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론 한길그레이트북스 136
로베르트 미헬스 지음, 김학이 옮김 / 한길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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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서문


"정치나 종교문제에 대하여 자신과 다른 의견을 들으면 심장이 요동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을 건드리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들과는 토론이 불가능하다. 심장이 요동치면 두뇌는 멈추기 때문이다." "사회학의 과제는 어떤 체계를 만드는 것이라기보다 통찰을 전달하는 데에 있고, 해결책을 발견하기보다는─개인과 집단의 삶을 둘러싼 많은 문제들은 그 어떤 해결책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넓은 의미에서 항상 '열려' 있다─어떤 한 경향과 그에 대한 반대 경향, 어떤 한 원인과 그에 대한 반대 원인, 간단히 말해 사회생활의 그물망을 가능한 한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도록 제시하는 데에 있다." "이 문제는 현재에 속한 현상이나, 현재에 인접한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이러한 연구에는 연구 대상의 윤곽을 뚜렷하게 해주고 실루엣의 테두리를 분명하게 해주는 시간적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모든 사실적 비판과 선의의 충고에 귀를 열어놓을 것이다."(27-32)


서론


"논리적으로 보자면 혁명은 근본적인 변혁, 즉 전복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혁명이란 개념을 반드시 어떤 특정한 계급에게만 국한시킬 필요도, 어떤 특정한 외적(外的) 폭력 형태에만 연관시킬 이유도 없다. 그 어느 계급이, 위로부터건 아래로부터건, 무력을 사용하건 합법적인 수단 혹은 경제적 방법을 사용하건, 기존의 국가 질서에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한, 그것은 혁명적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면, 혁명적-반동적(보수적인 것과 반대된다)이란 개념과 혁명-반혁명의 개념은 하나로 융합된다. 혁명적 전복과 반동적 전복의 차이점은, 혁명적 혁명가들은 어떤 새로운 것, 역사적으로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 혹은 최소한 자기 나라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목표들을 지향하는 데 반하여, 반동적 혁명가들은 역사적으로 이미 존재했었지만 이제 다시 달성되어야 하는 목표를 외관상 똑같은 방식으로 도달하려 한다는 점에 있을 뿐이다."(50-1)


"근대의 정당정치에서 귀족정은 민주주의의 형태를 띠는 반면, 민주주의는 귀족적인 내용으로 채워진다. 한쪽에는 민주주의의 형태를 띤 귀족정이, 다른 한쪽에는 귀족적인 내용을 담은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정당정치의 토대가 외면적으로 민주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에만 집중하다가는, 모든 정당이 귀족정,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두정으로 변형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과두적 경향을 밝히는 데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관찰 대상은 바로 민주적인 정당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사회혁명적인 노동자 정당들의 내부 구조이다. 보수적인 정당들은 선거 기간을 제외하면 과두적 경향을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연하다는 듯이 드러낸다. 이는 보수 정당의 성격이 원칙적으로 과두적이니만큼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혁명을 지향하는 정당들조차 보수 정당 못지 않게 과두적 경향을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데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 책의 대단히 중요한 소재이다."(61)


제1부 지도자의 형성


"조직 없는 민주주의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대중은 오로지 조직 속에서만 지속성을 얻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단 몇 마디만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계급'은 사회 전체에 대하여 특정한 요구들을 내걸고, 그 계급의 경제적 기능에서 도출된 이데올로기와 '이상들'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 이를 위해 계급은 경제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도 전체의 의사를 결집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유일한 수단은 조직이다. 조직은 가능한 한 최소한의 힘을 소비한다는 최소비용의 원칙에 입각하며, 동일한 이해관계에 따른 연대(連帶)에 기반한다. 그러므로 조직은 약자가 강자에 대항하는 투쟁에 동원할 수 있는 최적의 무기이다." "그리하여 조직의 메커니즘은 견고한 구조를 창출함으로써 조직화된 대중을 심대하게 변화시킨다. 그리고 조직은 대중과 지도자의 관계를 역전시킨다. 조직은 정당과 노동조합을, 지도하는 소수와 추종하는 다수로 이분(二分)시키는 것이다."(77-9)


"대중을 지배하기란 소수를 지배하는 것보다 용이한 법이다. 왜냐하면 대중의 동의는 폭발적이고 불가항력적이며 무조건적이고, 그들이 일단 어느 한쪽으로 쏠리게 되면 그에 저항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민집회는 어떤 주제에 대하여 진지한 견해를 개진하고 논의하거나 세세하게 다루는 곳이 아니다. 작은 모임에서는 이성적인 토론이 가능하지만, 거대 집단이 한곳에 모이면 갑작스러운 공포와 무의미한 환호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우리는 선발된 대의원들이 모인 전당대회에서 결의안이 구두(口頭) 환호나 표결을 통하여 일괄적으로 통과되곤 한다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그때 통과된 결의안들은 대의원이 50명씩 모인 곳에서는 그리 쉽게 통과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혼자 있거나 몇몇이 모여 있을 때보다 대중으로 있을 때, 말과 행동에서 논리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대중병리적 현상이다. 다수는 개인을 소멸시키고, 개성과 책임감을 마모시킨다."(82-3)


"근대 정당은, 정당이란 단어의 정치적 의미에서 '전쟁 조직'이다. 정당이 준수해야 하는 전술학의 기본 법칙은 전투 태세이다. 사민당을 창당한 페르디난트 라살은 자신의 독재적 지위가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당원이란 지도자를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지도자의 손에 들린 망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앙집권은 예나 지금이나 결정의 신속성을 보장한다. 대규모 조직은 그 자체로 둔중한 기구이다. 만일 대중 정당이 신속한 결정이 요청되는 일상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대중으로 하여금 제한적이나마 일정한 판단력을 갖추도록 조치해가면서 당을 운영한다면, 시간적 손실과 공간적 거리 때문에 순수한 형태의 민주주의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러한 당 운영은 결정을 지연시키고 호기를 놓치게 만들 것이며, 정당에 필수적인 정치적 유연성과 타 정당과의 연대 능력을 손상시킬 것이다. 전쟁을 치르는 근대 정당에서는 따라서 엄격한 위계질서가 불가피하다."(94-5)


