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민주주의를 캐묻다 - 체제 탐구 우리 시대, 사상사로 읽는 원전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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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사 주해


▶ 읽게 될 것


"역사, 그리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상사 모두 궁극적으로는 '읽기'다. 읽는 것은 정신의 연습이다. 헬라스 신화에는 아홉 명의 무사mousa 여신들이 있는데, 그것 이전에 보이오티아에서 기원한 신화에는 아오이데 여신과 므네메 여신, 멜레테 여신 이렇게 세 명의 여신이 있다. 아오이데 여신은 노래와 목소리(song, voice)를, 므네메 여신은 기억(memory)을, 멜레테 여신은 연습과 기회(practice, occasion)를 관장한다. 앞의 두 여신들은 구체적인 대상에 관여하는 반면 멜레테 여신은 이들과 달리 행위, 즉 노래를 잘하거나 기억을 잘하기 위한 연습에 관여하므로, 이 여신은 다른 여신들에게 있어 일종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습을 통해서 얻게 될 통찰력 또는 창발創發(emergence)은 불현듯 떠오르는 영감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에 대한 앎과 그것들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원리로 올라서는 힘이거니와, 이 원리는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모든 것의 이론'(TOE, Theory of Everything)은 아니다. 사실 '모든 것의 이론'은 '아무것도 아닌 이론'(TON, Theory of Nothing)이다."(125-6)


▶ 우리가 시도하는 바


"철학은 서사에 그치지 않고, 시대와 맥락에서 탈피한 추상적 보편성에 이르러야 한다는 요구가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요구는 '오늘의 나'가 역사적 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망각해야만 충족될 수 있다. '오늘의 나'를 소거하고 탈시간적 보편성의 규준을 가지고 텍스트를 읽는 것은 배진적背進的 소급적遡及的 태도로 과거에 접근하는 것인데, 이는 취사선택한 부분적 과거에 근거하여 오늘을 섣부르게 정당화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어떻게 하여도 공정한 재해석이 불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실천철학이 '사상사적 탐구를 통한 역사성'과 '철학적 관상으로써 얻어지는 보편성'을 통일한 참다운 사상이려면 어제의 발현이라 할 '오늘의 희미한 빛'이 주는 실마리를 잘 살펴봄으로써 사태 자체(사상事象)의 보편적 원리를 개념적으로 파악하여 세계사의 진행과정과 미래를 꿰뚫어 알아야 한다는, 그러한 이상(Ideal)이 지배하던 관념론(Idealismus)의 시대가 있었으나 이제 그것은 섣부른 목적론적 형이상학으로 간주될 뿐이다. 우리는 그러한 단언을 삼가고 각각의 시대가 드러내는 시대정신(Zeitgeist)이라 짐작되는(또는 그것이라고 상정想定한) 것을 살펴보는 데 만족해야만 한다."(126-7)


서문


▶ 쾌락에 빠진 시민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 같은 이들은 현전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초월적인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당장 여기서 즐거운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불안의 시대는 초월적 이념에 눈을 돌리게 된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초월적 이념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땅을 벗어나 다른 세계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지금 당장 겪고 있는 어려움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차안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도저히 발견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피안의 세계와 불변하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절박한 동경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그러한 동경에서 이끌어 낸 이념적 열정으로써 현실을 개조하려 한다. 아테나이 폴리스 쇠퇴기에 등장한 플라톤의 형상形相(eidos) 이론은 이러한 동경과 변혁의 강력한 전조이다. 현세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보기에는 그냥 헛소리이지만, 적어도 초월적 이념을 주창하는 이에게는 그 이념이야말로 진짜이며 생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에게는 세계가 둘이 된다─거짓 세상과 참다운 세계, 땅 위의 세속 세계와 하늘의 신성한 세계." "현세의 삶에서 고통과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의 세계, 그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초월적 반성을 요청했던 사람이 아주 가끔 등장했던 세계, 그 요청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세계가 고전 시대 전반기의 폴리스라는 역사적 공간이었다."(130-3)


1장 민주정이 시작된 역사적 공간 '폴리스'_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 정의는 정의로운 것의 심판 


"정의(dike)는 법적인 정의이고, 정의로움(dikaiosyne)은 넓은 의미에서의 올바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은 오늘날의 용어로 '합법성'(legality)과 '올바름'(justice)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체제가 법 규범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 작동하고 그 법의 내용이 어떠하든 실정법으로서 입법만 되어 있다면 합법성을 획득한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내용이 극도로 악한 법도 법이므로 그것은 지켜져야 한다. 이는 체제의 형식적 구성에 기여한다. 현대의 개체주의적 자유 민주정은 내면의 양심과 이념을 사적인 영역에 국한시킴으로써 절차적 합법성을 체제 구축의 필요조건으로서 승인한다. 절차적 합법성에 따라 선출된 권력은 바로 그 합법성으로부터 권위의 '정당성'(legitimacy)까지 부여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당성의 원천을 정의로움, 즉 올바름에서 찾으며, 그런 까닭에 적절한 합의에 의해 형성되는 올바름은 격렬한 이념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곤 한다. 폴리스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규정을 준용한다면, 폴리스의 정당성이 올바름에 정초되지 않았을 때, 또는 무엇이 올바름인가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어떠한 합법성도 의미를 갖지 못한다. 무엇이 '잘 삶'인가를 확정해야만 체제는 완성된 현실태가 된다."(137-8)


2장 민주정의 절정기, 체제 유지를 위한 패권 싸움_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크세노폰 《헬레니카》


▶ 전쟁이 시작


"전쟁의 시작에 관한 논의에서는 전쟁의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에 대해서 투퀴디데스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원인은 두 가지가 있다. 한국어 판은 모두 '원인'으로 옮겨져 있지만 헬라스 어 원문에는 두 개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prophasis와 aitia이다. aitia는 〈양쪽이 공공연하게 제기한 (···) 원인〉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알고 있고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원인이다. 이것은 무엇일까. 당시의 헬라스 세계 사람들은 전쟁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휴전협정 파기와 선전포고의 원인이라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투퀴디데스는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완결될 수 없다고 보아 alethestate prophasis, 즉 〈진정한 원인〉을 찾았다. 그것은 아테나이의 세력이 커진 것에 대한 펠로폰네소스 지역 사람들의 두려움이다." "〈진정한 원인〉은 일종의 내면적인 원인 또는 의도인데, 이것에 실현 도구가 더해지면 〈공공연한 원인〉이 도출된다. 즉 'prophasis+도구=aitia'라는 도식이 성립한다. 투퀴디데스를 비롯한 고대의 기록자들은 prophasis까지 파고들어야 참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prophasis는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심상 지도(mental map) 같은 것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실현되려면 도구라는 매개를 거쳐야만 한다. 그 도구들이란, 작용하는 토대인 지리적 구조와 현실의 힘(자본, 제해권, 함선 건조기술 등과 같은 인간사를 구성하는 것들)을 통칭한다."(155-7)


▶ 민중이 원하는 대로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exousia)를 가리킨다. 플라톤은 《정체》(Politeia)에서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를 논하면서, 과두 정체에서 〈올바르지 못한 짓을 아주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되는 경우〉(554c)가 등장하고 이것을 누구나 최대한 충족시키기 위해 민주 정체로의 이행이 생겨난다고 본다. 〈그러니까 과두 정체에서 민주 정체로 바뀌는 것은 (···) 그것이 내세우게 된 '좋은 것'에 대한, 즉 최대한 부유해져야만 한다는 데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aplestia) 때문〉(555b)이다." "민주 정체의 시민들은 개인이 가진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라는 가치가 절대로 공격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마비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에도 목격할 수 있는, '미숙한 평등주의'로 변질된 자유이다. 이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들은 공허한 자만심에 편승하여 떼를 쓰는 이들이며, 그것에서 정치적 자산을 취하는 이가 나쁜 의미의 '포퓰리스트'이다."(167)


▶ 30인 참주를 축출


"뤼시아스에 따르면 30인 참주들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한편, 돈을 갈취하는 것은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7)다. 그들의 주요한 행동 동기는 이익이었다. 그들은 〈불의를 당한 이들〉(52)이나 〈페이라이에우스 측 사람들을 위해서나 부당하게 죽어가고 있던 이들을 위해서 분쟁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56)다. 이들은 명료하게 나쁜 짓을 한 이들(Wrongdoers)이다. 불의를 당한 이들은 저항자들(Resisters)이나 희생자들(Victims)을 가리킨다. 그런데 뤼시아스는 다른 이들도 있었음을 알린다. 〈그 민회에 참석했던 이들 중 훌륭한 시민이었던 이들은, 사전에 준비된 것과 강제된 것을 알아차리고서는, 일부는 그 자리에 머무르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다른 일부는 적어도 도시에 대해 그 어떤 해악도 표결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자리를 떠나고 있었습니다〉(75). 침묵을 지키거나 표결에 불참한 사람들은 중립적인 이들(Neutrals) 또는 수동적 방관자들(passive By-stander)이다. 다른 종류의 사람들도 있었다. 〈다른 이들이 협조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없었으며, 다름 아닌 그 협조자들에 의해 구제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지금 올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는 점을 말입니다〉(85). 이들은 나쁜 짓에서 편익을 얻을 것이라 기대했던 협조자들(Beneficiaries from Wrongdoing)이다. 저항했던 이들과 희생당한 이들이 한 쪽에 서고, 나쁜 짓을 한 자들과 나쁜 짓에서 편익을 얻은 자들이 한덩어리가 된다."(168-9)


3장 민주정 시대를 체감한 소크라테스_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 기록


"플라톤의 철학적 사색(필로소피아philosophia)은 궁극으로 추상적인 기하학과 초월적 형이상학으로 귀결한다. 이는 서구 사상에서 형이상학적 전통(metaphysical tradition)의 시원이 되고, 기독교 신학에서도 신플라톤주의로 계수된 것이 접합되어 핵심적인 한 줄기를 이룬다. 이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아 개념은 신념 체게가 실제적 삶의 영역에서 작동하고 기여해야 한다고 여기는 인문주의적 전통(humanist tradition)의 원천 중 하나이다. 이 둘의 구분은 플라톤이 《정체》에서 제시한 '선분의 비유'(509d~511e)에 근거하여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 참된 앎은 의견(doxa)이 아닌 최상위에 있는 사유(noesis)이고 철학자는 그것을 추구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들에게는 의견에서 시작하여 합의에 이르는 것이 합당한 탐구활동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주장에 따르는 철학자는 고독한 진리 탐구자이나 이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따르는 철학자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의견에 귀기울이는 사람이다." "이소크라테스에 따르면 현명한 사람의 궁극적 관심사는 인간사이다. 인간의 일이 이소크라테스의 관심사이고, 소크라테스에 관한 크세노폰의 기록들도 소크라테스가 인간사에 관하여 관심을 가졌던 일들을 집중적으로 담고 있다."(173-5)


4장 체제의 정당성을 묻는 '이념 혁명'_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론》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고소한 이들의 행동에서 치명적인 결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이러한 사람으로 규정한다. 고발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에 진실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모든 잘못된 행동은 바로 이 수치심 결여에서 나온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다. 〈여러분께서는 저한테서 모든 진실을 들으시게 될 것입니다〉(17b).  소크라테스가 자기 변론 첫머리에 내놓는 핵심은 이처럼 자신이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밝히려 하는 진실은 도덕이 포함된 진실이고, 이는 부끄러움과 관련된 것이다. 이 부끄러움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고발한 이들에게 강하게 반론할 때 취하는 주제이다. 부끄러움은 좋은 것에 대한 보편적 욕구와 앎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힘이기도 하다. 공명심이나 명예욕에서 생겨나는 굴욕감과는 다른 것이다. 자신을 고발한 이들에 대한 규정 두 가지, 즉 거짓말을 한다는 것과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을 잘 기억해 두자."(74-5)


"앎에 대해서는 세 가지 태도가 가능하다. 하나는 전적으로 무지한 것이다. 이는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어디까지를 알고 있고 어디부터는 무지한지를 아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무지의 지이다. 마지막은 뭔가 아는 것이 있기는 한데,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상태이다. 소크라테스는 두번째 경우를 선택하겠다고 한 것이다. 무지의 무지가 최악이다. 차라리 전적으로 무지한 것이 낫다. (무지의 무지는 오만함이다. 무지를 낯설게 느끼지 않고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시인과 정치가와 장인들을 만나러 다녔는데 이 사람들은 무지의 무지 상태에 있다. 소크라테스가 〈인간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자, 지혜를 사랑하는 자, 무지를 아는 자,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자와 대립하는 자, 인간을 넘어서는 자가 아닌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최상의 상태에 있는 자임을 의미할 것이다."(81-2)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 아테나이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면서 우리는 그들 중 일부가 재물에 대한 탐욕에 열광하였음을 알았다. 그들은 그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였으며, 그들의 민주 정체는 그것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했었다. 소크라테스의 지적은 그저 청렴하고 고고한 도덕주의자의 상투적인 지탄이 아니다. 자신이 눈으로 목격한 사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다. 그가 일부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촉구한 것은 혼을 돌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질문을 하고 캐묻고 심문〉(29e)한다. 이것이 그가 행하는 신에 대한 봉사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신의 명령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당대의 사람들을 겪으면서 알게 된 것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가 보기에 아테나이 사람들 중 일부는 〈혼이 최대한 훌륭해지도록 하는 데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도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었다. 이것을 일깨우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결심했던 것이다."(91-2)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영혼을 돌보라고 깨우치는 일을 '개인적으로 한다'고 말한다." "올바름을 늘 말할 수 있으려면 특정 당파에 속해 있어서는 안 된다. 당파의 이익에 복무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반정치, 정치 혐오가 아니라 불편부당한 진리의 입장을 취하기 위해서이다." "아테나이는 전쟁의 격변 속에서 그리고 패배의 혼란 속에서 정치 체제가 계속 바뀌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정파에 가담하는지는 올바름의 기준이 아니었다. 특정 정파에 가담하는 것은 공인의 입장에서 그 정파에 동조하는 것이어서, 그 정파가 올바르지 못한 것을 주장할 때에도 반대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사인의 입장을 고집한 것은 공인으로서의 법적 책임보다 더 근본적인 부끄러움을 짊어지기 위해서였다. 그는 정치를 혐오한 것도 아니요, 민주정도 참주정도 찬성하거나 반대한 것이 아니라 올바름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인 입장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92-6)


"아테나이 사람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 혁명과 정치 혁명의 난관을 이겨 내고 마침내 민주 정체를 성취하였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시민으로 만들어 주었고 시민들은 폴리스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아테나이 시민들의 삶은 '쾌락이라는 참주'에게 굴복한 것이다. 민주 정체에서 산다고 해서 곧바로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의 생활양식이 올바름을 지향해야만 '더 많은 이의 더 나은 삶'이라고 하는 민주 정체의 탁월함이 참으로 실현될 것이다. 달리 말해서 민주 정체가 그저 하나의 정치적 의사결정 방식이 아닌, 만민의 평등과 행복이라는 민주주의 이념을 실현하는 매개로서 완성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은 바로 올바름인 것이다." "어떤 정체에 살고 있는지보다 훨씬 더, 아니 다른 차원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올바름이다. 이 올바름에 대한 철저한 촉구 때문에 미묘한 경계인이었던 소크라테스는 체제 정당성에 대한 급진적 이념 혁명가가 된다."(101-2)


5장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정치적 지향_플라톤 《메넥세노스》


▶ 나라 체제는 인간들의 생활양식


"나라 체제, 즉 어떤 정치 체제(politeia)에서 사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양식(trophe)이 규정된다. 정치 체제는 생활양식을 조건 지우고 생활양식은 정치 체제를 조건 지운다. 서로 스며들어서 서로를 적신다. 그런데 여기에는 딜레마가 있다. 나라 체제가 올바르면 사람들의 생활양식도 올바르다. 나라 체제가 올바르지 못하면 사람들의 생활양식도 올바르지 못하므로 사람들을 올바르게 하려면 나라를 올바르게 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올바르지 못하면 나라 체제를 올바르게 할 방도가 없다. 그래서 악순환이 계속된다. 사람들이 악해져 있으니 체제를 잘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첫 단추를 어떻게 끼우느냐가 중요하다. 이러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플라톤은 정치 체제가 생활양식을 만들어 내고, 그보다는 미약하지만 생활양식도 정치 체제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므로 《정체》에서는─나라와 개인의 올바름이 반드시 상응하지는 않지만─한 나라의 올바름을 먼저 따진 후 한 사람의 올바름을 따지는 것이다. 더 큰 것이기에 따지기 쉽기도 하지만, 나라가 올바르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도덕주의적 처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주의 처방은 그저 사람이 올바르면 된다는 처방이다. 시민들의 생활양식이 지혜롭고 사려 깊다면 그러한 것이 정치 체제의 조건이 될 수도 있다." "《메넥세노스》에서 제시된 연설은 생활양식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것과 정치 체제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것을 구별해서 보여 줌과 동시에 두 영역의 미묘한 경계선도 보여 준다. 이 경계선, 즉 사인이 공적인 일에 개입할 수 있는 최대의 범위가 역사다."(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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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상의 역사 - 마키아벨리에서 롤스까지
사카모토 다쓰야 지음, 최연희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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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사회사상이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사회(society)'의 의미는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세계 각지에서 면면히 구축되어온 인간의 사회 일반을 뜻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회'는 실질적으로는 근대사회, 특히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서 시작되는 유럽 사회와 그 연장선상에서 성립된 북미 대륙 사회를 가리킨다. 즉, 거기에는 같은 유럽이라 해도 고대·중세 사회는 포함되지 않으며 같은 근대라 해도 유럽과 북미가 아닌 방대한 영역들도 포함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의 '사회'는 첫째로 '법의 지배'를 원리로 하는 '합리적 국가'를 가지는 사회를 말하며, 둘째로는 '시장'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말한다. 이와 같은 의미의 '사회'는 인류역사상 근대 이후의 유럽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 책에서 펼쳐질 사회사상의 역사는 근대국가와 시장경제의 관계를 원리적으로 고찰한 사상의 역사이며, 각 시대에 각 지역에 살았던 사상가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출현한 국가 및 시장에 관한 문제들과 씨름한 역사이다."(12-3)


"이 책에서는 사상가들의 사상이 주로 두 가지 요인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본다. 첫째는 사상가들이 살았던 '시대의 문맥'이며 둘째는 각 사상가가 과거로부터 계승한 '사상의 문맥'이다." "각 시대의 사회사상의 단면을 살펴보면, 같은 시대의 문맥 내부에서 사고하면서도 다른 사상 전통에 뿌리내린 이질적 사회사상의 경우가 있고, 다른 시대에 살며 전혀 다른 문제와 씨름한 듯 보이지만 같은 사상 전통에 뿌리내린 동질적 사회사상의 경우도 있다. 전자의 예로서는 18세기 유럽에 살며 문명사회의 위기라 일컬어진 동질의 문제와 씨름한 스미스와 루소, 19세기 유럽에 살며 자본주의의 위기와 사회주의의 발흥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 밀과 마르크스의 경우가 전형적이다. 후자의 예로서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혹은 이성주의라는 같은 사상 전통 속에 있으면서도 18세기 유럽과 20세기 영국 및 미국이라는 다른 세대와 사회의 문맥 속에서 사고했던 흄과 하이에크, 칸트와 롤스의 조합을 들 수 있을 것이다."(21-2)


"이 책은 근대 이후 사회사상의 전개 과정을 '자유'와 '공공'이라는 두 개념의 관계를 통해 추적한다. 그것은 근대국가와 시장경제의 관련을 둘러싼 사상가들의 사색의 궤적을 탐구하는 작업의 최종 목적이기도 하다. … 근대 사회사상 속에서도 '사私'의 입장을 관철시킨 듯한 사상가의 계열(홉스, 스미스, 벤담 등)과 '공公'의 사상 계열(루소, 헤겔, 마르크스 등)은 언뜻 보아도 확연히 구별된다. 그리고 벌린의 『자유론』에 나오는 '자유의 두 개념'의 구별에 관한 유명한 논의(위의 두 계열에 대응시켜 말하면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구별)는 거의 이 구별에 대응한다. 그러나 벌린 자신이 이 구별의 엄밀한 적용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듯이 사회사상사에서 '사'의 사상가와 '공'의 사상가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근대 사회사상의 전체를 되짚는 시도이며, 오늘날까지 '사'의 사상가로 여겨져온 이들에게 '공'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확인하려는 시도이다."(26-9)


제1장 마키아벨리의 사회사상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농업 생산력 증가와 원격지 무역의 출현, 지대의 금납화로 농노의 신분전환 촉진(자치도시의 시민, 독립 자영농), 영주권력의 몰락과 국왕 권력의 강화, '단일한 영역을 단일한 정치권력이 지배'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선구적 형태들 등장

2. 사상의 문맥 : 르네상스의 전성기로서, '한 국가를 세울 수 있다'는 근대국가 사상 출현, 새로운 학문 기관인 '대학'에서 인문주의 교양교육 실시, 그리스·로마 고전 연구를 바탕으로 당대의 정치·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정치가와 관료를 양성하는 기반 구축


"마키아벨리는 키케로의 사고방식을 계승해 자유로운 시민이 공통의 룰(법)에 기초해서 서로 결합해 공동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공화제에 의한 '법의 지배'라고 생각했다. '법의 지배'는 군주제(일인에 의한 지배)로도 귀족제(소수자에 의한 지배)·민주제(다수자에 의한 지배)로도 실현될 수 있지만, 군주제는 개인의 재능이나 이해관계에 좌우되기 때문에 무엇보다 공화정체(귀족제·민주제)에서야 진정한 '법의 지배'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그 기본적 견해였다. 그의 과제는 이 고전적 공화주의 사상을 근대사회의 현실(시장경제와 근대국가의 출현)에 들어맞도록 조정하는 것이었다."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의 공통된 주제가 바로 자유로운 국가의 조건으로서의 '법의 지배' 실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군주론』은 '법의 지배'를 주체적으로 담당하는 정치 지도자의 '덕(비르투)'을 그린 인간론이며, 『로마사 논고』는 '법의 지배'를 객관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기구론·제도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45-6)


#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법의 지배'는 훗날 로크나 루소의 그것과 같은 정밀한 이론이 아니라 위정자가 인민을 통치·지배하는 기술이라는 소박한 성격을 지닌다. 


