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변혁 1 : 19세기의 역사풍경 한길그레이트북스 176
위르겐 오스터함멜 지음, 박종일 옮김 / 한길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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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이 책은 한 시대의 초상화이다. 이 책은 세계사의 한 세기를 완벽하고도 백과전서식으로 다룬 것처럼 가장할 의도는 없으며, 상세한 자료를 갖춘 해설서로서 독자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이 책과 베일리의 저서(『현대세계의 탄생』)는 다른 저서들보다 앞서서 지역을 국가, 문화 또는 대륙으로 나누는 방식을 버렸다. 두 저작은 다 같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이것에 관한 설명을 위해 별도의 장을 두지 않고 저서 전편을 통해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두 저작은 다 같이 베일리가 그의 영문판 부제에서 언급한 '세계적 연결'(global connections)과 '세계적 비교'(global comparison)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없다고 가정한다. 두 가지는 서로 결합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나아가 모든 비교가 엄격한 역사적 방법론을 통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연결과 비교를 적절히 통합할 수 있다면 때로는─반드시는 아니지만─현실과 동떨어진 비교보다 훨씬 더 많은 수확을 가져올 수 있다."(30-1)


제1부 근경近景


1장 기억과 자기관찰 (19세기의 영구화)


"오늘날, 리스본에서 모스크바에 이르기까지, 19세기에 지어진 오페라극장은 여전히 관중으로 넘쳐나고 그곳에서 상연되는 작품도 대부분이 19세기 작품이다. 19세기 중엽, 오페라는 세계 문화의 수도라고 불리는 파리에 '상륙'했다. 1830년 무렵 파리의 음악사는 바로 세계의 음악사였다. 파리 오페라극장은 수많은 경쟁자들이 몰려들어 음악가들의 '자석의 성'(Magnetstadt)이란 이름을 얻었다." "오페라는 바다 건너 식민지에까지 전해졌다. 프랑스문화의 우월성은 식민지에 세워진 당당한 오페라극장 건물을 통해 입증되었다. 가장 웅장한 건축은 1911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수도 하노이에 세워진 오페라극장이었다." "오페라가 북아메리카에 뿌리내린 시기는 좀 더 빨랐다. 1859년, 뉴올리언스에서 프랑스 오페라하우스가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1883년에 완공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와서는 세계 정상급 오페라극장이 되었고 동시에 미국 상류사회의 자기과시 무대가 되었다."(76-7)


"19세기에 들어와서 이전의 어떤 세기보다도 기록물이 중요해졌다. 유럽에서 19세기는 국가가 모든 기록을 차지한 시대였다. 이런 목적으로 세워진 국가 기록보관소는 통치행위의 유적이 집중적으로 보관된 장소였다. 기록보관소와 함께 직업과 사회적 신분의 하나로서 기록 관리원과 전문적으로 문헌을 연구하는 공공기록 역사가가 등장했다." "기록보관소는 유럽인의 발멸품은 아니지만 19세기에 유럽만큼 문헌자료의 수집에 관심을 가졌던 다른 지역과 나라는 없었다. 중국에서는 문헌사료의 보존은 오랜 옛날부터 국가의 직무로 인식되어 왔으나 개인이 수장에 흥미를 보인 경우는 드물었다. 과거든 현재든 극소수의 비국가 단체만 자신의 기록보관소를 보유했다." "오스만제국의 통치자들은 국가의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헌기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서 일찍부터 많은 양의 문자자료가 생산·보존되어 왔고 이를 관리 연구하는 전문가집단이 양성되었다."(82-4)


# 기록보관소와 유사한 사례로 공공도서관, 공공(혹은 국가)박물관, 백과전서 편찬 등이 있다.


"19세기 신발명품의 하나가 세계박람회였다. 이것은 파노라마식 시각과 백과전서식 기록의 가장 역동적인 결합이었다. 세계박람회의 시발은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만국공업박람회(1851)였다." "이런 대형 박람회가 세계에 미친 영향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방면에서 나타났다. 하나는 박람회가 보여준 풍부한 상징성이다. 박람회는 세계평화와 사회의 조화를 추구하는 시대의 시작, 전 세계를 향하여 영국의 경제적·기술적 우월성을 확인시키는 기회, 야만과 혼란을 이긴 제국 질서의 개선곡 등으로 인식되었다. 다른 하나는 박람회에서 적용된 정확한 물품 분류법이다. 박람회는 전시품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강(綱, class), 유(類, division), 아류(亞類, subdivision) 등으로 분류했다." "이 분류법의 배후에는 시간의 종적계층화(縱的階層化)란 개념이 숨겨져 있었다. 이것은 모든 인류가 다 같이 높은 단계의 문명세계에 진입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박람회라는 기회를 이용해 펼치고자 하는 의도였다."(94-5)


"이 시기의 주요한 사상 유파─실증론, 역사론, 진화론─는 지식의 누적성과 비판성에 대해서는 일치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인식과 지식이 가진 공공적 의의에 대한 인식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지식은 교육의 기능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고 실용적 가치도 가져야 한다. 새로운 형태의 매체가 등장하자 새로운 사물과 낡은 사물이 서로 융합될 수 있었다.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문화에서도 학문이 이와 유사한 방향으로 발전한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일부 문명에서는, 예컨대 일본과 중국에서는 교육계의 엘리트들이 유럽의 새로운 이념과 제도가 전파될 때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더 나아가 주도적으로 새로운 내용을 보태기도 했다." "19세기는 기억이 잘 보존된 시대였다. 지금도 19세기가 선명한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세기에 탄생한 수장과 전람의 제도와 기구는 그것들이 창설되던 당시에 설정된 여러 가지 목표와 제약을 넘어서 지금까지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99)


"19세기가 남긴 또 하나의 중요한 유산은 19세기 사람들이 그 시대에 관해 남겨놓은 방대한 서술과 해석이다." "사람들이 사회 저층의 생활조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사회보도'와 '실증조사'라는 새로운 연구 분야가 등장했다. 보수적이거나 급진적이거나를 따질 것 없이 모든 학자가 부르주아지─대다수의 학자들 자신이 이 계급 출신이었다─를 비판의 확대경 아래에 놓았다." "사회를 정확하게 관찰하고 문학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파노라마식 관찰이다. 프랑스대혁명 전야에 세바스띠앙 메르시에가 내놓은 『파리화집』(파리의 도시생활을 묘사한 12폭의 화집)이 이런 관찰방식의 전범이 되었다. 메르시에는 철학적 방식으로 파리를 묘사하기를 거부했다. … 엥겔스는 1845년에 출판된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황』에서 〈대영제국 무산계급의 전통적인 환경〉을 묘사했다." "엥겔스가 저서에서 묘사한 개인과 그들의 생활상황은 실명과 함께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신뢰성과 생동감을 더해주었다."(101-3)


# 사회보도와 유사한 사례로 사실주의 소설, 여행문학 등이 있다.


"지리학─무수한 여행과 끝없는 측량을 동반한─의 시야는 세계를 보면서 뿌리는 지역에 내려야 하는 과학이다. 지리학의 한 분파인 경제지리학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산업화 과정의 부산물로서 생겨났고 식민 지리학은 서방의 약탈적인 영토 확장의 동반자로서 생겨났다. 훨씬 더 중요한 자기관찰 기관으로서 최근애 생겨난 것이 사회학이다. 사회학은 이론적 바탕을 갖춘 문제 제기를 통해 이왕의 사회보도를 초월하면서도 동시에 사회현상의 실증적 묘사와의 관련성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경제학의 영역에서는 애덤 스미스의 획기적인 저작 『국부론』(1776)이 나오기 전에 이런 관련성이 이미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추상적인 이론 모델을 수립하는 추세는 1817년 리카도의 저작에서 그 싹을 틔웠다. 진정한 의미에서 지배적 주류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주관적 효용을 표현하는 수학적 이론과 시장균형 이론이 오스트리아, 스위스, 영국에서 거의 동시에 제시된 1870년 이후에 나타났다."(115)


"19세기는 '현대' 통계학의 창립단계였다. 통계는 무작위적인 데이터의 집적이 아니라 주도면밀하게 데이터를 수집하고 수학적인 처리를 거친 결과이다. 국가는 꾸준히 통계업무를 늘려왔다. 복잡한 통계업무를 처리할 조직적인 역량을 정부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계는 사회가 지속적으로 시행하는 자기감독(self-monitoring)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방면에서 인간이 지나치게 멀리 나갔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일부 국가가 쌓은 통계지식은 학술과 행정 영역에서 실제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을 훨씬 초과했다. 통계학은 이때부터 정치적 수사가 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통계학자가 부득이한 상황에서 만들어낸 어떤 통계개념은 국가 관료의 손안에서 도구가 되었다. 기술적인 필요에서 만들어 냈던 사회통계의 범주─계급, 계층, 카스트, 인종─는 행정관서의 편의대로 사회의 모습을 빚어내는 권력이 되었고, 사실상 사회의 인식 자체를 규정짓는 권력이 되었다."(119, 126)


"19세기에 사실주의 소설, 통계학, 사회에 대한 실증적 연구보다 더 널리 퍼진 것이 신문이었다. 신문업이 뿌리를 내린 곳이면 그곳의 정치적 소통 환경에는 즉시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언론자유에 대한 요구는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변혁을 추진하는 커다란 동력이 되었다." "1789년의 '인권과 시민권 선언'은 〈사상과 관점의 자유로운 표현〉을 〈인류의 가장 귀한 권리의 하나〉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천이란 면에서 보자면 이 선언은 당시에는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 제2제국(1851-70년)에서 집권자들은 처음에는 신문·잡지와 서적 출판에 대한 통제의 강화와 탈정치적 개조를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60년대 이후 국가가 준의회제로 전환되면서 출판물에 대한 통제는 점차 완화되었다. 제3공화국에 들어와 파리코뮌 실패(1871) 후의 국가테러 수준의 억압정책이 폐지(1878)되고 나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공공 공간이 탄생했다."(127, 131-2)


"마지막으로, 19세기는 표면적 세계에서 발생한 현상을 기록하기 위해 광학과 화학 기술을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생생하고 진실한 영상기록이 세상에 나온 그 순간을 경계로 하여 전체 19세기는 둘로 나뉘어졌다. 1827년에 세상을 떠난 베토벤의 모습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1849년에 세상을 떠난 쇼팽의 수척한 모습을 사진을 통해 알고 있다. 슈베르트는 초상화로 후세에 모습을 남겼지만 로시니는 그보다 5년 연상인데도 더 오래 살았기 때문에 위대한 사진작가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 찍은 초상 사진을 남겼다." "이 시기에 회화와 사진은 대부분의 경우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장에서 찍은 생생한 사진들, 즉 살아 있거나 죽어가는 군인들의 실제 모습은 영웅주의를 주제로 한 전쟁 회화가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표지였다. 1888년에 값싸고, 휴대하기 쉽고, 조작도 간편한 코닥(Kodak) 필름 사진기가 나와 인류의 시각 기록을 위한 새로운 수단을 제공했다."(147-9)


# 뤼미에르 형제와 기술자 쥘 카르팡티에는 움직이는 영상 '시네마토그라프'를 1895년에 처음 공개했다.


2장 시간 (19세기는 언제인가?)


"나의 19세기는 몇 년 몇 월에 시작되어 몇 년 몇 월에 끝나는 시간의 연속적 통일체가 아니다. 내가 흥미를 갖는 역사는 백 년 또는 그보다 긴 시간에 걸쳐서 〈이리하여······그 뒤로······〉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서사적 선형적 과정이 아니라 다양한 전환과 변화의 과정이다." "모든 역사적 변화의 시작과 종결은 여러 시점에서 발생한다. 그 시간적 연속성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변화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앞선 역사 발전단계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초기 근대'라고 하는 표현이 그 한 예다." "둘째, 19세기는 지금 이 시대의 '사전사'이다. 19세기에 시작된, 또는 19세기적 특징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역사적 변화가 1914년(또는 1900년)이 되자 일시에 멈춰버린 사례는 없다. 따라서 이 책에서 나는 의도적으로 규범을 무시하고 시선을 20세기로 향할 것이며 때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까지 시야에 포함시킬 것이다. 19세기는 기나긴 역사의 발자취와 융합된, 역사 '속의' 19세기다."(196-7)


"하나의 시대정신(Zeitgeist)이 한 시대의 삶의 모든 양상을 표현한다는 신비스러운 관념에 동의하지 않았을 때 역사적 시대구분은 '문화영역에서의 시간의 다양성'이란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정치사의 중대 사건과 경제사의 중요 전환은 시간적으로 겹치지 않는다. 예술사에서 하나의 예술사조가 시작하거나 끝나는 시점은 일반적으로 사회사에서 새로운 발전이 생겨났다고 생각되는 시점과 관련이 없다." "이 문제에 있어서 정치적 대사건이 줄 수 있는 도움은 미미할 뿐이다. 20세기 이전에는 전체 인류사에 획을 긋는 연도는 없었다. 역사를 뒤돌아 보건대 세계사적 영향을 미친 프랑스대혁명도 그 시대에 미친 영향을 보면 중간 규모 유럽국가의 군주가 왕위에서 쫓겨나 단두대로 보내진 사건이었을 뿐 세계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혁명이) 외부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프랑스 내에 국한된 혁명적 강령과 정책이 아니라 그 강령이 군사적 확장을 통해 전파되는 과정이었다."(211-3)


"1차 대전이 폭발했을 때도 지구상의 많은 지역에서는 초기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1918년 전쟁이 끝났을 때 세계적인 위기가 찾아왔다. 더욱이 독감이 세계를 휩쓸자 형세는 완전히 바뀌었다. 겨우 몇 달 사이에 모든 대륙의 생산자와 판맨자가 뉴욕 주식시장의 폭락이 불러온 충격을 느꼈다. 처음에는 1937년 7월 중국과 일본에서, 다음으로는 1939년 9월 러시아 서쪽의 유럽지역에서(독일의 폴란드 침공),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1941년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고 일본이 미국을 습격했을 때야 2차 대전의 시작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라틴아메리카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에 미친 영향은 1차 대전 때의 정도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1945년 이전에는 세계'정치'사에서 전체 인류가 동시에 근거리에서 영향을 감지할 수 있는 특정한 날짜는 없었다. 1945년 이후가 되어서야 인류가 공유하는 세계사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213-4)


# 안장형 시기(Sattelzeit, 대략 1750년~1850년)의 특징

1. 유럽 정복국가의 등장으로 세계의 세력관계가 극적으로 변화

2. 서반구의 식민지 정착 사회에서 (캐나다를 제외하고) 정치적 독립운동이 결실을 맺음

3. 통합적인 사회적 연대의식과 시민적 평등이라는 새로운 이상 출현

4.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 대중 참여의 확대(여성, 인디언, 흑인노예는 여전히 배제)

5. 신분사회에서 계급사회로의 점진적인 전환

6. 산업혁명이 영국의 국경을 넘어 보편적인 성장흐름으로 변모

7. 1830년 경은 유럽의 철학과 예술사에서 중요한 전환점(1827년 베토벤, 1828년 슈베르트, 1831년 헤겔, 1832년 벤담 사망)


# 빅토리아시대와 세기말을 이어주는 전환기(19세기 80년대)의 특징

1. 광물에너지가 생물에너지를 추월하면서 전 지구적 환경사가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

2. 산업화의 지리적 범위가 끊임없이 확대되었고, 수많은 과학적 발명품이 등장

3. 자본주의 내부의 구조개편(특히, 해외시장 개척)으로 세계경제의 연계성 확대

4. 제국주의 확장의 새로운 국면 전개(간접적인 영향력 행사에서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로 전환)

5. 정치 체제는 제각각이지만 세계 여러 강국들의 정치 질서가 안정기로 진입

6. 유럽의 문화적 부흥 시기(반 고흐, 세잔의 회화, 말라르메의 시, 드뷔시의 음악, 니체의 철학 등)

7. 비서방 세계에서는 강한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적 자아의식의 등장


"많은 역사적 증거가 보여주듯이 노예제도의 종결은 해방된 노예의 입장에서 보자면 마치 새로운 시대가 갑자기 찾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생활 가운데서 '노예제도의 사망'은 길고도 험난하고 거듭되는 실망의 과정이었다. 프랑스대혁명에서부터 19세기 50년대 중국의 태평천국 운동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은 새로운 시간질서에 대한 열망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혁명의 주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전통과 결별한 새로운 역법의 수립이었다." "18세기 말기 이후 시기의 특징은 시간 기록의 합리화와 그것을 근대세계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이었다. 1792년의 프랑스, 1868년의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 1918년 2월의 러시아(볼셰비키 정권은 지체 없이 그레고리력을 도입했다)의 경우가 그랬다. 중국의 태평천국운동 사람들이 세우려고 했던 이상국가에서도 그런 시도가 있었다." "그들의 새로운 세계에서 시간은 간단하고, 투명하며, 속임이 없었다."(256)


3장 공간 (19세기는 어디인가?)


"19세기는 지리학이 과학으로 전환해가던 '첫 번째' 단계이자 지리발견의 '마지막' 시대였다. 유럽인의 발길이 닿은 적이 없는 곳, 지도 위에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공백으로 남아 있는 곳, 고도의 위험만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곳을 찾아가는 영웅적인 여행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지리발견의 마지막 시대─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긴' 19세기 개념과 기본적으로 중첩된다─는 쿡 선장이 첫 번째 세계일주 항해에 나선 1768년에 시작되었다. 이 항해에서 쿡 선장은 과학자 동료들과 함께 타히티,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했다. 그 후로 영국 해군은 탐험활동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상을 보여주다가 프랭클린 탐험대의 조난(1847년)을 만나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1911년 12월, 아문센이 남극점에 도착함으로써 지리발견의 찬란한 연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그 후로도 산악·사막·해양탐험 활동은 여전히 활발했지만 인류가 발견해주기를 기다리는 땅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294-5)


"19세기에는 지리학의 중요 개념의 정의도 아직 유동적이었다. '라틴아메리카'란 개념도 그 의미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명료하지 않고, 특히 '스페인령 라틴아메리카' 지역과 '포르투갈어 사용지역'을 구분하려는 사람에게는 골치 아픈 문제이다. '서인도제도' 혹은 카리브해 지역을 라틴아메리카에 포함시켜야 하는지를 두고 아직도 논란이 있다." "시몬 볼리바르 세대는 '남부아메리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라틴아메리카'란 명칭은 1861년에 범라틴주의(pan-Latinism)를 지지하던 프랑스의 생시몽주의자들이 만들어냈고 곧바로 정치가들이 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색채가 강해졌다." "그래도 '라틴아메리카'는 상대적으로 오래된 지역 개념이다. 지역 개념으로서 '동남아시아'는 1차 대전 기간에 일본에서 등장했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동남아시아인'에게는 문화적 동질감이 없었다. 이 지역 전체에 관한 첫 번째 역사서가 나온 것도 1955년 이후의 일이었다."(299-301)


"초기 근대사 지도에서 아시아대륙의 중간 부분은 경계가 모호하게 표시된 채 명칭도 '타타리'(Tartary)라고만 표기된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이곳을 '내륙아시아' 또는 '중앙아시아'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모호한 명칭은 아직도 개념적으로 안정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동방'(Orient)이란 아랍인, 터키인, 이란 무슬림이 거주하는 땅─오스만제국 치하의 발칸반도를 포함하여─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문화적인 개념이었다." "19세기 말이 되자 '근동'(Near East)이란 명칭이 외교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명칭이 가리키는 지역은 오스만제국과 한때는 오스만제국의 영토였으나 당시에는 실질적으로 그 통치를 벗어난 북아프리카(이집트와 알제리)였다." "'중동'은 미국 해군장교이자 군사학자인 알프레드 마한이 1902년에 만들어낸 개념이다. 중동이란 명칭에는 역사적·문화적 의미가 전혀 없었고 영국과 제정 러시아가 서로 차지하려고 힘을 겨루는 페르시아만 이북 지역을 가리켰다."(301-3)


"오래전부터 유럽은 세계에서 독보적으로 단일성과 함께 다양성을 유지해왔다는 자기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다양성은 어떻게 조직되어 있으며 그 요소들은 무엇인가? 헤르더가 제시했고 19세기 초에 성행했던 낭만주의 민족학의 '3원론'은 유럽을 '라틴─게르만─슬라브' 3대 지역으로 나누었다. 많은 사람이 이 학설을 추종했고 심지어 1차 대전에서는 선전 주제로 이용했다. 훗날 나치는 이런 관점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부활시켰다." "서유럽이란 개념은 (1차 대전 이전에는 형성되지 않았던) 영국과 프랑스의 연대를 전제로 한다. 외교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은 1904년 이후의 일이었다. 민주주의-입헌주의란 가치관의 각도에서 볼 때 두 나라 사이에 동질성이라고 할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영국의 정치엘리트 계층은 나폴레옹 3세의 '독재정권'을 늘 불신과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19세기에 관한 한 '서유럽'이란 곤혹스러운 지역개념이다."(339-41)


"19세기의 공간은 사실상 고도로 획일적이고 연속적이었고, 이는 정부가 개입한 결과였다. 미국의 토지법이든, 여러 나라(네덜란드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의 체계적인 토지측량과 소유권 등기든, 지금까지 강력한 통치를 경험한 적이 없는 지역에 대한 식민통치이든 국가는 공간을 철저하게 동질화하는 활동을 해왔다. 특히 1860년 이후 국가통치를 단순히 전략적 거점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지역 세력에 대한 상시적인 개입으로 보는 시대적 추세가 나타났다. 이런 추세는 근대 초기부터 시작된 점진적인 '영토주권화' 또는 '영토권 형성'의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유럽 특유의 현상은 아니었다." "영토권은 현대국가의 표지일 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군주정치의 한 형식이었다. 예컨대, 19세기의 이란에서 통치자의 업적을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는 새로운 영토의 탈취이거나 최소한 기존 영토의 방어 여부였다. 이런 업적이 없는 군주는 왕위를 노리는 왕자들이 반역할 수 있는 좋은 표적이 되었다."(355-6)


제2부 전경全景


4장 정주와 이주 (유동성)


"19세기의 인구 재난은 세계의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이 경험한 재난은 분명히 적었다. 아일랜드는 19세기 유럽의 불운아였다. 이 나라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인구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국가였다. 1780년 무렵 아일랜드는 인구 고속성장기에 진입했으나 1846-52년의 대기근으로 인구 상황은 철저하게 바뀌었다." "나폴레옹 시대가 끝난 뒤 유럽 인구감소의 원인으로서 전쟁과 내란의 중요도는 18세기와 훗날 20세기 때보다 크게 떨어졌다." "1815년부터 크리미아전쟁─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발생한 군사충돌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의─이 발발한 1853년까지 유럽에는 어떤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1500년 이후 대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한 10차례의 강대국 간 전쟁 가운데서 1815-1914년에 발생한 전쟁은 하나도 없었다." "전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유럽의 비중을 감안하면 18세기에 발생한 전쟁의 전사자 수는 19세기의 8배나 됐다."(417-8)


"해외이민은 이미 근대 초기의 유럽을 구분하는 중요한 표지였다. 중국과 일본의 통치자들이 자기 백성들이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사실상 금지하고 있을 때 유럽인은 전 세계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인구대비 해외이민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 영국의 이민 목적지는 주로 아메리카 신대륙이었고 네덜란드의 경우는 아시아였다.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한 나라는 스페인이었고, 러시아 이서(以西) 지역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던 프랑스는 이민배출국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19세기 사회사를 연구할 때는 반드시 그 직전 시대의 이민 활동의 결과를 중심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고대의 '민족 대이동'이 아니라 17세기와 18세기의 이민이 수많은 사회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라틴아메리카 사회는 세 가지 요소─약탈과 잇따른 바이러스의 침공으로부터 살아남은 원주민, 유럽 이민자,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로 끌려온 사람들─로부터 성장해 나온 젊은 사회였다."(426-9)


"19세기 이민사에서 대중의 주의를 끄는 제도는 정치적 반대자들은 곤궁, 고독, 극단적으로 열악한 기후조건에 노출시키는 징벌적 식민지이다. 시베리아는 1648년에 이미 제정러시아의 유배지가 되었고, 표트르 대제 통치 시기에도 전쟁포로를 격리시키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12월당(Dekabrists)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후부터 시베리아는 정치범의 중요한 유배지가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1848년과 1851년의 동란을 평정한 후 정치범들을 추방했다. 파리코뮌의 봉기를 진압한 후 프랑스 정부는 3,800명 이상의 반란가담자들을 19척의 배에 실어 (1853년부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태평양의 뉴칼레도니아로 보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유배지였다. 해양 패권을 두고 프랑스에게 밀릴 수 없다는 전략적 동기를 배제할 수는 없지만, 1780년대 중반 영국 감옥의 심각한 과밀현상 때문에 생긴 위기가 없었더라면 죄수들을 수만 리 떨어진 먼 섬으로 유배하자는 발상은 선택되지 않았을 것이다."(435-9)


"20세기와 비교할 때 19세기의 (정치적 망명 혹은) 난민은 (최소한 19세기 60년대 이전까지는) 익명의 집단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분명히 식별되는 부유하고 좋은 교육 배경을 가진 난민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1776년에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하자 캐나다와 카리브해 지역으로 도피한 약 6만 명 가량의 영국왕실에 충성하는 사람들, 1789년에 부르봉 왕조에 충성했던 망명자들, 1848-49년 유럽 각지의 혁명이 실패한 후 진압당한 피해자들이 있었다." "법률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대한 사건은 1839년의 '7월 혁명'이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서유럽, 특히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에서 정치적 망명─정치범의 송환금지─을 법으로 보호하는 제도가 생겨났다. 1848-49년 유럽의 혁명 시기에 대부분의 국가가 이 원칙을 받아들였다. 이 원칙에 따르면 국가재정으로 정치적 망명자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야 했고 그 때문에 정치적 망명자의 행동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441-2)


