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격전의 전설
칼 하인츠 프리저 지음, 진중근 옮김 / 일조각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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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1940년의 기적


"1940년 5월, '너무나 어이없는, 현대 전쟁사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은 4년 동안이나 프랑스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동원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 4일 만에 스당 돌파에 성공하면서, 총 6주 만에 전역이 종결된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독일의 승리는 결코 예견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우연히 맞물리면서 발생한 결과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치 선전가들은 독일의 승리가 이미 오래전부터 정립된 개념에 따라 실행·달성된 것이라는 일종의 전설을 창조해냈고, 여기에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전격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와 동시에 이 새로운 전략의 창시자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라고 선전했고, 그는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가장 위대한 군사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합국 측은 너무나 처절하게 패배한 지휘관들의 그럴싸한 구실 찾기를 위해 이 전설을 자진해서 받아들였다."(30-2)


제1장 '전격전'의 기원과 개념


"제1차 세계대전은 무기체계의 발전에 따라 화력 요인이 기동 요인을 압도했고 대부대급 작전들은 종종 시작하기도 전에 우박처럼 퍼붓는 포탄과 기관총탄의 세례 속에 교착 상태에 빠졌다. 급기야 전쟁 양상은 소모적인 장기간의 진지전으로 치달았고, 장군들은 작전술 차원의 지휘기법이 퇴색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제국의 군사지도부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통해 엄청난 교훈을 얻었다. 전투력이 월등히 우세한 적을 상대로 해서는 결코 '속전속결'을 단행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40년 스당에서의 승리 이후 히틀러와 그의 장군들은 비로소 '전격전'에 있는 '승리의 열쇠', 즉 신속한 결전을 통해 경제적으로─그리고 전략적으로도─ 훨씬 우위에 있는 적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작전술 차원의 '기적의 무기'를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산업화 사회에서 이러한 망상은 훗날 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할 때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했고, 독일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43-5)


제2장 '전격전' 개념이 없는 '전격전'과 서부전역의 배경


"독일 군부는 독일제국의 불리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다시 한번 양면전쟁을 치를 가능성을 고심한 결과, '신속한 전쟁'을 통한 '즉각적인 결전'을 시도하고자 했다. 폴란드 전역은 개전 4일 만에 사실상 승패가 결정되었고 18일 후에는 실질적으로 종결되었다. 이 전역은 복잡한 기동으로 적을 포위해야 하는 몰트케와 슐리펜의 작전계획과는 달리, 오히려 지형 조건을 이용한 자연적인 포위작전으로 전개되었다." "기갑부대, 즉 전차의 운용 면에서도 폴란드 전역은 서부전역과 근본적으로 판이했다. 서부전역이 '지헬슈니트Sichelschnitt(낫질) 계획'(1940년 5월)에 의거해 기갑부대를 주축으로 실시한 대규모 작전이었던 반면, 폴란드 전역의 경우 기갑부대는 작전술 수준의 독립 제대조차 투입되지 않았다. 대신 기갑부대는 통상 사단급 수준(전술적 수준)으로 편성·운용되었다. 폴란드 전역은 새로운 방식의 전쟁 개념을 적용한 일종의 시험장이었을 뿐이다."(58-9)


"1940년이 서부전역이 애초부터 전격전으로 계획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적 자원의 동원을 살펴보면 더 명확해진다. 그 단적인 예가 Uk 계층(노동자 계층)의 존재와 이들의 징집면제였다. 서부전역이 발발하기 전에 육군은 이 민간인들을 무기한으로 방위산업체에 동원했으나 동부전역 전에는 기한을 정확히 3개월, 1941년 9월까지로 한정해서 동원했다. 3개월 이내에 전격전으로 덩치만 크고 내실이 없는 소련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서부전역을 계획할 때 독일군 지도부는 제1차 세계대전과 유사한 장기전 쪽으로 방향을 잡아나갔다. 당시 산업화된 전쟁 시대에 군사적 대결도 결국에는 후방에서의 방위산업 능력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이러한 정책을 입안한 것이다." "히틀러와 그의 군사 고문들은 기갑부대에 의한 신속하고도 결정적인 작전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서방국가들과의 장기간의 투쟁을 위해 경제적·군사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72-3)


"적의 규모를 부풀리고 아군 전투력을 축소하는 것은 전쟁을 선전할 때의 기본원칙이다. 특히 아군이 승리했을 때, 이 원칙은 승리를 더 찬란한 영광으로 빛나게 하지만, 패배했을 때는 패배를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서부전역에 관한 많은 문헌들은 독일의 전력이 연합국의 그것보다 월등히 우세했다는 비상식적인 내용들을 여과 없이 그대로 담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괴벨스에 의해 완벽히 조율되던 독일의 선전기관들은 서방국가들의 언론에 나타나는 공포스런 독일군의 이미지를 한층 더 강조할뿐더러, 더 나아가 극단적이고 과장된 표현을 써야만 했을까?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독일 측 선전의 최우선적인 목적은 영국의 계속되는 전쟁 수행에 제동을 걸고 미국을 위협해 참전을 막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국방군이 '천하무적'이라는 선전을 통해, 강철로 된 파도처럼 쇄도해 어떤 적이라도 무너뜨린다는 독일 '전격전 부대'라는 공포와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83)


제3장 지헬슈니트 계획을 둘러싼 갈등


"A집단군 참모장 만슈타인 중장은 10월 21일 육군 총사령부로부터 최초 공격명령을 수령했다. 수령 직후 그는 훗날 '지헬슈니트 계획'이라고 불린, 획기적인 사상이 내재된 대안을 발전시켰다." "만슈타인이 기획한 방책이 기발했던 이유는, 단 하나의 조치로 두 가지 문제─우익을 주공으로 삼으면 적 방어부대의 주력과 부딪히기 때문에 기껏해야 국지적인 승리만 얻을 수 있고, 차후에 적에게 작전술 규모의 치명적인 역습을 당할 우려가 있다─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북부에 위치한 B집단군이 아닌 중부의 A집단군을 주공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적이 예상치 못한 공격, 즉 통과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아르덴 산림지대로 강력한 기갑부대를 투입하여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슈타인은 A집단군 사령관인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의 승인하에 총 일곱 차례 건의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육군 총사령부는 만슈타인의 주장을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무시해버렸다."(125-7)