"『로마사 논고』에서 다루는 '법의 지배'를 원리로 하는 공화국에서도 탁월한 지도자의 '덕'은 불가결하며 지도자는 법률과 제도의 형식적 해석과 운용에 빠지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적절한 판단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공화국을 떠받치는 것은 탁월한 지도자의 덕만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국민 대중의 덕 역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리비우스를 비롯한 〈모든 역사가들〉의 민중관을 비판하고 〈가령 법률을 지킬 의무가 있는 군주와 법률에 구속되는 인민을 비교해보면 군주보다 오히려 인민에게서 보다 많은 덕(비르투)을 찾아볼 수 있다〉(제1권 58장)고 말한다. 그는 민중을 이성을 결여한 동물적 욕망에 휘둘리는 존재로 보는 전통적 우민관을 거부하고 민중을 군주 못지않게 '법의 지배'에 복종할 수 있는 존재로서 새로이 파악한다. 이것이야말로 공화국에서의 국민의 '덕'이며, 현명한 지도자의 덕은 국민의 덕과 유기적으로 연결됨으로써 그 나라의 '법의 지배'를 확고하게 한다."(51)


"마키아벨리의 공화국 구상은 그 내부에 중대한 균열을 배태하고 있었다. 그것은 첫째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근대적 개인이라는 인간상과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최우선시하는 정치가·국민의 '덕'의 모순이며, 둘째로는 그러한 '덕'과 당시 출현중이던 시장경제의 모순이었다." "그가 이러한 모순과 대립을 자각하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그려낸 자기 이익을 대담하게 추구하는 인간은 군주든 일반 국민이든 사치나 부의 향수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적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긍정하는 자기 이익의 추구는, 그가 공화국의 조건으로서 '청빈'을 옹호한 것이 상징하듯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공공'의 선(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적 인간에 의한 권력과 명예의 추구였다. 따라서 그는 중세 사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고 있던 근대적 인간의 모습을, 권력과 명예의 추구라는 목적을 위해 합리적 수단을 냉철히 계산하여 추구하는 정치 지도자(군주)를 모델로 삼아 정식화했던 것이다."(55-6)


제2장 종교개혁의 사회사상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종교개혁은 유대교·그리스도교적 고대 세계로의 회귀를 통해 봉건사회의 지배 구조를 타파하려는 운동으로 귀결, 평범한 농민, 상인, 직인 같은 '직업인'의 광범위한 운동에 불을 지펴 르네상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회학적 형성력'을 가짐

2. 사상의 문맥 : 절대왕정 확립이 영국보다도 뒤늦은 유럽 대륙에서 모어의 유토피어보다 훨씬 뒤처진 사회적 현실을 마주하여, 성서의 학문적 연구 성과를 대담하게도 로마교회에 대한 정치적 비판에 직결시킴으로써, 인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사상을 전개


"루터는 성직자의 특권과 권위를 부정하고 신앙의 자유에 기반한 만인평등 사상을 내세웠다. 이때 루터의 자유는 무엇보다도 내면의 자유이며 그것은 외면적 세계에서의 부자유와 일체를 이룬다. 외면적 부자유는 첫째로 물리법칙에 지배되는 자연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부자유를 의미하며 둘째로는 현실 사회의 부자유를 의미하므로 루터의 사상에는 전통적 사회질서를 바꿀 수 없다고 보는 정치적 보수주의의 경향이 불가피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루터는 신앙에 의해 자유로워진 영혼은 곧장 육체를 부린 사회적 실천으로서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식이나 근행(勤行) 등과 함께 세속적 직업의 실천인 '노동'을 중시한다. 여기서의 '노동'은 생활의 양식을 얻기 위한 활동이 아니며 신에게 의로움으로 여겨지기(구원받기) 위한 활동도 아니다. 사람은 이미 신앙에 의해 의로움을 인정받고 있으므로 그가 종교적 의의를 인정하는 노동은 민중이 스스로의 신앙을 표현하는 활동으로서의 그것이다."(70-1)


"칼뱅 이전의 개혁자들은 세속의 정치 질서에 적극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노력은 로마교회('보이는 교회') 비판과 진정한 그리스도교회('보이지 않는 교회')의 확립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 결과 루터의 경우에는 현존하는 정치 질서에 대한 보수적 태도가 명확히 드러났다. 이와 달리 세속의 국가나 정치기구가 종교개혁 수단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고 보았던 칼뱅의 경우에는 종교개혁의 이념에 적합한 국가나 교회의 제도 설계가 주된 사상 과제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신의 의지와는 상반되는 현실의 정치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하는 것(혁명)의 정당화론을 포함해 전제 지배에 대한 저항권과 혁명권 사상의 가장 중요한 사상적 원천이 된다. 프랑스의 '폭군방벌론자(暴君放伐論者, 모나르코마키)'나 스코틀랜드의 인문주의자 조지 부캐넌을 거쳐 잉글랜드의 존 로크가 쓴 『통치론』(1690)으로 흘러드는 정치적 급진주의의 주요한 원천은 칼뱅주의 정치사상이었다."(76)


"마키아벨리가 개인의 자유와 공화국의 자유를 '덕'이라는 정치적 공공성의 개념으로 결합시키려 했던 것과 달리 루터와 칼뱅은 부패한 국가나 교회의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신의 '은총'과 구원의 '확신'이라는 고독한 내면세계로의 일시적 퇴행을 우선 요구한다. 이것은 신의 절대성과의 관계에서 개인의 정신적 자유를 확립하는 방법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귀결로서 '직업'이나 '영리'가 새로운 사회적 의의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칼뱅의 비인간적인 이웃 사랑─'예정설'을 받아들인 신자가 구원의 불안에서 오는 고독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영리 활동에 진력하는 가운데, 고객이나 동업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베푸는 사랑─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굴절된 사회화의 논리이며, 17~18세기 후대의 도덕적 공공성과는 동떨어진 세계이다. 바꿔 말하면 종교적으로 자립하여 가톨릭 지배의 속박에서 해방된 개인들을 다시금 현세적 사회의 결속으로 재결합시키는 데에 종교개혁 이후 사회사상의 과제가 있었다."(77-8)


제3장 고전적 '사회계약' 사상의 전개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30년전쟁 이후 종교가 아니라 순전히 정치적 원리에 입각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주권국가들의 등장, 경제적 권익이 국익의 중심이 되면서 '세력균형' 원칙에 의거하여 가톨릭 국가와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의 합종연횡이 다수 발생

2. 사상의 문맥 : '과학혁명'의 영향 아래, 베이컨은 반복 '실험'과 '일반 명제' 수립을 되풀이하는 '경험'적 학문론을, 데카르트는 감각의 불확실성을 강조하며 '이성'적인 학문론을 주창. 그로티우스는 자연법에 기초한 사회계약설의 선구적인 모델 제시


"홉스와 로크가 제기한 사회계약설의 공통 과제는 현실의 사회질서를 일단 논리적으로 해체한 다음 그것이 역사의 특정 단계에 출현한 필연성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류 사회의 기원을 역사적 혹은 인류학적 의미에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사회와 정부(국가)의 정통성을 원리적으로 되묻는 작업을 의미했다. 이렇게 보면 '사회계약'의 논리에는 현존 정치체제의 권위와 권력을 논리적으로 해체해 그것의 성립 근거와 정통성을 되묻는 비판적·혁명적 측면과, 그렇게 재구성된 현존 질서를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보수적 측면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극적 요소가 '사회계약'의 논리에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은 역사상 출현한 '사회계약' 사상의 성격과 역할을 좌우하기도 했다. 홉스가 절대왕정의 지지자로 여겨져 고단한 인생을 보냈던 것과 대조적으로 로크가 명예혁명 체제의 자유의 상징으로서 행복한 인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사회계약'의 논리가 수행한 대조적인 역할 때문이었다."(96)


"홉스가 보기에 전쟁상태를 벗어나 국가(commonwealth)를 세울 수 있는 원동력은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죽음의 공포'라는 정념이다. 이 경우에 국가 주권은 절대적인 것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주권을 수립하는 개인들의 의지가 주권자의 의지와 동일하다는 주권 수립의 논리 자체에 국가 주권의 절대성의 근거가 있다. 사람이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에 반대하기가 불가능한 이상, 그런 무수한 의지가 떠받치는 주권자의 권위와 권력은 절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반면 로크의 '사회계약'은 ①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정치사회 수립을 서로 '동의'하는 '결합 계약'과 ② 정치형태(정체)를 확정하고 특정한 개인 혹은 단체에 개인들의 자연권을 '신탁(trust)'하는 '지배 복종 계약'이라는 두 단계로 나뉜다. 홉스에게 주권자는 사회계약의 주체도 당사자도 아니었지만, 로크의 경우 자연권을 신탁받은 위정자는 계약의 한쪽 당사자로서 국민에게 책임을 지며, 신탁 위반이 있으면 국민에 의해 비판·고발되는 관계에 있다."(100, 107)


"이러한 차이의 배경에는 두 사람이 전제로 하는 사회상의 큰 차이가 있었다. 사유재산과 시장경제가 발달한 문명사회를 선취한 로크의 자연 상태와 영국의 피비린내나는 내전이나 아메리카 신대륙의 미개사회와 오버랩이 된 홉스의 자연 상태는 언뜻 보아 비슷하지만 다른 것이었다. 홉스는 경제 질서를 정치 질서(절대 주권)의 확립을 통해서만 생각할 수 있었지만, 로크는 경제 질서라는 기반 위에서 정치 질서(자유로운 정부)의 형성·확립을 전망했다. 게다가 로크의 경우에 정치와 경제라는 두 질서는 '신의 법'으로서의 '자연법' 논리에 의해 관철된 것이었다. 자연법이 없으면 자연 상태에서의 평화로운 생산 활동은 없으며 이중의 사회계약도, 권력자의 신탁 위반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나 혁명이라는 정치 행동도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로크 사상은 종교개혁 사상의 전통 속에 있었다. 로크의 자연법은 기계적인 에고이즘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보존과 양립하는 한에서 각자의 자기보존을 명하는 것이었다."(110-1)


제4장 계몽사상과 문명사회론의 전개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영국의 명예혁명(1688)에서 프랑스혁명(1789)까지의 '계몽의 시기', 당대 유럽 국가들은 정치적 안정과 착실한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좀더 진전된 근대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 그 목표는 바로 '문명사회(civil society)'의 실현

2. 사상의 문맥 : 계몽은 절대왕정하의 프랑스에서는 급진적 정치사상으로, 입헌군주제하의 영국에서는 기존 체제의 틀 안에서 자유와 부를 키워드로 한 점진적 개혁의 입장으로, 독일에서는 칸트의 철학이나 레싱의 문학 등에서 관념적·이념적으로 표현


"17세기의 홉스와 로크의 '사회계약' 사상이 그 시대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평화로운 질서를 회복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은 '정치사회(civil society)'의 이론으로서 전개되었다면,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을 기조로 하는 18세기 사회사상은 기본적으로 '문명사회(civilized society)'의 이론으로서 전개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계몽사상은 '종교'와 '정치'에서의 근본적 대립(가톨릭 대 프로테스탄드, 공화제 대 군주제)을 일단 보류해두고 주된 관심을 '도덕'과 '경제'로 옮겨갔다." "종교·정치에서 도덕·경제로 중심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선악과 옳고 그름의 규준을 묻는 도덕상의 기본 문제나 국부의 본질과 원인을 묻는 경제학의 문제가 정치체제나 종교 신조의 차이를 뛰어넘은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 문제이자 '문명사회'의 기본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계몽사상가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한 주된 문제는 정치와 종교의 질서에서 상대적으로 독립한 도덕과 경제 질서의 해명이었다."(120)


"정치사회론에서 문명사회론으로 문제가 바뀐 것에 상응하여 인간 본성론에서도 17세기로부터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특히 영국에서 현저한 경향을 보여, 사회사상의 논의의 중심이 '이성(reason)'에서 '정념(passion)' 혹은 '감정(sentiment)'으로 이동했다." "17세기의 이성주의에서 18세기의 정념(감정)주의로의 전환이라는 계몽사상의 큰 흐름은 영국의 섀프츠베리와 네덜란드 출신의 맨더빌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반사회적 정념을 이성이 통제한다는 전통적 도식을 비판하고 '정념'이나 '감정' 자체에서 인간의 사회적 결합의 원리를 발견하려 했다." "두사람은 상이한 사상 계보를 지니면서도 홉스와 로크에게 마지막까지 찾아볼 수 있었던, 이기심의 반사회성이라는 관점에 기초한 사회질서 이론을 넘어 이기적 정념 자체가 사회화됨으로써 문명사회의 거대한 시스템이 성립되는 메커니즘을 탐구했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이 새로운 사상의 전개는 18세기 문명사회론의 기초가 된다."(121-3)


"스코틀랜드 계몽사상가들에게 자유는 사회계약 사상이 자연 상태의 가설을 통해 이상화한 것과 같은 원리적·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문명사회의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장하는 사회적·경제적 자유였다. 이러한 현실적 자유를 정당화하려고 한 선구가 맨더빌의 '사악은 공익'이라는 사상이었다." "맨더빌 본인은 개인들의 이기적 정념을 국부 증대와 공공성 확대로 절묘하게 이끄는 정치가나 입법가의 존재를 대전제로 하고 있었으며, 그는 단순한 자유방임론자도 자생적 질서론자도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가·입법자의 영지와 판단력에 이끌리면서도 일반 대중의 이기적 정념을 추진력으로 하는, 말하자면 시장적 공공성의 이론이었으며 18세기 문명사회 사상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맨더빌 이후 계몽사상의 전개 과정은 맨더빌의 역설의 핵심을 계승하면서 그 역설성을 갖가지 방법으로 극복하고 개인의 자유를 정치적·경제적 공공성으로 매개하려는 다양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137-8)


제5장 루소의 문명비판과 인민주권론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미국의 독립선언(1776)과 프랑스혁명(1789)은 인류의 야만(빈곤)에서 문명(부유함)으로의 진보라는 계몽사상의 역사적 한계─당대의 문명사회가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의 불평등을 본질로 하는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라는 사실─입증

2. 사상의 문맥 : 루소는 문명사회의 불평등을 '자연법'에 의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부不정의로 단정, 자연법학이 현실의 국가·사회의 양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현실의 질서와 타협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잘못을 범한다고 지적


"로크와 같은 자연법학자에게 사유재산을 둘러싼 정의·부정의의 관념은 신의 명령으로서의 자연법에 근거하는 것이며 인류의 이성에 선천적으로 각인된 것이었다. '생명·자유·재산'이 일체적인 '프로피티(property)'로 여겨졌으며, 그 정당한 기원은 노동에 의한 획득이었다. 이 원리에 근거해 로크의 자연 상태에서는 사유재산과 계약에 기초한 평화로운 질서가 확립되며, 사회적 분업(시장 사회)도 발달한다. 로크의 경우에 정부의 출현이 불가피했던 것은 화폐의 도입에 의한 빈부 격차의 발생 때문이며, 사유재산의 성립과 정부의 출현은 별개의 사건이었다. 이와 달리 루소의 경우에는 정치권력(국가)이나 경제권력(재산) 모두 농업 생산과 함께 나타나는 강자에 의한 약자 지배의 산물이며, '자연법'과도 '정의'와도 무관한 것이었다. 최초의 국가는 '법의 지배'를 따르는 군주제 국가이며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고 피치자의 '동의'에 의한 지배를 가장하지만, 이는 '강제된 동의'에 불과하다."(149)


"그런데 루소에 따르면 이 단계는 '동의'의 개관을 가장하고 있는 만큼 차라리 나은 것이었다. 문명사회의 좀더 진전된 발달은 사회 전체의 부를 크게 키우는 한편 그 분배를 더욱 불평등하게 하여, 외견상 부와 번영을 구가하는 문명사회의 현실은 공공연한 전제 국가가 된다. 이제까지의 정치적 지배·피지배라는 나름대로 합리적이었던 정치적 관계는 마침내 전제적 폭력에 의한 주인·노예 관계로 바뀌며,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온 선이나 정의의 관념이 완전히 소멸하여 사회는 사실상의 무법 지대가 된다. 바로 이것이 프랑스를 비롯한 동시대 유럽의 현실이었다." "루소는 이렇게 해서 사회적 불평등이 인간의 자연(본성)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사의 어느 발전 단계에서 비롯된 역사적인 것임을 입증하려고 했다. 그는 이런 인류 진보의 역사를 단순히 부정하지 않고 새로운 역사적 창조 행위로서의 '사회계약'에 의한 국가와 사회의 재건을 꾀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사회계약론』에서 다룬 근본 문제였다."(149-50)


# 루소의 '일반의지'

1. 일반의지는 인간의 '영혼'에 해당하며 국가 '주권'의 본질이다. 일반의지 혹은 주권에 구체적 형태를 부여한 것이 바로 '입법권'이다.

2. 일반의지는 인민 전체의 의지이며 인민 전체의 이익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개별 의지의 집합체인 '전체의지'와 구별된다.

3. 일반의지는 '분할 불가능'하며 '대표 불가능'하다. '인민' 이외의 집단─가령, 입헌정치 시스템─이 '인민'의 의지를 대행할 수는 없다.


"홉스든 로크든 인간 본성이 사회계약을 전후로 근본적 변화를 겪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이론에서 변화를 겪는 것은 개인의 외적 환경, 즉 그들이 사는 사회의 상태와 제도이며, 그들은 이러한 환경의 변화에 의해 사람들이 본래의 인간 본성을 좀더 평화로운 정치사회 속에서 실현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달리 루소는 '사회 계약'에 의한 정치사회의 확립이 개인들의 외적 환경을 바꿔놓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상으로 그들의 성격과 감정을 변화시키며, 그 결과 그들의 생활양식마저도 근본적으로 바꿔놓는다고 생각했다." "자연법학자들의 논의에서는 정치사회 수립의 최대 목적은 생명의 보존(홉스)이며 사유재산권의 확립(로크)이었다. 그러나 루소의 새로운 정치사회에서는 개인들의 신체와 재산은 보호되지만, 그 보호는 개인들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한 보호가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 실현의 일환일 뿐이다. 루소의 경우에는 개인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이익의 관계가 말 그대로 '역전'되는 것이다."(158)


제6장 스미스에게서의 경제학의 성립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영국의 중상주의적 경제체제─북미와 인도를 축으로 하는 식민지들을 값싼 원재료 공급지이자 자국의 상품을 판매할 거대한 시장으로 삼는─가 안고 있는 약점, 곧 문명사회의 번영이 식민지 체제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모순이 점차 부상

2. 사상의 문맥 : 스미스의 도덕철학은 ① 자연신학(자료 소실), ② 윤리학, ③ 자연법학으로 구성되며, 이 중 윤리학이 『도덕감정론』의 모체가 되고, 자연법학에서 '정의(justice)' 부문이 아니라 '편의(expediency)' 부문이 발전해 『국부론』의 토대를 형성


"스미스가 보기에 맨더빌의 (사악은 공익이라는) '역설'과 루소의 (자연으로부터의) '타락' 비판은 언뜻 정반대로 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개인은 공공이나 타인의 이익을 그것 자체를 위해서 추구하지 않는다. 맨더빌의 '허영심'도 루소의 '사교성'도 문명사회의 초기 단계에 간사한 정치가나 입법자에 의해 도입된 인위적 정념이며 인간 본래의 자연적 원리가 아니라고 본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같은 암묵적 전제에 서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스미스는 이의를 제기한다. 스미스의 입장은 인간 본래의 자연적 정념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것이며, 그 자체에서 문명사회의 진정한 발전을 가져올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스미스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인간 본성 안에 〈사회를 이루고 타인과 결합하게끔〉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어떤 원리가 존재함을 입증하는 것이며, 자연의 정념에 의한 문명사회 발전의 메커니즘을 '역설'도 '타락'도 아닌 것으로서 설명하는 것이었다."(173-4)


"『도덕감정론』에는 인간 본성(인간의 자연)에 관한 스미스의 기본적 아이디어 세 가지가 제시되어 있다. 첫째로, 인간은 홉스나 맨더빌이 상정한 것처럼 이기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둘째, 그 증거로 인간의 본성에는 이기심과 함께 '동류 감정'이 존재하며 이는 '공감(sympathy)'과 같은 것이다. 셋째, '공감'은 루소의 '연민'과는 다르며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타인의 기쁨이나 쾌락에 대해서도 작용한다. 이는 명백히 스미스가 '서간'에서 맨더빌과 루소에 대해 행한 양면 비판의 귀결을 보여준다. 스미스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신의 쾌락이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 한에서 홉스나 맨더빌은 옳았지만, 인간의 동기를 전부 이기적인 것으로 환원하려고 한 것은 그들이 범한 오류였다." "틀림없이 인간 본성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이기심이지만, '공감'에는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행동을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한계 내로 억제하는 힘이 있다고 스미스는 생각했다."(178)


"스미스는 『국부론』 첫머리에서 '분업'의 발전이 바로 국부 증대의 원동력이라고 선언했다. 그러한 문명사회의 밝은 전망을 보여준 스미스가 제5편에서는 분업의 원리를 무제한적으로 추구하면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는 〈인간으로서 될 수 있는 한 바보가 되며 무지해진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인간이 가령 공장 노동자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를 다했다 해도 시민으로서의 적절한 판단력을 행사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으며, 특히 스미스가 우려했듯이 〈자신이 속한 나라의 중대하고 광범위한 이해〉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된다. 스미스가 무엇보다도 우려한 것은 그들이 시민으로서의 기개나 책임감을 상실하여 국방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스미스가 주장한 공교육 사업은 지적·기능적 측면에서의 건전한 서민 육성뿐 아니라 문명사회의 개인을 국가가 체현하는 '공공성(나라의 안전과 독립)'에 붙들어놓는, 최후의 생명선으로서의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197-8)


# 스미스가 생각한 정부의 정당한 역할은 ① 국방, ② 사법, ③ 공공사업(시장친화적인 사회기반시설 조성과 시장친화적이지 않은 공교육 사업)이다.


제7장 '철학적 급진주의'의 사회사상: 보수에서 개혁으로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프랑스혁명의 공화주의 이념이 공포정치로 변질되자 영국의 급진주의자들은 이를 반면교사 삼아 입헌군주제의 틀 안에서 선거권 확대를 통한 의회 개혁 추진, 한편 산업혁명의 급속한 진전으로 토지·노동·자본의 조화라는 자유경쟁 원리 붕괴

2. 사상의 문맥 : 보수주의(버크, 맬서스)는 산업혁명이 야기하는 변혁에 맞서 전통적인 정치와 사회 제도를 수호해야 한다는 입장, 개혁주의(벤담, 제임스 밀, 리카도)는 전통 사회의 기본 구조가 크게 바뀌더라도 정치적 개혁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


"제레미 벤담, 제임스 밀, 데이비드 리카도 세 사람이 직면한 근본 문제는 영국의 구사회, 즉 1688년 이후 명예혁명 체제의 근본적 개혁이었다. 이 체제는 영국을 근대적 입헌군주제로 전환시킨 획기적 체제였지만, 이제는 균열을 드러내고 있었다." "스미스는 정부의 본래 역할을 재정의함과 동시에 중상주의 정책을 비판함으로써 명예혁명 체제의 현실에 근본적 비판을 가했지만 그 비판은 체제의 경제정책 비판에 머물 뿐, 과두제적이며 비민주적인 정치 구조 자체를 직접적으로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철학적 급진주의자들은 이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버크가 국왕이나 정부의 북미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며 '경제개혁'에 의한 정치의 쇄신을 외치면서도 의회 개혁 자체에는 반대한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달리 '철학적 급진주의'는 명예혁명 체제의 지배 구조를 민주화하고 선거권을 대폭 확대함으로써 국정의 중심에 좀더 광범위한 국민의 이해와 의견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218)


"그들은 자연법이나 자연권에 근거한 이론이 현실의 사회 개혁에는 무력하다고 생각했다. 벤담은 과거의 여러 사상이 표현은 제각각일지언정 하나같이 주관적인 권리 개념에 머물러, 어떤 권리를 객관적이고 '외적(external)인' 규준에 의해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런 주관적 이론으로는 산업혁명의 진전 속에서 현실로 나타난 불안정한 사회질서나 치안 악화에 적절하고 신속하게 대처할 수 없다. 특정 범죄나 사건이  재판에 처할 경우 관습법의 전통에 따라 재판관이나 배심원의 판단에 의해 판결이 내려지는 것이 통례인데, 그것은 결국 그들이 과거의 판례를 참고하여 주관적·감정적 판단을 내리는 것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기득 권익의 옹호로 시종할 뿐이다. 버크가 상찬한 관습법의 논리와 결별해, 관습법을 떠받치는 주관적 권리론과는 다른, 정치적 권리의 객관적이고 '외적'인 규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성과가 벤담과 제임스 밀의 공리주의 철학과 그에 기초한 입법론·정치론 및 교육론이었다."(220-1)


"개인이 스스로의 행동을 그 활동 범위와 책임 속에서 '최대 행복 원리'에 의해 자기 규제하는 결과로서 사회 전체의 최대 행복이 산출되는 법체계를 확립하는 것, 바로 이것이 벤담의 입법자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오늘날에도 공공사회 전체의 이익이 될 것이 분명한 대사업이나 개혁을 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얻어 추진하려는 경우에 '신의 의지'나 '이성의 법'을 들고나올 수 없다고 한다면, (국가권력에 의한 위로부터의 사회통제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벤담 등의 '최대 행복 원리' 이외에 최종적인 정치적 정당화의 근거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여전히 반성해야 할 것은 ① 현대사회의 '최대 다수' 중에서 암묵적으로 배제된 이가 있는지 여부, ② 정책 목표인 '최대 행복'의 실현은, 자유와 권리가 간과되기 십상인 소수자의 극심한 고통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지 여부이며, 무엇보다도 ③ 이들 문제에 대해 위정자·권력자의 행동이 최대한의 정보 공개에 의해 국민의 엄중한 감시하에 놓여 있는지 여부다."(235)


제8장 근대 자유주의의 비판과 계승: 후진국에서의 '자유'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대륙 국가들에서는 프랑스혁명의 정치 이념(자유·평등·사유재산)과 각국의 사회적·경제적 현실(봉건제의 잔존과 자본주의의 미발달)의 격차가 너무 컸기 때문에, 급진적인 개혁에 대한 열망과 근대화 자체에 대한 회의와 굴절된 비판이 등장

2. 사상의 문맥 : 이성적 법칙이 세계에 내재한다는 독단론과 경험적 인식은 불확실하다는 회의론을 모두 비판한 칸트, 자아(개인, 주체)와 세계(국가, 객체)의 통일을 설파한 피히테, 보편 이상에 대한 반동으로 비합리적 감정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의 등장


"헤겔에 따르면 근대 자연법이나 사회계약의 이론은 소유권과 계약, 이를 보호하는 국가의 확립을 이기적인 개인들의 동의를 통해 설명했다. 그것은 일정한 설명력을 갖지만, 한편으로는 왜 우리가 정의의 법을 준수해야 하는지, 그 도덕적 근거를 설명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즉, 칸트는 정부의 성립을 이기적인 개인들에 의한 '사회계약'으로 설명함과 동시에 도덕의 문제를 '정언명령'이라는 선험적 이성의 명령으로 설명하려고 했으나 헤겔은 이러한 편의적 해결에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헤겔 법철학의 진정한 과제가 드러난다. 그것은 근대사회에서의 법의 객관성과 도덕의 주관성의 분열, '정의'의 객관성과 '선'의 주관성의 분열이라는 근대사회의 근간과 관련된 모순을 사상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 답이 『법철학 강의』 제3부의 '인륜'론이다. 그것은 '가족' → '시민사회' → '국가'라는 세 단계로 구성되며, 인류 사회가 가족적 단계에서 국가적 단계로 발전하는 역사적 필연의 분석이다."(253-4)


"헤겔은 '가족'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아 정신적·물질적으로 독립한 개인을 단위로 하는) '시민사회'로의 발전을 루소와 같이, 본래 무구했던 인류가 사회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부패·타락하는 역사로 그리지 않는다. '시민사회'의 성립은 개인의 독립과 자유 획득의 프로세스인 한편, 사랑의 공동체로부터 자립한 개인은 그 온기나 애정 넘치는 관계를 잊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근거해 시민사회에서의 좀더 높은 통일, 자유로운 정신에 기초한 통일을 열망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민사회'의 역사적 내실은 자본주의이며, 그 본질은 만인이 만인을 스스로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부리는 '욕구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시민사회는 과잉 및 빈곤의 무대가 되며, 양자에 공통된 육체적·정신적 퇴폐의 광경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그는 시민사회의 현실에 〈격분한 나머지 루소 등 깊은 사고와 감정의 소유자들은 시민사회를 거부하고 다른 극단으로 치닫는다〉고 하면서 동시대의 낭만주의자를 비판한다."(254-5)


"헤겔의 국가는 ① 군주권, ② 통치(행정)권, ③ 입법권이라는 3층 구조를 이루는데, 주목해야 할 것은 '군주권'의 위치이다. 홉스, 로크, 루소 등 헤겔 이전의 대표적 정치 이론에서는 입법권과 통치(행정)권이 국가 제도상의 두 기둥으로 여겨졌으며, 군주의 존재는 두 권한을 인격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비해 헤겔은 군주권을 입법권과 통치(행정)권 위에 군림하는 독자적 권력으로서 파악해 국가의 의지를 체현하는 최고의 존재라고 규정했다. 물론 이때의 군주가 절대왕정 등의 전근대적 군주는 아니다." "헤겔의 '군주'는 〈자기 결정하는 의사(意思)〉이며 '자유의 이념'과 '법의 지배'의 인격화이다. 이렇듯 헤겔은 '자유의 이념'의 인격화로서의 근대적 군주가 인류사에 출현하는 필연성을 『역사철학 강의』에서 상세히 고찰하고 있다." "사람들의 자유로운 활동은 이성적인 군주제 국가의 지도에 의해서만 진정한 공공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헤겔이 최후에 도달한 세계사 인식의 입장이었다."(257-61)


제9장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산업혁명에 따른 1인당 국내총생산 증가와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의 공존, 대자본가층이 전세계로 진출하여 '자본의 문명화 작용'을 꾀하는 동시에, 반체제적 집단 역시 국경을 넘어 자본주의 타도와 사회주의 실현을 내걸고 상호 교류 확대

2. 사상의 문맥 : 생시몽은 조직된 과학자와 산업가의 이성적 관리에 기반한 이상적 산업사회 구상, 푸리에는 이기심과 이성이 아니라 정념과 협동에 기반한 농업 사회 구상, 오언은 환경결정론에 기반한 공동체 운동 구상(오늘날 협동조합 운동의 아버지)


"스미스 이래의 경제학은 가격 결정이나 자본축적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임무로 해왔을지언정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문제삼지는 않았다. 자본주의의 대전제는 사유재산 제도이며 지주, 자본가, 노동자라는 세 계급은 토지, 자본, 노동이라는 신성한 재산의 소유자로서 등장한다. 그들은 사유재산의 소유자로서 자유롭고 평등하며, 각기의 사유재산을 자신에게 최대의 이익이 되도록 시장에서 판매하여 그 성과를 신성한 사유재산으로서 획득한다. 자본주의는 사유재산으로 시작해 사유재산으로 끝나는 시스템이다. 루소처럼 사유재산 제도 자체를 의문시한 사상가도 있었지만, 경제학자들에게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자 현실로서, 그들의 경제학은 하나같이 이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자본가의 지배 아래서 노동자가 일을 하면 할수록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내재된 메커니즘이라는 인식을 마르크스는 뚜렷이 가지고 있었다. 이 현실을 그는 '노동 소외'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277-8)


# 자본주의가 낳는 소외의 형태

1.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 노동자가 만들어낸 생산물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의 재산이 된다.

