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와 애국 - 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공공성
오구마 에이지 지음, 조성은 옮김 / 돌베개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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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오늘날 사람들은 종종 〈전후, 일본은 풍요로워졌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 전후란 어느 시대를 가리킬까? 전쟁의 피해 때문에 크게 하락했던 일본의 1인당 국민 총생산은 패전 후 10년이 지난 1955년에 전쟁 전 수준을 회복했다. 따라서 1954년까지를 전후라고 생각한다면, 〈전후, 일본은 가난해졌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또한 현대에는 〈전후 정치의 기본이었던 55년 체제〉와 같은 표현도 쓰인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이, 55년 체제는 1955년에 성립되었다. 그리고 1956년 『경제 백서』經濟白書에는, 당시 유행어가 된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즉 1955년에 전후가 끝났다는 것이 당시의 인식이었다. 그 전후가 끝났을 때, 55년 체제와 고도 경제성장으로 상징되는 또 하나의 전후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는 잠정적으로 앞의 전후를 '제1의 전후', 뒤의 전후를 '제2의 전후'라고 부르겠다. 당연히 〈전후, 일본은 풍요로워졌다〉라고 말할 때의 전후는 '제2의 전후'를 가리킨다."(19-20)


"제1의 전후와 제2의 전후에는, 똑같은 말도 울림이 달랐다. 즉 국가나 민족이라는 말의 울림도 두 시기에 다르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제1의 전후는 질서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현실은 바뀔 수 있다〉라는 말이 현실감 있게 울린 시대였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서 질서의 한 형태인 국가라는 말은 어떻게 울렸을까? 그것이 인간을 짓누르기 위해 주어진 체제가 아니라 변혁이 가능한 현실의 일부로서 이야기된 국면이, 부분적으로나마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애국이라는 말은 어떻게 울렸을까? 그리고 그것은 진부하게 취급되기 이전의 민주라는 말과 어떤 관계였을까? 오늘날에는 〈전후 민주주의는 애국심을 부정했다〉라고 종종 평가되는데, 민주와 애국의 관계는 정말로 그러했을까? 내셔널리즘에 관한 전후의 언설을 검증하는 것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것은 당연히 국가와 개인의 관계, 혹은 공과 사의 관계에 대한 전후의 언설을 재검증해 가는 작업이기도 하다."(21-2)


1부


1 윤리의 초토화─전쟁과 사회 상황


"미일 개전 때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전쟁을 찬미했다. 이는 절반의 사실에 불과하다. 그들이 직면한 현실은 공표된 문면과는 약간 달랐다. 지식인이나 작가들은 전쟁에 협력하는 작품을 쓰거나, 아니면 창작을 단념하고 군수 관련 공장에서 일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처했다. 무엇보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수감의 공포, 고문과 옥사의 공포였다. 탄압의 공포는 지식인들 사이에 고립감과 의심증을 낳았다. 시대에 편승해서 마지막까지 이익을 얻은 극히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많은 지식인들에게 전쟁은 실로 악몽이었다. 그것은 표면에서 숭고한 이념에 대한 찬미가 이루어지고, 뒷면에서는 공포와 보신, 의심증과 배반, 환멸과 허위를 하나로 뭉쳐 놓은 것이었다. 타자에 대한 신뢰와 자기 자신의 긍지가 뿌리째 뽑힌 그 체험은, 굴욕감과 자기혐오 없이는 좀처럼 회상할 수 없는, 서로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않은 상처로 봉인되었다. 그러나 이런 회한의 기억이 전후사상의 중요한 저류가 된다."(58-66)


"1943년 10월부터 문과계 대학생의 징병 유예가 없어지고, 이른바 학도 출진이 이루어졌다. 전쟁 후기에 입영은 죽음과 거의 같은 뜻이었다." "이런 가운데, 정부에 대한 비판적 심정은 정부가 그들에게 가르친 애국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즉 정부가 주창해 온 애국과는 다른 종류의 진정한 애국[전쟁 반대]이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 제도의 레이테Leyte섬에서 사망한 한 학도병은 〈과연 누가 진정한 애국자였는지는 역사가 결정해 줄 것입니다〉라고 썼고, 중국 대륙에서 전사한 학도병도 〈내 충절의 방법은 아마도 현재 군 수뇌부의 근본 방침과 어긋난다〉라고 말한다." "학도병들의 경험은 지식인 전쟁 체험의 한 축소판이었다. 그것은 대중에 대한 모순적인 감정을 품게 만든 굴욕의 경험이면서, 사상과 사회과학을 일본 사회의 변혁에 도움이 되게끔 만들 필요성을 통감케 한 경험이었다. 이런 경험은 전시기에 형성된 '진정한 애국'이라는 표현과 함께, 전후사상에 크게 반영된다."(66, 73-4)


"가치관의 붕괴나 윤리의 저하는 8월 15일에 급격히 찾아온 것이 아니라, 전시 중부터 진행된 사태였다. 정부가 내세운 이념이 허구로 가득했다는 점은, 이미 많은 인간들이 느끼고 있었다. 말하자면 패전은 최후의 일격에 불과했다." "많은 죽음과 추악함에 직면하고 기아와 빈곤으로 추락했던 사람들에게, 전쟁 지지에 대한 회한은 컸다." "허위와 보신, 무책임과 퇴폐, 면종복배의 이면에 만연했던 이기주의, 그곳에는 물리적인 패배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붕괴가 있었다." "허위와 무책임을 낳고, 대량의 죽음과 파괴를 가져온 황국 일본과 신민의 관계, 이것을 대신할 공과 사의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져야 할까. 무너진 '국민 사이의 인간다운 연대'는, 어떤 새 원리로 다시 구상할 것인가.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일본을 창출하는 것이다.〉 전사한 학도병이 유고에 남긴 이 말은, 패전을 맞닥뜨린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된 마음이었다. 전후라고 불리는 시대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77, 81-3)


2 총력전과 민주주의─마루야마 마사오, 오쓰카 히사오


"일본에서는 프랑스나 한국 등과 달리, 패전 후에 해외 망명자들이 귀국해서 정권을 세우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후의 위정자와 지식인 대부분은 전쟁 전과 전시부터 활동해 온 사람들로, 사고의 전환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전후사상의 모색은 새로운 언어 체계를 외국에서 수입하기 이전에, 전시기의 언어 체계를 바꾸어 읽으며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시작했다. 여기서 전후 민주주의의 기반이 된 것은 총력전의 사상이었다." "예를 들어 훗날 수상이 되는 아시다 히토시는 전쟁 종결의 원인과 책임을 추궁하는 의견서에서 〈근대 총력전에서 우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한 사람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에 책임을 느끼게 해야 한다. 국민들이 당면한 전쟁을 군부 및 정부의 전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근대전에서는 우선 이 점만으로도 패배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며, 통제 철폐와 언론 자유화를 주장하고 있다. 즉 아시다는 총력전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민주화를 주장했다."(87-8)


"패전 직후에 다수 등장한 이런 논조는, 모두 국민의 저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전쟁이 끝났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패전이라는 충격에 직면한 사람들이 취했던 일종의 심리적 방어 기제였다. 민주화에 대한 지향은 이런 내셔널리즘과 표리일체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내셔널리즘은, 전쟁으로 붕괴된 국민의 도의道義를 재건한다는 주장과도 연결되었다. 히가시쿠니나 이시와라, 고야마 등은 모두 전시 중의 암시장 경제나 관료의 무책임을 들어 전쟁에 패한 원인은 도의의 퇴폐에 있다고 주장하며, '1억 총참회를 하는 것이 우리나라 재건의 첫걸음'이라고 외친다. 이 1억 총참회라는 말은, 히가시쿠니 수상[쇼와 천황의 조카]이 1945년 8월 28일에 가진 기자 회견에서 발언한 뒤로 유명해졌다. 연합국과 아시아 국가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사죄한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패전의 굴욕감을 표현하기 위해, 패배 원인을 도의의 퇴폐에서 찾는 가운데 나온 말이었다."(89-90)


"1943년 10월, 29세의 마루야마 마사오는 게이오대의 『미타 신문』이 주최한 후쿠자와 유키치 특집에 「후쿠자와에서의 질서와 인간」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여기서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에 대한 당시의 분열된 평가에 대해 언급한다. 한 가지 평가는 후쿠자와를 서양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개인주의자로 보고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를 아시아 진출을 주장한 국가주의자로 찬미하는 것이었다." "마루야마는 개인과 국가를 대립시키는 개인주의적 국가관이 아니라, 주체적인 책임 의식을 가진 인간이 능동적으로 국가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 즉 '개인주의자라는 점에서 실로 국가주의자'가 되는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마루야마의 주장은 아시다의 〈근대 총력전에서 우위를 획득하려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에 책임을 느끼게 해야 한다〉라는 말과 거의 같은 취지이기도 했다. 즉 마루야마의 사상은 특이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게 공유되었던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95-7)


"마루야마는 1946년 5월에 발표한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에서 일본 사회에는 자유로운 주체적 의식을 지닌 개인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내발적內發的인 책임 의식이 없다고 보았다. 거기서는 권력자조차도 책임 의식을 결여한 '폐하의 하복' 혹은 하료下僚의 로봇일 수밖에 없다는 '무책임의 체계'가 지배한다. 그와 동시에 상위자가 가한 억압을 하위자에게 발산한다는 '억압 이양'이 사방에서 발생한다. 그것을 국제 관계에 투영한 것이, 구미 제국주의의 압박을 아시아 침략으로 해소하려 한 행위였다. 게다가 이런 일본 사회에는 근대적인 사私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公의 명확한 경계도 없다. 거기서 발생하는 것은 공의 이름에 따른 사생활에의 개입이며 공의 이름을 빌린 사적 이해의 추구다. 또한 근대적인 정교분리도 이루어지지 않아서 최고 권력자인 천황이 동시에 윤리의 정점이 되며, 이런 '천황으로부터의 거리'가 정치적 지위인 동시에 윤리의 평가 기준이 되었다고 마루야마는 보았다."(108-9)


"이런 마루야마의 역할을 경제학의 언어로 행한 사람이 오쓰카 히사오였다. 오쓰카는 1944년 7월 「최고도 '자발성'의 발양」이라는 논고를 발표하여, 생산력 확충을 위해서는 노동자가 〈'자발성'과 '목적 합리성'〉을 내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자발성의 중시는 필연적으로 근대적 개인의 재평가까지 이어졌다. 근대적 개인의 재평가는 '근대의 초극론'과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이기적인 활동에 바탕을 둔 자유방임 경제를 계획적인 통제 경제로 넘어서야만 생산이 확충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그런 의견에 대항해서 근대적 개인을 재평가하기 위해, 오쓰카는 그것이 질서 없는 이기주의가 아님을 밝혀야 했다. 즉 오쓰카는 마루야마와 같은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마루야마가 개인주의와 멸사봉공의 대립을 극복한 국민주의를 구상했듯, 오쓰카는 이기적 영리심과 멸사봉공의 대립을 넘어선 경제 윤리를 추구했다."(114-6)


