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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ㅣ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평점 :
관리사무소의 새벽은 아주 조용하다. 저 멀리 지나가는 차들의 소리, 문 밖을 나가면 눈 앞을 막고 있는 뿌연 안개, 오로지 고요함, 숨소리 하나 안 나는 그 고요함뿐이다. 그 속에 있으면 과거의 내가 보이고, 그가 나에게 말을 한다. 고요함 속에 있으면 말이다.
고요함 속에 눈을 감는다. 그러면 난 다시 그곳에 가 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고요한 교실, 밖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소리, 지나가는 차들의 소리 들만이 멀리서 들려온다.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본다. 내 양 옆에 윗도리는 공고를 상징하는 회색 마이를 입고, 검정색 교복 바지를 입은 그들이 앉아있다. 여전히 과거 속에서도 이들은 서로 소리지르고 눈을 뒤집어 까며 침을 튀기며 말하고 있다.
“그게 핵심이 아니라고! 병신아!”
왼쪽에서
“넌 눈이 어디로 박혔냐, 이건 완전 진짜라고 이 덜 떨어진 새끼야!”
오른쪽에서
서로 쌍 욕을 퍼붓는 이들, 고요함과 함께 이들의 소리가 같이 묘하게 어울린다.
우리는 수업이 끝난 공고의 빈 교실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내가 책상을 두 개를 붙인 채 가운데 앉아 있고, 왼쪽에는 전자과 칠뜩이가, 오른쪽에는 화공과의 에로 본좌가 지금 대화를 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전자과 칠뜩이로부터 시작됐다. 갑자기 뜬금없이 자신은 이제부터 문학의 인생을 살겠다며 교실에 들어오자 마자 선언을 하더니 이게 바로 문학이라며 책상 위에 멋있게 던진 책,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공장을 다니며 기판에 납땜이나 하는 인생 벗어 나려면 문학이 아니라 자격증이라고 핀잔을 주던 화공과 에론 본좌는 그가 던진 책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정작 자기는 집에서 야동이나 모으고 있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칠뜩이가 여기 ‘끝.내.주.는’ 부분도 있어 란 말에 혹해 이 책의 펼친 것이 전쟁의 서막이었다.
‘끝내주는’ 부분을 본 에로 본좌는 하루키에게 홀딱 반해 버렸다. 몇 번을 다시 읽고, 그 부분만 찾아 읽던 그는 이것은 문학이 아니라 야설(야한 소설의 줄임말)의 지존이며, 이것이야 말로 내가 찾던 ‘신의 야설’이라며 급 흥분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자기가 보여준 문학의 정점에 있는 책이 졸지에 ‘신의 야설’로 둔갑하는 사태에 칠뜩이는 너무 놀라 흥분해 말도 더듬거리며 그에게 대들기 시작한 것이 이 모든 논쟁의 출발이었다.
“야이, 병.. 병.. 병신아! 이건 그 따위 수준 낮은 저질 문학이 아니라고! 제대로 읽어!”
침까지 흘리며 말하는 칠뜩이.
“이건 문학이 아니야! 이건 진짜야! 완전 꼴려!”
이미 눈은 빗나가 있는 에로 본좌.
두 사람은 접점을 찾지 못하고 계속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칠뜩이는 나를 쳐다보고 이렇게 물었다.
“루쉰P, 누가 맞냐?”
지겨운 대화에 창 밖을 보고 있던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문제는 마르크스야.”
둘은 동시에 나에게
“야, 이 등신아!”
난 그 때 IMF라는 초유의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이건 뭔 일인가? 하고 넋 빠져 있었다. 98년 말 우리가 학교의 정책이란 것에 의해 3학년 2학기 때는 무조건 수업 일수를 채우기 위한 취업을 해야 만 했고, 취업을 받아 줄 회사는 없었고, 공장도 없었다. 학교에서는 나가라 하는데 받아 줄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학교에 있는 것은 수업 일수 때문에 용납되지 않았다.