"근대 정당이 일상적인 투쟁에서 명령의 신속한 전달과 정확한 이행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카이사르주의가 필수적이다. 네덜란드의 사회주의자 반 콜은, 진정한 정당 민주주의는 투쟁이 종결된 뒤에나 가능하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심지어 일시적으로는 전제주의(Despotismus)가 요청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자유는 신속한 실천력에 굴복하여야 하고, 대중이 소수의 의지에 종속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최고 덕목이다." "반 콜의 발상 속에는 근대 정당의 요체가 들어 있다. 민주주의는 투쟁하는 정당의 '일상생활용품'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전투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당에게 필요한 것은 '동작을 둔하게 만들지 않는 가벼운 무장'이다. 앞으로 더 설명하겠지만, 정당이 인민투표와 같은 민주주의를 위한 예방 조치들을 적대시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고, 정당에게 카이사르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단히 중앙집권적이고 과두적인 위계 질서가 필요한 이유도 마찬가지이다."(95-6)


"지도체제는 강제적이지만, 선거체제는 그렇지 않다. 선거는 참여의 의무가 아니라 권리에 기반한다. 그리고 선거의 권리가 선거의 의무로 대체되지 않는 한, 다수가 자발적으로 포기해버린 권리를 소수가 이용하여 무관심한 대중에게 법을 강요할 가능성이 항존한다. 따라서 민주 정당 대부분의 참여 활동은 사다리꼴이다. 가장 낮은 곳은 지역 유권자들이 점하고, 그 위에는 유권자의 10분의 1에서부터 30분의 1 정도에 불과한 지구당 당원들이 존재하며, 그 윗자리는 다시 훨씬 더 적은 수의 정기적인 총회 참석자들이 차지한다. 그 위에 당 관리들이 자리잡고, 마지막의 최상층에는 당 관리들과 빈번한 사적 접촉을 나누는 대여섯 명의 당 수뇌부가 위치한다. 그리고 당의 결정권 및 통제권은 수와 반비례한다." "다수는 자신을 대신하는 소수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소수의 지도를 받고자 하는 대중의 욕구는 곧잘 영웅 숭배로 연결되고, 그 욕구는 조직화된 노동자 정당에서도 한계를 모른다."(107-8)


"대중은 개인숭배에 대한 강력한 충동을 갖는다. 대중의 원초적 이상주의는, 혹독한 일상의 삶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면 할수록 더욱 맹목적으로 매달릴 세속의 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버나드 쇼가 귀족정은 우상의 집합인 반면 민주정은 우상 숭배자의 집합이라고, 그 특유의 역설로 꼬집은 데는 진리의 일단이 들어 있다. 물론 당원 대중이 때때로, 흑인들이 물신(物神)을 두들겨 패듯 자신들의 우상을 팽개치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때에도 대중은 내동댕이친 우상을 다시 세워놓는 물신숭배자의 심리에 따른다." "게다가 숭배는 숭배 받는 사람을 과대망상증 환자로 만들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턱없이 오만한 대중 지도자를 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지도자의 오만한 자기 현시는 대중에게 암시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그에 따라 대중의 경외감은 더욱 고조되고, 그 과정 속에서 지도자의 자기 현시 그 자체가 지배 권력의 중추가 된다."(120-9)


"정당 제도의 근대적 발전과 더불어 조직의 형태가 고정되면 될수록, 임시직 지도자들은 직업적 지도자들로 대체된다." "대중은 항시적으로 자신들을 대표하고 자신들의 일을 처리해주는 소수의 개인들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것이다." "그와 함께 민주적 통제를 받는 영역이 점점 감소한다." "그리하여 복잡한 구조를 갖춘 거대 조직이 나타나고, 분업의 논리에 의하여 관할 영역이 분화되고, 분화된 영역이 다시 한 번 세분화된다. 그리하여 결국 모든 것을 포괄하면서도 각 기관의 업무가 엄격하게 구분된 관료제가 형성된다. 당무 교리문답의 제1조 역시, 업무의 전달 경로를 정확하게 준수하는 것이 되고, 당의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던 모든 노력은 당의 계서화(階序化)로 귀결된다. 당의 계서화는 당이 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다. 정당 조직의 과두제적이고 관료적인 경향은 따라서 실천적인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조직의 원칙 그 자체의 필연적인 산물이다."(142-3)


"(대중이) 접근하기 힘든 업무를 담당하는 지도자는 불가결한 지위에 도달한다. 전문성 덕분에 지도자는 당원들의 우위에 올라서고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격상되는 것이다. 지도자들의 전문성은, 그들이 의원으로서 습득하게 되는 경험과 사회적 지식, 특히 의회 상임위원회에서 획득하는 전문 지식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의회 상임위원회는 의회 안의 과두제, 다시 말해 의회라는 과두제 안의 또 하나의 과두제의 출발점이자 중추이다." "각종의 정당 집회에서 특정 사안에 대한 담당자나 발제위원 혹은 전문가로서 등장하는 그 사람들, 다시 말해 해당 사안을 철저하게 꿰뚫고 있고, 너무도 간단하고 뻔한 문제조차 적절하게 삭제하고 변경하고 전문용어를 구사함으로써 오로지 자신들만이 해명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문제로 둔갑시키는 그 사람들은, 이론적으로는 대중의 대표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느덧 대중이 정신적으로 결코 접근할 수 없고 기술적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존재들이 되는 것이다."(148-9)


"사실 지도자 권력의 가장 견고한 기반은 바로 대중의 무능이다." "모든 관리 업무, 다시 말해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권위가 요구되는 모든 전술적·행정적 사안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독재', 즉 민주주의 원칙으로부터의 이탈이 필수적이다.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악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인 필요악이다. 사회민주주의란 모든 것을 인민을 '통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인민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결정적인 것은 지도자의 선의와 통찰력이다. 머릿수에 의해 결정되는 다수결은 단지 가장 일반적인 원칙을 제정할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 전술적으로 중요한 모든 사항은 지도자가 결정한다. 이는 소수가 전체 당의 이름으로 정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투쟁 정당이다. 민주주의는 목표일 뿐 수단이 아니다."(151-4)


