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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1947 - 전후 독도문제와 한.미.일 관계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10년 8월
평점 :
서장
"1952년 1월 한국의 해양주권선언, 즉 평화선 발표에 대해 일본이 항의하면서 독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다." 일본 외무성의 입장을 대표하는 각서는 모두 네 건인데, "첫 번째 각서에 첨부된 「1953년 7월 13일자 죽도에 관한 일본정부의 견해」라는 장문의 글에 일본정부가 주장하는 독도영유권의 핵심적 내용과 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일본 외무성은 역사적 사실과 국제법의 두 가지 측면에서 일본의 독도영유권을 다루었다. 먼저 역사적 사실로는 ①과거에 죽도(竹島) 혹은 기죽도(磯竹島)라는 명칭으로 불린 섬은 현재의 울릉도이며, 현재의 죽도는 과거에 송도(松島)로 불렸다. ②1693년과 1881년 조선정부의 항의로 일본인의 죽도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이는 현재의 울릉도이지 죽도(독도)가 아니다. ③한일 간 존재했던 충돌은 울릉도에 관한 것이지 현재의 죽도(독도)에 관한 것이 아니다. ④문헌·고지도상의 송도는 현재의 죽도(독도)로 일본에 알려졌고, 일본 영토의 일부분이다."(25-6)
"1952년 처음으로 한일 양국 간에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외교각서 교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이래, 양국의 각서는 일종의 독도연구사를 형성하게 되었다. 역사적 근거(문헌·지도·연구)와 국제법적 근거(SCAPIN·대일평화조약·독도폭격·독도 폭격연습장 지정 및 해제)가 동시에 다루어졌으며, 시기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긴 시기가 다루어졌다. 역사적으로는 광범위한 주제에 대한 바늘 끝 같은 첨예한 자료적 해석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한국정부는 역사적 근거를 강조하는 입장이었던 반면, 일본정부는 국제법적 근거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때문에 한국은 일본의 국제법적 근거를 반박하는 데, 일본은 한국의 역사적 근거를 부정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이 시기에 양국 정부의 견해는 단지 외무부·외무성의 작업이 아니라 역사학자·지리학자·국제법학자 등 양국의 전문가가 총동원된 총력전의 양상이었으며, 주로 역사적 근거가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었다."(32-3)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의 준비·진행 과정에서 일본이 미국을 이용해 독도영유권을 확보하려 시도한 것에서 전후 독도문제가 발원했다는 판단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1905년 일본의 한국 침략과정에서 첫번째 희생물이 된 독도는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이었고, 전후 한국령으로 귀속되는 것이 당연했다. 1952년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독도영유권을 주장했을 때 그 근거는 일본의 고유영토설이나 1905년의 불법 영토편입 사실이 아니라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에서 독도가 일본령으로 남게 되었다는 주장에 무게중심이 두어졌다. 즉, 일본은 1905년의 불법적 영토편입은 을사늑약으로 실질적 주권을 상실하고 항거불능이었던 한국을 상대로 한 일방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일환이었기에 주장의 근거와 정당성이 현저히 부족한 상태였던 반면, 자국과 48개국이 서명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평화조약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보편적 동의를 획득할 수 있는 근거라고 판단했다."(60-1)
#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성격
1. 미국 주도의 단극적(單極的) 평화조약 : 반공·반소가 핵심
2. 일본과 서명국들간의 평화관계 회복 : 중국(대만과 분열되어 대표성 논란)과 한국(식민지 전력 논란) 배제 → 공산주의 저지라는 반공에 방점
3. 일본의 전쟁책임과 배상·보상·사과 문제 외면
4. 조약 이후 동북아시아에서 미국과의 양자동맹을 통한 안보·지역 질서 구축
#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 한일관계에 미친 영향
1. 한국을 서명국·조인국에서 배제하고 '2차 대전 이후 해방된 국가'로 간주하면서 (재일한국인을 비롯한) 한국의 국제법적 지위 문제 방치
2. 일본이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통해 독도를 일본령으로 인정받았다고 주장하면서 한일간 영토문제 상존
3. 일본이 한일회담 과정에서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상쇄하거나 묵살하기 위해 적산(敵産)에 대한 대한(對韓)청구권을 주장하면서 배상·청구권 문제 쟁점화
1 한국 1947년 : 남조선과도정부·조선산악회의 독도조사
"1947년 6월 울릉도에서 시작된 일본인의 독도 불법상륙 및 한국 어선 총격사건은 (일본의 어업한계선인) 맥아더라인 확대 및 한국의 어로구역 축소 우려와 결합되면서 강력한 목소리로 발전했다. 그런데 당시 한반도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은 혼란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미소의 강력한 영향 속에 남북은 분단되었고, 좌우갈등은 격렬한 상황이었다. 완전통일·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둘러싼 갈등과 미소·남북·좌우의 갈등과 대립은 생사를 건 인정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찬반탁·좌우익의 대립이 극심한 물리적 충돌과 테러로 이어지는 "혼란한 시점에 한국인들 가운데에서 독도영유권에 대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돌이켜보자면 당시 독도영유권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과 노력이 본격화된 것은 요행이자 천우신조에 가까웠다. 이후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1947년 울릉도에서 시작되어 대구·서울로 이어진 독도에 대한 관심은 한국의 독도영유권 확립에 중요한 기여를 한 첫 출발점이 되었다."(107-8)
