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일인 이야기 - 회상 1914~1933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이유림 옮김 / 돌베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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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Prolog


"독일에서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초등학생이었던 세대는 날마다 여러 나라들이 벌이는 거대하고 자극적이고 매혹적인 게임처럼 전쟁을 경험했다. 이는 평화가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신나고 극적인 만족감을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나치즘의 근본 비전이 되었다. 여기서 나치즘은 선전의 힘과 단순성, 판타지에의 호소, 활동 동기 등을 얻었다. 또한 내부의 적에 대한 편협함과 잔인함도 여기서 비롯했다. 이 놀이를 함께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숫제 '적'으로도 인정하지 않고 그저 흥이나 깨는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많은 것들이 나치즘을 강화하고 그 성격을 변하게 했다. 하지만 그 뿌리는 바로 여기, 독일 군인들의 '전선 경험'이 아니라 독일 학생들의 전쟁 경험에 있다." "전쟁을 현실로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대개 이를 다르게 평가하기 마련이다." "나치즘의 근간이 된 세대는 1900년에서 1910년 사이에 태어나 전쟁이라는 현실에 아무 영향도 받지 않고 이를 거대한 놀이로 경험한 사람들이다."(31-2)


"1918년 혁명은 나와 내 또래에게 전쟁과 정반대로 영향을 미쳤다. 전쟁은 우리의 실제적인 일상생활을 전혀 바꾸지 않아서 때로 지루할 지경이었지만 환상에는 마르지 않는 풍부한 재료를 제공했다. 혁명은 일상생활에 새로운 변화를 많이 가져왔고 이 변화는 매우 다채롭고 자극적이었지만 우리의 환상에 끼어들지는 않았다. 혁명은 전쟁과 달리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단순하고 분명하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혁명의 모든 위기, 혁명 과정에서 일어난 파업과 총성과 반란과 시위 행렬은 모순으로 가득하고 혼란스러웠다. 사실 정말 중요한 게 뭔지는 끝내 분명해지지 않았다." "혁명의 와중에 권력은 거리에 굴러다녔다. 그 권력을 집어 든 사람들 가운데 진정한 혁명가는 아주 드물었다." "진정한 혁명가들이 아마추어처럼 비조직적인 폭동을 연달아 일으키면 방해자들이 반혁명으로 맞섰다. 그들은 정부군으로 위장한 이른바 '자유군단'을 내세워 혁명을 몇 달 만에 피비린내 나게 진압했다."(44-6)


"혁명에 반대하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안정은 멀었다. 오히려 베를린에서는 3월에 혁명의 시체를 매장하고서야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뮌헨에서는 4월에야.) 베를린에서는 노스케가 원래 혁명을 지원했던 '인민해병대'를 적절한 절차 없이 해산하려고 하자 시가전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러나 결과는 처음부터 분명했고 승자의 복수는 잔혹했다. 1919년 봄 좌파 혁명이 형태를 갖추려고 헛힘을 쓸 때, 이후의 나치 혁명은 히틀러가 없었지만 이미 완성되어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때 에베르트와 노스케를 구해준 자유군단은 단원들의 구성, 특히 견해, 태도, 투쟁 방식에서 이후의 나치 돌격대와 그냥 똑같다. 그들은 이미 '도망치려다가 총에 맞았다'는 장치를 만들어냈고 고문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그리 많이 묻거나 가려내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적수까지 벽에 세워 총살함으로써 1934년 6월 30일을 예고했다. 실천을 뒷받침할 이론만 부족했다. 이론은 나중에 히틀러가 제공한다."(49-50)


