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샘 1 - 석유가 탄생시킨 부와 권력 그리고 분쟁의 세계사, 최신증보판 황금의 샘 1
대니얼 예긴 지음, 김태유.허은녕 옮김 / 라의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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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석유의 창세기


"본격적인 석유 비즈니스의 기원은 석유산업 탄생에 누구보다도 큰 역할을 했던 조지 비셀이라는 사람의 우연한 결단에서 비롯되었다." "비셀은 석유가 두통, 치통, 귀머거리의 치료부터 위경련, 기생충, 류머티즘, 수종증의 치료에 이르기까지 의약품 및 민간요법용으로 널리 사용되고, 말과 노새의 등에 난 상처를 치료하는 데도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약은 '세네카 오일'이라고 불렸는데, 그 치료법을 백인들에게 전파했다고 알려진 레드 자켓이라는 세네카 인디언족의 추장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비셀은 이 검고 끈끈한 액체가 가연성 물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다트머스 대학에서 석유 샘플을 보는 순간, 그는 이것이 의약품이 아니라 광원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상품화함으로써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비셀은 다른 투자가들을 설득해 투자 그룹을 만들었고, 1854년 말에 예일 대학의 실리만 교수에 석유를 광원이나 윤활제로 사용할 수 있을지 분석해달라고 의뢰했다."(30-2)


"실리만은 석유 분석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 연구가 당신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것이라 약속할 수 있습니다〉라고 밝힘으로써, 투자가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보고서를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했다. 3개월 후 연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는 '석유 증류 제품을 광원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예기치 못했던 성공적 결과'를 보고서에 담았다." "어느 역사가가 평가했듯이, 실리만의 연구는 석유산업의 태동기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으며, 석유의 새로운 용도에 대한 모든 의구심을 일소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석유는 서로 다른 끓는점에서 탄소와 수소로 구성된 다양한 물질로 분류分溜될 수 있고, 이 분류 물질 중에는 램프에 사용할 수 있는 양질의 기름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당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간단하고 값싼 공정을 거쳐 아주 가치 있는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원료 물질이라는 믿음을 확고히 해주는 많은 발견했다〉고 언급했다. 이제 다음 단계의 과제는 과연 석유가 충분히 존재하는지의 문제였다."(33-4)


"서부 펜실베이니아의 석유 생산량은 급격하게 늘어나 1860년 45만 배럴에서 1862년에는 300만 배럴에 이르렀다. 그러나 판로는 빨리 개발되지 않아, 1861년 1월에 배럴당 10달러였던 석유 가격이, 1861년 말에는 10센트로 폭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실베이니아산 석유는 싼값 덕분에 램프용 연료 시장에서 석탄유와 다른 램프용 연료를 몰아내고 단기간에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 "남북전쟁에도 불구하고 석유 붐은 멈출 줄 몰랐고, 오히려 석유산업을 발전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남부 지방의 송진 공급이 중단되자 송진에서 추출하는 값싼 램프용 연료인 캄펜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산 석유로 만든 등유는 재빨리 그 자리를 대체했고, 북부의 석유시장은 훨씬 더 빨리 발전했다. 전쟁은 이보다 훨씬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쟁으로 남부가 분리되자 북부는 더 이상 면화 수출로 외화를 벌 수 없었는데, 유럽으로의 석유 수출이 늘어나 손실을 보전하게 된 것이다."(47)


"미국에서 초창기 석유산업의 골격을 형성하고 석유 생산에 관한 법규를 제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영국 관습법에 기초를 둔 '포획법규'였다. 사냥 중 사냥감이 타인 소유지로 옮겨 갔을 때, 그 땅의 소유자만이 잡을 권리가 있다는 규정이다. 같은 논리로 땅의 소유자는 그 땅 아래에 있는 무엇이라도 파낼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따라서 동일한 유전지대에 있는 땅 소유자들은 석유를 많이 생산해서 인근 유정의 생산을 감소시킨다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 의해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양을 단시간에 퍼 올리려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생산량과 가격이 불안정해졌다. 석유는 사냥감이 아니었다. 포획법규는 유전의 궁극적 생산량을 감소시키는 엄청난 손해를 입혔다. 그러나 그 규칙의 이면에는 다른 효과가 있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석유산업에 참여하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게 한 것이다. 또 생산 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더 넓은 판로가 개척되었다."(50-1)


"'새로운 불빛'인 등유를 구입하려는 외국의 요구가 점차 커지고 있었지만, 석유를 유럽 지역으로 수송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선원들은 수송 도중에 등유가 폭발하거나 화재가 날 수 있다는 생각에 크게 두려워했다. 1861년 마침내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 선주가 간신히 선원을 모집해 석유를 선적한 배를 출항시켰다. 그가 무사히 런던에 도착함으로써 석유의 국제교역 시대가 시작되었고, 미국의 석유는 빠른 속도로 세계 시장을 장악해나갔다. 석유산업은 초기부터 국제적 비즈니스로 자리 잡았다. 해외시장을 개척하지 못했다면 미국의 석유시장은 큰 규모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유럽은 공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연료로 사용하던 동물성 유지나 식물성 기름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었다. 한 세대 이상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산 석유에 대한 수요는 급격히 증가했다." "1870년대와 1880년대 미국의 등유 수출량은 전체 석유 생산량의 절반 이상에 달했고 전체 수출품 중 4위를 차지했다."(88-9)


