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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화의 제국 - 자본주의의 새로운 역사
스벤 베커트 지음, 김지혜 옮김, 주경철 감수 / 휴머니스트 / 2018년 10월
평점 :
서론
"오늘날 우리가 인정하는 글로벌화한 대량생산 형태의 자본주의는 1780년경 산업혁명과 함께 출현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생각이다. 그러나 전쟁자본주의war capitalism는 16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기계와 공장보다 먼저 등장했다. 그리고 전쟁자본주의는 공장이 아니라 들판에서 번성했으며, 기계화가 아니라 토지에 집중되고 노동집약적이었으며,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 토지와 노동의 폭력적인 약탈에 의존했다. 이런 약탈행위로 일군 엄청난 부와 새로운 지식으로 유럽의 제도와 국가가 강화되었으며, 이 모두는 19세기까지, 그리고 이후 유럽이 이룬 놀라운 경제발전의 중요한 전제조건이 되었다. 많은 역사가가 이 시대를 '상인'자본주의 또는 '상업'자본주의의 시대라고 일컬었지만, 유럽 제국의 팽창과 자본주의의 긴밀한 관계는 물론, 그 민낯과 폭력성을 더 잘 표현하는 것은 '전쟁자본주의'라는 용어다."(24)
"자본주의를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임금노동자를 떠올린다. 하지만 초기 자본주의는 자유노동이 아니라 노예노동에 기반했다. 산업자본주의라고 하면 우리는 계약과 시장을 먼저 떠올리지만 초기 자본주의는 거의 폭력과 신체적 구속에 의지했다. 근대의 자본주의는 재산권을 우선시하지만, 초기 자본주의의 특징은 확고한 소유권과 대규모 약탈이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국가를 등에 업은 강력한 제도와 법의 지배에 의지한다. 전 세계로 뻗은 제국을 창조하기 위한 최종 단계에서는 국가의 힘이 필요했을지 몰라도, 초기 단계에서 자본주의는 노예주의 노예 지배나 변방 자본가의 원주민 지배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의 자의적 행동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자본주의가 지극히 공격적인 방식으로 해외에 진출해 축적한 결과물 덕분에, 유럽인은 여러 세기를 이어온 면화의 세계들을 장악할 수 있었고,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글로벌 경제를 고안해낼 수 있었다."(24-5)
"그렇다면 면화의 제국을 뒷받침하는 주장들이 왜 다른 상품들에는 적용되지 않을까? 다른 상품들과 달리 면화는 경작지와 공장이라는 두 단계의 노동집약적 생산과정을 거쳐야 했다. 사탕수수와 담배는 유럽에서 대규모 산업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양산하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담배는 새로운 거대 제조기업의 등장을 초래하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인디고를 재배하고 가공하는 과정은 유럽의 제조업자들에게 거대한 새 시장을 제공하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아메리카에서 쌀 경작은 노예제와 임금노동의 폭발을 가져오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그 결과 면산업은 다른 어떤 산업과도 다르게 세계 전역에 널리 분포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여러 대륙을 연결한 면화는 근대 세계를 이해할 열쇠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근대 세계의 특징인 심각한 불평등과 글로벌화의 오랜 역사,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본주의의 정치경제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도 함께 제공한다."(26-7)
1장 전 지구적 상품의 등장
"식물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면화는 〈형태적 유연성〉 덕분에 다양한 환경에서 자란다." "면화를 재배한 사람들 다수가 수천 년 동안 세계 전역에서 다른 이들도 자신들과 같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들은 대략 남반구 위도 32~35도에서, 북반구 위도 37도 사이의 지역에 살았다. 이 지역들은 면화 재배에 적합한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아열대 식물인 면화는 생육기간에 온도가 섭씨 10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면서 통상 섭씨 16도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 또 널리 알려진 대로 200일 이상 서리가 내리지 않고 연 강수량이 500~630mm이며 생육기간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는 지역에서 잘 자란다. 이는 세계 전역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기후로, 면화가 여러 대륙에 풍부하게 분포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면직물 생산은 1,000년 전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큰 제조업이었다."(39)
"세계의 그 많은 지역에서 그 많은 사람이 실을 잣고 그 실로 옷감을 짰던 면화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제조산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9세기까지 면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여전히 가정 내 소비를 위한 가내생산이었다. 하지만 1780년대 산업혁명에 앞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가장 중요하게도 면제품은 대개 노동집약적인 생산물이었기에 중요한 가치저장수단이자 교환수단이 되었다. 어느 지역이든 지배자들은 한결같이 면직물을 공물이나 세금으로 요구했고 사실상 면화는 정치경제의 탄생과 함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면직물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메소아메리카 전역에서 이상적인 교환수단이었다. 면화와 달리 면직물은 장거리를 쉽게 운송할 수도 있고 썩지 않아서 가치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근대 이전 세계 거의 어디에서나 면직물로 식량과 제품, 심지어 보호수단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것을 구매할 수 있었다."(55-6)
"수요가 늘자 면직물은 가정에서 벗어나 첫걸음을 뗐다. 인도에서는 직업 방직공이 출현했다. 그들은 원거리 무역 물품을 공급하며, 국내는 물론 지배자들과 부유한 상인들에게 면직물을 제공하는 데 집중했다." "작업장이 일반화되면서 새로운 유형의 방직공도 일반화되었다. 남성 위주의 개인들로, 특별히 시장 판매용 제품을 생산하는 방직공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작업장이 생겨났어도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전문화된 생산은 도시가 아닌 농촌에서, 작업장이 아닌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전형적이었다. 이들 농촌의 시장 생산자들과 자급을 위해 생산하는 사람들의 차이점은 글로벌 통상에서 신흥 세력, 곧 상업자본가들이 장악한 선대제先貸制 네트워크에 의존하는지 그 여하에 있었다. 19세기 상업화된 면직물 생산의 토대를 형성했던 이런 네트워크에서 방적·방직공은 도시 상인을 위해 실을 잣고 면직물을 제조했으며, 상인은 그들의 생산품을 취합해 먼 곳의 시장에 내다 팔았다."(58-60)
2장 전쟁자본주의의 구축
