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사 - 적응과 변화의 긴 여정, 1700~1922 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1
도널드 쿼터트 지음, 이은정 옮김 / 사계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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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오스만 제국사를 공부하는가?


"오스만 제국은, 우연히 근대에 세계를 지배하게 된 여러 서유럽 국가들에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자리 잡았던 까닭에 긴 세월 동안 유럽의 군사·정치·이데올로기적 팽창의 직접적인 예봉에 맞서게 되었다. 이러한 근접성은 오스만 측과 유럽 모두의 정체성 형성에서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 양측의 근접성은 거부와 끌림의 과정을 거치면서 복합적인 정체성 형성을 구축했다. 오스만 제국은 초창기부터 이후에 유럽이 된 지역의 일상생활, 종교, 정치와 서로 얽혀 있었다. 대개의 경우, 이처럼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거리에 반비례한다. 어쨌든 한 인간은 자신을 특별하고 독특한 성격을 가진 뚜렷하고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할 때, 자기 자신은 무엇이고, 마찬가지로 무엇이 아닌지 정의하는 데 자주 '타자(他者)'를 잣대로 이용한다. 비잔티움, 발칸, 동부와 서부 유럽들을 상대하면서, 오스만인들은 간혹 (어쩌면 힌두교도를 적으로 대했던 무굴인들처럼) 이슬람교를 수호하는 무슬림 전사들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다."(30-2)


"오스만인들은 유럽인의 상상의 방앗간에 수많은 곡식을 제공했다. 종교 개혁기와 17세기 프랑스의 공상문학에서 적그리스도와 강적의 이미지는 오스만 왕조의 군사적 위축기를 거치면서 보다 단순한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우리는 18세기의 예니체리 음악과 튀르크 풍을, 그 다음에는 어디에나 있는 동방의 카펫과 영화관에 따라붙어 있는 19세기의 이국풍과 에로티시즘을 볼 수 있다. 비록 오스만 제국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유럽과 그 연장선상에 있는 문화 세계에서는 그 문화적 유산들이 남아 있다. 말기의 오스만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가 세계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고 점유했던 서유럽 제국주의의 절정기를 버텨냈다. 19세기 말에는 유럽 대륙의 바깥에 겨우 한 줌밖에 안 되는 독립국가만 있었을 뿐이다. 중국, 일본과 함께 오스만 제국은 그나마 힘을 가지고 살아남은 대단히 중요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이다. 독립국가로서 그들은, 유럽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던 식민화된 여러 민족에게 희망의 원천이 되었다."(37-8)


2 오스만 제국의 기원에서 1683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13세기에서 14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즈음해 소아시아라고도 불리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북쪽 귀퉁이에서 태동했다. 15세기 중엽까지 아나톨리아 반도의 비잔티움 제국과 비잔티움 봉건 영주들 치하의 정주민들의 삶은, 홍수처럼 밀려와 나름대로 작은 국가를 형성한 튀르크인 유목민들 사이에 놓여 있는 '섬'에 비유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튀르크멘 소공국들이 흥기했다 사라졌고, 비잔티움의 통제력에도 기복이 있었다. 아나톨리아는 확장과 축소를 거듭하는 작은 튀르크멘 또는 비잔티움 공국들과 소국들로 이루어진 조각 이불이 되었다. 간혹 비잔티움의 저항은 제국적 수준이든 봉건 영주의 수준이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비잔티움의 기독교 영토에서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한 아나톨리아는 불가피하게 장기적으로 거대한 변화를 겪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무슬림 지역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과 혼돈의 분위기는 오스만 국가의 출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44-5)


# 오스만 제국 탄생의 배경

1. 소아시아에서 비잔티움 중앙 정부의 통치를 무너뜨린 튀르크 유목민들의 침입

2. 변방에 혼란과 인구압을 가져온 몽골의 중동 침입

3. 종교와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다수의 지지자를 모았던 실용적이고 유연한 정책들