# 1934년 6월 30일 : 에른스트 룀을 비롯한 정적, 정부 요인, 유대인을 학살한 '긴 칼의 밤'을 지칭한다.


"세계대전은 모든 민족이 다 경험했고, 혁명, 사회적 위기, 총파업, 부의 재편, 화폐 평가절하 등도 거의 다 경험했다. 하지만 어떤 민족도 1923년 독일에서처럼 이 모든 게 한꺼번에 터무니없이 극단적으로 치솟는 일은 경험하지 않았다. 돈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 기준이 사라져버린, 어마어마한 사육제謝肉祭의 행렬과 끝없는 피투성이 농신제農神祭는 어떤 민족도 경험한 적이 없다. 1923년을 겪고 난 다음 독일인은 꼭 나치즘이 아니라도 어떤 환상적인 모험에라도 뛰어들 준비를 마쳤다. 나치즘의 심리학적·정치학적 뿌리는 훨씬 더 깊이 내려간다. 하지만 나치즘의 광란적인 특징을 결정하는 것은 그때 이미 만들어졌다. 냉혹한 광기, 불가능한 것을 향해 오만할 만큼 거침없이 나가는 맹목적 결단력, '우리한테 유용한 것이 정당한 것이다'와 '불가능이란 없다'는 원칙, 1923년 같은 경험은 어떤 민족이 영혼의 상처 없이 치러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듯하다."(72)


"8월, 1달러는 100만 마르크에 이르렀다. 우리는 믿을 수 없는 기록이라도 들은 양 숨을 멈추고 말았다. 두 주일 뒤에는 이에 대해 웃었다. 달러가 100만 경계선에서 새로운 추진력이라도 얻었는지 속도를 열 배 높여 곧 1억, 이어 10억 마르크로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9월이 오자 100만 마르크는 아예 실제적인 가치가 없어지고 10억 마르크가 지불 단위가 되었다. 10월 말 지불 단위는 1조 마르크였다. 그러는 사이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제국은행이 지폐 발행을 중단했다." "8월 중순, 정부는 극렬한 거리 폭동으로 인해 허우적거렸다." "이제 우리는 국가가 멸망하길, 제국이 분해되길, 그러니까 우리 사생활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걸맞은, 끔찍한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라인란트가 변절했다, 바이에른이 변절했다, 황제가 돌아왔다, 프랑스군이 진군했다 등등 소문이 이토록 무성한 적이 없었다.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구분하기 어려웠다."(82-3)


"그러다가 정말 기대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지속적인 가치를 지닌' 돈이 다시 나올 것이라는 믿을 수 없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얼마 뒤 정말 새로운 화폐가 나왔다. '렌텐마르크'라고 적힌 작고 볼품없는 회녹색 지폐. 렌텐마르크로 처음 물건 값을 치를 때면 다들 약간 미심쩍은 마음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다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인은 그 돈을 실제로 받고 물건을 내주었다. 1조 마르크 가치가 있는 상품,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다음 날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믿을 수 없었다." "그 몇 주 전 슈트레제만이 총리 자리에 올랐다. 정치는 단박에 훨씬 평온해졌다. 이제 아무도 공화국이 무너질 거라고 수군대지 않았다. 온갖 '동맹'이 툴툴거리면서 겨울잠을 자려고 물러났다." "그랬다. 우리 세대가 독일에서 경험한 딱 한 번 뿐인 진정한 평화기가 시작되었다. 1924년부터 1929년까지 6년 동안 슈트레제만이 외무장관으로 독일 정치를 이끌었던 슈트레제만 시대."(85-8)


"1914년부터 1924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나이 든 세대는 자신의 이상과 확신을 의심하면서 소심해졌다. 반면 젊은이들은 공적인 소란, 센세이션, 무정부주의, 무책임한 숫자 놀음의 위험한 매혹밖에 아는 게 없었다. 공적인 긴장이 멈추고 사적인 자유가 돌아오자 그들은 이를 선물이라기보다는 박탈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저 이 모든 것을 자기가 본 것보다 더 커다란 규모로 직접 해보기만 기다렸다. 그러면서 모든 사적인 생활을 '지루하다' '부르주아적이다' '고리타분하다'고 치부했다. 대중은 무질서의 온갖 센세이션에도 익숙해졌다. 게다가 그들 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커다란 미신, 즉 그동안 맹목적이고 교조적으로 칭송해온 전지전능하신 성 마르크스의 마법적인 능력과 그가 예언한 역사 발전의 필연성에 대한 믿음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표면 아래에는, 거대한 재앙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곧 닥칠 재앙의 전조마저 이런 평화로운 풍경에 딱 어울리는 듯했다."(90-3)


