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 혁명까지, 개정판
유진 로건 지음, 이은정 옮김 / 까치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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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특히 이슬람 첫 5세기 동안의 역사, 즉 기원후 7세기에서 12세기까지의 역사를 말이다. 이때는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카이로, 코르도바에 기반한 이슬람 대제국들이 세계정세를 좌우했다." "모든 아랍인은 이 때를 자신들이 세계의 주역이었던 시절로 회고한다. 아랍인이 이슬람 신앙을 가장 충실히 지켰을 때, 가장 위대했다고 주장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은 특히 이러한 주장에 공감한다." "1940년대와 1950년대 대부분의 아랍 시민들은 식민지적 유산에 기반한 작은 민족주의를 근본적으로 위법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아랍의 웅대함을 열망했던 사람들은, 당대의 강국들 사이에서 아랍인들이 적법한 자리를 되찾는 데에 필요한 통합 목표와 임계질량은 오직 광범위한 아랍 민족주의 운동으로만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식민지 경험은 아랍을 하나의 민족 공동체가 아니라 국민국가들의 군락으로 만들어놓았고, 그 결말에 아랍인들은 매우 실망했다."(15-9)


"아랍 세계가 지난 5세기 동안 겪은 일들의 대부분은 지구촌 사람들이 경험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민족주의, 제국주의, 혁명, 산업화, 도농 간의 이동, 여권 투쟁 등 근대 인류사의 위대한 모든 주제들이 아랍 역사에서도 전개되었다. 또한 아랍인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들도 많이 존재하는데, 도시의 형태, 음악, 시, 선택받은 무슬림으로서의 특별한 지위(『쿠란』은 알라가 그의 마지막 계시를 인류에게 아랍어로 주었음을 최소 10번은 강조한다), 모로코에서부터 아라비아까지 뻗어 있는 민족 공동체라는 개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언어와 역사에 기반한 공통의 정체성으로 묶여 있는 아랍인들은 그 다양성으로 인해서 더욱더 매력적이다. 그들은 한 민족인 동시에 여러 민족이기도 하다. 즉 정부 형태나 경제 활동 유형, 방언, 서법(書法), 풍경, 건축, 요리법 등은 그야말로 변화무쌍하다." "아랍 세계의 이 모든 사람들은 개별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공통의 아랍 역사에 의해서 자신들이 하나로 묶여 있다고 생각한다."(23-4)


1 카이로에서 이스탄불로


"오스만의 맘루크 제국의 정복─1516년 8월 24일 다비크 평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시작된─은 아랍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맘루크 검객과 오스만 소총수의 운명적인 무력 충돌은 아랍 세계의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또한 오스만의 정복은 이슬람 등장 이후 처음으로 아랍 세계가 비아랍인이 세운 수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슬람 최초의 왕조인 우마이야는 기원후 661년에서 750년 사이에 다마스쿠스에서 빠르게 팽창하던 제국을 통치했다. 아바스 칼리프 제국(750-1258)은 당대 최고의 이슬람 제국을 바그다드에서 통치했다. 969년에 세워진 카이로는 1250년에 맘루크 왕조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이미 네 왕조들이 수도였다. 하지만 1517년부터는 아랍 지역 밖의 수도들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아랍인의 사회적 지위가 협의되었고, 이와 같은 정치적 현실은 근대 아랍 역사의 본질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34)


"술탄 술레이만 1세는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성공한 통치자 중의 한 명이었다. 46년간의 치세(1520-1566) 동안 술레이만은 아버지(셀림 1세)가 시작한 아랍 정복을 마무리했다. 그는 1533-1538년에 페르시아의 사파비 제국으로부터 바그다드와 바스라를 빼앗았는데, 수년간 시아파인 사파비로부터 박해를 받아온 그곳의 수니파 주민들은 오스만군을 해방자로 여기며 환영했다. 이라크 정복은 전략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나 매우 중요했다. 술레이만 1세는 아랍의 고도(古都) 바그다드를 정복하고 시아파 교리가 수니파 영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저지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술레이만 1세의 군대가 남부 아라비아의 예멘을 점령하기 위하여 1530년대와 1540년대에 이집트에서 남쪽으로 진군했다. 지중해 서쪽에서는 북부아프리카의 해안 지역인 리비아와 튀니지, 알제리를 1525년에서 1574년 사이에 정복해서 조공을 바치는 가신국으로 만들었다."(44-5)


"맘루크 제국을 정복한 2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은 북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 남부까지 성공적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그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아랍 지역에서 정치체제를 표준화할 생각이 없었던 또는 표준화 할 수 없었던 오스만은 많은 경우 지역 엘리트들과 협력을 통하여 통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각각의 아랍 지역들은 이스탄불과 각기 다른 관계를 맺으며 각양각색의 행정 구조를 만들어냈지만, 그들 모두는 분명히 하나의 제국의 일부였다. 이러한 이질성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처럼 당대의 다종족적이고 다종파적인 제국들의 공통점이었다. 18세기 중반까지 오스만은 이와 같은 다양성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중앙과 아랍 주변부 간의 역학관게가 18세기 후반에 달라졌다. 새롭게 등장한 지역 통치자가 세력을 규합하여, 종종 오스만 제국의 유럽 적국들과 협력하며 오스만 체제에 반하는 자치를 추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60)


2 오스만 지배에 맞선 아랍의 도전


"국정운영에 관한 오스만의 개념에 따르면 훌륭한 통치는 〈형평성의 순환(circle of equity)〉으로 표현되는, 상호 연관된 네 가지 요소가 섬세하게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하다. 우선, 국가는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서 대군(大軍)이 필요하다. 대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데, 국가의 유일한 고정적 재원은 세금이다.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서 국가는 신민의 번영을 촉진해야만 한다. 그리고 신민의 번영을 위해서 국가는 반드시 정의로운 법을 보장해야 한다. 이렇듯 한 바퀴를 돌면 다시 국가의 책무라는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제국의 표준화된 관행에 따라서 18세기의 다마스쿠스도 이스탄불의 술탄이 위임하여 파견한 오스만 튀르크인이 아닌 지역명문가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아즘(Azm) 가문은 17세기에 중부 시리아의 하마 인근에서 모은 광대한 농지를 통해서 부를 쌓았다. 아즘 가가 자신들의 왕국을 건립하기 시작한 결과 〈형평성의 순환〉은 깨졌고, 상황은 나빠지기 시작했다."(62-3)


"오스만 치세 초기에는 데브쉬르메, 즉 〈소년 징집〉을 통해서 모집된 노예 엘리트들이 독점했던 고위직에서 자유민 무슬림이었던 아랍인들은 배제되었다. 하지만 18세기 중반에는 이미 많은 지역 명사들이 지방의 최고 행정직에 올랐고 〈파샤(pasha: 재상이나 군사령관, 총독 같은 고위 관료)〉라는 직함을 받게 되었다. 다마스쿠스의 아즘 가문의 예는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과 마운트 레바논을 지나 메소포타미아와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확산되고 있던 광범위한 현상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지역 통치자의 등장으로 많은 세금이 지역 군인들이나 총독의 건축 사업에 소요되었기 때문에, 아랍 지역에 대한 이스탄불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이러한 현상이 아랍 지역 곳곳으로 확산되고 누적되면서, 오스만 제국의 보전은 점점 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지역 통치자들이 급증하면서 18세기 후반에 아랍 지방 곳곳에서 이스탄불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67)


