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 2 - 공리주의 신조의 진화(1789~1815)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93
엘리 알레비 지음, 박동천 옮김 / 한국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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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 / 공리주의 신조의 진화(1789~1815)


서언


"정치 분야에서 벤담과 그의 제자 뒤몽은, 〈인간의 권리 선언〉을 조목조목 반박하기 위해 공리의 원리를 기반으로 삼았다. 반면에, 매킨토시와 페인과 고드윈의 경우에는, 평등한 권리의 원리보다는 이익 일치의 원리가 항상 우선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의 공리주의는 장래의 철학적 급진주의를 예시한다. 경제 분야에서, 고드윈은 개인재산이 사라짐으로써 모든 개인들이 필요한 만큼의 생계를 평등하고 풍요롭게 제공받게 될 사회가 도래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 공리의 원리를 기반으로 삼았다. 맬서스는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에서 언제나 근간이었던 노동의 법칙을 역설하면서, 공리의 원리를 기반으로 삼아 어두운 면을 지적했다. 인간이 본능을 억제할 줄 모르는 한, 소비자 수가 가용한 생계자원의 양보다 계속해서 빨리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행복은 이처럼 고통스러운 조건에 종속된다. 이와 같은 두 갈래의 공리주의 중에서, 정통 교리가 되는 쪽은 고드윈의 것이 아니라 맬서스의 것이었다."(5)


"자유주의 이념들이 영국에서 재신임을 얻고 있던 시기였던 만큼, 자유주의 이념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세상 사람들 모두가 말하는 언어였던 공리의 언어를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 불가피하지 않았겠는가? 여기에 1808년 벤담과 제임스 밀의 만남이라는 특별한 사정이 추가된다. 오랫동안 휘그당 내 진보파였던 제임스 밀은 벤담을 자유주의의 명분으로 개종시켰고, 종내에는 정치적 급진주의의 명분으로 개종시켰다. 제임스 밀은 리카도에게도 이념을 주입했다. 리카도가 경제적 신조 전체를 통일하고 체계화하기 위해서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에다가 맬서스의 두 가지 진화법칙을 결합한 것은 밀의 지령과 감독에 따른 일이었다. 결국, 제임스 밀은 가능한 모든 출판 수단을 통해서 스스로 벤담주의의 열렬한 선전가가 된다. 오랫동안, 18세기부터, 서로 격리된 개인들이 여기저기서 선전해왔던 이념들이, 이제야 비로소 제임스 밀 덕택에 그리고 벤담의 후원 아래, 공리주의 학파로 집중되었다."(5-6)


1장 / 정치적 문제


"흄과 애덤 스미스와 벤담은 저항권이라는 발상과 결부시켰기 때문에 사회계약이라는 발상을 비판했었다. 버크는 반란이라는 수단을 꾸짖을 하나의 이유가 거기에 들어있다고 봤기 때문에 사회계약론을 받아들였다. 사회계약이란 사람들이 서로 묶여있다는 뜻이지, 다수파에게 자기네 맘대로 사회적 연대의 끈을 풀어버릴 자유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일반적 공리라는 관점을 취하는 사람에게는 인민주권의 교의는 오류다: 〈누구도 자신의 대의명분에 관해 스스로 판관이 될 수 없다〉. 다수의 의지가 다수의 이익과 일치한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인민주권이란 다수파의 절대 권력일 뿐으로, 한 사람의 절대 권력을 뜻하는 군주주권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법을 농단하는 것이며 해로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버크는 공리주의 철학에서 반민주주의 정치를 연역했다. 그가 보기에, 인권의 이론은 비현실적인 〈형이상학〉이었고, 프랑스 혁명에 책임이 있는 저자들, 문사들, 필로조프들의 작품이었다."(12-3)


