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 환경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유전체에 관한 행동 후성유전학의 놀라운 발견
데이비드 무어 지음, 정지인 옮김 / 아몬드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부 이것은 혁명일까


"후성유전학은 우리의 DNA '위에' 혹은 DNA에 달라붙은 뭔가가 실제로 '존재하며', 이들이 DNA가 기능하는 방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런 이유로 후성유전epigenesis 과정은 우리의 거의 모든 특징에 영향을 미친다. 아직은 과학자들이 후성유전적 표지에 관해 알아야 할 사실들을 막 알아가기 시작한 단계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확실히 획기적이다. 경험(그리고 우리가 처한 환경 속 여러 상황)이 일부 후성유전적 표지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일란성 쌍둥이 사이의 차이, 식생활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어머니의 행동이 성인이 된 자녀의 스트레스 상태에 미치는 영향 등 아주 다양한 것들을 후성유전적 표지로 설명할 수 있다. 후성유전학의 이런 발견들은 본성 대 양육 논쟁을 뿌리째 뒤흔드는 데 일조했다. 요컨대 후성유전적 사건들은 DNA와 환경의 접점에서 발생하므로 이를 알면 우리의 특징들이 언제나 본성과 양육 '두 가지 모두'의 결과라는 것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17-8)


"DNA는 우리의 '그 어떤' 특징도 단독으로 만들어낼 수 없다! 오히려 우리의 형질은 우리가 한 개체로서 발달하고 생을 살아가는 동안 유전적 요인과 비유전적 요인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유전자들, 즉 DNA의 분절된 단위들은 항상 맥락의 영향을 받으며, 어떤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최종적으로 그것이 나타내는 표현형 사이에 절대적인 인과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현재 어떤 존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다. 형질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비유전적 요인들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것이 마주한 맥락의 '결과'이다. 의사가 우리 유전자의 구성 방식을 살펴보고 특정 질병이 발생할지 아닐지 '확률' 이상을 알려줄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맥락 속에서 살아가는지가 삶에서 어떤 결과가 생길지에 언제나 일부 역할을 담당하므로, 유전자만으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단언할 수 없다."(28-9)


"오늘날의 생물학자들이 쓰는 정의에 따르면 〈후성유전이란 다양한 맥락 또는 상황에 따라 유전 물질이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되는, 즉 발현되는 방식을 일컫는다.〉" "유전자(의 작용)을 바라보는 전통적 관점에서는 우리가 어떤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 관점에 따르면 당신의 눈이 파란 것은 파란 눈과 관련된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방암과 관련된 유전자를 갖고 있다면 유방암이 발병할 위험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러나 후성유전의 정의에 따라 생각해보면, 이런 일들을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유전자의 활동 정도가 다양한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DNA가 무엇을 '하는지'다. 유전자의 스위치가 '꺼질' 수 있다면 그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후성유전학의 관점에서 볼 때 특정 유전자를 가진 것은 열쇠 하나를 가진 것과 비슷하며, 딱 맞는 열쇠구멍이 없다면 그 열쇠는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33-4)


"일반적으로 어떤 개인의 유전체genome, 즉 그 사람의 세포 속에 들어 있는 유전 물질의 총합은 평생 변함없이 유지된다고 여겨진다.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를 제외하면 우리가 수정될 때 받은 DNA 염기서열 정보는 죽을 때 몸속에 있는 정보와 똑같다." "이 때문에 전통적으로 생물학자들은 '발달'이란 유전체가 아닌 유기체의 특성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일단 DNA의 일부가 시기에 따라 다르게 행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우리의 유전체가 아주 중요한 방식으로 역동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유전체가 기능하는 방식의 차이가 DNA의 화학적 구조 변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다. 즉 사람의 유전체가 살아가는 동안 확실히 변화한다는 점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됐다. 따라서 개인의 몸속에 있는 유전 물질이 평생 변화하지 않는다는 기존 통념은 수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발달 중인 유전체', 주위 환경이 맥락에 반응하여 변화하는 유전체를 가지고 태어난다."(35-6)


