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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지 군단 1~4권 박스 세트 - 한정판
후루야 미노루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6년 1월
평점 :
품절
이 아파트에는 매일 아침 8시반에 정확하게 출근하는 여성이 있다.
약간 긴 파마머리, 어떤 날은 스커트 차림, 어떤 날은 진 청바지에 마이를 입고 높은 구두를 신은 이 여성. 수수한 화장, 차분한 표정, 전문직에 종사할 것 같은 이미지, 얼굴은 계란형에 미인이다!
난 항상 9시 출근이지만 어느 날 눈에 띈 이 여성을 보기 위해 매일 아침 8시 20분에 출근한다. 그런 나에게 모두 성실하다고 말한다. 푸훗. 항상 사실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 법.
이 여성은 어떤 날은 뛰고, 어떤 날은 걷는다. 다급한 날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날은 저녁에도 볼 때가 있다. 7시에서 8시쯤 퇴근을 하는 듯 하다.
이 여성 분은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렇지 모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여성분께 내 마음대로 이름도 지어드렸다. 지혜씨라고 말이다. 출근하기 위해 멀리서 걸어오는 그 여성에게 혼자서 말을 걸어본다.
'지혜씨, 오늘은 헤어스타일이 멋지시네요.'
'지혜씨, 오늘은 옷이 참 잘 어울리세요.'
그렇게 아파트 길목에서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다.
옴진리교에 대한 책을 열심히 보고 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하고 말이다. 그리고 결심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겠다고 말이다. 근데 주변을 둘러보니 변압실이라 오로지 웽~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전압기와 책상, 의자, tv 뿐. 난 혼자였다.
이 녀석들에게 애정을 쏟을까 하다가 '이건 아니야, 난 사람이야, 사람을 사랑해야 해'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다 섬광 같이 지나간 한 여성, 매일 같이 서로 무표정하게 바라 보지만 난 그 여성에게 애정을 쏟아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사랑을 쏟아준다고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밤에는 달을 보며 그 여성이 오늘은 좋은 하루를 보냈기를! 낮에는 해를 보며 그 여성이 오늘은 즐거운 일만이 가득하기를! 중얼거리고 있다.
나랑 친한 경비 반장님은 지하에 나와 달 보고 해 보고 중얼거리는 나를 보며 걱정이 되시는 모양이다. 저번에 무슨 책을 읽냐고 물어보실 길래 옴진리교라는 사린 가스 테러 사건에 대한 책을 보고 있다고 말씀드리자 갸우뚱 하시며 전기 공부 책은 안 읽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이후에 택배로 배달되는 책들은 경비 반장님을 통해서 오는데 옴진리교 2탄 '약속의 장소에서' 그리고 옴진리교 교주의 어린 시절을 추적한 '황천의 개'등.
배달 될 때마다 무슨 책이냐고 물어 보시는 경비 반장님께 내가 그 때마다 옴진리교라고 하자 더욱 더 이상한 표정으로 바뀌시고 있다. 그리고 경비 반장님께서 한 마디.
'암튼 힘 내!'
뭘, 힘 내란 거지...뭐 하여튼...나를 요즘 좀 피하신다. 경비 반장님. 나랑 곧잘 차도 마시며 시국을 토론 했는데 말이다.
내 생활의 모든 사상의 원류는 후루야 미노루다.
만화가를 지망하는 오타쿠 기계과 친구와 더불어 에로계의 공고 본좌라 불리는 화공과 친구 그리고 공산주의 사상에 한 발 담그고 있는 공고의 붉은별 전기과 나 이렇게 세 명을 주축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써클이 형성되었다. 이름하여 '바보파'
전태일 평전에서 전태일 열사가 활동했던 써클의 이름이 '바보파'라는 사실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우리는 그런 심오한 의미의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여름이 지나고 대 토론이 벌어졌다. 우리는 공고생이기 때문에 놀고 다녀서야 되겠는가 아무리 공부를 하지 않아도 시험은 잘 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써클 동료들을 설득해 겨울 중간고사를 집중 공부를 했었다.
서로 밤을 새가며 토론을 하고 교과서에 밑줄을 치며 우리는 공고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를 했다. 공고는 참 좋았던 점이 어디부터 어디까지 페이지에 문제가 다 나온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공부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우리 써클 소속은 기계과 오타쿠를 중심으로 2명, 화공과 에로 본좌를 중심으로 1명, 전기과 공고의 붉은별을 중심으로 3명이었다. 서로 과마다 시험 범위는 틀리기 때문에 각기 과별로 범위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공부를 했다.
공고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기에 공부를 하면 눈에 확 띈다. 우리가 공부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아이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야, 졔네 공부한다.'
공부를 하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난 속으로 그런 아이들의 기대와 칭찬 속에서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반드시 이번에 우리 전기과에서 대 반란을 일으키고야 말겠다라며 강한 각오를 품었다.
시험 날, 전기과 우리들은 사색이 되었다. 시험 범위를 잘못 파악한 내 오류로 시험 범위가 아닌 앞 페이지들을 우리는 공부를 한 것이다.