2. 생산 활동으로부터의 소외 : 본래 자유로운 목적의식적 활동이어야 할 노동이 부자유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된다.

3. 유적 본질(존재)로부터의 소외 : 2의 결과로서 자유롭고 의식적인 인간의 '본래적 노동'의 본질이 부정된다.

4. 인간으로부터의 인간 소외 : 인류 동포로부터의 소외로서, 대표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인간의 '유적 본질(존재)로부터의 소외'를 자연발생적 분업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인 분업이 인간의 외부에서 강제력을 발휘하여 '소외'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소외'에 대한 논의에서 마르크스는 네 가지의 소외로부터 자유로운 본래적 노동의 모습으로서 두 개의 서로 다른 비전을 제시한다. 하나는 '자유롭고 의식적인 노동'이라는 노동관이고, 또하나는 '사회적 노동'이라는 노동관이다. 인간 노동의 이 두 측면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 『수고』에서 마르크스가 제시한 설명은 반드시 명확하지만은 않다. 인간의 노동이 본래는 '자유롭고 의식적'이라는 것을 마르크스는 다른 동물과의 비교를 통해 보여준다. 꿀벌이나 비버는 변변찮은 건설 노동자보다 훨씬 집을 잘 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본능에 따른 활동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인간의 노동은 본능이나 육체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이 행해지며 대상에 '미의 법칙'을 부여하는 것조차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 노동의 본래 모습은 첫째, 둘째, 셋째의 소외의 현상 형태 속에서 '소외'라는 부정적 형태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지만, 넷째의 소외 형태인 '타인으로부터의 소외'는 '사회적 노동'의 부정으로서 나타난다."(279-80)


"마르크스 사상의 원점에는 인간의 '자유'라는 이념이 존재하며, 마르크스 사상은 그 유토피아적 성격으로 인해 영속적인 생명력을 획득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본주의의 모순(노동력의 상품화에 의한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자본주의의 본질인 한 거기서 유래하는 여러 사회적·경제적 문제들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한에서 시장과 선거라는 한정된 경제활동, 정치활동 이외에 무언가 진정한 '자유인의 연합'이 있지 않을까 하는, 나아가 그것을 기반으로 자본주의의 지배와 착취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을 움직여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항축을 형성해온 것도 사실이며, 그것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그것이 항상 마르크스 사상의 계승이라는 스타일을 취하리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가 아무리 영속하고 마르크스 사상이 훗날의 사상가들에게 아무리 비판당해도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인 한 마르크스는 죽지 않는 사상가로 남을 것이다."(294-5)


제10장 J. S. 밀에게서의 문명사회론의 재건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제2차 선거법 개정(1867)으로 상층의 숙련 노동자들이 체제 내로 편입, 언론 자유의 신장과 초등교육 보급 등으로 국민의식의 동질화, 국민 여론의 획일화가 진행되면서 국민 다수의 의견이 정치의 동향을 결정하는 대중민주주의가 등장

2. 사상의 문맥 : '최대 대수의 최대 행복' 원리를 이해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깊이 바라게 되지는 않는다는 '철학적 급진주의' 비판, 사유재산을 부동의 사실로 보는 고전경제학은 일시적 유효성밖에 갖지 못한다는 비판, 여성인권(특히 참정권) 옹호


"밀과 토크빌은 동시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공통된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근대사회의 두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제도가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생활양식과 여론의 획일화·평준화, 나아가 그 최종적 귀결인 '다수의 전횡'이라는 문제였다. 토크빌은 유럽의 전통 사회와는 달리 시민 간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미국 사회 속에서 근대사회의 순수배양 과정을 목격하고 그 우월성과 함께 우려할 만한 문제 역시 일찌감치 지적했다. 밀은 그런 문제 제기에서 큰 시사를 얻어 토크빌적 분석을 통해 미국 사회와 공통된 문제를 낳고 있던 당시 영국 사회의 구조 변화를 고찰하게 된다." "그러한 밀의 사고법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붕괴론이나 유토피아적 공산주의론과도 달랐으며, 자본주의 문명이 필연적으로 초래할 '다수의 전횡'을 중심으로 한 구조적 위기를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 자체가 준비하는 새로운 정치적·경제적 가능성을 통해 극복하려는 것이었다."(312-3)


"인간이나 사회의 역사적 가변성을 경시하고 그 가변성이 가져오는 사회의 다양성이나 발전 가능성에서 눈길을 거두는 보수적 정신이야말로 유럽 문명사회의 새로운 개량과 변혁을 가로막고 있는 원흉이라고 밀은 생각했다. 〈여러 가지 분명한 증거를 무시하려 하는 현대 일반의 경향이야말로 큰 사회문제들을 합리적으로 다루려 하는 태도에 대한 주요한 방해물의 하나요, 인류의 개선에 대한 가장 큰 장애의 하나라는 사실〉(『자서전』)이야말로 그가 단순한 '역사주의'와는 구별되는, '역사적 방법'에 기초한 사회과학의 혁신을 통해 호소하고 대항하려 한 것이었다." "밀이 〈여러 가지 분명한 증거〉라고 생각했던 것 중에는 노동자나 여성의 참정권, 종속으로부터의 여성해방이라는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회 일반의 〈편견은 오직 철학에 의해서만 타파될 수 있으므로, 편견이 자기편에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는 한 편견을 이겨내고 전진하기는 요원〉하다는 것이 밀을 지탱한 신념이었다."(315-6)


"밀은 로크에서 벤담, 아버지 밀에 이르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문제 설정 자체가 그의 시대에는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밀의 시대, 즉 선거권이 국민의 다수에게로 확대된 시대에는 정치가가 겉으로는 국민 다수파의 대표자를 자처하는 한편, 그들이 다수파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소수파를 희생시킨다는, 과거와는 정반대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벤담이나 아버지 밀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리는 이러한 귀결을 적극적으로 추인하는 것으로도 여겨졌다. 다수파의 이해를 대표하는 정치권력의 존재는 소수자의 '고통'을 크게 웃도는 다수자의 '쾌락'을 실현함으로써 정당화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은 '소수 의견(minority)의 존중'과 '개성(individuality)의 존중'을 현대 '자유'론의 핵심으로서 설정한다." "강한 개성의 소유자는 동질화된 사회에서는 눈에 띄고 부각되어 배제된다. 바로 이것이 밀이 가장 우려하며 경고한 '다수의 전횡'이 끼치는 해악이었다."(326-7)


제11장 서구 문명의 위기와 베버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대량 소비 사회의 출현,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급증 등으로 노동자계급의 부르주아화 진행, 이는 제국주의와 내셔널리즘의 확산에 기여하는 한편, 반대 세력들 역시 사회개량주의 노선으로 선회하도록 자극(페이비언협회, 수정주의 논쟁)

2. 사상의 문맥 : 콩트는 자연과학의 방법을 사회과학에 응용한다는 의미에서 '실증주의' 사회학을 주창, 실증주의는 제국주의와 대중화시대의 주요 사회사상으로 자리매김,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사상가들은 실증주의의 지배에 맞서 각자의 사상 확립

※ 사회과학의 자연과학화는 '물리학화(수리적 방법 중시)'와 '생물학화(다윈의 진화론 중시)'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베버는 유럽의 합리화 과정을 '세계의 탈주술화'라 부르고 그 본질을 '주지주의적 합리화'로서 파악한다." "이는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우리의 삶의 조건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우리의 삶에 어떤 신비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힘이 작동할 까닭은 없다는 것, 오히려 모든 사물은─원칙적으로─예측을 통해 지배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있거나 또는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아무리 다양화되고 개인화되어도 그 가치나 이념은 그 사람에게는 절대이자 '신'이다.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신'을 섬기면서 각자의 목적을 추구하고 그 실현을 위해 희소한 경제재(화폐)나 정치재(권력)를 놓고 다툰다. 거기서는 필연적으로 '신들의 투쟁'이라는 아수라장이 출현하며 그 연장선상에서 전쟁이나 혁명이 발발한다. 당시의 실증주의적 과학이 자본주의적 경제 경쟁과 제국주의적 권력투쟁의 아수라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술학이라는 것을 베버는 인식하고 있었다."(352-3)


"베버에 따르면 과학(학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직접적으로 가르칠 수는 없지만 주어진 조건 아래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가르칠 수는 있다. 즉, 어떤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는 어떤 기술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지를 오직 과학만이 진정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가르쳐줄 수 있다." "개인 차원에서 무한히 다양하고 혼란스러운 여러 가치가 공존·경합하는 현대 세계는 제임스 밀의 '다신론'이나 보들레르의 『악의 꽃』의 세계이기도 하다. 제임스 밀이나 보들레르의 정신세계를 사는 사람들이 그럼에도 스스로의 가치를 믿고 학문에 종사하는 경우에 학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각자가 믿는 가치(신)의, 과학적 정합성에 기초한 실현을 돕는 것이며, 각자의 궁극적 가치와 그 실천적 선택이나 행동 사이에 모순이 있는지 여부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나아가 모순이 있는지 여부, 사람이 어떤 행위를 선택할 것인지 여부는 학문이나 과학이 책임질 수 없는 궁극의 개인적 선택의 문제이다."(352-4)


"러시아나 독일의 혁명주의자들은 타오르는 정열과 숭고한 목적('심정 윤리')에 휘둘려 정치운동으로 나아가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테러리즘에 호소하는 등 본래의 목적과는 모순되는 행동을 한다. 혁명 지도자에 의한 운동 참가자의 '영혼의 프롤레타리아화' 역시 불가피하다. 혁명가를 포함한 정치가는 이 모순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을 질 수 있는가('책임 윤리') 하는 것이 두 윤리 사이의 〈심연과 같이 깊은 차이〉이며 바로 그것이 베버의 최종적 문제였다." "불타는 정치 신념에서 출발하면서도 그 모든 행동에 대한 일체의 결과책임을 한몸에 떠안고 게다가 필요하다면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자기의 신념·심정에 따라 대담한 결단과 행동을 감행하는 인간이 바로 베버가 생각하는 이상적 정치가상이었다." "이러한 베버의 정치가론은 비단 직업적 정치가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의회민주주의라는 전형적인 관료제적 조직에 의해 성립된 근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로서 제시된 것이기도 하다."(360-1)


제12장 '전체주의' 비판의 사회사상: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케인스, 하이에크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두 차례 세계대전의 전간기(戰間期)로서, 러시아혁명(1917), 세계 대공황(1929), 나치 독일의 성립(1933)이 발생, 세가지 사건 모두 19세기에 계속 성장·발전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이자 그 질서의 불안정성을 반영한다는 공통점

2. 사상의 문맥 : 자본주의 비판과 옹호라는 양극단의 입장에 있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케인스, 하이에크를 한데 묶는 사상적 공통항은 '전체주의 비판', 이때의 전체주의는 히틀러의 나치즘과 무솔리니의 파시즘, 스탈린주의를 동일시하는 헐거운 개념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계몽의 변증법』을 관통하는 주제는 자본주의 문명은 부와 생산력에도 불구하고 왜 ('문화산업'과 '반유대주의'라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상태'에 빠졌는가 하는 문제이다." "'계몽'이 낳은 서구 문명의 궁극적 모습은 현대의 자본주의이다. 그것은 특히 '문화 산업'에서 집약된다. 거기서 목적과 방향을 잃은 '계몽'의 이성과 주체성은 '신화'의 '모방' 원리로 전락한다." "사람들은 미디어나 광고로 보급되는 유행에 따르기를 소비생활 속에서 강제당하며, 그 강제가 '강제'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워지므로 거기에 조금이라도 따르지 않는 이가 외려 '부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돌출된다." "반유대주의의 병리 역시 고도 대중 소비사회의 병리로서 파악해야 한다. 자본이 대중매체나 광고를 통해 만들어내는 획일적인 '자연'의 질서에 적합하지 않을뿐더러 그것에 대한 '모방'에 빠지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이 차별적인 낙인찍기의 대상이 되고 사회적 배제의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383-4)


"『계몽의 변증법』의 전체주의 비판이 '좌우의 전체주의' 문제를 자본주의 문명의 병리적 현상으로서 파악하고 이에 대해 유럽 문명의 원리(노동에 의한 자연의 억압과 소외) 자체에 대한 비판을 통해 답하려고 한 것이라면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전체주의 비판은 눈앞에 펼쳐지던 전체주의의 현실을 자본주의 문명의 사수라는 공통된 목적의 범위 안에서 해명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들은 '좌우의 전체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자본주의 문명을 지켜내면서도 자본주의 자체의 구조적 부패 혹은 타락의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며 그 근원에 다가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 공통된 틀 안에서도 두 사람의 사상적 입장은 대극적으로 달랐으며 이는 케인스의 '새로운 자유주의'와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각각의 의미에서 '자유주의'의 변혁(케인스)이나 부흥(하이에크)을 주장했다. 요컨대 둘 모두 각각의 의미에서 엄연히 '자유주의자(리버럴)'이었다는 사실은 강조할 만하다."(384-5)


"케인스가 자유로운 사회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문명사회의 핵심 원리인) '개인주의'는 하이에크의 '참된 개인주의'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둘은 기본적으로 같다고 생각된다. 개인의 자유롭게 다양한 삶을 옹호하기 위해 '전체주의'와 대결하는 자세도 그들 사이에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케인스가 마지막까지 자유당의 입장을 견지하고 마르크스주의자, 국가사회주의자를 중추에 품은 영국 노동당의 체질을 엄중하게 비판한 것 역시 하이에크의 노동당 비판과 공명하는 성질을 갖는다. 거기서 남겨진 차이는 자유로운 사회를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조건을 어떻게 구상해야 할지이며 그 정책적 구체화로서 어떤 정치적 선택을 장려할 것인지 하는 문제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참된 개인주의에 기초한 자유로운 문명사회의 옹호라는 근본적 가치관을 공유하면서도 그 구체적 실현방법에 대한 견해를 (경우에 따라서는 180도) 달리했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396-7)


제13장 현대 '리버럴리즘'의 여러 흐름


# 시대적·사상적 문맥

1. 시대의 문맥 : 종전 후 수립된 '냉전' 체제와 베를린 장벽 붕괴로 촉발된 '냉전' 체제의 붕괴, 고르바초프는 정치적 민주화에 초점을 맞춰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를 촉발, 덩샤오핑은 정치적 자유·민주화 없는 경제개혁을 추진해 '사회주의 시장경제' 수립

2. 사상의 문맥 : 인간의 상호 승인 욕구(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를 억압하던 사회주의 세계의 붕괴를 '역사의 종언'으로 판단한 후쿠야마, 소련·동유럽 붕괴 후에 세계가 크고 작은 여러 종교·민족 분쟁에 노출되는 '문명의 충돌'을 예상한 헌팅턴

※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 승자(주인)는 노예의 노동에 의존해 점차 인간으로서 열악해지고, 패자(노예)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하여 점차 주인과 대등해진다는, 상호 승인을 추구하는 인간상을 제시한 변증법


"하버마스의 제안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18세기의 '계몽적·커뮤니케이션적' 이성─시민적 공공권(public sphere)에서 귀족주의적인 공적 정치 세계에 맞서 형성된 자유로운 '여론'의 바탕─을 민주화하여 현대에 복권시키자는 것이다. 즉, 그는 현대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정치적·도덕적으로 승인할 수 있는 조건을 계몽적 이성의 민주화에 의한 '시민적 공공성' 혹은 '시민사회'의 현대적 재생이라는 전략으로써 재검토한 것이다. 그가 '화폐'와 '행정권력' 양쪽을 싸워야 할 상대로 명시한 것은 국가가 자본주의의 반사회적 양상을 관리·억제한다는 사회민주주의적 입장을 자신이 기본적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러한 국가가 관료제에 의한 '시민사회'의 억압 장치로 전화할 위험성도 강하게 의식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시민적 공공성'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민주주의 운동('연대')이 불가결하며 바로 그것이 자본주의의 현실 속에서 자유와 정의를 실현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421-2)


"하버마스가 계몽 시대의 시민적 '공공권'으로 돌아가 '커뮤니케이션적 이성'의 복권을 제기한 것처럼, 롤스는 로크, 루소, 칸트의 '사회계약설'의 전통으로 돌아가 '공정으로서의 정의' 사상을 부활시키려 했다." "롤스는 고전적 공리주의의 문제는 그것이 개인 간, 계급 간의 사회적·경제적 대립과 불평등의 존재를 전제하여 이를 사후적으로 '시정'한다는 기본적 사고방식에 입각해 있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불평등·불공정한 사회의 현실을 정치와 정책의 힘으로 조금이라도 평등·공정하게 하려는 발상이다. 이에 대해 롤스는 고전적 사회계약설의 논리에 따라 법도 정부도 존재하지 않는 '원초적 상태'를 논리적으로 상정하고 거기서 전원이 합리적으로 선택할 사회를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로서 구상한다. 현실의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시정'하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불평등·불공정이 발생할 수 없는 사회 구조를 제시하려는 것이다. 그 근본적 원리가 바로 '정의의 두 원리'이다."(422-4)


# 롤스의 정의의 두 원리

1. 자유 원리 : 기본적 자유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2. 평등 원리 :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익이 되고〉(차등 원리), 〈공정한 기회균등의 조건하에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책과 직위가 결부되도록〉(기회균등 원리) 편성되어야 한다.


"노직은 롤스와 마찬가지로 로크적 사회계약론을 기초로 논의를 전개했지만, 로크 이론에 좀 더 충실한, '노동에 의한 소유'의 논리를 기축으로 하는 '권원(權原) 이론'을 전개했다. 그것에 따르면 노직이 '최소 국가'라 부른 정당한 정치권력의 기원은 ① 무주물(無主物)을 획득한 결과로서의 소유물의 보호, ② 동의에 의한 소유권 양도의 보장, ③ 앞의 두 가지에 대한 부정행위를 바로잡는 것이라는 세 가지뿐이다. 이에 비해 샌델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공통선'의 사상 전통으로 돌아가 '올바름'이 '선'보다 우월하다는 롤스의 기본적 견해를 비판한다. 개인은 본디 다양한 정치적·종교적·문화적 배경을 지닌 공동체 속에서 나고 자라며 거기서 살아감으로써 저마다의 자아를 확립한다. 공동체는 종교적·문화적으로 규정된 '공통선'의 세계이며 사람들은 '공통선'을 갖춰나가는 가운데 그 공동체 고유의 '정의'를 갖춰나간다. 따라서 '선(the good)'이야말로 '올바름(the right)'에 우선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430)


종장 사회사상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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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상사 한길그레이트북스 152
루이스 코저 지음, 신용하.박명규 옮김 / 한길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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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 오귀스트 콩트


"콩트는 인류의 발전과정을 설명하고 동시에 앞으로의 진행과정도 예견할 수 있는, 일종의 자연주의적 사회과학을 만드는 일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다. 그는 시대를 초월하여 인류를 지배해온 운동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과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이와 함께 특정한 역사적 시기의 사회적 안정성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설명할 여러 조건도 공식화해보려 노력했다. 사회운동과 사회정학─진보와 질서, 변동과 안정─은 그의 사고체계를 형성하는 두 핵심을 이룬다. 인간사회도 자연계를 연구하는 것과 똑같은 과학적 방법에 의해 연구되어야 한다고 콩트는 생각했다. 인간사회가 우주의 다른 영역보다 훨씬 복잡한 모습을 띠고 있긴 하지만, 기본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사회과학도 단지 이론적 관심만을 갖는 데서 벗어나 인간에게 궁극적으로는 구체적인 유익을 가져다주어야 하며, 인간조건의 개선에 중대한 몫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27-8)


"사회의 기본법칙을 발견하게 되면 인간의 오만한 자부심을 고칠 수 있게 된다. 즉 사람들은 어떤 역사적 순간에서도 사회적 행위는 사회유기체의 적절한 기능을 위기에 빠뜨리지 않을 수준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시에 인간은 사회적 법칙들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경시킴으로써 주어진 한계 내에서 행동의 신중함을 얻을 수도 있다. 다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영역에서도 〈과학의 임무는 현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변경시키는 것이며, 이것을 위해서는 그 법칙들을 이해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이 새로운 과학적 정신이 일단 어느 정도 확산되고 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절대적 개념들로 사고할 수 없고, 사회의 특수한 조건과 관련시켜 사고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정치행위의 사회적·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정치적 목표를 말할 수는 없게 된다." "그는 영원히 타당한 율법적 진리를 받아들이는 대신, 인간 이해의 끊임없는 발전과 과학적 작업의 자기수정적 성격을 강조했다."(29)


"콩트는 사회체계의 구성요소를 다루는 데서 개인을 기본적 요소로 보는 것을 강하게 거부했다. 〈과학적 정신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사회를 개인들로 구성된 것으로 볼 수 없다. 진정한 사회적 단위는 가족이다. 필요하다면 가족의 기반을 이루는 부부에게로 환원시킬 수는 있다. ······가족은 종족을 이루고, 종족은 국가를 형성한다.〉 개인의 행위와 성향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 사회과학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제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해 있는 것임이 밝혀진〉 인간의 사회성을 공리주의적인 관점에서 도출하려는 것은 특히 잘못된 것이다." "콩트는 사회를 생물유기체에 비유하여 파악했지만, 그러한 비유적 사고가 초래하는 곤란함도 잘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생물유기체는 피부로 둘러싸여 있어서 물리적 경계를 분명하게 갖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단위체는 물리적인 수단으로 묶일 수 없고, 단지 정신적 결합에 의해서만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콩트는 언어 그리고 무엇보다 종교에 핵심적인 중요성을 부여했다."(36-7)