제2부 지도자 권력의 사실적 특징


"관료제는 본질적으로 분업에 기초한다. 분업이 지배적인 곳에서는 기능의 세분화, 전문화, 독점화가 두드러진다. 특히 프로이센-독일처럼 당이 경찰과 행정 관료와 형법으로부터 억압을 받는 곳에서는, 억압의 암초를 피해가면서 당을 안전하게 이끌고 갈 노련한 조타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당은 당의 발전을 조심스럽게 보존함으로써 어느 정도나마 항구성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계기도 있다. 노동운동은 정치적 노동운동이든 경제적 노동운동이든 상관없이, 국가 행정 관리들이 그렇듯이 관리직의 재직 기간이 어느 정도 길어야 한다. 노동운동 지도자가 훌륭한 공무원처럼 업무에 정통하게 되기까지는, 업무에 익숙해질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연속성이 부재하는) 순수 민주주의에는 주권 대중의 이의(異意)로 인한 결단력 부족과 안정성의 부재, 한마디로 말해 '영원히 변화하는 민주주의'라는 문제점이 있다. 정당은 이를 피하려고 노력한다."(169-71)


"당원의 결속력과 지속성은 부분적으로 당 조직의 견고성과 재정 능력에 의존한다. 정당이 직원들에게 비록 월등한 수준은 아니라 할지라도 만족할 만한 정도의 급여를 지불하면, 당에는 당원들이 쉽게 끊을 수 없는 끈이 만들어진다. 독일 사민당 당직자들이 파렴치한 외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던 것은, 독일 사회주의 운동이 당에 대한 봉사를 현금으로 보상한다는 원칙을 정립하였기 때문이다. 그 원칙은 동시에 당 관료제와 당의 중앙 권력을 강화한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등의 사회주의자들이 부분적으로는 오늘날까지도 자발적 봉사에 의존하는 (말과 글의) 선동 활동을 전개하는 데 반하여, 독일 사민당은 언론과 농촌에 대한 선동 등 모든 선동 활동에 보수를 지급하고 있다. 전자에서는 개인적인 협조, 희생정신, 활력, 열광 등이 동기로 작용하지만, 후자에서는 금전적인 보수를 배경으로 하는 규율, 지조, 의무감이 동인(動因)으로 작용한다."(188-9)


"아울러 노동운동 지도자들에게 낮은 급여를 제공하는 것, 특히 노동조합 운동의 유소년기에는 때때로 의식적으로까지 적용되었던 그 방식이 업무 태만을 막을 만한 적절한 안전 장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동안 입증되었다. 인간 대부분은 이상주의만으로 의무 이행에 최선을 다하지는 않는다. 열광은 장기적으로 창고에 저장해놓을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관리에게 적절한 보수를 지급하는 것은 또 다른 두 가지 이유에서도 필수적이다. 첫째는 사회주의적 도덕 때문이다. 어떤 노동이든, 노동에 대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원칙이 그것이다. 노동의 사회적 가치에 합당하지 않게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를 빌리자면 착취이다. 두 번째는 현실정치적인 이유이다. 지도자에게 적은 보수를 준다는 원칙은, 모든 것을 지도자의 이상주의에 거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보수가 낮으면 부패와 사회적 타락이 생긴다."(197-8)


"언론은 지도자가 대중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하고, 보존하고, 강화하는 강력한 무기이다. 언론은 물론, 유명한 선동 정치가가 집회 연설을 통하여 청중에게 행사하는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언론이 발휘하는 영향력의 범위는 훨씬 더 넓고, 쓰인 언어는 말해진 언어보다 더 멀리 전달된다. 그러므로 언론은 지도자 개인의 명성을 대중에게 알리고, 그의 명성을 증폭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수단이다. 노동조합과 정당의 기관지는 언제나 지도자에 대한 찬사로 채워진다. 〈사심 없는 희생〉이나 〈냉철한 지성과 강인한 인내력을 갖춘 뜨거운 이상주의〉와 같은 찬사들은 마치 그것만으로도 강력한 노동자 조직을 제련해낼 수 있는 것처럼 기관지의 지면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이런 아첨은 원래 부르주아지의 것이었다." "그리고 지도자로의 상승을 열망하는 사람이 언론에 자기 이름을 싣는 것은, 대중에게 자신을 알리고 친숙하게 함으로써 더 높은 직책으로 상승하는 방법이기도 하다."(199-201)


"정당의 관료제가 강화되면 사회주의 이념의 근본적인 두 가지 요소, 즉 원대한 이상주의적 사회주의 문화에 대한 헌신과 국제적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약화된다. 이제 문제는 이념이 아니라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국내에 선동과 조직 활동의 문이 열리게 되자, 사회주의자들의 머리는 불멸의 원칙들 대신 일상적인 정당활동의 요건들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전문적인 지식을 얻지만, 시야의 너비와 무게를 잃는다. 그들이 산재보험법과 퇴역보험법에서 저주스럽고 교활한 술수를 가려낼 수 있게 되면 될수록, 그리고 그들이 공장감독법, 영업재판소, 소비조합 점포의 두루마리 상표, 도시 가스 등의 가스 사용량 등등의 특수 문제들을 꿀벌의 성실성으로 파악하게 되면 될수록, 그만큼 그들은 노동운동의 의미를 협소한 의미에서조차 견지하기 힘들어 하게 된다." "그처럼 사물의 근본을 꿰뚫는 '폭넓은' 사고를 상실하고 전문성 속에 함몰되는 경향은 근대적 발전 경향 그 자체이다."(247-8)


"지도자들이 최소한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의 이론적 주인인 대중의 의지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때로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의 허약하고 통속적인 본성을 이용한 선동정치일 뿐이다. 선동가들은 대중의 의지에 아첨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대중을 앙양하고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대신, 마치 대중의 노예가 되어 대중 발끝에 엎드리는 것 이외에 그 어떤 야심도 없는 양 연극을 선보이면서, 실제로는 대중에게 멍에를 씌우고 대중의 이름으로 지배하려는 자들이다. 그들 중에서 보다 솔직하고 보다 윤리적인 자들의 성공 비결은, 〈자신들이 숙고하여 작성하고 실천한 계획에 대중의 강력하고 맹목적이며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을 짜맞출 수 있었다〉는 것뿐이다." "그의 복종은 그저 잠정적이고 유보적인 것에 불과하다." "부정(不貞)한 자는 걱정을 하고, 강력한 자는 거스른다. 그러나 지배하는 자는 선동가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민의 위탁을 팽개치거나 겉으로만 수행하는 척하면서, 뒤에서 지배한다."(265-6)