무조건 나가라. 일을 하라. 자리가 없는데 어디 가서든 일을 하라. 근데 받아 줄 회사는 없다. 그런 기묘한 세계의 한 복판에 나는그리고 우리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시간이나 때우러 다니던 헌책방에서 가와카미 하지메의 ‘빈곤론’의 책을 접하고 또 음침하게 앉아 있던 젊은 지식인 형에게 감화를 받은 나는 마르크스가 이런 문제의 해결점이자 출발점이며, 결국 무지가 우리를 이렇게 지옥 속으로 밀어 붙이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우연찮게 얻은 마르크스에 대한 지식의 쪼가리로 계급이란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것은 다 자본가들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에 대해 분노로 난 휩싸여 있었다. 뭘 해도 마르크스야! 자본가들! 그들이 누군지 모르지만 내 불행의 원흉은 그들이야!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친구들에 의해 결국 난 등신이 됐고, 책상은 엎어지고, 칠뜩이와 에로 본좌는 서로 멱살을 잡고 뒹굴고, 어디로 날라가 버렸는지 ‘상실의 시대’는 없어져 버렸다.
하루키 그는 나에게 그런 존재다. 기묘한 세계의 중심에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초 절정 미인 아이리시스님의 선물이자, 내 기묘한 세계의 중심이 되는 인물의 잡문집.
돌이켜 보면 그 때의 에로 본좌와 칠뜩이의 치열한 논쟁, 그리고 나의 논쟁, 그것은 서로 의미 없는 논쟁이자 그 무엇도 의미를 찾기 힘든 대화였다. 그런 대화들을 하며 우리는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상대방의 입장 따위 들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서로 각자의 생각만 중요할 뿐, 칠뜩이는 칠뜩이 마음대로, 에로 본좌는 본좌 마음대로, 난 내 마음대로, 그런데 지금도 사람들은 항상 그렇다. 맞냐 틀리냐, 이쪽이냐, 저쪽이냐 등등.
난 그런 속에서 항상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말이다. 하루키 잡문집에서는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유라고 할까? 다 읽으면 솜 같은 부드러움, 어떤 것으로 찔러도 푹 들어갈 것 같은, 아주 부드러움 그런 것이 느껴진다. 이 쪽이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또 저쪽이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다 읽으면 그냥 그의 이야기가 그가 섬세하게 만들어낸 세계가 펼쳐질 뿐이다. 무리하게 들어오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 넉넉함. 그것이 하루키 잡문집을 다 읽은 나의 전체적인 감상이다.
설날 ‘복주머니’를 열어보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어주었으면 한다는 것이 하루키의 바램이다. 이런 문장은 어떨까?
마음에 드는 것이 있느냐 하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거야 뭐 어쩔 도리가 없겠죠.
하루키는 이런 태도다. 지금의 내 리뷰 역시 이러하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느냐 하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거야 뭐 어쩔 도리가 없겠죠.
화공과 에로 본좌, 그는 어떠한 사람인가. 이미 그는 고등학교 입학 시절부터 남다른 아우라를 풍겼다. 185 정도 되는 멀대 같이 큰 키, 그러나 몸에는 군살을 비롯해 살 하나 없는 몸매, 아 저 친구와 비슷하구나 하고 생각 든 물체는 가끔씩 길에서 마주치는 가게 앞에 전시된 사람 모양의 풍선이 있지 않는가, 밑에서 바람을 불어 왔다 갔다 하는 그런 막대기 같은 사람 풍선, 딱 그 물체가 사람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듯한 친구였다.
그런 큰 키를 가지고 교실 뒤에 짝도 없이 앉아 수업 중에 혼자서 교과서를 보고 킬킬거리고 웃거나 하는 독특한 녀석이었다. 분명 그 책은 교과서인데, 그렇다고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니라서 뭔가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다고나 할까?
