 인용했던 것은 바로 영국의 사법제도였다. 일반적으로 영국은, 정부의 권위가 아니라 신민의 자유가 무제한이라고 간주되는 나라로 비쳤다. 개인의 행동들은, 그것을 불법이라 선언하는 법이 특정되기 전까지는, 합법으로 간주되는 나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소가 이뤄진 다음에 법은 유죄판결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지연시키고 방해하기 위해 모든 주의를 다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는 나라였다. 영국은 심문이나 고문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거기엔 배심재판제가 있었다. 사법제도가 복잡한 것 자체가 신민의 자유를 위한 안전장치로 보였다." "영국은 왕이 찬탈의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 모른다고 항상 의심을 받고, 그런 왕의 권력에 맞서 법률이라는 직능이 배심원단의 후원 아래 영국인들의 자유를 지켜줄 옹호자라고 전통적으로 간주되어 오던 나라다."(170-1)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기에 개혁과 박애의 거대한 운동이 벤담을 둘러싸고 형성되고 있었다. 박애주의자들과 법률가들과 입법자들을 모두 몰두하게 만든 것은 형법의 문제, 교도소 체제의 문제였다. 경건주의적인 동시에 실천적이고 사회적이며 〈공리주의적〉인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전형적인 대변자들은 〈복음주의 교파〉의 사람들, 〈성자들〉, 일종의 감리교도지만 영국교회 안에 머무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혈이 낭자한 사냥의 폐지, 일요일 안식의 엄격한 준수, 노예제 폐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옥 개혁을 요구했다." "그 후, 1784년에 의회가 오스트레일리아로 행정적 추방이라는 편법을 개시했을 때, 벤담은 새로운 체제를 제시하면서 종래의 체제에 맞섰다. 추방이라는 발상과 대조적으로, 그는 스스로 『파놉티콘』이라고 명명한 모범 감옥의 설계도를 그려냈다. 이것은 엘베시우스에서 그가 발견한 이익의 인위적 일치라는 원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적용한 결과였다."(176-9)


3장 / 경제이론과 정치이론


"애덤 스미스의 경제이론에서, 우리는 벤담의 사법이론에서 만났던 〈자연〉이라는 단어를 다시 만난다. 벤담에 따르면, 형벌의 〈자연적〉 척도는 판사에 의해 가해지는 물리적 고통의 양과 범죄로 분류된 행위에서 결과하는 물리적 고통의 양 사이의 비교에서 나온다. 애덤 스미스에게, 가치의 〈자연적〉 척도는 그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경험된 고통의 양, 다른 말로 표현하면, 희생된 쾌락의 양과 그 물건을 획득한 결과로, 이 획득이 노동을 통해 직접 이뤄졌던지 아니면 노동에 교환이 뒤따름으로써 간접적으로 이뤄졌든지 상관없이, 기대되는 쾌락의 양 사이의 비교에서 나온다. 형벌이 효과적이려면 형벌의 악이 범죄의 악을 보상하고 넘쳐야 한다. 노동이 효과적이려면 보상의 선이 노동의 고통을 보상하고 넘쳐야 한다." "다만 벤담의 사법이론에서 쾌락과 고통의 계산은 입법자와 행정관의 의도적인 작업에 의해 인위적으로 확정된다. 반면에 애덤 스미스의 경제이론에서는 동일한 계산이 저절로 이뤄진다."(201-2)