"1930년 봄 브뤼닝이 공화국 총리 자리에 올랐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독일에 처음으로 엄격한 주인이 생긴 것이다." "배상금을 지불하는 게 불합리하다고 증명하기 위해 그는 은행이 문을 닫고 실업자 수가 600만까지 올라가는 등 독일 경제가 거의 무너지도록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국가 재정을 유지한다고 '허리띠를 더 졸라매라'는 엄격한 가장의 처방전을 가차 없이 적용했다." "브뤼닝은 이를 악물고 모든 고통스러운 결과를 감당했다. 외국 여행을 불가능하게 만든 '외환 관리'와 이민을 불가능하게 만든 '이민세', 나중에 히틀러의 효과적인 고문 도구에 속하게 된 것 가운데 많은 것을 브뤼닝이 도입했다. 더 나아가 언론 자유의 제한과 제국 의회의 억압도 그 시작은 브뤼닝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는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했다. 하지만 공화주의자들은 이런 일이 일어난 다음 과연 무엇을 더 지켜야 할지 묻기 시작했다."(110-1)


"브뤼닝에게는 진정한 추종자가 없었다. 그는 '묵인되었다.' 그는 차악이었다. 몹시 가학적인 고문 전문가에 맞서 학생들을 때리면서 〈내가 너희들보다 아프다〉라고 말하는 엄격한 교사였다. 사람들은 브뤼닝이 히틀러를 막을 딱 하나뿐인 보호막으로 보였기에 그를 감쌌다. 브뤼닝도 당연히 이를 알고 있었고 그가 정치적으로 생존하는 이유는 히틀러에 대항하는 한편 히틀러가 존재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절대 히틀러를 없앨 수 없었다. 브뤼닝은 히틀러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동시에 히틀러를 보존해야 했다. 히틀러는 실제 권력을 잡아서는 안 되지만 계속 위험하게 남아 있어야 했다. 브뤼닝은 2년 동안 이를 악물고 얼굴에는 미소를 띤 채 어려운 줄타기를 해냈는데, 이것만 해도 대단한 성취였다. 그가 균형을 잃는 순간이 오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럼 그다음엔? 브뤼닝의 시대에는 내내 이런 질문이 남았다. 그럼 그다음엔? 음울한 현재가 무시무시한 미래에 대한 전망 덕분에 가벼워 보이는 시대였다."(112)


"1932년 여름까지 점점 더 숨이 막혀가더니 브뤼닝이 갑자기 별다른 이유도 없이 실각하고 파펜-슐라이허의 막간극이 이어졌다. 아무도 정체를 모르는 귀족들이 정부를 세우더니 반년 동안 정치는 마치 헝가리 경기병들의 질주 같았다. 공화국이 무너지고 헌법이 효력을 잃고 제국 의회는 해산되었다가 다시 선출되기를 거듭했다. 신문은 금지되고 프로이센 정부는 떠나고 행정 기구 고위층은 모두 바뀌었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이 마치 흥미진진한 모험처럼 명랑한 분위기에서 일어났다." "그때 나치들은 어느새 최종적으로 허용된 제복을 입고 거리를 꽉 채우는가 하면 폭탄을 던지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그해 8월 사람들은 히틀러와 부총리 자리를 놓고 흥정하다가, 11월에는 파펜과 슐라이허가 갈라진 뒤 히틀러에게 총리 자리를 제안했다." "모든 진지한 장애물은 치워졌다. 헌법도 없고 법적 계약도 없고 공화국도 없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118-9)