"유럽의 자본가와 지배자들은 다양한 수단을 통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변화시켰다. 무력을 동원한 교역을 통해 유럽을 중심으로 복잡한 해양 무역망을 창출할 수 있었고, 재정-군사 국가fiscal-military state의 구축으로 세계 구석구석 외딴 곳까지 세력을 떨칠 수 있었다. 해상보험에서 선하증권船荷證券에 이르기까지 각종 금융상품이 마련되어 자본과 상품의 장거리 운송이 가능해졌으며, 법률체계의 발달로 글로벌 투자에 어느 정도 안정성이 보장되었다. 또 원격지의 자본가와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어 현지 방직공과 면화 재배인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토지를 약탈하고 아프리카인들을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플랜테이션 농장도 번성하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이런 변화는 산업혁명으로 향하는 첫걸음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면화 세계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면화의 제국에 통합되었다."(74-5)
# 재정-군사 국가 : 조세와 재정의 혁신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 군사 활동과 전쟁을 지속했던 국가들
"모든 유럽 동인도회사들의 공통점은 인도산 면직물을 구매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동남아시아에서 향신료와 교환하기 위해, 또 국내 소비를 위해 유럽으로 가져갈 면화를 구매했다. 또 이제 막 신세계에 자리잡기 시작한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할 노예들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운송할 면화를 구매했다. 이렇듯 당시 면직물은 세 대륙을 망라하는 무역 체제와 얽혀 있었다. 이런 무역 체제는 콜럼버스와 다 가마의 기념비적인 원정이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킨 결과였다." "그 결과 유럽이 아시아로 팽창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면직물은 핵심 품목이 되었다." "동인도회사는 1621년에 이미 5,000여 필의 면직물을 영국으로 수입했는데, 40년 뒤에는 수입량이 다섯 배로 증가했다. 실제로 면직물은 동인도회사의 가장 중요한 무역상품이 되었고, 1766년에는 면직물이 동인도회사의 전체 수출품 가운데 75% 이상을 차지했다."(78)
"전쟁자본주의는 세계를 '내부'와 '외부'로 가를 수 있는 부유하고 강력한 유럽인들의 역량에 의지했다. '내부'는 모국의 법과 제도와 관습을 포괄했고, 국가가 부과한 질서의 지배를 받았다. 반대로 '외부'를 특징지은 것은 제국의 지배, 방대한 지역의 수탈, 원주민 학살, 자원 약탈, 노예화, 그리고 멀리 떨어진 국가의 효율적인 감시를 벗어난 민간 자본가들의 방대한 토지 지배였다. 이런 제국의 보호령들에는 내부의 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소유주들이 국가를 능가했고, 폭력이 법에 도전했으며, 사적 행위자들이 대담한 물리적 강제력을 동원해 시장을 개조했다.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것처럼, 그런 지역들이 〈다른 어떤 인간 사회보다 더 신속하게 부와 강대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사회적 백지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전쟁자본주의 '내부'에 의지하는 전혀 다른 사회와 국가들이 등장하는 데 그 기반을 제공한 것이 바로 그런 사회적 백지 상태였다."(85-6)
3장 전쟁자본주의가 치른 대가
"영국 면산업의 눈부신 발전 덕분에 영국 정부와 영국 자본가들은 전쟁자본주의로 얻은 결실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새로운 기계와 새로운 생산조직, 대규모 공장에서 일하는 임금노동자들은 사상 초유의 생산성을 만들어냈다. 그 덕분에 생산비용이 낮아져 영국의 제조업자들은 기대했던 새로운 시장에 진출했다. 면제품의 가격이 저렴해지자 내수시장이 확대되었고, 면직물의 디자인이 중간 계급 소비자들의 자기표현에 점점 더 중요한 요소가 되어감에 따라 면직물은 더 폭넓게 유행했다." "영국 면산업의 진정한 호황은 바로 수출 호황이었다. 1800년에 이르러 영국에서 제조된 면직물이 세계 시장에서 중요한 존재가 되자, 그와 동시에 수백 곳의 공장 소유주, 상인, 선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 농촌지역에서 새로 지은 공장에서 일하는 방적·방직공 수천 명이 새로이 해외 시장에 의존하게 되었다." "영국산 면제품은 이제 세계 시장에서 인도산 면제품을 재빠르게 대체해나갔다."(133-5)
"예전에 인도의 방적·방직공이 장악했던 여러 수출 시장을 이제는 영국산 면직물이 차지했지만, 애초에 영국 제조업자들은 전쟁자본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지역에서의 판매에만 집중했다. 산업혁명의 황금기이던 18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영국산 면제품 수출의 3분의 2 이상이 그런 지역들로 향했다. 나중에 면직물 수출은 영국이 200년 동안 막대한 부를 쌓은 대서양 경제의 통로들로 흘러들었다.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주인에게서 보급받은 의복이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의 생산자들과 달리 자신들의 의복을 직접 생산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유독 수익성 있는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주로 노예를 취급했던 아프리카 무역에서도 영국산 면직물의 수요가 높았는데(아메리카에서 면화 재배가 호황을 이룬 결과, 심지어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상인들이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인도산 직물과 동일한 영국산 직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덕분이었다."(136)
"면산업은 제국의 팽창으로 얻은 여러 전리품 가운데 하나로 시작해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솜털이 난 흰색 꼬투리에서 새로운 글로벌 체제인 산업자본주의가 시작된 셈이다. 물론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발명과 혁신은 있었다. 하지만 오직 면산업만이 지구 전체에 영향력을 미쳤고, 강제노동과 강력하게 연결되었으며, 국가로부터 유독 최고 수준의 지원을 받으며 세계 전역의 필수적인 시장들을 장악했다. 나중에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지만, 산업자본주의는 발생 직후에 여러 다른 곳에서 전쟁자본주의가 확대, 강화되는 데 기여했다. 그것은 영국이 자국의 공장에 더 저렴한 면화를 안정적으로 공급한 자국 상인들이 역량에 기대어 일방적으로 앞장서서 산업자본주의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국의 면제조업자들은 엄청난 양의 면화를 새롭게 요구한 반면, 산업자본주의의 제도적 구조는 여전히 미숙하고 고루해서 수요을 모두 충족시킬 만큼 면화를 충분히 생산할 노동력과 영토를 창출할 수 없었다."(144)
4장 노동력의 포획, 토지의 정복
"1791년까지도 제조업에 사용할 목적으로 생산된 면화 대부분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영세농들이 재배한 것이었고, 주로 현지에서 소비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면산업의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면화는 무력을 동원하여 토지와 노동력을 약탈하는 것이 특징인, 전 지구적이고 역동적이며 폭력적인 형태의 새로운 자본주의와 마침내 결정적 연결고리를 마련했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핵심에는 기계화된 제조업의 절박한 요구와 전근대적 농업의 생산으력 사이에 생겨난 커다란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필요한 노예제가 있었다. 공장들이 급속히 팽창하며 면화를 너무 빠르게 소비한 탓에 전쟁자본주의의 전략만이 필요한 토지와 노동의 재분배를 보장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토착민과 토지를 빼앗은 정착민, 노예와 플랜테이션 농장주, 현지 장인과 공장 소유주들은 일방적이지만 지속적인 전쟁의 암운이 짙게 드리운 새로운 한 세기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150-1)