"그러나 아랍 지역은 이스탄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소소한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군대나 자원을 할애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이스탄불은 다마스쿠스나 카이로의 통치자들이 일으킨 문제보다는 빈이나 모스크바의 도전을 더 우려했다. 18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아랍 지방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문제보다는 유럽 이웃 국가들의 위협에 더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는 오스만의 정복 이전 상태로 유럽을 되돌려 놓고 있었다. 1683년까지 오스만이 빈의 관문에서 압박을 가했었다. 하지만 1699년 오스트리아는 오스만을 격퇴하고 카를로비츠 조약─오스만은 처음으로 영토 상실을 경험했다─을 통해서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폴란드의 일부를 보상받았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흑해 지역과 코카서스에서 오스만을 압박했다.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의 지역 명사들의 문제는 이와 같은 상황이 제기한 엄청난 위협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68)


"아랍 세계에서 오스만 통치에 대한 진정한 다음 도전은 제국의 경계 너머, 중앙 아라비아 한가운데에서 제기되었다. 이념적인 순수성으로 인해서 더욱 더 위협적이었던 이 운동은 이라크에서 시리아 사막을 지나 히자즈의 메카 및 메디나 성도까지 포물선을 그리며 오스만 통치권을 위협했다. 자히르 알 우마르나 알리 베이와 달리 이 운동의 지도자는 지금도 중동과 서구에서 유명 인사로서 영예를 누리고 있다. 바로 와하비 개혁운동의 창시자인 무함마드 이븐 압드 알 와하브가 그 주인공이다." "와하비즘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신의 독특한 성질, 즉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신의 단일성〉이다. 하찮은 존재와 신을 결합시키려는 그 어떤 행위도 다신교(아랍어로는 〈shirk)〉라고 비난했는데, 왜냐하면 신이 협력자나 대리인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은 하나의 신 이상을 믿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오스만 이슬람의 많은 요소들을 다신교로 규정한 와하비는 오스만 당국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83-5)


"오스만은 와하비의 도전을 분쇄하는 데에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개혁 운동은 오스만 제국의 변경인 아랍 지방 너머 중앙 아라비아에 그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오스만군은 아나톨리아에서부터 나지드 국경까지 수개월간을 행군해야만 했다. 바그다드의 총독이 이미 경험했듯이, 와하비들과 그들의 영토에서 싸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적지에서 대군에게 음식과 물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일만으로도 오스만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결국 오스만 정부는 와하비의 침략을 저지할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와하비를 격퇴하고 히자즈를 오스만 제국에게 돌려줄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와하비 문제의 해결사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그의 능력과 야심은 곧 오스만 국가를 배신했다. 실제로 1805년부터 이집트 총독을 지낸 무함마드 알리 파샤는 아랍 지방에 대한 이스탄불의 통치권에 도전한 지역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다."(87-90)


3 무함마드 알리의 이집트 제국


"1805년 6월 18일, 이집트 총독에 오른 무함마드 알리 파샤는 이집트의 국부(國富)를 독점하여 강력한 군대와 관료 국가 건설에 그 세입을 사용했다." "무함마드 알리는, 훗날 오스만이 모방하게 되는, 유럽의 개념과 기술에 의존하며 이집트를 개혁의 길로 이끌었던 혁신가이기도 했다. 그는 중동 지역에서 최초로 농민 군단을 창설했다. 또한 유럽 바깥에서는 최초로 실현된 산업화 프로그램에 착수했고 군에 필요한 무기와 직물을 생산하고자 산업혁명 기술을 도입했다. 교육 사절단을 유럽의 수도들에 파견하고 유럽의 서적 및 기술 편람을 아랍어 판본으로 출판하기 위해서 번역국도 창설했다. 뿐만 아니라 오스만 술탄의 총독이 아닌 독립적인 군주로 자신을 대우하는 유럽 열강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치세 말기에는 이집트와 수단에 대한 무함마드 알리 가문의 세습 통치권이 성공적으로 안착되었다. 그의 왕조는 1952년에 혁명으로 군주제가 무너질 때까지 이집트를 지배했다."(100)


"무함마드 알리의 큰 아들 이브라힘 파샤는 1817년 초 아라비아에서 와하비와 무자비한 전쟁을 벌였다. 와하비들을 중앙아라비아의 나지드 지역으로 몰아내기에 앞서서 우선 홍해 지방의 히자즈에 대한 통제권을 손에 넣었다. 비록 나지드가 오스만 영토 밖에 있었지만, 이브라힘 파샤는 와하비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적들을 와하비의 수도인 디리야로 몰아냈다." "1818년 9월, 수세에 몰린 와하비는 절멸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무함마드 알리는 지금까지 중앙아라비아에서 어떤 오스만 총독이나 사령관도 해내지 못했던 전쟁을 성공적으로 잘 수행해냈다." "프랑스군이 이집트에서 축출되고 와하비 운동도 격퇴됨에 따라 술탄 마흐무드 2세가 아랍 세계에서의 오스만 제국의 입지를 위협하던 가장 심각한 도전들을 무사히 넘겼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라비아에서의 승리를 이끈 이집트 총독 본인이야말로 마흐무드 2세에게 더 큰 위협이 될 터였다."(103-4)


"처음으로 와하비와의 전쟁에 나서기로 동의했던 1811년 이래로 무함마드 알리는 시리아 통치를 열망해왔다. 실제로 그는 1839년 6월 24일 벌어진 네지브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물리치고 시리아 점령을 거의 실현했다. 그러나 동부 지중해가 이집트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것을 원치 않았던 유럽 연합국은 그의 야망을 무력으로 저지했다." "영국이 보기에, 레반트에서의 전략적 이점을 확보하기 위한 유럽 열강 간의 충돌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 보존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1840년 런던 의정서에 비밀리에 첨부된 부록에서 영국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정부는 〈다른 모든 나라의 국민이 공평하게 획득할 수 없다면, 자국민만을 위한 어떤 영토 확장이나 독점적인 영향력 확보 또는 상업적인 이권 추구를 하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서약을 했다. 자기부정적인 이 의정서 덕분에 오스만 제국은 오스만 영토에 대한 유럽의 구상으로부터 약 40년 동안 제국을 더 지켜낼 수 있었다."(120)


"오스만 정부로부터 지역 자치를 얻어내려는 시도 속에서 아랍 지역의 민중들은 너무도 큰 대가를 치렀고, 야심찬 지역 통치자들이 일으킨 전쟁과 인플레이션, 정치 불안, 수많은 부당한 처사로 큰 고통을 받았다. 그들은 이제 평화와 안정을 원했다. 오스만 역시 체제에 대한 안으로부터의 도전을 종식시키고 싶었다. 외세의 위협과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떤 오스만도 아랍 지역을 방치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되었다." "유럽 열강의 개입이 없었다면 무함마드 알리는 제2차 이집트 위기 때 오스만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서 오스만 정부는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기존의 행정기관들을 땜질하는 것이 아니라, 낡은 체제를 완전히 분해하여 수리하는 것이 필요함을 의미했다." "오스만 개혁가들은 고유의 문화적 고결함과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유럽의 사상과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서 분투해야만 했다."(121-2)


4 위험한 개혁


"이중적 동기가 오스만 개혁 시대의 특징이 되었다. 유럽의 환심을 사기 위한 선전행위가 대내외적인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개혁에 나선 진심 어린 결의와 결합한 것이다. 1839년 11월 3일, 이스탄불에서 오스만의 외무대신 무스타파 레시드 파샤가 오스만과 외국의 고위 인사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압둘메지드 1세를 대신해 개혁 칙령을 낭독했다. 그날부터 오스만 제국은 행정 개혁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1839년부터 1876년까지 선출 의회를 갖춘 입헌군주제로 국가 체제를 변화시켰다. 이 시기는 탄지마트(Tanzimat, 〈재정비〉라는 의미)로 잘 알려져 있다." "이제 술탄은 국가 수장으로서 의례적이고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이러한 진전은 1876년의 헌법 제정으로 마무리되었고, 여전히 술탄이 커다란 힘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의회가 설립되면서 의회의 정치적 참여가 확대되었다. 37년의 시간 동안 오스만의 절대주의 체제는 서서히 입헌군주제로 대체되어 갔다."(128-30)