"정치적 이민과 영웅적인 망명이 19세기의 표지적 현상이라고 한다면, 집단적으로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삶을 도모하는 수많은 가난한 난민의 모습은 '전면전'(totaler Krieg)과 인종적 편견을 배경으로 하는 극단적 민족주의가 범람한 시대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정부 행위가 촉발한 국경을 넘는 난민의 물결은 19세기에도 없지는 않았다. 이 시기의 몇 차례 중대한 행동, 혹은 국가행동의 배후에는 잔혹한 현실이 숨겨진 경우가 많았다." "새로운, 그래서 서둘러 마련된 민족국가의 이념은 이민족을 융합하거나 배척하는 기준이 되었다. 대체적으로 각국의 이민에 대한 태도는 관용적이었다. 유출되는 이민의 규모는 새로운 시민을 받아들이는 유입이민의 규모와 평형을 이루었다. 그러나 대다수 정부는 이민 문제에 있어서 지나치게 많은 유입이민을 경계했다. 다른 나라에 와 있는 통합주의 소수집단은 언젠가는 합병 주장을 지지하고 민족주의 외교정책의 유용한 도구로 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447, 452-3)


"노예무역이 폐지되면서 아프리카는 더 이상 대륙 간 이민체계의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게 되었다. 달리 말해 세기말의 유럽, 남아시아, 중국과는 달리 아프리카는 더 이상 장기적이며 정기적인(지리적 특성에 기인한) 노동력을 공급하지 않게 되었지만, 이 대륙으로의 식민 이민은 주목받아야 한다. 1차 대전이 폭발하기 직전, 구세계 유럽의 이민이 집중된 곳은 오래된 문명과 많은 인구를 가진 아시아의 식민지가 아니라 아프리카였다. 알제리의 76만 명의 유럽인(2/3가 프랑스인이었다)은 대영제국의 식민지를 제외하고는 가장 규모가 큰 식민지 정착민 집단이었고, 인도의 최대 17만 5,000명(온갖 부류를 다 포함해도)의 유럽인 집단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같은 시기에 남아프리카에는 약 130만 명의 백인 주민이 있었다." "모든 형태의 거주자를 다 합하여 대략 240만의 '백인' 또는 유럽 혈통이 아프리카에 살고 있었고 대부분이 1880년 이후에 도착한 사람들이었다."(473-4)


"19세기에 비유럽 국가 출신의 새로운 이민도 등장했다. 이런 이민의 '추동요인'(pull faktor)은 대영제국과 영국의 지배를 받는 지역에서 발생한 광범위한 (그러나 이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노동력 부족이었다. 그 경제적 동력은 제조업보다는 자본주의의 세 가지 신흥영역─플랜테이션, 기계화된 채광업, 철도산업─에서 나왔다. 양적인 면에서 가장 중요한 노동 수요처는 도구의 기계화와 작업의 조직화를 농업 원재료의 생산과 가공에 적용한 (농업과 산업혁명이 결합된 산물인) 플랜테이션이었다. 새로 노동시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예외 없이 유색인종이었다." "그들의 사생활에 제도적으로 개입하는 '주인'이나 사회적 낙인은 없었다. 그들의 고용 기간은 특정되어 있었고 그들의 자녀는 법률상으로 고용관계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이민자의 생각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노예들은 노예제 폐지를 전적으로 지지했지만 계약노동자들의 경우는 상황이 분명치 않았다."(483-5, 489)


5장 생활수준 (물질적 생존의 안전과 위험)


"1800년 무렵 세계인구의 기대수명은 30세에 지나지 않았고 아주 드문 특수 상황하에서 35세나 그보다 약간 더 올라갔다.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성년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취미생활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일과가 끝난 뒤의 '퇴근'이란 없었고 직업적 생애를 마감한 뒤의 '은퇴'란 것도 없었다. 가장 흔한 사망원인은 감염에 의한 질병이었다. 사망은 오늘날보다 '더 날쌔게' 찾아왔다." "이전의 어떤 시대에도 인류의 수명이 수직으로 상승하는 추세를 보인 적은 없었고 19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산업화 초기(대략 1780년-1850년)에 영국의 기대수명은 하락했을 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시대에 도달한 적이 있는 정점에도 미치지 못했다. 총체적으로 볼 때 영국 노동자의 물질생활 수준은 1780-1850년 기간에 개선되지 않았다. 이 시기가 지난 뒤 임금 증가의 속도가 분명하게 물가의 상승폭을 초과했고 예상 평군수명도 점차 올라가기 시작했다."(540-2)


"대략 1850년부터 각국 정부는 공중위생 체계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서유럽 각국은 질병의 전염원에 대한 전통적인 통제와 격리─예컨대, 예전부터 시행해오던 지중해와 흑해지역 항구의 검역소─에서 출발하여 질병의 온상이 되는 환경 자체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기초 시설투자로 나아갔다.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유럽인들은 공중의료가 교회나 자선사업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정부 직무의 하나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1849년 영국의 의사 존 스노의 발견 덕분에 식수를 정화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스노는 콜레라의 전염 경로가 공기나 인체 접촉이 아니라 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공중 위생체계 수립을 위한 수자원 정책의 전제는 수자원의 공공재적 속성을 인정하고, 물에 관한 권리를 정의하여 사적 소유와 공적 소유를 구분하는 것이었다. 물의 소유와 사용(산업적 사용을 포함하여)에 관한 온전한 법체계를 갖추는 것은 복잡하고도 긴 과정이었다."(543-4)


"전 세계의 공중위생 사업의 학문적 기반은 루이 파스퇴르의 미생물 이론이었다. 19세기 80년대에 그의 이론은 유럽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파스퇴르의 이론은 존 스노 등 실천가들의 관찰 작업에 과학적 기초를 제공해주었고 또한 위생 정책 수립이 정당정치의 정략에 이용되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초기의 공중위생 사업은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학문적 기초 때문에 보편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생물 이론이 등장하면서 청결이 최고의 준칙으로 공인되었다. 세균학의 산물인 '건강인'(homo hygienicus)란 개념은 이렇게 탄생했고 루이 파스퇴르와 로베르트 코흐의 지위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이론가로 상승했다. 질병은 이때부터 이전의 생태, 사회, 정치, 종교적 맥락과 결별했고 건강이 최고의 가치로 숭상되었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지역에서 위생 조건의 개선이 사망률을 낮추는 데 기여한 효과는 여전히 간편하고 저렴한 기술로 같은 효과를 기대했던 다른 지역보다 훨씬 컸다."(551)


"사망률이 떨어지게 된 두 번째 요인은 질병예방에 관한 새로운 인식의 등장이었다. '인구 과도기'가 그랬듯이 전염병학의 과도기도 시간의 차이를 두고 세계 각지에서 등장했다. 총체적으로 보아서 19세기에는 전염병이 발생하여 대규모 사망─인구통계학자들이 '사망률의 위기'라고 부르는─으로 이어질 확률은 크게 줄었다. 서북유럽에서 전염병의 발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첫 단계는 1600년 무렵에 시작하여 1670-1750년에 정점에 이르게 되는데, 페스트와 티푸스의 발병률이 현저히 떨어졌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성홍열, 디프테리아, 백일해에 감염되어 사망에 이르는 사례가 크게 줄었다. 대략 1850년 무렵에 시작되는 세 번째 단계에서는 폐결핵을 제외한 호흡기 질환의 심각성이 점차 낮아졌다. 마지막으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오늘날 유럽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망률의 구조─심혈관계 질환과 암이 사망의 주요 원인─가 점차 정착되었다."(555)


"19세기는 여러 면으로 의학발전사에서 구시대에 속하면서 동시에 구시대 종말의 시작이었다. 어느 사회나 고위험 집단이 존재했고 어느 나라나 첫 번째로 위험에 노출되는 집단은 군대였다. 뉴질랜드 정복 전쟁이 19세기에 일어난 전쟁 가운데서 전투나 사고로 사망한 병사가 질병으로 사망한 병사보다 더 많은 유일한 전쟁일 것이다. 이와 정반대의 극단이 1895년의 마다가스카르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대략 6,000명의 프랑스 병사가 말라리아로 죽었고 전사자는 20명 뿐이었다. 의학사의 새로운 시대는 유럽 밖에서 1904-05년의 러일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사전에 병사들에게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우수한 의료장비를 확보함으로써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전체 병력 손실의 1/4로 낮출 수 있었다. 군사적으로 낙후한 일본 군국주의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부족한 물질적 인적 자원을 아끼고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었다."(588-9)


"(공중위생의) 위대한 대표 인물들은 대부분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연구자가 아니라 사회개혁가와 의료 위생의 실천자였다. 여기서 말하는 실천이란 19세기 중엽에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시작했고 얼마 후 세계 기타 지역에서 최소한 국부적으로라도 영향을 미친 위생운동을 가리킨다.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논증되기 전부터 깨끗한 식수와 양호한 오수 배출 체계, 이와 더불어 조직적인 쓰레기 처리와 거리 청소 체계가 갖추어지면 도시의 생활이 더욱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이 보여주었다." "근본적으로 태도의 변화를 결정하는 것은 유럽에서 도입된 최신 과학이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아니라 문화적 배경이었다. 도시의 보건위생 상황을 개선하겠다는 희망과 의지(또는 능력)를 갖고 있고, 그것을 위해 재정을 투입한 사회가 얻은 것은 더 긴 수명과 증강된 군대의 전투력 그리고 확대된 사회적 활력이었다. 전염병에 대응해본 경험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한 나라의 비중이 달라졌다."(590)


"기근은 간단하게 주기적 기근(장기적 식품부족)과 높은 사망률이 뒤따르는 돌발적 기근으로 나눌 수 있다. 기근의 위기는 19세기보다는 20세기의 특징이었다. 위대한 의학 발전의 세기, 기대수명이 두 배로 늘어난 20세기는 또한 역사상 기근이 가장 빈번하게 발생한 세기이기도 했다." "잊지말아야 할 것은 나폴레옹전쟁의 연대에 유럽의 많은 지역이 기근을 경험했다는 점이다." "당시 영국에서 실제로 굶어 죽은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민중에게 일상으로 익숙한 물건들─예컨대 밀가루나 보리 같은 식료품─이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비싸졌다." "어느 집이건 여인과 어린이의 희생이 더 컸던 것은 밖에 나가 돈을 벌어와야 하는 가장과 남성의 체력을 보전하기 위해 자신의 양식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1816-17년 이후 유럽 대륙에서는 생존 위기의 망령은 사라졌다. 역사적으로 기근이 자주 발생하던 지역, 예컨대 발칸반도에서 18세기 80년대 이후 기근은 드문 현상이 되었다."(601-3)


# 아일랜드 대기근(1845-49)은 완전한 식량부족의 직접적 결과였다는 점에서 예외적인 사례이다.


"아일랜드 대기근이 덮친 1846년, 미국의 농업이 역사상 기록적인 풍년을 맞은 가운데, 당시 영국 정부의 대응책은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다." "자유방임주의자들의 관점에서는 간섭은 토지 소유자의 이익과 자유무역을 손상시키는 행위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감자 경작을 위주로 하는 농업경제의 붕괴는 농업의 현대화와 구조조정을 위한 좋은 기회이며 그 결과 농업은 '자연적인 평형'을 실현할 것이란 주장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감자 경작의 위기는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아일랜드 사회의 여러 가지 불공정을 바로 잡으려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영국 정부와 아일랜드 지주계급의 적대 관계도 정부의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영국 정부가 볼 때 아일랜드 지주계급의 금전적 탐욕과 농업 개조에 대한 무관심이 이때의 위기를 불러온 원인이었다. 영국 정부로서는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 나서야 할 이유가 없었다."(606)


"1891-92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기근이 주로 볼가강 유역에서 80만의 인명을 앗아갔다. 이때 러시아는 특별한 구호조처 없이 두 차례의 기근을 극복했다." "1891-92년의 대기근은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대기근은 차르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찾아온 '반동이' 시기를 종식시키고 러시아 사회를 혼란의 시대로 몰아넣었는데, 혼란은 결국 1905년의 혁명으로 귀결되었다. 총체적으로 볼 때 러시아 정부가 재난구조 활동에서 보여준 성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정치의 영역에서는 효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당시의 러시아 민중이 볼 때 기근이란 아일랜드, 인도, 중국 같은 '미개한' 식민지나 반(半)식민지 국가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명국가'에게 기근이란 일종의 수치였다. 1890-92년에 발생한 시대에 뒤떨어진 대기근은 러시아와 번영·발전하는 서방 국가 사이의 끊임없이 확대되고 있는 격차를 다시 한번 세상 사람들에게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607-8)


"19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에 발생한 인도의 대기근은, 우매한 인도인이 발전에 반대하는 저항심의 표현─당시에 적지 않은 유럽인이 이런 관점을 유지하고 있었다─이 아니라 근대화 초기의 부정적인 증상의 표출이었다. 철도와 운하는 원래는 구호물자를 실어나를 수 있는 편리한 기초시설이었지만 동시에 농촌지역에서 농산품 투기사업을 펼치기에 적절한 조건도 만들어냈다. 요컨대, 식량의 유입도 쉬워졌지만 식량의 유출 또한 쉬워졌다. 수확의 감소는 불가피하게 식량가격의 폭등으로 이어졌다. 매점매석과 투기는 전근대적 사회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때의 사태에서 드러난 새로운 면은, 모든 농촌의 전통적인 비축식량이 전국 또는 국제시장의 교역품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농산물 수확의 미세한 변동도 식량가격의 두 배로 높여놓을 수 있다. 그 결과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에 속하는 농촌 주민이 최대의 피해자가 되었다."(613-4)


"미국의 부자들이 보유한 부의 규모는 세계사에서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등장하기 전에 어느 누구도 그처럼 방대한 물질적 부를 축적한 적이 없었다. 19세기 말, 미국의 부호들이 석유, 철도, 철강업에서 끌어모은 부는 유럽의 산업화 시기에 가장 부유했던 면방업계 거두들이 보유했던 자산 규모보다 몇 배나 많았다." "미국 최고 부자의 자산은 1860년에 2,500만 달러이던 것이 20년 뒤에는 1억 달러로 늘어났고 다시 그로부터 20년이 지나서는 10억 달러가 되었다. 1900년이 되자 미국 최고의 부자는 유럽 최고의 부자(영국의 귀족이었다)보다 20배나 많은 자산을 보유했다." "이제는 전통적인 금권정치가 등장했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내부에서 분열했다. 부자들 사이에서 보수파 또는 우파 자유주의 정당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유럽이나 미국의 부자와 초부자가 모두 보수적 가치관의 열렬한 지지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자유주의자 부호'란 말은 모순된 개념이 되었다."(6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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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노동계급의 형성 -상
에드워드 파머 톰슨 지음, 나종일 외 옮김 / 창비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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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계급이란 개념에는 역사적 관계란 개념이 뒤따른다. 관계라고 하면 으레 다 마찬가지지만, 역사적 관계란 것도 우리가 만일 그것을 어느 특정 순간에 죽은 것으로 고정시켜놓고서 그 구조를 해부하려 든다면 제대로 분석할 수 없는 어떤 '흐름'이다. 제 아무리 정교하게 짜여진 사회학적 이론의 틀을 가지고서도 계급의 순수한 표본을 제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계급은, 어떤 사람들이 (이어받은 것이건 또는 함께 나누어가진 것이건) 공통된 경험의 결과 자신들 사이에는 자기들과 이해관계가 다른(대개 상반되는) 타인들과 대립되는 동일한 이해관계가 존재함을 느끼게 되고 또 그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때 나타난다. 계급적 경험은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맺게 되는, 바꿔 말하면 자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속에 들어가게 되는 그러한 생산관계에 의해서 주로 결정된다. 계급의식이란 이러한 경험들이 문화적 맥락에서 조정되는 방식, 즉, 전통, 가치체계, 관념, 그리고 여러 제도적 형태 등으로 구체화되는 방식이다."(7)


제1부 자유의 나무


1장 제한 없는 회원수


"'우리 회원의 수에는 제한이 없다.' 이것은 런던교신협회(London Corresponding Society, 1792년 창립)의 정관 제1조이다. 이 조항이야말로 역사가 바뀌고 있음을 알려주는 전환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배타성을 고수하려는 그 어떤 발상, 정치활동을 특정한 세습적 엘리뜨집단 혹은 재산소유집단의 전유물인 양 생각하는 그 어떤 발상에도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 이 정관 조항에 동의한다는 것은 곧 런던교신협회가 정치적 권리와 재산권을 동일시하는 케케묵은 사고방식에 등을 돌리고 있음을 의미하였으며, 또한 '폭도'들이 그 자체의 목적 추구를 위해 스스로 조직을 이룬 것이 아니라 자파 세력을 강화하고 당국의 간담을 서늘케 할 목적을 띤 파당의 단속적(斷續的)인 행동으로 치닫는 시절이었던 '윌크스와 자유' 시절의 급진주의에도 등을 돌리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무제한의' 방식으로 선전과 선동에 문을 활짝 연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뜻하는 것이었다."(30)


# 단속적(斷續的) : 간헐적으로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2장 크리스천과 아폴리언(Apollyon, 마왕)


"양심의 자유는 허용받았지만 '심사법 및 단체법'(Test and Corporations Acts) 때문에 공적 생활에서는 여전히 권리를 가지지 못하고 있던 반국교도들은 18세기 내내 여러 시민적·종교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교육받은 젊은 세대 목사들 다수가 자기네의 관대한 합리적 신학을 자부하고 있었다. 박해받은 분파 특유의 깔뱅주의적 독선은 버리고 그들은 아리우스파 및 쏘치누스파 '이단'을 거쳐 유니테리언주의로 기울어졌다." "'솔직담백함'을 좋아하고 '열광'을 불신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던 유니테리언파의 합리적 기독교는 런던의 일부 직종인과 상점주들 그리고 대도시의 이 비슷한 집단들 사이에서 호감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나 농촌의 빈민들에게 이야기가 먹히기에는 이 교리는 지나치게 차갑고 지나치게 멀고 지나치게 세련되었으며 유복한 계급의 안락한 가치들과 지나치게 밀접히 결부되어 있었다. 이 교파의 어법 및 어조 자체가 장벽이 되고 있었다."(37-41)


# 쏘치누스파 :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인간의 원죄 등을 부정한 16세기 이딸리아의 신학자 쏘치니의 교의를 따르는 일파


"일부 사람들은 공화국시절 수평파의 패배에까지 소급해서 이 이유를 찾곤 한다. 성자들이 다스리는 세상이 오리라는 천년왕국적 희망이 박살나버리자 빈민들의 청교주의(Puritanism) 내에서도 현세적 열망과 영적 열망 사이에는 엄격한 구분이 그어지게 되었다.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기 전인 1654년에 이미 총회파 침례교도(General Baptist) 총단은 (그들 중의 제5왕국설 신봉자들을 겨냥하여) 자기들이 보기에는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 전까지는 〈성자들 자신이 세상의 지배권과 통치권을 그들 수중에 두어야 한다고 기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천명하는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그 시기가 올 때까지는 〈어느 곳에선가 세속 정부의 지배권을 얻기보다는 ··· 참을성있게 세상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성자들의 몫이었다." "이같은 물러섬─청교주의의 적극적 활력과 반국교도의 자기보존적 후퇴의 공존─에 대한 이해는 18세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42-3)


"크리스천은 현실의 세상에서 아폴리언과 싸운다. 그러나 패배와 대중적 무관심의 시절에는 빈민들의 숙명론을 강화시키면서 은둔주의가 우세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빈민들'에게 가장 충실하고자 하던 바로 그 종파들이 1750년 경에는 새로운 개종자들에게 가장 냉담하였으며, 또 기질적으로도 복음전도에 가장 미온적이었다. 반국교주의는 두 가지 대립되는 경향 사이에서 긴장관계에 놓여 있었는데 이 양자는 다 어떠한 민중적 호소력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 하나는 합리적 인도주의와 세련된 설교를 중시하는 경향으로서 빈민들이 접근하기에는 지나치게 지적이고 품위가 있었다. 또다른 편에 있는 것은 엄격한 선민들로서 그들은 교회 외부의 사람들과는 통혼을 해서도 안되었으며, 모든 교리위반자와 이단을 내쫓으면서 지옥에 떨어지기로 예정된 '타락한 무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서 있었다. 〈전자의 깔뱅주의는 해체되고 있었고, 후자의 깔뱅주의는 돌처럼 경직되어가고 있었다〉고 알레비는 지적한 바 있다."(49)


"산업혁명이 진행된 전기간 동안 감리교는 권위주의적 경향과 민주주의적 경향 사이의 이같은 긴장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 민주적 추진력이 가장 강하게 느껴진 것은 분리해나온 종파들─신종파 및 (1806년 이후에는) 초기 감리교도들─사이에서였다. 더구나 홉스봄 박사가 지적한 바와 같이 감리교가 전파된 곳이면 어디서나 이 교파는 기성 국교회와 손을 끊음으로써 19세기 프랑스에서 반(反)성직주의(anti-clericalism)가 해냈던 기능과 유사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단 이 긴장이 폭발하면 때에 따라 세속 지도자들은 감히 건드릴 수조차 없을 도덕적 정열로 휩싸이곤 하였다. 사탄의 성격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고 또한 어느 계급이 사탄의 편인지도 분명하지 않은 한, 감리교는 일종의 도덕적 내전─즉 반국교파 예배당과 선술집 간의, 사악한 자와 속죄받은 자 간의, 멸망에 빠진 자와 구원받은 자 간의 내전─을 근로인민의 운명으로 못박아 설정하였다."(66)


3장 '사탄의 요새들'


"자칫하면 산업혁명기의 민중을 교회에 등록된, 즉 예배당에 다니는 선한 자와 방종한 악한 자로 그릇되게 구분하기 쉽다.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사실들은 흔히 쎈세이셔널한 형태로 제시되거나, 아니면 비난하기 위한 의도에서 정리되곤 하였다." "여러 수치들은 무산자들의 실제 범죄적 행동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근거가 없는 얘기도 아니겠지만, 지속적인 일자리가 없고 재산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불법적인 수단으로 먹고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유산계급인들의 의식구조를 드러낸다." "대부분의 유산계급 남녀들은 빈민들의 질서를 잡을 필요성을 느꼈다. 치유책으로 제시된 것들은 제각각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 이면의 추진동기는 거의 다 똑같은 것이었다. 노동빈민들에게 줄 메시지는 단순한 것으로서, 기근의 해였던 1795년에 버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인내, 노동, 절제, 절약, 그리고 종교가 그들에게 권장되어야 한다. 그외의 모든 것은 순전히 사기일 뿐이다.〉"(79-82)


"유산계급들이 보인 그같은 성향은 술집들, 정기시(定期市)들, 일체의 대규모 집회 등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권력소유자들의 타고난 경향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런데 증거를 '날조'하는 이같은 전반적인 경향은 18세기 말에 세 가지 다른 방향에서 부추겨졌다. 첫째는, 신흥 제조업자(manufacturer) 계급의 공리주의적 태도를 들 수 있다. 공장도시들에 작업규율을 부과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이 계급은 수많은 전통적 오락 및 기분전환거리들에 대해 적대적이 되었다. 둘째는, 자책하는 죄인들의 끝없는 행렬을 만들어내면서 인쇄소에서 신앙고백식 전기(傳記)들을 쉴 새 없이 펴내고 있던 감리교도들의 압력 자체를 들 수 있다." "세번째 요인은 운동의 첫 세대 지도자들 및 그 역사의 기록자들 가운데 몇몇은 독학한 노동자들로서, 그들은 흥청망청식의 술집세계에 등을 돌리는 자기수련의 노력에 힘입어 자수성가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자신들의 계층 내에서 계몽과 질서, 절제를 뿌리내리기 위한 투쟁이었다."(83-4)


"도시의 공동체에서도, 농촌의 공동체에서도 소비자의식이 다른 형태의 정치적 혹은 산업적 적대관계의 형태들보다 우선하였다. 임금이 아니라 빵가격이 민중 불만의 가장 민감한 지표였다. 장인들, 자영 수공업기술자(craftsman)들, 혹은 콘월 지방의 주석광산 노동자들(이곳에서는 '자유로운' 광부의 전통이 19세기까지 그들의 행동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같은 집단들은 자기네 임금이 관습에 의해 혹은 그들 자신의 교섭에 의해 조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 식료품을 응당 자유로운 시장에서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으며, 물자부족의 시기에도 여전히 물가가 관습에 의해 조절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같은 '폭동들'은 민중의 입장에서는 정의로운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 지도자들은 영웅으로 생각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 폭동은 관습가격 혹은 프랑스식 '민중 지정가격'(taxation populaire)과 유사한 민중가격으로 식료품을 팔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곤 했다."(91-4)


"1780년대에 들어서면, 우리는 배후조종을 받고 있던 폭도와 혁명적 군중의 혼합체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1780년대의 민중은 그들의 무절제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야말로 왕권에 대항하는 평형추라고 여기고 있던 자유지향적 휘그파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버크는 폭동진압을 위해 군대를 투입하는 것을 비난했으며, 그런가 하면 폭스는 자기는 〈상비군의 통치를 받느니 차라리 폭도의 지배를 받는 게 훨씬 낫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그 어떤 휘그파 정객도 그처럼 위험한 사회세력과 결탁할 엄두를 내지 않았으며, 또한 그 어떤 씨티 원로도 이를 묵과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또 개혁운동가들은 그들 나름대로 조직화된 여론을 형성해내고자 노력하였으며, 폭도를 풀어놓는 수법을 경멸하였다. '기동성'(mobility)이라는 말은 19세기 급진주의자들과 차티스트들이 자기네의 평화적이고 질서정연한 시위들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며 붙인 표현이었다."(104)