혁명Die Revolution


"1933년 1월 30일, 아침신문 표제는 다음과 같았다. 〈공화국 대통령 히틀러 호출.〉 무력감에 짜증이 났다. 대통령은 지난해 8월에 이어 11월에도 히틀러를 불러서 각각 부총리와 총리 자리를 제안했다. 히틀러는 그때마다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었고, 그때마다 정부에서는 근엄하게 '절대 다시' 이런 시도를 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절대 다시' 하지 않겠다는 결의는 기껏해야 석 달 동안 유지되었다. 그때 이미 독일에서는 마치 오늘날 세계가 그러는 것처럼 히틀러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언제나 다시 점점 더 쉽게 제공하다 못해 숫제 강요하려는 병적인 욕망이 그의 적수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다." "점심 때 신문 표제는 〈히틀러 다시 지나친 요구〉였다. 사람들은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요구하지 않는다면 히틀러의 성정에 맞지도 않을 테지. 이렇게 다시 한 번 독배를 피할 수 있게 되는구나." "5시쯤 저녁신문이 나왔다. 〈민족주의자 중심 내각 구성, 총리 히틀러.〉"(134-5)


"1933년 2월 무렵 독일인들 대부분이 공산주의자가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는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이 문제를 너무나 간단히 접어버렸다는 것은 탓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처음으로 나치 시대 독일인들의 성격상 집단적 약점이 드러난다. 독일인들은 국회의사당이 불에 조금 그을렸다고 해서 헌법으로 보장된 개인적 자유와 기본권을 빼앗겨도 마치 당연한 것처럼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였다. 공산주의자들이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으니 정부가 '단호하게 대처'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음 날 나는 연수원 동료 몇 명과 함께 이 사건에 대해 토론했다." "내가 말했다. 〈어떤 공산주의자가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고 해서 내가 읽고 싶은 신문을 못 읽게 하다니, 이건 개인적인 모욕이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래요?〉 누군가가 가볍게, 악의 없이 대답했다. 〈아뇨, 왜 그래야 하죠? 지금까지 「전진」이나 「적기」를 읽으셨나요?〉"(151-2)


"혁명이란 무엇인가? 법률 전문가들은 헌법을 그 안에 규정된 것과 다른 방법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빈약하나마 이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1933년 3월 나치 '혁명'은 혁명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엄밀하게 '합법적으로', 헌법이 허용한 방법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눈속임이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찬찬히 살펴봐도 그해 3월에 일어난 일들이 정말 '혁명'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지 여전히 의심이 간다. (기존 질서와 그 수호자인 경찰, 군부 등을 타격하는) 혁명이 늘 감동적이고 장엄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참극, 폭력, 약탈, 살인, 방화 등이 함께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혁명가'이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용기를 보여주며 목숨을 걸기를 바라게 마련이다. 바리케이드는 시대에 조금 뒤떨어졌을지 모르지만 어떤 형식이든 자발성, 봉기, 헌신, 반란 등은 참된 혁명을 이루는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 보인다. 1933년 3월 혁명에는 그 가운데 단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154-5)


"네 가지 요소가 결합해 나치 정권이 세워졌다. 네 가지 요소란 테러, 축제와 장광설, 배반, 마지막으로 집단적 허탈 상태다. 집단적 허탈 상태란 수백만이 동시에 신경쇠약에 걸린 듯 정신을 놓은 상태다. 많은 나라, 사실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 태어날 때 이보다 더 많은 피를 흘렸다. 하지만 어떤 국가도 이토록 혐오스럽게 탄생하지는 않았다. 유럽 역사는 두 가지 형태의 테러가 있다. 하나는 고삐 풀린 혁명적 군중이 승리에 취했을 때 나타나는 걷잡을 수 없는 살의다. 다른 하나는 무적의 국가기구가 권력을 과시하며 위협하려고 냉혹하고 면밀하게 계획해서 일으키는 잔혹 행위다. 이 두 가지 테러는 대개 혁명과 억압으로 나눠진다. 첫째 테러는 혁명적이다. 순간적인 흥분과 분노, 도취 상태에 빠졌다는 데서 그 변명을 찾는다. 둘째 테러는 억압적이다. 혁명에서 일어난 만행을 보복한다는 데서 그 변명을 찾는다. 이 두 가지 테러를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방식으로 결합하는 게 나치의 몫이었다."(155-6)