"만슈타인과 별개로 히틀러도 스당에서 결정적인 돌파를 감행하려는 계획을 구상했다. 육군 총사령부는 히틀러의 구상을 '어설픈 생각'이라 치부하며 말렸지만 그는 자신의 방책을 고집했다." "히틀러의 비서실장 슈문트 대령은 베를린의 수상관저에서 신임 제7기갑사단장 롬멜을 포함한 6명의 신임 장관급 지휘관들과의 조찬식 날짜를 2월 17일로 정했다. 간담회가 끝난 후 히틀러는 만슈타인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이 자리에는 요들과 슈문트만이 동석했다. 다른 장군들이 발언했다면 불안함이 섞인 독백을 내뱉은 후 이내 말을 끊어버리고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 히틀러였지만 이번만은 태도가 달랐다. 그는 만슈타인의 설명에 완전히 사로잡힌 듯 조용히 경청했다.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매혹적인 논리에 감동받은 나머지, 그에게 느꼈던 혐오감도 잊어버렸다. 히틀러는 감격해 하며 만슈타인의 최종 결론인 '강력한 전차[부대]'의 투입에 강한 공감을 표시했다."(128-9)


"지헬슈니트 계획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거론되는 인물은 3명(할더, 히틀러 그리고 만슈타인)이다. 그러나 기갑부대 전문가로서 이 구상을 현실화하는 방법을 만슈타인에게 조언한 사람이 구데리안 장군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게다가 구데리안이 작전 지역의 지형을 꿰뚫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만남은 운명적이라 할 만했다. 구데리안은 1914년 아르덴 지역 공격작전에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1918년 당시 독일 영토였던 스당에서 4주간의 장군참모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따라서 이 계획은 구데리안과 만슈타인이라는 쌍두마차가 창안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만슈타인이 A집단군 참모장 지위를 잃은 후에도 구데리안은 그와 공동으로 창안한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열을 쏟았다.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구데리안은 상부의 지시와 명령을 여러 번 무시했으며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끝까지 관철시켰다. 그러므로 만슈타인이 지향한 작전이 현실화된 것은 구데리안의 덕택이었다."(126-30)


"히틀러는 전술적이고 단순히 귀납적으로 생각해 스당을 떠올렸지만, 만슈타인은 연역적으로, 한 차원 높은 전략적 심사숙고를 거쳐 스당을 선택했다. 여기에 또 다른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스 강 극복 이후 전쟁을 어떻게 수행하는가였다. 스당 돌파 이후 기갑사단들이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이 의도했던 대로 급속도로 대서양 해안으로 돌진하자 이 독재자는 공황에 빠져, 성공을 눈앞에 둔 기갑부대를 정지시켰다." "스당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가장 큰 원인은 군사 분야에 문외한인 히틀러가 전술적·작전술적 그리고 전략적 개념의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한 데 있다. 마치 아마추어 체스 선수가 우연히 천재적인 행마에 한 번 성공한 후 자신을 챔피언이라고 굳게 믿는 것처럼, 히틀러는 자신을 챔피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한판승을 거둔 자신의 총참모부에 어줍잖게 참견해 됭케르크 바로 앞에서 기갑부대를 정지시키고 영국군을 살려줌으로써 외통수를 놓치고 말았다."(142-3)


제4장 1940년의 아르덴 공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 장군들은 군사 사상 면에서 날이 갈수록 독단에 빠져들었다. 프랑스 총사령관 가믈랭 장군조차도 마스 강을 '유럽에서 가장 탁월한 대전차 장애물'이라 평가했고, 지리학적으로 이중이 장애물인 아르덴-마스 강은 우회는 가능해도 돌파는 불가능한 천연적인 전략적 방어체계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군은 적이 스당으로 침략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다른 전선을 보강하기 위해 2등급 부대들만으로 방어를 준비하는 등 상대적으로 이곳의 벙커나 방어시설에 소홀했다. 또한 프랑스군 지도부는 만일 독일이 아르덴을 통해 대공세를 취할 경우 이곳으로 병력을 이동 및 증원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과오는, 제1차 세계대전 식의 시간 개념으로 독일군의 '전격전 공세' 템포에 대응할 수 있다는 프랑스 장군들의 경험적 사고방식이었다. 그들은 독일군이 마스 강을 도하하기까지 약 2주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확신했다."(229-30)


"지헬슈니트 계획의 혁명적 사상은 혁명적 방법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다. 그 중 핵심은 역사상 최초로 기갑부대를 작전술적으로 독립 운용하는 것이다." "당시 국방군에서 작전술은 야전군(예외적으로 군단급) 단위부터 적용되었다. 구데리안은 작전술 차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부대 편성을 끈질기게 요구했고, 서부전역에 대비해 마침내 클라이스트Kleist 기갑군이 창설되었다. 그 예하에는 5개의 기갑사단과 이를 지원하는 3개의 차량화보병사단이 편성되었다. 이른바 '고속기동부대', 즉 기갑사단과 차량화보병사단이 도보로 행군하는 보병부대들을 훨씬 앞서 완전히 독립적인 공격작전을 수행한다는 편성은 세계 전쟁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로써 A집단군은 크게 2개 제대로 구분되었는데, 하나는 작전술 차원의 돌파를 실시하는 고속 기동부대였고, 다른 하나는 그를 후속에서 잔적殘敵을 소탕하거나 점령지역을 확보하는 임무를 맡은 보병 중심의 야전군들이었다."(173-5)