4장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


"1780년의 고든 폭동 가담자들과 1791년 버밍엄의 (군중에 맞선) '교회와 국왕'파 폭동 가담자들은 '독립', 애국심, 잉글랜드인의 '생득권' 등에 대한 견해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가 그들의 '생득권'을 위협하는 낯선 분자들에 맞서서 '헌법'을 수호하고 있다고 느꼈다." "폭동 가담자들은 스스로를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free-born Englishman)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을 터이다. 애국심, 민족주의 그리고 심지어는 맹신이나 박해까지도 모두 자유라는 수사(修辭)의 옷을 입고 있었다. 심지어는 '낡은 부패세력'조차도 영국식 자유를 찬미하고 있었다. 민족적 명예나 권력이 아니라 자유가 귀족문벌파, 선동정치가 그리고 급진주의자들 모두의 표어였다. 버크가 프랑스혁명을 규탄한 것도, 페인이 프랑스혁명을 옹호한 것도 모두 자유의 이름으로였다. 프랑스 혁명전쟁이 개시되면서부터(1793)는 애국심과 자유가 모든 엉터리 시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112)


"보통의 잉글랜드인의 입장은 첫째, 적극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적인 것이었다기보다 반反절대주의적인 것이었다. 둘째, 스스로 확고한 권리는 거의 가지지 못했지만 법률에 의해 자의적 권력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개인주의자라고 느끼고 있었다. 셋째,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지만 명예혁명이 억압에 맞서는 저항으로서의 폭동권에 대한 입헌적 선례를 제공해주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로크가 보기에 통치의 주요 목적은 국내평화의 유지와 인신 및 재산의 안전보장에 있었다. 사리사욕이나 편견에 의해 희석될 때 그같은 이론은 곧 유산계급에게 재산권의 침범자들을 처벌하는 가장 피비린내나는 법전을 인가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인신적 혹은 재산적 권리들을 침범하고 법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 그런 자의적(arbitrary) 권력을 인가해주지는 않았다. 피비린내나는 형법이 관대하고(liberal) 때로는 꼼꼼하기까지 한 행정 및 법률해석과 공존한다는 역설적 상황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14-5)


"1818년 의회 위원회는 경찰부 설치를 주장하는 벤담의 제안을 〈모든 집의 모든 하인으로 하여금 주인의 행동을 살피는 스파이가 되게 하고, 사회의 모든 계급으로 하여금 각기 다른 계급들을 정탐하게끔 만들게 될 안〉이라고 판단하였다. 토리파는 지방교구의 특권적 권리 그리고 지방 치안판사의 권한 등이 억압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고, 회그파는 국왕 혹은 정부의 권한이 증대될 것을 두려워하였으며, 버뎃이나 카트라이트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시민들의 자발적 결사 혹은 가옥보유주들의 윤번제 경비근무라는 이념을 더 좋게 평가하였다. 그런가 하면 급진적 민중은 차티스트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경찰도 억압의 기구로 여겼다." "중앙권력의 그 어떤 권한 증가도 증오하는 이같은 태도 속에서 우리는 지방자치를 고수하려는 방어적 입장, 휘그적 이론, 그리고 민중적 저항의 기묘한 혼합을 보고 있다. 젠트리층과 일반민중 모두 지방적 권리와 관습들을 소중히 여겼다."(117-8)


"그러나 우리는 우선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 20년 동안 종래의 헌법상의 절차들에 새로운 차원이 '실제로' 부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언론은 이미 국왕과 상하 양원으로부터 독립된, 불특정한 권리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18세기 후반은 또한 강령단체(platform)─다소 제한된 목표를 위해 선전활동을 벌이며 출판물, 대규모 집회, 청원 등을 이용하여 '장외에서' 여론을 불러일으키던 '재야' 압력집단─가 대두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윌버포스나 위빌로서는 자기들의 선동을 젠트리 혹은 자유토지보호자(freeholder)들에게 국한시키고자 원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이를 통해 선례들이 확립되었으며, 이 실제 사례들은 광범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었다. 헌법의 복잡한 장치에 새로운 톱니바퀴가 추가되었다. 어스킨과 위빌은 견제와 균형이라고 하는 잘 알려진 공학적 비유법을 사용하면서, 〈인민의 운동에서 시계의 작동과 같은 규칙성〉을 요구하였다."(121)


"프랑스혁명은 좀더 원대한 성격의 선례를 마련해주었다. 이성의 빛에 의해, 그리고 '빈약하고 진부하고 소름끼치는 관습, 법률법규의 방식들'을 그늘 속으로 던져넣은 근본 원칙들에 입각하여 작성된 새로운 헌법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입헌주의적 논거의 지반을 처음으로 대폭 제거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은 페인이 아니라 버크였다." "버크는 전통에 대한 숭상으로 헌법에 대한 숭상을 보완하였다." "버크에게 크나큰 우려를 안겨준 것은 부패한 귀족층의 도덕적 본성이라기보다 오히려 민중의, 곧 '돼지 같은 떼거리'의 본성이었다. 버크는 역사를 하나의 '자연의 과정', 곧 너무나 복잡하고 꾸물거림이 심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혁신도 늘 예기치 못한 위험들로 가득 찰 수 밖에 없게 되는 그러한 과정으로 파악했다. 페인은 버크의 경고를 무시한 점에서는 잘못이었을지 몰라도 버크의 특수한 논지에 가로놓여 있는 계급적 이해관계의 관성을 폭로한 점에서는 옳았다."(127-8)


"페인의 『인간의 권리』는 잉글랜드 노동계급 운동의 원천을 이루는 저작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의 논거와 어조를 좀더 면밀히 살펴보아야 하겠다. 이 책을 쓸 때 페인은 이미 15년 가까이나 되는 세월을 실험과 입헌주의적 우상파괴의 팔팔한 풍토 속에서 살아온, 국제적 명성을 지닌 미국인이었다. 그는 제2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잉글랜드의 관례와는 다른 사고방식 및 표현방식으로 씌어진 한 저작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입헌주의적 논거의 틀을 초두부터 거부하였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으며, 문서에 씌어진 죽은 자의 권위에 의해 이 권리들이 상속되지 못하고 통제되고 흥정거리가 되는 것에 반대하여 싸운다.〉 버크는 〈후손의 권리를 곰팡내나는 양피지 문서의 권위에 영원히 의탁할 것〉을 바랐던 반면, 페인은 각각의 세대마다 자신의 뭇 권리와 정부형태를 새로이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30)


"대의제 기관들에 대한, 이성의 힘에 대한, (페인의 말을 빌리자면) 일반민중 사이에 〈잠자는 상태로 누워 있는 지각(知覺)의 덩이〉에 대한, 그리고 〈인간은 정부에 의해 타락하지 않는 한 천성적으로 인간의 벗이며, 인간본성은 그 자체로서 사악한 것이 아니다〉라는 믿음에 대한 무한한 신뢰야말로 페인의 낙관주의를 지탱하는 전제들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전통 및 교육기관들에 대한 독학한 사람 특유의 불신(〈그는 자기 자신의 서술은 송두리째 외우고 있었으며 그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는 것이 페인을 잘 아는 한 사람의 평이었다)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경험주의를 단도직입적으로 밀고 나아가고 '상식'에 호소함으로써 복잡한 이론문제들을 회피해버리려고 하는 경향을 드러내면서, 비타협적이고 당돌하고 심지어 독단적이기까지 한 어조로 표현되고 있었다. 19세기 노동계급의 급진주의에서는 이같은 낙관주의의 강점과 약점이 모두 몇번씩이고 되풀이하여 나타났다."(136-7)


"페인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관련해서는 모든 세습적 영예와 특권들의 철폐를 바라고 있었으나, 경제적 평등 실현을 지지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는 사회 내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의 시민으로서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반면 경제적으로는 사회 내에서 모든 사람은 당연히 고용주 혹은 피고용자로 계속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국가는 한쪽 편의 자본문제나 다른 쪽 편의 임금문제에 간여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권리』와 『국부론』은 서로를 보완하고 장려해주었다. 그리고 이 점에서 또한 19세기 노동계급 급진주의의 주된 전통은 페인으로부터 그 특징을 취하고 있었다. 오웬파의 영향 및 차티스트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다른 전통들이 우세한 적도 몇번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한번씩 퇴조를 겪고 나서 보면 언제나, 저류에 흐르는 페인주의적 주장들은 손상받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곤 하였다. 1880년대까지 노동계급의 급진주의는 대체로 이 테두리 내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137-8)


5장 자유의 나무를 심기


"1792년 초에만 하더라도 영국 수상 피트는 확신을 가지고 '15년간'의 평화를 예상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6개월이 더 지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영국이 중립을 유지하면서 프랑스에서의 소란한 사태로 이득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1792년 5월의 포고령은 페인주의 선전의 확산에 대해 정부측이 최초의 심각한 우려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아직까지도 순전히 국내적인 문제로 여겨지고 있었다. 세 가지 요인이 상황을 바꾸어놓았다. 그 첫째는 9월학살 이후 프랑스혁명이 급속도로 과격해진 것이다. 두번째는 신생공화국의 팽창주의적 열기로 인해 영국의 이익과 유럽의 외교적 균형이 직접 위협을 받게 된 일이다. 세번째로는 프랑스의 혁명적 열기와 국내의 성장하는 자꼬뱅운동이 합류할 위험스러운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개혁운동가 위빌은 〈인민 가운데 최하층계급들에게 폭력과 불의의 행위를 선동하는〉 경향이 있는 페인의 〈유해한 영향〉을 개탄하였다."(151-2, 156)


# 9월학살 : 1792년 9월 2~6일 파리에서 급진파가 왕당파를 비롯한 수감자들을 학살한 사건


"국내의 탄압은 물론이요, 나라 밖 사태들도 잉글랜드 자꼬뱅들의 활동을 더 수월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하였다. 처음에는 민중의 호응을 받지 못했던 대(對)프랑스전쟁이 민중들 사이에서 전통 깊은 반프랑스적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켰음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아주 상세하게 보도가 되곤 하였던 새로운 처형사건들(9월학살, 국왕과 마리 앙뚜아네뜨의 처형)도 하나하나가 다 이같은 감정을 부채질하였다. 1793년 9월에는 페인의 친구들인 지롱드파가 국민공회로부터 밀려나고 그 지도자들이 단두대로 보내졌으며, 이 해 마지막 주에는 페인 자신도 뤽쌍부르 궁에 유폐되었다. 이같은 경험들은 지나치게 열렬하고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으로 자기네 신념을 프랑스의 대의명분과 동일시하였던 지식인세대에 저 깊디깊은 환멸의 첫 단계를 초래하였다. 1792년에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지식인 개혁운동가들과 평민 개혁운동가들 사이의 통합은 결코 다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162-3)


"민중단체들은 그들에게 닥친 이 첫번째 폭풍우를 이겨냈다. 그러나 시련을 거치는 가운데 이들 단체는 강조점과 어조에서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페인의 이름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그의 공공연한 공화주의적 어조도 헌법의 '순수성'을 회복하자는 새로운 강조점에 밀려났다. (런던교신협회는 이를 1688년 협정의 맥락에서 규정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같은 수정은 이 테두리를 벗어나는 그 어떤 수사적 용어도 고발대상으로 삼겠다는 당국의 명백한 의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을 뿐이며 다른 면에서는 박해로 인해 협회들은 오히려 급진화되었다." "1793년에 단체들에 가입해 있던 개혁운동가들의 대다수는 이제 장인, 임금노동자, 소마스터 및 소직종인(small tradesman) 등이었다. 그리고 이제 두 개의 새로운 테마가 아주 두드러지게 강조된다. 경제적 불만 및 사회적 치유책이 그 한가지이고, 조직 몇 연설 형태에서 프랑스의 선례를 모방하는 것이 다른 한가지이다."(174)


"당국의 곤경은 입헌주의의 모순으로부터 생겨났다. 지방의 치안관이 즉결심판을 내리는 데 필요한 법은 충분히 있었지만, 중앙의 사법관리들은 중요한 사안의 기소에 관해서는 명확한 의견을 제시하려 하지 않았다. 치안교란에 관한 법률은 내용이 모호했으며, 그래서 검찰총장은 대역죄라는 어마어마한 죄명으로 기소해야 할지 치안교란적인 중상모략 행위라는 비교적 가벼운 죄목으로 고발해야 할지를 선택해야 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에서 정부는 모호한 법률, 배심제도(대니얼 이튼을 두 번, 토머스 워커를 한 번 무죄방면하여 당국에 굴욕을 안겨주었다), 토머스 어스킨(그는 여러 차례의 재판에서 변론을 폈다) 같은 뛰어난 변호인들을 포함하는 비록 소수이지만 쟁쟁한 폭스파 야당세력, 입헌주의적 어법이 그야말로 체질적으로 배어 있어 개인적 자유가 침해받는다 하면 그 어떤 경우에라도 튀어일어나 방어할 태세가 되어 있는 공공여론 등 일련의 장애에 부딪혔다."(175-6)


"잉글랜드 자꼬뱅들은 지금까지 인정되어온 것보다 수적으로 더 많고, 프랑스혁명을 만들어낸 '평민대중'과 더 비슷해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프랑스) 자꼬뱅을 닮았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열광적인 평등주의로 1793~94년 로베스삐에르의 혁명적 독재를 떠받쳐주었던 저 빠리'구'(區, section)의 쌍-뀔로뜨들과 더 비슷하다." "공화력 2년 빠리에서도 그러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제화공들은 항상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이 장인들은 페인의 교리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받아들였다. 곧 그것은 절대적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군주정, 귀족정, 국가 및 세금에 대한 철저한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열광의 시대에 이들 제화공들은 한편으로는 수천명의 소상점주, 인쇄공 및 서적판매상, 의료인, 교사, 판화공, 소마스터 및 반국교파 성직자들의 지지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짐꾼, 석탄운반부, (막)노동자, 육군병사와 수병들의 지지를 모아들인 저 운동의 단단한 핵심세력이었다."(221-2)


"1797년에 이르면 초강경파 자꼬뱅들 가운데 일부는 입헌주의 운동에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걸지 못하게 되었음이 명백하다. 이때부터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런던의 민주주의자들 중에는 쿠데타─아마도 프랑스 군대의 지원을 받을─외에는 아무것에도 희망을 걸지 않는 (스펜스주의자 내지 공화파) 소수집단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들은 비록 진지했지만, 그들식의 음모결사는 당대의 일반적인 추세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종의 생경함을 띠고 있었으며, 추상적인 공화주의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오코일리의 처형, 아일랜드 반란의 진압, 그리고 런던과 맨체스터에서의 지도적 인물들의 체포 등과 아울러 비밀결사 음모는 더이상 '전국적' 존재기반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지방에서는 이같은 지하조직이 존재했던 경우라 하더라도 이들 조직은 고립되어 시들어버리거나 아니면 그 자체의 공업적 상황에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245-6)


"혁명적 충동은 아주 초기에 질식당해버렸음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최초의 결과는 쓰라림과 절망이었다. 지배계급의 반혁명적 공포는 사회생활의 모든 면에서 곧 동직조합, 민중의 교육, 민중의 스포츠와 풍속, 민중의 출판물과 단체들, 그리고 민중의 정치적 권리 등에 대한 태도에서 표현되고 있다." "잉글랜드는 반혁명적 감정 및 규율의 밀물이 산업혁명의 밀물과 시기적으로 일치하였다는 점에서 유럽이 다른 나라들과 구분된다. 새로운 기술과 공업조직의 형태들이 발전할수록 정치적·사회적 권리들은 후퇴하였다. 조급하고 급진적인 성향을 가진 산업부르주아지와 막 형성되고 있던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자연스러운' 동맹은 성립하자마자 깨져버렸다." "이 두 세력이 행동의 일치를 보인 것은 1792년의 몇달 동안 뿐이었다." "1790년대 잉글랜드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감리교 때문이 아니라, 혁명을 일으킬 만한 힘을 가졌던 유일한 동맹이 와해되어버렸다는 사실 때문이다."(251-2)


제2부 아담에 대한 저주


6장 착취


"1790년대의 모든 급진적인 현상들은 1815년 이후에는 거의 열 배로 재생산되었다. 몇개 안되던 자꼬뱅 신문들은 20여 개의 초급진적이고 오웬주의적인 정기간행물들을 낳았다. 대니얼 이튼이 페인의 책을 출판한 죄로 구금당했다면, 리처드 칼라일과 그를 따르는 노동자들은 동일한 죄로 도합 200년 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교신협회가 20여 개의 도시에서 불안정하게 유지되었던 데 반해, 전쟁 이후 햄프든 클럽과 정치동맹들은 작은 공업 촌락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운동이 면직공업에서 큼직한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발생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양자간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면방직공장은 더욱 많은 상품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그 자체를 생산해낸, 산업혁명만이 아닌 사회혁명의 주역으로도 간주된다. 요컨대 어떤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했던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이제는 무엇을 설명해주는 말이 된 것이다."(268-9)


"확실히 면직공업은 산업혁명의 선도공업이었고 면방직공장은 공장제도의 탁월한 모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성장의 역학과 사회적·문화적 삶의 역학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아주 직접적으로 일치된다고 상정해서는 안된다. (1780년경의) 면방직공장의 '비약적인 발전' 이후의 반세기 동안에도 공장노동자는 면직공업에 종사하는 성인노동자 중에서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1830년대 초에 면수직공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면직, 모직, 견직 방적공장과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모든 남녀 노동자보다도 여전히 그 수가 더 많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1830년대에도, 성인남자 면방적공은 그 실체가 도무지 잡히지 않는 이른바 전형적인 '평균 노동자'(average working man)가 아니었다. 이 점은 중요하다. 면방직공장의 새로움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노동계급 공동체(working-class community)들을 만들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정치적·문화적 전통의 연속성을 과소평가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270-1)


"그럼에도 불구하고 1790년과 1830년 사이의 두드러진 사실은 '노동계급'의 형성이다. 이것은 첫째, 계급의식의 성장에서, 즉 이 다양한 모든 노동대중 집단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동일하고 타계급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그들의 이해관계가 동일하다는 의식의 성장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둘째,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산업적 조직형태의 성장에서 드러난다. 1832년에 이르면 토대가 굳건하고 자기의식적인 노동계급의 제도들─노동조합, 공제조합, 교육 및 종교 운동, 정치조직, 정기간행물들─노동계급의 지적 전통, 노동계급의 지역공동체 패턴, 노동계급의 감정구조가 있었다." "노동계급의 형성은 공장제도의 자동생산물이 아니었다. 산업혁명의 변화하는 생산관계와 노동조건들은 원료에 작용한 것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 그러니까 페인이 버리고 떠났으며 또 감리교도들이 그 틀을 만들어낸 바로 그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에게 작용하였다."(272-3)


"결국, 노동계급의 의식과 제도를 형성하는 데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것은 증기기관 못지않게 정치적 맥락이었다." "프랑스를 보고 놀라 전쟁의 애국적인 열정에 휩싸인 귀족과 제조업자들은 제휴하였다. 잉글랜드의 구체제는 국정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나날이 번성해가는 공업도시들을 잘못 통치해온 낡은 단체들을 온존시킴으로 해서 새롭게 수명을 연장하게 된 것이다. 그 협력의 대가로 제조업자들은 중요한 양보를 얻어냈다. 그것들은 도제제도, 임금규제, 공업에서의 노동조건들을 다루어온 '온정주의'적인 법률들의 취소 내지 철폐였다. 귀족들은 민중의 자꼬뱅적 '음모'를 탄압하는 데 관심이 있었고 제조업자들은 임금상승을 위한 '음모'를 무산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다." "새로운 것은 이러한 사태가 프랑스혁명과 함께, 점증하는 의식화와 더욱 광범위해진 욕구와 함께, (런던과 공업지구의) 인구증가와 함께, 그리고 더욱 지독하고 더욱 노골적인 형태의 경제적 착취 등과 함께 일어났다는 점에 있다."(276-7)


7장 농업노동자들


"인클로우저를 지지하던 자들은 흔히 에이커당 생산성과 지대가치가 높아졌다는 말로 그들의 주장을 대신한다. 그러나 모든 마을에서 인클로우저는 가능한 모든 것을 이용해서 겨우 먹고 살던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를 파괴하였다. 자기의 권리에 대한 법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던 영세농은 거의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인클로우저는 (그것에 대한 온갖 궤변적인 수식어들을 그대로 용인하는 경우) 재산 소유자들과 법률가들의 의회가 제정한 재산에 관한 공정한 규칙과 법에 따라 행해진 계급적 강탈행위에 다름아닌 것이었다." "인클로우저는 자본주의적 재산관계 면에서는 '지극히 적절한' 것이었을지 모르나, 그것은 촌락의 관습과 권리라는 전통적인 외피를 찢어버리는 것이었다. 또한 인클로우저의 사회적 폭력은 바로 자본주의적 재산 개념을 촌락에다 철저하고 완벽하게 부과한 데 있었다." "실로, 인클로우저는 농업적 생산수단에 대한 인간의 관습적인 관례들을 파괴한 수백년에 걸친 긴 과정의 정점이었다."(301-3)


"이렇게 지주와 농장주들의 부가 증가하고 있을 때, 노동자가 지독한 생계수준에서 허덕인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는 대답을 이 시대 전체에 걸친 전반적인 반혁명적 분위기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임금을 낮추기 위해 전쟁을 희망한다'는 것은 1790년대 북부지방 일부 젠트리의 구호였다. 전쟁은 도시의 개혁가들에 대한 탄압뿐 아니라 위빌이 대표하는 인도주의적인 젠트리의 쇠퇴도 가져왔다. 전반적인 인클로우저의 원인이 탐욕이라는 주장에 덧붙여 하나의 새로운 주장이 제시되었는데, 그것은 사회적 규율이라는 주장이다. '지나간 시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남긴 유산'인 공유지는 이제 무질서의 위험한 온상으로 간주되었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이데올로기가 덧붙여진 것이다. 젠틀먼이 영세농들을 공유지에서 제거하고, 그들의 노동자들을 예속상태로 떨어뜨리고, 부수적 소득을 깎아내리고, 소토지보유농을 쫓아내는 것이 공적인 성격을 지닌 정책사항이 되었다."(306-7)


"인클로우저─특히 전쟁기간 중의 남부와 동부 경작지에서의─는 전반적인 농촌인구의 감소를 초래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들은─물결치듯 마을에서 도시로, 그리고 주에서 주로─이주하였지만 전반적인 인구증가는 감소된 인구를 메우고도 남았다. 전쟁이 끝나 곡가가 하락하고 그래서 농장주들이 더이상 〈우리의 젊은이들을 육군이나 해군에 내보낼 수 없게 되자〉(이는 지방의 치안관 수중에 있던 편리한 징계수단이었다), 사람들은 '잉여인구' 문제를 요란하게 떠들어댔다. 그러나 1834년 신빈민법이 시행된 이후에, 여러 촌락에서 떠들어댄 이러한 '잉여'는 허위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촌락에서 노동의 대가는 대부분 구빈세로 충당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며칠 혹은 반나절만 고용되었다가 교구로 되돌려졌다. 우천시에는 노동자들이 '남아돌고' 추수 때는 '모자랐다'." "이 시스템은 자신의 임금이나 노동생활에 대해 노동자가 그나마 가지고 있던 통제력을 완전히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313-4)


8장 장인과 그밖의 노동자들


"19세기 초, 숙련된 수공업기술자의 임금은 흔히 노동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나 '관습'이라는 관념들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관습적인 임금규정은 농촌 수공업기술자들에게 전통적으로 부여된 신분으로부터 대도시에서 시행되던 복잡한 제도적 규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을 고려대상에 넣고 있었다." "농촌의 수공업기술자들은 대개 교육수준이 높고 다재다능하였으며, 그들이 (자신의 관습을 가지고) 도시에 가서 도시노동자들과 접촉했을 때 도시노동자들─직조공, 양말제조공 혹은 광부─보다는 자기들이 '훨씬 높다'고 느끼고 있었다." "수공업기술직이라는 관습적인 전통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공정'가격과 '정당한' 임금이라는 관념과 더불어 유지되고 있었다.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범주들 즉 생계, 자존심, 일정한 수준의 솜씨에 대한 자부심, 기술의 등급에 따른 관습적인 보수 등은 초기의 동직조합 분규에 있어서 순전히 '경제적'인 요구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요구들이었다."(329-31)


"그런데 가장 주목할 점은, 이 시기에 숙련기술을 지닌 장인을 가리킬 때 '귀족'(aristocracy)이라는 용어를 일찍부터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노동귀족'(labour aristocracy)이라는 현상은 흔히 1850년대와 1860년대에 활발했던 숙련공들의 노동조합주의에 수반되거나─심지어는 제국주의의 결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1800~1850년 시기에 노동귀족이라고 할 만한 신·구 엘리뜨 노동자가 있었다. 구엘리뜨는 자기 스스로를 마스터, 상점주, 전문직업인들과 마찬가지로 '신분이 높다'고 생각하던 장인 마스터(master-artisan)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부 공업에서 수공업기술자의 특권적 지위는 관습의 힘을 통해서, 혹은 결사와 도제직의 규제를 통해서, 혹은 수공업이 고도로 숙련되고 전문화된 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에─사치품 제조 부문 같은─작업장과 공장생산에서도 여전히 존속되고 있었다. 새로운 엘리뜨는 철강업, 금속기계작업, 제조공업에서의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더불어 등장했다."(332-3)