"벤담은 한때 공화주의 쪽으로 기운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위기는 극히 짧았고 극히 피상적이었다. 제헌의회 연설가들의 〈망상〉과 〈열광적인 웅변〉은 이미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루이 14세 시절에 박해받은 신교도의 후손들에게 조상의 재산을 돌려주는 등의 시책은 그가 보기에 안전의 원리를 위배하는 것이었다." "1793년에 아직 영국을 떠나지 않은 탈레랑에게 벤담은 『식민지를 해방하라!』는 제목의 소책자 한 부를 증정했다. 이 책은 원칙에 관한 논의에서 시작하여, 식민제국의 소유가 인권이라는 신조의 관점에서 불의할 뿐만 아니라, 식민을 하는 나라의 이익에도 식민지의 이익에도 무용하고 해로움을 증명하려는 시도였다. 남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식민지를 공격하는 어리석음은 무엇 때문이냐고 1797년에 상원에서 그는 캐물었다." "벤담은 이것이 자신의 자코뱅주의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경제적 자코뱅주의를 제외하면, 벤담은 반-자코뱅파였다."(40-2)


"1789년 초에 벤담은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의 말미에, 미국의 인권선언들, 특히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의 인권선언을 비판하는 내용의 주석을 첨가했다. 이 두 선언은 제1조에, 〈사람들이 사회계약을 형성할 때 후손들에게 수여할 수도 없고 박탈할 수도 없는 일정한 자연권이 있다. 재산을 획득하고 소유하고 보호할 수단, 행복과 안전을 추구하고 확보할 수단을 가지고 생명과 자유를 향유할 권리가 거기에 포함된다〉고 확인했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서 '생명 또는 자유의 향유를 박탈하는' 모든 법률과 기타 명령은 무효〉라는 말과 같다─다시 말해서, 모든 형법은 예외 없이 무효라는 말인 것이다." "벤담이 생각하기에, 인민은 자신을 구속할 수 없다. 인민의 선량한 즐거움만이 오직 인민을 제어할 수 있고, 어떤 다른 고삐도 거기에 추가될 수 없으며, 어떤 다른 것에 의해서 무효화될 수도 없다. 벤담은 박애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획가였다. 그러나 그는 공화주의자도 민주주의자도 아니었다."(44-5, 52)


"벤담은 두 가지 점에서 비판의 초점을 모은다. 첫째, 인권선언의 언어가 잘못되었다. 사람들이 평등하고, 법은 시민들로부터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억압된 평등을 회복하고 위협받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인권선언문에서 서술문으로 표현된 내용은 명령문으로 적혔어야 한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평등'해야 하고', 법은 자유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적었어야 하는 것이다. 법에 대한 〈합리적 검열자〉와 무정부주의자의 차이, 균형자와 폭력을 행사하는 자의 차이가 이것이다. 합리적 검열자는 자기가 인정하지 않는 법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런 법의 폐지를 요구한다. 무정부주의자는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변덕을 법으로 세우면서, 인류 전체를 초대한다." "벤담이 보기에, 한 민족 전체가 숙고해서 고안했다고 자처하는 헌법은, 영국 헌정 같은 〈우연의 합성〉보다 덜 지혜롭고, 행복의 생산성도 낮다."(45-6)


"둘째, 인권선언은 네 가지 자연권의 존재를 인정한다: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억압에 대한 저항. 그런데 이 네 가지 자연권은 벤담의 민법철학에서 지목된 네 가지 목표와 부합하지 않는다. 자유?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자유를 자의적으로 정의하지 않는 한, 자유를 제약하지 않는 법, 따라서 이 불가양의 권리에 대한 위협이 아닌 법은 없다. 하지만 악을 행할 자유 역시 자유가 아니던가?" "재산? 재산은 법이 확정한다. 그러나 모든 세금과 모든 벌금은 재산권에 대한 공격이고, 따라서 저항과 봉기를 정당화한다. … 안전? 제약을 가하거나 처벌을 위협하는 법은 모두 안전에 대한 공격이다. 억압에 대한 저항권? 이 권리는 다른 권리들과 같은 근거에서 나오는 근본적인 권리가 아니다: 이것은 시민들이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여길 때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눈길을 돌리는 수단이다." "이 권리의 정의는 그 이론의 반역적이고 반사회적인 성격을 특히 정확하게 보여준다."(46-8)