"마루야마와 오쓰카가 근대라는 말로 설명한 것은, 서양 근대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것은 비참한 전쟁 체험의 반동으로서 꿈꾸게 된 이상적인 인간상을, 서양 사상의 언어로 빌려서 표현하려는 시도였다. 개個의 확립과 사회적 연대를 겸비하고 권위에 대항하여 자신의 신념을 지켜 내는 정신을, 그들은 주체성이라 이름 붙였다. 그런 주체성을 갖춘 인간상을 마루야마는 근대적 국민, 오쓰카는 근대적 인간 유형이라고 불렀다. 즉 주체성이란 전쟁과 패전의 굴욕으로부터 다시 일어서기 위해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말이었다.  그 주체성은 국내에서는 권위에 항거하는 '자아의 확립'으로, 국제 관계에서는 미소美蘇에 대한 자주독립이나 중립을 주창하는 내셔널리즘으로 각각 표현되었다. 마루야마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일신 독립하여 일국 독립한다〉라는 말을 사랑한 것은 그런 심정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마루야마와 오쓰카의 사상은 공통의 전쟁 체험을 가진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125-6)


3 충성과 반역─패전 직후의 천황제


"패전 직후의 일본이 '절대 왕정 단계'라는 역사 인식을 토대로 공산당이 주장한 것은, 우선 천황제를 타도하는 시민 혁명을 목적으로 삼고, 그 후에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간다는 '2단계 혁명론'이었다. 이런 역사관의 상식은 왕정을 타도한 프랑스 혁명으로 신분과 지역을 초월한 근대 국민 국가가 성립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천황제가 남아 있는 한 일본은 국민 국가가 아니며, 우선 국민 국가의 형성을 목표로 천황제를 타도해야 했다. 거기서는 봉건제의 잔재인 천황제와 근대적인 국민 혹은 민족이 대립하는 존재였다. 마루야마가 천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초국가주의와 근대적인 국민주의를 대비시킨 것에도, 이런 역사관이 깔려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국민이란 천황제에 지배당하는 신민臣民과 구별된, 자유롭고 평등한 근대적 인간이었다. 이노우에 기요시의 표현에 따르면 내셔널리즘과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국가인가, 천황의 국가인가〉라는 선택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156)


"이런 바른 애국심의 역사적 사례로 이따금 거론된 것이, 마루야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메이지의 자유 민권 운동이었다. 1946년 『역사가는 천황제를 어떻게 보는가』에서 이노우에는 자유 민권 운동의 활동가를 애국자들이라고 부르며 상찬했다." "패전 직후에는 이런 논조가 광범위하게 공유되었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예를 들면 오다카 구니오는 〈일본인은 충군이기는 했지만 서양인에 비해서 특별히 애국적이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경제학자 오코우치 가즈오도 근대 유럽에서는 〈애국 운동은 항상 항상 서민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 낡은 특권에 대립해서 새로운 질서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운동으로 등장했다〉라고 말했다." "이런 논조를 따라, 오다카 구니오도 구래舊來의 일본에서는 〈종적 일선을 거슬러 올라가 '위의 한 분'에게 충절을 다하는 것만이 문제이며, 횡적으로 제휴하고 횡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조국을 위해 동포를 위해 헌신하는 일은 제2, 제3의 문제였다〉라고 말한다."(157-8)


"천황제와 대치된 것이 주체성이며, 연대와 단결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마루야마나 가토 슈이치가 근대적인 주체성의 확립을 부르짖으면서도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라던가 〈부끄러움을 알아라〉라는, 다소 고풍스러운 말을 빈번히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런 논조는 동시대의 다른 논자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민법학자 가이노 미치타카는 1948년 5월의 논고에서 천황제를 〈무책임을 긍정하는 제도〉, 〈'국민'을 만들지 않는다〉라고 비판하면서 보수파를 향해 〈신헌법의 공포 앞에 할복이라도 해서······ 천황에 대해 '사죄'를 해야만 했을 터이다〉라고 말한다. 천황제를 폐지하라는 근대적 지향과 〈할복하라〉라는 무사도풍의 비난은 논리적으로는 모순될 터였다." "당시의 천황제란 단순히 군주가 존재하는 정치 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굴욕적인 기억과 결합된 말이었다. 그런 천황제와 대치되는 주체성은, 한편으로는 근대적인 언어로 이야기되면서도, 동시에 무사도적인 언어로 표현되기도 했다."(167)


"천황제가 인간을 억압한다는 인식과 천황 개인에 대한 경애가 교차하는 데서 하나의 주장이 생겨났다. 쇼와 천황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천황제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천황제로부터 천황의 해방'이다. 전후의 신헌법하에서, 천황에게는 참정권도 없고, 신앙이나 언론 출판의 자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령 「공산당에 들어가는 변」을 쓴 모리타 소헤이는 〈천황을 기요틴에 내거는 사태에 이른다 해도, 나는 공산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단호히 거기에 서명하지 않을 것을 여기 명언해 둔다. 이것은 내가 천황제의 폐지와 천황 일가를 어디까지나 개별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주장한 것은 사람들에게 굴욕을 강제했던 사회적, 심리적인 시스템으로서의 천황제의 폐지였으며, 꼭 천황 개인의 처단은 아니었다. 거기서 주장된 것이 새로운 내셔널리즘과 윤리의 재건이며, 민족 도덕의 확립이었다. 그리고 민족 도덕의 확립을 위해서는 천황이 어떤 형태로든 전쟁 책임을 밝힐 것이 요구되었다."(168-72)


4 헌법 애국주의─제9조와 내셔널리즘


"대부분의 전후 지식인들은 패전으로 황폐해진 일본을 재건하기 위해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패전 직후에 우선 내세워진 것이 문화 국가나 평화 국가라는 표어였다." "이런 평화나 도의道義의 주장은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 패배한 일본에 남겨진 마지막 국가 정체성의 기반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원자 폭탄으로 상징되는 구미의 군사력에 대한 대항 의식과도 결합되어 있었다." "육군 중장 이시와라 간지도 그런 논리에 따라 비무장 평화주의를 주장하며 〈몸에 쇠붙이 하나 갖추지 않으면서 세계 평화와 인도를 위해 그 태도를 규탄하고 반성을 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평화주의의 논조가 1945년 8월 시점부터 존재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민주화의 목소리가 점령군의 지령 이전에, 총력전 시기의 언어 사용의 연장선상에서 출현한 것과 마찬가지로, 평화주의의 목소리는 도의 국가라는 슬로건의 연장으로서 출현했다. 헌법 제9조는 이런 토양 위에 등장한 것이다."(192-4)


"당초 점령군의 제안에 놀랐던 보수적인 정치가들이 헌법을 용인하게 된 큰 이유는 상징 천황을 인정한 제1조의 존재였다. 이 조항으로 말미암아 천황제 폐지의 위험이 없어졌다." "동시에 이 헌법은 패전으로 위기에 직면한 보수 정치가들이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GHQ의 '공직추방령'에 내몰린 보수정치가들로서는 과감한 개혁안을 제시하는 길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실제로 신헌법 초안의 공표는 보수 정권의 위기를 구해 주는 꼴이 되었다. 3월 6일의 초안 요강 발표 이후로 이 초안을 지지하는 사회당과 천황제 타도를 외치며 초안에 반대하는 공산당이 대립한다. 그리고 정부는 초안 요강을 공표한 지 4일 뒤, 4월에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고시했다. 개혁의 기운을 선수 친 보수 정당은 지지를 모았고, 특히 요시다 시게루를 중심으로 한 자유당이 이 선거에서 약진하여 정권을 획득했다. 신헌법은 단순히 미국의 압력으로 밀어붙여졌다기보다는, 보수 정치가들의 생존책으로 수용되었다."(199-200)


"1946년 시점에서 헌법의 태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점령군과 대결할 각오를 요구하는 행위였기에, 결국 의회에서의 헌법 심의는 압도적인 다수로 가결되었다. 그리고 제9조에는 국제 평화를 주창한 제1항과 전력 포기를 주창한 제2항 사이에,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라는 문구를 넣는 수정이 가해졌다. 이 수정은 이후의 재군비에서 국제 평화라는 목적을 해하지 않는다면 전력 보유가 가능하다는 헌법 해석을 낳는다. 패전 직후의 헌법 논의에서 흥미로운 점은, 난바라 시게루를 비롯해 이후 호헌 세력이 되는 사람들이 신헌법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후에 개헌 세력이 되는 보수 정치가들은 헌법을 상찬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난바라가 헌법을 비판한 것은, 헌법의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안이하게 헌법을 개정하는 정치 자세에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점령군이 두려워서 헌법을 상찬했던 보수 정치가들도 미국이 방침을 전환한 1950년대 이후로 헌법 비판을 시작했다."(212)


5 좌익의 '민족', 보수의 '개인'─공산당·보수계 지식인


"1950년대 중반까지 공산당의 권위는 신과 같았다. 어떻게 해서 그런 상황이 생겼을까. 첫 번째 이유는 고도 경제 성장 이전의 일본에 존재한 압도적인 빈부격차다. 도시와 농촌, 상층과 하층 간 격차는 컸으며 패전 후의 거리에는 고아와 전쟁 피해자가 넘쳐 났다. 이런 현실 앞에 공산당의 존재가 빛나보였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일본에서 전쟁에 반대한 유일한 정당이 공산당이었던 점이다. 전전의 비공산당계 무산 정당 및 노동 운동은 모두 전쟁에 협력한 과거가 있었다. 전후가 되어 비공산당계의 사회주의자들이 합동해서 일본사회당을 결성했지만, 전쟁 협력의 오점을 지니지 않은 점에서 공산당의 정신적 우위는 명백했다. 세 번째이자 가장 큰 이유는 지식인들의 회한이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패전 후의 지식인들을 〈회한 공동체〉라고 불렀는데, 이때의 회한이란,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결과의 문제보다도, 전시기 그들의 처신에 대한, 말하자면 윤리적인 문제였다."(220)


"패전 후의 논단에서 우익 국수주의자는 세력을 실추했다. 그 대신에 올드 리버럴리스트라고 통칭된 지식인들이 보수 논단을 형성했다." "그들에게는 사상적 상이함을 넘어선 일종의 공통성이 있었다. 하나는 그들 중 다수가 패전 시에 50대 이상으로, 다이쇼기에 청년 시대를 보낸 세대였던 점이며, 또 하나는 그들이 공산주의를 혐오하고 천황을 경애하는 문화인이면서 자유주의를 흠모했다는 점이었다." "전전의 지식인은 거의가 도시 거주의 중산층 이상에 속하여, 경제적으로도 교양으로도 일반 민중과 동떨어져 있었다. 1948년 조사에서 신문 정도의 읽고 쓰기가 완전히 가능한 자는 4.4퍼센트에 지나지 않았고, 군대에서 처음으로 하층민과 접촉한 학도병들은 대중에게 경악과 경멸의 감정을 품었다." "그런데 이런 격차를 축소시키는 단초가 된 사건이 전시 및 패전 후의 인플레이션이었다. 공습 때문에 도시 중산층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금융 상품이나 예금의 가치가 급락하면서 도시 중산층의 몰락을 초래했다."(236-7)