"민주주의에서 출현한 과두제의 존립을 위협하는 두 개의 적대적인 힘이 있다. 첫째는 대중의 민주주의적 저항이고, 둘째는 그와 관련되면서 그 결과이기도 한 군주정으로의 이행이다. 군주정의 성립은 과두 정치가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위험은 아래와 옆으로부터 오는 셈이다. 한쪽은 봉기이고, 다른 쪽은 찬탈이다. 따라서 근대의 모든 국민정당에는 진정한 동료애, 즉 인간적인 신뢰의 결핍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잠재적인 투쟁 상태,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린, 지도자들 간의 상호 불신에서 비롯된 흥분된 대치상태가 나타난다." "시칠리아의 몇몇 도시에서는 정당들이 뒤엉켜 싸우는 것을 놓고 부유한 사람들과 부유하게 된 사람들 간의 투쟁이라고 조소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귀족(과 지주)과 졸부(상인, 공공사업 업자, 공장주 등)의 투쟁인 것이다. 근대 민주 정당에서도 금전적인 측면은 없지만, 그와 비슷한 투쟁이 벌어진다."(269-70)


"기존 지도자에 대하여 지도자 후보가 반기를 드는 것은, 정당 조직 그 자체와 체제로서의 지도자 지배에게 위험한 것이 아니다. 현재의 혁명가는 장래의 반동이다. 우리는 지도권을 둘러싼 투쟁의 복잡다단한 양상 속에서 다음과 같은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국제 노동운동사는 연륜이 비교적 짧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근대 사회계급의 역사보다 거만하고 권위적인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근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는 자기편에게 버림받아 쓰러지고 먼지 속으로 사라져간 용병 대장들의 사례들을 전해준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드물다. 대중이 지도자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입증한 사례는 극히 드문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지도자들과 갈등에 빠져든 새로운 지도자가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힘있는 자로 거듭나는 경우, 즉 새로운 지도자가 기존의 지도자를 끌어내리고 그를 대체하는 데에 성공하는 경우가 통상적이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민주주의가 거둔 성취는 신속하게 무로 돌아가고 만다."(283-4)


제3부 대중 지도의 심리적 영향


"대중은 지도를 욕구하지만 지도권에 무관심한 것과 대조적으로, 지도자에게는 타고난 권력욕이 있다. 그리하여 조직의 기술적 논리 때문에 발생한 과두 민주주의는 권력욕이라는 지도자의 보편적인 인성에 의하여 더욱 강화된다. 조직, 관리, 전략의 필요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심리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바이지만,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적어도 경력 초기에는 자신이 대변하는 원칙을 확신한다. 르 봉의 말은 아주 적절하다. 〈지도자는 처음에 대체로 일개 추종자에 불과하다. 그러다가 그는 스스로 사도가 되려는 마음을 품는다.〉 지도자는 대중으로부터 나오고, 대중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의 본능적인 행위가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 채, 또 그 어떤 개인적인 속셈도 품지 않은 상태에서 부지불식간에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 확고한 당 조직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장차 지도자가 되기 위한 첫 단계를 밟기 위해서는 그 지도자의 개인적인 열의가 전제되어야 한다."(287-8)


"시간이 경과하면서 지도자들에게 나타나는 심리적인 변화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다. 대중의 지휘관이 된 사람 모두가 과거 한때, 지휘관이 되기를 꿈꾸었던 사람인 것은 아니다. 프랑스 격언에도 있지 않은가. 〈성공한 사람 모두가 출세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사실 지도자가 되려는 분명한 의식적, 무의식적 의지를 가지고 입당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은 그저 희생 정신과 투쟁 정신, 혹은 기존의 관계 및 그 책임자들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운동에 참여한다. 그들은 이상주의자답게 모든 당원들을 형제로 간주하고, 모든 당 집회를 이상으로 가는 도정의 정거장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운동의 와중에 천부적인 혹은 습득된 능력 때문에 지도자가 된다. 그렇게 하여 일단 지도자로 올라선 사람은 결코 정치적 지위가 낮았던 과거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모든 권력 의식은 과대망상을 부여한다." "권력은 권력을 장악한 자의 인간적 성격까지 변화시킨다."(292-3)


"황제로서의 공적 활동에서 나폴레옹 1세는 자신의 권력이 오로지 프랑스 인민의 의지에서 비롯되었음을 과시하였다. 이집트에서의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명성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그는 종전까지 입법부 의원들에게만 주어지던 인민의 제1대표라는 칭호를 자신에게 수여하여야 할 것이라고 명령조로 요구하였다. 그리고 인민투표에 의하여 황제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권력이 오로지 인민 대중에 근거한다고 선언하였다. 인민에 의하여 헌법적으로 승인된 일인독재, 이것이 바로 인민주권에 대한 보나파르트주의적 해석이다." "보나파르트주의는 전체의지에서 기원하였으되 그 기원으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 주인이 된 개별의지에 대한 이론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독재가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선거로 선출된 독재자에게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인민 다수의 의지를 구현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 반대하는 것은 모두 비민주적이 된다."(298-301)


"근대의 민주적인 혁명 정당들과 노동조합의 역사는 보나파르트주의와 유사한 면모들을 드러낸다. 원인은 자명하다. 보나파르트주의가 성공할 수 있는 곳은 언제나 민주적 대중이 존재하는 곳이다. 따라서 정부의 적대자는 항상 인민주권에 의거하여 분쇄된다. 왜냐하면 보나파르트주의는 대중에게 자신들이 지배자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인민 대중의 권력 위임이 마치 인민이 법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고 투쟁한 것인 양 나타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서는 권력 위임을 통한 인민의 주권 포기가, 보기 싫은 정통 세습 군주정처럼 형이상학적인 신(神)의 도움이 아니라 인민의 의지를 통하여 적법하게 이루어진다. 따라서 선출된 국가 수반은 대중의 자유로운 의지 행위, 즉 대중의 자의적 행위를 통하여 출현한 대중의 창조물이다. 이는 대중 개개인에게 자족감을 안겨준다. 〈내가 그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으면, 그는 지금의 그가 되지 못했을 거야.〉 〈내가 그를 뽑았어.〉"(302-4)