4. 유목민들의 발칸 반도 접근을 통제하여 더 많은 지지자들을 모을 수 있었던 지리적 위치


"오스만 1세는 그 이름을 딴 오스만 왕조의 개창자이지만, 변방에 있는 여러 튀르크멘 집단 가운데 한 지도자였을 뿐 가장 세력 있는 인물은 확실히 아니었다." "1300년 당시 그런 튀르크멘 공국들은 수십 개에 달했으며, 이 모든 것은 튀르크멘 유목민들이 아나톨리아의 해안선을 압박하여 마침내 평야지대를 점령했던, 보다 광범위한 과정의 일부였다.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오스만 왕조가 승리를 거두었고, 나머지는 이내 사라졌다." "국가 형성에 성공한 것은, 물론 오스만인들의 특별한 유연성, 즉 변화하는 조건에 실용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능력과 준비를 갖췄기 때문이다. 이 떠오르는 왕조는, 부계에 따른 혈통의 기원은 튀르크계였고, 기독교도와 무슬림, 튀르크어와 그리스어 사용자들이 상당히 뒤섞인 지역에서 태동했다. 무슬림과 기독교인들 모두 아나톨리아와 그 너머에서부터 오스만의 깃발 아래로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적인 이익(은 물론이고 지위와 권력)을 얻으려고 모여들었다."(46-7)


"1300년경에서 1683년 사이에 오스만 국가는 형태와 행정 기구 안에서의 권력 집중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급격한 진화를 겪었다. 이 기간의 앞부분인 1300년에서 1453년 사이에 엘리트는 변방의 영주(베이[bey])들, 튀르크멘 지도자들, 왕자들이었고, 이러한 지도자들은 오스만 군주를 동등한 권력자들 가운데 제일인자(primus inter pares)로 받아들였다. 자신의 수행원, 군대 그리고 술탄에게서 독립적인 지지자들을 이끌고 오스만 국가에 봉직하게 된 이 엘리트들은 오스만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더 많은 권력과 부를 얻었기 때문에 오스만 국가를 따랐다. 술탄은 이처럼 거의 동등한 엘리트들에게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그들과 협상을 했다." "14세기 초부터, 술탄은 그저 거의 동등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튀르크멘 지배자라기보다는 이론적으로 절대적 군주라는 논리가 진화하고 있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엄청난 권위를 갖게 된 술탄 메흐메드 2세는 군주의 절대적 권력의 논리를 법제화했다."(67-8)


"메흐메드 2세(재위 1451~1481)와 쉴레이만 대제(재위 1520~1566)의 재위 기간 사이의 1세기 중 어느 시점에선가 아마도 관료들과 신민들 사이에 '오스만 제국'에 대한 의식이 널리 퍼져나갔던 듯싶다." "가장 기본적으로, 강역 내의 사람들은 적들로부터 술탄의 보호를 받았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공격을 받았다. 나아가 오스만 국가 내에 존재한다는 의식은 부분적으로 술탄이 신민들의 충성을 강화하려 한 무수한 행위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또 다른 차원에서, 세금의 정규화와 오스만 관료들이 지방을 자주 방문했다는 사실 또한 신민들이 같은 세계에 속한다는 의식을 강화시켰다. 더욱이 메흐메드 2세와 쉴레이만은 신민들의 행동에 대한 술탄의 기준과 규법을 규정한 법전을 반포했다. 그리하여 공통된 법 체제, 세금 그리고 모든 신민에게 안전을 제공하는 공통의 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공통된 '오스만' 국가 정책에 동참한다는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68-9)


"일반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창건자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 거의 단절 없이 이어져온 전사 군주는 술탄 쉴레이만 대제의 재위 기간에서 끝났다. 이 시기의 성숙한 제국에서는 정복전이 차츰 주춤해짐에 따라, 이제는 전쟁하는 술탄이 아니라 정권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술탄이 필요했다." "이제 술탄들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군주로서 관료적 명령을 정당화해주되 자신은 정책을 입안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7세기 절반의 기간(1656~1691) 동안 유명한 쾨프륄리 가문이 사실상 국정을 좌우했고 가끔 대재상(vezir, 재상 또는 장관을 의미)으로 봉직했다." "새로운 집단지도 체제, 즉 민간인들의 과두제가 등장하고 옛 관례들이 새로운 관례들로 대체되었지만, 술탄들은 표면적으로 연속성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중앙 정부는 실제로 통치권을 여전히 갖고 있었지만 군주가 아닌 사람들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이는 서유럽과 중유럽에서 군주들이 권력을 다지고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 상황이었다."(69-71)