"19세기 내내 유럽 열강은 오스만 문제에 간섭하기 위해서 소수 집단의 권익 문제를 구실로 삼았다. 러시아는 오스만 기독교 공동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동방정교회로 자신의 보호범위를 넓혔다. 프랑스는 오래 전부터 마운트 레바논의 마론파 교회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왔고, 19세기에는 오스만의 모든 가톨릭 공동체의 공식적인 후원자임을 자처했다. 영국은 이 일대의 어떤 교회와도 역사적인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과 드루즈파, 그리고 아랍 세계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의 주위로 모여드는 작은 규모의 개종자 집단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걸쳐져 있었기 때문에 유럽 열강은 오스만 문제에 간섭하기 위해서라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소수 집단의 권익 문제는, 때로는 (크림 전쟁 같은)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열강이 오스만에게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했다."(131)


"크림 전쟁의 여파 속에서 오스만 정부는 제국의 비무슬림 소수 공동체들의 안전을 빌미로 유럽이 또다시 개입하는 것을 막고자 자국 대중의 분노가 폭발할 위험까지도 무릅썼다. 1856년 개혁 칙령의 조항 대부분은 오스만의 기독교도와 유대인들의 권리 및 의무에 관한 것이었다. 칙령은 처음으로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오스만 신민의 완전한 평등을 보장했다." "1856년의 칙령이 발표되기 이전까지는 그 어떤 개혁도 무슬림이 문자 그대로 영원한 신의 말씀으로 숭상하는 『쿠란』을 직접적으로 위배한 경우는 없었다. 『쿠란』에 반한다는 것은 신에 대한 거역을 의미했기 때문에 칙령이 제국의 여러 도시에서 낭독되었을 때, 신실한 무슬림들이 분노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탄지마트 개혁은 오스만 제국을 위험지대로 밀어넣었다. 주민 대다수의 종교와 가치에 위배되는 개혁을 정부가 단행함으로써 개혁의 진행 과정은 정부 권위에 도전하는 반란과 신민들 간의 폭력사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132-3)


"오스만은 탄지마트를 대중이 지지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개혁과 혜택이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금을 더 잘 거두고 서구식 병역에 필요한 군인을 더 효율적으로 징집하기 위한 관료제의 확대로부터 대다수의 주민들은 얻을 것이 없었다.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정치적 사고 및 관행에 더욱 잘 부합하기 위해서 단행한 모든 사법적 변화들도 평범한 오스만인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이러한 이질적인 변화를 신민들이 수용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지역 경제와 사회 복지 향상을 위한 정부의 투자가 필요했다. 예를 들면 가스등이나 증기 연락선, 전기 전차와 같이 대중에게 술탄 정부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를 심어준 대규모 사업들은 개혁 정부를 향한 지지도를 높여주었다." "19세기 후반에 오스만 제국 전역에서 건설 및 토목 사업에 광범위한 정부 투자가 이루어졌다. 오스만 세계가 세계 경제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점점 더 다양한 산업 제품과 상품들이 아랍 시장으로 유입되었다."(141)


5 식민주의의 첫 번째 물결 : 북아프리카


"아랍 세계에 대한 유럽의 제국주의가 북아프리카에서 시작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북아프리카의 아랍 지역은 오스만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18-19세기 동안 이스탄불로부터 점점 더 자유로워졌다. 반면 오스만 중심부에 가까웠던 중동의 아랍 지역들─대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반도─은 19세기 개혁기(1839-1876) 동안 이스탄불의 지배 아래 더욱더 통합되었다. 다마스쿠스와 알레포가 오스만 제국의 핵심 지역이었다면, 튀니지나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가신국이었다. 북아프리카의 자율성을 강화시킨 국면들─독립적인 정부를 지향하는 특정 지배 가문의 등장─이야말로 북아프리카의 국가들이 유럽의 점령에 취약해진 주요 요인이었다. 더욱이 북아프리카의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남유럽─에스파냐와 프랑스, 특히 이탈리아─과 거리가 가까웠다. 북아프리카는 오스만 제국의 먼 변경이었지만 유럽에게는 가까운 외국이었던 것이다."(155-8)


# 1830년 알제리(부족들의 저항 운동을 완전히 종식시킨 것은 1847년, 프랑스), 1881년 튀니지(프랑스), 1882년 이집트(영국), 1911년 리비아(이탈리아), 1912년 모로코(프랑스-에스파냐 보호령) 식민지화


"영국의 이집트 점령은 이집트 국경 저 너머에서도 대격변을 초래했다. 나폴레옹 시절부터 프랑스의 중요한 피보호국이었던 이집트에 경쟁 국가인 영국이 영구적인 제국주의 지배 체제를 구축하자 프랑스의 당혹감이 적대감으로 변했던 것이다. 이집트는 프랑스의 군 자문가들에게 의존해왔고, 가장 큰 규모의 교육 파견단을 파리로 파견했으며, 프랑스의 산업 기술을 수입해왔다. 게다가 수에즈 운하 회사도 프랑스 법인으로 설립되었다. 이집트의 상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프랑스는 기어이 〈배반자 앨비언〉(Albion, 영국 혹은 잉글랜드)에게 원한을 갚고자 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의 전략 지역을 손에 넣음으로써 앙갚음을 했는데, 이는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 영국의 해외 기업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곧 이어서 포르투갈과 독일, 이탈리아가 가담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제국을 상징하는 색깔로 아프리카 지도를 칠하게 되는 〈아프리카 쟁탈전〉이 벌어졌다."(188)


"정치적 단위로서 〈민족〉─자치를 열망하는 특정 영토에 기반한 공동체─이라는 개념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19세기 동안 중동에 뿌리를 내리게 된 유럽 계몽주의 사상의 산물이었다. 19세기 초만 해도 대다수의 아랍인은, 대개 유럽의 지지를 받으며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던 발칸의 기독교 공동체와 연관된 민족주의에 눈살을 찌푸렸다. 또한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의 군인들은 술탄의 부름을 받고 182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발칸의 민족주의 운동과 싸웠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가 유럽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면서 오스만 세게와 단절되자, 민족주의는 외세의 지배에 맞서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부상했다. 실제로 제국주의는 북아프리카에서 민족주의가 등장하는 데에 필요한 중요한 두 가지의 구성요소를 제공했다. 해방될 민족 영토의 경계를 명시한 국경선과 공동의 해방 투쟁으로 주민을 결집시킬 공동의 적이 바로 그것이다."(197-8)


"알 사이드 자말 알 딘 알 아프가니(1839-1897)와 셰이크 무함마드 압두(1849-1905)는 20세기에도 이슬람과 민족주의에 영향을 미칠 이슬람 개혁 의제를 만들어낸 공동 작업자이다." "알 아프가니는 이슬람이 근대 세계와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무슬림이 오늘날의 문제에 맞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종교적 갱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재의 무슬림들이 종교 원리에 따라 산다면, 그들의 나라는 예전의 힘을 회복하고 유럽이 제기한 외부적인 위협을 극복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압두는 역설적이게도 진보적인 이슬람을 주창하면서도 초기의 이슬람 공동체─아랍어로는 살라프(salaf, 즉 선조)로 알려진, 예언자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를 역할 모델로 삼았다. 그 결과, 압두는 살라피즘(Salafism)─오늘날 이 용어는 오사마 빈 라덴과 가장 급진적인 이슬람 반서구 행동파를 연상시킨다─이라고 불리게 될 새로운 계열의 개혁 사상의 창시자 중의 한 명이 되었다."(199-201)