"이렇게 과거의 자유주의자들로 구성된 1950년대의 보수 논조는 평화주의를 공론空論, 미숙, 유치 등이라 비판하고 현실, 상식, 전통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많았다 나아가 고이즈미 신조나 다나카 미치타로 등은 재군비에 찬성하고 국방의 의무를 공공심公共心의 일환으로 상찬했다. 이런 주장은 그 후의 보수 논조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1950년대의 보수 논조는 고도성장 이후의 그것과 비교할 경우에 특징이 몇 가지 있었다. 그 하나는 전후의 민주화나 노동 운동 등을 군부 독재와 동일시하는 경향이었다." "특히 경제학자였던 고이즈미는 마르크스주의와 총력전 체제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이것이 자유주의 경제를 해쳤다고 주장했다." "또한 1950년대의 올드 리버럴리스트들은 개인의 자유를 열심히 강조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논조의 배경 역시 그들의 전쟁 체험이었댜.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개인의 자유란 빨갱이와 군부에 대항해 자기의 자유를 지킨다는 의미와 같았기 때문이다."(246-8)


"그렇다면 그들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공공심은 어떻게 공존했을까? 그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 잡지 『고코로』의 좌담회에 등장하는 다케야마 미치오의 발언이다. 이 좌담회에는 〈인간이라는 것은 각자의 천분에 따라 각각의 역할을 맡는다〉라는 발언도 나왔는데, 이런 일종의 신분제적인 사고방식이 그들이 주장하는 개인의 자유와 공공심의 양립을 지탱했다. 즉 대중이 근로를 통해 사회에 공헌하듯, 〈문화를 맡은 자〉인 자신들은 자유롭게 문화를 즐김으로써 일반 민중이 할 수 없는 형태로 사회에 공헌한다. 이런 질서는 전통적이고 자연스러우며 그 질서에 정치가 개입하면 전체주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평화라는 말도, 이들에게는 약간 독특한 의미로 쓰였다. 고이즈미 신조는 재군비와 미일 안보 조약에 찬성을 표하면서 〈민족 간에 평화가 바람직한 것과 마찬가지로 계급 간에도 평화가 바람직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천황이야말로 이런 평화, 즉 그들이 안정적인 지위를 누렸던 전쟁 전 시대의 상징이었다."(249)


6 민족과 시민─정치와 문학 논쟁


"1946년 후반부터 1947년 초에 걸쳐 〈혁명이 멀지 않았다〉라는 기운 속에서, 공산당은 1947년 2월 1일 자로 총파업을 기획했다. 그러나 이 2·1 파업은 점령군의 명령으로 중지되었고, 공산당은 전후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았다." "그 후 노동 운동에서 공산당의 장악력이 저하되면서 좌절한 학생들과 젊은 노동자들은 내성內省의 시기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런 젊은 활동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긴다이분가쿠』를 비롯한 주체성론이었다." "오쓰카 히사오는 근대적 인간 유형의 확립이 선행되지 않는 한 제도적인 사회 개혁을 이루더라도 효과는 적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에 대해서 공산당계의 논자들은 인간의 의지는 경제적인 하부 구조로 규정되며 사회의 변혁 없이 의식의 변혁 같은 것은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공산당 측에서 보면 사회 변혁의 계획을 동반하지 않는 주체성의 주장 같은 것은 난센스에 지나지 않았으며, 청년층의 지지를 얻는 데 있어서 잠재적인 라이벌 사상과 다름없었다."(283)


"그러나 마루야마나 오쓰카가 말한 주체성은 공과 사 양 쪽 모두가 파괴된 전쟁 중의 반전反戰으로서 꿈꾸게 된, 권위로부터의 자립과 타자와의 연대를 겸비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우메모토 가쓰미 등이 주장한 주체성은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는 역사의 필연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필연성 속에 해소되지 않는 자기를 표현했다. 후자는 개인을 넘어선 전쟁이라는 역사의 필연성을 인정하면서도 자기의 죽음을 납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품었던 심정이다. 즉 패전 후의 주체성이란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체계적인 이론으로 회수되기 곤란한 심정을 표현한 말이었다. 사람들은 전쟁과 패전이라는 거대한 사회 변동에 농락당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납득시킬 설명을 찾아서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역사의 필연성을 믿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이론적인 설명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자기의 잔여물 중 일부가 다른 종류의 말을 찾는 원동력이 되었을 때, 그것이 주체성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287)


"당시에는 전시 중의 자기 자신에 회한을 갖지 않는 문학가는 거의 없었다. 전쟁을 투철하게 반대한 자도, 전쟁을 찬미한 글을 실천해서 옥쇄한 문학가도 극히 소수였다. 대부분의 문학가는 보신이나 편승으로 전쟁에 협력하고 자기의 내면을 배반했다는 회한을 품고 있었다. 논쟁 상대의 과거를 직접적으로 폭로하는 것은 꺼려졌지만, 전쟁이 가져온 상호 불신과 자기혐오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영화 〈라쇼몽〉에서 자기에게 형편이 좋은 허위 증언을 늘어 놓는 군상을 그린 것도 이런 시대 상황 아래서였다." "그러나 이런 회한으로부터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무장을 생각했을 때, 당시로서는 마르크스주의의 학습과 공산당 참가 이외의 방법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그리고 고바야시나 후쿠다가 정치로부터 나를 지킨다는 논리로 전쟁 책임 문제를 회피했다면, 많은 공산당원들은 정치의 권위로 나에 대한 비판을 지움으로써, 역시 전쟁 체험을 은폐했다."(298-9)


"당시의 공산당 주변에서 민족은 인민과 거의 동의어였고 근대적인 개인의 확립과도 모순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어찌되었든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비판하면서 민족을 내세우는 논조는 전시를 떠올리게 했다. 이런 '민족'에 대항하여 아라 마사히토는 '시민'을 내세웠다." "여기서 유의할 점이 하나 있는데, 당시에는 일반 명사로서 시민을 사용하는 것이, 다소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지식인의 기본 교양이었던 헤겔 사상이나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근대 시민 사회란 자본주의 사회이며 시민은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서양 문화의 향유가 도시 중간층의 특권이었던 당시에 세계 시민은 자본가의 대명사이며 민족은 민중의 동의어라는 언설이 성립했던 것이다." "결국 정치와 문학의 분열을 넘어서고자 한 시도에서 만들어진 민족과 시민의 대립이라는 도식은, 전후의 언설 구조가 변천하는 과정을 보여준 하나의 지표가 되어 갔다."(300-2, 309)


2부


7 가난과 단일 민족─1950년대의 내셔널리즘


"1950년대 전반까지의 일본 사회에서는 (사회 전체가 빈곤에 시달리는 가운데) 지식인과 노동자, 도시와 농촌 사이에 압도적인 문화적 격차가 존재했고, 화제를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말하자면 당시의 일본은 지역과 계층으로 사람들이 분단되어, 균질한 '일본인' 같은 생각이 거의 통용되지 않는 세계였다." "농촌 인구가 많았던 당시에 '시민'이라는 말은 도시 부르주아층의 대명사였다. 그런 반면 '민중'이나 '대중'은 지식인이나 도시 중산층을 포함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런 언어 상황 속에서 도시 중산층과 농민을 모두 포함하는 집단을 표현하는 말은 '민족'이나 '국민'이 되기 쉬웠다. 또한 1950년대의 좌파 지식인들은 단일 불가분한 일본 민족, 단일한 민족 국가라는 말을 이따금 사용했다. 단일 불가분이라는 말은 프랑스 혁명 정권의 표어였던 '하나이며 불가분한 공화국'의 번역에서 파생한 것으로, 신분 및 지역의 분단을 극복하고 국민이 성립한 상태를 지향하는 말이었다."(316-20)


"원래 아시아 국가들의 내셔널리스트들은 당시의 일본 지식인과 유사한 문제를 다루었다. 그것은 서양 근대의 교양을 익힌 도시부의 지식인들과 농민으로 대표되는 일반 민중의 격차였다. 그런 까닭에 아시아 국가들의 내셔널리스트들은 이 격차를 식민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해소하고 하나의 국민으로서 연대를 만들어 낼 것을 주장했다. 특히 중국공산당이 도시 지식인들에게 중국 재래의 문화를 다시 보게 하고, 지방의 민중 속으로 들어가도록 설파한 점은, 일본에서도 지식인들의 주목을 모았다." "이렇게 해서 1950년대 전반에는 진보계 지식인이 서양 지향을 자기 비판하고 일본인으로의 회귀를 표명하는 것이 하나의 조류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계몽 활동을 대신하여 민중 지향의 다양한 활동이 모색되었다. 그 하나는 대중문화의 연구였고, 그것과 병행해서 민화나 민요가 급속히 재평가되고 민속학이 주목을 모았다. (민중에게 작문을 지도하는) 생활 기록 운동의 대두 역시 같은 움직임으로 들 수 있다."(331-3)


"1955년 7월, 공산당은 그때까지의 무장 투쟁 노선을 극좌모험주의라며 포기했다. 패전 후 공산당이 누린 정신적 권위의 원천은 옥중 비전향과 절대 무류無謬의 신화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많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전향을 거듭했던 전시에, 공산당만이 주체성을 유지했다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코민포름의 비판에 동요하고, 몇 번이고 방침을 전환하는 공산당의 모습은 그런 신화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당 전체는 코민포름에 종속되었으면서 하부 당원에게는 절대적인 권위로 군림하는 자세 역시, 천황제와 유사한 권위주의라는 인상을 주었다." "요시모토는 1958년의 「전향론」에서 옥중 비전향의 공산당 간부도 일본의 현실을 무시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묵수한 데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후쿠다 쓰네아리가 1947년에 유사한 의견을 말했을 때는 그를 지지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1958년 요시모토의 주장은 공산당에게 실망한 지식인과 학생, 그리고 신좌익(통칭 분트에서 유래한)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353-5)


"1955년에는 공산당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정계 개편이 진행되었다. 공산당이 육전협에서 무장 투쟁 노선을 포기한 것을 전후해, 재군비의 시비를 둘러싸고 분열했던 좌파사회당과 유파사회당이 합체해 일본사회당이 결성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보수 정당 측도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동해 자유민주당을 결성한다. 이른바 '55년 체제'라고 불리는 정당 지도가 이때 완성되었다. 그리고 1956년 『경제 백서』에는 이후 유행어가 된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전후'의 끝이며, 또 하나의 '전후'의 시작이었다. 이제 고도성장과 55년 체제로 상징되는 안정과 번영의 전후가 시작되려 했다. '전후 민주주의'라는 말도 이 시기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패전 직후의 민주주의는 구질서를 타파하기 위해 내걸린 변혁의 상징이었다. 그런 격동의 전후는 끝나고, 민주주의가 55년 체제로 형해화된 의회 정치의 관용구가 되어 가던 때에, 전후 민주주의라는 말이 태어났다."(356-7)