"권리는 사회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서 생성된다. 그러므로 한 나라의 법률적 구성이 완성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의 인권선언문을 작성하는 것이 순서이다. 그때까지는 '자연법'이니 '자연권'이니 하는 문구들은 장광설의 구름 속에 자신의 무지를 감추는 교사들에게나 편리한 〈무의미한 전문용어〉에 불과하다. 〈진실하고 변하지 않는 유일한 원리는 '일반이익'이다. 공리가 지고지상의 목표로서, 법과 덕과 진리와 정의를 그 안에 포섭한다〉. 그것만이 하나의 객관적 과학으로서 도덕에 관한 지식의 기초가 될 수 있다. 〈공리의 원리 위에서 추론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고, 의견 차이가 오래 가는 경우가 확률상 드물다. 그들은 경험에 즉각 의거해서 확인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의 판단을 교정할 규칙이 쉽고 단순하고 오직 한 갈래의 진로만을 알려주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차이가 어디서 나오는지를 금세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논쟁을 매조지하는 굉장한 비결이다.〉"(54)


2장 / 경제적 문제


"〈모든 물건의 진정한 가격, 모든 물건이 그것을 취득하기 원하는 사람에게 진실로 드는 비용은 그것을 취득하는 데 따르는 땀과 고생〉이라고 애덤 스미스는 말했다." "윌리엄 고드윈은 애덤 스미스의 명제를 이어받아, 인간의 노동 이외에 어떤 다른 부(富)도 세상에서 인정하지 않고자 했다. 그는 부라는 잘못된 명칭으로 불리는 것은 다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동하게끔 강제하도록 일정한 개인들에게 사회의 제도가 부여해준 권력〉일 뿐이라고 봤다." "〈부의 소유가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가져오는 권력은 (중략) 구매의 권력, 그 시점에 시장에 있는 모든 노동 또는 노동의 모든 산물에 대한 일정한 장악력이다. 그의 재산이 많은지 적은지는 이 권력의 정도에 정확히 비례한다. 그것 덕분에 그가 구입할 수 있게 된 또는 장악할 수 있게 된,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양 또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산물의 양에 비례한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의 말이다. 고드윈도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112-4)


"그러나 애덤 스미스가 보기에, 부의 불평등을 보호하기 위해 시민적 정부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정부가 그러한 불평등의 원인은 아니다. 따라서, 부의 불평등 분배는 부의 생산 자체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자연적 현상이다. 반면에 고드윈은 자본주의와 토지재산에서 상속의 효과, 다시 말해서 하나의 적극적 제도, 정부가 만든 하나의 인공물의 효과를 봤다. 〈우리의 개인적 용도에 활용되어야 할 물건들과 관련해서, 또는 우리의 근면으로 얻은 생산물과 더더욱 관련해서, 재산 또는 영구적 지배권이라는 발상은 그것을 보장해주는 모종의 법 또는 관행이라는 발상을 불가피하게 시사한다. 이런 것이 없다면 재산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재산은 어떤 형태를 띠든지 제도의 직접 간섭에 의해서 지탱된다.〉 그러므로 애덤 스미스가 정의하듯,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에 따라 받는 상태만이 아니라, 공리의 원리에 부합하게, 모든 사람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받는 상태를 지향해야 한다."(115-6)


