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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ㅣ 바리에테 12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정혁현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사랑을 하려면 목숨 바치라는
7월 이달의 책 [이웃]에 대하여
오랜만에 아이들을 데리고 살고 있는 아파트 놀이터에 배드민턴을 치러 갔다. 그동안 제대로 놀아주지 못한 마음을 모아 열심히 놀아줄 작정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아이가 둘이라서 하나와 치면 다른 하나가 입이 나왔고, 치고 난 아이도 교대하면서 입이 나왔다. 엄마가 구경할 테니 둘이서 치라고 하면 아직 힘 조절이 되지 않는 아이들이라 엄마와만 치고 싶어 했다. 둘이 치라고 아들에게 채를 내어 주는데 옆에서 배드민턴 채를 들고 어슬렁거리던 중학생 남자아이가 들고 나온 채를 주면서 자신과 치자고 하는 것이었다. 별 수 없이 그 아이와 배드민턴을 치는데 딸은 동생이 못 친다고 짜증을 내고 나는 나대로 마음이 불편했다. 아이들과 놀아 준다고 해놓고 마음대로 놀아주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처지가 되었다. 딸이 아들에게 못한다고 짜증을 심하게 내기에 나는 말해버렸다. 못 치는 것은 둘 다 똑같다고. 그랬더니 딸은 화가 나서 채를 던지고 자전거를 타러 가버렸다. ‘내가 뭐가 더 못쳐’라고 외치면서 가버리는 딸아이에게 사실 미안했다. 나는 들고 있던 채를 구경하고 있던 초등학생 남자아이에게 주고 함께 치라고 하고는 잽싸게 아들에게 돌아왔다.
레비나스가 “인간”의 범위에 포함시키지 못한 것은 비인간적인 것 그 자체, 즉 인간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관계를 벗어나는 차원이다. ..... 그가 여기서 놓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든 규범적인 결정은 오로지 “비인간적인”것, 즉 불투명하게 남아 있으며, “인간”으로 간주되는 것의 어떤 서사적 재구축에도 저항하는 어떤 것의 불가해한 근거에 의지해서만 가능하다는 역설이다. [이웃] 252p
나는 아들의 감정은 돌볼 수 있었지만, 중학생 아이의 어떤 관심에 대한 열망은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견을 자신 있게 말할 기회를 갖지 못한 아이의 얼버무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아이의 어떤 것이 나를 두렵게 했다. 그 아이는 초등학생과 함께 배드민턴을 치면서도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건넸다. 나는 그것이 싫었고 대꾸할 겨를을 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과장되게 웃었다. 그의 셔틀콕이 날개가 나가고 머리가 나가도록 새게 치면서 자신을 봐달라고 거의 절망에 가까운 히스테릭한 웃음을 계속 웃어도 나는 그에게 갈 수 없었다. 나는 내 아이들을 두고 그의 엄마가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끼어들고 싶어 했다. 아들아이가 친 공이 울타리를 넘어갔고, 아들이 울타리를 돌아 공을 가지러 가는 사이 그는 달려와 울타리를 넘어가서 공을 들고 돌아왔다. 고마움보다는 어색한 마음이었다. 그의 호의가 부담스러웠다. 자신의 공을 망가뜨린 아이는 다시 아들 옆에 와서 연신 채를 휘둘렀다. 아들의 머리를 쳐버릴까 두려웠던 나는 삼각으로 함께 치자고 권했다. 삼각으로 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가 공을 잘 치는 것도 아니고.
인간됨은 유한, 수동성, 상처받기 쉬운 노출에 대한 특정한 태도이다. 253p
어두워지고 있었다. 딸아이는 일단 돌아왔다. 함께 치자는 권유에 딸은 한 번 무시하는 태도로 아파트 한 동을 돌아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나는 다시 딸에게 함께 하자고 말했다. 딸은 마지못해 동생에게서 채를 받아들었다. 삼각으로 배드민턴을 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딸아이의 얼굴에 짜증이 올랐지만, 쉽게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중학생 아이에게 물었다. 저녁을 먹었느냐고, 먹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안도했다. 나는 대뜸 얼른 돌아가서 밥을 먹으라고 했다. 그 때의 내 목소리가 얼마나 가소롭던지. 간사하고 어색하던지. 엄마가 기다릴텐데 왜 안 가느냐고. 엄마가 찾을 테니 얼른 가라고. 그 아이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이미 많이 어두워졌다. 모두 돌아가고(우린 이른 저녁을 먹었다) 우리만 남았다. 딸아이의 기분이 풀어질 때까지 딸아이가 스스로 잘 친다고 생각할 때까지 열심히 쳐주었다. 아들과도 마찬가지였다. 공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되자 집에 가자고 했다. 딸은 더 치고 싶은 눈치였지만, 나는 어두워서 눈이 아프다고 엄살을 부렸다. 딸은 수긍했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내 찝찝했다. 생각해보니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갈 때마다 혼자 놀고 있던 그 아이였던 것 같아 딸에게 물어보니 그 아이가 맞았다. 그는 어느 무리에도 끼지 못했다. 그 아이의 또렷하지 않았던 말투가 떠올랐다. 안타까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아이의 엄마가 되지도 그 아이의 공부방 선생이 되지도 그 아이의 상담 선생이 될 수도 그 아이의 담임이 될 수도 없었다.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엄연할 뿐이었다. 딸은 그네를 타고 있던 자신에게 그 아이가 다가와 무릎을 만지고 허벅지를 만지더라는 말을 했다. 불쾌감은 극에 달했다. 그냥 있었냐고 하니 동생과 합심해서 그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노라고 아이들이 말했다. 나는 다음에는 그를 무시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나의 그 아이에 대한 호의가 우스웠다.