"1877년, 토머스 에디슨은 전기 조명 개발에 착수했고, 2년 만에 내열 백열전구를 발명했다. 전기는 매우 유용했다. 그러나 전력산업의 급속한 발전은 석유산업을 위협했고 특히 '올드 하우스'(스탠더드 오일의 별칭)에 매우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생산, 정제, 파이프라인, 저장 시설 등에 엄청나게 투자했던 스탠더드오일은 석유의 주요 시장이던 조명 시장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조명 시장이 석유 수요원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해갈 무렵, 석유의 새로운 시장이 나타났다. 일명 '말 없이 달리는 마차'라 불린 자동차의 출현이었다." "1905년, 휘발유로 움직이는 자동차는 증기기관차와 전기기관차와의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했다." "석유산업은 휘발유 시장뿐 아니라 공장, 기차, 선박 등에서 사용되는 보일러용 연료 소비 증가로 또 하나의 시장을 갖게 되었다. 석유의 미래를 우려했던 문제점들은 매우 빠르게 해결되었다. 오히려 '늘어나는 석유 수요를 공급이 따라갈 수 있을 것인가'가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었다."(126-9)


"한편, 걸프 연안과 미국 중부에서 유전들이 속속 발견됨에 따라, 난공불락으로 보이던 스탠더드오일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료유와 휘발유의 지속적인 소비 증가와 속속 발견되는 유전 덕분에, 윌리엄 멜론처럼 어떤 다른 회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업할 수 있는 경쟁자들이 생겨났다. 물론 스탠더드오일의 판매량도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탠더드오일의 시장점유율은 날로 줄어들고 있었다. 1880년에는 미국 전체 정제 능력의 90% 이상을 차지했지만 1911년에는 60~65% 수준으로 축소됐다. 멕시코 만 연안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미국 원유 시장에 대한 스탠더드오일의 지배력과 가격 결정자로서의 역할도 대폭 축소되었다. 그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전이 발견됨에 따라 국제시장의 지배력도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전역에서 스탠더드오일과 그의 무자비한 사업 관행에 반대하는 정치적·사법적 공세가 진행되고 있었다. 스탠더드오일은 사면초가에 처했다."(151-3)


"1911년 7월 말, 드디어 스탠더드오일은 몇 개의 사업 주체로 분할되었다. 이들 중 가장 큰 것은 지주회사였던 뉴저지 스탠더드오일로, 총 순자산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이것은 나중에 엑슨Exxon이 되어 계속 주도권을 행사했다. 두 번째로 큰 것이 순자산의 9%를 보유한 뉴욕 스탠더드오일로, 나중에 모빌Mobil이 되었다. 캘리포니아 스탠더드오일은 쉐브론Chevron이 되었고, 오하이오 스탠더드오일은 소하이오Sohio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영국 석유BP의 미국 판매회사가 되었다. 또한 인디애나 스탠더드는 아모코Amoco가 되었고, 콘티넨털오일은 코노코Conoco가 되었으며, 애틀랜틱은 아르코ARCO의 일불가 되었다가 훗날 선Sun사에 흡수되었다."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회사들은 분리 독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서로의 상권을 존중했고 옛날의 영업 관계를 지속했다. 그런 와중에도 일선에서 뛰던 사람들은 회사 분할로 인해 자신의 뜻에 따라 운영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177-8)


"이에 앞선 1907년, 쉘과 로열더치의 완전한 통합이 이루어져 로열더치 쉘 그룹이 탄생했다. 4년 전에 설립한 최초의 공동판매 회사는 '브리티시'를 앞에 넣어 '브리티시 더치'라 불렸는데, 이제는 '로열더치'라는 이름이 앞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는 (로열더치의) 디터딩이 마침내 승자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1907년에 완전한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스탠더드오일이 지배해왔던 세계 석유시장의 판도가 바뀌었다. 로열더치 쉘이 거대한 회사로 부상해 스탠더드오일의 시장 지배력을 위협했다. 1910년 디터딩은 〈스탠더드오일이 3년 전에 우리를 쓰러뜨리려 했다면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스탠더드오일은 가격 인하와 더불어 남부 수마트라에서 석유 이권을 따내기 위해 네덜란드 자회사를 설립했다. 로열더치 쉘이 스탠더드오일에 반격할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으로!'였다. 이는 1910년부터 1914년까지 로열더치 쉘의 슬로건이 되었다."(204-7)