3 1683년에서 1789년까지의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이 과거보다 훨씬 더 불운했던 이 시기의 특징은 군사적 패배와 영토 축소였다. 18세기 오스만의 패배와 영토 상실은 매우 심각한 사건이었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들 사이에 경쟁이 없었다면 더욱 심각해졌을 껏이다. 유럽 외교관들이 전후 협상에서 경쟁자들이 너무 많은 이권을 차지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수차례에 걸쳐 오스만의 편을 들어 개입함으로써 패배한 오스만인들이 잃어버릴 뻔했던 영토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쐐기를 마련해주었다." "패전의 시기는 1683년 빈에서 시작하여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침공과 함께 끝났다. 1683년 빈 포위의 실패로 오스만군은 패배하여 도망쳐야 했으며, 잇달아 이스탄불 정권에 끔찍한 재난을 안겨준 사건들이 일어났다." "1798년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침공으로 오스만 제국은 나일 강 유역의 요지이자 부유한 이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잃게 되었고 결국 무함마드 알리 파샤와 그의 후손들 치하에서 별도의 국가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74-9)


"18세기가 지나는 동안 술탄은 대개의 경우 상징적인 권력만을 가지고 있었고, 정치 부문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제안한 변화 또는 행동들을 추인하기만 했다." "술탄들이 국내의 정치적 우위를 둘러싼 싸움에서 패배함에 따라 그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도구와 기술들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8세기 초부터 중앙 정부는 그 자체의 정통성을 고양하고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성지 메카와 메디나로 가는 순례로를 재정비했다. 이른바 튤립의 시대(1718~1730) 동안의 변화는 술탄들이 정통성을 보강하기 위해 사용했던 세련된 방법들을 더욱 확실하게 설명해준다." "루이 14세의 궁정처럼 당시 튤립 시대의 오스만 조정은 엄청난 소비의 현장이었다. 술탄 아흐메드와 대재상 이브라힘 파샤는 이스탄불 엘리트들을 소비면에서 선도하느라 애썼고, 모방 대상으로서의 그들 자신의 입지를 사교 생활의 중심에 확립했다. 이는 그들의 정치적 지위와 정통성을 높이려는 의도였다."(82-4)


"중앙의 이스탄불과 기타 오스만 도시들에서는 엘리트 내부의 정치적 우위를 위한 경쟁뿐만 아니라 엘리트와 민중 사이의 투쟁도 있었다. 이 투쟁에서 그 유명한 예니체리 군단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8세기에 이르러 예니체리의 무기와 훈련은 너무도 급격하게 퇴조하여 크림 타타르와 기타 지방 군사력이 그들을 대신하여 군의 전투에 중심이 되었다. 한때 화약무기로 무장한 엘리트 보병이었던 이들의 상징인 기율과 엄격한 훈련이 1700년경에 이르러 사라졌고, 이리하여 예니체리 군단은 외적의 공포의 대상에서 술탄의 공포의 대상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엘리트적이면서도 민중적인─민중 계층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엘리트에 연결되는─예니체리의 정체성은 그들에게 국내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다. 그들은 반복해서 술탄을 즉위시키고 또 폐위시켰으며, 대재상과 기타 관료들을 임명하고 해직시켰는데, 이는 엘리트 내부의 투쟁으로 일어난 사건이기도 했지만 가끔 민중을 대변하기도 했다."(85-7)


# 데브시르메 :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의 기독교인 마을들과 보스니아의 무슬림 집단에서 소년들을 선발하여 예니체리의 일원으로 키우는 어린이 공납제도


