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1947 - 전후 독도문제와 한.미.일 관계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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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1952년 1월 한국의 해양주권선언, 즉 평화선 발표에 대해 일본이 항의하면서 독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다." 일본 외무성의 입장을 대표하는 각서는 모두 네 건인데, "첫 번째 각서에 첨부된 「1953년 7월 13일자 죽도에 관한 일본정부의 견해」라는 장문의 글에 일본정부가 주장하는 독도영유권의 핵심적 내용과 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일본 외무성은 역사적 사실과 국제법의 두 가지 측면에서 일본의 독도영유권을 다루었다. 먼저 역사적 사실로는 ①과거에 죽도(竹島) 혹은 기죽도(磯竹島)라는 명칭으로 불린 섬은 현재의 울릉도이며, 현재의 죽도는 과거에 송도(松島)로 불렸다. ②1693년과 1881년 조선정부의 항의로 일본인의 죽도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이는 현재의 울릉도이지 죽도(독도)가 아니다. ③한일 간 존재했던 충돌은 울릉도에 관한 것이지 현재의 죽도(독도)에 관한 것이 아니다. ④문헌·고지도상의 송도는 현재의 죽도(독도)로 일본에 알려졌고, 일본 영토의 일부분이다."(25-6)


"1952년 처음으로 한일 양국 간에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외교각서 교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이래, 양국의 각서는 일종의 독도연구사를 형성하게 되었다. 역사적 근거(문헌·지도·연구)와 국제법적 근거(SCAPIN·대일평화조약·독도폭격·독도 폭격연습장 지정 및 해제)가 동시에 다루어졌으며, 시기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긴 시기가 다루어졌다. 역사적으로는 광범위한 주제에 대한 바늘 끝 같은 첨예한 자료적 해석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한국정부는 역사적 근거를 강조하는 입장이었던 반면, 일본정부는 국제법적 근거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때문에 한국은 일본의 국제법적 근거를 반박하는 데, 일본은 한국의 역사적 근거를 부정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이 시기에 양국 정부의 견해는 단지 외무부·외무성의 작업이 아니라 역사학자·지리학자·국제법학자 등 양국의 전문가가 총동원된 총력전의 양상이었으며, 주로 역사적 근거가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었다."(32-3)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의 준비·진행 과정에서 일본이 미국을 이용해 독도영유권을 확보하려 시도한 것에서 전후 독도문제가 발원했다는 판단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1905년 일본의 한국 침략과정에서 첫번째 희생물이 된 독도는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이었고, 전후 한국령으로 귀속되는 것이 당연했다. 1952년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독도영유권을 주장했을 때 그 근거는 일본의 고유영토설이나 1905년의 불법 영토편입 사실이 아니라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에서 독도가 일본령으로 남게 되었다는 주장에 무게중심이 두어졌다. 즉, 일본은 1905년의 불법적 영토편입은 을사늑약으로 실질적 주권을 상실하고 항거불능이었던 한국을 상대로 한 일방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일환이었기에 주장의 근거와 정당성이 현저히 부족한 상태였던 반면, 자국과 48개국이 서명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평화조약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보편적 동의를 획득할 수 있는 근거라고 판단했다."(60-1)


#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성격

1. 미국 주도의 단극적(單極的) 평화조약 : 반공·반소가 핵심

2. 일본과 서명국들간의 평화관계 회복 : 중국(대만과 분열되어 대표성 논란)과 한국(식민지 전력 논란) 배제 → 공산주의 저지라는 반공에 방점

3. 일본의 전쟁책임과 배상·보상·사과 문제 외면

4. 조약 이후 동북아시아에서 미국과의 양자동맹을 통한 안보·지역 질서 구축


#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 한일관계에 미친 영향

1. 한국을 서명국·조인국에서 배제하고 '2차 대전 이후 해방된 국가'로 간주하면서 (재일한국인을 비롯한) 한국의 국제법적 지위 문제 방치

2. 일본이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통해 독도를 일본령으로 인정받았다고 주장하면서 한일간 영토문제 상존

3. 일본이 한일회담 과정에서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상쇄하거나 묵살하기 위해 적산(敵産)에 대한 대한(對韓)청구권을 주장하면서 배상·청구권 문제 쟁점화


1 한국 1947년 : 남조선과도정부·조선산악회의 독도조사


"1947년 6월 울릉도에서 시작된 일본인의 독도 불법상륙 및 한국 어선 총격사건은 (일본의 어업한계선인) 맥아더라인 확대 및 한국의 어로구역 축소 우려와 결합되면서 강력한 목소리로 발전했다. 그런데 당시 한반도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은 혼란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미소의 강력한 영향 속에 남북은 분단되었고, 좌우갈등은 격렬한 상황이었다. 완전통일·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둘러싼 갈등과 미소·남북·좌우의 갈등과 대립은 생사를 건 인정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찬반탁·좌우익의 대립이 극심한 물리적 충돌과 테러로 이어지는 "혼란한 시점에 한국인들 가운데에서 독도영유권에 대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돌이켜보자면 당시 독도영유권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과 노력이 본격화된 것은 요행이자 천우신조에 가까웠다. 이후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1947년 울릉도에서 시작되어 대구·서울로 이어진 독도에 대한 관심은 한국의 독도영유권 확립에 중요한 기여를 한 첫 출발점이 되었다."(107-8)


"1947년 독도조사대의 결성·파견에는 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 국사관 관장 신석호, 조선산악회 송석하·도봉섭 등 일제하에서 진단학회 활동을 벌였거나(신석호·송석하·유홍렬), 조선학 운동을 주도했던(안재홍·송석하)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즉, 식민지시대 이래 한국적인 것, 한국 문화·역사·지리 등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연구를 주도했던 인물들이 해방 후 독도조사대 결성을 주도한 것이다. 특히 안재홍이 민정장관 직위에 있었던 점은 조선산악회가 독도조사에 동원될 수 있는 실질적 힘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947년 8월의 독도조사는 비밀리에 수행되었지만, 해안경비대 등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이루어졌고, 이는 민정장관 안재홍의 조력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독도에 대한 조사작업이 필요했던 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은 소규모의 공식조사단 파견과 더불어 대대적인 학술조사활동을 민간의 조선산악회에 부탁했던 것이다."(120)


2 한국 1948년 : 독도폭격사건과 독도의 재발견·재인식


"1947년 독도조사로 시작된 한국인들의 독도 인식은 1948년 6월에 발생한 독도폭격사건을 통해 결정적으로 제고되었다." "사건발생을 처음 보도한 것은 『조선일보』 1948년 6월 11일자였는데, 6월 8일 오전 11시 반경 국적불명의 비행기가 독도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가해 울릉도·강원도 어선 20여 척이 파괴되고, 어부 16명이 즉사하고, 10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폭격소식은 다음 날 독도에 출어했던 어선을 통해 울릉도에 전해졌고, 울릉도 경찰은 6월 9일 저녁 7시 구조선 두 척을 독도로 파견했다. 그러나 불과 4톤도 안 되는 구조선으로는 구호작업을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이들은 10일 저녁 6시 울릉도로 돌아왔는데, 폭격 당일 독도 부근에 흩어졌던 사체와 배 파편은 하룻밤 사이 파도에 휩쓸려갔고, 바위에 난파된 경양환(慶洋丸)에서 김준선, 최태식 두 사람의 사체만을 수습해 왔다. 폭격 당시 즉사한 사람은 9명이며, 행방불명자 5명도 즉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179-81)


"하지는 6월 17일 맥아더에게 2급 비밀 전문을 보내 "(독도폭격) 문제는 현지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이며 모든 구실과 경우를 활용해 총력적으로 반미주의를 부채질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악효과를 극복하고 대응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하지가 맥아더에게 원한 것은, "지난주 리앙쿠르암(독도)에서 한국 어선에 대한 우발적 폭격을 포함한 불행한 사태에 비추어, 맥아더 장군은 장래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지역이 미군기의 폭격이나 총격지역으로 활용되지 않게 하라고 명령했음을 본인에게 통보했다"라는 하지 성명의 승인이었다." "아울러 딘 군정장관이 독도 동방 10해리 지점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지역에 대한 폭격금지를 요청한 것은 단지 이 해역이 한국 어민들의 어로지역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주한미군정의 관할구역이자 한국 영토임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이 지역이 한국 어부들의 어업구역이라며 구체적인 어획고를 제시하기까지 했다."(191-3)


"1948년 독도폭격사건은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교훈과 계기를 제공했다. 이 폭격사건으로 말미암아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국민적 공감대와 국내외적 확인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언론의 보도는 피해 어민들이 강원도 울진·묵호, 울릉도 어민들로 모두 한국인들이며, 이들이 조업하던 독도 역시 한국령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또한 미군정 역시 사건이 발생한 독도에 "군의를 포함한 조사 및 구호반"을 파견했다. 즉, 독도의 관할권이 미군정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과 조치들은 모두 사건발생지인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분명한 증거였다. 또한 이 사건의 조사와 처리에 일본정부나 SCAP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으며 일본 언론에 보도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독도폭격사건을 계기로 모든 한국인들은 독도가 명백히 한국의 영토이며, 불행한 사건이 발생한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244-5)


"일본은 미국에는 패배했지만, 아시아국가들 특히 한국이나 중국에는 패배하지 않았다는 이중적인 전후 인식을 갖고 있었다. 특히 전쟁 책임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일본은 미국에는 복종적·위계적 동맹을, 아시아국가들에는 멸시적이며 냉소적인 구제국주의적 시각을 유지했다. 이미 1948~49년 단계에서 일본 외무성은 한국의 독립을 부정했다. 훗날 한일회담 일본측 수석인 구보타 간이치로가 한국이 샌프란시스코조약 이전에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었다고 한 발언은 이러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일본은 1905년 독도 불법 영토편입 사건을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의 맥락·구조에서 분리시켜 개별적인 사건으로만 다루려 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1900년대를 전후한 제국주의 침략과정에서 대한제국·조선 정부와 맺은 조약들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전제와 가정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본이 철저한 전후 반성과 청산과정을 거쳤다면, 독도영유권 주장은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273-4)


3 일본 1947년 : 독도·울릉도는 일본령


외무성 조약국장이던 하기와라 도오루가 작성한 「평화조약에 대한 일본정부의 일반적 견해」 제1차안(1947.5)을 검토한 가세 도시카즈는 "카이로선언은 일본정부가 감수하기 곤란한 영토조항을 담고 있으므로, 일본정부가 이를 승인하는 것처럼 전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카이로선언의 영토조항은 ①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래 탈취·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도서 박탈, ②만주·대만·팽호도 등 중국에서 도취(盜取)한 영토의 중화민국 반환, ③폭력·탐욕으로 약취(略取)한 기타 일체의 지역에서 구축(驅逐)을 규정한 바 있다. 그런데 가세 참사관의 코멘트는 기본적으로 일본 외무성 관리들이 자국이 수락한 항복조건마저 무시하고 무력화하려 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일본은 포츠담선언에 제시된 무조건 항복조항을 수락함으로써 종전에 이르렀다. 포츠담선언은 곧 일본 항복문서의 기본텍스트가 되었다. 그런데 포츠담선언의 영토조항은 카이로선언을 계승한다고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287)


"조지 앳치슨은 국무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치고문으로 맥아더와 충돌했다. 아시아우선주의자로 일본의 새로운 '황제'였던 맥아더는 반공주의에 입각한 일본 사회의 재건을 원했다. 맥아더는 전후 일본 개혁 대부분이 실제로는 "소련의 첩자"인 "이른바 자유주의자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을 수행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공직추방, 배상, 반독점 조치 등은 압력솥의 뚜껑을 여는 것이기에 개혁을 하는 시늉만 하며 실제권력은 똑같은 사람들 수중에 내버려두어 일본이 "타고난 아시아의 지도자"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오히려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1947년 8월 강력한 대일징벌론자이자 중국통이었던 조지 앳치슨이 불의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 것을 계기로 "SCAP(연합국 최고 사령부) 내에서 중국전문가 대신 일본전문가가 득세하기 시작했고, 대일정책에서도 징벌적 정책과 민주화 정책에서 온건적 현상유지정책 내지 역전코스가 시작되었다."(299-301)


"일본 사회에 대한 시볼드의 인식은 '매료' 그 자체였다. 그는 일본계 여자와 결혼했고, 수많은 일본인 거물들을 친구로 삼았다. 전후에도 시볼드는 정치담당보고관으로 거리낌 없이 일본 극우 정치인들과도 교류했다. 시볼드는 태평양전쟁의 책임은 일본의 정치·경제·사상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극소수 '군국주의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시볼드는 자신의 친일적 입장을 일본의 공산주의화 저지, 즉 반공주의로 정당화하려 했다. 그는 전후 일본에서 벌어진 전범추방, 재벌해체 등의 경제개혁을 공산주의자들이 사주라며 반대했다." "반면, 한국을 여섯 차례 방문했던 그는 한국인이 "슬프고, 억압받고, 불행하고, 가난하고, 조용하며, 음울한 민족"이며, "전후 상황과 이 대통령의 거친 성격은 미군사령관에 파견된 수많은 미국정치고문들에게 한국을 보다 완고하고 견딜 수 없는 곳으로 인식"한다고 썼다. 그는 이런 견지에서 대일평화조약과 초기 한일회담을 이끌어갔다."(302-3)


1946년 11월부터 1947년 6월까지 일본 외무성은 총 4차례에 걸쳐 연합국에 대대적으로 배포한 「일본의 부속소도」(Minor Islands Adjacent Japan Proper)라는 팸플릿에서 "울릉도를 일본령으로 묘사하려는 의도를 내보였다. 일본 외무성의 설명을 따라가보면 11세기에 일본이 먼저 울릉도를 인지했으며, 한국은 13세기 중반 이후에야 식민지화를 시도했지만, 15세기 이후 공도(空島)정책을 취했고, 임진왜란 후 1세기 동안 일본이 이 섬을 지배했다. 17세기 말 울릉도 영유권을 둘러싼 논쟁 끝에 한국령이 인정되었지만, 한국은 여전히 공도정책을 취했고, 일본 어부들이 인근에서 계속 어업을 했다. 19세기 후반에도 일본 내에서 울릉도 개발논의와 청원이 있었고, 일본정부의 불허에도 일본인들이 울릉도를 출입했다는 주장이다. 즉, 일본이 먼저 울릉도를 인지했으며, 1세기 동안 지배했고, 영유권 논쟁이 있었으며, 한국이 공도정책으로 사실상 방치한 사이에 일본이 실질적으로 개발했다는 내용이다."(345-6)


"다음으로 독도에 관한 팸플릿의 서술을 살펴보면, 일본인들은 고대부터 독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1667년에 마쓰시마(松島)라고 명명했으며, 유럽인들은 1849년에야 리앙쿠르암이라고 명명했다. 한편 울릉도와는 달리 리앙쿠르암에 대해서는 한국 명칭이 없고, 한국에서 제작된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04년 9월 시마네현 어부 나카이 요사부로가 일본정부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켜 자신에게 대여해줄 것을 청원했다. 다음 해인 1905년 1월 28일 일본정부는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자국령에 편입시켰고, 이를 시마네현 현보에 고시했다. 나카이와 일본정부는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한제국정부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1년 뒤인 1906년 울릉도 군수 심홍택의 보고로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으나, 러일전쟁의 와중에 일본 군대가 궁성을 점령했고 외교권은 박탈당한 상태였다."(349-50)


"일본 외무성이 만든 허위정보에 기초한 팸플릿이 1948~51년 간 주요 길목에서 한국의 독도영유권을 무장해제하는 결정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문건을 동경의 미국 외교관·관리들이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손을 거쳐 국무부로 전달된 후 중요성이 재차 확인되었다는 데 있었다. 즉, 일본 외무성과 미 국무부 외교관·관리들의 교류와 소통, 상호 영향력이 한국의 정당한 권리와 요구를 침해했다는 사실이었다.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던 한국은 일본의 이러한 허위정보와 문서조작작업을 전혀 알지 못했으며, 정작 대일평화조약이 논의되는 시점에는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전쟁에서 생존을 위해 허덕이고 있었다. 1905년 국가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 있을 때 일본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영토편입한 이후, 1947년 일본 외무성에 의해 또다시 허위문서로 조작된 정보가 유포되었고, 1950~51년 한국전쟁으로 한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일본의 허위정보가 미 국무부를 움직였다."(365)


4 미국 1947년 : 리앙쿠르암(독도)은 한국령


1949년 11월 2일 미 국무부가 작성한 대일강화조약 초안에는 부속지도가 첨부되었는데, 독도(리앙쿠르암)이 한국령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독도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이 시점에 발생했다.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일본에서 미 국무부의 대표이자 주일정치고문이었던 시볼드는 초안에 대한 검토의견서에서 독도가 1905년 일본령이 된 이후 단 한 차례도 한국의 이의제기를 받지 않아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폈다. 초안을 전달받지 못했던 주한미대사 존 무초는 미국과 유엔이 정책적으로 한국을 지지했으며 한국정부의 위신이 있기 때문에 한국에 대일평화협상 참가 및 서명국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미 국무부가 양국의 의견을 모두 수용하여 한국의 대일평화협상 참가, 독도는 일본령이라는 조항을 새로 추가한 "이 (수정) 초안의 존재는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일본 영유권,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가 일본령으로 확인되었다는 주장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375)


"1950년 5월 대일평화조약 대통령특사로 임명된 존 포스터 덜레스는 일본 및 연합국들과의 협상을 지휘했다. 덜레스는 대일평화조약의 핵심이 "비징벌적인 평화조약"에 있다고 생각했다. 제1차 대전을 종결한 베르사유회담에 초급 외교관으로 동석했던 덜레스는 베르사유조약이 패전국에 대한 전쟁책임을 명문화한 후 영토할양, 배상금 등을 강제했기 때문에 독일에 의한 제2차 대전이 발발했다고 생각했다. 당시 미 국무부가 작성한 기존의 조약 초안을 베르사유체제와 마찬가지로 배상을 포함한 징벌적 성격이 강했으며, 제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와의 평화조약 역시 전쟁책임과 배상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때문에 덜레스는 국무부가 준비한 초안이 "지나치게 상세"하며, 일본인의 의견을 결정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더라도 시작단계부터 일본과 의논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덜레스가 추진한 비징벌적이며 배상문제를 거의 배제한 '평화조약'은 세계외교사에서 유례가 없는 우호적 조약이었다."(375-6)


"대일평화조약의 초안은 얄타체제로 대표되는 미·소·영·중 4대국의 연합전선이 냉전의 격화와 중국 대륙의 공산화로 대표되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붕괴되는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며 변화해갔다. 최종적으로 미국·영국은 일본과 평화조약 체결에 참가해 서명했고, 소련은 참가했으나 서명을 거부했으며, 중국은 초대받지 못했다. 미국은 적국 일본에 대해 가혹하고 징벌적인 조약 초안을 준비했다가, 1948년 냉전의 격화와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정책을 변경했다. 미국은 일본을 미국의 동아시아 하위동맹자로 설정했고, 일본에 관대한 평화조약을 제안했다. 미국은 남태평양의 구일본위임통치령의 접수 및 신탁통치, 오키나와에 대한 신탁통치 및 군사시설 유지, 일본 본토에 대한 군사시설 및 군대주둔권을 획득함으로써 대일평화조약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영국은 일본에 대한 경계심과 억제를 표명했으나 결국 초안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상태에서 대일평화조약에 동의하였다."(379-80)


"로버트 피어리는 전쟁기간 동안 국무부에서 대일정책 관련 업무를 맡았고, 1945년 10월 주일미정치고문실에 배속되어 근무했으며, 1946년 중반 미 국무부 극동국으로 옮겨 일본담당관 및 동북아시아과 등에서 일한 일본통이다." "1947년 1월 30일 로버트 피어리가 제출한 제1장 영토조항을 다룬 초안·비망록·지도 가운데 초안이 남아 있다." "피어리가 만든 매우 간단한 2쪽짜리 문서는 이후 1947~49년 국무부 대일평화조약 초안 영토조항의 원천이자 핵심이 되었다. 피어리는 대일평화조약의 영토조항 초안을 처음 작성할 때부터 제주도·거문도·울릉도와 함께 독도를 "한국 근해의 모든 작은 섬들"에 포함시켰다. 또한 피어리의 영토조항 초안은 1947년부터 1949년까지 독도를 한국령으로 표시한 미국측 초안으로 이어졌다. 특히 피어리가 일본통이며, 일본에 우호적인 입장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독도가 한국령으로 명확히 규정된 것은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의미가 있다."(388-9)


5 미국의 대일평화조약 초안과 독도 인식(1947~1951)


1. 미 국무부 조약 초안의 독도 인식(1947~1949) : 리앙쿠르암(독도)은 한국령

2. 시볼드의 공작(1949~1950) : 리앙쿠르암(독도)은 일본령 주장

3. 존 포스터 덜레스의 등장(1950~1951) :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조항 삭제

4. 영미합동초안의 성립과 최종 조약문의 확정(1951)


6 영국의 평화조약 초안과 영미협의(1951)


7 미국과 일본의 협의(1951)


"(경제적 배상과 관련하여) 무배상은 대일평화조약 체결과정의 기본정신이자 원칙이었다. 무배상이 강조된 것은 장래 오랫동안 일본에 중대한 부담을 지우면서까지 배상하지 않도록 한 원칙을 주요 교전국인 미국·영연방·네덜란드 등이 승인했기 때문이며, 국민당 정부도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배상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조약의 기본정신과 원칙이 무배상을 강조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무배상으로 불린다. 사실상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 채택된 것은 역무(役務)배상이라는 새로운 방식이었는데, 이는 구상국(求償國)이 제공하는 원료를 가공해 인도하거나 구상국 연안수역의 침몰선박의 인양·해체를 맡는 방법 등으로 일본이 외화부담을 지지 않으면서 피해국의 손해를 보상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이 채택된 가장 큰 이유는 승전국인 미국이 일본에 다량의 원조를 제공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배상액이 커지면 그만큼 미국의 부담이 늘어나기 때문이었다."(629-30)


"청구권과 관련해 일본 외무성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a) 일본의 재외재산: 연합국 중 〈일본과 현실적으로 전투행위에 돌입했던 제국에 있는 모든 일본 자산은 반환될 것〉. 일본 재산 중 사유재산에 대해서는 특별한 고려를 해줄 것을 간청. 전쟁에 따른 청구권의 지불에 이것이 적용될 때는, 재산의 소유자에 대한 보상문제는 일본정부의 재량에 일임해줄 것. (b) 약탈재산: 〈반환은 대부분 완료되었음. 평화조약의 체결과 함께 종결될 문제임〉. 괄호 친 두 부분은 일본 외무성의 기본적 시각을 보여주는 것인데, 교전당사국 내 일본 재산은 반환되어야 하지만, 일본이 타국으로부터 약탈한 재산은 반환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평화조약 체결로 종결하자는 것이었다. 교전국가와 점령지의 경우에 이런 시각을 유지한다면 식민지의 경우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다. 식민지에 대한 약탈재산이나 반환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유재산을 포함한 식민지 내 일본의 재산반환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630-1)