제4부 지도자에 대한 사회적 분석


"억압상태가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이 그것을 '의식'하는 것이 계급투쟁의 역사의 동인(動因)이다. 따라서 근대 프롤레타리아트가 즉자적(卽者的)이고 대자적(對者的)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사회문제'가 대두하지 않는다. 계급투쟁이 혼몽한 잠복 상태에서 영원히 머무르지 않기 위하여 필요한 토대는 계급의식이다. 이것이야말로 계급투쟁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자신들을 짓누르는 억압을 처음에는 본능적으로만 감지한다. 교육을 받지 못한 그들로서는 미궁과도 같이 어지러운 세계사의 방향을 결코 통찰할 수 없다. 심리적 역사법칙이라고 간주할 만한 것이 있다. 오랜 문화적 소외와 권리의 박탈로 인하여 쇠잔해지고 스스로에게 절망해버린 계층과 계급은, 자신의 계급 동지 외에 '상위'(上位)─이 기계적인 단어를 계속 쓰자면─계급이 함께 말할 때 비로소 강력한 행동을 취하기 위하여 몸을 일으킨다는 것이다."(320-2)


"사회주의 이론은 철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 등 지식인들의 저술에서 나온 것이다. 수많은 사회주의 강령에서 지식인의 언어가 아닌 단어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사회주의의 태두들은 몇몇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일차적으로 지식인들이었다.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가들은 이차적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자발적인 프롤레타리아트적(proletaroid) 운동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정신적, 경제적 생활수준의 개선을 선망하던 본능적 움직이었을 뿐이다. 그것은 저주스러운 현실의 객관적 원인을 인식한 인간의 행위였다기보다, 현실에서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불만들을 기계적으로 분출해버리는 운동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적' 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바뀌고, 무의식적이고 무목적적이며 본능적인 반란이 비교적 분명하고 명시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전환한 것은 노동자들에게 지식이 결부되었던 때였다."(322-3)


"우리는 '부르주아지의 자식들' 중에 사회주의의 이념을 받아들임은 물론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다 못해, 자신의 깨달음이 지시하는 대로 인간 해방의 목표에 자신의 삶을 조건 없이 바치기 위하여 친구, 친척, 부모, 사회적 지위, 사회적 명예 등을 포기해버린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초년생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생업에 전적으로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이 속하는 계급 자체는 그들의 이탈에서 별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전체로서의 계급은 결코 특권적인 지위를 자진해서 내놓지 않는다. 왜냐하면 계급은 '가련한 형제'를 위하여 퇴장해야 할 만한 그 어떤 도덕적 동기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계급 이기주의'가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 역시 계급 이기주의를 갖는다. 그러나 역사적인 이유로 인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특수한 계급이해는 궁극적으로─적어도 이념에서는─인류의 무계급 이상(理想)과 일치한다."(332)


"많은 젊은 부르주아지들이 가슴속에 선한 의지의 지순한 불꽃을 품고 갈채와 명예와 돈을 도외시한 채 사회주의에 뛰어든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은 자신의 양심을 평화롭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의 내적 확신을 외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발걸음을 내디디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 외에 다른 부류의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도 있다. 즉 개인적으로 불만이 있는 사람, 야심가, 성격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신경쇠약자 등이 그들이다. 국가의 권위를, 그것을 장악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혐오하는 사람은 많다. 이는 높이 매달린 포도와 여우에 관한 우화와도 같은 것이다. 그 우화는 시기심과 만족되지 못한 지배욕을 나타낸다. 이것은 대가족 속에서 자라난 어느 가난한 방계(傍系) 출신의 후손이 부유하고 권세 있는 사촌에 대해 느끼는 증오와 질투이며, 귀족적인 로마에서 둘째가 되느니 차라리 프롤레타리아트적인 갈리아에서 첫째가 되려는 자존심이다."(348-50)


"계급투쟁은 계급투쟁에 봉사하는 기구들을 창출한다. 문제는 그 기구들이 정당 내부에 사회적인 변화와 변형을 일으킨다는 데 있다. 그 기구들을 통하여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수적으로는 아주 적지만 질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한 일부가 낮은 지위로부터 벗어나 점차 부르주아 계급으로 이동한다." "일찍이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일부의 지혜롭고 야심적인 노동자들은 강철과 같이 근면하고 주어진 기회를 영리하게 이용하는 데다가 행운의 도움까지 받아서 기업가로 상승하였다." "오늘날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기계적인 손놀림만을 요구하는 단순하고 협소한 대공장에서 자신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과거에는 '노동'이 제공해주던 사회적 상승의 가능성을 이제는 근대적인 '노동운동' 속에서 찾고 또 발견한다. 노동운동은 그들에게 새로운 생계 수단과 높은 생활수준을 제공하고, 사회적 상승의 사다리까지 되어준다. 그리고 그 기회는 조직의 성장과 더불어 증가한다."(367-9)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의 '육체'노동으로부터 '정신'노동으로의 전환은 자신의 존재 전체를 포괄하는 폭넓은 변신 과정으로 연결된다. 해당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트에서 이탈하여 점차 소시민에 편입되는 것이다. 우선은 다만 직업적, 경제적으로만 그러하다." "정당이나 노조의 관리직이 노동자를 곧장 자본가로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노동계급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는 했기 때문에, 〈상승한 노동자〉(gehobene arbeiterexistenz)라는 사회학적으로 적절한 용어가 생겨난 것이다." "그들은 비록 노동 대중과 지속적으로 접촉하지만, 그들에게는 심리적 변화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우리가 언급한 경제적 변화를 넘어선다. '생활수준이 상승한 노동자'가 언제나 새로운 환경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도덕적 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사회정치적 교양 수준이 그를 변화된 생활수준으로부터 보호할 만큼 높은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의 계급적 순수성과 이념적 통일성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373-5)


