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와 애국 - 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공공성
오구마 에이지 지음, 조성은 옮김 / 돌베개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장


"오늘날 사람들은 종종 〈전후, 일본은 풍요로워졌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 전후란 어느 시대를 가리킬까? 전쟁의 피해 때문에 크게 하락했던 일본의 1인당 국민 총생산은 패전 후 10년이 지난 1955년에 전쟁 전 수준을 회복했다. 따라서 1954년까지를 전후라고 생각한다면, 〈전후, 일본은 가난해졌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또한 현대에는 〈전후 정치의 기본이었던 55년 체제〉와 같은 표현도 쓰인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이, 55년 체제는 1955년에 성립되었다. 그리고 1956년 『경제 백서』經濟白書에는, 당시 유행어가 된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즉 1955년에 전후가 끝났다는 것이 당시의 인식이었다. 그 전후가 끝났을 때, 55년 체제와 고도 경제성장으로 상징되는 또 하나의 전후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는 잠정적으로 앞의 전후를 '제1의 전후', 뒤의 전후를 '제2의 전후'라고 부르겠다. 당연히 〈전후, 일본은 풍요로워졌다〉라고 말할 때의 전후는 '제2의 전후'를 가리킨다."(19-20)


"제1의 전후와 제2의 전후에는, 똑같은 말도 울림이 달랐다. 즉 국가나 민족이라는 말의 울림도 두 시기에 다르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제1의 전후는 질서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현실은 바뀔 수 있다〉라는 말이 현실감 있게 울린 시대였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서 질서의 한 형태인 국가라는 말은 어떻게 울렸을까? 그것이 인간을 짓누르기 위해 주어진 체제가 아니라 변혁이 가능한 현실의 일부로서 이야기된 국면이, 부분적으로나마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애국이라는 말은 어떻게 울렸을까? 그리고 그것은 진부하게 취급되기 이전의 민주라는 말과 어떤 관계였을까? 오늘날에는 〈전후 민주주의는 애국심을 부정했다〉라고 종종 평가되는데, 민주와 애국의 관계는 정말로 그러했을까? 내셔널리즘에 관한 전후의 언설을 검증하는 것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것은 당연히 국가와 개인의 관계, 혹은 공과 사의 관계에 대한 전후의 언설을 재검증해 가는 작업이기도 하다."(21-2)


1부


1 윤리의 초토화─전쟁과 사회 상황


"미일 개전 때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전쟁을 찬미했다. 이는 절반의 사실에 불과하다. 그들이 직면한 현실은 공표된 문면과는 약간 달랐다. 지식인이나 작가들은 전쟁에 협력하는 작품을 쓰거나, 아니면 창작을 단념하고 군수 관련 공장에서 일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처했다. 무엇보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수감의 공포, 고문과 옥사의 공포였다. 탄압의 공포는 지식인들 사이에 고립감과 의심증을 낳았다. 시대에 편승해서 마지막까지 이익을 얻은 극히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많은 지식인들에게 전쟁은 실로 악몽이었다. 그것은 표면에서 숭고한 이념에 대한 찬미가 이루어지고, 뒷면에서는 공포와 보신, 의심증과 배반, 환멸과 허위를 하나로 뭉쳐 놓은 것이었다. 타자에 대한 신뢰와 자기 자신의 긍지가 뿌리째 뽑힌 그 체험은, 굴욕감과 자기혐오 없이는 좀처럼 회상할 수 없는, 서로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않은 상처로 봉인되었다. 그러나 이런 회한의 기억이 전후사상의 중요한 저류가 된다."(58-66)


"1943년 10월부터 문과계 대학생의 징병 유예가 없어지고, 이른바 학도 출진이 이루어졌다. 전쟁 후기에 입영은 죽음과 거의 같은 뜻이었다." "이런 가운데, 정부에 대한 비판적 심정은 정부가 그들에게 가르친 애국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즉 정부가 주창해 온 애국과는 다른 종류의 진정한 애국[전쟁 반대]이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 제도의 레이테Leyte섬에서 사망한 한 학도병은 〈과연 누가 진정한 애국자였는지는 역사가 결정해 줄 것입니다〉라고 썼고, 중국 대륙에서 전사한 학도병도 〈내 충절의 방법은 아마도 현재 군 수뇌부의 근본 방침과 어긋난다〉라고 말한다." "학도병들의 경험은 지식인 전쟁 체험의 한 축소판이었다. 그것은 대중에 대한 모순적인 감정을 품게 만든 굴욕의 경험이면서, 사상과 사회과학을 일본 사회의 변혁에 도움이 되게끔 만들 필요성을 통감케 한 경험이었다. 이런 경험은 전시기에 형성된 '진정한 애국'이라는 표현과 함께, 전후사상에 크게 반영된다."(66, 73-4)


"가치관의 붕괴나 윤리의 저하는 8월 15일에 급격히 찾아온 것이 아니라, 전시 중부터 진행된 사태였다. 정부가 내세운 이념이 허구로 가득했다는 점은, 이미 많은 인간들이 느끼고 있었다. 말하자면 패전은 최후의 일격에 불과했다." "많은 죽음과 추악함에 직면하고 기아와 빈곤으로 추락했던 사람들에게, 전쟁 지지에 대한 회한은 컸다." "허위와 보신, 무책임과 퇴폐, 면종복배의 이면에 만연했던 이기주의, 그곳에는 물리적인 패배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붕괴가 있었다." "허위와 무책임을 낳고, 대량의 죽음과 파괴를 가져온 황국 일본과 신민의 관계, 이것을 대신할 공과 사의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져야 할까. 무너진 '국민 사이의 인간다운 연대'는, 어떤 새 원리로 다시 구상할 것인가.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일본을 창출하는 것이다.〉 전사한 학도병이 유고에 남긴 이 말은, 패전을 맞닥뜨린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된 마음이었다. 전후라고 불리는 시대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77, 81-3)


2 총력전과 민주주의─마루야마 마사오, 오쓰카 히사오


"일본에서는 프랑스나 한국 등과 달리, 패전 후에 해외 망명자들이 귀국해서 정권을 세우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후의 위정자와 지식인 대부분은 전쟁 전과 전시부터 활동해 온 사람들로, 사고의 전환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전후사상의 모색은 새로운 언어 체계를 외국에서 수입하기 이전에, 전시기의 언어 체계를 바꾸어 읽으며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시작했다. 여기서 전후 민주주의의 기반이 된 것은 총력전의 사상이었다." "예를 들어 훗날 수상이 되는 아시다 히토시는 전쟁 종결의 원인과 책임을 추궁하는 의견서에서 〈근대 총력전에서 우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한 사람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에 책임을 느끼게 해야 한다. 국민들이 당면한 전쟁을 군부 및 정부의 전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근대전에서는 우선 이 점만으로도 패배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며, 통제 철폐와 언론 자유화를 주장하고 있다. 즉 아시다는 총력전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민주화를 주장했다."(87-8)


"패전 직후에 다수 등장한 이런 논조는, 모두 국민의 저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전쟁이 끝났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패전이라는 충격에 직면한 사람들이 취했던 일종의 심리적 방어 기제였다. 민주화에 대한 지향은 이런 내셔널리즘과 표리일체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내셔널리즘은, 전쟁으로 붕괴된 국민의 도의道義를 재건한다는 주장과도 연결되었다. 히가시쿠니나 이시와라, 고야마 등은 모두 전시 중의 암시장 경제나 관료의 무책임을 들어 전쟁에 패한 원인은 도의의 퇴폐에 있다고 주장하며, '1억 총참회를 하는 것이 우리나라 재건의 첫걸음'이라고 외친다. 이 1억 총참회라는 말은, 히가시쿠니 수상[쇼와 천황의 조카]이 1945년 8월 28일에 가진 기자 회견에서 발언한 뒤로 유명해졌다. 연합국과 아시아 국가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사죄한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패전의 굴욕감을 표현하기 위해, 패배 원인을 도의의 퇴폐에서 찾는 가운데 나온 말이었다."(89-90)


"1943년 10월, 29세의 마루야마 마사오는 게이오대의 『미타 신문』이 주최한 후쿠자와 유키치 특집에 「후쿠자와에서의 질서와 인간」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여기서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에 대한 당시의 분열된 평가에 대해 언급한다. 한 가지 평가는 후쿠자와를 서양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개인주의자로 보고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를 아시아 진출을 주장한 국가주의자로 찬미하는 것이었다." "마루야마는 개인과 국가를 대립시키는 개인주의적 국가관이 아니라, 주체적인 책임 의식을 가진 인간이 능동적으로 국가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 즉 '개인주의자라는 점에서 실로 국가주의자'가 되는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마루야마의 주장은 아시다의 〈근대 총력전에서 우위를 획득하려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에 책임을 느끼게 해야 한다〉라는 말과 거의 같은 취지이기도 했다. 즉 마루야마의 사상은 특이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게 공유되었던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95-7)


"마루야마는 1946년 5월에 발표한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에서 일본 사회에는 자유로운 주체적 의식을 지닌 개인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내발적內發的인 책임 의식이 없다고 보았다. 거기서는 권력자조차도 책임 의식을 결여한 '폐하의 하복' 혹은 하료下僚의 로봇일 수밖에 없다는 '무책임의 체계'가 지배한다. 그와 동시에 상위자가 가한 억압을 하위자에게 발산한다는 '억압 이양'이 사방에서 발생한다. 그것을 국제 관계에 투영한 것이, 구미 제국주의의 압박을 아시아 침략으로 해소하려 한 행위였다. 게다가 이런 일본 사회에는 근대적인 사私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公의 명확한 경계도 없다. 거기서 발생하는 것은 공의 이름에 따른 사생활에의 개입이며 공의 이름을 빌린 사적 이해의 추구다. 또한 근대적인 정교분리도 이루어지지 않아서 최고 권력자인 천황이 동시에 윤리의 정점이 되며, 이런 '천황으로부터의 거리'가 정치적 지위인 동시에 윤리의 평가 기준이 되었다고 마루야마는 보았다."(108-9)


"이런 마루야마의 역할을 경제학의 언어로 행한 사람이 오쓰카 히사오였다. 오쓰카는 1944년 7월 「최고도 '자발성'의 발양」이라는 논고를 발표하여, 생산력 확충을 위해서는 노동자가 〈'자발성'과 '목적 합리성'〉을 내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자발성의 중시는 필연적으로 근대적 개인의 재평가까지 이어졌다. 근대적 개인의 재평가는 '근대의 초극론'과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이기적인 활동에 바탕을 둔 자유방임 경제를 계획적인 통제 경제로 넘어서야만 생산이 확충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그런 의견에 대항해서 근대적 개인을 재평가하기 위해, 오쓰카는 그것이 질서 없는 이기주의가 아님을 밝혀야 했다. 즉 오쓰카는 마루야마와 같은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마루야마가 개인주의와 멸사봉공의 대립을 극복한 국민주의를 구상했듯, 오쓰카는 이기적 영리심과 멸사봉공의 대립을 넘어선 경제 윤리를 추구했다."(114-6)


"마루야마와 오쓰카가 근대라는 말로 설명한 것은, 서양 근대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것은 비참한 전쟁 체험의 반동으로서 꿈꾸게 된 이상적인 인간상을, 서양 사상의 언어로 빌려서 표현하려는 시도였다. 개個의 확립과 사회적 연대를 겸비하고 권위에 대항하여 자신의 신념을 지켜 내는 정신을, 그들은 주체성이라 이름 붙였다. 그런 주체성을 갖춘 인간상을 마루야마는 근대적 국민, 오쓰카는 근대적 인간 유형이라고 불렀다. 즉 주체성이란 전쟁과 패전의 굴욕으로부터 다시 일어서기 위해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말이었다.  그 주체성은 국내에서는 권위에 항거하는 '자아의 확립'으로, 국제 관계에서는 미소美蘇에 대한 자주독립이나 중립을 주창하는 내셔널리즘으로 각각 표현되었다. 마루야마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일신 독립하여 일국 독립한다〉라는 말을 사랑한 것은 그런 심정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마루야마와 오쓰카의 사상은 공통의 전쟁 체험을 가진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125-6)


3 충성과 반역─패전 직후의 천황제


"패전 직후의 일본이 '절대 왕정 단계'라는 역사 인식을 토대로 공산당이 주장한 것은, 우선 천황제를 타도하는 시민 혁명을 목적으로 삼고, 그 후에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간다는 '2단계 혁명론'이었다. 이런 역사관의 상식은 왕정을 타도한 프랑스 혁명으로 신분과 지역을 초월한 근대 국민 국가가 성립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천황제가 남아 있는 한 일본은 국민 국가가 아니며, 우선 국민 국가의 형성을 목표로 천황제를 타도해야 했다. 거기서는 봉건제의 잔재인 천황제와 근대적인 국민 혹은 민족이 대립하는 존재였다. 마루야마가 천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초국가주의와 근대적인 국민주의를 대비시킨 것에도, 이런 역사관이 깔려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국민이란 천황제에 지배당하는 신민臣民과 구별된, 자유롭고 평등한 근대적 인간이었다. 이노우에 기요시의 표현에 따르면 내셔널리즘과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국가인가, 천황의 국가인가〉라는 선택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156)


"이런 바른 애국심의 역사적 사례로 이따금 거론된 것이, 마루야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메이지의 자유 민권 운동이었다. 1946년 『역사가는 천황제를 어떻게 보는가』에서 이노우에는 자유 민권 운동의 활동가를 애국자들이라고 부르며 상찬했다." "패전 직후에는 이런 논조가 광범위하게 공유되었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예를 들면 오다카 구니오는 〈일본인은 충군이기는 했지만 서양인에 비해서 특별히 애국적이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경제학자 오코우치 가즈오도 근대 유럽에서는 〈애국 운동은 항상 항상 서민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 낡은 특권에 대립해서 새로운 질서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운동으로 등장했다〉라고 말했다." "이런 논조를 따라, 오다카 구니오도 구래舊來의 일본에서는 〈종적 일선을 거슬러 올라가 '위의 한 분'에게 충절을 다하는 것만이 문제이며, 횡적으로 제휴하고 횡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조국을 위해 동포를 위해 헌신하는 일은 제2, 제3의 문제였다〉라고 말한다."(157-8)


"천황제와 대치된 것이 주체성이며, 연대와 단결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마루야마나 가토 슈이치가 근대적인 주체성의 확립을 부르짖으면서도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라던가 〈부끄러움을 알아라〉라는, 다소 고풍스러운 말을 빈번히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런 논조는 동시대의 다른 논자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민법학자 가이노 미치타카는 1948년 5월의 논고에서 천황제를 〈무책임을 긍정하는 제도〉, 〈'국민'을 만들지 않는다〉라고 비판하면서 보수파를 향해 〈신헌법의 공포 앞에 할복이라도 해서······ 천황에 대해 '사죄'를 해야만 했을 터이다〉라고 말한다. 천황제를 폐지하라는 근대적 지향과 〈할복하라〉라는 무사도풍의 비난은 논리적으로는 모순될 터였다." "당시의 천황제란 단순히 군주가 존재하는 정치 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굴욕적인 기억과 결합된 말이었다. 그런 천황제와 대치되는 주체성은, 한편으로는 근대적인 언어로 이야기되면서도, 동시에 무사도적인 언어로 표현되기도 했다."(167)


"천황제가 인간을 억압한다는 인식과 천황 개인에 대한 경애가 교차하는 데서 하나의 주장이 생겨났다. 쇼와 천황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천황제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천황제로부터 천황의 해방'이다. 전후의 신헌법하에서, 천황에게는 참정권도 없고, 신앙이나 언론 출판의 자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령 「공산당에 들어가는 변」을 쓴 모리타 소헤이는 〈천황을 기요틴에 내거는 사태에 이른다 해도, 나는 공산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단호히 거기에 서명하지 않을 것을 여기 명언해 둔다. 이것은 내가 천황제의 폐지와 천황 일가를 어디까지나 개별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주장한 것은 사람들에게 굴욕을 강제했던 사회적, 심리적인 시스템으로서의 천황제의 폐지였으며, 꼭 천황 개인의 처단은 아니었다. 거기서 주장된 것이 새로운 내셔널리즘과 윤리의 재건이며, 민족 도덕의 확립이었다. 그리고 민족 도덕의 확립을 위해서는 천황이 어떤 형태로든 전쟁 책임을 밝힐 것이 요구되었다."(168-72)


4 헌법 애국주의─제9조와 내셔널리즘


"대부분의 전후 지식인들은 패전으로 황폐해진 일본을 재건하기 위해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패전 직후에 우선 내세워진 것이 문화 국가나 평화 국가라는 표어였다." "이런 평화나 도의道義의 주장은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 패배한 일본에 남겨진 마지막 국가 정체성의 기반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원자 폭탄으로 상징되는 구미의 군사력에 대한 대항 의식과도 결합되어 있었다." "육군 중장 이시와라 간지도 그런 논리에 따라 비무장 평화주의를 주장하며 〈몸에 쇠붙이 하나 갖추지 않으면서 세계 평화와 인도를 위해 그 태도를 규탄하고 반성을 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평화주의의 논조가 1945년 8월 시점부터 존재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민주화의 목소리가 점령군의 지령 이전에, 총력전 시기의 언어 사용의 연장선상에서 출현한 것과 마찬가지로, 평화주의의 목소리는 도의 국가라는 슬로건의 연장으로서 출현했다. 헌법 제9조는 이런 토양 위에 등장한 것이다."(192-4)


"당초 점령군의 제안에 놀랐던 보수적인 정치가들이 헌법을 용인하게 된 큰 이유는 상징 천황을 인정한 제1조의 존재였다. 이 조항으로 말미암아 천황제 폐지의 위험이 없어졌다." "동시에 이 헌법은 패전으로 위기에 직면한 보수 정치가들이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GHQ의 '공직추방령'에 내몰린 보수정치가들로서는 과감한 개혁안을 제시하는 길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실제로 신헌법 초안의 공표는 보수 정권의 위기를 구해 주는 꼴이 되었다. 3월 6일의 초안 요강 발표 이후로 이 초안을 지지하는 사회당과 천황제 타도를 외치며 초안에 반대하는 공산당이 대립한다. 그리고 정부는 초안 요강을 공표한 지 4일 뒤, 4월에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고시했다. 개혁의 기운을 선수 친 보수 정당은 지지를 모았고, 특히 요시다 시게루를 중심으로 한 자유당이 이 선거에서 약진하여 정권을 획득했다. 신헌법은 단순히 미국의 압력으로 밀어붙여졌다기보다는, 보수 정치가들의 생존책으로 수용되었다."(199-200)


"1946년 시점에서 헌법의 태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점령군과 대결할 각오를 요구하는 행위였기에, 결국 의회에서의 헌법 심의는 압도적인 다수로 가결되었다. 그리고 제9조에는 국제 평화를 주창한 제1항과 전력 포기를 주창한 제2항 사이에,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라는 문구를 넣는 수정이 가해졌다. 이 수정은 이후의 재군비에서 국제 평화라는 목적을 해하지 않는다면 전력 보유가 가능하다는 헌법 해석을 낳는다. 패전 직후의 헌법 논의에서 흥미로운 점은, 난바라 시게루를 비롯해 이후 호헌 세력이 되는 사람들이 신헌법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후에 개헌 세력이 되는 보수 정치가들은 헌법을 상찬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난바라가 헌법을 비판한 것은, 헌법의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안이하게 헌법을 개정하는 정치 자세에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점령군이 두려워서 헌법을 상찬했던 보수 정치가들도 미국이 방침을 전환한 1950년대 이후로 헌법 비판을 시작했다."(212)


5 좌익의 '민족', 보수의 '개인'─공산당·보수계 지식인


"1950년대 중반까지 공산당의 권위는 신과 같았다. 어떻게 해서 그런 상황이 생겼을까. 첫 번째 이유는 고도 경제 성장 이전의 일본에 존재한 압도적인 빈부격차다. 도시와 농촌, 상층과 하층 간 격차는 컸으며 패전 후의 거리에는 고아와 전쟁 피해자가 넘쳐 났다. 이런 현실 앞에 공산당의 존재가 빛나보였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일본에서 전쟁에 반대한 유일한 정당이 공산당이었던 점이다. 전전의 비공산당계 무산 정당 및 노동 운동은 모두 전쟁에 협력한 과거가 있었다. 전후가 되어 비공산당계의 사회주의자들이 합동해서 일본사회당을 결성했지만, 전쟁 협력의 오점을 지니지 않은 점에서 공산당의 정신적 우위는 명백했다. 세 번째이자 가장 큰 이유는 지식인들의 회한이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패전 후의 지식인들을 〈회한 공동체〉라고 불렀는데, 이때의 회한이란,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결과의 문제보다도, 전시기 그들의 처신에 대한, 말하자면 윤리적인 문제였다."(220)


"패전 후의 논단에서 우익 국수주의자는 세력을 실추했다. 그 대신에 올드 리버럴리스트라고 통칭된 지식인들이 보수 논단을 형성했다." "그들에게는 사상적 상이함을 넘어선 일종의 공통성이 있었다. 하나는 그들 중 다수가 패전 시에 50대 이상으로, 다이쇼기에 청년 시대를 보낸 세대였던 점이며, 또 하나는 그들이 공산주의를 혐오하고 천황을 경애하는 문화인이면서 자유주의를 흠모했다는 점이었다." "전전의 지식인은 거의가 도시 거주의 중산층 이상에 속하여, 경제적으로도 교양으로도 일반 민중과 동떨어져 있었다. 1948년 조사에서 신문 정도의 읽고 쓰기가 완전히 가능한 자는 4.4퍼센트에 지나지 않았고, 군대에서 처음으로 하층민과 접촉한 학도병들은 대중에게 경악과 경멸의 감정을 품었다." "그런데 이런 격차를 축소시키는 단초가 된 사건이 전시 및 패전 후의 인플레이션이었다. 공습 때문에 도시 중산층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금융 상품이나 예금의 가치가 급락하면서 도시 중산층의 몰락을 초래했다."(236-7)


"이렇게 과거의 자유주의자들로 구성된 1950년대의 보수 논조는 평화주의를 공론空論, 미숙, 유치 등이라 비판하고 현실, 상식, 전통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많았다 나아가 고이즈미 신조나 다나카 미치타로 등은 재군비에 찬성하고 국방의 의무를 공공심公共心의 일환으로 상찬했다. 이런 주장은 그 후의 보수 논조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1950년대의 보수 논조는 고도성장 이후의 그것과 비교할 경우에 특징이 몇 가지 있었다. 그 하나는 전후의 민주화나 노동 운동 등을 군부 독재와 동일시하는 경향이었다." "특히 경제학자였던 고이즈미는 마르크스주의와 총력전 체제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이것이 자유주의 경제를 해쳤다고 주장했다." "또한 1950년대의 올드 리버럴리스트들은 개인의 자유를 열심히 강조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논조의 배경 역시 그들의 전쟁 체험이었댜.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개인의 자유란 빨갱이와 군부에 대항해 자기의 자유를 지킨다는 의미와 같았기 때문이다."(246-8)


"그렇다면 그들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공공심은 어떻게 공존했을까? 그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 잡지 『고코로』의 좌담회에 등장하는 다케야마 미치오의 발언이다. 이 좌담회에는 〈인간이라는 것은 각자의 천분에 따라 각각의 역할을 맡는다〉라는 발언도 나왔는데, 이런 일종의 신분제적인 사고방식이 그들이 주장하는 개인의 자유와 공공심의 양립을 지탱했다. 즉 대중이 근로를 통해 사회에 공헌하듯, 〈문화를 맡은 자〉인 자신들은 자유롭게 문화를 즐김으로써 일반 민중이 할 수 없는 형태로 사회에 공헌한다. 이런 질서는 전통적이고 자연스러우며 그 질서에 정치가 개입하면 전체주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평화라는 말도, 이들에게는 약간 독특한 의미로 쓰였다. 고이즈미 신조는 재군비와 미일 안보 조약에 찬성을 표하면서 〈민족 간에 평화가 바람직한 것과 마찬가지로 계급 간에도 평화가 바람직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천황이야말로 이런 평화, 즉 그들이 안정적인 지위를 누렸던 전쟁 전 시대의 상징이었다."(249)


6 민족과 시민─정치와 문학 논쟁


"1946년 후반부터 1947년 초에 걸쳐 〈혁명이 멀지 않았다〉라는 기운 속에서, 공산당은 1947년 2월 1일 자로 총파업을 기획했다. 그러나 이 2·1 파업은 점령군의 명령으로 중지되었고, 공산당은 전후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았다." "그 후 노동 운동에서 공산당의 장악력이 저하되면서 좌절한 학생들과 젊은 노동자들은 내성內省의 시기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런 젊은 활동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긴다이분가쿠』를 비롯한 주체성론이었다." "오쓰카 히사오는 근대적 인간 유형의 확립이 선행되지 않는 한 제도적인 사회 개혁을 이루더라도 효과는 적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에 대해서 공산당계의 논자들은 인간의 의지는 경제적인 하부 구조로 규정되며 사회의 변혁 없이 의식의 변혁 같은 것은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공산당 측에서 보면 사회 변혁의 계획을 동반하지 않는 주체성의 주장 같은 것은 난센스에 지나지 않았으며, 청년층의 지지를 얻는 데 있어서 잠재적인 라이벌 사상과 다름없었다."(283)


"그러나 마루야마나 오쓰카가 말한 주체성은 공과 사 양 쪽 모두가 파괴된 전쟁 중의 반전反戰으로서 꿈꾸게 된, 권위로부터의 자립과 타자와의 연대를 겸비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우메모토 가쓰미 등이 주장한 주체성은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는 역사의 필연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필연성 속에 해소되지 않는 자기를 표현했다. 후자는 개인을 넘어선 전쟁이라는 역사의 필연성을 인정하면서도 자기의 죽음을 납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품었던 심정이다. 즉 패전 후의 주체성이란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체계적인 이론으로 회수되기 곤란한 심정을 표현한 말이었다. 사람들은 전쟁과 패전이라는 거대한 사회 변동에 농락당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납득시킬 설명을 찾아서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역사의 필연성을 믿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이론적인 설명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자기의 잔여물 중 일부가 다른 종류의 말을 찾는 원동력이 되었을 때, 그것이 주체성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287)


"당시에는 전시 중의 자기 자신에 회한을 갖지 않는 문학가는 거의 없었다. 전쟁을 투철하게 반대한 자도, 전쟁을 찬미한 글을 실천해서 옥쇄한 문학가도 극히 소수였다. 대부분의 문학가는 보신이나 편승으로 전쟁에 협력하고 자기의 내면을 배반했다는 회한을 품고 있었다. 논쟁 상대의 과거를 직접적으로 폭로하는 것은 꺼려졌지만, 전쟁이 가져온 상호 불신과 자기혐오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영화 〈라쇼몽〉에서 자기에게 형편이 좋은 허위 증언을 늘어 놓는 군상을 그린 것도 이런 시대 상황 아래서였다." "그러나 이런 회한으로부터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무장을 생각했을 때, 당시로서는 마르크스주의의 학습과 공산당 참가 이외의 방법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그리고 고바야시나 후쿠다가 정치로부터 나를 지킨다는 논리로 전쟁 책임 문제를 회피했다면, 많은 공산당원들은 정치의 권위로 나에 대한 비판을 지움으로써, 역시 전쟁 체험을 은폐했다."(298-9)


"당시의 공산당 주변에서 민족은 인민과 거의 동의어였고 근대적인 개인의 확립과도 모순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어찌되었든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비판하면서 민족을 내세우는 논조는 전시를 떠올리게 했다. 이런 '민족'에 대항하여 아라 마사히토는 '시민'을 내세웠다." "여기서 유의할 점이 하나 있는데, 당시에는 일반 명사로서 시민을 사용하는 것이, 다소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지식인의 기본 교양이었던 헤겔 사상이나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근대 시민 사회란 자본주의 사회이며 시민은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서양 문화의 향유가 도시 중간층의 특권이었던 당시에 세계 시민은 자본가의 대명사이며 민족은 민중의 동의어라는 언설이 성립했던 것이다." "결국 정치와 문학의 분열을 넘어서고자 한 시도에서 만들어진 민족과 시민의 대립이라는 도식은, 전후의 언설 구조가 변천하는 과정을 보여준 하나의 지표가 되어 갔다."(300-2, 309)


2부


7 가난과 단일 민족─1950년대의 내셔널리즘


"1950년대 전반까지의 일본 사회에서는 (사회 전체가 빈곤에 시달리는 가운데) 지식인과 노동자, 도시와 농촌 사이에 압도적인 문화적 격차가 존재했고, 화제를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말하자면 당시의 일본은 지역과 계층으로 사람들이 분단되어, 균질한 '일본인' 같은 생각이 거의 통용되지 않는 세계였다." "농촌 인구가 많았던 당시에 '시민'이라는 말은 도시 부르주아층의 대명사였다. 그런 반면 '민중'이나 '대중'은 지식인이나 도시 중산층을 포함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런 언어 상황 속에서 도시 중산층과 농민을 모두 포함하는 집단을 표현하는 말은 '민족'이나 '국민'이 되기 쉬웠다. 또한 1950년대의 좌파 지식인들은 단일 불가분한 일본 민족, 단일한 민족 국가라는 말을 이따금 사용했다. 단일 불가분이라는 말은 프랑스 혁명 정권의 표어였던 '하나이며 불가분한 공화국'의 번역에서 파생한 것으로, 신분 및 지역의 분단을 극복하고 국민이 성립한 상태를 지향하는 말이었다."(316-20)


"원래 아시아 국가들의 내셔널리스트들은 당시의 일본 지식인과 유사한 문제를 다루었다. 그것은 서양 근대의 교양을 익힌 도시부의 지식인들과 농민으로 대표되는 일반 민중의 격차였다. 그런 까닭에 아시아 국가들의 내셔널리스트들은 이 격차를 식민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해소하고 하나의 국민으로서 연대를 만들어 낼 것을 주장했다. 특히 중국공산당이 도시 지식인들에게 중국 재래의 문화를 다시 보게 하고, 지방의 민중 속으로 들어가도록 설파한 점은, 일본에서도 지식인들의 주목을 모았다." "이렇게 해서 1950년대 전반에는 진보계 지식인이 서양 지향을 자기 비판하고 일본인으로의 회귀를 표명하는 것이 하나의 조류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계몽 활동을 대신하여 민중 지향의 다양한 활동이 모색되었다. 그 하나는 대중문화의 연구였고, 그것과 병행해서 민화나 민요가 급속히 재평가되고 민속학이 주목을 모았다. (민중에게 작문을 지도하는) 생활 기록 운동의 대두 역시 같은 움직임으로 들 수 있다."(331-3)