암튼 제발 나에게 말 안 시켜줬으면 하는 친구 베스트 5위 안에서도 상위권 안에 드는 친구였다. 도대체 이 녀석과 어떻게 친해 진 것일까? 한적한 미개발 P시에 사는 이 녀석은 그래도 전철이 지나다니는 내가 사는 O시의 공고에 합격 해 매일 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다. 우리 반에는 P시에서 학교를 오는 아이들을 가리켜 P파 라고 지칭했다. 그들은 버스를 타고 같이 학교를 등교하기에 붙여진 의미 없는 호칭이었다. 그 P파에서 유독 그는 다른 버스를 타고 오거나 하며 그들과 어울리지를 않았다. 게다가 P파의 아이들을 학교에서 봐도 피해 다니기 일쑤였다.
후에 들은 얘기로는 중학교 시절부터 P파의 거북이라고 불리는 녀석에게 괴롭힘을 당했는데 하필 고등학교도 그와 같이 다니게 됐다는 소식과 그 속에 숨겨진 진실은 사실 거북이를 피하려고 이 학교를 지원했는데 거기에 거북이도 붙었다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이 바로 화공과 에로 본좌였다.
그런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이 어디 한, 둘 이겠는가, 나 역시 공고를 합격한 후 부모님들은 오토바이를 몰고 교복을 입고 담배를 물고 다니는 학생들은 모두 O시의 내가 다니는 이 공고의 학생들이라고 굳건히 믿고 계셨기에 나를 위해서 중3 겨울 방학 때 집 근처 합기도 도장을 찾아가 직접 운동 신청해 주셨다. 합기도 도장을 끌려 가며 원래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면 부모님들은 수학이나 영어학원에 신청해 줘서 공부를 시키는데 우리 부모님들은 왜 나를 도장으로 데려가나 하면서 의아해 했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부모님과 관장님의 친절한 가르침을 사사 받아 난 정의를 위해서 무력을 사용하고자 하는 의욕에 불 타 있었다. 또한 관장님은 고도의 심리전에 능통하신 분으로 나를 위해서 싸우지 않고 적을 제압하는 법에 대해 강의도 해 주셨다. 일단 입학과 동시에 가방에는 책 말고 쌍절곤을 가지고 다니라 하셨고, 학교 쉬는 시간에 책을 꺼 내는 척 하며 쌍절곤을 자연스럽게 떨어 뜨리라고 했다. 거기다가 하나 더 사람들과 얘기할 때는 자신이 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퍼 트리라고 하셨다. 하나 하나 잊어버릴까 봐 소중하게 수첩에 적은 나는 그렇게 실천을 했고, 더욱 가관 이었던 것은 너무 성급하게 운동한다고 퍼트리고 싶은 마음에 이런 식의 대화를 거의 이어갔다.
“반갑다. 나 누구라고 해.”
라고 새로 만난 친구가 인사를 하면
“어, 난 신터미널 근처 OO관에서 운동을 하고 있어.”
라고 말이다.
앞, 뒤 다 잘라먹고 이렇게 말이다.
암튼 관장님이 가르쳐 준 방법은 효력이 있어, 나를 둘러싼 아이들에게 50%는 운동을 하고 있으니 건들지 말자라는 파와 50%는 운동을 하고 있으니 한 번 건드려서 싸워 봐야지 라는 파가 양분돼 있었다.
화공과 에로 본좌, 나는 이렇게 서로 안타까운 사연을 간직한 채 우리는 서로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화창한 오후, 체육시간이었다.
