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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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히틀러는 정확히 56년(1889-1945)을 살았다. 생애 전반 30년과 그 뒤 26년 사이에는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는 심연이 놓인 것처럼 보인다. 30년 동안 무엇 하나 변변치 않은 실패자였다. 그런 다음 갑작스럽게 지방의 유명 정치가가 되는가 싶더니 마지막에는 전 세계의 정치를 뒤흔드는 인물이 되었다." "히틀러의 생애를 가르는 단면은 횡단면이 아니라 길게 가르는 종단면이다. 1919년까지는 허약함과 실패, 그리고 1920년 이후로는 힘과 업적이라는 식으로 갈라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다. 그보다는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정치적 삶과 체험에서의 비상한 집중도와, 개인적 삶에서의 정도 이상의 빈약함으로 나누어야 한다. 전쟁 전에 불확실한 보헤미안 생활을 할 때도 그는 마치 가장 중요한 정치가인 양 정치적 시대사건Zeitgeschehen 속에서 살고 움직였다. 그리고 뒷날 총통으로 있을 때도 사생활 면에서는 출세한 보헤미안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삶의 결정적 특징은 단조로움과 1차원성이다."(28-9)


"히틀러에게는 성격이나 개성에서 발전도 성숙도 없다. 그의 성격은 일찌감치 확정되었다. 아니 압류되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놀랍게도 언제나 똑같은 자리에 머물렀다. 그 무엇도 덧붙여지는 것이 없다.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성격이 아닌 것이다.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화해하는 요소는 모두 결여되었다. 자주 수줍음처럼 작용하는, 접촉을 꺼리는 기질을 온건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렇다. 긍정적인 특성들─의지력, 용기, 부지런함, 강인함 등─은 모두 '경직된' 면에 속한다. 부정적 특성들은 가차없음, 복수욕, 신의信義 없음, 잔인성 등이다. 게다가 아주 처음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자기비판 능력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히틀러는 평생 동안 그야말로 자기 자신에만 푹 빠져 지냈으며, 아주 어린 시절부터 생애 마지막 날까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히틀러 숭배에서 히틀러는 숭배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최초이자 가장 오래도록 충실한 신도였다."(34-5)


# 히틀러의 정치적 전기

1. 일찌감치 삶을 대체하여 정치에 집중

2. 최초의 (아직은 사적인) 정치 활동.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로 이민(1913년)

3.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1918년 11월 혁명 이후)

4. 대중연설가로서 자신의 집단최면 능력을 발견함(1920년 2월 24일 첫 대중연설)

5. (모두가 기다리는 기적을 행할 자인) 총통이 되기로 결심

6. 개인적 기대수명에 맞추어 정치 시간표를 짜기로 결심(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자신의 삶의 시간과 동기화)

7. 자살 결심(정치적 삶이란 전부 아니면 무無의 문제)


성과


"정권 획득 이전에 히틀러는 오로지 선동가라는 명성만을 얻었었다. 대중 연설가로서, 그리고 대중 최면술사로서의 성과들은 논란의 여지가 없었고, 1930~1932년에 절정에 이른 위기의 기간에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진지한 권력 후보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권좌에 올라서도 자신을 지켜내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통치는 연설과는 다르다고들 했다. 또한 히틀러가 연설에서 통치자들에게 과격한 비난을 퍼부으며 모든 권한을 자신과 자신의 당을 위해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모순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온갖 종류의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맞장구를 쳐대면서, 당시 가장 중요한 근심거리인 경제 위기와 실업 문제에 대해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는지 구체적인 계획을 전혀 내놓지 않았다는 것도 눈에 띄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그 사람이 1933년 권력을 장악한 이후, 매우 활력이 넘치고 발상이 풍부하고 능률적인 활동가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심리적 반작용이 더욱 컸다."(61-2)