"설령 탈프롤레타리아트화된 사회주의자 스스로가 사민당 신문 편집인이나 의회 의원으로 명예롭게 늙어가면서 노동해방의 진정한 투사로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그 자녀들, 즉 딸뿐만 아니라 아들 역시 아버지의 사회적 상승이 그들에게 가져다준 새로운 계급으로 살아간다. 이는 물질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념적으로도 새로운 계급에 곧바로 동화된다. 예컨대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새로운 계급 출신과 결혼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노동계급을 연결해주던 유일한 연결 고리였던 공통의 정치-사회적 이념에 대한 믿음은 자식들에 이르러서는 정치적 무관심으로 바뀌어버린다. 요컨대 노동자를 가족 단위로 고찰하면 구(舊)노동자는 빠르든 늦든 새로운 환경에 흡수되고 마는 것이다. 부르주아적으로 성장하고, 아버지보다 훨씬 좋은 학교에 다녔으며, 부르주아적인 관심 속에 살아가는 자식들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부르주아화 이전의 반부르주아적 기원을 생각해낸다."(376)


"영미(英美)의 비교적 규모가 큰 노동조합들은 거의 모두 조합주의(Korporativismus)의 경향, 즉 노동귀족의 경향을 드러낸다. 이미 성장한 노동조합은 더 이상 선전활동을 벌이지 않는다. 가입을 촉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타인이 접근할 수 없도록 주변에 철조망을 치고, 가입비를 인상하거나 전문적인 직업교육 이수 증명을 요구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조직의 외적 성장을 막는다." "유럽에서도 파당 및 도당의 형성(과두적 경향)이 활발하다." "나폴리의 군수 노동자들은 정부에게, 〈노동자를 교체할 때 새로 채용되는 노동자 중 최소한 3분의 1은 현재 근무중인 노동자 가족, 즉 아버지와 동일업종에서 성장한 사람들 중에서 뽑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 노동자들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듯 그렇게 세상 물정에 어둡거나 뒤처진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계급투쟁이 민주주의를 통하여 귀족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 집단이 귀족화되는 것이라는 사실은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다."(390-2)


"지배의 열정이 고도로 발달하는 쪽은 통상적으로 과거에 노동자였던 사람들이다. 자본에 봉사하는 임금노동자라는 예종의 사슬로부터 방금 벗어난 그는 대중이 부과하는 예종의 사슬에 묶이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싫어한다. 그는 오히려 자유사상가라도 된 양 방종에 빠져든다. 모든 나라의 경험으로 미루어,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성장한 노동 지도자들이야말로 두드러지게 자의적이고, 추종 대중의 반론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오만하고 이기적이라는 점, 이제 갓 소유하게 된 권위를 지키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인다는 점, 자신에 대한 비판은 무엇이건 굴욕과 멸시로 간주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지난 시절을 상기시키려는 악의적인 시도로 받아들이는 것 등은 바로 벼락 출세자의 특징이다." "노동자 출신의 노동지도자들은 자신이 새로운 관리 업무를 맡으면서 과거의 노동을 포기하게 되었고 계급 또한 바뀌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면 불쾌해한다."(401-2)


제5부 지도자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예방 조치들


"모든 형태의 직접적인 인민 통치에 가해지는 비판은 인민투표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대중 의지의 항구적인 표현 수단으로서 인민투표가 갖는 결정적인 약점은 대중의 미성숙에 있다. 설혹 대중이 성숙하다고 하더라도 인민투표를 실시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또한 인민투표는 특히 신속한 결정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활동하는 정치적이고 투쟁적인 정당에게 성격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제도이다. 그것은 오히려 순발력을 저해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은 교묘한 질문을 이용하여 대중을 손쉽게 기만할 수도 있고, 불분명하게 질문함으로써 답변을 불분명하게 유도한 뒤 그 결과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도 있다. 전체투표는 절대적이며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그 본질로 인하여 능란한 사기꾼의 지배를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상드는, 대중의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인민투표는 민중의 자유에 대한 암살 행위라고 말하였다."(442-3)


"(부르주아지 출신 지도자들을 프롤레타리아트화하는 작업은) 다음과 같은 심리적 통찰에 기초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도, 사회혁명 정당에 소속된 모든 사회 계층과 부류들을 아우르는 '사회적 동질성'이 있어야만, 고질적인 지도부의 해악 몇 가지를, 그 싹까지 잘라버리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현저하게 약화시킬 수 있는 예방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활방식의 평등은 윤리적 요청이기만 하였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 정당의 과두적 경향의 발전을 막거나 멈추도록 하는 출구로 간주되고 있었던 것이다." "볼셰비키가 러시아 인민 속에서 거둔 성공의 열쇠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그들의 인민적이고 일상적인 언어 구사와 소박한 생활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는 특히 레닌에게 해당된다. 그러나 그러한 경이로운 시도는 이데올로기적인 영역만을 건드리는 것이고, 기껏해야 정당에 대한 광신을 낳을 뿐이다. 그것으로 지도자들이 대중의 사고와 현실 속으로 소멸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450-2)


"생디칼리슴은 민주주의의 국가체제가 명명백백한 '소수의 지배'임을 폭로하였다." "그렇지만 생디칼리슴이 무게 중심을 조합적 행동에 두려 하면 할수록, 생디칼리슴 스스로가 여러 면에서 과두정으로 귀결된 위험성은 커진다. 혁명적인 노동조합 집단에서조차 지도자들이 추종 대중을 우롱할 만한 구실은 얼마든지 있다." "프랑스 생디칼리스트들은 빈번하게, '직접행동'이야말로 노동계급이, 대표되는 대중으로서가 아니라 자주적인 대중으로 나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리고 배신, 탈선, 부르주아지화에 불과한 모든 대의체제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생디칼리스트들은 그 일방적인 이론이 정당에만 적용되고 극히 혁명적인 노동조합을 포함하는 노동조합 운동에는 적용되지 않기라도 하듯이 말한다. 그러나 노동조합도 조직의 구조에서 노동자 정당과 동일한 기본 원칙에 입각한다. 대중의 이해관계가 몇몇 선출된 자에 의하여 대변되는 것이다."(453-5)