"고전적 개념의 분자 유전자란, 세포질 안에서 물리적으로 단백질을 생산하는 세포소기관에게 염기서열 정보를 제공하는 DNA 분절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DNA 안에는 〈OO단백질을 부호화하는 분자 유전자가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별개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유전자라는 말을 쓸 때 내가 의미하는 바는, 단백질(또는 어떤 생물학적 기능을 수행하는 산물)을 만드는 데 쓰이는 서열 정보를 품고 있는 DNA의 분절 혹은 분절들이다. 현대 생물학자들이 '유전자'를 이야기할 때는 어느 특정한 한 가지를 의미하는 게 아니며, 유전자는 근본적으로 가설상의 개념으로 남아 있다는 점을 기억해두자. 우리 내부에는 신체와 정신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일련의 안내서, 이를테면 '청사진'이나 '조리법' 비슷한 것이 들어 있다는 흔한 믿음은 의심의 여지없이 틀렸다. 오히려 DNA 분절에는 많은 경우 모호한 정보가 담겨 있으며, 이런 정보를 사용하려면 먼저 맥락에 따른 편집과 재배열을 거쳐야 한다."(56-7)


"20세기 초 과학자들은 배아가 발달함에 따라 배아의 세포들이 분화한다는 것, 즉 그 세포들로부터 여러 성숙한 세포들에 전형적인 변별적 특징들이 발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윽고 분화가 끝난 정상적 세포들은 다능성을 잃는다. 뉴런이 된 세포는 계속 뉴런으로 남으며, 저절로 간세포나 다른 어떤 세포로 변하는 일은 결코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잠재력을 상실하는 이유에 관한 한 가지 설명은, 세포들이 성숙하고 분화하는 동안 다른 종류의 세포가 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잃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58년에 프레더릭 스튜어드가 성숙한 식물에서 채취한 뿌리 세포 하나로부터 새로 완전한 식물이 생성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 식물, 그리고 이후 밝혀진바 모든 생물의 분화된 세포들은 원래의 정보를 전혀 잃지 '않는다'. 이리하여 생물학자들은 우리 서재의 읽지 않은 책들 속 정보처럼, 모든 종류의 세포가 되는 데 필요한 정보가 분화된 세포들 속에도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77)


"염색체가 비활성화될 수 있다는 발견은 다능성과 분화의 수수께끼에 해답을 제시하는 듯했다. 특히 만약 염색체 중에서 (분자 전체가 아니라) 일부 '분절'만 비활성화될 수 있다면 말이다. 실제로 이는 자연이, 동물이 진화에서 생겨나는 가장 중요한 문제, 바로 다세포 동물의 성체가 자신이 살면서 발달시켰던 다양한 세포 유형을 자식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풀어낸 방식이었다." "자연은 우리가 단 하나의 다능성 세포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그 세포의 세포핵 속 중앙 '데이터베이스'에 들어 있는 정보의 다양한 조각들을 사용하여 모든 세포 유형을 '발달시킬' 수 있게 했다. 일단 어떤 유전자들은 활성화하고 또 다른 유전자들은 비활성화하는 시스템이 자리 잡으면, 일부 줄기세포는 이런 방식으로, 다른 줄기세포는 저런 방식으로 발달하게 만드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과학자들은 X-비활성화를 연구함으로써 유전자 발현 '조절'이 발달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79-80)