"1933년 이전에도 히틀러의 관찰자와 비평가들이 조금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면 연설 재능 말고도 한 가지가 더 눈에 띄었을 것이다. 즉 그의 조직 능력인데, 더 엄밀히 말하자면 대단한 업적과 성과를 낳을 수 있는 권력 기구를 만들고 지배하는 능력이었다. 20년대 말의 민족사회주의당은 오로지 히틀러의 작품이었고, 30년대 초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기도 전에 이미 조직력이라는 면에서는 다른 모든 정당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20년대 히틀러의 두 번째 작품은 내전용 군대인 돌격대SA로서, 당시의 다른 모든 정치적 전투 기구들은─민족주의 기구인 철모단, 사회민주당 기구인 제국기, 심지어는 공산당 기구인 붉은전사단까지도─여기 비하면 절뚝거리는 속물 단체처럼 보일 정도였다. 돌격대는 전투 열의와 돌격 능력에서 다른 모든 단체를 훨씬 앞섰으며, 잔인성과 살인 의욕에서도 당연히 앞섰다. 오로지 돌격대만이 진짜로 두려운 대상이었다."(62-3)


"30년대 중반의 경제기적이 정말로 히틀러가 이룬 업적인가? 이런저런 반박을 예상할 수 있으나 그래도 이 질문에는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히틀러가 경제나 경제정책 면에서 완전 문외한이라는 말은 맞다. 경제기적에 발동을 건 몇 가지 발상들은 대부분 그의 생각이 아니었고, 당시 모든 것을 좌우한, 대단히 위험한 재정적인 묘기는 분명히 다른 사람, 곧 그의 '재정 마법사'인 히얄마르 샤흐트의 공로였다. 하지만 샤흐트를 데려다가 먼저 제국은행의 수장으로, 이어서 경제장관으로 일하게 한 사람이 히틀러였다. 그리고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전임자들이 주로 재정적 측면의 온갖 고려 끝에 막은 경제 활성화 정책들을 서랍에서 꺼내 작동시킨 사람도 히틀러였다. 세액공제부터 금속 가공 연구소 어음, 근로봉사부터 고속도로에 이르기까지 여러 정책들이 나왔다." "그는 경제가 지금 이 순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챌 만큼 정치적 본능을 지녔다."(66-7)


"경제기적이 가장 인기 있는 히틀러의 업적이었지만, 통치기의 첫 6년 동안 독일의 재무장과 군비확장을 이룬 것도 똑같이 센세이셔널하고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히틀러가 총리가 되었을 때는 현대적인 무기도 공군도 없이 그저 10만 명의 군대뿐이었다. 1938년에는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군대와 공군력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믿기 힘든 업적이다! 군사기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상감과 민족주의적 자부심을 일깨웠다. 이 또한 바이마르 시대에 어느 정도의 사전 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고, 게다가 개별적으로는 히틀러의 세부 작업이 아니라 군 지도부가 이룩한 엄청난 성과였다. 하지만 히틀러가 명령을 내리고 영감을 주었다. 군사기적은 히틀러의 결정적인 자극이 없었다면 경제기적보다도 더욱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은 경제기적보다 그가 훨씬 더 오래 마음에 품었던 계획과 의도에서 나온 일이기도 했다."(68-9)


"히틀러는 라우슈닝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어째서 우리는 은행과 공장의 사회화 따위가 필요한가. 만일 사람들을 확고하게 하나의 규율 안에 집어넣고 거기서 나올 수 없게 한다면, [은행과 공장의] 사회화라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인가. ······ 우리는 사람을 사회화한다.〉 이것은 히틀러 민족사회주의[나치즘]의 사회주의적 측면이다." "인간이 노동에서 소외되는 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서 소외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목적이 인간의 소외를 없애는 것이라면 인간의 사회화가 생산수단의 사회화보다 이런 목적을 훨씬 더 크게 달성한다.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부당함을 제거하는 정도이다. 그것도 지난 30년 또는 60년의 세월 동안 입증된 바로는 효율성을 대가로 지불하고 얻는 이점이다. 하지만 인간의 사회화는 실제로 소외를, 그러니까 대도시에서의 소외를 제거하는데, 이 경우 개인의 자유를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 자유와 소외란 동전의 양면이고 공동체와 기율도 마찬가지다."(79-81)


성공


"히틀러의 모든 성공은 1930년부터 1941년 사이 12년 동안에 일어났다. 그 이전, 이미 10년이나 계속된 정치 경력에 성공이란 없었다. 1923년의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고, 1925년에 새로 정비한 정당은 1929년까지 중요하지 않은 소수 정당이었다. 1941년 이후로도, 실은 1941년 가을부터는 성공이란 전혀 없었다. 군사적 시도는 모두 실패하고 패배를 거듭했으며, 동맹국들은 떨어져나가는데 적진인 연합군은 연합을 유지했다." "원한다면 찾아볼 수는 있지만, 역사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상승과 하강, 그렇다. 성공과 실패가 번갈아 나타난다. 순수한 실패, 순수한 성공, 그런 다음 다시 순수한 실패라는 세 단계를 이렇게 분명히 나눌 수 있는 경우는 없다. 동일한 사람이 오랫동안 겉보기에 희망이 없는 무능력자, 그런 다음엔 거의 그만큼의 기간동안 겉보기에 천재적인 능력자, 이어서 다시 이번에는 겉보기가 아니라 진짜로 희망이 없는 무능력자. 이것은 설명을 요하는 일이다."(95-7)