"덜레스의 1951년 1~2월 동경 방문은 한국 전장에서의 상황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성사되었다. 1950년 11월 중공의 개입 이후 백두산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은 급속히 후퇴했으며, 1951년 1월 초에는 한국정부 및 주요 인사들의 제주도·일본 망명을 고려할 정도로 전황이 악화되었다. 대일평화조약의 조속한 체결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미국 조야에서 제기되었고, 덜레스는 전격적으로 일본과 대일평화조약·미일안보조약의 체결에 합의하게 된다. 다른 연합국과의 협의, 구체적 조약문의 세부적 수정작업이 남았지만, 1951년 2월 11일 그가 동경을 떠날 때 이미 대일평화조약은 거의 완성단계에 돌입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덜레스와 일본의 가장 주요한 관심사는 일본의 미래안보문제였다. 2월 2일 일본 국회에서 덜레스는 일본이 상호방위 같은 일정한 조약체제하에 들어온다면 미국은 주일미군을 확실히 보유해달라는 일본정부의 요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이라는 취지로 연설했다."(638-9)


# 미일안보협정과 미일행정협정(SOFA) 체결로 실현


"일본정부가 제시한 한국의 대일평화조약참가 불가 이유는 첫째, 한국이 일본과 관련해서는 평화조약에 따라 독립을 획득하게 될 해방국으로 일본과 교전상태나 전쟁상태가 아니었다. 둘째, 한국이 서명국이 되면 공산주의자들인 재일한국인들이 재산회복·보상 등에서 일본정부에 엄청난 요구를 할 것이다. 때문에 미국 초안에 명시된 것처럼 한국에 대한 권리·권원·청구권을 포기하고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정도면 충분하고, 양국 관계는 한일간 양자조약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시다의 입장을 정리하면 ① 전시 한국의 연합국 지위 불인정, ② 재일한국인의 연합국 국민 지위 부여 시 일본정부 파탄, ③ 한국의 조약서명국 배제, ④ 한일관계 수립은 한일 간 협정으로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회담일 오후, 재일한국인이 연합국 국민의 지위를 획득하지 않는 것만 확실히 보장된다면 한국이 강화조약의 서명국이 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덜레스에게 전달했다."(664)


8 한국정부의 대일평화조약 대응과 한미협의(1951)


# 덜레스의 1차 초안(제안용)에 대한 한국정부의 답신(1951.5.7)

1. 한국의 연합국·서명국 자격 부여 및 재일한국인의 연합국 국민 자격 부여

2. 대마도 반환

3. 재한일본인의 적산 몰수 인정

4. 맥아더라인 존속


"미 국무부는 미군정기 및 한국정부 수립기에 한미 협정을 통해 귀속재산으로 인정한 한국 내 일본 재산에 대해서는 타당성을 인정하였다." "한국에 대한 연합국 자격 및 조약서명국 지위 부여와 관련해서는, 한국이 주장하는 근거(임정의 대일투쟁·선전포고, 폴란드의 예)를 부인했다. 다만 이 문제와 관련해 미국정부의 입장이 결정되는 바에 따라 한국에 연합국·서명국 지위를 부여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즉, 한국이 제시한 과거의 사실이 연합국·서명국 자격조건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 미국의 대한정책적 입장에 따라 한국의 자격이 결정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대마도 반환 요구와 맥아더라인 존속 요구를 과도한 배상 혹은 일종의 영토할양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전반적으로 한국의 주장은 당시까지 미국이 추구해왔던 '비징벌적이며 배상을 제외한' 평화적 조약 체결이라는 원칙과 큰 격차가 있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상을 주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731-2)


# 미국의 결정사항 통보(1951.7.9)

1. 한국에 최신 대일평화조약 초안(제3차 영미합동초안) 제공

2. 한국의 조약서명국 자격 부정

3. 한국의 대마도 반환 요구 기각

4. 맥아더라인 논의는 국제어업회담으로 해결 권고


# 한국의 제2차 답신서 주요 내용

1. 재한일본인 귀속재산의 한국 소유권 확인(최우선 요구 사항)

2. 대마도를 기각하는 대신 독도·파랑도 등의 영토권 확정

3. 맥아더라인 유지


"한국정부가 최초로 독도를 거론한 제2차 답신서(1951.7.19)에는 독도의 명칭만이 거론되었을 뿐 독도·파랑도에 대한 어떠한 근거·관련자료도 제시되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조약 초안에 거론된, 일본이 방기할 도서인 제주도·거문도·울릉도 뒤에 단지 독도·파랑도를 첨부했을 뿐이다. 추가 설명도 전무했다. 또한 위치와 존재가 확인되지 않던 파랑도와 함께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주장함으로써 독도 자체의 실존감이나 신뢰도를 저감(低減)시켰다. 나아가 한미협의의 맥락에서 보자면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다음에 독도 반환을 주장했고, 그것도 가공의 섬인 파랑도와 함께 요청함으로써, 독도가 한국측 영유권의 중요성에서 후순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한미협의(1951.7.19) 시점에 한표욱 1등서기관은 독도와 파랑도가 "대체적으로 울릉도 인근에 위치"한다고 발언함으로써 지리적·역사적·문헌적 정보가 부정확하고 미비했음을 드러냈다."(762-3)


"미 국무부는 1951년 8월 10일 대일평화조약과 관련해 한국정부에 최종입장을 통보했다. (여기서 러스크는 독도가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키도사 관할하에 놓여져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독도는 7월 19일자 한국측 제2차 답신서에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미국은 불과 20여 일 만인 8월 10일에 일본령이라고 결정해 한국에 통보했다. 러스크 서한에 등장하는 이 대목은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이 제시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다. 이 사이 한국측은 근거자료를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한국정부는 물론 주미한국대사관도 독도와 파랑도가 울릉도나 다케시마 인근에 있다고 했을 뿐 정확한 방위나 실체, 그것이 한국령이라는 역사적·문헌적 증거나 근거자료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주한미대사관도 회신을 보내지 못했다. 이미 대일평화조약 초안 완성의 시기적 압박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미 국무부는 더 이상 결정을 늦출 수 없었고, 자신들이 보유한 정보에 근거해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777-9)


"지금까지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한국정부는 러스크 서한의 독도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않았다. 조약서명국 자격·맥아더라인에 대해서는 몇 차례 의견을 개진했지만, 독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훗날 유진오는, 독도를 평화조약에 명기치 않은 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분쟁의 씨를 남겨놓은 처사라고 평가했다. 맥아더사령부가 맥아더라인을 그을 때 독도를 맥아더라인 밖에 위치시켜 한국령으로 표시했는데, 그것을 평화조약에 명시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다만 그렇게 된 이유는 "미국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해석되지 않는다. 울릉도에 부속된 소암초에 지나지 않으므로 특기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본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했다." "아울러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정식 외교공문서에 실존하지 않는 섬(파랑도) 이름을 적어 우리 영토라고 주장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고 기록했다."(785-6)


# 1950~1951년 간 한국의 최대 우선순위는 한국전쟁에서의 생존 및 승리였다.


9 보이지 않는 전투 : '독도분쟁'의 서막과 한·미·일의 대응


"1952년 1월 19일 (독도가 포함된 '영해선 이외의 어족자원 보호관할권(관할선)'을 확정한) 한국의 해양주권선언이 있은 직후, 일본 외무성은 성명을 발표해(1.20) 일본의 독도영유권을 주장했다. 일본 외무성은 한국정부가 한일 간 공해에 50~60마일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데, "강화조약에서 우리에게 귀속된 우리의 독도까지도 한국에 속하게 될 것"이며 "한국정부는 또한 그 지배하에 있지 않은 북한의 해역에까지 그 주권을 확장"하고 있다며 맹비난했다. 일본이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가 일본령에 귀속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일본은 현재같이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고유영토설)이거나 1905년에 무주지로 편입된 영토(무주지편입설)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1951년 샌프란시스코대일평화조약에서 일본령으로 귀속된 섬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게 된 첫번째 배경이 샌프란시스코대일평화조약이었음이 분명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826)


1952년 9월 한국산악회 독도조사대의 방문을 전후하여 재차 독도폭격사건이 발생하자 "1953년 2월 27일 한국군은 한국 및 유엔군 당국의 완전 합의로 독도 주변 공폭(空爆)연습이 없을 것을 미극동총사령관 명의로 보장하였으며, "미국정부로서도 독도는 한국 영토의 일부임을 인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즉각 이에 대해 반박했다. 미극동군사령관에게 조회한 결과 "유엔군사령부는 독도에 있어 폭격연습의 중지를 한국정부에 통고한 것일 뿐, 그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라는 회답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정부는 영유권 주장 근거로 두 가지를 내세웠는데, 첫째 대일평화조약에 일본이 권리·권원·청구권을 포기할 지역을 명문화해 규정했는데 독도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점, 둘째 독도는 미일합동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폭격연습지 리스트에 추가되었는데, 이는 본래 독도가 일본령인 까닭에 합동위원회가 리스트에 올린 것이므로 한국령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다."(840-1)


"독도문제가 표면화되는 중요한 동기는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체결과정에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대한 미 국무부의 우호적 동향을 일본정부가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 미 국무부는 러스크 서한(1951.8.10)을 일본정부에 공식 전달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정부는 윌리엄 시볼드 등을 통해 미 국무부의 결정내용과 관련 정보를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의 팸플릿 작성과 1949년 11월 시볼드의 주장 이후 독도문제는 표면에서 전혀 논의되지 않았고, 1951년 2월과 4월 덜레스의 두 차례 동경 방문에서도 전혀 논의되지 않았다. 그런데 1951년 7월 한미협의과정에서 독도문제가 제기되고, 1951년 8월 딘 러스크 국무차관보의 서한이 제시되고 난 뒤에야 일본의 독도영유권 선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인과관계로 보자면 일본측에 관련 정보가 누설되었거나, 일본측이 관련 정보를 입수한 후 선전이 시작되었음이 분명했다."(859-60)


"일본의 외교적 성명(1952)과 물리적 점령 시도(1953) 사이에 위치한 것이 바로 독도의 미군 폭격연습장 지정·해체 전략이다. 먼저, 1952년의 시점에 일본은 독도영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현저히 약했기 때문에 미국을 이용해 영유권 증거문서를 확보하려 했다. 둘째, 1952년부터 1953년 5월까지 일본 순시선·어선 등이 독도 해역에 출현하지 않거나 독도에 불법상륙을 시도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은 독도가 미군 폭격연습장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셋째, 1953년 3월 19일 독도가 폭격연습장에서 해제되자 5월부터 본격적으로 불법상륙과 일본령 표지판 설치 등의 공격적 행동을 취했다. 넷째, 5~7월 간 여러 차례 독도 불법상륙을 시도하고 외교각서를 발표하는 등 화전양면 공세를 취한 후에야 일본은 한국정부를 상대로 독도의 폭격연습장 지정·해제가 일본의 독도영유권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는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기획된 대응방략의 결과였다."(872)


# 1953년 물리적 점령 시도에 담긴 일본의 의도

1. 독도 폭격연습장 지정·해제로 미국에게 독도영유권을 확보했다는 자신감의 표출

2. 제2차 한일회담(1953.4.15~7.13)에서 일본 영토인 독도를 포함한 평화선(이승만라인)은 불법한 획선(劃線)이라는 것을 강조

3. 자신들의 도발에 맞선 한국측 대응을 통해 재무장강화의 구실을 만들려는 의도


"그런데 한국 어민들이 폭격을 당했고, 이에 대해 한국정부가 강하게 항의하자 미공군사령부는 폭격중단과 폭격연습장 해제를 결정했다. 만약 독도가 한국령이 아니라면, 미군은 한국정부에 대해 불법월경 및 불법어로로 발생한 사고였으며, 귀책사유가 한국측의 위법에 있었다고 통보하면 그만인 문제였다. 일본측 논리에 따르자면, 폭격연습장 지정이 독도에 대한 일본 영유권을 미국이 확인한 증거이듯이, 미국이 폭격연습장 사용중단을 한국정부에 통보한 것은 미국이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정한 증거였다. 나아가 1948년 독도폭격사건에 이어 독도가 한국 어민들이 조업하는 한국 어장이자 한국 영토임을 미국이 재확인한 것이었다. 때문에 미군 당국은 한국정보에 통보했고, 한국정부가 이 사실을 공표한 다음에야 일본정부가 인지하고 미군 당국에 재확인을 한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미국이 일본과 상의 없이 독도 폭격연습장 사용을 중단하고 이를 한국정보에 통보한 사실에 대해 거세게 항의했다."(882)


"당시 미국에게는 한국 상황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었다. 만 3년 이상 지속된 전쟁은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스탈린이 사망함으로써 휴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반공포로를 석방하는(1953.6.18) 등 휴전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상황이었다. 미국에게 이승만은 도저히 통제 불능이었다." "1953년 중반 이승만의 휴전회담 반대가 절정에 달하자 미군 수뇌부는 또다시 이승만 제거계획을 꺼내들었다. 5월 3일 미8군사령관 테일러는 이승만 제거를 위한 에버레디계획(Everready Plan), 즉 상비계획을 승인했다." "이승만을 정점으로 한 한국정부에 대한 미 군부·국무부의 불신과 증오심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달했다. 거칠고 비이성적이며 막무가내인 이승만과 한국정부, 이에 대비되는 세련되고 고분고분하고 합리적인 일본정부, 이것이 당시 미 국무부 당국자들의 눈에 비친 한국과 일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미 국무부는 독도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943-4)


"한일 양국은 독도에서 대결적 충돌을 벌였지만, 미국의 중재와 무마로 1953년 10월 6일 제3차 한일회담을 개최했다. 그러나 불과 보름 만에 일본 수석 구보타 간이치로의 망언으로 10월 21일 회담은 결렬되었다. 구보타는 작심하고 ① 한국이 강화조약 발효 전에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② 일본 패전과 동시에 재한일본인을 전부 철수시킨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③ 재한일본 사유재산 몰수는 국제법 위반이다, ④ 카이로선언의 '한민족이 노예상태'에 있다는 문구는 전시(戰時) 흥분상태에서 작성된 것이다. ⑤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가 한민족에 은혜를 주었다고 발언했다. 한국측에서는 구보타 발언의 철회 및 사과가 회담재개의 전제조건이었지만, 일본은 전혀 그럴 의사가 없었다. 존 앨리슨 신임 주일대사는 1953년 11월 18일 "일본 국내의 정치적 민감성 때문에 구보타 발언의 취소 혹은 직접적 사과는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평가했다."(946)


"주일미대사관의 앨리슨 대사, 윌리엄 터너 참사관, 핀 2등서기관 등은 물론 워싱턴의 동북아시아국 일본과의 더닝까지 모두 러스크 서한의 공개를 통한 미국의 입장표명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동북아시아국장 매클러킨이 러스크 서한 공개를 억제하고 있었지만, 현장과 본부의 공개 요구가 국무부의 회랑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회한 변호사 출신의 덜레스가 미 국무장관이 아니었다면, 1953~54년의 시점에 러스크 서한이 공개되어, 한미·한일 관계가 대파란에 휩싸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덜레스의 지시는 첫째, 독도분쟁과 관련해 미국이 일본편을 들 수는 없다. 둘째, 문제가 있다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야 한다. 셋째, 그때까지 미국이 중재할 수 있다. 넷째, 미국의 입장을 밝히라는 일본정부의 주장은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1월 23일자 앨리슨 주일대사의 전문은 바로 덜레스가 강조한, 미국이 독도분쟁에 "법률적으로 관련되지 않았다"라는 점을 강력하게 논박한 것이었다."(947-8)


동경의 반발이 거세지자 덜레스는 1953년 12월 9일 미 국무부의 최종 입장을 정리한 전문을 동경대사관에 보냈다. "이 전문에서 덜레스는 대일평화조약과 미국의 행정적 결정이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과의 독도분쟁에서 미국이 일본에 우호적으로 행동하길 기대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는 1951년 대일평화조약문의 영토조항에 독도가 일본령에서 배제될 섬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사실, 그리고 1952~53년 간 미일합동위원회가 독도를 일본정부 시설로 인정해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해제한 사실을 언급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의 입장을 한국에 공식 통보한 1951년 8월 10일자 러스크 서한은 일본정부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즉, 한국에 대해서는 정책결정을 통보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본정부에 대해 미국의 입장을 알리는 것이 필요하거나 바람직하겠지만, 최근의 한일관계의 어려움에 비추어볼 때 더 이상 미국이 개입하는 것은 안 된다고 못박았다."(949-50)


"덜레스는 평화회담 당시 미국의 입장은 수많은 조약서명국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것이 서명국들의 합의된 공론이자 결정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적이었는데, 러스크 서한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조문의 최종 성안을 앞둔 급박한 시기에 행정실무자의 편의적 문서작업 과정에서 채택된 것으로, 국가 간 논의·결정 과정이나 고위급 정책결정을 거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덜레스는 미국이 공개적으로 소련이 점령하고 있는 하보마이를 일본령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은 이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는 반면, 공산 침략에 맞서 싸우는 허약한 위기의 한국에 대해서만 강력한 조치를 취하며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덜레스의 정책판단은 (독도분쟁이 "한국의 다케시마에 대한 요구"에서 비롯되었다는 식의) 한국인들의 관점에서 믿기 힘든 사실과 평가들을 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1953년 12월의 시점에 가장 한국의 입장을 옹호한 결정이기도 했다."(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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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김태우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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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서막


1장 폭격의 역사 : 개관


"(공군이론의 창시자로 평가되는) 줄리오 두에는 국가의 모든 자원이 전쟁에 집중된 1차대전의 새로운 전쟁양상에 주목하면서, 지형에 국한되지 않고 언제나 공격에 임할 수 있는 공군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더불어 그는 공군력의 가장 핵심적 요소로 '제공권'의 장악을 강조했다. 두에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전에서 제공권의 상실은 곧 지상작전과 해상작전의 실패를 의미했다. 두에는 제공권 장악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현대 '전략폭격'의 효시가 된 생각들을 최초로 개념화했다." "두에는 적의 저항의지를 말살하는 것이야말로 전쟁의 주요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군력에 의한 적의 핵심지역(vital centers) 무력화를 강조했다. 두에는 심지어 "군사목표보다 공업목표를 중시해야 하며, 적국의 도시에도 인정사정없이 타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군사작전의 핵심 파괴 대상이란 적 병력이 아니라 오히려 적 점령지역의 민간인들이었다."(28)


# 전략폭격과 전술폭격

1. 전략폭격(strategic bombing) : 적의 전쟁수행능력과 전쟁의지를 없애기 위해 적의 주요 도시나 생산시설, 정치·군사의 중추부 등을 파괴하는 폭격작전

2. 전술폭격(tactical bombing) : 지상부대나 해상부대의 작전을 돕기 위해 실시되는 공중폭격


"1942년 2월 아서 해리스의 영국공군 폭격기사령관 임명은 영국 공중폭격정책의 전환점을 의미했다. 당시 영국정부와 공군은 공중폭격 결과의 미미함에 대해 국내 여론의 심한 질타를 받고 있었다. 영국공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공군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수는 날로 증가했다. 처칠은 공중폭격 여론에 내몰렸다. 그로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1942년 초 영국정부와 공군은 마침내 과감한 해결책을 뽑아들었다. 영국정부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정치적으로는 좀더 솔직하고 군사적으로는 좀더 효율적인 '지역폭격'이라는 공중폭격정책을 제시했다. 지역폭격은 '목표구역폭격'(target area bombing)이라고도 불리는데, 명확하게 분리된 다수의 목표를 단일 목표로 취급하는 방법이다. 즉 군수공장이나 항구, 철도조차장 같은 군사 용도 시설과 주변 주거구역 등 시가지 '전체'를 하나로 묶어 군사목표로 간주해 일정 지역을 통째로 융단폭격하는 방식의 폭격작전이다."(35)


"태평양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미군은 유럽에서와 동일한 정밀폭격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공군과의 공조 속에서 지속되었던 유럽에서의 정밀폭격과는 달리, 일본 군사·산업시설을 향한 정밀폭격은 그 효율성에서 적잖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1945년 1월, 헨리 아널드 미 육군항공대 사령관은 태평양지역에서의 국면전환을 위해 중국과 인도에 배치된 미공군 부대들을 전면 철수하고, 모든 B-29기들을 마리아나기지에 집결시켜 하나의 지휘통제 아래 둘 것을 명령했다. 더불어 조직개편의 일환으로 정밀폭격을 주장하던 헤이우드 한셀을 대신해 커티스 르메이를 제21폭격기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미공군의 전략폭격 역사에서 독보적이고 상징적인 인물이 된 르메이는 2차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군의 민간지역 무차별 폭격작전의 상징적 존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40-1)


2장 일제시기 조선인과 공중폭격


"일본군의 전략폭격은 서구 중심의 공중폭격 역사 서술에서 빈번히 제외되거나 망각되었으나 1937년 게르니카 폭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전략폭격이 같은 해 중국대륙의 주요 도시들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본군은 일본의 대만·조선·중국의 저항세력을 향해 무차별폭격을 가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 예로는 1920년 간도출병 당시의 조선인 거주지 폭격과 1930년 대만에서 발생한 항일무장봉기 우서(霧社)사건 진압시 공중폭격 등을 들 수 있다. 간도출병이란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남동부 간도지방에서 조선인 무장독립운동단체 결성이 급증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일본이 제19사단 시베리아 출병군 등을 간도에 투입한 사건을 일컫는다." "당시 일본군은 폭격의 효과와 관련해 "지금까지 한번도 비행기를 보지 못했던 선지인(鮮支人, 조선인과 중국인에 대한 멸칭)에게 많은 효과가 있었다"라고 평가했다."(47-8)


"일본군은 1910년대 이래 다양한 공중폭격 경험을 기초로 1930년대에는 선진적인 항공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더욱이 1930년부터는 일본산 비행기 시대를 열었고, 미쯔비시중공업 등에서 생산된 각종 신형 폭격기들은 1937년 중일전쟁에서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 시점부터 다음 해 10월 27일 우한(武漢) 점령에 이르기까지 16개월 동안 일본 해군항공대(육군항공대 제외)만 무려 1만대의 비행기를 참전시켰고, 약 3만 5000발의 폭탄과 32만발의 지상 총격용 총탄을 소비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그 이전 시기 동서양을 통틀어 어떤 공중폭격 양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공군력의 발현이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전전긍긍한 남경시민, 공습 후 침묵의 일야(一夜)」 「비행대는 적 후방시설 폭격, 상해전선 공육군 활약」 같은 화려한 제목의 신문기사들이 단 하루의 예외도 없이 일본의 공군력을 찬양하고 있었다."(48-9)


3장 냉전과 공중폭격


"(전후 수립된) 합동참모본부의 비상전쟁계획은 유럽지역 적극공세와 극동지역 전략방어라는 큰 틀 속에서 '공군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소련에 대응하고자 했다. 미군은 이러한 전쟁계획하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제어할 수 있는 소련 주변부 공군기지 확보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다. 1945~46년 중국 서부지방과 이탈리아의 공군기지들이 미국의 전쟁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공내전 상황과 중공군의 진격으로 인해 중국의 공군기지는 고려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이탈리아 또한 소련 공격에 대한 취약성 때문에 합참의 계획에서 빠지게 되자 합참은 새로운 지역들을 미군 전쟁계획의 주요 거점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1947년 합참은 일본과 류큐열도를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제어하기 위한 주요 공군기지로 선정했다. 더불어 미국의 여러 주요 인사들은 류큐열도에 위치한 오키나와를 극동지역 전략방어의 거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71-2)