6 분할통치 : 제1차 세계대전과 전후 처리


"청년 튀르크인들은 1876년의 헌법 복원과 의회의 재소집을 술탄에게 요구하며 혁명을 일으킨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청년 튀르크인들이 제국에 대한 아랍인들의 소속감을 강화하고자 단행했던 정책들─제국의 공식 언어로 터키어를 지정하는 식의─은 오히려 신생 민족주의 운동을 초래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초기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직면한 어려움은 거의가 극복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오스만 정부의 감시는 어디에나 존재했고, 비합법적인 정치 활동은 무차별적으로 진압당했다. 아랍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들도 부족했다. 무함마드 알리처럼, 아랍 지방에서 실력자가 봉기하여 오스만군을 패퇴시키던 시대는 지나갔다. 19세기의 오스만 개혁 성과 중의 하나는 중앙정부를 강화시켜 아랍 지역을 이스탄불의 지배에 더욱더 종속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아랍 세계에 대한 오스만의 장악력을 뒤흔들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격변이 필요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바로 그 격변이었다."(208-9)


"1918년 가을 이후, 오스만의 전선은 와해되었다. 영국군이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시리아─아랍 반란을 일으킨 협력자들의 도움으로─에 대한 정복을 완수했다. 오스만군은 아나톨리아로 퇴각했고 다시는 아랍 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18년 10월에 마지막 튀르크군이, 〈냉혹한〉 셀림이 402년 전에 아랍의 영토 정복을 시작했던 바로 그 현장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알레포의 북쪽 국경을 넘었다. 이렇게 지난 400년 동안 계속되었던 오스만의 아랍 통치가 돌연히 끝나버렸다."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영국의 이집트 지배가 가져온 고난을 신문에서 읽은 다른 지역의 아랍인들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외국의 지배를 피하고자 결의를 다졌다. 1918년 10월부터 1920년 7월까지 짧지만 들뜬 이 시간 동안 아랍의 독립은 곧 달성될 듯이 보였다. 하지만 영토를 둘러싼 승전국들의 야욕이라는 가장 큰 장애물이 아랍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211-2)


"1919년에서 1922년까지 진행된 이집트와 영국과의 협상 사이사이에 시민소요가 발생하곤 했다. 결국 이집트 민족주의자들이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이름뿐인 독립이 전부였다. 이집트의 치안 유지를 위해서 영국은 1922년 2월 28일에 일방적으로 보호령 종식을 선언하고 〈대영제국의 핵심적인 이권과 관련된〉 4개 주요 영역─제국의 통신 안보, 이집트 방어, 외국인의 이권 및 소수 집단의 권리 보호 그리고 수단─에 대한 통제권을 영국이 보유한다는 조건으로, 이집트를 독립 주권 국가로 인정했다. 영국이 군사 기지를 보유하고 수에즈 운하를 통제하며 보호령 시절이나 별반 다를 것 없이 이집트 국내 문제에 번번이 간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건들을 전제로 한, 이 독립의 한계를 양측 모두 잘 인지하고 있었다. 향후 32년 동안 주권을 찾으려는 이집트와 제국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려 했던 영국은 식민지적 관계를 재규정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타협에 나서야만 했다."(238)


"1918년, 메소포타미아에 정치질서를 도입하는 작업은 2003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을 정복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1920년경이면 이라크인들도 영국이 이라크를 식민통치에 종속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1919년의 이집트 혁명을 멀리서 지켜보던 이라크인들은 영국이 다마스쿠스의 파이살 정부를 버리고 프랑스의 식민지 점령을 위한 길을 열어주려고 시리아 및 레바논에서 군을 철수하자 점점 더 큰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마치 영국과 프랑스가 아랍 지역의 독립을 부정하고 자기들끼리 이 영토들을 나누어 가지려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했다." "대부분의 서구인들은 이라크에서 〈1920년 혁명〉으로 언급되는 1920년 봉기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수세대 동안 이라크 학생들은 민족의 영웅들이 이라크의 렉싱턴과 콩코드라고 할 수 있는 팔루자와 바쿠바, 나자프에서 외국군과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어떻게 싸웠는지를 배우며 성장했다."(239-44)


7 중동의 대영제국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영국은 홍해와 페르시아 만 양안을 모두 아우르는 단일 지배 세력의 부상보다 아라비아에서 여러 국가들이 상호 견제를 하며 균형을 이루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점점 강력해지고 있던 사우디 정권에 대한 완충제로 하심 가를 이용하는 것이 대영제국의 이해관계에는 더 잘 부합했다." "1921년 7월부터 9월까지 T. E. 로렌스는 전후 협상이 가져온 새로운 현실을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하도록 후세인 왕을 설득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로써 후세인은 이븐 사우드가 히자즈 정복을 위해서 전투를 개시하려는 때에 더 이상 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븐 사우드는 영토를 계속 확장했고, 1932년에 왕국의 이름을 사우디아라비아로 개명했다. 이븐 사우드는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 지역에서 왕권을 수립했으며 영국의 제국주의적인 지배로부터도 독립을 지켜냈다. 이는 영국의 중요한 오판 덕분이었다. 영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에 석유가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256-7)


"식민 장관 윈스턴 처칠은 1921년 6월 하원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자신은 영국의 위임통치 지역의 왕으로 후세인의 아들들을 앉힘으로써 하심 가에게 했던 영국의 깨진 약속을 이행하는 데에 기여하는 동시에 아랍 지역에 헌신적으로 의존적인 통치자들을 영국이 보유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이다." "처칠과 로렌스는 1921년 3월에 예루살렘 회의로 아미르 압둘라를 초청하여 중동에 관한 대영제국의 최신 구상안을 알려주었다. 그 안에 의하면 파이살은 프랑스가 확실히 장악하고 있는 다마스쿠스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지만 그 대신 이라크의 왕이 될 것이었다. 한편 압둘라에게 제안할 수 있는 최선은 트란스요르단이라는 신생국의 수장 자리였다. 육지로 둘러싸인 트란스요르단─이 당시 영토에는 홍해의 아카바 항구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은 압둘라의 야심을 만족시키기에는 한참 부족했지만,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트란스요르단에서 〈샤리프의 해결안〉은 대영제국의 현실이 되었다."(258-9)


"트란스요르단이 영국의 중동 영토 중에서 가장 지배하기 쉬웠지만, 이라크도 한동안은 가장 성공한 위임통치령으로 생각되었다. 파이살 왕은 1921년에 취임했고 제헌의회가 1924년 초에 선출되었으며 영국과 이라크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조약이 그해 후반에 비준되었다. 1930년에 이라크가 안정적인 입헌군주국으로 자리 잡으면서 위임통치국으로서의 영국의 역할은 완수되었다." "이라크는 국제연맹의 26년의 역사 동안 정회원이 된 유일한 위임통치령이었다. 이라크는 여전히 영국이나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던 다른 모든 아랍 국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이라크가 달성한 성과, 즉 독립을 이루어서 국제연맹의 회원국이 되는 것은 아랍 세계의 민족주의자들의 목표가 되었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인 대다수는 자신의 나라에서 누리고 있는 영국의 지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라크인들의 저항은 1920년의 봉기로 끝나지 않았고, 이라크에서의 영국의 계획을 끝까지 방해했다."(263-4)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이집트는 아랍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높은 수준의 다당제적 민주주의를 달성했다. 1923년의 헌법 제정으로 정치적 다원주의와 양원제를 위한 정기적인 선거, 성인 남성의 참정권, 언론의 자유가 도입되었다. 많은 신당들이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선거는 높은 투표율을 보였다. 언론인들도 상당한 자유를 누리며 활동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의 시대는 이집트 정치의 황금기로서보다는 분열적인 당파주의 시기로 더 자주 기억되곤 한다. 뚜렷이 구별되는 세 개의 세력이 이집트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영국과 군주, 의회를 통한 와프드당이 바로 그들이다. 이 삼자 간의 경쟁으로 이집트의 정치는 커다란 분열을 겪었다." "1930년대의 경험은 이집트인들로 하여금 자유민주주의 정당정치에 환멸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이집트인들은 시디키의 독재를 거부했지만, 그렇다고 와프드당이 달성한 결과에도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독립에 대한 불투명한 전망은 한 세대 동안이나 더 계속되었다."(270, 277)