"생디칼리스트들은 파업을 프롤레타리아트가 벌이는 직접행동의 만병통치약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파업은 정치적인 인물이 자신의 조직적 재능과 지휘 능력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정치 파업인 총파업에서 그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전문적인 노동지도자에게 경제파업은 직업 군인에게서의 전쟁과도 같은 것이다. 파업과 전쟁은 그들에게 신속하고 빛나는 상승의 기회를 제공한다. 노동지도자들 중에는 거대 파업을 주도하여, 영어로 말하자면 경영하여(manage) 인민의 눈을 붙잡고 여론과 정부의 주목을 받음으로써, 최고의 명예직과 생계 수단을 확보한 인물이 많다." "따라서 그들이 정당보다 더욱 강력한 지도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특정한 전제조건하에서는 파업과 직접행동의 '이념'을 이론적으로 선전하는 것만으로도, 대중 지도자가 권력과 영향력을 확보하고 대중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생명의 나무에서 황금 사과를 따기에 충분하다."(456-8)


"정당의 조직화가 계서적이고 과두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끊임없이 지적한 최초의 이론가들은 아나키스트들이다. 이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나 생디칼리스트들보다 훨씬 더 명료하게 조직의 위험성을 통찰하였다. 그들은 권위를 부자유와 예종, 아니 지구상의 모든 해악의 전주곡으로 간주하고 배격한다. 그들에게 강제란 〈감옥 및 경찰과 동의어〉이다. 그들은 지도자의 개인주의가 얼마나 쉽게 추종 대중의 사회주의를 억제하고 마비시키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명료하게 통찰한 그 위험에 빠져들지 않기 위하여, 온갖 종류의 실천적인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좁은 의미에서의 정당을 조직하지 않는다. 그들은 추종 대중을 고정된 틀 속에 조직하지도 않고, 정관을 마련하지도 않으며, 선거, 당비, 배타적인 집회 등의 의무와 업무를 추진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아나키즘 지도자들에게서 사회민주당 지도자들보다 강력한 이념적 면모가 부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465-6)


"우리는 아나키즘 지도자들 가운데에서 성실하고 학구적이고 사심 없는 사람들, 박애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각별한 애정을 갖고 돌보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아나키즘 지도자들이 정치의 장에서 움직이는 조직화된 정당의 지도자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훨씬 더 도덕적이라고 해서, 그들에게 지도자의 특성과 욕구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탁월한 아나키스트들이 생애의 수많은 날들을 바쳐가면서 지도자의 권위를 배격하는 이론 투쟁을 벌였지만, 그들 내부에 있는 자연적인 지배 욕구를 소멸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과 정당 지도자들과의 차이점은, 정당에서는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지배의 수단을 아나키즘 지도자들이 사용한다는 데 있을 뿐이다. 그것은 사도(司徒)와 연사(演士)의 수단들, 다시 말해 사상의 정열적인 힘, 희생의 위대함, 확신의 깊이 등이다. 그들은 기술적인 필요성에 입각하여 조직을 지배하는 대신, 추종 대중의 감정을 지배하는 것이다."(466-7)


제6부 종합: 조직의 과두적 경향


"혁명을 표방하는 정당이 보수적인 내적 본질을 갖기에 이르는 기나긴 사슬의 마지막 고리는 정당과 국가 사이의 관계이다. 중앙집권적인 국가 권력을 타도하기 위해서 탄생한 정당은, 국가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역시 거대하고 견고하게 조직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노동자 정당은 고도로 중앙화된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랑하는 자신의 조직 원리는 타도의 대상인 국가의 조직 원리와 동일하게 된다. 그 원리는 권위와 규율이다." "권위적인 국가와 똑같은 수단으로 조직된 그 혁명 조직의 지도자들은 결국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국가라는 거대 조직에 대립하는 자기 정당은 비록 조직 문제에서는 기적을 연출해낼지 모르지만, 국가에 비해서는 여전히 취약한 축소판에 불과하며, 따라서 조만간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국가와의 모든 힘겨루기는 자신들의 처절한 패배로 끝나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당의 설립자들이 창당할 때 내걸었던 희망과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475-7)


"오늘날 우리는 정당의 조직 역량과 강도가 커지면서 혁명적 동력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조심성과 우려가 그만큼 커지는 현상을 목격한다. 당 조직의 확대와 당 정치의 조심성 사이에는 내적인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 국가로부터 위협받으면서도 존립의 근거를 국가에서 찾는 정당이 비대해지자, 그 정당은 국가를 과도하게 자극할 만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회피하려고 불안하게 노력하는 것이다." "초창기에 그들의 목표는 혁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혁명적 수단을 원칙적으로 선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득이한 상황에서 그들은 수단도 혁명적이라고 외쳤다. 그 정당이 이제 연륜이 쌓이자, 혹은 정치적으로 성숙해지자, 혁명에 대한 본래의 신념이 수정된다. 자신들의 정당은 〈최선의 의미에서〉 혁명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당은 검찰이 주시하는 수단에서는 혁명적이지 않고, 오로지 회색의 이론과 흰색의 종이 위에서만 혁명적이라고 서슴지 않고 선언하는 것이다."(477-9)


"이제 만일 강력하고 대담한 전술을 택한다면 (반세기 동안 당이 애써 구축한) 그 모든 것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다시 말해 수십 년 간에 걸친 노력과 수천 명에 달하는 당내 상하위 간부진, 한마디로 '당' 전체가 위태로워지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대담한 전술을 구사한다는 것은 점차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 되어간다. 이미 성취한 것에 대한 집착,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삶이 당의 존재에 거의 전적으로 매여 있는 수많은 성실한 가장(家長)들의 개인적인 욕심, 또한 전시(戰時)에 빈번하게 나타나듯 국가가 당을 해산해버린다면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으로 파탄을 맞게 되리라는 불안감, 부당한 감상주의와 정당한 이기주의, 이 모든 것이 작용함으로써 당에는 일말의 과감성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여전히 혁명적인 언어가 사용되지만 현실에서 그 당은 기껏해야 입헌적인 야당의 임무를 다하는 정당으로 전락한다. 여기에서도 결과는 원인보다 오래간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사민당의 상태였다."(481-2)