1948년 6월 8일 벌어진 독도폭격사건에서 한국전쟁과 관련한 사실들을 짚어보면 "우선 냉전 초기 독도폭격훈련은 소련과 북한을 향한 미군의 '위력과시용'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적시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독도폭격사건이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하게 읽히는 대목 중 하나는 대규모의 민간인 희생에 관한 부분이다."(78-9) "2차대전기 일본인 혹은 아시아인에 대한 미국의 인종주의적 편견은 현재 학계에서도 통용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독도폭격사건이 2차대전 종료 후 불과 3년 뒤에 발생했다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처럼, 독도폭격사건 2년 후에 발발했던 한국전쟁 중에도 아시아인을 향한 미군의 인종주의적 편견은 결코 현격하게 줄어들지 않았다." "우리는 한국전쟁 발발 불과 5년 전 극동지역에서 무차별 대량폭격을 수행했던 주체들이 자신의 무대를 고스란히 한반도로 옮겼을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82)


제2부 북폭


"1950년 7월 7일 전선에서 북한군의 전황은 겉보기에 상당히 낙관적이었다. 7월 5일 북한군은 오산에서 미 지상군과 최초로 교전하여 그 병력의 3분의 1을 몰살시키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기까지 했다. 기존 학계의 한국전쟁 서술에 따르면, 당시 북한지도부는 승리의 축배를 들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당대 소련 문서에서 보듯, 김일성을 포함한 북한지도부는 소련대사 앞에서 자신의 불안과 당혹감, 좌절감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당대 소련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는 전쟁 초기 북한지도부의 불안과 좌절의 표면적 원인은 전쟁 초기부터 본격화된 미공군의 북한지역 대량 폭격 때문이었지만, 좀더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전면적으로 전쟁에 개입한 미국의 결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는 그들의 식민지기(期) 경험을 통해 획득한 다양한 공중폭격 관련 지식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86-7)


4장 정밀폭격


북한지역 공중폭격을 수행하기 위해 1950년 7월 8일 창설된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의 전쟁 초기 주요 임무는 북한군의 전투력에 기여하는 북한지역 산업시설과 군수창고, 유류저장소, 한강-삼척 라인 북쪽의 도로·철도·항만과 항공시설 등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즉 한강에서 압록강 사이에 있는 북한군 수송망을 차단하고, 북한군 병참보급에 도움을 주는 산업시설을 파괴하는 것이 폭격기사령부의 주임무였다." "한국전쟁 초기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의 북한지역 폭격 목표는 거의 모두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폭격기사령부는 북한지역 출격 이전에 목표물을 구체적으로 배정했는데, 대부분은 평양, 원산, 흥남, 함흥, 청진, 나진, 성진 등 북한의 대도시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공군의 북한지역 폭격이 대도시지역에 국한된 이유는 폭격사령부의 작전 자체가 '차단작전'과 '전략폭격'이라는 2가지 작전개념하에 전개되었기 때문이다."(104)


# 차단작전(interdiction) : 적의 병력과 물자가 전선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적 후방의 교통중심지, 도로, 철로, 병력이동로, 이동병력의 숙소 등을 폭격하는 항공작전


5장 북폭, 그리고 논쟁의 시작


"전쟁 초기 양측의 목표물 인식은 극단적으로 판이했다. 미 극동공군은 군사목표 정밀폭격이라는 폭격정책에 따라, 원산의 조선정유공장·조차장·선착장 등의 목표물을 공격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군 폭격기의 타깃이 5년 전 일본 본토 폭격 당시처럼 도심의 민간지역을 향한다고 주장했다."(117) "원산은 1950년 7월 초부터 약 한달가량 지속된 폭격에 의해 핵심 산업시설과 교통시설의 상당부분을 상실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산지역 민간인 주택 수백채와 북한주민 수천명이 함께 희생되었다. 미공군은 전쟁 발발시점의 폭격정책에 따라 군사목표 정밀폭격을 모색했으나, B-29기를 이용한 고공폭격은 필연적으로 대규모의 민간인 희생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초기 군사목표만을 정밀폭격했다는 미공군 측 주장과, 도시지역 전반에 무차별 폭격피해를 입었다는 북한 측의 주장은 모두 나름의 근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119-20)


# 그 외의 폭격 지역 : 흥남·평양·청진·나진·함흥·겸이포·성진


"한국전쟁 초기 B-29기의 폭격양상에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조종사의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상태에서 진행된 맹목포격이 매우 빈번히 수행되었다는 사실이다. B-29기 조종사들은 기상악화로 인해 목표물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1만피트 이상의 고공에서 대량의 파괴폭탄을 도심 목표물을 향해 투하하곤 했다. 이런 경우 조종사와 폭격수는 매우 세밀한 목표물 판단근거를 지녀야 했는데, 실상 그들은 지극히 초보적 수준의 레이더장치만을 유일한 목표인식의 근거로 갖추고 있었다. 조종사들은 이러한 맹목폭격 방법을 레이더폭격이라 불렀고, 원산과 평양 등의 목표물을 향한 대량폭격에서 이 방식을 빈번히 활요했다. 실상 B-29기는 굳이 레이더폭격이 아닌 주간육안폭격을 수행한다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주변지역 상당부분을 동시에 파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B-29기의 높은 '오폭률' 때문이었다."(144)


"B-29기 정밀폭격의 수행절차와 위력 및 한계는 한국전쟁 초기 미공군 공중폭격의 역사적 실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본 전제들이다. 미공군은 군사목표 정밀폭격을 정책적으로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사실상 실행 불가능한 목표나 다름없었다. 폭격목표물들이 대부분 도시 인구밀집지역 부근에 위치한 반면에, 폭격을 수행할 B-29기들의 목표물 적중률은 터무니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기 미국은 자신의 폭격기들이 군사목표만을 정밀폭격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상 현실과 거리가 먼 수사에 불과했다. 한국전쟁기 북폭에 동원된 수많은 폭격기 조종사들은 대량의 폭탄을 한꺼번에 쏟아부어 타깃 인근의 민간지역 전반을 완전히 괴멸시키는 방식으로 폭격을 진행해야만 자신의 군사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그러한 방식으로 폭격을 수행했다."(146-7)


6장 북한의 피해와 대응


"1939년 일본군의 충칭폭격을 목격하고 에드거 스노우가 표현한 "완전히 개인적인 증오"는 당대 북한의 사진과 문헌들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1950년 9월 9일 9일 『로동신문』은 미공군의 평양폭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 "높이 솟았던 선암리 교회당과 고아원 및 기타 문화시설들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폭연 속에서는 잃어버린 가족들을 부르는 비통한 목메인 목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으며, 구호대원들은 이곳저곳에서 무너진 벽돌을 헤치고 어린이와 늙은이들의 시체를 끌어내고 있었다." 폭격 현장에서 아내와 아이를 잃은 김리익은 다음과 같이 미국을 향한 증오를 표현했다. "우리는 원쑤들의 이 만행을 영원이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다하여 골수에 사무친 이 원한을 갚고야 말 것이다." 미공군의 공중폭격은 한국전쟁 초기부터 "누구도 진실로 이해할 수 없는 완전히 개인적인 증오"를 북한 곳곳에서 만들어내고 있었다."(152-3)


제3부 평범한 임무


7장 폭격의 구조


"한국전쟁기 제5공군의 전술항공작전은 기본적으로 미공군의 일반적 전술항공작전 개념 속에서 작동했지만, 한국전쟁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일정한 차별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요컨대 공군의 보편적인 전술항공작전은 크게 제공권 장악, 전선지역 차단, 지상병력 화력지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중에서 미공군은 일반적으로 제공권 장악을 가장 중시했고, 다음으로 병력과 물자의 이동을 막는 차단작전을 중시했으며, 지상군에 대한 화력지원은 이상의 작전이 완수된 후에 이행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1950년 남한에서는 이러한 단계설정이 상당정도 와해되었다. 북한 공군력이 열악했기 때문에 미공군은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제공권 장악을 단기일 내에 완수할 수 있었다. 또한 지상전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차단작전보다 전선의 지상군에게 직접적인 화력지원을 제공하는 근접지원작전(Close Air Support)이 중시되기 일쑤였다."(170)


"한국전쟁 초기 매우 불안정했던 전술항공통제시스템 속에서 속출했던 미공군의 유엔지상군 공격 사례들은 명백히 '오폭'으로 분류 가능한 사건들이지만, 당시 미공군 전폭기들의 임무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남한지역 도시와 농촌에 대한 폭격은 대부분이 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수많은 임무보고서들은 미공군 전폭기들이 전술항공작전에서 전선 인근의 촌락들을 애초부터 타깃으로 설정했음을 생생히 보여준다." "노근리사건조사반은 노근리사건 발생을 전후한 시점의 미공군 전폭기 임무보고서들을 전반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적잖은 당혹감과 충격 속에 해당 결론에 도달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대 미공군 전폭기들의 임무보고서들 대부분이 남한의 도시와 농촌, 혹은 흰옷을 입은 피난민 행렬을 향한 전폭기의 무차별적 공격이 일상적인 임무인 듯 너무도 태연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180-1)


"기초교육과 훈련과정에서 기능주의적인 전쟁기계로 육성된 미공군 조종사들의 전시 행동양식은 폭격의 구조와 양상을 살피는 데 중요한 분석대상이다. 과거 2차대전기 상당수의 미군 조종사들이 자신들의 전쟁을 인종우월주의, 군국주의, 광신적 민족주의, 팽창주의에 맞서는 숭고한 성전(聖戰)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지원한 공군 조종사들은 달랐다. 조종사 선발, 교육, 임무브리핑, 작전 과정에서 정치적 요소들은 오히려 탈색되었다. 조종사들에게 강조되는 제일의 덕목은 오로지 유능한 비행술과 폭격술뿐이었다. 조종사 개개인의 전투 동기부여도 마찬가지였다.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인종주의와 일본군의 진주만공격, 미군포로 학대 등은 비행기 조종사들에게 커다란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한 조종사들은 개인적 출세와 성공과 같은 원인들에 이끌려 매일 조종간을 잡고 있던 셈이다."(188-9)


"개인적 성공이라는 목표 외에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중요했던 비행 동기부여 요소는 '동료들의 압력'이었다. 조종사들은 일단 공격을 위한 진입대열에 서면 동료들에게 창피한 꼴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투공격을 회피할 수 없었다. 공격을 중단시킬 권한은 대개 전투경험이 풍부한 편대장만이 갖고 있었다. 편대원들은 용맹한 편대장들의 통솔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 출세나 동료들의 압력은 모두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부여였다. 2차대전기 조종사들에게 강조된 파시즘의 축출 같은 정치적 구호들은 한국전쟁 과정에서는 완전히 논외였다." "전폭기 조종사들은 그저 정찰병의 지시를 기계적으로 따르거나, 무감각하게 임무 구역 내에 폭탄을 소진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했다. 그들은 자신의 타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자신의 작전이 어떤 성격의 군사작전이며, 왜 그 같은 공격을 수행해야만 하는지 되묻는 경우가 없었다."(190-1)


"조종사들은 기계로 양성되었지만 결코 완전한 기계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차별적인 민간지역 폭격이나 민간인 공격을 정당화시켜야만 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살상이나 민간지역 폭격과 관련하여 조종사들이 제시한 가장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자기정당화 논리는 크게 2가지다. 첫째는 북한군 점령지역의 모든 민간인이 궁극적으로 북한군의 군사활동을 돕는 세력으로서 사실상 적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논리고, 둘째는 군인으로서의 직업정신을 강조하는 논리로, 자신의 민간인 공격을 부대 상관이나 정찰병의 지시에 의한 직업적 업무수행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셔우드의 인터뷰 분석결과에 따르면, 조종사들은 살인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공격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전투원과 민간인 사이의 구분을 흐리게 만드는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192-3)


8장 흰옷을 입은 적들


"전술항공통제반(Tactical Aircraft Control Parties, TACP)이나 모스키토 정찰병의 유도에 의한 공중폭격은 전폭기의 전술항공작전 수행에서 가장 원칙적·보편적으로 활용되는 폭격절차다. 전선지역에 배치된 통제관의 유도에 의한 폭격은 목표물 발견이 힘든 전폭기 입장에서는 매우 효율적인 공격방법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기 전술항공작전의 성격 규명에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정찰병의 유도에 의해 공중폭격을 실시하는 경우, 일단 공격지시가 하달되기만 하면 모든 전폭기 조종사는 공격지점의 적 병력이나 민간인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진행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기 미공군이 직접 작성한 수많은 임무보고서와) 전쟁 중 실시된 조종사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실제 전폭기 조종사들은 연료부족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전술항공통제반이나 모스키토 정찰병의 공격지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반문하지 않고' 공격을 실시했다."(198)


적 병력이나 보급품의 존재를 전혀 확인할 수 없는 민간지역에 대한 무차별적 '시험폭격'에 대해 증언한 "전폭기 조종사들은 대낮에 전선 인근의 북한군 병력을 찾아내는 데 많은 곤란을 겪었다. 빠르게 비행하는 전폭기 내에서 산속에 은신한 적을 찾는 일은 어려웠다. 이런 까닭에 미공군 조종사들은 점차 적 병력이 거주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특정지역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점차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같은 '의심지역 시험폭격'에서 민간인 거주지역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다수의 조종사들은 오로지 자신의 '육감'(hunch)에 의존해 남한의 도시와 농촌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조종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빠른 시간 내에 적 병력을 찾아내 살상하는 것뿐이었다. 이들은 네이팜탄 투하나 기총소사로 인한 시험적 공격으로 인해 해당 지역의 민간인이 다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205-7)


9장 남한지역 대량폭격


"미 극동공군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B-29기를 북한지역 전략폭격과 차단작전에만 활용할 예정이었으나, 지상전의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B-29기를 남한의 지상군 '교전지역'까지 불러들였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지상군의 수세상황에 맞서 공군의 근접지원작전을 매우 강조했다. 특히 파병시기가 가장 빨랐던 미 제24사단이 위험에 직면하자 7월 9일 맥아더는 B-29 중폭격기 전부를 출동시켜 악전고투하는 지상군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폭격기사령부 B-29기들의 근접지원작전이 절정에 이른 시점은 1950년 8월 중순이었다. 8월 중순 북한군은 낙동강전선을 돌파하여 부산을 점령할 목적으로 낙동간 북안의 경북 칠곡군 왜관읍 주변에 병력을 결집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8월 13일 극동공군사령관을 자기 사무실로 불러 적의 대병력이 집결하고 있는 지역을 B-29기 '전부'를 동원하여 융단폭격하라고 지시했다."(229-30)


"극동공군은 1950년 7월 한강 남안을 따라 최초로 폭격선을 설정했는데, 이 폭격선이 유엔군 후퇴와 함께 결국 낙동강 인근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스트레이트마이어는 조종사들에게 폭격선 남쪽의 목표물 공격시에는 공격 이전에 적극적으로 목표물을 확인할 것을 요구했지만, 폭격선 북쪽의 목표물에 대해서는 제한없는 공격을 허락했다. 폭격선은 전선의 남하와 함께 남쪽으로 이동했고, 제한없는 공격의 범위는 남한지역 전반에 걸쳐 점차 확장되었다." "(열차, 차량, 탱크, 병력의 이동을 막기 위한) 남한지역 교량 공중공격은 필연적으로 많은 민간인 희생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포화를 피해 길을 떠난 민간인들이 피난행로의 병목과도 같은 교량에 대거 운집한 상황에서 북한군의 전선 진입을 차단하고자 했던 유엔 지상군과 공군은 피난민들에게 사전 경고 없이 교량을 폭파하곤 했다."(238-40)


제4부 초토화정책


"(중국군의 참전 가능성 여부를 묻는 질문에) 맥아더의 대답은 단호했다. "거의 없습니다. (···) 우리는 한반도에 우리의 공군기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중국이 평양으로 밀고 내려오려 한다면 최악의 대량학살(greatest slaughter)이 벌어질 것입니다." 트루먼은 "대량학살"이 벌어질 것이라는 맥아더의 발언에 특별히 토를 달지 않았다." "중국군이 참전할 경우 최악의 대량학살을 벌이겠다는 맥아더의 발언은 실제 1950년 11월 초 중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이 공식화되면서 구체적인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1950년 11월 5일 맥아더는 북한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군사목표로 간주하는 '초토화정책' (Scorched Earth Policy)을 명령했다. 이후 한국전쟁 발발 이래 워싱턴의 정밀폭격정책에 따라 금지되어오던 B-29기의 소이탄 투하가 한반도 상공에서 현실화되었다. 1950년 겨울, 유난히 추웠던 북한 도시와 농촌의 눈밭 위에 불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268-9)


10장 초토화정책의 결정


"중국인민지원군의 본대는 한국군이 평양을 탈환했던 바로 그날, 10월 19일 저녁부터 안둥(지금의 단둥), 장전하구, 지안을 통해 압록강을 건너 각각 신의주, 삭주, 만포진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한반도에 진입한 중국인민지원군은 제13병단 예하 4개 군 12개 사단을 포함해 총 병력 26만명에 달했다. 애초 이들은 예상방어지역을 확보하여 일정기간 방어 후 공세로 전환한다는 작전방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방침은 유엔군의 북한지역 전진 방식에 조응하여 급속히 변경되었다." "모든 유엔군 부대들은 성과달성을 위해 마치 국경선까지 경주대회라도 하듯 정신없이 전진하면서 적에게 자신의 취약점을 고스란히 노출시켰다. 중국군은 이렇듯 고립된 상태로 접근해오는 유엔군 부대들을 개별적으로 철저히 "각개격파"해나갔다. 1950년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중국군을 만난 미군과 한국군은 여지없이 그 병력의 상당수를 잃었다."(282)


"(초토화정책을 결정한) 맥아더는 (만주 국경 8킬로미터 이내 지역을 폭격에서 제외한) 합참의 지시에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그는 만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인력과 물자가 유엔군에 "엄청난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고 위협하며, 합참 명령의 즉각적인 재검토를 요구했다. 같은 날 맥아더는 합참에게 보내는 다른 전문을 통해 병력 증원을 요청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궁지에 몰리거나 여태까지 얻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다시 한번 협박했다. 결국 합참은 "기존에 계획했던 신의주 표적과 압록강 철교 끝부분을 포함하는 국경 인근 북한지역 폭격을 허용한다"고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냈다. 합참은 국경지역 폭격을 허용하는 전문에거 "미국의 국익 차원에서 볼 때 한반도 분쟁을 국지화하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표현을 추가했다. 그러나 해당 전문에서 '한국인들을 위해' 민간지역 폭격에 신중해야 한다는 표현은 어디에도 없었다."(290)


11장 불타는 눈밭


"(2차대전기 일본 도시지역에 투하된) M-69는 석유를 기본으로 하는 소이탄인 반면, (한국전쟁기 도시지역에 주로 투하된) M-76은 석유와 금속의 장점이 넓은 방사성(放射性)과 분말금속 소이탄 매개체의 화력상승효과가 합해진 강력한 무기다. M-76 내에는 '굽'(goop)이라는 마그네슘과 원유의 화합물이 들어갔다. 분말 마그네슘과 만난 석유는 진한 농도의 반죽 덩어리로 변한다. 불타는 마그네슘은 으레 강철도 녹일 수 있는 섭씨 1980도까지 온도가 상승하기 때문에, 굽은 목조건물뿐만 아니라 차량·열차·철로·공장 등의 파괴에도 유용한 폭탄원료였다. 마그네슘은 물과 융합되면 폭발성이 있는 수소 등의 가스를 형성시키기 때문에 진화도 어렵다. 불타는 마그네슘은 밝은 불꽃을 내며 인체에 해로운 흰색의 산화마그네슘 연기까지 형성시킨다. 신의주폭격 사진에서 유난히 하얗던 연기는 산화마그네슘의 존재를 증명한다."(303-4)


"미공군은 극도로 인화성이 강한 소이탄을 도시지역에 투하한 후, 화염이 수일 동안 불탈 수 있도록 (도시주민들을 목표로 삼은) 기총소사를 쏟아부으면서 진화작업을 방해했다. 진화작업의 방해를 위한 또다른 활동은 소이탄 투하 직후의 도시 전지역에 대한 시한폭탄 투하였다. 국제연맹 조사단은 미공군 폭격기들이 주로 소이탄 투하 후에 시한폭탄을 투하했다고 주장한다. 조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시한폭탄은 다양한 시간대에 폭발했는데, 낙하 후 20일 이후에 폭파하는 것들도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1950년 8월과 11월 극동공군은 남북한 도시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비인도적인 시한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했던 것이다. 작전은 민간인을 희생시키고 그들 사이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주요한 목적으로 했다. 북한주민들은 기총소사 및 시한폭탄이 두려워 소이탄의 화염을 감히 끌 엄두를 못 냈다."(307-8)


"제12전폭대대 F-51 전폭기편대들의 임무보고서는 중국군 개입 이후 미공군 전폭기들의 작전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폭기 편대들은 적 병력이나 보급품을 찾아내기 위해 각별히 애쓸 필요가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임무구역에서 적 병력이나 보급품을 수색하다가, 적절한 목표물을 발견하지 못하면 해당 구역 내의 마을과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적 병력이나 보급품의 존재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민간인 거주지역은 그 자체로 훌륭한 공격목표였다. 기지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마을은 탑재한 무기를 모두 "소진"할 수 있는 좋은 목표물로 인식되었다. 실제 대부분의 전폭기 임무보고는 회항 직전의 마을 폭격에 대한 묘사에서 "공격"(attack)이나 "폭격"(bomb)이라는 표현 대신 "소진"(expend)이라는 표현을 빈번히 사용했다. 전폭기들은 탑재한 무기들을 마을에 모두 쏟아붓고 난 후에야 기지로 돌아왔다."(312)


제5부 협상하며 죽이기


"1953년에 접어들며 미공군은 더이상 값어치 있는 목표물을 찾아낼 수 없는 북한의 도시와 농촌 지역을 향해 폭격의 강도를 한층 더 높이기로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민간지역을 향한 대량폭격을 통해 정전회담장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한다는 소위 '항공압력전략'이 더욱더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결정은 대부분 토굴생활로 어렵사리 살아가던 북한 도시와 농촌의 무고한 민중들에게는 또다시 커다란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폐허 아래 지하 토굴마저도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 생존은 모든 북한주민들의 최대 당면 과제가 되었다. 정전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양측 대표들은 공히 인도주의적 원칙을 내세우며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강력히 호소하고 있었지만, 협상기간 내내 폭격을 견뎌내야 했던 북한주민들에게 2년의 협상 기간은 그저 비인도적인, 생존을 위한 투쟁의 기간에 불과했다."(336)


12장 기계와 인간의 전쟁


"한국전쟁기 미공군 작전사를 다룬 기존의 연구들은 정전협상이 시작된 후 1년여의 기간(1951년 6월~52년 6월)을 철도차단작전의 시기로 정리한다. 실제 이 시기 북한지역 철도차단은 미공군의 가장 중요한 군사목표 중 하나였다. 38선 인근의 전선에서 싸우는 공산군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식량과 무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기에 열차는 가장 중요한 보급품 이동수단이었다." "북한이 화물과 여객 수송에서 (각각 90퍼센트와 62퍼센트를) 철도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과거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에 따른 대대적인 철도부설정책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제는 철도건설에서 군사적 측면을 중요하게 고려하여 항만집중적이고 남북종단적 성격을 띤 철로를 건설했다. 물론 이 같은 특징은 일본의 전쟁수행뿐만 아니라 북한의 한국전쟁 수행과정에서도 주효하게 활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339-40)