"그가 편안해져서 채찍을 느슨하게 하거나 떨어뜨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의 에너지와 의지력은 공적인 활동의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똑같이 놀라운 것이었고, 그의 지배력은 총리관저의 벙커에서도 절대적인 것이었다. 마지막 순간 그의 통치 영역은 오로지 이 총리관저에만 한정되었지만 그 순간에도 여전히 절대적이었다." "성공에 익숙해진 사람이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운명에 도전하려는 오만함을 드러냈다는 주장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히틀러의 몰락을 불러오는, 러시아를 공격하기로 한 결정은 성공에서 자양분을 얻은 오만함에서 갑자기 떠오른 발상이 아니었다. 이 공격 계획은 아주 오래 전부터 거듭 숙고하여 결정된 히틀러의 주요 목적이었다." "히틀러가 과대망상에 빠져 있었다면 원래 처음부터 그랬다." "1923년의 쿠데타 실패가 그가 수업을 한 유일한 사건이었다. 다른 경우에서는 거의 섬뜩할 만큼 늘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정책은 1925년부터 1945년까지 완전히 동일하였다."(97-9)


"이로써 우리는 뜻밖에도 히틀러의 성공 곡선의 비밀을 풀 열쇠를 손에 쥐게 된다. 이 열쇠는 히틀러 자신의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히틀러가 상대한 적들이 변한 것과 적들 자체가 바뀌었다는 점에 있다." "성공의 경우는 언제나 양측이 있게 마련이고, 한쪽의 성공은 다른 쪽의 실패가 된다." "히틀러는 단 한 번도 더 강하거나 질긴 적을 상대로 성공을 쟁취한 적이 없었다. 20년대 말의 바이마르 공화국과 1940년의 영국만 해도 그에게는 너무 강한 적이었다. 우선 그는 약한 자가 강자를 상대할 때 이용하는 교묘하고 풍부한 발상이나 기민함을 갖지 못했다. 1942~1945년의 연합군에 맞선 전쟁에서 연합군의 내부 갈드을 이용하여 그들을 갈라놓겠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반대로 히틀러는 여러 가지로 부자연스러운 동서 연합군이 서로 단합하는 데 누구보다도 기여한 바가 많았고, 무모한 고집으로 모든 접합점이 터지려는 연합군이 서로 달라붙어 있도록 가능한 온갖 일을 다 했다."(100)


"그에 반해 성공은 모두 정말로 아무런 저항 능력이 없거나 의지가 없는 적들에 맞서서만 거둔 것이었다. 국내정치에서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이미 속이 다 비어서 실질적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죽음의 일격을 가했다. 국제적으로는 1919년의 유럽 평화조약이 이미 안에서부터 흔들려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때 끝장을 냈다. 두 경우 모두 이미 쓰러지고 있는 것을 쓰러뜨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30년대에 히틀러는 철저히 허약한 적들을 상대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후예 자리를 놓고 히틀러와 맞서던 독일의 보수주의자들은 전략도 없고, 히틀러에 맞서 저항할까 연합할까를 두고 속으로 흔들리면서 자기들끼리 싸우던 사람들이었다. 마찬가지로 30년대 후반의 영국과 프랑스 정치가들이 저항과 동맹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을 때 히틀러는 외교적 성공을 쟁취했다. 1930년의 독일, 1935년의 유럽, 그리고 1940년의 프랑스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히틀러의 성공은 기적이라는 후광을 잃게 된다."(101)