"애덤 스미스는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가 성립하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할 모든 조건들을, 물리적 조건이든지 심리적 조건이든지,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앞장섰다. 첫째, 어떤 시점에서든, 도처로부터, 그리고 무한한 양으로, 대상들이 시장에 나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조건이 더욱 잘 충족될수록 시장가격은 자연가격 언저리에서 일정한 수준으로 더 잘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개인들이 언제나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완벽하게 깨우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애덤 스미스에게는 경제 현상들의 본질이 이 마지막 조건을 충족시켜준다고 생각하는 성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생산물을 얼마만큼의 양으로 시장에 내놓는 것이 자기들에게 이익인지에 관해 판매자들이 틀리는 경우가 때때로 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마지막 결산에서는 개별적인 착오들이 상쇄된다." "완벽하게 이기적인 개인은, 일반적인 규칙으로서, 동시에 완벽하게 합리적이라는 가정이 여기에 들어 있다."(209-10)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노동은 생산량대로 소비되지 않은 자본을 생성하고, 자본의 소유자는 '이윤'을 고려하면서 그것을 노동자에게 꿔줄 태세를 갖추게 된다. 시간이 또 흐름에 따라 토지는 모두 점유되고, 그러면 지주가 자기에게 속한 땅을 사용하는 대가로 '지대'를 요구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윤도 지대도 노동의 '임금'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윤과 지대가 어떤 상품의 가격에 요소로서 포함된다면, 분업에 상응하지 않게 할당되는 이득이 있다는 뜻이다. 이익의 일치를 낳는 것은 교환에 근거한 분업이기 때문에, 이익의 일치는 더 이상 필연적이지 못하고 균열이 발생할 수도 있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어떤 나라에서는 〈지대와 이윤이 임금을 잡아먹는다〉고 말하며, 자기 용어로 상위 계급과 하위 계급 두 계급 사이에 이익의 필연적인 대립을 정립한다." "그리하여 그에 따르면 자연적 독점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인위적 독점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교환의 메커니즘을 왜곡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212-3)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상업과 산업의 자유를 제창한 이론가들의 새로운 관점에서는 나약한 정치권력에도 민사를 내버려두고 레세-페르를 실천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권력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결함, 지출하고 지출을 방치한다는 심각한 결점이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새로운 신조의 지지자들도 정부에게 자기관리를 촉구했다. 정부가 상업과 산업을 규제하기 위한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세금 징수 역시 간섭의 한 방식이다. 정부는 가능한 한 적게 다스리고 또 적게 지출하는 것이 적당하다─이 두 조건은 하나로 축약된다. '정치경제학'이라는 표현의 원래 의미가 이런 사고방식에 부합했었고, 1780년까지도 이 의미는 아직 폐지되지 않았다. 『국부론』을 쓸 당시의 애덤 스미스, 그리고 경제개혁에 관해 유명한 연설을 행할 때의 버크는 〈정치경제학〉을 〈정치인 또는 입법자의 과학 분야〉로서, 공공재정을 사려 깊게 관리하는 과학이자 하나의 실천 이론으로 이해했다."(221-2)


"정치경제학은 하나의 '과학'과 함께 하나의 '예술'을 담고 있는데, 과학이 예술에게 아슬아슬하게 복속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벤담은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벤담은 정치경제학을 애덤 스미스가 그랬듯이 정의했다: 그것은 〈입법의 예술의 한 분야〉로서, 민족의 부를 이끌어갈 최선의 방향에 관한 지식이자, 〈최대행복이라는 더욱 일반적인 목적이 최대의 부와 최대의 인구를 생성함으로써 촉진되는 한, 최대행복을〉 생성해내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찾아낼 지식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명제 아래에서 노동자들, 자본가들, 지주들로 구성된 사회 안의 부의 분배를 검토해보면 이익은 자연스럽게 균열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벤담은 이 질문을 파고 들어가지 않는다." "제네바의 뒤몽에 따르면, 〈이런저런 지점에서 법이 어떠해야 하는지, 민족의 번영이 가능한 최고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법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무엇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이것이 벤담이 제안하려는 목표였다."(227-8)


"1785년 무렵에, 벤담은 애덤 스미스의 경제이론과 자신의 사법이론을 융합─고리대금업을 옹호하고 식민지 보유에 반대하면서─하는데 성공했다고 봤다. 그 두 이론은 국가의 기능에 대한 정의에서 일치했다. 모를레는 셸번 경에게 이렇게 썼다. 〈자유는 자연적 상태고 제약은 반대로 강박의 상태이므로, 도둑과 살인자들만 계속해서 잡아낸다면, 자유를 돌려줌으로써 모든 것이 제자리를 되찾고 만사가 평화로울 것입니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가 실제로 가졌던 견해를 경구의 형식으로 표현한 셈과 같다. 다른 말로 하면, 부를 직접 증가시키고 자본을 직접 조성하는 것은 국가의 기능이 아니다. 국가의 기능은 부가 일단 획득된 다음에 부의 소유에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국가는 완수해야 할 사법적인 기능이 있지만, 국가의 경제적 기능은 최소한으로 축소되어야 한다. 애덤 스미스의 이론들을 채택함으로써 벤담은 40년 후에 철학적 급진주의의 구성으로 이어지게 될 이념체계의 형성에 첫걸음을 떼었다."(245)