북한지도부는 말 그대로 철도 및 교량 복구사업에 전쟁의 사활을 걸었다. "1951년 8월부터 12월까지의 스트랭글작전과 1952년 3월부터 5월까지의 쌔처레이트작전으로 대표되는 미공군의 집중적 차단작전은 사실상 '기계와 인간의 전투'에 다름없었다. 전선이 고착되고 전투 자체가 1차대전기의 참호전처럼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후방으로부터의 원활한 보급은 전쟁의 사활을 가르는 문제가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유엔군은 일본과 남한의 후방지역으로부터 보충병력, 물자, 무기를 어려움 없이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중국군과 북한군은 미공군의 북한지역 폭격으로 인해 후방에서 또다른 치열한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후방의 북한주민들도 미공군의 폭격으로 인해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는데, 특히 야간 철도복구와 노무활동에 종사하기 위해 상당수가 밤낮을 바꿔 살아야 했다."(347)


13장 항공압력전략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북한지역 폭격피해에 대해 직접 보고했던 1952년 7월은 극동공군작전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7월의 북한지역 공습은 기존의 차단작전과는 상이한 목적하에 수행되었다. 극동공군은 차단작전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기존의 폭격전략에 큰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소위 '항공압력전략'(air pressure strategy)이라는 전략개념이 이 시기부터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항공압력전략은 공군력에 가해진 기존의 정치적·군사적 제한요소를 해제시키고, 오히려 공군력을 '정치적 압력수단'으로 직접 활용하는 새로운 개념의 공군전략이었다."(359) "(랜돌프와 메이오는 '항공압력전략'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철도와 노반을 가장 낮은 수위에 배치했다. 동시에 중요 목표물 리스트를 새로 작성했는데, 그 첫번째는 "보급품"(supplies)이 제시되었고, "후방의 병력과 인력"(rear area troops and manpower)과 "도시와 마을의 건물들"이 주요 타깃으로 추가되었다."(361)


"극동공군은 항공압력전략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공산측 지도부와 주민들에게 심리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첫번째 타깃으로서 북한지역의 수력발전소에 주목했다. 수풍·부전·장진·허천·부영·금강산 등의 수력발전소들은 일본 최고 기술자들이 20년 이상의 공사기간을 통해 수립한 당대 최고 수준의 시설들이었다. 이들은 한반도 전력의 90퍼센트 이상을 생산해냈다." "1952년부터 미공군 정보보고서들은 북한의 산업시설들이 전국적으로 분산된 지하시설을 통해 재건되고 있다는 분석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극동공군은 지하갱도를 따라 재건된 북한 산업시설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산업시설 직접 파괴가 아닌 동력원 파괴가 좀더 효율적인 작전으로 부상했다. 동력이 없는 암흑 속에서 북한의 생산시설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었다. 수력발전소의 파괴는 어느새 극동공군의 시급한 해결과제로 부상하고 있었다."(363-4)


"1950년대 미공군 역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미 제24사단장 윌리엄 딘의 묘사를 인용했다. "공산군의 마을 보급품 집적소(supply dumps)와 '예전에 건물들이 존재했던 흔적만이 남아 있는 눈 덮인 공터'에 대한 딘 장군의 묘사는 이 같은 보급품(supply), 병력(personnel), 통신센터(communication centers) 파괴의 실질적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딘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폭격피해의 대상을 그저 "소도시"(towns)와 "마을주민"(villagers)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에 작성된 수많은 미 극동공군의 문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후 미공군은 여전히 북한의 도시와 농촌 폭격을 보급품 집적소, 병력, 통신센터에 대한 공격으로 묘사했다. 전쟁기에도 적극적으로 정당화되었던 미공군의 비인도적 군사작전에 대한 묘사가 전후 미군의 공식 역사에서 더욱 치밀하게 합리화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다."(382-3)


맺음말 극단의 기억을 넘어 평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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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가토 요코 지음, 윤현명 외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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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일본 근현대사를 생각하다


"전쟁은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서 주권·사회계약에 대한 공격, 다시 말해 상대국의 헌법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 〈전쟁 및 전쟁상태론〉, 루소


"통수권 독립이라는 발상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야마가타는 세이난전쟁 이듬해인 1878년 8월 근위포병대가 급료에 대한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킨 것을 보았고, 당시 자유민권운동이 사회에 퍼지고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야마가타는 1897년 스스로 참모본부장에 취임해 군령軍令에 관한 사항은 오로지 참모본부장이 관리한다는 규칙을 제정했습니다. 야마가타는 자유민권운동의 영향이 군대에 미치는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또한 세이난전쟁의 교훈을 살려 군대 명령권자와 정치 지도자를 분리하는 것이 국가의 안전을 위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대규모 반란을 막기 위해 그러한 분리가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통수권 독립은 결과적으로 인류의 역사를 불행하게 만들었는데, "통수권 독립으로 일본 군부는 정치 지도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었고, 이것이 더욱 전쟁을 부추겼기 때문입니다."(70-1)


1장 청일전쟁 - '침략·피침략'을 넘어 봐야 할 것


"1880년대에 이홍장은 중국군의 근대적 개혁을 추진합니다. 또 1881년에는 신장 지역의 평정에 힘썼습니다. 중국의 서부 신장에 이리伊犁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권이지만 청의 지배 영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야쿠브 베그가 새로운 국가를 세웠습니다. 그러자 청 정부는 신속하게 군대를 보내 이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질서 회복을 도모하는 한편, 러시아와는 영토 일부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이리조약'을 맺었습니다. 이홍장의 무력 대응이 효과를 거둔 셈입니다. 이홍장의 단호한 결단력을 본 열강은 '오! 중국이 변했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중국이 만만찮은 상대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청은 조선을 대하는 태도마저 바꾸었습니다. 그때까지 청의 조선 관련 정책은 '예부禮部'가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이홍장은 1881년 조선과 안남을 자신이 직접 담당할 수 있게 제도를 고쳤습니다."(98-9)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脫亞論'은 톈진조약(1885.4) 이전에 쓰였습니다. 역사가 반노 준지는 후쿠자와가 "우리 나라는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흥하게 할 만한 여유가 없다"라고 한 것은 '개화파에 대한 지원을 통해 조선에 진출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일종의 패배 선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웃 나라는 조선을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지나와 조선을 대하는 방법도 이웃 나라임을 고려해 특별히 대하는 것이 아닌, 서양인이 그들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면 된다"라고 한 것은 '이제는 전쟁으로 청을 친 다음 조선 진출을 달성하는 수밖에 없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요컨대 후쿠자와의 '탈아론'은 서구 열강의 아시아 분할이 임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대를 포기하고 조선과 중국을 저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일본의 조선 진출은 조선 내부의 개혁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중국을 친 다음 무력을 통해 실행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05-6)


"빈 대학 정치경제학 교수였던 슈타인은 이토 히로부미가 유럽을 방문했을 때 이토에게 메이지헌법의 기둥이 되는 권력분립의 기본 구조, 국가가 행하는 사회정책의 필요성 등을 가르쳐주었습니다."(107) "슈타인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는 주권선과 이익선의 개념을 설명했습니다. 주권이 미치는 국토의 범위가 '주권선'이고 그 국토의 존망에 관계되는 외국의 상태가 '이익선'인데, 조선을 중립국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이익선이 된다고 했습니다. 즉 '조선을 즉시 점령할 필요는 없다. 스위스나 벨기에 또는 수에즈운하처럼 조선을 중립국으로 두는 것에 대해 영국·러시아·청·독일·프랑스 등의 승인을 받으면 된다.' 이것이 슈타인의 조언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논의에는 '중국 대신 일본이 조선의 중립을 보장한다. 담보擔保한다'는 논리가 등장합니다. 담보는 무력과 같은 실력으로 특정한 상태를 계속 유지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두 사람의 만남에서 그런 분위기가 형성된 것입니다. 1889년 6월의 일입니다."(111-2)


"요시노 사쿠조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교수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이념적 기초를 만든 사람입니다." "요시노의 제자 오카 요시타케는 요시노 못지않게 뛰어난 인물로,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부 해군과 함께 미국을 통한 화평을 극비리에 추진하던 도쿄대학 법학부 교수 그룹 중의 한 명입니다." "오카는 일본의 민권파가 개인주의·자유주의 사상이 약한 것은 메이지 초기부터 국권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만약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없다면 상황에 따라 사람은 국가가 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근대 일본에서는 민권파나 반정부세력이라 할지라도 외교·군사에 관해서는 후쿠자와나 야마가타와 비슷한 생각을 공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불평등조약 아래 근대 국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민주의 이상 이전에 '먼저 국권을 확립하자'는 '합리주의'가 부각됐던 것입니다."(116-7)


"후쿠자와 유키치는 '민당은 의회에서 중의원 의원의 8할을 차지하기 때문에 정부의 법률안, 예산안 통과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민당은 정부에 대해서 번벌정부, 전제정부라는 비판밖에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당시 정부에는 조슈·사쓰마·도사·히젠이라는 네 개의 번 세력이 있었고, 이들이 정부 요직을 독점했습니다. 그 때문에 민당인 자유당이나 개진당 소속 사람은 아무리 돈이 있고 우수해도 번벌정부의 내부로 파고들 수 없었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타이완을 식민지로 획득했습니다. 태평양전쟁 종결 시점을 기준으로 타이완 총독부에는 4만 3870명의 일본인 관료가 있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수입니다. 그래서 후쿠자와가 "지금이야말로 민당은 새로운 식민지를 획득하고, 거기서 지금껏 얻지 못했던 관료직을 얻어라"라고 했던 것이지요. 이것이 자유당을 포함한 민당이 청일전쟁을 그다지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124-6)


2장 러일전쟁 - 조선이냐 만주냐, 그것이 문제로다


"먼저 제국주의 시대의 전쟁의 '효용'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러일전쟁의 효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해서 간신히 이겼습니다. 그 결과 서구 열강에 대사관을 둘 수 있는 나라가 됐습니다. 당시에는 강대국과 불평등조약을 맺은 나라는 대사관을 둘 수 없었습니다. 대사관 대신 공사관만을 두었지요. 영국 주재 일본공사관이 대사관으로 승격된 것은 1905년 12월의 일입니다. 러일전쟁의 강화조약이 같은 해 9월에 맺어졌으니 국가의 격이 확 달라진 셈입니다. 이처럼 당시의 국제 관계는 실로 엄격한 상하 관계였습니다."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불평등조약 개정 등 당면의 국가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러일전쟁 5년 뒤에 이루어진 1910년의 한일합병입니다. 이는 섬나라 일본이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획득한 타이완과 펑후제도가 섬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149-51)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커다란 희생을 치렀습니다. 뤼순전투에서만도 다수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생겼습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 사회에는 '일본은 20만 명의 희생과 20억 엔의 돈으로 만주를 획득했다'는 말이 널리 퍼졌습니다. 실제로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은 러일전쟁 4년 뒤인 1909년 〈제2대청정책淸政策〉이라는 의견서에서 '20억 엔의 자재와 20만 명의 사상자'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 후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도 "20억 엔의 자재와 20만 명의 영령으로 획득한 만주의 권익을 지켜라"와 같은 슬로건이 등장합니다. 만주의 권익을 둘러싸고 중국과 대립했던 쇼와 시기에도 일본인은 러일전쟁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주사변의 근저에는 러일전쟁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 간의 기억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1930년대에 본격화된 일본의 침략전쟁의 뿌리는 러일전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156-7)


# 1898년 러시아가 시모노세키조약의 배상금을 지원하는 담보로 중국에게 뤼순과 다롄을 얻으면서 랴오둥반도 남쪽에 부동항 확보 → 극동 지역의 군사력 운용폭 확대 : 일본에게는 악몽 같은 상황


"러시아가 만주를 잠식해 들어가던 1903년 10월경, 극동 총독에 임명된 베조브라조프는 황제를 잘 설득했습니다. '철도를 만드는 것보다 좀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한국을 차지하면 돈이 들지 않습니다. 일본은 별 것 아닙니다'라는 식이었지요. 그는 '한국 또는 한반도를 차지하면 랴오둥반도의 뤼순·다례 항구를 지킬 수도 있다. 중둥 철도 남쪽 지선의 끝자락에 있는 뤼순·다롄을 방위하기 위해 육지에서 철도를 부설해 마을을 건설하는 것은 돈이 많이 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들이지 않고 뤼순·다롄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다 쪽, 즉 한반도를 잡아두는 편이 비용이 싸다. 일본이 진짜로 전쟁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청일전쟁은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러일전쟁에는 여기에 또 다른 문제가 추가됐군요. '철도 부설과 도시 건설에 필요한 비용을 싸게 하는 것'과 '극동의 바다에 해군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각각 경제 및 안전보장 문제와 연결됩니다."(173-4)


"어째서 일본은 러시아에 대항할 때 한국 문제를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일본은 러일전쟁을 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돈을 빌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 문제로 전쟁을 하려고 합니다. 돈을 빌려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어? 이미 한국 문제로 청일전쟁 때 싸우지 않았나요?"라고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일본의 한국 확보는 미국과 영국에 관심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요? "남부의 목화로 만든 무명(면)을 수출하고 싶지요? 콩을 세계적으로 상품화하고 싶지 않나요?"라고 말하면 됩니다. 이렇게 수출 시장으로서 만주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결국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러시아에 맞서면서도, 서구 열강을 향해서는 만주의 문호 개방을 위해 러시아와 맞서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서구 열강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구 열강에 비해 늦게 '제국'이 된 일본으로서는 주변의 지원이 절실했습니다."(181-2)


"8만 4000명이라는 엄청난 전사자를 낳았지만, 러일전쟁 승리 덕분에 일본은 러일협상에서 요구했던 것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우세한 이익'이 포츠머스조약에서 '탁월한 이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청일전쟁 때의 '완전무결한 자주독립의 나라'라는 표현이 이제는 '정치·군사 및 경제적인 탁월한 이익'으로 바뀌었습니다." "〈제3조 : 러시아제국 정부는 청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또는 기회균등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일체의 영토상 이익 또는 우선적·전속적인 양여를 만주에서 얻을 수 없음을 선언한다.〉 그전까지는 러시아가 중국의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을 점령함으로써 다른 나라는 만주에서 배제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각국이 평등하게 만주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 영국 그리고 전쟁 중 러시아를 원조했던 독일, 프랑스도 포함됩니다. "자, 제국주의 국가 여러분! 어서 오세요"하고 중국 동북부의 문을 활짝 연 셈입니다. 이것이 러일전쟁이었습니다."(188)


3장 제1차 세계대전 - 일본이 느꼈던 주관적인 좌절감


러일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이 호전적인 국가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미일관계가 어색할 즈음 일본은 독일이 서태평양의 섬을 지배하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마리아나, 팔라우, 캐롤라인, 마셜 등의 미크로네시아 지역은 미국이 태평양을 횡단해 동양으로 올 때의 길목에 있습니다. 일본은 이런 섬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가토 다카아키 외상은 영일동맹을 내세워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려고 했습니다. 동맹국을 돕는다는 명분이었지요. 당시 영국은 일본의 개입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가토 외상은 영일동맹 협약 전반의 이익을 방호한다는 명목으로 참전을 강행했습니다. 영국이 대서양에서 안심하고 싸우는 동안 일본 해군은 1914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독일령 섬, 즉 남양군도를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당시 독일은 마셜제도의 잴루잇, 캐롤라인제도의 포나페·트루크·야프, 마리아나제도의 사이판 등지에 해군기지를 갖고 있었는데, 이것을 일본이 점령한 것입니다."(210-1)


남양군도 다음으로 일본이 노린 곳은 중국 산둥성의 권익입니다. "칭다오와 자오지 철도를 차지하면 일본은 유사시에 산둥반도의 자오저우만·칭다오에 상륙한 다음, 철도를 통해 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난까지 손쉽게 진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철도를 따라 톈진, 베이징까지 금방 북상이 가능합니다. 그전에는 베이징에 도달하려면 우선 한반도의 인천에 상륙하고, 거기서 다시 철도로 만주의 안둥까지 가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 펑톈·진저우·산하이관을 넘어서 톈진·베이징으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중국의 심장부를 달리는 가장 좋은 철도는 영국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독일령을 빼앗음으로써 영국 이외에는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중요한 철도를 손에 넣은 것입니다. 사실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베이징을 공략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나라는 그때까지 없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육해군 공동 작전을 수행했는데, 이제는 중국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능해졌습니다."(216-7)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과 미국·영국·프랑스 간에 벌어진 격론은 일본이 차지한 독일령 산둥반도의 권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격론의 핵심은 산둥반도를 바로 중국에 돌려줘야 하느냐, 아니면 일본이 패전국 독일로부터 정식으로 수령한 다음 적절한 시기에 중국에 반환해야 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하라 내각과 정우회는 파리에서 있었던 외교상의 문제를 전부 이전 정권인 제2차 오쿠마 내각과 헌정회, 그리고 가토 외상의 책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이후에도 계속 조명되어 왜곡된 기억을 낳게 했습니다. 이전 정권의 잘못으로 일본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부당하게 비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서구 국가가 중국에 동조해서 일본을 부당하게 비난했다는 이미지는 일본의 우익에 의해 확대되고 재생산됐습니다. 민간 우익으로 유명한 기타 잇키는 산둥 문제를 둘러싼 격론에 대해 일본이 중국과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배척됐다고 평가했습니다."(238-9)


"파리강화회의에서 채택된 베르사유강화조약의 제156조부터 제158조를 보면 "산둥의 권익은 일본의 것이 된다"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요구가 전부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의 외교가 실패했고 다른 연합국이 일본을 따돌렸다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객관적으로 당시의 일본은 권익을 챙겼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정치·경제 문제보다 의식의 문제, 정체성의 문제가 더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일본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느낀 위기감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미국 의회가 한국의 3·1운동을 언급하면서 일본의 가혹한 식민 지배를 비판하고 그런 일본과 타협한 윌슨 대통령을 비난하자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쨌든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은 감정의 상처가 되어, 깊고 무겁게 남았습니다. 1930년대 이후 그 상처는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265-7)


4장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 일본의 자멸과 중국의 역할


"만주사변 발발 이전에 도쿄제국대학 학생들이 만몽 문제에 대해 무력행사를 해야 한다고 답했던 것을 되새겨봅시다. 무려 9할에 가까운 사람이 무력행사에 찬성했습니다. 이는 당시의 일본인이 만몽 문제를 일본의 주권에 대한 위협 혹은 일본 사회의 기본 원리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중의원 의원인 마쓰오카는 1930년 12월에 개회한 통상회의에서 의원으로서 첫 연설을 했습니다. 이때 그 유명한 "만몽은 우리 나라의 생명선이다"라는 말을 했지요. 이때는 만주사변 발발 9개월 전으로, 당시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의 외상 시데하라 기주로가 미국·영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협조 외교를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협조 외교를 비판하는 마쓰오카의 주장은 "첫째 경제적·군사적으로 만몽은 일본의 생명선이라는 것, 둘째 일본 국민의 요구는 "생물로서의 최소한의 생존권"이라는 것이었습니다."(286-7)


"일본에서는 '생명선'·'생존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그렇다면 그 특수 권익의 실태는 어땠을까요?" "1926년의 통계에서, 만철과 일본 정부의 투자를 합하면 61퍼센트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법인 기업이 31퍼센트인데, 여기에는 만철로부터 유입된 자본 약 3억 700만 엔이 포함돼 있습니다. 따라서 약 3억 700만 엔을 만철의 것으로 계산하면 만철과 일본 정부의 대만몽 투자 비율은 무려 약 85퍼센트가 됩니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운수업 외에도 정부로부터 광업 및 철도 부속지 사업을 넘겨받아 관리하는 회사입니다. "결국 만몽에 대한 투자는 대부분 국가 관련 투자였습니다. 따라서 국민으로부터 비판이 제기되기 어려운 구조였지요. 미국이나 영국처럼 사기업의 투자가 활발했다면 기업인의 비판이 정책에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 관련 지분이 85퍼센트에 달하는 상황에서 만몽에 대한 정책은 국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300-1)


"만주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은 양자 간 논의를 주장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영국·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이 뚜렷해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으로 독일 정부의 배상금 지불이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만으로도 영국은 충분히 바빴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관동군과 일본이 아주 심한 일을 저지르지 않는 한, 일본을 통해서 동아시아의 질서를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대일 융화'라는 말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에 대해서는 "타인만을 상대하지 말고 자기 본분을 다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체적으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잔혹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연맹은 조사단을 파견합니다. 그 유명한 '리튼 조사단'입니다. 관동군과 일본이 아주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는 한, 일본에 유리한 보고서를 작성할 준비가 된 조사단이었습니다."(316-7)


"리튼 조사단은 일본이 '(장쉐량 정권에 의한 동북 3성의) 무법 상태로 인해 다른 어떤 국가보다 더 많이 힘들었다'고 인정했습니다. 또 중국이 국민당의 지시 아래 일본 상품을 불법적으로 '보이콧'했다고 했습니다." "만약 일본이 만주에서 경제적 권익만을 노렸다면 리튼 조사단의 결론에 만족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 특히 일본 군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일단 보고서는 일본의 행동을 국제연맹 규약 위반 또는 부전조약 위반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9월 18일의 군사행동을 합법적인 자위 조치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또 만주사변 이후 1932년 3월에 독립을 선언한 '만주국'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습니다. 만주국이 국민의 독립 요구에 따라, 즉 민족자결의 결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일본 관동군의 힘을 배경에 두고 만들어진 국가라고 명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이 만주 지역의 '중국적 특성'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만주가 중국 땅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318-9)


강경 발언을 거듭하면서도 내심 중국의 타협 요청을 기다리던 "우치다 외상의 계획을 망친 것은 쇼와 전전기에 항상 말썽을 일으켰던 문제아, 바로 육군이었습니다. 1933년 2월 육군은 만주국의 남쪽, 만리장성의 북쪽에 있는 중국의 러허성을 침공했습니다. 사실 작전은 현지군의 독단이나 폭주가 아니었습니다. 각의를 거쳐 결정된 작전을 천황 자신이 1개월 전에 재가裁可한 것입니다." "일본은 만주국을 국가로 승인하면서 1932년 9월 15일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가 그것입니다. 일만의정서는 일본과 만주국 쌍방은 한쪽의 영토·치안에 대한 위협을 다른 한쪽에 대한 안녕·존립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공동으로 방위에 임한다고 규정했습니다." "따라서 일본군의 개입은 조약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만주국 내에 일본군이 주둔한다'는 이런 엉터리 조문을 강요한 것 자체가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가임을 잘 보여줍니다."(331-2)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만들고 북만주까지 만주국의 영토로 편입했지만 육군은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소련이 다시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대비책이 있었을까요? 육군은 만주국과 소련이 국경 지대에서 소련군을 효율적으로 격퇴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만주국의 서쪽이며 만리장성 이남인 화베이 지역에 주목했습니다. 그곳에 안전한 장소를 만들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육군은 엄연한 중국 영토인 화베이 지역을 일본의 영향 아래 둔 다음, 그곳 비행장에 일본군 전투기를 배치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꼭두각시 정권을 세운 다음, 별도의 정치·경제권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육군이 1935년 무렵에 추진했던 '화베이 분리 공작'입니다. 이것으로 일본은 중국과 결정적으로 대립하게 됐습니다. 중국 정부 내도 대일유화파가 있었지만, 화베이 지역을 분리하려는 일본 육군을 보고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343-4)


# 중국 정치가들의 예견

1. 후스 : 2~3년 간 중국이 일본의 공세를 홀로 버텨내면 소련과 미국의 개입을 이끌어 낼 수 있다.