"고드윈은, 애덤 스미스가 단지 혼동된 방식으로만 지각했던 실제 사회에는 이익의 조화가 없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부가 불평등하게 분배된 사회 상태가 주어졌다면, 빈궁한 사람은 오직 부자가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지불할 때만 생계수단을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부자들이 자기네 부를 소비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쓸데없는 일들을 새로 발명할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은 혜택을 볼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모든 정교한 사치품, 수많은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경향이 있는 모든 발명은 행복의 확산에 정면으로 역행한다.〉 사치품이 하나 발명되었다는 것은, 일시적인 차원 이상으로는 임금이 늘어나지 않은 채, 사회의 최하위 계급에게 강요되는 노동의 양이 그만큼 증가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대다수 구성원들의 노동을 사거나 팔 권력을 사기 또는 무력으로써 찬탈한 자들은 '노동자들이 생계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관리하는 데 충분히 이골이 나 있다.〉"(119-20)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일단 토지가 점유되고 자본이 축적되고 나면, 노동자는 더 이상 자기 노동의 생산물을 전부 누리지 못한다. 그의 임금은 그 자신과 고용주 사이에서 맺어진 흥정의 결과로 정해진다. 이 흥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주인이 유리하다. 고용주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한계에 의해 제지될 때까지 임금을 낮춘다." "이제 부자가 빈자의 생계를 허락하는 것은 일과 교환한 대가다. 똑같은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교환이 이뤄지는 조건들이 교환을 불공정하게 만들고, 이익의 일치를 훼손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 애덤 스미스가 단지 희미하게만 감지했던 이 사실을 최초로 드러낸 사람 중 한 명이 고드윈이었다." "이처럼 개인재산 제도 위에 세워진 실제 사회에서는,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사이에 이익의 조화가 아니라 갈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는 손상되지 않는다. 개인재산 자체가 현실 속의 정부 제도에 근거하며, 인위적 문명의 상태에 근거하기 때문이다."(121-3)


"문명화된 동시에 평등주의적인 사회, 아무도 다른 사람의 노동의 산물을 소유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노동의 산물도 소유하지 않는 사회, 다만 각자가 공동 노동의 산물을 자신의 필요에 비례해서 향유할 뿐인 사회, 추구해야 할 목표는 그런 사회다.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려면 어떤 길로 가야 하는가?" "(결정적으로) 일어나야 할 변화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성향이 바뀌어, 자기가 소유할 때보다 이웃 사람이 소유했을 때 더 큰 공리를 생산할 것을 자발적으로 내놓게 되는 변화다: 이런 성향이 풍미하게 될 시대는 아직 머나먼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성향이 팽배한 사회가 이치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리고 만사의 자연적 진보로 말미암아 인간의 지성도 항상 더 강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시대가 올 것이다. 고드윈은 이익의 조화를 위한 새로운 조건을 제시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이기적이기를 멈추고 분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정신이 반드시 이 최종적 상태를 지향한다고 여겼다."(123-5)


"1786년, 벤담과도 알았던 조지프 타운센드라는 경제학자가 〈인구의 원리〉라고 일컬을 수 있는 입장에 근거해서 구빈법의 문제를 다룬 한 편의 〈논문〉을 제출한다. 타운센드는 살기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하고, 근로의 의무를 부과하는 모든 법률적 질서는 굶주림이라는 자연의 제재에 비해 약하고 실효성이 없다는 원칙을 바탕에 깔면서 출발한다. 가난한 사람들, 다시 말해, 미래를 대비할 줄 모르고, 사회적 기능 가운데 가장 〈굴욕적이고 더럽고 비천한〉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다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 이로써 〈인간 행복의 재고량〉이 최종적인 회계에서 증가한다. 굶주림, 빵을 얻으려는 욕망은 가장 힘든 일도 받아들일 수 있고 부드럽게 만든다. 반면에, 구빈법은 〈세상의 본질과 구성 자체에 의해 실현될 수 없는 것을 달성하겠다고 나서는 셈으로, 어불성설과 접경지대에서 걸치는 원칙들에서 추진된다〉. 〈사회가 진보하는 와중에서〉, 누군가는 궁핍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144-5)