화공과도 전기과도 체육수업을 위해 모여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일주일에 한 번은 수업하기 싫은 체육 선생은 비품실에서 공 몇 개를 꺼내 던져주며 공이나 차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개들이 공 보면 달려가서 물고 오듯이 별 생각도 없이 공을 가지고 운동장으로 달려 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난 그럴 줄 알고 준비한 책 한 권을 들고 조용히 운동장 근처의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한, 두 페이지 읽었을까. 내가 앉아 있는 곳 그리 얼마 떨어지지 않은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키득거리는 소리, 하지마 하지마 하는 소리. 독서의 몰입을 방해하는 이 상스러운 것들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그곳을 보니 아이들이 무리지어 있었고 그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화공과의 에로 본좌의 머리가 그 아이들을 사이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뭔 일인가 싶어. 읽던 책을 덮고 그 광경을 구경하러 갔다. 그곳에는 아이들이 벤치를 중심으로 반원으로 서 있었고, 거북이는 테니스 공을 들고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화공과 에로 본좌는 벤치 뒤에 서 있었고 말이다. 거북이가 에로 본좌에게 공을 던지면 그는 기묘한 웃음소리를 내며 ‘하지마, 하지마’ 하는 소리를 내며 공을 피하고, 그 피한 공을 찾아가 주워서 거북이에게 다시 주었다. 그러면 거북이는 다시 에로 본좌에게 낄낄대며 던지는 것 이었다. 옆에서는 아이들도 같이 웃고 있고 말이다.
원래 난 정의를 위해 나서는 체질이 아니다. 게다가 돌이켜 보면 그런 일들에 있어서는 멀리 돌아가거나 모른 척하기 일쑤다. 하지만 난 보고 말았다. ‘하지마’라고 말하며 기묘하게 얼굴을 일그러 트리며 웃는 에로 본좌의 입술을 말이다. 그의 표정은 웃는 듯 했지만 입술은 일그러져 있었다.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워서 말이다.
“야, 니들 그만해!”
아이들의 시선, 거북이의 시선 모두 나에게 쏟아졌다. 게다가 화공과 에로 본좌의 그 기묘한 시선.
“왜 사람을 괴롭혀, 그게 재밌냐?”
나의 거침 없는 발언, 속으로 ‘짱 멋있어, 마치 영화의 주인공 같아’라며 감탄하는 내 마음과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초 긴장 상태의 마음으로 난 여러 갈래 찢겨져 있었다.
“뭐야, 이 새끼야, 한판 붙어 보자는 거야.”
테니스 공을 손에 움켜쥔 거북이 눈을 부라리며 말한다.
내가 워낙 운동한다고 떠 들었지만 그 실체를 확인하지 못 했던 아이들 중 몇 몇은 갑자기 그 무리에서 뛰쳐나가 운동장에서 공을 차던 아이들까지 모두 불러 금세 나와 거북이 주위에는 화공과와 전기과의 아이들로 꽉 차게 됐다. 지금 생각해도 그 순간에 어찌 그리 많은 인원이 모이냐 라며 속으로 혀를 찼었다. 게다가 화공과는 여자 아이들도 있었고, 그 속에는 내 초등학교 동창도 둘이나 있었다.
이미 상황은 벌어졌고, 물러설 자리도 없음을 느낀 나는 한 판 붙자라고 소리를 치며 주먹을 관장님이 가르쳐 주신 데로 꽉 말아쥐었다. 근데 거북이 녀석이 벤치 위로 성큼 올라가는 것이었다. 마치 조지 오웰이 코끼리를 언제 쏠 것이냐고 기대하던 인도의 민중들처럼 아이들은 나를 바라 보고 있었고 난 1%의 협상의 여지만 있다면 거북이와 대화를 해야 한다고 그것이 관장님의 마지막 비술 일촌 피하기였기에 그에게 다가 갔다.
“야,”라고 말하며 다가 가던 나는 갑자기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앞이 갑자기 껌껌해 지고 눈을 뜨니 내가 방금 있던 운동장 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고, 대신 내 눈 앞에 새우라고 불리는 친구가 앞에 서 있었다.
“루쉰P, 날 따라와!”
순진하게 웃으며 내 앞을 뛰어가는 새우에게
“야! 수업 끝났어? 내 싸움은 어떻게 된 거야!”
라고 소리치며 그를 쫓아가는데
“루쉰P! 루쉰P!”
하는 고함 소리와 갑자기 볼이 너무나도 아팠다.
또 다시 눈이 떠졌다. 내 눈 앞에는 내 멱살을 잡고 볼을 세차게 때리고 있는 반장 녀석과 옆에 양동이에 물을 받아서 나에게 뿌리고 있는 녀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만 때려, 이 자식들아..”