2 카를 마르크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란 긴장과 갈등을 통해 사회변동을 야기하는 대립된 세력들 간의 동적 균형을 의미한다. 그의 견해는 진화론적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에게 진보의 추진력은 평화로운 성장이 아니라 갈등이었다. 즉 긴장이 모든 것의 근원이며 사회적 갈등은 역사과정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대부분의 18세기 사상가의 견해와는 대립되고, 대부분의 19세기 사상과는 보조를 같이한다." "마르크스는 상대주의적 사상을 지닌 역사주의자였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상체계는 물론 인간 간의 모든 사회적 관계조차도 각 역사적 시기에 특수하게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사상과 범주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는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역사적이고 일시적인 산물이다.〉 예를 들면 고전경제학자들이 지주, 자본가, 임금노동자를 사물의 자연적 질서 속에 영구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인 데 반해, 마르크스는 그러한 범주들을 특수한 역사적 시기에만 나타나는 특수한 현상으로 간주했다."(83-4)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체계의 변화는 지리나 기후 같은 비사회적 요인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이러한 요인들은 중요한 역사적 변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불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사상의 출현과 관련하여 설명될 수도 없다. 사상의 발생과 수용은 사상 이외의 요인에 달려 있다. 사상은 주된 동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관계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물질적 이해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 반영인 것이다. 사회를 구조적으로 상호연결된 전체로 간주하는 마르크스의 전체적 접근방식은, 물론 몽테스키외에게서도 배운 바가 있지만, 주로 헤겔에게서 배운 것이다. 결과적으로 마르크스에게는 전체의 어떤 부분도─그것이 법조문이든 교육 제도든 종교나 예술이든─그 자체로서는 이해될 수 없기도 하다. 사회란 구조화된 전체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발전해나가는 총체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공헌은 헤겔의 체계에서는 별로 중요시되지 않던 변수, 즉 경제적 생산양식을 독립변수로 확정시킨 데 있다."(85)


"마르크스가 보기에 지배적 사상의 영원한 진리성이란 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사상의 지지자들의 계급이익이 직접적·간접적으로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 마르크스는 사상을 그것의 기능이란 면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하려 했고, 개개인의 생각을 사회적 역할과 계급적 위치와 관련시키려 했다. 그는 〈만약 우리가 지배계급의 사상을 지배계급 그 자체와 분리시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한다면, 그 사상의 산출자와 생산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어느 시대에는 이런 사상이, 어느 시대에는 저런 사상이 지배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리하여 개인과 사상의 원천이 되는 전체 조건과의 관계를 무시한다면〉 결코 올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마르크스는 어떤 개인들은 꼭 계급이익에 따라서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꼭 그가 속한 계급에 의해 모든 행동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과는 구별된, 범주로서의 인간은 계급이익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다."(95-7)


3 허버트 스펜서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스펜서에게도 관념은 부수적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스펜서는 〈모든 시대와 나라에서의 보편적 의견은 그 시대와 나라의 사회구조와 함수관계에 있다〉고 했다. 스펜서에게 진화란 〈상대적으로 불확정적이고 응집성이 없으며 동질적인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확정적이며 응집력이 강한 이질적 상태로의 변동〉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보편적인 과정이라 여겨졌다." "생물학적 유추가 스펜서의 모든 사회학적 추론에서 특권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스펜서의 생물학적 유추가 가져온 가장 유용한 결과는, 진화적 성장은 모든 단위의 구조와 기능에 변동을 가져온다는 생각과 양적 크기의 증가는 분화(differentiation)를 심화시킨다는 생각이었다. 여기서 그가 생각한 것은, 쉬운 예를 들면, 만일 인간이 갑자기 코끼리만 한 크기로 성장한다면 그의 신체구조에 중대한 수정이 있어야만 살아 있는 유기체로 존속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148-9)


"스펜서는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과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사회적 법칙이 작용한다는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콩트와 일치한다." "그러나 콩트가 사회의 법칙을 발견하려는 목적이 사람들이 사회 세계 안에서 집합적으로 행동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한 데 반해, 스펜서는 연구의 목적이 집합적으로 행동하지 '않기' 위함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종교 지도자 같은 정신적 힘을 통해 사회를 인도하려 했던 콩트와는 달리, 스펜서는 사회학자는 사회가 정부나 개혁가들의 간섭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대중에게 확신시켜야 한다고 정열적으로 주장했다." "스펜서가 국가가 지녀도 좋다고 생각한 유일한 힘은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과 외부의 적으로부터 집단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이외의 모든 일은 계약을 맺거나 서로 간에 합의를 보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에 맡겨져야 한다. 스펜서의 견해에 따르면, 좋은 사회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 간의 계약에 기초한 사회다."(160-1)


"스펜서의 이론은 보편적 원리에 입각한 설명이란 점을 만족시켜줌과 동시에 그것은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독선적인 요구도 만족시켜주었다. 이제 사회가 진화하면 할수록 그 사회는 도덕적으로도 우월한 것이라는 사실이 판명된 것처럼 보였다." "스펜서의 학설이 널리 호응을 얻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산업혁명이 가져온 변화의 주된 측면 중 하나는, 다수의 비교적 단순한 수공업이 사라지고 산업적 생산형태에서 나타나게 된 '소외'를 수반한 훨씬 복잡한 분업이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변화를 점진적인 기능분화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스펜서는 당시 일반적인 공리주의적 설명도식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진화적 필연성이란 생각은 도덕적으로 불안해 보이던 것들을 지적인 구미에 맞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이전의 사람들, 즉 현대 산업세계의 매력과 그것이 지금까지 환영받던 생활양식에 미친 파괴적 영향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던 사람들의 인지적 불협화음을 감소시켜주었다."(194-5)


4 에밀 뒤르켐


"뒤르켐은 사회현상은 '사회적 사실'(social fact)이며, 바로 이것이 사회학의 주된 연구대상이 되는 것이라 보았다. 뒤르켐에 따르면, 사회현상은 생물학적인 실체라 할 수 있을 개개인들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초기의 뒤르켐은 사회적 사실을 외재성과 구속성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성숙기의 뒤르켐은 특히 도덕적 원칙 같은 사회적 사실은 개인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의식 속에 내재화되어 있는 경우에만 개인의 행위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인도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공식화에 따르면, 구속성이란 단순히 개인 의지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강압이 아니라 오히려 규칙에 복종하려는, 일종의 도덕적 의무와 유사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란 〈우리를 초월해 있는 어떤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내재해 있는 어떤 것〉이다. 이 시기 뒤르켐은 사회적 사실을 사물의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현상만이 아니라 행위자와 사회과학자가 의식을 통해 알게 되는 어떤 현상으로도 연구하려고 했다."(203-4)


"뒤르켐은 여러 종교집단 또는 직업집단 간의 자살률이 늘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 집단들의 성격을 연구했고, 그 성원들 간에 응집력이나 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집단 차원의 특징적인 방식들을 연구했다. 그는 높은 자살율을 나타내는, 즉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비교적 약한 응집력을 가지고 있거나 상대적으로 무규칙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구조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뒤르켐에게서 통합의 주된 요소 중 하나는 여러 성원 간의 상호작용 정도다. 유형화된 상호작용의 빈도는 가치통합의 정도, 즉 가치나 신념에 대한 성원들의 공유 정도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고도의 합의가 존재하는 집합체는 합의 정도가 낮은 집합체보다 일탈 행동이 적다." "성숙기의 뒤르켐은 사회의 모든 성원이 공통의 상징적 표상체계와 주변세계에 관한 공통의 가정을 공유할 경우에야 비로소 도덕적 통합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것들이 없이는 사회는 쇠퇴하고 붕괴하고 마는 것이다."(205-7)


"뒤르켐은 종교란 사회적 산물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신성화된 사회 자체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포이어바흐처럼 뒤르켐도 사람들이 함께 섬기는 신이란 사회가 갖는 힘이 투영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종교란 명백히 사회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일어나며,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신성한 것을 찬양할 때 그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사회가 갖는 힘을 찬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힘은 그들 자신의 실존으로부터 너무 초월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형상화해보기 위해서 그들은 이것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종교가 그 본질에서 사회가 갖는 힘의 초월적 표상에 불과한 것이라면, 전통적 종교의 소멸이 꼭 사회의 와해를 뜻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현대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전에는 종교적 표상이라는 중개를 통해서만 인지해오던 사회의 의존성을 이제는 직접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달리 말하면, 사회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다."(214-5)


5 게오르그 짐멜


"짐멜은 콩트나 스펜서처럼 사회를 하나의 사물이나 유기체로 보지도 않았고, '실질적인' 존재가 없는 편의적 명칭에 불과한 것으로 보지도 않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사회란 일정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개인들 간의 복합적 관계로 이루어진 복잡한 관계망으로 구성된다. 즉 〈사회는 상호작용으로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개인을 지칭하는 이름에 불과하다.〉 더 큰 초개인적 구조들─국가, 종족, 가족, 도시, 노동조합 등─은 비록 그 나름대로의 자율성과 영속성을 지니며 외부에 존재하는 권력으로서 개인에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결국은 상호작용의 결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회를 연구하는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연구 영역은 사회성(sociation), 다시 말해 사람들이 서로 연합하고 상호작용하는 특수한 유형이나 형식을 다루는 일이다." "대체로 그는 거대한 사회적 구성체의 바탕에 작용하는 개인들 간의 기본적인 상호작용의 유형(오늘날 '미시사회학'이라 불리는)에만 그의 관심을 제한했다."(268-9)


"짐멜은 개인과 사회 간에 널리 존재하는 변증법적 관계를 강조한다. 사회적 관계망에의 참여는 인간생활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그것은 또한 자아실현에 방해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는 개성이나 자율성의 출현을 도와주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한다. 사회생활의 여러 형식은 각 개인에게 자신을 강요하는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인간이 되도록 해준다. 그것은 자발적인 자유 활동을 억압함으로써 인간의 개성을 형태짓기도 하고 무력하게 하기도 한다. 제도적인 형식 속에서만, 또한 그것을 통해서만 인간은 자유를 얻을 수 있으나 그의 자유는 바로 이 제도적 형식 때문에 영원히 위협받게 된다." "짐멜은 전적으로 조화로운 집단이란 경험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회성이란 언제나 두 범주─피상적으로 보면 대립 관계에 있는 '갈등'과 '합의'라는─의 상호작용이 가져오는 결과다. 다시 말해 둘 다 긍정적인 성분이며 모든 관계를 구조화시켜 주고 그들에게 지속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힘인 것이다."(276-7)


"짐멜이 보기에 현대사란 모순적인 두 과정, 즉 인간이 창조한 문화적 산물이 오히려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점차로 증대시켜가지만, 동시에 개인들은 철저한 속박과 종속으로부터 점진적으로 해방되어가는 과정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분화란 동질적인 것에서 이질적인 것으로, 균일적인 것에서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전통적인 조그만 세계의 일상적인 일에 대한 몰두에서 다양한 모습의 참여와 개방된 기회가 존재하는 넓은 세계로의 참여로 이행함을 뜻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자율성을 획득하고 그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예술, 과학, 종교, 법률 등을 필요로 한다. 그는 이것들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이러한 문화적 기차들을 내면화할 필요가 있다." "그것들은 애당초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그것들은 이제 객과적 형태를 지니게 되며 내적인 발전논리를 따라 그들의 근원이나 목적으로부터 점점 소외되어간다는 독특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283-6)


6 막스 베버


"베버는 사회학을 사회적 행위에 대한 종합적인 과학으로 파악했다. 그는 분석의 초점을 개별 인간행위자에게 두었다는 점에서 사회학을 사회구조적인 학문으로 생각했던 이전의 학자들과는 달랐다. 스펜서는 유기체에 비유할 수 있는 '사회체'의 진화에 관심을 두었다. 뒤르켐의 주된 관심은 사회구조의 '통합'을 유지시키는 제도적 장치에 있었다. 사회를 보는 마르크스의 전망은 변화하는 사회구조와 생산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계급' 간의 갈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과는 반대로, 베버의 주된 관심은 인간행위자가 특정한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상호작용하는 동안 자신의 행위에 부여하는 주관적 의미에 놓여 있었다." "그는 현대 서구인들의 특징은 사회적·역사적 상황의 변화에 따른 인간행위의 성격 변화라는 측면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베버는 역사의 '유물론적' 해석이나 '관념적' 해석에 몰입하지 않은 채 구체적으로 궁극적인 분석단위를 활동하는 개인으로 삼았다."(321-2)


"베버는 사회학을 〈사회적 행위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그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사회적 행위에 대한 '해석적 이해'를 추구하는 과학〉이라고 정의했다. 해석적 이해라는 개념은 역사학자 드로이젠과 딜타이 같은 학자에 의해 널리 사용되었다. 그들에게 이 개념은 합리적-인과적 설명보다도 직관을 더 찬양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와는 반대로, 베버는 이 개념 속에서 인과적 관계 확립의 첫 단계를 발견했다. 베버의 주장에 따르면, 어떤 행위의 주관적 의미는 분석대상에 대한 감정이입(Einfuehlung)과 추체험(Nacherleben)을 통해 더욱 잘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해석적 설명도 그것이 과학적 명제라는 위엄 있는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과적 설명이 되어야 한다. 사회과학에서 '해석적 이해'와 '인과적 설명'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의미에 대한 즉각적 직관이 타당한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과적 설명을 목표로 한 이론적 구조 속에 결합될 수 있어야 한다."(325)


"베버는 역사적 인과성과 사회학적 인과성을 모두 확신했다. 다만 인과성이란 말 대신 개연성이란 말을 사용했다." "베버는 인간의 행위를 예측할 수 없는 경우란 행위자가 미쳐 있을 경우뿐이며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우리가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의식하는 행위들과 결합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자유롭다는 주관적 감정은 예측불가능성이나 비합리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면밀히 살펴보면 합리적으로 예측될 수 있고 통제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연성이나 우연이라는 베버의 개념은 자유의지론 같은, 일종의 형이상학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벽한 인과적 연관을 설정하기가 극히 어렵다는 점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사회탐구에서 객관적이고도 경험적인 확실성을 얻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최선의 방법은 탐구대상이 된 현상을 결정짓는 데 참여한 다양한 인과적 연쇄를 추적해 보는 것이라고 그는 결론지었다."(330)


7 소스타인 베블런


"베블런은 고전경제학이 구성해놓은 '법칙'이란 개념은 시간성이 없는 일반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배격하고, 대신 인간의 경제행위도 다른 행위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형성된 사회적 맥락에 입각해 분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경제행위가 모든 인류의 타고난 성향, 즉 공리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성향에서 나타난다고 보는 입장을 거부했다." "초역사적 일반법칙과 공리주의적 또는 쾌락주의적 계산을 중시하는 진부한 경제학과는 달리, 베블런은 새로운 경제학, 즉 역사적인 또는 그의 용어대로 진화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인간개념에 기초한 경제학을 주장했다." "개인에게 경제생활이란 〈자신이 원하는 목표에 수단들을 적응시켜나가는 누적적 과정이다.〉" "베블런에 따르면, 역사적 진화는 헤겔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어떤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떠한 방향도, 어떠한 최종단계도, 어떠한 완성도 있을 수 없는 맹목적인 누적적 인과관계의 체계〉이다."(382-3)


"현대에 관한 베블런의 핵심 사상은 현대 자본주의가 피할 수 없는 대립, 즉 기업과 공장, 소유권과 기술, 금융형 직업과 제조형 직업─돈을 버는 자와 상품을 만드는 자, 판매기술과 제조기술 간의 대립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블런은 이 구분을 당시 미국에 널리 퍼져 있던 사고방식이나 진화론적 견해를 공격하는 주무기로 사용했다. 그의 동료 진화론자, 예를 들면 이전 스승의 섬너 같은 사람은 성공한 기업가나 대기업은 경쟁적인 투쟁에서 '최적자'임이 판명된 자들이므로 현대문명의 꽃으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블런은 금융형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진화과정에서 적자생존한 사람이기는커녕 다른 사람이 수고한 기술과 혁신 위에서 자기 살을 찌운 기생충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유한계급은 산업조직 내부에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그것에 빌붙어서 살아가고 있다.〉 '산업계의 지도층'은 실제 산업활동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며, 오히려 이들은 진화를 지연시키고 왜곡시킨다는 것이다."(385)


"베블런은 인간사에서 경쟁의 사회적 원천에 대한 복잡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자존심은 동료에 의해 부여되는 평가의 반영에 불과하지만 경쟁의 원천으로 주목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자기 동료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경쟁 문화 안에서는 누구나 익시온의 수레바퀴에 매이게 된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 이웃을 능가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베블런은 사람들이 지속적인 경쟁과정에서 자신들이 독점한 높은 지위를 상징화시킴으로써 이익을 얻는 여러 수단을 분석했다. 과시적 소비, 과시적 유한, 높은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의 과시적 표현 등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웃을 능가하여 그들로부터 높은 자기평가를 얻어내려는 대표적인 수단이라고 베블런은 보았다." "각 계급은 그들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까지 자기보다 나은 지배계급의 생활양식을 본받는다. 이것이 현대의 가난한 자들이 물질적으로는 이전 선조들보다 더 향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고통을 느끼게 되는 이유다."(387-9)


# 익시온(Ixion)의 수레바퀴 : 익시온은 라티파이의 왕으로,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서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멈추지 않는 수레바퀴에 매달리게 된 인물이다.


8 찰스 쿨리


"쿨리는 〈자아와 사회는 쌍둥이다〉라고 썼다." "쿨리는 사회세계의 대상이 주체의 정신과 자아를 형성하는 구성요소가 된다고 보았다. 쿨리는 데카르트적 사고가 만들어놓은 개인과 사회 간의 개념적 장벽을 제거하고 대신 양자의 상호교류를 강조하려고 했다." "쿨리는 개인의 자아는 타자와의 교제 속에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개인 생활의 사회적 기원은 다른 사람과의 상호교제에 있다.〉 쿨리에게서 자아는 처음에는 개인적이었다가 나중에 사회적인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제를 통해 변증법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정신에다 귀속시키는 자신에 대한 반영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고립된 자아라는 것이 있을 여지가 없다. 〈당신, 그, 그들에 대한 의식과 관련되지 않은······ '나'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자아의 반영적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서 쿨리는 이를 거울에 비유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비추는 상대방에 대한 하나의 거울.〉"(439-40)


"쿨리가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스펜서식의 생물학적 유추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과정의 체계적 상호관련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사회가 하나의 유기체라 말할 경우 우리가 뜻하는 것은······여러 형태의 과정이 연결된 하나의 복합체이고, 그 각각의 과정은 상호작용을 통해 생명을 얻고 성장할 뿐만 아니라 이 전체가 너무 잘 통합되어 있어서 어느 한 부분에서 일어난 일이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유기적 사회관을 바탕으로 쿨리는 고전경제학과 스펜서 사회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던 공리주의적 개인주의에 반대했다. 〈미국과 영국에는 개인주의 전통이 너무나 강해 이상적인 사회를 직접 논의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개별화된 공식, 예를 들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같은 것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공식은 인간본성에는 적절한 것이 되지 못한다. ······이상적인 사회는 직접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유기적 전체여야 한다.〉"(441-2)


"쿨리는 (가족, 아이들의 놀이집단, 이웃 등과 같은) 일차집단이 실질적으로 인간적 협동이나 친교를 생성시키는 보편적인 기반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집단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시키려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떠나 동정과 사랑으로 동료들과 영원한 결속을 맺게 된다." "쿨리의 사상에서는 거울자아의 개념과 일차집단의 관념이 밀접하게 서로 얽혀 있다. 타자의 사상에 대한 민감성─쿨리가 성숙한 인간을 나타내는 지표로 간주했던 타자의 태도, 가치, 판단 등에 대한 감응성─은 일차집단의 가깝고 친밀한 상호작용 속에서만 배양되고 자라날 수가 있다. 따라서 이 집단은 특별히 인간적인 성장이 일어나는 산실이다. 성숙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이던 사람이 일차집단 내에서 점차 타인의 요구나 바람에 물들어가면서 성숙한 사회생활의 상호작용에 자신을 맞추어 나가게 된다. 일차집단은 개개인에게 사회생활에 필수적인 타자에 대한 민감성을 불어넣어 이기적 고립에서 벗어나게 한다."(443-4)


9 조지 미드


"미드에게 사회심리학은 〈사회과정 내에 놓여 있는 개인의 활동(activity)과 행동(behavior)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한 개인의 행위는 오직 그가 구성원으로 되어 있는 전체 사회집단의 행위와 관련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의 개인적 행위는 그 자신을 초월하고 그 집단의 다른 구성원을 의미하는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행위 속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초기 사회심리학이 개인심리학적 견지로부터 사회적 경험을 고찰했던 반면, 미드는 개인적 경험이 〈사회의 견지에서, 적어도 사회질서에 불가결한 의사소통의 견지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시사했다. 미드의 사회심리학은 '개인의 견지로부터 경험에로의 접근'을 전제 조건으로 했으며, 따라서 존 왓슨의 행동주의(behaviorism)와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회심리학은 〈무엇이 이 경험에 속하는 것인가를 특별히 규정하려고 기도했다. 개인 그 자신이 하나의 사회 구조, 하나의 사회질서에 속하고 있기 때문이다.〉"(478)


"미드는 몸짓(gesture)에서 사회적 행위가 실현되는 핵심적 메커니즘을 보았다. 그러나 미드는 동물적 수준에서 발견되는 무의미한(nonsignificant, 비자의식적인unself-conscious) 몸짓과 인간 상호교섭의 대부분을 특징짓는 유의미한(significant, 자의식적인self-conscious) 몸짓을 엄격하게 준별했다." "유의미한 몸짓은 서로 다른 개인들에게 대체로 동일한 내용을 전달하는 언어의 상징에 기초를 두고 있다. 상징적 상호작용에서 인간은 유의미한 몸짓을 사용하고, 상호 간에 서로의 태도를 해석하며, 그러한 해석에 의해 산출된 의미에 기초해 행동한다. 블루머의 말처럼, 〈상징적 상호작용은 해석, 즉 행위의 의미의 획득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정의(definition), 즉 다른 사람에게 그가 어떻게 행위해야 할 것인가의 지시 전달을 포함한다.〉 인간의 의사소통과정은, 정의와 재정의, 해석과 재해석을 통한 행위 노선의 반복된 결합으로서,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한 끊임없는 자아의식적 적응을 포함한다."(478-9)


"미드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 중 하나는 의식과 자아의 발생에 대한 설명이다. 미드는 다른 사람의 역할을 취득하고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부터 자신의 행위수행을 보는 능력을 유년기에 점차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의식과 자아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인간의 의사소통은 오직 〈다른 개인에게서 일어나는 상징이 자신 안에서 [일어날] 때〉만이 가능하다." "자아의 본질은 그의 성찰성(reflexivity)이다. 개인적 자아는 오직 그의 타자와의 관련 때문에 개인적인 것이다. 상상력으로 타자의 태도를 취득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개인의 자아는 자신의 성찰 대상이 되는 것이다. 주체임과 동시에 객체인 자아는 사회적인 것의 본질이다. 각 자아의 특수한 개인성은 일반화된 타자를 형성하는 타자들의 태도의, 결코 두 사람에게 동일하지 않은 특수한 조합의 결과다. 그러므로 개인성이 사회성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할지라도, 각자는 사회적 과정에 대해 개별적 공헌을 하게 된다."(480-3)


10 로버트 파크


"파크의 견해에 따르면, 사회는 상호작용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전통과 규범의 체계에 의해 통제되는 개인이라는 구성요소들 간의 상호작용의 산물로 이해되는 것이 가장 좋다. 사회적 통제─적대, 갈등, 투쟁 등의 과정들을 질서짓는 데 이바지하는─는 〈사회의 핵심적 사실이자 핵심적 문제인 것이다.〉 〈어디가 되었든 사회라는 것은 하나의 통제조직이다. 그것의 기능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에게 존재하는 에너지를 조직하고 통합하며 지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학이란 〈개인들이 우리가 이른바 사회라 부르고 있는, 일종의 집단적인 존재 속으로 유도되고 또한 거기에 참여하도록 권유 받는 과정을 탐구하는 시각과 방법〉을 말한다." "하지만 사회적 통제는 결코 사회의 항구적 균형상태를 이루어내지는 못한다. 적대적 관계가 통제 메커니즘에 의해 조절된다고 하는 사실은 그것들이 근절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잠재적인 것이 된다는, 즉 사회적으로 용인된 통로를 통하게 된다는 의미일 뿐이다."(514)


"파크는 사회변동의 과정을 세 가지 단계의 연속, 즉 일종의 '발달사'로 이해했다. 이런 발달사는 불만에서 출발하여 소동이나 사회적 불안을 낳고, 이는 대중운동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새롭게 재구성된 제도적 질서 내에서 새로운 화해로 끝나게 된다. 사회적 불안은 〈기존방식의 붕괴를 나타냄과 동시에 새로운 집합행동의 준비를 나타낸다.〉 불안의 수행자인 군중은 파크가 말한 대로, 〈어떤 사건 때문에 일어난 우연한 흥분 때문에 모이게 된 단순한 집단이 아니다.〉 이들은 〈낡은 질서에 대한 충성이 무너져버린 해방된 대중〉이다. 파크의 관점에서 보면, 군중이란 하나의 기본적이고 초보적인 사회적 형성체(social formation)다." "아무런 생각이 없던 군중이 (사회적 통제를 거쳐) 반성적인 공중(public)으로 변화하게 되면 거기서 새로운 사회적 실체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조건만 갖추어지면 관습의 굴레를 깨뜨리고 새로운 사회질서에 특징을 부여하는 새로운 화해의 길을 준비하는 데 성공할 수도 있다."(519-20)