"중앙에서의 정치 권력의 중심 이동─술탄에서 술탄의 가문으로, 다시 베지르와 파샤 가문들로, 다시 또 거리로─은 지방 정치의 중요한 변동과 궤를 같이했다. 전체적으로 17~18세기에는 지방정치 권력이 중앙의 통제에서 보다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듯이 보였다." "지방 명사들은 그들이 중앙의 임명에서부터 유래했든, 오스만 이전 시대의 엘리트 출신이든, 맘루크 출신이든 일반적으로 지역 내의 상인과 지주들뿐만 아니라 종교학자 집단인 울레마와 밀접한 유대관계를 유지했다." "그렇지만 지방 명사 가문의 권위 확립은 대개 오스만 중앙 권위에 대한 반란이 아니었다(아라비아의 와하비 운동은 달랐다)." "지방 명사들은 나름대로 중앙 정부와 술탄이 정치 권력과 공무상의 조세 수입원에 대한 공식 승인을 해줌으로써 명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리 확보 경쟁을 중재해주기를 기대했다. 이들은 '지방의 오스만인'들이었고,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오스만 체제의 일부가 되고자 했으며, 그 체제의 일부였다."(87-90, 93)


4 19세기


"제국 내에서는 많은 지방 명사들이 18세기에 등장하여 오스만 왕조와 국가의 기본적인 정통성을 인정하면서도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했다. 반란자들은 오스만 제국을 파괴하거나 분리 독립하려고 시도한 적이 거의 없었다. 반란이 있었지만 그것은 대개 체제 안에서 움직였으며, 반란의 목표는 세금 면제나 정의의 보장 등으로, 오스만 세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서부터 특정 지역을 분리시켜, 독립적이고 그 어떠한 상위의 정치적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주권국가를 세우려는 적극적인 움직임들이 발칸 반도, 아나톨리아, 아랍 지역에서 모두 나타났다. 더욱이 거의 모든 경우에 열강 가운데 어느 한 세력이 19세기의 반란을 지원했으며, 그 열강의 도움은 실제로 반란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19세기의 반란은 오스만 신민들의 통치자에 대한 반란이었으며, 많은 영토 상실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이전과 다르다고 할 것이다."(99)


# 오스만 제국의 주요한 영토 상실

1. 무함마드 알리의 이집트 장악(1805)과 독립 시도(1832~1838, 유럽 연합군의 저지로 실패)

2. 세르비아인의 반란(1804)과 이에 따른 세르비아인 군주의 세습 통치 승인(1817)

3. 그리스 독립전쟁(1821~1830)을 영국·프랑스·러시아 연합군이 승인하면서 그리스 독립 쟁취

4. 오스만-러시아 전쟁(1877~1878) 이후 맺어진 베를린 조약의 결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공식적으로) 독립,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로 편입

5.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늘날의 이라크·이스라엘·팔레스타인·요르단 지역은 영국으로, 시리아·레바논 지역은 프랑스로 편입,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탄생(1932)


"예전의 관점에서는, 민족주의─독자성, 우월감 그리고 독립을 주장하는 감정들─는 국가보다 우선했으며 마침내 국가를 탄생시켰다. 각 개인들은 자신들이 경제적·정치적·문화적 권리를 빼앗겼고, 여전히 빼앗기고 있는 억압된 민족의 일원이라고 느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스만의 지배에서부터 독립한 국가의 권리를 요구했다. 근래의 학설에서는, 국가가 먼저 존재했고 민족주의는 그 뒤에 나타났다고 한다. 즉, 새로운 국가가 그 자체를 보존하기 위해 국경 안에서 민족적 정체성 형성을 지원하고 창조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분리 직전의 발칸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쇠퇴한 것이 아니라 번영했다. 그러나 그 후의 신생국가들이 무모한 토지 재분배 계획 같은, 정치적으로는 인기있지만 경제적으로는 파괴적인 정책들을 펼치면서 결과적으로 독립 후의 경제가 독립 전보다 악화되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우리는 경제적 쇠퇴로는 분리주의 운동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121-2)