1797년 2월, 벤담은 피트를 상대로 「구빈법안에 관한 관찰」을 작성했는데, 여기서 그의 태도가 호기심을 자아낸다. 그 법안을 비난하는 데는 그것이 하나의 평등주의적인 조치임을 증명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평등화 체제가 임금에 적용되었을 때 근면과 그리고 이어서 재산에 (비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더라도) 위협을 가하는 정도는 그것이 재산에 적용될 때 재산과 그리고 이어서 근면에 위협을 가하게 될 정도에 비해 결코 덜하지 않다〉. 하나의 표준임금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확립하려는 모든 시도를 그는 비난했고, 특히 피트의 법안에서 〈능력 부족 조항 또는 보조임금 조항〉이라 명명한 대목을 비난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잘못이 아니라 단지 불운일 뿐인 어떤 약점 때문에 이웃들보다 더 열악한 상태로 그를 내버려두기는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벤담이 보기에, 이런 감상주의는 모든 종류의 엄밀한 법과 어울릴 수 없다."(152-4)


"구빈법의 취지를 옹호하던 맬서스가 〈맬서스주의〉로 개종하게 된 것은 1797년 고드윈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었다." "콩도르세는 물었다: 〈(인간 근면 진보의 법칙과 인구 진보의 법칙) 이 두 가지 대등하게 필연적인 법칙들이 서로 모순을 일으킬 단계, (중략) 사람 수 증가가 생계수단의 증가를 능가하는 단계가 틀림없이 오지 않을까?〉 물론 고드윈과 콩도르세에 따르면, 인구와 인간 번영에서 그와 같은 퇴보는 지극히 머나먼 일이었다. 그러나 맬서스는 이렇게 말한다─모든 사람에게는 생계가 필요하다. 그런데 생계수단의 분배에서 현재와 같은 불평등을 치유할 권력이 사회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생계의 권리가 있고, 따라서 동료로부터 도움받을 권리가 있다─모든 사람에게는 생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자연은 계속 수가 증가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에 충분한 양의 생계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계의 권리는 착각 속의 권리이며, 만사의 본질 안에 근거하지 않는다."(157-9)


"인간의 산업이 진보해서 풍요가 일단 실현되었다고 하면, 재산이라는 제도와 교환이라는 현상이 사라짐과 동시에 이기주의가 쓸데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분업에 기초한 이익조화의 이론은 바로 이와 같은 재산, 교환, 이기주의 등의 개념들을 함축한다. 맬서스는 이익 융합의 원리를 거부했다. 선의의 감성은 이기주의로부터 점진적 진화에 의해 파생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기주의 대신에 선의로 사회의 작동 원리를 바꾸게 되면, 오늘날 단지 소수만이 느끼는 결핍의 아품을 전체 사회가 느끼도록 만드는 결과밖에 없을 것이다. 맬서스에 따르면, 문명사회를 야만사회와 구분해주는 모든 것은 확립된 재산 체제 덕분이고, 편협한 것처럼 보이는 겉보기에도 불구하고, 이기주의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 맬서스는 애덤 스미스의 전통을 충실하게 물려받은 수탁인으로 보인다." "이 신조를 적용한다는 것은 곧 도움받을 권리를 규탄하는 것이고, 그 권리를 인정해주는 구빈법을 규탄하는 것이다."(162-3)


"맬서스는 국가에게 교육의 기능이 맡겨지기를 바랐다. 애덤 스미스가 그랬듯이, 가난한 집의 아동들이 초등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교구 학교를 운영하는 체제를 그는 옹호했다. 기존의 소규모 〈자선학교〉와는 달리, 이런 학교에서는 더욱 실천적인 성격의 교육이 이뤄져야 하고, 기하학과 역학의 요지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애덤 스미스는 이미 요구한 바 있었다. 맬서스는 이보다 나아가, 정치경제학을 인민에게 실천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맬서스는 기존의 움직임에 공리주의적 공식을 마련해줬다. 교회개혁파들은 모든 사람이 신 앞에서 평등하기 때문에 성경에 관해, 신의 법에 관해, 그리고 도덕의 법칙에 관해, 지식을 가능한 한 평등하게 공유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주장했다. 맬서스는 자연이 그들의 처분에 맡긴 쾌락의 양의 증가에 맞춰 자기네 필요의 증가를 어떻게 규율해야 할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인간 종의 발전과 증가를 결정하는 물리적 법칙을 아는 것이 '유용'하다고 주장했다."(168-9)