"파크에게 자아는 개인의 자기 역할에 대한 개념으로 구성되며, 이 역할은 다시 사회 내의 다른 성원이 이 역할의 근저를 이루는 지위를 인정해주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자신에 대한 개념이 자기 지위와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고립된 개인이다. 완전히 고립된 사람, 즉 자신에 대한 개념이 자기 지위 속에 조금도 적절히 반영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비정상적인 사람일 것이다.〉 파크의 주변인(marginal man) 개념은 자아개념을 한 개인이 집단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반영한 것으로 파악하는 그의 견해에서 직접 도출된 것이다. 아메리카의 물라토나 아시아의 혼혈족, 유럽의 유대인들처럼 주변인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집단에 몸담고 있지만 그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 "그러나 파크는 이러한 극단적 주변성이 고통과 함께 이익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문명과 진보의 과정을 가장 훌륭히 연구할 수 있는 길은 이런 주변인의 정신─문화의 변화와 융합이 진행되고 있는─을 통하는 것이다.〉"(523-4)


11 빌프레도 파레토


"물리-화학체계는 물이나 알코올처럼 개별적인 요소들이 모인 하나의 독립된 집합체다. 이 체계를 특징짓는 요인들은 상호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체계의 한 부분이 변하면 다른 부분들에도 그에 적응하는 변화가 일어난다. 파레토는 사회체계를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파악하고 〈자연계에서 발견되는 혼합된 화학적 합성물들과 마찬가지로〉 이해관심, 충동, 감정 등이 뒤엉켜 있는 개인을 〈분자〉로 간주했다. 파레토의 일반사회학은 인간행위를 결정하는 수많은 변수 간의 상호의존적 변화상을 분석하는 틀로서 사회체계라는 개념을 내세우고 거기서 모든 것이 출발하고 있다." "그는 경제학 특히 현대경제학은 인간행위의 특정한 하나의 측면에만 국한되어 있다고 보았다. 즉 그것은 희소 자원을 얻기 위한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행위만을 다루고 있다. 파레토는 인간행위의 상당 부분이 경제학자들의 관심 밖에 있는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행위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사회학으로 전향했다."(553-4)


"파레토는 사람이란 종종 논리적 행위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음에도 자신의 행위를 '논리화'하려는, 다시 말해 일련의 관념체계의 논리적 결과로 보이게 하려는 강한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행위를 설명해주는 것은 그것을 합리화하거나 '논리화'하는 데 사용되는 신념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마음 상태, 기본적인 인간의 감정인 것이다." "그의 주된 관심 중 하나는 비논리적 행위를 정당화·합리화시켜주는 비과학적 이론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었다. 그는 형이상학적·종교적·도덕적 체계들을 낱낱이 부수어 분석했고, 그 결과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과학적 이론과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보여주었다. '자유'니 '평등'이니 '진보'니 '신의'니 하는 개념들은 모두가 야만인들이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데 사용하던 신화나 주술적 마법만큼 해로운 것이라 했다. 그 어떤 것도 검증될 수 없으며 모두가 인간의 행위에 옷을 입히고 그것을 존경스럽게 꾸미는 데 봉사하는 허구라 주장했다."(555-6)


"파레토는 특히, 사람들이 자신은 논리적 행위라 생각했으나 외부에서 볼 때는 전혀 논리적 목표가 없는 그러한 행위에 참여하는 경우나, 행위자 자신이 추구한 것과는 다른 어떤 결과에 도달해버린 경우에 초점을 맞추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의식이나 관행을 통해 폭풍우를 진압하거나 비를 불러올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객관적으로 자연현상이 이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에 참여함으로써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현재 당하고 있는 실존적 고난과 재난을 더 잘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도취적인 힘이 생겨남을 경험할 수 있고, 그들이 참여하고 있는 사회체계의 유대를 더욱 강화시킬 수 있다. 이런 경우 명백히 허구적인 신념체계도 고도의 개인적·사회적 유용성을 지니게 된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한 이론의 실험적 진리성과 그것의 사회적 유용성은 별개의 것이다.〉 〈경험과 합치되는 이론이 사회에 해로울 수 있고 경험과 맞지 않는 이론도 사회에 유익할 수 있다.〉"(563-4)


12 카를 만하임


"만하임은 문화적 대상 내지 지적 현상을 다루는 두 가지 방법을 구분했다. 즉 하나는 이들을 '안으로부터' 이해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 내재적 의미를 연구자가 파악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상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지식사회학의 방법으로, 사상가가 불가피하게 가담하게 되는 사회적 과정의 한 성찰로서 '밖으로부터'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지식은 존재구속적(seinsverbunden)이며 실존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만하임은 〈철학을······실재와의······관련 속에서 연구한다〉는 마르크스의 실용주의적 연구 방향을 일반화하려고 시도했으며, 사상의 체계가 그 제안자의 사회적 위치─특히 그 계급적 위치─에 의존하는 방법을 분석하려고 했다. 만하임은 마르크스가 그의 부르주아 적대자에 대한 논쟁적 공격의 도구로 주로 사용했던 것을 마르크스주의의 연구에도 효율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 분석도구로 전환시켰다."(613)


"만하임은 지식사회학을 사상의 사회적·존재적 조건화의 이론이라고 정의했다. 만하임에 따르면, 모든 지식과 사상은 사회구조와 역사적 과정 내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어떤 위치에 구속되는'(bound to a location) 것이다." "사상은 그 제안자의 역사적 시간과 사회구조 내에서 차지하는 상이한 위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전망적일 수밖에 없다." "만하임에 따르면, 지식의 존재구속성이란 명제는 이러한 존재적 요인들이 〈사상의 발생에만 관련될 뿐만 아니라 사상의 형태와 내용에도 침투해 들어가서 우리의 경험과 관찰의 범위와 강도, 즉······주체의 '전망'을 결정적으로 규정한다는 사실〉을 나타낼 수 있을 때 더욱 명확해진다." "다시 말하면, 특정한 측면만이 편견으로 채워질 가능성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특수적 개념'으로부터, 사상의 전체 양식과 전체 형태, 전체 내용이 모두 그 제안자의 사회적 위치에 구속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의 전체적 개념'으로 이행한 것이다."(614-5)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후, 영국으로 망명한 만하임은 사회계획 및 사회재건의 사회학 연구에 몰두했다." "대중사회의 조직 내에서 〈기능합리성─즉 고도로 계산적이고 능률적인 방법으로의 행동을 조직화하는─은 장족의 진보를 이루었다. 그러나 바로 이 진보가 실질합리성, 즉 사건들이 상호 관련성 속에서 지성적 통찰력을 드러내는 사상의 작용〉의 쇠퇴를 가져왔다." "만하임이 보기에 목적의식적 계획에 의존해 전체적으로 재건된 사회체계만이 서구문명을 구제할 수 있다." "〈미래의 심리학적·사회학적으로 중요한 문제는······조율되지 않는 대중(masses)과 군중(crowds)을 여러 형태의 집단(groups)으로 어떻게 조직화 하는가이다.〉 미래 시민의 물질적 복지만이 계획의 대상이 아니며 그들의 정신적 복지까지도 더 이상 우연에만 맡겨둘 수 없다. 이것이 본래 자유주의자였던 만하임이 왜 해체에 대한 하나의 방파제로서 종교의 부흥까지도 옹호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이다."(621-4)


13 피티림 소로킨


"소로킨은 인간의 상호작용과정이 세 가지 핵심 요소를 포함한다고 보았다. (1) 상호작용의 대상인 행위자로서의 인간, (2) 인간의 품행과 행동을 지도하는 의미, 가치, 규범, (3) 의미와 가치들을 일련의 행동으로 객관화시키고 통합시키는, 견인차이자 지휘자 역할을 담당하는 '물질현상' 등이 그것이다. 소로킨은 베버와 마찬가지로 의미, 가치, 규범에 대한 이해 없이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러므로 소로킨은 사회학적 사고에서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문화가 사회적 행동을 결정하는 초개인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상호작용하는 사람(인격)들과 이들로 구성된 총체적인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그 문화란 상호작용하는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 가치, 규범의 총체다. 또한 소로킨은 문화는 제의적 대상이나 예술작품 같은 물리적 매개물에 의해 전달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661-2)


"자신의 저서 『사회문화적 동학』에서 소로킨은 인간사회와 문화를 전반적으로 탐구하는 것 이상으로 일련의 일반 명제들을 통해서 사회문화적 구조 속에 존재하는 역사적 다양성을 조명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소로킨은 인간의 진화에 대한 단선적 설명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슈펭글러처럼 반(半)생물학적 유추를 통해 문화에 일정한 주기가 있다는 주장에는 반대했다. 대신 그는 사회문화적 현상이 비교적 일관성 있고 통합적인 총체로서의 문화적 세계관─그가 문화심성(mentalities)이라 부른─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것이 전반적인 인류 역사에서 특정 기간에 그 의미를 제공해준다고 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찾으려던 것은 문화의 〈모든 요소를 관통하는 핵심[원리]〉다. 이 핵심원리는 〈파편들의 혼돈을 질서 있게 만들고 의미를 부여한다.〉 소로킨은 어떠한 문화도 완벽하게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문화란 언제나 완전히 조화될 수 없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663)


"소로킨은 끊임없이 요동치는 역사의 파도는 무작위적이거나 신들의 변덕이 아니라 특징적인 리듬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주요한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어떤 문화도 실상은 이런 내적 필연성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특정한 운명에 종속된다. 하지만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화심성'의 사고유형은 자신의 전제를 스스로 파괴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소로킨이 명명한 '내적 변화'의 원리인데, 사회변동이 외부의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요인에 의해 촉발된다는 것이다. 소로킨은 〈특정한 문화심성이 만개한 상태에 도달하면 그것은 '적응의 도구'로서 작동하는 데 점점 부적합해진다. 즉 사회구성원들과 전반적인 사회와 문화생활에 진정한 만족감을 전달해주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서술했다. 문화체계는 이 지점에서 자신을 탄생시킨 전제에 제한당하며 문화의 관성을 넘어선다. 이 과정을 통해서 옛 문화는 스스로 사멸의 길로 들어서며 새로운 문화체계가 생겨나는 것이다."(664)


14 윌리엄 토머스, 플로리안 즈나니에츠키


15 미국사회학이론의 최근 동향


"'기능주의분석'은 일반적으로 사회현상이나 구조 속에 배태되어 있는 특정 요소가 발생시키는 결과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연구하는 이론적 관점을 말한다. 파슨스의 저작 『사회적 행위의 구조』는 194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의 이론적 발전을 주도한 기능주의분석의 이정표와 같다." "파슨스에게 인간행동의 핵심적 특성은 다음의 기본 틀을 근간으로 한다. (1) 결코 외부자극에 단순반응하거나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존재가 아닌, 자기선택과 판단이 가능한 행위자들, (2) 이 행위자들이 달성하려는 목표, (3) 행위자들이 목표추구 과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대안적 방법과 이들 간의 선택, (4) 목표의 성취와 대안의 선택에 제약을 가하는, 생물학적이거나 환경적인 조건에서 오는 상황적 제약, (5) 행위자들이 목표와 방법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규범과 가치 등이다. 즉, 인간행위자들은 일련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으나, 이 선택은 생물학적·환경적 조건과 가치와 규범이 지배하는 사회구조에 의해 제약된다."(790-3)


"파슨스의 두 번째 주요 저작 『사회체계』는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이 행위를 제약하는 체계에 주목한다." "『사회체계』에서 파슨스는 제도화된 가치와 규범, 차별화된 지위에 맞는 차별화된 사회적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회체계 또는 그 하위 체계의 바탕에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네트워크 안에 연결되어 있는 다른 행위자들이 기대하는 역할을 수행할, 충분히 동기부여가 된 행위자들이 있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체계에서 특정 지위에 있는 역할수행자들은 그들의 기대와 부정적·긍정적 규제를 행할 수 있는 권력을 통해 다른 행위자를 제어한다. 체계의 주요 가치와 규범이 유지되려면 적절히 사회화된 행위자들이 역할 요구를 수행할 동기부여가 되어 있고, 다른 행위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러한 제도화된 요구를 수호하고 방어할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 파슨스의 체계이론에서 가치와 규범이 이처럼 중요한 위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이론을 '규범적 기능주의'라고 부르는 데 큰 무리는 없다."(793)


"머튼은 이전의 기능주의이론이 가진 편협함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기능 못지않게 역기능도 연구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모든 사회현상은 필연적으로 기능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말리노프스키의 가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사회의 모든 요소는 사회구조의 작동에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한다는 보수적인 경향도 비판했다. 머튼은 기능적 대체물과 역기능이라는 쌍둥이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것이 기능수행을 위해 최적화된 것이라는, 한없이 낙천적인 생각을 타파하는 데 공헌했다. 그는 사회의 무질서, 사회문화적 모순, 다변화된 가치가 오히려 특정한 사회구조에서 나타날 수 있음을 밝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머튼에게서 사회적 행위자들은 항상 사회학적 양면성, 모호함, 충돌하는 기대, 선택의 딜레마를 마주하는 존재다. 사회는 하나의 통합된 전체가 아니다. 오히려 구조라는 틀로 사회를 명백히 통합된 하나의 전체로 보려는 가능성을 제한하는 불일치와 부조화가 바로 사회의 특징이다."(7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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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의 망명 - 사회사상의 대항해: 1930~1965 개마고원 서구 지성사 3부작 3
스튜어트 휴즈 지음, 김창희 옮김 / 개마고원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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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대이주


"사실 이탈리아 출신의 망명자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탈리아계 유대인들을 빼고 나면 망명자들 가운데 중요한 지식인으로 꼽을 만한 사람은 별로 없다. 탁월한 인물들 가운데 대다수는 정치적 행동주의자─가능한 한 유럽 대륙에 머무르고 싶어했던─로서 그들의 조국을 지배하고 있는 (무솔리니)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중부 유럽 출신 망명객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구대륙 문화의 신대륙으로의 전반적인 이식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탈리아 망명자들이 사회사상 분야에 남긴 업적들의 대부분이 파시즘 그 자체의 비판에 국한된다는 사실도 그리 놀라운 일이 못 된다. 보르게세 같은 탁월한 문학비평가나 살베미니 같은 역사가가 미국에 와서 자신의 분야로 삼은 것은 파시즘 분석이었다. 무솔리니에 대해 판단을 내리겠다는 논쟁적인 과제가 보다 추상적인 그의 관심사들을 밀어젖혔으며 그의 저술들에 엄격한 실천적 목표를 부여했던 것이다."(26-7)


"파리가 보다 아름답고 런던이 보다 세련되었다고 한다면, (확신과 공포가 엇비슷하게 혼재되어 있던) 베를린은 미학적인 새로움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 논조의 예리함, 정신의 기민성, 대립되는 양식들의 공존 등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 재능 있는 사람들은 베를린의 빈약한 외관과 사교상의 괴로움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독일 문화의 분열상은 이미 뚜렷해졌고 사실상 19세기로 되돌아간 상태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열광적이고도 다양한 지적 생활 속에서 민족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세계주의적인 공감을 표시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기본적인 격차가 있었다. 회고해볼 때, 이 중에서 후자가 바이마르 문화의 보다 전형적인 경우라면 전자는 비록 독창성이나 우수함에서는 후자에 뒤떨어졌지만 항상 수적으로 우세였고 대중적인 지지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계주의적인 성향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고뇌의 원천이기도 한 바로 그 민족적 특성의 표현을 놓고 매우 자랑스러워했다."(28-31)


"독일 지식층의 반항아들이 종종 무계급적 혹은 '보헤미안'적 생활방식을 표방하기도 했던 데 반해, 그들의 지도적인 사회사상가들은 여전히 '부르주아적'이었다." "묵시록적인 시기에 '부르주아적 휴머니즘'의 생존가능성에 관한 문제는, 그 휴머니스트들이 망명지까지 가지고 간 성가시면서도 상호 관련된 두 가지 문제 중에서 첫번째 것이었다. 두번째 문제는 '정신Geist'의 문제였다." "'정신'을 경외하는 점에서는 대다수 독일적인 지식인들과 소수의 세계주의적 지식인들 간의 차이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독일의 작가와 교수들은 '정신'의 공급자로서 농민대중에게 궁극적인 가치를 규정해주는 일종의 '사제직'을 주장해왔다. 1930년대에 현실세계에서 받은 타격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은 착실히 성장해 나갔고,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와 같이 문화적 혁명가를 자처하던 사람들은 헤겔의 가르침에 아주 밀착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서는 숨어 있는 모순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35-6)


"망명자들 중 창조적인 작가들과 사회사상가들은 각각 다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전자는 계속 자신들의 모국어를 고수하면서 번역자를 매개로 해서만 미국의 대중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사상가들은, 물론 출중한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작가들과는 반대의 길을 택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영어로 집필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새 언어를 완전히 습득한 사람들은 제일 어리거나 적응력이 강한 사람들에 한정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길을 택함으로써 그들이 잃어버리고 만 것들─사고와 느낌의 차원이 의미전달의 기술로 대치되면서, 많은 부대적 의미, 다의성과 시적인 관념, 무의식적인 표현과 침묵의 의미까지도 놓치게 되는─을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망명자들은 자신들이, 만약 고전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고대 그리스의 '코이네koine'와 동일시할 수도 있을 그런 영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44-5)


"베버는 1920년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뒤를 이을 아무런 조직적인 학파도 남겨놓지 않았다. ('가치 중립적인' 사회 연구를 지향하는) 베버의 유산이 사회사상의 주된 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비로소 미국에 건너와서의 일이었다." "더욱이 영국이나 미국으로 이주한 사회학자들과 사회학적 역사가들은 보다 덜 관습적이었고 보다 실험지향적이었다. 그중에는 만하임과 그의 제자들 외에, 베버에게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배운 방법론과 사고방식을 그대로 망명지까지 간직하고 간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라에서는 별로 발달하지 못했던 기술들을 미국의 사회학자들에게서 기꺼이 배우고자 했다. 그래서 대서양 양편의 종합이 처음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특히 이 사회학적 전통의 종합에서 독일인들이 이론을 제공했다면 미국인들은 경험적 탐구를 위한 재능과 열정을 제공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국제적인 사회학의 기원이다."(46-8)


"프로이트의 경우, 그의 딸 안나가 영국에 계속 머무르면서 그의 연구를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계승자들은 대부분 대서양을 건너갔다. 이런 결단이 실제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정신분석학이 이미 미국의 풍토에 정착해 있어 1933년(히틀러 집권)이나 1938년(오스트리아 병합) 이후에 건너간 연구자들도 쉽게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의 환경은 그들이 떠나온 곳의 환경보다는 훨씬 더 호의적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 덜 폐쇄적이었고 오히려 그들이 가지고 온 메시지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들이 미국에 도착한 시기는 바로 경제공황으로 말미암아 세속화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광범위하게 회의를 불러일으키면서 미국인들이 '그들 자신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대안적 사고방식을 갈망하고 있을 때였다. 정신분석학은 1930년대의 감정상의 주저 속에서도 최소한 보다 대중적인 차원에서 기회를 제대로 잡았던 것이다."(49)


"비트겐슈타인이 1929년 케임브리지에 도착해서 같은 해 미국으로 친구 슐리크를 방문했던 일은 빈의 논리적 분석과, 영국·미국에서 이미 형성되고 있던 이에 필적하는 철학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중요한 국면의 서막을 이루었다." "카르납과 빈 학파의 다른 학자들 역시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 철학의 지배적인 경험적 분위기는 우호적인 수용을 약속했고, 그것의 실용주의적이고 도구주의적인 접근방식도 비교적 엉성하게나마 빈 학파의 발견들과 유사했다. 중부 유럽 출신의 논리학자들은 그들의 정교한 방법, 자연과학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탁월한 명징성 등을 통해 새로운 영어권의 제자들에게 접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가능한 한 모호성이 배제된 상징언어를 통해 그들의 가르침을 전달하려 했기 때문에 다른 망명자들을 괴롭히던 번역의 문제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었다. 한 세대도 지나가기 전에 영어는 자연스럽게 독일어를 대신해 논리적 분석의 전용어가 되었다."(50-1)


2장 영국의 철학 : 대이주의 서곡


"영국의 분위기와는 좀 걸맞지 않은 '외국 수입품'이었던 헤겔의 관념론적 사유방식을 청산하는 동시에 영국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20세기적 사고방식을 수립하는 일은 별개의 두 집단에 속한 저술가들에게 맡겨졌다. 첫째 집단은 경제학의 마셜과 사회학의 월러스로 대표되는 실용주의적이며 명목론적인 사회과학자들이었다. 마셜과 월러스 같은 사람들은 보편적인 이론에 대한 19세기적인 열망을 포기하고 개별적인 현상들에 주목했다. 그들은 또한 사회개혁 등과 같이 그들의 이념을 실제로 적용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목적에서 동시대의 대륙인들보다 훨씬 온건했기 때문에 1900년 전후의 독일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들에게는 급박해 보였던 인식론적 문제들을 비교적 담담하게 대했다. 영국의 사회사상가들은 사변보다는 측정을, 인식의 문제보다는 구체적인 사실들을 선호했던 것이다. 그들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업적은 다음 세대에 케인스의 새로운 경제학으로 나타났다."(55-6)


"절대적 관념론을 뒤엎은 두 번째 사상가 집단은 케임브리지의 철학자 무어와 러셀이었다." "(실증주의와 헤겔을 모두 논박한) 무어의 주장은 이른바 〈선善〉이라는 것 그 자체는 〈매우 특이한 종류〉에 속하기 때문에 〈사실 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치의 영역을 사실(혹은 과학)의 영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입장은 거의 동시대에 나온 베버의 방법론적 주장과 흡사하다. 이 영국인과 독일인은 각자의 마음속에, 두 전선에서 동시에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 불안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독자들에게 아무런 주의도 없이 과학적 주장과 윤리적 주장 사이를 무분별하게 오고가는 '실증주의자'들의 태도에 대해 공격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정신의 영역에서는 그 두 가지 형태의 진술이 거대한 종합에 도달하리라는 '헤겔적 관념'을 공격했다. 무어의 표현처럼, 진리를 희생시킨 채 〈통일〉과 〈체계〉를 추구한다는 것은 철학의 할 일이 아니었다."(56)


"언어는 비트겐슈타인이 투쟁의 장소로 잡은 영역이었다. 언어에 대한 그의 공격은 '인간생활에서 말이 작용하는 방식'에 관한 보다 폭넓은 탐구의 일부분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은 『논고』를 쓴 이후에 그의 생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해명하고 있었다. 『논고』를 쓸 무렵에 그는 실재reality에서 언어가 도출된다고, 다시 말해 실재세계real world의 구조가 언어의 구조를 결정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이제 그 역逆이 진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즉, 실재를 이해하는 도구로서의 언어는 우리가 그 현실을 보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이 과거에 생각했던 것처럼, 철학적 분석이 언어의 논리적 구조의 기저에 놓여 있는 제일성齊一性, uniformity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었다. 그런 제일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철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한히 다양한 언어의 용례를 검토함으로써 보다 심원한 언어의 성질을 밝혀내는 것뿐이다."(74-5)


# 제일성 : 같은 조건에서 같은 현상을 되풀이하여 일으키도록 하는 질서의 원리나 공리


"사회사상의 입장에서 보면, 비트겐슈타인의 방법─독립적·객관적인 지지점도 없고 '의미와 필연성'도 그것을 구현하고 있는 언어행위를 통해서만 보존되는─에는 큰 이점이 있었다. 즉, 러셀과 빈 학파가 거의 막아버릴 뻔했던 전망을 다시 열어놓았던 것이다. 철학은 다시 구체적인 사례로, 현실적인 삶의 과정으로 돌아왔다. '언어를 생각하는 것'은 곧 '삶의 형식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비트겐슈타인은 간주했다. 철학자들은 일상적인 담론의 부정확성 그 자체에 신경을 쓰지 않고, 인간의 일상적인 관심사들의 모습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그 관심사들을 논의할 수 있었다. 카르납과 그의 동료들이 염려했던 것처럼 그 방법은 과학을 손상시킨다기보다는 통상 과학적 분석의 틀을 벗어나 있으면서도 과학적 분석에 중요한 의의를 갖는 인간 사고와 행위의 거대한 영역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바로 빈의 추종자들을 당황케 하는, 비트겐슈타인 사상의 예술적·신비적 측면이었다."(82)


"사회사상의 입장에서 볼 때, 그가 남긴 유산 가운데 가장 값진 측면은 1920년대─한편엔 분석철학과 논리실증주의, 다른 한편엔 현상학과 실존주의─분리되었던 사유양식들을 하나의 지적인 세계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전망을 마련했다는 데에 있다. 논리학자일 뿐만 아니라 신비론자이기까지 했던 그는 하이데거와 무어를 동일한 관점에서 읽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었다. 더욱이 언어에 대한 그의 태도를 통해, 그는 필연적으로 어휘가 부정확할 수밖에 없는 분야의 연구자들을 다시 진지한 사상가들의 대열 속에 영입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역사를 별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엄밀한 정의에 대한 혐오와 사건이 발생하는 전체 맥락에 대한 강조를 통해 전문 역사가의 유동적이고 관대한 언어 사용법에 접근해갔다. 언어에 관한 그의 조작 개념은 아주 엄격한 방법이 사용될 수 없는 탐구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존중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90-1)


