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화의 제국 - 자본주의의 새로운 역사
스벤 베커트 지음, 김지혜 옮김, 주경철 감수 / 휴머니스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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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오늘날 우리가 인정하는 글로벌화한 대량생산 형태의 자본주의는 1780년경 산업혁명과 함께 출현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생각이다. 그러나 전쟁자본주의war capitalism는 16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기계와 공장보다 먼저 등장했다. 그리고 전쟁자본주의는 공장이 아니라 들판에서 번성했으며, 기계화가 아니라 토지에 집중되고 노동집약적이었으며,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 토지와 노동의 폭력적인 약탈에 의존했다. 이런 약탈행위로 일군 엄청난 부와 새로운 지식으로 유럽의 제도와 국가가 강화되었으며, 이 모두는 19세기까지, 그리고 이후 유럽이 이룬 놀라운 경제발전의 중요한 전제조건이 되었다. 많은 역사가가 이 시대를 '상인'자본주의 또는 '상업'자본주의의 시대라고 일컬었지만, 유럽 제국의 팽창과 자본주의의 긴밀한 관계는 물론, 그 민낯과 폭력성을 더 잘 표현하는 것은 '전쟁자본주의'라는 용어다."(24)


"자본주의를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임금노동자를 떠올린다. 하지만 초기 자본주의는 자유노동이 아니라 노예노동에 기반했다. 산업자본주의라고 하면 우리는 계약과 시장을 먼저 떠올리지만 초기 자본주의는 거의 폭력과 신체적 구속에 의지했다. 근대의 자본주의는 재산권을 우선시하지만, 초기 자본주의의 특징은 확고한 소유권과 대규모 약탈이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국가를 등에 업은 강력한 제도와 법의 지배에 의지한다. 전 세계로 뻗은 제국을 창조하기 위한 최종 단계에서는 국가의 힘이 필요했을지 몰라도, 초기 단계에서 자본주의는 노예주의 노예 지배나 변방 자본가의 원주민 지배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의 자의적 행동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자본주의가 지극히 공격적인 방식으로 해외에 진출해 축적한 결과물 덕분에, 유럽인은 여러 세기를 이어온 면화의 세계들을 장악할 수 있었고,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글로벌 경제를 고안해낼 수 있었다."(24-5)


"그렇다면 면화의 제국을 뒷받침하는 주장들이 왜 다른 상품들에는 적용되지 않을까? 다른 상품들과 달리 면화는 경작지와 공장이라는 두 단계의 노동집약적 생산과정을 거쳐야 했다. 사탕수수와 담배는 유럽에서 대규모 산업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양산하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담배는 새로운 거대 제조기업의 등장을 초래하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인디고를 재배하고 가공하는 과정은 유럽의 제조업자들에게 거대한 새 시장을 제공하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아메리카에서 쌀 경작은 노예제와 임금노동의 폭발을 가져오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그 결과 면산업은 다른 어떤 산업과도 다르게 세계 전역에 널리 분포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여러 대륙을 연결한 면화는 근대 세계를 이해할 열쇠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근대 세계의 특징인 심각한 불평등과 글로벌화의 오랜 역사,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본주의의 정치경제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도 함께 제공한다."(26-7)


1장 전 지구적 상품의 등장


"식물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면화는 〈형태적 유연성〉 덕분에 다양한 환경에서 자란다." "면화를 재배한 사람들 다수가 수천 년 동안 세계 전역에서 다른 이들도 자신들과 같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들은 대략 남반구 위도 32~35도에서, 북반구 위도 37도 사이의 지역에 살았다. 이 지역들은 면화 재배에 적합한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아열대 식물인 면화는 생육기간에 온도가 섭씨 10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면서 통상 섭씨 16도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 또 널리 알려진 대로 200일 이상 서리가 내리지 않고 연 강수량이 500~630mm이며 생육기간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는 지역에서 잘 자란다. 이는 세계 전역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기후로, 면화가 여러 대륙에 풍부하게 분포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면직물 생산은 1,000년 전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큰 제조업이었다."(39)


"세계의 그 많은 지역에서 그 많은 사람이 실을 잣고 그 실로 옷감을 짰던 면화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제조산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9세기까지 면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여전히 가정 내 소비를 위한 가내생산이었다. 하지만 1780년대 산업혁명에 앞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가장 중요하게도 면제품은 대개 노동집약적인 생산물이었기에 중요한 가치저장수단이자 교환수단이 되었다. 어느 지역이든 지배자들은 한결같이 면직물을 공물이나 세금으로 요구했고 사실상 면화는 정치경제의 탄생과 함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면직물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메소아메리카 전역에서 이상적인 교환수단이었다. 면화와 달리 면직물은 장거리를 쉽게 운송할 수도 있고 썩지 않아서 가치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근대 이전 세계 거의 어디에서나 면직물로 식량과 제품, 심지어 보호수단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것을 구매할 수 있었다."(55-6)


"수요가 늘자 면직물은 가정에서 벗어나 첫걸음을 뗐다. 인도에서는 직업 방직공이 출현했다. 그들은 원거리 무역 물품을 공급하며, 국내는 물론 지배자들과 부유한 상인들에게 면직물을 제공하는 데 집중했다." "작업장이 일반화되면서 새로운 유형의 방직공도 일반화되었다. 남성 위주의 개인들로, 특별히 시장 판매용 제품을 생산하는 방직공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작업장이 생겨났어도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전문화된 생산은 도시가 아닌 농촌에서, 작업장이 아닌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전형적이었다. 이들 농촌의 시장 생산자들과 자급을 위해 생산하는 사람들의 차이점은 글로벌 통상에서 신흥 세력, 곧 상업자본가들이 장악한 선대제先貸制 네트워크에 의존하는지 그 여하에 있었다. 19세기 상업화된 면직물 생산의 토대를 형성했던 이런 네트워크에서 방적·방직공은 도시 상인을 위해 실을 잣고 면직물을 제조했으며, 상인은 그들의 생산품을 취합해 먼 곳의 시장에 내다 팔았다."(58-60)


2장 전쟁자본주의의 구축


"유럽의 자본가와 지배자들은 다양한 수단을 통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변화시켰다. 무력을 동원한 교역을 통해 유럽을 중심으로 복잡한 해양 무역망을 창출할 수 있었고, 재정-군사 국가fiscal-military state의 구축으로 세계 구석구석 외딴 곳까지 세력을 떨칠 수 있었다. 해상보험에서 선하증권船荷證券에 이르기까지 각종 금융상품이 마련되어 자본과 상품의 장거리 운송이 가능해졌으며, 법률체계의 발달로 글로벌 투자에 어느 정도 안정성이 보장되었다. 또 원격지의 자본가와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어 현지 방직공과 면화 재배인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토지를 약탈하고 아프리카인들을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플랜테이션 농장도 번성하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이런 변화는 산업혁명으로 향하는 첫걸음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면화 세계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면화의 제국에 통합되었다."(74-5)


# 재정-군사 국가 : 조세와 재정의 혁신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 군사 활동과 전쟁을 지속했던 국가들


"모든 유럽 동인도회사들의 공통점은 인도산 면직물을 구매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동남아시아에서 향신료와 교환하기 위해, 또 국내 소비를 위해 유럽으로 가져갈 면화를 구매했다. 또 이제 막 신세계에 자리잡기 시작한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할 노예들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운송할 면화를 구매했다. 이렇듯 당시 면직물은 세 대륙을 망라하는 무역 체제와 얽혀 있었다. 이런 무역 체제는 콜럼버스와 다 가마의 기념비적인 원정이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킨 결과였다." "그 결과 유럽이 아시아로 팽창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면직물은 핵심 품목이 되었다." "동인도회사는 1621년에 이미 5,000여 필의 면직물을 영국으로 수입했는데, 40년 뒤에는 수입량이 다섯 배로 증가했다. 실제로 면직물은 동인도회사의 가장 중요한 무역상품이 되었고, 1766년에는 면직물이 동인도회사의 전체 수출품 가운데 75% 이상을 차지했다."(78)


"전쟁자본주의는 세계를 '내부'와 '외부'로 가를 수 있는 부유하고 강력한 유럽인들의 역량에 의지했다. '내부'는 모국의 법과 제도와 관습을 포괄했고, 국가가 부과한 질서의 지배를 받았다. 반대로 '외부'를 특징지은 것은 제국의 지배, 방대한 지역의 수탈, 원주민 학살, 자원 약탈, 노예화, 그리고 멀리 떨어진 국가의 효율적인 감시를 벗어난 민간 자본가들의 방대한 토지 지배였다. 이런 제국의 보호령들에는 내부의 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소유주들이 국가를 능가했고, 폭력이 법에 도전했으며, 사적 행위자들이 대담한 물리적 강제력을 동원해 시장을 개조했다.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것처럼, 그런 지역들이 〈다른 어떤 인간 사회보다 더 신속하게 부와 강대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사회적 백지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전쟁자본주의 '내부'에 의지하는 전혀 다른 사회와 국가들이 등장하는 데 그 기반을 제공한 것이 바로 그런 사회적 백지 상태였다."(85-6)


3장 전쟁자본주의가 치른 대가


"영국 면산업의 눈부신 발전 덕분에 영국 정부와 영국 자본가들은 전쟁자본주의로 얻은 결실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새로운 기계와 새로운 생산조직, 대규모 공장에서 일하는 임금노동자들은 사상 초유의 생산성을 만들어냈다. 그 덕분에 생산비용이 낮아져 영국의 제조업자들은 기대했던 새로운 시장에 진출했다. 면제품의 가격이 저렴해지자 내수시장이 확대되었고, 면직물의 디자인이 중간 계급 소비자들의 자기표현에 점점 더 중요한 요소가 되어감에 따라 면직물은 더 폭넓게 유행했다." "영국 면산업의 진정한 호황은 바로 수출 호황이었다. 1800년에 이르러 영국에서 제조된 면직물이 세계 시장에서 중요한 존재가 되자, 그와 동시에 수백 곳의 공장 소유주, 상인, 선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 농촌지역에서 새로 지은 공장에서 일하는 방적·방직공 수천 명이 새로이 해외 시장에 의존하게 되었다." "영국산 면제품은 이제 세계 시장에서 인도산 면제품을 재빠르게 대체해나갔다."(133-5)


"예전에 인도의 방적·방직공이 장악했던 여러 수출 시장을 이제는 영국산 면직물이 차지했지만, 애초에 영국 제조업자들은 전쟁자본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지역에서의 판매에만 집중했다. 산업혁명의 황금기이던 18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영국산 면제품 수출의 3분의 2 이상이 그런 지역들로 향했다. 나중에 면직물 수출은 영국이 200년 동안 막대한 부를 쌓은 대서양 경제의 통로들로 흘러들었다.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주인에게서 보급받은 의복이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의 생산자들과 달리 자신들의 의복을 직접 생산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유독 수익성 있는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주로 노예를 취급했던 아프리카 무역에서도 영국산 면직물의 수요가 높았는데(아메리카에서 면화 재배가 호황을 이룬 결과, 심지어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상인들이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인도산 직물과 동일한 영국산 직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덕분이었다."(136)


"면산업은 제국의 팽창으로 얻은 여러 전리품 가운데 하나로 시작해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솜털이 난 흰색 꼬투리에서 새로운 글로벌 체제인 산업자본주의가 시작된 셈이다. 물론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발명과 혁신은 있었다. 하지만 오직 면산업만이 지구 전체에 영향력을 미쳤고, 강제노동과 강력하게 연결되었으며, 국가로부터 유독 최고 수준의 지원을 받으며 세계 전역의 필수적인 시장들을 장악했다. 나중에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지만, 산업자본주의는 발생 직후에 여러 다른 곳에서 전쟁자본주의가 확대, 강화되는 데 기여했다. 그것은 영국이 자국의 공장에 더 저렴한 면화를 안정적으로 공급한 자국 상인들이 역량에 기대어 일방적으로 앞장서서 산업자본주의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국의 면제조업자들은 엄청난 양의 면화를 새롭게 요구한 반면, 산업자본주의의 제도적 구조는 여전히 미숙하고 고루해서 수요을 모두 충족시킬 만큼 면화를 충분히 생산할 노동력과 영토를 창출할 수 없었다."(144)


4장 노동력의 포획, 토지의 정복


"1791년까지도 제조업에 사용할 목적으로 생산된 면화 대부분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영세농들이 재배한 것이었고, 주로 현지에서 소비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면산업의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면화는 무력을 동원하여 토지와 노동력을 약탈하는 것이 특징인, 전 지구적이고 역동적이며 폭력적인 형태의 새로운 자본주의와 마침내 결정적 연결고리를 마련했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핵심에는 기계화된 제조업의 절박한 요구와 전근대적 농업의 생산으력 사이에 생겨난 커다란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필요한 노예제가 있었다. 공장들이 급속히 팽창하며 면화를 너무 빠르게 소비한 탓에 전쟁자본주의의 전략만이 필요한 토지와 노동의 재분배를 보장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토착민과 토지를 빼앗은 정착민, 노예와 플랜테이션 농장주, 현지 장인과 공장 소유주들은 일방적이지만 지속적인 전쟁의 암운이 짙게 드리운 새로운 한 세기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150-1)


"카리브해 지역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오스만 제국과 인도의 농부들과 달리 토지와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거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토착민이 소멸되고 서아프리카에서 거의 매일 노예가 도착하면서 새롭게 성장하는 시장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카리브해 지역 플랜테이션 농장주들과 다른 면화 재배인들을 구별하는 결정적 요소였다. 한편, 오스만 제국과 인도의 강력한 영주들도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그들의 면화 농장에서 노동을 시켰지만, 그곳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의 노예제 같은 제도가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더욱이 카리브해 지역에서 자원의 신속한 재편을 가능하게 했던 자본 유입이 다른 곳에서는 방해를 받았는데, 토지의 사적 소유권이 없었던 데다 오스만 제국 및 인도 통치자들의 정치권력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카리브해 지역에서만이 사실상 아무런 제약도 없이 새로 확보한 토지와 노동력이 투입되면서 면화 재배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160)