"1955년 7월, 공산당은 그때까지의 무장 투쟁 노선을 극좌모험주의라며 포기했다. 패전 후 공산당이 누린 정신적 권위의 원천은 옥중 비전향과 절대 무류無謬의 신화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많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전향을 거듭했던 전시에, 공산당만이 주체성을 유지했다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코민포름의 비판에 동요하고, 몇 번이고 방침을 전환하는 공산당의 모습은 그런 신화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당 전체는 코민포름에 종속되었으면서 하부 당원에게는 절대적인 권위로 군림하는 자세 역시, 천황제와 유사한 권위주의라는 인상을 주었다." "요시모토는 1958년의 「전향론」에서 옥중 비전향의 공산당 간부도 일본의 현실을 무시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묵수한 데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후쿠다 쓰네아리가 1947년에 유사한 의견을 말했을 때는 그를 지지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1958년 요시모토의 주장은 공산당에게 실망한 지식인과 학생, 그리고 신좌익(통칭 분트에서 유래한)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353-5)


"1955년에는 공산당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정계 개편이 진행되었다. 공산당이 육전협에서 무장 투쟁 노선을 포기한 것을 전후해, 재군비의 시비를 둘러싸고 분열했던 좌파사회당과 유파사회당이 합체해 일본사회당이 결성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보수 정당 측도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동해 자유민주당을 결성한다. 이른바 '55년 체제'라고 불리는 정당 지도가 이때 완성되었다. 그리고 1956년 『경제 백서』에는 이후 유행어가 된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전후'의 끝이며, 또 하나의 '전후'의 시작이었다. 이제 고도성장과 55년 체제로 상징되는 안정과 번영의 전후가 시작되려 했다. '전후 민주주의'라는 말도 이 시기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패전 직후의 민주주의는 구질서를 타파하기 위해 내걸린 변혁의 상징이었다. 그런 격동의 전후는 끝나고, 민주주의가 55년 체제로 형해화된 의회 정치의 관용구가 되어 가던 때에, 전후 민주주의라는 말이 태어났다."(356-7)


8 국민의 역사학 운동─이시모다 쇼, 이노우에 기요시, 아미노 요시히코 외


"전후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가 계몽 활동 이외에 힘을 쏟은 실천 활동은 교과서 비판이었다. 1946년 10월에 마지막 국민학교 초등과(소학교)용 국정 국사 교과서가 된 『나라의 발걸음』이 발행되었다. 세계사의 견지 및 인민의 역사도 다룬 이 교과서는 교육 민주화의 상징으로 선전되었지만,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여기에 천황 숭배 교육의 잔재가 보인다든가 전쟁 책임에 대한 추궁이 없다든가 하는 점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교과서 비판은 실증주의에 입각해 정치적 편향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치적인 실증주의를 비판하는 형태였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지금까지 역사 교육이 정책에 따라서 악용되었기 때문에, 이번의 역사 교과서가 정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문학에서는 정치적 중립을 가장한 예술 지상주의가 비판되었는데, 역사학에서는 실증주의가 그것에 해당했다. 실증주의는 최종적으로는 제국주의 측에 가담하는 부르주아 사상이라고 여겨졌다."(383)


"이시모다 쇼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정치에 참가해서 자기의 연구를 발전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는 「촌락의 역사·공장의 역사」에서 민중 스스로가 창조한 역사를 소개하면서 〈강단 역사학의 좁음, 미천함은 이런 역사가 전국에서 나타나게 될 때 유감없이 폭로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물론 글을 쓰지 못하는 노동자가 역사를 쓰기란 〈실제로는 곤란한 작업일 것〉이다. 거기서 〈역사의 전문가가 그 일을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때 역사학자의 역할은 〈높은 곳에서 민중에게 요청하지 않고, 겸손하게 함께 작업을 하는 그런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전문가도 인민으로부터 자기 학문의 좁음을 깨달으며, 함께 공부하고 성장해 갈 수 있을 것이었다. 이시모다에게 이런 과정에 참가하는 것은 윤리감이나 책임의식으로 감내해야 할 고행이 아니라 일종의 쾌락이었다." "이런 역사학의 창조는 후에 국민적 역사학이라 불리며, 역사학의 혁명이라는 구호와 결합해서 많은 학생들을 매료시킨다."(390-1)


"그러나 국민적 역사학 운동은 1953년경부터 차츰 막다른 길에 부딪혔다. 운동을 담당했던 학생들은 진지하기는 했지만 너무나 미숙했다. 우선 드러난 문제는 학생들 중에 민족이나 민중의 권위를 빌려서 타자를 공격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었다. '역사학의 혁명'을 내세운 그들은 자기들의 뜻에 맞지 않는 학자나 교수들을 반혁명적, 근대주의 등이라 비난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공산당의 당내 투쟁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소감파와 국제파가 상호 비방을 확대하며 사문과 린치가 횡행하던 상황 속에서, 국민적 역사학 운동에의 찬반은 이윽고 정치적 입장의 시험지가 되었다." "공산당의 정치 방침에 따라, 서클이나 농촌 조사를 단순한 당세 확장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차례로 현저해졌다. 이시모다는 후에 〈서클을 단순히 새로운 형태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사상, 혹은 서클의 수나 그 회원의 증감만이 보고되고, 무슨 내용을 이야기했는가가 조금도 토의되지 않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회상한다."(419-21)


"1951년 이시모다는 지식인의 대중 멸시를 비판하여 〈지식인에게 대중은 료쿄쿠와 통속 소설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속악俗惡을 의미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혁명 민화나 혁명 로쿄쿠를 민족 문화라 칭했던 점에서는 국민적 역사학 운동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즉 '민중 속으로'라는 이념 그 자체가 현실 민중에 대한 무지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실제로 현실 민중의 반응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역설적이게도 국민적 역사학 운동에 비판적이었던 이노우에 기요시 쪽이 석탄암을 깨는 일용직 노동자의 아들이었으며, 돌을 쪼개고 짚을 엮으며 대학까지 다닌 사람이었다. 이노우에는 국민적 역사학 운동이 끝난 뒤에 〈도련님 아가씨들이 농촌에 들어가서 인민의 빈곤에 놀라고, 봉건제의 뿌리 깊음에 깜짝 놀라, 크게 감격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도 좋은 공부가 되리라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정수라며 우쭐거리는 데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라고 말한다."(423)


9 전후 교육과 민족─교육학자·일교조


"교육 개혁에서도 점령군의 대응은 빨랐다. 1945년 12월까지 군국주의적인 교원을 추방하는 심사 기관의 설치, 공교육과 신토神道의 분리, 수신·일본사·지리 교육의 일시 정지 등을 명령했다." "1947년 3월 극동위원회가 교육에서 칙어 사용을 금지한 한편, 같은 달에 「교육 기본법」이 제정된다." "점령군의 지령으로 개혁이 진행되고 교원 자격 심사와 추방도 실시되었지만, 일본 측이 행한 심사는 느슨했으며, 추방된 자는 전 교원의 0.5퍼센트, 대학 교원 중에서는 0.3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교육 칙어」에 대해서도 극동위원회가 금지한 지 1년이 넘게 지난 1948년 6월이 되어서야 국회에서 무효 결의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해서 패전 후의 교육계에는, 변경된 제도와 변치 않는 교육자라는 모순된 상황이 생겼다. 그 결과는 어제까지 귀축미영과 천황 숭배를 설파하던 교사가 돌연히 미국과 민주주의를 찬미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학생들의 불신을 샀고, 전후 민주주의는 기만이라는 인상을 심었다."(431-2)


"사회 전체의 변혁이 없으면 개인의 행복도 없다는 논조는 고도성장 이전의 일본에서는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 변혁의 시점이 빠진 채로 개인의 중시를 주장하는 「교육 기본법」은 봉건제를 타파한다는 의미에서는 한걸음 나아갔다고 해도, 부유한 자의 승리를 정당화하는 자유주의 사상에 불과했다." "나아가 비판은 사회 과목으로도 향했다. 역사와 지리를 폐지하고 설립된 사회 과목은 일본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박탈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역사·지리 교육의 부활이 주장되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야가와를 비롯한 공산당계 논자들은 소련과 중국을 모델로 삼아 개인주의와 근대주의를 비판했다. 그에 비해 가쓰다나 우에하라는 프랑스나 독일을 모델로 삼아 근대적 개인들이 뒷받침하는 내셔널리즘을 주창했다. 그런 차이는 있지만 애국심 교육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미국적인 전후 교육을 비판하는 경향은, 당시의 진보계 교육학자들에게 공통되었다고 할수 있다."(440-4)


"이렇게 전전과의 연속성이 발생한 배경에는 교육계에서 공직 추방이 거의 실행되지 않았다는 사정이 있었다. 전후의 많은 교원들은 전전부터 교육에 종사했거나, 혹은 전전의 교육으로 인격을 형성한 인간들이었다. 성전 완수가 민주주의로 바뀌어도, 애국심과 민족이 강조되는 사태가 바뀌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연속성은 당시의 역사학자들에게도 존재한 경향이었다. 그러나 교육학 분야에는 전쟁에 협력했던 자가 역사학보다 많았으며, 전시와 전후 간에 말 사용의 연속성이 보다 현저했다. 예를 들어 야가와 도쿠미쓰는 전시에 대일본청소년단의 교양부장을 맡아 1942년에는 〈일본 민족이 오늘날 세계에 신질서를 건설하는 것은, 세계를 진짜 세계답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1952년에 〈오늘날 우리의 대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평화 확보와 민족 독립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리라. 그것은 우리 일본 민족의 위대한 사업이다〉라고 말했다."(460-3)


"1950년대 교육학자들에게는, 전쟁 전의 교육에 존재했던 국가 목표에 향수를 품고 그 대안을 찾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행동 양식의 연속성 속에 있는 한, 새로운 교육 이념을 모색하더라도 만족할 만한 결과가 얻어질 리 없었다. 그들이 어떤 이념을 찾아냈다고 해도, 그 행위가 국가 목표의 대용품을 찾는다는 의식에 기반을 두는 한, 그것이 대용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가 잠재적으로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패전 후의 교육론을 구속한 것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각인된 행동양식이었다. 황국 일본에서 주권 재민의 나라로 말이 바뀌어도, 공통어를 보급하고, 교사의 지도성을 부르짖고, 반미를 주창하고, 민족과 전통을 상찬하고, 국가 목표를 추구한다는 행동 양식이 실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사상적인 대립과는 대조적으로, 보수파와 상통하는 부분이 생긴 것도 그런 이유였다." "여기서 생긴 불신감은 전후에 교육 받은 아동들이 성인이 된 1960년대에 전후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의 배경을 이룬다."(474-5)


10 피로 물든 민족주의의 기억─다케우치 요시미


"다케우치 요시미는 「중국의 근대와 일본의 근대」라는 논고에서, 중국과 일본의 차이는 〈궁극적으로는 고유의 문화를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差〉이다. 즉 〈중국의 문명은 만들어 낸 것이며, 일본처럼 남에게서 빌리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제도든 사상이든, 유럽 문명이 낳은 결과만을 빌려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혁을 실현하는 길은 내부로부터의 자기 개조를 관철하는 것 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이런 근대 일본에서는 자유주의가 길이 막히면 전체주의, 전체주의가 패배하면 민주주의로, 위기 때마다 외국에서 사상을 수입해 올 것이 기대된다. 요약하자면 〈과거에 주어진, 지금도 주어진, 장래에도 주어질 것이라는, 주어지는 환경 속에서 형성되어 온 심리 경향이 뿌리내렸다〉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진정한 절망이나 자기 혁신에 이르지 못하고 〈영구히 실패함으로써 영구히 성공한다. 무한한 반복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보인 듯 생각된다〉라고 다케우치는 말한다."(510-1)


"다케우치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종종 주체성이나 현실, 혹은 정치 등을, 어딘가로 찾으러 가면 주어지는 완성품처럼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주어져야 할 '주체성'을 밖으로 찾으러 나가는〉 것이나 〈현실이라는 실체적인 것이 있어서 무한히 그것과 가까워지는 것〉이 시도된다. 이렇게 해서 자기를 찾으러 밖으로 나간다는 행위, 외부에서 구원을 찾는 기대가 노예의 상태를 고정시킨다." "이렇게 외부에서 문화를 이입해서 위기를 회피하는 것은 물론, 전통을 묵수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것도 자기 보전이며 자기를 잃는 데 불과하다. 서양의 모방과 그 반동에 불과한 국수주의의 사이에서 흔들려 왔던 근대 일본은 〈자기라는 것을 거부하고 동시에 자기 이외의 것을 거부한다〉라고 다케우치는 말한다. 반면 루쉰은 과거의 자기에 머무르는 것도 외부의 힘에 기대서 자기를 포기하는 것도 거부하고 저항한다. 그 양쪽에 대한 거부는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동시에 노예의 주인이기도 거부〉하는 것이다."(512-3)


"다케우치의 사상은 실은 동시대의 사상과 연속되어 있다. 메이지부터 일본의 근대화를 다시 생각한다는 접근도, 주체성이라는 문제에 집착한 것도, 봉건제를 비판하고 국민적 기반의 성립을 지향한 것도, 거의 마루야마와 공통되었다." "그러나 마루야마가 근대를 기준으로 일본 사회를 비판한 데 비해서, 다케우치는 긍정해야 할 근대와 부정해야 할 근대를 나누어 일본의 근대화와 봉건제 쌍방을 비판했다. 다케우치가 일관되게 비판한 것은, 외부의 권위로부터 주어지는 우등생이나 열등생이라는 위치 짓기에 자기가 스스로 말려드는 노예근성이었다. 그런 노예근성을 일종의 자기 보전과 자기 동일성의 희구라고 간주하면, 그것에 근대라는 명칭을 주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권위에의 예종을 봉건적이라고 간주하고 (서양 문화를 재빨리 이입한) 우등생과 (그러지 못한) 열등생의 분단 상태를 봉건사회의 길드와 같다고 논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 까닭에 다케우치에게는 근대 비판과 근대 지향이 모순되지 않았다."(522)


"다케우치는 「근대주의와 민족의 문제」라는 논고에서 〈근대주의란 바꾸어 말하면 민족을 사고의 통로에 포함하지 않는, 혹은 배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케우치가 이 논고에서 '피투성이 민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자기의 내부에 있는 암흑이며, 구체적으로는 전쟁 책임 문제였다." "대일본 제국이 외부의 힘으로 쓰러져도, 자기 안에 야만인 심리가 잠들어 있음을 깨달은 다케우치에게 〈악몽은 잊힐지도 모르지만 피는 씻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는 전후의 지식인들이 피투성이 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민주화나 근대화라는 〈관념과 말의 권위에 기대어〉, 〈자기만은 빠져나간 것〉처럼 구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케우치는 이 논고에서 내셔널리즘과의 대결을 주장하며 〈더러움을 자기 손으로 씻지 않으면 안 된다〉, 〈오로지 용기로써 용기를 가지고 현실의 밑바닥을 뚫고 가라〉,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비겁하다〉 등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525-7)


11 자주독립과 비무장 중립─강화 문제에서 55년 체제까지


"1950년 6월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로 출동한 주일 미군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GHQ는 일본 정부에게 경찰예비대를 설립하도록 지시했다. 이것과 병행하여 미국은 미군의 점령을 종료하고 일본을 독립시켜서 반공 동맹국으로 육성하는 방침을 택했다." "그러나 미국은 점령 종료 후에도 극동의 출격 기지로서 일본을 확보하기를 원했다. 그 결과로 미군의 일본 주둔을 인정하는 미일 안전 보장 조약과 쌍을 이루는 형태로 1951년 9월에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미군 주둔에 반발한 소련과 중국, 인도 등은 이 강화 회의에 불참했다. 이 강화 회의를 앞두고, 미국 주도의 강화 조약과 미일 안보 조약을 긍정하는 '단독 강화론', 그리고 소련과 중국을 포함한 강화를 주장하는 '전면 강화론'이 대립했다. 이 전면 강화론을 주창한 것으로 잘 알려진 지식인 집단이 바로 '평화문제담화회'이며, 그런 논의 속에서 헌법 제9조도 주목받게 된다."(541)


"요시노 겐자부로는 1948년부터 평화문제담화회를 조직해 공산당으로부터 한발 떨어진 지점에서 평화 운동을 개시했다. 이 평화문제담화회는 1948년 7월에 유네스코에서 발표한 유럽의 사회 과학자 8인이 낸 평화 성명에 자극받아, 일본의 사회 과학자로서 평화 성명을 내고자 요시노가 조작했다." "그러나 (전쟁이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발생한다고 본) 공산당계 논자들은 냉담한 반응이었다. 유네스코의 헌장에는 〈전쟁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성명은 인간성을 중시하고 사회 과학을 '인간의 학學'이라고 규정했다. 요시노는 여기에서 기존의 사회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간의 이항 대립적인 도식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인간이 이루어 가는 평화로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말하자면 유네스코의 성명은 오쓰카 히사오에게 베버가, 마루야마에게는 근대 국민 국가의 이념이 그랬듯이, 전쟁 체험에서 태어난 심정을 표현할 때의 자극 매체가 되었다."(562-3)


"〈미국의 행동을 심판할 척도가 우리 손 안에 있다〉라는 논리는 당초부터 평화문제담화회에 존재했다. 1948년 12월의 토의에서 의장 아베 요시시게는 〈극동 재판은 평화와 문명의 이름으로써 일본 국민을 재판한 것입니다〉, 〈연합국이 평화와 문명의 이름을 가지고 우리를 재판한 이상, 반드시 우리를 향해 평화와 문명을 보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연히 그런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한다. 아베의 이 주장은 1949년 1월의 성명에도 담긴다." "요시노 겐자부로는 당시를 회상하며 〈극동 재판에서 일본 국민을 그처럼 재판했던 상대가, 지금 다시 전쟁을 하려는 것이며, 거기에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에 대한 불만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평화를 요구하는 것은 일본의 구질서와 현재의 동서 대립에 대한 양면적인 비판이 된다〉라고 말한다. 비무장 중립론과 호헌론은 미소라는 양 대국에 대한 자주독립의 의지 표시이자, 미국을 추종하며 부활을 꾀하는 일본의 구질서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569-70)


"전후 배상은 본래 평화의 문제와 불가분일 터였다. 그러나 패전 후의 궁핍한 경제 상태 속에서는 평화를 향한 바람이 우선시되고 배상 문제는 경시되기 쉬웠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에 가해진 가혹한 배상이 나치스가 대두하는 온상이 되었다는 역사도 존재했기에, 배상 청구가 억제된 것은 당연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전쟁 책임은 오로지 일본의 위정자가 일본 국민에게 끼친 피해를 묻는 것, 혹은 지식인의 처신 방법이나 주체성의 문제였다. 이처럼 전면 강화론자들 역시 솔직한 애국심에 의거했던 만큼, 대다수 '일본인' 이외의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결여하기 일쑤였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발효로 자이니치 조선인 및 타이완인들의 일본 국적이 박탈되었지만, 그 문제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오키나와의 분리에 대해서는 지식인층에서 오키나와 주민에 대한 동정적인 의견도 적지 않았지만, 일본 정부나 사회당은 오로지 영토 확보라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584-5)


"추방이 해제된 보수 정치가들이 대량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1953~1956년은 정치 제도가 전전으로 회귀할 위험이 가장 강했던 시기다. 개헌 준비뿐만 아니라 1954년에는 보안대가 자위대로 승격했고, 1956년에는 교육위원회의 공선제가 폐지되었다. 그 밖에 (남성 호주제 중심의) 가족 제도를 부활시키는 민법 개정이 계획되었고, 전후 개혁으로 해체된 내무성을 부활시키는 내정성內政省 설치 법안 등이 의회에 제출되었다." "이른바 '55년 체제'가 성립하면서 사회당의 좌파와 우파, 그리고 공산당 등은 양쪽 모두 1955년을 경계로 자기 당의 사회 구상을 보류함으로써 국민적인 호헌 운동에 참가했다. 이를 통해서 전전 체제로의 회귀를 저지했다는 의의는 분명히 컸다. 그러나 그 대가로 각자가 본래 지향했던 사회 구상을 서로 대결시켜 가는 역동성은 사라졌다. 그런 가운데 호헌, 평화, 민주주의라는 말이 보수 세력의 공세로부터 전후 개혁의 성과를 〈지킨다〉는 방위적인 슬로건이 뒤어 갔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592-4)


12 60년 안보 투쟁─전후의 분기점


"1951년 안보 조약에는 미국의 일본 방위 의무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미국에게 일본을 방위할 의무를 주장하는 방향으로 안보 조약을 개정하는 지름길은, 일본이 헌법을 개정해서 재군비와 해외 파병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적어도 어떤 방법으로든 미국의 국제 전략에 공헌하지 않고서는 안보 조약을 보다 대등한 관계로 가져가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보수 정권의 생각이었다." "기시가 안보 조약 개정을 둘러싸고 미일 교섭을 추진했던 1958년은 내정에서도 충돌이 많은 해였다. 일교조 억압, 경관의 권한 대폭 확대 등을 둘러싼 일련의 충돌은 기시가 종래부터 개헌론자였던 점과 어우러져서, 안보 조약 개정과 전전 체제의 부활은 한 몸이라는 인상을 확대시켰다. 이제 안보 조약 개정은 단순한 외교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전후 일본의 거시적인 디자인을 둘러싼 대립이 되고 있었다. 그 대립은 1960년에 들어가서 큰 불을 뿜는다."(604-6)


"기시는 관료적인 권위주의, 미국에 대한 종속, 전쟁 책임의 망각, 그리고 비열함이라는, 전후사상이 혐오해 온 모든 것을 갖추었다. 쓰루미는 〈기시 수상만큼 멋지게, 쇼와 시대 일본의 지배자를 대표하는 자는 없다. 이보다 훌륭한 하나의 상징은 생각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일본에서 현재 벌어지는 일은 실질적으로는 패배 전에 일본을 지배했던 국가와 패배 후에 태어난 국가라는, 두 국가의 싸움이다〉라고 주장했다. 5월 19일의 안보 조약 강행 채결을 경계로 문제는 안보에 대한 찬반으로부터 '전전 일본'과 '전후 일본'이라는 '두 국가의 싸움'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기시에 대한 항의만큼 전후 일본에 대한 애국심을 공공연히 표명할 기회는 없었다." "그때 사람들은 전쟁의 기억을 상기하면서, 전후에 계속 품어 왔던 심정이 기시 노부스케라는 상징으로 응축되는 것을 느꼈다. 시미즈가 말했듯이 〈오랫동안 말로 표현되지 못했던 낡은 경험과 감정〉이 이제는 〈표현의 기회〉를 획득하려 했다."(615-7)


"안보 투쟁은 '시민'이라는 말이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정착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시민'이라는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움직임이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있었지만, 시민을 프티 부르주아와 동의어로 보는 공산당 주변의 인식은 뿌리가 깊었고, 이 말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안보 투쟁 속에서 공산당의 권위가 실추되고 노동자나 농민에 의존했던 기존 조직으로부터 독립된 운동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말로서 시민이 사용되어 갔다." "이런 시민은 내셔널리즘과 모순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후쿠다 간이치는 시민 정신을 상찬하면서 〈일본 국민이 처음으로 국민으로서의 책임에 나섰다〉, 〈실로 국민 국가 일본의 원리적 탄생을 예고한다〉라고 말했다. 역시 젊은 정치학자였던 사카모토 요시카즈는 좀 더 직접적으로 〈안보에 대한 도전이라는 형태로, 일본 역사에서 데모크라시와 내셔널리즘이 처음 손을 잡았다〉라고 주장했다."(630-2)


"5월 19일의 강행 채결에서 30일이 경과하면 참의원의 심의를 거치지 않아도 안보 조약은 자연 승인되었다. 그 기일인 6월 19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간바 미치코가 사망한 6월 15일, 아이젠하워의 도쿄 방문이 중지된 16일, 그리고 「폭력을 물리치고 의회주의를 지켜라」라는 신문의 공동 성명이 나온 17일, 국회는 연일 거대한 데모대로 포위되었지만, 기시 수상은 여전히 강경한 자세를 유지했다." "운동 측에는 결정적인 한 수가 없었고, 사회당과 공산당을 비롯한 혁신 정당은 구체적인 방침을 표명하지 못했다." "6월 18일, 데모대는 밤새워 국회를 포위했지만 마침내 시간은 0시를 맞이하고 안보 조약은 자연 승인되었다." "다음날인 20일에 참의원의 자민당은 야당의 허를 찌르고 안보특별위원회와 본회의를 단독으로 열어, 안보 관계 법안을 일거에 통과시켰다. 22일에는 미국 상원이 신안보 조약을 승인하고, 23일에 가서 기시 수상은 외상 공저公邸에서 비준서를 교환한 뒤, 내각 총사직을 공표했다."(654-5)


"이런 결과에 대해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시미즈 이쿠타로는 안보 자연 승인의 밤, 패배감에 무너져 울었다. 대조적으로 마루야마 마사오는 투쟁 속에서 실현된 질서 의식과 연대감의 압도적인 인상에 비하면 〈'자연 승인'의 순간 같은 것은 나의 뇌리 속에 하잘 것 없는 장소밖에 차지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승패의 평가가 어찌되었든 간에 안보의 자연 승인과 기시 수상의 퇴진 이후, 데모의 물결은 급격히 시들어 갔다. 애초에 5월 19일 이후 운동의 성황은, 안보 그 자체에 대한 반대보다도 기시에 대한 반감과 전학련으로 대표되는 소박한 정의감으로 뒷받침되었다. 기시가 퇴진하고 안보가 자연 승인되면서 소박한 정의감에서 보면 패배가 명확해진 이상, 운동의 퇴조는 피할 수 없었다." "기시를 대신해서 수상이 된 이케다 하야토는 취임 직후에 「소득 배증 계획」을 발표했고, 본격적으로 고도 경제 성장의 막이 오르려 했다. 그리고 전후 일본의 민주와 애국을 둘러싼 언설도 변동의 시대로 들어간다."(655-7)


3부


13 대중 사회와 내셔널리즘─1960년대와 전공투


"고도 경제 성장의 진전, 1963년 OECD 가입, 1964년 도쿄올림픽 등의 현상과 병행해 발생한 것이 체계적인 사상을 갖추지 않은 무자각적 내셔널리즘의 확산이다." "정치학자 마쓰시타 게이이치에 따르면, 생산력과 대중 매체의 발전으로 인해 서방 선진국에서는 문화와 생활 양식의 균질화가 진행 중이며, 계급 사회에서 대중 사회로 이행되었다. 거기에서는 계급 대립을 전제로 한 사회주의 혁명이 성립되지 않으며, 정치에 무관심한 대중이 주류를 차지한다. 그리고 과거에 마르크스가 〈조국을 갖지 않는다〉라고 말한 프롤레타리아트도 〈사회의 '소시민화'〉와 〈대중 민주주의〉로 〈자본주의 국가의 '국민'으로 전화〉하여 대중 내셔널리즘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중에 '단일 민족'이라는 말의 용법도 변화했다. 이 말은 1950년대에는 형성되어야 할 목표로서 좌파가 주창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로는 고대 이래의 기성사실을 가리키는 말로 보수 측이 주창하게 된다."(665-8)


"고도 경제 성장과 병행하여 생긴 현상이 하나 더 있었다. 전쟁 체험의 풍화이다." "전쟁 체험의 부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의 등장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의 기억이 차츰 형해화하면서 동시에 미화의 대상이 된 점이었다." "전쟁을 미화하는 전기물이 용전감투勇戰敢鬪나 순수무잡純粹無雜을 강조한 반면, 전쟁의 비극을 전하고자 하는 전쟁 체험물은 비극과 노고를 정서적으로 이야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양쪽은 정치적 입장은 반대였지만, 전쟁을 감상적으로 이야기한다는 점과 전후사상의 가장 큰 계기였던 굴욕과 회환의 상처에 닿는 부분이 적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1956년 히다카 로쿠로가 말한 바에 따르면 전쟁을 모르는 세대뿐만 아니라 전쟁 체험 세대에서도 〈전쟁이 이미 각자의 체험과 실감을 넘어선 추상물이 되기 시작〉했다." "체험자들에게만 통하는 폐쇄적인 표현은 점차 정형화되어, 회한을 감상으로 은폐하는 미사여구가 되어 버리기 쉬웠다."(671-4)


"그리고 고도성장이 진행되면서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 대두했다. 이런 비판은 평화로운 시대밖에 알지 못하고, 그런 상황에 권태를 느끼게 된 전후 세대의 공감을 불렀다. 전학련 주류파의 젊은이들과 친교가 있던 시미즈 이쿠타로는 1961년에 공산당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일정한 연령 이상의 인텔리는 전전 및 전시 중의 어두운 기억이 살아 있기 때문에, 평화와 민주주의가 전후의 양대 가치라는 점만으로도 제법 만족할 수 있지만, 젊은 녀석들은 매우 다르다. 전후에 소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양대 가치가 당연한 것, 평범한 것, 심지어는 지루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평화와 민주주의의 기만을 지적하는 젊은이들 중 많은 수가 1955년 이전에 다양한 헌법관과 평화관이 존재했다는 점을 몰랐다." "어쨌든 이 시기부터 패전 후에 존재했던 다양한 사상 조류와 개혁을 일괄해서 '전후 민주주의'라 총칭하는 방법이 급속하게 일반화되었다."(676-8)


"전후의 학제 개혁과 고도성장은 대학생의 급격한 대중화를 초래했다. 그에 더해 1960년대 중반부터 패전 후 베이비 붐 세대의 대학 진학이 이루어지면서, 진학률의 급상승과 더불어 수험 경쟁의 격화와 대학 설비의 부족이 일어났다. 그 결과로 출현한 것이 대학 입학 이전에는 입시 학원과 진학 학원의 증가이며, 대학 입학 후에는 대강당에서 마이크로 이루어지는 강의였다. 수험 전쟁, 메머드 대학, 매스 프로mass production(대량 생산) 교육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 것도 이 시기였다." "수험 전쟁을 뚫고 도달한 대학에 열악한 설비와 대량 생산화된 교육 내용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런 학생들에게 기대에 대한 큰 배신이었다. 또한 1960년을 경계로 대학 졸업자의 완전 취업 상태가 성립했지만, 대학 졸업생의 급격한 증가 때문에 취직 가능한 직업은 평범한 것으로 변했다." "이런 사태는 큰 꿈을 안고 대학에 진학한 젊은이들이 자신의 미래가 제한되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688-9)