5 오스만인들과 그 주변 세계


"일반적으로 18세기까지는 그 어떤 국가도 오스만 제국과 동등하게 교섭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606년 시트바 토록 조약에서 술탄이 여느 때와는 달리 합스부르크 군주를 동등한 자격으로 대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으로 오스만 국가는 주위에 동등한 국가가 없다고 보았고, 이런 체제는 한 세기가 더 지날 때까지 사실상 바뀌지 않았다. 이처럼 '전근대적' 외교에서 국가들 간의 전쟁이라는 조건은 구체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선언한 경우가 아니면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평화라고 인정한 조건은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전쟁의 중지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술탄은 경고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전쟁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스만 세계에서는 이러한 영구적인 전쟁의 관념은, '전쟁의 영역'과 '이슬람의 영역'이라는 분할에 따라 이론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이와 똑같은 영구적인 전쟁 개념은 중국이나 유럽에서도 지배적이었고 그곳에서는 법적인 정당화가 다르게 받아들여졌다."(130)


"이른바 카피툴레이션이라는 것도 오스만 제국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는 술탄의 영토에서 얼마 동안을 살든 거류 외국인들의 대우에 관한 규정이었다. 자국에 외부인들이 향유하기에는 너무나 격조 높은 독특한 법이 있다는 생각에 따른 카피툴레이션의 관념은 오스만 측의 개념일 뿐 아니라 세계의 다른 지역, 예를 들어 중국에서도 지배적이었다. 그러므로 오직 오스만 신민들만이 오스만 법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오스만] 군주는 카피툴레이션을 외국인에게 일방적이고 비상호적인 방식으로 하사했다." "카피툴레이션은 제국 내의 외국인들을 법적으로 보호했다. 카피툴레이션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오스만 제국의 세금과 관세에서 완전히 면제를 받았다. 당연히 카피툴레이션은 인기가 높아, 프랑수아 1세 이후 다른 군주들이 요청해올 정도였다. 카피툴레이션은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힘이 강했을 때는 전혀 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 후에는 오스만 주권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131-2)


# 카피툴레이션capitulation : 오스만 제국이 유럽 국가들과 체결한 시혜적인 통상조약으로, 유럽 세력이 커진 18세기 말 이후에는 그 성격이 불평등 조약으로 변모했다. 


"국제관계와 외교 수행을 규정하는 또 다른 형태가 르네상스 말에 등장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당시 서유럽과 중유럽으로, 그 후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근대적'이라고 불린 이 양식은 국제관계와 외교 방식이 지속적이고 상호적이며, 호혜·치외법권·주권 평등 등의 개념에 입각한 것이었다. 약하든 강하든 각각의 국가는 국제관계에서 만날 때는 서로가 서로에게 동등했다. 오스만 군사력이 약화되면서 이러한 개념들의 채택이 점차 늘어났고, 외교는 오스만 제국의 생존을 위한 무기창고에서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술탄 마흐무드 2세(재위 1808~1839)는 외무부를 공식적으로 설치했고, 1834년 외국으로 영구적인 사절단을 보내기 위한 외교 기구를 승인했다. 이 시기는 아주 절묘했으니, 이스탄불이 1829년 러시아인들의 점령과 1833년 무함마드 알리 파샤 군대의 점령을 겨우 피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에서 군대는 국가를 구하는 데 실패했고, 이제 국가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외교뿐이었다."(132-5)


"오스만인들은 외교를 수행할 때 칼리프 위(位)라는 독특한 도구를 갖고 있었다. 칼리프 위는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7세기에 새로운 이슬람 국가에서 정치 지도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000년에서 1258년 사이, 누가 정치적 실권을 가졌는지에 상관없이 칼리프는 매우 권위 있지만 주로 상징적인 인물로서 무슬림 공동체를 통합하는 역할을 했다. 오스만 시대에 술탄들이 칼리프 칭호를 간혹 사용했지만, 이 칭호는 실제로 그 어떤 중요성도 띠지 않았다." "19세기에 이르러 인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의 수많은 무슬림들이 영국, 러시아, 프랑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 술탄은 그들에게, 그리고 그 자신의 신민들에게 칼리프로서 호소했으며 저항과 충성을 위한 구심점이 되었다. 칼리프라는 개념은─그 역사적 권위, 명예, 그리고 더 좋았던 과거의 이슬람 시대에 대한 향수를 담았으므로─중앙아시아와 인도의 무슬림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다."(138-9)