2부 후성유전학의 기본 개념들


"일란성monozygotic(MZ) 쌍둥이는, 정자 하나와 난자 하나가 수정되어서 생기는 하나의 수정란(접합자)에서 발달하기 때문에 백 퍼센트 동일한 DNA를 공유한다." "2005년, 마드리드 소재 스페인 국립암센터는 일란성 쌍둥이 40쌍의 후성유전적 상태에 관한 중요한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연구자들은 이 쌍둥이들의 유전체 전체에서 일어난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를 모두 검토하여 '젊은' 일란성 쌍둥이들이 서로 극히 유사한 후성유전적 표지 패턴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쌍둥이들이 나이 들면서 각자 삶에서 서로 다른 경험이 쌓일수록 그들이 후성유전적 상태도 서로 달라졌으며, 〈나이가 더 많고,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영위하며,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 쌍둥이에게서는 유전체 전체에 나타난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에서 현저한 차이의 증거가 보였다. 즉, 살면서 겪은 경험들이 DNA에 '표시'를 남기며 이 표시들이 우리의 유전체가 발현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112-4)


# DNA 메틸화 : DNA 한 가닥에 '메틸기'라는 분자 하나가 달라붙는 과정을 가리키며, 유전자 발현을 중단시키는(다른 말로 하면, RNA 전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


# 히스톤 아세틸화 : 히스톤에 아세틸기가 부착되는 과정을 가리키며, 유전자를 '침묵'시키기도 하고 '활성화'시키기도 한다.


"다만 차이를 만드는 것이 환경 요인일 때 '어떤 특징을 초래한다는 것'과 '특징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이라는 것'이 서로 다른 일임을 머릿 속에 새겨두는 것이 좋다. 상황이 반대여서 차이를 만드는 것이 유전자라면, 우리는 이 상황의 차이를 놓치고서 유전자만이 원인을 제공할 능력을 지녔다고 가정하기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유전학자가 X라는 질병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존재하지만 그 병이 없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유전자 하나를 발견했다고 상상해보자. 이 경우, 많은 사람이 단독으로 그 병을 초래하는 유전자가 발견되었다고 결론지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발견된 이 유전자가 그 병의 표현형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이 유전자가 환경 요인과 무관하게 그 표현형을 '초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섭식이 단독으로 한 표현형의 발달을 초래할 수 없듯이 유전자 역시 그럴 수 없다. 유전 요인도 환경 요인도 '독립적으로' 표현형을 초래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119)


"환경이 후성유전체에 영향을 준다는 발견은 중요한 질문 하나를 제기한다. 바로 환경 요인이 어떻게 '우리 내부로' 들어와 유전자 활동에 영향을 주는가 하는 질문이다. 꿀벌의 경우 로열젤리 속 특정 단백질이 꿀벌의 몸속 호르몬 농도를 높인다. 이와 비슷하게 포유류의 경험, 그러니까 우리의 경험은 몸속 호르몬 방출을 부추기고, 그 호르몬 분자들이 DNA 근처로 이동해 후성유전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또한 환경은 감각기관을 자극함으로써 우리 내부 상태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보는 것과 듣는 것은 둘 다 우리 몸 속에 후성유전적 효과를 이끌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낸다. 환경에서 생겨난 자극은 감각기관의 뉴런, 혈류 속 호르몬, 세포핵 속 유전자 등 여러 측면에서 생물학적 활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현재와 같은 상태가 되었는가 하는 질문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언제나 우리가 무엇을 경험했는가,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 몸, 세포, 기관, 유전자가 어떤 맥락에 처해 있는가다."(122-3)


"아동기의 방임이 성인기의 불안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모들에게 자녀를 방임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만약 방임이 '어떻게' 불안으로 이어지는지 안다면 그 외에도 의지할 수단들이 많을 것이다. 발달상 결과의 '기계적' 원인을 추적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추상적으로 생각해보면 더 명확하다. N(방임)이라는 조건이 A(불안)라는 달갑지 않은 결과와 연관된다는 것을 안다면, 할 수 있는 일은 N에 영향을 주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N이 D를 초래하고, D는 W를 초래하며, W는 P를 초래하고, 이것이 A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면, 앞선 네 단계 중 어느 단계에 개입하더라도 그 좋지 않을 결과를 피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런 식의 연쇄적 인과, 그러니까 한 사건이 다음 사건을 초래하며 아주 긴 연쇄를 이루는 일은 생물계에서 너무나 흔하기 때문에 생물학자들에게는 이를 가리키는 단어가 따로 있을 정도이다. 바로 '캐스케이드cascade'다."(152)