"1947년 독도조사대의 결성·파견에는 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 국사관 관장 신석호, 조선산악회 송석하·도봉섭 등 일제하에서 진단학회 활동을 벌였거나(신석호·송석하·유홍렬), 조선학 운동을 주도했던(안재홍·송석하)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즉, 식민지시대 이래 한국적인 것, 한국 문화·역사·지리 등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연구를 주도했던 인물들이 해방 후 독도조사대 결성을 주도한 것이다. 특히 안재홍이 민정장관 직위에 있었던 점은 조선산악회가 독도조사에 동원될 수 있는 실질적 힘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947년 8월의 독도조사는 비밀리에 수행되었지만, 해안경비대 등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이루어졌고, 이는 민정장관 안재홍의 조력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독도에 대한 조사작업이 필요했던 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은 소규모의 공식조사단 파견과 더불어 대대적인 학술조사활동을 민간의 조선산악회에 부탁했던 것이다."(120)
2 한국 1948년 : 독도폭격사건과 독도의 재발견·재인식
"1947년 독도조사로 시작된 한국인들의 독도 인식은 1948년 6월에 발생한 독도폭격사건을 통해 결정적으로 제고되었다." "사건발생을 처음 보도한 것은 『조선일보』 1948년 6월 11일자였는데, 6월 8일 오전 11시 반경 국적불명의 비행기가 독도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가해 울릉도·강원도 어선 20여 척이 파괴되고, 어부 16명이 즉사하고, 10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폭격소식은 다음 날 독도에 출어했던 어선을 통해 울릉도에 전해졌고, 울릉도 경찰은 6월 9일 저녁 7시 구조선 두 척을 독도로 파견했다. 그러나 불과 4톤도 안 되는 구조선으로는 구호작업을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이들은 10일 저녁 6시 울릉도로 돌아왔는데, 폭격 당일 독도 부근에 흩어졌던 사체와 배 파편은 하룻밤 사이 파도에 휩쓸려갔고, 바위에 난파된 경양환(慶洋丸)에서 김준선, 최태식 두 사람의 사체만을 수습해 왔다. 폭격 당시 즉사한 사람은 9명이며, 행방불명자 5명도 즉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179-81)
"하지는 6월 17일 맥아더에게 2급 비밀 전문을 보내 "(독도폭격) 문제는 현지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이며 모든 구실과 경우를 활용해 총력적으로 반미주의를 부채질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악효과를 극복하고 대응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하지가 맥아더에게 원한 것은, "지난주 리앙쿠르암(독도)에서 한국 어선에 대한 우발적 폭격을 포함한 불행한 사태에 비추어, 맥아더 장군은 장래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지역이 미군기의 폭격이나 총격지역으로 활용되지 않게 하라고 명령했음을 본인에게 통보했다"라는 하지 성명의 승인이었다." "아울러 딘 군정장관이 독도 동방 10해리 지점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지역에 대한 폭격금지를 요청한 것은 단지 이 해역이 한국 어민들의 어로지역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주한미군정의 관할구역이자 한국 영토임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이 지역이 한국 어부들의 어업구역이라며 구체적인 어획고를 제시하기까지 했다."(191-3)
"1948년 독도폭격사건은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교훈과 계기를 제공했다. 이 폭격사건으로 말미암아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국민적 공감대와 국내외적 확인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언론의 보도는 피해 어민들이 강원도 울진·묵호, 울릉도 어민들로 모두 한국인들이며, 이들이 조업하던 독도 역시 한국령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또한 미군정 역시 사건이 발생한 독도에 "군의를 포함한 조사 및 구호반"을 파견했다. 즉, 독도의 관할권이 미군정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과 조치들은 모두 사건발생지인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분명한 증거였다. 또한 이 사건의 조사와 처리에 일본정부나 SCAP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으며 일본 언론에 보도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독도폭격사건을 계기로 모든 한국인들은 독도가 명백히 한국의 영토이며, 불행한 사건이 발생한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244-5)