"카리브해 지역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오스만 제국과 인도의 농부들과 달리 토지와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거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토착민이 소멸되고 서아프리카에서 거의 매일 노예가 도착하면서 새롭게 성장하는 시장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카리브해 지역 플랜테이션 농장주들과 다른 면화 재배인들을 구별하는 결정적 요소였다. 한편, 오스만 제국과 인도의 강력한 영주들도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그들의 면화 농장에서 노동을 시켰지만, 그곳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의 노예제 같은 제도가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더욱이 카리브해 지역에서 자원의 신속한 재편을 가능하게 했던 자본 유입이 다른 곳에서는 방해를 받았는데, 토지의 사적 소유권이 없었던 데다 오스만 제국 및 인도 통치자들의 정치권력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카리브해 지역에서만이 사실상 아무런 제약도 없이 새로 확보한 토지와 노동력이 투입되면서 면화 재배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160)
"그렇게 해서 서인도 남아메리카의 면화가 리버풀, 런던, 르아브르, 바르셀로나의 시장에 쏟아져 들어왔고 결국 기계화된 방적이 급속히 팽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팽창에는 한계가 있었다. 서인도 제도에는 면화 재배지로서 적합한 땅이 적어서 면화 생산에 제약이 있었으며,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사탕수수보다 면화가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토지가 풍부한 브라질에서뿐 아니라 서인도 제도에서도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들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면화 플랜테이션 농장들과 경쟁을 벌였다. 그 결과 1790년부터 서인도 제도의 면화 수출은 크게 감소해 영국 시장 점유율이 10%까지 축소되었다. 1819년 이후 영국인이 재배한 면화에 부여된 관세 혜택조차 그런 추세를 역전시키지 못했다. 19세기 초에 이르면 서인도 제도의 시장 점유율은 하염없이 하락했는데, 이는 〈흑인들의 해방으로 더욱 가속되었다.〉"(166)
"1791년 가장 중요한 면화 생산지인 생도맹그에 혁명이 일어나 그 지역을 뒤흔드는 바람에 면화를 포함해 세계 시장을 겨냥한 상품의 생산이 거의 중단될 뻔했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노예 반란으로 생도맹그의 예속된 주민들은 스스로 무장을 하고 프랑스 식민 지배 체제를 물리쳤으며, 아이티라는 국가의 탄생과 노예제 폐지를 이끌어냈다. 전쟁자본주의는 가장 힘없어 보이는 행위자인 수십만 명에 이르는 생도맹그 노예들의 수중에서 최초의 중요한 전기를 맞았다. 당시 생도맹그 면화 생산은 영국에 수입되는 전체 면화의 24%를 차지했지만, 4년 뒤인 1795년에는 그 비중이 4.5%에 불과했다." "확실히 전통적인 면화 생산 기법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인근에는 수급에 충분한 면화를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 있었다. 바로 신생국 미국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노예제에 기반을 둔 면화 생산이 기록적인 수준까지 치솟았다."(166-8)
5장 노예제가 지배하다
"미국 면화의 대영 수출은 1791~1800년에 93배 증가했고, 1820년까지 다시 일곱 배가 증가했다. 1802년에 이미 영국 시장에서 미국은 단일 면화 공급처로는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었고, 1857년에는 중국만큼 많은 면화를 생산하게 되었다. 휘트니의 조면기 덕분에 생산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미국산 육지면은 영국 면제조업자들의 요구에 꼭 맞아떨어졌다. 미국산 면화는 조면기를 사용해 섬유의 손상이 컸지만, 유럽과 다른 지역의 하층 계급 사이에 수요가 높았던 저렴하고 조악한 품질의 면사와 직물을 제조하기에는 알맞은 원료였다. 만약 미국에서 면화를 공급하지 못했더라면 오랜 면화 시장의 현실을 볼 때 면사와 면직물의 대량생산이라는 기적은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고, 새로운 소비자들도 이런 값싼 상품을 구매할 수 없었을 것이다. 떠들썩하게 이야기되는 직물 부문에서의 소비자 혁명은 플랜테이션 노예제 구조에 나타난 극적인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180)
"여기에는 면화, 주민을 축출하고 공지로 만든 토지, 노예제, 이 세 가지가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리버풀 크로니클》과 《유러피언 타임스》는 면화 재배에 노예노동이 더없이 중요해서 노예가 해방된다면 면직물 가격이 두세 배 올라갈 것이고, 영국에 참혹한 결과를 안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악몽 같은 무자비한 강압이 수백만 노예들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이러한 폭력이 종식될 가능성이 있다면 면화의 제국에서 풍성한 이익을 거두어들이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미국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폭력의 종식이라는 악몽이 현실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들을 세계의 주도적인 면화 재배인으로 만들어준 세 번째 이점을 이용했다. 그것은 바로 정치권력이었다. 남부의 노예 소유주들은 '5분의 3 타협안'으로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헌법에 새겨넣었다. 노예를 소유한 대통령, 대법원 판사, 의회 양원의 강력한 대표들은 노예제도에 거의 무한한 정치적 지원을 보장했다."(188-9)
# 5분의 3 타협안 : 흑인 인구의 5분의 3에 해당하는 투표권을 백인 노예주에게 인정해주자는 내용의 타협안으로, 1787년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남부 주와 북부 주 사이에 합의되었다.
"면화가 미국 경제를 지배하면서 면화 생산 통계치는 〈미국 경제를 평가하는 데 차츰 더 중요한 단위가 되었다.〉 서양 세계에서 미국산 면화의 중요성이 너무 커진 탓에 독일의 한 경제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북부나 서부가 사라진다고 해도 미국의 남부가 사라지는 것과 비교한다면, 세계에 별 의미는 없을 것이다.〉 남부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세계경제에서 자신들의 중심적 역할을 확신하고 기쁨에 차서 자신들이 〈근대 문명의 운명을 좌우할 운전대〉를 쥐었다고 선언했다. 《아메리칸 코튼 플랜터》는 1853년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미국의 노예노동은 인류에게 지금까지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축복을 가져다주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이런 축복이 지속되려면 노예노동도 지속되어야 한다. 세계에 공급할 면화를 자유노동으로 생산하는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자발적 노동으로 면화를 재배해 성공을 거둔 적이 없다.〉"(200-1)
"북아메리카 식민지들이 서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대영제국에서 멀어지기 시작해, 대서양을 가로지른 연결이 정치·군사적 행동에 의해 단절될 수 있음이 드러나자 영국의 산업이 미국산 면화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미국산 면화에 대한 높은 의존도에 대한 영국 면제조업자들의 우려는 세 가지 문제에 집중되었다. 첫째, 그들은 1810년대 미국에 눈에 띄게 많아지기 시작한 공장들이 점점 더 많은 양의 면화를 소비해 유럽 소비자들이 사용할 면화의 양이 감소할까 염려했다. 둘째, 특히 영국 제조업자들은 유럽 대륙의 생산자들이 세계의 면화 수요를 더 늘릴 경우 미국에서 공급되는 면화를 두고 그들과 경쟁하게 될까 걱정했다. 가장 중요한 세 번째 문제는 〈노예제의 지속성이 점점 더 불확실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피로 얼룩진 생산물〉에 의지하는 것은 〈미국의 노예제라는 범죄〉에 〈의지하는 자살행위〉와 마찬가지였다."(202-3)