6 오스만 제국의 통치 방법


"18세기에 오스만 정권은 전에 없이 무슬림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18세기 전반에 술탄들은 다마스쿠스에서 성스러운 도시들(메카와 메디나)로 이어지는 순례로를 보호함과 동시에 강화하려고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고, 그러한 목적으로 요새들과 이를 보완하는 군사 주둔지들을 세웠다. 18세기에 아라비아의 와하비 반군들은 오스만 왕조의 정통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순례 여행을 교란시켰으며 1803년에는 메카를 정복했다. 술탄 마흐무드 2세는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 파샤에게 군단을 요청해 와하비 세력을 일시적으로 제압했다. 압뒬하미드 2세는 칼리프로서의 위상을 드높이고 순례자들의 여행을 편리하게 하고 시리아-아라비아 지역을 중앙에 귀속시키기 위해 19세기 말 히자즈 철도를 개설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영국이 메카와 메디나를 점령하고 하자즈 철도를 끊으려고 한 것은, 와하비들의 공격처럼 전 이슬람 세계에서 오스만 왕조의 권위를 격하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161)


"그런데도 오스만 술탄으로서 통치 기간 중에 성스러운 도시들을 순례한 술탄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왕실의 일원으로서 순례한 사람은 대여섯 명도 채 안 된다." "신체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모든 무슬림의 기본적 의무인 순례를 오스만 왕조가 등한시했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술탄 오스만 2세 시대에 울레마는, 술탄은 순례에 가기 위해 수도를 비우기보다는 남아서 정의를 수호해야 한다고 공식적인 종교적 의견서(파트와[fatwa]. 법률자문역 무프티의 의견서로, 구속력은 없지만 경우에 따라 상당한 권위를 가진다)에서 말했다. 당시 울레마는 오스만 2세의 통치에 적대적이었고, 오스만 2세가 순례를 계획하면서 비밀리에 다른 일을 꾸미는 것을 두려워했다(오스만 2세가 예니체리를 폐지하고 군을 대폭 개혁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이처럼 술탄이 순례를 가지 못하도록 한 이 의견서는 상당히 특수한 것이다. 결국 오스만 왕조가 순례에서 완전히 발을 뺐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161-2)


7 오스만 경제: 인구·교통·무역·농업·제조업


"오스만 역사 전체를 통틀어, 이주(移住)는 언제나 인구 분포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었다. 이주는 정치적·경제적인 여러 이유로 발생했다. 경제적 이주의 사례 가운데 하나는 항구 도시들의 성장이다. 19세기 동안, 당시 제국에서 성장하고 있던 국제 무역과 관련된 항구 도시들의 발전에 따라 (내륙 인구는 감소하고) 해안 지역에 그나마 인구가 밀집되었다. 이러한 항구 도시에 경제적인 이유로 내륙의 오스만 신민들이 이주했으며, 이즈미르의 경우에는 인접해 있는 에게 해의 섬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즈미르, 베이루트, 알렉산드리아, 살로니카에는 오스만 내륙의 이주민들뿐만 아니라 지중해를 건너온 말타·그리스·이탈리아·프랑스 출신의 이주민들도 있었다. 그들에 힘입어 항구 도시들은 세계 시민적이고 다언어적인 '레반트'(레반트[Levant]란 동지중해 연안 지역을 포괄하여 지칭하는 말이다) 문화를 형성했으며, 이는 특별히 오스만 제국의 일부분이라기보다는 대체로 지중해 세계의 일부였다."(188)


"경제적인 이주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이주들은 극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해당 지역에 오늘날까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된 합스부르크-오스만 전쟁의 인구학적 영향을 예로 들어보자. 전투를 피하기 위해 세르비아 정교회 신도들은 코소보 인근의 고향을 떠나 북쪽으로 간헐적인 이주의 물결을 이루었다. 그때까지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었으나 알바니아인들이 점차 이주해와 그 공백을 메웠다. 일부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 동부로 이주했는데, 그 결과 그곳에서 다수를 이루던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내주었다. 또 어떤 세르비아인들은 계속 북쪽으로 이동하여 합스부르크 영토로, 예를 들어 1736~1739년 전쟁에서 오스만 측이 승리한 이후 그곳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이주민을 내보낸 사회나 받아들인 사회나 모두 종교적으로 더욱 동질화되었다. 이것이 1990년대의 보스니아와 코스보 위기에 관한 오스만 시대의 배경이다."(189)