"일본은 미국에는 패배했지만, 아시아국가들 특히 한국이나 중국에는 패배하지 않았다는 이중적인 전후 인식을 갖고 있었다. 특히 전쟁 책임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일본은 미국에는 복종적·위계적 동맹을, 아시아국가들에는 멸시적이며 냉소적인 구제국주의적 시각을 유지했다. 이미 1948~49년 단계에서 일본 외무성은 한국의 독립을 부정했다. 훗날 한일회담 일본측 수석인 구보타 간이치로가 한국이 샌프란시스코조약 이전에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었다고 한 발언은 이러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일본은 1905년 독도 불법 영토편입 사건을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의 맥락·구조에서 분리시켜 개별적인 사건으로만 다루려 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1900년대를 전후한 제국주의 침략과정에서 대한제국·조선 정부와 맺은 조약들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전제와 가정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본이 철저한 전후 반성과 청산과정을 거쳤다면, 독도영유권 주장은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273-4)
3 일본 1947년 : 독도·울릉도는 일본령
외무성 조약국장이던 하기와라 도오루가 작성한 「평화조약에 대한 일본정부의 일반적 견해」 제1차안(1947.5)을 검토한 가세 도시카즈는 "카이로선언은 일본정부가 감수하기 곤란한 영토조항을 담고 있으므로, 일본정부가 이를 승인하는 것처럼 전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카이로선언의 영토조항은 ①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래 탈취·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도서 박탈, ②만주·대만·팽호도 등 중국에서 도취(盜取)한 영토의 중화민국 반환, ③폭력·탐욕으로 약취(略取)한 기타 일체의 지역에서 구축(驅逐)을 규정한 바 있다. 그런데 가세 참사관의 코멘트는 기본적으로 일본 외무성 관리들이 자국이 수락한 항복조건마저 무시하고 무력화하려 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일본은 포츠담선언에 제시된 무조건 항복조항을 수락함으로써 종전에 이르렀다. 포츠담선언은 곧 일본 항복문서의 기본텍스트가 되었다. 그런데 포츠담선언의 영토조항은 카이로선언을 계승한다고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287)
"조지 앳치슨은 국무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치고문으로 맥아더와 충돌했다. 아시아우선주의자로 일본의 새로운 '황제'였던 맥아더는 반공주의에 입각한 일본 사회의 재건을 원했다. 맥아더는 전후 일본 개혁 대부분이 실제로는 "소련의 첩자"인 "이른바 자유주의자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을 수행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공직추방, 배상, 반독점 조치 등은 압력솥의 뚜껑을 여는 것이기에 개혁을 하는 시늉만 하며 실제권력은 똑같은 사람들 수중에 내버려두어 일본이 "타고난 아시아의 지도자"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오히려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1947년 8월 강력한 대일징벌론자이자 중국통이었던 조지 앳치슨이 불의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 것을 계기로 "SCAP(연합국 최고 사령부) 내에서 중국전문가 대신 일본전문가가 득세하기 시작했고, 대일정책에서도 징벌적 정책과 민주화 정책에서 온건적 현상유지정책 내지 역전코스가 시작되었다."(299-301)
"일본 사회에 대한 시볼드의 인식은 '매료' 그 자체였다. 그는 일본계 여자와 결혼했고, 수많은 일본인 거물들을 친구로 삼았다. 전후에도 시볼드는 정치담당보고관으로 거리낌 없이 일본 극우 정치인들과도 교류했다. 시볼드는 태평양전쟁의 책임은 일본의 정치·경제·사상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극소수 '군국주의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시볼드는 자신의 친일적 입장을 일본의 공산주의화 저지, 즉 반공주의로 정당화하려 했다. 그는 전후 일본에서 벌어진 전범추방, 재벌해체 등의 경제개혁을 공산주의자들이 사주라며 반대했다." "반면, 한국을 여섯 차례 방문했던 그는 한국인이 "슬프고, 억압받고, 불행하고, 가난하고, 조용하며, 음울한 민족"이며, "전후 상황과 이 대통령의 거친 성격은 미군사령관에 파견된 수많은 미국정치고문들에게 한국을 보다 완고하고 견딜 수 없는 곳으로 인식"한다고 썼다. 그는 이런 견지에서 대일평화조약과 초기 한일회담을 이끌어갔다."(302-3)
1946년 11월부터 1947년 6월까지 일본 외무성은 총 4차례에 걸쳐 연합국에 대대적으로 배포한 「일본의 부속소도」(Minor Islands Adjacent Japan Proper)라는 팸플릿에서 "울릉도를 일본령으로 묘사하려는 의도를 내보였다. 일본 외무성의 설명을 따라가보면 11세기에 일본이 먼저 울릉도를 인지했으며, 한국은 13세기 중반 이후에야 식민지화를 시도했지만, 15세기 이후 공도(空島)정책을 취했고, 임진왜란 후 1세기 동안 일본이 이 섬을 지배했다. 17세기 말 울릉도 영유권을 둘러싼 논쟁 끝에 한국령이 인정되었지만, 한국은 여전히 공도정책을 취했고, 일본 어부들이 인근에서 계속 어업을 했다. 19세기 후반에도 일본 내에서 울릉도 개발논의와 청원이 있었고, 일본정부의 불허에도 일본인들이 울릉도를 출입했다는 주장이다. 즉, 일본이 먼저 울릉도를 인지했으며, 1세기 동안 지배했고, 영유권 논쟁이 있었으며, 한국이 공도정책으로 사실상 방치한 사이에 일본이 실질적으로 개발했다는 내용이다."(345-6)