"그렇게 해서 서인도 남아메리카의 면화가 리버풀, 런던, 르아브르, 바르셀로나의 시장에 쏟아져 들어왔고 결국 기계화된 방적이 급속히 팽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팽창에는 한계가 있었다. 서인도 제도에는 면화 재배지로서 적합한 땅이 적어서 면화 생산에 제약이 있었으며,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사탕수수보다 면화가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토지가 풍부한 브라질에서뿐 아니라 서인도 제도에서도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들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면화 플랜테이션 농장들과 경쟁을 벌였다. 그 결과 1790년부터 서인도 제도의 면화 수출은 크게 감소해 영국 시장 점유율이 10%까지 축소되었다. 1819년 이후 영국인이 재배한 면화에 부여된 관세 혜택조차 그런 추세를 역전시키지 못했다. 19세기 초에 이르면 서인도 제도의 시장 점유율은 하염없이 하락했는데, 이는 〈흑인들의 해방으로 더욱 가속되었다.〉"(166)


"1791년 가장 중요한 면화 생산지인 생도맹그에 혁명이 일어나 그 지역을 뒤흔드는 바람에 면화를 포함해 세계 시장을 겨냥한 상품의 생산이 거의 중단될 뻔했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노예 반란으로 생도맹그의 예속된 주민들은 스스로 무장을 하고 프랑스 식민 지배 체제를 물리쳤으며, 아이티라는 국가의 탄생과 노예제 폐지를 이끌어냈다. 전쟁자본주의는 가장 힘없어 보이는 행위자인 수십만 명에 이르는 생도맹그 노예들의 수중에서 최초의 중요한 전기를 맞았다. 당시 생도맹그 면화 생산은 영국에 수입되는 전체 면화의 24%를 차지했지만, 4년 뒤인 1795년에는 그 비중이 4.5%에 불과했다." "확실히 전통적인 면화 생산 기법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인근에는 수급에 충분한 면화를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 있었다. 바로 신생국 미국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노예제에 기반을 둔 면화 생산이 기록적인 수준까지 치솟았다."(166-8)


5장 노예제가 지배하다


"미국 면화의 대영 수출은 1791~1800년에 93배 증가했고, 1820년까지 다시 일곱 배가 증가했다. 1802년에 이미 영국 시장에서 미국은 단일 면화 공급처로는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었고, 1857년에는 중국만큼 많은 면화를 생산하게 되었다. 휘트니의 조면기 덕분에 생산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미국산 육지면은 영국 면제조업자들의 요구에 꼭 맞아떨어졌다. 미국산 면화는 조면기를 사용해 섬유의 손상이 컸지만, 유럽과 다른 지역의 하층 계급 사이에 수요가 높았던 저렴하고 조악한 품질의 면사와 직물을 제조하기에는 알맞은 원료였다. 만약 미국에서 면화를 공급하지 못했더라면 오랜 면화 시장의 현실을 볼 때 면사와 면직물의 대량생산이라는 기적은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고, 새로운 소비자들도 이런 값싼 상품을 구매할 수 없었을 것이다. 떠들썩하게 이야기되는 직물 부문에서의 소비자 혁명은 플랜테이션 노예제 구조에 나타난 극적인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180)


"여기에는 면화, 주민을 축출하고 공지로 만든 토지, 노예제, 이 세 가지가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리버풀 크로니클》과 《유러피언 타임스》는 면화 재배에 노예노동이 더없이 중요해서 노예가 해방된다면 면직물 가격이 두세 배 올라갈 것이고, 영국에 참혹한 결과를 안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악몽 같은 무자비한 강압이 수백만 노예들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이러한 폭력이 종식될 가능성이 있다면 면화의 제국에서 풍성한 이익을 거두어들이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미국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폭력의 종식이라는 악몽이 현실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들을 세계의 주도적인 면화 재배인으로 만들어준 세 번째 이점을 이용했다. 그것은 바로 정치권력이었다. 남부의 노예 소유주들은 '5분의 3 타협안'으로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헌법에 새겨넣었다. 노예를 소유한 대통령, 대법원 판사, 의회 양원의 강력한 대표들은 노예제도에 거의 무한한 정치적 지원을 보장했다."(188-9)


# 5분의 3 타협안 : 흑인 인구의 5분의 3에 해당하는 투표권을 백인 노예주에게 인정해주자는 내용의 타협안으로, 1787년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남부 주와 북부 주 사이에 합의되었다.


"면화가 미국 경제를 지배하면서 면화 생산 통계치는 〈미국 경제를 평가하는 데 차츰 더 중요한 단위가 되었다.〉 서양 세계에서 미국산 면화의 중요성이 너무 커진 탓에 독일의 한 경제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북부나 서부가 사라진다고 해도 미국의 남부가 사라지는 것과 비교한다면, 세계에 별 의미는 없을 것이다.〉 남부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세계경제에서 자신들의 중심적 역할을 확신하고 기쁨에 차서 자신들이 〈근대 문명의 운명을 좌우할 운전대〉를 쥐었다고 선언했다. 《아메리칸 코튼 플랜터》는 1853년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미국의 노예노동은 인류에게 지금까지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축복을 가져다주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이런 축복이 지속되려면 노예노동도 지속되어야 한다. 세계에 공급할 면화를 자유노동으로 생산하는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자발적 노동으로 면화를 재배해 성공을 거둔 적이 없다.〉"(200-1)


"북아메리카 식민지들이 서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대영제국에서 멀어지기 시작해, 대서양을 가로지른 연결이 정치·군사적 행동에 의해 단절될 수 있음이 드러나자 영국의 산업이 미국산 면화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미국산 면화에 대한 높은 의존도에 대한 영국 면제조업자들의 우려는 세 가지 문제에 집중되었다. 첫째, 그들은 1810년대 미국에 눈에 띄게 많아지기 시작한 공장들이 점점 더 많은 양의 면화를 소비해 유럽 소비자들이 사용할 면화의 양이 감소할까 염려했다. 둘째, 특히 영국 제조업자들은 유럽 대륙의 생산자들이 세계의 면화 수요를 더 늘릴 경우 미국에서 공급되는 면화를 두고 그들과 경쟁하게 될까 걱정했다. 가장 중요한 세 번째 문제는 〈노예제의 지속성이 점점 더 불확실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피로 얼룩진 생산물〉에 의지하는 것은 〈미국의 노예제라는 범죄〉에 〈의지하는 자살행위〉와 마찬가지였다."(202-3)


"역설적이지만 면화를 갈구하는 제조업자들에게 예기치 않은 곳에서 미처 생각지 못한 이유로 구제책이 나타났다. 경쟁관계인 아시아 면산업의 공정이 서서히 지속적으로 붕괴하면서 면화 수급 문제가 완화된 것이다." "아시아 지역과 지방의 무역 네트워크는 지속되기는 했어도 결코 다시 번성하지는 못했다. 관습, 편의성, 이윤으로 특징지어졌던 이들 소규모 무역 네트워크는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특성을 지닌 유럽의 자본과 국가 권력 때문에 와해되었다. 사실 미국에서 노예제 덕분에 가능했던 면화의 저렴한 가격이 다른 모든 곳의 현지 제조업을 붕괴시키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텐치 콕스가 예리하게 통찰했던 것처럼, 영국 제품을 인도로 수출한 일은 인도인들에게 〈팔지도 못할 제품을 만드느니 면화를 재배하는 쪽으로 전환할 것을〉 강요했을 것이다." "이처럼 면화가 유통되는 대체 경로들이 파괴되면서 세계 곳곳의 농촌지역의 더 많은 영토와 더 많은 노동력이 글로벌 경제에 잠식당했다."(220-2)


6장 산업자본주의, 날개를 펴다


"전쟁자본주의 경제모델은 산업화에 필요한 원료, 특히 원면과 여러 중요한 제도적 유산을 제공했지만, 영국의 사례는 다음 단계인 면직물 대량생산에 전쟁자본주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또한 영국의 사례는 산업화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할 수 있는 국가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법적으로, 관료주의적으로, 기반시설로, 군사적으로 자국 영토에 파고들 수 있는 강력한 국가가 없었다면 산업화는 결단코 불가능했다. 시장을 조성하고,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세수를 늘릴 도구를 마련하고, 국경을 순찰하고, 임금노동자의 동원을 감안하여 변화를 촉진하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실제로 자국 면산업을 육성하는 국가의 능력이 산업화된 곳과 산업화되지 않은 곳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근대 국가들을 표시한 지도는 일찍이 면공업의 산업화가 목격되었던 지역을 표시한 지도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251-2)


"그 결과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발명품인 산업자본주의는 특정 경로로만 움직였다. 영국의 선례를 따를 수 있었던 자본가들은 보통, 자국의 제조업 성장이 국력을 강화할 방법이라고 여기며 산업화 기획을 포용한 국가에서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경제활동과 국가의 영토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수립되었다. 이런 국가들에서 통치자, 관료, 자본가는 장기적 자본 투자, 노동력 동원, 확장되는 국내 시장과 해외 시장, 지구 경제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기 위해 법과 관료주의, 군사력과 기반시설을 통해 영토의 경계 안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신생 국민국가의 정치인들에게는 영국식 모델을 기반으로 산업사회를 건설하지를 고려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산업은 부의 원천이자 탁월한 전쟁 도구이기도 했다." "결국 산업자본주의는 1860년대에 크나큰 위기[미국 남북전쟁]를 겪으면서 전쟁자본주의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만큼 충분히 강해졌다."(262-3)


"사실 노예노동 자체가 제조업에 전혀 부합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면직물공장에 노예가 채용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노예제가 지배하는 사회는 면공업의 산업화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초기의 산업화는 전 지구적으로 전쟁자본주의에 의지했으나, 지구상에서 전쟁자본주의가 가장 난폭한 형태를 취했던 지역들은 결코 산업화를 달성한 적이 없다. 예를 들어 쿠바는 대규모의 노예화된 노동자들에게 의지했지만, 19세기 내내 단 한 곳의 방적공장도 갖지 못했다. 전쟁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사적 파벌들 사이의 전쟁 상태는 산업자본주의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그러므로 면공업의 확산을 설명해주는 것은 국가의 역량만이 아니다. 국가 내부의 권력 분포 역시 그 설명에 도움을 준다. 노예제 국가들은 자국 산업가들의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를 지지하는 문제에서 더디고 취약하기로 악명이 높았다."(271-2)


# 가령, 브라질에서는 사탕수수나 커피를 생산하는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의 압력 때문에 여타 국가들에서 산업화를 가능하게 해준 보호주의─높은 관세 같은─가 제기능을 하지 못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이 국면이 중요한 이유는 그 형태의 다양성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토지와 노동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특유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조율되지도 않고 억제되지도 않은 자본가의 진취성이 특징적인 전쟁자본주의와, 기반시설에서는 물론이고 행정적·법적·군사적으로 강력한 국가가 개인의 진취성을 이끌었던 산업자본주의의 공존에 의지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정지된 것이 아니었다. 전쟁자본주의 덕분에 가능했던 산업자본주의는 강력한 새 제도와 구조를 만들어냈다." "1860년 이후로 영토와 사람들을 식민화한 주체는 수탈과 사적인 신체적 구속으로 지탱되는 노예주들이 아니라 국가권력으로 지탱되는 자본이었다." "가장 위대한 제도적 혁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노동력을 동원하는 방식이었다. 비록 초법적extralegal 강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임금노동은 노동자와 노동을 이전과 전혀 다른 법적·제도적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275-7)


7장 산업노동력의 동원


"분명 산업혁명은 주로 노동력 절감 기술에 관련된 것이었다. 예컨대 우리는 방적 부문에서 생산성이 수백 배나 향상된 것을 목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을 절감하는 이런 기계들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역시 노동력이 필요했다." "계몽주의는 경제적 인간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자극했고, 그 결과 유럽에서 노예제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아프리카 노예들을 맨체스터, 바르셀로나, 뮐루즈로 데려오는 일은 논외의 문제가 되었다. 지역주민을 노예로 만들 수도 없었다. 더욱이 노예노동에는 경제적으로 크게 불리한 측면이 있었는데, 예속적인 조건 아래에서는 작업에 동기를 부여하기가 어려웠고 감독 비용이 컸다. 더욱이 노예노동의 경우에는 일 년 내내, 때로는 노동자의 일생 동안 비용이 발생했고, 호경기와 불경기를 거듭하는 산업자본주의의 까다로운 주기를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성과 남성, 소녀와 소년의 노동력이 상품으로 바뀌었다."(288-9)


"제조업자들이 많은 사람을 공장으로 끌어들여 일을 시키는 데에 따르는 문제를 모면하기 위해 선택한 한 가지 방법은 먼저 사회의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 즉 저항할 수단이 거의 없던 사람들을 채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정 안에서 오랫동안 확고히 유지되어온 권력관계, 특히 가장인 남성이 적합하다고 여기는 대로 아내와 자녀의 노동력을 배치할 수 있었던 가부장제의 오랜 전통에 의지했다. 산업자본주의의 출현은 사실 이런 오래된 사회적 위계질서와 권력관계를 바탕에 두고 있었으며, 이런 것들을 수단으로 삼아 좀 더 폭넓게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고용주들은 생계를 보장하는 비자본주의적인 방식이 존속해야만 자신들이 사용하는 노동력의 '저렴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또한 인도 등지의 면화를 재배하는 농촌지역이 세계 시장을 위한 생산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알려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298-9)


"초기 면제조업자들이 여성의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은 중요했다. 유럽 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많은 지역들의 여성들 역시 직물을 생산했지만, 아프리카나 아시아와 달리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여성들은 가정을 벗어나 공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이는 직물의 산업화에 결정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가부장제의 유산과 농촌지역의 변화는 거의 언제나 더 노골적인 형태의 강요로 보완되었다. '직기 주인'의 강요와 '채찍 주인'의 강요가 크게 달랐다고는 하지만,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공장 내에서 노동자들을 징계하기 위해, 공장에 채용된 노동자들이 공장을 떠나지 못하게 막기 위해 완력을 사용하는 일이 횡행했다. 문제의 공장들에 투자한 제조업자들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을 강요하고 물리적 폭력까지도 사용했는데, 이런 일이 사적으로 저질러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국가의 용인을 받은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304-5)