그런 아이는 누가 돌보아야 할 것인가. 그런 아이들은 도처에 널렸다. 갈수록 사회가 파편화 되어가니 아이들의 놀이 상대는 부모를 넘어서지 못한다. 나와 아이들이 놀고 있던 사이 한 엄마와 아이가 잠깐 배드민턴을 쳤다. 엄마 앞에서 그 아이의 목소리는 컸고 자신감이 있었고, 그 아이의 공은 활기가 넘쳤다. 정서적인 돌봄은 그런 것이다. 어떤 틀 안에 있음, 어떤 보호 안에 있음, 어떤 간섭 안에 있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은 어쩔 것인가. 가족의 틀을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 지 너무나 잘 안다. 그런 상황에서 무시로 끼어들고 싶었던 그 아이에 대한 감정적인 거부반응은 나를 당혹스럽게 했고, 불쾌하게 했고, 나 자신에 대한 한계를 느끼게 했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는 그는 인간성 외부의 존재, 즉 동물이나 신이라는 의미지만, “그는 비인간이다”는 전혀 다른 어떤 것, 즉 그는 단순히 인간도 단순히 비인간도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부정하지만, 인간 존재에 고유한 섬뜩한 과잉으로 특징짓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 칸트와 독인 관념론 이후로, 맞서 싸워야 할 과잉은 절대적으로 내재적인 것, 즉 바로 주체성 그 자체의 핵심이다..... 칸트와 함께 광기는 바로 인간 존재의 핵심의 거리낌 없는 폭발을 표지한다..... 아감벤은 무젤만을 완벽한/불가능한 목격자로 설정한다. 무젤만은 집단 수용소의 공포를 완전히 목격한 유일한 존재이며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것을 증언할 수 없다. 그는 마치 그가 본 공포의 “검은 태양에 불타버린”것과 같다. ...... 나와 이러한 사건의 관계는 언제나 그것을 완전히 목격하는 누군가에 의해 매개되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더 이상 그것에 관해 보고할 수 없다. ...... 즉 타자의 상처 입기 쉬운 얼굴에서 발성되는 무한한 부름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때, 우리는 윤리적 주체가 된다. 그런 한에서, 우리는 무젤만은 정확히 더 이상 “여기에 내가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서 더 이상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무젤만과 마주칠 때, 우리는 그의 얼굴에서 그/그녀의 상처받기 쉬운 상태 속에 있는, 우리의 책임성에 대한 무한한 부름으로 우리에게 말 건네는 타자의 심연의 흔적을 식별할 수 없다. 그 대신에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일종의 장님 눈동자 굴리기, 즉 깊이의 결여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무젤만은 영도의 이웃, 그와 어떤 감상적인 관계도 불가능한 이웃일 것이다. [이웃] 254-257p
나는 그 아이를 무섭다고 했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의 말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 내 아이들의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내 아이들의 감정적 상태에 관심이 있었고, 나의 옹졸함은 한없이 그 아이에 대한 내 마음의 불편함으로 돌아왔다. 그는 괴물이 아니었지만 내겐 괴물처럼 느껴졌다. 내가 위선으로 또는 동정심으로 그 아이에게 계속해서 마음을 쓰고 그 아이와 놀아주게 될 때, 내 아이들은 소외 될 것이다.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의 어떤 가닥을 잡은 그 아이가 파도처럼 밀려들어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까지 느껴졌다. 이것이 모성의 한계다. 절대로 가족의 선을 넘어설 수 없는 것,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할 생각이 없는 것. 그러니 사회가 필요한 것이고, 그러니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 필요하다. 성숙하지 못한 부모는 자식들을 내팽개칠 것이고, 사회가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는 소외되다가 범죄자가 될 것이다. 도둑이 될 것이고, 살인자가 될 것이고, 간섭 없이 자라 절제를 모르는 부랑자가 될 것이다. 물론 아주 축소된 의미의 정치에 대한 말이다.