"이제 우리는 맬서스의 지적 태도를 정의할 수 있다. 자신의 신조로부터 그려지는 인간 삶의 모습은 〈암울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수동적 복종의 정치이론이나 악에 대해 체념하는 도덕이론이 거기서 도출되어야 한다거나, 또는 인생이라는 것이 〈더 높은 행복의 상태를 준비하기 위한 시련의 상태이자 덕의 수련장〉이라는 결론이 내려져야 한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신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잘되기를 원한다. 육체적 필요는 정신을 발동시켜 진보의 역량을 일깨울 목적을 가진다. 인구가 식량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게끔 예정된 것은, 지구 전체를 경작지로 만들도록 인간을 제약하기 위해, 이런 종류의 자극제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인구와 식량의 증가 법칙이 같았다면, 인간은 결코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맬서스는 속죄라고 하는 초자연적 이념에 반해서 진보라는 인간적 이념의 편에 섰다. 실제로 그는 자유주의자이자 휘그파였고, 언제나 자유주의자이자 휘그파로 남았다."(169-70)


3장 / 벤담, 제임스 밀, 벤담주의자


"제임스 밀과 알게 된 1808년에 벤담은 예순 살이었다. 그렇지만, 괴이하게도, 영국의 공중에게 법과학의 이론가로서 그리고 개혁가로서 그의 면모는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로는, 『파놉티콘』을 쓴 사람이라는 점 말고는 거의 없었다. 그는 〈한 가지 구상의 제창자〉 가운데 한 명쯤으로 치부되었을 뿐인데, 그런 사람은 당시 영국에 무척 많았다. 농업 공산주의를 설파한 스펜스, 보통선거권을 옹호한 카트라이트, 사각형 모양의 마을 구조를 통해서 인간의 도덕적 갱생을 제창한 로버트 오웬 등등이 있었다. 또는, 벤담은 어떤 보편적 해결책을 제창하지 않았으므로,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감옥 개혁가 하워드라든지, 노예제에 반대했던 윌버포스와 같은 유형의 박애주의자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1808년으로 접어들 무렵, 벤담은 자신의 박애주의 운동을 실패한 것으로 여겼다. 실망으로 끝난 박애주의는 그의 마음 안에서 인간에 대한 일반적 불신으로 탈바꿈했다."(188-9)


"제임스 밀은 여러 해 전부터 휘그당원이었고, 아마 휘그당원 중에서도 진보파였을 것이다. 그는 무한한 완성 가능성의 이론을 지지했다. 그는 가톨릭 해방을 요구한 점에서 《에든버러 평론》의 출판인들과 뜻이 같았다. 의견과 언론의 자유는 그가 가장 열렬히 옹호한 대의명분이었다. 그런데 벤담은 제임스 밀과 만나게 된 때부터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특히 언론의 자유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임스 밀은 휘그 자유주의의 전통적 명제로 가까이 간다. 그보다 앞서 프리스틀리가 그랬던 것처럼, 제임스 밀은 정부의 통제가 필요하다고 일단 전제하면 정부 자체도 하나의 조직된 통제에 복속하는 것이 순서라고 요구하기 위해,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를 기초로 삼았다. 하지만 제임스 밀은 아직 무척이나 소심했다! 그는 미국에게 하나의 민주적 헌법을 부여할 태세는 되어 있었지만, 애당초 그 헌법의 '형태를 갖추는' 임무를 인민에게 맡길 만큼 신임하지는 않았다."(198-9, 203)