"노동자들을 모집하고 규율을 시행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노동조건이 끔찍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끔찍했던지, 세계 곳곳의 노예 소유주들이 산업노동자들의 조건에 비하면 노예노동의 조건이 더 낫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예를 들어 독일 면산업에서는 주 6일 하루 14~16시간씩 노동하는 것이 하나의 규범이었다. 1841년 푸에블라에서는 하루 노동시간이 점심 휴식시간 1시간을 포함해 평군 14.8시간이었다. 프랑스 제2제정 시기 하루 노동시간은 평균 12시간이었으나, 고용주들이 원할 경우 노동자들은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했다. 1873년까지 바르셀로나 섬유공장의 노동시간 역시 매우 길었다. 어디서나 생산 작업은 위험했고, 기계는 귀가 멀 정도의 소음을 동반했다. 이런 조건들은 노동자들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1850년대 작센 정부가 징병을 시도했을 때, 군복무를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한 노동자는 전체 방적공의 16%, 방직공은 18%에 불과했다."(307)


8장 전 지구적 면화 만들기


"면화의 매매에 관한 모든 활동을 포괄하는 리버풀의 상인들은 면화의 재배와 제조, 판매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다루는 조련사가 되었다." "리버풀의 면화 시세는 수십만 방적공장 노동자들의 고용 여부를 결정했다. 전 세계가 리버풀의 면화 시세에 신경을 곤두세웠다는 사실은 그 도시의 상인들이 지구상의 드넓은 지역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반영한다. 리버풀의 면화 가격이 오르면 루이지애나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면화 농경지 구입을 새로 결정할 것이고, 노예무역업자들은 수천 명의 젊은 노예를 이 새로운 영토로 들여와 이윤을 얻었을 것이다. 리버풀에서 날아온 소식이 어느 날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그들의 땅에서 몰아내는 데 일조했고, 어느 날엔 인도의 철도 건설에 투자할 것을 독려했으며, 또 어떤 날엔 스위스나 구자라트 또는 멕시코 마초아칸의 가정에서 이루어지던 방적과 직조를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었다."(320)


"상인들은 편지를 쓰고, 공급자와 소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을 하고, 계산을 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상인들이 창조한 면화의 제국이 몹시 방대했기에, 그들은 곧 특정 부문만 전문적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일부 상인들은 면화를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항구로 옮기는 데 주력했고, 다른 이들은 대양을 횡단하는 교역에 주력했으며, 일부는 면화를 제조업자들에게 파는 데 주력했다. 반면 다른 상인들은 면제품 수출을 전담했고, 또 다른 상인들은 특정 국가나 지역에 수입된 면제품을 배급했다. 일반적으로 상인들은 특정 지역에서 자신들의 무역에 집중했고, 세계의 특정 지역을 서로 연결시키는 전문가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사업은 놀랍도록 제각기 달라 보였다. 사실 글로벌 체제는 중앙의 제국주의적 명령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 인맥을 갖추고 때로는 지극히 지엽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한 수많은 행위자들에 의해 구축되었다."(327)


"유럽의 자본, 그리고 뉴욕과 보스턴의 점점 더 많은 자본이 미국의 면화 플랜테이션 농장주와 면화상인들을 이어주는 중간상인, 곧 도매상 집단을 거쳐 면화 농업의 팽창에 투입되었다. 도매상은 공장과 플랜테이션 농장 사이에 이어지는 상인들의 연쇄사슬을 완성하는 연결고리였다. 재배인과 연결된 도매상과 면화 수출상 사이의 상호 작용을 지렛대 삼아 유럽의 자본은 기계의 생산 리듬에 맞춰 면화를 제공하도록 미국 남부의 농촌지역을 몰아 세웠다." "도매상에게는 8%를 웃도는 대출 이자가 또 다른 수입원이 되었다. 도매상은 유럽 상인들에게서 자본을 끌어왔고, 그렇게 해서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도매상을 통해 세계의 상품시장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자금시장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도매상은 노예 플랜테이션 농장주와 자영농에게서 수집한 면화를 수출업자에게 판매해 면화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수적으로도 가장 많았다."(345-6)


"이런 여신與信 체제는 전 지구적 범위였기 때문에 쉽게 붕괴할 수 있었다. 그 체제의 각 부분은 모두 다른 모든 부분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제국의 어느 한 부분에서 누군가 실패하면 그 위기가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랭커셔의 제조업자들은 해외 시장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상인들이 해외 시장에서 제품 값을 지불하지 못하면 국내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귀하가 우리의 상품을 구입한지 11개월이 경과했고 우리의 부채가 심각해서 올봄에는 분명 상황이 급박해질 터라 현금으로든 제품으로든 조속한 송금을 요청하니 양해 바랍니다.〉 뉴욕 상인 햄린 판 페흐텐은 근심에 차서 이렇게 간청했다. 간혹 그래왔듯이, 면화 가격이 크게 떨어지면 상인들은 그들이 지급한 선급금보다 적은 가치의 면화를 받게 되므로 채무를 상환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 결과는 1825년, 1837년, 1857년에 들이닥친 전 세계적 대공황이었다."(350-1)


"경제질서가 이처럼 믿을 만한 정보와 신뢰, 신용에 의지한 탓에 상인들은 시장 밖에서 만들어진 네트워크들에 의지하게 되었다. 임금노동의 출현과 마찬가지로 글로벌 무역을 만들어내는 일은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이전의 사회적 관계에 달려 있었다. 상인들이 남달랐던 것은 자본을 축적하고 분산할 수 있는 능력이나 정보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만이 아니었다. 확대가족의 결속, 지리적 인접성, 동일종교, 동일민족, 출신지를 기반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그 네트워크에 의지하는 능력 엿기 상인들을 남다르게 한 요인이었다. 무역이 위태롭고 회사의 생존이 오직 거래처 한 곳의 신뢰도에 좌우되던 세계에서는 신뢰성이 필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 안에서 신뢰 강화 방법을 모색하며 역사가들이 '관계형 자본주의relational capitalism'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내자, 더 쉽게 신뢰성이 생겨났다. 이처럼 면화 시장을 더 크게 좌우한 것은 시장 밖의 사회 관계였다."(360)


9장 세계를 뒤흔든 전쟁


"유럽의 제조업자들과 상인들에게 엄청난 부를 안기고 수십만 명의 공장노동자에게는 가혹한 노동 환경을 안긴 면산업은, 미국을 세계경제의 중심무대로 밀어 올리며 〈지금껏 미국에서 계획되거나 실현되었던 것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농산업〉을 구축했다. 면화 수출만으로도 세계의 경제지도 위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남북전쟁 직전에 면화는 미국이 해외로 내보낸 상품의 전체 가치의 61%를 차지했다."(378) "그러나 미국 남북전쟁의 발발은 1780년대 이래 전 세계적 면화 생산망과 글로벌 자본주의를 지탱해오던 관계를 단박에 날려버렸다. 영국의 외교적 승인을 강제로 받아내기 위해 남부연합 정부는 면화 수출의 전면 금지를 단행했다. 남부연합이 이 정책의 수명이 다했음을 깨달았을 무렵에는 북부의 봉쇄로 면화 대부분이 남부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산 면화의 유럽 수출은 1860년에 380만 꾸러미로 감소했고 1862년에는 사실상 전무했다."(382-3)


"제조업자들이 공장을 폐쇄하고 방적·방직공들이 고통을 겪는 동안에도 면화무역상들은 한동안 황금기를 누렸다." "가격변동성이 커지고 투기가 확산되자 투기적인 시장 거래, 특히 판매와 관련된 투기 거래를 제도화하려는 상인들의 움직임도 확산되었다." "제조업자들은 면섬유의 새로운 공급처를 강력히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조업자들의 압박을 받고 면산업 노동자들의 고충과 집단행동을 염려한 정부 관료들도 우려를 표명했다. 무엇보다도 면은 그들 국가경제의 중심이었고 사회의 궁극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였다." "자국 산업에 필수적인 원료를 저렴한 가격에 확보하는 문제에 이처럼 지대한 공적 관심이 쏟아진 것은 과거와 분명하게 결별했음을 의미했다. 1780년대 이래 상인들이 면화 시장을 확고히 지배해왔지만, 이제 면화는 수십 년 동안 상인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며 강력해진 국가의 문제가 되었다."(385-8)


"면화 기근에 직면한 제조업자들과 식민지 관료들은 갈수록 시장의 기능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비롯된 면화기근은 식민지(인도)의 원료 생산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어놓았다." "면화 가격의 급격한 상승 덕분에 정부 개입의 효율성이 커지고 순조롭지 않던 세계 시장을 향한 생산으로의 이행이 원활해졌다. 남북전쟁 발발 후 두 해 동안 인도 면화의 가치는 네 배 이상 상승했다. 그 결과 인도의 농사꾼은 새로 개간한 토지뿐 아니라 식량작물의 재배에 전용되던 토지에서도 면화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캘커다 주재 미국 영사에 따르면, 인도의 면화 재배농들이 이처럼 예전에 없던 농산물 수출에 주력하자 〈예상치 못한 대량 공급〉이 초래되었다. 이런 예기치 않은 면화의 대량 공급은 미국의 전쟁 기간 동안 큰 수익을 안겼을 뿐 아니라 공장 운영을 지속하려는 유럽의 면제조업자들이 필요한 원료를 얼마간 확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392-4)


"1865년 4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총성이 멈췄을 때, 유럽이 지배한 85년의 면화 역사에서 가장 큰 혼란이 마무리되었다. 쿨리부터 소작인, 임금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노동력 동원을 위한 새로운 체제가 세계 곳곳에서 시험되었고 면화 생산이 남북전쟁 이전 수준으로 돌아갈지는 미지수였지만, '자유노동' 면화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거의 보편적이 되었다. 미국 전역의 해방노예들이 그들의 자유를 축하하고 있을 때 제조업자들과 노동자들은 새롭게 풍부해진 면화 공급을 동력 삼아 공장들이 수용 능력 이상으로 가동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상인들에게는 축하할 일이 거의 없었다. 리버풀의 베어링 브라더스사는 1865년 2월 런던에 있는 그들의 동업자에게 〈종전에 관한 소문이 거의 공포를 유발했다〉라고 알렸다." "보스턴의 얼음 상인 캘빈 W. 스미스는 봄베이에서 이렇게 전했다. 〈이곳에서 영국인과 파시교도들이 짓는 침울한 표정은 내가 지금껏 어떤 치명적인 상황에서도 본 적 없는 것이다.〉"(416-7)


10장 전 지구적 재건


"노예 덕분에 면화의 제국이 혁명적으로 바뀌었듯이, 노예해방은 면화 자본가들을 그들 나름의 혁명으로 향하게 했다. 그들은 세계에서 면화 재배 노동력을 조직할 새로운 방법을 찾는 일에 골몰했다. 미국의 면화 재배를 도맡았던 노예의 해방과 어느 때보다 커진 면화 수요를 조화시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값싼 면화를 찾는 면제조업자들의 불안정한 수요 탓에 〈면화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사안이었다. 면화의 수입량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산업화된 유럽 국가들의 무역에서 면화는 여전히 가장 많은 비용이 드는 품목이었고, 면제품 수출은 유럽에서 해외 시장에 내놓은 상품목록에서 최상위를 차지했다. 수십만 노동자가 직물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었으므로 이런 수요와 판로는 유럽과 북아메리카 사회의 사회적 안정을 보장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너무나 중요한 산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면화의 제국을 전 지구적인 수준에서 재편해야만 했다."(422-3)


"면화의 제국을 그 핵심부터 재건하려면 면산업가, 상인, 지주, 국가 관료가 나서서 가정 중심의 생산을 포기하지 않는 재배농민들의 선택을 분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국민국가를 강화하며, 농촌 지역의 농부들을 생산자이자 상품의 소비자로 만들기 위해 합법적이고 때로는 불법적인 강제력을 용인하는 권력자들에 의지해야 했다. 그들은 신용, 토지의 사적 소유, 계약법을 포함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확산시켜 농촌 마을을 혁명적으로 바꾸려 했다. 그들은 프랑스 식민 관료들이 매우 적절하게 〈새로운 착취 양식〉이라고 불렀던 것을 찾아냈다." "새로운 형태의 강제력과 폭력과 수탈이 포함된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세계의 면화 재배지역으로 더 넓게 퍼져나갔다. 이제 지배력은 주인의 권위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공정하지도 않은 시장과 법, 국가 같은 사회적 기제에서 비롯되었다."(427-8)


"역설적으로, 지주들은 지역에서 그들의 권력을 공고히 한 바로 그 시기에 국가경제 안에서는, 역사가 스티븐 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극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권력의 쇠퇴〉를 경험했다. 면화 가격이 하락할 조짐을 보이고 그들이 소비하는 물품은 보호 관세에 직면한데다가 자본이 부족해지면서 자본의 조달 비용이 높아지자, 지주들은 남북전쟁 기간에 등장한 국내 산업화의 정치경제에서 부차적인 존재로 밀려났다. 전 지구적으로 이 면화 재배인 집단이 상인들만큼 강력했던 적은 없었지만 미국 남북전쟁 이전에는 지역 정치를 장악했고 중앙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제 권력은 그들과 같은 원료 공급자들에게서 결정적으로 멀어졌다. 당시 그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남북전쟁은 세계에서 면화 재배인으로는 마지막으로 강력한 정치집단을 형성했던 이들에게서 권력을 빼앗아갔다. 면제조업자에게 나타난 이런 중대한 변화로 면화 제국은 안정되어갔다."(439-40)


"19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이집트산, 브라질산, 인도산 면화는 세계 시장에 새롭게 등장한 중요한 존재들이 되었다." "면화의 생산은 이렇게 여러 대륙으로 확대되었는데 그런 현상이 노예제 없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더 주목할 만했다." "(노예가 아닌 농사꾼들이 면화를 생산하도록) 지구 전역의 농촌지역을 재편하려는 이 모든 투쟁을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점은 이제 국가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때는 노예노동에 더없이 중요했던 노예주의 뻔뻔스러운 물리적 폭력이 새로운 형태의 강제력으로, 국가가 나서서 제도화하고 시행한 새로운 형태의 강제력으로 대체되었다. 그렇다고 물리적 폭력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계약과 법, 세금에서 오는 압력에 비해 물리적 폭력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국가는 영토 안에서 새로운 주권을 발전시키면서 노동에 대한 그 주권도 확대했고 제도라는 산업자본주의의의 새로운 힘을 증명했다."(446-7)