이 책에서 이웃의 의미는 다양하다. 태어나서 처음 듣게 되는 다른 아이의 울음소리에서 ‘이웃’의 의미는 온다. 본능은 돌볼 상대를 빼앗길 지도 모른다는 공포로부터 ‘이웃’을 알아 볼 것이고, 울고 있는 상대가 경쟁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동반할 것이다.
“인간은 부여받은 본능적 자질들에 상당한 공격성이 포함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웃은 그들에게 잠재적인 협력자나 성적 대상일 뿐 아니라, 그들의 공격본능을 자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웃을 상대로 자신의 공격본능을 만족시키고, 아무 보상도 주지 않은 채 이웃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이웃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이웃을 성적으로 이용하고, 이웃의 재물을 강탈하고, 이웃을 경멸하고 이웃에 고통을 주고, 이웃을 고문하고 죽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이웃] 9p
‘맨 몸으로 와서 맨 몸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맨 몸으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무섭게 싸워야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프리드리히 셸링은 이미 주체를 모든 것이 되려는 무의 끝없는 분투로 정의하였다.’(책249p) 돌봄을 받지 못하고 맨몸으로 세상과 맞설 때 얼마나 헐벗고 고통스러울 것인지 돌봄 아래에 있는 이들은 잘 느끼지 못한다. 한 번의 실수나 고통이 트라우마로 남는 섬세한 인간인지라 고통으로 단련된 누군가를 알아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고, 그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로 돌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무감하다.
종교적이건 세속적이건 회의적인 지도자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합리적인 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으로 보였으며, 사실 지극히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과연 그것은 우리에게 정확히 주체성과 책임 그리고 공동체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14p
사실 한 개인으로서 책임의 범위는 가족을 넘어설 수 없다. 그동안의 일부일처제가 만들어온 틀의 책임성일 것이다. 가족을 넘어서는 소외된 어떤 존재 그 존재의 고통이 만들어낸 무서움을 한 개인이 감당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법의 힘을 필요로 한다. 내가 감당할 수 없으니 공동체가 감당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법과 보편성의 전 영역은 친하지 않은 타자에 대한 그리고 타자를 위한 이러한 책임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내가 나의 작은 세계와 그 소유를 포기(‘잠시중지’가 아닐까)하고 타자의 기준에서 사태를 보려고 시도할 때, 나는 정의와 보편적인 법의 영역에 들어선다.(책232p)' 돌봄을 받지 못한 어떤 존재, 소외의 사각지대에서 외로움에 떨면서 오드라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존재에 대한 책임을 나 아닌 나와 같은 많은 자들의 암묵적 합의에 의한 힘의 균형에 의해 만들어낸 어떤 이상태가 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극단의 말로 호명된 것은 아닐까. ‘이웃’은 연민이나 동정을 싫어한다. 그는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극단을 추구한다. 손 하나를 주면 팔을, 팔을 주면 몸을 요구한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전 존재를 거는 위험한 일이 된다. 쉽게 책임 질 수 없지만 이웃은 늘 눈앞에서 극단의 위협으로 존재한다. 그 위협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에 극단의 위엄을 부여한다. 이런 의식이 어쩌면 서양 시민 의식을 형성시켰던 교양에 담긴 독(毒)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 말의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모토, 즉 “파씨즘에 대해 말하기 싫다면,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입을 닥쳐라”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 쓸 수 있는 것이다. 오드라덱, 그레고르 잠자, 그리고 무젤만에 대해 말하기 싫다면, 너의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입을 닥쳐라 책 16p
극단의 위협으로 간주되는 ‘이웃’은 언제든지 ‘나’로 대체될 수 있다. 나는 ‘이웃’으로 변질 될 수 있고, ‘이웃’은 언제든지 ‘나’로 변질될 수 있다. 아니 사실 ‘나’는 ‘이웃’이다.