"쉘과 로열더치의 통합으로 경영권을 잃은 마커스 새뮤얼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그러나 곧 양사의 통합이 러시아 석유에 크게 의존했던 쉘에 매우 다행스러운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 "1903년 바쿠에서 석유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했는데, 이는 러시아 전체를 뒤흔들었고 결국 러시아의 첫 번째 총파업이 될 노동쟁의의 물결을 일으켰다. 나라는 혼란스러웠고 정부는 위기에 직면했다. 러시아산 석유에 크게 의존하던 새뮤얼과 로스차일드사, 다른 기업들의 걱정은 당연했다. 러시아 정부는 민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를 느꼈고, 다른 많은 국가가 그랬던 것처럼 국외에서 기회를 찾으려 했다. 그들은 국론을 통일시키고 통치자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나라 밖에서 공동의 적을 설정했다. 그런데 다른 국가들이 실패했던 것처럼 그들도 적을 잘못 선택했다. 일본을 선택한 것이다." "러시아 군대는 참패를 거듭했고, 대마도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가 몰살당하면서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208-11)


"러시아 석유산업에 타격을 준 것은 정치적 혼란이나 인종 문제, 노동운동으로 인한 긴장만이 아니었다. 러시아산 석유는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대규모 생산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무질서하고 뒤떨어진 굴착 시설과 생산 설비는 생산 능력을 저하시키고 바쿠 주변의 유전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혔으며 결국 고갈을 재촉했다. 이는 급격한 가격 상승을 야기했고,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한 신규투자 축소로 이어졌다. 러시아 정부는 비어가는 국고를 채우기 위해 어리석게도 국내 수송 요금을 올렸다. 결과는 참담했다. 세계 시장에서 러시아산 석유의 가격이 더 올라갔고 그 결과 경쟁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장점이 오히려 단점으로 바뀌면서, 러시아산 석유는 다른 나라의 석유 공급에 문제가 있을 때만 필요한 잉여 생산물로 전락했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 석유산업의 구조를 전면적으로 바꾸어놓을 만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유럽에서 새로운 석유 공급원이 출현했으니 바로 루마니아였다."(214)


"러시아는 1860년대부터 중앙아시아에서 무자비한 영토 확장과 합병에 나섰다. 또한 중앙아시아의 인접국들을 정복해 부동항을 얻고자 했다. 영국의 입장에서 볼 때 러시아의 영토 확장은 인도와 통하는 요로要路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영국의 지위가 위태로워졌다. 페르시아가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갈 상황에 처한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페르시아와의 관계에서 경제적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다른 열강들을 배제하고 페르시아 지배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다아시와 그의 석유탐사 계획은 영국의 정책을 돕는 역할을 했다. 영국이 석유 이권을 차지한다면 러시아와 세력 균형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영국은 이 사업을 지원했다." "1901년 5월 28일, (뇌물에 넘어간) 페르시아 국왕 무자파 알딘은 역사적인 계약에 서명했다. 다아시는 페르시아 영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지역에 대해 60년 동안 석유 이권을 확보하게 되었다."(221-3)


"영국 정부 내에서는 다아시가 외국 자본에 사업 전체를 팔아넘기거나 이권 전체를 상실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열강들 사이에서 자국의 위상과 같은 전체적 전략과 고도의 정치적 문제였다. 외무부가 가장 우려한 것은 러시아의 확장주의와 인도의 안전보장 문제였다." "해군부가 안고 있는 문제는 좀 더 구체적이다. 즉 영국 함대의 연료로 쓸 중유 공급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영국 해군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전함들은 당시 석탄을 사용했고, 석유는 작은 선박에만 사용되었다. 석유가 소량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석유의 부존량이 영국 해군력 유지에 불안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석유가 충분하게 존재하는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당시 석유 연료를 선호한 해군부의 인사들조차 석유가 대규모로, 또 안정적으로 공급될 때까지는 보조 연료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런 면에서 다아시의 페르시아 사업은 지원 받을 가치가 있었다."(229)


"1907년 영·러 협정의 일환으로 영국과 러시아 양국은 페르시아를 분할해 각기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합의했다. 이런 합의는 양측 모두에게 이유가 있었다. 즉 러시아는 러일전쟁의 패배와 1905년 혁명의 혼란으로 국력이 약화되어 있어서 영국과 화해하기를 희망했다. 영국은 인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것을 우려했을 뿐 아니라, 이제는 독일의 중동 진출을 더욱 경계하고 있었다. 1907년 협약에 따라 페르시아 북부는 러시아 영향권 아래에, 남부는 영국의 영향권 아래에, 중부는 중립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중부 지역에 새로운 굴착 현장이 있었다. 테헤란 주재 신임 영국 공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페르시아를 양분한 이 협약은 '외국인에 대한 기존의 반감에 더욱 불을 댕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페르시아 분할은 영국, 러시아, 프랑스 간에 결성된 '3국 협상'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3국은 그로부터 7년 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터키제국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237-8)