8 국민의 역사학 운동─이시모다 쇼, 이노우에 기요시, 아미노 요시히코 외


"전후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가 계몽 활동 이외에 힘을 쏟은 실천 활동은 교과서 비판이었다. 1946년 10월에 마지막 국민학교 초등과(소학교)용 국정 국사 교과서가 된 『나라의 발걸음』이 발행되었다. 세계사의 견지 및 인민의 역사도 다룬 이 교과서는 교육 민주화의 상징으로 선전되었지만,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여기에 천황 숭배 교육의 잔재가 보인다든가 전쟁 책임에 대한 추궁이 없다든가 하는 점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교과서 비판은 실증주의에 입각해 정치적 편향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치적인 실증주의를 비판하는 형태였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지금까지 역사 교육이 정책에 따라서 악용되었기 때문에, 이번의 역사 교과서가 정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문학에서는 정치적 중립을 가장한 예술 지상주의가 비판되었는데, 역사학에서는 실증주의가 그것에 해당했다. 실증주의는 최종적으로는 제국주의 측에 가담하는 부르주아 사상이라고 여겨졌다."(383)


"이시모다 쇼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정치에 참가해서 자기의 연구를 발전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는 「촌락의 역사·공장의 역사」에서 민중 스스로가 창조한 역사를 소개하면서 〈강단 역사학의 좁음, 미천함은 이런 역사가 전국에서 나타나게 될 때 유감없이 폭로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물론 글을 쓰지 못하는 노동자가 역사를 쓰기란 〈실제로는 곤란한 작업일 것〉이다. 거기서 〈역사의 전문가가 그 일을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때 역사학자의 역할은 〈높은 곳에서 민중에게 요청하지 않고, 겸손하게 함께 작업을 하는 그런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전문가도 인민으로부터 자기 학문의 좁음을 깨달으며, 함께 공부하고 성장해 갈 수 있을 것이었다. 이시모다에게 이런 과정에 참가하는 것은 윤리감이나 책임의식으로 감내해야 할 고행이 아니라 일종의 쾌락이었다." "이런 역사학의 창조는 후에 국민적 역사학이라 불리며, 역사학의 혁명이라는 구호와 결합해서 많은 학생들을 매료시킨다."(390-1)


"그러나 국민적 역사학 운동은 1953년경부터 차츰 막다른 길에 부딪혔다. 운동을 담당했던 학생들은 진지하기는 했지만 너무나 미숙했다. 우선 드러난 문제는 학생들 중에 민족이나 민중의 권위를 빌려서 타자를 공격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었다. '역사학의 혁명'을 내세운 그들은 자기들의 뜻에 맞지 않는 학자나 교수들을 반혁명적, 근대주의 등이라 비난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공산당의 당내 투쟁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소감파와 국제파가 상호 비방을 확대하며 사문과 린치가 횡행하던 상황 속에서, 국민적 역사학 운동에의 찬반은 이윽고 정치적 입장의 시험지가 되었다." "공산당의 정치 방침에 따라, 서클이나 농촌 조사를 단순한 당세 확장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차례로 현저해졌다. 이시모다는 후에 〈서클을 단순히 새로운 형태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사상, 혹은 서클의 수나 그 회원의 증감만이 보고되고, 무슨 내용을 이야기했는가가 조금도 토의되지 않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회상한다."(419-21)


"1951년 이시모다는 지식인의 대중 멸시를 비판하여 〈지식인에게 대중은 료쿄쿠와 통속 소설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속악俗惡을 의미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혁명 민화나 혁명 로쿄쿠를 민족 문화라 칭했던 점에서는 국민적 역사학 운동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즉 '민중 속으로'라는 이념 그 자체가 현실 민중에 대한 무지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실제로 현실 민중의 반응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역설적이게도 국민적 역사학 운동에 비판적이었던 이노우에 기요시 쪽이 석탄암을 깨는 일용직 노동자의 아들이었으며, 돌을 쪼개고 짚을 엮으며 대학까지 다닌 사람이었다. 이노우에는 국민적 역사학 운동이 끝난 뒤에 〈도련님 아가씨들이 농촌에 들어가서 인민의 빈곤에 놀라고, 봉건제의 뿌리 깊음에 깜짝 놀라, 크게 감격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도 좋은 공부가 되리라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정수라며 우쭐거리는 데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라고 말한다."(423)


9 전후 교육과 민족─교육학자·일교조


"교육 개혁에서도 점령군의 대응은 빨랐다. 1945년 12월까지 군국주의적인 교원을 추방하는 심사 기관의 설치, 공교육과 신토神道의 분리, 수신·일본사·지리 교육의 일시 정지 등을 명령했다." "1947년 3월 극동위원회가 교육에서 칙어 사용을 금지한 한편, 같은 달에 「교육 기본법」이 제정된다." "점령군의 지령으로 개혁이 진행되고 교원 자격 심사와 추방도 실시되었지만, 일본 측이 행한 심사는 느슨했으며, 추방된 자는 전 교원의 0.5퍼센트, 대학 교원 중에서는 0.3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교육 칙어」에 대해서도 극동위원회가 금지한 지 1년이 넘게 지난 1948년 6월이 되어서야 국회에서 무효 결의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해서 패전 후의 교육계에는, 변경된 제도와 변치 않는 교육자라는 모순된 상황이 생겼다. 그 결과는 어제까지 귀축미영과 천황 숭배를 설파하던 교사가 돌연히 미국과 민주주의를 찬미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학생들의 불신을 샀고, 전후 민주주의는 기만이라는 인상을 심었다."(431-2)


"사회 전체의 변혁이 없으면 개인의 행복도 없다는 논조는 고도성장 이전의 일본에서는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 변혁의 시점이 빠진 채로 개인의 중시를 주장하는 「교육 기본법」은 봉건제를 타파한다는 의미에서는 한걸음 나아갔다고 해도, 부유한 자의 승리를 정당화하는 자유주의 사상에 불과했다." "나아가 비판은 사회 과목으로도 향했다. 역사와 지리를 폐지하고 설립된 사회 과목은 일본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박탈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역사·지리 교육의 부활이 주장되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야가와를 비롯한 공산당계 논자들은 소련과 중국을 모델로 삼아 개인주의와 근대주의를 비판했다. 그에 비해 가쓰다나 우에하라는 프랑스나 독일을 모델로 삼아 근대적 개인들이 뒷받침하는 내셔널리즘을 주창했다. 그런 차이는 있지만 애국심 교육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미국적인 전후 교육을 비판하는 경향은, 당시의 진보계 교육학자들에게 공통되었다고 할수 있다."(440-4)


"이렇게 전전과의 연속성이 발생한 배경에는 교육계에서 공직 추방이 거의 실행되지 않았다는 사정이 있었다. 전후의 많은 교원들은 전전부터 교육에 종사했거나, 혹은 전전의 교육으로 인격을 형성한 인간들이었다. 성전 완수가 민주주의로 바뀌어도, 애국심과 민족이 강조되는 사태가 바뀌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연속성은 당시의 역사학자들에게도 존재한 경향이었다. 그러나 교육학 분야에는 전쟁에 협력했던 자가 역사학보다 많았으며, 전시와 전후 간에 말 사용의 연속성이 보다 현저했다. 예를 들어 야가와 도쿠미쓰는 전시에 대일본청소년단의 교양부장을 맡아 1942년에는 〈일본 민족이 오늘날 세계에 신질서를 건설하는 것은, 세계를 진짜 세계답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1952년에 〈오늘날 우리의 대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평화 확보와 민족 독립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리라. 그것은 우리 일본 민족의 위대한 사업이다〉라고 말했다."(460-3)


"1950년대 교육학자들에게는, 전쟁 전의 교육에 존재했던 국가 목표에 향수를 품고 그 대안을 찾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행동 양식의 연속성 속에 있는 한, 새로운 교육 이념을 모색하더라도 만족할 만한 결과가 얻어질 리 없었다. 그들이 어떤 이념을 찾아냈다고 해도, 그 행위가 국가 목표의 대용품을 찾는다는 의식에 기반을 두는 한, 그것이 대용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가 잠재적으로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패전 후의 교육론을 구속한 것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각인된 행동양식이었다. 황국 일본에서 주권 재민의 나라로 말이 바뀌어도, 공통어를 보급하고, 교사의 지도성을 부르짖고, 반미를 주창하고, 민족과 전통을 상찬하고, 국가 목표를 추구한다는 행동 양식이 실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사상적인 대립과는 대조적으로, 보수파와 상통하는 부분이 생긴 것도 그런 이유였다." "여기서 생긴 불신감은 전후에 교육 받은 아동들이 성인이 된 1960년대에 전후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의 배경을 이룬다."(474-5)


10 피로 물든 민족주의의 기억─다케우치 요시미


"다케우치 요시미는 「중국의 근대와 일본의 근대」라는 논고에서, 중국과 일본의 차이는 〈궁극적으로는 고유의 문화를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差〉이다. 즉 〈중국의 문명은 만들어 낸 것이며, 일본처럼 남에게서 빌리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제도든 사상이든, 유럽 문명이 낳은 결과만을 빌려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혁을 실현하는 길은 내부로부터의 자기 개조를 관철하는 것 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이런 근대 일본에서는 자유주의가 길이 막히면 전체주의, 전체주의가 패배하면 민주주의로, 위기 때마다 외국에서 사상을 수입해 올 것이 기대된다. 요약하자면 〈과거에 주어진, 지금도 주어진, 장래에도 주어질 것이라는, 주어지는 환경 속에서 형성되어 온 심리 경향이 뿌리내렸다〉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진정한 절망이나 자기 혁신에 이르지 못하고 〈영구히 실패함으로써 영구히 성공한다. 무한한 반복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보인 듯 생각된다〉라고 다케우치는 말한다."(510-1)


"다케우치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종종 주체성이나 현실, 혹은 정치 등을, 어딘가로 찾으러 가면 주어지는 완성품처럼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주어져야 할 '주체성'을 밖으로 찾으러 나가는〉 것이나 〈현실이라는 실체적인 것이 있어서 무한히 그것과 가까워지는 것〉이 시도된다. 이렇게 해서 자기를 찾으러 밖으로 나간다는 행위, 외부에서 구원을 찾는 기대가 노예의 상태를 고정시킨다." "이렇게 외부에서 문화를 이입해서 위기를 회피하는 것은 물론, 전통을 묵수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것도 자기 보전이며 자기를 잃는 데 불과하다. 서양의 모방과 그 반동에 불과한 국수주의의 사이에서 흔들려 왔던 근대 일본은 〈자기라는 것을 거부하고 동시에 자기 이외의 것을 거부한다〉라고 다케우치는 말한다. 반면 루쉰은 과거의 자기에 머무르는 것도 외부의 힘에 기대서 자기를 포기하는 것도 거부하고 저항한다. 그 양쪽에 대한 거부는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동시에 노예의 주인이기도 거부〉하는 것이다."(512-3)


"다케우치의 사상은 실은 동시대의 사상과 연속되어 있다. 메이지부터 일본의 근대화를 다시 생각한다는 접근도, 주체성이라는 문제에 집착한 것도, 봉건제를 비판하고 국민적 기반의 성립을 지향한 것도, 거의 마루야마와 공통되었다." "그러나 마루야마가 근대를 기준으로 일본 사회를 비판한 데 비해서, 다케우치는 긍정해야 할 근대와 부정해야 할 근대를 나누어 일본의 근대화와 봉건제 쌍방을 비판했다. 다케우치가 일관되게 비판한 것은, 외부의 권위로부터 주어지는 우등생이나 열등생이라는 위치 짓기에 자기가 스스로 말려드는 노예근성이었다. 그런 노예근성을 일종의 자기 보전과 자기 동일성의 희구라고 간주하면, 그것에 근대라는 명칭을 주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권위에의 예종을 봉건적이라고 간주하고 (서양 문화를 재빨리 이입한) 우등생과 (그러지 못한) 열등생의 분단 상태를 봉건사회의 길드와 같다고 논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 까닭에 다케우치에게는 근대 비판과 근대 지향이 모순되지 않았다."(522)