"3월 말 나치는 이제 혁명적 활동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고 느꼈다. 혁명적 활동의 조심스런 첫걸음은 1933년 4월 1일부터 유대인에 대항해 불매동맹을 맺는 것, 즉 그들을 보이콧하는 일이었다." "이와 동시에 유대인에 대한 '계몽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사실 유대인은 '하류 인간'으로 일종의 동물인데 악마의 특성까지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널리 퍼진 두려움 너머 이상하고도 실망스러운 일이 있다면 이렇게 나치가 누군가를 살해하겠다는 의도를 공개적으로 밝힌 일이 독일 전체에 논쟁과 토론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반유대주의가 아니라, '유대인 문제'에 대해서. 이는 나치가 그때부터 다른 많은 '문제'에 대해서도 국제 무대에서 거듭 써먹어 성공한 수법이다. 한 나라든, 민족이든, 인종 집단이든 나치가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공공연하게 위협하면 갑자기 그게 일반적인 화제가 되었다. 그것도 협박을 받은 사람들이 과연 존재할 권리가 있는지를 문제 삼아 널리 토론했다."(172-4)


"모두들 갑자기 유대인에 대해서 나름대로 의견을 세우고 표명할 권리가 있다고 느꼈다. 더 나아가 반드시 표명해야 한다는 의무감까지 생겼다."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서 일하면 이를 범죄로 간주하거나 적어도 눈치가 없다고 평가하는 게 곧 일반적인 의견으로 인기를 끌었다. 유대인의 옹호자에게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유대인들은 뻔뻔스럽게도 의사, 변호사, 언론인 가운데 이렇게 높은 백분비를 차지한다고 항의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람들은 대체로 '유대인 문제'를 백분율 계산으로 다루기를 좋아했다. 공산당원 가운데 유대인 백분비가 너무 높지 않은지, 세계대전 전사자 가운데 유대인 백분비는 너무 낮지 않은지 조사하기도 했다.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스스로 지식인인 체하는 어떤 남자는 아주 진지하게 전체 유대인 가운데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사람은 12,000명 뿐인데, 이는 이에 상응하는 아리아인의 숫자에 비하면 너무 적다고 주장하면서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어느정도 정당화'하기도 했다.)"(175)


"(이 모든 일에 깃들어 있는 광기를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지만) 나치 정권 아래에서도 적어도 처음 몇 년 동안 일상생활은 겉보기에 전혀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영화관, 극장, 카페가 꽉꽉 들어차고 야외와 무도장에서는 쌍쌍이 춤을 추었다. 사람들이 평온하게 거리를 거닐고 젊은이들은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몸을 쭉 편 채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 나치도 이를 선전용으로 우려먹을 만큼 우려먹었다. 〈우리의 일상적이고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에 와서 보라. 유대인들까지도 얼마나 잘 지내는지 와서 보라.〉 광기, 공포와 긴장, '하루하루 이어지는 삶'과 죽음의 무도, 그 비밀스런 흐름은 물론 보이지 않았다. 마치 베를린 지하철역에서 〈수염을 잘 깎아서 기분 좋은 하루〉라는 카피가 달린 면도날 광고에서 활짝 웃고 있는 남자 얼굴을 보면서 그가 벌써 4년 전에 대역죄로 플뢰첸제 교도소 마당에서 머리가 잘린 그 남자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191)


작별Abschied


"그 무렵 내가 작별을 해야 했던 것이 대법원만은 아니었다. 작별은 모든 것을 관통하는 극단적인 좌우명이 되었다. 예외도 없었다. 내가 살던 세계가 날마다 자연스럽게, 소리를 내지 않고 녹아내리더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식적인 영역에서 눈에 띄게 일어나는 일이 거의 가장 무난한 일이었다. 그래, 정당이 사라졌다. 해산했다. 우선 좌파정당이 해산한 다음 우파정당도 해산했다. 나는 어느 정당의 당원도 아니었다. 대중이 그 이름을 말하고 그가 쓴 책을 읽고 그가 한 연설을 토론하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이민을 떠나기도 했고, 수용소에 들어가기도 했다." "더 불안한 것은 어쩐 일인지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던 별로 해를 끼칠 것 같지 않은 사람들까지 꽤 많이 사라진 것이다. 날마다 듣다보니 그 목소리가 마치 지인처럼 익숙해진 라디오방송 아나운서가 집단 수용소로 사라졌다. 그 이름을 들먹이는 사람까지 곤란해졌다! 여러 해 동안 우리와 동행하던 남녀 배우들도 갑자기 사라졌다."(241-2)