"장인과 (막)노동자 간의 구별─신분, 조직 그리고 금전적인 보수에 있어서─은 나볼레옹전쟁 기간보다 더 심해지지는 않았지만 헨리 메이휴가 묘사한 1840년대와 1850년대의 런던에서도 엄청나게 심했다. 〈런던 서쪽 끝의 숙련된 직공들로부터 동부지구의 미숙련노동자들에게로 옮겨가보면, 도덕적 그리고 지적 변화가 너무도 커서 우리는 마치 새로운 땅에 들어온 것과 같은, 그리고 다른 종족 속에 끼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라고 메이휴는 말했다. 남부지방에서 공제조합 회원 규모가 가장 크고, 동직조합 조직이 아주 지속적이고 안정되어 있으며, 교육 및 종교 운동이 번창하고, 오웬주의가 굳게 뿌리를 내린 것은 바로 장인들 사이에서였다." "그런데 자신의 수공업과 동직조합의 보호가 박탈될 경우, 장인은 메이휴시대의 런던에서 가장 가련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가난에 찌든 숙련직인들은 (부랑자들과는 전혀 다른 계급이었기에) 마지막 절망에 빠졌을 때에야 비로소 구빈원으로 향했다."(337-8)


"우리가 낡은 기술이 쇠퇴하고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는 과정을 고찰할 때, 낡은 기술과 새로운 기술이 거의 언제나 각기 다른 사람들의 차지였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19세기 전반의 제조업자들은 매번 기술혁신에 박차를 가했는데, 이러한 기술혁신은 성인남자 수공업기술자를 여자나 미성년 노동으로 대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낡은 기술이 과거와 마찬가지 수준이거나 그보다 더 높은 기술을 요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대체되었을 경우에도, 우리는 동일한 노동자들이 이전 기술에서 다음 기술로 혹은 가내생산에서 공장생산으로 이전하는 경우를 거의 볼 수 없다. 기계와 기술혁신에 직면하여 겪게 되는 불안정성과 적대감은, 단지 편견과 (그당시 당국이 주장하는 대로) '정치경제학'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장인들은 새로운 기계가 그들의 자식이나 다른 사람의 자식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는 있어도 그 자신에게는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346-7)


"선대제 노동자와 장인 모두에 관련된 몇가지 일반적인 사항이 있다. 첫째, 직조공이나 〈싸구려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을 〈기계화 과정에 의해 대체된 재래식 직종 몰락의 본보기〉로서 설명해치워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임금이 최저수준이었던 것은 공장노동자가 아니라, 그 전통과 방법이 18세기에 속했던 가내노동자들이었다〉라는 경멸조의 진술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이와 같은 진술들은 우리에게 이런 것들은 산업혁명의 진정한 추진력과는 그다지 관계없는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즉, 그들은 '낡은' 전(前)공업사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고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의 진정한 면모는 증기기관, 공장노동자, 그리고 고기를 먹는 엔지니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780년~1830년 사이에 선대제 노동을 이용하는 공업에 고용된 사람의 수는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종종 '증기기관과 공장이 선대제 노동자의 수를 증가시킨 주범이었다.'"(362-3)


"농업노동자들이 토지를 갈망했다면, 장인들은 '독립'을 염원했다. 이러한 염원은 초기 노동계급 급진주의의 역사 도처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런던에서 소마스터가 되는 꿈(1790년대에 여전히 강했고, 버밍엄에서는 1830년대에도 여전히 강했던 꿈이다)은 1820년대와 1830년대에 '자택' 혹은 '다락방' 마스터들이 겪은 경험─즉, 일주일 내내 기성품 도매상이나 기성품 제조업체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독립'─에 직면했을 때 더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이것은 1820년대 말에 오웬주의에 대한 지지의 물결이 왜 갑자기 높아졌는가를 설명해준다. 동직조합의 전통들과 독립에 대한 갈망은 자신들의 생계수단에 대한 사회적 통제, 즉 '집단적' 독립이라는 사상 속에서 하나로 엮여졌다. 오웬주의적 실험이 대부분 실패했을 때에도 런던의 장인은 자신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웠다. 런던에서 태어난 장인들은 공장의 작업속도를 맞출 수 없었다. 일개 프롤레타리아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364-5)


9장 직조공들


"직조공들의 처지를 악화시킨 원인을 역직기에만 돌린다면 그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직조공의 직위는 1813년에 이르면 이미 산산이 무너져내려가 있었는데, 이때 영국의 역직기는 총 2,400대로 추산되었고 손과 동력 간의 경쟁은 대체로 심리적인 것이었다." "기계의 발명과 직조업에 대한 자본 투자를 '지연시킨' 것은 오히려 수직기 노동이 남아 돌아가고 값쌌기 때문이다. 직조공들의 신분하락은 지체가 낮은 장인 직종 노동자들의 경우와 아주 비슷하다. 그들의 처지는 그들의 임금이 낮아질 때마다 점점 더 무방비상태로 되어갔다. 직조공들은 이제 더 적은 돈을 벌기 위해 밤늦게까지 더 오래 일해야 했고, 더 오래 일을 함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이 실직되는 기회를 증가시켰다.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신봉자들조차도 아연실색하였다. 〈애덤 스미스 박사가 그와 같은 사태를 생각해보기나 했을까?〉라고 한 인도주의적인 고용주는 외쳤는데, 그의 고결한 사업방식은 그 자신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389)


"직조공들은 도시의 장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황금기'에 대한 기억을 아주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고, 그런만큼 신분적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도시의 장인보다도 더 뿌리깊은 사회적 평등주의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호시절에 그들의 생활방식은 지역공동체에 의해 공유되어왔기 때문에 그들이 고통도 지역공동체 전체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위가 매우 낮아졌기 때문에 그들이 경제적·사회적 보호장벽을 쳐야 할 그들보다 낮은 미숙련공이나 일용노동자들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들의 저항─그 저항이 오웬의 언어로 표현되든 성경적인 언어로 표현되든 상관없이─은 각별한 도덕적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파당적인 이익에 호소하기보다는 기본권과 인간의 우애와 행동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들에 호소했다." "그들의 꿈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 즉 그들이 생산한 것을 마스터와 중간업자들에 의한 왜곡 없이 교환하는 독립적 소생산자의 공동체였다."(410-1)


"직조공들의 공장제 반대에는 그들의 지역공동체의 '가치체계'가 담겨 있다. 우리는 1830년대의 잉글랜드에서 서로 다른 전통과 규범과 기대를 가지고 서로 충돌하는 공장, 직조, 농촌의 공동체들로 구성된 하나의 '다원사회'(plural society)를 볼 수 있다. 1815년에서 1840년까지의 역사는 부분적으로 앞의 둘(즉, 공장과 직조 공동체들)이 공통의 정치운동(급진주의, 1832년의 개혁, 오웬주의, 10시간 운동, 차티스트 운동) 안에서 하나로 합쳐지는 이야기이다. 반면, 차티스트 운동의 마지막 단계는 부분적으로 이 양자가 불편한 공존관계를 유지하다가 마침내는 결렬되는 이야기이다. 수직공들이 장인들과 여러 전통을 공유하고 그들과 통혼하고, 자녀들을 일찍부터 공장에 보냈던 맨체스터나 리즈 같은 대도시에서는 양자간의 차이가 가장 적게 나타났다. 고지대에 있는 직조업 촌락의 지역공동체들은 훨씬 배타적이었다. 그들은 '도회지 사람들'─온통 '쓰레기조각과 부글대는 것들'로 이루어진─을 경멸하였다."(428-9)


"입법부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며 따라서 '자연스러운' 경제적 힘들이 사회의 일부 사람들을 해쳐도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을 전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낡은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아직도 온존되고 있는 자유의 신화이다. 역직기는 국가와 고용주 모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입증해주는 확고한 알리바이를 마련해주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직조공들의 이야기를 또한 산업혁명기에 벌어진 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직조공의 역사에서 우리는 노동조합이라는 자체 방어수단을 가지지 못한 일부 노동자들에게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체제가 행한 행동의 하나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정부는 그들의 정치조직과 노동조합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일랜드 기근의 희생자들에게 행했던 것과 같은 뻔뻔스러운 방법으로 자본의 자유라는 부정적 도그마를 직조공들에게 강요하였다. 이러한 도그마의 유령은 오늘날까지도 떠돌아다닌다."(434)


"일부 경제사가들은 (아마도 인간의 진보를 경제성장과 동일시하는 숨겨진 '진보주의' 때문에) 산업혁명기의 기술혁신이 철도시대 이전까지는 (금속공업을 제외하고는) 성인 숙련노동을 일자리에서 쫓아냈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쫓겨난 노동은 이 시대 내내 넘쳐흐른, 순전히 인간의 근육만을 사용하는 고된 작업에 값싼 노동력을 무한정 공급하였다. 광산, 부두, 벽돌 쌓는 작업, 가스작업, 건축, 운하 및 철도 건설, 짐마차 운반과 인력 운반 등에서는 기계화가 거의 혹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외적인 것은 숙련을 요하는 직종들이고, 그래서 미숙련 육체노동이나 선대제 노동 공업들의 상태는 '특별히 불행했던 것'이기는커녕, 온갖 방법으로 임금을 깎아내리기 위해 고용주들과 입법자들과 이데올로그들이 고안해낸 한 체제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노동조건들이 급속이 악화되어가고 있을 때 직물업이 과잉공급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으로 확인시켜준다."(435)


10장 생활수준과 실제의 경험들


"산업혁명기 민중의 식생활에 관한 논의는 곡물, 육류, 감자, 맥주, 설탕 및 차 소비를 주로 문제삼는다. 이 모든 것들은 별로 주목할 만한 것이 없는 기록이다. 50년에 걸친 산업혁명기에, 국민생산 가운데 노동계급이 차지하는 몫이 재산소유계급과 전문직업인 계급이 차지하는 몫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소되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국부(national wealth)가 증가하고 있다는 증거를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고, 또 그 자신의 노동산물임이 분명한 국부의 대부분이 역시 분명한 방식으로 고용주들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있던 바로 그때에 '평균' 노동자는 최저생계 수준에 아주 가까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심리적으로 그것은 생활수준의 저하와 다름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경제적 진보의 혜택' 가운데서 그가 차지한 몫은 고작 더 많은 감자, 그의 가족을 위한 몇 벌의 면직의류, 비누와 초, 약간의 차와 설탕, 그리고 『경제사평론』에 실린 그 엄청난 수의 논문들뿐이었다."(442)


"슬럼가, 악취가 풍기는 강물, 자연파괴, 형편없는 건축물 등은 모두가 높은 인구 압력 아래서 계획도 사전경험도 없는 가운데 급속히 그리고 무계획적으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모두 용서될 수 있다는 견해가 지겹게 반복되고 있다. 〈흔히 빈곤의 원인은 탐욕이라기보다는 무지였다〉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명백히 양자 모두가 원인이었다. 그런 주장은 어느 시점까지만 타당한데, 즉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의사들과 위생개혁가들, 벤담주의자들과 차티스트들이 재산소유자들의 타성과 '값싼 정부'를 외치는 납세자들의 선동에 대항하여 개량을 위한 끈질긴 싸움을 계속하던 1830년대 혹은 1840년대의 어느 시점까지만 타당하다. 이 시기에 이르면 노동자들은 사실상 악취가 나는 '별개의 지역들'(enclave, 다른 나라 땅으로 둘러싸인 영토)에 격리되어 있었고, 중간계급들은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편리할 만큼 그 지역과 멀리 떨어짐으로써 공업도시에 대한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냈다."(446)


"인구학자들은 인구폭발의 주요 원인으로 사망률 감소보다는 출생률 증가를 새롭게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들이 가외수입을 얻거나 구호금을 받기 위해 의식적으로 더 많은 자식들을 가지기로 작정했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출생률의 증가는 지역공동체와 전통적인 가족생활 패턴의 파괴(스피넘랜드 제도와 공장은 조혼과 '무분별한' 결혼을 금지해온 터부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주인집에서 먹고 자는 농장의 하인과 도제 수의 감소, 전쟁의 영향, 신도시로의 인구집중, 심지어는 다산형질의 유전학적인 선택 등에 의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출생률의 증가를 생활수준 향상의 증거로 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동자들 가운데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무분별한' 자들이 가족수가 가장 많았다는 것은 19세기 초반의 관찰자들이 반복해서 지적하는 테마였고, 한편 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 농민의 결혼패턴 전체가 바뀐 것은 대기근의 뼈저린 경험을 겪고나서부터였다."(449)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인도주의적인 대의명분을 어느정도 지지했던 수십명의 젠틀먼과 전문직업인들은, 1820년대에는 인구가 밀집된 제조업지역의 한복판에 살면서도 그들이 사는 집의 대문에서 불과 100~200야드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폐들을 알지 못했다. 어린이노동을 하는 소녀들이 반벌거숭이 상태로 갱도에서 나왔을 때, 허더스필드 지역의 유지들은 참으로 놀랐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악폐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얼마나 '알려지지 않고'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가난이 스스로 들고 일어나지 않으면 사람들이 가난을 지켜보면서도 어느 정도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지를 잊어버린다. 1790년과 1830년 사이의 부자들의 눈에 공장의 어린이들은 '바쁘고' '부지런하고' '유용했다'. 어린이들은 그들의 정원과 과수원 밖에 머물러 있었고 또 값이 쌌다. 양심의 가책이 일어나더라도 그러한 가책은 대개 종교적인 반성이 잠재울 수 있었다."(472-3)


11장 개조하는 힘을 지닌 십자가


"나뽈레옹전쟁 기간에 감리교 신도의 수는 괄목할 만큼 증가했다. 전쟁 기간은 또한 모든 비국교 교파 사이에서 (알레비의 표현을 빌리면) 〈혁명적 정신이 걷잡을 수 없이 퇴조하는〉 시기였다. 전쟁 기간 중의 감리교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 특히 놀랍다. 첫째, 새로운 공업 노동계급 사이에서 그 수가 가장 많이 늘었다. 둘째, 웨즐리 사망 후 몇년 사이에 목사들의 새로운 관료화가 강화되었는데 그들은 신도들의 복종심을 조작하는 것과 교회의 권위를 모욕할 수 있는 모든 일탈현상의 출현을 제재하는 것을 그들의 의무로 여겼다. 이 점에서 그들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수세기 동안 복종의 의무를 빈민들에게 설교해온 것은 국교회였다. 그러나 국교회는 빈민들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감리교도들, 적어도 그들 중 많은 사람은 '분명히' 빈민이었다. 감리교 지방설교사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누가 말했듯이) 〈나의 제니 방적기 뒤에서〉 연설문안을 궁리하던 미천한 사람들이었다."(484-5)


"감리교가 일요학교를 통해 최소한 어린이와 성인에게 기초교육을 실시했던 점을 상기하면 우리는 흔히 감리교의 죄악을 어느 정도는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다 큰 채탄부 녀석들과 그들의 누이들이' 또 위틀, 보울러, 점보 및 화이트 모스에서 온 직조공과 노동자의 아이들이 다니는 1790년대 말 미들턴 학교의 행복한 정경을 그린 뱀퍼드의 그림을 때때로 회상하게 된다. 그러나 (정통 웨즐리파를 주도한) 제비즈 번팅이 용서할 수 없었던 초기 감리교도들의 느슨함을 보여주는 바로 '이러한' 정경이다. 그는 1808년 셰필드의 목사로 재직시 일요학교의 아동들이 '글쓰기'를 배우고 있는 것을 목도했을 때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는 '안식일의 끔찍스런 악용'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것이 신학적으로 부당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어린아이들이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은 '영적인 선행'이지만, 글쓰기는 그로부터 '세속적 이익'이 생길 수도 있는 '세속적인 기교'였기 때문이다."(488-9)


"우리는 번팅과 그의 동료들에게서 그들이 어린이노동을 용인한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이들의 기형적 신체와 짝을 이루는 그들 자신의 기형적 감각을 보게 된다. 공업중심지(1804~15년의 맨체스터, 리버풀, 셰필드, 핼리팩스, 리즈)에서 그가 초기 목사직을 수행할 때의 수많은 통신문을 살펴보면 끊임없는 교파간의 사소한 분쟁과 도덕적인 속임수와 또 젊은 여성의 개인적 품행에 관한 시시콜콜한 신문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런 중에도 번팅이나 그의 동료들 중 누구 하나 산업주의의 결과에 대해서는 단 한번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젊은 감리교 지도자들은 태만으로 어린이노동이라는 범행에 공모하는 죄만 지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빈민들에게 복종이란 활성분(活性分)을 주입시킴으로써 빈민들을 내부에서부터 약화시켰다. 그리고서 그들은 기업가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작업규율이라는 심리적 성분의 조성에 가장 적합한 요소들을 감리교 안에서 길러냈던 것이다."(489-90)


"감리교는 어떻게 해서 이렇듯 놀라운 활력을 가지고 이 이중의 직분─부르주아의 종교이자 프롤레타리아의 종교라는─을 수행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앤드류 유어 박사의 『매뉴팩처들의 철학』에서 하나의 완벽한 선례를 볼 수 있다." "공장제는 인간성의 개조를 요구한다. 장인이나 선대제 노동자의 '발작적인 노동행태'(working paroxysms)는 인간이 기계의 규율에 적응할 때까지 규격화(methodized)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규율을 지키는 미덕이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감독관이 되지 않는 한) 전혀 세속적 이득을 가져다줄 것 같지 않을 때, 어떻게 그 미덕을 그들에게 주입시킬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인간은 마땅히 그의 으뜸가는 행복을 현재의 상태가 아니라 미래의 상태에 기약해야 한다는 ···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중요한 교훈〉이 주입됨으로써만 가능하다. 노동은 반드시 〈초월적 존재의 사랑에 의해 ··· 우리의 의지와 애정 위에 고취된 ··· 하나의 순수한 '덕행'〉으로서 수행되어야만 한다."(498-9)


"〈그렇다면 인류는 이 개조하는 힘(transforming power)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이다. 죄를 범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그(십자가)의 희생이며, 죄에 끌리는 마음을 없애는 것은 그 동기이다. 십자가는 그와 같은 끔찍한 속죄가 아니고서는 비열한 죄가 씻기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죄를 극복한다. 십자가는 불복종의 죄에 대한 보상을 치르며, 순종을 고무하며, 순종하는 힘을 얻게 해주며, 순종을 실행 가능케 하며, 순종을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만든다. 십자가는 순종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순종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든다. 결국 십자가는 순종을 부추기는 동기일 뿐만 아니라 순종의 기본틀(pattern)이다.〉" "웨즐리파는 은총의 보편성 교의를 설파했다. 적어도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죄와 은총의 기회는 평등하다. 그리고 지식의 종교이기보다 '마음'의 종교로서, 아무리 소박하고 아무리 교육받지 못한 자라도 은총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499-501)


"그러나 이 교리에는 좀더 복잡한 점들이 있다. 사람이 자신의 의지에 따른 행동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일 것이다. 구원은 신의 전권(prerogative)이었으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극도로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속죄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일단 은총을 확신하고, 일단 감리교의 형제애 안에 철저하게 들어오면 노동하는 남자나 여자나 '교리를 어기는 것'(backsliding)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친 산업세계에서 그들이 아는 유일한 공동체 집단으로부터 축출당함을 의미했을 것이다." "부자는 교회에 봉사함으로써 (특히 예배당을 지음으로써) 은총의 증거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육신의 욕망, 눈의 욕망, 그리고 자만심'의 유혹을 덜 받는다는 점에서 행운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은총을 입고 있을 가능성이 한결 많았는데, 그것은 그들의 '소명'(직업) 때문이 아니라 '다시 죄를 지을'(backslide) 유혹을 덜 받았기 때문이다."(502-3)


"그러나 감리교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종교'라는 것이 웨즐리의 주장이었다. 감리교가 예전의 청교도 분파들과 가장 뚜렷하게 다른 점은 그 '열광'과 감정적인 황홀경에 있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전(前)산업기의 저항적인 노동자나 장인의 성격구조가 공업노동자의 순종적인 성격구조로 난폭하게 재주조되는 영적 시련을 볼 수 있다. 실로 여기에 유어가 말한 '개조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개성의 바로 원천에 침투하여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를 억압하려는 악마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억압'이란 잘못된 낱말이다. 이러한 에너지의 표출은 금지되었다기보다는,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서 표출되지 않고 오직 교회를 위해서만 사용되도록 징발되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궤짝 같은 예배당이 마치 인간의 영혼을 채가려는 커다란 덫처럼 공업지대에 서 있었다. 바로 그 교회 안에는 신앙을 버린 자, 고해, 사탄에 대한 공격, 길 잃은 양들로 이루어진 감동적인 드라마가 끊임없이 존재하였다."(503-7)


"감리교는 늘 교회 문을 열어둠으로써 산업혁명기에 뿌리뽑히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사라져가고 있던 예전의 공동체적 생활방식을 대신할 만한 어떤 종류의 공동체를 제공했다." "사실 이 시기의 많은 사람에게 감리교회의 교우라는 '티켓'은 주술적인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철  따라 이동하는 노동자들에게 그것은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길 때 새로운 공동체로 들어가는 입장권이 될 수 있었다. 이 종교공동체 내에는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자체의 드라마, 자체의 지위와 비중의 등급, 자체의 화젯거리가 있었으며 많은 상부상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목사는 별로 없었지만 약간의 사회적 신분이동도 있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교회 안에 들어오면, 그렇지 않으면 적대적이기만 한 이 세상에서도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사람들은 필경 그들이 지닌 소박함, 정결함 또는 경건함 때문에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521-2)


12장 공동체


"18세기 잉글랜드의 도시문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한층 더 (이 말의 통상적인 의미에서) '농촌적'이었던 반면, 농촌문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풍요로웠다. 〈사람들이 늘 한곳에 그대로 있으면 어리석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라고 코벳은 주장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신흥 공업도시들은 농촌을 밀어냈다기보다 농촌 '위에서' 성장하였다. 19세기 초에 가장 일반적인 공업배치 상황을 보면, 흩어져 있는 공업 촌락들이 하나의 원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상업과 제조업 중심지가 그 원의 중심축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 촌락들이 교외지대가 되어가고 농토들이 벽돌로 뒤덮여감에 따라 19세기 후기의 대규모 도시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오랜 전통의 해체를 가져올 만큼 난폭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남부 랭커셔, 포터리즈, 웨스트 라이딩과 블랙 컨트리의 고유한 관습과 미신과 방언들은 단절되지도 않았고 딴 곳으로 옮겨지지도 않았다."(558)


"지방색을 띤 이러한 전통들은 예전의 생활방식이 사라지는 데 대한 의식적인 저항이었고 또 그것은 빈번하게 정치적 급진주의와 연결되었다. 이와 같은 예전 생활방식의 사라짐에서 중요했던 것은 비단 눈에 보이는 공유지와 '놀이터'의 사라짐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즐겼던 여가의 상실이었으며 놀고 싶어하는 충동의 억압이었다. 번연이나 벡스터의 청교도적 가르침이 웨즐리에 의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옥의 불을 피하듯이 모든 경박한 짓을 피하라. 그리고 욕하고 거짓 맹세 하는 것을 피하듯이 어리석은 짓을 피하라. 여자에 손대지 말라.〉 카드놀이, 색깔 있는 옷, 장신구, 연극─이 모든 것이 감리교의 금기사항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비속한' 노래와 춤을 반대하는 소책자들이 씌어졌으며 경건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문학과 예술은 아주 수상쩍게 생각되었다. 끔찍스러운 '빅토리아 시대의' 안식일이 빅토리아 여왕이 출생하기도 전에 강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561-2)


"19세기 초의 노동계급의 공동체는 온정주의나 감리교의 산물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고도로 의식적인 노력의 산물이었다. 맨체스터나 뉴카슬에서는 자체 규율과 공동체적 목적을 강조하는 노동조합과 공제조합의 전통이 멀리 18세기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공제조합들은 중간계급 회원을 거의 두지 않았다. 공제조합 회원은 사무원이나 소직종인 이상의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별로 없었으며 대부분이 장인들이었다. 모든 동료가 조합기금의 출자자였기 때문에 회원수가 안정되어 있었고 또 주의 깊고 열성적인 자치 참여가 이루어졌다." "우리는 공제조합의 비밀주의 안에서, 그리고 상층계급의 탐색적인 눈초리 아래서도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불투명성 안에서 독자적인 노동계급 문화와 제도의 성장을 말해주는 확실한 증거를 본다. 이같은 기층문화로부터 아직은 그리 튼튼하지 못한 노동조합들이 성장한 것이며 또한 그 속에서 노동조합 간부들이 양성된 것이다."(571-6) 


"1830년께면 대부분의 노동계급 구역에서 국교회의 부활뿐 아니라 감리교의 부활이 자유주의 사상가, 오웬주의자, 비종파 그리스도 교인들로부터 날카로운 반대를 받았다. 런던, 버밍엄, 남동부 랭커셔, 뉴카슬, 리즈 및 기타 도시들에서 칼라일이나 오웬의 이신론자들은 대단히 많은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감리교도들은 그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였으나 점점 더 직종인들과 특권적인 노동자집단을 대변하는 경향을 띠었고 윤리적으로 노동계급의 공동생활에서 떨어져나갔다. 부흥운동의 일부 옛 중심지는 '이교(異敎)'로 빠져들었다. 한때는 〈술 마시기 못지않게 기도 드리기로, 욕하기 못지않게 찬송가 부르기로 눈길을 끌었던〉 뉴카슬의 쌘드게이트에서 감리교도들은 1840년대에 이르자 가난한 이들 사이에 있던 추종자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랭커셔의 일부 지역에서는 공장 직공들과 마찬가지로 직조업 지역공동체들도 예배당에서 대거 이탈하여 오웬주의와 자유사상의 물결에 휩쓸렸다."(584)