2. 왕자오밍 : 그렇게 일본을 상대로 힘을 소진하면 중국은 공산화될 것이다.


5장 태평양전쟁 - 전사한 장소를 알려줄 수 없었던 나라


"일본은 미국과 일본의 절대적인 격차를 국민에게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물질적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야마토 정신이라고 하면서 국력 차이를 강조하기까지 했습니다. 국민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위기를 강조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361) "당시의 중국통 다케우치는 중일전쟁은 내키지 않는 전쟁이었지만, 태평양전쟁은 강대국인 미국·영국을 상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약자를 괴롭히는 전쟁이 아니라 밝은 전쟁이라는 감회를 말했습니다. 다케우치의 글에는 전쟁을 '상쾌한 기분'으로 받아들였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요코하마 시내 다카시마역의 역무원 고하세 사부로는 개전 당일 일기에 "역장에게서 이 소식을 듣는 순간 이미 우리는 어제까지의 나태한 기분에서 벗어났다. 있어야 할 곳에 안착된 것 같은 기분이다"라고 썼습니다. 전쟁이 시작됐다는 말을 듣고 어제까지의 느긋한 기분이 아니라, 안착된 기분이 들었다는 내용입니다."(364-5)


"육군성과 해군은 (독소전쟁 발발 이후 두드러진) 외무성과 참모본부의 북진론을 견제하기 위해 움직였고, 그 방책으로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주장하였습니다. 그 결과 1941년 7월 2일의 어전회의에서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결정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미국의 반응입니다. 육군성과 해군은 일본이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에 진주를 한다고 해도 미국이 강력한 보복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그곳은 프랑스령이기 때문에 미국의 권익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모본부 전쟁반에서 기록한 일지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에서 멈춘다면, 미국의 금수禁輸는 없다고 확신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단행하자 미국은 신속하게 대응했습니다. 7월 25일에는 미국 내 자산을 동결했고, 8월 1일에는 대일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했습니다."(392-3)


"왜 미국은 그토록 신속하게 반응했을까요? 미국은 독일군 300만 명의 공격을 받고 있는 소련이 10월까지 전선을 유지하고 버티면 이듬해 봄까지는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련에는 동장군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초 모스크바까지 진격한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무너뜨릴 수 없었던 이유도 혹독한 겨울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1942년 봄까지 소련이 버텨낸다면 소련에 무기를 제공할 수 있을 만큼 미국의 무기 생산량이 증가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1941년 9월 28일 미국과 영국은 소련과 협정을 맺고 소련에 군수물자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두 나라는 어쨌든 소련이 1942년 봄까지 전선을 지탱해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1941년 여름, 소련의 힘을 북돋울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던 것입니다. 결국 미국은 일본의 남진에 강력한 보복 조치를 취함으로써 소련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일본을 걱정하지 말고 독일과의 싸움에 전념하라고 말입니다."(393-4)


국가의 안전에 대해 고심한 미즈노 히로노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일본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다. 우리 나라는 주요 물자의 8할을 외국에 의존하기 때문에 통상 관계의 유지는 생명줄과도 같다. 외국과의 통상 관계는 일본이 비리와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한 유지될 것이다. 현대의 전쟁은 반드시 지구전·경제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물자가 부족하고 기술이 저열하며, 주요 수출 품목은 생필품이 아닌 생사다. 전쟁에서 일본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셈이다. 따라서 일본은 무력전에는 이겨도 지구전·경제전에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일본은 전쟁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탄압받았고, 국민도 그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본의 관심사는 지구전은 불가능하니 독일과 함께 소련을 협공할 것인가, 아니면 어떤 방법으로 상대를 선제공격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옮겨갔습니다. 이 양자택일의 문제에서 일본이 선택한 것은 후자였습니다."(411-3)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대개 수동형으로 표현합니다. 즉 죽은 일본인도 '피해자'라는 뉘앙스인데, 이것은 많은 일본인이 태평양전쟁을 '피해'의 이미지로 느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와테현에서처럼 전체 전사자의 9할이 1944년부터 패전까지의 1년 반 동안에 발생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9할의 전사자는 머나먼 전장에서 죽은 셈입니다. 그런데 일본이라는 나라는 유족에게 그 병사가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려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위령慰靈에 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감안할 때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즉 레이테든, 과다카날이든 정글에서 죽은 사랑하는 아들의 뼈를 수습하지 않으면 부모로서 마음이 편치 않고, 또 하늘의 도리에도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서는 엄청난 수의 전사자와 어우러져 일본인이 태평양전쟁을 '피해'의 이미지로 느끼도록 만들었습니다."(421-4)


일본인이 태평양전쟁을 피해의 이미지로 느끼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만주에 얽힌 국민적인 기억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해외에 있던 일본인 민간인은 321만 명이었습니다. 여기에 육해군 군인이 대략 367만 명이었는데, 이 둘을 합치면 688만 명의 일본인이 해외에 있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688만 명 중에 200만 명이 만주에 있었습니다. 그 200만 명 중에 소련 침공 후 사망한 사람이 모두 24만 5400명이라고 합니다. 상당히 많은 수입니다. 사망자와 귀국하지 못한 고아나 부인 등을 제외하고 많은 일본인이 만주에서 철수했습니다. 패전 당시 일본은 총인구의 8.7퍼센트가 철수를 경험했습니다." "확실히 만주로부터의 철수 체험은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피해와 고통이 강조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화를 낳은 근본 원인은 일본 정부의 정책에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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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의 황금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 - 전후 경제 호황의 종말과 보통 경제의 귀환
마크 레빈슨 지음, 조미현 옮김 / 에코리브르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1948년 1월에 미국 관료들은 점령지 일본의 경기 부진을 우려해 배상금을 받아내기보다 경제 재건에 역점을 두는, 머지않아 '역전 정책(reverse course)'이라고 명명할 새로운 정책을 공표했다." "4월에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마셜 플랜이라는 경제 원조 계획─소련과 그 의존국들은 즉각 거부한 원조─을 인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6월에 미국, 영국 및 프랑스의 군 당국은 새로운 화폐인 도이치마르크가 독일에서 소비에트연방이 점령하지 않은 지역의 법정 통화임을 선포했다." "역설적이게도 전후 세계를 동과 서, 독재 정권과 민주주의로 양분하며 유럽의 심장부에 드리웠던 '철의 장막'의 쇳소리는 부활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소련과 거기에 갇힌 동맹국 블록은 말 그대로 스스로 장벽을 친 셈이었다. 투자자와 기업 경영자들은 프랑스나 일본이 결국 소련의 편에 설지에 관한 걱정에서 말끔하게 벗어났다." "1948년 하반기에는 공업 생산이 연 137퍼센트라는 믿기지 않는 비율로 증가했다."(34-5)


"경제적 중도주의는 정치적 중도주의와 손을 잡았다. 사회 복지 제도를 해체하려는 보수 정당은 한 곳도 없었다. 사회적 정의에 대한 종교적 의무감의 발로이건, 재개된 계급 투쟁에 대한 공포 때문이건, 혹은 공공 지출이 더 건강한 경제를 만들 것이라는 투철한 신념에서건 많은 국가에서 그들은 열광적으로 사회 복지 제도를 지지했다." "처음에는 기적으로 보였던 경제 성과가 이내 일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해를 거듭해도 그런 상황은 지속됐다." "언제나 경제생활을 특정짓던 변동성은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보내진 듯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경제적 성공은 자본주의의 야성적 충동이 아닌, 신중한 경제 계획 덕분이었다."(40-1) 존 케네디와 린든 존슨 대통령의 수석경제고문 헬러는 "향상된 통계와 컴퓨터 예측 기법을 통해서 물가를 상승시키지 않으면서도 실업을 정복하기 위해 지출과 세수를 조정하는 방법을 정부가 정확히 알 수 있다고 역설했다. 헬러는 이러한 사고를 '신경제학'이라고 불렀다."(43)


장기 호황을 유지하는 정부의 역량에 대한 보편적인 신앙과도 같았던 이 신흥 경제학의 열렬한 신도인 서독 정치인 카를 실러의 주장에 따르면, "경제는 '합리적 완전체(rational whole)'였다. 정부가 할 일은 경제를 운용하는 게 아니라, 최적의 성과를 목표로 그것을 미세하게 조정하기 위해 세계와 지출의 힘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는 정부가 고속도로에 쏟아부은 수백만 마르크의 지출이 어떻게 서서히 경제로 흘러들지를 보여주는 투입 산출 분석, 그리고 어떤 세금을 인하해야 일자리를 최대로 창출할 것인지를 밝혀내는 선형계획법 같은 기술로 달성될 터였다. 아울러 통계 분석의 새로운 방법론에 정통한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들이 데이터를 평가하고 중대한 판단을 내릴 터였다. 1956년 실러는 정부가 물가를 계속 안정시키면서도 완전 고용과 꾸준한 경제 성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견해를 법안으로 제출했다. 그는 이 경이로운 조합을 '마법의 삼각형(magic triangle)'이라고 불렀다."(48-9)


당시 '개발도상국'이라 부르던 나라들도 정부가 지휘하는 현대화를 향한 강행군에 착수했다. 프레비시에 따르면, "풍부한 천연자원을 수출하고 공장의 제조품을 수입하는 것은 이들 주변부 국가들을 잘 살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그들의 수출품 가격이 해외로부터 사들인 상품의 가격에 비해 장기간 하락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레비시는 무역에서 주변부 국가들이 갖는 열등한 지위가 그 나라 노동자들이 생산성을 더 높일 수 있는 투자 재원 조달에 필요한 이윤 축적을 가로막는다고 피력했다. 따라서 불공정 무역은 라틴아메리카가 가난해진 근본 원인이었다."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에 관한 그의 생각은 어떤 면에서 카를 실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실러는 자본을 조합하고 어떤 산업이 투자 가치가 있는지 선택하는 것은 민간 부문이 할 일이라 여긴 반면, 프레비시는 정부의 계획이 갖는 훨씬 더 적극적인 역할을 염두에 두었다."(59-60)


# 프레비시의 '종속 이론'


"프레비시는 유익한 정책을 집행하고 수입에 대해 보호책을 쓰면서도 나라 안에서는 경쟁을 장려하는 지혜로운 기술 관료들로 이뤄진 정부 부처를 마음속에 그렸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현실은 딴판이었다. 계획 부서는 나라가 무엇을 수입하고 수출할지, 새 공장의 부지는 어느 곳으로 하고 거기서 무엇을 생산할지, 그리고 위태롭게도 어떤 개인이 모두가 탐내는 허가를 받을지 결정하면서 민간 부문의 생사를 좌우하는 권력을 떠안았다. 끝없는 허가 요구는 지도자들의 가족 친지와 핵심 후원자가 수익성 좋은 독점 기업 운영권을 따냄에 따라 경쟁의 목줄을 죄었다. 가난한 소비자들이 부담할 비용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프레비시는 수입 대체를 개발도상국에 산업이 뿌리내리기 시작하면 단계적으로 폐지해야 할 단기 정책으로 간주했지만 투자자와 산업 노동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수입 장벽을 그대로 유지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이익과 부를 보호해달라고 요구했다."(67-8)


"1960년대 중반 닉슨의 전임 대통령 린든 존슨은 세금 인상이나 사회 보장 프로그램 축소 없이 베트남의 군사력을 증강하는 '군비·민생 양립(guns and butter)' 정책을 펼쳐온 터였다. 연준은 정부가 전쟁 자금을 싸게 융통할 수 있도록 확실한 단기 저금리 기조를 유지함으로써 존슨의 정책을 충실히 뒷받침했다. 단기적으로 이러한 양립 정책은 거의 모든 국민의 일자리와 임금의 급격한 상승을 보장했다."(71) 그러나 베트남 철수와 더불어 실업률 증가와 인플레이션 상승이라는 불행한 조합이 발생하자 "1970년 초 번스의 연준은 인플레이션을 제압하기 위해 긴축 정책을 폈다. 몇 달 뒤에는 방향을 뒤집어 실업률을 낮출 거라는 희망 속에서 공격적일 정도로 완화 정책을 실시했다. 1970년 5월에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통화 정책만을 사용할 경우 '매우 심각한 경기 불황'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닉슨에게 임금 및 물가 상승을 검토는 하되 규제하지 않는 위원회의 창설을 촉구했다."(74)


"(미국의 저금리 정책이 초래한 불을 끄기 위해, 즉 물가를 잡기 위해) 각국 정부는 너무나도 감쪽같이 반反인플레이션 정책으로 전환했다." "1971년 8월 15일 닉슨은 번스의 축복을 받으며 국영 텔레비전에 출연해 90일 간의 임금 및 물가 동결을 발표했다. 대통령은 또한 다른 나라 정부가 더 이상 그들의 달러와 금을 맞바꿀 수 없다고 돌연 선언─이른바 닉슨 쇼크(Nixon Shock)로 알려진 선언─했다."(77) "아서 번스의 금융 완화 정책은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켰고, 경제는 터보 엔진을 단 듯 급성장했다. 몇몇 나라에서는 단기 금리가 너무 떨어지는 바람에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기업이 대출 비용보다 적은 융자금을 상환할 수 있었다─대출을 해서라도 건물을 올리고, 설비를 구매하고,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할 강력한 인센티브가 있었다." "그러나 청구서는 곧 만기가 도래할 터였다." "닉슨이 재선에 성공할 무렵, 세계 모든 주요 경제국의 물가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79-80)


"되살아난 인플레이션과 환율의 혼란이 금융 시장을 뒤흔드는 동안, 여론층은 다른 주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세계가 곧 경제적 심연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문제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 지금은 지나치게 경기가 좋은 때라는 현실이 걱정이었다. 그들은 상상도 못했던 수준의 부를 창출한 성공적인 추진력이 경제적·환경적 붕괴를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걱정했다. 새로운 환경주의는 1970년대 초 경제 성장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대다수 인구보다 확실히 더 풍족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집단인 그 지지자들에게 소득 인상과 물질적 풍요 확대란 찬양할 성취가 아니라 맞서야 할 문제였다."(81) "환경에 대한 1970년대 초의 위기의식 증대는 또 하나의 떠오르는 관심사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다. 바로 인구 과잉이다." "환경 운동과 인구의 제로 성장을 위한 관련 운동은 놀라우리만치 정치적 국경을 초월했다." "어느 날 아주 갑자기 녹색은 좋은 것이 됐다."(85-6)


"새로운 환경 운동은 군림하던 경제학적 통설을 향한 직접적 도전이었다. 많은 논평가들이 관찰했듯 1인당 소득이나 국민총생산의 증대 같은 전통적인 경제 지표는 환경적 고려 사항을 왜곡된 방식으로 설명했다. 제련소와 정유소에서 나오는 산출량 증대는 그 결과로 유발된 오염 물질 증가의 악영향을 전혀 차감하지 않은 채 순 플러스(+)로 기록됐다. 그러나 터무니없게도 만일 기업이나 정부가 사후에 오염수 정화에 돈을 투입할 경우 그것 역시 경제 성장으로 집계됐다. 더 많이 오염시킬수록 경제가 더 빨리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는 환경주의자들의 불만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로부터 완전히 잘못된 결론이 도출됐다. 경제 성장은 단지 허구일 뿐이라는─혹은 더 나쁘게도 번영은 적이라는─것이었다." "이 새로운 관념에서 경제 성장이란 참을 수 없는 공해이자 헤아릴 수 없는 환경적 해악이며 천연자원의 무모한 고갈을 의미했다."(88)


"산유국들은 언제나 미국달러로 자국의 생산물 가격을 매겨왔는데, (브레턴우즈 체제의 폐기가 초래한) 달러 붕괴는 수백만 배럴의 석유로 더 적은 독일 트럭과 일본의 I빔(I-beam) 철재를 구입하게 될 거라는 뜻이었다."(94) "1973년 10월 6일은 욤키푸르, 즉 속죄일로 유대인 달력에서 가장 신성한 날이었다. 전후의 장기적 경제 성장이 단 하나의 날짜에 정점을 찍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욤키푸르보다 더 나은 후보는 없었다." "(골란 고원을 둘러싼 전투가 벌어진 지) 48시간 만에 중동 6개국은 유가를 2배 올리는 데 동의함으로써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원했다. 석유 수출국들은 석유 회사 임원위원회와의 협상이 지연되자 독자적인 행보에 나섰다. 10월 16일 그들은 새로운 기준 유가를 공표했다. 배럴당 5.12달러였다. 훗날 야마니는 "OPEC이 권력을 잡은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고 술회했다. 1973년 초부터 9개월 만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의 가격이 거의 2배로 올랐다."(102)


"1970년대에 중앙은행 총재들은 대략 한 달에 한 번 바젤에 모였는데, 여기서 일 이야기라 함은 보통 경기 여건에 관한 논의를 뜻했다. 1974년 3월과 4월의 화제는 석유 수출국들의 팽창하는 부를 어떻게 다룰까 하는 것이었다. 부자 나라의 은행들로 밀려드는 달러에서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다른 통화로 전환해 그 돈을 빌려줘야 했다. 이는 설령 채무자들이 대출금을 제때 갚는다 해도 갖가지 위험 요인을 창출했다. 만일 환율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대출 상환금이 은행의 예금주에 대한 달러 채무 가치보다 적어질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한 석유왕국이 갑자기 자국의 달러를 돌려달라고 요구하기라도 하면, 그것을 영국의 파운드(pound)나 네덜란드의 휠던(gulden)으로 전환해 5년짜리 대출을 해주는 데 써버린 은행은 현찰이 절박한 상황에 봉착할 것이다. 이는 섬뜩한 전망이었다. 은행들은 글로벌 금융과 변동 환율이라는 신세계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18-9)


# 잉글랜드 은행 총재 리처드슨이 영국 금융가에 도입한 조치

1. 국내용 : 은행들이 은행감독부에 정기적으로 융자금, 예치금, 차입금 운용 상태를 상세히 기록한 자료를 제출하도록 했다.

2. 국제용 : 전 세계로 대출된 해외 달러의 유입이 금융 시스템 전체를 와해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고 바젤 논의를 제안했다.


(석유 가격의 상승으로 넘쳐나던 오일 달러가) "금융 시스템을 타고 빠르게 흘러들었으므로 전 세계 은행은 프랑크푸르트와 뉴욕에서, 베이루트와 애틀랜타에서 문을 활짝 열고는 앞다퉈 예탁금을 유치하고 예전에는 접촉하지 않던 대출자에게 융자를 제공했다. 수익 사업으로 몰려들던 은행 다수는 국제적인 대출에는 초보자였고, 자신들의 신규 고객에 대해 잘 몰랐다. 이는 시한폭탄이었고, 감독관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한 은행이 대출을 더 많이 해줄수록 채무 불이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더 많은 자본을 챙겨둬야 한다. 그러나 은행장들은 자본 보유분의 증대가 주주들에게는 더 낮은 수익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골치 아프지만 잘 알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많은 은행에 자본이 거의 없었다."(130-1) "오일 달러가 계속 밀려들고 국제적인 대출이 호황을 맞으면서 은행들의 인상적인 성장은 나날이 취약해져가는 그들의 토대를 가려줬다."(132)


"20세기 초 이래로 미국에서 주의 경계를 넘어가는 석유 파이프라인 하나당 부과하는 요금은 연방의 규제 아래 있었고, 1932년 연방 의회는 국내 생산업체의 기름 판매를 확실히 하기 위해 수입한 석유, 가솔린 및 윤활유에 세금을 부과했다." "미국 석유는 수입 석유보다 18퍼센트 더 팔렸지만 모든 정유사는 가솔린과 디젤 연료의 출처와 무관하게 똑같은 값을 받았고, 이는 국내 석유에 더 의존하는 정유사가 이윤 감소에 부딪치리라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정유사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능한 한 많은 배럴을 수입할 절박한 동기가 있었다." "값비싼 국산 석유 구매를 필사적으로 피하려는 이들 대형 정유사는 정치적 이유로 특별 수입 쿼터를 할당받은 군소 정유사와의 거래에서 이 문제의 해법을 찾았다. 군소 정유사는 자신들보다 큰 정유사의 '첩(妾)'이 되기로 계약서에 서명했고, 원유를 직접 정제하느라 힘들일 필요 없이 높은 가격에 자신들의 수입 쿼터를 되팔았다."(140-2)


"(석유 수입 쿼터제는) 닉슨의 반反인플레이션 프로그램이 물가 상승을 제압하려던 순간에 더 높은 가격을 소비자들에게 전가했다. 게다가 국산 석유 사용 의무 조항은 미국의 석유 비축분을 고갈시키고, 타국의 비축분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다─프로그램이 의도한 목적과 정확히 반대였다." "시카고 대학에 재직 중이던 조지 스티글러와 로널드 코스 같은 경제학자들은 특정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을 정부 기관의 지시보다 경쟁에 의해 결정할 때 경제가 호전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1950년대부터 규제 완화의 학문적 틀을 제시해왔다." 정치인들은 미국에서 석유와 가스 생산이 늘어나길 바랐지만, 탐사용 시추공(wildcat wells, 상업적 가치가 입증되지 않은 최초의 유정) 개발자들이 더 많은 유정을 뚫도록 부추길 여지가 있는 유가 인상은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에너지 정책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우왕좌왕했고,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려는 헛된 노력 속에서 불행히도 규제 위에 또 규제를 쌓아 올렸다."(142-4)


높은 가격과 비효율성을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규제 완화의 첫 번째 타겟이 된 "운송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의회는 1980년 은행이 예금주에게 지불할 이자율의 규제를 완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예상을 뒤엎고 그 법률은 금융 산업의 대규모 성장으로 이어졌으며, 경제의 어떤 부문이 가장 신용을 받을 만한지 결정하는 권한을 정부 관료에게서 빼앗아갔다. 전자통신, 전력 및 기타 산업에서 경쟁을 제한하던 미국의 규제는 곧이어 면밀한 조사 대상이 됐고, 석유와 천연가스의 규제 완화도 다시 정치적 의제로 등장했다. 이런 움직임은 신속하게 해외로 확산됐고, 비평가들은 상점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상점이 팔 수 있는 품목을 제한하고, 가격을 담합하는 카르텔 결성을 허용하고 높은 국제 항공 운임을 보호하는 법안을 표적으로 삼았다. 1978년에는 루이 14세 시대 이래 국가가 경제를 통제해온 프랑스에서 185년 만에 처음으로 정부가 빵 값에 대한 규제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151)


"득실을 따져보면 규제 완화의 결과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긍정적이었다. 옛날 직종과 옛날 회사가 사라진 반면 새로운 일자리와 새로운 기업이 등장했고, 규제로 보류됐던 새로운 상품─변동 금리 예금 계좌, 휴대전화, 골퍼와 미식가의 구미에 맞춘 민영 텔레비전 채널─이 소비자에게 혜택을 가져다줬다. 예전에는 규제 기관에 의해 좌우됐던 가격과 서비스를 협상할 수 있게 된 회사들이 자신의 사업을 더욱 생산적으로 운영할 방법을 모색함에 따라 경제 성장은 힘을 받았다. 그러나 황금기의 본질적 양상이던 안정과 안전은 그걸 감싸주는 규제라는 틀이 없어지면서 심각하게 훼손됐다. 정부들이 생산성 증가를 회복하고 경제를 활성화시키려 노력하면서, 안정은 감당할 수 없는 사치가 되고 말았다."(152-3) 규제 강화와 규제 완화라는 구호에는 이념과 이익 모두가 걸려 있었다. 정부 정책은 그 균형의 담장 위에 올라선 심판이었고, 심판은 경기 중에 거의 예외 없이 양쪽으로부터 비난받기 일쑤였다.