3장 파시즘 비판


"지적 소양이 압도적으로 문학에 편중되어 있던 보르게세의 파시즘 비판은 생생하고 인상적이었다. 그의 저서는 충격 효과, 유익한 일화, 유창한 언어구사 등으로 넘쳐흘렀다. 그래서 바로 그 연극적 기질을 십분 발휘해 그는 의식적으로 예술적 표현을 하기에 적합한 파시즘의 여러 측면들─즉, 파시즘 집권 과정의 우여곡절, 파시즘의 문화적·역사적 맥락 등을 강조할 수 있었다. 보르게세는 무솔리니 통치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탈리아 민중이 그것을 수용했던 이유는 주로 성격상의 나약함에 있다고 확신했다. 즉, 파시즘 특유의 요소들은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것이었으며, 그것은 처음에는 마음속에 나타난 현상이었다가 나중에 가서야 대중사大衆史의 사실로 방향을 잡았다는 것이다." "파시즘은 '변혁'이 '실체'이며, '정열'이 '덕'이라고 가르쳤다. 힘이 곧 정의正義를 만들어낸다는 믿음과, 정의의 이념을 힘의 이념으로 대치하는 과정 속에서 파시즘은 하층 중산계급의 신조가 되었다."(97-8)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헤겔주의자들, 즉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등과 마찬가지로 만하임은 권위주의적 통치의 출현을 합리성의 부식과 연결시켰다. 그리고 그런 과정의 위험성은 바로 대규모 산업사회의 본성 속에 내재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미 베버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런 사회는 최고도로 합리적 계산을 가능케 하는 동시에 그에 상응해서 감정상의 만족에 대한 일련의 억압·단념에 의존하는 행동체계를 만들어냈다. 그 사회는 아주 정밀한 사회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비합리적 혼란도 매우 광범위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또 동시에 그 사회는 '승화되지 못한 심리적 에너지도 축적'해 왔기 대문에 그것은 결국 정교한 사회생활의 기구를 분쇄할 정도의 위협으로 작용했다. 기술적 합리성과 대중감정 간의 운명적인 이율배반─즉, 정교한 장치와 그 속에 내재하는 야만주의 간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에서 만하임은 파시즘 운동의 심리학적 차원을 간파할 수 있었다."(103)


"정신분석가로 훈련을 받았던 프롬은 순수히 심리학적이기만 한 설명에 만족을 못 느꼈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의 어떠한 기본적인 도식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시즘의 호소에 대한 장기적인 역사적 평가 속에서 이 양자의 요소들을 결합하고자 했다." "프롬의 저서에서 가장 독창적인 특징은 종교개혁기의 독일이 바이마르 시대와 나치 시대의 사회사를 예시하고 있다는 단순하고도 무시대적인 지적이었다. 추론은 계속된다. 각각의 경우에 급작스런 경제적 변동은 사회의 전통적인 구조를 뒤흔들어놓았다. 그래서 개인들의 무력감과 고독감은 증가했고, 모든 전통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는 더욱 현저해졌지만 개인적인 성취의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각 개인은 거대 세력들로부터 위협을 느꼈다. 20세기에서처럼 16세기에도 그 결과는 〈강제적인 확실성 추구〉 〈불안으로부터 종교적·이데올로기적 지도자, 즉 루터나 히틀러의 품 안으로의 절망적인 도피〉였다."(106)


"무솔리니가 오랫동안 '조합국가'라고 부르던 것에 마침내 실체를 부여한 1934년 '조합' 창설의 요란한 선포는 살베미니의 저서 『파시즘의 위협 아래에서』가 출현하는 데 직접적인 자극제가 되었다."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군수뇌, 고급관료 , 대기업가, 당지도자 등을 주요 구성원으로 하는 일종이 '집단과두체제'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 네 집단의 연동적인─상호 보강적인─이해관계가 정권에 내적인 응집력과 안정성을 부여했다." "궁극적으로는 파시스트의 지도자들이 조정 역할을 하긴 했지만, 그들의 권력─그리고 총통 자신의 권력─도 과두체제의 다른 구성원들의 필요와 압력에 의해 제한되었으며 결국 그들과의 협조관계 속에서만 존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총통은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면서 이 행동준칙을 잊어버렸다. 그가 평소에 아끼던, 그리고 그를 지원해오던 이탈리아 사회의 자산가들은 하나씩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으며, 마침내 1943년 여름, 그는 자신의 당 지도자들에 의해 타도되었다."(124-6)


"노이만 역시 독일의 지배계급은 이해관계가 얽히고 상호보완적이기도 한 네 개의 집단─즉 대기업, 당, 관료, 군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독일의 기업이 카르텔화되어 가는 과정과, 공식적으로 인정된 지역적·기능적 집단들이 대규모 콘체른에 지배되어 가는 과정 등을 추적함으로써, 독일노동전선의 기만책과 노동계급의 '원자화' 과정을 밝혀내게 되었다. 그의 가장 노련한 분석이었던 이 작업에서, 그는 계급화해라는 국가사회주의자들의 허울좋은 가면을 체계적으로 벗겨냄으로써 노동문제 전문변호사라는 그의 옛 직업으로 되돌아갔다. 더욱이 그는 나치 경제체제의 이른바 당 부문이라는 것도 나치 수령들의 합법화된 강도행위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은 점점 더 대자본가들과 공생 상태에 돌입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폭력을 휘두르던 자들은 점점 기업가로 변신해가고 있으며, 기업가들은 점점 폭력을 휘두르는 자로 변화해가고 있다〉고 그는 결론지었다."(136-7)


"1951년 초에 출판된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은 과장이 심한 데다가 대단히 편향되어 있고 자료로 뒷받침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한 해석을 잇달아 전개하고 있다." "가령, 그녀는 공산주의가 나치즘과 동일한 이데올로기를 갖는다고 독자들에게 제시하면서도,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지는 아무런 적절한 설명도 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녀는 기본적으로 전체주의를 광기와 동일시함으로써 공산주의의 실천 가운데 경제적 합리성을 아예 무시해버렸다." "서문에서 아렌트는 그 책이 집필되던 시기의 환경, 즉 '두 강대국 간의 제3차 세계대전'을 예견하면서 생활하던 경험에 대해 언급했다. 1950년경만 해도 그런 파국적인 예상은 그리 신기한 것이 아니었지만, 5년이 채 못 되어 그것은 이미 지나친 과장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일종의 '이념형'으로써의 전체주의는 1950년대 말 단순한 도식적인 분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이데올로기적 상황 속에서 점점 효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156-8)


"전 산업적 가치─다시 회복된 공동체 내에서의 계급 간 화해─가 파시즘의 기본목표 중의 하나였다면, 그것을 성취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살베미니와 노이만이 이미 제시했던 데로 간단히 답변하자면, 그 이유는 대규모 산업자본 세력이 분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파시즘 권력이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면, 결국 그들이 요구하는 경제적 토대를 제공해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중공업밖에 없었다. 그리고 주요 기업가들은 그들 자신이 필요불가결한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군사적 준비와 전 산업공동체의 가치에로의 귀환은 양립할 수 없는 목표들이었으며,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목표의 서열상 그 가운데 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파시스트 체제에서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성이라는 주장은 마침내 기묘한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즉, 경제의 현상질서는 유지되었던 반면, 그 운동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희생되고 말았던 것이다."(165)


4장 대중사회 비판


"대중들의 위협에 대한 경고는 서구의 사회사상에서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19세기엔 니체와 부르크하르트, 토크빌과 애덤스 등 다양한 사람들이 지적한 불길한 예감도 있었고, 20세기의 첫 세대에선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향수어린 명상과 이탈리아의 3인조인 크로체, 모스카, 파레토 등의 보다 체계적인 분석도 나왔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사회적 지위와 지적인 입장에서 귀족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중이 선거권을 행사하게 되면서부터 나타날 통속성 혹은 취향과 견해의 '평준화'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의 대중사회 비판은 그 안에 민주주의적 열망을 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1950년대 미국에 관한 글을 썼던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도덕적 목적은 지위와 문화적 특권에 기초를 둔 사회로부터 아직까지 남아 있는 부분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서 상실된 것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대중 자신을 그들의 해방의 열매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171)


"그래서 19세기에는 자본주의적 관계의 '경제적' 비판으로 성립되었던 것이, 이제는 망명한 대중사회 연구자들의 손에서 대규모 산업이 만들어낸 기업문명에 대한 '문화적' 비판으로 변형되었다. 단순한 풍요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다는 가정이 그 분석 속에 함축되어 있었다." "인간이 그들의 일(그리고 놀이)을 '소외된 것' 혹은 '물화物化된 것'으로 인식하는 한─소외Entfremdung와 물화Verdinglichung를 본질로 하는 세계 속에서 인간이 그 자신의 사물로의 변환을 감수하는 한─생산수단의 소유권을 단순히 기술적으로만 이전하는 데 희망을 건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소련이 그 적절한 실례였다." "기술적 합리성과 현대 대중의 미적·도덕적 가치 사이에서 연관관계를 발견하는 일은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에게 맡겨진 과제였다. 이들이 볼 때, 파시즘도 자유민주주의의 대극에 서는 것이 아니라, 산업화된 서구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한 경향─비합리적 지배의 경향─의 '가장 극단적인 실례'였다."(172-3)


"망명자들의 대중사회 비판 뒤에 숨어 있던 대전제는 미국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던 생소한 세계관─즉, 자신의 원천인 헤겔로 다시 되돌아감으로써 면모를 일신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이었다." "루카치는 물론, 그와 관계가 소원했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역시 1920년대부터 1960년까지의 기간에 걸쳐 마르스크주의에 고양된 새로운 철학적 입장을 부여했던 주관주의적 재해석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람시는 20세기 신新마르크스주의─19세기 말의 과학적 가면을 벗어버리고 19세기 초의 헤겔적 토대로 되돌아간 마르크스주의─를 이탈리아에서 고독하게 구현한 선구자이며, 메를로-퐁티는 신마르크스주의에 자유주의적 색채를 입혀 뒤늦게나마 프랑스에 선전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이런 성향의 이데올로그들에게는 '소외'라는 개념이 사회분석의 관건이 되었으며, 다양한 사상가들을 한데 묶어주는 핵심적인 용어이기도 했다."(175-6)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이란, 일련의 강력한 집중포화에 의해 주제가 선명히 부각되거나 간파될 때까지 부정에 부정을 계속해 나가는 사유양식을 의미했다. 비판이론은 그 정의定義와 실제에서 비체계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폐쇄적인 철학에 적대적이었다. 그래서 비판이론이 헤겔에게 빚을 졌다면 그것은 비판이론의 최종적인 형태라기보다는 공격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비판이론은 부정의 과정을 부단히 전개시켜 나가는 가운데 헤겔 자신의 체계까지도 능가하여 그것과 적대되는 위치에 서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는 방법론적으로 마르크스의 변증법보다도 더 파괴적인 새로운 형태의 변증법, 즉 '종합의 계기를 갖지 않는 변증법'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이론은, '사물'이 인간의 지각에 우선한다는 단호한 주장과, 세련되기는 했지만 극도로 추상적인 표현양식 사이에 불안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이 중 후자의 의미에서 그들은 여전히 관념론적이고 형이상학적 틀 속에 머물러 있었다."(181-2)


"『계몽의 변증법』에서 본격적으로 탐구되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목적은 '왜 인류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상태에 돌입하지 못하고 새로운 야만상태로 떨어졌는지' 그 이유를 발견해내는 것이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들의 목적은 계몽주의가 왜 자기 파멸에 빠지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저자들은 이 계몽주의라는 용어를 채택할 때, 18세기의 진보적인 사상이라는 뜻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 즉 베버가 고전적으로 정의해놓은 바와 같은 합리화rationalization와 각성disenchantment의 전과정이라는 뜻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신화를 분쇄하려 노력했다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주장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것은 다시금 또 하나의 신화─거짓 명석성의 신화─로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완전히 배반당하지 않기 위해, 계몽의 개념을 다시 음미해봄으로써 과거의 희망을 구출해내는 일은 바로 현대의 지식인들에게 맡겨진 과제였다."(196-7)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대중문화의 대중성이란 것이 사실은 가식이며 조작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대중문화를 의식적으로 하나의 산업으로 표현하려 했다. 그것은 전혀 민주주의적이지 못하고 지배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과거의 위대한 예술은 일종의 '부정적인 진리'를 구현하고 있었던 반면─고전음악조차 '완전무결한 양식'의 명령을 검증해보기도 했던 데에 반해─현대의 문화산업은 예술을 '절대적 모방'으로 환원시켜버렸다. 그것은 모든 것에 동일한 각인을 남긴다. 그것은 비극을 포기하고 '인간의 자조自嘲' 혹은 '인간성의 풍자'를 장난스런 모습으로 보여줌으로써 누구에게나 쉽게 접근한다." "그들이 『계몽의 변증법』을 쓸 당시 그들은 할리우드 근처에 살면서, 오락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독일 망명자들과 어울리곤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영화는 아주 자연스럽게 '생활이 관리받는 세계'에서의 암묵적인 강제성의 적절한 실례로 그들에게 인식될 수 있었다."(199-200)


"1964년에 『일차원적 인간』을 내놓은 마르쿠제는 미국─선진산업문명이 최고도로 발달한 곳─에서 부드럽고 합리적이며 민주적인 부자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선진산업사회란 모든 부문에서 과학 기술이 승리를 거둔 사회, 복지국가와 전쟁국가의 경향이 외적으로는 아무런 모순도 없이 공존하는 사회, 여러 가치들의 보편적인 평준화로 시민들이 자신의 현실적인 선택권의 박탈을 깨달을 수 없게 된 사회, 국민들이 통치자의 말은 믿지 않으면서도─혹은 노골적으로 불신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그 말에 따라' 행동하는 사회, 현상이 일체의 초월을 거부하기 때문에 사회적 규제를 목적으로 더 이상 파시즘이 요구되지 않는 사회, 마르크스주의가 아직도 이론적으로는 적용될 수 있지만 역사적 행위자를 상실한 사회,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미하나마 유일한 희망은 하층의 국외자들이 내보이는 분노와 버젓한 삶에 대한 열망에서밖에 찾을 수 없는 사회라고 보았다."(224)


# 다만 이러한 사회분석은 당시 미국 출신 비판자들의 시각과 크게 다르거나 그 수준을 넘어선 것은 아니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산업화되기 이전의 독일 정신세계에 살고 있었다는 점에서 마르쿠제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이 정말 이해하고 있던 것은 헤겔적인 청년 마르크스였다. 자본주의의 산물에 대한 그들의 정열적인 항의는, 자본주의의 합리성을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로 진전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단계로 보는 후기 마르크스의 평가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그들에게 경제적 합리화의 과정은 무엇보다도 계몽주의가 조작으로 타락해간다는 중요한 징후로 이해되었다. 놀랍게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생각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상의 적들이 생각하는 '또 다른' 독일관─즉, 전원적 가치와 공동체적 연대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시대착오적이고 낭만화된 독일─에 공명했다. 다시 말해 따뜻하고 직접적인 인간관계로 이루어진 사회에 대한 열망 및 문학·예술을 통해 나타나는 고급 문화와 세련된 취향을 유기체적이면서도 더불어 함께 이해하려는 열망이 대단히 흡사했던 것이다."(232)


5장 자아심리학의 출현


"프로이트 자신은 그가 초기에 발견한 사항들─무의식의 우위성과 유아기의 성욕(및 그에 수반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을 정통성의 최소한의 요건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지형학적 사고방식과 (충동과 자아의 방어 메커니즘을 다루는) 역동적 사고방식을 정신분석 운동에 소속되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설명방식, 즉 심리적 에너지의 저장과 소비에 관한 '경제적' 용어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프로이트의 해석방식 가운데 가장 모호하고 가장 낡은 것으로 취급되어왔으며 사실 19세기 기계론적 가정의 흔적을 아주 뚜렷하게 담고 있었다." "그러나 망명자들과 미국 태생의 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유산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 문제의 결정적인 중요성에 대해서만은 동의할 수 있었다. 즉, 사회에 대한 개인의 관계, 특히 집단생활의 환경에 적응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개인적 변화의 문제가 그것이었다."(238-9)


"프로이트 좌파로 분류되는 마르쿠제는 직접 정신분석의 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으며 임상경험을 이용할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단지 프로이트가 고안해낸 치료법의 함축적인 의미를 고찰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외의 두 사람─라이히와 로하임─은 모두 정식으로 훈련받은 임상가들이었으며, 동시에 마르쿠제의 급진주의를 그대로 따르면서 정신분석학 내부에 좌익의 맹아를 만들어냈다. 마르쿠제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경우에서도 급진주의는 3중의 것이었다. 즉, 성적, 정치적, 문체상의 급진주의를 모두 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性에의 열광'과 성적 쾌락이 인간 행복의 궁극적인 척도라는 신념에다가, 정치와 성의 문제는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본능의 억압은 정치적 지배의 중요한 무기로 작용한다는 신념을 연결시켰다. 그리고 문체의 측면에서 볼 때 이 세 사람은 모두 극단적인 형태의 진술을 즐겨 사용했으며 주어진 논의를 궁극적인 지점에 이르기까지 추구해 나갔다."(241)


"좌파가 프로이트 이상으로 성의 우위성을 강조했다면, 신프로이트 학파는 성의 문제에 관한 프로이트의 보다 단호한 진술들을 수정하려고 노력했으며, 성적 요소 이외의 것들이 정신분석이론에서 보다 큰 중요성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려 했다. 주로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프로이트 우파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모두 일률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이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망명학자들은 미국이라는 환경에 대해 그리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들이 그 무렵 베를린이나 빈에서 가졌던 체험들 때문에 결코 그들은 정치적 현상에 대해 호의적인 견해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받아들여준 나라가 지금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처럼 불안스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결국 미국 식민주의의 신조와 실제를 그들의 정신분석 작업의 전제로 받아들였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보수주의로의 전향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241-3)


"원초적인 충동이라는 단순한 도식에 대한 불만은 단지 신프로이트 학파의 수정주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소장정신분석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환원주의적임을 발견했으며, 보다 복잡한 동기화의 이론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는 일종의 동의가 이루어졌다. 즉, 충동이 점차 길들여져 가는 현상을 설명해줄 수 있는 일종의 동기체계에 대해 언급하는 경향과, 안정되어 있고 일상적이며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사유·행동의 패턴을 내포하는 퍼스낼리티 기능관을 채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이렇게 하면서도 프로이트의 기본적인 원칙들에 충실하기란 고도의 이론적인 숙련이 필요한 일이었다. 무의식을 고수하면서 그 위에 세련된 설명구조를 마련하는 것─즉, 환원주의를 포기하면서 본말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1923년, 프로이트가 『자아와 이드』에서 공표한 구조적 3분법─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은 이들 프로이트 중도파에게 일종의 행동방침이었다."(245-6)


"하르트만은 일반 심리학, 다시 말해 정신생활에 대한 일반 이론을 확립하고자 했으며, 이때 '정신분석학과 그 이외의 심리학의 합류 지점'이 바로 자아심리학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하르트만은 '자아의 역할'을 규정하면서 프로이트 부녀의 정식을 훨씬 넘어서려 했다. 그는 프로이트가 자아의 '체계화' 기능이라고 부른 것을 확대하면서, 그리고 자아의 적응작업을 '현실지배'로 특징지으면서 내적 갈등에 대한 고전적 정신분석학의 강조를 현저하게 축소시켰다. 하르트만은 환경에의 모든 적응 혹은 모든 학습과 성숙과정이 갈등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개인의 발달과정에서 나타는 수많은 현상들─지각, 의도, 대상이해 등─은 그가 자아의 '갈등없는 영역'이라고 명명한 것 속에서 일어난다. 이 영역은 자아의 힘이라는 특수한 영역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는 이 힘을 '성격'과 '의지'라는 전통적인 도덕적 용어로 설명하는 가운데 위험스럽게도 수정주의적 어휘에 접근해갔다."(253)


"하르트만은 〈자아〉라는 용어가 〈정신분석가들 사이에서조차 매우 모호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자아'의 정신분석학적인 의미를 그것이 대중적 용법 혹은 철학적 용법에서 획득한 여타의 의미로부터 구별해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부정적인 용어로 정의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었다. 즉, 프로이트적인 치료법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퍼스탤리티personality 혹은 개인individual과 동의어가 아니며, 경험의 객체object에 대립되는 주체subject와도 합치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단순한 인식 혹은 감정도 분명히 아니다. 정신분석학에서 자아는 매우 다른 질서를 갖는 개념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퍼스낼리티의 하부구조〉이며 〈그 자체의 기능에 의해 정의된다.〉 이 기능은 무수히 많기 때문에 나열하기가 곤란하다(물론 이드나 초자아의 기능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을 몇 가지 들자면 현실에의 적응, 행동, 사고 등과 안나 프로이트가 연구했던 방어를 들 수 있다."(256)


"정신분석학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갈등'을 설명함으로써 사회학적 인식에 기여할 수 있었다. 인류학자들은 이런 문제에 이미 익숙해 있었지만, 하르트만의 관찰에 의하면, '인간'이 주어진 환경조건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라는 문제는 문화인류학의 충격에 의해 점점 무시되고 '특정문화의 구성원'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라는 문제만 부각되었다. 하르트만의 이러한 두 가지 차이점 간에 존재하는 모순은 단지 외면적인 것일 뿐이다. 양자 모두 그가 평소에 철저하게 견지하고 있던 직업적·개인적 신념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자아의 자율성'─자아의 성장 및 강화─은 개별적인 인간과 보편자로서의 인간 모두에게 특유한 한 가지 목적 속에서 두 가지 견해를 결합시킨다." "어떤 문화권에 사는 인간이든 모두 성장하는 과정─특히 초자아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유사한 경험을 할 것이기 때문에, 인류학자나 정신분석가들이 몇 가지의 보편적인 윤리적 평가작용을 발견했던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다."(261-5)


"1960년대에 와서 역사가들은 정신분석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랫동안 찾던, 개인에서 대중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를 인류학이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인류학에까지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한 사회가 스스로를 정의할 때 사용하는 상징, 말 혹은 제도적 형식으로 표현되는 공통적인 의미, 그리고 인간이 그들에게 기대되는 것을 내면화하는 방식─즉, 카디너의 용어를 빌리자면, 제2차적인 '투사체계'의 과정─등을 문화인류학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데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회과학자나 역사학자들도 점점 이 두 영역 간의 공동연구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결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회연구에서 정신분석이론을 체게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서 동의에 도달할 가능성은 별로, 아니 전혀 없었다. 하르트만도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점진적이고 축적적인 '상호 침투' 과정이었다. 그렇게 보자면 프로이트 이론의 '적용'이란 결코 적절한 표현이 아니었다."(294-5)


6장 결론 : 대변혁


"1950년대 초 유럽의 생활 및 연구조건이 전쟁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자 망명 지식인들은 '귀향'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문화적 충성심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경제적 안락을 택할 것인가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문제 말고도, 망명자들에게는 세기의 중반기에 보다 특수한 상황─즉, 냉전과 그에 수반된 '매카시즘'의 파도─이 닥쳐왔다. 망명의 문제에 대해 글을 써오던 사람들도 이번에 닥친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아마 그 주제는 그들이 전면적으로 탐구하기에는 지나치게 미묘하고도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판 파시즘에 대한 공포가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망설이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추진력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과, 대부분의 미국 출신 지식인들이 그들의 정부를 지원하거나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 때 미국에 남은 망명자들 중 지도적인 인사들이 미국의 국내 및 대외정책이 가는 길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했다는 사실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300-1)


"1941년 미국의 선전포고 이후 본래의 미국인들과 새로운 이주자들은 반파시즘 투쟁에 함께 나섰지만, 1940년대 후반에 이르자 이 결속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아렌트처럼 몇몇 주목할 만한 예외도 있었으나, 그들은 공산주의를 나치즘과 마찬가지로 '전체주의적'인 것으로 규정한다든가 스탈린을 히틀러와 같은 인물로 보는 태도를 거부했다. 이런 거부 속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심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파시즘은 그들 대부분이 1920년대에 견지하고 있던 윤리적 상대주의 혹은 판단 유보의 태도를 결국 해체시키는 촉진제 구실을 했다. 또 그것은 그들에게 악의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선'에 대한 나름의 감각을 갖도록 했다. 그래서 그들은 나치의 기록을 완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보면서도, 공산주의─심지어 그것이 스탈린에 의해 왜곡된 공산주의라 하더라도─에 대해서만은 그 기원과 미래에 대한 잠재능력 속에 계몽주의의 가냘픈 희망 혹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하려 했던 것이다."(301-2)


"더욱 넓게 이야기하자면 1930년부터 1945년까지 15년의 기간은 망명자들에게 정신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그 기간 동안 목격할 수 있었던 3중의 전투─경제공황, 국내의 압제, 인종적 정복 등에 대항한─는 그들에게 남은 인생의 중심적인 이데올로기적 경험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동방으로부터의 새로운 위협에 철저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서구의 재동원─이번에는 스탈린주의에 대해─이 과거와 같은 대의명분을 결여하고 있다고 확신하기까지 했다. 토마스 만은 히틀러가 많은 사람의 감정을 아주 단순화시켜주며, 극도로 명쾌한 거부의 태도와 명확하고 필사적인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쓸 정도였다. 그에 대한 투쟁의 기간은 '도덕적으로 선한 시기'였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에 그 이후의 시기는 윤리 수준이 하락한 시기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1930년대를 '침울한 부정직의 시대'라고 묘사한 미국 출신 비판자들의 견해와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302)