아, 힘 없는 나의 목소리.
“야, 정신차렸어. 정신차렸어.”
옆에서 나를 지켜 본 친구들의 증언은 이러했다. 내가 뭐라고 소리치며 벤치로 다가갈 때 거북이는 벤치에서 나를 향해 발로 내 머리를 걷어 찼고 난 그 한 방에 엎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일어 설려고 하는 순간 거북이가 다시 내 머리를 발로 찼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절을 했고, 지켜 보던 아이들과 거북이 역시 P파와 더불어 수업 종이 끝나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절한 나를 양호실에 데려가면 싸웠다는 것이 들통나기에 20분 동안 누워 있던 나를 향해 에로 본좌는 수업도 들어가지 않고 양동이에 물을 떠와 끼얹고 반장은 내 볼을 정신차리라고 세차게 때렸다는 것이다. 20분 동안 말이다. 쉬지도 않고…
옷은 흠뻑 젖어 있고, 볼은 탱탱 불고, 머리가 깨질 듯한 나에게 친구들은 이건 정말 야비한 수법이었다. 어떻게 누워 있는 사람의 머리를 찰 수 있는 냐 라며 다시 붙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 아이들의 부축을 받고 결국 나는 양호실을 갔고, 관자놀이가 퉁퉁 부어 있다는 양호 선생님의 지적과 어디서 다쳤냐는 말씀에 교실에 들어가다가 문에 끼었다라는 반장의 어이 없는 변명과 아무런 의심 없이 믿어 주는 미소가 아름다운 양호 선생님을 보며, 내가 미쳤거나, 아니면 이 사람들이 미쳤거나 둘 중 하나다라는 생각을 하며 양호 침대에 누워서 아픈 관자놀이에 냉 찜질을 하며 사태를 파악했다.
단 한 마디로 그 때까지 노력한 고도의 심리전술이 모두 무산으로 될 위기에 봉착한 것 이었다. 더욱이 공고는 싸움 실력이 들통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곳이다. 난 아픈 와중에도 화공과의 에로 본좌를 불렀다. 에로 본좌는 그야말로 존경에 가까운 눈빛으로 나를 만나러 왔고, 그에게 나는 귓속말로 속닥거렸다.
에로 본좌는 그의 교실로 가서 나의 말대로 움직여 주었다. 다음 날 아침 머리에 반창고를 붙인 채 아직도 퉁퉁 부은 관자놀이를 붙잡고 가던 중 화공과, 전기과의 P파가 오는 것이 보였다. 난 어제 에로 본좌와 얘기한 데로 그들에게 다정하게 다가갔다.
야규 무네노리의 신 카케류의 비법으로 그들이 생각한 자세가 아니라 새로운 자세를 몇 번 바꾸면 그들의 마음의 움직임을 내 안에 담을 수 있다는 관장님의 말씀대로 피할 줄 알았던 내가 그들에게 다가 가자 그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 미묘한 마음의 움직임을 느끼며 나는 말했다.
“야, 얘들이 어제 내가 너랑 싸웠다는데. 하하하!”
거북이에게 건넨 이 한 마디.
거북이의 표정과 P파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얼어 붙었다. 아무 대꾸도 못 하는 그들을 뒤에 남겨 놓은 채 관자놀이를 부여 잡고 웃으며 가는 나의 모습, 신 카케류 야규 무네노리가 따로 없을 정도였다.
어제 에로 본좌와 나눈 얘기는 미친 척하자는 것이었다. 에로 본좌에게는 내가 아무 기억을 못 한다고 교실에 가서 얘기하라고 했고 그 주역인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어떻게든 기억을 못 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 이후 에로 본좌는 나와 붙어 다녔고, 거북이와 P파의 괴롭힘 역시 멈추었다. 우리는 그렇게 미친 그룹을 형성한 것이었다.