"다음으로 독도에 관한 팸플릿의 서술을 살펴보면, 일본인들은 고대부터 독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1667년에 마쓰시마(松島)라고 명명했으며, 유럽인들은 1849년에야 리앙쿠르암이라고 명명했다. 한편 울릉도와는 달리 리앙쿠르암에 대해서는 한국 명칭이 없고, 한국에서 제작된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04년 9월 시마네현 어부 나카이 요사부로가 일본정부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켜 자신에게 대여해줄 것을 청원했다. 다음 해인 1905년 1월 28일 일본정부는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자국령에 편입시켰고, 이를 시마네현 현보에 고시했다. 나카이와 일본정부는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한제국정부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1년 뒤인 1906년 울릉도 군수 심홍택의 보고로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으나, 러일전쟁의 와중에 일본 군대가 궁성을 점령했고 외교권은 박탈당한 상태였다."(349-50)
"일본 외무성이 만든 허위정보에 기초한 팸플릿이 1948~51년 간 주요 길목에서 한국의 독도영유권을 무장해제하는 결정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문건을 동경의 미국 외교관·관리들이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손을 거쳐 국무부로 전달된 후 중요성이 재차 확인되었다는 데 있었다. 즉, 일본 외무성과 미 국무부 외교관·관리들의 교류와 소통, 상호 영향력이 한국의 정당한 권리와 요구를 침해했다는 사실이었다.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던 한국은 일본의 이러한 허위정보와 문서조작작업을 전혀 알지 못했으며, 정작 대일평화조약이 논의되는 시점에는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전쟁에서 생존을 위해 허덕이고 있었다. 1905년 국가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 있을 때 일본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영토편입한 이후, 1947년 일본 외무성에 의해 또다시 허위문서로 조작된 정보가 유포되었고, 1950~51년 한국전쟁으로 한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일본의 허위정보가 미 국무부를 움직였다."(365)
4 미국 1947년 : 리앙쿠르암(독도)은 한국령
1949년 11월 2일 미 국무부가 작성한 대일강화조약 초안에는 부속지도가 첨부되었는데, 독도(리앙쿠르암)이 한국령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독도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이 시점에 발생했다.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일본에서 미 국무부의 대표이자 주일정치고문이었던 시볼드는 초안에 대한 검토의견서에서 독도가 1905년 일본령이 된 이후 단 한 차례도 한국의 이의제기를 받지 않아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폈다. 초안을 전달받지 못했던 주한미대사 존 무초는 미국과 유엔이 정책적으로 한국을 지지했으며 한국정부의 위신이 있기 때문에 한국에 대일평화협상 참가 및 서명국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미 국무부가 양국의 의견을 모두 수용하여 한국의 대일평화협상 참가, 독도는 일본령이라는 조항을 새로 추가한 "이 (수정) 초안의 존재는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일본 영유권,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가 일본령으로 확인되었다는 주장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375)
"1950년 5월 대일평화조약 대통령특사로 임명된 존 포스터 덜레스는 일본 및 연합국들과의 협상을 지휘했다. 덜레스는 대일평화조약의 핵심이 "비징벌적인 평화조약"에 있다고 생각했다. 제1차 대전을 종결한 베르사유회담에 초급 외교관으로 동석했던 덜레스는 베르사유조약이 패전국에 대한 전쟁책임을 명문화한 후 영토할양, 배상금 등을 강제했기 때문에 독일에 의한 제2차 대전이 발발했다고 생각했다. 당시 미 국무부가 작성한 기존의 조약 초안을 베르사유체제와 마찬가지로 배상을 포함한 징벌적 성격이 강했으며, 제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와의 평화조약 역시 전쟁책임과 배상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때문에 덜레스는 국무부가 준비한 초안이 "지나치게 상세"하며, 일본인의 의견을 결정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더라도 시작단계부터 일본과 의논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덜레스가 추진한 비징벌적이며 배상문제를 거의 배제한 '평화조약'은 세계외교사에서 유례가 없는 우호적 조약이었다."(375-6)
"대일평화조약의 초안은 얄타체제로 대표되는 미·소·영·중 4대국의 연합전선이 냉전의 격화와 중국 대륙의 공산화로 대표되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붕괴되는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며 변화해갔다. 최종적으로 미국·영국은 일본과 평화조약 체결에 참가해 서명했고, 소련은 참가했으나 서명을 거부했으며, 중국은 초대받지 못했다. 미국은 적국 일본에 대해 가혹하고 징벌적인 조약 초안을 준비했다가, 1948년 냉전의 격화와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정책을 변경했다. 미국은 일본을 미국의 동아시아 하위동맹자로 설정했고, 일본에 관대한 평화조약을 제안했다. 미국은 남태평양의 구일본위임통치령의 접수 및 신탁통치, 오키나와에 대한 신탁통치 및 군사시설 유지, 일본 본토에 대한 군사시설 및 군대주둔권을 획득함으로써 대일평화조약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영국은 일본에 대한 경계심과 억제를 표명했으나 결국 초안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상태에서 대일평화조약에 동의하였다."(379-80)