"언어의 문제는 중부 유럽의 사상이 도버 해협 혹은 대서양을 건너감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이익과 손실을 평가할 때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표현의 뉘앙스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분야─즉, 사용되는 중요한 용어들이 관습적이거나 국제적인 것들이며, 그 의미까지도 직설적이고 명백한 분야─는 영미의 지적 생활에 노출됨으로써 거의 순수한 이익만을 얻었다. 자연과학 또는 방법의 정확성에서 그것에 접근하는 분야에서는 사상의 융합 혹은 공생을 운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뚜렷한 영역을 가진 경험적 연구나 개별적 연구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파시즘 비판자들의 저서를 영어로 출판해야 했을 때, 그들의 주장이 평이한 서술에 적합한 언어로 쓰임으로써 보다 예리하고 보다 명확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인들이 항상 자신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오던 사변적인 사고양식에서는 그러한 융합이 불완전하거나 실패에 그치고 말았다."(334)


"망명자 세대는 이론의 정교화─피상적인 경험적 연구를 넘어서는 추상화의 차원─라는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좀 뒤떨어졌지만, 언어와 가치에 관한 고찰이라는 면에서는 그들의 선배들보다 넓은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세기의 중반기가 되자 과거와 같은 요약적 방식으로 인간의 담론을 취급하는 태도는 지적으로 설득력을 잃었다. 그 사이 두 가지의 새로운 사회 연구 분야─언어학과 인류학─가 개발됨에 따라, 여타 분야의 보다 통찰력 있는 연구자라면 그들 자신의 언어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소통의 형식에 관한 강력한 관심은 비트겐슈타인과 아도르노의 업적을 메를로-퐁티나 구조주의자들과 같은 프랑스 소장학자들의 업적에 연결시켜주었다. 그리고 이런 재검토 과정에서 말이 반드시─정신분석학의 '담화요법talking cure'에서처럼─이해로 통하는 길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기서 음악이 그에 대한 대안 또는 보다 유효한 표현수단으로 등장했다."(336-7)


"그렇지만 음악에 의존했을 경우, 의미를 명료하게 만들 수 없는 영역이 생겨났다. 결국 직접적인 일대일의 의사소통 가능성에 대한 사회사상가의 열망은 무산된 셈이었다. 적어도 이론에서만큼은,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난 연구자들도 옳다고 인정할 만한 사회학적 증명을 자기가 고안해낼 수 있을 것이라던 베버의 확신은 이제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자기회의의 과정을 통해 사회사상가는 보통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던 가치체계와는 다른 가치체계를 탐구하게 되었다." "사실 망명세대의 업적 중 많은 부분이, 학문적 성실성과 정열적인 윤리적 실행을 동시에 간직한 채 인간사를 논의하는 방법을 자기 자신과 후계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지적인 성실성은 사회이론가의 최고 이상으로 계속 남아 있기는 하겠지만, 이제 그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사상의 거장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자기 인식에 의존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그 성실성에 덧붙여졌다."(3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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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사회 - 서구 사회사상의 재해석: 1890~1930 개마고원 서구 지성사 3부작 1
스튜어트 휴즈 지음, 황문수 옮김 / 개마고원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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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몇 가지 예비적 고찰


"인간 정신에는 지성의 영역과 구별되는, 분명하지 않은 감정과 상투적인 경제 과정의 영역이 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토대substratum'라고 불렀다. 마르크스의 경우, 토대에 대해 알아야 할 중요한 점은 인간의 생활을 가차없이 제약하는 생산제도의 성격이었다. 그다음 세대의 위대한 사회사상가들의 경우에는, 인간 감정의 비합리적이고 사실상 변하지 않는 성질─프로이트가 흔히 '충동drives'이라고 부르고, 파레토가 '잔여residues'라고 부른 것, 인간 행위를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것─에 결정적인 관심을 가졌다." "인간이란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여러 방안 중에서 자유롭게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각적이며 이성적인 존재라는, 18세기 또는 19세기 초의 인간상을 그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환상이라면서 포기했다. 인간의 자유는─물리적 환경에 의해서든, 또는 정서적 조건에 의해서든─불가피하게 제한을 받게 마련이라는 이러한 확신은,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현대 사회과학의 대전제가 되었다."(18-9)


# 파레토는 잔여를 개인의 행위를 추동하는 명예, 미덕, 조국과 같은 이상 속에 표현된 감상과 느낌의 현시로 정의했다. 그는 잔여를 어떤 객관적 실체도 가지지 않은 기본적인 심적 상태로 보았다.


"역사의 본질은 '변화'이다. 그리고 변화는 최소한 일부라도 자각적 정신활동의 결과여야 하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기로 결단했음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거대한 비개인적인 힘'은 단지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통계학적인 의미에서는 수많은 선택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형이상학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대체로 각자의 선택이 자유롭다고 확신한다. 우리의 사상적 용어와 범주에도 이러한 확신이 내포되어 있다." "반복되는 것, 비합리적인 것, 준準본능적인 것이 역사의 토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 자체의 주제일 수는 없다. 논리적으로 한정된 시간적 계기繼起에서 정연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만이 역사의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에서 행위와 사상은 분리할 수 없을 만큼 뒤얽혀 있다. 지성의 역사는 이러한 공통된 자료를 행위의 관점에서보다는 오히려 사상의 관점에서 다루는 한 가지 방법을 말한다."(20-1)


"이 연구는 일련의 지적 전기傳記가 결코 아니다. 목차를 살펴보더라도, 개별 사상가의 저술에 대한 분석이, 보다 일반적인 개념 구조의 어디에 초점을 두고 있는가 하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시대를 통해 한 관념이 어떠한 부침浮沈을 겪었는가를 보여주는 지도를 작성하려는 것은 위험한 장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때에나 사물을, 단절도 불확실한 점도 없는 탄탄한 유형에 따라 배열하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개개의 사례들을 살펴봐야 한다. 결국 개인이야말로 역사연구의 궁극적 단위이다. 관념 자체는─사상의 '경향' '운동' '조류'와 마찬가지로─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관념은 아무리 충실하더라도 개인의 사상을 탄생시키지 못한다(많은 철학자들이 그렇게 상상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한 개인이 어느때 어느 곳에서 자기자신의 마음속에서 그 관념을 산출할 때까지, 관념은 전혀 현실성을 갖지 못한다."(39)


2장 1890년대의 10년 : 실증주의에의 반항


# 여기서의 실증주의는 자연과학에서 유추한 방법론을 가지고 인간의 행동을 논하려는 경향 전체를 가리키는 느슨한 규정이다.


"1890년대의 주요 지적 혁신자들은 인간 행동의 비합리적 동기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비논리적인 것, 비문명적인 것, 설명할 수 없는 것의 재발견에 사로잡혀 있었고 거의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비합리주의자'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위험할 정도로 모호하다. 이것은 무의식의 영역에 대한 관용, 심지어는 편애까지도 암시한다. 사실 그 반대가 진실이었다. 1890년대의 사상가들은 비합리적인 것을 제거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비합리적인 것에 천착함으로써 그들은 이를 길들여 인간의 건설적 목표를 위해 사용하려고 했다." "매우 한정된 의미 이외에, 그들을 비합리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그 대신 '반주지주의자'라는 말이 때때로 사용되어왔다. 이러한 규정은 유동적이고 포괄적이다. 이는 관념론과 선험a priori 철학, 곧 1세기 반 전의 추상적 사상으로부터의 이탈을 암시하며, 바로 이 점이 모든 점에서 상당히 동떨어진 뒤르켐과 소렐 같은 저술가들을 결합시켰다."(52-3)


"원래의 18세기적 또는 공리주의적 형태에서 실증주의는, 사회에서 인간의 문제는 쉽게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한 주지주의적 철학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다윈주의의 영향 아래 실증주의적 신조는 그 합리주의적 특색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곧 '유전'과 '환경'이 인간 행동의 주요한 결정 요인으로서 의식적이고 논리적인 선택을 대신하게 되었다. 홉스적인 자연상태(이제는 '생존경쟁'이라고 불리게 된)는 인간과 인간관계의 특성을 파악하는 견해로서 품위 있는 사회질서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일종의 과학적 운명론이었다. 그것은 18세기 철학자들 또는 19세기 전반 영국 공리주의자들의 특징이었던 쾌활한 낙관적 태도와 대립하는 것이었다. 실증주의의 궁극적인 아이러는 극단적인 주지주의로서 출발한 것이 결국은 철저한 반주지주의 철학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면에서 1890년대의 젊은 사상가들은 '비합리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합리적 탐구의 권리를 옹호하려고 노력했다."(55)


"전쟁 전에는 자유주의적인 독일의 지성인들마저 거의 모두가 의심의 여지없는 애국자였다. 독일의 국력 향상을 그들은 교의로 받아들였다. 그들의 아버지 세대는,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 문제를 해결한 방식에 국가적 가치를 위한 자유주의적 가치의 희생이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스마르크의 방식을 항의도 없이, 오히려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베버나 마이네케 같은 사람들이 성장한 분위기였다. 순응주의자였던 그들은 몹시 망설이면서 그들 사회의 지배적 가치에 대한 정당한 반대에 나섰다." "저명한 지성인들은 거의 모두 빌헬름 치하의 독일의 사회적 분위기─그 허풍, 벼락부자적인 속물근성, '비잔틴주의'라고 불리는 아첨─에 어떤 형태로든 반발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무수한 실(絲)에 의해 그 사회 안의 지배 세력에 묶여 있었다. 그들은 교수로서 상위 중산계급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철저하게 반대하던 헌법하에서 조직된 정부의 관리였다."(65-6)


"그들의 학문적 진지성과 인간적 품위에도 불구하고, 독일 교수들은 그들의 높은 신분의 포로였다. 일반 민중은 그들을 존경하고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거의 기적으로 보일 만큼 열렬한 관심으로 그들의 추상적 논의에 따르면서도, 그들을 채용한 대부분의 정부와 마찬가지로 교수들에게서 국가 공동체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태도를 기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교수들도 순응하는 것을 별로 싫어하지 않았다. 일부 교수들은 체제의 '국내적' 성격에 대해서는 격렬한 비판을 했겠지만, 외교정책의 영역에서는 사실상 모두가 민족주의의 틀 속에 남아 있었다." "베버는 독일 대학 생활의 위선─짐멜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미헬스는 사회주의자이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대학 강단에서 추방된 상황에서 참된 학문의 자유를 말해도 소용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했다." "따라서 우리는 1890년에서부터 1914년까지의 독일에서 상보적이면서도 모순되는 두 과정─문화적 부활과 '지식인의 이탈'의 시작─을 볼 수 있다."(67-8)


"프랑스의 지적 생활을 독일의 지적 생활과 비교해볼 때, 우리는 두 가지 뚜렷한 차이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문화적 활동의 중앙 집중과 상당히 비판적 정신을 가진 지성인들의 자기 나라 정부에 대한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이다. 아마도 이 두 가지 사항은, 이 연구의 등장인물 중에는 독일인보다는 프랑스인이 많으면서도 프랑스인 중에는 베버나 프로이트 같은 거물이 없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1890년대와 1900년대 초의 프랑스 생활의 외적 환경은 정신생활에 유리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당국의 압박과 지역적 고립이 독일에서처럼 사상에 대한 심각한 장애가 되지 않았던 상황에서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사태와 대결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프랑스의 지성인은 국가의 자유주의적 태도와 동료들의 우정이 뒷받침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프랑스에서 외로운 천재란 독일에서처럼 특징적인 문화적 소산이 아니었다."(70-1)


"이 연구에 나오는 프랑스의 주역들은 모두 어떠한 의미에서든 공화주의자였다. 자기가 그 아래에서 살고 있는 제도를 열렬히 지지한 사람은 뒤르켐뿐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밖의 사람들도 모두 어느 정도는 조건부로 공화국과 정치적 민주주의를 시인하고 있었다(소렐의 변절도 세기가 바뀐 다음의 일이었다). 1890년대 말 드레퓌스 사건의 와중에서 공화국이 존립 자체를 위협받는 듯했을 때, 그들은 모두 힘을 합쳐 공화국을 옹호했다." "이렇듯 어떤 경우에 공화국은 열렬하게 옹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특히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해당되었다. 유대인들에게는 국가적 모토인 '평등'이라는 말이 공허한 상징 이상이었다. 그들의 경우 공화국에 대한 애국심은 충심의 감사로부터 우러나오는 당연한 것이었다." "프랑스의 저술가나 학자들은 프랑스가 문명세계의 중심이며 프랑스어가 지적 소통을 위한 가장 완벽한 수단이라고 확신했다. 프랑스의 지성인들은 다른 곳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72-5)


3장 마르크스주의 비판


"1890년대의 마르크스 비판자들은 마르크스 이론의 중심에 있는 계시적 견해에 이르러, 사회사상가로서의 마르크스와 정치선동가로서의 마르크스 사이에 놓인 잘 알려져 있는 대조를 발견했다." "그것은 1890년대의 비판자들이 의식적이기보다는 암암리에 제기한 의문이었다. 사회과학자로서의 마르크스는 분명히 계몽주의의 합리적 전통에 속해 있었다. 학자의 입장에서 그는 관대하고 공정했으며, 적들─자본주의자들과 산업부르주아지들─의 저술도 공평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예언자로서의 마르크스는 분노한 사람이었고 논쟁에서는 반대론자들에게 악의에 찬 조소를 퍼부었다. 후자의 입장에서 그의 저술은 우파에 의해서도 좌파에 의해서도 계몽주의의 무덤을 파는 인부의 교과서로 이용되었다. 18세기 유럽 유산을 재평가하는 것이 1890년대 새로운 사상가들의 중심 과제의 하나여야 한다면, 마르크스를 어느 정도까지 계몽주의의 소산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본질적인 과제였다."(89)


"뒤르켐─그는 관점과 지향성에서 보면 실증주의자였으나 콩트나 스펜서가 물려준 실증주의적 전통에 만족하지 않았다─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에서 추상적 사변이 아니라 경험적 자료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학의 지적 가능성을 발견했다. 파레토─역시 실증주의자였으나 마르크스에게 보다 적대적이었고 마르크스를 주로 전문적 경제학의 관점에서 판단했다─는 사회주의의 신화를 파괴함으로써 사회 갈등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이론을 처음으로 구상하게 되었다. 반쯤은 19세기의 과학자이고 반쯤은 20세기의 예언자였던 소렐은 때로는 지적 명석성을 위해서, 때로는 도덕적 향상을 위해서 거듭하여 마르크스에게로 되돌아갔다. 크로체의 경우, 마르크스주의는 실증주의자를 때릴 몽둥이를 제공하는 동시에 문학과 예술을 모델로 한 그의 관념론적 역사관을 수정해주었다. 이들은 모두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과학적' 타당성이라는 결정적인 문제에 심취해 있었다."(92-3)


# 마르크스주의 비판

1. 뒤르켐 : 사회주의는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전적으로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고, 따라서 '참된 과학적 성격'을 갖고 있지 않다.

2. 파레토 : 민중의 지도자란 현실 권력에 접근할 길이 없다고 느끼는 불만분자로서, 대혁명은 옛 엘리트와 새로운 엘리트들의 투쟁에 불과하다.

3. 크로체 : 마르크스의 이론은 '특정한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것'인데, 마르크스는 그 기점을 넘어서서 '이상적이고 도식적인' 정의에 도달했다.

4. 소렐 : 사회주의는 '과학'이 아니라 상징적 형식으로 표현된 '사회시社會詩'이다. 이 도덕운동의 본질은 직접 참여하고 공감해야 이해할 수 있다.


"가장 광범한 관점에서 말하다면, 1890년대의 비판자들이 이루어놓은 일은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의 핵심적 강조점을 근본적으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그들은 경제학으로부터 사회생활의 도덕적·문화적 측면으로 강조점을 옮겨놓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마르크스의 가르침에서, 그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만든 정치운동의 전술적 필수요건이라는 면을 넘어서서 일반적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되는 면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따라서 그들은 마르크스의 저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혁명적 교훈과 일반적 사회이론을 분리하는 본질적인 과제를 달성했다. 일단 이렇게 '정화'되고서야 마르크스주의는 유럽 사회사상의 주류에 흡수될 수 있었다. 1900년 이후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이중생활을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정당활동을 고무했고, 또 한편으로는 과학적 타당성을 주장하는 최초의 포괄적 사회이론으로서 경험적 사회과학의 기준에 대한 최초의 시금석을 마련했다."(115)


"그람시의 관심을 끈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정권을 장악한 '다음에' 나타날 새로운 문화의 성격이었다. 그리고 특히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자신과 같은 지성인들의 역할이었다. 그러므로 그람시는 주요 공산주의 지도자들 중에서 거의 혼자, 낡은 사회로부터 새로운 사회로 옮겨가는 결정적 변화가 될 '자유로의 도약'이라는 마르크스의 생각을 진지하게 다루었다." "그람시는 종교개혁이나 계몽주의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는 〈대중적 성격〉의 〈새로운 통합적 문화〉를 창조할 임무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람시의 논의는 결국 순환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설적 방식을 암시한다. 그람시를 통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관념론적 시발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람시는 위대한 사회적 이념의 기원이 지성인의 의식 속에만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러한 이념은 물질적 조건과 경제적 관계로부터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이념과 민중의 의식과의 관계는 필연적인 것도 자동적인 것도 아니었다."(120-3)


4장 무의식의 회복


"프로이트 사상의 이원성과 양극성은 어린 시절의 갈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었다. 말년에 그는 이원론적 관점에서 자기 사상을 표현했다. 이러한 양극성은 그의 창조적 충동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정열과 예술적 창조에 대한 정열이라는 두 충동에 의해 분열〉되어 있었다." "〈젊었을 때, 나는 사변에 강한 매력을 느꼈으나 이러한 경향을 무자비하게 억제했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그는 아주 천천히 최초의 관심─문화사의 세계와 〈인간은 어떻게 해서 현재와 같은 인간이 되었는가 하는 대문제〉─으로 되돌아갔고, 말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의사로서의 경력이 단지 엄청난 우회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사변적 추상에 대한 경향이 너무나 강렬해서 이 경향에 지배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구체적인 과학적 자료를 연구함으로써 이러한 경향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147-8)


"프로이트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그때까지 개인 연구를 통해 획득한 통찰들을 인간 공동체의 세계에 적용하기 시작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는 줄곧 사회에 대해 써온 것이다. 그는 '가족 속의' 개인에 대해 썼기 때문이다. 곧 어린아이와 부모의 관계, 형제와 자매의 관계는 그의 성격 형성 이론의 기초에 놓여 있었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문명의 소산인 보다 광범한 공동체로 나섰다. 이 이행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러므로 사회이론에 관한 그의 최초의 책, 『토템과 터부』가 원시 종족에 관한 연구였던 것은 논리적인 결과였다. 사회의 기반에 대한 추상적 우화로서 이 책은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마찬가지로, 적어도 검증할 수 있는 진실과는 거리가 멀고, 저자의 사회적 전망의 한계를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원시 종족에게 (···) 유럽 중산계급 가족의 온갖 편견과 부조화와 까다로운 성미를〉 부여하고 〈이들을 선사시대의 정글에 풀어놓아 가장 매력적이지만 환상적인 가설 속을 날뛰며 돌아다니게 했다.〉"(164)


"오늘날 프로이트 학파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스승의 〈인류학적 사변은 (···) '상징적' 가치〉를 가질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임상적·경험적 자료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썼으며 초기의 속박으로 되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프로이트의 궁극적 목적은 현실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원래 그의 목표는 인간의 무의식의 이해였다. 후대의 연구자들을 당황하게 만든 것은 그의 보다 포괄적인 야심이었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야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플라톤, 헤겔 등 위대한 체계 수립자의 대열에 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표면상의 경험주의에도 불구하고─자연과학의 엄밀한 방법에 대한 신앙에도 불구하고─보다 깊은 차원에서 프로이트는 인간 존재의 마지막 수수께끼를 정연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형이상학과 우주론을 갈망했다. 그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원초적 죄라는 상호 관련된 비유를 더욱더 강력하게 강조했고, 마침내 자신의 상像─입법자 모세의 상─을 드러냈다."(150-1)


"분명히 프로이트는 (인류의 운명에 대한 회의와 희망 사이에서) 거의 환상을 갖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과 환자들의 무의식을 너무나 깊이 조사했기 때문에 인간이 선을 행할 가능성에 대해 관습적인 신뢰를 가질 수 없었다." "프로이트는 환상 없이 세계를 바라보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인도주의적 감정〉을 갖고 있었다. 〈인간은 가장 착할 때에도 가장 악할 때에도 공통된 방식에 따라 설명될 수〉 있고 〈선과 악은 공통된 과정을 통해〉 생긴다고 프로이트는 생각했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동시에 인간을 경멸한 만한 것으로 만들지 않고 이해할 만한 존재로 만드는 (···) 인간상을 제시했다.〉 그는 이성과 실재론과 인간애를 현명하게 결합해 존재라는 현실과 직면했다. 그는 종교의 위안을 거부하는 용기를 가졌고, 더 나아가 순수하게 세속적인 자신의 신념을 솔직하게 발표하는 보다 큰 용기를 갖고 있었다. 그는 말년에 끊임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삶을 견뎌내고 싶거든 죽음을 준비하라〉고 권고했다."(170-2)


"융은 보다 철저하게 훈련받은 프로이트의 정신에서 간과한 역사, 종교, 신화에 관한 일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거의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조이스와 헤세의 경우에는 프로이트 이상으로─현대의 창조적인 문필가들에게 호소력을 가졌다. 그러나 그의 광범한 이해력은 그에게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알아낸 것을 확실한 형태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마음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그의 저술은, 거기서 관념의 논리적 연관성을 찾아내려는 사람에게는 시련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관념들을 하나씩 분류하려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또한 무익하기도 하다." "그는 정신분석이론이 점령한 모든 전진기지로부터 후퇴했다. 그는 정신분석의 최소한의 원리인 '무의식, 유아, 성욕, 억압, 갈등, 전이轉移'라는 개념을 포기하거나 완전히 완화했다. 그의 비판자들은 이렇듯 확고한 토대 위에서 그를 '반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179)


5장 소렐의 현실 탐구


"소렐의 핵심적이고 창조적인 시기의 가장 인상적인 저술인 『폭력론』은 보통 그의 이름과 연결되는 사상에 고전적 공식을 부여하고 있다. 그 사상이란 '증오도 없이 복수심도 없이' 정화하는 힘으로서의 폭력의 개념, 역사적 '신화', 특히 총파업이라는 생디칼리슴적 신화를 자력으로는 움직이지 못하는 대중을 일치된 행동에 나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전투상像'으로 규정한 것, 이러한 신화에 의한 사고를 보다 역설적으로 현대 과학의 방법론에 도입한 것 등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그 후의 사회사상가들이 가장 빈번하게 보다 정돈된 형태로 적용하고 활용한 사상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들은 소렐이 여기저기에 뿌려놓은 엄청나게 많은 암시 중에서 극히 일부를 대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폭력론』은 소렐의 자기 모순의 범위나 힘에 대해 적절한 관념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복잡함으로 가득 찬 소렐의 연구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의 다른 저술들과 견주지 않으면 안 된다."(186)


"20여 년 간 기술자로 일한 소렐은 세상의 '만드는 사람들'과 '행동하는 사람들'을 존경했다. 〈그가 가장 신뢰한 지각의 방법은 손에 의한 것이었고, 그가 가장 신뢰한 사람들은 손을 사용해 세계와 관계하는 사람들─일하는 사람들과 예술가─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기계도 존중했다. 반면에 그는 자연의 세계를 두려워하고 믿지 않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는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현실의 혼돈에 부과하는 '인공적 자연'과 대립되는, 그가 말하는 이른바 '자연적 자연'을 싫어했다. 자연 자체의 불가해한 신비와, 인간이 길들일 수 있는 유일한 것, 따라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과학의 인공적 구성물 사이의 구별은 소렐 사상의 절대적인 중심이었다." "'질서 있는 인공적 세계'의 창조─이것이 소렐의 기본적이고 변함없는 목표였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정치적 신화라는 개념조차,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는 기술자적 사고 구조와 전적으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다. 신화도 인공적 구성물이었기 때문이다."(190)


"모럴리스트로서 소렐은 구식이었고 수줍기조차 했다. 성性문제에 대한 그의 엄격성은 매우 각별했다. 그의 동시대인들 중에서 그처럼 〈세계는 보다 정숙해지는 정도에 따라 더욱 공정해질 것〉이라고 아주 진지하게 주장한 사상가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윤리적 엄격성은, 그의 혁명적 폭력의 강조와는 극단적으로 모순되는 듯한 소렐 사상의 보수적 측면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윤리적 문제에도─이번에는 생명 없는 자연이 아니라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인간성에─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소렐의 목표였다." "그러므로 평생에 걸친 그의 탐구는 '회귀ricorso'─고대의 영웅적 가치들의 회복에 의한 인류 역사의 쇄신─를 찾는 것이었다. '회귀'─글자 그대로 '재상영rerunning'─라는 개념은 소렐이 비코에게서 끌어낸 것으로, 그는 크로체보다 앞서서 비코를 발견했다." "회귀의 탐구는 어처구니없는 그의 정치적 변절을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그는 끊임없이 추구하고 끊임없이 실망했던 것이다."(190-2)