이 그룹이 바로 ‘바보파’ 였다. 우리는 그렇게 기묘하게 만났다. 칠뜩이도 뒤통수에 500원 짜리 땜빵 있었는데 단순히 뒤통수에 있는 땜빵 때문에 칠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얘들의 놀림의 피해 우리 그룹에 들어 온 이후 ‘거기로 갈 줄 알았어’라는 아이들의 얘기를 들으며 아이들의 놀림은 멈추었다. 난 항상 뭔가 한 방이 있다는 기대를 받으며 여전히 ‘운동을 하고 다녀’라고 아이들에게 얘기를 하고 다녔고 말이다.
그렇게 여러 과의 아웃사이더들의 모임이 바로 우리의 모임이었다. 저능아라고 표현하기 힘든 어떤 선을 넘은 집단의 대표격으로 우리는 아이들에게 칭송을 받으며 우리 그룹은 형성 돼 갔다.
여름에는 운동장 풀 밭에 앉아 내 권유로 문학 책을 들고 같이 독서를 하고 있으면 지나가는 아이들의 상쾌한 비웃음 소리와 몇 안 되지만 여신 대우를 받는 소수의 여자 학생들의 손가락질 속에서 우리 그룹은 무럭 무럭 성장해 갔다. 참고로 공고에서는 다른 학교와 미팅도 많이 하는데 우리 그룹은 단 한 명도 초대 받지 못 했다는 사실에서 그 유명세를 증명할 수 있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하루키 잡문집은 나에게 그들의 추억을 떠 올리게 하고 그들에 대해 말하게 한다. 그리고 끊임 없는 이야기의 형태로 쓰게 한다. 재미가 있든 없든 말이다. 독서를 자주 하지만 하루키의 잡문집 경우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내 뿜게 한다. 그게 왜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하루키가 잡문집에서 말하는 자연스러운 이야기들이 나도 말하라고 재촉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내가 소설을 쓰는 한 가지 큰 목적은 이야기라는 하나의 ‘생물’을 독자와 공유하고, 그 공유성을 지렛대 삼아 마음과 마음 사이에 개별적인 터널을 뚫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누구든, 나이가 몇이든, 어디에 있든, 그런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쓴 그 이야기를 당신이 ‘자기 이야기’로 확실하게 끌어안아주느냐 마느냐, 단지 그것뿐입니다.
하루키의 저 문장에서 ‘이야기’를 내 리뷰로 바꾼다면 나 역시 그러하다. 리뷰라는 이 형식의 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풀고 내 마음의 터널을 내 서재에 온 당신의 마음의 터널에 뚫고 싶은 것이다. 근데 이왕 터널 뚫는 거라면 내 터널이나 더 뚫어야겠다.
11월 말 핸드폰 번호를 새롭게 바꿔 버렸다. 난 모든 것에서 도망쳤다. 부끄럽게도 말이다. 성형외과의 내 여자 동창이 난 처음에는 예전과 똑 같은 과격함으로 나를 대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만나면서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내 과거 속의 과격하고 자기 주장이 강하고 그런 여성은 없어져 있었다.
말투도 조신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고 돌려서 말하는 그런 여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몇 번 만나면서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달라진 점이 나에게도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렇게 열성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냥 자신의 직장 얘기, 아니면 관심사 그런 것들을 얘기할 뿐, 난 거기에 맞장구를 치거나 내 얘기를 하거나 그러면서 말이다. 나는 쉬는 날에는 내가 억지를 써서 근처에 갈 일이 있으니 태우러 간다고 하거나 다른 핑계를 대고 직장 근처에서 몇 십분 전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태우고 와서 집 앞에 내려주거나 하는 그런 행동을 반복했다.
그녀가 나에게 딱히 시간을 내서 어디를 놀러 간 거나 그런 적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다가가는 것도 부담스럽게 느껴진다고 판단했고, 그냥 이렇게 자연스러운 것이 좋지 않을까라고 혼자 생각도 했기 때문이다.