"(정당의 경우처럼) 분업에 의하여 등장한 기관이 공고화되면, 그 속에 기관 자체의 이해관계, 즉 기관을 위한 기관에 대한 이해관계가 발생한다는 것은 변경 불가능한 사회법칙이다. 그리고 조직 자체의 이해관계가 생겨나면, 그것에는 조직원 전체의 이해관계와 충돌하고 대립하는 측면들이 나타난다. 그것만이 아니다. 다양한 사회 계층들이 사회적 기능에 따라 독자적으로 결집되어 기관을 조직하면, 그 기관들은 다시금 고유한 이해관계를 내세우게 된다. 한 지배층이 또 다른 지배층으로 교체될 필연성과 그로부터 도출된 과두정의 법칙, 즉 인간이 대규모 단체로 조직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조직 형태로서의 과두정의 법칙이 유물사관을 배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유물사관을 보충한다. 역사가 부단한 계급투쟁으로 구성된다는 학설과, 계급투쟁이 구(舊)과두정에 합류하는 새로운 과두정으로 귀착될 뿐이라는 학설 사이에는 그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504)


"그렇게 사회주의자들은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그렇지 못하다. 사회주의자들이 승리하는 순간 사회주의는 몰락한다. 대중이 전력을 다하여 지도자들을 교체한 뒤 만족해하는 것은 가히 희비극이라 할만하다. 노동자들에게는 오로지 〈정부를 충원하도록 하였다〉는 명예만이 남을 뿐이다. 선의의 이상주의자들조차 일단 지도자가 되면 단기간 내에 지도자의 일반적 속성들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반(反)낭만주의자들이 1833년 경에 그런 회의감을 다음과 같은 신랄한 풍자 속에 담아냈던 것은 역사적으로 그럴 만하였기 때문이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길거리에서 총질을 하는 사람들이 벌이는 것이 혁명인가? 그런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창문이나 깨뜨릴 뿐이고, 거기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리장수밖에 없다. 이런 흥분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투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사람들을 깔아뭉갠다. ······혁명이란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는 정직한 인민을 선동하려는 노력일 뿐이다.〉"(505-6)


결론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에서 과두 체제가 형성되는 것은 '유기적인' 과정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사회주의적인 조직이든 아나키즘적 조직이든 할 것 없이, '모든' 조직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다. 할러가 이미 지적한 대로, 모든 조직 관계에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자연적으로 형성된다. 따라서 모든 정당 조직은 민주적 토대 위에 선 강력한 과두정이다. 어느 곳이나 선출하는 자와 선출되는 자가 있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선출된 지도자는 선출한 대중을 지배한다. 조직의 과두적 구조는 조직의 민주적 토대에 의하여 숨겨진다. 후자는 당위이고, 전자는 현실이다. 이러한 본질적 차이는 대중에게 철저하게 은폐된다." "문화적으로 우월하고 말솜씨도 뛰어난 지도자들의 견고한 연설에 지속적인 영향을 받은 나머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하나의 고정 관념이 생겨난다. 투표를 통하여 자신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대변인에게 위임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자신이 〈지배에 한몫〉한 것이라는 관념이 그것이다."(509-10)


"사회주의자들이 공권력을 장악한 뒤에 대중에게 약간의 통제권을 제공하면 지도자와 추종 대중 간의 이해관계가 완벽하게 합치되리라는 생각은 매우 비과학적인 가정이다." "(사회주의가 인간을 신으로 만들 것이라는 주장과 달리) 우리가 사실로 확인한 대중의 미성숙은, 민주화가 진전되어 사회주의가 이룩되면 곧바로 소멸되어버릴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이는 대중의 본질 그 자체로부터 해명된다. 대중은 조직되더라도 자기 앞에 놓여 있는 복합적 문제의 해결에 본질적으로 무능하다. 대중은 노동분화와 전문화와 지도를 필요로 하는 무정형의 군집이다. 〈인류는 지배당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인류에 혐오감을 느낀다〉라고 프루동은 1850년에 감옥에서 썼다. 개별적인 인간은 대개 천성적으로 지도에 의존한다. 근대적 삶의 기능들이 분화되면 분화될수록, 그 경향은 더욱 커진다. 그리고 개별적인 인간들로 구성된 조직은 개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지도에의 욕구를 갖는다."(513)


"민주주의의 본질은 각 개인의 정신적 비판 능력을 강화하고 촉발시킨다는 데에 있다. 비록 민주주의 조직이 관료화되면서 그러한 통제 능력이 크게 약화되지만, 본질은 그렇다." "과두적 현상이 역사적으로 필연적이라고 해서, 민주주의자들이 그에 대하여 투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력이 오랜 동지들은 숙명적으로 지도자, '사회학적 의미에서의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 정치 활동에 찌들고 분노하여 정치의 장을 떠나고 그로써 그 지도자들을 통제하지 않은 채 방치하는 것은, 조직의 이념을 손상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지도자의 권력을 예감할 수조차 없는 수준으로까지 확대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서두에서 지적하였듯이 조직이란 오늘날의 모든 사회 계층, 특히 재정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과두적 위험성을 있는 그대로 명료하게 직시하여야만, 과두정의 위험을 막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515-6)


"역사 속의 민주주의의 흐름은 몰려오는 파도와 같다. 파도는 항상 바위에 부딪쳐 깨진다. 그러나 파도는 영원히 다시금 몰려온다. 파도가 연출하는 연극은 격려와 절망을 교차시킨다. 민주주의는 일정한 발전 단계에 도달하면 곧바로 타락하기 시작한다. 그때 민주주의는 귀족정의 정신을, 때로는 귀족정의 형식까지 받아들이고, 한때 민주주의가 투쟁하였던 귀족정과 유사해진다. 그러면 다시 민주주의의 내부에서 민주주의의 과두적 성격을 지책하는 새로운 비판자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들은 영광의 투쟁기와 불명예스럽게 지배에 참여하는 시기를 겪은 뒤에, 마침내 다시 구(舊)지배계급 속으로 흡수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내건 새로운 자유의 투사들이 또 다시 등장한다. 청년의 치유할 수 없는 이상주의와 노년의 치유할 수 없는 지배욕 사이의 가공스러운 투쟁은 그렇듯 끝없이 이어진다. 언제나 새로운 파도가 언제나 똑같은 바위에 부딪친다. 이것이 정당사의 심원한 서명(署名)이다."(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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