"역설적이지만 면화를 갈구하는 제조업자들에게 예기치 않은 곳에서 미처 생각지 못한 이유로 구제책이 나타났다. 경쟁관계인 아시아 면산업의 공정이 서서히 지속적으로 붕괴하면서 면화 수급 문제가 완화된 것이다." "아시아 지역과 지방의 무역 네트워크는 지속되기는 했어도 결코 다시 번성하지는 못했다. 관습, 편의성, 이윤으로 특징지어졌던 이들 소규모 무역 네트워크는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특성을 지닌 유럽의 자본과 국가 권력 때문에 와해되었다. 사실 미국에서 노예제 덕분에 가능했던 면화의 저렴한 가격이 다른 모든 곳의 현지 제조업을 붕괴시키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텐치 콕스가 예리하게 통찰했던 것처럼, 영국 제품을 인도로 수출한 일은 인도인들에게 〈팔지도 못할 제품을 만드느니 면화를 재배하는 쪽으로 전환할 것을〉 강요했을 것이다." "이처럼 면화가 유통되는 대체 경로들이 파괴되면서 세계 곳곳의 농촌지역의 더 많은 영토와 더 많은 노동력이 글로벌 경제에 잠식당했다."(220-2)
6장 산업자본주의, 날개를 펴다
"전쟁자본주의 경제모델은 산업화에 필요한 원료, 특히 원면과 여러 중요한 제도적 유산을 제공했지만, 영국의 사례는 다음 단계인 면직물 대량생산에 전쟁자본주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또한 영국의 사례는 산업화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할 수 있는 국가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법적으로, 관료주의적으로, 기반시설로, 군사적으로 자국 영토에 파고들 수 있는 강력한 국가가 없었다면 산업화는 결단코 불가능했다. 시장을 조성하고,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세수를 늘릴 도구를 마련하고, 국경을 순찰하고, 임금노동자의 동원을 감안하여 변화를 촉진하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실제로 자국 면산업을 육성하는 국가의 능력이 산업화된 곳과 산업화되지 않은 곳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근대 국가들을 표시한 지도는 일찍이 면공업의 산업화가 목격되었던 지역을 표시한 지도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251-2)
"그 결과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발명품인 산업자본주의는 특정 경로로만 움직였다. 영국의 선례를 따를 수 있었던 자본가들은 보통, 자국의 제조업 성장이 국력을 강화할 방법이라고 여기며 산업화 기획을 포용한 국가에서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경제활동과 국가의 영토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수립되었다. 이런 국가들에서 통치자, 관료, 자본가는 장기적 자본 투자, 노동력 동원, 확장되는 국내 시장과 해외 시장, 지구 경제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기 위해 법과 관료주의, 군사력과 기반시설을 통해 영토의 경계 안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신생 국민국가의 정치인들에게는 영국식 모델을 기반으로 산업사회를 건설하지를 고려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산업은 부의 원천이자 탁월한 전쟁 도구이기도 했다." "결국 산업자본주의는 1860년대에 크나큰 위기[미국 남북전쟁]를 겪으면서 전쟁자본주의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만큼 충분히 강해졌다."(262-3)
"사실 노예노동 자체가 제조업에 전혀 부합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면직물공장에 노예가 채용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노예제가 지배하는 사회는 면공업의 산업화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초기의 산업화는 전 지구적으로 전쟁자본주의에 의지했으나, 지구상에서 전쟁자본주의가 가장 난폭한 형태를 취했던 지역들은 결코 산업화를 달성한 적이 없다. 예를 들어 쿠바는 대규모의 노예화된 노동자들에게 의지했지만, 19세기 내내 단 한 곳의 방적공장도 갖지 못했다. 전쟁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사적 파벌들 사이의 전쟁 상태는 산업자본주의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그러므로 면공업의 확산을 설명해주는 것은 국가의 역량만이 아니다. 국가 내부의 권력 분포 역시 그 설명에 도움을 준다. 노예제 국가들은 자국 산업가들의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를 지지하는 문제에서 더디고 취약하기로 악명이 높았다."(271-2)
# 가령, 브라질에서는 사탕수수나 커피를 생산하는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의 압력 때문에 여타 국가들에서 산업화를 가능하게 해준 보호주의─높은 관세 같은─가 제기능을 하지 못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이 국면이 중요한 이유는 그 형태의 다양성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토지와 노동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특유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조율되지도 않고 억제되지도 않은 자본가의 진취성이 특징적인 전쟁자본주의와, 기반시설에서는 물론이고 행정적·법적·군사적으로 강력한 국가가 개인의 진취성을 이끌었던 산업자본주의의 공존에 의지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정지된 것이 아니었다. 전쟁자본주의 덕분에 가능했던 산업자본주의는 강력한 새 제도와 구조를 만들어냈다." "1860년 이후로 영토와 사람들을 식민화한 주체는 수탈과 사적인 신체적 구속으로 지탱되는 노예주들이 아니라 국가권력으로 지탱되는 자본이었다." "가장 위대한 제도적 혁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노동력을 동원하는 방식이었다. 비록 초법적extralegal 강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임금노동은 노동자와 노동을 이전과 전혀 다른 법적·제도적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275-7)
7장 산업노동력의 동원
"분명 산업혁명은 주로 노동력 절감 기술에 관련된 것이었다. 예컨대 우리는 방적 부문에서 생산성이 수백 배나 향상된 것을 목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을 절감하는 이런 기계들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역시 노동력이 필요했다." "계몽주의는 경제적 인간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자극했고, 그 결과 유럽에서 노예제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아프리카 노예들을 맨체스터, 바르셀로나, 뮐루즈로 데려오는 일은 논외의 문제가 되었다. 지역주민을 노예로 만들 수도 없었다. 더욱이 노예노동에는 경제적으로 크게 불리한 측면이 있었는데, 예속적인 조건 아래에서는 작업에 동기를 부여하기가 어려웠고 감독 비용이 컸다. 더욱이 노예노동의 경우에는 일 년 내내, 때로는 노동자의 일생 동안 비용이 발생했고, 호경기와 불경기를 거듭하는 산업자본주의의 까다로운 주기를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성과 남성, 소녀와 소년의 노동력이 상품으로 바뀌었다."(288-9)