"외교 분야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1919년 파리에서 전쟁 이전 유럽의 4강 체제가 무너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은 전쟁으로 인해 붕괴되고, 러시아는 유럽과의 협력에서 배제되었다. 그로써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승전국 연합에서도 배제되었다. 동시에 1917년 러시아를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던 미국은 승전국 연합에서 물러나면서 옛날 동맹국들의 평화협정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따라서 평화협정은 처음부터 실질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담당했다. 마치 바이마르 공화국이 바이마르 연합을 이룬 세 개 정당만으로 유지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두 경우 모두 기반이 너무 약해서 전체를 다 감당할 수가 없었다. 본질이 그대로 유지된 독일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힘만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명기된 제약들에 붙잡아두기에는 너무 강했다." "더욱이 조약의 모욕적인 취급 방식은 독일을 수정주의와 보복주의의 길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미친 듯이 이 길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다."(118)


오류-잘못된 생각들


"히틀러의 역사적·정치적 세계상, 곧 '히틀러주의'를 짤막하게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역사적 사건을 담당하는 존재는 오로지 민족 또는 종족(인종)이다. 계급도, 종교도,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의 국가도 아니다. 역사는 〈한 민족의 생존을 위한 싸움의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또는 선택하기에 따라서는 〈모든 세계사적 사건은 종족의 자기보존 충동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는 〈원칙적으로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그 목적은 인간의 종족적 생존의 유지라고 볼 수 있다.〉 또는 약간 덜 방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국가의 목적은 육체적·영적으로 동일한 생명체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유지하고 촉진하는 것이다.〉 〈국내정치는 한 민족이 외교적 주장을 하기 위해 내적인 힘을 확보하는 일이다.〉 여기서 외교적 주장이란 싸움이다. 〈살려고 하는 자는 싸워라. 그리고 영원한 투쟁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서 싸우지 않는 자는 삶을 얻지 못한다.〉"(136)


"간단히 말해 정치는 전쟁이자 전쟁 준비이며, 이 전쟁에서는 첫째로 생존공간이 핵심 문제이다. 생존공간의 문제는 아주 보편적인 것으로 모든 민족, 심지어는 모든 생명체에 타당한 것이다. 〈생명체의 자기 보존 충동과 지속적 보존의 욕구는 무한한데, 그에 비해 이 전체 생명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유한하다. 생존공간의 이런 한게가 바로 생존전쟁을 강요한다.〉" "둘째로 전쟁에서는 지배와 종속이 문제가 된다. 〈자연의 귀족주의적 기본 원칙이 원하는 것은 강자의 승리와 약자의 박멸 또는 약자의 무조건 굴복〉이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서로 경쟁하여 더 나은 품종으로 발전해야 하는 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침없는 게임〉이다. 셋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민족들의 지속적인 전쟁에서는 세계지배가 핵심 문제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먼 미래에, 지구 전체의 수단과 가능성을 바탕으로 최고 인종이 지배 민족이 되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인류에게 다가올 것임을 짐작하기〉 때문이다."(137-8)


"이것은 히틀러의 세계상의 절반에 불과하다. 다른 절반은 바로 반유대주의다." "민족이론에서는 역사 전체가 생존공간을 놓고 벌이는 민족들의 지속적인 싸움이었다. 반유대주의 이론에서 우리는 갑자기 그것이 역사 전체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히틀러에 따르면 민족들의 싸움과 나란히 역사에서 또 다른 지속적인 내용이 있는데, 곧 인종 싸움으로서, 그것은 백인, 흑인, 황인종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이 아니라 백인종 내에서 벌어지는 싸움, 곧 '아리안'과 유대인 사이의 싸움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유대인과 다른 모든 종족들 사이의 싸움으로서, 그들은 보통 때는 끊임없이 서로 싸우다가도 유대인에 맞서서는 모조리 한편이 되는 것이다. 이 싸움은 말 그대로 목숨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으로, 멸종을 지향하는 싸움이다." "실제로 히틀러는 자신의 특성을 유대인 멸종자라 규정하고 특별히 독일 정치가가 아닌 전 인류의 선두에 서서 싸우는 자라고 주장했다."(140-2)


"히틀러의 정치체계에서 국가가 아주 하위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우리는 전혀 다른 맥락인 히틀러의 성과 부분에서 그가 정치가[국가의 사람]가 아니었다는 놀라운 사실에 부딪혔다. 그는 심지어 전쟁이 시작되기 오래전에 독일이라는 국가의 특성으로 보이는 것을 모조리 파괴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고, '국가 속의 국가들'이라는 혼돈으로 대체해버렸다. 이제 우리는 히틀러의 사고체계에서 이런 잘못된 행동의 이론적 근거를 보고 있다. 히틀러는 국가에 관심이 없었고, 국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국가를 하찮게 여겼다. 오직 민족과 종족만이 중요할 뿐 국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국가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으로, 한마디로 전쟁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히틀러에게도 1933~1939년의 기간 동안 전쟁 준비가 없을 수 없었지만, 그가 만들어낸 것은 전쟁 기계일 뿐 국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반드시 뒤탈이 있는 법이다."(147-8)