"(공산당원이던) 한스 오토는 어느 날 만신창이가 된 채 친위대 병영 마당에 누워 있었다. 체포된 다음 '잠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4층 창문에서 몸을 던졌다고 했다. 매주 악의 없는 해학으로 베를린 시민을 웃기던 신문 만화가가 자살했다." "5월에 상징적으로 책을 불태운 일은 신문 기사에 그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서점과 도서관에서 책들이 사라졌다. 좋든 나쁘든 현대 독일 문학이 완전히 지워졌다. 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나치가 참아주던 몇몇 작가들은 이제 볼링 핀처럼 허공에 홀로 서 있었다. 그 밖에는 고전이나 갑자기 솟아난 끔찍하고 부끄러운 수준의 혈통문학과 향토문학 뿐이었다." "많은 신문과 잡지가 신문 가게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거기 남아있는 신문과 잡지에 일어난 일이 더 이상했다. 정말 그 신문이나 잡지인지 도저히 다시 알아볼 수 없었다." "「베를리너 타게블라트」나 「포시셰 차이퉁」처럼 오랜 전통을 지닌 민주적·지성적 신문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나치 기관지로 탈바꿈했다."(242-4)


"1933년 여름 나치가 아니었던 독일인들은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을까?" "우월성이라는 유혹에 굴복한 사람들은 초기 나치 정책이 보여주던 초심자의 도락적 성격에 연연한다. 그들은 날이면 날마다 이 모든 게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쓴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처음에는 확신에 차서 평온하게, 시간이 지나면 자기를 속이려 애쓰면서 나치 정권은 반드시 몰락한다고 예언한다. 마침내 나치 정권이 자리를 잡고 성공했을 때, 그들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무장하지 못했고 허황한 통계에 따라 면밀하게 계산한 심리적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1935년부터 1938년까지 뒤늦게 나치에 복속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 집단에서 나왔다." "우스운 것은 언젠가 실망을 모두 맛본 다음 그들이 옳다고 증명되리라는 사실이다. 나치가 몰락한 다음 그들이 돌아다니면서 내 이럴 줄 알았다고 떠벌리는 모습이 선연하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들은 희비극적 인물로 남을 것이다."(249-50)


"둘째 유혹은 원한을 품는 것, 즉 피학적으로 증오와 고통과 한없는 비관주의에 자신을 넘겨주는 일이다. 이런 반응은 독일인들이 패배를 맞을 때 거의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반응이다. 즉 독일인은 누구나 (사생활이나 공공생활에서) 영영 포기해버리고 싶은, 무심하고 기진해서 자신과 세계를 기꺼이 악마에게 넘겨주고 싶은, 화가 나고 우울해서 도덕적으로 자살하고 싶은 유혹에 맞서 싸워야 한다. 모든 위로를 거부하다니! 아주 영웅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자세에 가장 유독하고 위험하고 악랄한 위로가 숨어 있는 걸 아무도 보지 못한다. 이렇게 마음껏 자기를 희생하면서 바그너적인 죽음과 몰락에 탐닉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패배를 패배로 받아들일 능력이 없는 패자에게 남은 가장 큰 위안이다. 아이가 인형을 잃어버리고 나서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서럽게 엉엉 울어대는 게 나치와의 전쟁에서 지고 난 다음 독일인의 기본자세가 되리라고 감히 말한다.(1918년 많은 독일인이 이미 이런 태도를 보였다.)"(250-1)