"이런 배경 속에서 1960년대 후반에는 각지의 대학에서 분쟁이 이어졌다. 마침내 1968년에는 니혼대학과 도쿄대학에서 학생의 대학 점거가 일어나, 전 학교의 학생을 규합한 전학공투회의全學共鬪會議가 결성되어 '전공투'라고 약칭되었다. 1965년 한일 회담 반대 투쟁 이래로 학생운동은 일시적으로 정체되었는데, 1967~1968년 이후에는 한 번에 불타올랐다. 이 전공투의 대학 점거는 이윽고 전국 각지의 대학에 파급되어, 전공투 운동이라고 총칭되었다. 이 전공투 운동은 많은 경우에 혁명이나 소외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언어를 쓰며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배경이 된 것은 학생의 대량화와 기존 대학 조직 간의 불일치이며, 아키야마 등이 말하는 〈엘리트적 의식과 존재 사이의 결정적 결락〉이며, 대형화되는 대학과 사회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진실을 되찾고 싶다는 욕구〉였다. 이런 배경이 없었다면 전공투 운동이 일부 활동가의 범위를 넘어서 그토록 퍼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690-1)


"전공투 운동에 참가한 세대는 전쟁과 기아를 경험하지 않았다. 당시의 신좌익계 활동가 중 한 명은 〈데모에 가게 된 것은, 아무 고생도 하지 않고 자라나 세상 물정 모르고 도움도 안 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무엇이든지 하고 싶다는 '성실한' 기분과, 시대의 분위기에 빠르게 감응하며 유행을 좇는 패거리의 '비일상'에 대한 동경이 동거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라고 회상한다. 때문에 당시의 전공투계 학생들의 수기에는 매스mass, 일상, 질서 등에 대한 반역을 이야기하거나, 〈자기 부정〉, 〈일상의 부정〉, 〈예속의 평화보다 자유의 투쟁을!〉 등이라 호소하는 것이 많다. 도쿄대 전공투의 어느 학생은 〈전공투는 어떤 대학을 만들고 싶은 것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들은 싸움 그 자체를 바란다〉라고 답했다. 이런 전공투계의 학생들이 싫어한 말은, 민주주의, 평화, 근대 시민사회, 근대 합리주의, 협상 등이었다. 그들에게 그것들은 기존 사회를 지탱하는 논리이며 혁명을 말리는 개량주의였다."(693-4)


14 '공적인 것'의 해체─요시모토 다카아키


"1955년경부터 널리 사용된 전중파戰中派라는 말은, 훗날에는 전쟁 체험을 겪은 세대 전부를 총칭하게 되었지만, 당초에는 패전 시에 10대 후반에서 20대 전반의 청춘기였던 세대를 가리켰다. 보다 나이가 많은(패전 시에 30세 전후) 마루야마 마사오와 다케우치 요시미의 세대를 전전파戰前派, 보다 소년이었던(패전 시에 10세 전후) 에토 준과 오에 겐자부로 등의 세대를 전후파戰後派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 전중파는 전시 중에 가장 중심적인 동원 대상이 되었고, 가장 사상자가 많았을 뿐 아니라, 중등·고등 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도 갖지 못했다. 또 그들의 유년기는 황국 교육이 격화된 시기였고, 게다가 극도의 언론 탄압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나 자유주의를 접할 수도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전쟁 상태에 놓여 있었던 그들에게는,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사상을 가진 인간이 있다는 것도, 전쟁 이외의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719-20)


"이런 까닭에 전중파 지식인들은 전쟁이야말로 정상이고 평화 쪽이 이상이라는 감각을 종종 이야기했다. 1956년 좌담회에서 무라카미 효에는 〈전쟁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감정으로 자라났다〉라고 말했고, 작가 미시마 유키오도 〈지금 쪽이 정상이 아닌abnormal 듯한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다〉, 〈끊임없이 '진짜가 아니다'라는 의식이 있다〉라고 응한다. 전후사상을 의제擬制라고 비파한 요시모토는 이런 세대에 속했다." "교양과 지식량에서 윗세대에 뒤지는 그들이 기댈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의 가혹한 부분을 경험했다는 자부심이었다." "또한 이 세대의 최대 무기가 된 것은, 전쟁에 비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했던 연장자들의 책임을 추궁하고, 그들을 비겁하다고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중파의 다수는 윗세대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면서도 자신의 전쟁 책임은 느끼지 않았다." "본래 전쟁에 비판적인 사상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전쟁에 항의할 용기가 없었다는 종류의 회한을 공유하지 않았다."(721-5)


"전중파 지식인들에게는 동세대 중에서도 특이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 가운데 전선에서 전투를 경험한 자가 적다는 사실이다. 사토 다다오는 소년 비행병으로, 시라토리 구니오는 해군경리학교생으로, 모두 군 부속 학교의 생도로 일본 내에서 패전을 맞이했다 무라카미 효에와 무라카이 이치로, 우메하라 다케시 등은 청년 장교 혹은 학도병이었지만, 전선에서 근무한 경험은 없으며 역시 일본에서 패전을 맞이했다. 그리고 전중파 지식인의 대표 격으로 여겨지는 미시마 유키오와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태평양 전쟁 중에 20세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병역을 경험하지 않았다." "또한 동세대 속에서도 순진한 전쟁관을 패전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 경험 없는 학생들이 중심이었다. 요시모토와 미시마처럼 징병 체험이 없는 자는 군대 내부의 부정과 린치, 전장에서의 학살 행위 등을 목격하는 일도 더더욱 없었고, 정부의 슬로건이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챌 기회도 없었다."(729-30)


"요시모토를 비롯한 많은 전중파 지식인들의 패전 묘사에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숭고한 이념에 불타 완전히 죽음을 믿었던 상태에서, 너무나 돌연하게 8월 15일을 맞이해서 국가에 대한 가치관이 격변했다는 것이 그 전형이다." "1955년경부터 전중파 지식인들이 이런 특권적인 패전관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그 이야기 방식은 전쟁을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전후 민주주의의 위선을 공격했던 신좌익계의 젊은이들은 이런 전중파의 이야기를 환영했다. 이런 이야기가 민중의 전쟁 체험이었다면 진보적 지식인이 반전의식을 품었다는 것은 기만이며, 그들은 침략 전쟁에 협력한 과거를 은폐했거나 혹은 민중과 동떨어진 특권적인 엘리트에 지나지 않았음이 입증되기 때문이었다. 거기서는 전중파 세대의 향수와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의 비판의식이 전후 비판이라는 형태로 공범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729-33)


"1960년 안보 이전의 요시모토는 목숨을 걸고 싸워서 사상과 행동의 뒤틀림을 해소하고, 이 세상에서 피안으로 간 사자인 대중으로부터 그런 반질서를 찾았다. 그러나 1960년 이후의 요시모토는 같은 대중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전사자가 아니라 모든 '공'적 질서를 무화하는 '사'생활에서 찾아 갔다. 물론 그 사적인 존재는 마루야마가 주창한 바와 같은 근대적 책임 주체로서의 개인이나 시민은 아니었다." "요시모토가 주창하는 대중은 〈실로 국가 자체를 넘어 버린다〉. 그 대중이란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감성의 질서와 무관한 존재이며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적인 존재였다. 1963년의 평론 「묘사와 거울」에서 요시모토는 기존의 정치를 해체하는 것으로서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의 힘〉을 상찬한다. 그는 〈생산의 고도화가 촉진된 대중 사회의 힘〉이야말로 〈스탈린주의의 해체를 촉진〉했으며, 이것은 〈긍정적으로 다루어야 할 상징〉이라고 말한다."(774)


"요시모토의 저작은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았다. 그것은 고도성장 속에서 권위와 죄책감의 제약을 뿌리치고 자기 좋은 길을 걷는 것을 정당화해 줄 사상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자기 좋을 길을 걷는다는 그 바람은, 혹은 전공투 운동을 비롯해 권위에 반항하는 형태로, 혹은 죄책감을 벗어나 사생활에 몰두하는 형태로 각각 표현되었다. 요시모토의 사상은 그런 움직임을 촉진하는 촉매로 기능했다. 어떤 의미에서 요시모토 사상의 매력은 다양한 모순을 혼연히 포함한 점에 있다. 거기서는 철저 투쟁을 말하면서 사생활에 몰두하는 것이 궁극의 반질서로 여겨졌다. 〈대중의 원상原像을 투입하자〉라면서,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초월에 도달하는 것이 지향해야 할 〈자립〉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그런 혼돈 속에서 그때그때 자기의 바람에 응답해 주는 말을, 시를 읽듯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바람에 지지를 받으며 민주주의 신화를 비판한 요시모토는, 그 자신이 신화가 되어갔다."(784-5)


15 시취屍臭에 대한 동경─에토 준


"에토 준은 만주 사변 이듬해인 1932년에 태어났다. 소국민小國民 세대 등으로도 불리는 이 세대는 패전 시에 10세 전후에서 10대 초반이었다. 패전 시에 31세였던 마루야마 등의 전전파는 물론, 패전 시에 20세였던 요시모토 등의 전후파보다도, 더욱더 빈틈없이 전쟁과 황국 교육에 물들어서 자라난 것이 이 소국민 세대였다." "그러나 패전은 금세 찾아왔다. 전쟁에 헌신하는 것 이외의 가치관을 알지 못했던 소년 소녀들에게, 그것은 세계의 붕괴를 의미했다. 자기를 질타했던 교사가 변모하여 미국과 민주주의를 찬미하기 시작한 충격도 컸다." "때문에 이 소국민 세대는 전쟁으로 상처를 입었지만 전쟁 체험의 가혹함을 이야기한다는 판에 오르면, 자기들이 연장자보다 뒤처진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를 품고 있었다. 게다가 전쟁 체험에 집착하는 전중파에 대한 반발이 더해져서 자기들은 전쟁의 상처와는 무관한 전후파라고 강조하는 경향이 보였다."(789-95)


"전쟁의 상흔은 그들보다 윗세대인 전전파와 전중파의 경우, 회한이나 굴욕과 같은 사회적인 기억으로 새겨졌다. 그러나 패전 시에 10세 전후로, 자기의 체험을 위치 지을 사회적인 언어를 충분히 갖추지 못했던 소년 소녀들은 보다 추상적인, 표현되지 않는 억압감으로서 전쟁의 압력과 죽음의 공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소국민 세대의 소년들은, 태어날 때부터 병사로서 죽을 것을 교육받았다. 그것은 동경과 동시에 공포이기도 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겉으로 드러내고 공언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자신의 내심으로 인정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그런 탓에 그들은 죽음의 공포를 무의식 중에 억압했다. 그리고 그들의 2차 성징기가 전쟁과 겹친 까닭도 있어서, 억압된 죽음의 공포는 종종 성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각인되는 형태가 되었다." "이런 죽음과 성의 이미지 결합은 체계적인 언어를 갖지 못했던 소국민 세대의 내부에서, 신화처럼 혼돈된 기호의 난무로 기억되었다."(802-3)


"패전 직후의 에토는 다자이 오사무에 심취했다. 사양족斜陽族이라는 유행어까지 낳은 다자이의 문학은 전쟁으로 절망과 몰락을 강요당한 청년층에게 인기를 모았다. 에토는 〈우리 집이 급속히 무너졌을 때, 다자이 오사무를 숙독했던 흔적은, 아마도 평생 사라질 것 같지 않다〉라고 회상한다." "또한 에토는 〈나는 그 무렵 다자이 오사무를 통해 일본 낭만파를 바라보며, 혹은 일본 낭만파만을 바라보았다〉고 말했다." "에토가 다자이에서 찾아낸 것은 일본 낭만파를 상징하는 죽음의 향기였다. 에토에게 그것은 그가 태어났고 자란 전쟁 시대에 가득 찼던 향기이며 잃어버린 유년 시절을 함께한 친어머니와 할머니들의 향기였다. 다자이로 상징되는 달콤한 시취는 유년 시절에 각인된 '물컹거리는 추악한 것'으로부터 떠도는 향기이며, 에토에게는 공포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취의 유혹을 거부하고 전후의 현실 생활에 맞서는 것이, 그에게는 〈어른이 된다〉라는 의미였다."(811-2)


"원래 에토는 이 세대의 젊은 지식인들이 으레 그랬듯이, 마루야마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천황제나 전중파 지식인, 그리고 안보 투쟁의 지도자 등을 비판할 때 마루야마의 〈무책임의 체계〉라는 말을 상용했다. 정치는 결과 책임의 문제이며, 동기의 순수함을 관계가 없다는 전학련 평가도 마루야마의 영향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런 마루야마가 자기가 기대했던 것 같은 견해를 보이지 않은 점에 에토는 분노를 보였다. 에토가 보기에 마루야마가 8월 15일(패전의 날)을 기준점으로 현상의 일본을 비판하면서 공적 관심의 재건을 호소한 것은, 관념에 기대서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려는 자기 절대화였다. 에토에 따르면 〈'전후'에 정의의 실현을 본다는 사고방식〉은 〈전쟁에 어떤 도덕적 가치를 도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란 힘과 힘의 충돌에 불과하고, 전후 개혁도 미군에게 필요한 점령 정책에 불과했다. 평화 또한 신성한 가치 같은 것이 아니고 싸움을 회피하는 일상적 노력이라는 산문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834-5)


"전후사상에서 에토의 특징은, 구세대의 올드 리버럴리스트와는 달리 자기의 아이덴티티 문제에서 보수사상을 세워 간 점에 있었다. 올드 리버럴리스트들은 전쟁 전 중산 계층의 안정적인 생활 속에서 자기를 형성했고, 거기에서 길러진 가치관과 생활 감각을 기초로 하여 전후의 사회 변동을 비판했다. 그러나 에토는 올드 리버럴리스트들과 출신 계층은 겹치지만 소년기에 몰락을 경험했기 때문에 안정적인 아이덴티티를 형성할 수 없었다. 전후 사회에 허구감을 품는 것이나 죽음과 국가에 대해 양가적 태도를 가진 것은 그 세대의 문학가들에게 적지 않은 현상이다. 그러나 에토의 특징은, 생모의 죽음이 전쟁의 개시와 겹쳤고 아버지와의 갈등이 패전과 겹쳤다는 우연에서, 이런 양가성과 거부감이 '집'의 문제와 혼연일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에토는 패전의 아픔을 잊기 위해 전후 사회의 현실을 거부하고, 국가라는 백일몽을 쌓아 올리며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희구해 갔다."(856-7)


16 죽은 자의 월경─쓰루미 슌스케, 오다 마코토


"전쟁 전 지식인의 기본 교양은 헤겔이나 마르크스 등의 독일 철학이었고, 교토학파 등은 그것을 바탕으로 한 난해한 철학 용어로 전쟁을 미화했다. 그러나 쓰루미 슌스케는 미국에서 익힌 논리 실증주의와 프래그머티즘, 기호론 등을 무기로 이런 부적 같은 언어의 비합리성을 철저히 비판했다." "쓰루미는 패전 후 철학의 역할로 비판, 지침指針, 동정同情의 세 가지를 든다. 이 가운데 비판과 지침은, 전시 중에 횡행한 비논리적인 기호 사용법을 비판하고 장래를 향한 합리적 지침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쓰루미 사상의 특징은 그가 철학의 세 번째 역할로 든 동정에 있다. 쓰루미가 여기서 말하는 동정은 타자에게 연민을 쏟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동정은, 타자가 자기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 위에서, 타자와 공감하고 연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즉 사람들의 근저에 있는 〈만인에게 공통되게 존재하는 부분의 인자들〉을 찾아냄으로써 공감과 연대의 기반을 포착하는 일이 철학의 임무라는 것이다."(878-80)


"동시에 미국에서 언어 심리학을 배운 바 있는 쓰루미는 일상적인 기본 언어에는 민족어의 다양성을 초월하여 인류 공통의 룰이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쓰루미의 보편 지향이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그의 대중 지향만이 아니라 내셔널리즘과도 대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서양에서 배운 보편사상(이라고 칭하는 것)을 내세워서 대중을 계몽하려는 지식인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 사상을 벗겨 내고 내려가면 지식인들 역시 대중과 같은 일상어를 사용하며, 〈조상 이래의 민족문화로 만들어진 자신〉을 찾아낸다. 그것은 지식인과 대중이 계층 대립을 넘어 결합하는 '민족'의 장소다. 그러나 그 민족문화를 또한 벗겨 내고 내려가면 〈민족정신 밑바닥의 그 어떤 이름도 없는 부분〉이 얼굴을 내민다. 이렇게 해서 〈민족주의를 통한 인터내셔널리즘의 길〉이 열린다. 이런 근저에 있는 이름조차도 없는 부분을, 쓰루미는 〈민족주의와 무정부주의가 함께 태어나는 장소〉라고 부른다."(882-4)


"이런 근저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인 대중은 일본의 대중이면서 동시에 마이너리티를 배제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는 1959년 좌담회에서 〈일본 사회의 밑바닥을 꿰뚫고 나가면, 거기에 국제적인 시점이 열려 온다〉라고 말하며, 일본 사회의 '밑'에 존재하는 조선인, 부라쿠민, 창부들 등의 존재를 든다." "나아가 쓰루미의 경우에 이런 틀을 넘어선 근저의 지점은, 일종의 종교 감각과 이어졌다." "원래 영어에서 말하는 영매medium는 인간의 마음을 매개하는 '미디어'와 같은 말이며, 쓰루미는 전후 일본의 대중문화 연구와 미디어 연구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또한 동정이라고 번역되는 sympathy는 정신 감응telepathy과 마찬가지로, 언어logos로는 표현 불가능한 심정pathos이 인간 개체 간의 경계를 넘어 공진synchronize을 일으키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 까닭에 sympathy는 배려, 연민 등과 함께 공감이나 교감 작용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쓰루미가 말하는 동정의 뉘앙스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885-7)


"오다 마코토가 받은 '치명적인 상처'란 1945년 8월 14일의 오사카 공습이었다." "전후에 오다는 소련 참전과 8월 9일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이후, 그 다음 날인 8월 10일에 일본 정부가 이미 포츠담 선언 수락을 고한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8월 14일에 오사카가 공습을 받은 것은, 일본 정부가 국체호지라는 조건을 명시적으로 담고자 하는 데에 집착해서 포츠담 선언 수락의 정식 표명을 주저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8월 14일 공습은 전혀 무의미한 살육이었다. 거기에는 기껏해야 항복 조건과 체면에 집착하며 망설이던 일본 정부와 거기에 압력을 가한 미국 정부 사이의 알력이 존재한 데 불과했다. 그들의 죽음은 '아시아 해방을 위해 순국한 영웅'이라는 우파의 사상으로도, '평화의 주춧돌이 된 비극'이라는 좌파의 사상으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다. 오다는 후에 〈거기서 죽은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죽었는가. 어린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의 '전후'는 시작되었다〉라고 말한다."(905-7)


"오다는 자기의 전쟁 체험으로부터 〈하나의 원리를 키워갔다〉라고 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모든 순간에 위대한 것은 아니다, 바른 것은 아니다, 성실한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며, 그러나 동시에 〈어떤 인간이라도 어느 때에는 위대할 수 있다, 올바를 수 있다, 성실할 수 있다, 아름다울 수 있다〉라는 원리였다. 이것은 아라 마사히토가 패전 후에 『긴다이분가쿠』에 발표한 논고인 「제2의 청춘」의 말미에 쓰인 〈진부하고 찬연한, 범속凡俗과 닮았으면서도 영웅적인, 추악으로 가득 찬, 그러면서도 한없이 화려한〉이라는 인간관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다가 오사카 공습에서 체험한 '뭐든지'를 표현한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 모든 의미 부여와 낭만주의를 거부하는 인간상을, 오다는 '보통'의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그 보통이란 이상한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확산되어서 종잡을 길이 없는 뭐든지를 표현한 말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쓰루미 슌스케의 대중과도 겹쳐졌다."(923)


"1960년대에 전공투 운동과 함께 주목을 모은 것이 베헤렌이다. 베헤렌은 고정된 조직 형태를 취하지 않고 시민의 자유 참가라는 운동 방식을 내세워서 이후의 시민운동의 원형을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베헤렌은 그 표면적인 무이론無理論적인 모습의 이면에서, 프래그머티스트 철학자(쓰루미 슌스케)와 고대 그리스를 공부한 작가(오다 마코토)가 창설 역을 맡은, 철학적인 요소가 짙은 운동이었다. 거기서 이루어진 것은 개인이 어떻게 타자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국가란 무엇인가 라고 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자기를 묻는 질문이었다. 오다 마코토는 1992년에 출판된 『'베헤렌', 회고록이 아닌 회고』에서 〈문제는 자기 자신이었다〉라고 말한다. 나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될 수 있을까, 그 우리의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어떤 성격일 수 있을까가 그 문제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되묻는 과정에서 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공적인 것의 바람직한 모습을 모색하는 한 궤적을 남겼다."(863, 951)


결론


"전후사상의 최대 강점이자 약점은 그것이 전쟁 체험이라는 국민적인 경험에 의거했다는 것이다. 전쟁 체험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을 심어놓았다. 거기서부터 기존의 언어와 사상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많은 전후 지식인들의 경우, 전쟁 체험을 직접 이야기하는 일은 적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가장 큰 상처였을 뿐만 아니라, 언어로 용이하게 표현할 수 없는 체험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체험을 직접 이야기하는 대산 많은 사상을 만들어 냈다. 동시에 미군의 점령이라는 식민지 상황과 미국 문화의 급격한 침투,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거대한 격차 등은 현대 제3세계의 지식인들이 직면한 상황과 유사하기도 했다. 서양 근대에서 모델을 찾는 데 대한 양가적인 태도와, 지식인이 민중을 어디까지 대변할 수 있느냐는 문제도, 1950년대의 일본에서는 절실한 과제였다."(955-60)


"그러나 이런 전후사상의 강점은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다. 우선 전후사상은 전쟁 체험이 만들어 낸 국민 공동체의식에 의거했기 때문에, 종종 오키나와나 조선 등이 시야에 들어 있지 않았다. 시야에 들어 있는 경우에도 오히려 일본 민족주의의 강화 요인이 되는 방향으로 작용한 사례가 많았다. 이들은 전쟁 체험에 따른 국민 공동체 의식이 풍화되고, 대중 내셔널리즘이 이것을 대신한 1960년대 후반 이후에야 주목받게 된다. 또한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전후사상이 너무나도 남성적이었던 점도 부정할 수 없다. 무사도, 남자다움, 부끄러움을 알라, 팡팡 문화 등의 말이 빈출하는 것은, 좋든 나쁘든 전후사상의 한 특징이다." "전후 사상의 최대 약점은, 말로 이야기할 수 없는 전쟁 체험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전쟁 체험이 없는 세대와 공유할 수 있는 말을 만들지 못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전후사상은 근대나 주체성이라는 말의 배경이 된 전쟁의 기억을 공유하지 않은 세대에 대해서는 설득력을 잃어 갔다."(960-2)


"또한 동시에 전후사상의 붕괴 감각은, 질서가 안정된 고도성장기 이후에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 갔다. 1955년을 경계로 혼란과 개혁의 시대였던 '제1의 전후'가 끝나고 안정과 성장의 시대인 '제2의 전후'가 시작되는 가운데, 이른바 55년 체제의 이름하에 보수와 혁신이라는 세력 도식이 고정화되었을 때, 전후사상의 최전성기는 이미 끝나 있었다. 그리고 전후 태생의 좌파에게 전후 민주주의란 보수와 혁신의 형해화한 대립 도식 중 일부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과거 마루야마 마사오 등은 세계와 미래의 불안정함을 전제로 국가의 건설에 참가하는 국민주의를 주창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종종 전후 태생의 세대에게 기존 질서의 수중으로 들어간 '건설적'인 사상으로만 보이게 되었다. 또한 전쟁 체험 세대의 전쟁 기억도, 1960년대부터 급속히 풍화되어 갔다. 언어가 되지 않는 심정을 대신해서 나타난 것은, 굴욕의 상처를 은폐하고, 감상적인 이야기로 무해화된 전쟁 체험담이었다."(962)


"일본이 고도성장을 이룬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갖가지 설이 있지만, 냉전기 국제 조건의 호혜를 받았다는 것이 그중 하나다. 일본을 아시아에서의 중핵적인 반공 공업국으로 육성한다는 미국의 전략이 미국 및 동남아시아 시장을 일본에 가져 왔고,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특수를 주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제 냉전기에 차지했던 특권적인 국제적 위치를 잃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이 민주화를 이루었고, 냉전 후의 중국이 옛 서방 국가들과 활발히 경제 교류를 하게 되었기 때문에, 일본이 아시아 유일의 공업화된 자유 민주주의 국가였던 시대는 끝났다." "이런 국내적·국제적인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아시아에 대한 전쟁 책임 논의와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비롯한 우파의 대두가 일어난 사실이, 제3의 전후에서 일본 내셔널리즘의 정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논의들의 공통점은 전후에 대한 되묻기다."(979-80)


"일반적으로 전후 지식인은 권력 기구로서의 국가는 비판했지만 내셔널리즘에는 오히려 긍정적이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국가라는 단위와는 별개의 내셔널리즘을 이야기했다. 그런 의미에서는 국가에 맞서는 시민이라는 표현도, 당초는 일종의 내셔널리즘으로서 나타난 것이며, 국가에 맞서는 내셔널리즘이었다. 물론 마루야마의 표현을 역전시키자면 〈그것도 내셔널리즘이라 불러야 할지는 각자의 자유〉지만, 어떤 형태로든 공동성과 공공성을 상정하는 한, 넓은 의미의 동포애를 전부 부정할 수 있을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물론 필자는 내셔널리즘이라 불리는 현상의 부정적인 면을 알고 있으므로, 그 말의 복권을 주창할 의지는 없다. 또한 본래의 내셔널리즘을 가정하고 그것으로부터 현재의 내셔널리즘을 일탈 등으로 비판할 생각도 없다. 단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내셔널리즘이 바꾸어 읽기로 변용되는 것은 꼭 특이하거나 신기한 현상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이다."(992-5)


"자기가 자기라는 사실을 감촉하면서, 타자와 공동共同하는 '이름이 없는' 상태를, 전후 지식인들은 혹은 민족이라고 혹은 국민이라고 불렀다. 그것을 내셔널리즘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무의미하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전후사상이 '민주'와 '애국'이라는 내셔널리즘의 말로써 표현하고자 시도해 온 이름 없는 것을, 말의 표면적인 상이점을 구별해서 받아들이고, 그것에 현대와 어울리는 형태를 부여하는 바꾸어 읽기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달성될 때, 전후의 구속을 진정으로 넘어설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을 통독한 독자는 이미 그것을 위한 준비 작업을 마쳤다고 할 수 있다. 그때 그 이름 없는 것에 결과적으로 부여되는 것, 그 가령의 명칭이 무엇이 될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도 내셔널리즘이라 불려야 할지는 각자의 자유에 맡기자.〉 어찌되었든 간에 우리는 이 이름 없는 것을 과거에서 찾고, 현재에서도 찾고, 또한 미래에서도 찾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9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격전의 전설
칼 하인츠 프리저 지음, 진중근 옮김 / 일조각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입 1940년의 기적


"1940년 5월, '너무나 어이없는, 현대 전쟁사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은 4년 동안이나 프랑스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동원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 4일 만에 스당 돌파에 성공하면서, 총 6주 만에 전역이 종결된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독일의 승리는 결코 예견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우연히 맞물리면서 발생한 결과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치 선전가들은 독일의 승리가 이미 오래전부터 정립된 개념에 따라 실행·달성된 것이라는 일종의 전설을 창조해냈고, 여기에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전격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와 동시에 이 새로운 전략의 창시자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라고 선전했고, 그는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가장 위대한 군사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합국 측은 너무나 처절하게 패배한 지휘관들의 그럴싸한 구실 찾기를 위해 이 전설을 자진해서 받아들였다."(30-2)


제1장 '전격전'의 기원과 개념


"제1차 세계대전은 무기체계의 발전에 따라 화력 요인이 기동 요인을 압도했고 대부대급 작전들은 종종 시작하기도 전에 우박처럼 퍼붓는 포탄과 기관총탄의 세례 속에 교착 상태에 빠졌다. 급기야 전쟁 양상은 소모적인 장기간의 진지전으로 치달았고, 장군들은 작전술 차원의 지휘기법이 퇴색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제국의 군사지도부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통해 엄청난 교훈을 얻었다. 전투력이 월등히 우세한 적을 상대로 해서는 결코 '속전속결'을 단행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40년 스당에서의 승리 이후 히틀러와 그의 장군들은 비로소 '전격전'에 있는 '승리의 열쇠', 즉 신속한 결전을 통해 경제적으로─그리고 전략적으로도─ 훨씬 우위에 있는 적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작전술 차원의 '기적의 무기'를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산업화 사회에서 이러한 망상은 훗날 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할 때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했고, 독일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43-5)


제2장 '전격전' 개념이 없는 '전격전'과 서부전역의 배경


"독일 군부는 독일제국의 불리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다시 한번 양면전쟁을 치를 가능성을 고심한 결과, '신속한 전쟁'을 통한 '즉각적인 결전'을 시도하고자 했다. 폴란드 전역은 개전 4일 만에 사실상 승패가 결정되었고 18일 후에는 실질적으로 종결되었다. 이 전역은 복잡한 기동으로 적을 포위해야 하는 몰트케와 슐리펜의 작전계획과는 달리, 오히려 지형 조건을 이용한 자연적인 포위작전으로 전개되었다." "기갑부대, 즉 전차의 운용 면에서도 폴란드 전역은 서부전역과 근본적으로 판이했다. 서부전역이 '지헬슈니트Sichelschnitt(낫질) 계획'(1940년 5월)에 의거해 기갑부대를 주축으로 실시한 대규모 작전이었던 반면, 폴란드 전역의 경우 기갑부대는 작전술 수준의 독립 제대조차 투입되지 않았다. 대신 기갑부대는 통상 사단급 수준(전술적 수준)으로 편성·운용되었다. 폴란드 전역은 새로운 방식의 전쟁 개념을 적용한 일종의 시험장이었을 뿐이다."(58-9)