"공세 이튿날인 5월 12일, 구데리안 기갑군단의 우측에서 일시적인 교통대란이 발생했다. 원래 우측방에서 전진하기로 한 인접 보병사단들의 차량들이 기갑사단에 할당된 비교적 널찍한 도로에 계속해서 끼어들어 예상치 못한 혼란이 일어났다. 경쟁심을 느낀 보병부대가 기갑사단에 '승리의 영광'을 뺏기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A집단군의 작전 착오로 말미암아 전 유럽에서 전무후무한 대규모 정체현상이 야기되었다. 북부 기동로에서는 5월 13일 마스 강에서부터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고 독일 국경을 통과하여 라인 강변까지 총 250km에 이르는 교통마비 현상이 발생했다." "(끝없는 혼란이 이어지자) 기갑병과 장군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주적이 벨기에, 프랑스군이 아니라 기갑부대를 적대시하는 보병 야전군과 A집단군의 지휘부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들의 오판은 아르덴을 거의 '독일 기갑부대의 무덤'으로 만들 뻔했다. 이 사건으로 A집단군 지휘부는 예하부대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193-5)


"제1기갑사단이 단 3일 만에 아르덴을 통과해서 마스 강까지 진격한다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작전이 성공한 비밀은 바로 '중단 없는 연속적인 공격' 방식에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독일군의 진격이 정형화된 고정불변의 교리나 방법, 시스템 등을 기반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킬만스에크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를 '즉흥곡 연주'에 비유했다. 다시 말해 일단 목표를 설정한 후 그것을 어떻게 달성해야 할지에 대한 개념도, 문서상의 특별한 방책도 없었다. 아직 발전되지 못한 '전격전 전략'이 작전술-전술로 표출된 것이 아니라, 난해한 과제를 기발하고 비범하게 스스로 해결하는 행동이 독일군의 몸에 배어 있었다는 점이 성공의 열쇠였다. 난해한 과제란 바로 '3일 안에 마스 강변까지'였다. 이 전역에서 전개된 모든 비범한 전투방식은 이러한 요구에 부합하려는 행위의 결과물이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사건들을 고차원적으로 해석했고 나아가 일종의 시스템으로 개념화했다. 이것이 바로 '전격전'이다."(224)


제5장 결전 : 구데리안 기갑군단의 스당 돌파


"5월 13일 스당에서 시행된 독일 공군의 집중적인 폭격작전은 서부전역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인 동시에 이 전쟁에서 가장 성공적인 전술적 기습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때에 제1차 세계대전 중 최초로 전차가 출현하고 독가스를 사용하던 때에 버금가는 심리적 충격을 받았다." "클라이스트 장군이 마스 강 도하작전 명령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독일 공군의 가용한 모든 전력이 이곳에 투입되었다. 비록 전 전력이 투입되지는 못했으나 당시 스당 지역만큼 공중전력이 집중된 경우도 없었다." "특히 16시 직전까지 시행된 집중 폭격은 프랑스군에게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프랑스군 방어체계상의 종심지역은 그 후 물론 폭격 강도가 줄어들었지만, 1시간 반 동안이나 독일 공군의 공격에 시달렸다. 그 결과 프랑스 제55보병사단의 포병을 장시간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고, 구데리안이 예상한 대로 계속되는 '롤러식 폭격'은 심리적 효과 면에서 적의 전투의지를 상실시켰다."(260-3)


# 롤러식 폭격작전 : 임무수행을 완료한 일정 규모의 전력을 복귀시키고 후속부대가 폭격 임무를 수행하며 복귀한 부대는 재무장시켜 다시 전선에 투입하는 방식


"라퐁텐 장군의 사단 지휘소 벙커는 스당에서 8km 남쪽에 위치한 퐁다고의 삼림지대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5월 13일, 이곳에서 서부전역을 통틀어 가장 기이한 사건이 발생했다. 갑자기 발생한 집단공황이 프랑스군을 급격한 파멸로 몰아넣은 것이다." "이 시각, 이 지역 어디에도 전차는 물론 단 한 명의 독일군 병사도 없었다. 이 혼란의 진원지는 라 르나르디에르 고지였다. 이곳에서 최초로 '유령전차'가 출현했다는 보고가 들어와 이 엄청난 혼란이 야기되었다." "인파를 저지하려던 후방지역의 장교들마저도 탈영 대열에 동참했고 일부 병사들은 이곳에서 100km 떨어진 랭스까지 떠밀려 내려왔다. 헌병들도 집단 탈영병들에 대해 손쓸 방도가 없었다. 단 몇 시간 내에 제55보병사단은 공황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극히 몇몇 제대를 제외하고는 최하급 부대들까지 산산조각 나버렸다. 이들은 독일군 전차의 제물이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쇠약해진 정신력 때문에 이러한 파멸을 겪은 것이다."(284-6)


"5월 14일 전투기와 대공포 부대들은 연합국 공군의 집중폭격으로부터 마스 강의 교량들을 보호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중화기와 전차를 마스 강 건너편으로 이동시킬 유일한 통로는 제1기갑사단이 설치한 골리에의 교량이었다." "구데리안은 처음부터 스당 일대의 취약한 교량을 전체 작전의 성패가 걸린 아킬레스건으로 보았다. 그는 〈집중하라! 분산하지 말라!〉라는 구호를 부르짖었으며 스당 지역, 특히 골리에 교량 일대에 방공포를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전례 없이 조밀한 화망을 구성했다." "결론적으로 5월 14일 스당 일대에서 벌어진 공중전은 독일 국방군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첫째, (골리에 교량을 폭파하기 위해 출격한) 연합군 폭격기 부대의 '중추부'가 와해되어 이때부터 연합군은 집중적인 공군력 투사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둘째, 구데리안 장군은 이날 그의 군단 주력을 마스 강 건너편으로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작전술 차원의 돌파작전이 성공한 것이다."(288-93)