11장 파괴


"소수의 면화거래소들이 차츰 글로벌 면화무역을 지배하게 되자 면화의 제국 안에서 예전 방식으로 일하던 수입업자, 중개인, 도매상의 중요성은 훨씬 더 줄어들었다. 그런 거래소에서의 거래는 종교, 친족, 출신지의 유대관계로 조성된 신뢰의 네트워크에 좌우되지 않았다. 대신에 면화거래소 같은 이런 기구들은 비인격적인 시장이었다." "이제 거래는 실제의 물리적 면화를 뛰어넘어 대단히 추상화되고 표준화되었다. 자연의 엄청난 다양성은 관행과 계약을 통해 몇 개의 범주로 묶였는데, 그 범주들은 자본의 요구에 따라 면화를 동일한 표준으로 측정할 수 있게 하는 추상화에 합치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면화 자체의 표준화였다. 너무 편차가 커서 선물 거래의 목적에 맞춰 다루기 어려웠던 면화의 자연적 특성은 〈육지면 중품〉이라는 가상의 품질로 단일화되었고, 계약은 이 품질의 구체적인 제조 단위에 맞추어 표준화되었다."(483-4)


"글로벌 면화 시장이 이렇게 재건된 결과, 사업이 급성장했다. 뉴욕면화거래소는 1871년에서 1872년 사이에 500만 꾸러미(실제 수확량보다 약간 많은 양)의 선물거래 계약을 주고받는 한편, 10년 뒤에는 3,200만 꾸러미의 계약을 주고받았다. 이는 실제 면화 수확량의 7.5배에 이르는 양이다. 글로벌 면화무역은 이제 실제로 면화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미래 가격 추이를 예측하는 일이 되었다. 면화 재배와 면공업의 모든 중심지에서 주간에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면화 가격, 곧 면화의 '국제 가격'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래소들의 능력에 따라 그런 예측이 가능해졌다. 이제 면화무역은 면화의 제국 전역에 위치한 항구 도시들의 거리를 누비던 수입업자들과 도매상과 중개인들의 한가로운 속도에 맞춰서 진행되지 않았다. 이제는 산업자본과 금융의 리듬이 면화무역을 지배했다. 상인들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특히 그들의 핵심 기능 가운데 많은 부분을 국가가 차지해버렸다."(485)


"면화 시장의 세계화는 사회구조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임금노동자, 차지농, 소작농의 공통점은 생계농업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제 기본적인 생산과 소비가 세계 시장에 달려 있었다. 면화는 [한때] 〈부차적인 작물〉이었고 〈소작인은 면화 가격이 아무리 높아도 주저 없이 면화 대신 곡식을 재배했다. 곡식을 재배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에 와서는 수백만의 농사꾼은 주로 면화에 생활을 의지하게 되었다. 더욱이 세계 시장의 통합이 사회적 차별화와 함께 진행되었기 때문에 곡식을 손에 넣지 못해 주기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무산 차지농과 농업 노동자 집단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났다. 아프리카의 한 필자는 〈면화와 식량불안이 나란히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멕시코의 라라구나에서는 영양실조로 고통받는 아동의 비율이 기록적인 수준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소규모 농장의 삶은 늘 궁핍했다."(501-2)


12장 새로운 면화제국주의


"19세기 해방을 향한 위대한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의 면화 소비국들, 미국, 일본은 결정적으로 면화 재배가 가능한 영토를 장악하고 착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반도, 서아프리카, 중앙아시아에서 식민지 영토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력이 확대되고 국가의 힘이 커지면서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면화의 제국도 그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다. 이른바 '면화 열풍'은 세기 전환기에 새로 등장한 제국주의 세력들이 과거 남북전쟁 기간 동안 식민 당국들이 했던 것보다 더 열정적으로 뛰어들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1870년대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동자들을 세계 시장을 위한 면화 재배로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면화 자본가들이 세계 각지의 농촌지역에 어느 정도 압력을 가하는 한편, 19세기 후반 들어 면제조업자들과 정치인들 사이에서 안전하고 값싼 면화를 공급하고자 하는 오랜 관심이 더욱 깊어졌기때문이다."(514-6)


"1898~1913년 사이, 25년 만에 처음으로 면화 가격이 121%까지 인상되자 유럽과 일본의 제조업자들은 미국이 국내 재배지에서 수확한 면화를 국내 공장에서 소비하는 비중이 점점 더 커져서 면화가 부족해지고, 면화 가격이 인상될까봐 염려했다. 일부 투기꾼이 시장을 '매점하고서' 새로 세운 면화거래소에서 선물거래와 현물거래를 조작해 가격을 더 높게 책정하는 시도가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자 그러한 염려는 더욱 증폭되었다. 이런 매점매석이 수그러들자 '면화 포퓰리즘'의 물결이 미국 남부의 농촌지역을 휩쓸었다. 1892년에는 미국의 면화 농장에 병충해의 일종인 목화다래바구미가 번져 면화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의 신흥 지역에 방적공장들이 확산되면서 면화수요로 인한 압력이 가중되었다." "이와 동시에 '원자재 자급'이라는 보편적 개념이 유럽과 일본의 정책 입안자들과 자본가들에게 차츰 중요한 정치적 목표가 되었다."(516-7)


"하지만 면화의 추가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큰 성과는 미국 면화 단지의 확장이었다. 미국의 이런 면화 재배 확대는 어떤 면에서 러시아의 경우와 비교할 수 있는데, 러시아는 국가의 대리자들과 군대가 지속적으로 영토를 쟁탈하고 그 영토에 접근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반시설의 건설을 지원했다. 러시아에서처럼 미국은 나중에 황무지에 배수시설을 만들고 물길을 내고 관개시설을 건설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추쿠로바에서 그랬듯이) 중앙아시아의 농사꾼들을 이주시키고 유목민들을 강제로 정착시켜 면화를 재배하게 한 반면에, 미국은 역사가 존 위버의 표현을 따르자면 〈도전적인 개인들의 주도〉와 〈질서정연한, 국가가 보장하는 사유재산권의 확실성〉을 결합시켜, 원주민 대다수를 면화경작지대에서 내몰고 동부에 살던 시민들이 이주해 오도록 장려했다." "이렇게 늘어난 면화 경작지는 포르투갈의 전체 면적보다도 더 넓은 면적이었다."(525-6)


13장 남반구의 귀환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집단행동을 통해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했을 뿐 아니라 새롭게 강화된 국민국가에 압력을 넣어 복지 향상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독일은 노동친화적인 여러 법률을 제정했다. 1871년 이후 의무교육이 실시되면서 12세 이하 아동의 공장 노동이 금지되었고, 14세 미만 아동의 유효 노동시간은 제한되었다. 1910년에 제정된 법률에 따르면, 여성은 주중 10시간 이상, 토요일에는 8시간 이상 노동할 수 없으며, 13세 이하 아동의 노동은 일절 금지되었다. 매사추세츠주는 1836년에 최초의 노동법을 통과시켰고, 1877년에는 공장 안전 법규를 통과시켰으며, 1898년에는 여성과 미성년자의 야간노동을 금지시켰다. 그러다 결국 야간에는 공장 문을 닫게 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스위스에서도 노동법에 따라 노동비용이 인상되었고, 여성의 야간노동과 14세 미만 아동의 노동은 불법으로 규정되었다."(578)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가는 점차 민주적 정당성을 추구해나갔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자본가들에게는 한때 그들의 가장 중요한 권력의 원천이었던 강력한 국가에 의지하는 것이 이제 가장 크고 유일한 약점이 되었다. 그러한 국가 덕분에 결국 노동 계급이 작업현장과 정치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자본가들에게는 국가는 양면적인 존재였다. 국가는 지구 전역의 농촌지역에서 노동력을 동원한 일을 포함해 산업자본주의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지만 자본가들에게는 '덫'이 되기도 했다. 노동자들이 노동조건과 임금을 향상시키기 위해 국가정책에 접근해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때 전 지구적 사회 갈등(생도맹그에서 노예를 동원한 일이 영국 면제조업자들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끼쳤을 때)이나, 지역적 사회 갈등(인디언 농민들이 영국인 소유의 면화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동하기를 거부했을 때)은 이제 차츰 국가 차원의 갈등으로 변해갔다."(579)


"제조업자들은 자국의 해당 산업을 글로벌 경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더욱 강력해진 정부에 접근해 정책을 활용함으로써 경쟁의 압력에 대처했다. 독일의 면산업은 특정 산업 부문의 구체적인 필요에 최적화된 독일 관세 체제에 의지했다. 제조업자들이 집단행동에 나섰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지원하도록 국가에 압력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 "유럽과 뉴잉글랜드의 면제조업자들은 전 지구적인 면화의 제국 안에서 자신들이 누리던 높은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노동비용이 치솟는 바람에 그들의 노력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노동과 자본의 국가 통제에 따른 기회와 제약으로 인해 유럽의 노동 비용이 상승하자 세계의 다른 지역, 즉 노동력이 더 저렴하고 국가의 규제로 인한 제약이 덜한 지역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결과적으로 남반구는 20세기 세계 면산업이 애초의 진원지로 복귀하는 것을 환영했으며, 한 세기에 걸친 발전을 되돌려놓았다."(580-2)


"(이집트와 중국, 그리고 인도 같은) 탈식민사회에서 달라진 점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사회적 힘의 균형만이 아니었다. 국가와 사회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달라졌다. 면공업의 산업화에 뒤늦게 뛰어든 후발주자들은 잉글랜드, 유럽 대륙, 북아메리카의 첫 세대 산업가들이 직면했던 것과 다른 세계를 맞닥뜨렸기 때문에, 노동, 영토, 시장, 원료의 동원을 포함해 산업자본주의로 더 신속히 이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산업자본주의가 국가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탈식민주의 세계에서 그런 '대약진'은 종종 극단적인 국가주의를 낳는 결과를 초래했다. 탈식민주의 체제, 심지어 탈자본주의 체제가 이제 훨씬 더 급진적으로 영토, 자원, 특히 노동의 식민지적 통합이라는 수단을 채용했다. 산업자본주의가 국가 자체의 생존에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국가는 산업자본주의에서 산업에 방점을 찍었다. 사실 때때로 자본주의가 산업화의 도정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626)


14장 에필로그: 씨실과 날실


"1963년, 면화의 제국에 대한 유럽의 지배는 끝났다. 1960년대 말이면 글로벌 면직물 수출에서 영국의 비중은 고작 2.8%에 불과했다. 150년 전만 해도 영국은 그 시장에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한때 영국의 면직물공장에서 6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했지만, 이제 남은 노동자는 고작 3만 명 남짓이다. 여러 세대에 걸쳐 뮬방적기와 직기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실직상태에 놓이자 면화 도시들도 파국을 맞았다. 대륙의 몰락을 상징하는 증거는 1958년에 등장했는데, 오랫동안 자유무역의 견고한 투사였던 맨체스터상공회의소가 노선을 바꾸어, 영국 면직물산업에 보호가 필요하다고 선언했을 때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명백한 패배 선언이었다. 그런데 놀랍도록 생산적이고 무서우리만치 난폭한 이 생산 체제에서 유럽이 밀려나고 미국 역시 점차 주변으로 밀려났지만, 면화의 제국 자체는 존속했다. 오늘날의 세계는 전보다 더 많은 면화를 생산하고 소비한다."(632)


"지형부터 노동 체제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재편되어 온 면화의 제국을 통과하는 여행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근대 세계를 사유할 때 그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은 세계의 농촌지역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을 지배하는 것은 대체로 도시, 공장, 산업노동자이다. 그러나 근대 세계의 많은 것이 농촌지역에서 등장했으며, 농촌 주민들이 다른 곳에서 사요외는 상품의 제조자이자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상품의 소비자로 변했을 때 등장했다. 농촌을 강조하면 자본주의 역사에 마찬가지로 중요한 요소였던 강압과 폭력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 폭력의 여러 형식들 중에서도 특히 노예제, 식민주의, 강제노동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핵심에 놓여 있었다.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특정 지역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일할 것을 강요하는 일은 면화의 제국 전 역사를 통틀어 변함없이 등장하는 요소였다."(6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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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 - 역사의 고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어떻게 탄생했나
도널드 케이건 지음, 박재욱 옮김, 한정숙 감수 / 휴머니스트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서론


"〈아마도 내 설명에는 신기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듣는 이들에게 재미가 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사는 똑같지 않더라도 비슷하게 전개되기 마련이므로 미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과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찾는 사람이 이 책을 유용하다고 평가한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겠다. 이 책은 한 번 듣기에 좋은 경연용 글이 아니라 영원한 유산이 되도록 저술되었다.〉(1.22.4)" "이 문단은 투퀴디데스가 자기 역사책에서 사실을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왜 그토록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지를 설명해준다. 사실이 반드시 정확해야만 투퀴디데스는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즉, 그는 미래에 지혜로운 사람이 이 자료를 활용하여 특히 전쟁 같은 긴장된 상황에서 인간 행동의 일정한 정형들을 연구하고 교훈을 얻어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를 기대했다. 만약 그의 서술 내용에서 사실이 잘못되었다면 해석 역시 잘못된 것일 테고, 그렇다면 정치적 지혜를 이끌어낼 수도 없게 된다."(34-5)


1장 수정주의 역사가 투퀴디데스


"(수정주의자 본능을 지녔던) 투퀴디데스는 특정한 사람을 지목해 논변을 펼치지도 않고, 심지어 누군가의 견해를 반박할 때에도 자기 관점을 '대안적 설명'이라 이름 붙여 제시하지 않았다. 오직 신중한 조사와 숙고 끝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실과 거기에서 추출되는 결론만을 독자에게 제시했다. 투퀴디데스가 택한 방법은 크게 성공했다. 무려 2,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바라보는 데 있어 투퀴디데스와 다른 관점이 존재했음을 알아챈 독자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의 책과 여러 고대 자료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투퀴디데스가 살던 시대에 그와 다른 견해가 존재했고, 그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이러한 다른 견해에 반대하는 강력하고 성공적인 논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잊히고 가려진 동시대 견해를 복원해 투퀴디데스가 제시한 해석과 비교하면 투퀴디데스의 정신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의미를 흥미롭게 다시 조명할 수 있다."(42)


# 수정주의자 :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기존 방식을 날카롭고 철저하게 재검토하여 새롭고 통합적인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정신을 중대하게 바꾸려는 저자