"1940년이 서부전역이 애초부터 전격전으로 계획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적 자원의 동원을 살펴보면 더 명확해진다. 그 단적인 예가 Uk 계층(노동자 계층)의 존재와 이들의 징집면제였다. 서부전역이 발발하기 전에 육군은 이 민간인들을 무기한으로 방위산업체에 동원했으나 동부전역 전에는 기한을 정확히 3개월, 1941년 9월까지로 한정해서 동원했다. 3개월 이내에 전격전으로 덩치만 크고 내실이 없는 소련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서부전역을 계획할 때 독일군 지도부는 제1차 세계대전과 유사한 장기전 쪽으로 방향을 잡아나갔다. 당시 산업화된 전쟁 시대에 군사적 대결도 결국에는 후방에서의 방위산업 능력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이러한 정책을 입안한 것이다." "히틀러와 그의 군사 고문들은 기갑부대에 의한 신속하고도 결정적인 작전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서방국가들과의 장기간의 투쟁을 위해 경제적·군사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72-3)


"적의 규모를 부풀리고 아군 전투력을 축소하는 것은 전쟁을 선전할 때의 기본원칙이다. 특히 아군이 승리했을 때, 이 원칙은 승리를 더 찬란한 영광으로 빛나게 하지만, 패배했을 때는 패배를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서부전역에 관한 많은 문헌들은 독일의 전력이 연합국의 그것보다 월등히 우세했다는 비상식적인 내용들을 여과 없이 그대로 담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괴벨스에 의해 완벽히 조율되던 독일의 선전기관들은 서방국가들의 언론에 나타나는 공포스런 독일군의 이미지를 한층 더 강조할뿐더러, 더 나아가 극단적이고 과장된 표현을 써야만 했을까?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독일 측 선전의 최우선적인 목적은 영국의 계속되는 전쟁 수행에 제동을 걸고 미국을 위협해 참전을 막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국방군이 '천하무적'이라는 선전을 통해, 강철로 된 파도처럼 쇄도해 어떤 적이라도 무너뜨린다는 독일 '전격전 부대'라는 공포와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83)


제3장 지헬슈니트 계획을 둘러싼 갈등


"A집단군 참모장 만슈타인 중장은 10월 21일 육군 총사령부로부터 최초 공격명령을 수령했다. 수령 직후 그는 훗날 '지헬슈니트 계획'이라고 불린, 획기적인 사상이 내재된 대안을 발전시켰다." "만슈타인이 기획한 방책이 기발했던 이유는, 단 하나의 조치로 두 가지 문제─우익을 주공으로 삼으면 적 방어부대의 주력과 부딪히기 때문에 기껏해야 국지적인 승리만 얻을 수 있고, 차후에 적에게 작전술 규모의 치명적인 역습을 당할 우려가 있다─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북부에 위치한 B집단군이 아닌 중부의 A집단군을 주공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적이 예상치 못한 공격, 즉 통과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아르덴 산림지대로 강력한 기갑부대를 투입하여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슈타인은 A집단군 사령관인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의 승인하에 총 일곱 차례 건의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육군 총사령부는 만슈타인의 주장을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무시해버렸다."(125-7)


"만슈타인과 별개로 히틀러도 스당에서 결정적인 돌파를 감행하려는 계획을 구상했다. 육군 총사령부는 히틀러의 구상을 '어설픈 생각'이라 치부하며 말렸지만 그는 자신의 방책을 고집했다." "히틀러의 비서실장 슈문트 대령은 베를린의 수상관저에서 신임 제7기갑사단장 롬멜을 포함한 6명의 신임 장관급 지휘관들과의 조찬식 날짜를 2월 17일로 정했다. 간담회가 끝난 후 히틀러는 만슈타인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이 자리에는 요들과 슈문트만이 동석했다. 다른 장군들이 발언했다면 불안함이 섞인 독백을 내뱉은 후 이내 말을 끊어버리고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 히틀러였지만 이번만은 태도가 달랐다. 그는 만슈타인의 설명에 완전히 사로잡힌 듯 조용히 경청했다.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매혹적인 논리에 감동받은 나머지, 그에게 느꼈던 혐오감도 잊어버렸다. 히틀러는 감격해 하며 만슈타인의 최종 결론인 '강력한 전차[부대]'의 투입에 강한 공감을 표시했다."(128-9)


"지헬슈니트 계획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거론되는 인물은 3명(할더, 히틀러 그리고 만슈타인)이다. 그러나 기갑부대 전문가로서 이 구상을 현실화하는 방법을 만슈타인에게 조언한 사람이 구데리안 장군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게다가 구데리안이 작전 지역의 지형을 꿰뚫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만남은 운명적이라 할 만했다. 구데리안은 1914년 아르덴 지역 공격작전에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1918년 당시 독일 영토였던 스당에서 4주간의 장군참모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따라서 이 계획은 구데리안과 만슈타인이라는 쌍두마차가 창안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만슈타인이 A집단군 참모장 지위를 잃은 후에도 구데리안은 그와 공동으로 창안한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열을 쏟았다.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구데리안은 상부의 지시와 명령을 여러 번 무시했으며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끝까지 관철시켰다. 그러므로 만슈타인이 지향한 작전이 현실화된 것은 구데리안의 덕택이었다."(126-30)


"히틀러는 전술적이고 단순히 귀납적으로 생각해 스당을 떠올렸지만, 만슈타인은 연역적으로, 한 차원 높은 전략적 심사숙고를 거쳐 스당을 선택했다. 여기에 또 다른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스 강 극복 이후 전쟁을 어떻게 수행하는가였다. 스당 돌파 이후 기갑사단들이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이 의도했던 대로 급속도로 대서양 해안으로 돌진하자 이 독재자는 공황에 빠져, 성공을 눈앞에 둔 기갑부대를 정지시켰다." "스당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가장 큰 원인은 군사 분야에 문외한인 히틀러가 전술적·작전술적 그리고 전략적 개념의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한 데 있다. 마치 아마추어 체스 선수가 우연히 천재적인 행마에 한 번 성공한 후 자신을 챔피언이라고 굳게 믿는 것처럼, 히틀러는 자신을 챔피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한판승을 거둔 자신의 총참모부에 어줍잖게 참견해 됭케르크 바로 앞에서 기갑부대를 정지시키고 영국군을 살려줌으로써 외통수를 놓치고 말았다."(142-3)


제4장 1940년의 아르덴 공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 장군들은 군사 사상 면에서 날이 갈수록 독단에 빠져들었다. 프랑스 총사령관 가믈랭 장군조차도 마스 강을 '유럽에서 가장 탁월한 대전차 장애물'이라 평가했고, 지리학적으로 이중이 장애물인 아르덴-마스 강은 우회는 가능해도 돌파는 불가능한 천연적인 전략적 방어체계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군은 적이 스당으로 침략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다른 전선을 보강하기 위해 2등급 부대들만으로 방어를 준비하는 등 상대적으로 이곳의 벙커나 방어시설에 소홀했다. 또한 프랑스군 지도부는 만일 독일이 아르덴을 통해 대공세를 취할 경우 이곳으로 병력을 이동 및 증원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과오는, 제1차 세계대전 식의 시간 개념으로 독일군의 '전격전 공세' 템포에 대응할 수 있다는 프랑스 장군들의 경험적 사고방식이었다. 그들은 독일군이 마스 강을 도하하기까지 약 2주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확신했다."(229-30)


"지헬슈니트 계획의 혁명적 사상은 혁명적 방법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다. 그 중 핵심은 역사상 최초로 기갑부대를 작전술적으로 독립 운용하는 것이다." "당시 국방군에서 작전술은 야전군(예외적으로 군단급) 단위부터 적용되었다. 구데리안은 작전술 차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부대 편성을 끈질기게 요구했고, 서부전역에 대비해 마침내 클라이스트Kleist 기갑군이 창설되었다. 그 예하에는 5개의 기갑사단과 이를 지원하는 3개의 차량화보병사단이 편성되었다. 이른바 '고속기동부대', 즉 기갑사단과 차량화보병사단이 도보로 행군하는 보병부대들을 훨씬 앞서 완전히 독립적인 공격작전을 수행한다는 편성은 세계 전쟁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로써 A집단군은 크게 2개 제대로 구분되었는데, 하나는 작전술 차원의 돌파를 실시하는 고속 기동부대였고, 다른 하나는 그를 후속에서 잔적殘敵을 소탕하거나 점령지역을 확보하는 임무를 맡은 보병 중심의 야전군들이었다."(173-5)


"공세 이튿날인 5월 12일, 구데리안 기갑군단의 우측에서 일시적인 교통대란이 발생했다. 원래 우측방에서 전진하기로 한 인접 보병사단들의 차량들이 기갑사단에 할당된 비교적 널찍한 도로에 계속해서 끼어들어 예상치 못한 혼란이 일어났다. 경쟁심을 느낀 보병부대가 기갑사단에 '승리의 영광'을 뺏기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A집단군의 작전 착오로 말미암아 전 유럽에서 전무후무한 대규모 정체현상이 야기되었다. 북부 기동로에서는 5월 13일 마스 강에서부터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고 독일 국경을 통과하여 라인 강변까지 총 250km에 이르는 교통마비 현상이 발생했다." "(끝없는 혼란이 이어지자) 기갑병과 장군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주적이 벨기에, 프랑스군이 아니라 기갑부대를 적대시하는 보병 야전군과 A집단군의 지휘부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들의 오판은 아르덴을 거의 '독일 기갑부대의 무덤'으로 만들 뻔했다. 이 사건으로 A집단군 지휘부는 예하부대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193-5)


"제1기갑사단이 단 3일 만에 아르덴을 통과해서 마스 강까지 진격한다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작전이 성공한 비밀은 바로 '중단 없는 연속적인 공격' 방식에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독일군의 진격이 정형화된 고정불변의 교리나 방법, 시스템 등을 기반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킬만스에크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를 '즉흥곡 연주'에 비유했다. 다시 말해 일단 목표를 설정한 후 그것을 어떻게 달성해야 할지에 대한 개념도, 문서상의 특별한 방책도 없었다. 아직 발전되지 못한 '전격전 전략'이 작전술-전술로 표출된 것이 아니라, 난해한 과제를 기발하고 비범하게 스스로 해결하는 행동이 독일군의 몸에 배어 있었다는 점이 성공의 열쇠였다. 난해한 과제란 바로 '3일 안에 마스 강변까지'였다. 이 전역에서 전개된 모든 비범한 전투방식은 이러한 요구에 부합하려는 행위의 결과물이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사건들을 고차원적으로 해석했고 나아가 일종의 시스템으로 개념화했다. 이것이 바로 '전격전'이다."(224)


제5장 결전 : 구데리안 기갑군단의 스당 돌파


"5월 13일 스당에서 시행된 독일 공군의 집중적인 폭격작전은 서부전역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인 동시에 이 전쟁에서 가장 성공적인 전술적 기습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때에 제1차 세계대전 중 최초로 전차가 출현하고 독가스를 사용하던 때에 버금가는 심리적 충격을 받았다." "클라이스트 장군이 마스 강 도하작전 명령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독일 공군의 가용한 모든 전력이 이곳에 투입되었다. 비록 전 전력이 투입되지는 못했으나 당시 스당 지역만큼 공중전력이 집중된 경우도 없었다." "특히 16시 직전까지 시행된 집중 폭격은 프랑스군에게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프랑스군 방어체계상의 종심지역은 그 후 물론 폭격 강도가 줄어들었지만, 1시간 반 동안이나 독일 공군의 공격에 시달렸다. 그 결과 프랑스 제55보병사단의 포병을 장시간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고, 구데리안이 예상한 대로 계속되는 '롤러식 폭격'은 심리적 효과 면에서 적의 전투의지를 상실시켰다."(260-3)


# 롤러식 폭격작전 : 임무수행을 완료한 일정 규모의 전력을 복귀시키고 후속부대가 폭격 임무를 수행하며 복귀한 부대는 재무장시켜 다시 전선에 투입하는 방식


"라퐁텐 장군의 사단 지휘소 벙커는 스당에서 8km 남쪽에 위치한 퐁다고의 삼림지대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5월 13일, 이곳에서 서부전역을 통틀어 가장 기이한 사건이 발생했다. 갑자기 발생한 집단공황이 프랑스군을 급격한 파멸로 몰아넣은 것이다." "이 시각, 이 지역 어디에도 전차는 물론 단 한 명의 독일군 병사도 없었다. 이 혼란의 진원지는 라 르나르디에르 고지였다. 이곳에서 최초로 '유령전차'가 출현했다는 보고가 들어와 이 엄청난 혼란이 야기되었다." "인파를 저지하려던 후방지역의 장교들마저도 탈영 대열에 동참했고 일부 병사들은 이곳에서 100km 떨어진 랭스까지 떠밀려 내려왔다. 헌병들도 집단 탈영병들에 대해 손쓸 방도가 없었다. 단 몇 시간 내에 제55보병사단은 공황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극히 몇몇 제대를 제외하고는 최하급 부대들까지 산산조각 나버렸다. 이들은 독일군 전차의 제물이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쇠약해진 정신력 때문에 이러한 파멸을 겪은 것이다."(284-6)


"5월 14일 전투기와 대공포 부대들은 연합국 공군의 집중폭격으로부터 마스 강의 교량들을 보호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중화기와 전차를 마스 강 건너편으로 이동시킬 유일한 통로는 제1기갑사단이 설치한 골리에의 교량이었다." "구데리안은 처음부터 스당 일대의 취약한 교량을 전체 작전의 성패가 걸린 아킬레스건으로 보았다. 그는 〈집중하라! 분산하지 말라!〉라는 구호를 부르짖었으며 스당 지역, 특히 골리에 교량 일대에 방공포를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전례 없이 조밀한 화망을 구성했다." "결론적으로 5월 14일 스당 일대에서 벌어진 공중전은 독일 국방군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첫째, (골리에 교량을 폭파하기 위해 출격한) 연합군 폭격기 부대의 '중추부'가 와해되어 이때부터 연합군은 집중적인 공군력 투사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둘째, 구데리안 장군은 이날 그의 군단 주력을 마스 강 건너편으로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작전술 차원의 돌파작전이 성공한 것이다."(288-93)


"5월 14일, 또 한 번의 결정적인 장면이 셰메리에서 펼쳐졌다. 구데리안이 독단적으로 자신의 기갑부대를 서쪽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이것은 그가 상급자의 명령과 히틀러의 지시를 어긴 행동일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모든 전쟁술의 원칙'에 위배된 행동이었다. 그의 결정으로, 그를 따르는 다른 기갑사단들도 공세에 동참하게 되는 일종의 눈사태 효과가 일어났다. 기갑사단들은 완전히 고립된 채 대서양 해안을 향해 작전술적 쐐기를 박는 공격을 실시했다. 보병사단의 측방 방호는 전혀 없었다. 이 공세는, 훗날 윈스턴 처칠의 표현처럼, 가느다란 낫 형태를 띠었다." "역사상 최초로 기갑부대가 주축이 된 작전술 차원의 독립 작전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 전투는 새로운 군사사적 전환점으로서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별안간 현대적인 '작전술 차원의 기동전'이 등장함에 따라 1918년 이래 주축을 이뤄온 '진지전' 양상은 자취를 감추었고, 이러한 기동전 개념은 '전격전'이라는 암시적인 슬로건 뒤에 숨게 되었다."(314-5)


제6장 마스 강 전선의 붕괴


"독일군 기갑부대를 저지할 수 있는 기회가 단 한 번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5월 14일 오후였다. 바야흐로 이 시점이 서부전역의 가장 결정적인 국면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 같은 절호의 기회가 프랑스군이 계속해서 역습 시기를 미루는 바람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독일군은 제1,2기갑사단을 교두보 일대 확보에 투입할 수 없었고, 제10기갑사단의 주력은 후방에 위치한 터라 그 지역에 전력을 투입하지 못해 두 사단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 만일 프랑스군이 이곳으로 적시에 돌진했다면 결과는 뻔했다." "그러나 공격명령은 하달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역습의 전권을 위임받은 제21군단장 플라비니 장군이 전선으로 가는 내내 두려움에 휩싸여 전장을 이탈하는 수많은 병사들을 목격했는데, 이들은 수백, 수천 대의 독일군 전차들이 공격하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끊임없는 악재와 기갑부대의 공격대기지점 점령이 지연되는 데 초조해하던 플라비니는 결국 역습을 취소하고 말았다."(323-4)


"문제의 근원은 더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 훗날 많은 프랑스인들은 1940년 패배의 원인을 '저지'라는 단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개념 이면에 내재된 잘못된 사상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제2군사령관 욍치제르 장군의 명령은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지휘방식과 완전히 똑같았다. 그는 독일군의 돌파 시도에 다음과 같이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①돌파를 정면에서 저지한다. ②포병화력으로 적을 격멸한다. ③작전지역 내의 적을 섬멸하고 그 지역을 탈환한다. 이 방책은 일자형 전선을 다시 회복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작전술 차원의 기동전'에 대응하기에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었다. 독일군은 이와 유사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면 정면을 차단하기보다는 기갑부대로 적의 측방을 역습했다. 뒤집어서 만일 플라비니가 강력한 역습을 시행했다면, 월등히 우세한 전력을 보유한 프랑스군의 기갑부대가 북쪽으로 수 km 정도만 기동했다면 구데리안 기갑군단의 측방을 기습적으로 찌르는 대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325)


"이것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프랑스가 구데리안이 스톤 일대에서 실시한 '공세적 방어'를 작전술 차원의 주공으로 오판한 것이다. 프랑스군은 역습을 실시하는 대신, 실제로 돌파가 일어난 교두보의 서쪽 지역을 간과하고 예상되는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작전술 수준의 예비대로 편성된 정예사단을 방어작전에 투입했다 .이로써 독일군은 손쉽게 서쪽 방면을 돌파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또다시 독일군의 기만작전에 속았다. 지헬슈니트 작전이 시작될 때 독일군은 주공을 우익에 둔 것처럼 적을 속이고 중앙에서 돌파를 감행했다. 반면 스당에서 구데리안은 주공을 중앙에 둔 것처럼 가장하고 우측(서쪽)으로 돌진했다. 스당에서 돌파를 성공시킨 뒤 부대를 서쪽으로 진격시키되 동시에 그 역량 중 일부를 남쪽으로 투입할 것을 주장한 만슈타인의 구상이 또 한번 적중했다. 프랑스 지휘부는 물론, 대부분의 독일군 장군들도 만슈타인의 기가 막힌 행마行馬를 이해하지 못하긴 매한가지였다."(340)


"전투가 개시되자, 프랑스군 전차부대는 줄곧 제1차 세계대전 때의 경직된 교리에 따라 행동했다. 프랑스군 기갑부대들의 작전은 너무나 정적이고 선형적이었다. 그러나 독일군 전차들은 기동력을 발휘해 끊임없이 위치를 바꾸면서 전투를 수행했다. 또한 독일군의 통합된 무전통신 체계의 우수성이 여실히 증명되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순식간에 주공의 위치를 변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전차들은 극소수만이 무전기를 장착하고 있어서, 장교들이 자기 전차에서 내려 다른 전차로 찾아가 명령을 전달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바로 이때 프랑스군 전차들은 독일군의 기습을 받았다. 또 하나 구별되는 무기체계의 특징은 전차포탑의 형태였다. 프랑스군 전차의 포탑에는 단 한 사람만 탑승할 수 있어서 모든 전차장은 전술적인 판단과 결심, 전투지휘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탄약수와 포수의 임무도 병행해야 했다. 반면 포탑에 2~3명이 탑승한 독일군 전차의 지휘자들은 전투지휘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380)


제7장 대서양 해안을 향한 진격과 측방 노출 문제


"구데리안은 자신의 기갑부대들이 마스 강을 넘자마자 즉각 주도권을 쥐고 적 종심 깊이 돌진했다. 이것은 선형 전투지휘에서 비선형 전투지휘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그러나 대서양 해안으로 진격하는 동안 동시에 2개의 대결구도가 형성되었다. 하나는 전장에서 일어났고 다른 하나는 독일군 장군단 내부에서 발생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여전히 선형 전술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간격 발생과 노출된 측방에 대한 공포는 전차라는 무기체계가 없었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철저히 고립된 기갑사단이 적 후방으로 진격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계획이었다. 특히 지나치게 빠른 공격 템포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이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은 측방 방호를 위해 보병사단들이 기갑부대를 따라잡을 수 있도록 전차의 진격 속도를 늦출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반면 진보주의자, 특히 그 선봉에 선 구데리안 같은 이들은 그런 속도로는 결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며 반발했다."(397-8)


"5월 17일 아침, 클라이스트 장군은 상급부대의 지시에 따라 마지못해 구데리안의 지휘권을 박탈했다. 이 지휘권 분쟁은 독일군 최고지휘부에까지 큰 소동을 일으켰다. 이날 오후에 5월 15일자로 클라이스트 기갑군을 배속받은 제12군사령관 리스트 상급대장이 구데리안을 찾아왔다. 그는 상황을 진정시키고 룬트슈테트를 대신해서 구데리안에게 원래의 지휘권을 돌려주었다. 동시에 그는 A집단군의 동의하에 회유적인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는 구데리안에게 '전투 전위부대' 규모의 전진은 허락했지만, 군단 지휘소가 전방으로 진출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구데리안은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즉각 전차부대로 공격을 재개했지만, 무전기로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고 후방의 지휘소에서 야전 전화로 예하부대들과 연락을 취했다. 지휘소는 전방에 있는 제대와 수 km 길의 케이블로 연결되어 있어서 구데리안은 무전기를 쓸 필요가 없었고 상급 지휘관들의 감청을 피할 수 있었다."(401-2)


"5월 17일과 18일 '친히' 명령을 내려 기갑부대를 정지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총통 히틀러였다." "독일 군사사軍事史상 군사적 문외한이 군사작전에 개입한 경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1940년 5월 17일의 사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당시 독일군 총참모부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엘리트 집단이었고 이들은 냉철한 전문가적 판단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결정했다. 그러나 이 조직이 지금 비이성적인 외부인의 간섭을 받아야 하는 상상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했다. 문제는 히틀러가 전쟁과 군사적인 면에서 문외한이라는 것보다, 그의 심리 상태가 종종 매우 불안정했다는 것이다. 항상 총통은 어떤 가능성에 대한 극단적인 과대평가와 과장된 위기 사이를 오갔다. 지헬슈니트 작전 중에는 시간이 갈수록 성공 가능성이 커져갔는데도 그의 신경과민 증상은 점점 더 심해졌다. 작전의 성공을 확신한 유일한 인물인 히틀러는 스당 돌파의 성공을 보고받은 순간에도 사실을 믿지 못하고 '기적'이라며 말을 더듬었다."(404-5)


"히틀러는 '마른의 기적'이라 불리는 1914년 슐리펜 계획의 실패가 재연되리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노심초사했다. 반대로 할더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연합군이 솜 강과 엔 강을 따라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조치를 저지하려면 A집단군의 정예부대들 중 일부를 대서양 해안 방면이 아닌 콩피엔느를 거쳐 남서방향으로 선회시켜야 했다. 할더는 대서양 해안에서 혼란에 빠져 있는 적들을 포위·섬멸하는 데 몇몇 기갑사단과 제4군으로 증강된 B집단군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할더는 경쟁자 만슈타인보다 더 만슈타인다워졌다. 만슈타인은 2개의 개별적인 대규모 작전('황색계획'과 '적색계획')으로 연합군을 격멸하려고 했으나, 할더는 과거의 슐리펜처럼 단숨에 모든 것을 얻고자 했다. 히틀러는 이 아슬아슬한 계획에 기겁을 하고 강력하게 거부했다. 이로써 '남측방 방호의 문제는 공세적으로 해결한다'는 만슈타인의 구상은 공중으로 날아가버렸다."(406-7)


"몽코르네에서의 정지명령이 발령된 후 클라이스트 기갑군뿐만 아니라 제4군 예하의 호트 기갑군단도 멈춰서야 했다. 이 명령은 돌파구의 북측방에 연한 구데리안을 정지시킬 수는 있었으나 롬멜을 정지시키지는 못했다." "롬멜은 5월 16일 18:00시경 클레르파이에서 프랑스 국경을 넘어섰다. 곧 롬멜은 전방에 펼쳐진 연장된 마지노선과 함께 구축된 철조망과 지뢰지대 그리고 장갑화된 반구형의 포진지, 콘크리트 벙커 등의 윤곽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장군들 같았으면 망설이다가 더 유리한 여건을 조성해 다음날 공격을 개시했을 것이다. 게다가 중포병과 추가 보병부대, 공군 슈투카의 지원도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조치는 기습의 효과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롬멜은 상급 지휘관들의 지시를 거역하고 주저 없이 기습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아군이 공격할 준비가 완벽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도 야간에 전차부대를 집중 투입해서 강력하게 구축된 적 방어진지를 돌파한 것이다."(417-9)


"할더는 수차례 건의한 끝에 5월 19일, 히틀러에게서 모든 부대들이 대서양 해안까지 자유롭게 기동해도 좋다는 승인을 얻어냈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에서 수년 동안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치열한 진지전을 치렀던 격전지들을 가로지르며 재개된 지헬슈니트 작전의 결정적인 공세는 대성공으로 끝났다. 독일군 기갑부대는 연합군 전선에 쐐기를 형성함으로써 정예사단들이 집중되어 있던 연합군 북익 전체를 대서양 해안을 따라 완전히 포위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 포위망은 종심이 약 200km, 정면이 약 140km에 이르는 경이적인 규모였고 이곳에 포위된 부대는 벨기에군뿐만 아니라 프랑스 제1집단군 예하 제1영국원정군, 프랑스 제1,7군, 제9군의 패잔병 일부를 포함한 어마어마한 수였다. 연합군 사단들은 동쪽과 북쪽에 아직도 국지적인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이들도 독일군 B집단군에게 집중공격을 당하고 있었으며, 남쪽에서 독일군 제4군이 그들이 후방으로 돌진하고 있었다."(429-31)


"롤멜이 사실상 '아라스의 승리자'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롬멜은 연합군의 장군들과 달리 관행을 거부하고 적의 포탄이 떨어지는 최전선 한가운데서 자신의 사단을 지휘했다. 극도의 위험 속에서도 부하들과 함께한 그의 용기와 냉철함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는 갑자기 닥친 위험에 번개처럼 신속하고 과감하게 대응해 위기를 승리로 전환시켰다. 하지만 공명심에 휩싸인 그는 자신의 업적을 한층 더 높게 평가받기 위해 위협의 정도를 과장되게 표현해, '수백 대의 적 전차'가 자신의 부대를 공격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 보고 때문에 상급자들은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서부전역 이후에 롬멜이 히틀러에게 제출한 이른바 롬멜 보고서는 영국군의 역습 상황을 가리키는 적색 화살표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이렇게 하여 역설적이지만, 5월 21일 실패한 영국군의 역습은 '아라스에서의 정지 명령'을 탄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됭케르크의 전투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451-2)


제8장 됭케르크의 기적


"5월 24일, 독일군은 유일하게 연합군의 지배하에 있던 항구도시 됭케르크의 15km 전방까지 도달해 있었다. 선두부대는 이미 마지막 자연장애물인 아 운하를 넘어섰다. 독일군 기갑부대와 됭케르크 사이에는 이들을 저지할 만한 연합군 부대가 없는 진공 상태였다. 마지막 피난처가 봉쇄되어 약 백만에 가까운 영국군,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이 포위망에 갇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됭케르크에서 100km나 떨어진 동쪽에서 B집단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고 후방에서 다가오는 치명적인 위협에 사실상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이때 20세기 군사사에서 가장 기이한 사건 중 하나인 '됭케르크의 기적'이 일어났다. 연합군 병사들도 독일군 전차들이 마법의 손에 붙들린 것처럼 갑자기 정지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지명령은 히틀러에게서 비롯하지 않았다. 그는 장군단 내부의 위기가 한창 고조되었을 때에야 개입했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간의 대립 양상이 바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455)


"됭케르크 직전에서의 정지명령은 독일 육군 내부에서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단 한 차례의 명령으로 이처럼 격렬한 집단 항명이 일어난 경우는 없었다." "훗날 구데리안은 〈최상급 지도부의 간섭이 전체적인 전쟁 결과에 최악의 영향을 미쳤다〉라고 비판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부 부대들의 입장에서 이 명령은 정지명령이 아니라 철수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아 운하의 동쪽에 확보한 교두보를 포기하고 이 선에서 물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연합군 부대는 아무런 제약 없이 그곳에 진지를 편성할 수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 친위대 부대장이었던 제프 디트리히는 히틀러가 친히 내린 지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역했는데, 이 일만 보더라도 이 지시가 얼마나 비합리적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구데리안조차도 히틀러의 가장 충직한 부대가 반동행위를 취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지만, 이 독단적인 행위는 관대하게 처리되었다."(463-6)


"5월 26일 18:57분, 드디어 다이나모Dynamo 작전이 개시되었다. 하지만 철수작전은 당초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더디게 진행되었고 5월 28일까지 겨우 9,965명만이 승선해 영국으로 수송되었다." "5월 29일에는 47,310명이, 5월 31일에는 그보다 많은 68,014명이 구조되었다. 마침내 '됭케르크의 기적'이 하나둘씩 실현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기상조건도 연합군의 철수작전에 톡톡히 한몫을 했다. 파도가 높고 거칠기로 유명한 도버 해협의 바다가 며칠 동안이나 잠잠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다이나모 작전이 시행되던 9일 동안 해수면은 마치 연못처럼 잔잔했다." "연합군의 철수작전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또 하나의 요소는 그 기간 동안 하늘에 낮고 짙게 드리워져 있던 시커먼 구름이었다. 이 덕분에 독일 공군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연합군은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실시된 다이나모 작전에서 영국으로 구조된 연합군 병력은 총 338,682명이었다."(472-3)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됭케르크의 수수께끼'를 언제나 객관적인 측면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 했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독재자의 순수한 주관적인 동인을 배제했기 때문에 진정한 동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사실 그에게는 어떠한 전술적, 작전술적, 전략적, 그리고 정치 이데올로기 논리보다도 군사적 최고지도자로서의 개인적인 권위가 훨씬 더 중요했다. 히틀러는 됭케르크에서 기갑부대를 정지시켰다기보다는 육군 총사령부 장군들의 지휘권 행사를 중단시켰다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에게는 분명 자신의 이념, 즉 '총통의 이념'이 가장 중요했다." "서방국가들에 대한 공세는 명백히 '그의 전쟁'이었다. 군사 보좌관들은 하나 같이 서부전역에 승리할 수 없다고 예견했는데 뜻밖에 그가 옳았다는 것이 현실로 드러났다. 그렇게 세계 전쟁사상 가장 스펙터클한 승리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던 순간에 히틀러는 이 전쟁의 위대한 승리자가 자신이 아니라 휘하의 장군들이 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 것이다."(490)