"소렐의 연구에 포함되어 있는 비합리적이고 공상적이고 가증스러운 모든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부드러운 마음'의 가장 큰 오류에 빠지게 된다. 소렐을 '영원한 상 아래에서' 보는 것─그를 단지 추상적 사상가로만 보고, 어떤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매우 정열적으로 '참여'해 행동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오해이다." "소렐은 문제해결보다는 문제제기 때문에 중요한 사상가가 된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위대한 문제제기자들, 일반적으로 받아들인 기성의 통념을 교란시키는 위대한 사람들, 예컨대 아벨라르와 니체 그리고 소크라테스 같은 인물들의 전통에 속한다." "또한 소렐은 '비판적' 사상가로서 가장 유능했다. 정열적이고 개인적인 현실 참여, 집념, 전향, 무정견無定見─'광신주의'로 불리는 감정적 복합체 전체─으로 말미암아 그는 지적 기만을 분쇄하는 비판적 자세를 갖게 되었다. 바로 그의 시각의 난시적亂視的인 성질 때문에 이러한 자세는 더욱더 날카로웠다."(199-201)


# 영원한 상 아래에서sub specie oeternitatis : 스피노자가 한 말로, 모든 것을 영원의 관점에서 본다는 의미이다.


6장 신관념론의 역사관


"1770년부터 1840년에 이르기까지 독일 철학자들과 작가들은 유럽의 교사들이었다. 곧 그들로부터 프랑스인과 영국인과 이탈리아인은 단지 주지주의적인 설명에 만족하지 말고, 생생하면서도 발전하는 역사와 사회 자체의 소재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독일의 역사적 관념론의 영향을 받아 사회연구의 기준은 무한하게 풍요해졌다. 그러나 '응용된' 지혜라는 의미에서 볼 때 그들이 실제로 가르치고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즉 19세기의 커다란 정치적 변혁들은 전 세기로부터 이끌어낸 전제들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그 전제들은 철학적 의미에서는 이미 시대에 뒤진 것이었다. 1880년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시기에 다시 한 번 독일에서 부활의 숨결이 일어났다. 니체와 딜타이처럼 서로 다르고 독립되어 있으며 상호 모순되는 인물들이 1890년대의 지적 부활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이 새로운 가르침은 수포로 돌아갔다. 아니 그 이상으로 나쁜 상태를 불러왔다고 할 수도 있다."(205-6)


"역사와 사회의 연구에서 헤겔의 지배는 극적이었으나 시간적으로는 짧았다. 19세기 중반 이후로 그는 기억에 남아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오직 마르크스주의적 계승자들을 통해 그는 살아 있는 힘으로서 남아 있게 되었다. 보다 항구적인 영향은 헤겔보다 25세 어린 역사가 랑케의 영향이었다." "랑케는 헤겔보다 훨씬 더 낭만주의적 정신세계에 가까웠다. 세밀한 연구방법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랑케의 사고는 낭만주의자들의 사고 범주와 비슷했다. 낭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경험적으로 검증되거나 논리적으로 분석된 확고한 개념보다는 오히려 거의 신비적인 방식으로 '직관'되고 '관조'된 정신적 실재를 다루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랑케의 방법은 독일 관념론의 전형이었다. 역사와 경제학에서도, 사회학과 법률에서도 독일의 사회사상은 매우 단순한 소수의 원리에 기초를 두었다. 그런데 이 원리는 방법과 영역의 모든 차이를 넘어서 놀라울 만큼 획일적이었다."(206)


"관념론적 사회사상은 현상세계와 정신세계, 자연과학의 세계와 인간적 활동의 세계 사이에는 근본적인 분열이 있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독일인은 'Naturwissenschaft' 곧 자연과학과 'Geisteswissenschaften' 곧 '문학과학' 또는 '정신과학'─이른바 인문학이라고 불리는 것과 우리가 역사 또는 사회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하는─을 명확하게 구별한다. 이러한 까닭에 정신과학은 실증주의자들이 주장했듯이 자연과학을 모범으로 삼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인간 활동에 대한 관념론적 관심은 주요한 두 방향─한편으로는 자세하고 구체적인 역사, 또 한편으로는 역사철학─으로 갈라지는 경향이 있다.〉 미세한 점까지 애써서 연구하는 것은 분명히 독일적 전통의 본령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헤겔처럼 형이상학에 바탕을 둔 광대한 역사체계의 수립자나, 딜타이 또는 리케르트처럼 역사적 사고 자체에 대한 야심찬 비평자들도─그와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으로─ 독일 전통의 요소였다."(207)


"신新칸트 학파에 속하는 리케르트의 이론은 가치라는 개념만을 전적으로 주장함으로써 역사적 지식이라는 개념을 철저하게 주관적인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사회적·역사적 세계에서의 가치는, 검증될 수 있는 어떠한 과정에 의해서도 도달될 수 없고 오직 '직관'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타당성을 보증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궁극적으로 역사가는 자신의 가치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형이상학의 길뿐이었다. 리케르트가 마지막으로 택한 길도 이 길이었다. 즉 그는 인간의 '규범 의식'을 전제로 두고 역사가의 가치체계의 절대적 타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형이상학적인 것이어야만 했다. 그 전제에는 가치란 개별적인 역사가의 의식 밖에서, 역사가를 넘어서 있는 독립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들은 용기와 상상력을 가지고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을 구별하는 문제에 접근했지만, 영원히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했다."(211-2)


# 신칸트 학파는 정신과학은 자연과학처럼 '일반법칙'을 형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사건'을 이해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딜타이의 의의는, 처음으로 역사와 실증주의 및 자연과학을 철저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대결시킨 점에 있다." "형이상학의 도움을 거부하고 딜타이는 과학적 탐구의 타당성을 분명하게 인정했다. 실제로 실증주의에 대한 그의 가장 효과적인 관찰의 하나는 실증주의가 스스로 배척한 관념론적 철학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이라는 비난이었다. 곧 실증주의의 추상 개념물은 의미의 제시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과학과 과학적 방법에 대해 딭타이는 이의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목적은 당시의 자연 세계와 인간 활동 세계의 혼동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딜타이가 보기에, 두 영역은 모두 과학적 방식으로 연구할 수 있지만, 문화·사회·역사의 세계를 다루는 과학은 보통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는 다른 '유형'의 과학이었다." "역사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자신이 놓여 있는 시대와 문화의 상황, 그리고 역사가가 그의 개인적 세계에서 내리는 능동적인 결정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이다."(214-5)


"딜타이는 어떤 사람도─특히 19세기의 3분기에 정신이 형성된 사람은 누구든지─완성할 수 있으리라고 바랄 수 없는 계획을 세웠다. 베버와 마찬가지로─그리고 베버보다는 덜 성공적으로─그는 인간 정신에 대해 너무나 벅찬 종합을 시도했다." "특히 그는 그 자신의 사상에 함축된 회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요소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론은 없었더라도, 딜타이의 업적은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다.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에 대한 그의 구별은 역사가의 기준이 되었고, 역사가의 경우보다는 덜하지만 사회과학자들에게도 기준이 되었다. 딜타이 이후로 역사가들은 그들 학문의 '비과학적' 성격 때문에 굳이 변명할 필요는 없었다. 곧 그들은 역사학의 방법이 자연과학의 방법과 전적으로 동일할 수 없는 까닭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대 지성의 역사 전통─마이네케가 가장 뛰어난 대표자인─은 당연한 일이지만 딜타이가 확립한 철학적 사회연구의 기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218-9)


7장 마키아벨리의 후계자들 : 파레토, 모스카. 미헬스


"파레토가 선보인 엘리트의 기원과 구성에 대한 개념은 지도층 형성에 대한 오늘날의 이해와 비교한다면 매우 조잡했다. 파레토는─모스카, 미헬스도 마찬가지이지만─개개인의 '우월성'은 선천적이고 그 사람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뛰어난 기능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조직적 훈련이 필요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성공을 보증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재난을 초래하는 이러한 기능들 사이에는 구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뛰어난 사람들의 권력에의 갈망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지난날 흔히 권력에의 충동을 헛되게 만든 다른 동기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파레토의 기본 전제는 확고했다. 현대의 정치학자나 사회학자는 정치운동이란 능동적 소수자가 하는 일에 지나지 않고 인류의 대부분은 그들을 통치하고 있는 정부의 형태가 아무리 '민중적'이더라도 권력투쟁의 수동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의 중심 원리로 거듭해서 되돌아가곤 했다."(272-3)


"지배적 소수자의 개념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밝힌 사람은 사실은 모스카였다." "그는 『통치이론』과 『정치학 원리』에서 정치 과정을 한정된 자기보존적 파벌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라는 견해를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그러나 정치적 논의의 표면 뒤에서 모스카는 광범한 사회적 적용의 길을 보여주었다. 대의제도가 올바른 기능을 발휘한다면 모두가 그 나름의 역할을 수행할 기회를 갖게 될 '사회적 세력들'에 대해 말했을 때, 그는 경제적 계급에 바탕을 둔 정치이론에 매우 근접해 있었다. 그는 사회적 세력이라는 말로 실업가와 농업가, 지성인과 군인으로 구성되는 주요한 공공의 이해관계를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력들 중에서 그는 그 자신의 '세력'─중간 소득의 지식인들─을 위해 '무의식적인 대변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모스카에게는 일종이 '잠재적 마르크스주의'가 있었다. 그로 하여금 결국은 민중의 통치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한 '잠재적 민주주의'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273-4)


"모스카의 이론을 현대의 특징이 되고 있는 대중조직─모스카가 정치계급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만들어냈을 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조직─에까지 확대시키는 것은 미헬스에게 남겨진 일이었다. 파레토와 마찬가지로 미헬스도 사회주의를 통해서 사회학에 도달했다. 『정당사회학: 근대 민주주의 과두적 경향에 관한 연구』이라는 제목의 연구─모스카의 『통치이론』보다 4반세기 후에 간행된 ─에서 미헬스는 엘리트라는 개념을, 그동안 성장해왔고 그가 잘 알고 있는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에 적용했다. 그가 '과두제도의 철칙'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개인적 경험을 통해 발견한 진리─정치조직은 규율과 관리의 계속성에 대한 내적 필연성 때문에 불가피하게 폐쇄적이고 자기 보존적인 과두제도가 된다는 어렵게 얻은 확신─의 집대성이었다. 이 책의 신뢰성은 대부분 서구 대륙 3대국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저자 자신의 직접적 경험을 생생하게 반영한 데서 비롯되었다."(270-5)


8장 베버의 사회학 : 실증주의 및 관념론의 극복


"뒤르켐은 준準실증주의적 입장의 도움을 받아 사회학과 인류학의 결합에 성공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독일의 신관념론자들은 사회과학의 세계와 역사적 경험의 세계를 사실상 융합시키고 있었다. 이 두 결합의 체계는 아직은 합류되지 않았다. 역사와 철학에 대한 독일적 감각과 과학적 엄격성에 대한 영국-프랑스적 개념을 결합하는 것이 베버 스스로가 설정한 과제였다." "베버는 어떤 사상가들보다도 더욱 결정적인 합류점에 서 있다. 곧 관념론과 과학적 방법, 경제학과 종교,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 정치적 관여와 사회과학의 '객관성'의 주장 등에 맞서서 그는 이를 합류시킨 것이다. 베버는 개인적인 확신에서는 민주주의자이면서도 파레토와 모스카가 시작한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에 공헌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20세기의 여러 조건 아래에서 계몽주의가 살아남을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나, 여러 사건에 대한 기질적 반응에서는 오히려 '계몽주의적' 성격을 보였다."(306-8)


"뒤르켐을 '아노미'라는 개념과 관련시키는 것처럼, 우리는 베버를 '관료제도'와 '카리스마'라는 개념과 관련시켜 생각한다. 이 두 개념은 서로 모순되면서도 균형을 이루고 있고, 이 개념에 대한 베버의 태도도 흡인과 반발을 보이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현대 서구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경향은 공적 활동의 모든 국면에서 관료화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베버는 스스로 합리주의자로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계승자로서 이러한 경향을 찬양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관료제도가 개인의 지적 자유─이것은 그가 마음속 깊이 소중히 여기던 또 하나의 가치였다─에 일으킨 위험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탈출구를 마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베버는 언제나 '지배자' 개념에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자유에 대한 위협은 뚜렷했다. 베버는 이 용어에 따르는 원초적이고 위협적인 요소들─주술사, 예언자, 약탈자, 전쟁의 지휘자 등─을 모두 암시하고 있다."(308)


"베버는 역사적·사회적 연구에서 인과적 설명의 범위를 엄격하게 한정하려고 한 점에서는 크로체나 관념론자들과 입장이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인과적 설명을 전적으로 제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서, 베버는 '가설적 분석'이라는 가장 정교한 도식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연구에서 인과적 설명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그것을 제외하면 주어진 사건의 계기에 결정적인 차이를 일으킬 요인, 다시 말해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가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없는 요인을 찾아내는 것뿐이라는 확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가설적인 인과적 설명의 방법을 제기하면서, 베버는 당면한 문제의 결정적인 요인은 '개별적인 연구자의 관점으로부터'만 결정적인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이러한 요인의 선택은 궁극적으로 가치체계에 기초를 둔다는 의미였다. 여기까지 베버의 논의는 리케르트의 논의를 밀접하게 따르고 있다."(324-5)


"그러나 베버는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모든 형이상학적 뒷받침을 거부하고 과학적 추구에서의 '객관성' 또는 '윤리적 중립성'을─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주장하면서 리케르트와 갈라섰다. 베버는 독일의 교수가 공공연하든 은밀하든 선전가라는 특색을 가지고 있고, 강단에서 일종의 사회적 메시지를 설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독일의 대학교수는 학생이나 동료로부터 공격받을 두려움 없이 공적 문제에 대해 거만하게 말할 때,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버는 이러한 신념을 억압할 뜻이 없었다. 그는 자기 마음속에서 이러한 신념과 싸워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그는 이러한 신념은 사회과학 분야에서의 창조적 활동에 불가결한 것이라고 암시했다. 과학적으로 중요한 선택은 바로 이러한 확신의 일종의 승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도덕적 무관심의 태도는 과학적 객관성'과는 관계가 없다〉고 베버는 주장했다."(325-6)


# 연구 대상의 선택은 주관적(가치 판단)으로, 연구 대상의 분석은 객관적(사실 판단, 제한된 인과적 설명)으로 하려는 노력


"인과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 (소렐의 '분리' 개념과 흡사한) 베버의 '이념형' 정의이다. 사실상 이념형은 인과적 설명의 단일한 복합체이자 온갖 종류, 온갖 차원의 추상물이다." "일반적으로 베버가 제시한 구체적인 예는 두 가지 주요한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유개념─'정부'나 '교회' 등 사회현상의 계급─이다. 둘째는 '이상화된' 개별적인 현상복합체─예컨대 '자본주의'─로서, 여기에는 단 하나의 순수형만이 존재한다고 생각되었다." "베버는 자신의 구성물을 단지 이해를 위해 만들어낸 인공적인 도구로서, 언젠가는 보다 잘 만들어진 새로운 개념에 의해 대체될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사회과학의 역사는 현실을 개념의 구성물에 의해 분석적으로 정리하려는 시도─과학적 지평선의 확대와 변화에 의한, 이와 같이 구성된 분석적 구성물의 해소─이고 이렇게 변화한 기반에 바탕을 둔 개념들의 새로운 재구성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과정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베버는 생각했다."(330-2)


9장 유럽의 상상력과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 자체를 회고해보면, 1905년은 가장 분명한 분수령을 보여준다. 전쟁에 대한 거의 끊임없는 경계 상태에서 살았으므로, 1905년의 세대는 아버지의 세대들보다 성급했다. 그들은 선배들을 존경했다. 이 점에서는 보통의 젊은 세대의 상像과는 달랐다. 그러나 그들은 선배들이 제공하는 것보다는 좀 더 인상적이고 좀 더 극적인 것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선배들이 이룩한 발견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을 그들은 보다 난폭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1890년대의 저술가들은 이성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에는 자제심을 발휘했으나, 1905년의 젊은이들은 공공연하게 비합리주의자, 심지어는 반反합리주의자가 되었다. 젊은 사람들은 그들의 선배들의 점잖고 초연한 태도에 만족하지 못했다." "따라서 독일에서는 젊은 세대들이 니체의 가르침을 직접적 행동의 의미로 응용하기 시작했고, 그들 자신을 니체가 〈청년의 왕국〉을 수립하도록 요구한 〈용을 죽이는 전사의 제1세대〉라고 생각했다."(355-7)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그들 자신의 취향에 따라 베르그송을 해석했다. 그들은 베르그송의 사상에서 베르그송 자신의 확신과는 분명히 대조적인 직접적 행동 정치의─보통은 우익의─사상을 읽었고, 베르그송이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던 독단적 종교 사상을 읽었다." "아버지들은 드레퓌스의 무죄를 위해 싸웠고, '반동'과 성직자의 권력에 맞서 싸웠다. 이 새로운 세대가 아버지들보다도 더욱 보수적이었다는 것은 기묘한 현상이었다." "프랑스의 교육받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의 영향이 쇠퇴한 또 하나의 이유는 드레퓌스파의 승리를 횡령한 데 있었다. 승리한 급진파는 1901년부터 이데올로기적 복수의 정치를 시작했다. 이것은 1905년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프랑스에서는 단 한 사람이라도 인종과 종교 때문에 수난을 겪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온 나라를 벌컥 뒤집어놓은 바로 그 사람들〉이 이제 〈성직자를 추방하고 모든 종교적인 것에 선전포고를 한〉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358-60)


"상상적 문학에서는 사회이론가들이 저지하려고 노력한 상대주의적 가능성이 마음대로 활개칠 수 있었다. 20세기 초의 소설과 희곡에서 상대주의는 거의 상투어였다. 윤리와 철학은 일관성 없는 것이라는 인식은 곧 현대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설가와 극작가는 사회이론가들이 맞서 싸우거나 외면하고 있던 일을 완성했다. 책임없는 자의 순진성을 지닌 채, 작가들은 철학자와 사회학자들이 받아들이기를 망설이고 있던 최종적 결론을 아주 쉽게 받아들였다. 우리는 지드와 만의 초기 작품, 헤세와 피란델로의 성숙기 작품에서 그들이 '부도덕한 것'을 생명력과 창조의 원천으로서 태연히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윤리적 입장을 제시한 경우에도, 그것은 종교적으로 (또는 실용적으로) 기초된 지상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 의한 의식적인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각자의 의식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감각은 사회사상과 문학의 또 하나의 연관성을 보여준다."(383)


"또한 20세기 초 문학에서의 '실재reality' 개념도 극단적으로 문제가 많은 것이었다. 당시 '실재'라는 말은 겉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 동일한 현실의 모순되는 해석, 설명할 수는 없으나 의식이 고양된 순간에 섬광처럼 나타나는 보다 깊은 진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처럼 심층을 탐색하는 기술은 상상적 문학에 가장 분명하게 반영된다. 그리고 동일한 과정에 의해서 지워버릴 수 없는 기억의 저장고로서 무의식이라는 개념은 20세기 초의 소설에 거듭해서 나타난다. '지속'─경험으로서의 시간의 질質─에 대한 강박관념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실제로 살아온 시간에 대한 감각, 이 시간을 연장시키고 원근遠近을 정하는 무의식의 작용에 대한 감각, 무의식의 왜곡과 기만에 대한 감각은 알랭-푸르니에의 『대장 몬』, 만의 『마魔의 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독특한 맛을 준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프루스트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20세기 초의 대표적인 소설로 꼽히게 되는 것이다."(383-4)


"딜타이와 베버는 역사의 자료 자체에서 최종적 진리나 도덕적 가치의 어떤 근거를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날카롭게 자각하고 있었다. 역사가나 사회과학자는 결국 그들 자신의 가치체계를 확인하는 입장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임을 그들은 자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상대주의자였다. 동시에 그들은 적어도 부분적인 '객관성'에 도달하고 이와 함께 이질적인 가치에 대한 공감적인 이해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서구의 몰락』에서 슈펭글러는 이 두 가지 일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 사회의 가치체계는 다른 문화의 구성원들에게는 닫혀진 책과 같은 것이고, 역사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자신의 에토스ethos를 눈에 거슬리는 자신감을 갖고 모든 외래인으로부터 옹호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역사연구의 근원으로서의 정열과 이를 보다 광범한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판단으로 승화시킨 것 사이의 구별을 제거해버렸다."(394)


10장 1920년대의 10년 : 전환기의 지성인


"신新실증주의자들은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에 대해 확고한 인과관계의 고리를 만들어놓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인과관계를 믿는 것〉은 〈미신〉이고 〈이른바 자연법칙〉이 〈자연현상의 설명〉이라고 하는 것은 〈환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사실상 이러한 생각의 의문을 품고 있었다. 자연에서의 유일한 필연성은 〈논리적 필연성〉뿐이었다. 그러므로 콩트, 스펜서, 텐 또는 그밖의 사람들이 원래 과학적 연구의 범위로 삼고 있던 분야 중에서 대부분을 포기한 다음에야 비로소 20세기의 신실증주의자들은 철학에 과학적 방법을 다시 도입할 수 있었다.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온 문제들을 거의 다 가치 또는 형이상학의 문제로서 제거해버리고 그들은 논리적 또는 상징적 언어로 모호하지 않게 공식화할 수 있는 문제들만을 다루었다." "20세기의 시와 그림과 음악이 더욱 비교적秘敎的이고 '난해'해진 것처럼, 이제 철학도 똑같은 과정을 밟게 된 것이다."(420)


# 신新실증주의자들 : 『논리-철학 논고』(1921)를 발행한 시절의 비트겐슈타인과 프레게와 카르납 같은 빈 학파의 젊은 과학철학자들


"1920년대에도 시대가 어떤 의미에서는 '정상적'인 것처럼 생각하며 생활하고 철학하는 것이 아직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즐겁게 배회할 수 있는 범위는─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상당히 좁아져 있었다. 전쟁을 통해 서유럽과 중부유럽 사람들 사이에서 문화적 가치의 취약점이 드러난 것이다. 볼셰비즘의 대두는 러시아를 자유주의적 지성인의 공동체로부터 분리시켰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승리는 반세기 동안에 처음으로 서양의 주요한 나라를 자유로운 사색에 대해 거침없이 적의를 보이는 정부 밑에 놓이게 함으로써 볼셰비즘과 마찬가지로 양심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이 새로운 체제에 반대하는 지성인이었던 크로체와 모스카가 1920년대 중반에 어느 길을 가야 할지 망설인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크로체가─후에는 독일의 마이네케가─역사가는 정치적 논쟁으로부터 초연해야 한다는 이전의 주장을 버리고 결국은 전투적 태세로 자유제도를 옹호하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421)


"1920년대가 끝날 무렵, 대공황과 국가사회주의의 위협이 닥치자, 이러한 절충적 입장조차도 전혀 용납되지 않는 것 같았다. 1930년대가 되자, 더 많은 유럽 지성인들이 정치적 가담만이 단 하나의 가능한 선택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주) 소수가 파시즘을 선택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들 중에서는 하이데거와 융만이 나치 정권과 타협적인 관계를 맺었다. 유럽의 지적 지도자들 대부분은, 망명을 했든 인민전선의 긴요성을 주장했든, 또는 말없이 '국내에서의 은거'를 감수했든,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운명적인 미래라고 선언한 것에 저항하는 길을 선택했다." "경제적 파멸, 정치적 격동, 전쟁의 위협─이 모든 것은 그들의 생존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정치적 공포로 가득 차고 전쟁이 임박한 새로운 유럽에서 자유롭게 떠도는 지성인들을 위해 어떤 장소가 있었을 것인가? 자유롭게 사색하는 지성인들은 18세기 및 19세기의 무용지물이 된 유물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리라."(422-3)


"이성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면서, 20세기 초의 사회사상가들은 면도날 위를 걷는 듯한 위험에 직면했다. 한쪽에는 18세기와 실증주의적 전통이라는 지난날의 잘못이 있었다. 또 한쪽에는 비이성과 감정적 사고라는 장차의 잘못이 있었다. 그 사이에는, 심리학적·역사적 발견이 쌓아놓은 철저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이 한계 때문에, 이성을 신뢰할 수 있는 좋은 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곧 '직관'이나 자유연상이나 그밖의 비정통적인 탐구방식이 사회사상의 증명의 기준을 아무리 넓혀 놓았다 하더라도, 마지막 통제를 하고 결재를 하는 것은 이성뿐이었다." "(실증주의와 관념론 사이의 좁은 길 위에서) 베버만이 동요없이 이성과 비非논리는 '모두' 인간세계의 이해에 불가결하다는 주장을 밀고 나갔다. 그러나 그와 그의 세대가 이성과 정서적 가치 사이에 위태로운 균형이나마 이루어놓으려고 노력한 것은 겨우 10년 내지 20년 동안뿐이었다. 이 두 가지가 곧 별개의 것으로 갈라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4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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