"로버트 피어리는 전쟁기간 동안 국무부에서 대일정책 관련 업무를 맡았고, 1945년 10월 주일미정치고문실에 배속되어 근무했으며, 1946년 중반 미 국무부 극동국으로 옮겨 일본담당관 및 동북아시아과 등에서 일한 일본통이다." "1947년 1월 30일 로버트 피어리가 제출한 제1장 영토조항을 다룬 초안·비망록·지도 가운데 초안이 남아 있다." "피어리가 만든 매우 간단한 2쪽짜리 문서는 이후 1947~49년 국무부 대일평화조약 초안 영토조항의 원천이자 핵심이 되었다. 피어리는 대일평화조약의 영토조항 초안을 처음 작성할 때부터 제주도·거문도·울릉도와 함께 독도를 "한국 근해의 모든 작은 섬들"에 포함시켰다. 또한 피어리의 영토조항 초안은 1947년부터 1949년까지 독도를 한국령으로 표시한 미국측 초안으로 이어졌다. 특히 피어리가 일본통이며, 일본에 우호적인 입장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독도가 한국령으로 명확히 규정된 것은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의미가 있다."(388-9)
5 미국의 대일평화조약 초안과 독도 인식(1947~1951)
1. 미 국무부 조약 초안의 독도 인식(1947~1949) : 리앙쿠르암(독도)은 한국령
2. 시볼드의 공작(1949~1950) : 리앙쿠르암(독도)은 일본령 주장
3. 존 포스터 덜레스의 등장(1950~1951) :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조항 삭제
4. 영미합동초안의 성립과 최종 조약문의 확정(1951)
6 영국의 평화조약 초안과 영미협의(1951)
7 미국과 일본의 협의(1951)
"(경제적 배상과 관련하여) 무배상은 대일평화조약 체결과정의 기본정신이자 원칙이었다. 무배상이 강조된 것은 장래 오랫동안 일본에 중대한 부담을 지우면서까지 배상하지 않도록 한 원칙을 주요 교전국인 미국·영연방·네덜란드 등이 승인했기 때문이며, 국민당 정부도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배상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조약의 기본정신과 원칙이 무배상을 강조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무배상으로 불린다. 사실상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 채택된 것은 역무(役務)배상이라는 새로운 방식이었는데, 이는 구상국(求償國)이 제공하는 원료를 가공해 인도하거나 구상국 연안수역의 침몰선박의 인양·해체를 맡는 방법 등으로 일본이 외화부담을 지지 않으면서 피해국의 손해를 보상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이 채택된 가장 큰 이유는 승전국인 미국이 일본에 다량의 원조를 제공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배상액이 커지면 그만큼 미국의 부담이 늘어나기 때문이었다."(629-30)
"청구권과 관련해 일본 외무성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a) 일본의 재외재산: 연합국 중 〈일본과 현실적으로 전투행위에 돌입했던 제국에 있는 모든 일본 자산은 반환될 것〉. 일본 재산 중 사유재산에 대해서는 특별한 고려를 해줄 것을 간청. 전쟁에 따른 청구권의 지불에 이것이 적용될 때는, 재산의 소유자에 대한 보상문제는 일본정부의 재량에 일임해줄 것. (b) 약탈재산: 〈반환은 대부분 완료되었음. 평화조약의 체결과 함께 종결될 문제임〉. 괄호 친 두 부분은 일본 외무성의 기본적 시각을 보여주는 것인데, 교전당사국 내 일본 재산은 반환되어야 하지만, 일본이 타국으로부터 약탈한 재산은 반환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평화조약 체결로 종결하자는 것이었다. 교전국가와 점령지의 경우에 이런 시각을 유지한다면 식민지의 경우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다. 식민지에 대한 약탈재산이나 반환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유재산을 포함한 식민지 내 일본의 재산반환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630-1)
"덜레스의 1951년 1~2월 동경 방문은 한국 전장에서의 상황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성사되었다. 1950년 11월 중공의 개입 이후 백두산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은 급속히 후퇴했으며, 1951년 1월 초에는 한국정부 및 주요 인사들의 제주도·일본 망명을 고려할 정도로 전황이 악화되었다. 대일평화조약의 조속한 체결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미국 조야에서 제기되었고, 덜레스는 전격적으로 일본과 대일평화조약·미일안보조약의 체결에 합의하게 된다. 다른 연합국과의 협의, 구체적 조약문의 세부적 수정작업이 남았지만, 1951년 2월 11일 그가 동경을 떠날 때 이미 대일평화조약은 거의 완성단계에 돌입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덜레스와 일본의 가장 주요한 관심사는 일본의 미래안보문제였다. 2월 2일 일본 국회에서 덜레스는 일본이 상호방위 같은 일정한 조약체제하에 들어온다면 미국은 주일미군을 확실히 보유해달라는 일본정부의 요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이라는 취지로 연설했다."(638-9)
# 미일안보협정과 미일행정협정(SOFA) 체결로 실현
"일본정부가 제시한 한국의 대일평화조약참가 불가 이유는 첫째, 한국이 일본과 관련해서는 평화조약에 따라 독립을 획득하게 될 해방국으로 일본과 교전상태나 전쟁상태가 아니었다. 둘째, 한국이 서명국이 되면 공산주의자들인 재일한국인들이 재산회복·보상 등에서 일본정부에 엄청난 요구를 할 것이다. 때문에 미국 초안에 명시된 것처럼 한국에 대한 권리·권원·청구권을 포기하고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정도면 충분하고, 양국 관계는 한일간 양자조약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시다의 입장을 정리하면 ① 전시 한국의 연합국 지위 불인정, ② 재일한국인의 연합국 국민 지위 부여 시 일본정부 파탄, ③ 한국의 조약서명국 배제, ④ 한일관계 수립은 한일 간 협정으로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회담일 오후, 재일한국인이 연합국 국민의 지위를 획득하지 않는 것만 확실히 보장된다면 한국이 강화조약의 서명국이 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덜레스에게 전달했다."(664)