8 중동의 프랑스 제국


"프랑스는 오래 전부터 아랍 세계에 자신들의 제국을 구축하기 위하여 대(大)시리아─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요르단을 포함하는 광활한 영토─를 탐해왔었다. 프랑스는 이집트 협력자를 통해서 이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장할 요량으로 1830년대에는 시리아를 침략한 무함마드 알리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집트가 1840년에 시리아에서 철수하자, 프랑스는 시리아의 토착 가톨릭 공동체들, 특히 마운트 레바논의 마론파와의 유대관계를 강화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는 마침내 시리아에 대한 권리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1915년과 1916년 사이에 이루어진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통해, 자신들의 목표에 대한 영국의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이미 알제리와 튀니지, 모로코를 식민지화한 프랑스는 아랍인들을 성공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와 경험이 있다고 자신했다."(299)


"레바논 정치계에는 마운트 레바논의 지위에 공개적으로 적대감을 표명하는 흐름이 있었다. 트리폴리와 베이루트, 시돈, 티레 같은 해안 도시들의 수니파 무슬림들과 그리스 정교도들은 시리아의 주류 정치 사회에서 고립되거나 기독교도가 지배하는 레바논 국가에서 소수자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다." "수세기 동안의 오스만 지배에서 벗어난 베이루트의 민족주의자들은 더 큰 아랍 제국의 일원이 되길 원했기 때문에 다마스쿠스의 아미르 파이살 정부를 지지하고 있었다." "마론파 공동체의 많은 사람들은 프랑스의 기술적인 도움과 정치적인 지지를 원하면서도 어찌 되었든 간에 프랑스가 제국주의적인 이기심보다는 이타주의를 보여주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레바논에 대한 위임통치 준비가 진행되면서 프랑스의 군 행정가들은 마운트 레바논의 행정자문위원회에 자신들의 정책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결국 마운트 레바논의 정치인들도 국가 건설에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303-5)


"프랑스는 시리아를 점령한 초기부터 도시와 지방 모두에서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파우지 알 카우크지는 일격을 가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며 하마에서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프랑스에 맞서서 일어났던 이전의 시리아 반란들이 끓어올랐다가 주저앉은 것을 그동안 쭉 지켜본 그는 1925년의 상황은 다르다고 판단했다. 드루즈인과 다마스쿠스인 그리고 하마의 자신의 당 사이에서 프랑스에 반대하는 사람들 간의 새로운 연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프랑스는 다마스쿠스의 반란을 물리치기 위해서 무시무시한 폭력을 동원했다. 요새에서 무차별적으로 다마스쿠스 지역을 대포로 포격했다. 이후 수일간의 공중 폭격이 이어졌다." "결국 민족주의 운동의 주도권은 협상과 비폭력 저항이라는 정치적 과정을 통해서 목표를 추구하며 무장 투쟁을 멀리했던 도시 엘리트들로 구성된 새로운 지도부로 넘어갔다. 하지만 1936년까지 시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은 아무런 성과도 보여주지 못했다."(326-30)


"아랍 민족주의가 싹트던 시기에 알제리는 오히려 제국주의를 포용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알제리인들이 자신들의 운명에 만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교육받은 대다수의 엘리트들은 프랑스를 쫓아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930년까지도 자신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온전한 프랑스 시민권을 얻어서 그들의 대열에 합류하고자 했다. 민족주의 대신 시민권 운동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법은 알제리의 유럽인과 무슬림 사이를 명확하게 구분했다. 1865년에 프랑스 상원은 알제리의 모든 무슬림이 프랑스인이라고 공포했다. 하지만 그들이 군과 행정기관에서 일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프랑스의 '시민'은 아니었다. 알제리 원주민이 프랑스 시민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무슬림으로서의 신분을 포기하고 프랑스의 가족법 아래에서 사는 것에 동의해야만 했다. 결혼과 가족법, 유산 분배 모두가 이슬람법으로 정확히 규정되어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무슬림에게 신앙을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것과 같았다."(333-4)


9 팔레스타인 재앙과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더 이상 버틸 여력도 의지도 상실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이견은 해소가 불가능했다. 영국은 유대인에게 양보를 할 경우 1936-1939년처럼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했다. 반대로 아랍에게 양보를 한다면 유대인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도(1946년 7월 22일, 킹 데이비드 호텔 폭파 같은) 이제 분명해졌다. 1946년 9월에 런던에서 아랍과 유대 지도부의 만남을 주선하려는 영국의 노력은 양측의 참석 거부로 실패했다. 그리고 1947년 2월에 런던에서 열린 양자 회담도 국가 설립을 놓고 아랍과 유대인 측의 요구가 엇갈리면서 좌초되었다. 영국은 막다른 길에 다다랐고, 벨푸어 선언의 오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영국은 〈기존의 팔레스타인 비유대인 공동체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유대인들의 민족향토〉를 건설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47년 2월 25일에 영국은 국제연합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위임했다."(356)


"유대인 테러리스트들은 영국을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도록 만들겠다는 첫 번째 목표를 달성했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이 사용한 테러 전법은 오늘날까지도 이 지역을 괴롭히고 있는 위험한 선례를 역사에 남겼다." "한편 UN이 구체화한 분할안(Partition Resolution)은 팔레스타인을 바둑판 모양으로 여섯 구역으로 나눈 후 3개의 아랍지역과 3개의 유대지역으로 지정했고, 예루살렘은 국제적인 신탁 통치 지역으로 정했다. 이 안은 유대 국가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약 55퍼센트를 할당했는데, 하이파에서 야파로 이어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중해 해안과 아카바 만까지의 아라바 사막은 물론 이 나라의 북동쪽에 위치한 좁고 긴 갈릴리 전역도 포함되어 있었다." "트루먼은 훗날 〈이 당시 내가 느낀 중압감과 백악관을 겨냥한 (시오니스트 활동가들의) 맹렬한 선전 활동〉은 전무후무한 경험이었다고 떠올렸다. 1947년 11월 29일에 분할안이 기권 10표와 찬성 33표, 반대 10표로 통과되었다."(359)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1948년은 알 나크바(al-Nakba, 대재앙)로 기억되었다. 내전과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약 75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피난민으로 전락했다. 피난민들이 팔레스타인의 겨우 남은 아랍 영토와 레바논, 시리아, 트란스요르단, 이집트로 밀려들었다. 동예루살렘을 포함하여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만이 간신히 아랍인들의 수중에 남았다. 가자 지구는 이름만 자치 지역일 뿐 이집트의 신탁 통치를 받게 되었다. 서안 지구를 트란스요르단에 합병하면서 이제 요르단 강 양안(兩岸) 모두를 차지하게 된 트란스요루단은 요르단으로 국명을 고쳤다. 제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종식되었을 때 지도상에는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역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단지 외국의 점령 아래 또는 이산(離散)의 상태로 살고 있는, 뿔뿔이 흩어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국권을 인정받기 위해서 역사의 남은 시간을 싸우는 데에 써야만 했다."(382)