"5월 14일, 또 한 번의 결정적인 장면이 셰메리에서 펼쳐졌다. 구데리안이 독단적으로 자신의 기갑부대를 서쪽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이것은 그가 상급자의 명령과 히틀러의 지시를 어긴 행동일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모든 전쟁술의 원칙'에 위배된 행동이었다. 그의 결정으로, 그를 따르는 다른 기갑사단들도 공세에 동참하게 되는 일종의 눈사태 효과가 일어났다. 기갑사단들은 완전히 고립된 채 대서양 해안을 향해 작전술적 쐐기를 박는 공격을 실시했다. 보병사단의 측방 방호는 전혀 없었다. 이 공세는, 훗날 윈스턴 처칠의 표현처럼, 가느다란 낫 형태를 띠었다." "역사상 최초로 기갑부대가 주축이 된 작전술 차원의 독립 작전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 전투는 새로운 군사사적 전환점으로서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별안간 현대적인 '작전술 차원의 기동전'이 등장함에 따라 1918년 이래 주축을 이뤄온 '진지전' 양상은 자취를 감추었고, 이러한 기동전 개념은 '전격전'이라는 암시적인 슬로건 뒤에 숨게 되었다."(314-5)


제6장 마스 강 전선의 붕괴


"독일군 기갑부대를 저지할 수 있는 기회가 단 한 번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5월 14일 오후였다. 바야흐로 이 시점이 서부전역의 가장 결정적인 국면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 같은 절호의 기회가 프랑스군이 계속해서 역습 시기를 미루는 바람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독일군은 제1,2기갑사단을 교두보 일대 확보에 투입할 수 없었고, 제10기갑사단의 주력은 후방에 위치한 터라 그 지역에 전력을 투입하지 못해 두 사단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 만일 프랑스군이 이곳으로 적시에 돌진했다면 결과는 뻔했다." "그러나 공격명령은 하달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역습의 전권을 위임받은 제21군단장 플라비니 장군이 전선으로 가는 내내 두려움에 휩싸여 전장을 이탈하는 수많은 병사들을 목격했는데, 이들은 수백, 수천 대의 독일군 전차들이 공격하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끊임없는 악재와 기갑부대의 공격대기지점 점령이 지연되는 데 초조해하던 플라비니는 결국 역습을 취소하고 말았다."(323-4)


"문제의 근원은 더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 훗날 많은 프랑스인들은 1940년 패배의 원인을 '저지'라는 단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개념 이면에 내재된 잘못된 사상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제2군사령관 욍치제르 장군의 명령은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지휘방식과 완전히 똑같았다. 그는 독일군의 돌파 시도에 다음과 같이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①돌파를 정면에서 저지한다. ②포병화력으로 적을 격멸한다. ③작전지역 내의 적을 섬멸하고 그 지역을 탈환한다. 이 방책은 일자형 전선을 다시 회복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작전술 차원의 기동전'에 대응하기에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었다. 독일군은 이와 유사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면 정면을 차단하기보다는 기갑부대로 적의 측방을 역습했다. 뒤집어서 만일 플라비니가 강력한 역습을 시행했다면, 월등히 우세한 전력을 보유한 프랑스군의 기갑부대가 북쪽으로 수 km 정도만 기동했다면 구데리안 기갑군단의 측방을 기습적으로 찌르는 대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325)


"이것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프랑스가 구데리안이 스톤 일대에서 실시한 '공세적 방어'를 작전술 차원의 주공으로 오판한 것이다. 프랑스군은 역습을 실시하는 대신, 실제로 돌파가 일어난 교두보의 서쪽 지역을 간과하고 예상되는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작전술 수준의 예비대로 편성된 정예사단을 방어작전에 투입했다 .이로써 독일군은 손쉽게 서쪽 방면을 돌파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또다시 독일군의 기만작전에 속았다. 지헬슈니트 작전이 시작될 때 독일군은 주공을 우익에 둔 것처럼 적을 속이고 중앙에서 돌파를 감행했다. 반면 스당에서 구데리안은 주공을 중앙에 둔 것처럼 가장하고 우측(서쪽)으로 돌진했다. 스당에서 돌파를 성공시킨 뒤 부대를 서쪽으로 진격시키되 동시에 그 역량 중 일부를 남쪽으로 투입할 것을 주장한 만슈타인의 구상이 또 한번 적중했다. 프랑스 지휘부는 물론, 대부분의 독일군 장군들도 만슈타인의 기가 막힌 행마行馬를 이해하지 못하긴 매한가지였다."(340)


"전투가 개시되자, 프랑스군 전차부대는 줄곧 제1차 세계대전 때의 경직된 교리에 따라 행동했다. 프랑스군 기갑부대들의 작전은 너무나 정적이고 선형적이었다. 그러나 독일군 전차들은 기동력을 발휘해 끊임없이 위치를 바꾸면서 전투를 수행했다. 또한 독일군의 통합된 무전통신 체계의 우수성이 여실히 증명되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순식간에 주공의 위치를 변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전차들은 극소수만이 무전기를 장착하고 있어서, 장교들이 자기 전차에서 내려 다른 전차로 찾아가 명령을 전달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바로 이때 프랑스군 전차들은 독일군의 기습을 받았다. 또 하나 구별되는 무기체계의 특징은 전차포탑의 형태였다. 프랑스군 전차의 포탑에는 단 한 사람만 탑승할 수 있어서 모든 전차장은 전술적인 판단과 결심, 전투지휘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탄약수와 포수의 임무도 병행해야 했다. 반면 포탑에 2~3명이 탑승한 독일군 전차의 지휘자들은 전투지휘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380)


제7장 대서양 해안을 향한 진격과 측방 노출 문제


"구데리안은 자신의 기갑부대들이 마스 강을 넘자마자 즉각 주도권을 쥐고 적 종심 깊이 돌진했다. 이것은 선형 전투지휘에서 비선형 전투지휘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그러나 대서양 해안으로 진격하는 동안 동시에 2개의 대결구도가 형성되었다. 하나는 전장에서 일어났고 다른 하나는 독일군 장군단 내부에서 발생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여전히 선형 전술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간격 발생과 노출된 측방에 대한 공포는 전차라는 무기체계가 없었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철저히 고립된 기갑사단이 적 후방으로 진격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계획이었다. 특히 지나치게 빠른 공격 템포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이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은 측방 방호를 위해 보병사단들이 기갑부대를 따라잡을 수 있도록 전차의 진격 속도를 늦출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반면 진보주의자, 특히 그 선봉에 선 구데리안 같은 이들은 그런 속도로는 결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며 반발했다."(397-8)