"벤담은 오랫동안 민주주의 이념에 무관심했거나 심지어 적대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환경의 영향 아래, 벤담의 내면에서 민주주의 이념은 끊임없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벤담은 카트라이트와 같은 신조를 자신도 제창하도록 모르는 사이에 이끌려왔음을 깨달았다. 단체의 혼은 정의상으로 일반적 공리의 원리에 적대적이고, 정치적 귀족계급은 하나의 폐쇄적인 단체였다. 이 귀족계급이 자신의 박애주의적 기획을 향해 보여준 무관심 때문에 벤담은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다시 말해, 민주주의 운동의 다름 아닌 중심지에서 살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제임스 밀을 만났고, 밀을 통해서 프랜시스 버데트 경과 플레이스와 카트라이트를 만났다." "그러나 벤담이 한 명의 급진파로 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로 말미암아 급진당의 성격 자체가 변하게 된다. 1814년에 급진적 개혁가였던 브롬은 1818년에 버데트에 의해서 대변되고 있던 벤담과 결별한다."(215-6)


"기성 정부들을 폭력 혁명을 통해 전복하자는 요구는 이제 논외였다. 머지않아 벤담은 코베트나 헌트 같은 선동가와도 말다툼을 벌인다. 지성이 자연스럽게 진보하면 모든 정부가 쓸모를 잃고 폐지되는 날이 오리라는 고드윈과 같은 사람의 동경도 논외였다. 벤담과 밀은 정책적 사안에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가 아니라 인위적 일치 원리를 적용했다. 보통선거 제도를 통해서 그들은 일반이익, 즉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이익의 조화가 입법부에서 채택되는 결정으로부터 틀림없이 귀결될 그런 조건 아래 대의적인 정권을 조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런 식으로 해석된 대의제 정권의 급진적 이론은, 궁극적으로, 전통적인 영국 자유주의의 명제와 동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 당파는 유토피아적이고 혁명적인 성격을 상실하는 경향, 그리고 부르주아 소신가들의 당파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당파는 15년이 지나면, 〈급진적 지식인들〉의 당파 또는 〈철학적 급진파〉로 불리게 된다."(216-7)


"리카도와 애덤 스미스는 〈정치경제학〉이라는 표현을 같은 의미로 이해하지 않았다. 애덤 스미스에게 정치경제학은 산업계와 상업계의 현상에 관련된 일정 개수의 관찰들의 실천적 응용의 총합을 의미했다. 이러한 의미로 이해된 정치경제학의 구성에서 '예비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그리고 오로지 예비적인 부분에 불과한, 이론적인 부분에서는, 연역추론이 귀납과 뒤섞이는데 각각의 비율은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흄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애덤 스미스는 한 명의 관찰자로서 그리고 한 명의 역사가로서 진행하기를 원했던 것이 확실하다. 애덤 스미스에게는 예비적이었던 것이 리카도에게는 정치경제학의 핵심이 된다. 이제, 정치경제학은 실천에서 유리된, 나중에 어떤 실천적 결과를 빚게 되든지 상관없이, 하나의 이론이다." "리카도에 따르면, 정치경제학의 목적은 '법칙들'이다. 애덤 스미스에게는 정치와 입법의 한 분과였던 정치경제학이 리카도에게는 부의 자연적 분배 법칙의 이론이 된 것이다."(222)


"리카도의 정치경제학의 체계적이고 연역적인 성격은, 벤담과 제임스 밀의 매개를 통해 소개된, 프랑스로부터 받은 영향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벤담에 관해서는, 이 여부는 매우 불확실하다. 세와 리카도가 의도했듯이, 벤담도 애덤 스미스의 〈뒤범벅〉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던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러시아의 정치인 스페란스키가 벤담의 『정치경제학 교본』의 원고를 1804년에 뒤몽으로부터 받아보고 칭찬한 표현들은 한 마디도 바꿀 필요 없이 그대로 세의 책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시야의 범위, 분류의 명료함과 정밀함, 그리고 편제의 체계적 성격〉을 그는 칭송했다." "그러나 벤담이 정치경제학을 체계화하기 위해 채택한 관점은 세와 리카도의 관점과는 정면에서 상반된다. 벤담에게 공리의 원리는 언제나 본질적으로 하나의 격언, 의무체계의 기초였다. 일반적 공리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의 일치를 확보'해야 한다'. 이것이 입법자의 기예고, 정치경제학은 그 한 분과다."(230)