"5월 24일, 샤를르빌에 위치한 A집단군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히틀러는 자신이 신임하는 룬트슈테트가 권한을 박탈당해 무기력해진 모습을 보았다. 육군 총사령부는 자신의 의지에 반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독단적으로 그 같은 조치를 결정하고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는 자신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고 느꼈다. 지금까지 예하 장군들 중 감히 자신을 무시하거나 웃음거리로 만들고 그에게 도전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육군 총사령부의 일부 고위급 장교들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감정이 폭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지휘권을 바로 세우고, 누가 절대적인 군사 지도자인가를 과시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당한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를 공격했다. 이미 정지한 기갑부대를 얼마나 오랫동안 대기시킬 것인지에 관한 결정권을 (차하급 지휘관인) 룬트슈테트에게 위임함으로써 브라우히치와 할더를 엑스트라로 전락시켜버린 것이다."(491)


제9장 서부전역의 종결


"남서쪽을 향한 새로운 공세가 시작된 시점에 A집단군 예하부대가 재편성되었다. 5월 31일부로 구데리안 군단은 기갑군으로 승격되었고 구데리안은 대서양 해안에서 스당의 남쪽으로 공세를 전환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A집단군의 주력이 남쪽으로 진격하는 동안, 구데리안은 스당과 스위스 사이에 배치된 프랑스 제2집단을 포위하기 위해 측방으로 기동한 후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스위스 국경을 목표로 공격했다. 이로써 그는 1939년 가을, 만슈타인이 착안한 작전술 차원의 포위망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 당시(1939년) 만슈타인은 A집단군 참모장으로서 제2단계에서는 프랑스군의 후방, 즉 〈마지노선 후방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슐리펜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격렬한 프랑스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6월 9일 A집단군의 전면적인 공세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할더는 그 다음날 자신의 일기에 매우 유쾌한 어조로 이렇게 기록했다. 〈칸나이가 눈앞에 보이는 듯하군〉."(497)


"그 사이에 C집단군 예하 제7군도 브라이자흐에서 라인 강을 도하해 마지노선 돌파에 성공했다. 이들은 남부 알자스 방면으로 진출하여, 6월 19일에는 구데리안의 기갑군 중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일부와 벨포르에서 연결작전을 성사시켰다. 그리하여 낭시와 벨포르 사이에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해 이곳에 있는 3개의 프랑스 야전군을 에워쌌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슐리펜 계획의 결정판이었다. 됭케르크에서 실패했던 '칸나이'를 이번에는 완벽하게 성공시킨 것이다. 이 '로트링엔'의 포위망에서 독일군은 50만 명의 프랑스군을 포로로 획득했다. 사실 서부전역은 6월 17일에 종결되었다고 봐야 한다. 이날 새로 임명된 프랑스 수상 페탱 원수는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자 휴전을 제의했다." "6월 22일, 제1차 세계대전 시 독일이 항복문서에 조인했던 콩피에뉴의 숲에서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히틀러는 1918년 11월 11일 정전협정이 맺어진 이곳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던 것이다."(498)


제10장 승리와 패배의 원인


"제1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의 도움으로 승리한 프랑스에게 파로스의 승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전국 국민 중 프랑스인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실종자와 사망자가 도합 약 150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18~27세 남성 인구 중 27%가 전장에서 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베르됭 콤플렉스'라는 정신적 상흔이 프랑스인들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다. 육체적·심리적으로 지칠 대로 지친 프랑스 국민들은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런 상태였다. 이즈음 전쟁피로증과 평화를 갈망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히틀러는 노련하게 평화 선전공세를 펼치며 그 위장막 뒤에서 군사력을 증강했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은폐하기 위해 수차례 프랑스와 영국 출신의 영향력 있는 평화주의자들을 몇 명 초대하여 융숭하게 대접했다." "서유럽 사람들은 독일의 군사력 재건에 대해서도, 주데텐 위기 때에도 그리고 폴란드 침공 시에도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505-6)


"전쟁이 종식된 후 프랑스에서는 패전의 책임자를 색출하는 작업이 시행되었다. 그들은 소위 좌익이라 불린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몇몇 장군들이 포함된 우익집단들은 평화주의라는 독극물로 사회를 분열시킨 이들을 극렬하게 비난했다. 그들로 인해 군의 전력이 약화되었다는 논리였다. 장군들은 특정 시민계층의 타락을 부각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실책을 무마할 수 있는 증거를 만들어냈다. 조국 패망의 결정적 원인은 군사적 실책이 아닌 오로지 '사회적 문제' 때문이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비시 괴뢰정권 하에서 리옹에서 재판이 열렸을 때, 피고로 지목되어 제1열에 기립한 사람들은 장군들(가믈랭을 제외하고)이 아니라 붕괴한 제3공화국의 정치가와 지식인이었다. 더 기막힌 사실은 조국 패망의 가장 큰 책임자 중 하나인 욍치제르 장군이 국방장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사회주의자를 비판했지만,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만은 패전의 결정적인 책임이 프랑스군 장군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508)


"마지노선에 대해 모든 역사가들의 공통된 견해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만 그 효과가 극히 미미했던 비경제적 투자였다는 것이다." "마지노선이 원래 순수 방어전략의 일환으로 계획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이를 이용해 국경지대를 강력하게 방비함으로써 수많은 부대를 다른 지역으로 전용할 수 있는 융통성을 확보했고, 이로써 마지노선의 존재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행하게도 이른바 '마지노 사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작전술 차원의 기동전'의 르네상스가 태동한 반면, 프랑스는 어떻게 해서든 '개활지에서의 전투'를 피하고 마지노선 뒤에 안주하려 했다. '선형 방어' 교리에 집착했던 프랑스군 장군들은 제1차 세계대전 시의 참호전투를 재현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마지노 사상'은 수동적인 태도, 수세적인 자기 구속, 주도권의 단념을 의미하는 엄청난 재앙이었다."(509-10)


"연합군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들의 전투력 및 경제력의 양적 우위를 확신했고, 이 때문에 전쟁을 막대한 물량전으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했다. 반면 독일군은 진지전의 선형적 사고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공격전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연합군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계회에 의거해 포병과의 협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병진대형으로 전 부대가 동시에, 정확히 규정된 시간과 정확히 지시된 선까지 공세를 실시해야 했다. 이와 정반대로, 독일군 돌파부대 지휘관들은 철저히 독단적으로, 인접 부대와의 연결과 측방 노출을 고려하지 않고 쇄도해 들어갔다." "연합군은 적의 저항이 가장 강력한 지점(강점)에 예비대를 집중한 반면, 독일군은 적의 저항이 가장 취약한 지점에서 예비대를 집중 운용했다. 공격 작전 시 최초 제1제대는 적의 강점을 회피하고, 후속부대가 이곳을 무력화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중단 없는 '제파식 공격'의 목표는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적의 종심 지역으로 돌진하는 것이었다."(529)


"리들 하트에 따르면, 독일군 돌파부대의 성공의 열쇠는 바로 '간접접근'에 있다. 이들에게는 적 부대의 격멸과 적 부대와의 직접적인 교전보다는 가급적 교전을 회피하고 종심 깊이 진격해서 적의 병참선과 지휘통제의 중추부 그리고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더욱이 이와 같이 전역이 진행되면 적에게 '혼란'이라는 치명적인 심리적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실제로 돌파부대가 일단 적의 최전방 부대의 후방으로 돌진하는 데 성공하면, 방어선상의 진지들에 투입되어 있던 연합군 병사들은 매번 혼란에 휩싸였다. 즉 전선의 아주 미세한 지점, 단 한 곳이 돌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어체계 전체가 붕괴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술적인 돌파가 실패한 이유는 기갑부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1940년의 성공에는 이러한 역사적 근원이 있었다. 구데리안은 과거의 '돌파부대 전술'의 기본원칙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현대적인 기갑부대와 결합시켰다. 전격전의 핵심요소는 이렇게 창안되었다."(530)


마무리 총평과 에필로그


"결론적으로 1940년의 '전격전'은 히틀러가 탄생시킨 그리고 그가 주창한 '전격전 전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 인간은 〈절망의 정점에 이르면 엄청난 위기상황에서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없으며, 다른 탈출구가 보이지 않으면 대담한 돌출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마스 강을 건너 대서양 해안을 목표로 기동한다는 만슈타인의 지헬슈니트 계획은 대담한 돌출행동이었다. 연합군 장군들은 이 같은 대담한 행동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작전의 숨가쁜 진행에 연합군 장군들은 적잖이 당황했는데, 우유부단했던 히틀러도 예하 지휘관들이 점차 작전을 독단적으로 진행함에 따라 자신의 손에서 지휘권이 빠져나가는 것을 깨닫고는 당황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통제력을 되찾기 위해 됭케르크를 눈앞에 둔 기갑부대를 정지시켰는데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그러므로 '전격전 사상'은 서부전역의 승리의 근원이 아니라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549-50)


"독일 국방군에게 서부전역은 찬란한 대승리이자 비극이었다. 특히 스당의 신화가 여기에 큰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1870년과 1940년, 두 번씩이나 독일군은 큰 승리를 달성했으나, 매번 그 승리에서 잘못된 결론을 도출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혹독한 파멸을 맞게 되었다. 프랑스 육군은 베르됭에서의 승리로 진지전을 과대평가하게 된 반면, 독일군은 스당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작전술 차원의 기동전'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서부전역이 종결된 후 독일군 장군들은, 특히 이전까지 개혁적 사상에 회의를 품던 이들까지도, '전격전'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과는 정반대로 신속한 작전술적인 결전을 시행하여 경제적·전략적으로 우위에 있는 적과도 대적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전격전'은 칸나이 사상에서 비롯된 '기계화된' 기동전의 르네상스였다. 하지만 슐리펜과 마찬가지로 독일군 장군들은 누가 결국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자였는지를 간과했던 것 같다."(551)


"독일은 서방국가들과의 전쟁을 사전에 장기전으로 계획했으며 전쟁 기간에 제한을 두지 않고 시작한 반면, 소련과의 전쟁은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더구나 이러한 확정적인 종료 시점에 의거해 인적·물적 자원을 제한적으로 동원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모스크바에 입성하지 못했다. 그 결과 1941년 12월 영하 36도까지 떨어지는 뜻밖의 강추위 속에서 동복을 준비하지 못한 대부분의 독일군 병사들은 하복을 입고 적과 맞서 싸워야 했다. 더욱이 당시 국방군의 지상군, 공군 그리고 해군이 서로 다른 지역에 분산되어 한창 해당 전역의 전투를 치르고 있던 중에도 히틀러와 휘하의 장군들은 소련의 적군赤軍을 마치 '진흙으로 빚어진 거인' 같은 존재로 보고, 최초 돌파 단계에서 단숨에 쓰러뜨릴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독일군이 저지른 결정적인 실수는, 전략적 차원에서 전격전을 수행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선제타격능력이 열세에 있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552-3)


"결론적으로 1940년의 서부전역은 계획되지는 않았지만 성공한 '전격전'이었으며, 1941년의 동부전역은 반대로 기계획되었지만 실패한 '전격전'이었다. 1942년, 독일군은 새로운 전법으로 다시금 공세에 돌입하여 볼가 강변과 나아가 코카서스 일대까지 진격하여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그러나 이는 작전술 측면에서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찰나적 승리였으며, 독일은 전략적 차원에서 조만간 파멸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소련과 그 동맹국들의 경제적 우위가 효과를 발휘했다. 이것은 전차의 생산능력에서 잘 드러난다. 독일제국은 다른 무기체계를 제쳐두고 오로지 전차 생산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자재의 부족으로 인해 겨우 2만 5천 대를 생산할 수 있었다. 반면 연합국 중 주요 3개국인 미국, 영국, 소련은 도합 20만 대의 전차를 보유했다. 제2차 세계대전도 결국 제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전장에서의 전투력보다 후방의 병참능력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던 것이다."(554)


"여기서 다시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일어난다. '전격전'이라는 현상도 또다른 관점에서 시대착오적이지 않았는가? 산업화 시대에 두 번의 세계대전은 순수 전략적으로, 무엇보다도 방위산업의 생산 능력이 전쟁의 승부를 결정지었건만, 히틀러와 그의 장군들은 너무나 편협하게 군사적인, 특히 작전술적 측면에만 집착했다. 따라서 '전격전'은 혁명과 보수의 양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순수하게 작전술 차원만을 고려한다면 독일군 장군들은 현대적인 방책을 이용했지만 전략적 관점에서는 그와 정반대로 지극히 시대착오적인 전쟁 양상에 몰두했다. 이미 19세기에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군사적으로 더 우세한 남군이 경제적으로 월등한 북군에게 패망함으로써 군사력이 경제력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음에도 말이다. 돈키호테는 시대착오적인 전쟁 양상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요컨대 독일군 기갑부대 작전의 '전격전'은 우월한 산업 잠재력이라는 풍차에 맞선 장창 공격이었을 뿐이다."(5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당론 한길그레이트북스 136
로베르트 미헬스 지음, 김학이 옮김 / 한길사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판 서문


"정치나 종교문제에 대하여 자신과 다른 의견을 들으면 심장이 요동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을 건드리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들과는 토론이 불가능하다. 심장이 요동치면 두뇌는 멈추기 때문이다." "사회학의 과제는 어떤 체계를 만드는 것이라기보다 통찰을 전달하는 데에 있고, 해결책을 발견하기보다는─개인과 집단의 삶을 둘러싼 많은 문제들은 그 어떤 해결책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넓은 의미에서 항상 '열려' 있다─어떤 한 경향과 그에 대한 반대 경향, 어떤 한 원인과 그에 대한 반대 원인, 간단히 말해 사회생활의 그물망을 가능한 한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도록 제시하는 데에 있다." "이 문제는 현재에 속한 현상이나, 현재에 인접한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이러한 연구에는 연구 대상의 윤곽을 뚜렷하게 해주고 실루엣의 테두리를 분명하게 해주는 시간적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모든 사실적 비판과 선의의 충고에 귀를 열어놓을 것이다."(27-32)


서론


"논리적으로 보자면 혁명은 근본적인 변혁, 즉 전복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혁명이란 개념을 반드시 어떤 특정한 계급에게만 국한시킬 필요도, 어떤 특정한 외적(外的) 폭력 형태에만 연관시킬 이유도 없다. 그 어느 계급이, 위로부터건 아래로부터건, 무력을 사용하건 합법적인 수단 혹은 경제적 방법을 사용하건, 기존의 국가 질서에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한, 그것은 혁명적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면, 혁명적-반동적(보수적인 것과 반대된다)이란 개념과 혁명-반혁명의 개념은 하나로 융합된다. 혁명적 전복과 반동적 전복의 차이점은, 혁명적 혁명가들은 어떤 새로운 것, 역사적으로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 혹은 최소한 자기 나라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목표들을 지향하는 데 반하여, 반동적 혁명가들은 역사적으로 이미 존재했었지만 이제 다시 달성되어야 하는 목표를 외관상 똑같은 방식으로 도달하려 한다는 점에 있을 뿐이다."(50-1)


"근대의 정당정치에서 귀족정은 민주주의의 형태를 띠는 반면, 민주주의는 귀족적인 내용으로 채워진다. 한쪽에는 민주주의의 형태를 띤 귀족정이, 다른 한쪽에는 귀족적인 내용을 담은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정당정치의 토대가 외면적으로 민주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에만 집중하다가는, 모든 정당이 귀족정,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두정으로 변형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과두적 경향을 밝히는 데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관찰 대상은 바로 민주적인 정당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사회혁명적인 노동자 정당들의 내부 구조이다. 보수적인 정당들은 선거 기간을 제외하면 과두적 경향을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연하다는 듯이 드러낸다. 이는 보수 정당의 성격이 원칙적으로 과두적이니만큼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혁명을 지향하는 정당들조차 보수 정당 못지 않게 과두적 경향을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데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 책의 대단히 중요한 소재이다."(61)


제1부 지도자의 형성


"조직 없는 민주주의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대중은 오로지 조직 속에서만 지속성을 얻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단 몇 마디만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계급'은 사회 전체에 대하여 특정한 요구들을 내걸고, 그 계급의 경제적 기능에서 도출된 이데올로기와 '이상들'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 이를 위해 계급은 경제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도 전체의 의사를 결집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유일한 수단은 조직이다. 조직은 가능한 한 최소한의 힘을 소비한다는 최소비용의 원칙에 입각하며, 동일한 이해관계에 따른 연대(連帶)에 기반한다. 그러므로 조직은 약자가 강자에 대항하는 투쟁에 동원할 수 있는 최적의 무기이다." "그리하여 조직의 메커니즘은 견고한 구조를 창출함으로써 조직화된 대중을 심대하게 변화시킨다. 그리고 조직은 대중과 지도자의 관계를 역전시킨다. 조직은 정당과 노동조합을, 지도하는 소수와 추종하는 다수로 이분(二分)시키는 것이다."(77-9)


"대중을 지배하기란 소수를 지배하는 것보다 용이한 법이다. 왜냐하면 대중의 동의는 폭발적이고 불가항력적이며 무조건적이고, 그들이 일단 어느 한쪽으로 쏠리게 되면 그에 저항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민집회는 어떤 주제에 대하여 진지한 견해를 개진하고 논의하거나 세세하게 다루는 곳이 아니다. 작은 모임에서는 이성적인 토론이 가능하지만, 거대 집단이 한곳에 모이면 갑작스러운 공포와 무의미한 환호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우리는 선발된 대의원들이 모인 전당대회에서 결의안이 구두(口頭) 환호나 표결을 통하여 일괄적으로 통과되곤 한다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그때 통과된 결의안들은 대의원이 50명씩 모인 곳에서는 그리 쉽게 통과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혼자 있거나 몇몇이 모여 있을 때보다 대중으로 있을 때, 말과 행동에서 논리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대중병리적 현상이다. 다수는 개인을 소멸시키고, 개성과 책임감을 마모시킨다."(82-3)


"근대 정당은, 정당이란 단어의 정치적 의미에서 '전쟁 조직'이다. 정당이 준수해야 하는 전술학의 기본 법칙은 전투 태세이다. 사민당을 창당한 페르디난트 라살은 자신의 독재적 지위가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당원이란 지도자를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지도자의 손에 들린 망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앙집권은 예나 지금이나 결정의 신속성을 보장한다. 대규모 조직은 그 자체로 둔중한 기구이다. 만일 대중 정당이 신속한 결정이 요청되는 일상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대중으로 하여금 제한적이나마 일정한 판단력을 갖추도록 조치해가면서 당을 운영한다면, 시간적 손실과 공간적 거리 때문에 순수한 형태의 민주주의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러한 당 운영은 결정을 지연시키고 호기를 놓치게 만들 것이며, 정당에 필수적인 정치적 유연성과 타 정당과의 연대 능력을 손상시킬 것이다. 전쟁을 치르는 근대 정당에서는 따라서 엄격한 위계질서가 불가피하다."(94-5)


"근대 정당이 일상적인 투쟁에서 명령의 신속한 전달과 정확한 이행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카이사르주의가 필수적이다. 네덜란드의 사회주의자 반 콜은, 진정한 정당 민주주의는 투쟁이 종결된 뒤에나 가능하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심지어 일시적으로는 전제주의(Despotismus)가 요청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자유는 신속한 실천력에 굴복하여야 하고, 대중이 소수의 의지에 종속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최고 덕목이다." "반 콜의 발상 속에는 근대 정당의 요체가 들어 있다. 민주주의는 투쟁하는 정당의 '일상생활용품'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전투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당에게 필요한 것은 '동작을 둔하게 만들지 않는 가벼운 무장'이다. 앞으로 더 설명하겠지만, 정당이 인민투표와 같은 민주주의를 위한 예방 조치들을 적대시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고, 정당에게 카이사르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단히 중앙집권적이고 과두적인 위계 질서가 필요한 이유도 마찬가지이다."(95-6)


"지도체제는 강제적이지만, 선거체제는 그렇지 않다. 선거는 참여의 의무가 아니라 권리에 기반한다. 그리고 선거의 권리가 선거의 의무로 대체되지 않는 한, 다수가 자발적으로 포기해버린 권리를 소수가 이용하여 무관심한 대중에게 법을 강요할 가능성이 항존한다. 따라서 민주 정당 대부분의 참여 활동은 사다리꼴이다. 가장 낮은 곳은 지역 유권자들이 점하고, 그 위에는 유권자의 10분의 1에서부터 30분의 1 정도에 불과한 지구당 당원들이 존재하며, 그 윗자리는 다시 훨씬 더 적은 수의 정기적인 총회 참석자들이 차지한다. 그 위에 당 관리들이 자리잡고, 마지막의 최상층에는 당 관리들과 빈번한 사적 접촉을 나누는 대여섯 명의 당 수뇌부가 위치한다. 그리고 당의 결정권 및 통제권은 수와 반비례한다." "다수는 자신을 대신하는 소수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소수의 지도를 받고자 하는 대중의 욕구는 곧잘 영웅 숭배로 연결되고, 그 욕구는 조직화된 노동자 정당에서도 한계를 모른다."(107-8)


"대중은 개인숭배에 대한 강력한 충동을 갖는다. 대중의 원초적 이상주의는, 혹독한 일상의 삶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면 할수록 더욱 맹목적으로 매달릴 세속의 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버나드 쇼가 귀족정은 우상의 집합인 반면 민주정은 우상 숭배자의 집합이라고, 그 특유의 역설로 꼬집은 데는 진리의 일단이 들어 있다. 물론 당원 대중이 때때로, 흑인들이 물신(物神)을 두들겨 패듯 자신들의 우상을 팽개치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때에도 대중은 내동댕이친 우상을 다시 세워놓는 물신숭배자의 심리에 따른다." "게다가 숭배는 숭배 받는 사람을 과대망상증 환자로 만들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턱없이 오만한 대중 지도자를 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지도자의 오만한 자기 현시는 대중에게 암시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그에 따라 대중의 경외감은 더욱 고조되고, 그 과정 속에서 지도자의 자기 현시 그 자체가 지배 권력의 중추가 된다."(120-9)


"정당 제도의 근대적 발전과 더불어 조직의 형태가 고정되면 될수록, 임시직 지도자들은 직업적 지도자들로 대체된다." "대중은 항시적으로 자신들을 대표하고 자신들의 일을 처리해주는 소수의 개인들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것이다." "그와 함께 민주적 통제를 받는 영역이 점점 감소한다." "그리하여 복잡한 구조를 갖춘 거대 조직이 나타나고, 분업의 논리에 의하여 관할 영역이 분화되고, 분화된 영역이 다시 한 번 세분화된다. 그리하여 결국 모든 것을 포괄하면서도 각 기관의 업무가 엄격하게 구분된 관료제가 형성된다. 당무 교리문답의 제1조 역시, 업무의 전달 경로를 정확하게 준수하는 것이 되고, 당의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던 모든 노력은 당의 계서화(階序化)로 귀결된다. 당의 계서화는 당이 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다. 정당 조직의 과두제적이고 관료적인 경향은 따라서 실천적인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조직의 원칙 그 자체의 필연적인 산물이다."(142-3)


"(대중이) 접근하기 힘든 업무를 담당하는 지도자는 불가결한 지위에 도달한다. 전문성 덕분에 지도자는 당원들의 우위에 올라서고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격상되는 것이다. 지도자들의 전문성은, 그들이 의원으로서 습득하게 되는 경험과 사회적 지식, 특히 의회 상임위원회에서 획득하는 전문 지식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의회 상임위원회는 의회 안의 과두제, 다시 말해 의회라는 과두제 안의 또 하나의 과두제의 출발점이자 중추이다." "각종의 정당 집회에서 특정 사안에 대한 담당자나 발제위원 혹은 전문가로서 등장하는 그 사람들, 다시 말해 해당 사안을 철저하게 꿰뚫고 있고, 너무도 간단하고 뻔한 문제조차 적절하게 삭제하고 변경하고 전문용어를 구사함으로써 오로지 자신들만이 해명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문제로 둔갑시키는 그 사람들은, 이론적으로는 대중의 대표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느덧 대중이 정신적으로 결코 접근할 수 없고 기술적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존재들이 되는 것이다."(148-9)


"사실 지도자 권력의 가장 견고한 기반은 바로 대중의 무능이다." "모든 관리 업무, 다시 말해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권위가 요구되는 모든 전술적·행정적 사안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독재', 즉 민주주의 원칙으로부터의 이탈이 필수적이다.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악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인 필요악이다. 사회민주주의란 모든 것을 인민을 '통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인민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결정적인 것은 지도자의 선의와 통찰력이다. 머릿수에 의해 결정되는 다수결은 단지 가장 일반적인 원칙을 제정할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 전술적으로 중요한 모든 사항은 지도자가 결정한다. 이는 소수가 전체 당의 이름으로 정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투쟁 정당이다. 민주주의는 목표일 뿐 수단이 아니다."(151-4)


제2부 지도자 권력의 사실적 특징


"관료제는 본질적으로 분업에 기초한다. 분업이 지배적인 곳에서는 기능의 세분화, 전문화, 독점화가 두드러진다. 특히 프로이센-독일처럼 당이 경찰과 행정 관료와 형법으로부터 억압을 받는 곳에서는, 억압의 암초를 피해가면서 당을 안전하게 이끌고 갈 노련한 조타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당은 당의 발전을 조심스럽게 보존함으로써 어느 정도나마 항구성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계기도 있다. 노동운동은 정치적 노동운동이든 경제적 노동운동이든 상관없이, 국가 행정 관리들이 그렇듯이 관리직의 재직 기간이 어느 정도 길어야 한다. 노동운동 지도자가 훌륭한 공무원처럼 업무에 정통하게 되기까지는, 업무에 익숙해질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연속성이 부재하는) 순수 민주주의에는 주권 대중의 이의(異意)로 인한 결단력 부족과 안정성의 부재, 한마디로 말해 '영원히 변화하는 민주주의'라는 문제점이 있다. 정당은 이를 피하려고 노력한다."(169-71)


"당원의 결속력과 지속성은 부분적으로 당 조직의 견고성과 재정 능력에 의존한다. 정당이 직원들에게 비록 월등한 수준은 아니라 할지라도 만족할 만한 정도의 급여를 지불하면, 당에는 당원들이 쉽게 끊을 수 없는 끈이 만들어진다. 독일 사민당 당직자들이 파렴치한 외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던 것은, 독일 사회주의 운동이 당에 대한 봉사를 현금으로 보상한다는 원칙을 정립하였기 때문이다. 그 원칙은 동시에 당 관료제와 당의 중앙 권력을 강화한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등의 사회주의자들이 부분적으로는 오늘날까지도 자발적 봉사에 의존하는 (말과 글의) 선동 활동을 전개하는 데 반하여, 독일 사민당은 언론과 농촌에 대한 선동 등 모든 선동 활동에 보수를 지급하고 있다. 전자에서는 개인적인 협조, 희생정신, 활력, 열광 등이 동기로 작용하지만, 후자에서는 금전적인 보수를 배경으로 하는 규율, 지조, 의무감이 동인(動因)으로 작용한다."(188-9)


"아울러 노동운동 지도자들에게 낮은 급여를 제공하는 것, 특히 노동조합 운동의 유소년기에는 때때로 의식적으로까지 적용되었던 그 방식이 업무 태만을 막을 만한 적절한 안전 장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동안 입증되었다. 인간 대부분은 이상주의만으로 의무 이행에 최선을 다하지는 않는다. 열광은 장기적으로 창고에 저장해놓을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관리에게 적절한 보수를 지급하는 것은 또 다른 두 가지 이유에서도 필수적이다. 첫째는 사회주의적 도덕 때문이다. 어떤 노동이든, 노동에 대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원칙이 그것이다. 노동의 사회적 가치에 합당하지 않게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를 빌리자면 착취이다. 두 번째는 현실정치적인 이유이다. 지도자에게 적은 보수를 준다는 원칙은, 모든 것을 지도자의 이상주의에 거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보수가 낮으면 부패와 사회적 타락이 생긴다."(197-8)


"언론은 지도자가 대중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하고, 보존하고, 강화하는 강력한 무기이다. 언론은 물론, 유명한 선동 정치가가 집회 연설을 통하여 청중에게 행사하는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언론이 발휘하는 영향력의 범위는 훨씬 더 넓고, 쓰인 언어는 말해진 언어보다 더 멀리 전달된다. 그러므로 언론은 지도자 개인의 명성을 대중에게 알리고, 그의 명성을 증폭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수단이다. 노동조합과 정당의 기관지는 언제나 지도자에 대한 찬사로 채워진다. 〈사심 없는 희생〉이나 〈냉철한 지성과 강인한 인내력을 갖춘 뜨거운 이상주의〉와 같은 찬사들은 마치 그것만으로도 강력한 노동자 조직을 제련해낼 수 있는 것처럼 기관지의 지면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이런 아첨은 원래 부르주아지의 것이었다." "그리고 지도자로의 상승을 열망하는 사람이 언론에 자기 이름을 싣는 것은, 대중에게 자신을 알리고 친숙하게 함으로써 더 높은 직책으로 상승하는 방법이기도 하다."(199-201)


"정당의 관료제가 강화되면 사회주의 이념의 근본적인 두 가지 요소, 즉 원대한 이상주의적 사회주의 문화에 대한 헌신과 국제적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약화된다. 이제 문제는 이념이 아니라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국내에 선동과 조직 활동의 문이 열리게 되자, 사회주의자들의 머리는 불멸의 원칙들 대신 일상적인 정당활동의 요건들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전문적인 지식을 얻지만, 시야의 너비와 무게를 잃는다. 그들이 산재보험법과 퇴역보험법에서 저주스럽고 교활한 술수를 가려낼 수 있게 되면 될수록, 그리고 그들이 공장감독법, 영업재판소, 소비조합 점포의 두루마리 상표, 도시 가스 등의 가스 사용량 등등의 특수 문제들을 꿀벌의 성실성으로 파악하게 되면 될수록, 그만큼 그들은 노동운동의 의미를 협소한 의미에서조차 견지하기 힘들어 하게 된다." "그처럼 사물의 근본을 꿰뚫는 '폭넓은' 사고를 상실하고 전문성 속에 함몰되는 경향은 근대적 발전 경향 그 자체이다."(247-8)


"지도자들이 최소한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의 이론적 주인인 대중의 의지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때로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의 허약하고 통속적인 본성을 이용한 선동정치일 뿐이다. 선동가들은 대중의 의지에 아첨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대중을 앙양하고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대신, 마치 대중의 노예가 되어 대중 발끝에 엎드리는 것 이외에 그 어떤 야심도 없는 양 연극을 선보이면서, 실제로는 대중에게 멍에를 씌우고 대중의 이름으로 지배하려는 자들이다. 그들 중에서 보다 솔직하고 보다 윤리적인 자들의 성공 비결은, 〈자신들이 숙고하여 작성하고 실천한 계획에 대중의 강력하고 맹목적이며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을 짜맞출 수 있었다〉는 것뿐이다." "그의 복종은 그저 잠정적이고 유보적인 것에 불과하다." "부정(不貞)한 자는 걱정을 하고, 강력한 자는 거스른다. 그러나 지배하는 자는 선동가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민의 위탁을 팽개치거나 겉으로만 수행하는 척하면서, 뒤에서 지배한다."(265-6)