굴뚝 산업을 바탕으로 고도 성장을 구가하던 일본은 유가 인상에 직격탄을 맞았지만 석유 청구액을 지불할 만한 충분한 달러를 확보하기 위해 여전히 수출에 박차를 가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일본 부흥의 원동력이었던 굴뚝 산업은 에너지 부족과 초과 작업에 짓눌려 시들기 시작했다." "정부는 구舊경제의 쇠퇴가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대량 실업 방지 계획을 들고 개입했다. 하향 산업 부문의 노동자를 성장세에 있는 산업으로 이동시키는 고용주에게 리베이트를 줬다. 인건비 보조금, 직업 훈련 보조금 및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직장을 구하는 노동자를 돕는 장려금이 있었다. 근로 시간이 줄어든 노동자의 임금을 벌충해주는 보조금도 있었다." "구舊경제는 신新경제에 자리를 내줬다. 신경제에서는 공학과 디자인이 값싼 에너지와 값싼 노동보다 더 중요했다. 일본은 톤 단위로 팔리는 소비재가 아닌 자동차, 고급 전자 제품 및 정밀 기계를 만들어 잘 살게 될 터였다."(162-4)


"두꺼운 책자를 채울 만큼 많은 규제가 수입을 제한하는 한편, 새로 구조 조정을 마친 수출 기구가 기어를 고속으로 바꾸면서 일본은 전례 없는 규모의 무역 흑자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흑자가 죽은 경제를 부활시켰다. 1975년이 되자 일본은 1973년 이전보다 훨씬 느리긴 해도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이 나라는 다른 모든 산업화한 경제 대국을 앞질렀다. 그러한 이익이 일본 스스로 소정의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가서야 밝혀졌다. 정부는 지식 집약적인 제조업 구축에 세밀한 초점을 맞추는 과정에서 이 나라의 놀라우리만치 비효율적인 서비스업 부문을 거의 간과했다. 1980년 일본의 서비스업 부문 생산성은 1970년보다도 낮았다. 대형 점포 개설의 장벽, 트럭 운송의 경쟁 억제, 그리고 은행의 주말 현금인출기 운용 금지를 비롯한 많은 유사한 규제는 향후 몇 년간 경제 성장의 걸림돌로 여겨졌다."(166)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어떤 정부도 산업 전체의 종말과 거기에 따라오는 일자리 손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167) "노동자 계층을 돕는다는 대의명분으로 곤경에 빠진 산업을 구제하는 것은 1973년 이후 10년간 산업화한 세계 전역에서 주요 프로젝트가 됐다. '구조 조정'이라는 지시문 아래 수익을 못 내던 제조업체는 정부의 직접적 지원으로 수십억 달러를 챙겼고, 정부의 수입 제한 및 카르텔 합법화 같은 경쟁 완화 정책으로 가격을 높일 수 있게 되면서 수백억 달러를 추가로 거둬들였다. 그러나 실제 들어간 비용은 인상된 상품 가격과 특혜받은 회사가 빼먹은 보조금을 훨씬 넘어섰다. 전 세계가 생산성 증가의 둔화로 고전하던 시기에 대부분 국가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산업보다는 성장 가능성이 희박한 부진한 산업을 조직적으로 지원했다. 그 최종 결과는 생산성의 슬럼프를 극복하는 게 아니라 심화하는 쪽이었다."(173-4)


"노동 임금 상승의 급격한 둔화와 소득 격차 증대의 이유로 가장 흔히 거론되는 것은 정치적 결정─어떤 나라에서는 최저 임금 인상 실패, 다른 나라에서는 고용을 가로막는 규제 강화, 부국의 노동자를 저임금 국가와의 경쟁에서 더욱 취약하도록 만든 국제 무역 협약, 그리고 직원의 급료나 자신의 직무 성과에 대한 고려는 거의 없이 기업체 사장들이 스스료 급료를 책정할 수 있게 만든 법률─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순전히 국가 내부적인 설명만으로 미진하다. 사회적·정치적 영향은 나라마다 각기 달랐던 반면 임금 상승 둔화 및 격차 확대는 전 지구적 현상이었고 고소득 국가 전체와 중간 소득 국가 대부분에 영향을 끼쳤다. 글로벌한 추세의 중요 원인은 역시 글로벌할 필요가 있다." 국민 소득 중에서 배당금이나 자본 수익, 정부 세금 등을 제외하고 임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내는 "노동 분배율(labor share)은 1970년대 하반기에 한 나라만이 아닌 세계 각지에서 하락하기 시작했다."(186-7)


"사회 복지 제도는 놀라운 성취였다. 수백만 명의 연금 수령자는 노령에도 더 이상 극심한 빈곤에 처하지 않고 자신의 존엄을 찾았다. 상해보험은 노동자의 가족이 작업 중 상해를 당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줬고, 의료보험은 최하층 아이들까지 병원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했다. 실업보험은 실직자뿐 아니라 그들이 애용하던 상점과 그들이 제품을 구매하던 제조업체의 불황이 할퀸 고통을 다독여줬다. 경제학자들은 사회보험 프로그램을 '자동 안전장치'라고 표현했는데, 힘든 시기가 왔을 때 그것이 소비자의 손에 돈을 쥐어줬으므로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도움을 베푸는 정부란 공짜로 생기는 게 아니었다."(195) "1970년대에 경제 환경이 불안정해짐에 따라 환율 및 인플레이션이 통제 불가능하고 미래가 매우 불확실해 보이면서, 사회 복지 재원 조달을 위해 어느 때보다 세수를 많이 늘리려던 정부의 시도는 더욱 심한 저항에 부딪히기 시작했다."(200)


"통치 불능(ungovernability)은 1970년대 중반에 이 용어를 받아들인 대로 사회 불안보다는 정치 마비와 더 관련이 있었다. 이는 두 가지 근본적 사회 변화의 결과로 알려졌다. 하나는 교육과 풍요가 보통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를 줬다는 것이다. 시민은 더 이상 맹목적으로 그들이 속한 교회, 노조, 혹은 기업 조직의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무엇이 자기들에게 최대 이익이 되는지를 스스로 결정했다. 또 다른 변화는 정부가 많은 국민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서비스와 보조금을 제공하면서 실질적으로 너무 커져버린 나머지 시민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정부의 행동을 주시했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일어난 이 두 가지 변화는 정치인이 어떤 공공의 선이라는 명분 아래 결정을 내리면 순종적인 유권자는 그걸 따를 거라고 더 이상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회 복지 제도가 안긴 선물은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가 되었다."(208)


# 의제 대표 기능에서 특화된 소수 이익 집단이 다수가 공감하는 대규모 집단을 앞지르는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


"철의 장막 뒤에서 비선출 공산당 정권에 지배당하던 소련 의존국들은 서유럽, 북미, 일본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던 나라들보다 더 심각한 것으로 알려진 통치 불능의 위기에 돌입했다. 소비에트 블록 국가들은 흔히 경제가 마비된 나라들로 기억되지만, 이는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한 것이다." "공산 경제 계획자들은 규모의 경제에 관한 한 광신자였다. 그들은 카를 마르크스를 통해 산업화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필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산 경제 국가들은 제품을 생산하는 데는 제법 강했지만, 소비자들이 실제 원하는 물건을 생산하는 데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무기류와 중공업 제품이 우선이었으므로 일반 가정을 위한 아파트와 자동차는 자원을 차지할 순위에서 뒤로 밀렸다. 산출된 결과물은 천편일률적으로 조잡하고 구닥다리였다. 왜냐하면 품질이나 혁신에 대한 보상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다." "대중의 만족은 정치적 불안을 진정시키는 데 요긴할 때에만 우선순위에 들었다."(212-4)


새롭게 등장한 이념적이기보다는 능력 있는 비즈니스형 지도자들은 "인플레이션이 경제를 침식하고 시민이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드는 것을 지켜봤다. 그들은 사회 복지 제도의 한계를 인식했고, 대중의 세금 인상 반대가 심각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들은 기업에 매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수익성만이 회사로 하여금 투자를 증대하고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즉각 인정했다. 그들은 높은 유가가 국내 제조업의 많은 부분을 쓸모없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대중에게 말했던 것과 달리 폐쇄된 공장 대부분이 결코 다시 문을 열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들은 생산성 증가를 회복하는 것이 번영을 되찾으려는 그들의 노력에서 최대의 도전 과제가 되리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과 서로 간의 잦은 회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경기의 미미한 반등을 끌어냈을 뿐이다."(216)


# 서독의 헬무트 슈미트, 프랑스의 지스카르 데스탱, 일본의 미키 다케오, 미국의 지미 카터


"사민당은 1932년 이래 줄곧 스웨덴을 통치해온 정당이었다. 대부분의 스웨덴 국민은 다른 정당이 나라의 조타기를 조종하는 걸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을 만큼 기나긴 기간이었다. 그러나 경제가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침체기로 접어들던 1976년 9월 19일 유권자들은 정권에서 사민당을 쓸어버렸다. 충격의 여파는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런던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스웨덴식 모델이 개조에 들어간다"고 흥분해서 보도했다."(220) "독일, 네덜란드 및 스칸디나비아의 노조는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혁신이 노조원의 급료를 올리고 나머지 경제 부문에서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을 거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전투적 역사를 간직하고 고용주들이 제안한 변화라면 무엇이건 완강하게 반대하던) 영국의 노조 위원장들 사이에서 그런 말은 거의 이단이었다. 전국광산노조는 국영인 전국석탄청(National Coal Board)이 심지어 200년간 파내 제 역할을 다한 광산을 폐쇄하려는 것마저 반대했다."(223)


1978년 노동당 정부가 임금 인상 5퍼센트 안을 제시하자 "자동차 제조공, 화물차 기사, 철도 근무자, 간호사, 심지어 무덤을 파는 사람(gravedigger)까지 일터를 박차고 나갔다. 병원은 환자를 돌려보냈고, 닭은 사료 부족으로 죽어갔다. 1978~1979년의 어둡고 눈 많던 겨울은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 청소차들이 실어가길 거부한 탓에 런던 시민의 쓰레기가 레스터 광장에 수북이 쌓였던 겨울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거의 3000만 노동 일수(workday)가 파업으로 사라져버림에 따라 생산은 붕괴했다. 갈등이 마침내 타결됐을 때, 파업 노동자들은 정부의 기준선 5퍼센트보다 훨씬 높은 임금 인상을 쟁취했다. 그리고 1979년 3월, 단 한 표 차이로 의회는 캘러헌 정부에 대한 불신임을 선언했다." "노동당을 사양길로 밀어낸 것은 비단 경쟁적인 사상이 등장해서만은 아니었다. 노동당의 몰락은 무엇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번영을 가져온 경제 모델이 파탄난 결과였다."(225-7)


# 마거릿 대처 정부의 등장


"레이건이 보수 정당의 기수가 된 1976년 전통적 온건파이던 공화당 대통령 제럴드 포드는 어떻게든 그를 당의 대통령 후보로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당시 경제는 1973~1975년의 불황에서 회복 중이었고 물가 상승률은 하락세였으며 아직은 미국의 전성기가 끝났다는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1979년 하반기에 채권 시장이 예측한 불황이 예정대로 닥치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11퍼센트를 상회하는 담보 대출 이자율이 언젠가는 집을 장만할 수 있으리라는 젊은 세대의 희망을 꺾고 건설 현장의 철골 조립공과 자동차 공장의 공구 제작공에게 강제 해고 통지가 나붙자, 비로소 보수 정당이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왔다. 언어 구사와 그가 내뿜는 자신감에서, 레이건은 통치 불능의 세상이 됐다는 통념에 정면으로 배치됐다. 그는 강인한 이미지를 투사했고, 미국 정부가 적절히 관리하기만 하면 대외적으로 적들에 맞서고 대내적으로 번영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어떤 확신을 보여줬다."(230)


"대처주의는 신화를 창조한 이들의 주장처럼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경제가 산소에 굶주려 있던 대처의 임기 초반 2년간 영국은 1930년대 초 이래로 가장 혹독한 모순을 참아냈다. 성장을 부활시킨 것은 멀리 북해 연안의 새로운 유전에서 뽑아 올린 세수를 제외하면 통화 정책에 대한 새롭고 한층 절충적인 접근법이었다. 정부는 M3에 대한 숭배(통화 공급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인플레이션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견해)가 실수였음을 시인하지 않았지만 점진적으로 통화주의를 완전히 포기했다. 1982년 하우는 잉글랜드 은행이 향후 M3, M1, 환율 및 기타 요인의 조합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의회에서 말했다." "대처는 이 나라의 경화증이 시대에 뒤떨어진 기관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두 가지가 그녀의 분노를 자극했다. 바로 노조와 국영 기업이었다. 자신의 통화주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을 때 대처는 시야를 양쪽으로 돌렸다. 그들이 대체로 노동당 지지의 온상이라는 사실은 보너스였다."(245-6)


# M1 : 현금 + 당좌예금 예치금 / M2 : M1 + 보통예금 / M3 : M2 + 예금 증서 + 은행 외부의 통화 시장 계좌에 있는 일부 단기 자금


"대처의 승리는 노조원, 보통 때는 노동당을 뽑았지만 집을 사고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려는 열망을 가진 국민 덕분이었다. 이 계층 상승 가구들은 노동당의 무능함에 질려 전통과 단절하고 1979년 보수당을 찍긴 했지만, 그럼에도 노조의 가치를 믿고 있었다. 보수당이 권력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은 이들 유권자의 계층에 대한 충성심을 깨부수는 것이었다. 대처는 기나긴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노동당 유권자를 적대시하지 않고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출발점은 노조를 공격하거나 영국철강을 매각하는 것이 아닌, 국민이 자신의 집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1979년 정부는 '공영 주택(council housing)'으로 알려진, 지역 당국이 소유한 주택의 세입자에게 시장가보다 훨씬 싼 가격에 개별 주택을 구입할 권리를 승인하는 법안을 도입했다. 10가구당 1가구가 공공 주택에 살았으므로 이는 대중을 위한 민영화였다." "'매입권(Right to buy)'으로 알려진 이것은 노동당의 핵심 선거 구민을 겨냥했다."(250-1)


"1979~1981년까지 초기의 통화주의 실험은 어느모로 보나 재난이었다. 1981년의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 이후 서유럽의 어떤 나라보다도 경제가 커지면서 상황이 호전됐지만, 아직 활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인플레이션은 국제 표준으로는 여전히 높았다. 1979~1989년 소비자 물가는 연간 7.5퍼센트 비율로 상승했는데, 이는 이탈리아를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주요 경제국보다 높은 수치였다. 영국의 공장들이 대처가 처음 다우닝가 10번지로 이사했을 때만큼 많은 생산량을 기록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9년이 지난 1988년 겨울이 되어서였다. 대처가 재임 말기에 영국 경제의 성장을 부활시켰다고 설명하는 것도 역시 맞지 않다. 노동 생산성은 11년 재임 기간 동안 과거 10년 동안보다도 더디게 증가했다. 수년간의 형편없는 경제 성과에 이어 1980년대 하반기에는 몇 년간 강력한 성장이 있긴 했지만, 보수당의 정책 전환이 영국 경제를 아주 건강하게 되돌려놨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옳지 않다."(257-8)


"공산당 지지자로부터 표를 끌어오는 동시에 중도파 유권자를 지스카르 연합에서 분리시키는 데 맞춰진 프랑스 사회당의 1981년 선거 운동 공약은 상당히 정통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따랐다. 이를테면 중공업의 국영화, 부유세 신설, 15만 개의 정부 일자리 창출, 대규모 공공사업 프로그램, 최저 임금 인상, 전 국민을 위한 유급 휴가 5주, 그리고 유자녀 가구의 보조금 인상이 그것이다." "미테랑 표의 4분의 1 가량을 차지하고 그의 각료 중 4개 장관직을 확보한 공산당은 사회당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부가 연금, 가족 수당 및 주택 수당을 늘리고 건설 프로젝트의 자금을 대기 위해 돈을 빌림에 따라 공공 지출은 1982년 27퍼센트나 부쩍 뛰었다. 그런 자극이 경제의 급성장을 불러오기는 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1인당 소득은 1.7퍼센트 증가했다. 그러나 환호성을 지르는 신문 헤드라인 아래 1982년의 경제 지표는 대부분 마이너스였다."(268-9)


"아낌없는 적자 지출이 유발한 경제의 급성장은 1982년 하반기 들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고용은 하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그렇지 않았다. 오로지 나쁜 소식만 접한 사회당은 수사법을 한풀 누그러뜨려 기업가를 노동자의 착취자 대신 일자리 창출자로 기술하기 시작했다. 장관들은 인상된 세금과 사회 보장 부담금이 수익을 압박하고 투자를 감소시키고 있음을 지적한 주요 기업 임원들과의 소통을 조용히 재개했다."(273) "신성하게 여기던 사회주의 사상이 더 이상 자유 시장 사상을 대체할 실행 가능한 대안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자들은 국영 기업이 아닌 민간 부문에서 경제 회복을 꾀하는 새로운 버전의 사회주의를 창조해야 할 터였다. 경쟁을 장려하고, 규제 해제를 단행하고, 기업이 수익을 내도록 지원하고, 경제생활에서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 모두가 경제의 활력을 되살리는 새로운 사회주의 공식의 일부였다."(278-9)


"(레이건 정부에서 영향력 있는 경제 고문 집단이자) 종교적 열정과 자유의지론적 광신이 조합된 공급 중시 학자들은 1973년 이래로 미국을 괴롭히는 경제적 슬럼프가 정부 대책의 결과라고 믿었다. 정부가 국민이 더 많은 물건과 서비스를 구매하도록 소득을 증대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풍요롭다고 느끼게끔 만들려 했다는 것이다. 경제 정책은 소비자 수요를 늘리려 애쓸 게 아니라 소비자가 구매할 수 있는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발명가, 사업가 및 투자자─다른 말로 하면, 경제의 공급 측면을 제공하는 사람들─를 장려해야 한다는 게 공급중시자들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공급만이 수요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역설했다. 공급을 확대해야만 경제의 산출량이 늘어나고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급 중시 사상은 경제 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중 하나는 정부가 특히 사회 복지 프로그램에 돈을 덜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293)


"공급 중시 경제학은 교수가 아닌 논객들의 창조물이었다." "경제학자 아서 래퍼가 워싱턴의 한 레스토랑 냅킨에 처음 그렸다고 전해지는 일명 '래퍼 곡선(Laffer Curve)'에 대해서도 실증적 뒷받침은 없었다. 래퍼 곡선은 세율을 얼마나 낮춰야 경제 활동을 많이 자극해 정부의 세수를 증대할 정도가 될 수 있는지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래퍼의 이론은 추상적 명제였으므로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세율이 너무 높아지면 사람들이 더 이상 많은 소득을 벌려는 수고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며, 바로 그 시점에서 세금 수령액은 하락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데는 누구나 동의했다. 그러나 래퍼의 스케치는 그 시점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고, 공급 중시 진영의 어느 누구도 기꺼이 이를 추측해보려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 "증거가 있건 없건 세금 인하가 경제를 활성화할 것이라는 전망은 뿌리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295-6)


"미국에 투자한 외국인에게는 특히나 즐거운 시절이었다. 1983~1986년까지 미국 정부는 경제 규모 대비 국민소득의 평균 5퍼센트 연간 적자를 발표했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즉각적 여파 이래 단연 최고치였다. 정부의 막대한 대출 수요는 인플레이션 폭락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잣대로 봤을 때 높은 금리를 유지시켰다. 그리고 그 높은 금리가 해외로부터 전례 없는 액수의 돈을 끌어들였다." "투자자들은 달러의 상승세가 다른 통화로 환산했을 때 그들의 재산을 불려준 바로 그 시기에 미국의 주식과 채권 시장까지 호황을 누리면서 두 가지 방식으로 번창했다. 그러나 미국의 제조업체는 훨씬 더 힘든 상황에 봉착했다." "수입품을 더욱 저렴하게 만든 달러의 강세 덕분에 미국에서 수입하는 제품의 가치는 1981~1986년 40퍼센트 상승한 반면, 미국의 수출품 가치는 하락했다. 공업 도시는 일자리가 없어지고 소득이 떨어지면서 황폐해갔다."(302-3)


"1992년 연준의 경제학자들은 레이건 시대가 소수에게는 많이, 그러나 다수에게는 거의 아무런 혜택도 가져다주지 않았다고 논평했다." "레이건의 경제학자들은 투자자가 소득을 더 늘리도록 허용하면 경제를 현대화하고 생산성을 자극할 새로운 투자를 유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공급 중시 경제학은 실패작으로 판명났다." "이렇게 실망스러운 상황이 된 하나의 원인은 그레타 크리프너가 '금융화(financialization)'라고 지칭한 것이었다. 금융 규제 완화와 고금리의 조합은 급속히 팽창하는 신용 시장에서 기업들이 돈 놓고 돈 먹기에 주력하는 것을 온당하게 만들었다. 그런 전환은 "비금융 기업들이 공장의 장기적인 설비 투자로부터 자본을 빼내 금융 투자로 자원을 돌리는 형태를 취했다." 이런 추세는 일찍이 레이건이 지명한 산업경쟁력위원회가 금융 자산에 대한 투자 수익이 제조업 자산에 대한 수익보다 높다는 것을 관찰한 1983년 익히 알려졌고, 그 10년 동안 더욱 확연해졌다."(306-7)


"1970년대 제3세계의 폭발적 성장은 고든 리처드슨과 아서 번스 같은 중앙은행 총재들에게 그토록 심려를 끼치던 오일 달러가 부채질한 결과였다." "제3세계의 대출 수요는 어마어마했다. 은행장들은 베풀 수 있어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그 돈이 개발도상국에서 생활 수준을 향상시켜 공산주의 사상 확산에 대한 방어벽을 구축하길 바란 정부는 은행장들을 재촉했다."(312) "차용국 중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국고를 돼지 저금통처럼 다루면서 조사는 고사하고 의회나 언론의 비판조차 절대 용납하지 않는 독재자들이 다스렸다. 인상적인 경제 통계─1973~1980년 개발도상국의 생산량은 연간 4.6퍼센트의 높은 비율로 성장했다─로 인해 외환 대출 대부분이 노동자의 생산성을 늘리거나 소작농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데는 거의, 아니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 겉보기에만 번드르르한 프로젝트에 투입됐다는 사실은 가려졌다."(315)