"피셔 제독의 제일 목표는 영국 해군을 현대화해서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서운 기세로 산업화를 이루며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는 독일제국이 자신들의 적이 될 것임을 누구보다 먼저 확신했다. 그는 독일과의 충돌이 불가피할 경우, 석유 연료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석탄은 선원의 4분의 1이 동원되어 연료를 선적해야 하지만, 석유는 이런 인력의 투입 없이도 공해상에서 연료 재충전이 가능했다. 게다가 석유는 석탄 사용에 따른 피로감, 시간, 배출 가스, 불편성을 상당 부분 줄여주었고, 회부의 수를 절반 이상 줄여주었다. 석유의 장점은 가장 위험한 순간인 전투 중에 가장 잘 발휘되었다. 〈석탄 함정에서는 석탄이 소진되어가면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심지어 함포 요원까지 투입되어 석탄을 창고에서 화로로 옮겨야 했다. 전투 중 가장 위험한 순간에 전투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라고 처칠은 회고했다. 석유는 모든 함정의 화력을 증강하고 속력을 높여 주었다."(247-8, 254)


"영국의 '운명을 건 돌진'은 당연히 로열더치 쉘과 앵글로-페르시안의 극심한 경쟁을 야기했다. 물론 앵글로-페르시안이 명백하게 불리했다. 재정 기반이 약한 앵글로-페르시안이 쉘에 대항하기 위한 유일한 파트너는 영국 해군부였다. 그린웨이는 해군부에 20년간의 연료 공급 계약을 신청하고 재정적 위기에서 회사를 구하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그린웨이가 피셔의 위원회와 영국 정부에 증언한 것은, 정부의 도움 없이는 앵글로-페르시안이 쉘에 흡수되어 소멸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렇게 되면 쉘은 독점적 위치에 설 것이고 영국 해군에게 독점가격을 요구할 것이라 경고했다. 그는 새뮤얼이 유태인이고 디터딩이 네덜란드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쉘이 로열더치에 의해 관리되고 네덜란드 정부는 독일의 압력을 받기 쉽다는 것이다." "여러 부처들이 그린웨이의 주장에 지지를 보냈다. 쉘의 위협과 앵글로-페르시안의 애국심에 대한 그린웨이의 반복적인 주장에, 외무부는 찬성 입장을 고수했다."(258-60)


"적당한 가격에 필요한 양을 확보하기 위해서, 해군부는 석유 공급원을 소유하거나, 혹은 어느 정도라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했다. 석유를 비축하면 가능한 일이고, 그렇게 되면 시장 관리 능력도 커질 것이다. 또한 해군부는 원유 정제 능력을 갖추고 잉여분을 처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처칠은 〈석유의 품질, 정제, 도입선, 도입 경로 및 유전에 있어 어느 것 하나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확실한 석유 공급을 위한 관건은 사업의 다양화다〉라고 말했다." "1914년 6월 17일, 처칠이 하원에 제출한 의안은 두 가지 대목에서 중요했다. 하나는 정부가 앵글로-페르시안에 220만 파운드를 투자하고 대신 주식의 51%를 소유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사의 이사회에 이사 두 명을 파견한다는 것이었다." "민간 기업의 정부 소유를 주장한 처칠의 제안은, 디즈레일리가 수에즈 운하를 매입했던 것을 제외하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석유 의안은 의회 내부의 강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차이로 통과되었다."(261-5)


2장 세계의 세계에 대한 투쟁


"1915년까지는 영국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석유를 공급받는 데 아무 문제도 없었지만 1916년 초에 변화가 생겼다." "영국에서 석유 위기가 발생한 원인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선박에 의한 수송이 점차 감소하는 것으로, 독일의 잠수함 작전에 의해 영국 본토로 들어오는 모든 석유와 식량은 물론 기타 원자재의 공급이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석유 위기를 초래한 또 다른 원인은 석유 수요 급증이었다. 전시에는 전방이나 후방이나 석유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석유 부족을 우려한 영국 정부는 일종의 배급제를 도입했으나 효과는 일시적이었다." "석유 위기가 다가오자 미국과 유럽의 동맹국들은 이미 석유 공급 체계를 긴밀하게 통합해놓았다. 1918년 2월에는 연합국 석유회의가 발족되고 공동출자를 통해 석유 공급과 유조선 운행을 일원화해서 관리했다. 회원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4개국이었다. 이로써 연합국과 그들의 군대에서만큼은 보급물자 배분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285-8)


"1918년 11월 11일,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지만, 이제 석유는 전후 국제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새로운 유전을 얻기 위한 경쟁은,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하며 덤벼드는 기업가나 진취적인 사업가들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으로 국한되지 않았다. 세계대전을 겪으며 석유는 국가전략의 핵심요소로 등장했다. 따라서 정치가들과 관리들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 이상으로 싸움의 중심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전후 세계는 경제적 번영과 국력 신장을 위해 방대한 석유자원을 필요로 할 것이란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갈등의 초점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집중되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10년 전부터 석유 부존 가능성이 높다는 보고에 자극받아, 메소포타미아는 석유 이권을 따내려는 국가들과 석유 사업가들의 복잡한 외교적, 상업적 경쟁의 무대가 되었다.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허덕이며 새로운 수입원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터키제국 때문에 싸움은 더욱 격해졌다."(299-300)