"프리스틀리가 1768년에 『정부의 제일 원리』에서 채택한 것은 이익의 인위적 일치라는 원리였다. 그가 이 책에서 공리의 원리와 민주주의 이념을 의식적으로 융합했기 때문에,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을 연구할 때 이 책이 중요하다. 하나의 국가에 상관되는 모든 일의 기준은 〈어떤 국가든 구성원들의, 다시 말해 구성원 다수의, 복리와 행복〉이다. 그러므로 최선의 정부 형태는 〈현재 인류의 행복에 가장 도움이 되고, 미래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형태다. 따라서 하나의 정부를 세우려고 할 때의 관건은, 흄이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통치자들의 이익과 피치자들의 이익을 일치시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위태로운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의 이익 일치를 어떻게 확보할까? 〈그런 군주들을 한계 안에 머무르게 만드는 것은 어떤 경쟁자에게 우호적일지 모를 반란에 대한 지속적인 공포뿐이다. 다시 말해, 인민에게서 애호를 받는 것이 그들 자신의 이익이 되게끔 만드는 것뿐이다.〉"(267-8)


# 동시에 프리스틀리는 모든 사람이 모든 기능을 선출할 권리를 부여할 수는 없다고 하여, 정치적 자유에 제한을 두었다.


"1776년에 출판한 『정부에 관한 단상』에서 벤담은 블랙스턴이 제시했던 민주주의의 고전적 정의, 즉 〈모두에 의한 정부〉를 고찰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형태의 정부는 모든 정부에 대한 부정에 해당한다며 반대한다." "민주주의 체제가 자연상태에 가장 가까운 근사치라는 견해를 토머스 페인은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이념을 공리의 원리라는 관점에서, 그 의미는 여러 갈래지만, 해석하려는 이런 시도들은, 일단 당시에는,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한 시도에 불과했다. 이 당시에 영국의 정치적 자유주의가 전반적인 근거로 삼았던 것은 계약의 개념, 흄과 벤담이 공리의 개념을 제시하여 대조했던 상대 개념인 바로 그 계약의 개념이었다. 보통선거권 또는 임기 1년의 의회를 요구했던 개혁가들은 그런 개혁에 효용이 있다는 이유보다는,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확립된 역사적 규약의 원래 조항들과 그것이 부합한다는 이유에서, 존중할 만한 하나의 전통과 부합한다는 이유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세웠다."(272-3)


"그러나 원초적 계약의 이론가들은 이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정부의 역사적 기원을 하나의 협약에서 찾는 설명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정부들이 행사하는 권위의 기초도 이 협약에서 찾는다. 만일 우리가 이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주권자가 신민에게 정의와 보호를 제공하는 정도에 정확히 비례해서 신민의 의무도 부과한다는 조건부 약속이 군주나 정부를 구속하지 않는 한, 어떤 군주나 어떤 정부에도 복종을 바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 명제는 일반적인 의견에 상반된다. 정부에 대한 자신의 복종이 하나의 계약에 달려있고, 정부가 그 계약의 조건들을 이행한다는 조건에 연동되어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구나 정부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하나의 원초적 계약 위에 구축하는 이론은 있는 그대로의 실상에 부합하지 않는 하나의 추상적 이론에 불과하다. 또는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277-9)