"다케우치는 「근대주의와 민족의 문제」라는 논고에서 〈근대주의란 바꾸어 말하면 민족을 사고의 통로에 포함하지 않는, 혹은 배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케우치가 이 논고에서 '피투성이 민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자기의 내부에 있는 암흑이며, 구체적으로는 전쟁 책임 문제였다." "대일본 제국이 외부의 힘으로 쓰러져도, 자기 안에 야만인 심리가 잠들어 있음을 깨달은 다케우치에게 〈악몽은 잊힐지도 모르지만 피는 씻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는 전후의 지식인들이 피투성이 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민주화나 근대화라는 〈관념과 말의 권위에 기대어〉, 〈자기만은 빠져나간 것〉처럼 구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케우치는 이 논고에서 내셔널리즘과의 대결을 주장하며 〈더러움을 자기 손으로 씻지 않으면 안 된다〉, 〈오로지 용기로써 용기를 가지고 현실의 밑바닥을 뚫고 가라〉,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비겁하다〉 등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525-7)


11 자주독립과 비무장 중립─강화 문제에서 55년 체제까지


"1950년 6월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로 출동한 주일 미군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GHQ는 일본 정부에게 경찰예비대를 설립하도록 지시했다. 이것과 병행하여 미국은 미군의 점령을 종료하고 일본을 독립시켜서 반공 동맹국으로 육성하는 방침을 택했다." "그러나 미국은 점령 종료 후에도 극동의 출격 기지로서 일본을 확보하기를 원했다. 그 결과로 미군의 일본 주둔을 인정하는 미일 안전 보장 조약과 쌍을 이루는 형태로 1951년 9월에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미군 주둔에 반발한 소련과 중국, 인도 등은 이 강화 회의에 불참했다. 이 강화 회의를 앞두고, 미국 주도의 강화 조약과 미일 안보 조약을 긍정하는 '단독 강화론', 그리고 소련과 중국을 포함한 강화를 주장하는 '전면 강화론'이 대립했다. 이 전면 강화론을 주창한 것으로 잘 알려진 지식인 집단이 바로 '평화문제담화회'이며, 그런 논의 속에서 헌법 제9조도 주목받게 된다."(541)


"요시노 겐자부로는 1948년부터 평화문제담화회를 조직해 공산당으로부터 한발 떨어진 지점에서 평화 운동을 개시했다. 이 평화문제담화회는 1948년 7월에 유네스코에서 발표한 유럽의 사회 과학자 8인이 낸 평화 성명에 자극받아, 일본의 사회 과학자로서 평화 성명을 내고자 요시노가 조작했다." "그러나 (전쟁이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발생한다고 본) 공산당계 논자들은 냉담한 반응이었다. 유네스코의 헌장에는 〈전쟁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성명은 인간성을 중시하고 사회 과학을 '인간의 학學'이라고 규정했다. 요시노는 여기에서 기존의 사회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간의 이항 대립적인 도식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인간이 이루어 가는 평화로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말하자면 유네스코의 성명은 오쓰카 히사오에게 베버가, 마루야마에게는 근대 국민 국가의 이념이 그랬듯이, 전쟁 체험에서 태어난 심정을 표현할 때의 자극 매체가 되었다."(562-3)


"〈미국의 행동을 심판할 척도가 우리 손 안에 있다〉라는 논리는 당초부터 평화문제담화회에 존재했다. 1948년 12월의 토의에서 의장 아베 요시시게는 〈극동 재판은 평화와 문명의 이름으로써 일본 국민을 재판한 것입니다〉, 〈연합국이 평화와 문명의 이름을 가지고 우리를 재판한 이상, 반드시 우리를 향해 평화와 문명을 보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연히 그런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한다. 아베의 이 주장은 1949년 1월의 성명에도 담긴다." "요시노 겐자부로는 당시를 회상하며 〈극동 재판에서 일본 국민을 그처럼 재판했던 상대가, 지금 다시 전쟁을 하려는 것이며, 거기에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에 대한 불만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평화를 요구하는 것은 일본의 구질서와 현재의 동서 대립에 대한 양면적인 비판이 된다〉라고 말한다. 비무장 중립론과 호헌론은 미소라는 양 대국에 대한 자주독립의 의지 표시이자, 미국을 추종하며 부활을 꾀하는 일본의 구질서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569-70)


"전후 배상은 본래 평화의 문제와 불가분일 터였다. 그러나 패전 후의 궁핍한 경제 상태 속에서는 평화를 향한 바람이 우선시되고 배상 문제는 경시되기 쉬웠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에 가해진 가혹한 배상이 나치스가 대두하는 온상이 되었다는 역사도 존재했기에, 배상 청구가 억제된 것은 당연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전쟁 책임은 오로지 일본의 위정자가 일본 국민에게 끼친 피해를 묻는 것, 혹은 지식인의 처신 방법이나 주체성의 문제였다. 이처럼 전면 강화론자들 역시 솔직한 애국심에 의거했던 만큼, 대다수 '일본인' 이외의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결여하기 일쑤였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발효로 자이니치 조선인 및 타이완인들의 일본 국적이 박탈되었지만, 그 문제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오키나와의 분리에 대해서는 지식인층에서 오키나와 주민에 대한 동정적인 의견도 적지 않았지만, 일본 정부나 사회당은 오로지 영토 확보라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584-5)


"추방이 해제된 보수 정치가들이 대량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1953~1956년은 정치 제도가 전전으로 회귀할 위험이 가장 강했던 시기다. 개헌 준비뿐만 아니라 1954년에는 보안대가 자위대로 승격했고, 1956년에는 교육위원회의 공선제가 폐지되었다. 그 밖에 (남성 호주제 중심의) 가족 제도를 부활시키는 민법 개정이 계획되었고, 전후 개혁으로 해체된 내무성을 부활시키는 내정성內政省 설치 법안 등이 의회에 제출되었다." "이른바 '55년 체제'가 성립하면서 사회당의 좌파와 우파, 그리고 공산당 등은 양쪽 모두 1955년을 경계로 자기 당의 사회 구상을 보류함으로써 국민적인 호헌 운동에 참가했다. 이를 통해서 전전 체제로의 회귀를 저지했다는 의의는 분명히 컸다. 그러나 그 대가로 각자가 본래 지향했던 사회 구상을 서로 대결시켜 가는 역동성은 사라졌다. 그런 가운데 호헌, 평화, 민주주의라는 말이 보수 세력의 공세로부터 전후 개혁의 성과를 〈지킨다〉는 방위적인 슬로건이 뒤어 갔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592-4)


12 60년 안보 투쟁─전후의 분기점


"1951년 안보 조약에는 미국의 일본 방위 의무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미국에게 일본을 방위할 의무를 주장하는 방향으로 안보 조약을 개정하는 지름길은, 일본이 헌법을 개정해서 재군비와 해외 파병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적어도 어떤 방법으로든 미국의 국제 전략에 공헌하지 않고서는 안보 조약을 보다 대등한 관계로 가져가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보수 정권의 생각이었다." "기시가 안보 조약 개정을 둘러싸고 미일 교섭을 추진했던 1958년은 내정에서도 충돌이 많은 해였다. 일교조 억압, 경관의 권한 대폭 확대 등을 둘러싼 일련의 충돌은 기시가 종래부터 개헌론자였던 점과 어우러져서, 안보 조약 개정과 전전 체제의 부활은 한 몸이라는 인상을 확대시켰다. 이제 안보 조약 개정은 단순한 외교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전후 일본의 거시적인 디자인을 둘러싼 대립이 되고 있었다. 그 대립은 1960년에 들어가서 큰 불을 뿜는다."(604-6)


"기시는 관료적인 권위주의, 미국에 대한 종속, 전쟁 책임의 망각, 그리고 비열함이라는, 전후사상이 혐오해 온 모든 것을 갖추었다. 쓰루미는 〈기시 수상만큼 멋지게, 쇼와 시대 일본의 지배자를 대표하는 자는 없다. 이보다 훌륭한 하나의 상징은 생각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일본에서 현재 벌어지는 일은 실질적으로는 패배 전에 일본을 지배했던 국가와 패배 후에 태어난 국가라는, 두 국가의 싸움이다〉라고 주장했다. 5월 19일의 안보 조약 강행 채결을 경계로 문제는 안보에 대한 찬반으로부터 '전전 일본'과 '전후 일본'이라는 '두 국가의 싸움'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기시에 대한 항의만큼 전후 일본에 대한 애국심을 공공연히 표명할 기회는 없었다." "그때 사람들은 전쟁의 기억을 상기하면서, 전후에 계속 품어 왔던 심정이 기시 노부스케라는 상징으로 응축되는 것을 느꼈다. 시미즈가 말했듯이 〈오랫동안 말로 표현되지 못했던 낡은 경험과 감정〉이 이제는 〈표현의 기회〉를 획득하려 했다."(615-7)


"안보 투쟁은 '시민'이라는 말이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정착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시민'이라는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움직임이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있었지만, 시민을 프티 부르주아와 동의어로 보는 공산당 주변의 인식은 뿌리가 깊었고, 이 말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안보 투쟁 속에서 공산당의 권위가 실추되고 노동자나 농민에 의존했던 기존 조직으로부터 독립된 운동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말로서 시민이 사용되어 갔다." "이런 시민은 내셔널리즘과 모순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후쿠다 간이치는 시민 정신을 상찬하면서 〈일본 국민이 처음으로 국민으로서의 책임에 나섰다〉, 〈실로 국민 국가 일본의 원리적 탄생을 예고한다〉라고 말했다. 역시 젊은 정치학자였던 사카모토 요시카즈는 좀 더 직접적으로 〈안보에 대한 도전이라는 형태로, 일본 역사에서 데모크라시와 내셔널리즘이 처음 손을 잡았다〉라고 주장했다."(630-2)


"5월 19일의 강행 채결에서 30일이 경과하면 참의원의 심의를 거치지 않아도 안보 조약은 자연 승인되었다. 그 기일인 6월 19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간바 미치코가 사망한 6월 15일, 아이젠하워의 도쿄 방문이 중지된 16일, 그리고 「폭력을 물리치고 의회주의를 지켜라」라는 신문의 공동 성명이 나온 17일, 국회는 연일 거대한 데모대로 포위되었지만, 기시 수상은 여전히 강경한 자세를 유지했다." "운동 측에는 결정적인 한 수가 없었고, 사회당과 공산당을 비롯한 혁신 정당은 구체적인 방침을 표명하지 못했다." "6월 18일, 데모대는 밤새워 국회를 포위했지만 마침내 시간은 0시를 맞이하고 안보 조약은 자연 승인되었다." "다음날인 20일에 참의원의 자민당은 야당의 허를 찌르고 안보특별위원회와 본회의를 단독으로 열어, 안보 관계 법안을 일거에 통과시켰다. 22일에는 미국 상원이 신안보 조약을 승인하고, 23일에 가서 기시 수상은 외상 공저公邸에서 비준서를 교환한 뒤, 내각 총사직을 공표했다."(654-5)