"그렇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기원전 431년 봄부터 기원전 404년 봄까지 벌어진 사건을 따로 떼어내 스파르타와 아테나이가 벌인 단일한 전쟁으로 정의한 사람은 투퀴디데스가 처음이다." 그 기간에 벌어진 몇몇 분쟁을 독립적인 전쟁으로 다룬 당대 혹은 직후의 저술가들과 달리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합된 하나의 긴 전쟁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변을 펼쳤다. 〈사건이 발생한 순서대로 여름과 겨울을 나누어서 스파르타인과 동맹국들이 아테나이 제국을 끝장내고 장벽과 페이라이에우스 항을 점거하던 때까지 이야기이다. 전쟁은 27년간 이어졌다. 누군가 조약으로 전투가 중단된 시기는 전쟁 기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틀렸다. 10년 전쟁과 그에 뒤이은 의심스러운 휴전 기간, 이후에 벌어진 전쟁을 여름과 겨울 단위로 합산하면 전쟁은 이미 내가 말한 기간(27년)과 똑같은 햇수만큼 지속되었고, 단지 며칠만 차이가 난다.〉(5.26.1-3)"(54-6)


2장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1 ─ 케르퀴라 위기


"투퀴디데스는 스파르타인이 전쟁을 개시하기로 결정한 이유가 〈동맹국들이 제기한 논변에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아테나이가 보유한 힘이 날로 커지고 헬라스 대부분이 이미 아테나이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1.88)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실상 투퀴디데스가 자신이 내린 상황 판단을 마치 스파르타인의 판단처럼 제시한 것이다. 투퀴디데스는 당시 아테나이가 얼마나 강력해졌으며 스파르타인이 이에 대해 얼마나 경계심을 품었는지를 보여주는 보충 설명을 길게 덧붙여 자기주장을 뒷받침한다.(1.89-118) 이로써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기원을 에피담노스 문제보다 훨씬 이전에서 찾아야 함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아울러 투퀴디데스는 이 보충 설명의 끝 부분에서 아테나이와 스파르타가 전쟁을 결정한 행위는 페르시아 전쟁 직후부터 시작된 지속적인 과정에서 단지 마지막 단계였을 뿐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66-7)


"스파르타와 아테나이는 (아테나이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이 성장하여 성공과 부, 권력을 차지하고 서서히 아테나이 제국으로 탈바꿈한 페르시아 전쟁 직후의 시기부터 경쟁을 시작했다. 스파르타에는 처음부터 아테나이가 강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수상쩍게 여기고 못마땅해 하는 분파가 존재했다. 그들은 페르시아군이 도주한 뒤 아테나이가 성벽을 재건하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다. 아테나이인이 이러한 반대 의견을 확연한 태도로 거부하자 이들은 공식적으로 아무런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은밀히 이를 갈았다.〉(1.92.1) 기원전 475년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게루시아(스파르타 원로원)'에서는 아테나이와 전쟁을 벌여 새로 결성된 동맹을 분쇄하고 해상을 제패하자는 제안이 등장했다. 스파르타인은 얼마간 논쟁을 벌인 끝에 이 안을 거부했지만, 이 사건을 통해 반反아테나이파가 늘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8-9)


"대개 아테나이 민회에서는 거의 모든 논쟁이 하루 안에 끝났다. 그러나 케르퀴라 동맹 문제는 하루를 더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궁극적으로 거대한 전쟁을 초래할 정책을 결정했는데, 아테나이는 케르퀴라와 방어동맹만 맺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조약은 헬라스 역사에서 이때 처음 등장했다. 투퀴디데스는 케르퀴라와 코린토스 사절의 연설을 서술할 때에는 그들의 말 자체가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표현하도록 그대로 전달했다. 그런데 아테나이인의 연설은 하나도 전하지 않았다. 다만 아테나이인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라고 '자신이 믿는 바'를 매우 간략하게 요약하고 만다. 투퀴디데스는 최종 결정을 이끌어낸 동의안을 누가 제안했고 또 누가 옹호했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플루타르코스에 의존해야 한다. 〈사람들을 설득하여 코린토스와 싸우고 있는 케르퀴라를 돕게 하고 해군력을 갖춘 활기찬 나라와 연합하게 만든 이는〉 바로 페리클레스였다."(87)


# 케르퀴라 동맹 문제 : 케르퀴라가 코린토스와의 분쟁에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아테나이에게 동맹을 요청한 사안. 아테나이가 중립을 취한 결과로 코린토스가 케르퀴라 함대를 장악하게 되면 아테나이의 제해권이 위협받고, 이를 막기 위해 케르퀴라와 동맹을 맺으면 코린토스는 물론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과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딜레마를 품고 있었다.


"둘째 날 회의에서 다수가 방어동맹을 지지하도록 설득한 데에는 분명히 페리클레스의 연설 필요했다. 여기에서 투퀴디데스는 문제에 부딪혔다. 페리클레스는 분명 특유의 방식으로 인상적인 연설을 했을 테고 늘 그렇듯이 회의를 주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설득하여 케르퀴라인을 돕게 만든〉 이가 바로 페리클레스이며, 앞으로 엄청난 고난을 안기고 참혹하게 종결된 전쟁이 바로 그가 추진한 정책 때문에 벌어졌다는 인상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당대의 아테나이에서는 페리클레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초래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투퀴디데스는 바로 이 견해를 반박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 아테나이인의 결정을 특정 개인과 무관하게 취급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그럼으로써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 민회에서 이루어진 결정을 모든 아테나이인이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인 것처럼, 그리고 상황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이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89)


3장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2 ─ 케르퀴라 위기에서 메가라 봉쇄령까지


"아테나이는 아테나이 제국에 속한 모든 항구와 아테나이의 시장 겸 중심지인 아고라에 메가라인이 출입하지 못하게 막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전쟁보다 낮은 강제 수단인 경제 봉쇄는 현대 세계에서는 외교적 무기로 자주 활용하지만, 고대 세계에서 전시가 아닌 평시에 봉쇄 조치가 내려진 것은 처음이었다 이 또한 분명 페리클레스가 고안한 혁신적인 조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후 벌어진 전쟁이 이 봉쇄령 때문이었고 또 페리클레스가 이 봉쇄령을 동원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메가라 봉쇄령은 코린토스와 동맹을 맺은 폴리스들로 전쟁이 확산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외교적인 압력을 강화하려는 조치로 이해해야 한다. 코린토스는 펠로폰네소스인을, 그리고 누구보다도 스파르타를 싸움에 끌어들여야만 승리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리클레스와 아테나이인은 메가라를 징벌하여 다른 폴리스가 추가로 코린토스를 돕지 못하게 억제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99-100)


"마침내 기원전 432년 7월 에포로스들은 스파르타 민회를 소집하고 동맹국 중 아테나이에 불만을 가진 폴리스는 모두 스파르타로 오도록 초청했다." "(전쟁을 선동하는 코린토스인의 연설) 다음 발언자는 아테나이 사절 중 한 사람이었다. 투퀴디데스는 그가 〈다른 일 때문에 스파르타에 왔다가 우연히 참석하게 되었다.〉(1.72.1)고 말한다. 그 '다른 일'이 무엇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지만, 이는 아테나이인에게도 해명할 기회를 주려고 만든 핑곗거리였음이 분명하다. 페리클레스와 아테나이 입장에서는 스파르타 동맹국들의 불만 사항에 대해 해명은 해야겠지만 스파르타 민회에 공식 대변인을 보내지는 않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만약 공식적인 사절을 보낸다면, 평화조약에 따라 불화를 중재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스파르타가 아테나이의 행위를 심판할 권리를 가졌다고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런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도 아테나이인은 스파르타 민회의 논의에 영향을 끼치고 싶었다."(102-3)


"스파르타가 메가라 봉쇄 사안을 (30년 평화조약에 명시한 대로) 중재에 회부했다면 페리클레스는 중재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고 또 기꺼이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나 포테이다이아와 아이기나가 대표를 파견해 기원전 432년 스파르타 민회에서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해서, 스파르타가 포테이다이아와 아이기나 건으로 아테나이 제국의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또 메가라 봉쇄령처럼 아테나이가 추진하는 상업 정책과 제국 정책에 개입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이 부분에서 양보를 한다면 에게 해에서 아테나이가 장악한 헤게모니와 아테나이 제국에 대한 지배권이 스파르타의 용인 여부에 달려 있다고 인정하는 셈이었다. 아테나이가 지금 협박이 무서워 뒤로 물러선다면 이는 아테나이와 스파르타가 동등하다고 주장해온 입장을 스스로 저버리는 행위이며, 또 장차 더 많은 협박을 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민회 연설에서 외부 압력 때문에 유화책을 써서는 안 된다고 자세히 설명했다."(112)


4장 페리클레스의 전쟁 전략


"페리클레스의 전쟁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아테나이인이 수비에 치중하고 함대를 보존하며 전시에 제국을 확대하려 시도하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지 않는다면 결국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2.65.7)" "(투퀴디데스도 이에 동의했지만) 동시대 아테나이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쟁 첫해에 앗티케를 침공한 스파르타군이 아테나이 서북부 모퉁이만 휩쓸었다면 사람들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페리클레스가 내린 명령에 따라 기꺼이 성벽 뒤에 머물며 교전을 회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테나이인은 스파르타군이 도시에서 고작 60스타디온 떨어진 아카르나이 인근에 이르자 더 이상 참아서는 안 될 상황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자기 땅이 약탈당하는 모습은 끔찍한 일이었다.〉(2.21.2)" "페리클레스가 추진하던 정책을 향해 매우 거센 분노와 비판이 쏟아졌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민회가 자신이 수립한 전략을 거부하고 지상전을 강행하지 않을까 두려웠다."(119-21)


# 페리클레스 전략의 실패 요인

1.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스파르타에서도 평화파가 득세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전쟁 피해를 겪은 양측의 감정은 격해지고 전쟁을 지속하려는 결심이 한층 굳어져갔다.

2. 기원전 430~427년에 역병이 발생하여 도시 거주민의 3분이 1이 사망하면서 페리클레스의 권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심지어 펠로폰네소스에는 역병이 번지지 않았다.)

3.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가 축적한 전비(동맹에서 걷는 수익까지 포함한)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전쟁 개시 후 3~4년 정도를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반대파들의 비난과 소송에 맞서 기원전 430년에 행해진 연설에서) 페리클레스는 자기 정책의 결과로 빚어진 현재의 끔찍한 상황을 이해해달라거나 용서해달라고 호소하기는커녕 대담하게도 자신이 폴리스의 효율적인 지도자가 될 가장 탁월한 자질을 갖췄다고 주장한다. '아프라그모네스(고요함을 사랑하는 자들)'는 불행과 공포로 인해 바보, 겁쟁이에 자기밖에 모르는 자가 되어버렸다. 이에 비해 전쟁을 지속하기를 지지하고 '아프라그모네스'를 반대하는 논변을 펼치는 이는 용감하고 연륜을 쌓았으며, 현명하고 거기에 더해 진정한 지도자로서 탁월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다. 적어도 페리클레스 본인은 이 강력한 연설에서 스스로를 이와 같은 모습으로 표현했고, 투퀴디데스도 페리클레스를 그렇게 그렇게 묘사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는) 오직 페리클레스만이 발언을 허락받았고, 그의 강력한 언어는 역사가 투퀴디데스의 철저한 옹호 덕분에 더욱 증폭되었다."(147-9)


5장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는 민주정이었나


"투퀴디데스가 〈아테나이는 명목상 민주정이었으나 사실 점점 제1시민이 통치하는 정체가 되었다〉(2.65.10)고 말한 것은 자기 기준에서 볼 때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가 민주정이라 부르기에 부족했다는 뜻이다."(153-4) "그러나 (많은 희곡작가와 정적들이) 페리클레스와 내연녀를 인신공격하고 정치를 빈정대며 풍자하는 일은 사실상의 군주제나 독재정에서는 생각도 하기 힘들다. 어떤 이들은 페리클레스의 권력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가 수립한 프린키파투스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결은 전혀 적절하지 않다. 로마의 초대 황제가 제아무리 군주정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프린켑스라는 호칭 뒤에 숨기려 했어도,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행해진 것과 같은 정치 지도자에 대한 공공연한 악담과 공격을 받았다면 아무 처벌도 하지 않고 넘겼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페리클레스에 대한 비방과 풍자는 놀라우리만치 자유로운 민주정이 만들어낸 산물이며, 어떤 다른 곳에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160)


"오늘날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나이를 공격하는 사람들과 달리 고대의 비평가들은 이 체제가 '실제로' 민주정이라는 점을 확신했고, 바로 민주정이기 때문에 본성상 나쁘다고 믿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는 기원전 5세기 말의 타락한 민주정을 기원전 5세기 중반 위대한 아테나이를 이룩한 민주정과 같은 반열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 정치 체제가 근본적으로는 같다는 사실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투퀴디데스는 정치 영역에서 성공하려면 희귀할 정도로 탁월한 지혜가 필요하며, 그러한 지혜를 가진 자는 소수라고 확신했다. 그런 정치적인 재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을 재능 있는 희귀한 개인의 의견보다 우위에 두는 민주정은 성공할 가망이 없다. 재능 없는 시민들이 정치 천재에게 지도권을 내어준 다음에야 나라가 성공할 길이 열렸다. 투퀴디데스가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를 민주정이 아니라고 부인한 것이야말로 당시에 광범위하게 퍼졌던 견해를 수정하려는 특히 대담한 시도였다."(172-4)


6장 클레온은 운이 좋아 승리했는가


"투퀴디데스는 자기 역사책에서 기원전 427년에야 처음 클레온을 소개한다. 그리고 클레온이 〈시민 중 가장 난폭했고, 당시 누구보다 가장 크게 시민에게 영향을 끼쳤다〉(3.36.6)라고 말한다." "학자들은 대부분 니키아스와 클레온이 서로 매우 다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니키아스는 페리클레스의 정책을 따르는 자로서 평화를 옹호했고, 신중하고 고결한 인품을 가진 신사였다고 한다. 반면 클레온은 페리클레스를 반대하는 자였고, 전쟁을 옹호했고, 선동정치가였으며 속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보통 묘사되듯이 그렇게 다른 인물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니키아스와 클레온은 모두 귀족 가문이 아니라 '신인' 계층 출신이었다." "니키아스와 클레온은 둘 다 자기 가문에서 무엇으로라도 크게 이름을 떨친 첫 인물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아마 둘 다 부자였겠지만 폴리스에서 유난히 특출한 사람은 아니었다."(177-9)


"클레온과 데모스테네스가 이루어낸 놀라운 승리는 비할 데 없이 중요했다. 〈헬라스인이 보기에 이 일은 전쟁에서 벌어진 일 중 가장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그 누구도 스파르타군을 항복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4.40.1)" "아테나이인은 투퀴디데스와 그가 '지혜로운 사람들'이라 부른 이들과 의견이 달랐다. 아테나이인에게 데모스테네스와 클레온은 기적에 가까운 일을 이룩한 위대한 영웅이었다. 아테나이인은 당시 최고의 영웅이었던 클레온에게 감사를 표했다." "클레온은 이 기회를 이용해 아테나이 재정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자신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 수준의 승리를 거두기 위해 전쟁을 계속하려 했다. 클레온은 당당하게 포로를 압송한 지 두 달가량 지난 뒤인 8월 둘째 주 정도에 튀딥포스라는 자를 파견해 아테나이 동맹국에게 새롭고 더 높은 금액의 조공을 부과한다는 명령을 전달하고 이를 실행할 준비를 갖추었다."(206-8)


# 클레온의 승리(기원전 425년) : 평화협상을 지지하는 니키아스파와 맞서던 클레온과 데모스테네스가 스팍테리아 섬에 있는 스파르타 중장보병들을 공격하여, 그 중 스파르타 완전시민(120여 명)을 생포한 승리. 이 패배로 함대를 억류당하고 포로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스파르타는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아졌다.