8 한국정부의 대일평화조약 대응과 한미협의(1951)
# 덜레스의 1차 초안(제안용)에 대한 한국정부의 답신(1951.5.7)
1. 한국의 연합국·서명국 자격 부여 및 재일한국인의 연합국 국민 자격 부여
2. 대마도 반환
3. 재한일본인의 적산 몰수 인정
4. 맥아더라인 존속
"미 국무부는 미군정기 및 한국정부 수립기에 한미 협정을 통해 귀속재산으로 인정한 한국 내 일본 재산에 대해서는 타당성을 인정하였다." "한국에 대한 연합국 자격 및 조약서명국 지위 부여와 관련해서는, 한국이 주장하는 근거(임정의 대일투쟁·선전포고, 폴란드의 예)를 부인했다. 다만 이 문제와 관련해 미국정부의 입장이 결정되는 바에 따라 한국에 연합국·서명국 지위를 부여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즉, 한국이 제시한 과거의 사실이 연합국·서명국 자격조건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 미국의 대한정책적 입장에 따라 한국의 자격이 결정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대마도 반환 요구와 맥아더라인 존속 요구를 과도한 배상 혹은 일종의 영토할양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전반적으로 한국의 주장은 당시까지 미국이 추구해왔던 '비징벌적이며 배상을 제외한' 평화적 조약 체결이라는 원칙과 큰 격차가 있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상을 주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731-2)
# 미국의 결정사항 통보(1951.7.9)
1. 한국에 최신 대일평화조약 초안(제3차 영미합동초안) 제공
2. 한국의 조약서명국 자격 부정
3. 한국의 대마도 반환 요구 기각
4. 맥아더라인 논의는 국제어업회담으로 해결 권고
# 한국의 제2차 답신서 주요 내용
1. 재한일본인 귀속재산의 한국 소유권 확인(최우선 요구 사항)
2. 대마도를 기각하는 대신 독도·파랑도 등의 영토권 확정
3. 맥아더라인 유지
"한국정부가 최초로 독도를 거론한 제2차 답신서(1951.7.19)에는 독도의 명칭만이 거론되었을 뿐 독도·파랑도에 대한 어떠한 근거·관련자료도 제시되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조약 초안에 거론된, 일본이 방기할 도서인 제주도·거문도·울릉도 뒤에 단지 독도·파랑도를 첨부했을 뿐이다. 추가 설명도 전무했다. 또한 위치와 존재가 확인되지 않던 파랑도와 함께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주장함으로써 독도 자체의 실존감이나 신뢰도를 저감(低減)시켰다. 나아가 한미협의의 맥락에서 보자면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다음에 독도 반환을 주장했고, 그것도 가공의 섬인 파랑도와 함께 요청함으로써, 독도가 한국측 영유권의 중요성에서 후순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한미협의(1951.7.19) 시점에 한표욱 1등서기관은 독도와 파랑도가 "대체적으로 울릉도 인근에 위치"한다고 발언함으로써 지리적·역사적·문헌적 정보가 부정확하고 미비했음을 드러냈다."(762-3)
"미 국무부는 1951년 8월 10일 대일평화조약과 관련해 한국정부에 최종입장을 통보했다. (여기서 러스크는 독도가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키도사 관할하에 놓여져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독도는 7월 19일자 한국측 제2차 답신서에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미국은 불과 20여 일 만인 8월 10일에 일본령이라고 결정해 한국에 통보했다. 러스크 서한에 등장하는 이 대목은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이 제시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다. 이 사이 한국측은 근거자료를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한국정부는 물론 주미한국대사관도 독도와 파랑도가 울릉도나 다케시마 인근에 있다고 했을 뿐 정확한 방위나 실체, 그것이 한국령이라는 역사적·문헌적 증거나 근거자료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주한미대사관도 회신을 보내지 못했다. 이미 대일평화조약 초안 완성의 시기적 압박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미 국무부는 더 이상 결정을 늦출 수 없었고, 자신들이 보유한 정보에 근거해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777-9)
"지금까지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한국정부는 러스크 서한의 독도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않았다. 조약서명국 자격·맥아더라인에 대해서는 몇 차례 의견을 개진했지만, 독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훗날 유진오는, 독도를 평화조약에 명기치 않은 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분쟁의 씨를 남겨놓은 처사라고 평가했다. 맥아더사령부가 맥아더라인을 그을 때 독도를 맥아더라인 밖에 위치시켜 한국령으로 표시했는데, 그것을 평화조약에 명시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다만 그렇게 된 이유는 "미국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해석되지 않는다. 울릉도에 부속된 소암초에 지나지 않으므로 특기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본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했다." "아울러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정식 외교공문서에 실존하지 않는 섬(파랑도) 이름을 적어 우리 영토라고 주장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고 기록했다."(785-6)
