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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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소설을 처음 읽은지 거의 2년이 지났다.
다 읽고나서 나는 “이 소설은 두번 다시 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아무리 소년의 마음의 성장을 표현한다 해도 온갖 고통을 어린 소년에게 들씌운다는 건, 나에겐 못했다.
소설 읽는 독자에 지나지 않는 내가 뭣을 “안한다”, “못한다” 해도 그 내용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 매우 어리석은 말이다.
하지만 그래야만 내 마음속에 스며든 이 소설의 모든 등장인물들의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그런 착각에 거의 사로잡혔다.

그런데 며칠전, 문득 그게 아니다는 느낌이 떠올랐다.
주인공 한동구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가족을 매우 사랑하였다.
아직 어려서 어떻게 하면 가족이 모두 편안할까 그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여 고생하였다.
자신도 “난독증”이라는 일종의 병이면서도, 그를 극복하느라 고생하면서도.
엄마를 사랑하였고, 여동생을 사랑하였고, 권위주의적인 아버지도 사랑하였고, 가족불화의 원흉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할머니도 사랑하였다.
그러기에 그의 마지막 결단을 더 따뜻이 봐 주어야 하지 않았던가.
이 소설은 주인공 한동구를 통해서 내가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뭔가를 상징하고 있는게 아닐까.

2년만에 읽었다.
오랜만에 읽어 보니 처음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 한동구는 이 나라와 이 나라의 국민을 상징하였다는 느낌.
언제나 소란스로운 가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그로 인해 “난독증”이 되었던 소년.
그건 마치 70년대 80년대의 우리 나라 국민이 놓인 상황을 상기하게 한다.

한동구는 3학년이 되어서 겨우 박영은 선생님이라는 선녀같은 분을 만나 “난독증”을 해결하게 된다.
그러나 고통은 그걸로 해결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어린 소년이 손댈 수없는 어른들의 다툼은 마음의 성장의 길 앞에 가로 놓인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것은 돌이킬 수없이 크고 아프고 도저히 일어 설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오히려 그 절망속에서 성장한다.
소년은 어른들이 이루어내지 못했던 해결책을 제시한다.
소년과 어른들이아픔을 고루 나누는 방법으로.
그리하여 소년은 그의 “아름다운 정원”과 헤어질 각오를 하게 된다.
그 “아름다운 정원”과의 작별은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책임질 이 나라 국민의 각오를 상기한다.

2년만에 읽어보니,이 소년의 절망감이 다시 내 마음속에 스며들어 나의 눈물을 짜내었다.
그러나 동시에 작가의 그 참혹하다고도 할 수 있는 표현의 의도를 좀 알게 되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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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0-06-22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윤경씨는 저의 전작주의 작가에요. 그의 작품을 사랑하며 함께 나이먹어갈 수 있는 동갑내기 작가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어요. ^^

ChinPei 2010-06-22 12:08   좋아요 0 | URL
좋은 작품이라는 건 틀림 없는데, 영주가 넘 불쌍해서,영주 잃은 동구가 넘 불쌍해서, 가끔 이 작가를 원망했어요.
그 원망 땜에 별 하나 깎았지요.
그래도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꼭 읽어 봐야 된다고 느꼈어요.
 
얼어붙은 송곳니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노나미 아사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나는 이 소설 일본어 원문을 읽었다. 한국어 번역도 내용은 완전히 똑같을 것이라고 의심하지 말고 이 리뷰를 쓴다.

주인공 오토미치 타카코는 여성형사다.
소설이나 드라마의 여성형사라 하면 남자보다 오히려 더 씩씩하고 용기있고, 지성이 높은 그런 경우가 많은데, 오토미치는 좀 편견을 가지며 고집도 센 보통 여자다(물론 보통 남자도 마찬가지고).
오토바이 타는 솜씨는 훌륭하다 하겠지만, 그래도 Super Woman은 아니다.

레스토랑에서 일어난 발화 살인사건의 수사 본부에 배속되어, 여성 멸시가 심한 중년 형사 다키자와와 콤비를 짜게 된 것에도 불만히 많다.
타카코는 남몰래 다키자와를 “황제펭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배가 나오고 발다리가 짧아서 마치 펭귄을 닮아서).

형사란 조직은 남자만의 사회라고 믿고 있는 다키자와는 딸아이 같은 여자와 함께 수사하여야 할 불운을 한탄하여 타카코를 무시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수사를 진행해 간다.
또한 타카코는 그런 다키자와에 불만을 느끼면서도 그걸 추호도 표정에 내지 않는 채, 고집스롭게 다키자와를 따라 간다.
또 다키자와는 그런 타카코의 불만을 눈치채여 그런 잡된 감정이 수사에 지장을 준다고 호된 지적을 한다.
불만으로 가득찬 타카코는 그러나 의외에도 순종하게 받아들여 깊히 사과 하기도 하다.
이렇듯, 타카코와 다키자와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둘의, 얽히는 감정 묘사, 또 얽히기는 하지만 서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과정이 절묘했다.