"아일랜드 이민이 (노동시장에) 미친 영향은 양면적이며 또 흥미롭다. 역설적이게도 공업적 노동규율로 인해 어떤 틀에 박힌 것이 아닌 보충 노동력을 필요하게 만든 것은, 여러 압력들이 작용하여 잉글랜드 노동자의 성격구조를 바꾸어놓는 데 성공했다는 바로 그 점에 있었다. 한마디로 숙련 또는 반숙련 고용에서는 (근면, 금주, 사려 깊음, 계약 준수 같은) 에너지 지출의 조절이 필요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산업사회 밑바닥에 있는 무거운 육체노동직은 순전한 육체적 에너지를 마구 써댈 것을 요구했고, 전(前)산업노동 리듬에 속하는 강도 높은 노동과 질탕한 휴식의 교대가 필요했는데 잉글랜드의 장인이나 직조공은 그의 약화된 육체적 힘과 청교도적 기질이라는 두 가지 이유로 해서 이같은 노동에는 적합치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일랜드의 노동력이 산업혁명에 불가결했던 거은 오직 그것이 '값쌌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일랜드 농민층이 백스터와 웨즐리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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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와 검사 - 죄수들이 쓴 공소장
심인보.김경래 지음 / 뉴스타파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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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죄수들이 쓴 공소장


"죄수란 갇혀 있는 사람이다. 죄수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경우는 질병으로 인한 입원이나 직계가족의 사망 등 특별한 사유에 한한다. 하지만 특별한 사유 없이도 구치소나 교도소 밖에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출정이다. 출정이란 원래 구치소에 수감된 재소자가 재판을 받거나 자신의 사건과 관련한 검찰의 추가 조사를 받으러 구치소 밖으로 나가는 절차를 말한다. 재판이야 정해진 일정대로니 별다른 특혜나 조율이 있을 수 없다. 문제는 검찰 조사를 받으러 나가는 출정이다. 검사가 클릭 몇 번으로 공문 한 장을 보내기만 하면 언제든 죄수를 자신의 검사실로 불러들일 수 있다. 공문에 구체적인 수사 내용을 적시할 필요도 없다. 수사하는 내용의 제목 정도만 적어주고 관련 수사라고만 쓰면 된다. 본래 수용자에 대한 관리의 책임과 권한은 법무부 산하 교정본부, 즉 구치소나 교도소 측에 있지만 검사는 이 방법으로 죄수들을 마음대로 부를 수 있다. 똑같은 수사기관이지만 경찰은 출정을 요구할 권한이 없다."(21-2)


"일단 검사에게 '간택'을 받은 죄수는 구치소 안에서 일종의 권력을 가지게 되고, 그 권력을 악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악용의 결과는 대개 죄수들 사이의 사기 사건으로 귀결되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2차, 3차의 피해를 입기도 한다." "검사나 수사관도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 마찬가지다. 금융 범죄를 저지르고 구속된 죄수는 감옥 밖에 여전히 상당한 재산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몸이 구속되어 궁박한 처지에 놓여있으므로 아주 작은 편의를 받는 데 큰돈을 쓰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검사실에 드나드는 죄수는 누가 재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현재 가장 아쉬워하는 편의는 무엇인지 등 다른 죄수에 관한 정보를 검사나 수사관에게 전달하고 심지어 다리까지 놓아준다." "금전적인 유혹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 바로 성과를 내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고자 하는 유혹이 그것이다. 흔히 '별건 수사'라고 알려진 타건 압박 수사로 재소자를 쥐어짬으로써 원하는 진술과 증거를 얻어내는 수법이다."(33-4)


"서울남부지검은 금융 범죄와 기업 범죄, 조세 범죄를 중점으로 수사한다. 지난 2013년 서울중앙지검에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이 신설됐는데, 이듬해인 2014년 서울남부지검으로 이전했고, 2015년에는 역시 중앙지검에 있던 금융조세조사 1부와 2부가 남부지검으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남부지검은 대한민국의 금융 범죄와 기업 범죄 수사를 총괄하는 사실상의 컨트롤타워가 되었다. 그런데 금융 범죄와 기업 범죄는 내용이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수사가 매우 어렵다. 자본시장 전문가인 죄수를 수사에 활용했다는 주장이 개연성을 갖는 대목이다." "그런데 수사를 하는 검사 입장에서는 수사가 어려울수록 역설적으로 사건을 축소하거나 덮을 수 있는 재량의 범위가 넓어진다. 더군다나 금융 범죄나 기업 범죄 사건은 변호사들의 수입 액수가 일반 사건에 비해 적게는 몇 배에서 많게는 수십 배에 이를 정도로 크다. 바로 이 지점을 전관 변호사들이 파고들어 검사와 유착하고 사건을 은폐한다는 것이다."(37)


"죄수 K와 김형준 전 검사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내리 동창이었다 둘은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죄수 K는 반장이었고 김형준은 전교 학생회장이었다." "죄수 K와 김형준 두 사람의 우정이 파탄 나는 과정은, 아무리 우정을 가장하고 있다 해도 돈으로 맺어진 스폰서 관계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죄수 K가 김형준 검사에게 내연녀의 오피스텔까지 알아봐주며 '충성'을 다한 것은 그가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 아니라 유사시에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검사였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유사시'가 되자 당연히 도움을 기대했다. 김형준 검사에게도 죄수 K는 어려울 때 자기희생을 감수해서라도 도와야할 친구가 아니었다. 죄수 K로 인해 자신이 위험에 빠지자 도마뱀처럼 꼬리를 자르고 달아나려 했다. 수사 검사를 만나 했다는 '죄수 K는 법대로 엄정하게 처리하고 자신에 대한 오해만 없도록 해 달라'는 부탁은 죄수 K를 진짜 친구로 생가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43, 55)


"도피 중이던 죄수 K가 한겨레신문에 제보를 하고 이 제보가 기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김형준 측이 긴박하게 움직였던 1박 2일 동안 가장 중요한 장면은 손영배 검사가 신현식 변호사에게 전화를 건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 전화 한 통이 모든 뒷거래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겨레신문 기자에게도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이 다 된 거냐, 내가 알기로 김형준 검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보도를 꼭 해야 하나〉라는 얘기를 했다." "검찰은 죄수 K의 고소 사건에 김형준 검사가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압수수색 영장을 두 번이나 기각했고 결국 경찰에 맡겼던 사건을 다시 빼앗아왔다. 비위 사실을 보고 받은 대검은 언론 보도가 나오기 전까지 사건을 철저히 뭉갰다. 죄수 K가 김형준 검사의 비위를 언론에 제보하자 이번에는 현직 검사가 개입해 사건 무마를 시도했다. 그리고 다시 검찰은 이 같은 현직 검사의 개입 사실을 알면서도 덮었다. '검찰 식구' 전체로 보면 4중 5중의 제 식구 감싸기다."(58-60)


"고교 동창 스폰서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림자처럼 계속 등장했던 인물이 있다. 바로 검사 출신 전관 변호사 박수종이다." "박수종 변호사가 '고교 동창 스폰서 사건'에서 한 일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이렇다. 1) 김형준이 내연녀에게 줄 돈 천만 원을 빌려줬고 2) 김형준의 내연녀가 일하던 술집에 드나들며 김형준에게 회당 수십만 원어치의 술을 사줬다. 3) 일이 터지고 난 뒤 김형준이 죄수 K에게 돈을 갚을 때는 돈 심부름을 했고, 4) 김형준의 내연녀를 찾아가 입단속을 시켰다. 5) 이른바 '셀프 고소' 작전을 기획했고 6) 죄수 K의 언론 제보를 막기 위해 현직 검사 손영배를 끌어들였다. 7) 언론 제보를 막기 위한 뒷거래 비용으로 죄수 K에게 2천만 원을 보냈고 8) 죄수 K와 연락하며 언론 제보를 취소하도록 설득했다. 9) 한때 자신의 의뢰인이던 죄수 K가 체포되도록 죄수 K의 차명 전화 번호를 검찰에 제공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친분만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66, 70-1)


2부 악어와 악어새


"제보자 X 역시 박수종을 알고 있었다 주식시장에서 그의 이름은 제법 유명하다고 했다. 짧은 기간 동안 워낙 큰돈을 벌어 '박 재벌'이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제보자 X 자신이 연루됐던 사건인 스포츠서울 주가조작 사건에서도 박수종은 한 주가조작범의 변호인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제보자 X가 남부지검에서 수사에 참여했던 한 사건에서는 주가조작 혐의자로 등장했다. 그런데 두 사건 모두 수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제보자 X는 그로 미루어, 박수종의 뒷배에 큰 힘을 가진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렇게 어렴풋한 감을 가지고 있던 박수종에게 제보자 X가 분명한 의심을 품게 된 건 바로 고교 동창 스폰서 사건 이후다. 서울남부지검의 증권범죄합수단장을 지낸 김형준 검사가 박수종의 친구라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박수종 변호사에게 분명한 범법 혐의가 있다면, 김형준 검사 스폰서 사건에서 그가 기이할 정도의 저자세로 '견마지로'를 다했던 게 이해가 간다."(79-81)


"우리가 박수종의 진술조서에서 확인한 것처럼, 금융위는 2015년 초부터 박수종의 네 가지 금융 범죄 혐의를 조사하고 있었다. 금융위는 두 차례나 출석을 요구했지만 박수종은 거부했다. 그는 대검 특별감찰팀에 〈죄가 없으니까 (금융위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죄가 없으니 조사를 받으러 가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얘기다. 아마도 일반인이었다면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성실하게 금융위 조사에 응했을 것이다. 금융위는 결국 대검찰청에 박수종을 수사 의뢰했고, 이 사건은 그해 11월 서울남부지검 증권범죄합동수사단으로 배정됐다. 그런데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의 단장은 바로 김형준이었다. 김형준이 죄수 K에게 했던 〈지금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라는 말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형준 사건에서 박수종이 했던 일들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 모든 일들이 '피의자'가 '수사책임자'를 위해 해준 일이 되는 것이다."(84)


"제보자 X는 M&A 시장에 〈검찰이 세 번만 봐주면 누구나 재벌이 될 수 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합법과 불법의 영역이 가깝고 살짝만 불법을 저지르면 큰 수익을 올릴 기회가 널려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검찰은 박수종 변호사가 다스텍 주식을 활용해 수익을 올리는 과정에서 눈을 여러 번 감아줬다(다스텍을 포함한 세 사건은 약식기소, 한 사건은 불기소 처리됐다). 주범 서정기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다스텍을 수사하지 않은 것이 첫 번째다. '다스텍을 수사하지 않는다'는 수사 기밀을 박수종에게 귀띔해준 것이 두 번째다. 김형준 검사가 남부지검 증권범죄합동수사단장으로 재직할 당시 금감원이 수사 의뢰한 박수종의 금융 범죄 혐의를 봐준 게 세 번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16년 9월 김형준 검사 스폰서 사건이 터진 뒤 대검 감찰본부가 직접 박수종을 조사하면서 금융 범죄 혐의를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약식기소를 한 것이 네 번째다."(97)


"한국의 약탈적 주식담보대출은 상상인과 상상인플러스 두 개의 저축은행이 거의 도맡아왔다. 주식담보대출이 그렇게 좋은 사업이라면 상상인 계열의 저축은행들만 도맡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너무 가까워 언제든 쇠고랑을 찰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이 같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상상인을 주식담보대출에 '올인'하도록 이끄는 '용감한' 사람은 유준원 회장이라는 인물이다." "박수종은 유준원의 도움으로 위기에 빠진 상장사를 장악했다. '회사 정상화'라는 명분을 걸고 들어왔지만 상장폐지를 막는 유일한 길인 유상증자를 포기했고 대신 상장폐지 이후 소액주주들의 주식을 헐값에 거두어들였다. 결과적으로 박수종은 천억 원이 넘는 가치를 가진 손자회사를 거느린 비상장회사의 오너가 됐다. 그 사이 회삿돈 360억 원을 빼내 유준원 회사의 주식을 사는 배임 행위를 저질렀다. 반면 모다와 파티게임즈의 소액 주주들은 상장폐지로 천 6백억 원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다."(102, 114-5)


"스포츠서울 주가조작 사건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유준원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단 한 차례의 참고인 조사조차 받지 않았다. 유준원이 스포츠서울 주가조작 사건에서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주식 계좌관리인이었던 브로커 김 씨가 검찰조사에서 끝내 유준원의 공모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주가조작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진술을 한 브로커 김 모 씨의 변호인은 박수종이었다. 그리고 박수종은 이 사건의 수사책임자인 김형준에게 자주 향응을 제공하는 사이였다. 결국 박수종 자신의 금융 범죄 사건도 유야무야됐고 유준원도 무사했다." "스포츠서울 주가조작 사건은 유준원과 박수종 두 사람이 자본시장에서 왜 막강한 '콤비'로 불렸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유준원에게는 자본이라는 무기가, 박수종에게는 검사들과의 네트워크라는 무기가 있었다. 두 사람이 단기간에 쌓아올린 막대한 부는 두 무기의 결합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134-7)


3부 검찰의 썩은 꽃, 특수부


"전체 검사 2천 2백여 명 가운데 특수부 검사는 불과 5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특수부는 인지수사를 한다. 인지수사를 한다는 건 고소나 고발 없이 수사기관이 자체적으로 범죄를 알아차려서 즉 '인지'해서 수사를 한다는 뜻이다." "구치소나 교도소의 죄수들이 처벌받은 범죄는 그들이 과거에 저질렀던 여러 건의 범죄 중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꼭 자기 사건이 아니라도 죄수들은 범죄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검사는 죄수들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 어떤 죄수의 여죄를 파헤쳐 수감기간을 연장할 수도 있고 반대로 여죄가 드러난 죄수를 봐줄 수도 있다." "검찰의 출세 코스인 특수부, 인지수사의 부담, 범죄 정보의 보고인 구치소, 절박한 죄수들, 그리고 죄수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줄 수 있는 검사의 막강한 권한. 이 모든 조건이 합쳐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검찰 특수부의 하수도에는 오수가 흐르게 되고 그 자양분을 먹고 자라난 독초에서는 썩은 꽃이 피게 된다."(164-6)


"나는 김영일 검사와 죄수 이 씨, 죄수 K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 거래에 '삼각 사건 거래'라는 이름을 붙였다. 삼각형의 첫 번째 꼭짓점인 죄수 이 씨가 두 번째 꼭짓점인 죄수 K에게 돈을 주고 사건을 산 다음 이걸 세 번째 꼭짓점인 검사에게 상납했기 때문이다." "출정 내역에 따르면 죄수 이 씨는 2016년 한 해에만 김영일 검사실에 94번이나 출정을 갔다. 주 1.8회 꼴이다. 주말을 제외하면 닷새의 평일 가운데 이틀 정도를 구치소가 아닌 검사실에서 지낸 것이다. 이 정도면 죄수가 아니라 검사실 직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죄수 이 씨의 혐의는 특가법상 횡령이다. 횡령범에 불과한 죄수 이 씨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방위사업수사부나 특수부 수사에 그토록 자주 출정을 나간 이유는 김영일 검사와 죄수 이 씨가 '특수관계'라는 점을 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즉 죄수 이 씨는 김영일 검사에게 사건 정보를 물어다 주는 역할을 하는 '브로커 죄수'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172-4)


"IDS홀딩스는 투자자들의 돈을 유치해 그 돈을 굴려 수익을 낸 뒤 투자자들에게 원금과 수익을 돌려주는 일종의 투자회사였다. 홍콩의 FX 마진 거래에 투자해 수익을 낸다고 했다. 그러나 홍콩의 FX 마진 거래에 투자해 수익을 낸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검찰 수사로 밝혀진 전모에 따르면 이 사건의 피해자는 만 2천 명, 이들이 투자한 금액은 무려 1조 855억 원에 달했다. 2016년 9월 IDS 홀딩스의 대표였던 김성훈이 구속됐다." "서울중앙지검 별관에 있는 방위사업수사부는 굵직한 방위산업 비리를 전문적으로 수사하는 조직이다. 그런데 지난 2016년 방위산업 비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죄수들이 중앙지검 별관 408호 김영일 검사실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브로커 죄수 이 모 씨, 그리고 IDS홀딩스 사건의 주범 김성훈이 그들이다. 그런데 당시 김영일 검사실에 이들보다 더 자주 드나들었던 죄수가 바로 한 모씨다. IDS홀딩스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스스로를 8천억 자산가로 소개했던 그 한 씨다."(182-3, 194)


"검찰 수사에서 김성훈이 홍콩에 숨겨두었던 27억 원을 한 씨에게 송금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 돈으로 한 씨는 거물 사업가 행세를 하며 피해자들에게 접근했고 다시 한번 사기를 쳤다(김성훈의 채무를 자신이 대위변제 해줄테니 그에 대한 합의서와 처벌불원서를 써달라고 했다). 검찰은 한 씨를 사기 혐의뿐 아니라 범죄수익 은닉 혐의로도 기소했다. 김성훈으로부터 받은 27억 원이 피해자들에게 사기를 쳐서 벌어들인 범죄수익이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기가 막힌 일이다. 애초에 자신들의 돈이었던 범죄수익이 다시 자신에게 사기를 치는 자금으로 사용된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한 씨와 김성훈의 입장에서 보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 '귀인'이었다. 한 씨는 김성훈 덕분에 합의금을 지불한 뒤 출소해 사업가 행세를 하면서 또 한 번 사기를 칠 수 있었고, 김성훈은 한 씨 덕분에 피해자들로부터 합의서와 처벌불원서를 받아냈으니 말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배경이 바로 김영일 검사실이었다."(198-9)


"죄수들에게 돈은 힘이다. 돈이 있으면 그걸 영치금으로 넣어서 음식도 사먹을 수 있고 신문도 마음껏 구독할 수 있다. 내의도 추가로 구매해 교도소 안의 추운 겨울을 그나마 좀 따뜻하게 날 수도 있다. 그보다 돈이 많으면 접견 변호사를 몇 명씩 두고 거의 매일같이 변호사 접견을 나갈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자잘한 효용보다 더 중요한 돈의 효용은 바로 검사와 브로커 죄수들 사이에 벌어지는 '거래'에 한 몫 낄 수 있다는 것이다." "죄수 이 씨를 중심으로 한 '사각(김성훈을 포함한) 사건 거래'와 죄수 한 씨를 중심으로 벌어진 대위변제 사기 역시 김성훈의 돈을 중심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김성훈은 감옥에 갇힌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출정이라는 명목으로 김영일 검사실에 수시로 나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브로커 죄수 이 씨와 한 씨를 자신의 형집행정지나 감형을 위한 '작전'에 마치 아랫사람처럼 동원했다. 힘의 근원은 역시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이다."(202)


4부 한명숙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이 당선됐다. 김대중-노무현, 민주당 계열 정권 10년이 끝났다. 말하자면 세상이 바뀐 셈이다." "정연주 사장을 내보내려면 KBS 이사회가 해임안을 의결해야 했다. 이사회는 모두 11명의 이사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전임 정부 시절 여당 쪽에서 추천된 이사가 7명이다. 7대 4 구조. 새로운 여당 입장에서는 표가 부족했다. 7명 중 2명을 설득해서 정연주 사장 해임안에 찬성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6대 5로 해임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설득이 안 되면 이사 2명을 입맛에 맞는 인사로 교체하는 방법도 있었다. 2008년 5월 이사장이었던 김금수가 돌연 사퇴했다. 김금수는 전임 참여정부 측에서 추천한 인사였다. 김금수는 KBS 사장 교체를 진두지휘했던 최시중 방통위원장에게 정연주의 해임에 반대한다는 뜻을 명시적으로 밝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왜 사퇴했는지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정 사장 해임에 찬성하는 유재천 교수가 이사장으로 들어왔다."(229-30)


"신태섭 이사가 다음 타깃이었다. 신태섭은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적당한 해임 사유가 필요했다. 이명박 정부는 꽤 창의적인 방법을 고안했다. 신태섭은 부산 동의대 교수였다. 먼저 동의대가 움직였다. 동의대는 KBS 이사직을 하면서 겸임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태섭 교수를 해임했다. 그다음 방통위는 신태섭을 KBS 이사에서 해임했다. 교수에서 해임됐으니 국가공무원 결격사유에 해당한다는 이유였다. 2008년 7월이었다. 이렇게 정족수를 채운 KBS 이사회는 2008년 8월 8일 (드디어) 정연주 사장 해임안을 의결했다." "8월 11일 이명박은 이사회 제청을 받아 즉각 정연주를 해임했다. 8월 12일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연주를 체포했다. 배임 혐의였다. (정연주는 2012년 최종적으로 배임 혐의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해임 처분도 취소됐다. 하지만 KBS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세상이 이상했으니까, 한명숙 사건은 당시 벌어졌던 수많은 이상한 일 중 하나에 불과했다."(230-1)


"법원행정처는 2015년 5월 6일 한 문건을 작성한다. 문건 제목은 '상고법원 입법을 위한 대 국회 전략'. 한명숙 사건 대법원 판결을 석 달여 앞둔 시점이다. 법원행정처는 대법원에서 한명숙 사건을 전부 무죄 취지로 파기할 경우,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숙원사업이었던 상고법원 법안과 관련해 김무성을 설득하기는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고 문건에 적었다. 또 다른 문건은 법원행정처가 2015년 7월 20일 작성한 '상고법원 추진을 위한 BH 설득전략'이다." "〈향후 예정돼 있는 정치인 형사사건에도 BH의 관심과 귀추 주목될 것, 주요 현안 관련 접점 모색을 위한 유화적 태도 보일 가능성 충분.〉 말을 어렵게 해놨지만 간단하다. 앞으로 정치인이 연루된 형사사건 판결이 많다. 청와대가 관심이 많다. 그래서 청와대가 당분간 법원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 뒤에 주요 정치인 형사사건 목록을 죽 적어 놨다. 첫 번째가 한명숙 사건이었다."(256-7)


"한만호는 분양 사업 실패로 회사가 부도가 나서 2008년 구속됐다. 2010년 1월 형이 확정됐다. 3월 통영교도소로 옮겼다. 형이 확정된 기결수는 통상 구치소에서 교도소로 이감된다. 만기출소는 2011년 6월이었다. 한만호는 출소를 1년 3개월 앞둔 평범한 죄수였다. 통영교도소로 옮긴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던 3월 31일 갑자기 서울구치소로 이감됐다. 한만호는 이유를 몰랐다." "서울구치소 이감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시작이었다는 걸 한만호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이감 다음 날(4월 1일)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에 출정을 나간다." "특수1부에 가자 검찰은 아는 정치인이 있냐고 묻기 시작했다. 한만호는 처음에 검찰이 원하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한나라당 친박계 ○○○ 의원에게 6억 원을 줬다고 진술했다. 〈특수부 소환 첫날 자금이 한나라당 의원 쪽으로 제공되었음을 이야기했다. (조사를) 종료했다. 급히 덮었다.〉" "한만호 주장의 핵심은 검찰이 이미 타깃을 정해 놨다는 말이다."(273-5)


"한만호가 검찰에 협조하기로 마음을 먹자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다음 날부터 한만호는 스스로 '스토리를 구상해' 검찰에 진술하기 시작했다. 4월 5일 1차 조서를 썼고 5월 11일 마지막 5차 조서가 완성된다. 한 달 만에 모든 일이 끝났다. 검사와 수사관들은 한만호에게 편의를 제공하면서 칭찬했다. 한만호는 자괴감을 느꼈다.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검찰에 협조하는 자신과, 그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자의식이 싸움을 벌였다. 공포와 욕망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불안한 심리상태는 스스로를 '강아지'라고 부를 지경이 됐다." "〈매주 불러서 테스트하고 변호인 답변 피해가는 방법 교육하더니 아예 검찰 진술조서도 제공해주고 구치소에서도 공부하라 하며 "시험 본다"라며 테스트했다. 열심히 하는 체했다. 50을 넘기고 머리 허연 놈이 쪼다 짓을 했지만 그래도 20년 넘게 CEO 한 사람을 마치 저능아 취급했다. 그 모멸감은 죽어도 잊지 못할 것. 밖에서였다면 눈도 마주칠 수 없는 한참 동생뻘들이다.〉"(279-80, 284-5)


"한만호가 한명숙에게 돈을 줬든 안 줬든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한 이유는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한만호의 행동이 상식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검찰이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도움을 약속했을 수도 있고, 한만호가 막연히 기대했을 수도 있다. 다만 한만호는 검찰에 협조하고 그 대가로 검찰의 도움을 받아 재기하려고 했다. 한만호는 2011년 6월 출소할 예정이었다. 검찰에서 진술한 대로 법정 증언을 마치면 그만이었다. 검찰이 명시적으로 약속하지 않았더라도 한만호가 검찰에게 협조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밖에서 다시 사업을 일구고 가족과 즐겁게 살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왜 진술을 뒤집었을까."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한) 한만호의 검찰 진술이 모두 진실이었다면 한명숙이 법정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한만호는 돈을 전혀 받은 적이 없다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한명숙 앞에서 일관된 태도로 사죄의 마음을 표시했다. 더구나 위증죄를 무릅쓰고."(297-8)


# 한명숙 사건 타임라인

2010.03.31 한만호 서울구치소로 이감

2010.04.03 한만호, 한명숙에게 9억 제공 검찰 진술 시작

2010.06.02 한명숙 서울시장 선거 낙선

2010.07.21 검찰, 한명숙 정치자금법위반 불구속기소

2010.12.20 한만호, 법정에서 진술 번복

2011.02.21 동료 재소자 김 씨 1차 법정 증언(한만호 진술 번복 탄핵)

2011.03.07 동료 재소자 최 씨 법정 증언(한만호의 진술 번복 탄핵)