# 1950~1951년 간 한국의 최대 우선순위는 한국전쟁에서의 생존 및 승리였다.
9 보이지 않는 전투 : '독도분쟁'의 서막과 한·미·일의 대응
"1952년 1월 19일 (독도가 포함된 '영해선 이외의 어족자원 보호관할권(관할선)'을 확정한) 한국의 해양주권선언이 있은 직후, 일본 외무성은 성명을 발표해(1.20) 일본의 독도영유권을 주장했다. 일본 외무성은 한국정부가 한일 간 공해에 50~60마일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데, "강화조약에서 우리에게 귀속된 우리의 독도까지도 한국에 속하게 될 것"이며 "한국정부는 또한 그 지배하에 있지 않은 북한의 해역에까지 그 주권을 확장"하고 있다며 맹비난했다. 일본이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가 일본령에 귀속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일본은 현재같이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고유영토설)이거나 1905년에 무주지로 편입된 영토(무주지편입설)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1951년 샌프란시스코대일평화조약에서 일본령으로 귀속된 섬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게 된 첫번째 배경이 샌프란시스코대일평화조약이었음이 분명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826)
1952년 9월 한국산악회 독도조사대의 방문을 전후하여 재차 독도폭격사건이 발생하자 "1953년 2월 27일 한국군은 한국 및 유엔군 당국의 완전 합의로 독도 주변 공폭(空爆)연습이 없을 것을 미극동총사령관 명의로 보장하였으며, "미국정부로서도 독도는 한국 영토의 일부임을 인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즉각 이에 대해 반박했다. 미극동군사령관에게 조회한 결과 "유엔군사령부는 독도에 있어 폭격연습의 중지를 한국정부에 통고한 것일 뿐, 그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라는 회답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정부는 영유권 주장 근거로 두 가지를 내세웠는데, 첫째 대일평화조약에 일본이 권리·권원·청구권을 포기할 지역을 명문화해 규정했는데 독도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점, 둘째 독도는 미일합동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폭격연습지 리스트에 추가되었는데, 이는 본래 독도가 일본령인 까닭에 합동위원회가 리스트에 올린 것이므로 한국령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다."(840-1)
"독도문제가 표면화되는 중요한 동기는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체결과정에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대한 미 국무부의 우호적 동향을 일본정부가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 미 국무부는 러스크 서한(1951.8.10)을 일본정부에 공식 전달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정부는 윌리엄 시볼드 등을 통해 미 국무부의 결정내용과 관련 정보를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의 팸플릿 작성과 1949년 11월 시볼드의 주장 이후 독도문제는 표면에서 전혀 논의되지 않았고, 1951년 2월과 4월 덜레스의 두 차례 동경 방문에서도 전혀 논의되지 않았다. 그런데 1951년 7월 한미협의과정에서 독도문제가 제기되고, 1951년 8월 딘 러스크 국무차관보의 서한이 제시되고 난 뒤에야 일본의 독도영유권 선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인과관계로 보자면 일본측에 관련 정보가 누설되었거나, 일본측이 관련 정보를 입수한 후 선전이 시작되었음이 분명했다."(859-60)
"일본의 외교적 성명(1952)과 물리적 점령 시도(1953) 사이에 위치한 것이 바로 독도의 미군 폭격연습장 지정·해체 전략이다. 먼저, 1952년의 시점에 일본은 독도영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현저히 약했기 때문에 미국을 이용해 영유권 증거문서를 확보하려 했다. 둘째, 1952년부터 1953년 5월까지 일본 순시선·어선 등이 독도 해역에 출현하지 않거나 독도에 불법상륙을 시도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은 독도가 미군 폭격연습장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셋째, 1953년 3월 19일 독도가 폭격연습장에서 해제되자 5월부터 본격적으로 불법상륙과 일본령 표지판 설치 등의 공격적 행동을 취했다. 넷째, 5~7월 간 여러 차례 독도 불법상륙을 시도하고 외교각서를 발표하는 등 화전양면 공세를 취한 후에야 일본은 한국정부를 상대로 독도의 폭격연습장 지정·해제가 일본의 독도영유권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는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기획된 대응방략의 결과였다."(872)
# 1953년 물리적 점령 시도에 담긴 일본의 의도
1. 독도 폭격연습장 지정·해제로 미국에게 독도영유권을 확보했다는 자신감의 표출
2. 제2차 한일회담(1953.4.15~7.13)에서 일본 영토인 독도를 포함한 평화선(이승만라인)은 불법한 획선(劃線)이라는 것을 강조
3. 자신들의 도발에 맞선 한국측 대응을 통해 재무장강화의 구실을 만들려는 의도
"그런데 한국 어민들이 폭격을 당했고, 이에 대해 한국정부가 강하게 항의하자 미공군사령부는 폭격중단과 폭격연습장 해제를 결정했다. 만약 독도가 한국령이 아니라면, 미군은 한국정부에 대해 불법월경 및 불법어로로 발생한 사고였으며, 귀책사유가 한국측의 위법에 있었다고 통보하면 그만인 문제였다. 일본측 논리에 따르자면, 폭격연습장 지정이 독도에 대한 일본 영유권을 미국이 확인한 증거이듯이, 미국이 폭격연습장 사용중단을 한국정부에 통보한 것은 미국이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정한 증거였다. 나아가 1948년 독도폭격사건에 이어 독도가 한국 어민들이 조업하는 한국 어장이자 한국 영토임을 미국이 재확인한 것이었다. 때문에 미군 당국은 한국정보에 통보했고, 한국정부가 이 사실을 공표한 다음에야 일본정부가 인지하고 미군 당국에 재확인을 한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미국이 일본과 상의 없이 독도 폭격연습장 사용을 중단하고 이를 한국정보에 통보한 사실에 대해 거세게 항의했다."(882)