"투퀴디데스가 튀딥포스 법령을 언급했다면 클레온의 공격적 제국주의와 아테나이 속국들에 대한 그의 가혹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할 수 있겠지만, 이는 동시에 클레온과 데모스테네스가 페리클레스의 원래 전략에서 벗어난 작전으로 거둔 승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전면에 드러내는 결과가 된다. 이 승리로 아테나이는 제국의 수입을 증대시킬 수 있게 되었고, 장기전을 치를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다는 페리클레스 전략의 최대 약점을 교정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튀딥포스를 언급한다면 페리클레스 전략의 단점이 강조되고, 페리클레스의 원래 전략을 충실히 따랐더라면 분명히 승리했을 것이라는 투퀴디데스의 칭송은 벽에 부딪힌다. 그렇게 되면 독자는 페리클레스가 실수했으며, 클레온이 무분별하고 운만 좋은 미친 남자가 아니라 대담하고 명민한 지도자였다고 결론짓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는 진실은 그렇지 않다고 믿었다."(210)


7장 암피폴리스의 투퀴디데스와 클레온


"우리에게는 투퀴디데스가 암피폴리스에서 한 행동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보다 투퀴디데스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 투퀴디데스는 사실을 왜곡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마음먹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가 사실을 왜곡하지 않으려 했다면, 자기 변론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약한 부분인 운명의 날에 왜 에이온에 있지 않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이 일에 대해서 분명 투퀴디데스는 제대로 변명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투퀴디데스는 (자신과 반대측의 변론을 언급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겉으로는 자신을 변호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가장 냉정한 태도로 객관적인 이야기만 전했다. 그리고 핵심 질문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이로써 이천 년이 넘도록 독자들은 대부분 투퀴디데스는 잘못이 없고 페리클레스 사후 민주정이 분노하고 이성을 잃은 탓에 투퀴디데스가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결론을 내렸다."(224)


# 암피폴리스 함락(기원전 424년) : 투퀴디데스는 스팍테리아 사건 이듬해에 장군으로 선출되어 제국의 트라케 지역(핵심 근거지가 암피폴리스) 방어 임무를 맡았는데, 스파르타의 장군 브라시다스가 이 도시를 기습 공격해 장악했다. 이 사건으로 투퀴디데스는 반역죄를 선고받고 남은 전쟁 기간 동안 국외로 추방되었다.


"아테나이인은 암피폴리스를 비롯해 빼앗긴 여러 폴리스를 탈환하기 위해 전함 30척에 중장보병 1,200명, 기병 300기, 렘노스와 임브로스 출신의 뛰어난 대규모 경보병 특수 부대를 보냈다. 클레온이 장군으로 이 군대를 이끌었다." "투퀴디데스는 이번 작전의 동료 장군을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전쟁을 통틀어 트라케 지역에서 벌어진 작전을 모두 검토해도 장군 한 사람이 혼자서 군대를 이끈 경우는 없었다." "아테나이인이 예외적으로 대규모 군대를 오직 장군 한 명에게, 그것도 다수의 동료 시민에게 경험이 부족하다고 의심받는 장군에게 맡겼을 리는 없다. 투퀴디데스가 클레온과 동행한 장군 혹은 장군들을 언급하지 않은 일 역시 결코 우연한 누락이라 믿어서는 안 된다. 작전은 재앙으로 끝났고 그 이후 지금까지도 이 실패한 작전의 책임은 우리에게 알려진 유일한 관계자가 모두 뒤집어썼다. 이것은 의도치 않은 일일 리가 없다."(228-9)


# 브라시다스의 기습 : 암피폴리스 포위 작전에 앞서 정찰을 마치고 트라케 문을 지나 철수하던 아테나이 군이 브라시다스의 기습을 받아 600명 가량 전사(스파르타군은 7명 전사)한 사건. 클레온과 브라시다스도 함께 전사했다.


"클레온은 브라시다스와 마찬가지로 공격적인 정책이 자기 폴리스를 위한 최선책이라고 진심으로 확신하고 추구했다. 물론 클레온의 저급한 태도가 아테나이 정치 생활의 품격을 낮추기는 했다. 반란을 일으킨 동맹국에게도 지나치게 가혹했는데, 이를 잘했다고 칭찬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클레온이 아테나이 대외 정책을 형성하고 수행하면서 광범위한 여론을 대변했고 늘 열정과 용기로써 자기 생각을 행동에 옮긴 사람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동시대인 다수가 거의 항상 클레온 편에 섰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만 투퀴디데스가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죽음으로써 평화로 나아갈 길이 열렸다고 한 말은 옳았다. 당분간 아테나이에는 니키아스가 강력하게 이끄는 평화 정책에 반대할 만한 위상을 갖춘 인물이 없었다. 이 평화는 거짓으로 드러나고 아테나이인에게 재앙과 최종적인 패배를 안겨주겠지만 이는 클레온과 아무 상관 없는 결과였다."(241-2)


8장 시켈리아 원정은 어떻게 결정되었나


"투퀴디데스가 시켈리아 원정을 설명하는 내내 그려낸 모습에 따르면 이 작전은 시켈리아 섬 전체를 정복하고 착취하려는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아테나이 군중은 이 작전이 얼마나 거대한 모험이며 얼마나 어려울지, 또 얼마나 위험할지도 알지 못한 채 권력과 탐욕에 찌들어 이 일의 실행을 요구했다. 투퀴디데스는 이렇게 말한다. 〈다수는 이 섬이 얼마나 큰지도 몰랐고 헬라스인과 비헬라스인을 포함해서 섬 주민이 얼마나 많은지도 몰랐다. 그리고 자신들이 펠로폰네소스인과 벌이는 전쟁에 비해 결코 작지 않은 대규모 전쟁을 벌이려 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6.1.1)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인이 시켈리아로 1차 벙력을 보내기로 결정한 일을 설명한 뒤 니키아스의 입을 통해 자기 생각을 드러냈다. 〈아테나이인은 시시하고 겉만 번지르르한 핑계를 댔지만 실은 시켈리아를 정복할 의도였고 이는 거대한 사업〉(6.8.4)이었다."(252)


# 시켈리아 원정 : 시켈리아 서부에 있던 에게스타와 셀리누스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고, 열세에 몰린 에게스타가 아테나이에 도움을 요청한다. 주전파(알키비아데스)와 평화파(니키아스)가 대립하는 상황 속에서 아테나이는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지만, 적절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원정에 임했다가 결국 코린토스와 스파르타의 원조를 받은 쉬라쿠사이에게 참패를 당하고 만다.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인이 시켈리아의 지리와 인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큰 사업인지도 알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시켈리아를 향한 대규모 원정이 시작되기 적어도 9년 전인 기원전 424년에 아테나이 삼단노선 60척이 시켈리아에서 장기 주둔을 마치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투퀴디데스는 에게스타와 레온티노이의 요청에 아테나이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서술했는데 이 내용 역시 아테나이인이 무지했거나 무모했다는 주장에 타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민회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지 않고 대신 에게스타로 사절단을 보내 〈에게스타인이 말한 대로 국과 신전에 돈이 넉넉한지 살피고 동시에 셀리누스인과 벌이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조사하도록〉(6.6.3) 결정했다." "에게스타인은 아테나이에 은괴를 60탈란톤─전함 60척을 한 달 동안 부양할 수 있는─이나 제공해 더욱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253-4)


"투퀴디데스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아테나이인은 '엘피스(희망)'에 가득 차서 출발했다. 이 대목에서 투퀴디데스를 읽는 독자는 아테나이인이 1년 전에 불운한 멜로스인에게 경멸조로 했던 말을 틀림없이 떠올리게 된다. 이 이야기는 시켈리아 원정 직전에 서술되었다. 〈그래요. 희망은 험악한 시절에 위안을 줍니다. ····· 그러나 희망의 대가는 엄청나게 비싸기에, 단 한 번의 시도에 전부를 거는 이들은 그 시도가 실패했을 때에야 대가를 알게 됩니다.〉(5.103) 아테나이인의 냉정한 논평은 사실로 증명되었고, 스파르타가 도우리라는 희망에 운명을 걸었던 멜로스인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독자는 아테나이의 위대한 무적함대가 맞이할 끔찍한 운명을 이미 알기에 여기에 담긴 반어법을 놓칠 리 없다. 투퀴디데스는 이 모두를 통해 이번 원정대는 무지하고 탐욕스런 군중이 결정하고 응원한 행사이며, 처음부터 실패가 예견되는 일이었다고 암시한다."(279)


9장 시켈리아의 재앙은 누구의 책임인가


"니키아스는 전략가로서 원정 실패의 핵심 원인이 된 실수를 저질렀다. 쉬라쿠사이를 점령하려면 기병이 꼭 필요했다. 아테나이군이 처음부터 기병을 보유했다면 쉬라쿠사이는 항복할 도리밖에 없었다. 외부에서 어떤 도움을 얻더라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니키아스 본인이 원정대 출발 전에 기병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테나이군이 기병 부대를 원정대에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은 특히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이러한 착오는 판단을 잘못 내린 탓이 아니라 목적을 잘못 설정한 탓이었을 것이다. 니키아스는 시켈리아를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억지로 이 작전에 참가한 뒤에도 최소한의 행동만 하고 제대로 된 교전은 피하려 했다. 니키아스는 아마 쉬라쿠사이를 직접 공격하는 심각한 상황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으리라. 그러다가 그는 전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자신에게 작전에 필요한 병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89-90)


"(전황이 점차 불리해졌고, 본인도 본래 후퇴하는 편을 선호했지만) 니키아스는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심하면 더 좋지 않은 결과도 맞이해야 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내내 아테나이인은 기대를 저버린 장군들에게 가차없는 모습을 보였다. 위대한 페리클레스조차 정책과 전략의 결과물이 시민들을 분노하게 하자 모욕당하고 처벌받았다. 니키아스는 분명히 귀환하자마자 심한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니키아스는 자신의 명성과 안위를 염려해 (부정직한 보고서를 올리면서) 아테나이인에게 자기 뜻대로 철수하거나 아니면 1차와 같은 규모로 추가 원정대를 보내라고 요청했다. 니키아스는 애초에 아테나이인이 원정에 나서지 못하게 막으려고 꼼수를 부리다가 실패한 경험에서 아무 교훈도 배우지 못한 듯하다. 아테나이인은 이번에도 니키아스의 바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추가 함대와 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했고 니키아스를 해임하지도 않았다."(304-7)


"역사가들은 대부분 투퀴디데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러한 조치들이 아테나이 직접 민주정의 탐욕과 무지, 어리석음을 드러낸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아테나이인은 아테나이 민주정을 비난하는 주된 이유인 변덕과 우유부단함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들은 좌절과 실망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이 시작한 일을 끝마치려는 일관성과 결단력을 드러냈다. 아테나이인이 저지른 실수는 사실 정치 체제와 무관하게, 약하고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강력한 나라라면 다들 겪는 일이었다. 이런 일을 당한 강대국은 대개 그대로 군사를 되돌리면 위신에 타격을 입는다고 생각한다. 철군 자체도 불미스럽지만 주변 국가들이 이 나라의 국력과 결단력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안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런 모험을 할 때에는 대개 승리할 전망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지원을 멈추지 않는다."(307-8)


"투퀴디데스가 니키아스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자기 시대에 그런 일을 당하기에 가장 부적절한 사람〉)를 덧붙이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 니키아스의 동시대인들과 같이 시켈리아에서 벌어진 재앙의 가장 큰 원인은 니키아스가 정치가로서 또 장군으로서 무능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분명히 투퀴디데스는 니키아스의 무능이 시켈리아에서 벌어진 재앙의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투퀴디데스가 보기에 니키아스의 무능만으로는 시켈리아 원정의 실패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으며, 또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도 아니었다. 투퀴디데스는 재앙이 벌어진 주된 이유는 페리클레스 사후 민주정이 현명하고 절제력을 지닌 강력하고 총명한 지도자에게 견제를 받지 않았고, 생각 없고 야심 가득한 선동정치가에게 현혹되었으며, 그리하여 스스로를 무지와 탐욕과 미신과 공포에 내맡겼기 때문이라는 점을 독자가 이해하기 바랐다."(325)


결론


"우리가 본 대로 투퀴디데스는 사건에 대한 자신의 서술을 독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매우 다양한 장치를 사용했다." "그러면서 그는 독자들이 속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고, 진실을 강조하고 명백하게 드러내기 위해 자료를 선택했다." "투퀴디데스가 특이한 곳에 강조점을 둔 것은 속임수가 아니라 해석을 위해서였다. 또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우리가 투퀴디데스의 해석을 반박할 수 있게 도와주는 증거를 거의 대부분 투퀴디데스 본인이 제공한다는 점이다. 투퀴디데스 스스로 투퀴디데스식 해석의 목적을 알려주고 있다. 투퀴디데스가 목적한 바는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우리 앞에 제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의 진실이 꼭 우리의 진실일 필요는 없다. 투퀴디데스의 역사 서술을 유익하게 사용하려면 그가 제시하는 증거와 그가 덧입힌 해석을 구분해야만 한다. 오직 그 후에야 투퀴디데스가 바란 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영원한 유산〉으로 사용할 수 있다."(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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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자서전 2
김대중 지음 / 삼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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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삶은 20세기를 지나 새 천 년으로 이어졌지만 돌아보면 한줄기 섬광 같은 것이었다. 내가 꿈꾸었던 것들, 사랑한 것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가 이름을 연호하던 군중들은 어디에 있고 나를 협박하고 욕하던 무리들은 또 어디에 있는 것인가. 거짓과 증오가 닳아 없어진 세상에서 그들과 다시 만나고 싶다.