2011.03.23 동료 재소자 김 씨 2차 법정 증언

2011.06.09 검찰, 한만호 감방 압수수색, 비망록 압수

2011.06.13 한만호 출소

2011.07.07 검찰, 한만호 위증 혐의 기소


"김 씨는 2010년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 동안 89번 검찰청에 출정을 갔다. 한 달에 평균 15번이다. 주말과 휴일을 빼면 사실상 매일같이 불려나간 셈이다. 최 씨도 비슷하다. 2010년 4월부터 2011년 3월까지 1년 동안 148차례 검사실에 출정을 나갔다. 한 달 평균 12번이다." "한만호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김 씨와 최 씨의 증언이 법정에서 얼마나 설득력 있었는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하지만 검찰은 목적을 달성했다. 언론이 김과 최의 증언을 비중 있게 보도했기 때문이다." "한만호가 진술을 번복한 것은 한명숙의 도움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한만호는 한명숙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재개할 꿍꿍이가 있었다. 증인 김 씨와 최 씨의 논리이고 정확하게 검찰의 입장이었다 언론은 검찰의 계획대로 움직였다. 김과 최의 증언을 확대 재생산했다. 당시 실체적 진실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취재했던 언론은 없다. 이쪽 저쪽 주장만 중계했을 뿐이다. 그래서 검찰의 수고로움은 그리 헛되지 않았다. 목적은 달성했으니까."(315-8)


"2020년 뉴스타파 보도 이후 대검 감찰이 시작됐다. 한동수 감찰부장은 판사출신이다. 법조비리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2006년 김홍수 게이트 이후 2008년부터 감찰부장은 외부 공모를 통해 선발했다. 한동수는 2019년 당시 조국 법무부장관의 제청으로 감찰부장에 임명됐다. 임은정 검사는 평소 SNS나 언론을 통해 검찰 개혁을 강하게 주장해온 인물이다. 검찰 내부에서는 비주류, 정확하게 말하면 왕따로 평가 받는다." "검찰 수뇌부는 한동수와 임은정을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다. 2021년 3월 2일 윤석열 검찰총장은 '한명숙 재판 모해위증 사건'의 주임검사를 허정수 감찰3과장으로 지정했다. 2020년 6월부터 감찰이 시작됐는데 공소시효 나흘을 남기고 담당 검사를 갈아치웠다. 윤석열은 3월 3일 총장직에서 사임했다. 윤석열은 임기 마지막 지시로 검사 모해위증교사 의혹을 덮었다. 3월 5일 허정수 감찰3과장은 사건을 불기소 종결처리했다. '합리적인 의사 결정'으로 내린 결론이라고 기자들에게 설명했다."(3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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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과학, 인문학 서양 역사와 문명 총서 1
이종흡 지음 / 장미와동백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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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한 인간에게서 태어난 어떤 이론이 다른 인간에 의해 성숙되고 결실을 맺는 과정, 즉 문제 제기로부터 해결로 이어지는 역사는 그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대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형성되던 17-18세기에, 그 형성을 주도한 사상가들이 '선구적' 이론을 만들고자 하였던가? 그들에게 〈근대적〉인 합리성이나 진보를 정초定礎하려는 의도가 있었던가? 코아레가 지적하듯이, 〈너무도 명백한 사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이 다른 사람의 '선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는 점이다.〉 역사가가 어떤 이론의 함축이 뒤 시대에 실현되는 진보의 역사를 기술하려면 이론적 '선구자'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문제는 역사가에 의해 미리 결정된 틀에 선구자를 끼워 맞춘다는 데 있다." "베이컨이 근대 과학의 선구자냐 마술사냐, 비코가 19세기 역사주의의 선구자냐 르네상스 인문학의 뒤늦은 상속자냐에 관한 길고도 뜨거운 논쟁의 와중에서 희생당한 장본인은 바로 베이컨과 비코였다."(15-6)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필자가 설정한 '담론 상황'은 대화의 참여자들이 공유하는 논제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제시하며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애쓰는 상황이다. 그들은 유사한 논증과 수사학적 장치를 사용하며, 그들이 논증에서 사용하는 논거는 중복된다. 이 상황에서는 과학의 방법이나 이론의 보는 바에 따라 양편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실제로 토론되는 논제는 과학 이론의 역사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어쩌면 그것은 '비학적' 논제에 더 가까울 수 있다). 우리는 주류 과학철학과 과학사가 이론의 형성을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과학자 개인의 시적이고 직관적인 재능 덕택으로 돌려 온 측면을 비판하였다. 방벙이나 이론 자체에만 관심이 있었던 탓에, 방법이나 이론이 형성되는 실제 과정은 생략되거나 개인적 재능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담론 상황'에 관한 연구는 그 같은 '재능'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상황적인 것임을 전제한다."(28-9)


"필자는 '연속성 수준의 분석'을 통해 근대 초 유럽의 비학과 과학의 관계를 비학적 담론 상황과 과학적 담론 상황이 교차하는 영역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담론 상황의 연속은 비학의 상징 구조와 과학의 표상 구조 사이의 차이를 전제로 하지만, 두 구조 중 어느 하나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가정하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과학의 형성'이라는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구조가 모든 담론적 실천과 담론 상황을 장악한다면, 새로운 것의 '형성'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설정한 연속성의 영역은 과학적 관점에서도 파악될 수 있고 비학적 관점에서도 파악될 수 있는 유연한 공간이다. 그렇지만 어떤 관점을 채택하든지, 우리가 휘그적 역사학으로 되돌아갈 염려는 없다. 첫째는 우리가 비학의 지속이나 과학의 소급을 수행할 수 있는 '구조적' 경계선을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두 조류가 공존하면서 상호 작용하는 양상을 비교적 중립적인 견지에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34)


"인간의 노력 없이 언어 스스로가 변화할 리는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필자는 상징의 언어 구조 내에서 그것이 '표상'에 부적합함을 자각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일련의 담론을, 구조적 갈등의 원인으로 설정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러한 일련의 담론을 두 계열로 구분한다. 하나는 과학적 표상을 만들어 가는 담론의 계열이며, 다른 하나는 그 같은 과학적 노력의 의미를 분석하는 담론의 계열이다. 전자는 언어를 가능한 한 사물에 일치시키고자 하며, 후자는 언어와 사물의 본질적 불일치, 즉 사물에 대한 언어의 비유적 본성을 전제하면서 사물에 일치하는 언어의 본성을 들여다본다. 대체로 17세기와 18세기 초까지 전자는 '자연과학'의 담론이 취했던 방향이요, 후자는 '인문학'의 담론이 취했던 메타적 방향이다. 이 두 계열은 상호작용하면서, 전통적인 상징체계를 대체할 새로운 근대적 표상 체계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에서 필자는 위의 두 계열을 모두 '과학적 담론'의 범주로 묶었다."(36)


"근대 초 지적 담론의 지형을 비학·자연과학·인문학 등 세 영역에 의해 가늠하려는 이 연구는, 다음 두 가지 관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 이 세 영역은 원래부터 각기 '폐쇄된' 지식 영역으로 구획되어 있었다기보다는, '열린' 창문을 통해 서로를 마주 보면서 상호 작용하였다. 둘째, 세 영역을 차별화하는 기준은 담론의 내용보다는 형식에서 오히려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것들은 각자에 고유한 지식이며 인식 방법론에 의해 구분된다기보다는, 지식을 전달하고 사회적으로 정당화하여 사회적 권력으로 만드는 방식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여 준다는 말이다. 따라서 세 영역의 차이는 각자에 고유한 '수사학'을 통하여 충실하게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단순한 '꾸밈'의 기술이 아니라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술로서의 '수사학'을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비학적 상징의 수직성과 자폐성, 과학적 표상의 수평성과 강압성, 인문학적 표상의 총체성 등 각 영역의 차별적 특징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37-8)


제1부


1장 르네상스 비학의 인식체계


"우리가 르네상스 시대의 신플라톤주의를 '새로운' 현상이었다고(비록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 중 하나는, 그것이 '외부'로부터 서방 라틴 세계에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고대 말에 제설혼합주의syncretism 형식으로 형성된 신플라톤주의는, 중세에는 주로 비잔틴 지역에서 존속되었다." "그렇다면 비잔틴 세계가 서방에 전해 준 신플라톤주의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 문제의 해답은 비잔틴 세계가 아랍 문명으로부터 수용한 '태고 신학prisca theologia'의 전통에서 실마리를 구할 수 있다." "태고 신학에 따르면, 서방-이집트 전통은 하늘의 빛과 지혜를 간직하고는 있었지만 빛과 지혜를 거의 감춘 채 조금만 드러낸 것임에 반하여, 동방-페르시아 전통은 신과 천상의 신비를 빛과 어둠의 교의에 의해 공개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천명하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동방-페르시아의 '태고 신학'은 서방-이집트의 그것보다 오래되었고 우월하다는 것이었다."(43-5)


"비잔틴 세계에서는 '태고 신학'의 전통이 그리스도교 교의와 결합하였다. 이곳에서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플라톤 철학을 융합하였던 초대 교부들의 전통이 여전히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들의 견해는 크게 아우구스티누스(350-430) 계열과 락탄티우스(약 260-340) 계열로 구분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유대 민족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적 지혜만이 참된 것이었다." "반면 락탄티우스는 하나님의 계시가 모호하고 은폐적인 형식으로나마 이교도에게도 주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플라톤 및 그리스 철학뿐만 아니라 칼데아, 이집트, 시리아, 유대 등 여러 민족의 고대 전통으로부터 '태고 신학'의 계보를 작성하려는 학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논거로 사용되었다."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이미 11세기에 프셀로스(1018-1078)는 조로아스터·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로부터 플라톤에게로 이어지는 '태고 신학'의 계보를 작성할 수 있었다."(45-6)


"르네상스 비학은 창조와 창조된 세계의 비밀을 논의함에 있어, '두 권이 책'을 전제하고 있었다. 한 권의 책은 넓은 의미의 성전聖典들을 묶어서 부른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성경은 물론, 이교 민족의 많은 태곳적 문헌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처럼 여러 권의 책이 '한 권의 책'으로 묶일 수 있었던 것은, 신적 창조의 비밀이 성서(특히 모세의 「창세기」)뿐만 아니라, 이교 세계의 태곳적 문헌에도 계시되었다는 '태고 신학'의 전통, 곰브리치의 표현을 빌리면, 〈복수적 계시의 교의〉 전통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 권의 책은 '자연'을 지칭한다. 자연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직접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저자'의 의도를 담은 '책'으로 읽힐 수 있었다. '성전들'과 '자연'에서 모두 신적 계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새로운 관념이 아니었다. 그러나 태곳적 문헌 속에서 저자의 의도를 해독하는 방식을 그대로 자연에 적용하여, 조물주의 의도나 의지를 '읽으려는' 시도는 중세에는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현상이었다."(62-3)


"마술을 '신성한 것'에 대한 최상의 지식과 기술로, 주술을 정령에 의존하는 타락한 지식과 기술로 구분하는 태도는 15-16세기 사이의 마술사들에게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마술사'의 태곳적 의미는 '철학자' 혹은 '현자'였다는 것, 마술은 자연철학의 정점이요 완성이라는 것, 마술을 타락시킨 미신적이고 불경한 주술사는 가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 등의 주장은 당시의 마술 문헌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이러한 주술 비판은 중세 교회의 '마술' 비판을 닮은 면이 있다. 9세기나 10세기에 편찬된 『교구법령』은 '마술'을 정령이나 악마에 의지하는 기술이요 우상 숭배라고 규정하였던바, 이러한 태도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중세의 스콜라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르네상스 마술사들은 '주술'을 비판하였다. 더욱이 그들의 비판은 웹스터가 지적하였듯이, '주술'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한다는 점을 진심으로 걱정하면서 수행된 것들이었다."(87-8)


"비학의 인식론은 수직적이다. 인식론적 수직축에 의해 한 마술사는 다른 마술사를 열등한 적(주술사)으로 규정한다. 누가 우월하고 열등한가, 수직적 상승에서 누가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하였는가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 결정된다. 이것은 옛날이든 지금이든 비학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이다. 외부적 조건이 달라져도 이러한 특징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비학이 숨은 것을 추구하며, 결국은 볼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진리'를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비학은 상징으로 가득 찬 '두 권의 책'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상징의 가시적 이미지에 머무는 자를 열등한 적으로 규정한다. 비학은 상징을 초월하여 '보이지 않는' 진리를 향하지만, 종국적 진리는 그것을 파악한 사람 혼자만이 알 수 있다. 그를 광신적으로 추종하는 무리조차도 무엇이 진리인지는 모른다. 그들은 진리를 추종한다기보다, 진리를 파악한, 혹은 파악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추종할 따름이다."(91-2)


"이 시대의 많은 연금술 문헌은 연금술의 실제 작업 과정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 대속代贖 등 영적 과정과 유비하였다." "이러한 유비나 대입을 가능하게 한 근본 조건은, '성육화Incarnation'에 대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곰브리치가 말했듯, 그리스도교 전통은 〈성육화의 비밀이며 계시의 교의에 따라 말씀Logos이 육신이 될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은 성서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역사 전체를 통해서도 인간에게 말씀하신다〉는 믿음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예수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말씀'의 육화로 간주되었다. 연금술은 이 육화된 실체로부터 역으로 '말씀'을 추적하는 작업이었다. 요컨대, 예수가 육체적 시련과 죽음을 거쳐 부활과 대속이라는 창조주의 의지를 드러낸 방식은, '철학자의 돌'이 불의 시련과 재를 거쳐 결국 연금액(본질)으로 바뀌는 방식의 모형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연금술에 대한 기대는 보다 일반적인 종교적 심성에서 배양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94-5)


2장 비학의 상징체계


"비학의 언어에서 수나 도형이나 이름 같은 '형상'은 그것에 어울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덕이나 '약' 같은 숨어 있는 성질은 그것에 적절한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어떤 형상의 성질은 그 형상에 따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어떤 사물의 형상은 그것에 내재된 성질을 지배하기 때문에, 비슷한 형상은 비슷한 성질이나 효능을 가질 수 있다. 이처럼 형상이 더 나은 위치를 차지한 이유는 형상이 더 높은 세계로부터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에서 단어나 이름에도 덕과 성질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물의 '올바른' 이름은 '아담의 언어'(신성어)처럼 그 사물의 덕을 간직한다. 아담이 동식물을 올바르게, 각 동식물의 본성에 어울리게 명명함으로써 지배할 수 있었듯이, 마술사는 올바른 '이름'으로 그 이름에 의해 기호화된 사물을 지배할 수 있을 터였다. 비학의 인식론이 '두 권의 책'에 대한 해독일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기이한 언어-사물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98-9)


"르네상스 마술사들은 언어의 두 '층위'를 구분하였다. 암호화된 사물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사물의 본성은 계시의 도움을 받아 섬광처럼 해독자의 정신에 새겨진다. 피치노가 〈사물의 힘은 먼저 정신 안에서 파악된다〉고 말하면서 의도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수준에서 정신에 형성되는 '이미지'는 사물의 본질과 거의 일치한다." "다른 한 층위는 음성과 철자에 의한 표현의 수준이다. 이 '표헌적' 수준에서 정신에 새겨진 이미지는 언어에 의해 가시화된다." "아그리파는 히브리어의 22철자 중 단철자 12개는 12궁에, 복철자 7개는 7행성에, 3개의 모자母字는 3원소(水, 土, 火)에 상응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표현적 수준에서의 '언어'도 정신적 이미지를 운반하는 매개자로서, 지시된 사물을 변화시키는 위력을 갖는다. 아그리파가 말하듯이, 표현된 단어는 그것을 듣는 사람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지지 않은 사물도 변화시킨다. 그러나, 표현된 단어가 정신에 새겨진 이미지와 일치할 수는 없다."(107-8)


"위僞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는 헤르메스주의에 내포된 그리스도교적 '육화의 관념'이 조물주의 적극적 수사나 '시험'과 결합하는 하나의 계기를 예시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이 계시하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유사한 것으로 유사한 것을 표상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유사하지 않은 것으로 유사한 것을 표상하는 길이다. 전자는 보다 높은 세계가 아름다움이며 빛이며 '금金' 같은 비유를 통해서 상징화되는 방식이며, 후자는 신비하고 기괴한 비유에 의해 상징화되는 방식이다. 성서의 텍스트가 겉보기에 부적합한 상징과 비유로 자주 구성되는 이유는, 하늘의 존재(별)가 〈신 같은 인간이거나 빛나는 의복을 걸친 형상〉(우상)으로 혼동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취하는 수수께끼처럼 기괴한 이미지(거지나 비둘기의 모습 같은)는 인간에 대한 시험이다. 그것은 비입문자에게는 신성한 비밀에 접근할 수 없도록 막는 자물쇠이지만 입문자에게는 신성한 비밀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열쇠이다."(117)


"수사학에서 '표현'이란 단순한 전달보다는 '효과적' 전달을 지향하며, 이 효과의 크기는 '설득력'을 기준으로 가늠될 수 있다. 설득에 성공하였다는 것은 움직이고movere(감동시키고), 가르치며docere, 이끈다delectare(어떤 곳으로 향하게 한다)는 수사학의 세 가지 목표가 달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문맥에서 스칼리제르는 모든 담론의 목적이 '설득'에 있으며, '진리야말로 설득의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데 가장 적합한 수단은 무엇인가? 르네상스 수사학은 '비유figure 혹은 trope'에 주의를 기울였다." "(비유법의 한 종류인) 은유는 화자나 저자의 편에서는 명료한 정신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한 자연적·효과적 수단이요, 청자나 독자의 편에서는 그것을 감각에 명료히 새겨서 저자나 화자의 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상징적 표현이 효과적인 전달 수단이라는 가정은 비학에서뿐만 아니라 비학을 경멸한 에라스뮈스 같은 인문주의자에게서도 발견된다."(124-5, 129)


"겉으로는 16세기 비학과 17세기 과학이 인식론적으로 상당한 유사성을 가진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양자의 담론 형식 사이에는 구조적 차이가 가로놓여 있다. 특히 우리는 비학적 유비의 자폐성이 의사소통 상황에서 연장되고 정당화되고 강화되는 방식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의 수사학(표현법) 일반에서 그러하였듯이, 비학적 유비도 역시 감각적인 효과를 중시한다." "그러나 지식의 효과적 전달을 목표로 하는 저자(화자)라면, 독자(청자)가 '감각이라는 문' 앞에 서성이기만 하는 것을 원할 리 없다." "따라서, 정말로 '지식의 전달'을 목표로 하는 저자라면, 독자의 감각에 호소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자신의 지식이 독자의 '정신'에서 올바르게 판단될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이다. 비학의 유비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배려'를 결여한 것이다. 그것은 '감각이라는 문'을 사용할 뿐, 독자들을 그 '문'으로부터 정신적 판단을 향하도록 배려하고 이끌어 주지 않는다."(138-9)


"비학은 저자가 '진리'를 인식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뿐, 그 진리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다." "비학적 유비의 수직 구조에서 '테너tenor'(의미)는 항상 숨어 있다. 우주의 비밀을 꿰뚫었다고 주장하는 저자는, 많은 사례를 동원하여 독자를 유혹할 뿐이다." "비학의 인식론은 항상 숨은 저자와 숨은 의미를 상정한다. 모델은 조물주의 창조이다. 피조물의 숨은 형상은 조물주의 창조의 말씀이다. 우주의 가시적인 혼돈 뒤에는 신성한 통일성과 조화가 숨어 있다. 이 숨은 형상이며 조화를 발견한 태고적 현자는 '상징', 즉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유사성에 의해 연걸되는 언어로 창조의 비밀을 기록하였다. 르네상스 비학은 이처럼 '자연'과 '성전들'을 구성하는 '상징'을 뚫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창조의 비밀을 인식하고, 그리하여 '태고 신학'을 계승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비학적 유비에서 '감춤과 드러냄'의 수사적 전략은, 지식의 축적보다는 반복을, 지식의 개선과 진보보다는 손상되지 않은 계승을 의도한다."(142-4)


제2부


3장 17세기 자연과학에서 비학적 논제의 연속성


"17세기에 과학의 새로운 '방법'이 비학의 낡은 '방법'을 개선하는 과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과학의 '기계론'은 비학의 '애니미즘'을 대체하였고, 귀납법이며 연역법 같은 체계적 '방법'이 비학의 조잡한 경험과 관찰을 대신하는 과정은 실제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적 교체(진보)의 과정은 그것을 확인하겠다고 미리 결심하고 나서 17세기에 접근하는 역사가에게나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이컨이며 보일이며 뉴턴 같은 17세기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과학의 기계론과 비학의 애니미즘이 20세기의 우리에게 그러한 것처럼 대립적인 이론이나 방법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기계론이 '승리'하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17세기의 지적 분위기가 애니미즘 대 기계론의 '혈전'으로 점철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역사학적으로 오류이다. '자연이라는 책'은 17세기 자연 연구에서도 현저한 상투어였다. 자연지식에 관한 담론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상징'을 해독하는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었다."(147-8)


"숨은 저자의 '책'을 해독하겠다는 르네상스 비학의 논제는 17세기 자연지식의 담론에서도 인식 대상과 방법에 관한 일반 범주를 형성하고 있다." "자연의 기하학적 상징은 무한한 속성을 내포하는 조물주의 전언이다. 조물주의 정신에서는 그 모든 속성이 단 하나의 정의에 의해 한꺼번에 파악되지만, 인간은 명제로부터 명제로 이행하는 담론적 추론을 통해 그 속성을 하나씩 '해독'할 수밖에 없다. 기하학적 상징은 신적 정신에서는 명료한 전언이지만, 인간의 정신에서는 '암호'이다. 적어도 이 점에서는, 갈릴레오가 〈자연에서 조물주의 작용 양상modus perandi을 해명하고 조물주의 입법가적 의도를 해독할 수 있는 열쇠〉를 소유하기 위해 '자연의 수학적 법칙'을 정립하려 하였다는 추론이 무리가 아닐 것이다. 갈릴레오가 '수학적 법칙'에 헌신하던 17세기 초는 파라켈수스파의 전성기이기도 하였다. 이언 해킹의 용어를 빌리자면 파라켈수스파의 '저급 과학'은 르네상스 비학을 대부분 수정 없이 계승한 것이었다."(148-50)


"파라켈수스적 예언과 17세기 말의 예언 사이에는 분명히 방법론적 '차이'가 있었다. 1531년과 1682년에 출현한 동일한 혜성(핼리 혜성)을 관찰함에 있어서, 파라켈수스는 그 혜성이 주기적 궤도를 몰랐지만, 17세기 말의 뉴턴이나 휘스턴이나 핼리(1656-1742)는 그것을 알았다. 파라켈수스에게는 막연히 대재앙의 전조였던 혜성이, 휘스턴이나 뉴턴에게서는 대홍수의 과학적 원인으로 '설명'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구와 인류의 동시적 종말은 양자의 공통 논제였다. 휘스턴은 혜성의 인력이 지구의 수분을 모두 빼앗아 가면 지구는 내부의 불의 분출로 인하여 최후의 대화재를 맞이할 것이라고 계산하였다. 매뉴얼이 지적하듯이, 뉴턴은 〈행성의 형성과 행성 운동의 규칙성이 시간적 기원을 갖는 것처럼, 세계는 계시록에 예언된 대로 소진될 운명에 있다〉고 믿었다. 뉴턴의 과학적 '법칙'은, 모세가 전한 세계 창조와 세례 요한이 예언한 세계의 최후 사이에서 시한부로만 작용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167)


"그렇지만 16-17세기 동안 진행된 종말론적 논의를 오늘날 점성술사의 대재앙에 대한 예언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점성술사는 '예언'에 그치지만, 근대 초 유럽의 자연 연구에서 종말론적 논의는 '예언된 미래에 맞춰 세상을 바꾸려는 실천'에 헌신하였다." "실낙원 이후 심하게 변형되고 왜곡된 자연을 태초의 완전한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조물주의 몫이지만, 왜곡된 자연 조건 속에서 태초의 낙원을 재건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소명이었다." "이렇듯 16-17세기의 많은 저술에서 마술적 권력과 유토피아적 계획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였다. 아마도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 다양한 논의가 공유한 문제의식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실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컨은 '과학'의 목표가 '위대한 부흥Great Instauration'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인물이었다. 그의 '위대한 부흥'은 〈인간[아담]이 태초에 소유하였던 주권과 권력〉을 회복하는 작업이었다."(167-9)


4장 과학적 담론의 형성


"원래 르네상스 비학은 주술과의 차별화를 통해서 스스로를 정당화하였다. 주술은 우상 숭배인 반면, 마술은 참된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이었다. 조물주의 종국적인 전언을 해독하지 못한 채 중도에 머무는 '주술'에 대한 비판은, 마술이 종교적 목표를 표방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어떤 마술사가 그의 '기술'로 인간 조건의 개선을 약속하였을 때, 그는 인간의 육체적·물질적 조건과 인간의 영적·정신적 조건을 동시에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물질적 효용과 영적 용도의 결합은 원래부터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마술사는 환자의 영적 구원보다 돈벌이에 전념할 수도 있었고, 이단 혐의로 종교재판에 회부될 수도 있었다." "부르주아 세력의 성장은 비학의 물질적 효용을 강화하였을 것이며, 영적 구원을 독점하려는 기성 교회는 비학의 영적 용도를 억압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틈새' 혹은 긴장은 과학과 비학을 차별화하려는 노력을 자극하였을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179-81)


"그렇지만 윤리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지식의 효용에 대한 베이컨의 강조가 교회나 부르주아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오히려 베이컨은 자연지식을 추구하는 '과학자 집단'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려는 자신의 의도를 감추지 않는다. 『새로운 아틀란티스』에 등장하는 유토피아적 왕국 벤살렘Bensalem의 중심은, 〈사물의 원인과 비밀스러운 운동〉을 탐구하는 과학자 집단, 즉 '솔로몬의 집'이다. '솔로몬의 집'은 벤살렘 왕국의 〈등불〉이다." "이처럼 독립된 과학자 집단은 이웃 사랑과 박애의 대가로 기존의 정치·종교 엘리트 집단이 갖고 있던 것에 버금가는 '사회적 권력'을 얻는다." "따라서 '지식이 권력'이라는 베이컨의 개념은 두 가지(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어떤 대상에 관한 지식이 그 대상을 지배하는 '권력'을 준다는 의미요, 다른 하나는 어떤 지식의 사회적 효용이 그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 '사회적 권력'을 제공한다는 뜻이다."(182-3)