"홉스의 전통에 충실했던 벤담은, 자기가 보기에는 여전히 만들어진 추상이자 법률적 허구일 뿐이었던 '권리'의 개념 또는 '자연권'의 개념을 위한 자리를, 자신의 사법체계에서는 허용하지 않는 편을 선호했던 것이 명백하다. 의무와 범죄는 실정법이 창조한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정부가 설치된 까닭은 사람들이 권리를 가져서가 아니라 아무 권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억할 수 없는 옛날부터 권리가 있어서 바람직했다고 말하고 싶으면 말해도 되지만, 문제 되는 그 권리가 그때 아직 존재하지 않았음을 바로 그런 주장 자체가 증명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민주주의자들은 보통 원초적 계약과 자연권이라는 관념들을 자기네 요구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조가 공리주의 신조의 창시자들에게 안겨줬을 역겨움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다. 처음에 미국에서 승리를 거두고 다음에는 프랑스를 장악한 인권 이론은, 공리의 원리 위에 입지를 세우고자 했던 버크와 벤담으로부터 완강한 반대를 겪어야 했다."(288-91)


"벤담이 보기에, 하나의 〈정치사회〉라는 개념, 여러 가지 제약들이 강요되고 경험되는 하나의 체제는 실증적인(positive) 개념이다. 그러나 하나의 정착된 정부에 복종하는 습관이 없는 하나의 〈자연상태〉라는 개념은, 그리고 제약의 부재를 뜻할 수밖에 없는 자유의 개념도 마찬가지로, 순전히 부정적인(negative) 개념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자유는 〈우리에게 제약이 부과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되고, 안전은 〈남들에게 제약이 부과되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된다. 공리에 관해 말하라.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과 인위적으로 일치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도 제약에 복속해야 함을 저 개인이 납득할 것이다. 자연권에 관해, 자연법에 관해 말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양심을 완강히 붙들고, 그리고 공감과 반감의 원리가 부추기는 대로 넘어간 상태에서, 자기 기분에 거슬린다고 생각되는 모든 법에 맞서서 무기를 들라고 초대하는 셈이다. 공리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자유의 철학이 아니다."(299-301)


"1788년 말 무렵에 벤담은 다가오는 삼부회 선거를 준비하고 있던 프랑스에 자신의 성찰들로써 도움을 줄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개인은 행복을 향해 평등한 욕구를 가진다. 모든 개인들에게, 어느 한 물건이 행복을 증진하는 경향을 가늠하는 능력이 그 행복과 같다면, 〈최선의 정부 형태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아주 간단한 질문이 될 것이다. 이 사회의 모든 개인에게 투표권을 주기만 하면 되는 문제일 것이다〉. 그리하여 미성년자, 정신병자, 그리고 (약간 다르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유로) 여성을 빼면, 선거인에게 필요한 지적인 역량의 정도를 확정하는 데 적당한 규칙이 없는 터라서, 모두에게 평등한 정치적 권리를 수여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인권의 이론이 공리의 언어로 표현되는 일종의 번역이 이뤄진다." "그렇지만 이러한 논리 연습의 중요성을 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루소의 평등주의가 유행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벤담은 그것을 위한 공리주의적 공식을 찾아내보자 애썼던 것이다."(308-9)


"무정부주의적 명제를 지지하기에는 엘베시우스의 제자로서 그는 과학의 통치를 너무 많이 신봉했다." "통치자들에게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벤담이 의지하는 유일한 제재는 도덕적 제재뿐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기가 〈공론의 재판정〉이라고 부른 상시적인 관할권 아래 통치자들이 복속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그는 언론의 절대적 자유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 그의 태도는 엘베시우스나 볼테르, 또는 왕이 저술가들의 조언을 듣고 비판을 받고 그리고 〈계몽되어야〉 한다면서, 필요한 개혁을 실현해주기를 그리고 특권적인 단체들의 사욕에 사로잡힌 완고함을 무찔러주기를 왕에게 의존했던 대륙의 모든 철학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어쩌면 벤담은,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들처럼, 통치자들의 이익은 피치자들의 이익과 같다고 확인하고, 따라서 통치자들을 개혁의 명분으로 개종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진정한 이익에 관해 그들을 계몽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태세가 되어 있었는지 모른다."(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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