# 리카도식 정치경제학의 법칙적 성격은 진보의 철학을 설파한 (콩도르세의) 계몽 철학의 영향 아래 있다. 그렇기에 이 법칙들은 정태적인 균형의 법칙만이 아니라, 동태적인 진화와 진보의 법칙이기도 하다.


"1818년의 「교육」이라는 기사에서 제임스 밀은, 인간 본성의 유용한 자질들 중에 교육의 힘이 미치는 범위 안에 속하는 것이 어느 정도고, 속하지 않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라고 썼다. 엘베시우스에 따르면, 불완전하고 명백히 평균 이하로 태어난 상대적으로 제한된 수의 개인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탁월해질 수 있을 만큼 대등하게 민감하다고 간주할 수 있고, 그들의 불평등을 치유할 수 있는 원인도 찾아낼 수 있다. 이런 의견을 가진 것은 확실히 엘베시우스뿐이었다." "엘베시우스의 이론을 최초로 실험을 통해 검증하려고 제임스 밀은 자신의 맏아들 존 스튜어트를 실험대상으로 삼았다." "스튜어트 밀이 교육을 마친 다음에야 벤담의 작품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아버지는 스튜어트 밀을 엘베시우스와 벤담의 신조에 부합하는 전형적인 사상가이자 시민이자 인간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더욱 힘든 길을 따라, 온 힘을 쏟았다."(253-6)


"그러나 벤담의 제자이자, 말하자면, 자기 주군에게 봉사하는 수상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했던, 제임스 밀은 개인적 교육이라는 고립된 경험에 자신의 노력을 국한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교육의 보편화가 그 자체로 선이라는 점이었다." "《에든버러 평론》에 기고한 글에서 제임스 밀은, 고향에 대한 스코틀랜드인의 긍지를 담아, 인민 교육이라는 발상이 스코틀랜드에서 나왔음을 되새긴다. 인민에 대한 강습이 공공 서비스여야 하느냐는 질문에 관해, 그는 가급적 정부의 간섭을 멀리하는 것이 애덤 스미스의 원칙에 부합할 것이며 경험에서 오는 교훈과도 어울린다고 인정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인민이 극도로 무식하고 강습을 받기 위해 비용을 지불할 수 없도록 가난한 현실에서는, 국가가 개입해서 이 사업에 추동력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위임받은 권력을 국가가 남용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일종의 지성적 독재체제를 세우지 못하도록 방지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보장책, 곧 언론의 자유만으로 족하다."(259, 268-9)


"철학적 급진주의라는 것이 진실로 1832년경에 있었다면, 이와 같은 집단적 교조주의가 형성된 데에는 의문의 여지없이 일반적인 근거들이 있다. 정치와 경제와 사법의 질서에서 일정한 개혁들이 필요하다는 요구는 18세기 말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1815년에는 여론의 상당한 일부가 모두 비슷한 강도로 개혁을 부르짖었고, 그런 세력은 날마다 커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지적인 존재인 인간이 이 모든 개별적인 요구들을 하나의 단일한 원리 안에 체계화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는 것은, 이때부터 필연적이었다. 그런 원리가 공리의 원리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거의 필연이었다. 왜냐하면, 그 원리가 영국적 지성의 근거였으며, 보수주의자든 민주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세습적 사유재산을 지지하는 자든, 자유거래의 산봉자든 보호주의자든, 영국의 사상가라면 모두 본능적으로 그 원리로 돌아가 준거를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보면, 벤담이 그 운동의 우두머리로 선택된 것이다."(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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