"베이컨은 비학적 상징의 '감춤과 폭로'의 수사학을 수용하는 동시에 변형하였다. 입문자와 비입문자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입문자는 과학 전문가요, 비입문자는 과학의 아마추어이거나 문외한이다. 베이컨은 아마추어로부터 전문가로의 상승 가능성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입문자와 비입문자는 깊이 절연된 채,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 대중은 '파편적' 지식을 사용하며, 보답으로 과학자를 더욱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게 된다. 과학자는 사회적인 권위를 확보하여 외부로부터의 위해危害를 받지 않은 채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다." "베이컨의 수사학은 그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입문자에게든 비입문자에게든 지식을 가능한 한 명료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지식의 명료한 전달만이 문외한으로 하여금 과학의 파편적 지식에 '경탄'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요, 과학자로 하여금 지식의 부족함을 인식하여 보다 심원한 연구를 수행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196)


"'과학적 담론'에 적합한 언어가 무엇인지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 플러드와 케플러는 똑같이 이중적 표상과 이중적 전달을 의도하였다. 플러드에게 상징은 일상 언어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자연의 비밀을 표상하고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더 나아가, 상징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을 넘어서 이중의 독자, 즉 입문자와 비입문자를 차별화하는 동시에 입문자의 영적 계도를 의도한 것이었다. 물론 케플러의 상징도 이중의 독자를 구분하였다. 케플러의 경우에도 〈과학은 일상 언어나 감각에 호소하는 피상적 언어와는 구분되는 특수한 비밀의 언어〉로 구성되었다. 이 같은 '비밀의 언어'로서 수학이나 기하학 과학에 적합한 언어로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케플러는 결코 '영적 계도'를 표방하지 않았다. 비록 '수학적 상징'도 접근 가능한 자와 불가능한 자를 구분하지만, 이제 차별화는 영적 우월자와 열등자 사이에서 진행되기보다, 오직 지적 엘리트와 무식한 대중 사이에서만 진행된다."(213-4)


"1661년에 로버트 보일은 파라켈수스파의 연금술사들을 비난하면서, 특히 〈그들이 가르치겠다는 것을 표현하는 수수께끼 같은 방식〉과 그들의 〈애매한 표현〉을 비난의 주된 표적으로 삼았다. 파라켈수스파의 표현 방식은 〈독자로부터 존경을 받고 그들의 기예를 더욱 신비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기 위한 것이든, 독자에게 지식을 감추기 위한 것이든〉, 독자를 혼동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왕립학회의 또다른 회원인 그랜빌도 웹스터 같은 마술사들은 〈아담의 언어를 복원〉하기는커녕, 〈은유, 천박한 비유, 광신적 어구, 환상적인 언어 체계〉로 인하여, 오히려 바벨의 혼란을 증폭시킬 뿐이라고 공격하였다. 홉스 역시 『리바이어던』에서 〈명석한 정의〉에 따라 사용되는 〈정확한 어휘야말로 인간 정신의 등불〉이라고 말하면서, 은유를 비롯한 애매한 표현을 〈어리석은 등불〉과도 같다고 지적하였다. 은유에 의존한 유비는 〈여러 모순 사이를 방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로크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다."(224-5)


"윌킨스가 추구하였던 '실물 상징'은 사물과 사물에 대한 관념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언어를 만들 수 있고, 따라서 '사물의 질서'와 '말의 질서'를 일치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반면에 로크에게 말의 질서는 〈자의적〉이다. 〈사람이 말을 그의 관념에 대한 기호로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특정한 분절적 음성과 어떤 관념 사이에 자연적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언어만이 존재할 것이다. 어떤 단어는 자의적인 부여에 의해 자의적으로 어떤 관념의 표지가 된다. 따라서 단어의 용도는 관념에 대한 감각적 표시로 국한되며, 단어가 지시하는 관념이야말로 그 단어의 적합하고 직접적인 의미이다.〉 이제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관념을 지시하는 '자의적' 기호일 뿐이다. 언어는 사람 사이의 규약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될 뿐, 사물이나 관념과는 어떠한 자연적·필연적 관계도 없다. 로크의 주장은 소쉬르의 규약적·자의적 언어관을 피력한 것으로 볼 수 있다."(226-7)


"자연에 대한 담론은 더 이상 저자(화자)의 정신과 혼동되지 않으며, 자연 그 자체와도 혼동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저자의 책을 비판하는 행위는, 사물에 대한 그의 표상을 비판하는 것이지, 그의 전인성을 모독하고 우주를 뒤바꾸는 것은 아니다. 모자이크처럼 폐기될 것을 폐기하고, 수정될 것은 수정되고, 수용될 것은 수용되어도 '전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그러한 지식의 체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이 '전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게 된다. '전체'가 모든 파편의 결합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누가 모든 파편을 모아서 '전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언어가 사물에 대한 투명한 표상이기를 포기하고 언어와 사물이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미 이러한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다. 이상적 언어가 포기되는 순간부터, 인간 정신은 끊임없이 불화하고 반목하는 언어와 사물 사이를 중개하려고 노심초사하지만 한 번도 중재에 성공하지 못한 불행한 주인(주체)이 되었다는 말이다."(230)


제3부


5장 근대 인문학에서 비학적 논제의 연속성


"17세기 자연지식 담론에서 논제가 토론되는 방식은 '구조적으로' 변화하였다. 여기서 '구조적 변화'란 바로 사물과 사물에 대한 관념을 이어 주던 비학적 상징의 매개성이 파괴되었고, 언어가 인간의 정신적 관념을 '표상'하는 기능만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17세기 중반 이후로 '성전들'에 대한 논의는 태곳적 현자의 관념이며 지식이 그 속에서 어떻게 '표상'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르네상스 비학이 '조물주의 전언'을 대신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던 '태고 신학'의 언어는, 이제 단순히 세계에 대한 고대인의 지식이나 지혜의 수준을 전해 주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제는 태곳적 기록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종류의 지식이나 지혜를 얻을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러한 변화는 인문학적 사색이 번성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또한, 태고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적 경과가 진보로서든 퇴보로서든 하나의 '연속체'로 파악되면서, '전체로서의 역사'의 의미가 '새롭게' 논의될 수 있었다."(233-4)


"17-18세기에 '태곳적 지혜'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변화는, 고대인의 '원시성'이나 '단순함'이 다방면으로 논의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기원전 1세기경에 루크레티우스는, 원시 인류가 농업이나 직조 기술도 없고 성적 통제도 없이, 거의 동물적인 야만 상태에서 살다가 점차 문명화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었다." "기원전 300년경에 유헤메로스는, 신화란 거의 동물적 격정과 상상력에 사로잡힌 시민을 무력과 간계를 이용하여 통치한 정치가나 영웅이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해서 조작한 결과물이라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신화를 원시인의 조야한 상상이나 정치적 간계의 산물로 해석하는 '루크레티즘'이나 '유헤메리즘'은 르네상스 시대에 모두 부활하였고, 그 이후의 신화 해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종교 개혁 이후로, 특히 17세기부터는 신화 해석에 고대에는 없었던 요소가 새로이 첨가되었다. 고대 신화의 원시성에 대한 주장은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와 미묘한 긴장을 이루었다."(239-40)


# 고대인의 원시성 테제에 관한 논제

1. 라페이레르 : 아담 이전에도 선민과 이교도가 구분되지 않은 채 〈더럽고 야수적으로 살고〉 있었으며, 아담 이후로 선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2. 홉스 :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능력은, 피조물을 명명할 수 있는 능력(이성)일 뿐, 모든 피조물에 대한 완벽한 지식이나 추상화의 능력이 아니다.

3. 스피노자 : 모세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지만, 그들의 기록이 심오한 보편적 지혜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 이들은 당시 정통 교리의 투사들로부터 '악마 삼총사'라고 비난받았다.


"아담이나 모세, 나아가서는 헤르메스가 어떤 종류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느냐는 문제가 학문적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로서도 퍽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태곳적 지혜'를 토론하는 동안, 그것의 시간적·역사적 성격은 점차 뚜렷한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헤르메스 저작과 그리스도교 성서의 '알레고리적' 의미가 동시에 폭로되었으며, 그것들이 제한된 시공간적 조건에 어울리는 담론이라는 사실이 점차 명백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이른바 '고대파Ancients와 현대파Moderns의 논쟁'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고대인의 지혜와 언어는 현대인의 그것보다 우월한가? 우열을 가릴 수 있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태곳적 지혜를 그것이 현대인의 지식보다 우월하든 열등하든 하나의 역사적 산물로 만드는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러빈 교수가 지적하듯이, 〈그 논쟁은 한 차례의 대규모 전투라기보다, 수많은 작은 전투로 이어진 긴 전쟁〉이었다."(248-9)


"현대파의 승리를 위해 전기를 마련한 것은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이었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언어의 '자연적' 기원과 '인위적' 발전은 인류가 야만 상태로부터 문명 상태로 진보하는 과정으로 빈번하게 해석되었다." "행동(제스처)과 그림('상형어')은 오늘날의 입말과 글말처럼 동전의 앞뒷면이다. 행동으로 말하고 그림으로 기록하는 시대에, 인간은 감각에 매몰되어 있었다. '상형어'는 심오한 지혜를 감추기 위한 의도적 알레고리가 아니라 자연적·감각적 '필요'의 산물인 '조야한 언어'로 고정된다. 분절적인 음성과 알파벳적 기록에 의해서야 비로소 인간은 추상적 관념을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헤르메스, 모세, 종국적으로는 아담의 '신성한' 언어가 조잡한 원시 언어로 고착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현대파의 승리도 점진적으로 확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성사聖史'와 '이교사異敎史'의 태곳적 지혜가, 태고의 언어와 현대의 언어가 꾸준히 비교되었다. 비코는 바로 이러한 논쟁적 담론 상황에 속한다."(254-6)


"비코는 '성사'와 '이교사'를 완전 분리하여 '이교사'에 대해서만 야수적 기원 즉 '바바리즘'을 적용하였다. 성사와 이교사를 구분한 것이 이단 혐의를 피하면서 인류 문명의 기원이라는 위험한 주제에 접근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태곳적의 '심오한 지혜'를 부정한 것은 데카르트파를 위시한 현대파로부터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코는 '야수-인간'의 테제를 수용하되, 카조봉처럼 그리스도교적 지혜가 이교적 야만성보다 우월함을 입증하려 하지 않았다. 데카르트파처럼 '고대인'보다 '현대인'이 우월함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의 관심은 '역사학적인 것'이었다." "비코가 보기에 '야수-인간'의 무리는 감각이나 본능에 따라 결속되었다. 그렇다면 인류는 어떻게 감각이나 본능에 따라 최초의 문명을 형성할 수 있었는가? 『새로운 과학』 완성판(1744)의 주제인 '시적 지혜'는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비코가 내놓은 가장 충실한 답변이었다."(265-6)


"'시적 형이상학'은 태곳적에 살았던 사람 누구에게나 '선천적으로 주어진 능력'이다. 태곳적 인간이면 누구나 '시인'이다. 태곳적 시인들은, 〈그들 자신의 관념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지순至純한 예지에 따라 사물을 인식하며 인식함에 의해 창조하지만, 태곳적 사람들은 그들의 강건한 무지로 인해 오직 육체적 상상에 따라 사물을 창조하였다.〉 태곳적의 '시적 지혜'는 심오하거나 신성한 지혜가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시적 형이상학'에 의해 형성되며, 그것의 요체는 '육체적 상상'이다." "비코는 〈모든 시적 표현〉은 〈언어는 빈곤〉하지만 〈설명하고 이해시킬 필요〉가 있는 조건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은유가 바로 그러하다. 어떤 것을 설명할 필요는 있는데, 그것에 합당한 어휘를 결여하고 있을 때 은유가 사용된다는 말이다. 이교 태고 문명이 발하는 찬란한 빛은 은유나 우화로부터 방출된 빛이요, 따라서 지식이 아닌 무지의 소산이다."(272-3)


"'공통 감각sensus communis'은 섭리의 장소이다. 섭리는 늘 인간이 의도하는 '좁은 목적'보다 '넓고 우월한 목적'을 실현한다. 섭리는 '공통 감각'에 맞추어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비코가 말하는 섭리의 작용은 '상형어'의 기능에 상응한다. '상형어'는 '야수-인간들'의 육체적 상상에 의해 형성되지만, 다시 그들의 감각과 상상을 사로잡는 '이상적 초상肖像'으로 작용하여, 그들의 모든 경험과 사고를 규율하며 질서 짓는다. '상형어'의 기능은 단순히 담론적 수준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기예와 제도가 '상형어'의 기능을 수행한다. 비코의 표현을 빌리면, 기예나 제도도 말이 아닌 사물로 구성되는 일종의 〈시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곳적 이교도들이 '만든' 모든 것은, 아우어바흐가 '마술적 형식주의'라고 부른 기능을 수행하였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감각과 상상을 사로잡아 그들의 경험을 강제하고 규율하는 '상징'으로 기능하였던 것이다."(281-2)


6장 인문학에서 '과학적' 담론의 형성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벽두부터 자연 및 섭리에 대한 인간적 인식의 한계를 폭로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최초의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는 '신이 만든' 자연을 연구하는 자연철학이나 의학이 과연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론을 제기하였다. 물론 아직 페트라르카에게는 인간이 자신의 목적과 필요에 따라 창조하는 세계야말로 진리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다음 세대의 살루타티는 과학의 토대를 형성하는 결정적인 요소란 인식 대상의 존재론적 높낮이가 아니라, 인식 주체의 지적 능력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동시대의 자연철학을 공격하였으며, '신의 과학'(신학)과 동등한 자격을 갖춘 '인간적 과학'(인문학)이라는 개념에 도달하였다. 인간이 신이 만든 피조물은 확실하게 인식할 수 없지만, 그 자신이 창조한 것은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정 '인간적인' 과학의 대상은 자연의 작품이 아니라 인간의 작품인 법과 제도가 되어야 할 것이었다."(297-8)


"페트라르카는 자유 기예liberal arts가 기계적 기예mechanical arts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윤리적·영적 영역에 한하여 '인간이 만든 것'의 진리성을 인정한다는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방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르네상스 비학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적 기예와 신적 기예, 신이 만든 자연과 인간이 만든 세계 사이의 간극을 거의 제거하고, '인간이 만든 것'의 진리성을 넓은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학은 인간의 영적인 구원과 육체적 구원을 동시에 추구함으로써 기계적 기예와 자유 기예 사이의 해묵은 갈등을 청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술적 유토피아론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인간이 만든 것'은 자연과 섭리의 승인하에서만 진리가 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역사 세계는 종말론적 시간표 안에서만 가능한 세계였으며, 그 안에서 지상至上의 과제는 원래 아담에게 주어진 자연 지배력을 회복하는 것이었다."(298-9)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데카르트가 논리적·수학적 필연성을 존재론적 필연성에 대입하여, 자연 세계의 '확실한' 인식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것은 가히 지적 분수령이라 할 만한 변화였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논리적·수학적 질서나 패턴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나아가서는 그러한 것만이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천명하였다. 그러므로 세계상이 '기계화'된다는 것은, 단지 세계를 '기계'처럼 바라보게 된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것은 실물로든 상상으로든 인간에 의해 구성된 어떤 기계 모델이 실재에 부과되어 그 모델과 일치하는 실재의 질서만을 과학적 진리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을 가진 것이기도 하다. '기계'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인간의 지성은 비록 유한한 능력만을 가지지만, 적어도 '인간이 만든 것'에 대해서만은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생각은 17세기 중반 이후로 유럽 전역의 지성계에서 눈에 띄게 진전되고 있었다."(299-300)


"비코의 『지혜』는 '진리'가 '만들어진 것'과 의미론적으로 교환 가능하다는 테제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비코는 어떤 것을 만드는 조건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라는 토마스주의의 입장을 계승하였다기보다는, 그 역으로 어떤 진리를 인식하는 조건은 그것을 만드는 것이라는 키케로(혹은 둔스 스코투스)의 고전적 명제를 계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혜』에서 개진된 '베룸-팍툼'의 원리는 데카르트나 홉스가 제시하였던 진리 규준과는 다르다. 데카르트나 홉스에게는 '인간이 기하학을 만들었다는 것'이 '기하학의 증명 가능성(진리)'을 보증하는 '조건'인데 반하여, 비코에게는 그것 자체가 진리의 '기준'이 되고 있다. 데카르트나 홉스가 '명석판명함'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았다면, 비코는 '만들었다는 것' 자체를 진리의 기준으로 정립하였다는 말이다." "여기에 더해 『지혜』에서는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진리 기준이 수학과 기하학에 적용되지만, 『새로운 과학』에서는 그 기준이 '역사 세계' 전체로 확장된다."(303-5)


# 베룸-팍툼verum(진리)-factum(만들어진 것)의 원리


"비코가 '상상적 보편자'(상형어)에 주목하였던 것은, 현대의 관점에서 참이냐 거짓이냐를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제우스'는 '천둥 번개'의 표상이었다는 식으로 그것이 '무엇'을 표상하였던가라는 문제도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비코의 진정한 관심은, 왜 고대에는 '상상적 보편자'(상형어)가 '확실한' 전언으로 '통용되었는가'를 구명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이처럼 언어를, 그것이 정립된 시점에서의 사회적 용도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그것에 의해 말하는 사람이 생각하였던 것(관념)과 만들었던 것(사회관계나 제도)의 본성에 접근하려고 하였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비코는 문헌언어학의 두 분과를 '언어의 역사'와 '사건의 역사'로 구분하였다. 문헌언어학은 〈사물의 역사를 참조함으로써 언어의 역사에 확실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문헌언어학적 '확실성'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려면, 특정한 언어와 그것을 사용한 시대의 사회적·제도적 조건을 동시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었다."(313)


"비코의 '영원한 원형적 역사'는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인간사에 대한 문헌언어학적 이해를 결합한 개념이었다. 역사의 변화는 인간 관념의 '철학적' 패턴을 따르지만, 철학적 패턴은 구체적인 '역사적 변양變樣' 속에서만 확인된다." "'factum'은 인간이 만드는 현실의 역사로, 'certum'은 문헌언어학에 의해 확인되는 그 역사의 확실성으로, 'verum'은 철학에 의해 증명되는 그 역사의 일정한 패턴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은 감각이나 영혼이나 이성을 통해 '시민 사회의 역사'를 전개하는바, 각 시대의 본성은 침묵어나 영웅어나 분절적 언어에 의해 확실하게 인식되며, 역사의 순환적 패턴에 의해 인간의 역사란 인간이 만든 것 이상일 수 없다는 진리가 증명된다. 실제로 '시민 사회의 역사'는 감각이 지배하는 시대로부터 이성이 지배하는 시대까지 한 차례의 순환을 완결하고 나면, 다시 이 순환을 반복한다. '감각의 바바리즘'으로부터 출발하여 '반성(이성)의 바바리즘'에서 종결되는 순환을 반복하는 것이다."(316-7)


"인간 본성이 역사의 순환적 패턴을 결정한다는 관념은, 르네상스 시대에는 물론 보댕이나 스페로니, 베이컨 등 17세기 사상가들 사이에서도 답습되고 있던 해묵은 유산이었다. '베룸-팍툼'의 원리며 '야수-인간' 테제도 이미 17세기 중반에는 전 유럽의 관심사가 되어 있었다. 고대와 현대의 언어적 차이에 의해 각 시대의 본성을 해명하려는 시도는 '현대파와 고대파의 논쟁'에서 핵심 주제였다. 비코의 어원 연구는 로렌초 발라를 위시한 르네상스 문헌언어학의 잔영이었다." "그러나 비코는 '과학' 자체가 하나의 '문제'로 부상하던 담론 상황에 속해 있었다. 비코에게 '유리한 고지advantage point'를 제공한 것은 바로 '시대'였다. 이 유리한 고지에서, 비코는 순환론이라는 '해묵은' 관념을 '새로운' 담론 상황에 응용하여, 시의 시대(감각의 시대)와 과학의 시대(이성의 시대)를 동시에 반성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비코는 '과학에 대한 과학', 즉 '메타과학'으로서의 인문학의 위상을 정립하는 새로운 위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317-8)


"비코의 언어관을 '자연적' 아니면 '규약적'인 것이라고 양자택일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오히려 비코는 고대에든 현대에든 언어는 늘 '자연적인 동시에 규약적'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수 있다." "비코는 인간의 약속 없이도 언어가 성립할 수 있다는 자연적 언어관을 배격하는 동시에, 오로지 약속에 의해서만 언어가 성립할 수 있다는 규약적 언어관도 수정하고 있다. 각 시대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신의 시대에 언어는 자연적 특징이 강하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통용될 수 있지만, 인간의 시대에 언어는 '사물에 대응하는' 정의에 따라 통용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시대에 어떤 어휘가 어떤 사물에 대응하는가는 거의 전적으로 사회적 규약에 의존하게 된다." "비코에게 언어는 고대든 현대든 '인간이 만든 것'이다. 고대에는 자연적-상징적 언어가 지배적이었고, 비코 당시에는 자의적-규약적 언어가 지배적이었을 따름이다."(333-4)


"반성력(이성적 추론 능력)에 의존하여 사물에 대한 엄밀한 표상을 추구하는 가운데, 인간의 정신 한구석에는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하거나, 진리를 가장하여 거짓을 말하는) '진리의 가면을 쓴 반영'이 동시에 형성된다." "이와 관련하여 비코가 '반성(반영)의 바바리즘'을 언급하고 있는 대목은 참으로 흥미롭다. 비코는 두 상태의 '바바리즘'을 가정한다. 우선 그는 홉스가 만인 대 만인이 투쟁을 벌이는 '자연 상태'를 가정한 것처럼, '감각의 바바리즘'을 상정한다. 인류의 역사는 이 '감각의 바바리즘'으로부터 출발하여 '반성(반영)의 바바리즘'에서 한 차례의 순환을 완결한다. '감각의 바바리즘'은 '야수-인간'이 아직 상상적 보편자(상형어)를 정립하기 이전의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는 사람들이 공통 감각에 의해 언어의 의미를 규약할 수도, 서로 의사소통을 수행할 수도 없다. 반면에 '반성(반영)의 바바리즘'은 인간이 이성적 동의에 의해 의미를 규약할 수도, 따라서 서로를 믿고 의사소통할 수도 없게 된 상태이다."(341-2)


"청년 시절부터 비코는 일관되게 과학적 진리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과학적 진술의 참·거짓의 문제를 떠나, 과학적 담론의 이면을 들여다보았다. '오류의 낌새'마저 제거하려는 과학의 계획은 그것이 원래 의도한 바와는 달리 참·거짓의 판단 자체가 불가능한 '반성의 바바리즘'을 초래한다. 삶의 공동체는 파괴된다. 비록 고대의 시인들이 만든 '상형어'는 미신의 산물이었지만, 그들은 '상형어'의 '빛나는' 이미지로 최초의 시민 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다. '상형어'가 야수처럼 방황하던 인류의 '감각'을 사로잡은 덕택이었다. 그러나 이제 활짝 만개한 인간의 '이성'을 무엇이 제어할 수 있는가? 과학적 진리로는 부족하다. 참·거짓을 따지는 담론 상황에서는 참을 가장한 거짓이 침투하기 마련이요, 이야기된 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코는 인간 이성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비코는 현재의 과도한 이성을 '누그러뜨리는' 것을 최선의 처방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344-5)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의 동시대적 담론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비코의 '새로운 과학'은 단순한 반反과학도, 르네상스 비학의 부활도 아니었다. 오히려 비코는 과학적 담론이 야기한 질병을 치료하는 데,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는 데 관심이 있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관심을 가린의 용어를 빌려 '새로운 인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새로운 과학'으로서의 인문학의 형성에는 비코 외에도 적지 않은 동시대인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근대 과학이 '생활 세계'에 야기한 영향을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자각한 중요한 실례에 해당한다." "비코의 수사학은 한 시대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그 시대에 고유한 '확실성'으로(그 시대에 확실하다고 믿어진 것으로) 환원한다. 이렇듯 한 시대를 좁은 수사의 권역에 묶어둠으로써, 비코는 우리에게 과학적 담론의 권역을 넘어서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자격을 선물한다."(352-3)


결론


"피치노가 『헤르메스 전서』를 번역한 1464년부터 비코의 『새로운 과학』(3판)이 출판된 1744년까지 대략 3세기는 서구 '근대성modernity'의 형성기였다. 근대적 국민 국가, 근대적 자본과 시장이 형성된 시대였다. 국가와 자본이 생활 세계를 두루 장악하면서 사회적 갈등이 빈발하였으며, 그 와중에서 합리성과 '계몽'이라는 새로운 가치 기준이 정립되고 있었다. 일찍이 비코는 한 시대의 언어를 통해 그 시대 전체를 두텁고 촘촘하게 기술하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는 언어와 정치 제도, 언어와 종교 의식儀式, 언어와 경제적 교환 방식, 언어와 심성mentality, 언어와 일상 문화를 입체적으로 엮어 냈다." "3세기에 걸쳐 공통의 논제를 지속적으로 논의하는 '담론 상황'에서, 비학과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각자에 적합한 담론 영역을 구축하였다. 비학이 지식의 수직성(질과 깊이)을 유지하는 담론 형식을 유지하였다면, 과학은 지식의 수평성(양과 너비)을 강화하였으며, 인문학은 지식의 입체성thickness을 추구하였다."(360-1)


"포스트모던론자들은 '차이'와 '차별화'를 권력이 침투하는 틈새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틀린 판단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부라고는 할 수 없다. 비록 차별화 과정에서 논쟁이 발생하고 승패가 결정될 수도 있지만, 지식의 진정한 다원화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 담론의 지형을 어림잡기 힘든 조건에서는, 비학이 과학을 오히려 '과학적으로' 공격하고, 과학적 담론의 위력에 의해 인문학이나 비학의 특수성이 말살되고, 인문학과 비학이 자주 혼동되는 상황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지식의 분화는 끊임없이 발생하겠지만 지식의 진정한 다원화는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이 책은 서구 지식 담론의 지형에 대한 하나의 은유로서 제시된 것이다." "서구의 비학·과학·인문학을 각자에 고유한 '방법론'에 따라 차별화하는 작업보다는 각자에 고유한' 수사학'에 비추어 이해하는 작업이 더욱 풍요로운 결실을 약속할 것이다. 경험이 추상에 선행하듯이, 수사는 언제나 방법에 선행하기 때문이다."(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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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 - 《국가》 탐구 우리 시대, 사상사로 읽는 원전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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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국가》는 소크라테스와 몇몇 사람들이 페이라이에우스(피레우스) 항 근처에 있는 폴레마르코스의 집에서 나눈 대화를 소크라테스가 전해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밋밋한 대화가 아니라 격정과 냉소, 찬탄과 질책이 오고가며 장면 전환이 이루어지는 일종의 희곡이다. 소크라테스와 대화하는 사람들 중에는 우호적인 이들도 있고 적대적인 자들도 있다. 적대적이라 해서 당장 상대방을 죽이려 드는 이들은 아니다. 그 정도로 적대적이면 아예 마주앉아 대화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니 그 자리에 끼어들었을 리 없다. 설득의 가능성은 남아 있는 이들이다. 말을 섞는 것조차 곤란한, 상종도 하기 싫은, 인간 같지 않은 이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호적이라 해서 좋은 말만 하고 만만한 자들은 아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의외로 그런 자들이 하기 마련이다." "(대화편 《정치가》나 《법률》과는 달리) 《국가》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이끌고 가지만 다른 이들도 끌려가는 것만은 아니어서 대화의 균형이 이루어져 있다."(16-7)


서론 또는 문제 제기: 올바름에 관한 의견들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 시내로 돌아오는 길은 수월하지 않았다. 폴레마르코스는 단순히 기다려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붙잡은 것이다. 이는 그들이 소크라테스를 이겨 보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폴레마르코스의 집에서 대화가 시작된 상황은 평온하지 않았다. 격렬한 대결이 벌어진 것도 아니다. 약간의 긴장, 이 정도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목적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와는 다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거의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아테나이 사람들을 강하게 질타한다. 《국가》는 '대화를 통한'(dia logon) 설득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설득은 철학자의 과제다. 이 대화가 끝날 때쯤 여기서 시비를 걸던 사람들이 모두 소크라테스의 말에 승복하거나 적어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면 그의 목표는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트라쉬마코스와 같은 소피스테스들의 목적도 설득에 있다. 플라톤은 그들의 설득과 자신의 설득이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하는 데 많은 노력을 들인다."(26-8)


# 올바름에 관한 의견들

1. 케팔로스 : 넉넉한 재산을 갖고 있어서 신에게나 인간에게나 '갚을 것은 갚는 것'이 올바름이다.