"팔레스타인 재앙은 아랍 정치에 끔찍한 영향을 미쳤다. 신생 독립국가들의 희망과 염원에는 1948년의 패배로 인해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팔레스타인에서 겪은 패배의 여파로 아랍 세계는 무시무시한 정치적 동요를 목격했다.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4개국은 정치적 암살과 쿠데타, 혁명으로 침몰했다. 구엘리트들이 젊은 세대의 군인들에 의해서 타도되면서 대대적인 사회 혁명이 발생했다. 구 정치인들이 자국의 국경 내에서 민족독립을 위해서 투쟁했다면, 열정적인 자유장교단은 범아랍적인 단결을 주창한 아랍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또한 '구세력'이 유럽의 언어를 구사했다면, 새로운 지도자들은 거리의 언어로 말했다. 팔레스타인 재앙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랍 세계에 대한 유럽의 영향력을 종식시켰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후 2등 국가로 전락했다. 이렇게 제국은 물러났고 새로운 강국들이 국제체제를 지배하게 되었다."(392-3)


10 아랍 민족주의의 부상


"1952년 이집트에서 많은 사람들이 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이 무렵 정부의 전복을 적극적으로 도모하고 있던 이들은 정작 소수의 군장교들뿐이었다. 자유장교단(Free Officers)이라고 자칭했던 그들의 지도자는 가말 압델 나세르라는 젊은 대령이었다. 자유장교단은 이집트의 군주와 의회 정부가 나라를 망쳤다는 확실한 신념과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쿠데타 성공 이후 이집트 대중의 지지 속에서 군인들은 대담해졌고, 정치에도 더욱더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군인들은 재빠르게 이집트 정치에서 다당제를 추방했다. 1953년 1월에 와프드당과 무슬림 형제단의 압력에 대한 대응으로, 혁명평의회는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하고 정당 자금을 국고로 환수했다." "독립 수호에 열성적이었던 이집트는 어떻게 해서든지 주권의 침해 없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자유장교단은 타협 없이 전 세계와 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곧 깨닫게 되었다."(400, 406-7)


"주목할 만한 계속된 성공으로 나세르는 아랍 세계에서 권세를 떨치게 되었다. 반제국주의자로서의 이력과 아랍 단결을 향한 호소로 그는 중동 전역에서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투사가 되었다." "나세르는 라디오를 통해서 아랍 세계를 정복했다. 〈아랍의 소리〉를 통해서 아랍 정부의 수장들을 제치고 그들의 시민들에게 직접 말을 건넴으로써, 다른 아랍의 통치자들이 자신의 규칙을 따르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이집트의 대통령이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아랍 연대에 대한 나세르의 호소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이 그러했다." "시리아 정부는 카이로로의 길을 택했고, 1958년 2월 1일에 이집트와 통합 협정을 체결했다. 이것은 혁명적인 해의 시작이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합은 아랍 통합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알렸다. 정점에 도달한 나세르의 입지는, 다른 아랍 국가 수장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만들었다."(432-3, 438)


"나세르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일아랍공화국(UAR)으로 통합된 1958년에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이 연합은 아랍 세계 전역에 충격을 몰고 왔고, 이웃의 레바논과 요르단의 유약한 정부를 거의 쓰러뜨릴 뻔했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요르단과 레바논 양국이 통일아랍공화국에 가담하기를 기대하며 요르단의 하심 가 군주정과 레바논의 친서방적인 기독교 정부의 붕괴 가능성에 기뻐했다. 한편 바그다드의 하심 가 군주정을 타도한 1958년의 이라크 혁명은 이집트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통합시켜서 진보적인 통일 아랍 강대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희망을 실현시켜 줄, 새로운 아랍 질서의 전조처럼 보였다." "그러나 통일아랍공화국에 합류하지 않겠다는 이라크의 결정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카이로,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간의 연대 가능성은 사라졌다. 1950년대에 성공의 정상에 도달했던 나세르는 연속적인 좌절과 실패를 겪으면서 패배의 1960년대를 보내야 했다."(450-1)


11 아랍 민족주의의 쇠퇴


"놀랍도록 계속되던 나세르의 성공 가도는 1960년대에 중단되었다. 시리아와의 통합이 1961년에 깨졌다. 이집트군은 예멘 내전의 수렁에 빠졌고, 나세르는 이집트와 아랍 동맹국들을 1967년에 발발한 이스라엘과의 재앙적인 전쟁으로 끌어들였다. 팔레스타인 해방이라는 오래된 약속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시리아의 골란 고원뿐만 아니라 남은 팔레스타인 영토마저 이스라엘이 점령하면서 더욱더 요원해졌다. 1960년에 아랍 세계가 품었던 희망은 닳고 닳아서 나세르가 사망한 1970년에는 환멸과 냉소로 바뀌었다. 1960년대의 사건들은 아랍 세계에 과격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는 점점 과거의 일이 되어갔지만 이제 아랍인들은 냉전의 정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1960년대에 아랍 국가들은 친서방 진영과 친소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냉전의 영향은 소련군과 미군 간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된 아랍-이스라엘 분쟁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아랍의 분할통치는 계속되는 듯이 보였다."(452)


"1962년부터 나세르가 주창하기 시작한 아랍 사회주의는 아랍 세계를 분열시켰다. 이집트의 정치 언어는 갈수록 교조적으로 변했다. UAR의 해체 이후, 나세르는 아랍 민족의 이해관계보다는 편협한 국가적 이기심을 앞세우는 〈반동주의적〉 자산가들을 주로 비판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서구의 지원을 받는 아랍 국가들─모로코와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보수적인 군주국들과 튀니지, 레바논과 같은 자유 공화국들─도 〈보수반동적인〉 국가(서구에서는 〈온건한〉 국가로 알려졌지만)로 일축되었다. 혁명적인 아랍 국가들은 모두 모스크바와 제휴했고 소련의 사회 경제적 모델을 따랐다. 그들은 아랍 세계에서 〈진보적인〉(서구에서는 〈급진적인〉 아랍 국가들로 경멸되었다) 국가들로 알려졌다. 진보적인 국가들의 숫자는 초기에는 매우 적었지만─이집트와 시리아, 이라크─그 대열은 알제리와 예멘, 리비아에서 발발한 성공적인 혁명의 결과로 점점 길어졌다."(455-6)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의 패배로 아랍 정치는 급진적인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패전과 더불어 아랍 대중을 고의적으로 기만한 사실은 아랍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도를 땅에 떨어뜨렸다." "1948년의 전쟁 이후와 마찬가지로 아랍 세계 곳곳에서 쿠데타와 혁명의 물결이 일어났다. 이라크의 대통령 압드 알 라흐만 아리프는 1968년에 바트당이 주도한 쿠데타로 쫓겨났다. 리비아의 왕 이드리스는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이끈 자유장교단의 쿠데타로 타도되었고, 야파르 알 누마이리는 1969년에 수단 대통령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았다. 1970년에는 시리아 대통령 누르 알 딘 아타시가 하피즈 알 아사드의 군사 쿠데타에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새로이 등장한 각국의 정부들은 급진적인 아랍 민족주의 강령을 자신들의 적법성의 기초로 삼았고, 이스라엘의 파괴와 팔레스타인 해방, 제국주의─이제는 미국이 그 전형적인 본보기가 되었다─의 극복을 주창했다."(483-4)