"제조업자들이 많은 사람을 공장으로 끌어들여 일을 시키는 데에 따르는 문제를 모면하기 위해 선택한 한 가지 방법은 먼저 사회의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 즉 저항할 수단이 거의 없던 사람들을 채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정 안에서 오랫동안 확고히 유지되어온 권력관계, 특히 가장인 남성이 적합하다고 여기는 대로 아내와 자녀의 노동력을 배치할 수 있었던 가부장제의 오랜 전통에 의지했다. 산업자본주의의 출현은 사실 이런 오래된 사회적 위계질서와 권력관계를 바탕에 두고 있었으며, 이런 것들을 수단으로 삼아 좀 더 폭넓게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고용주들은 생계를 보장하는 비자본주의적인 방식이 존속해야만 자신들이 사용하는 노동력의 '저렴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또한 인도 등지의 면화를 재배하는 농촌지역이 세계 시장을 위한 생산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알려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298-9)
"초기 면제조업자들이 여성의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은 중요했다. 유럽 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많은 지역들의 여성들 역시 직물을 생산했지만, 아프리카나 아시아와 달리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여성들은 가정을 벗어나 공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이는 직물의 산업화에 결정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가부장제의 유산과 농촌지역의 변화는 거의 언제나 더 노골적인 형태의 강요로 보완되었다. '직기 주인'의 강요와 '채찍 주인'의 강요가 크게 달랐다고는 하지만,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공장 내에서 노동자들을 징계하기 위해, 공장에 채용된 노동자들이 공장을 떠나지 못하게 막기 위해 완력을 사용하는 일이 횡행했다. 문제의 공장들에 투자한 제조업자들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을 강요하고 물리적 폭력까지도 사용했는데, 이런 일이 사적으로 저질러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국가의 용인을 받은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304-5)
"노동자들을 모집하고 규율을 시행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노동조건이 끔찍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끔찍했던지, 세계 곳곳의 노예 소유주들이 산업노동자들의 조건에 비하면 노예노동의 조건이 더 낫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예를 들어 독일 면산업에서는 주 6일 하루 14~16시간씩 노동하는 것이 하나의 규범이었다. 1841년 푸에블라에서는 하루 노동시간이 점심 휴식시간 1시간을 포함해 평군 14.8시간이었다. 프랑스 제2제정 시기 하루 노동시간은 평균 12시간이었으나, 고용주들이 원할 경우 노동자들은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했다. 1873년까지 바르셀로나 섬유공장의 노동시간 역시 매우 길었다. 어디서나 생산 작업은 위험했고, 기계는 귀가 멀 정도의 소음을 동반했다. 이런 조건들은 노동자들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1850년대 작센 정부가 징병을 시도했을 때, 군복무를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한 노동자는 전체 방적공의 16%, 방직공은 18%에 불과했다."(307)
8장 전 지구적 면화 만들기
"면화의 매매에 관한 모든 활동을 포괄하는 리버풀의 상인들은 면화의 재배와 제조, 판매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다루는 조련사가 되었다." "리버풀의 면화 시세는 수십만 방적공장 노동자들의 고용 여부를 결정했다. 전 세계가 리버풀의 면화 시세에 신경을 곤두세웠다는 사실은 그 도시의 상인들이 지구상의 드넓은 지역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반영한다. 리버풀의 면화 가격이 오르면 루이지애나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면화 농경지 구입을 새로 결정할 것이고, 노예무역업자들은 수천 명의 젊은 노예를 이 새로운 영토로 들여와 이윤을 얻었을 것이다. 리버풀에서 날아온 소식이 어느 날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그들의 땅에서 몰아내는 데 일조했고, 어느 날엔 인도의 철도 건설에 투자할 것을 독려했으며, 또 어떤 날엔 스위스나 구자라트 또는 멕시코 마초아칸의 가정에서 이루어지던 방적과 직조를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었다."(320)
"상인들은 편지를 쓰고, 공급자와 소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을 하고, 계산을 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상인들이 창조한 면화의 제국이 몹시 방대했기에, 그들은 곧 특정 부문만 전문적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일부 상인들은 면화를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항구로 옮기는 데 주력했고, 다른 이들은 대양을 횡단하는 교역에 주력했으며, 일부는 면화를 제조업자들에게 파는 데 주력했다. 반면 다른 상인들은 면제품 수출을 전담했고, 또 다른 상인들은 특정 국가나 지역에 수입된 면제품을 배급했다. 일반적으로 상인들은 특정 지역에서 자신들의 무역에 집중했고, 세계의 특정 지역을 서로 연결시키는 전문가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사업은 놀랍도록 제각기 달라 보였다. 사실 글로벌 체제는 중앙의 제국주의적 명령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 인맥을 갖추고 때로는 지극히 지엽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한 수많은 행위자들에 의해 구축되었다."(327)
"유럽의 자본, 그리고 뉴욕과 보스턴의 점점 더 많은 자본이 미국의 면화 플랜테이션 농장주와 면화상인들을 이어주는 중간상인, 곧 도매상 집단을 거쳐 면화 농업의 팽창에 투입되었다. 도매상은 공장과 플랜테이션 농장 사이에 이어지는 상인들의 연쇄사슬을 완성하는 연결고리였다. 재배인과 연결된 도매상과 면화 수출상 사이의 상호 작용을 지렛대 삼아 유럽의 자본은 기계의 생산 리듬에 맞춰 면화를 제공하도록 미국 남부의 농촌지역을 몰아 세웠다." "도매상에게는 8%를 웃도는 대출 이자가 또 다른 수입원이 되었다. 도매상은 유럽 상인들에게서 자본을 끌어왔고, 그렇게 해서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도매상을 통해 세계의 상품시장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자금시장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도매상은 노예 플랜테이션 농장주와 자영농에게서 수집한 면화를 수출업자에게 판매해 면화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수적으로도 가장 많았다."(345-6)
"이런 여신與信 체제는 전 지구적 범위였기 때문에 쉽게 붕괴할 수 있었다. 그 체제의 각 부분은 모두 다른 모든 부분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제국의 어느 한 부분에서 누군가 실패하면 그 위기가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랭커셔의 제조업자들은 해외 시장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상인들이 해외 시장에서 제품 값을 지불하지 못하면 국내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귀하가 우리의 상품을 구입한지 11개월이 경과했고 우리의 부채가 심각해서 올봄에는 분명 상황이 급박해질 터라 현금으로든 제품으로든 조속한 송금을 요청하니 양해 바랍니다.〉 뉴욕 상인 햄린 판 페흐텐은 근심에 차서 이렇게 간청했다. 간혹 그래왔듯이, 면화 가격이 크게 떨어지면 상인들은 그들이 지급한 선급금보다 적은 가치의 면화를 받게 되므로 채무를 상환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 결과는 1825년, 1837년, 1857년에 들이닥친 전 세계적 대공황이었다."(350-1)