이 소설의 더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늑대인 “하야태(疾風:칠풍)”다.
늑대(정확하겐 늑대개)인 “하야태”에 의한 살인 장면은 그야말로 무자비하다.
인간의 목을 깨물어 두개골을 씹어 으깨는 잔학무도함은 그러나, 늑대에 번뇌나 속셈이 없어서 서슴없고 용맹하기도 하다.

사람에 의한 사건이 좀 황당 무계하였다는 건 아쉽기도 하지만, 주인공뿐 아닌 그이외 사람의 시야에서도 이야기가 서술되어가는 수법은 읽은이가 싫증 나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고 더 훌륭한 것은 인물묘사.
특히 늑대개까지 중요한 등장인물(개)로 매력적으로 묘사하였다는 점이 이 작품의 우수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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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그릇 동서 미스터리 북스 153
마츠모토 세이조 지음, 허문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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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모토 세이초의 가장 유명한 소설중의 하나다.
과거에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제작되었고(1974년), TV드라마는 1962년, 1977년, 1991년, 2004년, 계 4번이나 제작되었다.
특히 2004년의 드라마는 나도 봤던데, 출연자의 높은 연기력 덕분에 훌륭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단, 첫 사건의 동기[動機]와도 관련되는 과거의 “문제”가 원작 소설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원작보다 더 설득력이 있었는 듯)

일본에서 마츠모토 세이초의 소설은 “사회파(社會派) 미스터리”라고 불리우는 경우가 많다.
그의 소설은 많은 경우 사건의 트릭이나 그 추리과정만이 아니라 사건에 이르는 배경, 사회적 환경까지 언급하기도 한다.
이 소설 역시 그러하다.

토쿄 가장자리에서 한 남성이 살해된다.
사건 수사 첫 단계에서 알아낸, 남성이 말했다던 사투리가 사건의 배경을 더 복잡하게 한다.
피해자의 신원이 확인 되지 않는 채, 수사는 성과 없이 엉터리 방향을 헤메게 된다.

결국 형사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사투리의 수수께끼, 피해자의 사건 이전의 행동의 수수께끼, 그리고 사건 동기와 직접 관련되는 과거의 일들이 해명 되어간다.

중반의 다른 살인사건은 방법이 SF와 같아서 이질감을 느끼기는 했으나, 전반적으로 수사 과정이 착실해서 마음에 든다.
특히 사투리의 수수께끼 해명 과정은 마츠모토 세이초의 착실하고 정확한 조사 자세를 잘 보여주는 재밌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한 수수께끼 풀기에서 얻게 되는 달성감과는 전혀 다른, “인간의 카르마”와 운명의 깊은 슬픔으로 인한 “마음의 앙금”을 남게 한다.
그것이 바로 제목의 “모래 그릇” 그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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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0-05-22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4년 드라마 완전 몰입해서 봤었어요. 배우들 연기력도 대단했고, 드라마 배경도 음악도 다 좋았습니다.

ChinPei 2010-05-22 01:28   좋아요 0 | URL
(아까 오해)
아마, 2004년 드라마를 보셨지요.
주인공 나카이 마사히로는 남성가수 출신인데도 연기력이 괜찮은 편이어서 훌륭한 영화, 드라마 주인공을 많이 했지요.
나도 봤어요.
 
칼의 노래 (1.2권 합본) - 우리 소설로의 초대 4 (양장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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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성웅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일인칭 “나”로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야기는 정유년(1597년)에 이순신장군이 조정에 제포된 후 석방되어 백위종군을 시작하는 시점부터 서술(구술)한다.
명량해전, 그리고 지난날의 여러 해전의 상기하면서 마지막 최후의 전투로…
여기서 새삼스롭게 이순신장군의 업적, 역사사실은 자세히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건 한국이라면 모두다 배운 사실이니까(재일교포인 나조차 안다).
나는 오직 이 소설의 특이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다.

이 소설, 문장은 매우 쌀쌀맞다고 할 정도로 간결하다.
그야말로 일기 그 자체다.
“나는 이러했다”, “그는 그러했다”, “바다는 고요했다”, “바람은 차가웠다”, 그런 형식.
이순신장군이 쓴 “난중일기”도 이러하였던가?