"아랍 민족주의는 나세르 (사망) 이전에 이미 소멸한 상태였다. 통일아랍공화국으로부터의 시리아의 분리, 예멘에서의 아랍 국가 간의 경쟁, 1967년의 대패, 팔레스타인 전역의 상실로 인해서 범아랍주의를 향한 염원은 결코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연속적인 타격을 입었다. 검은 9월의 사건으로 아랍 국가들 간의 분열은 더욱 깊어졌다. 냉전 노선에 따라서 미국의 우방국이 되거나 소련의 열성 당원이 된 아랍 국가들을 가르는 단층선을 나세르 외에는 그 누구도 넘나들 수 없었다. 1970년에 아랍 세계는 각자의 이해관계를 가진 별개의 국가들로 확실히 분열되어 있었다. 1970년 이후에도 통합안이 등장했지만, 그 어느 것도 관련국의 보위(保衛)를 위협하지 않았으며 지속되지도 않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통합안들은 아랍 민족주의가 여전히 자국민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아랍 정부들이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고안한 선전활동에 지나지 않았다."(503)


# 검은 9월의 사건 :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이 자신들의 테러 활동(특히 비행기 납치) 무대로 요르단 영토를 활용하자 이에 격분한 요르단군과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충돌한 사건


12 석유의 시대


"자연은 아랍 국가들에게 석유를 공평하게 나누어주지 않았다. 위대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수천 년 동안 거대한 농업 인구를 부양했던 이라크 외에는, 가장 인구 밀도가 낮은 아랍 국가들─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그 외의 페르시아 만 국가들, 리비아,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가장 많은 석유 매장량이 발견되었다. 현지의 수요조차 충족시키지 못할 정도로 적은 양의 석유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에서도 발견되었다." "산유국들은 자력으로 개발 목표를 실현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다른 아랍 지역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해야만 했다. 국가가 없던 팔레스타인은 물론 튀니지,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예멘이 아랍의 노동력 수출에 적극 참여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코 이집트가 가장 많은 노동력을 수출했다. 1970년대 동안 산유국으로 향한 아랍 이주 노동자의 숫자는 1970년의 약 68만 명에서 1973년 석유 금수조치 이후에는 130만 명으로, 1980년에는 약 300만 명으로 증가했다."(504, 560-1)


"산유국의 이집트 노동자들이 고국으로 송금한 금액은 10년 동안 무려 200배가 증가했다. 이집트 사회학자 사드 에딘 이브라힘은 산유부국과 산유빈국 간에 이루어진 노동력과 자본의 교환 속에서 기인한 〈새로운 아랍 사회질서〉를 발견했다. 깊은 정치적 분열의 시기에 오히려 아랍인들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점점 더 상호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새로운 질서는 아랍 국가들 간의 적대감을 넘어설 만큼 유연성이 뛰어났다. 이집트가 리비아와 전쟁에 돌입한 1977년 여름에 40만 명의 이집트 노동자 중 그 누구도 이에 대한 보복으로 추방되지 않았다. 이러한 실용주의는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강화를 맺기 위해서 아랍 대열에서 이탈했을 때도 여전히 유효했다. 이집트 인력에 대한 산유국들의 수요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후 오히려 증가했다. 이브라힘의 결론처럼 석유는 아랍 현대사의 그 어느 시기보다도 1970년대 말에 아랍 세계를 사회경제적으로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561)


"뜻밖에도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산유국조차 신생 이슬람 정치 세력에게는 취약한 듯이 보였다. 더 이상 아랍 민족주의적 수사를 믿지 않는 새로운 세대가 아랍 세계에서 부상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대는 아랍의 왕과 대통령들이 부정부패로 궁전을 짓고, 아랍의 공익보다 개인의 권력을 우선시 하는 것을 보면서 정치 지도자들에게 환멸을 느꼈다. 그들은 소련의 공산주의나 무신론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을 아랍 국가들 간의 분할통치를 추구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보다는 이스라엘의 이해관계를 독려하는 새로운 제국주의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이란 혁명에서 얻은 교훈은 이슬람이 모든 적들을 합친 것보다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이슬람의 불멸의 진리를 따라서 연대한다면, 전제 군주를 타도하고 초강대국에게도 용맹하게 맞설 수 있을 것이라고 무슬림들은 생각했다. 아랍 세계는 이슬람의 힘에서 영감을 받은 새로운 정치와 사회적 변화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562-3)


13 이슬람의 힘


"1981년 10월 6일의 열병식에서 〈나는 파라오를 죽였다〉라고 외쳤을 때, 칼리드 알 이슬람불리는 종교보다 인간의 법을 앞세운 세속적인 통치자로서 사다트를 비난한 것이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무슬림 사회는 『쿠란』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지혜, 이슬람 신학자들의 판결기록에서 추론된 이슬람법의 요체이자 총체적으로 샤리아(sharia)로 알려져 있는 〈신의 법〉에 따라서 통치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연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속정부를 적으로 보았고, 통치자를 〈파라오〉라고 불렀다. 『구약성경』처럼 『쿠란』도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를 신의 율법보다 인간의 법을 권장한 전제군주로 묘사하며 매우 비판적이었다.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은 아랍 세계를 지배하는 현대판 파라오에게 맞선 폭력 사용을 세속정부를 전복하여 그 자리에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처라며 옹호했다. 칼리드 알 이슬람불리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고, 쓰러진 대통령을 파라오라 비난하며 사다트 암살을 정당화했다."(565-6)


"카리스마적인 이집트 사상가 사이드 쿠트브는 자신의 저작 『이정표』에서 현대를 규정하는 사회정치적 시스템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그것들은 과학과 지식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는커녕, 신의 가르침에 대한 무지, 즉 자힐리야(jahiliyya)를 초래했다는 것이었다. 이 단어는 이슬람 이전의 암흑시대를 일컫는 것이었기에 특히 이슬람에서는 그 반향이 컸다. 20세기의 자힐리야는 〈가치를 창조하고 집단행동의 원칙을 규정하며 삶의 방식을 선택할 권리는 신이 규정한 것과는 상관없이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형식을 취한다〉라고 쿠트브는 주장했다. 함축적으로 20세기의 과학과 기술의 현저한 발전은 인류를 현대로 이끌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신의 영원한 메시지의 포기는 이 사회를 6세기로 되돌려 놓았다." "쿠트브는 인류를 위한 신의 질서를 완벽하게 진술하고 있는 이슬람이야말로 인간이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진정한 해방신학이라고 생각했다."(570-1)


"이집트 정부는 반체제 이슬람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고문하고 선별적으로 처형했던 반면, 시리아 정권은 대량 말살 정책을 동원했다. 따라서 그 반대급부로 고강도의 훈련과 계획, 규율이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요구되었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암살이나 전복으로 무너뜨리기에는 아랍 정부들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 세속 정권을 전복하고,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기를 원하던 이슬람주의자들은 다른 곳을 찾아야만 했다. 레바논 내전의 갈등은 이슬람주의 일당들에게 이슬람 사회에 대한 이상적인 미래상을 고취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에는 아프가니스탄도 또다른 선택지가 되었다. 두 지역에서의 투쟁을 통해서 이슬람주의 일당들은 자신들의 싸움을 국제무대로 옮겼고, 그 범위를 넓혀서 이스라엘과 미국, 소련과 같은 중동 지역 및 세계의 초강대국들과 싸웠다. 개별 국가들의 국내 안보 투쟁으로 시작된 일이 세계적인 안보 문제로 비화된 것이었다."(581-2)