"민주주의에서 출현한 과두제의 존립을 위협하는 두 개의 적대적인 힘이 있다. 첫째는 대중의 민주주의적 저항이고, 둘째는 그와 관련되면서 그 결과이기도 한 군주정으로의 이행이다. 군주정의 성립은 과두 정치가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위험은 아래와 옆으로부터 오는 셈이다. 한쪽은 봉기이고, 다른 쪽은 찬탈이다. 따라서 근대의 모든 국민정당에는 진정한 동료애, 즉 인간적인 신뢰의 결핍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잠재적인 투쟁 상태,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린, 지도자들 간의 상호 불신에서 비롯된 흥분된 대치상태가 나타난다." "시칠리아의 몇몇 도시에서는 정당들이 뒤엉켜 싸우는 것을 놓고 부유한 사람들과 부유하게 된 사람들 간의 투쟁이라고 조소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귀족(과 지주)과 졸부(상인, 공공사업 업자, 공장주 등)의 투쟁인 것이다. 근대 민주 정당에서도 금전적인 측면은 없지만, 그와 비슷한 투쟁이 벌어진다."(269-70)


"기존 지도자에 대하여 지도자 후보가 반기를 드는 것은, 정당 조직 그 자체와 체제로서의 지도자 지배에게 위험한 것이 아니다. 현재의 혁명가는 장래의 반동이다. 우리는 지도권을 둘러싼 투쟁의 복잡다단한 양상 속에서 다음과 같은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국제 노동운동사는 연륜이 비교적 짧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근대 사회계급의 역사보다 거만하고 권위적인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근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는 자기편에게 버림받아 쓰러지고 먼지 속으로 사라져간 용병 대장들의 사례들을 전해준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드물다. 대중이 지도자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입증한 사례는 극히 드문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지도자들과 갈등에 빠져든 새로운 지도자가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힘있는 자로 거듭나는 경우, 즉 새로운 지도자가 기존의 지도자를 끌어내리고 그를 대체하는 데에 성공하는 경우가 통상적이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민주주의가 거둔 성취는 신속하게 무로 돌아가고 만다."(283-4)


제3부 대중 지도의 심리적 영향


"대중은 지도를 욕구하지만 지도권에 무관심한 것과 대조적으로, 지도자에게는 타고난 권력욕이 있다. 그리하여 조직의 기술적 논리 때문에 발생한 과두 민주주의는 권력욕이라는 지도자의 보편적인 인성에 의하여 더욱 강화된다. 조직, 관리, 전략의 필요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심리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바이지만,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적어도 경력 초기에는 자신이 대변하는 원칙을 확신한다. 르 봉의 말은 아주 적절하다. 〈지도자는 처음에 대체로 일개 추종자에 불과하다. 그러다가 그는 스스로 사도가 되려는 마음을 품는다.〉 지도자는 대중으로부터 나오고, 대중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의 본능적인 행위가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 채, 또 그 어떤 개인적인 속셈도 품지 않은 상태에서 부지불식간에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 확고한 당 조직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장차 지도자가 되기 위한 첫 단계를 밟기 위해서는 그 지도자의 개인적인 열의가 전제되어야 한다."(287-8)


"시간이 경과하면서 지도자들에게 나타나는 심리적인 변화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다. 대중의 지휘관이 된 사람 모두가 과거 한때, 지휘관이 되기를 꿈꾸었던 사람인 것은 아니다. 프랑스 격언에도 있지 않은가. 〈성공한 사람 모두가 출세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사실 지도자가 되려는 분명한 의식적, 무의식적 의지를 가지고 입당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은 그저 희생 정신과 투쟁 정신, 혹은 기존의 관계 및 그 책임자들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운동에 참여한다. 그들은 이상주의자답게 모든 당원들을 형제로 간주하고, 모든 당 집회를 이상으로 가는 도정의 정거장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운동의 와중에 천부적인 혹은 습득된 능력 때문에 지도자가 된다. 그렇게 하여 일단 지도자로 올라선 사람은 결코 정치적 지위가 낮았던 과거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모든 권력 의식은 과대망상을 부여한다." "권력은 권력을 장악한 자의 인간적 성격까지 변화시킨다."(292-3)


"황제로서의 공적 활동에서 나폴레옹 1세는 자신의 권력이 오로지 프랑스 인민의 의지에서 비롯되었음을 과시하였다. 이집트에서의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명성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그는 종전까지 입법부 의원들에게만 주어지던 인민의 제1대표라는 칭호를 자신에게 수여하여야 할 것이라고 명령조로 요구하였다. 그리고 인민투표에 의하여 황제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권력이 오로지 인민 대중에 근거한다고 선언하였다. 인민에 의하여 헌법적으로 승인된 일인독재, 이것이 바로 인민주권에 대한 보나파르트주의적 해석이다." "보나파르트주의는 전체의지에서 기원하였으되 그 기원으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 주인이 된 개별의지에 대한 이론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독재가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선거로 선출된 독재자에게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인민 다수의 의지를 구현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 반대하는 것은 모두 비민주적이 된다."(298-301)


"근대의 민주적인 혁명 정당들과 노동조합의 역사는 보나파르트주의와 유사한 면모들을 드러낸다. 원인은 자명하다. 보나파르트주의가 성공할 수 있는 곳은 언제나 민주적 대중이 존재하는 곳이다. 따라서 정부의 적대자는 항상 인민주권에 의거하여 분쇄된다. 왜냐하면 보나파르트주의는 대중에게 자신들이 지배자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인민 대중의 권력 위임이 마치 인민이 법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고 투쟁한 것인 양 나타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서는 권력 위임을 통한 인민의 주권 포기가, 보기 싫은 정통 세습 군주정처럼 형이상학적인 신(神)의 도움이 아니라 인민의 의지를 통하여 적법하게 이루어진다. 따라서 선출된 국가 수반은 대중의 자유로운 의지 행위, 즉 대중의 자의적 행위를 통하여 출현한 대중의 창조물이다. 이는 대중 개개인에게 자족감을 안겨준다. 〈내가 그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으면, 그는 지금의 그가 되지 못했을 거야.〉 〈내가 그를 뽑았어.〉"(302-4)


제4부 지도자에 대한 사회적 분석


"억압상태가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이 그것을 '의식'하는 것이 계급투쟁의 역사의 동인(動因)이다. 따라서 근대 프롤레타리아트가 즉자적(卽者的)이고 대자적(對者的)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사회문제'가 대두하지 않는다. 계급투쟁이 혼몽한 잠복 상태에서 영원히 머무르지 않기 위하여 필요한 토대는 계급의식이다. 이것이야말로 계급투쟁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자신들을 짓누르는 억압을 처음에는 본능적으로만 감지한다. 교육을 받지 못한 그들로서는 미궁과도 같이 어지러운 세계사의 방향을 결코 통찰할 수 없다. 심리적 역사법칙이라고 간주할 만한 것이 있다. 오랜 문화적 소외와 권리의 박탈로 인하여 쇠잔해지고 스스로에게 절망해버린 계층과 계급은, 자신의 계급 동지 외에 '상위'(上位)─이 기계적인 단어를 계속 쓰자면─계급이 함께 말할 때 비로소 강력한 행동을 취하기 위하여 몸을 일으킨다는 것이다."(320-2)


"사회주의 이론은 철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 등 지식인들의 저술에서 나온 것이다. 수많은 사회주의 강령에서 지식인의 언어가 아닌 단어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사회주의의 태두들은 몇몇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일차적으로 지식인들이었다.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가들은 이차적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자발적인 프롤레타리아트적(proletaroid) 운동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정신적, 경제적 생활수준의 개선을 선망하던 본능적 움직이었을 뿐이다. 그것은 저주스러운 현실의 객관적 원인을 인식한 인간의 행위였다기보다, 현실에서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불만들을 기계적으로 분출해버리는 운동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적' 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바뀌고, 무의식적이고 무목적적이며 본능적인 반란이 비교적 분명하고 명시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전환한 것은 노동자들에게 지식이 결부되었던 때였다."(322-3)


"우리는 '부르주아지의 자식들' 중에 사회주의의 이념을 받아들임은 물론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다 못해, 자신의 깨달음이 지시하는 대로 인간 해방의 목표에 자신의 삶을 조건 없이 바치기 위하여 친구, 친척, 부모, 사회적 지위, 사회적 명예 등을 포기해버린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초년생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생업에 전적으로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이 속하는 계급 자체는 그들의 이탈에서 별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전체로서의 계급은 결코 특권적인 지위를 자진해서 내놓지 않는다. 왜냐하면 계급은 '가련한 형제'를 위하여 퇴장해야 할 만한 그 어떤 도덕적 동기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계급 이기주의'가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 역시 계급 이기주의를 갖는다. 그러나 역사적인 이유로 인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특수한 계급이해는 궁극적으로─적어도 이념에서는─인류의 무계급 이상(理想)과 일치한다."(332)


"많은 젊은 부르주아지들이 가슴속에 선한 의지의 지순한 불꽃을 품고 갈채와 명예와 돈을 도외시한 채 사회주의에 뛰어든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은 자신의 양심을 평화롭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의 내적 확신을 외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발걸음을 내디디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 외에 다른 부류의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도 있다. 즉 개인적으로 불만이 있는 사람, 야심가, 성격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신경쇠약자 등이 그들이다. 국가의 권위를, 그것을 장악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혐오하는 사람은 많다. 이는 높이 매달린 포도와 여우에 관한 우화와도 같은 것이다. 그 우화는 시기심과 만족되지 못한 지배욕을 나타낸다. 이것은 대가족 속에서 자라난 어느 가난한 방계(傍系) 출신의 후손이 부유하고 권세 있는 사촌에 대해 느끼는 증오와 질투이며, 귀족적인 로마에서 둘째가 되느니 차라리 프롤레타리아트적인 갈리아에서 첫째가 되려는 자존심이다."(348-50)


"계급투쟁은 계급투쟁에 봉사하는 기구들을 창출한다. 문제는 그 기구들이 정당 내부에 사회적인 변화와 변형을 일으킨다는 데 있다. 그 기구들을 통하여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수적으로는 아주 적지만 질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한 일부가 낮은 지위로부터 벗어나 점차 부르주아 계급으로 이동한다." "일찍이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일부의 지혜롭고 야심적인 노동자들은 강철과 같이 근면하고 주어진 기회를 영리하게 이용하는 데다가 행운의 도움까지 받아서 기업가로 상승하였다." "오늘날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기계적인 손놀림만을 요구하는 단순하고 협소한 대공장에서 자신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과거에는 '노동'이 제공해주던 사회적 상승의 가능성을 이제는 근대적인 '노동운동' 속에서 찾고 또 발견한다. 노동운동은 그들에게 새로운 생계 수단과 높은 생활수준을 제공하고, 사회적 상승의 사다리까지 되어준다. 그리고 그 기회는 조직의 성장과 더불어 증가한다."(367-9)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의 '육체'노동으로부터 '정신'노동으로의 전환은 자신의 존재 전체를 포괄하는 폭넓은 변신 과정으로 연결된다. 해당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트에서 이탈하여 점차 소시민에 편입되는 것이다. 우선은 다만 직업적, 경제적으로만 그러하다." "정당이나 노조의 관리직이 노동자를 곧장 자본가로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노동계급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는 했기 때문에, 〈상승한 노동자〉(gehobene arbeiterexistenz)라는 사회학적으로 적절한 용어가 생겨난 것이다." "그들은 비록 노동 대중과 지속적으로 접촉하지만, 그들에게는 심리적 변화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우리가 언급한 경제적 변화를 넘어선다. '생활수준이 상승한 노동자'가 언제나 새로운 환경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도덕적 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사회정치적 교양 수준이 그를 변화된 생활수준으로부터 보호할 만큼 높은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의 계급적 순수성과 이념적 통일성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373-5)


"설령 탈프롤레타리아트화된 사회주의자 스스로가 사민당 신문 편집인이나 의회 의원으로 명예롭게 늙어가면서 노동해방의 진정한 투사로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그 자녀들, 즉 딸뿐만 아니라 아들 역시 아버지의 사회적 상승이 그들에게 가져다준 새로운 계급으로 살아간다. 이는 물질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념적으로도 새로운 계급에 곧바로 동화된다. 예컨대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새로운 계급 출신과 결혼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노동계급을 연결해주던 유일한 연결 고리였던 공통의 정치-사회적 이념에 대한 믿음은 자식들에 이르러서는 정치적 무관심으로 바뀌어버린다. 요컨대 노동자를 가족 단위로 고찰하면 구(舊)노동자는 빠르든 늦든 새로운 환경에 흡수되고 마는 것이다. 부르주아적으로 성장하고, 아버지보다 훨씬 좋은 학교에 다녔으며, 부르주아적인 관심 속에 살아가는 자식들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부르주아화 이전의 반부르주아적 기원을 생각해낸다."(376)


"영미(英美)의 비교적 규모가 큰 노동조합들은 거의 모두 조합주의(Korporativismus)의 경향, 즉 노동귀족의 경향을 드러낸다. 이미 성장한 노동조합은 더 이상 선전활동을 벌이지 않는다. 가입을 촉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타인이 접근할 수 없도록 주변에 철조망을 치고, 가입비를 인상하거나 전문적인 직업교육 이수 증명을 요구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조직의 외적 성장을 막는다." "유럽에서도 파당 및 도당의 형성(과두적 경향)이 활발하다." "나폴리의 군수 노동자들은 정부에게, 〈노동자를 교체할 때 새로 채용되는 노동자 중 최소한 3분의 1은 현재 근무중인 노동자 가족, 즉 아버지와 동일업종에서 성장한 사람들 중에서 뽑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 노동자들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듯 그렇게 세상 물정에 어둡거나 뒤처진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계급투쟁이 민주주의를 통하여 귀족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 집단이 귀족화되는 것이라는 사실은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다."(390-2)


"지배의 열정이 고도로 발달하는 쪽은 통상적으로 과거에 노동자였던 사람들이다. 자본에 봉사하는 임금노동자라는 예종의 사슬로부터 방금 벗어난 그는 대중이 부과하는 예종의 사슬에 묶이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싫어한다. 그는 오히려 자유사상가라도 된 양 방종에 빠져든다. 모든 나라의 경험으로 미루어,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성장한 노동 지도자들이야말로 두드러지게 자의적이고, 추종 대중의 반론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오만하고 이기적이라는 점, 이제 갓 소유하게 된 권위를 지키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인다는 점, 자신에 대한 비판은 무엇이건 굴욕과 멸시로 간주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지난 시절을 상기시키려는 악의적인 시도로 받아들이는 것 등은 바로 벼락 출세자의 특징이다." "노동자 출신의 노동지도자들은 자신이 새로운 관리 업무를 맡으면서 과거의 노동을 포기하게 되었고 계급 또한 바뀌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면 불쾌해한다."(401-2)


제5부 지도자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예방 조치들


"모든 형태의 직접적인 인민 통치에 가해지는 비판은 인민투표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대중 의지의 항구적인 표현 수단으로서 인민투표가 갖는 결정적인 약점은 대중의 미성숙에 있다. 설혹 대중이 성숙하다고 하더라도 인민투표를 실시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또한 인민투표는 특히 신속한 결정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활동하는 정치적이고 투쟁적인 정당에게 성격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제도이다. 그것은 오히려 순발력을 저해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은 교묘한 질문을 이용하여 대중을 손쉽게 기만할 수도 있고, 불분명하게 질문함으로써 답변을 불분명하게 유도한 뒤 그 결과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도 있다. 전체투표는 절대적이며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그 본질로 인하여 능란한 사기꾼의 지배를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상드는, 대중의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인민투표는 민중의 자유에 대한 암살 행위라고 말하였다."(442-3)


"(부르주아지 출신 지도자들을 프롤레타리아트화하는 작업은) 다음과 같은 심리적 통찰에 기초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도, 사회혁명 정당에 소속된 모든 사회 계층과 부류들을 아우르는 '사회적 동질성'이 있어야만, 고질적인 지도부의 해악 몇 가지를, 그 싹까지 잘라버리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현저하게 약화시킬 수 있는 예방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활방식의 평등은 윤리적 요청이기만 하였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 정당의 과두적 경향의 발전을 막거나 멈추도록 하는 출구로 간주되고 있었던 것이다." "볼셰비키가 러시아 인민 속에서 거둔 성공의 열쇠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그들의 인민적이고 일상적인 언어 구사와 소박한 생활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는 특히 레닌에게 해당된다. 그러나 그러한 경이로운 시도는 이데올로기적인 영역만을 건드리는 것이고, 기껏해야 정당에 대한 광신을 낳을 뿐이다. 그것으로 지도자들이 대중의 사고와 현실 속으로 소멸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450-2)


"생디칼리슴은 민주주의의 국가체제가 명명백백한 '소수의 지배'임을 폭로하였다." "그렇지만 생디칼리슴이 무게 중심을 조합적 행동에 두려 하면 할수록, 생디칼리슴 스스로가 여러 면에서 과두정으로 귀결된 위험성은 커진다. 혁명적인 노동조합 집단에서조차 지도자들이 추종 대중을 우롱할 만한 구실은 얼마든지 있다." "프랑스 생디칼리스트들은 빈번하게, '직접행동'이야말로 노동계급이, 대표되는 대중으로서가 아니라 자주적인 대중으로 나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리고 배신, 탈선, 부르주아지화에 불과한 모든 대의체제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생디칼리스트들은 그 일방적인 이론이 정당에만 적용되고 극히 혁명적인 노동조합을 포함하는 노동조합 운동에는 적용되지 않기라도 하듯이 말한다. 그러나 노동조합도 조직의 구조에서 노동자 정당과 동일한 기본 원칙에 입각한다. 대중의 이해관계가 몇몇 선출된 자에 의하여 대변되는 것이다."(453-5)


"생디칼리스트들은 파업을 프롤레타리아트가 벌이는 직접행동의 만병통치약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파업은 정치적인 인물이 자신의 조직적 재능과 지휘 능력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정치 파업인 총파업에서 그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전문적인 노동지도자에게 경제파업은 직업 군인에게서의 전쟁과도 같은 것이다. 파업과 전쟁은 그들에게 신속하고 빛나는 상승의 기회를 제공한다. 노동지도자들 중에는 거대 파업을 주도하여, 영어로 말하자면 경영하여(manage) 인민의 눈을 붙잡고 여론과 정부의 주목을 받음으로써, 최고의 명예직과 생계 수단을 확보한 인물이 많다." "따라서 그들이 정당보다 더욱 강력한 지도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특정한 전제조건하에서는 파업과 직접행동의 '이념'을 이론적으로 선전하는 것만으로도, 대중 지도자가 권력과 영향력을 확보하고 대중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생명의 나무에서 황금 사과를 따기에 충분하다."(456-8)


"정당의 조직화가 계서적이고 과두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끊임없이 지적한 최초의 이론가들은 아나키스트들이다. 이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나 생디칼리스트들보다 훨씬 더 명료하게 조직의 위험성을 통찰하였다. 그들은 권위를 부자유와 예종, 아니 지구상의 모든 해악의 전주곡으로 간주하고 배격한다. 그들에게 강제란 〈감옥 및 경찰과 동의어〉이다. 그들은 지도자의 개인주의가 얼마나 쉽게 추종 대중의 사회주의를 억제하고 마비시키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명료하게 통찰한 그 위험에 빠져들지 않기 위하여, 온갖 종류의 실천적인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좁은 의미에서의 정당을 조직하지 않는다. 그들은 추종 대중을 고정된 틀 속에 조직하지도 않고, 정관을 마련하지도 않으며, 선거, 당비, 배타적인 집회 등의 의무와 업무를 추진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아나키즘 지도자들에게서 사회민주당 지도자들보다 강력한 이념적 면모가 부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465-6)


"우리는 아나키즘 지도자들 가운데에서 성실하고 학구적이고 사심 없는 사람들, 박애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각별한 애정을 갖고 돌보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아나키즘 지도자들이 정치의 장에서 움직이는 조직화된 정당의 지도자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훨씬 더 도덕적이라고 해서, 그들에게 지도자의 특성과 욕구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탁월한 아나키스트들이 생애의 수많은 날들을 바쳐가면서 지도자의 권위를 배격하는 이론 투쟁을 벌였지만, 그들 내부에 있는 자연적인 지배 욕구를 소멸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과 정당 지도자들과의 차이점은, 정당에서는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지배의 수단을 아나키즘 지도자들이 사용한다는 데 있을 뿐이다. 그것은 사도(司徒)와 연사(演士)의 수단들, 다시 말해 사상의 정열적인 힘, 희생의 위대함, 확신의 깊이 등이다. 그들은 기술적인 필요성에 입각하여 조직을 지배하는 대신, 추종 대중의 감정을 지배하는 것이다."(466-7)


제6부 종합: 조직의 과두적 경향


"혁명을 표방하는 정당이 보수적인 내적 본질을 갖기에 이르는 기나긴 사슬의 마지막 고리는 정당과 국가 사이의 관계이다. 중앙집권적인 국가 권력을 타도하기 위해서 탄생한 정당은, 국가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역시 거대하고 견고하게 조직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노동자 정당은 고도로 중앙화된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랑하는 자신의 조직 원리는 타도의 대상인 국가의 조직 원리와 동일하게 된다. 그 원리는 권위와 규율이다." "권위적인 국가와 똑같은 수단으로 조직된 그 혁명 조직의 지도자들은 결국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국가라는 거대 조직에 대립하는 자기 정당은 비록 조직 문제에서는 기적을 연출해낼지 모르지만, 국가에 비해서는 여전히 취약한 축소판에 불과하며, 따라서 조만간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국가와의 모든 힘겨루기는 자신들의 처절한 패배로 끝나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당의 설립자들이 창당할 때 내걸었던 희망과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475-7)


"오늘날 우리는 정당의 조직 역량과 강도가 커지면서 혁명적 동력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조심성과 우려가 그만큼 커지는 현상을 목격한다. 당 조직의 확대와 당 정치의 조심성 사이에는 내적인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 국가로부터 위협받으면서도 존립의 근거를 국가에서 찾는 정당이 비대해지자, 그 정당은 국가를 과도하게 자극할 만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회피하려고 불안하게 노력하는 것이다." "초창기에 그들의 목표는 혁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혁명적 수단을 원칙적으로 선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득이한 상황에서 그들은 수단도 혁명적이라고 외쳤다. 그 정당이 이제 연륜이 쌓이자, 혹은 정치적으로 성숙해지자, 혁명에 대한 본래의 신념이 수정된다. 자신들의 정당은 〈최선의 의미에서〉 혁명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당은 검찰이 주시하는 수단에서는 혁명적이지 않고, 오로지 회색의 이론과 흰색의 종이 위에서만 혁명적이라고 서슴지 않고 선언하는 것이다."(477-9)


"이제 만일 강력하고 대담한 전술을 택한다면 (반세기 동안 당이 애써 구축한) 그 모든 것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다시 말해 수십 년 간에 걸친 노력과 수천 명에 달하는 당내 상하위 간부진, 한마디로 '당' 전체가 위태로워지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대담한 전술을 구사한다는 것은 점차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 되어간다. 이미 성취한 것에 대한 집착,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삶이 당의 존재에 거의 전적으로 매여 있는 수많은 성실한 가장(家長)들의 개인적인 욕심, 또한 전시(戰時)에 빈번하게 나타나듯 국가가 당을 해산해버린다면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으로 파탄을 맞게 되리라는 불안감, 부당한 감상주의와 정당한 이기주의, 이 모든 것이 작용함으로써 당에는 일말의 과감성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여전히 혁명적인 언어가 사용되지만 현실에서 그 당은 기껏해야 입헌적인 야당의 임무를 다하는 정당으로 전락한다. 여기에서도 결과는 원인보다 오래간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사민당의 상태였다."(481-2)


"(정당의 경우처럼) 분업에 의하여 등장한 기관이 공고화되면, 그 속에 기관 자체의 이해관계, 즉 기관을 위한 기관에 대한 이해관계가 발생한다는 것은 변경 불가능한 사회법칙이다. 그리고 조직 자체의 이해관계가 생겨나면, 그것에는 조직원 전체의 이해관계와 충돌하고 대립하는 측면들이 나타난다. 그것만이 아니다. 다양한 사회 계층들이 사회적 기능에 따라 독자적으로 결집되어 기관을 조직하면, 그 기관들은 다시금 고유한 이해관계를 내세우게 된다. 한 지배층이 또 다른 지배층으로 교체될 필연성과 그로부터 도출된 과두정의 법칙, 즉 인간이 대규모 단체로 조직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조직 형태로서의 과두정의 법칙이 유물사관을 배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유물사관을 보충한다. 역사가 부단한 계급투쟁으로 구성된다는 학설과, 계급투쟁이 구(舊)과두정에 합류하는 새로운 과두정으로 귀착될 뿐이라는 학설 사이에는 그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504)


"그렇게 사회주의자들은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그렇지 못하다. 사회주의자들이 승리하는 순간 사회주의는 몰락한다. 대중이 전력을 다하여 지도자들을 교체한 뒤 만족해하는 것은 가히 희비극이라 할만하다. 노동자들에게는 오로지 〈정부를 충원하도록 하였다〉는 명예만이 남을 뿐이다. 선의의 이상주의자들조차 일단 지도자가 되면 단기간 내에 지도자의 일반적 속성들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반(反)낭만주의자들이 1833년 경에 그런 회의감을 다음과 같은 신랄한 풍자 속에 담아냈던 것은 역사적으로 그럴 만하였기 때문이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길거리에서 총질을 하는 사람들이 벌이는 것이 혁명인가? 그런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창문이나 깨뜨릴 뿐이고, 거기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리장수밖에 없다. 이런 흥분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투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사람들을 깔아뭉갠다. ······혁명이란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는 정직한 인민을 선동하려는 노력일 뿐이다.〉"(505-6)


결론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에서 과두 체제가 형성되는 것은 '유기적인' 과정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사회주의적인 조직이든 아나키즘적 조직이든 할 것 없이, '모든' 조직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다. 할러가 이미 지적한 대로, 모든 조직 관계에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자연적으로 형성된다. 따라서 모든 정당 조직은 민주적 토대 위에 선 강력한 과두정이다. 어느 곳이나 선출하는 자와 선출되는 자가 있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선출된 지도자는 선출한 대중을 지배한다. 조직의 과두적 구조는 조직의 민주적 토대에 의하여 숨겨진다. 후자는 당위이고, 전자는 현실이다. 이러한 본질적 차이는 대중에게 철저하게 은폐된다." "문화적으로 우월하고 말솜씨도 뛰어난 지도자들의 견고한 연설에 지속적인 영향을 받은 나머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하나의 고정 관념이 생겨난다. 투표를 통하여 자신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대변인에게 위임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자신이 〈지배에 한몫〉한 것이라는 관념이 그것이다."(509-10)


"사회주의자들이 공권력을 장악한 뒤에 대중에게 약간의 통제권을 제공하면 지도자와 추종 대중 간의 이해관계가 완벽하게 합치되리라는 생각은 매우 비과학적인 가정이다." "(사회주의가 인간을 신으로 만들 것이라는 주장과 달리) 우리가 사실로 확인한 대중의 미성숙은, 민주화가 진전되어 사회주의가 이룩되면 곧바로 소멸되어버릴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이는 대중의 본질 그 자체로부터 해명된다. 대중은 조직되더라도 자기 앞에 놓여 있는 복합적 문제의 해결에 본질적으로 무능하다. 대중은 노동분화와 전문화와 지도를 필요로 하는 무정형의 군집이다. 〈인류는 지배당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인류에 혐오감을 느낀다〉라고 프루동은 1850년에 감옥에서 썼다. 개별적인 인간은 대개 천성적으로 지도에 의존한다. 근대적 삶의 기능들이 분화되면 분화될수록, 그 경향은 더욱 커진다. 그리고 개별적인 인간들로 구성된 조직은 개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지도에의 욕구를 갖는다."(513)


"민주주의의 본질은 각 개인의 정신적 비판 능력을 강화하고 촉발시킨다는 데에 있다. 비록 민주주의 조직이 관료화되면서 그러한 통제 능력이 크게 약화되지만, 본질은 그렇다." "과두적 현상이 역사적으로 필연적이라고 해서, 민주주의자들이 그에 대하여 투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력이 오랜 동지들은 숙명적으로 지도자, '사회학적 의미에서의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 정치 활동에 찌들고 분노하여 정치의 장을 떠나고 그로써 그 지도자들을 통제하지 않은 채 방치하는 것은, 조직의 이념을 손상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지도자의 권력을 예감할 수조차 없는 수준으로까지 확대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서두에서 지적하였듯이 조직이란 오늘날의 모든 사회 계층, 특히 재정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과두적 위험성을 있는 그대로 명료하게 직시하여야만, 과두정의 위험을 막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515-6)


"역사 속의 민주주의의 흐름은 몰려오는 파도와 같다. 파도는 항상 바위에 부딪쳐 깨진다. 그러나 파도는 영원히 다시금 몰려온다. 파도가 연출하는 연극은 격려와 절망을 교차시킨다. 민주주의는 일정한 발전 단계에 도달하면 곧바로 타락하기 시작한다. 그때 민주주의는 귀족정의 정신을, 때로는 귀족정의 형식까지 받아들이고, 한때 민주주의가 투쟁하였던 귀족정과 유사해진다. 그러면 다시 민주주의의 내부에서 민주주의의 과두적 성격을 지책하는 새로운 비판자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들은 영광의 투쟁기와 불명예스럽게 지배에 참여하는 시기를 겪은 뒤에, 마침내 다시 구(舊)지배계급 속으로 흡수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내건 새로운 자유의 투사들이 또 다시 등장한다. 청년의 치유할 수 없는 이상주의와 노년의 치유할 수 없는 지배욕 사이의 가공스러운 투쟁은 그렇듯 끝없이 이어진다. 언제나 새로운 파도가 언제나 똑같은 바위에 부딪친다. 이것이 정당사의 심원한 서명(署名)이다."(5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애