"이런 결과에 대해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시미즈 이쿠타로는 안보 자연 승인의 밤, 패배감에 무너져 울었다. 대조적으로 마루야마 마사오는 투쟁 속에서 실현된 질서 의식과 연대감의 압도적인 인상에 비하면 〈'자연 승인'의 순간 같은 것은 나의 뇌리 속에 하잘 것 없는 장소밖에 차지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승패의 평가가 어찌되었든 간에 안보의 자연 승인과 기시 수상의 퇴진 이후, 데모의 물결은 급격히 시들어 갔다. 애초에 5월 19일 이후 운동의 성황은, 안보 그 자체에 대한 반대보다도 기시에 대한 반감과 전학련으로 대표되는 소박한 정의감으로 뒷받침되었다. 기시가 퇴진하고 안보가 자연 승인되면서 소박한 정의감에서 보면 패배가 명확해진 이상, 운동의 퇴조는 피할 수 없었다." "기시를 대신해서 수상이 된 이케다 하야토는 취임 직후에 「소득 배증 계획」을 발표했고, 본격적으로 고도 경제 성장의 막이 오르려 했다. 그리고 전후 일본의 민주와 애국을 둘러싼 언설도 변동의 시대로 들어간다."(655-7)


3부


13 대중 사회와 내셔널리즘─1960년대와 전공투


"고도 경제 성장의 진전, 1963년 OECD 가입, 1964년 도쿄올림픽 등의 현상과 병행해 발생한 것이 체계적인 사상을 갖추지 않은 무자각적 내셔널리즘의 확산이다." "정치학자 마쓰시타 게이이치에 따르면, 생산력과 대중 매체의 발전으로 인해 서방 선진국에서는 문화와 생활 양식의 균질화가 진행 중이며, 계급 사회에서 대중 사회로 이행되었다. 거기에서는 계급 대립을 전제로 한 사회주의 혁명이 성립되지 않으며, 정치에 무관심한 대중이 주류를 차지한다. 그리고 과거에 마르크스가 〈조국을 갖지 않는다〉라고 말한 프롤레타리아트도 〈사회의 '소시민화'〉와 〈대중 민주주의〉로 〈자본주의 국가의 '국민'으로 전화〉하여 대중 내셔널리즘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중에 '단일 민족'이라는 말의 용법도 변화했다. 이 말은 1950년대에는 형성되어야 할 목표로서 좌파가 주창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로는 고대 이래의 기성사실을 가리키는 말로 보수 측이 주창하게 된다."(665-8)


"고도 경제 성장과 병행하여 생긴 현상이 하나 더 있었다. 전쟁 체험의 풍화이다." "전쟁 체험의 부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의 등장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의 기억이 차츰 형해화하면서 동시에 미화의 대상이 된 점이었다." "전쟁을 미화하는 전기물이 용전감투勇戰敢鬪나 순수무잡純粹無雜을 강조한 반면, 전쟁의 비극을 전하고자 하는 전쟁 체험물은 비극과 노고를 정서적으로 이야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양쪽은 정치적 입장은 반대였지만, 전쟁을 감상적으로 이야기한다는 점과 전후사상의 가장 큰 계기였던 굴욕과 회환의 상처에 닿는 부분이 적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1956년 히다카 로쿠로가 말한 바에 따르면 전쟁을 모르는 세대뿐만 아니라 전쟁 체험 세대에서도 〈전쟁이 이미 각자의 체험과 실감을 넘어선 추상물이 되기 시작〉했다." "체험자들에게만 통하는 폐쇄적인 표현은 점차 정형화되어, 회한을 감상으로 은폐하는 미사여구가 되어 버리기 쉬웠다."(671-4)


"그리고 고도성장이 진행되면서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 대두했다. 이런 비판은 평화로운 시대밖에 알지 못하고, 그런 상황에 권태를 느끼게 된 전후 세대의 공감을 불렀다. 전학련 주류파의 젊은이들과 친교가 있던 시미즈 이쿠타로는 1961년에 공산당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일정한 연령 이상의 인텔리는 전전 및 전시 중의 어두운 기억이 살아 있기 때문에, 평화와 민주주의가 전후의 양대 가치라는 점만으로도 제법 만족할 수 있지만, 젊은 녀석들은 매우 다르다. 전후에 소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양대 가치가 당연한 것, 평범한 것, 심지어는 지루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평화와 민주주의의 기만을 지적하는 젊은이들 중 많은 수가 1955년 이전에 다양한 헌법관과 평화관이 존재했다는 점을 몰랐다." "어쨌든 이 시기부터 패전 후에 존재했던 다양한 사상 조류와 개혁을 일괄해서 '전후 민주주의'라 총칭하는 방법이 급속하게 일반화되었다."(676-8)


"전후의 학제 개혁과 고도성장은 대학생의 급격한 대중화를 초래했다. 그에 더해 1960년대 중반부터 패전 후 베이비 붐 세대의 대학 진학이 이루어지면서, 진학률의 급상승과 더불어 수험 경쟁의 격화와 대학 설비의 부족이 일어났다. 그 결과로 출현한 것이 대학 입학 이전에는 입시 학원과 진학 학원의 증가이며, 대학 입학 후에는 대강당에서 마이크로 이루어지는 강의였다. 수험 전쟁, 메머드 대학, 매스 프로mass production(대량 생산) 교육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 것도 이 시기였다." "수험 전쟁을 뚫고 도달한 대학에 열악한 설비와 대량 생산화된 교육 내용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런 학생들에게 기대에 대한 큰 배신이었다. 또한 1960년을 경계로 대학 졸업자의 완전 취업 상태가 성립했지만, 대학 졸업생의 급격한 증가 때문에 취직 가능한 직업은 평범한 것으로 변했다." "이런 사태는 큰 꿈을 안고 대학에 진학한 젊은이들이 자신의 미래가 제한되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688-9)


"이런 배경 속에서 1960년대 후반에는 각지의 대학에서 분쟁이 이어졌다. 마침내 1968년에는 니혼대학과 도쿄대학에서 학생의 대학 점거가 일어나, 전 학교의 학생을 규합한 전학공투회의全學共鬪會議가 결성되어 '전공투'라고 약칭되었다. 1965년 한일 회담 반대 투쟁 이래로 학생운동은 일시적으로 정체되었는데, 1967~1968년 이후에는 한 번에 불타올랐다. 이 전공투의 대학 점거는 이윽고 전국 각지의 대학에 파급되어, 전공투 운동이라고 총칭되었다. 이 전공투 운동은 많은 경우에 혁명이나 소외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언어를 쓰며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배경이 된 것은 학생의 대량화와 기존 대학 조직 간의 불일치이며, 아키야마 등이 말하는 〈엘리트적 의식과 존재 사이의 결정적 결락〉이며, 대형화되는 대학과 사회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진실을 되찾고 싶다는 욕구〉였다. 이런 배경이 없었다면 전공투 운동이 일부 활동가의 범위를 넘어서 그토록 퍼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690-1)


"전공투 운동에 참가한 세대는 전쟁과 기아를 경험하지 않았다. 당시의 신좌익계 활동가 중 한 명은 〈데모에 가게 된 것은, 아무 고생도 하지 않고 자라나 세상 물정 모르고 도움도 안 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무엇이든지 하고 싶다는 '성실한' 기분과, 시대의 분위기에 빠르게 감응하며 유행을 좇는 패거리의 '비일상'에 대한 동경이 동거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라고 회상한다. 때문에 당시의 전공투계 학생들의 수기에는 매스mass, 일상, 질서 등에 대한 반역을 이야기하거나, 〈자기 부정〉, 〈일상의 부정〉, 〈예속의 평화보다 자유의 투쟁을!〉 등이라 호소하는 것이 많다. 도쿄대 전공투의 어느 학생은 〈전공투는 어떤 대학을 만들고 싶은 것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들은 싸움 그 자체를 바란다〉라고 답했다. 이런 전공투계의 학생들이 싫어한 말은, 민주주의, 평화, 근대 시민사회, 근대 합리주의, 협상 등이었다. 그들에게 그것들은 기존 사회를 지탱하는 논리이며 혁명을 말리는 개량주의였다."(693-4)


14 '공적인 것'의 해체─요시모토 다카아키


"1955년경부터 널리 사용된 전중파戰中派라는 말은, 훗날에는 전쟁 체험을 겪은 세대 전부를 총칭하게 되었지만, 당초에는 패전 시에 10대 후반에서 20대 전반의 청춘기였던 세대를 가리켰다. 보다 나이가 많은(패전 시에 30세 전후) 마루야마 마사오와 다케우치 요시미의 세대를 전전파戰前派, 보다 소년이었던(패전 시에 10세 전후) 에토 준과 오에 겐자부로 등의 세대를 전후파戰後派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 전중파는 전시 중에 가장 중심적인 동원 대상이 되었고, 가장 사상자가 많았을 뿐 아니라, 중등·고등 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도 갖지 못했다. 또 그들의 유년기는 황국 교육이 격화된 시기였고, 게다가 극도의 언론 탄압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나 자유주의를 접할 수도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전쟁 상태에 놓여 있었던 그들에게는,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사상을 가진 인간이 있다는 것도, 전쟁 이외의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719-20)


"이런 까닭에 전중파 지식인들은 전쟁이야말로 정상이고 평화 쪽이 이상이라는 감각을 종종 이야기했다. 1956년 좌담회에서 무라카미 효에는 〈전쟁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감정으로 자라났다〉라고 말했고, 작가 미시마 유키오도 〈지금 쪽이 정상이 아닌abnormal 듯한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다〉, 〈끊임없이 '진짜가 아니다'라는 의식이 있다〉라고 응한다. 전후사상을 의제擬制라고 비파한 요시모토는 이런 세대에 속했다." "교양과 지식량에서 윗세대에 뒤지는 그들이 기댈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의 가혹한 부분을 경험했다는 자부심이었다." "또한 이 세대의 최대 무기가 된 것은, 전쟁에 비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했던 연장자들의 책임을 추궁하고, 그들을 비겁하다고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중파의 다수는 윗세대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면서도 자신의 전쟁 책임은 느끼지 않았다." "본래 전쟁에 비판적인 사상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전쟁에 항의할 용기가 없었다는 종류의 회한을 공유하지 않았다."(721-5)


"전중파 지식인들에게는 동세대 중에서도 특이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 가운데 전선에서 전투를 경험한 자가 적다는 사실이다. 사토 다다오는 소년 비행병으로, 시라토리 구니오는 해군경리학교생으로, 모두 군 부속 학교의 생도로 일본 내에서 패전을 맞이했다 무라카미 효에와 무라카이 이치로, 우메하라 다케시 등은 청년 장교 혹은 학도병이었지만, 전선에서 근무한 경험은 없으며 역시 일본에서 패전을 맞이했다. 그리고 전중파 지식인의 대표 격으로 여겨지는 미시마 유키오와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태평양 전쟁 중에 20세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병역을 경험하지 않았다." "또한 동세대 속에서도 순진한 전쟁관을 패전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 경험 없는 학생들이 중심이었다. 요시모토와 미시마처럼 징병 체험이 없는 자는 군대 내부의 부정과 린치, 전장에서의 학살 행위 등을 목격하는 일도 더더욱 없었고, 정부의 슬로건이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챌 기회도 없었다."(729-30)