"셋째 유혹은 앞에서 나온 유혹에 굴복할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증오와 고뇌로 영혼이 망가지고 싶지는 않다. 선량하고 온유하고 친절하고 '착하게' 남아 있고 싶다. 하지만 날이면 날마다 증오와 고뇌를 블러일으키는 일이 몰려드는데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귀를 막고 숨어들 수밖에 없다. 이는 부드러운 것을 딱딱하게 만들어 결국 현실감각을 잃고 마는 다른 형태의 광기로 이어진다." "갑자기 다양한 전원문학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1934년에서 1938년까지 독일에서는 어린 시절의 회상록, 가족소설, 풍경 화보집, 전원시와 섬세하고 여린 소품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나왔다. 평범한 사람들은 물론 문학계에서도 이를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나치의 공공연한 선전문학을 빼면 거의 모든 책이 다 이런 분야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것도 시들해졌는데 아마 아무리 애를 써도 이런 문학에 필요한 무해함을 더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253-5)


"아니, 개인 생활로 물러나봤자 아무 소용 없었다. 어디로 물러나든 내가 피해 도망친 그것이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나치 혁명이 정치와 사생활의 오랜 분리를 없애버렸고, 나치 혁명을 단지 '정치적 사건'만으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혁명은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사생활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독가스처럼 벽을 통해 스며들었다. 이 독가스에서 벗어나려면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신체적으로 멀어지는 것, 이민이었다. 즉 내가 태어나 언어를 배우고 교육을 받은 나라, 게다가 애국이라는 연결 고리가 있는 나라에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우리가 독일과 작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독일이 독일로 남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 민족주의자들 스스로 독일을 망가뜨렸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서 자기 나라에서 떨어져 나가야 하는지를 두고 갈등했다. 그러나 비록 수많은 통용구와 상투적 표현으로 가려 있지만 진정한 갈등은 민족주의와 내 나라에 대한 충실함 사이에서 일어났다."(269-73)


"1933년 10월 13일 토요일, 독일이 군비축소회의와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날 저녁 히틀러가 연설을 마친 다음, 라디오에서 국가의 첫 소절이 흘러나오자 (사법연수생을 위한 훈련소에 있던 우리는) 모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몇몇은 나처럼 머뭇거렸다." "〈이건 중요하지 않아. 난 아니잖아. 이건 중요하지 않아〉 하는 느낌이 혀 위에 쓴맛처럼 남았다. 이런 느낌으로 나는 팔을 들어 올린 채 3분쯤 허공에 뻗고 서 있었다. 국가와 호르스트 베셀 노래가 딱 그만큼 오래 걸렸다. 거의 다 절도 있게 딱딱 끊어가며 쩌렁쩌렁 같이 불렀다. 나는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를 때 그러듯 입술을 조금 달싹이면서 같이 부르는 시늉만 했다. 하지만 모두 팔은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인형극을 공연하는 사람이 끈 달린 인형의 팔을 들어 올리듯 라디오가 우리 팔을 잡아당겼다. 눈이 없는 라디오 앞에 그렇게 서서 우리는 노래를 부르거나 부르는 척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른 사람의 비밀경찰이었다."(326)


"이런 '훈련소'에서도 의심할 나위 없이 행복이 피어난다. 동료애라는 행복이다." "동료애는 나치의 커다란 유혹 물질이자 미끼였다. 나치는 행복을 갈망하는 독일인들을 진전섬망증에 이를 때까지 동료애라는 알코올 속에 빠뜨렸다. 히틀러유겐트, 돌격대, 국방군, 수많은 훈련소와 연맹들을 통해 어디에서나 독일인을 동료로 만들었고 저항할 수 없는 나이에서부터 이런 마취제에 익숙해지게끔 했다." "동료애는 시민적인 의미에서든, 더 나쁜 종교적인 의미에서든 자기 스스로 책임진다는 느낌을 완전히 없애버린다." "'각자 자기를 위해서'라는 냉혹한 법칙이 아니라 '모두 한 사람을 위해서'라는 관대한 법칙 아래 살게 해준다." "더 나쁜 것은 동료애가 자기 자신과 신과 양심 앞에서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덜어낸다는 사실이다. 그는 동료들도 다 하는 일을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곰곰이 생각할 시간도 없다. 동료가 그의 양심이고 그는 동료들이 다 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용서받는다."(3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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