"우리가 후성유전에 관해 확실히 아는 한 가지는 세포마다 후성유전적 상태가 다르다는 것이다. 후성유전 메커니즘은 자연이 분화의 문제를 풀기 위해 마련한 해법이었기 때문이다. 수년 동안 과학자들은 사람들이 볼 안쪽에서 면봉으로 채취한 볼세포(협측 세포)의 DNA를 살펴봄으로써 인간 유전체를 검토했다. 우리의 모든 세포에는 동일한 유전정보가 들어 있으므로 유전정보에 접근하고 싶다면 '아무' 세포나 들여다보면 된다. 하지만 '후성유전정보'에 관해서 만큼은 볼 안쪽에서 가져온 세포와 뇌에서 가져온 세포가 서로 다른 그림을 보여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세포가 경험의 후성유전적 영향을 잘 보여줄 수 있을까? 답은 뻔할 수도 있다. 이전 경험에 반응하여 자체의 구조와 기능을 변경함으로써 경험을 '학습할' 수 있는 세포일 것이다. 어떤 종류의 세포에 이런 능력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클까? 바로 뉴런이다. 어쨌든 학습에 관해서라면 뇌가 가장 좋은 출발점 아니겠는가."(180-1)


"2009년에 미니 연구실의 패트릭 맥가윈과 동료들은 세 범주의 사람들의 뇌에서 추출한 DNA 연구에 관해 보고했는데, 그 세 범주는 어렸을 때 학대(성적 접촉, 심한 신체적 학대 그리고/또는 심한 방임)를 경험한 자살자들과, 아동기에 학대를 경험하지 않은 자살자, 학대를 전혀 경험하지 않았으며 자살이 아닌 사고로 갑자기 사망한 대조군이었다. 중요한 것은 맥가윈과 동료들이 해마 세포를 검토했다는 점인데, 해마는 쥐들이 갓 태어난 시기에 핥기와 털 고르기를 받는 경험이 영향을 미치는 바로 그 뇌 영역이다." "이 연구를 통해 생애 초기 경험이 사람의 후성유전적 상태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가 나왔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동기에 학대받은 자살자들은 사망 원인과는 무관하게 학대당한 적이 없는 사람들에 비해 GR 촉진유전자가 심하게 메틸화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오래전 나쁜 양육을 경험한 사람들은 뇌에서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단백질들이 덜 발현되어 있었던 것이다."(183)


"공학으로 만들어진 물건은 논리적으로 조립되고 용도에 딱 들어맞는 요소들을 갖췄다는 인상을 준다. 반대로 만약 어떤 생물학적 특징이 다른 맥락에서는 다른 기능을 했을법한 잡동사니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면, 그 이유는 바로 자연선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후성유전적 변형은 자연이 기억 시스템을 창조할 때 선택했을 법한 바로 그런 종류의 메커니즘이다. 어찌 보면 후성유전적 변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기억이기 때문이다. 분화된 세포가 다른 세포들과 구별되는 특징을 갖는 이유는 후성유전 상태가 반영된 특유의 유전자 발현 프로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분화된 세포들이 분열할 때는 항상 그 특유의 후성유전 상태를 각자의 '딸세포'에게 전달함으로써 딸세포들도 모세포와 동일한 '유형'의 세포가 되도록 한다. 이렇게 새 세대 세포들 속 후성유전적 표지는 앞 세대 세포 속에 존재했던 정보를 그대로 보유하게 된다. 이러한 세포의 '정보 보유'는 일종의 세포 '기억'으로 볼 수 있다."(209-10)