"당시 미국에게는 한국 상황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었다. 만 3년 이상 지속된 전쟁은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스탈린이 사망함으로써 휴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반공포로를 석방하는(1953.6.18) 등 휴전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상황이었다. 미국에게 이승만은 도저히 통제 불능이었다." "1953년 중반 이승만의 휴전회담 반대가 절정에 달하자 미군 수뇌부는 또다시 이승만 제거계획을 꺼내들었다. 5월 3일 미8군사령관 테일러는 이승만 제거를 위한 에버레디계획(Everready Plan), 즉 상비계획을 승인했다." "이승만을 정점으로 한 한국정부에 대한 미 군부·국무부의 불신과 증오심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달했다. 거칠고 비이성적이며 막무가내인 이승만과 한국정부, 이에 대비되는 세련되고 고분고분하고 합리적인 일본정부, 이것이 당시 미 국무부 당국자들의 눈에 비친 한국과 일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미 국무부는 독도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943-4)
"한일 양국은 독도에서 대결적 충돌을 벌였지만, 미국의 중재와 무마로 1953년 10월 6일 제3차 한일회담을 개최했다. 그러나 불과 보름 만에 일본 수석 구보타 간이치로의 망언으로 10월 21일 회담은 결렬되었다. 구보타는 작심하고 ① 한국이 강화조약 발효 전에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② 일본 패전과 동시에 재한일본인을 전부 철수시킨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③ 재한일본 사유재산 몰수는 국제법 위반이다, ④ 카이로선언의 '한민족이 노예상태'에 있다는 문구는 전시(戰時) 흥분상태에서 작성된 것이다. ⑤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가 한민족에 은혜를 주었다고 발언했다. 한국측에서는 구보타 발언의 철회 및 사과가 회담재개의 전제조건이었지만, 일본은 전혀 그럴 의사가 없었다. 존 앨리슨 신임 주일대사는 1953년 11월 18일 "일본 국내의 정치적 민감성 때문에 구보타 발언의 취소 혹은 직접적 사과는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평가했다."(946)
"주일미대사관의 앨리슨 대사, 윌리엄 터너 참사관, 핀 2등서기관 등은 물론 워싱턴의 동북아시아국 일본과의 더닝까지 모두 러스크 서한의 공개를 통한 미국의 입장표명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동북아시아국장 매클러킨이 러스크 서한 공개를 억제하고 있었지만, 현장과 본부의 공개 요구가 국무부의 회랑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회한 변호사 출신의 덜레스가 미 국무장관이 아니었다면, 1953~54년의 시점에 러스크 서한이 공개되어, 한미·한일 관계가 대파란에 휩싸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덜레스의 지시는 첫째, 독도분쟁과 관련해 미국이 일본편을 들 수는 없다. 둘째, 문제가 있다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야 한다. 셋째, 그때까지 미국이 중재할 수 있다. 넷째, 미국의 입장을 밝히라는 일본정부의 주장은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1월 23일자 앨리슨 주일대사의 전문은 바로 덜레스가 강조한, 미국이 독도분쟁에 "법률적으로 관련되지 않았다"라는 점을 강력하게 논박한 것이었다."(947-8)
동경의 반발이 거세지자 덜레스는 1953년 12월 9일 미 국무부의 최종 입장을 정리한 전문을 동경대사관에 보냈다. "이 전문에서 덜레스는 대일평화조약과 미국의 행정적 결정이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과의 독도분쟁에서 미국이 일본에 우호적으로 행동하길 기대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는 1951년 대일평화조약문의 영토조항에 독도가 일본령에서 배제될 섬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사실, 그리고 1952~53년 간 미일합동위원회가 독도를 일본정부 시설로 인정해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해제한 사실을 언급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의 입장을 한국에 공식 통보한 1951년 8월 10일자 러스크 서한은 일본정부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즉, 한국에 대해서는 정책결정을 통보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본정부에 대해 미국의 입장을 알리는 것이 필요하거나 바람직하겠지만, 최근의 한일관계의 어려움에 비추어볼 때 더 이상 미국이 개입하는 것은 안 된다고 못박았다."(949-50)
"덜레스는 평화회담 당시 미국의 입장은 수많은 조약서명국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것이 서명국들의 합의된 공론이자 결정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적이었는데, 러스크 서한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조문의 최종 성안을 앞둔 급박한 시기에 행정실무자의 편의적 문서작업 과정에서 채택된 것으로, 국가 간 논의·결정 과정이나 고위급 정책결정을 거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덜레스는 미국이 공개적으로 소련이 점령하고 있는 하보마이를 일본령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은 이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는 반면, 공산 침략에 맞서 싸우는 허약한 위기의 한국에 대해서만 강력한 조치를 취하며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덜레스의 정책판단은 (독도분쟁이 "한국의 다케시마에 대한 요구"에서 비롯되었다는 식의) 한국인들의 관점에서 믿기 힘든 사실과 평가들을 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1953년 12월의 시점에 가장 한국의 입장을 옹호한 결정이기도 했다."(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