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못 생긴 얼굴이 더 못 생기게 나와서 처음으로 사진 편집-모자이크 처리-을 해봤다. "선생님, 한번 안아봐도 될까요?" 했을 때 깜짝 놀라 얼굴이 새빨개지며 수줍어하시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 는 뜻의 夜深星逾輝(야심성유휘)를 서명처럼 쓰셨던 우이동 태생의 쇠귀(우이:牛耳), 신영복 선생님. 그 뜻이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겨우 두 번밖에 뵙지 못 했지만 그 목소리와 수줍은 웃음을 또렷이 기억한다. 목소리는 얼마나 부드러운지. 진정한 강함은 부드러움이라는 걸 나아중에야 알게 된 내게 메아리처럼 새겨졌다. 그리고 선생의 고운 글씨를 어찌 내 부족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거나.
신영복 선생이 『강의』라는 책을 쓰시고 한 대학에서 교양강의를 하시던 날, 감옥에 계실 때 일화를 들려주셨다. 어떤 없이(?) 사는 죄수가 들어왔는데 (면회 오는 사람 하나 없고. 최소한의 생필품마저 없었던) 그 사람이 빨래비누로 이를 닦더란다. 그걸 보고 모두가 자기 치약을 주겠다고 하는데도 한사코 거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이 사람들 없을 때 슬쩍 치약을 내밀었는데도 안 받더라고 한다. 몇 번 시도하다가 관뒀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주시는 거라면 받겠습니다." 했단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그 치약 하나를 받음으로써 자기가 참아내야 할 암묵적인 요구(치약을 줬던 사람들의)또는 알력이 싫었던 거였다. 좋은 잠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든가 하는... 그런 폐쇄적인 집단에서 으레 겪어내야 하는 것. 비단 폐쇄적인 공간에서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말이다. 누군가를 챙기려면 "자기"가 없어야 한다는 것. '내가 챙겨준 건데, 내가 챙겨줬으니까' 하는 오만감 우월감. 보상심리 등등.
내가 마음수련에서 배운 것 가운데 하나가 희사(喜捨)이다. 기쁘게 버림.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줄 때 "내가 준 건데, 내가 당신을 위해 챙겨준 건데 하는 의식. 좋은 일 해서 어깨가 으쓱해지는 유치한 기분 따위..." 가 없어야 한다는 것. 어떤 행위를 했다는 사실 자체 마저 버려야 한다는 것. 선생의 희사를 보고 그 사람의 마음이 흔들린 것이리라. 바라는 것 없이 누군가에게 주는 마음. "내가 없음" 그랬을 때 사람들은 마음을 준다는 것. 그게 진짜로 "주는" 것임을 선생은 일깨워준다.
선생님이 보고싶다. 한번 더 뵙지 못 한 것이 애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