"물론 후성유전적 표지가 운반하는 세포 '기억'과, 우리 뇌가 사실 정보와 자전적 정보를 유지하는 데 사용하는 심리적 기억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하지만 자연선택은 아마추어 실험가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자연선택은 세포분열의 맥락에서 정보를 보유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시스템을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점을 잘 활용해 다른 맥락에도 그 시스템을 가져다 쓸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전략은 자연선택에서는 워낙 전형적이어서, 진화생물학자들은 이 전략에 따로 굴절적응exaptation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오늘날의 새들에게 날개는 날 수 있게 해주므로 적응에 유리하다. 하지만 깃털은 날지 않는 일부 공룡들에게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론가들은 깃털이 원래는 비행이 아닌 다른 '용도'를 위해, 아마도 공룡의 체온 조절을 돕기 위해 진화했으리라고 주장했다. 깃털은 다른 이유로 나타났지만 이후에는 비행을 위한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으니 굴절적응의 전형적인 예가 되었다."(210-1)


"음식 섭취가 후성유전 상태에 영향을 주는 이유는, DNA를 메틸화하는 메틸기를 우리 몸이 어디서 얻는지 생각해보면 명백해진다. 메틸기는 바로 우리가 먹는 음식에서 온다. DNA 메틸화가 진행되는 동안 메틸기를 공급하는 가장 중요한 물질은 s-아데노실메티오닌, 일명 SAM이라는 분자다. 궁극적으로 SAM은 메틸기 대부분을, 그러니까 DNA 메틸화 동안 DNA에게 내어주는 바로 그 메틸기들을 비타민 B2, B6, (엽산 또는 폴산이라고도 하는) B9, B12 그리고 콜린을 함유한 식품에서 얻는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섭취하는 식품에 이 영양소들이 너무 많거나 너무 적으면 메틸기 공급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이 영양소들은 그 화학적 조성에 힘입어 몇 가지 생물학적 과정에 필요한 원재료를 공급하는데, 시리얼에 이 영양소들이 보충되어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즉, 콜린이나 엽산을 충분히 먹지 않으면 SAM 농도 저하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DNA와 히스톤 모두의 메틸화를 감소시킬 수 있다."(249-50)


"한 연구자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 겨울 기근에 노출된 사람들을 살펴보고 임신기를 전후해 일어난 후성유전적 사건이 그 인구 집단 내에 불균형한 비만율에 원인을 제공했을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들은 태아의 성장을 촉진하는 특정 호르몬 생산에 관여하는 DNA 분절 하나를 분석했다. 기근기에 태내에 있었던 이들은 태아기에 기근에 노출되지 않은 동성의 형제자매와 비교해 이 DNA 분절의 메틸화가 상당히 감소해 있었다. 흥미롭게도 태아기 후반에 기근에 노출된 사람은 그렇지 않은 형제자매들과 유사한 메틸화 프로필을 보였으므로 기근의 영향은 수정 시기와 가까운 더 이른 때에 확립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 연구가 2000년대 중반에 실시되었으니 기근 노출은 그로부터 60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음을 명심하자. 그러니까 수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경험의 영향이 60세 정도 된 사람들에게서 감지되었다는 말이다(물론 영양 이외의 스트레스 요인들도 비만의 원인을 제공했을 수 있다)!"(253-4)


3부 대물림의 의미와 메커니즘


"1880년대에는 (획득형질이 세대간에 유전된다는) 라마르크의 주장이 널리 존중받고 있었는데, 이 무렵 아우구스트 바이스만이라는 독일의 한 생물학자가 대물림이 일어나는 '방식'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그의 주장은 현대 생물학에서, 생식세포(정자/난자)와 체세포(우리 몸을 구성하는 나머지 모든 세포) 사이에 존재한다고 가정된 경계선을 뜻하는 '바이스만 장벽'이라는 개념으로 고이 모셔졌다. 이 장벽은 체세포에 생긴 변화가 장벽 너머 생식세포에 영향을 주는 일을 방지함으로써, 획득된 형질이 유전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관점에서 보면, '획득 형질의 유전'의 예가 되려면 연습을 통해 커진 역도선수의 '근육'세포가 그 선수의 아들이 어떤 경험을 하든 상관없이 큰 근육을 갖게 만드는 방식으로 선수의 '정자'세포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바이스만이 보기에, 연습을 통해 누군가의 체세포에 일어난 영향이 그 사람의 생식세포에 영향을 줄 수 없다면 획득 형질의 유전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287-9)