실수-잘못된 행동들


"유대인들은 해방된 이후로 모든 서방 국가에서 훌륭한 애국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유대인의 애국주의가 독일에서처럼 빛나고도 매우 감정적인 경우는 없었다. 유대인이 히틀러 이전까지는 독일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1933년에 이 모든 것이 끝났다. 히틀러는 독일에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순종적 사랑을 증오로 바꾸어놓았고, 또한 유대인 친구들에게 신의를 지킨 독일인들─분명 대다수는 아니지만 또한 가장 형편없는 계층도 아닌─까지 적으로 만들었다. 독일 안에서 히틀러 파동에 대해 수동적인 저항이나마 꾸준히 지속하게 만든 힘은 그의 반유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히틀러가 반유대주의로 자신의 권력욕에 처음부터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핸디캡─대외적 평판 하락이나 대규모 인재 유출 같은 현상들로 대표되는─을 불러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의 첫 번째 잘못이었다. 아직도 여전히 과소평가 되고 있는 잘못이다."(171-3)


"물론 여기에 다른 잘못들이 덧붙여진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처음부터 독일에 불러들인 폐해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두 번이나 자신의 목적에 매우 가까이 다가갔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1938년 가을에 영국과 프랑스의 완전한 동의를 받아 동유럽에서 독일의 패권이 인정되었을 때와, 1940년 여름에 프랑스에 대해 승리하고 또 다른 많은 나라들을 점령함으로써 러시아 이편의 유럽 대륙 거의 전체가 그의 발치에 놓였을 때였다." "〈나는 유럽의 마지막 기회였다〉고 히틀러는 1945년 2월 보어만 구술에서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다. 다만 그는 이렇게 덧붙여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기회를 망쳤다.〉 그 기회를 망친 것이 그의 두 번째 잘못이었다." "1938년 가을과 1940년 여름에 히틀러는 두 번이나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못 보았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집어던졌다. 이는 1941년에 러시아를 공격하고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뒷날의 잘못보다도 오히려 더욱 무거운 잘못이다."(173-7)


# 두 번의 잘못

1. 뮌헨 협정 위반(1938) : 체코슬로바키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후 분할하는 조치는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와 동맹을 맺도록 부추겼다.

2. 프랑스와의 동맹 무시(1940) :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맺어 유럽의 패권 국가로 우뚝 설 수 있는 정치적 기회를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기회를 손수 만들어내고 다시 없애버렸다." "그는 바로 이런 역사적 순간에 스스로 입증했듯이, 극히 드물게도 정치적 재능과 군사적 재능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그에게 완전히 결여된 것은 정치가의 건설적인 상상력, 곧 지속적인 것을 건설하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화조약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전에 국내에서 헌법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과 비슷하다.(평화조약은, 국가들의 공동체에서 헌법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확정 짓기를 꺼리는 것과 초조함이 그 걸림돌이었다. 이 두 가지는 그의 자기 경탄과 맥을 같이했다. 그는 스스로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자신의 '직관'을 맹목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그 직관을 속박할 어떤 제도도 만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자신을 대체할 수 없다고 여기고, 살아서 자신의 강령을 무조건 실현하려고 했기 때문에 자라는 데 시간이 필요한 그 무엇도 심지 못하고, 그 무엇도 후계자들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후계자를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185)


"설명할 길이 없는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의 동기를 찾으려면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히틀러 자신이 그 동기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5년에 히틀러는 정말로 독일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을 폭파하여 민족에게 살아남을 가능성을 남기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니까 이런 파괴를 통해 이 민족이 세계정복의 능력이 없음을 입증한 데 대한 벌을 내리려는 것이었다. (1941년, 러시아 전선에서 벌어진) 최초의 패배에서 벌써 이런 배신의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그런 생각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히틀러의 성격과 어울린다. 가장 극단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그의 성향, 그것도 '얼음처럼 차갑게' 그리고 '번개처럼 재빨리' 말이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히틀러는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로써 모스크바 앞의 전투를 통해 예고된 패배를 완전히 결정지었다. 그리고 1942년부터는 패배를 막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히틀러는 승리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195-7)