차에 태워서 직장에서 연수를 간다고 할 때는 선물 상자에 연수 갈 동안 먹을 과자나 그런 것들을 싸주고 편지도 써 주고, 몇 번 그런 일을 반복했었다. 그럴 때마다 부담스럽게 이런 것은 왜 주냐며 그녀는 말을 했지만 싫어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기에 난 이럴 때 남자가 강하게 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억지로 우기면서 선물을 쥐어주며 그녀를 집에 내려주고 가곤 했었다.
사람들에게는 연애한다고 말을 했지만, 연애는 아니라 그냥 혼자만의 짝사랑이었다. 같이 대화하면 난 그것이 너무나 좋고, 그냥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웃기도 잘 웃어 주었고, 나랑 공감을 많이 해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대신 깊이 있게 대화는 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남성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대화 속에서 넌지시 비추었고, 난 그 사람이 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마음 속에서 점점 커져 갔다. 그런데 말이다. 그녀가 원하는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과 나는 너무나도 천지차이였다. 비슷하지도 않고 말이다.
그 괴리감, 그것은 내 마음 속을 점점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태도에 대해서도 점점 의심이 쌓여져 갔다. 도대체 이런 식으로 나를 만나는 것은 무엇일까? 몇 번의 밥을 먹고 몇 번의 대화를 나누고 이런 것들이 나에게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그녀는 나를 무슨 의미로 만나고 있는 것일까? 만나면 그런 의심은 없어지고 그냥 나를 보며 웃는 그녀가 너무 좋았고, 그런 의심을 가지는 내가 부끄러웠다.
혼자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근데 그런 의심은 나를 더 파 먹는 것이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인가? 난 대체 몇 번이고 웃으며 만나고 대화하고 그런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지? 이렇게 해서 자꾸 다가가는 것일까? 얼마만큼 다가왔다는 것이지?
난 그녀와 내 깊은 곳까지 다 털어 놓고 대화를 했다고 생각했다. 여자친구가 없는 것에 대한 고민도 진지하게 얘기를 했다. 차 안에서 오랜 시간 동안 집에 들어 가지도 않은 채 그녀는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그리고 힘 내라고도 하고 말이다. 얘기를 하면 속이 편했다.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없어도 대화를 하면 그것이 좋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그녀의 내 이야기를 들어주며 방긋 웃는 그 미소가 말이다.
결국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참지를 못했다. 애매모호함에 대한 내 태도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날은 내가 용기를 내서 시간을 좀 달라고 사정을 했다. 집 근처의 커피숍에서 우리는 둘이 앉아서 또 대화를 했다. 소재가 무엇이었을까? 그냥 세상사였다. 어떤 주제도 없고 그 어떤 것도 없는 그런 이야기들 근데 너무 재미 있었다. 서로 웃기도 하고 공감도 하며 말이다.
대화가 마칠 무렵, 난 목구멍에서 걸려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끄집어 내서 정말 용기 있게 얘기를 했다. 좋아한다고 말이다. 정말 좋아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녀의 표정이 당혹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주 당황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그래서 어떻게 하자며 나에게 되려 질문을 했다. 난 거기서 말문이 막혔다. 뭐라 얘기를 해야 하지? 넌 내가 어떠냐? 라고 말을 해야 할까? 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랑 이렇게 만나고 있는 거냐? 근데 그 말들이 목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아무리 꺼 내려고 해도 나오지가 않았다. 난 어이 없게도 이런 말을 해 버렸다.
“ 그러니까, 너를 좋아한다는 이 감정이 너와 내 사이를 망쳐 놓을 것 같아. 지금 우리가 즐겁게 대화를 하고 있는 이 사이를 말이야. 그래서 접어 버리기로 했어. 너를 좋아한다는 그 감정 말이야. 그게 좋을 것 같아. 너와 나를 위해서.”
그녀의 안심하는 표정을 보며 내가 마무리를 잘 했구나 란 안도감과 내 안의 그 어떤 것이 무너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아주 철저하게 무너져 버리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에게 당부를 했다.