2. 폴레마르코스 : 친구에게는 이익을 주고, 적에게는 손해를 끼치는 것이 올바름이다.

3. 트라쉬마코스 : 더 강한 자의 편익이 바로 올바름이다.

4.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 올바름은 그 자체로 좋으며 결과로서도 좋은 것임을 논증해야 한다.


"민주 정체에서는 많은 사람이 약정을 하면 된다. 글라우콘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법률(nomoi)과 약정(계약: syntheke)을 제정하기 시작했으며, 이 법(nomos)에 의한 지시를 합법적(nomimon)이며 올바르다(dikaion)고 한다.〉 법이 〈올바름의 기원(genesis)이며 본질(ousia)〉이라고까지 말한다. 합법성과 올바름(정당성)이 법을 통해서 결합된다. 체제가 법규범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 작동하고 그 법의 내용이 어떠하든 실정법으로서 입법되어 있기만 하다면 정당성을 얻는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내용이 극도로 악한 법도 법이므로 그것은 옳은 것으로 간주되며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는 체제의 형식적 구성에 기여한다. 우리는 정당성의 원천을 참된 올바름에서 찾으며, 그런 까닭에 적절한 합의에 의해 형성되는 올바름이 진짜 올바른 것인지는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곤 한다." "결국 (무엇이 올바름인가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무엇이 '잘 삶'인가를 확정해야만 체제는 완성된 현실태가 된다."(77-8)


"담대한 글라우콘과 섬세한 아데이만토스가 요구하는 것은 올바름은 그 자체로서 좋으며 결과로서도 좋은 것임을 밝히는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윤리적인 행동 지침을 세우는 차원에서 그칠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 널리 받아들여질 만한 것까지 고려해야 할 주제이다. 한 사람의 올바름과 한 나라 또는 하나의 공동체에서 올바름 모두에 일관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올바름을 원리로서 탐구할 것을 요구하는 글라우콘, 올바름의 작용과 이로움을 밝혀 달라는 아데이만토스, 이 두 사람의 문제 제기는 아테나이에서는 찾아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것이면서도 지적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가 언급했듯이 〈개인들뿐만 아니라 나라들에 대해서〉, 한 사람의 영혼과 공동체 모두에 대해서 올바름의 원리와 작용을 구축하는 작업, 즉 올바름의 학學을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해야만 한다. 담대함과 섬세함으로 수행되는 이 작업은 '기쁨'을 낳아 놓을 것인가."(80-1)


제1부 공동체의 구성과 올바름


"《국가》에서는 '많은 사람의 쾌락'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그것이 공공 영역인 폴리스에서 정치적인 쟁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군주귀감서에 그것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지배자의 쾌락이 아닌 피지배자들, 주권자가 아닌 자들, 신민의 쾌락은 그저 억누르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쾌락을 만족시켜 달라는 요구조차 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민주 정체가 성립하면서 바로 이들이 폴리스라고 하는 공적인 영역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자신들의 쾌락을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지, '돈 놓고 돈 먹기'와 같은 보수 획득술은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 의제'가 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국가적 차원에서 치러지는 선거의 핵심 주제, 심지어 당락을 가르는 쟁점은 '영혼까지 끌어모아 부를 쌓아 올리려는 애타는 갈망'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이다." "즉, 《국가》는 민주 정체에서만 제기될 수 있는 정치적 문제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89-90)


"《국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제시되는 올바름의 기준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 적기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철학적 정치가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으니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호자는 한 가지 일만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수호자는 다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나라의 원칙인 '한 사람이 하나의 일을 하는 것'이 수호자 집단에는 적용되지 않음을 유념해 두어야 한다. 한 사람마다 하나의 직업을 갖는 나라에서 수호자들도 그 명칭은 '하나의' 직업이지만 내용상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의 성향은 교육을 통해서 다면적으로 변화하였으며 바로 그 다면성이 수호자 또는 통치자의 근본적인 특성이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수호자(와 통치자)만 유식해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단순 무식한 상태로 만들자는 것인가라고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우민정치를 하자는 것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과잉해석일 것이다."(113-4)


"시가 교육이 좋은 성격과 그에 이은 지성의 측면을 위한 것이었다면 체육 교육은 '격정'을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혼을 위해서 양쪽 다를 제도화한 것〉(410c)이다. 달리 말해서 하나의 혼이 가지고 있는 두 측면을 위해서 그 두 가지 교육이 요구된다. 〈수호자들은 성향상 이들 양면을 지니고 있어야만〉(410e)한다." "플라톤에게 있어 시가와 체육의 기본적인 목적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양 측면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둘을 골고루 쓸 수 있다. 이것이 혼화混和이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겁먹지 않고 차분하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적절한 정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올바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올바름은 딱 정해진 것이 아니라 활동을 가리킨다. 올바름은 특정한 상황에서 도덕적으로 최선의 것을 궁리해 내는 사유활동이다. 플라톤에 있어 올바름은 혼의 혼화에 이르는 과정을 이끌어서 혼화의 상태와 적절함을 만들어 내는 사유의 힘이다."(124-6)


"신분제가 엄격한 나라에 사는 사람은 자신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서양 중세에서 장남은 집안의 문장紋章을 이어받는다. 차남은 자신의 운명에 승복하고 다른 방책, 이를테면 일확천금을 노리고 십자군에 참전한다. 왜 불평이 없는가? 그것이 자신의 기본값이라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는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음을 굳이 따져서 알 필요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정함 따위를 따지지도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장남이 될 수 없다. 노력하면 뭔가를 성취할 수 있는 체제에서만 올바름과 공평함이 문제된다." "플라톤이 올바름에 대해 논의를 했다는 것은 민주 정체에서 핵심적인 쟁투가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아테나이에서는, 민주정 시기는 물론 참주정 체제에서도 이런 일이 끝없이 일어났다. 그는 민주정에서 조화로운 정치적 행위들이 가능한 방법, 체제 붕괴를 불러오는 당파적 쟁투를 막는 민주 정체 지도자들의 덕목이 무엇인지를 궁리한 것이다."(128-9)


"통치자의 기본적인 자질은 사적인 인간으로서의 모든 관계를 없애야 하는 데에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공무원들도 한 명의 주권자이지만 그들이 공직에 있는 한 그들은 공직이라는 기구(apparatus)의 한 조각이다. 거대한 조직(organization)의 한 기관(organ)에 불과한 것이다. 이 조직과 기구는 그 안에 어떤 인간이 들어온다 해도 규범과 원칙에 따라 작동한다. 플라톤 시대에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더욱이 민주 정체는 시민의 사적인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민회에서 모든 공적인 사안이 결정되었다. 그것이 민주정을 흔들고 불안으로 몰아가는 치명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우리가 추상적인 권력 기구라 부르는 장치를 구상한 것이다. 수호자들의 사적인 관계를 제거함으로써 그들은 권력 기구와 전면적으로 하나가 된다. 이제 그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에서 '나'는 사라지고 '우리', '폴리스'만 남는다. 그들은 폴리스의 일(ergon)을 수행하는 기계와 마찬가지다."(191)


제2부 공동체의 궁극적 근거와 철학적 정치가


"현실은 현실이다. 그것은 결코 이상이 아니다. 어떠한 정치적 구상을 제시하였을 때 그것에 상응하는 제도와 조직이 만들어질 가망이 없는 것을 이상주의적이라고 말하며 실현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을 현실적이라고들 한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정치적 제도와 조직이라는 실제 공간 속에서 작동하는 유형有形의 것들이 있다. 그것에 상응하거나 그것을 반영하는 정치적 사유를 했다면 그것은 현실적인가. 이는 단순히 현실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정치적 사유가 현실의 정치적인 것을 반영한다 해도 인간의 사유는 정확하게 그것을 반영할 수 없다. 모든 사유에는 인간의 반성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반성은 사유이고 관념이다. 관념(idea)은 이상적(ideal)이고 이상주의적인(ideal) 것이다. 플라톤이 내놓는 생각, 곧 철학자가 정치가가 되든지 정치가가 철학자가 되든지 해야 한다는 생각은 현실의 아테나이에서 펼쳐지는 정치를 검토한 다음에 나온 것이므로 관념이고 이상적인 것이다."(200-1)


"현실은 내버려두면 그대로 흘러간다. 가끔은 그것을 되짚어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살펴볼 때 뭔가 기준이 있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에 대한 논의를 거쳐서 만들어 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닮은 것이라도 있어야 한다. 말 그대로 본本이 있어야 그것에 대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하찮아 보이는 일을 하더라도 '그래, 하는 데까지 해 봐, 그러다 보면 뭐가 되더라도 되겠지, 그거면 충분한 것 아니겠어'라는 태도로 일을 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가 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게 있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현실의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최종 목적으로서의 '좋음의 이데아'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적 정치가'를 말하는 것은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 논의를 해 보자는 것이다. 반드시 그 사람이 다스려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 되는 정치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를 말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적인 출발점이다."(201-2)


"소크라테스는 자체를 아는 것이 앎이고,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비진리로 간주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의견 속에서 산다. 그들을 어떻게든 이끌고 가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 있는 이가 자신의 모름을 알아차렸다고 해 보자. 이 무지의 자각은 앎인가, 의견인가? 아직은 의견이다. 자신이 무식한 건 알지만 아직 앎은 없다. 모름에서 앎으로 가는 중간 단계다. 이것은 모름과 앎의 운동 과정이다. 앎과 모름은 이처럼 연속되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서로 모순 관계가 아닌 반대 관계이기 때문이다. 흰색과 까만 색도 반대 관계이다. 흰 색에 때가 묻으면 회색이 된다. 그러다가 때가 아주 많이 묻으면 까만 색이 된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 모름에서 앎으로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 중간 단계를 우리는 '생성'이라 표현해도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생성에 나섰을 때 그것을 인도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국가》에서는 누가 그런 일을 할 것인가. 일단 앎을 가진 철학자가 하리라고 예상해 볼 수 있다."(212-3)


"형상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것이다. 본은 형상을 닮은 것이다. 형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접근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의 면적을 계산할 때 원주율에 반지름의 제곱을 곱한다. 이는 원을 다각형으로 쪼개는 것이다. 그렇게 무한히 쪼갠다고 가정해서 얻어 낸 원의 면적이 원의 진짜 면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무한히 쪼개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원주율 자체가 확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얻어 낸 면적은 원의 진짜 면적에 접근해 있을 뿐이다. 원의 진짜 면적은 신만이 알 수 있다. 인간은 그 면적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신이 알고 있는 것은 신적인 것이고 인간은 신 닮은 것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차원을 구분한다. 하나는 완전하게 자기 스스로와 합치하는 차원, 즉 신의 차원, 형상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극한의 노력을 기울여 형상의 차원에 가깝게 간 '본'의 차원이다."(213-4)


"형상을 알아내는데서 그치면 그는 철학자일 뿐이다.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접촉해야만 한다. 천상에 올라가 지식을 얻은 다음 그들을 인도하러 내려가야만 하는 것이다. 올라가면 철학자이고 내려가면 정치가이다.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정치가라 하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된다. 철학자는 형상을 앎으로써 스스로 완성된다. 그것으로써 목적에 이르러 끝난다. 형상의 세계는 고요하고 시간으로부터 벗어난 곳이다. 인간 세상은 변화에 얽매여 있는 곳이다. 천상의 세계는 질서 잡혀 있으며 한정되어 있으나 아래는 혼돈스러우며 한정되어 있지 않다. 이것들 각각은 진리와 비진리이니 겹칠 수가 없다. 인간의 삶에 자족성(autarkes)이 있다면 본을 가진 정치가가 요구되지 않는다. 인간 실존은 논리적 공간에서 살고 있지 않으며, 인간 공동체는 불완전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천상에 있는 형상을 '전체에 따라서'(kata holon) 모방한 본을 가지는 것일 뿐이다. 이 본은 어중간하게 중간에 있는 것이다."(220-1)


"폴리스에서 어떤 정치적 행위를 할 때 그것을 해야 하는 근본적인 까닭으로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를 제시하였다. 좋음의 이데아를 오늘날의 용어로 말해 보면 '공동선'共同善이다. 이러한 최종 근거의 원초적 형태는 자연적 우주론, 즉 우주적 혼(cosmic soul)의 선이 세계를 뒤덮고 있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 《티마이오스》가 이것에 관한 정신철학적 논의를 담고 있다. 근대적 형태의 우주론은 칸트의 초월론적 선험론에서 주장하는 '실천이성의 요청'과 같은 것이다. 최고선, 자유의지, 영혼불멸은 증명할 수 없지만 그것들은 인간 삶의 윤리적 국면을 위해서 목적론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다. 현대 국가에 있어서는 공공복지 같은 이념이 정치에서의 최고선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것이 설정됨으로써 정치의 궁극적 과제가 도출되며, 이것으로써 정치는 사적인 이익의 극대화에 기여하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 보일 의무를 지게 된다. 이는 '정치의 궁극적 정당화 근거'이다."(253)


"많은 사람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향해 내려가야만 한다. 상승과 하강, 아나바시스와 카타바시스가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묶어서 '이행'(메타바시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동굴로) 내려가야 하는 이유를 매정하게 설명했다. 폴리스에서는 특정한 부류가 잘 지내는 게 아니라 모두가 잘 지내게 하는 것이 규범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해 보자면 정치가는 공화주의적인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를 보고서 그곳에서 누리는 '관상적 삶', 현실로 내려와 많은 사람들과 살아가는 '실천적인 삶', 이 두 가지 모두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연히 이 둘은 동시에 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철학적 정치가는 그것을 할 수 있다. 그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 양립 불가능한 모순을 견뎌 내는, 서로 다른 상태인 올라감과 내려감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철학자이면서 정치가인 것, 이는 참으로 고된 삶이다."(282-3)


제3부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와 시민들


"아테나이, 로마 공화정, 현대 민주정 등을 제외한 정치 체제들에서는 정치적 공직이 출생, 군주의 호의, 확립된 과두제 안에서의 지위의 획득에 의해서(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우) 성취될 수 있었다. 이는 공직을 귀속적으로 충원하는 방식이다." "플라톤이 구상한 폴리스에 적용되는 방식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교육적 충원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것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정체의 쇠퇴를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플라톤은 정체의 쇠퇴가 일어나는 원인이 정체의 구조 문제라기보다는 폴리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있다고 보았다. 아무리 이상적인 정체에 살고 있다 해도 그 폴리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지향하면서 사느냐, 즉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따라 정체는 얼마든지 퇴락할 수 있다." "시민들에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정치 체제의 상태를 평가하고 이름 붙이고 있으므로 플라톤이 정치학적 의미에서의 체제론을 논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논점을 벗어난 것이다."(302)


#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

1. 크레테 및 라코니케(스파르타) 식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은밀하게 추구함

2. 과두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드러내놓고 추구함

3. 민주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만인이 추구함

4. 참주 정체 : 명예(실상은 재물)을 만족시켜 줄 사람을 광적으로 찾아내서 지도자로 추대함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극대화되어 겹치면 민주정으로 가게 된다. 욕망 충족과 멋대로 하기에는 민주정만한 곳이 없다." "민주 정체에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말에 불변의 고정적 정의가 없다. 다수의 의견에 따라 의미를 규정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대중선동에 능한 자가 민주 정체에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데 왜 전통을 지켜야 하느냐면서 기존의 것을 엎어 버리면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질 것이다. 전통도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전통을 깨는 합의도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 극도의 대중영합주의 시대가 되어 버리면 다수의 합의에 의해 모든 것이 깨져 나간다." "모든 즐거움은 동일하고 똑같이 존중되어야만 하는 것이 민주정의 핵심에 자리한다. 날마다 마주치게 되는 욕구에 영합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 둘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소비자주의'다. 가치의 위계질서가 해체된 상태, 이것이 민주 정체의 필연적인 귀결이다."(324-8)


"참주 정체로 나아가는 씨앗은 이미 민주 정체 안에 들어 있다. 민주정은 다수의 동의를 얻은 자나 정당이 정치적 의사결정을 지배하게 되므로 민주 정체의 정치가들은 어떤 의미에서건 대중영합주의자(포퓰리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민주 정체의 정치가들은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이 법을 어기고 대중의 격렬한 지지를 바탕으로 뭔가를 하게 되는 지점, 즉 선도자가 되면 참주정으로 가게 된다. 마지막에 선도자는 '참주'로 변한다. 시민이 다양한 명칭을 갖는 것처럼, 똑같은 정치가가 상황의 변화와 진전에 따라 다른 명칭으로 불린다. 군중을 거느리고 동족의 피를 흘리는 것을 삼가지 않으면 그때부터 참주가 된다. 그는 늑대인간이다. 〈다른 제물들의 내장들 속에 잘게 썰어 넣은 인간의 내장 한 조각을 맛본 자는 반드시 늑대가 된다는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존재다. 참주 정체에서는 이러한 일이 사법살인의 형태로 자행된다. 대중선동가, 선도자, 참주, 이 연속 단계를 기억해 두어야 한다."(339)


"인간이라는 존재는 쾌락을 기본값으로 가지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쓰면 이기심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심을 가지고 있다. 이기적 개인들이 그 쾌락을 충족시키려 하는 상태는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다." "플라톤도 과두 정체에서 민주 정체로 오니 누구나 자기의 쾌락을 충족시키려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민주 정체는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자연상태의 이기적인 개인들의 싸움을 그치게 하려면, 불법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면 된다. 즉 법을 강제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인간이 만든 법에 대해 궁극적인 신뢰를 가지지 못했다. 그는 인간이 내놓는 진리는 참된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진리 닮은 것이다. 진리는 항상 저쪽에 있는 것이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니 어떻게 이것을 강제하겠는가. 결국 마음을 닦으라는 말만 하게 된다. 공동체의 법을 어기는 불법과 결합된 한 사람의 쾌락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처방은 한 사람의 심신수련으로 되돌아가 버리고 만다."(341-2)


제4부 참된 올바름과 궁극적 보답


"플라톤은 철학자가 언어를 이용하여 말하는 것을 진리라 하고, 시인이나 화가가 말하는 것은 베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철학자나 시인이나 모두 모방(mimesis)을 하고 있다." "인간이 현실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모방의 범주로 넣을 수 있다. 인간이라는 행위자가 초월적 실재로서의 진리를 알아차렸다고 해 보자.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은유의 후보자들이 있다. 은유는 인간이 만들어 낸 임의적인 것이라 약정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진리를 모방한 결과물이 은유인 것이다. 은유는 초월적 실재인 진리를 우리 인간에게 연결해 주는 통로다. 한마디로 모방은 은유를 형성해 내는 활동이다. 이러한 모방은 진리와 인간이 은유를 통해 오고가는 것, 즉 이행(metabasis)이다. 진리는 인간으로, 인간은 진리로 오고가는 것이다. 진리가 아무래도 위에 있다는 느낌이 있으니 그것을 알기 위해 인간이 올라가서'(anabasis) 진리를 가지고 '내려오는'(katabasis) 것이다. 은유는 오르내리는 사다리다."(369-70)


"소크라테스는 시인에 대한 비판보다는 진리의 인식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를 전개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온갖 착시에 빠져 있다. 〈같은 것들이 물속에서 볼 때와 물 밖에서 볼 때, 구부러져 보이기도 하고 곧은 걸로 보이기도 하는가 하면, 색채들과 관련되는 착시로 인해서 오목하게도 또는 볼록하게도〉 보인다. 시각을 통해 보는 것은 왜곡이 된다. 이것을 꼭 시각에 국한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비판적인 안목 없이 사태를 바라보면 대상이 던져 주는 정보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계산된 것과 측정된 것 또는 계량된 것'을 이용해야 한다. 이것들은 비판적 검토를 거쳐서 객관화된 것들이다. 계산된 것, 측정된 것, 계량된 것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교육이다. 이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미디어를 왜곡시키는 자들이요, 플라톤 시대에는 시인이었다. 시인들이 '혼의 헤아리는 부분'의 기능을 마비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플라톤의 미디어론으로 읽을 수 있다."(370-1)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이 이야기의 마지막으로 제시된 것은, 살아서 혼을 순수한 상태로 만들고 올바름을 지켰던 사람은 죽어서도 훌륭한 상태로 있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살아서의 삶이나 죽어서의 삶 모두에 대한 궁극적인 보답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야기의 보전'이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해야 할 과제라 천명했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이 이야기를 보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설득할 의무도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 설득된 자들은 '잘 지낸다'(eu zen)는 것을 궁극 목적으로 삼아 인간들과는 물론 신과도 화목하게 지낼 것이며, 살아서나 죽어서나 올바르게 살았던 보답을 받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보존하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보존하는 것, 사실 이것은 철학자가 하는 일이다. 앞날을 제시하는 것이 철학자의 임무인지는 잘 모르겠다. 안 가 본 길들을 철학자가 갈 수 있겠는가. 안 가 본 길들은 정치가들이 가는 것이다."(385-6)


추기追記


"아테나이 민주정의 결정적 계기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었다. 그는 정치적 선택을 조직하는 방식을 개조하였고, 정치적 선택을 아테나이 전래 집단인 데모스에 전체적으로 할당하였다. 여기서 민주정은 근대의 개인주의 방식이 아닌 집단의 선택으로 작동하였다." "클레이스테네스 이후로 민주정 체제에 숨은 문제는 '쾌락'과 연관된 부의 문제였다. 아테나이에서는 정치적 투쟁의 핵심인 부의 원천을 둘러싼 분배방식의 쟁투가 민주정으로 봉합되었고, 전쟁 시기에는 일당지급제도(misthophoria)라는 편법이 등장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로 충당된 국가의 핵심인력으로서의 해군에 대한 사회적 지위 부여 문제와도 얽혀 있는 것이다. 부를 분배하는 방식은 민주정을 통하여 새롭게 되었으나 부의 원천 자체는 토지 이외의 것이 획기적으로 생겨나지 않았다. 기술혁신이 불가능했던 고대 경제는 약탈 경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펠레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제국주의로 표출된 것이다."(394-5)


"민주정의 지도자가 가진 문제는 권력 획득의 과정과 기술에 있다. 달리 말해서 정치적 기술로서의 연설을 어떻게 평가하고 인정할 것인가, 오늘날의 술어로 표현하면 '대중영합주의'의 문제다." "한 개인의 내면적 심성의 특성이나 도덕성보다는 대중을 설득하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기술, 곧 연설술이 민주정에서는 탁월한 정치술의 중심을 이룬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체제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이 이를 배척한 것은 체제의 요체를 곧바로 겨냥한 것이다. 더 나아가 플라톤은 민주정이 실현한 일종의 '세계의 탈주술화'를 되돌리려 하였다. 주지하듯이 민주정은 절차적 합리성만을 최종심급으로 삼는다. 다시 말해서 민주정에서는 최종적 정초가 되는 이념이 없는데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라는 이념을 도입한다. 이는 탈주술화의 귀결인 민주정을 다시 주술화하려는 시도이다. 《국가》의 주제가 '올바름'이라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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