"히틀러는 정확히 56년(1889-1945)을 살았다. 생애 전반 30년과 그 뒤 26년 사이에는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는 심연이 놓인 것처럼 보인다. 30년 동안 무엇 하나 변변치 않은 실패자였다. 그런 다음 갑작스럽게 지방의 유명 정치가가 되는가 싶더니 마지막에는 전 세계의 정치를 뒤흔드는 인물이 되었다." "히틀러의 생애를 가르는 단면은 횡단면이 아니라 길게 가르는 종단면이다. 1919년까지는 허약함과 실패, 그리고 1920년 이후로는 힘과 업적이라는 식으로 갈라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다. 그보다는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정치적 삶과 체험에서의 비상한 집중도와, 개인적 삶에서의 정도 이상의 빈약함으로 나누어야 한다. 전쟁 전에 불확실한 보헤미안 생활을 할 때도 그는 마치 가장 중요한 정치가인 양 정치적 시대사건Zeitgeschehen 속에서 살고 움직였다. 그리고 뒷날 총통으로 있을 때도 사생활 면에서는 출세한 보헤미안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삶의 결정적 특징은 단조로움과 1차원성이다."(28-9)


"히틀러에게는 성격이나 개성에서 발전도 성숙도 없다. 그의 성격은 일찌감치 확정되었다. 아니 압류되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놀랍게도 언제나 똑같은 자리에 머물렀다. 그 무엇도 덧붙여지는 것이 없다.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성격이 아닌 것이다.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화해하는 요소는 모두 결여되었다. 자주 수줍음처럼 작용하는, 접촉을 꺼리는 기질을 온건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렇다. 긍정적인 특성들─의지력, 용기, 부지런함, 강인함 등─은 모두 '경직된' 면에 속한다. 부정적 특성들은 가차없음, 복수욕, 신의信義 없음, 잔인성 등이다. 게다가 아주 처음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자기비판 능력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히틀러는 평생 동안 그야말로 자기 자신에만 푹 빠져 지냈으며, 아주 어린 시절부터 생애 마지막 날까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히틀러 숭배에서 히틀러는 숭배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최초이자 가장 오래도록 충실한 신도였다."(34-5)


# 히틀러의 정치적 전기

1. 일찌감치 삶을 대체하여 정치에 집중

2. 최초의 (아직은 사적인) 정치 활동.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로 이민(1913년)

3.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1918년 11월 혁명 이후)

4. 대중연설가로서 자신의 집단최면 능력을 발견함(1920년 2월 24일 첫 대중연설)

5. (모두가 기다리는 기적을 행할 자인) 총통이 되기로 결심

6. 개인적 기대수명에 맞추어 정치 시간표를 짜기로 결심(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자신의 삶의 시간과 동기화)

7. 자살 결심(정치적 삶이란 전부 아니면 무無의 문제)


성과


"정권 획득 이전에 히틀러는 오로지 선동가라는 명성만을 얻었었다. 대중 연설가로서, 그리고 대중 최면술사로서의 성과들은 논란의 여지가 없었고, 1930~1932년에 절정에 이른 위기의 기간에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진지한 권력 후보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권좌에 올라서도 자신을 지켜내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통치는 연설과는 다르다고들 했다. 또한 히틀러가 연설에서 통치자들에게 과격한 비난을 퍼부으며 모든 권한을 자신과 자신의 당을 위해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모순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온갖 종류의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맞장구를 쳐대면서, 당시 가장 중요한 근심거리인 경제 위기와 실업 문제에 대해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는지 구체적인 계획을 전혀 내놓지 않았다는 것도 눈에 띄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그 사람이 1933년 권력을 장악한 이후, 매우 활력이 넘치고 발상이 풍부하고 능률적인 활동가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심리적 반작용이 더욱 컸다."(61-2)


"1933년 이전에도 히틀러의 관찰자와 비평가들이 조금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면 연설 재능 말고도 한 가지가 더 눈에 띄었을 것이다. 즉 그의 조직 능력인데, 더 엄밀히 말하자면 대단한 업적과 성과를 낳을 수 있는 권력 기구를 만들고 지배하는 능력이었다. 20년대 말의 민족사회주의당은 오로지 히틀러의 작품이었고, 30년대 초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기도 전에 이미 조직력이라는 면에서는 다른 모든 정당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20년대 히틀러의 두 번째 작품은 내전용 군대인 돌격대SA로서, 당시의 다른 모든 정치적 전투 기구들은─민족주의 기구인 철모단, 사회민주당 기구인 제국기, 심지어는 공산당 기구인 붉은전사단까지도─여기 비하면 절뚝거리는 속물 단체처럼 보일 정도였다. 돌격대는 전투 열의와 돌격 능력에서 다른 모든 단체를 훨씬 앞섰으며, 잔인성과 살인 의욕에서도 당연히 앞섰다. 오로지 돌격대만이 진짜로 두려운 대상이었다."(62-3)


"30년대 중반의 경제기적이 정말로 히틀러가 이룬 업적인가? 이런저런 반박을 예상할 수 있으나 그래도 이 질문에는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히틀러가 경제나 경제정책 면에서 완전 문외한이라는 말은 맞다. 경제기적에 발동을 건 몇 가지 발상들은 대부분 그의 생각이 아니었고, 당시 모든 것을 좌우한, 대단히 위험한 재정적인 묘기는 분명히 다른 사람, 곧 그의 '재정 마법사'인 히얄마르 샤흐트의 공로였다. 하지만 샤흐트를 데려다가 먼저 제국은행의 수장으로, 이어서 경제장관으로 일하게 한 사람이 히틀러였다. 그리고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전임자들이 주로 재정적 측면의 온갖 고려 끝에 막은 경제 활성화 정책들을 서랍에서 꺼내 작동시킨 사람도 히틀러였다. 세액공제부터 금속 가공 연구소 어음, 근로봉사부터 고속도로에 이르기까지 여러 정책들이 나왔다." "그는 경제가 지금 이 순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챌 만큼 정치적 본능을 지녔다."(66-7)


"경제기적이 가장 인기 있는 히틀러의 업적이었지만, 통치기의 첫 6년 동안 독일의 재무장과 군비확장을 이룬 것도 똑같이 센세이셔널하고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히틀러가 총리가 되었을 때는 현대적인 무기도 공군도 없이 그저 10만 명의 군대뿐이었다. 1938년에는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군대와 공군력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믿기 힘든 업적이다! 군사기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상감과 민족주의적 자부심을 일깨웠다. 이 또한 바이마르 시대에 어느 정도의 사전 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고, 게다가 개별적으로는 히틀러의 세부 작업이 아니라 군 지도부가 이룩한 엄청난 성과였다. 하지만 히틀러가 명령을 내리고 영감을 주었다. 군사기적은 히틀러의 결정적인 자극이 없었다면 경제기적보다도 더욱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은 경제기적보다 그가 훨씬 더 오래 마음에 품었던 계획과 의도에서 나온 일이기도 했다."(68-9)


"히틀러는 라우슈닝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어째서 우리는 은행과 공장의 사회화 따위가 필요한가. 만일 사람들을 확고하게 하나의 규율 안에 집어넣고 거기서 나올 수 없게 한다면, [은행과 공장의] 사회화라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인가. ······ 우리는 사람을 사회화한다.〉 이것은 히틀러 민족사회주의[나치즘]의 사회주의적 측면이다." "인간이 노동에서 소외되는 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서 소외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목적이 인간의 소외를 없애는 것이라면 인간의 사회화가 생산수단의 사회화보다 이런 목적을 훨씬 더 크게 달성한다.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부당함을 제거하는 정도이다. 그것도 지난 30년 또는 60년의 세월 동안 입증된 바로는 효율성을 대가로 지불하고 얻는 이점이다. 하지만 인간의 사회화는 실제로 소외를, 그러니까 대도시에서의 소외를 제거하는데, 이 경우 개인의 자유를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 자유와 소외란 동전의 양면이고 공동체와 기율도 마찬가지다."(79-81)


성공


"히틀러의 모든 성공은 1930년부터 1941년 사이 12년 동안에 일어났다. 그 이전, 이미 10년이나 계속된 정치 경력에 성공이란 없었다. 1923년의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고, 1925년에 새로 정비한 정당은 1929년까지 중요하지 않은 소수 정당이었다. 1941년 이후로도, 실은 1941년 가을부터는 성공이란 전혀 없었다. 군사적 시도는 모두 실패하고 패배를 거듭했으며, 동맹국들은 떨어져나가는데 적진인 연합군은 연합을 유지했다." "원한다면 찾아볼 수는 있지만, 역사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상승과 하강, 그렇다. 성공과 실패가 번갈아 나타난다. 순수한 실패, 순수한 성공, 그런 다음 다시 순수한 실패라는 세 단계를 이렇게 분명히 나눌 수 있는 경우는 없다. 동일한 사람이 오랫동안 겉보기에 희망이 없는 무능력자, 그런 다음엔 거의 그만큼의 기간동안 겉보기에 천재적인 능력자, 이어서 다시 이번에는 겉보기가 아니라 진짜로 희망이 없는 무능력자. 이것은 설명을 요하는 일이다."(95-7)


"그가 편안해져서 채찍을 느슨하게 하거나 떨어뜨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의 에너지와 의지력은 공적인 활동의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똑같이 놀라운 것이었고, 그의 지배력은 총리관저의 벙커에서도 절대적인 것이었다. 마지막 순간 그의 통치 영역은 오로지 이 총리관저에만 한정되었지만 그 순간에도 여전히 절대적이었다." "성공에 익숙해진 사람이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운명에 도전하려는 오만함을 드러냈다는 주장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히틀러의 몰락을 불러오는, 러시아를 공격하기로 한 결정은 성공에서 자양분을 얻은 오만함에서 갑자기 떠오른 발상이 아니었다. 이 공격 계획은 아주 오래 전부터 거듭 숙고하여 결정된 히틀러의 주요 목적이었다." "히틀러가 과대망상에 빠져 있었다면 원래 처음부터 그랬다." "1923년의 쿠데타 실패가 그가 수업을 한 유일한 사건이었다. 다른 경우에서는 거의 섬뜩할 만큼 늘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정책은 1925년부터 1945년까지 완전히 동일하였다."(97-9)


"이로써 우리는 뜻밖에도 히틀러의 성공 곡선의 비밀을 풀 열쇠를 손에 쥐게 된다. 이 열쇠는 히틀러 자신의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히틀러가 상대한 적들이 변한 것과 적들 자체가 바뀌었다는 점에 있다." "성공의 경우는 언제나 양측이 있게 마련이고, 한쪽의 성공은 다른 쪽의 실패가 된다." "히틀러는 단 한 번도 더 강하거나 질긴 적을 상대로 성공을 쟁취한 적이 없었다. 20년대 말의 바이마르 공화국과 1940년의 영국만 해도 그에게는 너무 강한 적이었다. 우선 그는 약한 자가 강자를 상대할 때 이용하는 교묘하고 풍부한 발상이나 기민함을 갖지 못했다. 1942~1945년의 연합군에 맞선 전쟁에서 연합군의 내부 갈드을 이용하여 그들을 갈라놓겠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반대로 히틀러는 여러 가지로 부자연스러운 동서 연합군이 서로 단합하는 데 누구보다도 기여한 바가 많았고, 무모한 고집으로 모든 접합점이 터지려는 연합군이 서로 달라붙어 있도록 가능한 온갖 일을 다 했다."(100)


"그에 반해 성공은 모두 정말로 아무런 저항 능력이 없거나 의지가 없는 적들에 맞서서만 거둔 것이었다. 국내정치에서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이미 속이 다 비어서 실질적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죽음의 일격을 가했다. 국제적으로는 1919년의 유럽 평화조약이 이미 안에서부터 흔들려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때 끝장을 냈다. 두 경우 모두 이미 쓰러지고 있는 것을 쓰러뜨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30년대에 히틀러는 철저히 허약한 적들을 상대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후예 자리를 놓고 히틀러와 맞서던 독일의 보수주의자들은 전략도 없고, 히틀러에 맞서 저항할까 연합할까를 두고 속으로 흔들리면서 자기들끼리 싸우던 사람들이었다. 마찬가지로 30년대 후반의 영국과 프랑스 정치가들이 저항과 동맹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을 때 히틀러는 외교적 성공을 쟁취했다. 1930년의 독일, 1935년의 유럽, 그리고 1940년의 프랑스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히틀러의 성공은 기적이라는 후광을 잃게 된다."(101)


"외교 분야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1919년 파리에서 전쟁 이전 유럽의 4강 체제가 무너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은 전쟁으로 인해 붕괴되고, 러시아는 유럽과의 협력에서 배제되었다. 그로써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승전국 연합에서도 배제되었다. 동시에 1917년 러시아를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던 미국은 승전국 연합에서 물러나면서 옛날 동맹국들의 평화협정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따라서 평화협정은 처음부터 실질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담당했다. 마치 바이마르 공화국이 바이마르 연합을 이룬 세 개 정당만으로 유지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두 경우 모두 기반이 너무 약해서 전체를 다 감당할 수가 없었다. 본질이 그대로 유지된 독일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힘만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명기된 제약들에 붙잡아두기에는 너무 강했다." "더욱이 조약의 모욕적인 취급 방식은 독일을 수정주의와 보복주의의 길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미친 듯이 이 길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다."(118)


오류-잘못된 생각들


"히틀러의 역사적·정치적 세계상, 곧 '히틀러주의'를 짤막하게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역사적 사건을 담당하는 존재는 오로지 민족 또는 종족(인종)이다. 계급도, 종교도,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의 국가도 아니다. 역사는 〈한 민족의 생존을 위한 싸움의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또는 선택하기에 따라서는 〈모든 세계사적 사건은 종족의 자기보존 충동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는 〈원칙적으로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그 목적은 인간의 종족적 생존의 유지라고 볼 수 있다.〉 또는 약간 덜 방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국가의 목적은 육체적·영적으로 동일한 생명체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유지하고 촉진하는 것이다.〉 〈국내정치는 한 민족이 외교적 주장을 하기 위해 내적인 힘을 확보하는 일이다.〉 여기서 외교적 주장이란 싸움이다. 〈살려고 하는 자는 싸워라. 그리고 영원한 투쟁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서 싸우지 않는 자는 삶을 얻지 못한다.〉"(136)


"간단히 말해 정치는 전쟁이자 전쟁 준비이며, 이 전쟁에서는 첫째로 생존공간이 핵심 문제이다. 생존공간의 문제는 아주 보편적인 것으로 모든 민족, 심지어는 모든 생명체에 타당한 것이다. 〈생명체의 자기 보존 충동과 지속적 보존의 욕구는 무한한데, 그에 비해 이 전체 생명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유한하다. 생존공간의 이런 한게가 바로 생존전쟁을 강요한다.〉" "둘째로 전쟁에서는 지배와 종속이 문제가 된다. 〈자연의 귀족주의적 기본 원칙이 원하는 것은 강자의 승리와 약자의 박멸 또는 약자의 무조건 굴복〉이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서로 경쟁하여 더 나은 품종으로 발전해야 하는 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침없는 게임〉이다. 셋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민족들의 지속적인 전쟁에서는 세계지배가 핵심 문제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먼 미래에, 지구 전체의 수단과 가능성을 바탕으로 최고 인종이 지배 민족이 되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인류에게 다가올 것임을 짐작하기〉 때문이다."(137-8)


"이것은 히틀러의 세계상의 절반에 불과하다. 다른 절반은 바로 반유대주의다." "민족이론에서는 역사 전체가 생존공간을 놓고 벌이는 민족들의 지속적인 싸움이었다. 반유대주의 이론에서 우리는 갑자기 그것이 역사 전체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히틀러에 따르면 민족들의 싸움과 나란히 역사에서 또 다른 지속적인 내용이 있는데, 곧 인종 싸움으로서, 그것은 백인, 흑인, 황인종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이 아니라 백인종 내에서 벌어지는 싸움, 곧 '아리안'과 유대인 사이의 싸움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유대인과 다른 모든 종족들 사이의 싸움으로서, 그들은 보통 때는 끊임없이 서로 싸우다가도 유대인에 맞서서는 모조리 한편이 되는 것이다. 이 싸움은 말 그대로 목숨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으로, 멸종을 지향하는 싸움이다." "실제로 히틀러는 자신의 특성을 유대인 멸종자라 규정하고 특별히 독일 정치가가 아닌 전 인류의 선두에 서서 싸우는 자라고 주장했다."(140-2)


"히틀러의 정치체계에서 국가가 아주 하위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우리는 전혀 다른 맥락인 히틀러의 성과 부분에서 그가 정치가[국가의 사람]가 아니었다는 놀라운 사실에 부딪혔다. 그는 심지어 전쟁이 시작되기 오래전에 독일이라는 국가의 특성으로 보이는 것을 모조리 파괴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고, '국가 속의 국가들'이라는 혼돈으로 대체해버렸다. 이제 우리는 히틀러의 사고체계에서 이런 잘못된 행동의 이론적 근거를 보고 있다. 히틀러는 국가에 관심이 없었고, 국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국가를 하찮게 여겼다. 오직 민족과 종족만이 중요할 뿐 국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국가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으로, 한마디로 전쟁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히틀러에게도 1933~1939년의 기간 동안 전쟁 준비가 없을 수 없었지만, 그가 만들어낸 것은 전쟁 기계일 뿐 국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반드시 뒤탈이 있는 법이다."(147-8)


실수-잘못된 행동들


"유대인들은 해방된 이후로 모든 서방 국가에서 훌륭한 애국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유대인의 애국주의가 독일에서처럼 빛나고도 매우 감정적인 경우는 없었다. 유대인이 히틀러 이전까지는 독일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1933년에 이 모든 것이 끝났다. 히틀러는 독일에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순종적 사랑을 증오로 바꾸어놓았고, 또한 유대인 친구들에게 신의를 지킨 독일인들─분명 대다수는 아니지만 또한 가장 형편없는 계층도 아닌─까지 적으로 만들었다. 독일 안에서 히틀러 파동에 대해 수동적인 저항이나마 꾸준히 지속하게 만든 힘은 그의 반유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히틀러가 반유대주의로 자신의 권력욕에 처음부터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핸디캡─대외적 평판 하락이나 대규모 인재 유출 같은 현상들로 대표되는─을 불러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의 첫 번째 잘못이었다. 아직도 여전히 과소평가 되고 있는 잘못이다."(171-3)


"물론 여기에 다른 잘못들이 덧붙여진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처음부터 독일에 불러들인 폐해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두 번이나 자신의 목적에 매우 가까이 다가갔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1938년 가을에 영국과 프랑스의 완전한 동의를 받아 동유럽에서 독일의 패권이 인정되었을 때와, 1940년 여름에 프랑스에 대해 승리하고 또 다른 많은 나라들을 점령함으로써 러시아 이편의 유럽 대륙 거의 전체가 그의 발치에 놓였을 때였다." "〈나는 유럽의 마지막 기회였다〉고 히틀러는 1945년 2월 보어만 구술에서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다. 다만 그는 이렇게 덧붙여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기회를 망쳤다.〉 그 기회를 망친 것이 그의 두 번째 잘못이었다." "1938년 가을과 1940년 여름에 히틀러는 두 번이나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못 보았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집어던졌다. 이는 1941년에 러시아를 공격하고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뒷날의 잘못보다도 오히려 더욱 무거운 잘못이다."(173-7)


# 두 번의 잘못

1. 뮌헨 협정 위반(1938) : 체코슬로바키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후 분할하는 조치는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와 동맹을 맺도록 부추겼다.

2. 프랑스와의 동맹 무시(1940) :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맺어 유럽의 패권 국가로 우뚝 설 수 있는 정치적 기회를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기회를 손수 만들어내고 다시 없애버렸다." "그는 바로 이런 역사적 순간에 스스로 입증했듯이, 극히 드물게도 정치적 재능과 군사적 재능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그에게 완전히 결여된 것은 정치가의 건설적인 상상력, 곧 지속적인 것을 건설하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화조약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전에 국내에서 헌법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과 비슷하다.(평화조약은, 국가들의 공동체에서 헌법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확정 짓기를 꺼리는 것과 초조함이 그 걸림돌이었다. 이 두 가지는 그의 자기 경탄과 맥을 같이했다. 그는 스스로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자신의 '직관'을 맹목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그 직관을 속박할 어떤 제도도 만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자신을 대체할 수 없다고 여기고, 살아서 자신의 강령을 무조건 실현하려고 했기 때문에 자라는 데 시간이 필요한 그 무엇도 심지 못하고, 그 무엇도 후계자들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후계자를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185)


"설명할 길이 없는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의 동기를 찾으려면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히틀러 자신이 그 동기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5년에 히틀러는 정말로 독일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을 폭파하여 민족에게 살아남을 가능성을 남기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니까 이런 파괴를 통해 이 민족이 세계정복의 능력이 없음을 입증한 데 대한 벌을 내리려는 것이었다. (1941년, 러시아 전선에서 벌어진) 최초의 패배에서 벌써 이런 배신의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그런 생각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히틀러의 성격과 어울린다. 가장 극단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그의 성향, 그것도 '얼음처럼 차갑게' 그리고 '번개처럼 재빨리' 말이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히틀러는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로써 모스크바 앞의 전투를 통해 예고된 패배를 완전히 결정지었다. 그리고 1942년부터는 패배를 막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히틀러는 승리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195-7)


"히틀러가 이 기간에 점점 더 안으로 움츠러든 것도 특이한 일이다. 그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대중과의 접촉이 없고, 전선 방문도, 공습을 받는 도시를 둘러보는 일도, 공개연설도 거의 없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군 사령부에서만 살았다." "이 시기 그의 전략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단을 희생시킨 기묘한 결정처럼) 융통성이 없고, 기발한 발상도 없으며, 구호라면 오로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싸우고 있었고, 아직도 시간이 필요했다. 왜? 히틀러는 언제나 두 가지 목적을 가졌다. 독일이 유럽을 지배하는 것과 유대인을 멸종시키는 것. 첫째 목적은 실패했다. 이제 그는 두 번째 목적에 집중했다. 독일 군대가 그 길고도 희생적인, 아무 소용도 없이 질질 끄는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날마다 인간화물을 실은 기차들이 수용소로 달려갔다. 1942년 1월에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 명령이 나왔다."(197-8)


범죄


"히틀러는 통치자나 정복자로서만 잔인했던 것이 아니다. 히틀러에게서 특이한 점은 국가이성이 조금도 그럴 이유나 핑계를 주지 않는데도 상상할 수 없이 대규모로 사람을 죽였다는 점이다. 그렇다. (정치적 계산 능력보다 살인의 욕구가 더욱 강했던) 그의 대량학살은 정치적·군사적 이익에 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히틀러의 대량학살은 전쟁 때 행해졌지만, 절대로 전쟁 행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지만 언제나 개인적인 욕구이던 대량학살을 위한 핑계로 전쟁을 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나의 투쟁』에 이렇게 썼다. 〈전방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쓰러진다면 후방에서는 적어도 해충을 박멸할 수 있다.〉 히틀러에게 해충인 사람들의 박멸은, 전쟁을 통해 후방의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만 전쟁과 연관성이 있었다. 그 밖에 이런 박멸은 히틀러에게 자체 목적이지, 승리를 위한 또는 패배를 막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202-3)


"1942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에 전 세계에는 히틀러의 대량학살이 단순히 '전쟁범죄'가 아니라 순수한 범죄이고, 그것도 그때까지 들어보지 못한 규모로 이루어지는 범죄로서, 보통은 전쟁범죄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문명의 파국이라는 의식이 살아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의식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통해서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재판에서는 히틀러의 원래 범죄, 곧 폴란드와 러시아 사람들, 유대인들, 집시와 병자들에 대한 대량학살이 기소에서 부수적인 사항이 되었다. 대량학살은 강제노동 및 추방과 더불어 '인류에 대한 범죄'로 분류되었고, '평화에 대한 범죄', 곧 전쟁 자체와 '전쟁범죄'가 핵심적인 기소 내용이 되었다. 전쟁범죄란 '전쟁법과 전쟁관습의 위반'으로 정의되었다. 하지만 이런 위반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양측 모두에서 이루어졌고, 전쟁 자체란 승전국도 행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전쟁에서 졌다는 이유로 피고가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이라고 누구든 쉽게 말할 수 있었다."(204-5)


"어쩌면 누군가는 뉘른베르크에서 모든 전쟁이 아니라 오직 침략전쟁과 정복전쟁만을 범죄라고 낙인찍은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할지 모르겠다. 히틀러는 정복전쟁을 했고, 적어도 동쪽에서만은 아무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2차 대전에서는 '전쟁 책임'의 논란이 없다. 히틀러가 독일을 지배하는 대제국의 건설을 가까운 목적으로, 세계지배를 원대한 목적으로 삼아 이 전쟁을 계획하고 원하고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무조건 범죄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설사 인류는 오늘날의 기술전쟁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전쟁을 없애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워도 마찬가지다. 주권국가들의 세계에서 전쟁을 피할 길이 없다면, 이런 기술시대의 전쟁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되었다 해도,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은 인류의 현재 상황논리에 들어 있는 것이다." "결국 뉘른베르크의 시도처럼 전쟁을 범죄로 규정하는 일은 그것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 뿐이다."(208)


"히틀러의 특별한 범죄는 (전쟁의 불가피성을 전제하는) '전쟁법과 관습의 위반'이 아니며, 그러니까 뉘른베르크 제판에 이름을 준 '전쟁범죄'가 아니다[뉘른베르크 전범재판]." "2차 세계대전 후에 이런 지혜를 잊은 것은 승전국의 잘못이었다. 무엇보다도 히틀러의 범죄를 모든 전쟁에서 일어나는 전쟁범죄와 한통속으로 몰아붙이면서 그 범죄의 특별한 성격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히틀러의 대량학살은 전쟁범죄가 아니라는 점이 특징이다. 전투의 절박함과 열기 속에서 전쟁포로 죽이기,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인질을 총살하기, '전략적' 공중전에서 순수한 거주 지역에 대한 공습, 잠수함 전투에서 여객선과 중립적인 배들을 침몰시키기, 이 모든 것은 전쟁범죄이며, 분명 매우 끔찍한 것이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일반적 합의에 의해 양측에서 그냥 잊는 게 더 낫다. 하지만 대량학살, 전체 주민계층을 계획적으로 멸종시키려는 것, '해충박멸' 등을 사람에게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210-1)


"1942년 11월에 이중 의미로 많은 것을 드러내주는 유명한 히틀러의 발언이 나왔다. 〈나는 기본적으로 언제나 12시 5분에야 멈춘다〉는 말이다. 독일을 둘러싼 포위망이 점점 좁혀지던 이 시기에도 그가 사령부의 테이블 담화에서 아직도 여전히 쉽게 깨지지 않는 자기만족과 심지어 이따금 꽤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한 것은, 연합군이 매일 가까워지는 만큼 이제 남은 마지막 목적 실현에 다가가고 있음을 의식한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3년 동안 날마다 전 유럽에서 유대인 가족들은 자기들의 집이나 숨은 장소에서 끌려나와 동쪽으로 이송되어 벌거벗은 채로 죽음공장으로 밀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 소각장 굴뚝은 날마다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 마지막 3년 동안 히틀러는 지난 11년처럼 성공을 즐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포기하기는 쉬웠다. 그 대신에 전보다 더 많이 살인자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배려마저 버린 채 희생자를 손에 쥐고 멋대로 행동하는 살인자였다."(228-9)


배신


"1944년 8월 22일에 히틀러는 루덴도르프가 1918년 9월 29일에 행한 것과는 정확히 반대로 행동했다. 그는 '뇌우 작전'을 펼쳐서, 갑작스럽게 옛날 바이마르 공화국의 장관·시장·의원·당직자·정책담당 공무원 등을 체포하도록 했다. 그들 중에는 뒷날 연방공화국의 출범 시기에 주인공이 되는 콘라트 아데나우어와 쿠르트 슈마허 등도 끼어 있었다. 이들은 루덴도르프가 비슷한 상황에서 정부를 넘겨주고 전쟁의 청산을 맡긴 인물들로서, 이른바 독일의 정치적 예비군이었다. 루덴도르프는 피할 수 없는 패전에 직면하자 그들에게 지배권을 넘겼다. 히틀러는 비슷한 상황에서 그들을 배제했다." "이 조치는 히틀러 생각에 너무 일찍 이루어졌던 1918년의 전쟁 중단이 이번에도 되풀이되는 것을 반드시 막으려는 첫 번째 조치였다. 그 어떤 기회도 남김없이 쓰라린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기로, 그의 말대로 하자면 〈12시 5분까지〉 계속 싸우기로 결심한 상태였던 것이다."(238-9)


"1918년 11월이 다시 눈앞에 있었다. 히틀러는 이번에는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였다. 여기서 1918년의 시점에 아주 강렬했다가, 지금 다시 피어난 증오, 독일 '11월의 범죄자들'에 대한 증오, 곧 독일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보지 못한 채 넘어가서는 안 된다.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1918년 이후에 나온 어느 영국인 기자의 진술에 충심으로 동감한다며 인용하였다. 〈독일인 세 명 중 한 명이 배신자다.〉 이제 그는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분명하고도 정확한 생각을 표현하는 모든 독일인, 그리고 이 전쟁이 끝난 다음까지 살아남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내는 모든 독일인을 가차 없이 죽이려고 했다. 히틀러는 언제나 커다란 증오를 품고 있었고,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서 많은 기쁨을 느꼈다. 여러 해 동안 유대인, 폴란드인, 러시아인을 향해 분출하던 히틀러의 증오의 힘, 히틀러의 내면에 있는 살인충동은 이제 공개적으로 독일인을 향했다."(240-1)


"아르덴 공격은 2차 대전의 다른 어떤 기획보다도 더 많이 히틀러 자신의 작품이었는데, 군사적으로 보면 정신 나간 기획이었다. 공격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시 전쟁 기술의 조건으로 보아 적어도 3 대 1 정도로 전력이 우세해야 했다. 하지만 1944년 12월에 서부전선에서 힘의 상황은, 완전히 우세한 연합군의 공군력을 빼고 보아도 1 대 1에 못 미쳤다 약자가 강자를 공격한 것이다. 게다가 공격 지점에서 잠깐만이라도 우세하기 위해서 히틀러는 골격만 남기고 동부의 방어전선에서 병력을 몽땅 동원해야만 했는데, 당시 참모총장 구데리안이 러시아군이 강력한 공격을 해 올 것이라는 절망적인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 히틀러는 이중으로 큰 모험을 한 것이다. 서부전선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 나중에 제국 서부 지역의 방어를 위해 꼭 필요한 병력을 소진하는 것이고, 동시에 러시아군이 공격해 올 경우 동부전선은 방어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실제로 일어났다."(242-3)