"파티는 1980년대 초 갑자기 잔인하게 끝났다. 1970년대 말 내내 인플레이션이 치솟으면서 런던과 뉴욕의 은행은 고정 금리 대출을 중단하고 변동 금리 대출로 전환해 이자율이 금융 시장 상황에 따라 변했다. 연준의 새로운 통화 원칙이 금리를 밀어 올린─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1년짜리 채권에 대한 총수익은 1978년 8퍼센트에서 1981년 17퍼센트까지 치솟았다─1979년 10월 이후 차용국들의 이자 지급액 역시 올라갔다."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투자가 목적이던 이 도피 자금은 대부분 신용을 연장해준 바로 그 부자 나라 은행으로 다시 들어갔고, 차용국 정부들은 자국에 아무런 경제적 혜택도 가져다주지 않은 대출의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1981년 달러 가치가 다른 통화에 대비해 상승하기 시작하자, 그 압박은 훨씬 더 강해졌다. 차용국들은 단지 예전과 똑같은 액수의 달러를 벌기 위해 더 많은 커피, 밀, 야자유를 수출해야 했기 때문이다."(316)


# 멕시코 모라토리엄 선언과 금융 위기의 전염


"채무 위기는 단편적 해결책으로는 불가능했다. 은행이건 차용국이건 도망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은행이건 차용국이건 파산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 노릇이고, 그것이 잠재적으로는 서유럽과 북미 그리고 일본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320) "IMF의 대출에는 조건이 붙었다. IMF는 차관을 요망하는 나라에 1센트라도 넘겨주기 전에 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개발할 전문가팀을 파견했다. IMF의 조건에 동의하지 않으면 정부는 돈을 받지 못했다. 그런 다음에도 대출금을 일정 비율로 나누어 지급하는─분할 발행이라고 알려진─방식으로 넘겼으므로, 만일 차용국이 약속한 개혁을 시행하지 않으면 어느 시점에서든 현금의 흐름이 끊길 수 있었다. 스스로를 정치에는 관심 없는 기술 관료로 여기는 경제학자들이 대거 포진해 있긴 했지만 IMF는 매우 정치적인 조직이었고, 차관을 희망하는 나라에 그들이 부과한 조건은 미국 및 유럽 관료의 시각을 반영했다. 관례상 총재는 유럽인이었다."(322-3)


"(레이건 행정부의) 시각에서 봤을 때 채무 위기의 기저에 있는 원인은 은행의 현명하지 못한 대출이나 소비재 하락 혹은 1979년 이후 급등한 금리가 아니라 채무국 자체의 행동이었다. 이제 워싱턴은 이런 나라들의 정부가 지나치게 크고 지나치게 간섭하는 통에 민간의 자율성을 짓누르고 번영을 망친다고 천명했다." "IMF와 세계은행은 자유 시장 정책이 마침내 채무국을 성장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새로운 통념을 널리 퍼뜨렸고, 과거 상향하달식 계획과 정부 지시에 의한 투자를 선호하던 자신들의 입장을 단숨에 뒤집었다. 채무국의 국민 다수도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했고, 프레비시가 오래도록 주창해온─수입 장벽으로 뒷받침된─정부 주도 산업화가 지속 가능한 번영을 가져오는 데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이 새로운 시장 지향적 사고는 워싱턴 컨센서스로 알려졌으며, 전문가들은 이를 개발도상국이 자신들의 부채를 딛고 일어나도록 도와줄 원칙이 담긴 반半공식적 개요서라고 말했다."(328-9)


정치적으로 조율된 경기 부양책이 "수명을 다하고 나면, 한 경제의 장기적 성장 잠재력은 전적으로 생산성 증가에 의존한다. 1970년대 초 이후 모든 경제 부국의 생산성 증가는 경제 정책과는 무관한 이유로 인해 예전보다 현저하게 느려졌다. 전후 시대에 더욱 생산적인 노동으로 옮아갔던 거대한 저활용 노동 인력을 다시 이용할 수는 없었다. 소농과 소작인은 오래전에 도시로 이주했고, 예전에는 무직이던 여성 노동 인력의 유입도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건설과 항구의 현대화처럼 거의 즉각적으로 생산성 증대를 끌어낼 수 있는 유형의 공공 부문 지출도 시행됐다. 노동력에 유입되는 청년 인구는 부모 세대보다 학력이 높긴 했지만 읽고 쓰는 능력이 경제 부국에서 거의 보편화한 이상 평준화 교육으로 생산성이 급증하던 시대는 이제 과거가 되었다. 미래의 복리 증진은 얼마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었다."(338-9)


"전자통신과 화물 운송의 신뢰도가 높아지고 정보를 여기저기로 전달할 수 있는 컴퓨터가 발전함에 따라 대규모 조직을 적은 부분으로 쪼개 각각을 노동 수급, 공항, 철도 노선, 정부 보조금 또는 그 밖의 매력적인 것을 활용하도록 배치하거나, 아니면 이제 원거리 관리가 한층 수월해진 회사에 특정 과제를 맡기는 것이 가능해졌다." "전출된 노동자는 자신이 수년간 쌓은 경험과 훈련이 다른 산업에서는 거의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걸 깨달았고,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급료가 더 적은 일자리 아니면 실직이었다. 주요 사업체가 사라진 지역 사회는 소득과 세수의 출혈이 심했고, 공공 서비스와 생활 편의 시설 비용을 댈 재원이 없어졌으며, 많은 경우 장기적인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기업은 새로운 과학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사업의 구조 조정은 결코 고통 없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1980년대에 이러한 변화는 국경을 초월했고, 이것이 장차 세계화라고 부르는 것의 출발점이었다."(341-2)


"서민 가구에는 소득 증가의 둔화가 생활 수준 향상의 둔화를 의미했다. 가족 규모가 작아져 확실히 소득은 과거보다 약간 더 늘어났고, 거의 모든 사람이 광범위하게 확산된 물질적 발전의 혜택을 입었다. 스마트폰과 가정용 컴퓨터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물건이 됐다." "그러나 성장 약화가 사회 복지 제도의 재정적 실행 가능성을 낮추면서, 실업 수당은 줄고 연금은 동결 또는 한꺼번에 삭감되고 수업료는 올랐다. 분노를 달랠 한 가지 수단은 신용 거래를 더 쉽게 얻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생에서 더 이상 현찰로 사치품을 구입할 여유가 없던 사람들이 그걸 향유하기 위해 더욱 손쉽게 돈을 빌릴 수 있었다. 2008년 미국과 유럽에서 그러한 실험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무엇보다 정체된 생활 수준은 정치적 주류의 변방에서 싹튼 반체제 운동의 부상으로 전개됐고, 이것이 불만을 품은 다수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끌어냈다."(344-6)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조치는 노동을 위해 자본의 힘에 제한을 둔 것으로 종종 설명되어왔다. 그것은 실상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었다. 전후의 협상은 노동자만큼이나 그들의 고용주에게도 굴러 들어온 복이었다. 당대의 가장 과격한 반자본주의자들조차 고용주가 안정적 일자리와 임금 인상을 제공할 경우에만 관대한 사회 수당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쟁은 수익을 부진하게 만들고 회사를 폐업으로 몰아감으로써 고용주가 그 약속을 지키기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전후의 사회 계약을 생성하는 데는 경제 전반에 걸쳐 경쟁을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일부 산업 국가에서 국가 독점 기업을 강제하고, 회사의 운영 시간과 사업장 위치 그리고 허가와 다른 회사의 가격을 철저히 규제하고, 정부에 여신 통제와 수입 제한 및 투자 장벽을 통한 시장 지배권을 주는 것 등이 그 방법이었다." "이런 조치는 많은 사람을 더 잘 살게 만들었다─잠시 동안 말이다."(346-7)


경제 기적은 정말로 일어난다. 하지만 폭발적으로 경제 성장을 누린 국가들 "역시 결국에는 궤도에서 이탈했고, 그들의 정치 지도자는 더 이상 기적을 일으킬 수 없었다." "1970년대 위기의 후유증은 수십 년간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90년대 일본의 가계 재정을 파탄나게 만든 거품 경제. 1980~1994년에 미국에서 있었던 수천 건의 은행 도산. 그리고 2008년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된, 부적격 대출자를 대상으로 한 과도한 대출로 더욱 불거지면서 고통스러울 정도로 높은 실업을 초래하고 유럽연합 자체의 생존을 위협했던 심각한 경기 침체. 이 모든 것의 기원은 경제를 생산성 증진이 허용하는 것 이상으로 더 빠르게 성장시키려던 정치적 노력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다 헛수고였다. 미국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이를 잘 표현했다. "20세기의 3분기는 경제 발전의 황금기였다. 그 시대는 모든 합리적 기대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우리가 머지않아 그와 같은 시기를 다시 만날 가능성은 없다."(3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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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워 1945-2005 2
토니 주트 지음, 조행복 옮김 / 플래닛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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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세계 경기 후퇴의 결정적 분기점

1. 닉슨의 고정환율제 포기 선언(1971.8.15)

2. 욤 키푸르 전쟁(1973.10.6)으로 촉발된 석유 파동


1970년대 들어 "서유럽은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라고 불리는 현상, 다시 말해 임금과 가격의 상승과 경제 침체가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대표들은 1971년 이래의 높은 인플레이션 비율을 근거로 들며 1973년의 위기가 닥치기도 전에 이미 피로의 징후를 보이고 있던 경제에 더 많은 임금과 기타 보상을 강요했다. 실질 임금은 생산성 증가를 웃돌기 시작했다. 이윤은 하락했고 신규 투자는 감소했다. 과열되었던 전후 투자 전략으로 형성된 과잉 생산 능력은 인플레이션이나 실업으로만 해소될 수 있었다."(752-3) "몇 년 전만 해도 일상생활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굴뚝 산업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철강 노동자와 광부, 자동차 산업 노동자, 방적공의 실직은 지역 경제의 경기가 하향 국면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발생한 게 아니었고 나아가 석유 파동의 부산물도 아니었다. 서유럽의 유서 깊은 제조업 경제가 소멸하고 있었다."(755-6)


각국 정치인들은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전후의 합의를 고수했다. 다시 말해 가능하면 완전 고용을 추구했고, 완전 고용을 달성하지 못하면 직업을 가진 자들에게는 임금 인상으로, 실직한 자들에게는 사회적 소득 이전으로, 공공 부문이나 민간 부문 공히 허약한 고용주에게는 현금 보조금으로 보충하려 했다. 그러나 70년대가 지나면서 점점 더 많은 정치가들이 이제 인플레이션은 높은 실업률보다 더 큰 위험을 일으킨다고 확신하게 되었다."(759) 1970년대에 전후 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하자, 중간 계급은 자신들이 사기를 당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인플레이션, 세금으로 조성된 사양 산업에 대한 정부 보조금, 예산과 재정 압박을 해소하기 위한 공공사업의 축소와 폐지 등 그들이 그렇게 느낄 만한 이유는 많았다. 과거에 그랬듯이 인플레이션의 재분배 효과는 현대 서비스 국가 특유의 높은 과세와 맞물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소위 중간 계급 시민들은 이를 가장 뼈저리게 느꼈다."(761-2)


불투명한 전망 속에서도 "서유럽에서 고전적인 형태의 공산주의와 파시즘에는 미래가 전혀 없었다. 시민적 평화에 대한 진정한 위협은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다가왔다."(764) 극단적 테러리즘을 고수한 바더-마인호프 집단에 대한 전반적인 "공감의 한 원천은 문학계와 예술계에서 증가하고 있던 독일의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향수였다. 이 사람들은 독일이 이중으로 '상속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나치가 독일 국민에게서 훌륭하고 '유용한' 과거를 박탈했다면, 연방공화국에 들어와서는 미국이라는 감독이 거짓된 독일의 이미지를 강요했다." "타인의 조작과 이익에 희생된 자는 이제 '독일인'이라는 테러리스트들의 주장처럼, 미국 점령군과 다국적 기업들, '국제' 자본주의 질서를 표적으로 삼은 독일 극좌파 테러리즘의 뚜렷한 민족주의적 색채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라이츠와 파스빈더의 영화에서 테러리스트들은 "정치적 억압에 맞서 양심으로 투쟁하는 현대의 안티고네로 그려진다."(776-8)


# 1970년대 서유럽을 혼란에 빠뜨린 두 가지 흐름

1. 소수 민족 분쟁(스페인 바스크, 북아일랜드, 코르시카 등)

2.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극단적 테러리즘(서독의 적군파RAF,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BR)


"정치 폭력이 '자기 긍정의 생산력'을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은 현대 이탈리아의 역사에서 낯설지 않았다. 네그리가 확인하고 붉은여단과 그 동조자들이 실천했던 것은 파시스트가 찬양한 '폭력의 정화력'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극좌파는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증오 때문에 반민주주의적 우파의 '프롤레타리아적' 폭력으로 후퇴했다. 1980년이면 좌파와 우파의 테러리스트들은 그 표적과 방법에서 서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784) "이 시기 좌파 테러리즘이 거둔 단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업적은 지역의 정치 단체들에 남아 있던 혁명적 환상을 철저하게 지워버린 것이다." 1970년대의 '총탄의 시대'는 사람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얼마나 허약한지 깨닫게 해주었다. "서유럽의 심장부에서 혁명적 전복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시절의 순효과는 테러리스트들이 계획하고 기대했듯이 사회를 양극화시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온갖 정파의 정치인들을 중도의 안전 지대에 결집하도록 몰아 댔다."(786)


"당대의 지식인 사회 전체가 매우 폭넓게 공유했던 인간 해방 이론의 밑바탕에는 두 가지 가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첫 번째는 권력의 토대는 계몽 사상 시대 이후 대부분의 사회 사상가들이 가정했듯이 자연 자원과 인간 자원의 통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 다시 말해 자연계에 관한 지식, 공적 영역에 관한 지식, 자신에 관한 지식, 그리고 무엇보다 지식 자체가 생산되고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에 관한 지식을 독점하는 데 있다는 가정이었다." "두 번째는 과거의 확실한 사실은 물론 확실함의 가능성 자체까지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혹적인 주장이었다. 모든 행위, 모든 견해, 모든 지식은 정확히 사회에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아야 했다. 판단이나 평가가 주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몇몇 영역에서는 당파적인 (그리고 암묵적으로 보수적인) 사회적 태도의 표현이자 표상으로 간주되었다."(788-90)


# 회의론 : 니체 → 푸코 / 해체론 : 하이데거 → 데리다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가정을 비판하고 계몽된 합리주의와 그 정치적, 인식론적 부산물의 토대에 문제를 제기하는 새로운 관심은 하이데거처럼 근대성과 기술적 진보를 비판했던 20세기 초의 비평가들과 '포스트모던' 시대의 몽매에서 깨어난 회의론자들 사이에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하이데거와 그들의 과거 이력을 세탁하게 해주었다." "라캉과 데리다처럼 새로이 대가가 된 이론가들은 대학의 기존 청중에게 언어의 변덕과 역설을 완전한 철학으로, 말하자면 텍스트적 해석과 정치적 해석에 무한정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틀로 승격시켰다." "격세유전적으로 경제적 범주와 정치 제도들에 집착했던 마르크스주의도 그러한 집착으로부터 구제되어 문화 비평으로 거듭났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 부르주아를 마지못해 극복해야 하는 불편함은 이제 더는 장애물이 아니었다."(791-2)


"자연을 인간의 목적에 맞게 굴복시키고 지배하려는 계몽 사상의 기획이 매우 비싼 대가를 치를 수 있다는 생각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저술을 통해 냉전으로 분열된 양 진영의 독자들에게 이미 익숙했다. 특히 1944년에 출간된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이 중요했다. 하이데거식으로 뒤틀린 이러한 반성─공산주의는 서구에서 수입한 부정한 것이며 끝없는 물질적 진보라는 지나치게 오만한 환상을 갖고 있다는─은 70년대에 윤리적 반대파와 생태학적 비판자들의 결합으로 등장한 지식인 반대파의 토대를 형성했다." "1973년 프랑스와 영국에서 '생태' 후보들이 선거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서독에서는 녹색당의 선구자인 농민대회가 창설되던 해였다. 서독의 환경 운동은 1차 석유 파동으로 추동력을 얻어 순식간에 주류 정치에 합류했다."(811-2) '복고retro'의 유행과 더불어 "70년대는 스스로 반성하는 걱정스러웠던 시대로서 앞이 아니라 뒤를 바라보았다."(796)


"70년대 초까지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스가 단지 지리적인 의미에서만 유럽의 주변부였던 것은 아니다. 세 나라 모두 냉전에서 '서방'에 충성했지만 다른 점에서는 상당히 고립되어 있었다. 경제는 유럽의 남쪽 변두리에 있는 다른 국가들, 즉 유고슬라비아나 터키의 경제와 닮았다." "세 나라 모두 1970년대 초에 서유럽보다는 라틴아메리카에 더 친숙한 성격의 권위주의적 통치자들이 다스렸다. 전후의 정치적 변화는 대체로 그 나라들을 비켜간 듯했다. 안토니우 살라자르가 1932년에서 1970년까지 통치했던 포르투갈과, 프랑코 장군이 1936년에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1939년부터 1975년에 죽을 때까지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은 채 통치했던 스페인에서는 다른 시대에 속한 권력의 위계 제도가 고착되어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군부 도당이 1967년에 국왕과 의회를 내쫓았다. 이후 그리스는 대령들의 혁명평의회가 통치했다. 세 나라의 불투명한 미래 위에는 불안정했던 과거의 망령들이 떠돌았다."(829)


"아이러니한 것은 지중해 유럽이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변화들이 문화나 정치의 과격파와 혁신자들이 아니라 구체제 자체의 보수적 정치인들 덕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그리스),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포르투갈), 아돌포 수아레스(스페인)는 몇 년 뒤의 미하일 고르바초프처럼 모두 자신들이 해체시키는 데 기여한 구체제의 특징적 생산물이었다." "세 나라는 정치적 고립을 자초하면서도 '서방'에 그다지 어려움 없이 진입하거나 재진입할 수 있었다. 그들의 외교 정책이 언제나 북대서양조약기구나 유럽경제공동체 회원국들의 외교 정책과 양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통의 반공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냉전의 제도들은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체제들과 군사 독재나 교권 독재 사이에서 소통과 협력을 증진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 나라들의 경제는 다른 서방 국가들의 경제와 본질적으로 유사했으며 이미 화폐와 상품, 노동의 국제 시장에 잘 통합되어 있었다."(861-3)


"1930년대 이래 공공 정책은 많은 사람들이 신뢰한 '케인스주의' 정책에 의존했다. 이에 따르면 경제 계획과 적자 예산, 완전 고용은 원래 바람직하며 서로 지탱해 주는 관계에 있다. 비판자들은 두 가지 논거를 제시했다. 하나는 매우 단순했다. 서유럽인들에게 익숙한 사회 복지 사업을 더는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논거는 특히 전후 수십 년 동안 국민경제가 위기로 점철되었던 영국에서 집요하게 주장되었다. 사회 복지 사업을 지속할 수 있든 없든 간에 국가 개입은 근본적으로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 국가가 일반적으로 제공하는 보험, 주택, 연금, 보건, 교육 등 서비스의 대부분은 민간 부문이 더 효과적으로 제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수사적 전략은 젊은 유권자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으로 들렸다. 젊은이들은 이러한 견해가 반백 년 전 마지막으로 지적 우월성을 확보했을 때 보여 준 치명적인 귀결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882-3)


"공공 부문이 명백히 제거되었는데도 1988년 영국 총생산에서 공공 지출이 차지한 몫(41.7퍼센트)은 '국가를 국민에 등에서 내려놓겠다'던 대처의 약속과는 달리 10년 전(42.5퍼센트)과 사실상 동일했다. 보수당 정권이 실업 수당으로 전례 없이 많은 액수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철강, 석탄, 섬유, 조선 등 비효율적인 (그리고 국가의 보조를 받던) 산업에서 일하다 실직한 많은 사람들은 결코 다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일생 동안 이름만 제외하면 모든 것을 국가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들이 일했던 산업의 고용주들이 몇몇 경우(특히 철강)에 이윤을 내는 사기업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는 사적 소유가 일으킨 기적이라기보다는 마거릿 대처 정권이 높은 수준으로 고정된 노동 비용을 덜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필요 없는 노동자들의 비용을 국가가 보조하는 실업으로 '사회화' 했던 것이다."(891-2)


"대처가 권력에 오르기 전, 영국 공공 정책의 초기 입장은 국가가 정통성과 주도권의 자연적인 원천이라는 점이었다. 대처가 무대에서 떠날 때쯤이면, 이러한 견해는 뿌리 깊이 국가에 얽매인 영국 노동당에서도 소수파의 견해로 전락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전후 합의의 핵심 가정들이 우파 혁명으로 박살났다면, 프랑스에서 정치적 틀을 깨뜨린 것은 비공산주의 좌파의 부활과 변화였다."(898-9) "드골의 적대자와 비판자는 이 장군이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하는 '비민주적' 방식을 특별히 강조했다. 이를테면 프랑수아 미테랑은 1965년에 출간된 소책자에서 드골의 방식을 '영원한 쿠데타'라고 지칭했다. 그러나 사실상 무제한적이었던 대통령의 권한은 드골의 후임자들에게는 정파를 불문하고 확실히 매력적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대통령을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독특한 제도는 개별 후보의 정치적 기술과 인성에 의지함으로써 5년마다 실시되는 의회 선거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901)


"전후 유럽의 자기 인식의 전환점은 1973년 12월 28일 파리에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가 서유럽 최초로 출간되면서 찾아왔다. W. L. 웹은 <가디언>지에 실은 영어 번역본에 대한 서평에서 "지금에 살면서 이 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일종의 역사적 바보이다. 시대 의식의 결정적인 부분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기이한 것은 솔제니친 자신도 인정했듯이 책이 전하는 전언, 즉 '현실 사회주의'는 야만스러운 사기극이며 노예 노동과 대량 학살의 토대 위에 세워진 전체주의 독재라는 메시지가 전혀 새롭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타이밍이 중요했다. 비판의 영향력은 서유럽에서 수십 년 동안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동유럽에서 1960년대 내내) 무뎌졌다. 국가사회주의가 1917년에 러시아에서 최초로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래 대륙 전역에서 우르릉거렸던 국가사회주의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일말의 빛을 찾으려는 욕구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918-9)


"퓌레의 설명에 따르면 19세기의 자유주의적 낙관론과 마르크스주의의 과격한 사회 변혁의 전망이라는 쌍둥이 지주에 의존했던 이 이야기는 땅에 처박혔다. 급진적 변혁을 목적으로 삼은 이 이야기에서 혁명의 상속인으로 추정되었던 소련 공산주의가 반동적으로 유산 전체를 오염시켰기 때문이다." "퓌레가 펼친 논지의 정치적 함의는 그 자신도 잘 이해하고 있었듯이 매우 중대했다. 마르크스주의가 정치로서 실패한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늘 불운이나 환경을 탓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대 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가 의심을 받는 것은 상황이 다르다. 다시 말해 이성도 필연성도 역사 속에서 작용하지 않았다면, 스탈린의 모든 범죄, 국가의 명령으로 사회를 변혁하는 중에 희생된 모든 생명과 자원, 절대적 명령으로써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던 20세기의 과격한 실험이 남긴 그 모든 오류와 실패는 길은 옳았지만 잘못 움직였다는 식으로 '변증법적으로' 설명될 수 없었다."(923-4)