"중동에서 석유 이권을 기대했던 것은 유럽계 회사들만이 아니었다. 미국계 회사들도 전 세계에 걸쳐 새로운 유전 개발 작전에 돌입했다. 미국도 중동으로 눈을 돌려야 했던 것이다. 석유가 갑작스럽게 고갈될지 모른다는 우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될 무렵 실질적인 강박관념으로 변해, 미국의 석유업계와 정부에 확산되었다. 이러한 우려는 1920년대 초까지도 계속되었다. '휘발유 없는 일요일', 전쟁 중에 부각된 석유의 엄청난 중요성 등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해 석유 고갈에 대한 두려움은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국제 무대에서 영국과의 충돌이 가시화되었다. 미국 정부와 석유업계는 미국이 재빨리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영국이 공격적 정책을 추진해 세계 도처의 석유자원을 선점할 것이라 믿었다. 정부는 서둘러서 미국 내 석유회사가 해외의 공급원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지원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미국 정부의 기본 원칙은 '문호 개방', 즉 미국의 자본과 기업에 대해 동등한 진입을 허용하라는 것이었다."(315-7)


# 적선협정赤線協定(1928. 7. 1)

페르시아와 쿠웨이트를 제외한 중동의 모든 유전 개발을 동업자들이 독점적으로 수행하기로 한 협정. 동업자로서 로열더치 쉘, 앵글로-페르시안, 프랑스(CFP), 미국(근동개발회사)가 각각 23.75%, 터키 석유회사의 굴벤키안이 5%의 지분을 부여받았다.


"자동차 시대의 초창기, 많은 미국인들은 휘발유라는 '새로운 연료'가 바닥나버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1917년부터 1920년 사이에 미국에서는 새로운 유전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고, 권위 있는 지질학자들은 미국의 석유 생산이 머지않아 한계에 이를 것이라는 우울한 예언을 했다. 석유 정제업자들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수요 증가로 공급 부족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 예상했다." "공급 부족이 예상되면서 가격 상승의 압력이 가중되었다. 그러나 석유탐사 기술도 발전하고 있었다. 1920년 이전까지 석유산업에 적용되는 지질학은, 지표 상에 관측되는 지형의 지도를 작성해 유전이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내는 '지표지질학'을 의미했다. 그러나 1920년 무렵에는 '지표지질학'으로 찾아낼 만한 유전이 거의 없었다. 즉 눈에 보이는 유전 후보지는 이미 모두 발견되었던 것이다. 유전 탐사자들은 지표 아래의 지질 구조를 통해 석유 부존 가능성을 알아내야 했다. 새로 등장한 학문인 '지구물리학'이 이를 가능케 해주었다."(355)


"20세기 초, 미국을 제외한 서반구의 석유탐사는 대부분 멕시코에 집중되었고, 멕시코는 곧 세계 석유시장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등장했다. 멕시코에서 벌어진 갈등은, 후에 세계 각지의 정부와 석유회사 간에 벌어진 본질적이고도 장기적인 싸움의 한 표본이었다. 쟁점은 두 가지로, 합의의 안정성과 주권 및 소유권의 문제였다. 누가 석유의 이익을 차지할 것인가? 멕시코 측은 오랫동안 잊혔던 원칙을 재차 주장했다. 이 나라에서는 1884년까지 지하 부존자원은 모두 군주에 귀속되며, 군주가 없을 경우에는 국가가 소유하게 되어 있었다." "혁명이 추구한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지하자원을 국가가 소유한다는 원칙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1917년 헌법 27조에 명문화되었는데, 이것이 싸움의 발단이 되었다. 멕시코 측은 석유의 소유권을 되찾았지만 외국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개발하고 판매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또한 투자자들은 안전한 계약과 수익 전망 없이는 개발 위험과 비용을 부담할 의사가 없었다."(395)


"한 석유회사는 멕시코 내에 있는 미국 소유의 석유 매장 지역을 보존하기 위해 본국 정부에 군사적 개입을 요구했고 미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멕시코가 외국 부채를 갚기 위해 수입을 올리려고 노력하는 중이어서, 문제는 한층 더 복잡해졌다. 미국의 주요 은행들은 멕시코의 석유 수입이 늘어나 자신들의 부채를 상환해주길 바랐다. 그래서 은행가들은 미국 석유회사에 대항하는 멕시코 측을 지원했고, 석유회사들이 요구하는 군사적 개입과 응징조치에 강력히 반대했다." "미국이 생각하는 멕시코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불안한 장소, 야만적으로 무질서한 계약을 꾸미는 나라, 전략적인 자원 유입에 위협을 주는 나라였다. 반면 멕시코가 미국과 미국의 석유회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외국 세력의 착취와 침략, 주권 침해의 고착화, 강한 힘을 가진 '양키제국주의'였다. 석유 회사들이 불안과 위기를 느끼면서 기업 활동이 빠른 속도로 후퇴했고, 멕시코는 곧 세계 석유 강국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다."(395-6)