"5월 17일 아침, 클라이스트 장군은 상급부대의 지시에 따라 마지못해 구데리안의 지휘권을 박탈했다. 이 지휘권 분쟁은 독일군 최고지휘부에까지 큰 소동을 일으켰다. 이날 오후에 5월 15일자로 클라이스트 기갑군을 배속받은 제12군사령관 리스트 상급대장이 구데리안을 찾아왔다. 그는 상황을 진정시키고 룬트슈테트를 대신해서 구데리안에게 원래의 지휘권을 돌려주었다. 동시에 그는 A집단군의 동의하에 회유적인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는 구데리안에게 '전투 전위부대' 규모의 전진은 허락했지만, 군단 지휘소가 전방으로 진출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구데리안은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즉각 전차부대로 공격을 재개했지만, 무전기로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고 후방의 지휘소에서 야전 전화로 예하부대들과 연락을 취했다. 지휘소는 전방에 있는 제대와 수 km 길의 케이블로 연결되어 있어서 구데리안은 무전기를 쓸 필요가 없었고 상급 지휘관들의 감청을 피할 수 있었다."(401-2)


"5월 17일과 18일 '친히' 명령을 내려 기갑부대를 정지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총통 히틀러였다." "독일 군사사軍事史상 군사적 문외한이 군사작전에 개입한 경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1940년 5월 17일의 사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당시 독일군 총참모부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엘리트 집단이었고 이들은 냉철한 전문가적 판단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결정했다. 그러나 이 조직이 지금 비이성적인 외부인의 간섭을 받아야 하는 상상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했다. 문제는 히틀러가 전쟁과 군사적인 면에서 문외한이라는 것보다, 그의 심리 상태가 종종 매우 불안정했다는 것이다. 항상 총통은 어떤 가능성에 대한 극단적인 과대평가와 과장된 위기 사이를 오갔다. 지헬슈니트 작전 중에는 시간이 갈수록 성공 가능성이 커져갔는데도 그의 신경과민 증상은 점점 더 심해졌다. 작전의 성공을 확신한 유일한 인물인 히틀러는 스당 돌파의 성공을 보고받은 순간에도 사실을 믿지 못하고 '기적'이라며 말을 더듬었다."(404-5)


"히틀러는 '마른의 기적'이라 불리는 1914년 슐리펜 계획의 실패가 재연되리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노심초사했다. 반대로 할더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연합군이 솜 강과 엔 강을 따라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조치를 저지하려면 A집단군의 정예부대들 중 일부를 대서양 해안 방면이 아닌 콩피엔느를 거쳐 남서방향으로 선회시켜야 했다. 할더는 대서양 해안에서 혼란에 빠져 있는 적들을 포위·섬멸하는 데 몇몇 기갑사단과 제4군으로 증강된 B집단군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할더는 경쟁자 만슈타인보다 더 만슈타인다워졌다. 만슈타인은 2개의 개별적인 대규모 작전('황색계획'과 '적색계획')으로 연합군을 격멸하려고 했으나, 할더는 과거의 슐리펜처럼 단숨에 모든 것을 얻고자 했다. 히틀러는 이 아슬아슬한 계획에 기겁을 하고 강력하게 거부했다. 이로써 '남측방 방호의 문제는 공세적으로 해결한다'는 만슈타인의 구상은 공중으로 날아가버렸다."(406-7)


"몽코르네에서의 정지명령이 발령된 후 클라이스트 기갑군뿐만 아니라 제4군 예하의 호트 기갑군단도 멈춰서야 했다. 이 명령은 돌파구의 북측방에 연한 구데리안을 정지시킬 수는 있었으나 롬멜을 정지시키지는 못했다." "롬멜은 5월 16일 18:00시경 클레르파이에서 프랑스 국경을 넘어섰다. 곧 롬멜은 전방에 펼쳐진 연장된 마지노선과 함께 구축된 철조망과 지뢰지대 그리고 장갑화된 반구형의 포진지, 콘크리트 벙커 등의 윤곽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장군들 같았으면 망설이다가 더 유리한 여건을 조성해 다음날 공격을 개시했을 것이다. 게다가 중포병과 추가 보병부대, 공군 슈투카의 지원도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조치는 기습의 효과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롬멜은 상급 지휘관들의 지시를 거역하고 주저 없이 기습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아군이 공격할 준비가 완벽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도 야간에 전차부대를 집중 투입해서 강력하게 구축된 적 방어진지를 돌파한 것이다."(417-9)


"할더는 수차례 건의한 끝에 5월 19일, 히틀러에게서 모든 부대들이 대서양 해안까지 자유롭게 기동해도 좋다는 승인을 얻어냈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에서 수년 동안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치열한 진지전을 치렀던 격전지들을 가로지르며 재개된 지헬슈니트 작전의 결정적인 공세는 대성공으로 끝났다. 독일군 기갑부대는 연합군 전선에 쐐기를 형성함으로써 정예사단들이 집중되어 있던 연합군 북익 전체를 대서양 해안을 따라 완전히 포위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 포위망은 종심이 약 200km, 정면이 약 140km에 이르는 경이적인 규모였고 이곳에 포위된 부대는 벨기에군뿐만 아니라 프랑스 제1집단군 예하 제1영국원정군, 프랑스 제1,7군, 제9군의 패잔병 일부를 포함한 어마어마한 수였다. 연합군 사단들은 동쪽과 북쪽에 아직도 국지적인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이들도 독일군 B집단군에게 집중공격을 당하고 있었으며, 남쪽에서 독일군 제4군이 그들이 후방으로 돌진하고 있었다."(429-31)