나는 내가 실정적으로 이러한 질서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한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확히 내가 존재의 질서 속에 있는 구멍인 한에서, 전체 존재의 질서에 대한 위협이다. 그와 같이, 무無로서의 나는 모든 것에 손을 뻗치고 전유하려는 분투이다. 오직 무만이 모든 것이 되기를 욕망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셸링은 이미 주체를 모든 것이 되려는 무의 끝없는 분투로 정의하였다. 반면에 현실의 한정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실정적인 생활은 정의에 따르면 순환과 재생산의 순간이다. ........중략........ 즉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타자들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냉혹한 인정은 우리 자신의 존재할 권리에 대한 레비나스의 문제제기가 감추고 있는 진실이다. 책 249-251p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가족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족의 간섭은 내 안의 타자를 형성한다. 나는 지역 공동체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역 공동체의 눈은 내 안의 또 다른 타자를 만든다. 나는 국가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국가는 내 안의 또 다른 타자가 된다. 나는 나이기 전에 이미 이웃이었다. 가족이었고, 지역 공동체였고, 국가였다. 처음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나가 되었다. 내가 나를 보고 검열한 순간 주체가 도래할른 지도 모른다. 그것이 주체인지도 모른 채로. 내가 나를 알아보는 행위가 쉬울 수 없다. 나를 가족이란 타자에게 맡기지 못한다면 행복할 수 없다. 나를 지역 공동체의 시야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게 한다면 나는 외로울 것이고, 내가 국가를 벗어나게 된다면 나는 사막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모든 곳을 타향으로 생각하는 존재가 될 때에야 헐벗은 존재가 될 때라야 비로소 나는 나를 알아볼 것이다. 삶은 쉽지 않을 것이고 수많은 산을 넘는 목마른 외로움에 치를 떨 것이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아직 주둥이가 노란 미숙자이다. 모든 장소를 고향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자는 이미 상당한 힘을 축적한 자이다. 전세계를 타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먀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언어와 비극] 가라타니 고진, 도서출판 b 280p
생 빅토르 후고의 [디다시카리온]의 일절이란 저 글을 가라타니는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것을 ‘공동체의 사고’로 조직되어진 유한한 내부(코스모스)가 조직될 수 없는 무한정한 외부(카오스)라는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모든 장소를 고향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자’란 이른바 코스모폴리탄, 공동체를 넘어선 보편적인 이성이나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전세계를 타향으로 생각하는 자’라는 것은 이른 바 데카르트-스피노자인 것으로, 완벽한 인간인데 모든 공동체의 자명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 설명하는데 이는 곧 모세의 사막과 같다. 이 말은 곧 ‘나의 기본적인 상황은 나 자신에 맞서는 영구 투쟁이다. 나의 삶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특수하고도 친숙한 세계 속의 자기중심적 뿌리내림과 타자에 대한 책임성이라는 무조건적인 부름 사이에서 나는 영원히 균열된다.(책231-232p)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비인격적 상징질서가 없다면, 어떠한 상호주체성도, 인간들 사이의 대칭적이며 공유된 관계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제3자 없이는 두 입장들 사이에 어떠한 중심축도 있을 수 없다. 만일 큰 타자의 기능 작용이 중지된다면 친한 이웃은 괴물 같은 사물에 부합할 것이다. 책 230p
우리는 용산 참사에서 폭력과 무관심의 얼굴을 발견했다. 거기에 법은 없었다. 국민의 안전하게 살 권리가 없었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권은 쉽게 침해당했다. 쌍용자동차의 자살 행진은 대다수의 침묵으로 인해 그들을 무젤만으로 만들었다. 삼성반도체 사업장에서 중금속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백혈병으로 근무력증으로 죽어간 죽음들도 보았다. 자살밖에는 할 수 없었던 비정규직 방송작가의 투신도 보았다. 언론은 그들의 말하려는 의지를 꺾었고, 정부는 그들과 말하려 들지 않았다. 당연한 말들이 무시당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걸 소외라고 말하면 질려하는 사람들 속에서 또 소외라고 말해야하는 무기력증을 느껴야 한다. 원자력 발전소가 조용히 멈추어도 나는 모른다. 원자력 발전소의 전기에 의해 전기가 켜져도 35도가 그냥 넘어가는 무더위 속에서 에어콘은 켜야만 잠을 잘 수 있다는 부름에 그냥 답한다. 가장 무서운 건 나다. 아이를 낳았고, 아이의 부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한없이 가족의 틀 속으로 파고드는 나다. 아이들을 원자력의 불가항력적인 위협 앞에 둔 나며, 천정부지로 솟아오르는 석유 값밖에는 남겨줄 것이 없는 나며, 그와 더불어 오르는 물가를 그냥 바라보는 나며, 매년 무섭게 더워지는 더위 속에 지구 온난화가 더 심해질 것을 알면서도 에어콘을 트는 나며, 나는 틀지 않는다면서도 남을 설득할 마음을 낼 수 없는 나며, 대체 에너지나 대안을 꿈꾸는 누군가를 밀어줄 힘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