"멕시코의 정치적 상황은 석유사업가들이 대거 베네수엘라로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멕시코와는 달리 베네수엘라는 정치적으로 안정돼 있었는데, 후안 비센테 고메스 장군 때문이었다. 잔인하고 교활하며 탐욕스러웠던 이 지배자는 27년 동안 베네수엘라를 통치하며 자신의 재산을 불려나갔다." "고메스 정권 아래의 베네수엘라는, 멕시코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정치적 예측 가능성, 행정적·재정적 안정성을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유전 개발은 맹렬한 속도로 추진되었다. 1920년 140만 배럴이었던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량은 1929년에 이르러 1억 3,700만 배럴에 달했고, 총생산량 측면에서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해 베네수엘라의 석유 수출액은 전체 수출액의 76%에 달했으며, 정부 세수의 절반을 차지했다. 베네수엘라는 이미 로열더치 쉘의 가장 큰 단일 석유 공급원이었다. 또한 1932년에는 페르시아와 미국을 제치고, 영국의 단일 최대 공급원이 되었다."(396-7, 400-1)


"아크나캐리 회담이 열린 때는 1929년 주식시장이 붕괴되고 대공황이 시작되기 1년 전이었고, 대드 조이너가 동부 텍사스에서 석유를 발견하기 2년 전이었다. 그러나 이미 세계 석유시장은 미국, 베네수엘라, 루마니아, 러시아에서 유입되는 석유로 넘치고 있어서 '파멸을 초래하는 경쟁'이 벌어질 징후가 보였다. 특히 러시아 석유가 범람하자 석유업자들은 즉시 아크나캐리로 몰려왔다." "아크나캐리는 시대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었다. 산업 합리화, 효율성, 중복 배제 등은 유럽과 미국에서 그 시대의 가치로 여겨지고 목표가 되었다." "존 록펠러와 헨리 플래글러 시대에는 '자유로운 경쟁'이 싸워서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전 세계를 완전히 지배하고 독점함으로써 상업 경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젠 다른 회사를 항복으로 몰고갈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회사도 없고, 정치 현실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따라서 아크나캐리에 모인 석유업자들의 목적은 정복보다는 협약이었다."(442-3)


"아크나캐리 문서의 핵심은 '현상유지As-Is' 협약이다. 이 협약에 가담한 석유업체들은 각 회사의 1928년도 시장점유율에 입각해, 총수요를 백분율로 나눈 값으로 시장별로 자신의 몫을 할당받았다. 총수요가 증가하면 업체들도 실제 생산량을 바로 증가시킬 수 있었지만, 백분율로 나눈 몫은 항상 똑같이 유지해야 했다. 이 외에도 각 업체는 비용 절감을 위한 설비 시설 공유에 동의하고, 새로 정유소와 그 외 시설들을 설립할 때에는 신중히 검토하기로 했다. 또한 효율을 높이기 위해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업체가 시장에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판매 가격은 미국 걸프 연안의 가격에 수송비를 합산하는 전통적인 방식에 기초해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런 공급 방식은 추가 이윤을 의미했다." "몇 달 후, 이 협약의 주체들은 석유 생산량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하는 데 동의했다. 협약 업체들이 배당된 시장 지분 이상으로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 경우는, 가외 생산량을 타 연합 업체에 팔 수 있을 때뿐이었다."(446-7)


"'현상유지' 협정은 무無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석유 공급 과잉에 이어진 공황에 맞서기 위해서뿐 아니라 유럽과 그 밖의 지역(대표적으로 소련을 겨냥한)에서 출현하는 강력한 정치세력에 맞서자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 "1930년대 석유업계에 미치는 정치적 압력의 형태는 다양했다. 정부는 수입 할당을 매기고, 가격을 정하고, 외환 거래에 제한을 가했다. 또 업계가 잉여 농산물에서 뽑은 알코올을 자동차 연료에 혼합하도록, 또 기타 석유 대체품을 사용하도록 강요했다. 정부는 막대한 신규 조세를 부과했고, 상호 무역 협정과 보다 큰 정치적 목적을 연계하기 위해 석유 수출입 거래를 통제하는 데 개입했다. 정부는 경제적 타당성이 부족한 국내 시설에 투자하도록 강압하면서 이윤 송금을 봉쇄했고, 업계에 대해 일정한 재고분을 유지하라고 주장했다." "전 세계적으로 1930년 후반기는 공황시대의 끝인 최악의 시기였기에, 주요 석유업체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정부 개입에 맞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454-5)