"롤멜이 사실상 '아라스의 승리자'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롬멜은 연합군의 장군들과 달리 관행을 거부하고 적의 포탄이 떨어지는 최전선 한가운데서 자신의 사단을 지휘했다. 극도의 위험 속에서도 부하들과 함께한 그의 용기와 냉철함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는 갑자기 닥친 위험에 번개처럼 신속하고 과감하게 대응해 위기를 승리로 전환시켰다. 하지만 공명심에 휩싸인 그는 자신의 업적을 한층 더 높게 평가받기 위해 위협의 정도를 과장되게 표현해, '수백 대의 적 전차'가 자신의 부대를 공격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 보고 때문에 상급자들은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서부전역 이후에 롬멜이 히틀러에게 제출한 이른바 롬멜 보고서는 영국군의 역습 상황을 가리키는 적색 화살표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이렇게 하여 역설적이지만, 5월 21일 실패한 영국군의 역습은 '아라스에서의 정지 명령'을 탄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됭케르크의 전투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451-2)


제8장 됭케르크의 기적


"5월 24일, 독일군은 유일하게 연합군의 지배하에 있던 항구도시 됭케르크의 15km 전방까지 도달해 있었다. 선두부대는 이미 마지막 자연장애물인 아 운하를 넘어섰다. 독일군 기갑부대와 됭케르크 사이에는 이들을 저지할 만한 연합군 부대가 없는 진공 상태였다. 마지막 피난처가 봉쇄되어 약 백만에 가까운 영국군,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이 포위망에 갇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됭케르크에서 100km나 떨어진 동쪽에서 B집단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고 후방에서 다가오는 치명적인 위협에 사실상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이때 20세기 군사사에서 가장 기이한 사건 중 하나인 '됭케르크의 기적'이 일어났다. 연합군 병사들도 독일군 전차들이 마법의 손에 붙들린 것처럼 갑자기 정지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지명령은 히틀러에게서 비롯하지 않았다. 그는 장군단 내부의 위기가 한창 고조되었을 때에야 개입했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간의 대립 양상이 바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455)


"됭케르크 직전에서의 정지명령은 독일 육군 내부에서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단 한 차례의 명령으로 이처럼 격렬한 집단 항명이 일어난 경우는 없었다." "훗날 구데리안은 〈최상급 지도부의 간섭이 전체적인 전쟁 결과에 최악의 영향을 미쳤다〉라고 비판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부 부대들의 입장에서 이 명령은 정지명령이 아니라 철수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아 운하의 동쪽에 확보한 교두보를 포기하고 이 선에서 물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연합군 부대는 아무런 제약 없이 그곳에 진지를 편성할 수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 친위대 부대장이었던 제프 디트리히는 히틀러가 친히 내린 지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역했는데, 이 일만 보더라도 이 지시가 얼마나 비합리적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구데리안조차도 히틀러의 가장 충직한 부대가 반동행위를 취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지만, 이 독단적인 행위는 관대하게 처리되었다."(463-6)


"5월 26일 18:57분, 드디어 다이나모Dynamo 작전이 개시되었다. 하지만 철수작전은 당초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더디게 진행되었고 5월 28일까지 겨우 9,965명만이 승선해 영국으로 수송되었다." "5월 29일에는 47,310명이, 5월 31일에는 그보다 많은 68,014명이 구조되었다. 마침내 '됭케르크의 기적'이 하나둘씩 실현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기상조건도 연합군의 철수작전에 톡톡히 한몫을 했다. 파도가 높고 거칠기로 유명한 도버 해협의 바다가 며칠 동안이나 잠잠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다이나모 작전이 시행되던 9일 동안 해수면은 마치 연못처럼 잔잔했다." "연합군의 철수작전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또 하나의 요소는 그 기간 동안 하늘에 낮고 짙게 드리워져 있던 시커먼 구름이었다. 이 덕분에 독일 공군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연합군은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실시된 다이나모 작전에서 영국으로 구조된 연합군 병력은 총 338,682명이었다."(472-3)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됭케르크의 수수께끼'를 언제나 객관적인 측면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 했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독재자의 순수한 주관적인 동인을 배제했기 때문에 진정한 동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사실 그에게는 어떠한 전술적, 작전술적, 전략적, 그리고 정치 이데올로기 논리보다도 군사적 최고지도자로서의 개인적인 권위가 훨씬 더 중요했다. 히틀러는 됭케르크에서 기갑부대를 정지시켰다기보다는 육군 총사령부 장군들의 지휘권 행사를 중단시켰다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에게는 분명 자신의 이념, 즉 '총통의 이념'이 가장 중요했다." "서방국가들에 대한 공세는 명백히 '그의 전쟁'이었다. 군사 보좌관들은 하나 같이 서부전역에 승리할 수 없다고 예견했는데 뜻밖에 그가 옳았다는 것이 현실로 드러났다. 그렇게 세계 전쟁사상 가장 스펙터클한 승리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던 순간에 히틀러는 이 전쟁의 위대한 승리자가 자신이 아니라 휘하의 장군들이 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 것이다."(490)


"5월 24일, 샤를르빌에 위치한 A집단군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히틀러는 자신이 신임하는 룬트슈테트가 권한을 박탈당해 무기력해진 모습을 보았다. 육군 총사령부는 자신의 의지에 반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독단적으로 그 같은 조치를 결정하고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는 자신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고 느꼈다. 지금까지 예하 장군들 중 감히 자신을 무시하거나 웃음거리로 만들고 그에게 도전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육군 총사령부의 일부 고위급 장교들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감정이 폭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지휘권을 바로 세우고, 누가 절대적인 군사 지도자인가를 과시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당한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를 공격했다. 이미 정지한 기갑부대를 얼마나 오랫동안 대기시킬 것인지에 관한 결정권을 (차하급 지휘관인) 룬트슈테트에게 위임함으로써 브라우히치와 할더를 엑스트라로 전락시켜버린 것이다."(491)