  나는 많이 흘러왔으니 곧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한반도 남쪽 바다 조그만 섬에서 태어나 지구촌을 떠돌았다. 온갖 무늬의 시간들이 주어졌지만, 위대한 신은 내게 용기와 지혜를 내려 주셨다. 그리고 마침내 일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을 내려 주셨다. 


  나는 민주주의, 정의, 평화, 민족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다. 중용의 철학 속에 일관된 인생을 살자고 늘 자신에게 다짐했다. 나는 내게 닥친 다섯 번 죽음의 고비, 6년 동안의 옥중 생활, 수십 년간의 감시와 연금, 망명 생활을 극복했다. 나는 모든 고난의 순간마다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내가 살아있음의 확인이었다. 그래도 어찌 흔들리지 않았겠는가. 내 고난에 동참하여 나를 일으켜 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이 진정 고맙다.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목숨을 잃는 칼날 위에 섰고, 때로는 부귀영화의 유혹을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매번 바른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돌아 보면 아득하지만 들춰 보면 격정의 순간들이었다.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역사의 심판이다. 우리들은 한때 세상 사람들을 속일 수 있지만 역사를 속일 수는 없다. 역사는 정의의 편이다.


  나는 마지막까지 역사와 국민을 믿었다. pp.602-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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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자서전 1 김대중 자서전
김대중 지음 / 삼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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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세상을 떠나신 지 1년이 가까워 옵니다. 우리 집은 당신이 살아 계시던 그때 그대로입니다. 올해에도 마당에 우리가 좋아하던 사피니아, 백일홍, 천일홍, 팬지꽃을 심었습니다. 당신이 저 아름다움을 보신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당신의 웃는 모습이 떠오르기만 해도 마음 한구석이 저려 옵니다.

  우리는 자주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정원을 바라보았지요. 우리 집을 찾아온 참새들에게 모이를 주는 것이 당신의 유일한 즐거움이었죠. 요새는 더 많은 참새들이 와서 모이를 먹고 있습니다. 참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면 당신 생각에 눈시울을 적십니다.


  당신이 자서전을 쓰기 시작하실 때 "모든 것을 진실하게 기록하여 역사와 후손에게 바치겠다"고 하신 말이 떠오릅니다. 자서전을 읽으면서 우리가 함께해 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뒤돌아보면 우리 앞에 그토록 험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진정 몰랐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습니다. 「로마서」에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할 바 아니다"라 했습니다. 이 성구같이 당신의 생애는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으며 극적이었습니다. 당신은 죽음의 고비를 몇 차례 넘기셨고 망명, 연금, 감옥 생활 등의 괴로움에도 신념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탄압하는 세력과 결코 타협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용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민주화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당신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일했습니다. 외환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나라를 정보화 강국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평생소원인 통일을 위해 남북 화해에 나서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 회담으로 남북 공동 선언도 발표했습니다.

  이 나라를 민주, 자유, 평화의 꽃이 피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당신의 꿈은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내일의 희망을 향해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당신이 바라던 것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남과 북의 벽을 허물고 서로 하나가 되는 그날까지 쉬지 않고 힘쓸 것으로 믿습니다. 머지않아 당신이 바라는, 아니 우리 모두 바라는 통일의 그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행하며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평화롭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계 평화를 이룩해 나가도록 힘쓰겠습니다. 당신의 뜻을 후손들이 반드시 이루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생은 고난이 가득했고 그 고난을 극복한 당신의 생애를 담은 자서전이 나오기까지 많은 분들이 수고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존경하고 친구처럼 가까웠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폰 바이츠체커 전 독일 대통령,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께서 자서전을 위해 좋은 글을 보내 주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당신이 세상을 떠난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을 보낸 슬픔으로 가득 찬 하루를 보내기도 하지만 하느님이 당신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씌어 주실 것이라 생각하며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온 47년의 생애를 매일같이 떠올리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언제나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내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기도헤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느님 품에 편안히 쉬시옵소서.

2010년 여름, 당신의 아내 이 희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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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05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 정체성 정치를 넘어
마크 릴라 지음, 전대호 옮김 / 필로소픽 / 2018년 6월
평점 :
품절


들어가는 말


"나는 20세기 미국 정치사를 기독교 신학 용어에 빗대 두 개의 《통치 체제》로 구분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제안한다. 첫째는 루스벨트 통치 체제로, 뉴딜 시대부터 1960년대 시민권 운동과 '위대한 사회'(린든 존슨 대통령이 내세운 구호)의 시대까지 이어지다가 1970년대에 소진되었다. 둘째 레이건 통치 체제는 1980년대에 시작되어 현재 기회주의적이고 무원칙적인 대중영합주의에 의해 종결되는 중이다. 각각의 통치 체제는 미국의 미래에 관한 고무적 이미지와 정치적 의제들을 좌우하는 특징적인 원칙들을 동반했다. 루스벨트 체제는, 시민이 위험과 곤경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하고 기본권의 부정否定에 맞서는 활동에 함께 참여하는 그런 미국을 그렸다. 표어는 연대, 기회, 공적 의무였다. 레이건 체제는 국가의 속박에서 풀려난 가정과 소규모 공동체, 기업이 번창하는 더 개인주의적인 미국을 그렸다. 표어는 자기 신뢰, 최소 정부였다. 첫째 체제는 정치적이었고, 둘째는 반反정치적이었다."(12)


"진보의 중대한 기권은 레이건 시대에 시작되었다. 루스벨트 체제가 끝나고 야심찬 통합 우파가 부상하면서, 미국 진보주의자들은 심각한 과제에 직면했다. 미국 사회의 새로운 현실에 적합하게 과거 시도들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반영하여 미국민이 공유할 미래에 관한 신선한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라는 과제에 말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이 과제를 수행하지 못했다. 대신에 그들은 우리가 시민으로서 공유하는 바와 우리를 한 나라로 묶는 것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은 채 정체성 정치 운동에 몰두했다." 정체성에 매혹되고 집착하는 태도는 그 원리, 곧 개인주의를 강화했다. "루스벨트 진보주의와 이를 지지하는 노동조합들을 상징하는 이미지는 서로 악수하는 두 개의 손이었다. 정체성 진보주의를 표현하는 흔한 이미지는 프리즘이 단일한 광선을 색깔 성분들로 분해하여 무지개를 만드는 모습이었다. 이 두 상반된 이미지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12-3)


"좌파의 정체성 정치는 원래 대규모 민중 계층들─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여성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정치 제도를 동원하고 정비함으로써 중대한 역사적 과오들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 정체성 정치는 1980년대 즈음에 자기 존중과 점점 더 협소하고 배타적으로 되는 자기 정의定義를 내세우는 사이비정치에 자리를 내주었다 .오늘날 우리의 학교와 대학에서 배우는 것은 그런 사이비정치다. 그로 인한 주요 결과는 젊은이들의 시선이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공익에 대해서 생각하고 공익을 실현하려면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준비를 하지 못한 채로 방치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은 자신과 무척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여 공동의 노력에 참여하게 하는 어렵고 생색나지 않는 과제를 맡을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13-4)


"그러나 정체성 진보주의에 대해서 제기할 수 있는 가장 뼈아픈 비난은 그 정치적 입장이 특정 집단들을 보살핀다면서 오히려 그 집단들을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진보주의자들이 소수자에게 추가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소수자들은 권리를 박탈당할 위협이 가장 크니까 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소수자들을─공허한 인정과 〈찬양〉의 몸짓에 머물지 않고─유의미하게 돕는 유일한 길은 선거에서 승리하여 장기적으로, 정부의 모든 층위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성취하는 유일한 길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메시지로 그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그런데 정체성 진보주의는 정반대의 일을 한다." "정체성 진보주의의 역설은 그 입장이 소망한다고 공언하는 바들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사고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마비시키는 것에 있다."(15-7)


제1장 반反 정치


"한 혁명은 다른 혁명을 은폐할 수 있다. 역사적 기억 속에서 1989년의 대표적 사건은 소련의 붕괴다." "(소련 붕괴의) 가장 큰 역설은, 냉전의 마지막 10년에 걸쳐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 정치가 진보하는 동안 미국인들이 민주주의 정치의 실행에 투입하는 역량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로널드 레이건은 공개적으로 폴란드의 연대자유노조를 비롯한 친민주주의 세력들을 지지하고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베를린 장벽의 철거를 극적으로 촉구했지만, 미국 내에서 그는 공익이나 공익 달성을 위한 정치 참여을 운운하는 것이 더는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민중이 선출한 대통령이었다. 미국에서는 삶을 대하는 새로운 관점이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그 관점은 사회의 필요와 욕망보다 개인들의 필요와 욕망에 절대적 우선권을 부여했다. 이 부지불식간의 혁명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일어난 어떤 역사적 사건보다 더 강력하게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쳤다."(30-1)


"미국 사회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부르주아 사회가 되었다. 물질적으로도 그러하고 문화적 신조들에서도 그러하다. 당사자의 선택. 개인의 권리. 자기 정의. 우리는 마치 혼인서약을 읊듯이 이 단어들을 말한다." "(개인주의 신조를 충실히 반영한) 레이건의 교리문답은 어떤 전통적 의미에서도 보수적이지 않다. 의존과 의무를 통한 전통적 결속보다 자기 결정이 우선이라는 점을 공리로 삼으니까 말이다. 자연적인 (가정부터 국가까지의) 집단 소속 욕구가 존재한다는 것이나 우리가 그 욕구를 충족시켜야 마땅하다는 것에 대해서 이 교리문답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 것과 네 것을 따지기 위한 어휘는 있으나, 공익을 환기하거나 계급을 비롯한 사회적 실재들을 다루기 위한 어휘는 없다. 이 교리문답이 그리는 그림 속에서 우리는 공간 속에 뿔뿔이 흩어진 채로 제각기 고유한 속력으로 자전하며 고유한 궤적을 따라 운동하는 기본입자들이다."(33-6)


# 레이건의 교리문답

1. 좋은 삶은 독립적인 개인의 삶이다.

2. 부의 분배가 아니라 축적을 우선해야 한다. 

3. 시장이 자유로워질수록, 시장은 더 많이 성장하고 모든 사람을 부유하게 만든다.

4. 독재적 정부나 비효율적 정부 혹은 부당한 정부가 아니라, 정부 그 자체가 문제다.


이 모든 것은 루스벨트 통치 체제에 동반되었던 교리문답과의 근본적 결별이었다. "무릇 교리문답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완고해지고 형식화하다가 결국 사회적 현실로부터 분리되는 경향이 있다. 바로 그런 변화를 미국 진보주의가 1970년대에 겪었다. 공익을 위한 집단적 활동은 합법적인 것이라는 원칙에 더하여 미국 진보주의는 공익 달성을 위한 최선의 길은 언제나 세금, 재정 지출, 규제, 법원의 판결이라는 신앙고백을 추가했다. 1980년대에 이르자, 정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다는 가정을 의문시할 이유들이 셀 수 없이 쌓여 있었다. 베트남전쟁, 워터게이트 사건, 스태그플레이션 앞에서의 무능함 등이 그런 이유들이었다. 위대한 사회에 너무 많은 프로그램들이, 너무 서둘러, 거창한 미사여구와 함께 도입되어 사람들의 기대를 부풀렸고, 그 기대는 실망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40-1)


"그들의 가장 어리석은 행동은 그들의 (또한 나의) 바람이 입법 과정에서 성취되지 않으면 그 과정을 우회하기 위해 법원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한 것이었다. 희귀어류 보호부터 낙태와 통학버스 같은 더 민감한 사안들까지 모든 것에 법원의 판결이 비 오듯 쏟아졌다. 진보주의자들은 여론의 동향을 살피고 합의를 이끌어내고 보폭을 좁히는 습관을 상실했다. 그리하여 대중은, 법이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들의 전유물에 불과하다는 우파의 주장에 점점 더 귀가 솔깃해졌다. 결국 그 비난이 정착했고, 그때 이래로 사법부 공직 후보자에 대한 인준은 고도로 당파적인 절차가 되었다. 현재 그 절차를 주도하는 것은 우파다. 이 모든 요인들의 복합적 작용으로, 정부의 행위는 비효율적이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역효과를 낸다, 혹은 제멋대로다, 라고 믿는 미국인이 (협력을 원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점점 더 늘어났다."(42)


"레이건의 공화당은 동부의 진보주의적 상류층과 억울함을 느끼는 남부 주민, 민주당을 저버린 중서부 소수민족 육체노동자들, 외곬의 자유시장주의자들, 반공 투사들, 정신 이상에 가까운 음모론자들, 1960년대의 분화적 변화에 밀려난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이 집단을 경시할 수 없는데─여성주의를 어머니이자 주부인 자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여긴 보수적 여성들을 결집했다. 그들이 이룬 집단은 이데올로기적으로나 기질적으로나 통합되기 어려운 연합체였다. 무엇보다도, 미국이 무엇이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공통의 비전이 부재했다. 레이건이 그 비전을 제시하자 공화당은 연합체이기를 그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통합되었으며 선거 승리의 역량을 갖춘 세력이 되었다. 현재 미국 대통령의 특징적인 표현을 빌리면, 이후 공화당은 〈잘 정비된 기계well-tuned machine〉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그러했다."(48-9)


제2장 사이비 정치


"새로운 반정치적 국가관에 직면한 진보주의자들은 정체성 정치의 덤불 속에서 길을 잃었고 그 덤불에 어울리는, 억울함을 토로하며 분열을 조장하는 차이의 수사법을 개발했다." "진보주의자들은 제도권 바깥에서 작동하는 사회운동들에 매혹되었고 민중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발전시켰다." "진보주의자들은 (학생들에게 시민의 책무를 가르치기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도록 훈련하고 학생 자신의 머리 바깥에 펼쳐진 세계에 무관심하도록 방치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진보 및 급진진보 정치 활동가들은 주로 노동계급이나 농업 공동체 출신이었고 지역의 정치 클럽이나 직업 현장에서 육성되었다. 그러나 그 시절은 지나가버렸다. 오늘날 진보 및 급진진보 정치 활동가들은 거의 다 대학교들에서 육성된다." "이는 진보주의의 전망이 우리의 고등교육기관들에서 일어나는 일에 적잖이 의존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63-5)