"유전 물질은 경험 요인에서 영향받을 수 없다는 이 개념은 '경성' 유전이라고 알려진 것으로, 표현형은 반드시 유전자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유전자 결정론이 널리 퍼진 원인이기도 하다. 또한 이 개념은 20세기 초기 생물학자들이 다윈의 진화 개념에, 새롭게 등장한 유전학 개념들을 끼워 맞춘 이른바 현대 종합설modern synthesis의 중심 믿음이다." "유전자 결정론이 불완전한 관념인 이유는 유전자가 진공 속에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표현형은 유전자들이 더 넓은 환경에서 영향을 받는 주변의 비유전적 요인들과 상호작용함에 따라 전개된다." "적응에 유리한 특징은 언제나 특정 맥락 안에서 발달하므로, 맥락과 무관하게 자연선택이 독립적으로 유전자를 '선택'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자연선택은, 어떤 동물을 번식할 때까지 생존할 수 있는 동물로 만드는 유전자-환경의 '조합'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세대는 조상이 물려준 원재료(발달 자원)로 그 형질들을 '구축'해야만 하는 것이다."(290-3)


"적응에 유리한 형질들은 특정 환경 안에서만 발달한다. 한 번 생겨난 그 형질들은 이후 후손에게도 한결같이 정상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유전적 요인과 비유전적 요인 '둘 다'의 세대 간 이동(세대 간 대물림)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생존하고 번식하는 데 의심의 여지없이 도움을 주므로 적응에 유리한 능력인 언어 능력을 생각해보자. 야생에서 자라 의사소통의 고립 상태에서 성장한 탓에 언어 능력을 발달시키지 못한 일부 아이들의 비극적인 예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언어 능력은 의사소통할 줄 아는 타인이 존재하는 맥락 안에서만 발달한다. 따라서 이 능력의 발달은 경험 의존적이다. 그러나 평범한 환경에서는 언어 능력에 세대마다 한결같이 나타난다. 보통 아이는 언제나 언어적 상호작용을 제공하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길러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발달기에 언어 능력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어지는 세대가 그 능력을 발달시키는 데 필요한 DNA와 사회적 요인 모두를 정상적으로 제공받기 때문이다."(295)