"이슬람주의자들은 1979년 이란 혁명의 성공과 이슬람 이란 공화국의 창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이집트에서는 한 분파 조직이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를 암살하는 데에 성공했다. 시리아에서는 무슬림 형제단이 하피즈 알 아사드가 이끄는 바트주의 정부와의 내전을 시작했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은 레바논 시아파의 무장 조직인 헤즈볼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동전의 양면으로 보았고, 레바논에서 양국에게 대대적인 일격을 가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지하드는 내부와 외부의 적 모두를 향한 것이었는데, 소련 점령군과 공개적으로 이슬람을 적대시하던 아프가니스탄 공산 정권이 그 대상이었다.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슬람 정부 아래 팔레스타인을 이슬람 세계로 복귀시키기 위해서 유대 국가에 대항하는 장기적인 지하드를 주창했다." "그러나 군사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레바논과 아프가니스탄 모두 외부의 적이 퇴각한 이후, 장기 내전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622-3)


14 냉전이 끝나고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국제 외교에서 소련과 미국이 협조하는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 역사상 처음으로 안전보장 이사회는 냉전 시대의 정치 논리에 구애받지 않고 단호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8월 2일에 결의안 660호가 신속하게 통과된 이후, 4개월 동안 안전보장 이사회는 거부권의 행사로 인해서 부결될 걱정 없이, 총 12개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아랍 정치인들─특히 이라크인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소련의 태도였다. 아랍 세계는 소련이 쇠약해진 상태이며 워싱턴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걸프 만에 대한 미국의 전략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고려했을 때, 소련은 자신들이 미국을 지지하거나 또는 미국과 대치할 수는 있어도, 행동에 나서지 못하도록 막을 힘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립해본들 얻을 이득이 없었던 소련은 미국에 협조하기로 결정했고, 한때 우방국이었던 이라크를 철저히 외면했다."(639-40)


"미국과 소련이 전례가 없는 협력의 시간을 즐겼던 반면 아랍 세계는 극심한 분열을 겪었다. 몇몇 아랍 지도자들에게는 미국의 개입이 초래할 위협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보다 더욱더 심각하게 여겨졌다. 리비아와 수단, 요르단, 예멘, PLO 지도자들은 모두 알제리 대통령 벤제디드의 우려에 공감을 표했고,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랍의 일치단결을 촉구했다." "카이로 정상회담의 최종 결의안에 대한 투표 결과는 아랍 세계의 분열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결의안은 침공을 비난했고, 이라크의 합병을 부정했으며, 쿠웨이트에서 모든 이라크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또한 자국 영토에 대한 이라크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 아랍에게 군사적 도움을 청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요청도 승인했다. 무바라크는 딱 2시간 만에 결의안에 대한 논의를 중단시키고 전문을 투표에 부쳤는데, 10개국은 최종안에 찬성했고 9개국은 반대했다. 아랍 세계는 첨예하게 분열된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었다."(640-1)


"1993년 8월, 이스라엘과 PLO가 가자와 예리코(서안 지구)에서의 팔레스타인 임시 자치를 합의했다고 공표하자, 세계는 놀랐고 예상했던 대로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클린턴 행정부는 아랍-이스라엘의 화해 조정에 실패한 미국을 대신해서 노르웨이가 거둔 성공에 매우 당황해했다. 이스라엘에서는 야당인 리쿠드당이 라빈 정부를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정권을 다시 잡으면 이 합의를 무효화할 것을 약속했다. 아랍 세계는 PLO가 비밀리에 이스라엘과 거래해서 아랍의 대오를 무너뜨렸다고 비난했다." "반면 오슬로 협정으로 이스라엘은 아랍 세계에서 유례없는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일단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과 단독협상을 체결하자 다른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운동을 배신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고도 이스라엘과 자국의 이해관계를 자유롭게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아랍-이스라엘 분쟁에 지쳐 있던 대다수의 아랍 국가들은 실용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을 생각하기 시작했다."(673-5)


15 21세기의 아랍인들


"아랍 국가들은 9/11 이후 해소 불가능한 압박감을 받게 되었다. 만약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반대할 경우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에게 경제적 고립에서부터 정권 교체라는 노골적인 요구에 이르기까지 여러 제재를 받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미국의 편을 든다면, 빈 라덴의 사례에 고무된 현지의 지하드 조직의 공격 위협에 자국 영토를 노출시키는 격이었다. 2003년 5월부터 11월까지 자국의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한 수차례의 폭탄 공격으로 125명의 사망자와 거의 1,000명에 달하는 부상자가 발생하며 사우디아라비아와 모로코, 터키의 도시들이 요동쳤다. 아랍 세계는 미국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데에 굉장히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다. 미국과 아랍이 소원해진 만큼 이스라엘과 미국은 더욱 가까워졌다." "이스라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이슬람주의 단체의 자살 폭탄 공격 시도는, 부시 대통령이 미국과 유대 국가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고 확신하게 만들었다."(693)


"2003년 3월 20일 시작된 이라크 침공은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다. 부시 행정부는 연합군 임시 행정처(CPA)라는 관리기관을 설립했다. CPA가 2003년 5월에 내린 두 건의 초기 결정으로, 전후 이라크의 혼돈은 미국 통치에 맞선 무장 폭동으로 변했다. 첫 번째 결정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바트당을 불법화하고 전(前) 바트 당원들을 공직에서 제외한다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 것은 50만 명에 달하는 이라크군과 정보부를 해체한다는 결정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탈바트화(de-Ba'thification)〉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CPA의 조치는 잘 무장된 수많은 군인을 일자리에서 내쫓았고, 이라크의 수니파 무슬림 정치 엘리트들은 나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시아 무슬림들이 득세해가는, 미국이 건설한 새로운 민주국가 이라크에 협력할 이유를 상실했다. 미국의 점령에 맞선 반란과 이라크 지역 사회 내의 종파적 갈등이 잇따랐다. 이라크는 곧 반미, 반서구 활동가들의 보급지가 되었다."(697)


"이스라엘에 맞선 저항을 통해서 이슬람주의 정당들은 정치적 배당금을 챙겼다. 실제로 유대 국가에 과감한 일격을 지속적으로 가하면서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넓은 정치적 지지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슬람 땅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싸우는 것이 종교적인 의무라고 믿었다. 2006년 여름에 양 정당은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의 수위를 올렸고, 이는 가자 지구와 레바논 모두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2006년의 충돌은 미국의 아랍 민주주의에 대한 지원의 한계 및 이스라엘에 대한 무한 지지를 확인시켜주었다. 사실상 부시 행정부는 친서방 정당이 정권을 잡은 선거 결과만 인정하려고 했다. 그리고 미국은 테러와 연계된 정당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이 아무리 부적절해도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성토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정당들의 국내적 입지는 더욱더 공고해졌다."(702-4)


"2011년 1월과 2월에 발생한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의 혁명은 아랍의 봄을 만들었다. 아랍의 봄 봉기에 참여한 각국의 시민들은 튀니지와 이집트의 시위대가 성취한 성공을 (자신들도) 거듭할 수 있다는 가정에 기반한 주장을 받아들였다. 모든 아랍 국가는 동질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혁명 모델이 모두에게 들어맞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랍의 봄이 낳은 착각이었다. 국가 기관이 거의 부재했던 카다피의 리비아는,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종파 문제를 가지고 있던 바레인과 완전히 달랐고, 지역주의의 오랜 역사를 가진 예멘과도 달랐으며, 알라위파라는 소수 종파의 지배하에 있던 시리아와도 달랐음이 곧 명백해졌다. 내부적인 제약과 역내 강국들의 간섭은 2011년 혁명을 경험한 6개국 각각에게 매우 다른 결과들, 즉 반혁명과 내전, 지역 갈등, 초국가적 칼리프 국가의 출현을 가져왔다. 해방 운동으로 시작된 행동이 오늘날 중동을 괴롭히는 최악의 정치적, 인도주의적 위기로 빠르게 악화된 것이다."(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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