"경제질서가 이처럼 믿을 만한 정보와 신뢰, 신용에 의지한 탓에 상인들은 시장 밖에서 만들어진 네트워크들에 의지하게 되었다. 임금노동의 출현과 마찬가지로 글로벌 무역을 만들어내는 일은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이전의 사회적 관계에 달려 있었다. 상인들이 남달랐던 것은 자본을 축적하고 분산할 수 있는 능력이나 정보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만이 아니었다. 확대가족의 결속, 지리적 인접성, 동일종교, 동일민족, 출신지를 기반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그 네트워크에 의지하는 능력 엿기 상인들을 남다르게 한 요인이었다. 무역이 위태롭고 회사의 생존이 오직 거래처 한 곳의 신뢰도에 좌우되던 세계에서는 신뢰성이 필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 안에서 신뢰 강화 방법을 모색하며 역사가들이 '관계형 자본주의relational capitalism'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내자, 더 쉽게 신뢰성이 생겨났다. 이처럼 면화 시장을 더 크게 좌우한 것은 시장 밖의 사회 관계였다."(360)
9장 세계를 뒤흔든 전쟁
"유럽의 제조업자들과 상인들에게 엄청난 부를 안기고 수십만 명의 공장노동자에게는 가혹한 노동 환경을 안긴 면산업은, 미국을 세계경제의 중심무대로 밀어 올리며 〈지금껏 미국에서 계획되거나 실현되었던 것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농산업〉을 구축했다. 면화 수출만으로도 세계의 경제지도 위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남북전쟁 직전에 면화는 미국이 해외로 내보낸 상품의 전체 가치의 61%를 차지했다."(378) "그러나 미국 남북전쟁의 발발은 1780년대 이래 전 세계적 면화 생산망과 글로벌 자본주의를 지탱해오던 관계를 단박에 날려버렸다. 영국의 외교적 승인을 강제로 받아내기 위해 남부연합 정부는 면화 수출의 전면 금지를 단행했다. 남부연합이 이 정책의 수명이 다했음을 깨달았을 무렵에는 북부의 봉쇄로 면화 대부분이 남부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산 면화의 유럽 수출은 1860년에 380만 꾸러미로 감소했고 1862년에는 사실상 전무했다."(382-3)
"제조업자들이 공장을 폐쇄하고 방적·방직공들이 고통을 겪는 동안에도 면화무역상들은 한동안 황금기를 누렸다." "가격변동성이 커지고 투기가 확산되자 투기적인 시장 거래, 특히 판매와 관련된 투기 거래를 제도화하려는 상인들의 움직임도 확산되었다." "제조업자들은 면섬유의 새로운 공급처를 강력히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조업자들의 압박을 받고 면산업 노동자들의 고충과 집단행동을 염려한 정부 관료들도 우려를 표명했다. 무엇보다도 면은 그들 국가경제의 중심이었고 사회의 궁극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였다." "자국 산업에 필수적인 원료를 저렴한 가격에 확보하는 문제에 이처럼 지대한 공적 관심이 쏟아진 것은 과거와 분명하게 결별했음을 의미했다. 1780년대 이래 상인들이 면화 시장을 확고히 지배해왔지만, 이제 면화는 수십 년 동안 상인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며 강력해진 국가의 문제가 되었다."(385-8)
"면화 기근에 직면한 제조업자들과 식민지 관료들은 갈수록 시장의 기능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비롯된 면화기근은 식민지(인도)의 원료 생산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어놓았다." "면화 가격의 급격한 상승 덕분에 정부 개입의 효율성이 커지고 순조롭지 않던 세계 시장을 향한 생산으로의 이행이 원활해졌다. 남북전쟁 발발 후 두 해 동안 인도 면화의 가치는 네 배 이상 상승했다. 그 결과 인도의 농사꾼은 새로 개간한 토지뿐 아니라 식량작물의 재배에 전용되던 토지에서도 면화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캘커다 주재 미국 영사에 따르면, 인도의 면화 재배농들이 이처럼 예전에 없던 농산물 수출에 주력하자 〈예상치 못한 대량 공급〉이 초래되었다. 이런 예기치 않은 면화의 대량 공급은 미국의 전쟁 기간 동안 큰 수익을 안겼을 뿐 아니라 공장 운영을 지속하려는 유럽의 면제조업자들이 필요한 원료를 얼마간 확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392-4)
"1865년 4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총성이 멈췄을 때, 유럽이 지배한 85년의 면화 역사에서 가장 큰 혼란이 마무리되었다. 쿨리부터 소작인, 임금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노동력 동원을 위한 새로운 체제가 세계 곳곳에서 시험되었고 면화 생산이 남북전쟁 이전 수준으로 돌아갈지는 미지수였지만, '자유노동' 면화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거의 보편적이 되었다. 미국 전역의 해방노예들이 그들의 자유를 축하하고 있을 때 제조업자들과 노동자들은 새롭게 풍부해진 면화 공급을 동력 삼아 공장들이 수용 능력 이상으로 가동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상인들에게는 축하할 일이 거의 없었다. 리버풀의 베어링 브라더스사는 1865년 2월 런던에 있는 그들의 동업자에게 〈종전에 관한 소문이 거의 공포를 유발했다〉라고 알렸다." "보스턴의 얼음 상인 캘빈 W. 스미스는 봄베이에서 이렇게 전했다. 〈이곳에서 영국인과 파시교도들이 짓는 침울한 표정은 내가 지금껏 어떤 치명적인 상황에서도 본 적 없는 것이다.〉"(416-7)
10장 전 지구적 재건
"노예 덕분에 면화의 제국이 혁명적으로 바뀌었듯이, 노예해방은 면화 자본가들을 그들 나름의 혁명으로 향하게 했다. 그들은 세계에서 면화 재배 노동력을 조직할 새로운 방법을 찾는 일에 골몰했다. 미국의 면화 재배를 도맡았던 노예의 해방과 어느 때보다 커진 면화 수요를 조화시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값싼 면화를 찾는 면제조업자들의 불안정한 수요 탓에 〈면화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사안이었다. 면화의 수입량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산업화된 유럽 국가들의 무역에서 면화는 여전히 가장 많은 비용이 드는 품목이었고, 면제품 수출은 유럽에서 해외 시장에 내놓은 상품목록에서 최상위를 차지했다. 수십만 노동자가 직물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었으므로 이런 수요와 판로는 유럽과 북아메리카 사회의 사회적 안정을 보장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너무나 중요한 산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면화의 제국을 전 지구적인 수준에서 재편해야만 했다."(422-3)
"면화의 제국을 그 핵심부터 재건하려면 면산업가, 상인, 지주, 국가 관료가 나서서 가정 중심의 생산을 포기하지 않는 재배농민들의 선택을 분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국민국가를 강화하며, 농촌 지역의 농부들을 생산자이자 상품의 소비자로 만들기 위해 합법적이고 때로는 불법적인 강제력을 용인하는 권력자들에 의지해야 했다. 그들은 신용, 토지의 사적 소유, 계약법을 포함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확산시켜 농촌 마을을 혁명적으로 바꾸려 했다. 그들은 프랑스 식민 관료들이 매우 적절하게 〈새로운 착취 양식〉이라고 불렀던 것을 찾아냈다." "새로운 형태의 강제력과 폭력과 수탈이 포함된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세계의 면화 재배지역으로 더 넓게 퍼져나갔다. 이제 지배력은 주인의 권위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공정하지도 않은 시장과 법, 국가 같은 사회적 기제에서 비롯되었다."(427-8)