제9장 서부전역의 종결


"남서쪽을 향한 새로운 공세가 시작된 시점에 A집단군 예하부대가 재편성되었다. 5월 31일부로 구데리안 군단은 기갑군으로 승격되었고 구데리안은 대서양 해안에서 스당의 남쪽으로 공세를 전환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A집단군의 주력이 남쪽으로 진격하는 동안, 구데리안은 스당과 스위스 사이에 배치된 프랑스 제2집단을 포위하기 위해 측방으로 기동한 후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스위스 국경을 목표로 공격했다. 이로써 그는 1939년 가을, 만슈타인이 착안한 작전술 차원의 포위망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 당시(1939년) 만슈타인은 A집단군 참모장으로서 제2단계에서는 프랑스군의 후방, 즉 〈마지노선 후방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슐리펜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격렬한 프랑스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6월 9일 A집단군의 전면적인 공세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할더는 그 다음날 자신의 일기에 매우 유쾌한 어조로 이렇게 기록했다. 〈칸나이가 눈앞에 보이는 듯하군〉."(497)


"그 사이에 C집단군 예하 제7군도 브라이자흐에서 라인 강을 도하해 마지노선 돌파에 성공했다. 이들은 남부 알자스 방면으로 진출하여, 6월 19일에는 구데리안의 기갑군 중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일부와 벨포르에서 연결작전을 성사시켰다. 그리하여 낭시와 벨포르 사이에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해 이곳에 있는 3개의 프랑스 야전군을 에워쌌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슐리펜 계획의 결정판이었다. 됭케르크에서 실패했던 '칸나이'를 이번에는 완벽하게 성공시킨 것이다. 이 '로트링엔'의 포위망에서 독일군은 50만 명의 프랑스군을 포로로 획득했다. 사실 서부전역은 6월 17일에 종결되었다고 봐야 한다. 이날 새로 임명된 프랑스 수상 페탱 원수는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자 휴전을 제의했다." "6월 22일, 제1차 세계대전 시 독일이 항복문서에 조인했던 콩피에뉴의 숲에서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히틀러는 1918년 11월 11일 정전협정이 맺어진 이곳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던 것이다."(498)


제10장 승리와 패배의 원인


"제1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의 도움으로 승리한 프랑스에게 파로스의 승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전국 국민 중 프랑스인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실종자와 사망자가 도합 약 150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18~27세 남성 인구 중 27%가 전장에서 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베르됭 콤플렉스'라는 정신적 상흔이 프랑스인들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다. 육체적·심리적으로 지칠 대로 지친 프랑스 국민들은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런 상태였다. 이즈음 전쟁피로증과 평화를 갈망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히틀러는 노련하게 평화 선전공세를 펼치며 그 위장막 뒤에서 군사력을 증강했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은폐하기 위해 수차례 프랑스와 영국 출신의 영향력 있는 평화주의자들을 몇 명 초대하여 융숭하게 대접했다." "서유럽 사람들은 독일의 군사력 재건에 대해서도, 주데텐 위기 때에도 그리고 폴란드 침공 시에도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505-6)


"전쟁이 종식된 후 프랑스에서는 패전의 책임자를 색출하는 작업이 시행되었다. 그들은 소위 좌익이라 불린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몇몇 장군들이 포함된 우익집단들은 평화주의라는 독극물로 사회를 분열시킨 이들을 극렬하게 비난했다. 그들로 인해 군의 전력이 약화되었다는 논리였다. 장군들은 특정 시민계층의 타락을 부각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실책을 무마할 수 있는 증거를 만들어냈다. 조국 패망의 결정적 원인은 군사적 실책이 아닌 오로지 '사회적 문제' 때문이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비시 괴뢰정권 하에서 리옹에서 재판이 열렸을 때, 피고로 지목되어 제1열에 기립한 사람들은 장군들(가믈랭을 제외하고)이 아니라 붕괴한 제3공화국의 정치가와 지식인이었다. 더 기막힌 사실은 조국 패망의 가장 큰 책임자 중 하나인 욍치제르 장군이 국방장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사회주의자를 비판했지만,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만은 패전의 결정적인 책임이 프랑스군 장군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508)


"마지노선에 대해 모든 역사가들의 공통된 견해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만 그 효과가 극히 미미했던 비경제적 투자였다는 것이다." "마지노선이 원래 순수 방어전략의 일환으로 계획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이를 이용해 국경지대를 강력하게 방비함으로써 수많은 부대를 다른 지역으로 전용할 수 있는 융통성을 확보했고, 이로써 마지노선의 존재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행하게도 이른바 '마지노 사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작전술 차원의 기동전'의 르네상스가 태동한 반면, 프랑스는 어떻게 해서든 '개활지에서의 전투'를 피하고 마지노선 뒤에 안주하려 했다. '선형 방어' 교리에 집착했던 프랑스군 장군들은 제1차 세계대전 시의 참호전투를 재현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마지노 사상'은 수동적인 태도, 수세적인 자기 구속, 주도권의 단념을 의미하는 엄청난 재앙이었다."(509-10)


"연합군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들의 전투력 및 경제력의 양적 우위를 확신했고, 이 때문에 전쟁을 막대한 물량전으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했다. 반면 독일군은 진지전의 선형적 사고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공격전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연합군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계회에 의거해 포병과의 협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병진대형으로 전 부대가 동시에, 정확히 규정된 시간과 정확히 지시된 선까지 공세를 실시해야 했다. 이와 정반대로, 독일군 돌파부대 지휘관들은 철저히 독단적으로, 인접 부대와의 연결과 측방 노출을 고려하지 않고 쇄도해 들어갔다." "연합군은 적의 저항이 가장 강력한 지점(강점)에 예비대를 집중한 반면, 독일군은 적의 저항이 가장 취약한 지점에서 예비대를 집중 운용했다. 공격 작전 시 최초 제1제대는 적의 강점을 회피하고, 후속부대가 이곳을 무력화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중단 없는 '제파식 공격'의 목표는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적의 종심 지역으로 돌진하는 것이었다."(529)