전 날 밤을 새서 눈이 빨개진 우리들은 너무 황당한 마음에 서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험 결과가 발표되던 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학교를 가지 말고 가출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시험 결과가 발표되고 우리 성적이 밝혀지자, 아이들은 파안대소를 했다. 나 때문에 같이 시험을 망친 동지들도 고개를 푹 숙인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이 모든 실패는 시험 범위를 착각한 내 실수다라고 양심 선언도 했으나 그 소리에 아이들은 더 파안대소!
그래서 붙여진 우리 써클의 별명이 '바보파'였다. 써클 이름을 우리가 지은 것이 아니라 여론이 지어준 것이다. 우리는 한사코 그 써클이 이름이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말이다.
웃긴 것은 공고에서는 불량써클 비밀 조사를 한다. 학기에 몇 번씩 비밀 여론조사를 실시해 괴롭히는 불량써클이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어떤 녀석이 장난으로 '바보파 루쉰P'라고 내 이름을 적었다.
우리 써클은 담배도 못 피고, 오토바이도 못 타며 지극히 순박한 친구들로 구성돼 있었다. 삥을 뜯기는 커녕 중학생들에게 삥을 뜯긴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의 주로 활동은 싸움 잘하는 녀석들을 피해서 점심을 어디서 숨어 먹을 것인가가 매일의 주요 주제였다.
선도실로 불려간 나.
'너희들 바보파가 뭐하는 써클이야!'
'저기...점심 먹는 써클인데요.'
'뭐라고! 이 새끼가!'
싸다귀를 맞았다. 그 이후 우리 써클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러 저러한 그냥 집이나 같이 다니는 친구들 모임이다라고 말을 하고 또 말 했지만 역시나 선생들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
실컷 얻어 터지고 써클 해체 각서까지 쓰고 일주일에 한 번 선도실로 불려가 그 간의 활동을 보고해야 했다. 결국 보다 못 한 같은 반 친구들이 장난으로 쓴 그 친구를 찾아내 우리 써클을 다 해명해 주기까지 공포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바보파'란 명칭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힘들고 고난의 고개를 넘던 시절, 나에게 힘을 내라며 오타쿠 기계과 친구가 준 책이 '크레이지 군단' 해적판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의붓 아버지에게 버림 받은 추남 이쿠오, 스구오 형제, 자신이 낳아 준 어머니가 누군인지 모른채 공원에서 방황을 하며 사는 추남 이또킹, 시험만 잘 보라고 압박하는 집에 뛰쳐나와 가출한 잘생긴 카즈.
후루야 미노루의 책을 보면 알겠지만, 이 사람 추남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그린다. 주인공 추남 이쿠오를 보며 거울 속의 얼굴을 봤을 때 싱크로율 70%에 육박해 너무 놀랐던 기억도 떠 오르고 말이다.
짙은 어둠으로 시작되는 이 만화는 이쿠오, 이또킹을 중심으로 가출한 청년들의 말도 안 되는 인생역정이 펼쳐진다. 그들을 받아 준 착한 이발소를 중심으로 말이다.
지랄 같은 세상이다라며 그 동안 벌어지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좌절하고 있던 나에게 '크레이지 군단'의 주인공들은 그런 지랄 맞은 세상에서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를 낱낱이 가르쳐 주었다.
후루야 미노루는 이 작품에서 어둠을 웃음으로 한껏 포장해 주었다. 우울한 것도 힘든 것도 모두 다 이렇게 만들어 버리자! 그것이 내가 후루야 미노루에게 배운 것이다.
정말 웃긴 만화였다. 이 책을 읽으며 내 안의 있는 어둠에 대한 컨트롤도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풀어야 할 지도 감을 잡았다.
이 책에는 애정 결핍증이 있는 여자아이가 나온다. 그녀는 이또킹을 너무 사랑해 집착의 정점을 보여주는데 결국 이또킹 엉덩이에 칼침을 놓는다.
이 여자아이는 부모님도 없이 원조교제로 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누군가 자신을 성적 기계로 보는 것이 아닌 사랑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자신이 사랑하겠다고 정한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녀는 돌아 버리는 것이다.
그 삭막한 세계에서 그녀가 바라던 사랑이 집착증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랑을 받고 싶다는 그 마음은 참으로 공감을 했다.
이 아파트에 있는 아름다운 여성 지혜씨, 그 분에게 들리던 들리지 않던 봄이기 때문에 나름 소중한 사랑의 텔레파시를 보내 드리려고 한다. 난 절대 다가가지 않는다. 그것이 후루야 미노루에게 배운 사랑법이다.
이 책에서 압권은 인생 리샛 버튼이다.
이쿠오는 이또킹에게 묻는다. 만약 외계인이 나타나 인생이 실패했다며 이 버튼을 누르면 인생을 다시 리셋할 수 있다고 하며 누를 것이냐 물어본다.
이또킹은 싫다고 한다. 왜냐면 이쿠오를 만났기 때문이란다.
나 역시 외계인이 리셋 버튼을 누르라고 한다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추남이어도 성격이 지랄 맞아도 버티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후루야 미노루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를 사랑해줘야 하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다고 말이다. 내가 돌아가면 지혜씨를 누가 챙겨주나!
봄인데 우울한 리뷰는 좀 벗어나 나름 희망적 리뷰를 한 편 써보자는 마음에 썼는데...또 글이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