"한편, 경기 침체의 수렁 속에서 '석유는 더 이상 황금이 아니다'란 사실을 깨달은 페르시아의 레자 팔레비는 격노했다. 앵글로-페르시안의 석유 로열티는 수출 소득의 3분의 2를 차지했으며 정부 수입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경기 침체로 인해 앵글로-페르시안이 내는 로열티가 1917년 이래 최저로 떨어졌다. 1932년 11월 6일의 각료회의에서 팔레비 왕은 돌연 앵글로-페르시안의 석유 이권을 일방적으로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1933년 4월 말, 마침내 영국 정부와 국왕 간에 협약이 이루어졌다. 석유 이권은 4분의 3으로 감소되었고, 페르시아가 유가 변동과 관계없이 톤당 4실링의 고정 로열티를 보장받았다. 동시에 페르시아는 이 회사의 주주들에게 실질적으로 지급되어 왔던 타 지역 이윤의 20%를 받게 되었고, 다른 사태와 무관하게 연간 최소한 75만 파운드의 보상을 약속받았다. 한편 석유 이권 인가 기간은 1961년에서 1993년으로 연장되었다. 결국 앵글로-페르시안의 본질적인 입지는 유지되었다."(455-9)


"1939년 9월, 유럽의 전쟁 발발 이후 몰수당한 미국의 석유회사 측과 미 정부 간의 이해는 심하게 엇갈렸다. 루스벨트 행정부에게는 뉴저지 스탠더드오일이나 기타 미국 회사들에 대한 자산 보상보다는 국가 안보가 중요했다." "당시 미국은 멕시코를 반구형 방어 체계에 묶어두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이 멕시코산 석유 공급에만 관심을 가졌지, 실질적으로 누가 이곳의 공급권을 쥐고 있는지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멕시코의 석유 자산 몰수는 볼셰비키 혁명이나 1911년 스탠더드 트러스트 해체 이후 업계가 겪었던 고통 중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 외국 회사와 멕시코 정부의 타협 과정은 협상의 정당성을 확인시켜주었다. 1938년 국유화는 혁명이 얻어낸 커다란 승리였다. 멕시코는 석유산업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 아래 두게 되었고, 멕시코 석유회사는 국영 석유회사 중 첫 번째이며 가장 중요한 회사로 부각되었다. 멕시코가 미래의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468-70)


"쿠웨이트에서의 석유탐사는 1935년에 시작되었고, 1936년 들어서야 비로소 지질 관측이 실시되었다. 쿠웨이트 동남부 버간은 가장 유망한 지역으로 관측되었고, 1938년 2월 23일 놀랄 만한 양의 석유가 발견되었다." "반면 이웃 사우디아라비아의 탐사는 실망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1938년 3월, 놀랄 만한 뉴스가 터졌다. 담맘 지역 7호 시추정의 지하 4,727피트 지점에서 대규모 석유가 발견된 것이다. 담맘에서 시추를 시작한 이래 거의 3년 만의 일이었다. 사우드 국왕과 사우디아라비아는 돈더미에 올라앉게 되었고, 이제 왕국의 존속은 순례자 수의 변동과는 무관해졌다." "1933년 협정의 부속 비밀문서에 따라 카속사는 1939년 5월 31일 우선권을 행사하여 44만 제곱마일에 달하는 절대적 이권 지역을 확보했다. 무려 미국 면적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물론 그만한 대가가 지불되었다. 사우디의 재정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소칼은 거듭해서 차관을 공여했는데, 총규모가 수백만 달러에 달했다."(504-5)


# 카속사(California-Arabian Standard Oil Company)는 미국 텍사코와 소칼의 합작 기업으로,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 기업인 아람코의 전신이다.


3장 전쟁과 석유


"1930년 후반 일본의 석유 생산은 국내 소비량의 불과 7% 정도를 충당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전부 수입에 의존했는데 80%는 미국에서, 10%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수입했다." "만주사변이 발발한 직후인 1930년대 초, 일본 정부는 국책 수행에 협조하도록 석유산업을 통제하기로 했다. 1934년 일본 군부는 시장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고자 했던 국내 업자들의 지지를 얻어 '석유산업법'을 통과시켰다. 외국 기업은 의무적으로 정상 영업에 필요한 재고 수준을 넘어서는 6개월분을 비축해야 했다. 목적은 분명했다. 국내 자본으로 석유 정제 사업을 육성하고, 외국 기업에 대한 의존을 줄이며,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새로운 식민지인 만주에서 석유사업을 독점할 회사를 설립하려고 했는데, 여기에서도 그 목적은 구미 기업의 배제였다." "워싱턴과 뉴욕, 런던에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전면적인 혹은 부분적인 대일 금수조치를 취하고 일본에 원유 공급을 억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514-6)