8 오스만 사회와 민간 문화


"일찍부터 국가와 신민들 모두 인정했던 복장 규제법은 사회 이동의 중요한 지표로 작용했고, 관료들 사이 또는 관료와 신민 사이, 그리고 신민 계층들 사이의 차이를 표시해주었다. 각각의 특정한 위계에 있는 사람들의 특정 모자와 겉옷이 법으로 규정되었고, 그 가운데 모자가 특히 강조되었지만 옷, 구두, 허리띠 등등의 색과 유형으로도 구별했다. 이러한 법은, 특정 복장으로 사람들을 각각 분리된 집단으로 나누고, 그런 특정 복장에 따라 모두 자기 분수를 알고 명사들에게 존경을 표하도록 하는 의도를 띠었다." "사회적 변화와 신분 상승이 너무나도 극단적이고 너무나도 국가의 통제력에서 벗어난 부분이라 1829년 술탄 마흐무드 2세는 하루아침에 완전히 두 손을 들었고, 복장에 기반한 오래된 사회적 소속의 표지들을 폐지해버렸다. 그 대신 새로운 규정들을 내세워, 모든 관료들은 페즈를 똑같이 쓰라고 명령했다. 각기 다른 다양한 터번과 명예로운 예복들이 모두 사라졌다(종교 계층은 예외였다)."(227, 232)


"상당수의 사람들이, 왜곡되고 결국 무너져버린 케케묵은 복식상의 표지가 마침내 사라진 것을 환영했다. 이제는 법적인 제약이 없어졌으므로 주로 비무슬림들이었던 많은 부유한 상인들은 의복의 차이로 간혹 벌어졌던 차별을 피하기 위해 곧바로 새로운 의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른 오스만 신민들은 통일된 복장으로 새로운 사회적 표상을 세우려는 노력을 거부했다. 사회적 위계에서 가장 끝부분에 있었던 근로자들은 무슬림이든 비무슬림이든 페즈를 거부하곤 했다. 이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평등에 반대하는 반동적인 수단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근로자들이 계층적 차이를 유지하고 싶어 했으며, 길드의 특권을 공격하면서 그들의 보호자였던 예니체리를 없애버리고 또한 오래도록 길드에 속한 근로자들에게 특혜와 보호를 제공해준 경제 정책들을 해체하고 있던 국가에 반발하는 연대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많은 무슬림과 비무슬림 근로자들은, 그들을 특별 집단으로 표시해주었던 모자를 계속 고집했다."(233-4)


9 집단 간의 협동과 갈등


"온갖 부정적인 고정관념과 선입견 속에서도 오스만 역사의 대부분에 걸쳐 집단 간의 관계는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수세기 동안 오스만 영토에서 소수자들은 프랑스 왕국의 땅이나 합스부르크 제국 영토에 있는 소수자들보다 온전한 권리와 더 많은 법적 보호를 누렸다." "지금까지 정형화된 인식은, 오스만 신민들이 15세기 이래로 명확하게 구분되고 서로 침투 불가능한 '밀렛'이라는 종교 집단들로 서로 분리되어 살아간다는 인상을 준다. 이런 부정확한 관점에 따르면, 각각의 집단들은 서로 인접해 있으면서도 분리되어 고립적으로 살았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맺힌 증오가 널리 퍼져 있었다. 최근 학술 연구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거의 모든 면에서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오스만의 비무슬림들을 '밀렛'이라고 부른 것은 먼 옛날이 아니라 19세기 초 마흐무드 2세의 치세 당시부터였다. 그 이전에 밀렛은 제국 내의 무슬림들이나 제국 '바깥'의 기독교인들을 의미했다."(267-8)