"요시모토를 비롯한 많은 전중파 지식인들의 패전 묘사에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숭고한 이념에 불타 완전히 죽음을 믿었던 상태에서, 너무나 돌연하게 8월 15일을 맞이해서 국가에 대한 가치관이 격변했다는 것이 그 전형이다." "1955년경부터 전중파 지식인들이 이런 특권적인 패전관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그 이야기 방식은 전쟁을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전후 민주주의의 위선을 공격했던 신좌익계의 젊은이들은 이런 전중파의 이야기를 환영했다. 이런 이야기가 민중의 전쟁 체험이었다면 진보적 지식인이 반전의식을 품었다는 것은 기만이며, 그들은 침략 전쟁에 협력한 과거를 은폐했거나 혹은 민중과 동떨어진 특권적인 엘리트에 지나지 않았음이 입증되기 때문이었다. 거기서는 전중파 세대의 향수와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의 비판의식이 전후 비판이라는 형태로 공범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729-33)


"1960년 안보 이전의 요시모토는 목숨을 걸고 싸워서 사상과 행동의 뒤틀림을 해소하고, 이 세상에서 피안으로 간 사자인 대중으로부터 그런 반질서를 찾았다. 그러나 1960년 이후의 요시모토는 같은 대중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전사자가 아니라 모든 '공'적 질서를 무화하는 '사'생활에서 찾아 갔다. 물론 그 사적인 존재는 마루야마가 주창한 바와 같은 근대적 책임 주체로서의 개인이나 시민은 아니었다." "요시모토가 주창하는 대중은 〈실로 국가 자체를 넘어 버린다〉. 그 대중이란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감성의 질서와 무관한 존재이며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적인 존재였다. 1963년의 평론 「묘사와 거울」에서 요시모토는 기존의 정치를 해체하는 것으로서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의 힘〉을 상찬한다. 그는 〈생산의 고도화가 촉진된 대중 사회의 힘〉이야말로 〈스탈린주의의 해체를 촉진〉했으며, 이것은 〈긍정적으로 다루어야 할 상징〉이라고 말한다."(774)


"요시모토의 저작은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았다. 그것은 고도성장 속에서 권위와 죄책감의 제약을 뿌리치고 자기 좋은 길을 걷는 것을 정당화해 줄 사상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자기 좋을 길을 걷는다는 그 바람은, 혹은 전공투 운동을 비롯해 권위에 반항하는 형태로, 혹은 죄책감을 벗어나 사생활에 몰두하는 형태로 각각 표현되었다. 요시모토의 사상은 그런 움직임을 촉진하는 촉매로 기능했다. 어떤 의미에서 요시모토 사상의 매력은 다양한 모순을 혼연히 포함한 점에 있다. 거기서는 철저 투쟁을 말하면서 사생활에 몰두하는 것이 궁극의 반질서로 여겨졌다. 〈대중의 원상原像을 투입하자〉라면서,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초월에 도달하는 것이 지향해야 할 〈자립〉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그런 혼돈 속에서 그때그때 자기의 바람에 응답해 주는 말을, 시를 읽듯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바람에 지지를 받으며 민주주의 신화를 비판한 요시모토는, 그 자신이 신화가 되어갔다."(784-5)


15 시취屍臭에 대한 동경─에토 준


"에토 준은 만주 사변 이듬해인 1932년에 태어났다. 소국민小國民 세대 등으로도 불리는 이 세대는 패전 시에 10세 전후에서 10대 초반이었다. 패전 시에 31세였던 마루야마 등의 전전파는 물론, 패전 시에 20세였던 요시모토 등의 전후파보다도, 더욱더 빈틈없이 전쟁과 황국 교육에 물들어서 자라난 것이 이 소국민 세대였다." "그러나 패전은 금세 찾아왔다. 전쟁에 헌신하는 것 이외의 가치관을 알지 못했던 소년 소녀들에게, 그것은 세계의 붕괴를 의미했다. 자기를 질타했던 교사가 변모하여 미국과 민주주의를 찬미하기 시작한 충격도 컸다." "때문에 이 소국민 세대는 전쟁으로 상처를 입었지만 전쟁 체험의 가혹함을 이야기한다는 판에 오르면, 자기들이 연장자보다 뒤처진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를 품고 있었다. 게다가 전쟁 체험에 집착하는 전중파에 대한 반발이 더해져서 자기들은 전쟁의 상처와는 무관한 전후파라고 강조하는 경향이 보였다."(789-95)


"전쟁의 상흔은 그들보다 윗세대인 전전파와 전중파의 경우, 회한이나 굴욕과 같은 사회적인 기억으로 새겨졌다. 그러나 패전 시에 10세 전후로, 자기의 체험을 위치 지을 사회적인 언어를 충분히 갖추지 못했던 소년 소녀들은 보다 추상적인, 표현되지 않는 억압감으로서 전쟁의 압력과 죽음의 공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소국민 세대의 소년들은, 태어날 때부터 병사로서 죽을 것을 교육받았다. 그것은 동경과 동시에 공포이기도 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겉으로 드러내고 공언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자신의 내심으로 인정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그런 탓에 그들은 죽음의 공포를 무의식 중에 억압했다. 그리고 그들의 2차 성징기가 전쟁과 겹친 까닭도 있어서, 억압된 죽음의 공포는 종종 성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각인되는 형태가 되었다." "이런 죽음과 성의 이미지 결합은 체계적인 언어를 갖지 못했던 소국민 세대의 내부에서, 신화처럼 혼돈된 기호의 난무로 기억되었다."(802-3)


"패전 직후의 에토는 다자이 오사무에 심취했다. 사양족斜陽族이라는 유행어까지 낳은 다자이의 문학은 전쟁으로 절망과 몰락을 강요당한 청년층에게 인기를 모았다. 에토는 〈우리 집이 급속히 무너졌을 때, 다자이 오사무를 숙독했던 흔적은, 아마도 평생 사라질 것 같지 않다〉라고 회상한다." "또한 에토는 〈나는 그 무렵 다자이 오사무를 통해 일본 낭만파를 바라보며, 혹은 일본 낭만파만을 바라보았다〉고 말했다." "에토가 다자이에서 찾아낸 것은 일본 낭만파를 상징하는 죽음의 향기였다. 에토에게 그것은 그가 태어났고 자란 전쟁 시대에 가득 찼던 향기이며 잃어버린 유년 시절을 함께한 친어머니와 할머니들의 향기였다. 다자이로 상징되는 달콤한 시취는 유년 시절에 각인된 '물컹거리는 추악한 것'으로부터 떠도는 향기이며, 에토에게는 공포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취의 유혹을 거부하고 전후의 현실 생활에 맞서는 것이, 그에게는 〈어른이 된다〉라는 의미였다."(811-2)


"원래 에토는 이 세대의 젊은 지식인들이 으레 그랬듯이, 마루야마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천황제나 전중파 지식인, 그리고 안보 투쟁의 지도자 등을 비판할 때 마루야마의 〈무책임의 체계〉라는 말을 상용했다. 정치는 결과 책임의 문제이며, 동기의 순수함을 관계가 없다는 전학련 평가도 마루야마의 영향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런 마루야마가 자기가 기대했던 것 같은 견해를 보이지 않은 점에 에토는 분노를 보였다. 에토가 보기에 마루야마가 8월 15일(패전의 날)을 기준점으로 현상의 일본을 비판하면서 공적 관심의 재건을 호소한 것은, 관념에 기대서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려는 자기 절대화였다. 에토에 따르면 〈'전후'에 정의의 실현을 본다는 사고방식〉은 〈전쟁에 어떤 도덕적 가치를 도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란 힘과 힘의 충돌에 불과하고, 전후 개혁도 미군에게 필요한 점령 정책에 불과했다. 평화 또한 신성한 가치 같은 것이 아니고 싸움을 회피하는 일상적 노력이라는 산문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834-5)


"전후사상에서 에토의 특징은, 구세대의 올드 리버럴리스트와는 달리 자기의 아이덴티티 문제에서 보수사상을 세워 간 점에 있었다. 올드 리버럴리스트들은 전쟁 전 중산 계층의 안정적인 생활 속에서 자기를 형성했고, 거기에서 길러진 가치관과 생활 감각을 기초로 하여 전후의 사회 변동을 비판했다. 그러나 에토는 올드 리버럴리스트들과 출신 계층은 겹치지만 소년기에 몰락을 경험했기 때문에 안정적인 아이덴티티를 형성할 수 없었다. 전후 사회에 허구감을 품는 것이나 죽음과 국가에 대해 양가적 태도를 가진 것은 그 세대의 문학가들에게 적지 않은 현상이다. 그러나 에토의 특징은, 생모의 죽음이 전쟁의 개시와 겹쳤고 아버지와의 갈등이 패전과 겹쳤다는 우연에서, 이런 양가성과 거부감이 '집'의 문제와 혼연일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에토는 패전의 아픔을 잊기 위해 전후 사회의 현실을 거부하고, 국가라는 백일몽을 쌓아 올리며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희구해 갔다."(856-7)


16 죽은 자의 월경─쓰루미 슌스케, 오다 마코토


"전쟁 전 지식인의 기본 교양은 헤겔이나 마르크스 등의 독일 철학이었고, 교토학파 등은 그것을 바탕으로 한 난해한 철학 용어로 전쟁을 미화했다. 그러나 쓰루미 슌스케는 미국에서 익힌 논리 실증주의와 프래그머티즘, 기호론 등을 무기로 이런 부적 같은 언어의 비합리성을 철저히 비판했다." "쓰루미는 패전 후 철학의 역할로 비판, 지침指針, 동정同情의 세 가지를 든다. 이 가운데 비판과 지침은, 전시 중에 횡행한 비논리적인 기호 사용법을 비판하고 장래를 향한 합리적 지침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쓰루미 사상의 특징은 그가 철학의 세 번째 역할로 든 동정에 있다. 쓰루미가 여기서 말하는 동정은 타자에게 연민을 쏟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동정은, 타자가 자기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 위에서, 타자와 공감하고 연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즉 사람들의 근저에 있는 〈만인에게 공통되게 존재하는 부분의 인자들〉을 찾아냄으로써 공감과 연대의 기반을 포착하는 일이 철학의 임무라는 것이다."(878-80)