"히틀러가 이 기간에 점점 더 안으로 움츠러든 것도 특이한 일이다. 그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대중과의 접촉이 없고, 전선 방문도, 공습을 받는 도시를 둘러보는 일도, 공개연설도 거의 없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군 사령부에서만 살았다." "이 시기 그의 전략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단을 희생시킨 기묘한 결정처럼) 융통성이 없고, 기발한 발상도 없으며, 구호라면 오로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싸우고 있었고, 아직도 시간이 필요했다. 왜? 히틀러는 언제나 두 가지 목적을 가졌다. 독일이 유럽을 지배하는 것과 유대인을 멸종시키는 것. 첫째 목적은 실패했다. 이제 그는 두 번째 목적에 집중했다. 독일 군대가 그 길고도 희생적인, 아무 소용도 없이 질질 끄는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날마다 인간화물을 실은 기차들이 수용소로 달려갔다. 1942년 1월에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 명령이 나왔다."(197-8)


범죄


"히틀러는 통치자나 정복자로서만 잔인했던 것이 아니다. 히틀러에게서 특이한 점은 국가이성이 조금도 그럴 이유나 핑계를 주지 않는데도 상상할 수 없이 대규모로 사람을 죽였다는 점이다. 그렇다. (정치적 계산 능력보다 살인의 욕구가 더욱 강했던) 그의 대량학살은 정치적·군사적 이익에 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히틀러의 대량학살은 전쟁 때 행해졌지만, 절대로 전쟁 행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지만 언제나 개인적인 욕구이던 대량학살을 위한 핑계로 전쟁을 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나의 투쟁』에 이렇게 썼다. 〈전방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쓰러진다면 후방에서는 적어도 해충을 박멸할 수 있다.〉 히틀러에게 해충인 사람들의 박멸은, 전쟁을 통해 후방의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만 전쟁과 연관성이 있었다. 그 밖에 이런 박멸은 히틀러에게 자체 목적이지, 승리를 위한 또는 패배를 막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202-3)


"1942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에 전 세계에는 히틀러의 대량학살이 단순히 '전쟁범죄'가 아니라 순수한 범죄이고, 그것도 그때까지 들어보지 못한 규모로 이루어지는 범죄로서, 보통은 전쟁범죄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문명의 파국이라는 의식이 살아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의식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통해서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재판에서는 히틀러의 원래 범죄, 곧 폴란드와 러시아 사람들, 유대인들, 집시와 병자들에 대한 대량학살이 기소에서 부수적인 사항이 되었다. 대량학살은 강제노동 및 추방과 더불어 '인류에 대한 범죄'로 분류되었고, '평화에 대한 범죄', 곧 전쟁 자체와 '전쟁범죄'가 핵심적인 기소 내용이 되었다. 전쟁범죄란 '전쟁법과 전쟁관습의 위반'으로 정의되었다. 하지만 이런 위반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양측 모두에서 이루어졌고, 전쟁 자체란 승전국도 행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전쟁에서 졌다는 이유로 피고가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이라고 누구든 쉽게 말할 수 있었다."(204-5)


"어쩌면 누군가는 뉘른베르크에서 모든 전쟁이 아니라 오직 침략전쟁과 정복전쟁만을 범죄라고 낙인찍은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할지 모르겠다. 히틀러는 정복전쟁을 했고, 적어도 동쪽에서만은 아무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2차 대전에서는 '전쟁 책임'의 논란이 없다. 히틀러가 독일을 지배하는 대제국의 건설을 가까운 목적으로, 세계지배를 원대한 목적으로 삼아 이 전쟁을 계획하고 원하고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무조건 범죄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설사 인류는 오늘날의 기술전쟁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전쟁을 없애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워도 마찬가지다. 주권국가들의 세계에서 전쟁을 피할 길이 없다면, 이런 기술시대의 전쟁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되었다 해도,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은 인류의 현재 상황논리에 들어 있는 것이다." "결국 뉘른베르크의 시도처럼 전쟁을 범죄로 규정하는 일은 그것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 뿐이다."(208)