"리들 하트에 따르면, 독일군 돌파부대의 성공의 열쇠는 바로 '간접접근'에 있다. 이들에게는 적 부대의 격멸과 적 부대와의 직접적인 교전보다는 가급적 교전을 회피하고 종심 깊이 진격해서 적의 병참선과 지휘통제의 중추부 그리고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더욱이 이와 같이 전역이 진행되면 적에게 '혼란'이라는 치명적인 심리적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실제로 돌파부대가 일단 적의 최전방 부대의 후방으로 돌진하는 데 성공하면, 방어선상의 진지들에 투입되어 있던 연합군 병사들은 매번 혼란에 휩싸였다. 즉 전선의 아주 미세한 지점, 단 한 곳이 돌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어체계 전체가 붕괴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술적인 돌파가 실패한 이유는 기갑부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1940년의 성공에는 이러한 역사적 근원이 있었다. 구데리안은 과거의 '돌파부대 전술'의 기본원칙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현대적인 기갑부대와 결합시켰다. 전격전의 핵심요소는 이렇게 창안되었다."(530)


마무리 총평과 에필로그


"결론적으로 1940년의 '전격전'은 히틀러가 탄생시킨 그리고 그가 주창한 '전격전 전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 인간은 〈절망의 정점에 이르면 엄청난 위기상황에서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없으며, 다른 탈출구가 보이지 않으면 대담한 돌출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마스 강을 건너 대서양 해안을 목표로 기동한다는 만슈타인의 지헬슈니트 계획은 대담한 돌출행동이었다. 연합군 장군들은 이 같은 대담한 행동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작전의 숨가쁜 진행에 연합군 장군들은 적잖이 당황했는데, 우유부단했던 히틀러도 예하 지휘관들이 점차 작전을 독단적으로 진행함에 따라 자신의 손에서 지휘권이 빠져나가는 것을 깨닫고는 당황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통제력을 되찾기 위해 됭케르크를 눈앞에 둔 기갑부대를 정지시켰는데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그러므로 '전격전 사상'은 서부전역의 승리의 근원이 아니라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549-50)


"독일 국방군에게 서부전역은 찬란한 대승리이자 비극이었다. 특히 스당의 신화가 여기에 큰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1870년과 1940년, 두 번씩이나 독일군은 큰 승리를 달성했으나, 매번 그 승리에서 잘못된 결론을 도출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혹독한 파멸을 맞게 되었다. 프랑스 육군은 베르됭에서의 승리로 진지전을 과대평가하게 된 반면, 독일군은 스당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작전술 차원의 기동전'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서부전역이 종결된 후 독일군 장군들은, 특히 이전까지 개혁적 사상에 회의를 품던 이들까지도, '전격전'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과는 정반대로 신속한 작전술적인 결전을 시행하여 경제적·전략적으로 우위에 있는 적과도 대적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전격전'은 칸나이 사상에서 비롯된 '기계화된' 기동전의 르네상스였다. 하지만 슐리펜과 마찬가지로 독일군 장군들은 누가 결국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자였는지를 간과했던 것 같다."(551)


"독일은 서방국가들과의 전쟁을 사전에 장기전으로 계획했으며 전쟁 기간에 제한을 두지 않고 시작한 반면, 소련과의 전쟁은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더구나 이러한 확정적인 종료 시점에 의거해 인적·물적 자원을 제한적으로 동원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모스크바에 입성하지 못했다. 그 결과 1941년 12월 영하 36도까지 떨어지는 뜻밖의 강추위 속에서 동복을 준비하지 못한 대부분의 독일군 병사들은 하복을 입고 적과 맞서 싸워야 했다. 더욱이 당시 국방군의 지상군, 공군 그리고 해군이 서로 다른 지역에 분산되어 한창 해당 전역의 전투를 치르고 있던 중에도 히틀러와 휘하의 장군들은 소련의 적군赤軍을 마치 '진흙으로 빚어진 거인' 같은 존재로 보고, 최초 돌파 단계에서 단숨에 쓰러뜨릴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독일군이 저지른 결정적인 실수는, 전략적 차원에서 전격전을 수행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선제타격능력이 열세에 있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552-3)


"결론적으로 1940년의 서부전역은 계획되지는 않았지만 성공한 '전격전'이었으며, 1941년의 동부전역은 반대로 기계획되었지만 실패한 '전격전'이었다. 1942년, 독일군은 새로운 전법으로 다시금 공세에 돌입하여 볼가 강변과 나아가 코카서스 일대까지 진격하여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그러나 이는 작전술 측면에서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찰나적 승리였으며, 독일은 전략적 차원에서 조만간 파멸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소련과 그 동맹국들의 경제적 우위가 효과를 발휘했다. 이것은 전차의 생산능력에서 잘 드러난다. 독일제국은 다른 무기체계를 제쳐두고 오로지 전차 생산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자재의 부족으로 인해 겨우 2만 5천 대를 생산할 수 있었다. 반면 연합국 중 주요 3개국인 미국, 영국, 소련은 도합 20만 대의 전차를 보유했다. 제2차 세계대전도 결국 제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전장에서의 전투력보다 후방의 병참능력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던 것이다."(554)


"여기서 다시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일어난다. '전격전'이라는 현상도 또다른 관점에서 시대착오적이지 않았는가? 산업화 시대에 두 번의 세계대전은 순수 전략적으로, 무엇보다도 방위산업의 생산 능력이 전쟁의 승부를 결정지었건만, 히틀러와 그의 장군들은 너무나 편협하게 군사적인, 특히 작전술적 측면에만 집착했다. 따라서 '전격전'은 혁명과 보수의 양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순수하게 작전술 차원만을 고려한다면 독일군 장군들은 현대적인 방책을 이용했지만 전략적 관점에서는 그와 정반대로 지극히 시대착오적인 전쟁 양상에 몰두했다. 이미 19세기에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군사적으로 더 우세한 남군이 경제적으로 월등한 북군에게 패망함으로써 군사력이 경제력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음에도 말이다. 돈키호테는 시대착오적인 전쟁 양상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요컨대 독일군 기갑부대 작전의 '전격전'은 우월한 산업 잠재력이라는 풍차에 맞선 장창 공격이었을 뿐이다."(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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