"역설적으로, 지주들은 지역에서 그들의 권력을 공고히 한 바로 그 시기에 국가경제 안에서는, 역사가 스티븐 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극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권력의 쇠퇴〉를 경험했다. 면화 가격이 하락할 조짐을 보이고 그들이 소비하는 물품은 보호 관세에 직면한데다가 자본이 부족해지면서 자본의 조달 비용이 높아지자, 지주들은 남북전쟁 기간에 등장한 국내 산업화의 정치경제에서 부차적인 존재로 밀려났다. 전 지구적으로 이 면화 재배인 집단이 상인들만큼 강력했던 적은 없었지만 미국 남북전쟁 이전에는 지역 정치를 장악했고 중앙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제 권력은 그들과 같은 원료 공급자들에게서 결정적으로 멀어졌다. 당시 그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남북전쟁은 세계에서 면화 재배인으로는 마지막으로 강력한 정치집단을 형성했던 이들에게서 권력을 빼앗아갔다. 면제조업자에게 나타난 이런 중대한 변화로 면화 제국은 안정되어갔다."(439-40)
"19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이집트산, 브라질산, 인도산 면화는 세계 시장에 새롭게 등장한 중요한 존재들이 되었다." "면화의 생산은 이렇게 여러 대륙으로 확대되었는데 그런 현상이 노예제 없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더 주목할 만했다." "(노예가 아닌 농사꾼들이 면화를 생산하도록) 지구 전역의 농촌지역을 재편하려는 이 모든 투쟁을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점은 이제 국가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때는 노예노동에 더없이 중요했던 노예주의 뻔뻔스러운 물리적 폭력이 새로운 형태의 강제력으로, 국가가 나서서 제도화하고 시행한 새로운 형태의 강제력으로 대체되었다. 그렇다고 물리적 폭력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계약과 법, 세금에서 오는 압력에 비해 물리적 폭력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국가는 영토 안에서 새로운 주권을 발전시키면서 노동에 대한 그 주권도 확대했고 제도라는 산업자본주의의의 새로운 힘을 증명했다."(446-7)
11장 파괴
"소수의 면화거래소들이 차츰 글로벌 면화무역을 지배하게 되자 면화의 제국 안에서 예전 방식으로 일하던 수입업자, 중개인, 도매상의 중요성은 훨씬 더 줄어들었다. 그런 거래소에서의 거래는 종교, 친족, 출신지의 유대관계로 조성된 신뢰의 네트워크에 좌우되지 않았다. 대신에 면화거래소 같은 이런 기구들은 비인격적인 시장이었다." "이제 거래는 실제의 물리적 면화를 뛰어넘어 대단히 추상화되고 표준화되었다. 자연의 엄청난 다양성은 관행과 계약을 통해 몇 개의 범주로 묶였는데, 그 범주들은 자본의 요구에 따라 면화를 동일한 표준으로 측정할 수 있게 하는 추상화에 합치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면화 자체의 표준화였다. 너무 편차가 커서 선물 거래의 목적에 맞춰 다루기 어려웠던 면화의 자연적 특성은 〈육지면 중품〉이라는 가상의 품질로 단일화되었고, 계약은 이 품질의 구체적인 제조 단위에 맞추어 표준화되었다."(483-4)
"글로벌 면화 시장이 이렇게 재건된 결과, 사업이 급성장했다. 뉴욕면화거래소는 1871년에서 1872년 사이에 500만 꾸러미(실제 수확량보다 약간 많은 양)의 선물거래 계약을 주고받는 한편, 10년 뒤에는 3,200만 꾸러미의 계약을 주고받았다. 이는 실제 면화 수확량의 7.5배에 이르는 양이다. 글로벌 면화무역은 이제 실제로 면화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미래 가격 추이를 예측하는 일이 되었다. 면화 재배와 면공업의 모든 중심지에서 주간에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면화 가격, 곧 면화의 '국제 가격'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래소들의 능력에 따라 그런 예측이 가능해졌다. 이제 면화무역은 면화의 제국 전역에 위치한 항구 도시들의 거리를 누비던 수입업자들과 도매상과 중개인들의 한가로운 속도에 맞춰서 진행되지 않았다. 이제는 산업자본과 금융의 리듬이 면화무역을 지배했다. 상인들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특히 그들의 핵심 기능 가운데 많은 부분을 국가가 차지해버렸다."(485)
"면화 시장의 세계화는 사회구조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임금노동자, 차지농, 소작농의 공통점은 생계농업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제 기본적인 생산과 소비가 세계 시장에 달려 있었다. 면화는 [한때] 〈부차적인 작물〉이었고 〈소작인은 면화 가격이 아무리 높아도 주저 없이 면화 대신 곡식을 재배했다. 곡식을 재배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에 와서는 수백만의 농사꾼은 주로 면화에 생활을 의지하게 되었다. 더욱이 세계 시장의 통합이 사회적 차별화와 함께 진행되었기 때문에 곡식을 손에 넣지 못해 주기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무산 차지농과 농업 노동자 집단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났다. 아프리카의 한 필자는 〈면화와 식량불안이 나란히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멕시코의 라라구나에서는 영양실조로 고통받는 아동의 비율이 기록적인 수준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소규모 농장의 삶은 늘 궁핍했다."(501-2)
12장 새로운 면화제국주의
"19세기 해방을 향한 위대한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의 면화 소비국들, 미국, 일본은 결정적으로 면화 재배가 가능한 영토를 장악하고 착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반도, 서아프리카, 중앙아시아에서 식민지 영토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력이 확대되고 국가의 힘이 커지면서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면화의 제국도 그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다. 이른바 '면화 열풍'은 세기 전환기에 새로 등장한 제국주의 세력들이 과거 남북전쟁 기간 동안 식민 당국들이 했던 것보다 더 열정적으로 뛰어들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1870년대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동자들을 세계 시장을 위한 면화 재배로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면화 자본가들이 세계 각지의 농촌지역에 어느 정도 압력을 가하는 한편, 19세기 후반 들어 면제조업자들과 정치인들 사이에서 안전하고 값싼 면화를 공급하고자 하는 오랜 관심이 더욱 깊어졌기때문이다."(514-6)
"1898~1913년 사이, 25년 만에 처음으로 면화 가격이 121%까지 인상되자 유럽과 일본의 제조업자들은 미국이 국내 재배지에서 수확한 면화를 국내 공장에서 소비하는 비중이 점점 더 커져서 면화가 부족해지고, 면화 가격이 인상될까봐 염려했다. 일부 투기꾼이 시장을 '매점하고서' 새로 세운 면화거래소에서 선물거래와 현물거래를 조작해 가격을 더 높게 책정하는 시도가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자 그러한 염려는 더욱 증폭되었다. 이런 매점매석이 수그러들자 '면화 포퓰리즘'의 물결이 미국 남부의 농촌지역을 휩쓸었다. 1892년에는 미국의 면화 농장에 병충해의 일종인 목화다래바구미가 번져 면화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의 신흥 지역에 방적공장들이 확산되면서 면화수요로 인한 압력이 가중되었다." "이와 동시에 '원자재 자급'이라는 보편적 개념이 유럽과 일본의 정책 입안자들과 자본가들에게 차츰 중요한 정치적 목표가 되었다."(516-7)