"히틀러의 특별한 범죄는 (전쟁의 불가피성을 전제하는) '전쟁법과 관습의 위반'이 아니며, 그러니까 뉘른베르크 제판에 이름을 준 '전쟁범죄'가 아니다[뉘른베르크 전범재판]." "2차 세계대전 후에 이런 지혜를 잊은 것은 승전국의 잘못이었다. 무엇보다도 히틀러의 범죄를 모든 전쟁에서 일어나는 전쟁범죄와 한통속으로 몰아붙이면서 그 범죄의 특별한 성격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히틀러의 대량학살은 전쟁범죄가 아니라는 점이 특징이다. 전투의 절박함과 열기 속에서 전쟁포로 죽이기,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인질을 총살하기, '전략적' 공중전에서 순수한 거주 지역에 대한 공습, 잠수함 전투에서 여객선과 중립적인 배들을 침몰시키기, 이 모든 것은 전쟁범죄이며, 분명 매우 끔찍한 것이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일반적 합의에 의해 양측에서 그냥 잊는 게 더 낫다. 하지만 대량학살, 전체 주민계층을 계획적으로 멸종시키려는 것, '해충박멸' 등을 사람에게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210-1)


"1942년 11월에 이중 의미로 많은 것을 드러내주는 유명한 히틀러의 발언이 나왔다. 〈나는 기본적으로 언제나 12시 5분에야 멈춘다〉는 말이다. 독일을 둘러싼 포위망이 점점 좁혀지던 이 시기에도 그가 사령부의 테이블 담화에서 아직도 여전히 쉽게 깨지지 않는 자기만족과 심지어 이따금 꽤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한 것은, 연합군이 매일 가까워지는 만큼 이제 남은 마지막 목적 실현에 다가가고 있음을 의식한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3년 동안 날마다 전 유럽에서 유대인 가족들은 자기들의 집이나 숨은 장소에서 끌려나와 동쪽으로 이송되어 벌거벗은 채로 죽음공장으로 밀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 소각장 굴뚝은 날마다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 마지막 3년 동안 히틀러는 지난 11년처럼 성공을 즐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포기하기는 쉬웠다. 그 대신에 전보다 더 많이 살인자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배려마저 버린 채 희생자를 손에 쥐고 멋대로 행동하는 살인자였다."(228-9)


배신


"1944년 8월 22일에 히틀러는 루덴도르프가 1918년 9월 29일에 행한 것과는 정확히 반대로 행동했다. 그는 '뇌우 작전'을 펼쳐서, 갑작스럽게 옛날 바이마르 공화국의 장관·시장·의원·당직자·정책담당 공무원 등을 체포하도록 했다. 그들 중에는 뒷날 연방공화국의 출범 시기에 주인공이 되는 콘라트 아데나우어와 쿠르트 슈마허 등도 끼어 있었다. 이들은 루덴도르프가 비슷한 상황에서 정부를 넘겨주고 전쟁의 청산을 맡긴 인물들로서, 이른바 독일의 정치적 예비군이었다. 루덴도르프는 피할 수 없는 패전에 직면하자 그들에게 지배권을 넘겼다. 히틀러는 비슷한 상황에서 그들을 배제했다." "이 조치는 히틀러 생각에 너무 일찍 이루어졌던 1918년의 전쟁 중단이 이번에도 되풀이되는 것을 반드시 막으려는 첫 번째 조치였다. 그 어떤 기회도 남김없이 쓰라린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기로, 그의 말대로 하자면 〈12시 5분까지〉 계속 싸우기로 결심한 상태였던 것이다."(238-9)


"1918년 11월이 다시 눈앞에 있었다. 히틀러는 이번에는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였다. 여기서 1918년의 시점에 아주 강렬했다가, 지금 다시 피어난 증오, 독일 '11월의 범죄자들'에 대한 증오, 곧 독일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보지 못한 채 넘어가서는 안 된다.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1918년 이후에 나온 어느 영국인 기자의 진술에 충심으로 동감한다며 인용하였다. 〈독일인 세 명 중 한 명이 배신자다.〉 이제 그는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분명하고도 정확한 생각을 표현하는 모든 독일인, 그리고 이 전쟁이 끝난 다음까지 살아남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내는 모든 독일인을 가차 없이 죽이려고 했다. 히틀러는 언제나 커다란 증오를 품고 있었고,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서 많은 기쁨을 느꼈다. 여러 해 동안 유대인, 폴란드인, 러시아인을 향해 분출하던 히틀러의 증오의 힘, 히틀러의 내면에 있는 살인충동은 이제 공개적으로 독일인을 향했다."(240-1)