"1945년 이후 권리 담론은 개인에 집중되었다. 이 또한 전쟁의 교훈이었다." "개인 권리의 법률적 수사를 현실 정치의 영역에 밀어 넣은 동력은 동시에 발생한 마르크스주의의 후퇴와 유럽안보협력회의였다."(927) 동유럽 지식인들이 "시민 사회─70년대 중반 이래 동유럽의 지식인 반대파가 널리 채택했던 모호한 어구─를 재건하려는 노력에 담긴 의미는 이들이 1968년 이후에 당-국가의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프라하의 후사크나 베를린의 호네커가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권리-담론'의 논리를 인정하고 자국의 헌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리라고는 누구도 진정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이론상의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바로 실제로는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며, 국내외의 관찰자들에게 이 사회들이 사실상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지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반대파는 공산당 당국과 싸우는 대신 의도적으로 그들을 지나쳐 이야기했다."(930-1)


사회주의 경제권에서 생산된 조악한 품질의 상품은 수출이 어려웠기 때문에 "사실상 동유럽의 상점을 채우는 유일한 방법은 서방에서 돈을 빌리는 길뿐이었다. 서방은 확실히 돈을 빌려줄 열의가 있었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민간 은행들 모두 소련 진영 국가에 자금을 빌려주게 된 것을 기뻐했다." "동유럽 전체의 경화 채무는 1971년 61억 달러에서 1980년 661억 달러로 늘었다. 이는 1988년 956억 달러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수치에는 루마니아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는 오랫동안 외국의 채무를 갚았고 그동안 국민은 등골이 휘었다. 이 채무는 70년대에 헝가리에서 적용된 것과 같은 가격 결정의 허용 폭이 아니었더라면 훨씬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의미는 분명했다. 공산주의 체제는 차관만이 아니라 빌려온 시간에도 의존하여 생존하고 있었다. 조만간 공산주의 체제는 고통스럽고 사회를 붕괴시킬 경제 조정을 거칠 필요가 있었다."(954-5)


"레닌이 유럽사회에 기여한 독특한 점은 유럽 급진주의의 분권적 정치 유산을 빼앗아 지배력의 독점이라는 혁신적인 시스템으로 권력의 성격을 바꾼 것이었다. 레닌은 권력을 주저 없이 한 곳에 집중시켰으며 강제로 그곳에 존속시켰다. 공산주의 체제는 주변부에서 무한정 부식될 수도 있었지만, 최후의 붕괴를 주도할 자는 중앙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의 붕괴에 관한 이야기에서, 프라하나 바르샤바에서 놀랍도록 번창한 새로운 종류의 반대는 시작의 끝일 뿐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출현한 새로운 성격의 지도부는 끝의 시작이 될 터였다."(957) "철저한 당원이었던 고르바초프는 당이나 당의 정책을 절대로 공개리에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곧 흐루시초프 시대의 오류에 환멸을 느꼈고 이후 브레주네프 시절의 억압과 무기력에 실망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런 의미에서 고전적인 개혁 공산주의자였다."(974)


공식적으로 '자본주의'가 수십 년 동안 격한 비난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사회에서 "경제 개혁가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라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1921년 이후 소련의 모든 개혁 정책은 레닌의 신경제 정책NEP을 필두로 똑같이 시작되어 똑같은 이유로 활력을 잃었다. 중대한 경제 개혁은 통제의 완화나 포기를 의미했다. 개혁은 해결하려는 문제를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방금 말했듯이 통제력의 상실을 뜻했다. 그런데 공산주의 체제는 통제에 의존했다. 공산주의는 실로 통제 그 자체였다. 경제의 통제였으며 지식의 통제였고 운동과 여론과 인간의 통제였다. 그 외 모든 것은 변증법이었다." "소련은 중앙 통제 경제의 정치적, 제도적 기득권을 지닌 자들이 운영했다. 소련 특유의 작은 모순들과 일상의 부패는 권위와 권력의 원천이었다. 당이 경제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 자체를 개혁해야 했다."(976-7)


"유럽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에서 두드러진 측면은 전염 그 자체가 아니었다. 모든 혁명은 그런 식으로 확산된다. 누적된 사례가 기존 권위의 정통성을 침식했다. 1848년과 1919년의 혁명, 그리고 정도는 약하지만 1968년의 혁명도 바로 그러했다. 1989년의 새로움은 몰락 과정의 속도였다." 즉석 정치 교육의 수단이 된 텔레비전 방송이 널리 퍼지면서 "공산주의 체제의 중대한 자산이었던 정보에 대한 통제권과 독점권이 소실되었다. 혼자라는 두려움은, 즉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들도 공유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갖게 되는 두려움은 영원히 사라졌다. 심지어 루마니아에서도 국영 텔레비전 방송실의 장악이 봉기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1989년 혁명들의 두 번째 현저한 특징은 그 평화로운 성격이었다." "전 세계의 많은 시청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전 국민이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공산당 정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경에 빠졌다."(1026-8)


"동유럽의 군중과 지식인,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신속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공산주의에서 질서정연하게 탈출한) '제3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면, 이는 단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그들을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1989년 7월 6일, 고르바초프는 스트라스부르의 유럽회의에서 연설하면서 청중에게 소련이 동유럽의 개혁을 가로막는 일은 없으리라고 밝혔다. 개혁은 '전적으로 인민들의 문제'였다." "고르바초프의 입장에는 전혀 모호함이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1988년에 미흐니크가 말했듯이, '외교 정책의 성공에 사로잡힌 포로'였다. 제국의 중심이 주변부 식민지를 붙들지 않겠다고, 그럴 수 없다고 너무나 공공연히 인정했기에 또 그렇게 이야기한 데 대해 도처에서 갈채를 보냈기에, 제국은 식민지를 잃었으며 더불어 제국의 지역 내 협력자들도 잃었다. 나머지 결정해야 할 일은 자신들의 몰락 방식과 방향이 전부였다."(1033-4)


"독일의 재통합은 분열의 시기에 특이한 융합의 사례였는데, 그 공은 우선 헬무트 콜에게 돌아가야 한다." 한때 하루에 2,000명에 달했던 서독으로의 주민 유입을 멈추기 위해 헬무트 콜은 동독의 파괴에 착수했다. "1990년 5월 18일, 두 독일 사이에 '화폐, 경제, 사회의 연합'이 체결되었고, 7월 1일에는 그 핵심 조항인 도이치 마르크의 동독 확대 사용이 발효되었다. 동독인은 이제 사실상 무용지물인 동독 마르크를 4만 도이치 마르크까지 1대1이라는 엄청나게 유리한 환율로 교환할 수 있었다." "8월 23일, 동독 의회는 서독 정부와 사전에 체결한 협약에 따라 연방공화국에 가입하기로 가결했다. 한 주 뒤, 통일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 조약에 따라 독일민주공화국은 독일연방공화국에 흡수되었다. 3월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승인하고 1949년의 기본법 23조에 의해 허용된 대로였다. 10월 3일 통일 조약이 발효되었고, 독일민주공화국은 연방공화국에 '가입'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1040-2)


동독 국민들은 자신들의 "괴로운 역사에 관여하기보다는 잊으라는 권고를 받았다. 1950년대 서독의 망각의 시절이 얄궂게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연방공화국 초기에 그랬듯이, 1989년 이후에도 해답은 번영이었다." "서독 유권자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콜은 세금 인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이 거대한 새로운 과제를 이행하기 위해 연방공화국은 그때까지 상당한 흑자를 보았던 재정을 적자로 돌리는 것 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연방 은행은 그러한 정책이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에 깜짝 놀라 1991년부터 이자율을 꾸준히 올렸다. 1991년은 도이치 마르크가 예정에 따라 유럽 통화에 영원히 연동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자율 인상이 가져온 연쇄 효과인 실업 증가와 경제 성장의 둔화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화폐제도 가입국 전역에서 감지되었다. 헬무트 콜은 자국의 통일 비용을 밖으로 전가했으며, 독일의 유럽 내 협력자들은 부담을 나누어지게 되었다."(1048-50)


"고르바초프 시절에는 '러시아적 특성'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게 강해졌다. 그 이유는 동독이 프리드리히 대왕을 매우 공개적으로 자랑하고 독일민주공화국의 고유한 독일적 특성을 드높이기 시작한 이유와 동일했다. 인민공화국들이 무너지던 때에 애국심은 사회주의를 대신할 유용한 수단으로 재차 등장했다. 바로 이 때문에 애국심은 가장 편하고 위협이 가장 적은 형태의 정치적 반대이기도 했다." "보리스 옐친이 예기치 않게 등장하게 된 배경은 이러했다." "당과 관료 기구가 진정한 변화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지 관찰할 좋은 기회를 가졌던 옐친은 이 결정적인 순간에 러시아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정치적 본능을 발휘했다." "고르바초프가 국내 정치에서 저지른 주된 전술적 오류는 민족을 드러내며 실제적인 권력과 상당한 독립성을 갖는 민족 입법부의 등장을 장려한 것이었다."(1064-5)


# 1991년 6월 12일, 옐친의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대통령 선출 / 12월 31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멸


"체코슬로바키아의 평화로운 분열은 같은 해 유고슬라비아를 덮친 파국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서방 언론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유럽과 미국의 정치가들이 공공연하게 취한 한 견해에 따르면, 발칸 지역은 희망이 없는 곳으로 불가사의한 싸움과 먼 옛날의 원한이 뒤섞인 가마솥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운명을 타고났다.' 자주 인용되듯이 유고슬라비아는 여섯 개의 공화국과 다섯 개의 민족, 네 개의 언어, 세 개의 종교, 두 개의 알파벳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단일 정당이 이 전부를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1989년 이후에 일어난 일은 단순했다. 솥뚜껑이 제거되자 가마솥이 폭발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는 운명이 아니라 인간의 작품이었으며, 이 점에서 다른 공산 국가들의 해체와 유사했다. 유고슬라비아 비극의 압도적인 책임은 독일이나 다른 외국의 정부가 아니라 베오그라드의 정치인들에게 있었다."(1085-6)


종교와 민족을 연결짓는 일은 갈수록 희미해져 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는 투르크의 전진을 막는 중세 세르비아의 마지막 거점이자 1389년 역사에 길이 남을 패전(코소보 전투)의 장소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따라서 지역 내에서 알바니아인이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사실을 일부 세르비아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인구 측면에서 골칫거리이며 역사적으로도 도발적인 일로 간주했다." "세르비아인들이 자신들과 바짝 붙어 불안을 조성하는 알바니아인들을 싫어한 반면, 유고슬라비아 북부에서는 무기력한 남부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증가했는데 이는 민족을 가리지 않았다. 문제는 민족이 아니라 경제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부유한 북부가 보조금으로 연명하는 남부에 분노하는 동안 "유고슬라비아의 빈부차는 극적인 수준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마침내 지리와 연관되어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1091-2)


"민족주의는 (티토 사후의 정치적 공백기에) 밀로셰비치가 세르비아를 장악하는 방법이었으며, 1989년 5월 그가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그 효력은 이미 확인되었다."(1095) "발트 국가들이나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에서 공산주의 체제 이후의 정치인들은 소수 민족들의 존재를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 없이 공산주의라는 과거를 벗어던지고 민족 독립에 호소하면서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민주주의를 즉시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는 달랐다. 연방이 구성 공화국들로 해체될 경우, 슬로베니아를 제외하고는 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각국마다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소수 민족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듯이, (분열의) 촉매제는 코소보였다." "세르비아의 수정 헌법은 이미 궁핍하고 불우한 최하층민이었던 알바니아인들에게서 자치권과 정치적 대표권을 사실상 박탈했다."(1096-7)


# 코소보 의회 해산과 병합


1992년에 벌어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전쟁, 그리고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사이의 전쟁으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마케도니아에서 창설된 코소보해방군은 코소보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알바니아와 연합하기 위해) 무장 투쟁을 천명했다."(1109) 밀로셰비치의 주된 전략적 목표는 "반대 세력의 패배가 아니라 비세르비아계 시민들을 세르비아인의 영토라고 주장된 곳에서 축출하는 것이었다. 어느 편을 막론하고 모두 관여했던 이러한 행위는 매우 오래된 관행으로 새롭게 '민족 청소'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세르비아 군대가 단연 최악의 범죄자들이었다. 보스니아 전쟁이 끝날 무렵 약 30만 명이 살해되었고, 수백만 명이 추방되었다. 유럽공동체 보호 시설의 입소 신청자는 1988년에서 1992년 사이 세 배 이상 늘었다. 1991년에는 독일 한 나라에서만 25만 6,000명의 난민을 수용했다."(1101-2) 


# 스레브레니차 학살 : 1995년 7월 11일 국제연합이 정한 '안전지대'(보스니아 동부의 스레브레니차)에 진입한 세르비아 군대가 소년들을 포함한 이슬람계 남자들 7,400여 명을 나흘에 걸쳐 학살한 사건


"90년대 정치의 분열적 기질은 과거에 공산주의 체제였던 동유럽 나라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서유럽에서도 중앙 집권적 통치의 구속을 벗어던지려는─또한 먼 지방의 가난한 동료 시민들에 대한 책임을 포기하려는─똑같은 충동이 감지되었다. 스페인에서 영국까지 서유럽의 기존 영토 단위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적어도 전통적인 국민 국가 형태를 그럭저럭 유지했으나, 대규모의 행정적 지방 분권을 경험했다."(1145) "자치에 대한 욕망은 이를테면 보헤미아보다는 카탈루냐에서 확실히 더 강했고, 플란데런과 왈론 사이의 간극은 체코와 슬로바키아 사이나 심지어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간극보다 훨씬 더 넓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유럽처럼 분리를 감행하기보다는 국가 내 존속을 택한) 요인은 서유럽 국가들이 이제는 자국 백성에 대한 권위를 독점하는 독립적인 민족 단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서유럽 국가들은 점차 다른 무엇의 일부가 되어 가고 있었다."(1165)


#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동맹(북부 동맹), 프랑스의 코르시카 섬, 영국의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벨기에(플란데런 지방과 왈론 지방의 갈등)


"유럽연합 회원국들을 일련의 진정으로 새로운 제도적, 재정적 협정으로 몰아넣은 것은 1992년의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5년 뒤에 이를 계승한 암스테르담 조약이었으며, 이 두 조약은 근본적으로 변한 외부 환경의 직접적인 귀결이었다."(1165)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공동 통화의 요구 조건을 엄격히 적용했으며, 가입을 희망하는 모든 나라는 빠르게 늘어났던 유럽연합의 실천 규약인 아키코뮈노테르acquis communautaire를 자국의 통치 체제에 통합하라고 강요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절차가 복잡한 관료적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조약은 북유럽의 신청국들이나 오스트리아에는 어떠한 지장도 초래하지 않았지만, 동유럽의 장래 후보들에게는 대단히 곤란한 장애들이었다. 유럽연합은 자체 헌장의 규정에 따라 새로운 유럽을 품 안에 끌어안겠다고 공언했지만 실제로는 가능하면 배제하려 애썼다."(1171)


# 아키코뮈노테르acquis communautaire : '공동체의 경험'이란 뜻으로 현재까지 축적된 유럽연합 법규 전체를 말한다.


#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여파

1. 여전히 체질이 허약한 중동부 유럽 국가들에게 유럽연합 가입 이전 단계로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승인하면서 조약이 북대서양조약기구를 후원하게 되었다.

2. 유럽연합과 관련된 의제들이 대중들의 관심권에 들어오면서 익명의 관료 기구들이 조용히 계획하고 결정 내리던 시절이 막을 내렸다.

3. 유럽의 결합(최소한 서유럽만이라도)을 위한 길을 마련했다.


"한 국가의 정부는 자유롭게 세금을 거두어 예상되는 비용에 충당하는 반면, 유럽연합은 스스로 재원을 조달할 능력이 거의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유럽연합의 수입은 고정된 비율의 관세와 농업세, 연합 전역의 간접 판매세(부가가치세), 그리고 특히 국민총소득GNI의 겨우 1.24퍼센트가 상한선인 회원국들의 분담금에서 나왔다." 따라서 유럽연합의 소득은 개별 회원국들 내부의 정치적 압력에 취약했다. "2004년 유럽연합이 동유럽으로 확대된 이후, 19개 회원국이 브뤼셀로부터 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다. 연합 운영비는 사실상 순기여국인 영국과 프랑스, 스웨덴,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독일 등 6개 회원국의 분담금으로 충당되었다. 2003년 12월, 6개국 모두 앞으로는 유럽연합에 내는 국가별 분담금을 국민총소득의 1.24퍼센트에서 1퍼센트로 낮추어야 한다고 집행위원회에 청원했다. 이는 유럽연합의 미래에는 불길한 일이었다."(1181)


"독일은 무임 승차한 나라들의 도덕적 해이와 실질적인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성장 안정 협정'을 고집했다. 유로화 체제에 가입하기를 원하는 나라들은 공채를 국내총생산의 60퍼센트 미만으로 억제해야 했으며 재정 적자도 국내총생산의 3퍼센트 미만으로 운영해야 했다. 이러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나라는 상당한 액수의 벌금을 포함하는 연합의 제재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의 요점은 유로화 지역의 어떤 정부도 재정적으로 방심하거나 예산을 마음대로 초과하지 못하도록 보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회의론자들이 예견했듯이 '천편일률적' 통화가 주는 부담이 곧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프랑크푸르트에 설립된 유럽중앙은행은 처음부터 이자율을 비교적 높게 유지하여 새로운 통화를 지탱하고 인플레이션을 방지하려 했다. 그러나 유로화 지역 국가들의 경제는 발전 수준과 경기 순환 지점이 서로 달랐다."(1183-4)


"그러나 모든 점을 다 고려할 때, 유럽연합은 좋은 것이다. 단일 시장이 가져다준 경제적 이익은 영국의 가장 열렬한 유럽연합 회의론자조차 인정할 정도로 분명했다." "80년대 말부터 유럽공동체와 유럽연합의 예산은 명백히 재분배적 성격을 띠었다. 부유한 지역에서 가난한 지역으로 재원을 이전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격차를 꾸준히 감소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리하여 사실상 앞선 세대의 국가별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대체했다."(1193) "유럽연합은 간접 통치 제도로서 갖는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흥미롭고 독창적인 속성을 지녔다. 결정이 내려지고 법률이 통과되는 곳은 초정부적 차원이지만, 이러한 결정과 법률은 각국 정부를 통해서 이행된다. 모든 일은 협정에 의해 시행되어야 한다. 강제 수단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징세 공무원도 없고, 유럽연합 경찰도 없다. 그러므로 유럽연합은 각국 정부에 의한 국제적 통치라는 특이한 타협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1195)


유럽의 최하층이 빈곤과 실업뿐만 아니라 인종과 교리로도 결정되면서 "극우 정당들은 영국 국민당처럼 '소수 민족'에 반대하여 집결했든 국민전선의 장 마리 르펜처럼 '이민자'를 표적으로 삼았든 이 시기에 많은 소득을 얻었다. 한편으로는, 세계화된 경제의 취약 계층으로 드러난 많은 노동자들은 더딘 경제 성장으로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경제적 불안정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좌파의 옛 기관들은 더는 그러한 불안정을 계급의 기치 아래 가두고 동원할 만한 자리에 있지 않았다. 국민전선이 대체로 한때 프랑스 공산당의 보루였던 구역에서 최상의 결과를 얻은 것이 우연이 아니다.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소수 민족들이 자신들의 주변에 눈에 띄게 증가했기에, 그리고 동유럽에서 이어지는 수문이 일단 개방되면 훨씬 더 많은 외국인이 복지의 여물통으로 먹고 살거나, '우리의' 일자리를 앗아갈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극우파가 내세우는 주장의 호소력은 강했다."(1208-9)


"새로운 반체제 정당들은 다른 점에서도, 즉 청렴하다는 점에서도 이득을 보았다. 정권에서 배제되었기에 90년대 초까지도 유럽 제도의 토대를 갉아 먹고 있는 듯했던 부패에 오염되지 않았다."(1214) "진정으로 놀라운 일은 새로운 우파 포퓰리즘 정당들의 출현이 아니라 이들이 1989년 이후의 혼란과 불만을 이전보다 더 잘 이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유럽인들이 정치인들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지라도, 유럽 통치 체제의 핵심에는 가장 급진적인 반체제 정당들조차 감히 정면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지지를 얻은 무언가가 있다. (민주주의나 자유 또는 법치 이념이 아니라) 실제 작동 방식에 이러저러한 결함들이 있다고 심각하게 지적될 때조차 유럽인들을 하나로 결속시킨 이것은 바로 '유럽식 사회 모델European model of society'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는 '미국식 생활양식American way of life'과 대비될 때 비로소 그 뜻이 더 분명해진다."(1218)


"돌이켜 보건대 전후 몇 십 년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한때는 이데올로기적 양극화가 고착된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이해되었지만 이제는 그 실체가 드러났다. 그 시기는 1914년에 시작된 유럽 내전의 연장된 에필로그였으며, 히틀러의 패배와 그의 전쟁이 미결로 남긴 사업이 최종적으로 해결되기까지 40년간 지속된 휴지기였다." "회복은 냉전을 극복하고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냉전 덕분에 가능했다. 소련 제국의 그림자는 과거 오스만 제국의 위협처럼 유럽을 줄어들게 했지만, 남은 유럽에게는 통합의 혜택을 부여했다. 서유럽 시민들은 동유럽인들이 감금되어 있는 중에 번창했다. 구대륙 제국들을 계승한 국가들의 빈곤과 후진성을 처리해야 할 의무도 없었고,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받은 덕택에 직전 과거의 정치적 여파로부터도 안전했다. 동쪽에서 보면 이는 언제나 협소한 시각이었다. 공산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소련 제국이 붕괴된 뒤로는 이러한 시각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1220)


근대 국가가 세금을 걷고 전쟁을 수행하는 두 가지 밀접한 연관 기능을 수행한 것과 달리 "유럽연합은 초보적인 군사적 능력을 갖추는 데에도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외교 정책을 마련하는 데에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러한 사정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반백 년 동안 불리한 조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2001년 9·11 사건의 여파로 더 나은 유럽의 미래를 위한 탈국민국가적 처방의 한계는 명확해졌다. 어쨌든 전통적인 유럽 국가는 외부에서 전쟁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평화를 강요했다. 이는 홉스가 오래전에 깨달았듯이 국가에 유일하고 독특한 정통성을 부여한다. 최근까지 비무장 시민에 대한 격렬한 정치적 전쟁이 만연했던 나라들(스페인, 영국, 이탈리아, 독일)에서 국가의 중요성은, 말하자면 경찰과 군대, 정보부, 사법 기구의 중요성은 잊힌 적이 없다. '테러리즘'의 시대에 국가의 무력 독점은 대부분의 시민에게는 매력적인 재보험이다."(1295-6)


"유럽연합은 경제적 서비스와 기타 서비스의 주요 제공자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 시민은 참여자라기보다는 소비자로 규정되며, 따라서 그처럼 야심적인 사업의 전례로는 유망하지 않았던 민주주의 이전의 스페인이나 폴란드, 또는 아데나워 시절 서독의 조용한 정치 문화와 노골적으로 비교될 위험성이 존재했다."(1297) 이처럼 "우리가 탈국민 시대나 탈국가 시대에 살고 있다는 환상은 '세계화된' 경제 발전에 지나치게 주목하고······ 인간의 삶의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유사한 초국적 발전이 틀림없이 진행 중이라고 추정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오로지 생산과 교환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유럽은 실로 초국적 물결이 깨끗이 연결된 플로우 차트가 되었지만, 권력이나 정치적 정통성, 문화적 친근성의 장소로 볼 때, 유럽은 여전히 오래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작은 개별 국가들이 모여 있는 익숙한 곳이었다. 민족주의는 대규모로 왔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민족들과 국가들은 여전하다."(12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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