"여기서 히틀러의 핵심 동기가 전혀 외교적인 것─서부전선에서 뜻밖의 극단적인 결전을 벌여 서방세력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어 타협을 강요한다. 그렇지 않다면 동부 전선에서 패배하게 될 것이고, 서방세력은 자기들의 몫이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이 아니라 국내 문제이고, 실제로 자기 나라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다고 추정하면 그의 사고방식은 훨씬 덜 복잡한 것이 된다. 국민의 다수와 히틀러 사이에는 1944년 가을에 이미 틈이 벌어져 있었다. 대다수 국민은 히틀러가 바라는 전망 없는 결전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1918년 가을과 같은 결말이 나기를 원했고, 이제 그만 끝나기를, 가능하면 온건한 결말, 그러니까 서부전선에서 끝나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러시아군을 밖에 묶어두고 서방세력을 들어오게 하는 것, 그것이 1944년 말에 대부분의 독일 국민이 속으로 바라던 결말이었다. 히틀러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었지만, 아르덴 공격으로 그것을 망쳐놓을 수가 있었다."(245)


"정말로 적군보다 더욱 잔인하게 파괴를 실행하는 것이 히틀러의 의도였다. 적군은, 적어도 서방의 적군은 〈도이치 민족이 가장 원시적인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반을······ 파괴〉하려는 목적을 갖지는 않았다. 그 결과 이제 빠른 속도로 진행된 적군의 점령은 적어도 서부에서는 압도적으로 구원으로 여겨져 환영을 받았고, 나치 국민을 만나리라 기대했던 미국·영국·프랑스군은 그와 달리 망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히틀러와는 아무 상관도 없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점령군은 당시 그것을 아첨하는 위장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정말로 총통에게 배신당했다고 느꼈고, 사실이 그랬다. 연합군이 이미 착수하고 있던 '재교육'은 마지막 몇 주 동안 히틀러가 강력한 방식으로 이미 완수해 놓았다. 독일인들이 이 마지막 몇 주 동안 겪은 것은 마치 그동안 함께 살아온 남편이 갑자기 살인자임이 드러나자, 사람들에게 남편을 물리치고 자기를 구해달라고 외치는 여자와 같았다."(250-1)


"히틀러는 독일 국민을 사랑했는가? 그는 독일을 찾아냈다. 알지 못한 채 선택했다. 엄격히 말해서 그는 독일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독일 국민은 그가 선택한 민족이었다. 그의 타고난 권력본능이 나침반 바늘처럼 그들을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가리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말로 그랬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권력의 도구로서 그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는 독일을 위해 원대한 야망을 가졌고, 그런 점에서 자기 세대의 독일 사람들과 마음이 맞았다. 당시 독일 사람들은 야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야망은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이 둘이 합쳐져서 히틀러에게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독일의 파괴는 히틀러가 자신에게 부과한 마지막 목적이었다. 그가 파괴하려던 다른 것들에서 그랬듯이 이것도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다. 그로써 그는 독일이 마지막에 자기에게 결별을 선언하도록, 그것도 생각보다 더 빨리 더욱 근본적으로 결별하도록 하였다."(25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독일인 이야기 - 회상 1914~1933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이유림 옮김 / 돌베개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롤로그Prolog


"독일에서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초등학생이었던 세대는 날마다 여러 나라들이 벌이는 거대하고 자극적이고 매혹적인 게임처럼 전쟁을 경험했다. 이는 평화가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신나고 극적인 만족감을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나치즘의 근본 비전이 되었다. 여기서 나치즘은 선전의 힘과 단순성, 판타지에의 호소, 활동 동기 등을 얻었다. 또한 내부의 적에 대한 편협함과 잔인함도 여기서 비롯했다. 이 놀이를 함께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숫제 '적'으로도 인정하지 않고 그저 흥이나 깨는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많은 것들이 나치즘을 강화하고 그 성격을 변하게 했다. 하지만 그 뿌리는 바로 여기, 독일 군인들의 '전선 경험'이 아니라 독일 학생들의 전쟁 경험에 있다." "전쟁을 현실로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대개 이를 다르게 평가하기 마련이다." "나치즘의 근간이 된 세대는 1900년에서 1910년 사이에 태어나 전쟁이라는 현실에 아무 영향도 받지 않고 이를 거대한 놀이로 경험한 사람들이다."(31-2)


"1918년 혁명은 나와 내 또래에게 전쟁과 정반대로 영향을 미쳤다. 전쟁은 우리의 실제적인 일상생활을 전혀 바꾸지 않아서 때로 지루할 지경이었지만 환상에는 마르지 않는 풍부한 재료를 제공했다. 혁명은 일상생활에 새로운 변화를 많이 가져왔고 이 변화는 매우 다채롭고 자극적이었지만 우리의 환상에 끼어들지는 않았다. 혁명은 전쟁과 달리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단순하고 분명하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혁명의 모든 위기, 혁명 과정에서 일어난 파업과 총성과 반란과 시위 행렬은 모순으로 가득하고 혼란스러웠다. 사실 정말 중요한 게 뭔지는 끝내 분명해지지 않았다." "혁명의 와중에 권력은 거리에 굴러다녔다. 그 권력을 집어 든 사람들 가운데 진정한 혁명가는 아주 드물었다." "진정한 혁명가들이 아마추어처럼 비조직적인 폭동을 연달아 일으키면 방해자들이 반혁명으로 맞섰다. 그들은 정부군으로 위장한 이른바 '자유군단'을 내세워 혁명을 몇 달 만에 피비린내 나게 진압했다."(44-6)


"혁명에 반대하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안정은 멀었다. 오히려 베를린에서는 3월에 혁명의 시체를 매장하고서야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뮌헨에서는 4월에야.) 베를린에서는 노스케가 원래 혁명을 지원했던 '인민해병대'를 적절한 절차 없이 해산하려고 하자 시가전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러나 결과는 처음부터 분명했고 승자의 복수는 잔혹했다. 1919년 봄 좌파 혁명이 형태를 갖추려고 헛힘을 쓸 때, 이후의 나치 혁명은 히틀러가 없었지만 이미 완성되어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때 에베르트와 노스케를 구해준 자유군단은 단원들의 구성, 특히 견해, 태도, 투쟁 방식에서 이후의 나치 돌격대와 그냥 똑같다. 그들은 이미 '도망치려다가 총에 맞았다'는 장치를 만들어냈고 고문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그리 많이 묻거나 가려내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적수까지 벽에 세워 총살함으로써 1934년 6월 30일을 예고했다. 실천을 뒷받침할 이론만 부족했다. 이론은 나중에 히틀러가 제공한다."(49-50)


# 1934년 6월 30일 : 에른스트 룀을 비롯한 정적, 정부 요인, 유대인을 학살한 '긴 칼의 밤'을 지칭한다.


"세계대전은 모든 민족이 다 경험했고, 혁명, 사회적 위기, 총파업, 부의 재편, 화폐 평가절하 등도 거의 다 경험했다. 하지만 어떤 민족도 1923년 독일에서처럼 이 모든 게 한꺼번에 터무니없이 극단적으로 치솟는 일은 경험하지 않았다. 돈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 기준이 사라져버린, 어마어마한 사육제謝肉祭의 행렬과 끝없는 피투성이 농신제農神祭는 어떤 민족도 경험한 적이 없다. 1923년을 겪고 난 다음 독일인은 꼭 나치즘이 아니라도 어떤 환상적인 모험에라도 뛰어들 준비를 마쳤다. 나치즘의 심리학적·정치학적 뿌리는 훨씬 더 깊이 내려간다. 하지만 나치즘의 광란적인 특징을 결정하는 것은 그때 이미 만들어졌다. 냉혹한 광기, 불가능한 것을 향해 오만할 만큼 거침없이 나가는 맹목적 결단력, '우리한테 유용한 것이 정당한 것이다'와 '불가능이란 없다'는 원칙, 1923년 같은 경험은 어떤 민족이 영혼의 상처 없이 치러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듯하다."(72)


"8월, 1달러는 100만 마르크에 이르렀다. 우리는 믿을 수 없는 기록이라도 들은 양 숨을 멈추고 말았다. 두 주일 뒤에는 이에 대해 웃었다. 달러가 100만 경계선에서 새로운 추진력이라도 얻었는지 속도를 열 배 높여 곧 1억, 이어 10억 마르크로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9월이 오자 100만 마르크는 아예 실제적인 가치가 없어지고 10억 마르크가 지불 단위가 되었다. 10월 말 지불 단위는 1조 마르크였다. 그러는 사이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제국은행이 지폐 발행을 중단했다." "8월 중순, 정부는 극렬한 거리 폭동으로 인해 허우적거렸다." "이제 우리는 국가가 멸망하길, 제국이 분해되길, 그러니까 우리 사생활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걸맞은, 끔찍한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라인란트가 변절했다, 바이에른이 변절했다, 황제가 돌아왔다, 프랑스군이 진군했다 등등 소문이 이토록 무성한 적이 없었다.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구분하기 어려웠다."(82-3)


"그러다가 정말 기대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지속적인 가치를 지닌' 돈이 다시 나올 것이라는 믿을 수 없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얼마 뒤 정말 새로운 화폐가 나왔다. '렌텐마르크'라고 적힌 작고 볼품없는 회녹색 지폐. 렌텐마르크로 처음 물건 값을 치를 때면 다들 약간 미심쩍은 마음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다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인은 그 돈을 실제로 받고 물건을 내주었다. 1조 마르크 가치가 있는 상품,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다음 날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믿을 수 없었다." "그 몇 주 전 슈트레제만이 총리 자리에 올랐다. 정치는 단박에 훨씬 평온해졌다. 이제 아무도 공화국이 무너질 거라고 수군대지 않았다. 온갖 '동맹'이 툴툴거리면서 겨울잠을 자려고 물러났다." "그랬다. 우리 세대가 독일에서 경험한 딱 한 번 뿐인 진정한 평화기가 시작되었다. 1924년부터 1929년까지 6년 동안 슈트레제만이 외무장관으로 독일 정치를 이끌었던 슈트레제만 시대."(85-8)


"1914년부터 1924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나이 든 세대는 자신의 이상과 확신을 의심하면서 소심해졌다. 반면 젊은이들은 공적인 소란, 센세이션, 무정부주의, 무책임한 숫자 놀음의 위험한 매혹밖에 아는 게 없었다. 공적인 긴장이 멈추고 사적인 자유가 돌아오자 그들은 이를 선물이라기보다는 박탈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저 이 모든 것을 자기가 본 것보다 더 커다란 규모로 직접 해보기만 기다렸다. 그러면서 모든 사적인 생활을 '지루하다' '부르주아적이다' '고리타분하다'고 치부했다. 대중은 무질서의 온갖 센세이션에도 익숙해졌다. 게다가 그들 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커다란 미신, 즉 그동안 맹목적이고 교조적으로 칭송해온 전지전능하신 성 마르크스의 마법적인 능력과 그가 예언한 역사 발전의 필연성에 대한 믿음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표면 아래에는, 거대한 재앙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곧 닥칠 재앙의 전조마저 이런 평화로운 풍경에 딱 어울리는 듯했다."(90-3)


"1930년 봄 브뤼닝이 공화국 총리 자리에 올랐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독일에 처음으로 엄격한 주인이 생긴 것이다." "배상금을 지불하는 게 불합리하다고 증명하기 위해 그는 은행이 문을 닫고 실업자 수가 600만까지 올라가는 등 독일 경제가 거의 무너지도록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국가 재정을 유지한다고 '허리띠를 더 졸라매라'는 엄격한 가장의 처방전을 가차 없이 적용했다." "브뤼닝은 이를 악물고 모든 고통스러운 결과를 감당했다. 외국 여행을 불가능하게 만든 '외환 관리'와 이민을 불가능하게 만든 '이민세', 나중에 히틀러의 효과적인 고문 도구에 속하게 된 것 가운데 많은 것을 브뤼닝이 도입했다. 더 나아가 언론 자유의 제한과 제국 의회의 억압도 그 시작은 브뤼닝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는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했다. 하지만 공화주의자들은 이런 일이 일어난 다음 과연 무엇을 더 지켜야 할지 묻기 시작했다."(110-1)


"브뤼닝에게는 진정한 추종자가 없었다. 그는 '묵인되었다.' 그는 차악이었다. 몹시 가학적인 고문 전문가에 맞서 학생들을 때리면서 〈내가 너희들보다 아프다〉라고 말하는 엄격한 교사였다. 사람들은 브뤼닝이 히틀러를 막을 딱 하나뿐인 보호막으로 보였기에 그를 감쌌다. 브뤼닝도 당연히 이를 알고 있었고 그가 정치적으로 생존하는 이유는 히틀러에 대항하는 한편 히틀러가 존재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절대 히틀러를 없앨 수 없었다. 브뤼닝은 히틀러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동시에 히틀러를 보존해야 했다. 히틀러는 실제 권력을 잡아서는 안 되지만 계속 위험하게 남아 있어야 했다. 브뤼닝은 2년 동안 이를 악물고 얼굴에는 미소를 띤 채 어려운 줄타기를 해냈는데, 이것만 해도 대단한 성취였다. 그가 균형을 잃는 순간이 오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럼 그다음엔? 브뤼닝의 시대에는 내내 이런 질문이 남았다. 그럼 그다음엔? 음울한 현재가 무시무시한 미래에 대한 전망 덕분에 가벼워 보이는 시대였다."(112)


"1932년 여름까지 점점 더 숨이 막혀가더니 브뤼닝이 갑자기 별다른 이유도 없이 실각하고 파펜-슐라이허의 막간극이 이어졌다. 아무도 정체를 모르는 귀족들이 정부를 세우더니 반년 동안 정치는 마치 헝가리 경기병들의 질주 같았다. 공화국이 무너지고 헌법이 효력을 잃고 제국 의회는 해산되었다가 다시 선출되기를 거듭했다. 신문은 금지되고 프로이센 정부는 떠나고 행정 기구 고위층은 모두 바뀌었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이 마치 흥미진진한 모험처럼 명랑한 분위기에서 일어났다." "그때 나치들은 어느새 최종적으로 허용된 제복을 입고 거리를 꽉 채우는가 하면 폭탄을 던지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그해 8월 사람들은 히틀러와 부총리 자리를 놓고 흥정하다가, 11월에는 파펜과 슐라이허가 갈라진 뒤 히틀러에게 총리 자리를 제안했다." "모든 진지한 장애물은 치워졌다. 헌법도 없고 법적 계약도 없고 공화국도 없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118-9)


혁명Die Revolution


"1933년 1월 30일, 아침신문 표제는 다음과 같았다. 〈공화국 대통령 히틀러 호출.〉 무력감에 짜증이 났다. 대통령은 지난해 8월에 이어 11월에도 히틀러를 불러서 각각 부총리와 총리 자리를 제안했다. 히틀러는 그때마다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었고, 그때마다 정부에서는 근엄하게 '절대 다시' 이런 시도를 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절대 다시' 하지 않겠다는 결의는 기껏해야 석 달 동안 유지되었다. 그때 이미 독일에서는 마치 오늘날 세계가 그러는 것처럼 히틀러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언제나 다시 점점 더 쉽게 제공하다 못해 숫제 강요하려는 병적인 욕망이 그의 적수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다." "점심 때 신문 표제는 〈히틀러 다시 지나친 요구〉였다. 사람들은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요구하지 않는다면 히틀러의 성정에 맞지도 않을 테지. 이렇게 다시 한 번 독배를 피할 수 있게 되는구나." "5시쯤 저녁신문이 나왔다. 〈민족주의자 중심 내각 구성, 총리 히틀러.〉"(134-5)


"1933년 2월 무렵 독일인들 대부분이 공산주의자가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는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이 문제를 너무나 간단히 접어버렸다는 것은 탓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처음으로 나치 시대 독일인들의 성격상 집단적 약점이 드러난다. 독일인들은 국회의사당이 불에 조금 그을렸다고 해서 헌법으로 보장된 개인적 자유와 기본권을 빼앗겨도 마치 당연한 것처럼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였다. 공산주의자들이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으니 정부가 '단호하게 대처'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음 날 나는 연수원 동료 몇 명과 함께 이 사건에 대해 토론했다." "내가 말했다. 〈어떤 공산주의자가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고 해서 내가 읽고 싶은 신문을 못 읽게 하다니, 이건 개인적인 모욕이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래요?〉 누군가가 가볍게, 악의 없이 대답했다. 〈아뇨, 왜 그래야 하죠? 지금까지 「전진」이나 「적기」를 읽으셨나요?〉"(151-2)


"혁명이란 무엇인가? 법률 전문가들은 헌법을 그 안에 규정된 것과 다른 방법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빈약하나마 이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1933년 3월 나치 '혁명'은 혁명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엄밀하게 '합법적으로', 헌법이 허용한 방법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눈속임이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찬찬히 살펴봐도 그해 3월에 일어난 일들이 정말 '혁명'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지 여전히 의심이 간다. (기존 질서와 그 수호자인 경찰, 군부 등을 타격하는) 혁명이 늘 감동적이고 장엄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참극, 폭력, 약탈, 살인, 방화 등이 함께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혁명가'이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용기를 보여주며 목숨을 걸기를 바라게 마련이다. 바리케이드는 시대에 조금 뒤떨어졌을지 모르지만 어떤 형식이든 자발성, 봉기, 헌신, 반란 등은 참된 혁명을 이루는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 보인다. 1933년 3월 혁명에는 그 가운데 단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154-5)


"네 가지 요소가 결합해 나치 정권이 세워졌다. 네 가지 요소란 테러, 축제와 장광설, 배반, 마지막으로 집단적 허탈 상태다. 집단적 허탈 상태란 수백만이 동시에 신경쇠약에 걸린 듯 정신을 놓은 상태다. 많은 나라, 사실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 태어날 때 이보다 더 많은 피를 흘렸다. 하지만 어떤 국가도 이토록 혐오스럽게 탄생하지는 않았다. 유럽 역사는 두 가지 형태의 테러가 있다. 하나는 고삐 풀린 혁명적 군중이 승리에 취했을 때 나타나는 걷잡을 수 없는 살의다. 다른 하나는 무적의 국가기구가 권력을 과시하며 위협하려고 냉혹하고 면밀하게 계획해서 일으키는 잔혹 행위다. 이 두 가지 테러는 대개 혁명과 억압으로 나눠진다. 첫째 테러는 혁명적이다. 순간적인 흥분과 분노, 도취 상태에 빠졌다는 데서 그 변명을 찾는다. 둘째 테러는 억압적이다. 혁명에서 일어난 만행을 보복한다는 데서 그 변명을 찾는다. 이 두 가지 테러를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방식으로 결합하는 게 나치의 몫이었다."(155-6)


"3월 말 나치는 이제 혁명적 활동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고 느꼈다. 혁명적 활동의 조심스런 첫걸음은 1933년 4월 1일부터 유대인에 대항해 불매동맹을 맺는 것, 즉 그들을 보이콧하는 일이었다." "이와 동시에 유대인에 대한 '계몽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사실 유대인은 '하류 인간'으로 일종의 동물인데 악마의 특성까지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널리 퍼진 두려움 너머 이상하고도 실망스러운 일이 있다면 이렇게 나치가 누군가를 살해하겠다는 의도를 공개적으로 밝힌 일이 독일 전체에 논쟁과 토론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반유대주의가 아니라, '유대인 문제'에 대해서. 이는 나치가 그때부터 다른 많은 '문제'에 대해서도 국제 무대에서 거듭 써먹어 성공한 수법이다. 한 나라든, 민족이든, 인종 집단이든 나치가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공공연하게 위협하면 갑자기 그게 일반적인 화제가 되었다. 그것도 협박을 받은 사람들이 과연 존재할 권리가 있는지를 문제 삼아 널리 토론했다."(172-4)


"모두들 갑자기 유대인에 대해서 나름대로 의견을 세우고 표명할 권리가 있다고 느꼈다. 더 나아가 반드시 표명해야 한다는 의무감까지 생겼다."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서 일하면 이를 범죄로 간주하거나 적어도 눈치가 없다고 평가하는 게 곧 일반적인 의견으로 인기를 끌었다. 유대인의 옹호자에게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유대인들은 뻔뻔스럽게도 의사, 변호사, 언론인 가운데 이렇게 높은 백분비를 차지한다고 항의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람들은 대체로 '유대인 문제'를 백분율 계산으로 다루기를 좋아했다. 공산당원 가운데 유대인 백분비가 너무 높지 않은지, 세계대전 전사자 가운데 유대인 백분비는 너무 낮지 않은지 조사하기도 했다.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스스로 지식인인 체하는 어떤 남자는 아주 진지하게 전체 유대인 가운데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사람은 12,000명 뿐인데, 이는 이에 상응하는 아리아인의 숫자에 비하면 너무 적다고 주장하면서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어느정도 정당화'하기도 했다.)"(175)


"(이 모든 일에 깃들어 있는 광기를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지만) 나치 정권 아래에서도 적어도 처음 몇 년 동안 일상생활은 겉보기에 전혀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영화관, 극장, 카페가 꽉꽉 들어차고 야외와 무도장에서는 쌍쌍이 춤을 추었다. 사람들이 평온하게 거리를 거닐고 젊은이들은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몸을 쭉 편 채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 나치도 이를 선전용으로 우려먹을 만큼 우려먹었다. 〈우리의 일상적이고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에 와서 보라. 유대인들까지도 얼마나 잘 지내는지 와서 보라.〉 광기, 공포와 긴장, '하루하루 이어지는 삶'과 죽음의 무도, 그 비밀스런 흐름은 물론 보이지 않았다. 마치 베를린 지하철역에서 〈수염을 잘 깎아서 기분 좋은 하루〉라는 카피가 달린 면도날 광고에서 활짝 웃고 있는 남자 얼굴을 보면서 그가 벌써 4년 전에 대역죄로 플뢰첸제 교도소 마당에서 머리가 잘린 그 남자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191)


작별Abschied


"그 무렵 내가 작별을 해야 했던 것이 대법원만은 아니었다. 작별은 모든 것을 관통하는 극단적인 좌우명이 되었다. 예외도 없었다. 내가 살던 세계가 날마다 자연스럽게, 소리를 내지 않고 녹아내리더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식적인 영역에서 눈에 띄게 일어나는 일이 거의 가장 무난한 일이었다. 그래, 정당이 사라졌다. 해산했다. 우선 좌파정당이 해산한 다음 우파정당도 해산했다. 나는 어느 정당의 당원도 아니었다. 대중이 그 이름을 말하고 그가 쓴 책을 읽고 그가 한 연설을 토론하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이민을 떠나기도 했고, 수용소에 들어가기도 했다." "더 불안한 것은 어쩐 일인지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던 별로 해를 끼칠 것 같지 않은 사람들까지 꽤 많이 사라진 것이다. 날마다 듣다보니 그 목소리가 마치 지인처럼 익숙해진 라디오방송 아나운서가 집단 수용소로 사라졌다. 그 이름을 들먹이는 사람까지 곤란해졌다! 여러 해 동안 우리와 동행하던 남녀 배우들도 갑자기 사라졌다."(241-2)


"(공산당원이던) 한스 오토는 어느 날 만신창이가 된 채 친위대 병영 마당에 누워 있었다. 체포된 다음 '잠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4층 창문에서 몸을 던졌다고 했다. 매주 악의 없는 해학으로 베를린 시민을 웃기던 신문 만화가가 자살했다." "5월에 상징적으로 책을 불태운 일은 신문 기사에 그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서점과 도서관에서 책들이 사라졌다. 좋든 나쁘든 현대 독일 문학이 완전히 지워졌다. 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나치가 참아주던 몇몇 작가들은 이제 볼링 핀처럼 허공에 홀로 서 있었다. 그 밖에는 고전이나 갑자기 솟아난 끔찍하고 부끄러운 수준의 혈통문학과 향토문학 뿐이었다." "많은 신문과 잡지가 신문 가게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거기 남아있는 신문과 잡지에 일어난 일이 더 이상했다. 정말 그 신문이나 잡지인지 도저히 다시 알아볼 수 없었다." "「베를리너 타게블라트」나 「포시셰 차이퉁」처럼 오랜 전통을 지닌 민주적·지성적 신문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나치 기관지로 탈바꿈했다."(242-4)


"1933년 여름 나치가 아니었던 독일인들은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을까?" "우월성이라는 유혹에 굴복한 사람들은 초기 나치 정책이 보여주던 초심자의 도락적 성격에 연연한다. 그들은 날이면 날마다 이 모든 게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쓴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처음에는 확신에 차서 평온하게, 시간이 지나면 자기를 속이려 애쓰면서 나치 정권은 반드시 몰락한다고 예언한다. 마침내 나치 정권이 자리를 잡고 성공했을 때, 그들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무장하지 못했고 허황한 통계에 따라 면밀하게 계산한 심리적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1935년부터 1938년까지 뒤늦게 나치에 복속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 집단에서 나왔다." "우스운 것은 언젠가 실망을 모두 맛본 다음 그들이 옳다고 증명되리라는 사실이다. 나치가 몰락한 다음 그들이 돌아다니면서 내 이럴 줄 알았다고 떠벌리는 모습이 선연하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들은 희비극적 인물로 남을 것이다."(249-50)


"둘째 유혹은 원한을 품는 것, 즉 피학적으로 증오와 고통과 한없는 비관주의에 자신을 넘겨주는 일이다. 이런 반응은 독일인들이 패배를 맞을 때 거의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반응이다. 즉 독일인은 누구나 (사생활이나 공공생활에서) 영영 포기해버리고 싶은, 무심하고 기진해서 자신과 세계를 기꺼이 악마에게 넘겨주고 싶은, 화가 나고 우울해서 도덕적으로 자살하고 싶은 유혹에 맞서 싸워야 한다. 모든 위로를 거부하다니! 아주 영웅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자세에 가장 유독하고 위험하고 악랄한 위로가 숨어 있는 걸 아무도 보지 못한다. 이렇게 마음껏 자기를 희생하면서 바그너적인 죽음과 몰락에 탐닉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패배를 패배로 받아들일 능력이 없는 패자에게 남은 가장 큰 위안이다. 아이가 인형을 잃어버리고 나서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서럽게 엉엉 울어대는 게 나치와의 전쟁에서 지고 난 다음 독일인의 기본자세가 되리라고 감히 말한다.(1918년 많은 독일인이 이미 이런 태도를 보였다.)"(250-1)


"셋째 유혹은 앞에서 나온 유혹에 굴복할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증오와 고뇌로 영혼이 망가지고 싶지는 않다. 선량하고 온유하고 친절하고 '착하게' 남아 있고 싶다. 하지만 날이면 날마다 증오와 고뇌를 블러일으키는 일이 몰려드는데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귀를 막고 숨어들 수밖에 없다. 이는 부드러운 것을 딱딱하게 만들어 결국 현실감각을 잃고 마는 다른 형태의 광기로 이어진다." "갑자기 다양한 전원문학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1934년에서 1938년까지 독일에서는 어린 시절의 회상록, 가족소설, 풍경 화보집, 전원시와 섬세하고 여린 소품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나왔다. 평범한 사람들은 물론 문학계에서도 이를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나치의 공공연한 선전문학을 빼면 거의 모든 책이 다 이런 분야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것도 시들해졌는데 아마 아무리 애를 써도 이런 문학에 필요한 무해함을 더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253-5)


"아니, 개인 생활로 물러나봤자 아무 소용 없었다. 어디로 물러나든 내가 피해 도망친 그것이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나치 혁명이 정치와 사생활의 오랜 분리를 없애버렸고, 나치 혁명을 단지 '정치적 사건'만으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혁명은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사생활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독가스처럼 벽을 통해 스며들었다. 이 독가스에서 벗어나려면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신체적으로 멀어지는 것, 이민이었다. 즉 내가 태어나 언어를 배우고 교육을 받은 나라, 게다가 애국이라는 연결 고리가 있는 나라에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우리가 독일과 작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독일이 독일로 남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 민족주의자들 스스로 독일을 망가뜨렸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서 자기 나라에서 떨어져 나가야 하는지를 두고 갈등했다. 그러나 비록 수많은 통용구와 상투적 표현으로 가려 있지만 진정한 갈등은 민족주의와 내 나라에 대한 충실함 사이에서 일어났다."(269-73)


"1933년 10월 13일 토요일, 독일이 군비축소회의와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날 저녁 히틀러가 연설을 마친 다음, 라디오에서 국가의 첫 소절이 흘러나오자 (사법연수생을 위한 훈련소에 있던 우리는) 모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몇몇은 나처럼 머뭇거렸다." "〈이건 중요하지 않아. 난 아니잖아. 이건 중요하지 않아〉 하는 느낌이 혀 위에 쓴맛처럼 남았다. 이런 느낌으로 나는 팔을 들어 올린 채 3분쯤 허공에 뻗고 서 있었다. 국가와 호르스트 베셀 노래가 딱 그만큼 오래 걸렸다. 거의 다 절도 있게 딱딱 끊어가며 쩌렁쩌렁 같이 불렀다. 나는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를 때 그러듯 입술을 조금 달싹이면서 같이 부르는 시늉만 했다. 하지만 모두 팔은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인형극을 공연하는 사람이 끈 달린 인형의 팔을 들어 올리듯 라디오가 우리 팔을 잡아당겼다. 눈이 없는 라디오 앞에 그렇게 서서 우리는 노래를 부르거나 부르는 척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른 사람의 비밀경찰이었다."(326)


"이런 '훈련소'에서도 의심할 나위 없이 행복이 피어난다. 동료애라는 행복이다." "동료애는 나치의 커다란 유혹 물질이자 미끼였다. 나치는 행복을 갈망하는 독일인들을 진전섬망증에 이를 때까지 동료애라는 알코올 속에 빠뜨렸다. 히틀러유겐트, 돌격대, 국방군, 수많은 훈련소와 연맹들을 통해 어디에서나 독일인을 동료로 만들었고 저항할 수 없는 나이에서부터 이런 마취제에 익숙해지게끔 했다." "동료애는 시민적인 의미에서든, 더 나쁜 종교적인 의미에서든 자기 스스로 책임진다는 느낌을 완전히 없애버린다." "'각자 자기를 위해서'라는 냉혹한 법칙이 아니라 '모두 한 사람을 위해서'라는 관대한 법칙 아래 살게 해준다." "더 나쁜 것은 동료애가 자기 자신과 신과 양심 앞에서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덜어낸다는 사실이다. 그는 동료들도 다 하는 일을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곰곰이 생각할 시간도 없다. 동료가 그의 양심이고 그는 동료들이 다 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용서받는다."(34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