"물론 오스만 세계의 사람들은 무슬림과 비무슬림 사이의 차이를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무슬림이라는 것만으로도 무슬림들은 이미 오스만 왕조와 오스만 국가 기구를 이루는 대부분의 성원과 종교적 믿음을 공유했다. 국가 자체에 여러 가지 속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슬람 국가라고 일컬었고, 많은 술탄들은 그들의 칭호 가운데 '가지', 즉 이슬람 신앙을 위해 싸우는 전사라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특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선택받은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끊임없이 배제되는 '고임'(goyim)─비유대인, 타자─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무슬림들에게, '딤미'(dhimmi)라는 개념은 차이에 대해 말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었다. 이 경우 무슬림들은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무함마드 이전에 신의 계시를 받았던 까닭에 불완전한 '경전의 사람들'(즉, 딤미)로 생각했다. 그들은 신의 계시를 일부만 받았기 때문에 무슬림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무슬림보다 열등했다."(270-1)


"점차 늘어가는 서구의 경제·정치·사회·문화적 힘이 오스만 제국의 기존 질서를 뒤집어엎는 변화를 촉발시켰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세기 동안 세 가지의 사회적 위계 질서 사이에서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다. 첫 번째는 이전 수세기에 걸쳐 존재했고 19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던 위계 질서로, 이는 비무슬림 위에 무슬림들을 정치적·법적으로 주도적인 위치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18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외국 기업의 모델로, 외국인들을 정상에, 두 번째 등급에 비무슬림들을, 그리고 무슬림들을 바닥에 놓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오스만주의적 모델로, 이는 모든 종교적·종족적 집단들에서 충원된 국가 행정 관료계가 통치하며, 법과 국가 앞에서 모든 성원들을 평등한 사회로 통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오스만의 옛 질서는 사라져가고 있었지만 새로운 질서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9세기 오스만 사회는 진화하고 있었지만, 그와 같은 변화는 1922년 제국의 붕괴로 미완성으로 남았다."(284-5)


"튀르크인들이 타민족의 혐오와 민족주의로 비난받는 것을 이해하는 열쇠는 부분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중동에서 일어난 사건들에서 찾을 수 있다. 열강은 강제로 제국을 분할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 지역들을 그들끼리 나눠가졌고, 국제연맹 체제에서 위임통치 정권을 수립하여 그들의 감독 아래 두었으며, 1950년대 중반까지 여러 가지 구실을 들어가며 통치를 계속했다. 그들은 아나톨리아의 큰 덩어리를 아테네에 있는 그들의 하수인들에게 넘겨주고 알맹이 빠진 오스만 제국을 남겨두려고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저항 세력이 집결했고, 제국을 재건할 수 없었던 그들은 아나톨리아의 나머지 땅에 제국보다 작은 국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나중에 튀르크 민족국가(즉, 터키 공화국)가 되었다. 아랍과 아나톨리아 지역에서의 민족주의 운동은 오스만 제국의 잔해 속에서 국가를 창설하여 민족을 일으키는 데 전력했다. 특히 터키,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이집트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그러한 예이다."(294)


"튀르크 민족주의자와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각각의 민족주의적 정체성들을 창안하고 확산시키고자 했다. 그들 각각은 오스만 후기에 튀르크 민족주의의 요소를 고안해내고, 찾아내고 또 확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요소들을 긍정했던 튀르크 국가와 민족의 건설자들에게는 이것이 새로운 튀르크 국가를 정당화하고 역사적 뿌리를 부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아랍 국가와 민족의 건설자들에게는, 튀르크인들의 악행이 그들의 분리된 국가 정체성을 강화하고 정당화해주었으며, 아마도 자신들의 동의 없이 벌어졌던 열강의 점령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반튀르크적 해석은 영국과 프랑스가 그들의 제국 파괴를 정당화하는 데 일조했다. 따라서 1918년 이전에 의미 있는 튀르크 민족주의가 존재했다는 주장은 영국, 프랑스, 터키, 그리고 독립을 얻기 위해 분투하고 있던 아랍 정치가들과 지식인들을 포함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수많은 문제들을 조장했다."(294-5)


10 오스만 제국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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