"동시에 미국에서 언어 심리학을 배운 바 있는 쓰루미는 일상적인 기본 언어에는 민족어의 다양성을 초월하여 인류 공통의 룰이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쓰루미의 보편 지향이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그의 대중 지향만이 아니라 내셔널리즘과도 대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서양에서 배운 보편사상(이라고 칭하는 것)을 내세워서 대중을 계몽하려는 지식인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 사상을 벗겨 내고 내려가면 지식인들 역시 대중과 같은 일상어를 사용하며, 〈조상 이래의 민족문화로 만들어진 자신〉을 찾아낸다. 그것은 지식인과 대중이 계층 대립을 넘어 결합하는 '민족'의 장소다. 그러나 그 민족문화를 또한 벗겨 내고 내려가면 〈민족정신 밑바닥의 그 어떤 이름도 없는 부분〉이 얼굴을 내민다. 이렇게 해서 〈민족주의를 통한 인터내셔널리즘의 길〉이 열린다. 이런 근저에 있는 이름조차도 없는 부분을, 쓰루미는 〈민족주의와 무정부주의가 함께 태어나는 장소〉라고 부른다."(882-4)


"이런 근저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인 대중은 일본의 대중이면서 동시에 마이너리티를 배제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는 1959년 좌담회에서 〈일본 사회의 밑바닥을 꿰뚫고 나가면, 거기에 국제적인 시점이 열려 온다〉라고 말하며, 일본 사회의 '밑'에 존재하는 조선인, 부라쿠민, 창부들 등의 존재를 든다." "나아가 쓰루미의 경우에 이런 틀을 넘어선 근저의 지점은, 일종의 종교 감각과 이어졌다." "원래 영어에서 말하는 영매medium는 인간의 마음을 매개하는 '미디어'와 같은 말이며, 쓰루미는 전후 일본의 대중문화 연구와 미디어 연구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또한 동정이라고 번역되는 sympathy는 정신 감응telepathy과 마찬가지로, 언어logos로는 표현 불가능한 심정pathos이 인간 개체 간의 경계를 넘어 공진synchronize을 일으키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 까닭에 sympathy는 배려, 연민 등과 함께 공감이나 교감 작용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쓰루미가 말하는 동정의 뉘앙스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885-7)


"오다 마코토가 받은 '치명적인 상처'란 1945년 8월 14일의 오사카 공습이었다." "전후에 오다는 소련 참전과 8월 9일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이후, 그 다음 날인 8월 10일에 일본 정부가 이미 포츠담 선언 수락을 고한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8월 14일에 오사카가 공습을 받은 것은, 일본 정부가 국체호지라는 조건을 명시적으로 담고자 하는 데에 집착해서 포츠담 선언 수락의 정식 표명을 주저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8월 14일 공습은 전혀 무의미한 살육이었다. 거기에는 기껏해야 항복 조건과 체면에 집착하며 망설이던 일본 정부와 거기에 압력을 가한 미국 정부 사이의 알력이 존재한 데 불과했다. 그들의 죽음은 '아시아 해방을 위해 순국한 영웅'이라는 우파의 사상으로도, '평화의 주춧돌이 된 비극'이라는 좌파의 사상으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다. 오다는 후에 〈거기서 죽은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죽었는가. 어린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의 '전후'는 시작되었다〉라고 말한다."(905-7)


"오다는 자기의 전쟁 체험으로부터 〈하나의 원리를 키워갔다〉라고 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모든 순간에 위대한 것은 아니다, 바른 것은 아니다, 성실한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며, 그러나 동시에 〈어떤 인간이라도 어느 때에는 위대할 수 있다, 올바를 수 있다, 성실할 수 있다, 아름다울 수 있다〉라는 원리였다. 이것은 아라 마사히토가 패전 후에 『긴다이분가쿠』에 발표한 논고인 「제2의 청춘」의 말미에 쓰인 〈진부하고 찬연한, 범속凡俗과 닮았으면서도 영웅적인, 추악으로 가득 찬, 그러면서도 한없이 화려한〉이라는 인간관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다가 오사카 공습에서 체험한 '뭐든지'를 표현한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 모든 의미 부여와 낭만주의를 거부하는 인간상을, 오다는 '보통'의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그 보통이란 이상한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확산되어서 종잡을 길이 없는 뭐든지를 표현한 말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쓰루미 슌스케의 대중과도 겹쳐졌다."(923)


"1960년대에 전공투 운동과 함께 주목을 모은 것이 베헤렌이다. 베헤렌은 고정된 조직 형태를 취하지 않고 시민의 자유 참가라는 운동 방식을 내세워서 이후의 시민운동의 원형을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베헤렌은 그 표면적인 무이론無理論적인 모습의 이면에서, 프래그머티스트 철학자(쓰루미 슌스케)와 고대 그리스를 공부한 작가(오다 마코토)가 창설 역을 맡은, 철학적인 요소가 짙은 운동이었다. 거기서 이루어진 것은 개인이 어떻게 타자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국가란 무엇인가 라고 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자기를 묻는 질문이었다. 오다 마코토는 1992년에 출판된 『'베헤렌', 회고록이 아닌 회고』에서 〈문제는 자기 자신이었다〉라고 말한다. 나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될 수 있을까, 그 우리의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어떤 성격일 수 있을까가 그 문제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되묻는 과정에서 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공적인 것의 바람직한 모습을 모색하는 한 궤적을 남겼다."(863, 951)


결론


"전후사상의 최대 강점이자 약점은 그것이 전쟁 체험이라는 국민적인 경험에 의거했다는 것이다. 전쟁 체험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을 심어놓았다. 거기서부터 기존의 언어와 사상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많은 전후 지식인들의 경우, 전쟁 체험을 직접 이야기하는 일은 적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가장 큰 상처였을 뿐만 아니라, 언어로 용이하게 표현할 수 없는 체험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체험을 직접 이야기하는 대산 많은 사상을 만들어 냈다. 동시에 미군의 점령이라는 식민지 상황과 미국 문화의 급격한 침투,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거대한 격차 등은 현대 제3세계의 지식인들이 직면한 상황과 유사하기도 했다. 서양 근대에서 모델을 찾는 데 대한 양가적인 태도와, 지식인이 민중을 어디까지 대변할 수 있느냐는 문제도, 1950년대의 일본에서는 절실한 과제였다."(955-60)


"그러나 이런 전후사상의 강점은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다. 우선 전후사상은 전쟁 체험이 만들어 낸 국민 공동체의식에 의거했기 때문에, 종종 오키나와나 조선 등이 시야에 들어 있지 않았다. 시야에 들어 있는 경우에도 오히려 일본 민족주의의 강화 요인이 되는 방향으로 작용한 사례가 많았다. 이들은 전쟁 체험에 따른 국민 공동체 의식이 풍화되고, 대중 내셔널리즘이 이것을 대신한 1960년대 후반 이후에야 주목받게 된다. 또한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전후사상이 너무나도 남성적이었던 점도 부정할 수 없다. 무사도, 남자다움, 부끄러움을 알라, 팡팡 문화 등의 말이 빈출하는 것은, 좋든 나쁘든 전후사상의 한 특징이다." "전후 사상의 최대 약점은, 말로 이야기할 수 없는 전쟁 체험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전쟁 체험이 없는 세대와 공유할 수 있는 말을 만들지 못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전후사상은 근대나 주체성이라는 말의 배경이 된 전쟁의 기억을 공유하지 않은 세대에 대해서는 설득력을 잃어 갔다."(960-2)


"또한 동시에 전후사상의 붕괴 감각은, 질서가 안정된 고도성장기 이후에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 갔다. 1955년을 경계로 혼란과 개혁의 시대였던 '제1의 전후'가 끝나고 안정과 성장의 시대인 '제2의 전후'가 시작되는 가운데, 이른바 55년 체제의 이름하에 보수와 혁신이라는 세력 도식이 고정화되었을 때, 전후사상의 최전성기는 이미 끝나 있었다. 그리고 전후 태생의 좌파에게 전후 민주주의란 보수와 혁신의 형해화한 대립 도식 중 일부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과거 마루야마 마사오 등은 세계와 미래의 불안정함을 전제로 국가의 건설에 참가하는 국민주의를 주창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종종 전후 태생의 세대에게 기존 질서의 수중으로 들어간 '건설적'인 사상으로만 보이게 되었다. 또한 전쟁 체험 세대의 전쟁 기억도, 1960년대부터 급속히 풍화되어 갔다. 언어가 되지 않는 심정을 대신해서 나타난 것은, 굴욕의 상처를 은폐하고, 감상적인 이야기로 무해화된 전쟁 체험담이었다."(962)


"일본이 고도성장을 이룬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갖가지 설이 있지만, 냉전기 국제 조건의 호혜를 받았다는 것이 그중 하나다. 일본을 아시아에서의 중핵적인 반공 공업국으로 육성한다는 미국의 전략이 미국 및 동남아시아 시장을 일본에 가져 왔고,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특수를 주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제 냉전기에 차지했던 특권적인 국제적 위치를 잃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이 민주화를 이루었고, 냉전 후의 중국이 옛 서방 국가들과 활발히 경제 교류를 하게 되었기 때문에, 일본이 아시아 유일의 공업화된 자유 민주주의 국가였던 시대는 끝났다." "이런 국내적·국제적인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아시아에 대한 전쟁 책임 논의와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비롯한 우파의 대두가 일어난 사실이, 제3의 전후에서 일본 내셔널리즘의 정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논의들의 공통점은 전후에 대한 되묻기다."(979-80)


"일반적으로 전후 지식인은 권력 기구로서의 국가는 비판했지만 내셔널리즘에는 오히려 긍정적이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국가라는 단위와는 별개의 내셔널리즘을 이야기했다. 그런 의미에서는 국가에 맞서는 시민이라는 표현도, 당초는 일종의 내셔널리즘으로서 나타난 것이며, 국가에 맞서는 내셔널리즘이었다. 물론 마루야마의 표현을 역전시키자면 〈그것도 내셔널리즘이라 불러야 할지는 각자의 자유〉지만, 어떤 형태로든 공동성과 공공성을 상정하는 한, 넓은 의미의 동포애를 전부 부정할 수 있을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물론 필자는 내셔널리즘이라 불리는 현상의 부정적인 면을 알고 있으므로, 그 말의 복권을 주창할 의지는 없다. 또한 본래의 내셔널리즘을 가정하고 그것으로부터 현재의 내셔널리즘을 일탈 등으로 비판할 생각도 없다. 단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내셔널리즘이 바꾸어 읽기로 변용되는 것은 꼭 특이하거나 신기한 현상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이다."(992-5)


"자기가 자기라는 사실을 감촉하면서, 타자와 공동共同하는 '이름이 없는' 상태를, 전후 지식인들은 혹은 민족이라고 혹은 국민이라고 불렀다. 그것을 내셔널리즘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무의미하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전후사상이 '민주'와 '애국'이라는 내셔널리즘의 말로써 표현하고자 시도해 온 이름 없는 것을, 말의 표면적인 상이점을 구별해서 받아들이고, 그것에 현대와 어울리는 형태를 부여하는 바꾸어 읽기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달성될 때, 전후의 구속을 진정으로 넘어설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을 통독한 독자는 이미 그것을 위한 준비 작업을 마쳤다고 할 수 있다. 그때 그 이름 없는 것에 결과적으로 부여되는 것, 그 가령의 명칭이 무엇이 될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도 내셔널리즘이라 불려야 할지는 각자의 자유에 맡기자.〉 어찌되었든 간에 우리는 이 이름 없는 것을 과거에서 찾고, 현재에서도 찾고, 또한 미래에서도 찾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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