"하지만 면화의 추가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큰 성과는 미국 면화 단지의 확장이었다. 미국의 이런 면화 재배 확대는 어떤 면에서 러시아의 경우와 비교할 수 있는데, 러시아는 국가의 대리자들과 군대가 지속적으로 영토를 쟁탈하고 그 영토에 접근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반시설의 건설을 지원했다. 러시아에서처럼 미국은 나중에 황무지에 배수시설을 만들고 물길을 내고 관개시설을 건설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추쿠로바에서 그랬듯이) 중앙아시아의 농사꾼들을 이주시키고 유목민들을 강제로 정착시켜 면화를 재배하게 한 반면에, 미국은 역사가 존 위버의 표현을 따르자면 〈도전적인 개인들의 주도〉와 〈질서정연한, 국가가 보장하는 사유재산권의 확실성〉을 결합시켜, 원주민 대다수를 면화경작지대에서 내몰고 동부에 살던 시민들이 이주해 오도록 장려했다." "이렇게 늘어난 면화 경작지는 포르투갈의 전체 면적보다도 더 넓은 면적이었다."(525-6)
13장 남반구의 귀환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집단행동을 통해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했을 뿐 아니라 새롭게 강화된 국민국가에 압력을 넣어 복지 향상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독일은 노동친화적인 여러 법률을 제정했다. 1871년 이후 의무교육이 실시되면서 12세 이하 아동의 공장 노동이 금지되었고, 14세 미만 아동의 유효 노동시간은 제한되었다. 1910년에 제정된 법률에 따르면, 여성은 주중 10시간 이상, 토요일에는 8시간 이상 노동할 수 없으며, 13세 이하 아동의 노동은 일절 금지되었다. 매사추세츠주는 1836년에 최초의 노동법을 통과시켰고, 1877년에는 공장 안전 법규를 통과시켰으며, 1898년에는 여성과 미성년자의 야간노동을 금지시켰다. 그러다 결국 야간에는 공장 문을 닫게 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스위스에서도 노동법에 따라 노동비용이 인상되었고, 여성의 야간노동과 14세 미만 아동의 노동은 불법으로 규정되었다."(578)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가는 점차 민주적 정당성을 추구해나갔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자본가들에게는 한때 그들의 가장 중요한 권력의 원천이었던 강력한 국가에 의지하는 것이 이제 가장 크고 유일한 약점이 되었다. 그러한 국가 덕분에 결국 노동 계급이 작업현장과 정치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자본가들에게는 국가는 양면적인 존재였다. 국가는 지구 전역의 농촌지역에서 노동력을 동원한 일을 포함해 산업자본주의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지만 자본가들에게는 '덫'이 되기도 했다. 노동자들이 노동조건과 임금을 향상시키기 위해 국가정책에 접근해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때 전 지구적 사회 갈등(생도맹그에서 노예를 동원한 일이 영국 면제조업자들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끼쳤을 때)이나, 지역적 사회 갈등(인디언 농민들이 영국인 소유의 면화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동하기를 거부했을 때)은 이제 차츰 국가 차원의 갈등으로 변해갔다."(579)
"제조업자들은 자국의 해당 산업을 글로벌 경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더욱 강력해진 정부에 접근해 정책을 활용함으로써 경쟁의 압력에 대처했다. 독일의 면산업은 특정 산업 부문의 구체적인 필요에 최적화된 독일 관세 체제에 의지했다. 제조업자들이 집단행동에 나섰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지원하도록 국가에 압력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 "유럽과 뉴잉글랜드의 면제조업자들은 전 지구적인 면화의 제국 안에서 자신들이 누리던 높은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노동비용이 치솟는 바람에 그들의 노력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노동과 자본의 국가 통제에 따른 기회와 제약으로 인해 유럽의 노동 비용이 상승하자 세계의 다른 지역, 즉 노동력이 더 저렴하고 국가의 규제로 인한 제약이 덜한 지역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결과적으로 남반구는 20세기 세계 면산업이 애초의 진원지로 복귀하는 것을 환영했으며, 한 세기에 걸친 발전을 되돌려놓았다."(580-2)
"(이집트와 중국, 그리고 인도 같은) 탈식민사회에서 달라진 점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사회적 힘의 균형만이 아니었다. 국가와 사회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달라졌다. 면공업의 산업화에 뒤늦게 뛰어든 후발주자들은 잉글랜드, 유럽 대륙, 북아메리카의 첫 세대 산업가들이 직면했던 것과 다른 세계를 맞닥뜨렸기 때문에, 노동, 영토, 시장, 원료의 동원을 포함해 산업자본주의로 더 신속히 이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산업자본주의가 국가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탈식민주의 세계에서 그런 '대약진'은 종종 극단적인 국가주의를 낳는 결과를 초래했다. 탈식민주의 체제, 심지어 탈자본주의 체제가 이제 훨씬 더 급진적으로 영토, 자원, 특히 노동의 식민지적 통합이라는 수단을 채용했다. 산업자본주의가 국가 자체의 생존에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국가는 산업자본주의에서 산업에 방점을 찍었다. 사실 때때로 자본주의가 산업화의 도정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626)
14장 에필로그: 씨실과 날실
"1963년, 면화의 제국에 대한 유럽의 지배는 끝났다. 1960년대 말이면 글로벌 면직물 수출에서 영국의 비중은 고작 2.8%에 불과했다. 150년 전만 해도 영국은 그 시장에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한때 영국의 면직물공장에서 6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했지만, 이제 남은 노동자는 고작 3만 명 남짓이다. 여러 세대에 걸쳐 뮬방적기와 직기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실직상태에 놓이자 면화 도시들도 파국을 맞았다. 대륙의 몰락을 상징하는 증거는 1958년에 등장했는데, 오랫동안 자유무역의 견고한 투사였던 맨체스터상공회의소가 노선을 바꾸어, 영국 면직물산업에 보호가 필요하다고 선언했을 때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명백한 패배 선언이었다. 그런데 놀랍도록 생산적이고 무서우리만치 난폭한 이 생산 체제에서 유럽이 밀려나고 미국 역시 점차 주변으로 밀려났지만, 면화의 제국 자체는 존속했다. 오늘날의 세계는 전보다 더 많은 면화를 생산하고 소비한다."(632)
"지형부터 노동 체제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재편되어 온 면화의 제국을 통과하는 여행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근대 세계를 사유할 때 그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은 세계의 농촌지역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을 지배하는 것은 대체로 도시, 공장, 산업노동자이다. 그러나 근대 세계의 많은 것이 농촌지역에서 등장했으며, 농촌 주민들이 다른 곳에서 사요외는 상품의 제조자이자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상품의 소비자로 변했을 때 등장했다. 농촌을 강조하면 자본주의 역사에 마찬가지로 중요한 요소였던 강압과 폭력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 폭력의 여러 형식들 중에서도 특히 노예제, 식민주의, 강제노동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핵심에 놓여 있었다.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특정 지역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일할 것을 강요하는 일은 면화의 제국 전 역사를 통틀어 변함없이 등장하는 요소였다."(6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