"어떤 의미에서 시민권 운동은 더 과거에 있었던 종교적 인종적 소수자 집단들의 투쟁과 공통점이 더 많았다. 양쪽 모두에서 관건은 시민으로서의 평등과 존엄을 인정받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여성주의의 1차 물결과 2차 물결, 그리고 초기 동성애자 권리 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전이轉移가 시작되었다. 이제 관심의 초점은 한편으로 우리가 민주 시민으로서 우리 자신을 미국과 동일시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미국 내 다양한 사회집단들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사이의 관계가 더는 아니었다. 시민의 지위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신에 사람들은 개인적 정체성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인종, 성적 취향, 성별 등으로 물든 유일무이한 난쟁이, 내면의 호문쿨루스를 의미하는 개인적 정체성을 말이다. '내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존 F. 케네디의 도발적인 질문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되었다."(70)


"원래 신좌파는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를 약간 맑스주의 식으로 해석하여, 겉보기에 개인적인 모든 것이 실은 정치적이라는 뜻으로, 권력투쟁에서 벗어난 영역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저 구호를 정반대의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우리가 정치 활동이라고 여기는 것이 실은 그저 나를, 내가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표현하는 개인적인 활동일 따름이라는 뜻으로 말이다." "'정체성'은 신좌파를 산산이 분열시켰다. 흑인들은 대다수의 지도자가 백인이라는 점에 불만을 표했고, 여성주의자들은 대다수 지도자가 남성이라는 점을 불평했다. 머지않아 흑인 여성들은 급진주의적 흑인 남성들의 성차별과 백인 여성주의자들의 암묵적 인종차별을 싸잡아 불평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인 여성들 역시 여성동성애자들로부터 이성애 가족의 자연스러움을 전제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 모든 집단들이 정치로부터 바라는 바는 사회정의와 전쟁 종식 그 이상이었다."(79-80)


"건강한 정당 안에서 작동하는 힘들은 구심력이다. 그 힘들은 파벌들과 이해 관심을 모아서 공통의 목표와 전략을 만들어내도록 유도한다. 그 힘들은 공통 이익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혹은 최소한 발언하는 것을 모든 각자의 의무로 만든다. 반면에 운동 정치에서 작동하는 힘들은 모두 원심력이다. 그 힘들은 점점 더 작은 파벌들로의 분열을 유도한다. 단일한 사안에 강박적으로 매달리고 이데올로기적 우월성을 엄숙하게 내세우는 파벌들로의 분열을 말이다." "사안 중심의 운동에서 정체성 중심의 운동으로 관심이 서서히 이동하면서, 미국 진보주의의 초점도 공통성에서 차이로 옮겨갔다. 그리하여 폭넓은 정치적 비전이 밀려나고 그 자리를 사이비정치가, 느끼는 자아와 그 자아의 인정 투쟁에 관한 뚜렷이 미국적인 수사법이 차지했다. 그리고 알고 보니 그 수사법은 생산하는 자아와 그 자아의 이익 투쟁에 관한 레이건의 반정치적 수사법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81-2)


"우리의 상상 속 대학생이 캠퍼스의 정체성 중심 사고방식에 깊이 빠져들수록, 그는 '우리'라는 단어를 더욱 불신하게 될 것이다. 집단들의 차이를 은폐하고 특권층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 보편주의자가 사용하는 계략이라고 선생들이 가르쳐 준 그 단어를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학문적 경향들이, 사실상 우리 사회의 전 분야에서 권장되는 급진적 개인주의에 지적인 멋까지 부여한다는 점이다. 삶의 모든 것을 익명의 권력이 주무른다는 신비주의적 사상을 우리의 상상 속 대학생이 받아들인다면, 그가 민주 정치에서 발을 빼고 그것에 빈정거리는 시선을 던지더라도, 그 행동은 완벽하게 정당화될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페이스북 정체성 모형'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 모형에서 자아란, 내가 '개인 브랜드'와 유사하게 구성하는 홈페이지다. 그 자아는 타인들과 연결되는데, 나는 그 연결들을 나의 재량대로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다."(89-91)


"루스벨트 통치 체제 기간에 집단 정체성은 우리의 정치 시스템이 사회구성원들의 평등한 지위라는 약속을 이행하도록 강제하는 필수 수단으로 인정받았다. 반면에 페이스북 모형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아, 바로 나의 자아다. 공통의 역사나 공통의 이익, 심지어 공통의 생각조차도 그 모형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늘날 좌파 성향의 젊은이들은─우파 성향의 젊은이들과 정반대로─자신의 정치적 참여를 이런저런 정치사상들과 관련지을 가능성이 작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X로서, 다른 X들에 관심이 있고 X성과 연관된 의제들에 관심이 있어서, 정치에 참여한다고 말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그들은 Y들, Z들과 동맹할 전략적 필요성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 공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각자의 정체성은 유동적이며 여러 차원을 지녔고 그 차원들 각각이 인정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동맹은 결코 정략결혼 이상일 수 없다."(93)


"지난 10년 동안 새롭고 매우 의미심장한 어법 하나가 대학교들에서 주류 언론으로 흘러들었다. 그것은 'X로서 말하는데'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발언자가 특권적인 지위에서 이 사안에 관하여 말한다는 점을 듣는 이에게 알린다. 이 표현은 정의상 비X의 관점에서 유래한 질문들을 차단하는 장벽을 세운다. 그리고 의견 대립을 권력 관계로 규정한다. 결과적으로 논쟁에서 도덕적으로 우월한 정체성을 들먹이고 질문이 들어올 때 가장 강하게 분노를 표현하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그리하여 과거라면 '나는 A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근거는 이러이러해'라는 식으로 시작되었을 학급 토론이 지금은 'X로서 말하는데, 네가 B라고 주장하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거야'라는 형태를 띤다. 만약에 정체성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이런 형태의 논쟁 전술은 완벽하게 합리적이다. 정체성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말은 공평한 대화의 장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금기가 논쟁을 대체한다."(94)


제3장 정치


"우리의 공적인 삶이 하루가 다르게 더 추해지고 있는 트럼프 집권 이후 진보주의자들이 트럼프에게 저항하기 위해 매우 신속하게 조직을 꾸리는 광경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저항은 본성적으로 반응이다. 저항은 앞을 내다보기가 아니다. 그리고 반反트럼프주의는 정치가 아니다. 나는 진보주의자들이 트럼프의 모든 행보 각각에 대응하는 데 몰두하느라 사실상 그가 원하는 게임을 하게 되는 불상사를 염려한다. 트럼프가 진보주의자들에게 내준 기회를 그들이 잡지─심지어 알아채지─못하게 되는 불상사를 염려한다. 트럼프가 통상적인 공화당 정신과 그나마 얼마 남지 않았던 원칙 있는 보수주의를 파괴해버린 지금, 경기장은 텅 비어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세월을 통틀어 최초로 우리 진보주의자들 앞에 이렇다 할 이데올로기적 적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트럼프 너머를 바라보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105-6)


# 민주정치를 재학습하기 위한 4가지 교훈

1. 운동 정치보다 제도 정치가 먼저다.

2. 목표 없는 자기표현보다 민주적 설득이 먼저다.

3. 집단 정체성이나 개인 정체성보다 시민의 지위가 먼저다.

4. 개인주의와 원자화를 막는 시민 교육이 긴요하다.


"정체성 진보주의자들은 선거 승리가 정치 활동의 제일 목표라는 교훈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운동 정치의 마법에 걸려 있다." "미국 헌법의 기틀을 잡은 사람들은 정치 활동이 반드시 협의와 타협을 요구하는 제도를 통해 걸러지도록 만들고, 정치 활동이 빈번한 선거, 견제와 균형, 공무원의 자율성, 군대와 법규의 제정 및 공평한 집행에 대한 시민의 통제로 구성된 시스템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더구나 이 모든 일이 세 층위의 정부에서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정치적 성공을 위해서는 조금씩 쌓아가는 지루한 작업이 아주 많이 필요함을 의미했고, 미국 헌법의 입안자들은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낭만주의자들은 이같이 극적이지 않은 정치관을 꺼린다. 그들은 정치를 제로섬 대립─민중과 권력의 대립, 또는 문명과 폭도의 대립─으로 간주하는 쪽을 더 선호한다. 그쪽이 훨씬 더 가슴 설레는 일이기 때문이다."(109-11)


"그러나 운동 정치의 그 어떤 성취도 제도 정치를 통해 무효화될 수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철칙이다. 반대로 제도 정치의 성취가 운동 정치를 통해 무효화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철칙이 아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을 개혁한 운동들은 많은 것을 해냈고 특히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변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어쩌면 이것이 무릇 운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일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운동은 이루고자 하는 구체적인 정치적 목적을 혼자 이뤄낼 능력이 없다. 운동은, 운동의 목표에 공감하지만 기꺼이 느리고 끈기 있게 선거운동을 벌이고 법안을 만들고 협상을 통해 법안을 통과시키고 관료들을 감독하면서 법이 집행되는지 감시하는 시스템 정치가들과 공직자들을 필요로 한다. 마틴 루터 킹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운동 지도자였다. 그러나 힐러리 클린턴이 옳게 지적한 대로, 파벌 정치가 린든 존슨의 노력이 없었다면 킹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갔을 것이다."(113-4)


"입법 절차에 대한 불신과 당의 목표 성취를 위해 법원에 의존하는 경향이 심화되면서 민주당 엘리트들은 폭넓은 민중에서 분리되었다." "의제를 법원으로 가져간다면, 당신은 당신의 주장이 절대적인 법에 따라 옳다고 주장하기만 하면 되고 당신의 사건을 배당받은 판사들만 설득하면 된다." "이 전술은 모든 의제를 협상의 여지가 없는 불가침의 정의에 관한 문제로 간주하는 습관을 진보주의자들에게 심어주었다. 또한 이 전술은 불가피하게 반대자들을 다른 견해를 지닌 동료 시민들이 아니라 부도덕한 괴물들로 낙인찍어서 내친다. 더 나아가 이 전술은, 사람들이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하고 그들을 설득하려 애쓰고, 사회적 합의를 형성해가는 끈기 있는 작업으로부터 진보주의자들을 해방시켰다." "이 접근법은 공화당 정치인들이 자신들이야말로 민중의 진정한 대변자이며 민주당 정치인들은 고위성직자 계급이라고 주장할 여지를 대폭 열어주었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대중의 정신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117-8)


"민주 정치의 관건은 설득이지, 자기표현이 아니다. '내가 여기 있다. 나는 퀴어queer다'라는 말로는 머리 쓰다듬기나 곁눈질 이상의 반응을 결코 유발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과 사람들이 모든 사안에 대해서 동의하는 일은 영원히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여라. 민주주의에서는 다른 견해가 항상 존재하리라고 예상해야 한다. 정체성과 연결된 사회운동에 열중할 때 발생하는 결과 하나는 당신이 유사한 생각과 유사한 얼굴과 유사한 학력을 가진 사람들로 둘러싸이는 것이다. 당신이 설득하려는 사람들을 순수성 검사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 만사가 원칙의 문제인 것은 아니며, 원칙의 문제가 불거졌을 때에도, 대개의 경우 이 원칙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이 원칙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원칙들을 어쩌면 희생시켜야 함을 상기하라. 도덕적 가치들은 결국 완벽하게 맞아 들어가서 전체를 이루도록 제작된 퍼즐의 조각들이 아니다."(121-2)


"선입견과 무관심은 뿌리가 깊다. 대다수 사람들은, 나나 나와 가까운 누군가가 당할 수도 있는 고통이라고 (비록 추상적으로라도) 느끼지 않는 한, 타인들의 고통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가령, 동성애자 권익 보호 운동은 대중이 이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했지만, 태도의 변화는 미국 전역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자식들이 부모에게 (때로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는 동안에 이루어졌다." "반면에 인종은 전혀 다른 문제다. 미국 사회의 인종 분리를 감안할 때, 백인 가족들은 흑인 미국인들이 삶을 볼 기회가 거의 없고, 따라서 이해할 기회도 거의 없다. 나는 흑인 남성 운전자가 아니며 앞으로도 영원히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흑인 남성 운전자의 경험에 공분하려면 나 자신과 그를 동일시할 모종의 길이 더욱더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유일하게 공유한 것은 시민의 지위다. 우리 사이의 차이가 강조되면 강조될수록, 그가 당한 학대에 내가 격분할 가능성은 더 낮아진다."(132-3)


"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자치self-government의 원리에 입각한 교육을 통해 민주적 시민들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 원리가 행동을 유발하려면, 우리가 타고나지 않은 감정 속에 그 원리가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리고 감정은 가르칠 수 없다. 감정은 우러나도록 유도해야 한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정치 분야가 존재하는 모든 일을 통틀어 가장 기적에 가깝다. 시민적 감정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엔트로피의 지배를 받는다. 시민들 사이의 연대가 열악하거나 약화되면 자연스럽게 정치-아래의subpolitical 애착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 "민주주의자들이 없는 민주주의는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그런 민주주의는 타락하여 과두정치, 신권정치, 인종적 민주주의, 부족주의, 권위적 일당독재, 혹은 이것들이 조합된 체제로 된다."(136-7)


"또 한 세대의 시민을 이전 세대와 유사하게 시민으로 키우는 것은 그리 끔찍한 일이 아닐 것이다. 약간의 수정을 거친다면, 옛 모형은 본받을 가치가 있다. 열정과 헌신뿐 아니라, 지식과 논쟁도 그러하다. 당신의 머리 바깥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 당신과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 미국과 미국의 모든 시민들을 위하는 마음, 그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각오를 본받을 가치가 있다. 우리 모두를 위한 공통의 미래를 상상하는 야심도 그러하다. 이것들을 가르치는 부모나 교육자는 정치 활동─구체적으로 시민을 육성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오직 시민이 있을 때만, 우리는 그들이 진보적 시민으로 되는 것을 바랄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진보적 시민이 있을 때만, 우리는 미국을 더 나은 궤도에 진입시키는 것을 바랄 수 있다. 당신이 도널드 트럼프와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고자 한다면, 이것이 당신의 출발점이어야 한다."(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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