"진주만 공격을 계획한 야마모토는 러일전쟁 당시, 즉 1904년 뤼순 항 기습에서 공격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점이 큰 실수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진주만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일본이 전쟁을 결의한 최대의 동기는 석유였다. 그런데 하와이 작전에는 석유가 빠져 있었다. 야마모토와 참모들도 석유에 관한 한 미국이 압도적 우위에 있음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오하우 섬에 있는 석유 저장 기지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석유 기지에 대한 공격은 작전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심각한 반격을 유발할 수 있는 전략적 실패였다. 하와이에 있는 석유는 전부 미국 본토에서 운반된 것이었다. 일본군이 미국 함대의 석유 비축 기지와 저장 탱크를 파괴했다면 미국 태평양 함대의 모든 선박은 작동 불능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는 진주만에서 격침된 군함에 그쳤다. 만약 석유 비축 기지가 파괴되었다면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캘리포니아에서 석유를 공수해야 했다."(545-6)


"1937년에서 1938년, 이 게 파르벤은 하나의 독립된 기업이라기보다는 독일 산업의 한쪽 팔이었다. 게다가 철저히 나치화 되어 있었다. 회사의 3인자를 포함해 모든 유태계 임직원들이 제거되었고, 반反나치의 칼 보쉬 회장도 물러났다. 반면 나치당에 속해 있지 않던 여타 이사들은 서둘러 입당원서에 서명했다. 4개년 계획의 야심찬 공약들은 매우 웅대했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내실 있는 합성연료 산업을 완성하지 못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9월 1일까지, 수소첨가법 설비 14개가 완전 가동 중이었고 6개가 추가로 건설되고 있었다. 1940년 합성연료 생산량은 하루 7만 2,000배럴에 달하여 총석유 공급량의 46%를 차지했다. 합성연료는 군사적 필요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욱 의미심장했다. 베르기우스법이라고 불리는 수소첨가법으로 생산된 합성연료는 독일의 전체 항공 휘발유 수요의 95%를 점했다. 만약 합성연료가 없었다면 독일 공군은 비행기를 띄울 수 없었을 것이다."(556)


"파르벤은 소위 '자유노동자'와 '노예노동자'를 동시에 사용했다. 노예 노동자에 대해서는 성인에게는 기술에 따라 3~4마르크, 어린이에게는 그 절반을 지급했다. 물론 그 돈은 히틀러 친위대의 금고 속으로 들어갔다." "한 추정치에 따르면, 1944년 독일 합성연료 산업의 전체 노동력 중 3분의 1은 노예 노동력이었다. 파르벤은 아우슈비츠에서의 친위대와의 합작사업에 점점 깊이, 그리고 열성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양측은 여러 가지로 교류했다. 크리스마스 전날, 아우슈비츠에 상주하는 파르벤의 관계자는 지역 친위대 사람들과 휴일 사냥에 나가게 되었다. 그들은 토끼 203마리와 여우 1마리, 살쾡이 1마리를 잡았다. 파르벤의 산업단지 건설 책임자가 여우 1마리와 토끼 10마리를 잡아 사냥 챔피언이 되었다. 당시의 사냥 기록에서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모두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 구역에서 올해 달성한 성과 중 가장 좋았다. 이 기록은 조만간 강제수용소에서 있을 사냥 기록만이 깰 수 있을 것이다.〉"(575-7)


"영국의 입장에서 전쟁에 필요한 석유의 확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전쟁의 발발은 필요한 석유의 양이 비약적으로 증가함을 의미했다. 이제 의지할 곳이라고는 세계 석유 생산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미국뿐이었다. 영국 정부와 쉘-멕스 하우스에 있는 석유 관계자들에게는 두 개의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석유를 공급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외환 사정이 악화되고 있는 영국에 지불 능력이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은 워싱턴에 있었다. 1940년 12월, 3선에 성공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미국이 민주주의의 '병참고'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다음해 3월에는 무기대여법이 제정되어 영국에 물자 공급을 하는 데 장애가 되었던 자금 문제가 해소되었다. 루스벨트가 언급한 바와 같이 '멍청하고 우둔하고 낡은 달러 사인'은 불필요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상환 시기를 명기하지 않은 채 대출한 물자 중에는 석유도 있었다. 선박을 이용해 석유를 영국으로 수송하는 데 장애가 되던 중립법도 완화되었다."(614)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미군은 석유 공급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육군은 석유 소비량에 관한 기록조차 보유하지 않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자가 참호전이었다면 후자는 기동전이었다(전쟁 중에 처칠과의 만찬회 자리에서 스탈린은 〈이번 전쟁은 엔진과 옥탄가의 싸움이다. 미국의 석유산업과 자동차 산업을 위해 건배하자〉라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막대한 양의 석유를 소비했다. 유럽에 파견된 미군은 제1차 세계대전의 100배나 되는 휘발유를 사용했다. 미 육군 1개 사단의 기계력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4,000마력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18만 7,000마력에 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서 운송된 물자의 절반이 석유였다. 미군 병참부대의 추산에 따르면, 미군 병사 1명이 해외에 파견되는 경우 67파운드의 장비와 보급물자가 필요했는데, 그중 절반이 석유제품이었다."(6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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