그러나 그 간결한 문장은 읽으면 읽으수록 시적이다.
“…먼 수평선 쪽에서 비스듬히 다가오는 저녁의 빛은 느슨했다. 부서지는 빛의 가루들이 넓게 퍼지면서 물 속으로 스몄고, 수면을 스치는 잔 바람에 빛들은 수억만 개의 생멸로 반짝였다. 석양에 빛나는 먼 섬들이 어둠 속으로 불려가면 수평선 아래로 내려앉은 해가 물 위의 빛들을 거두어들였고, 빛들은 해지는 쪽으로 몰려가 소멸했다([칼의 노래] 209쪽)”

그 간결한 문장은 또 철학적이었다.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적에게 있을 것이었고, 적이 나를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나에게 있을 것이었다([칼의 노래] 32쪽)”

또한 이순신장군의 말은 훈시적이었다.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칼의 노래] 197쪽)”

그리고 소설 전체적으로는 마치 화가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의 유화를 보는 듯, 아름답기도 한다.
문장은 화판의 한 색깔이라고도 하듯이.
목 베다, 적을 베다, 칼로 베다, 그런 살벌한 말이 가득한데 말이다.

소설의 이순신장군 <나>는 늘 태연하신다.
그러나 눈으로선 보이지 않는 이순신장군의 불보다 뜨거운 투지와 적의, 차가운 분노와 억울함이 행간에서 스며 나와 읽은이의 마음을 물들이게 한다.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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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人の知らない日本語 1 (單行本,ソフトカバ-) 日本人の知らない日本語 1
蛇藏&海野?子 / メディアファクトリ-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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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도 대부분 문제되지 않는 일본어에 관한 잡학을 소개한 만화책이어서, 일본어 학교에 다니는 외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선생님의 회화가 웃깁니다.
거의 개그 만화지요.
일본어의 어려움을 해설한 책이 이렇게 웃긴다니.
게다가 외국인 학생들은 모두 진지하고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어서 그것이 또 웃깁니다.
일본어의 잡학 내용도 괜찮아요.
일본어 잡학에 관해선 일본에 태어나서 40년이 넘는 나도 "아, 그랬구나"라고 많이 느낄 정도로, 흔히 알수 없었던 내용이 많았어요.

사실 일본어도 한국어 못지 않게 말이 어려워요.
특히 존경어, 겸양어(謙讓語: 자기를 낮춤으로써 상대편을 높이는 말), 비즈니스나 예의를 갖추는 문서에서 사용하는 말들.
일본인도 정확히 이해하는 자가 드물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일본어는 가끔 문제가 있어요.
예컨데, 이 만화에서도 나오는 존경어(라고 등장인물이 인식해서 사용하던 말) “∼先生, おられますか?( ∼선생님, 계세요?)”는 그야말로 헷갈립니다.
이 만화에서도 “おられますか?(계세요?)”는 존경어가 아니다고 되어 있어요.
그 근거는 “おる, いる(있다=겸양어)”에 존칭어미”られる”를 틀리게 덧붙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한국어에서도 마찬가진데, 일본어에서도 겸양어+존경어가 하나로 된 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난 몇십년동안, “おられますか?(계세요?)”를 존경어로 인식하여 사용해 왔으니까, 작은 충격이었어요.
나도, 내 곁에 있는 많은 일본인들도 틀린 채 “おられますか?(계세요?)”를 연발해 왔단 말인가요?

인터넷으로 조사해 봤어요.
조사한 결과.
“おられますか?(계세요?)”는 일본어 존경어로 유용하다는 것이 옳은 듯.
헷갈린다∼

이런 의견이 있어요.
“「なさる(하신다)」에 대응해서 「いらっしゃる(계신다)」라고 해야 할 때, 「おられる(계신다)」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される(하신다)」에 대응해서 「おられる(계신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 일본어다”
헷갈리죠?
요약하면, 존중성의 강약으로 말한다면 “いる(있다)”  <  “おられる(계신다)”  <  “いらっしゃる(계신다)”라고 되는 겁니다.
사용법으로 말한다면 가게에 처음 오신 손님께 말할 때 = “いらっしゃる(계신다)”, 오래도록 함께 협력해서 일 해 왔던 서로 잘 아는 손님께 말할 때 = “いらっしゃる(계신다)” 또는 “おられる(계신다)”.
특히 “おる(있다)”는 겸양어가 아니다는 것이 옳은 견해랍니다.

견해?
자기 나라 말의 사용법에 관해서도 내부에 “다른 견해”가 있다니.
헷갈리죠?
따지고 보면 일본어는 정말 어렵다는 예지요.

그러나 잡학은 어디까지나 잡학입니다.
이 만화책에 실린 내용을 전혀 몰라도 일본 유학이나 비즈니스에선 문제 되지 않아요.
그저 “일본어, 참 어렵고도 재미 있고, 이 외국인들도 다 재미 있구나” 그 정도로 보면 이 만화 정말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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