“ 내가 너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니까 그런 착각을 할 수도 있어. 나도 그런 태도를 좀 고쳐야겠어. 그리고 너가 나한테 그런 말 했다고 우리 관계가 이상해 지는 것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지금처럼 지내자 알았지?”
나는 당연하지 걱정하지 말라고 난 그냥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내 맘이 편해서 그런 거야 이제 말을 했으니 그런 생각 없이 널 정말 친구로 친하게 지낼 수 있겠어 그게 나한테도 더 좋은 것 같아 라고 말하며 무너지는 내 한 쪽의 그 어딘가에 눈을 돌리지 않은 채 아주 웃으며 크게 말했다.
그렇게 그녀를 태워 보내고 난 또 며칠 동안 그녀랑 카톡을 하고 또 서로 신변에 대한 대화를 했다. 웃으며 말이다. 그러다 빼빼로 데이가 지난 후 난 더 이상 나에게 참을 수 없었다. 역겹다는 생각도 들고, 지겹다는 생각도 했다. 내 자신에 대해서 말이다. 그녀에게 오는 카톡을 보며 기다리고 있는 자신,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 누구에도 알리지 않고 11월 말에 핸드폰 번호를 아예 다른 번호로 바꿔 버렸다. 핸드폰 연결 안내 서비스도 신청하지 않았다. 그냥 다 끊어 버렸다. 한 달이 지난 지금도 그녀에게 연락이 올 방법이 나에겐 없다. 그리고 나 역시 연락할 방법이 없다. 전화번호는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눈이 쏟아 지던 날 저녁에 차를 몰고 가는 데 길가 버스 정류장에서 남자의 목에 목도리를 둘러 주는 여자의 모습을 지나치며 보았다. 근데 그 모습을 보고 지나치는 순간, 가슴에서 억누르지 못할 그 어떤 것이 폭발해 버려 눈물이 쉴 새 없이 나왔다. 계속해서 마치 바보처럼 눈물이 계속 나왔다. 주변 도로에 차를 주차하고 운전대를 잡고 그냥 엉엉 울어 버렸다. 왜 그 커플을 보고 내가 눈물이 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눈물이 나왔다. 미친 듯이 말이다.
그 와중에 아이리시스님의 하루키의 잡문집이 왔다. 난 거기서 그 구절을 발견했다.
아무 것도 아닌 것만 생각하자. 바람을 생각하자.
거기에 대해 하루키는 보충 설명을 해 준다.
나는 뭔가 고통스럽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늘 그 구절을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만 생각하자. 바람을 생각하자’라고, 그래서 눈을 감고 마음의 문을 닫고 바람만 생각했다.
하루키의 잡문집은 나에게 지금 최고의 책이다. 그의 책을 보고 주문한 레이먼드 카버, 레이먼드 챈들러, 잭 런던 그리고 재즈 음악들이 내 옆에 막 쌓여 있다. 난 지금 아무 것도 아닌 것만 생각한다. 잡문집만 생각한다.
하루키 잡문집 나에겐 하루키에 대해 알 수 있는 책이고 읽어도 후회하지 않는 책이다.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잡문집을 읽으며 살아 났다. 그리고 쓰고 싶었다. 의미가 있든, 없든 말이다.
크리스마스 때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내게 에로 본좌가 놀러왔다. 그리고 하루키의 잡문집을 보았다.
“이번에는 어떤 부분이 끝내주냐?”
난 화도 안 났다. 크리스마스에 홀로 있을 나를 위해 온 녀석이다. 고마울 뿐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만 생각하자. 바람을 생각하자.
난 씩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모두 끝.내.줘.”
그는 웃으며 잡문집을 들었고, 크리스마스가 끝나는 다음 날 아침까지 모두 읽고 나에게
“이 녀석은 진짜야..”라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하루키는 진짜지. 그것이 이 잡문집 안에 모두 들어가 있다.
고맙습니다. 아이리시스님 ^^
아무 것도 아닌 것만 생각하자. 바람을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