"아르덴 공격은 2차 대전의 다른 어떤 기획보다도 더 많이 히틀러 자신의 작품이었는데, 군사적으로 보면 정신 나간 기획이었다. 공격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시 전쟁 기술의 조건으로 보아 적어도 3 대 1 정도로 전력이 우세해야 했다. 하지만 1944년 12월에 서부전선에서 힘의 상황은, 완전히 우세한 연합군의 공군력을 빼고 보아도 1 대 1에 못 미쳤다 약자가 강자를 공격한 것이다. 게다가 공격 지점에서 잠깐만이라도 우세하기 위해서 히틀러는 골격만 남기고 동부의 방어전선에서 병력을 몽땅 동원해야만 했는데, 당시 참모총장 구데리안이 러시아군이 강력한 공격을 해 올 것이라는 절망적인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 히틀러는 이중으로 큰 모험을 한 것이다. 서부전선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 나중에 제국 서부 지역의 방어를 위해 꼭 필요한 병력을 소진하는 것이고, 동시에 러시아군이 공격해 올 경우 동부전선은 방어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실제로 일어났다."(242-3)


"여기서 히틀러의 핵심 동기가 전혀 외교적인 것─서부전선에서 뜻밖의 극단적인 결전을 벌여 서방세력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어 타협을 강요한다. 그렇지 않다면 동부 전선에서 패배하게 될 것이고, 서방세력은 자기들의 몫이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이 아니라 국내 문제이고, 실제로 자기 나라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다고 추정하면 그의 사고방식은 훨씬 덜 복잡한 것이 된다. 국민의 다수와 히틀러 사이에는 1944년 가을에 이미 틈이 벌어져 있었다. 대다수 국민은 히틀러가 바라는 전망 없는 결전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1918년 가을과 같은 결말이 나기를 원했고, 이제 그만 끝나기를, 가능하면 온건한 결말, 그러니까 서부전선에서 끝나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러시아군을 밖에 묶어두고 서방세력을 들어오게 하는 것, 그것이 1944년 말에 대부분의 독일 국민이 속으로 바라던 결말이었다. 히틀러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었지만, 아르덴 공격으로 그것을 망쳐놓을 수가 있었다."(245)


"정말로 적군보다 더욱 잔인하게 파괴를 실행하는 것이 히틀러의 의도였다. 적군은, 적어도 서방의 적군은 〈도이치 민족이 가장 원시적인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반을······ 파괴〉하려는 목적을 갖지는 않았다. 그 결과 이제 빠른 속도로 진행된 적군의 점령은 적어도 서부에서는 압도적으로 구원으로 여겨져 환영을 받았고, 나치 국민을 만나리라 기대했던 미국·영국·프랑스군은 그와 달리 망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히틀러와는 아무 상관도 없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점령군은 당시 그것을 아첨하는 위장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정말로 총통에게 배신당했다고 느꼈고, 사실이 그랬다. 연합군이 이미 착수하고 있던 '재교육'은 마지막 몇 주 동안 히틀러가 강력한 방식으로 이미 완수해 놓았다. 독일인들이 이 마지막 몇 주 동안 겪은 것은 마치 그동안 함께 살아온 남편이 갑자기 살인자임이 드러나자, 사람들에게 남편을 물리치고 자기를 구해달라고 외치는 여자와 같았다."(250-1)


"히틀러는 독일 국민을 사랑했는가? 그는 독일을 찾아냈다. 알지 못한 채 선택했다. 엄격히 말해서 그는 독일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독일 국민은 그가 선택한 민족이었다. 그의 타고난 권력본능이 나침반 바늘처럼 그들을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가리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말로 그랬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권력의 도구로서 그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는 독일을 위해 원대한 야망을 가졌고, 그런 점에서 자기 세대의 독일 사람들과 마음이 맞았다. 당시 독일 사람들은 야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야망은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이 둘이 합쳐져서 히틀러에게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독일의 파괴는 히틀러가 자신에게 부과한 마지막 목적이었다. 그가 파괴하려던 다른 것들에서 그랬듯이 이것도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다. 그로써 그는 독일이 마지막에 자기에게 결별을 선언하도록, 그것도 생각보다 더 빨리 더욱 근본적으로 결별하도록 하였다."(2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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