# 이 관점에서 보면 매우 실질적인 의미에서 '모든' 형질은 '획득 형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 내장 속에 사는 어떤 미생물들은 건강 유지를 위한 비타민을 합성하고 지방 저장 방식을 조절하거나 채소의 어떤 성분을 분해한다. 또 병을 앓은 후 회복을 돕는 화학물질을 만들어준다고 알려진 미생물도 있다. 우리를 돕는 이런 세균들을 우리는 기생충이 아니라 '공생자symbiont'라 부른다." "이 생물들은 4만 종이나 되며 모두 합하면 수백만 개의 유전자를 품고 있어서 2만 개 정도인 '우리 자신'의 세포 속 유전자보다 훨씬 더 많다." "이 밀항자들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은 생리 기능에 그치지 않는다. 지금은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외래 생물들이 소화계의 정상적 발달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실제로 우리의 내장과 장내 미생물은 함께 진화한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 세균 공생자들은 일부 내장 세포 속 '우리의' 유전자를 발현시키고, 내장 발달을 돕는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미생물들은 우리의 DNA를 메틸화하거나 히스톤을 수정하지 않더라도, 넓은 의미에서 '후성유전적'이라고 간주해야 마땅하다."(301-2)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되는 대물림의 특별히 흥미로운 한 예는 경험의 '후성유전적' 효과가 생식세포의 DNA에는 후성유전적 영향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유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새끼를 많이 핥아주고 털을 골라주는 암컷 쥐(즉 높은 LG[licking/grooming]어미)가 키운 딸 쥐는 자신도 LG가 높은 어미로 자라는데 이때 그 딸을 키운 어미가 생모인지 양모인지는 상관없다. 그 효과는 높은 LG 양육자에게 받은 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핥기와 털 고르기를 많이 받은 쥐들의 뇌 영역에서 에스트로겐 수용체를 만드는 DNA에 메틸화가 상대적으로 덜 일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핥기와 털 고르기는 암컷 새끼 쥐들에게 뇌에서 에스트로겐 수용체 수를 증가시키는 후성유전적 효과를 만들어내고, 이렇게 증가한 수용체는 이 새끼 쥐들이 어미 쥐가 되었을 때 '자기 새끼'를 더 많이 핥아주고 털을 골라주게 유도한다. 이런 방식으로 높은 LG 표현형은 다음 세대로 효과적으로 전달됐다."(308-9)


4부 숨은 의미 찾기


"후성유전학을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다른' 형태의 결정론들을 부추기는 마뜩찮은 방식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행동 후성유전학과 관련해 강한 설득력을 발휘한 발견 가운데 몇 가지가 생애 초기 경험의 장기적 영향에 관한 연구에서 나왔다는 점 때문에, 아기가 초기에 한 경험이 반드시 그들의 특징에 영속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암시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아기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미래의 고통을 예방하는 '접종'이라는 주장은 대체로 경계해야 한다. 영양이 풍부한 섭식과 질 좋은 환경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사람의 발달은 결정론적으로 이뤄지는 과정이 아니다. 따라서 성숙한 상태에서 우리가 지니는 특징들을 유전이 결정하는 게 아니듯 후성유전이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후성'유전적 결정론, 다시 말해 한 유기체의 '후성'유전적 상태가 반드시 어느 특정 표현형을 초래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또 하나의 결정론이며, 유전자 결정론보다 아주 조금 덜하기는 하지만 위험한 생각이기는 마찬가지다."(362)


"오늘날 후성유전학의 가장 두드러지는 연구 대상은 아마 암일 것이다. 이는 현재 과학자들이 암세포의 DNA가 일반적으로 정상 세포의 DNA에 비해 메틸화가 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생쥐를 이용한 여러 연구에서 비정상적으로 낮은 DNA 메틸화 정도가 종양을 일으키는 일과 과련된다는 것이 밝혀졌고, 앤드루 파인버그에 따르면 후속 연구들은 〈줄기세포의 후성유전 상태 이상이〉 암의 원인을 설명하는 〈통합적 공통 주제〉이며, 유전체의 메틸화 변화는 〈암 초기의 모든 암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암이 DAN '저'메틸화와 관련이 있다는 말은 직관과 반대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메틸화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DNA 분절이 메틸화되는가이다. 암과 관련해 말하자면, 우리 세포 속에는 과다 발현될 경우 통제할 수 없는 세포 증식을 초래하는 유전자가 들어 있다. 이런 유전자들이 탈메틸화되는 것은 악성종양 발생의 원인이 될 수 있다."(377)


# 행동 후성유전학의 핵심 교훈

1. DNA 혼자 형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생물학적, 물리적, 문화적 요인들이 함께 작용한다).

2. 신다윈주의 종합설은 수정되어야 한다.

3. 후성유전 상태는 역동적이다(생물학적/정서적 경험 및 환경 요인과 상호작용한다).

4. 유전자에 관한 은유는 부정확하다(가령, 유전체는 청사진/조리법/컴퓨터 프로그램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