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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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우리 시대에 넘치는 비판주의와 회의주의와 불신주의의 종언을 고하는 신화 시대로부터의 철퇴였다. ([폴라리스 랩소디] 2권, 10쪽)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워낙에 유명한 소설입니다. 풍차와의 결투는 돈키호테 이야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에피소드이며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돈키호테]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광인 돈키호테와 맹목적인 헌신의 시종 산초 판사는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책을 읽기 전에 알고 있는 돈키호테에 대한 편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돈키호테에 대한 다른 무언가가 더 있을 것이라는 기대 - 혹은 의심 - 를 가지고 있으면서, 막상 너무 많이 들어왔고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 - 착각 - 하기 때문에 실제로 책을 읽게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겠지요. 그래서 [돈키호테]에 대해서 이것저것 주워들은 이야기가 많아서 막상 읽게 된 것은 비로소 이번에서야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어디에선가 본 이야기들이다, 라는 기시감이었습니다. 뭔가 흔한 내러티브를 지닌 이야기들,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이야기 구성들, 팔백여쪽의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들었던 생각은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모험담이 그렇다기보다는, 책 속의 또다른 이야기들인 얽히고 설킨 남여간의 이야기들이, 익숙하게 다가온다고나 해야할까요. 그래서 그 익숙함에 대해서 생각해보니, 아마도 [돈키호테]를 먼저 읽지 않고 그 이후의 이야기들을 먼저 읽게 된 까닭이 크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즉, 다른 이들의 표현대로, 


[돈키호테] 이후에 쓰인 소설은 [돈키호테]를 다시 쓴 것이나 그 일부를 쓴 것이다. -르네 지라르

와 같은 느낌인 셈이죠. 사실, 우리나라 고전 소설도 그렇지만, 근대 이전의 소설들은 틀 안의 이야기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16세기 영문학을 배울 때, 크리스토퍼 말로의 [닥터 파우스투스]를 배웠던 것이 기억 납니다. 셰익스피어의 여러 희곡들을 배웠던 것도 기억 납니다. 그런 소설들과 희곡들이 영문학사에서 의미있었던 까닭은 이야기의 틀이 예전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존의 틀 - 내러티브이든, 구성이든 - 에서 벗어난 이야기들, 그 이야기의 시초가 된 작품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이기에,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 [돈키호테]에 빚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겠지요. 


그래서, 편력 기사로서의 돈키호테의 삶은, 그 이전의 편력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무릇 편력 기사라면, 사랑의 충성(어감이 조금 이상하지만)을 맹세한 자신의 여인에 대한 지고지순함을 발판삼아, 세상과 자신에게 닥치는 거친 세파를 이겨내야하는데, 돈키호테는 그딴건 없습니다. 덤벼드는데 풍차고, 겁먹는데 물레방아고, 정의의 칼이랍시고 휘두르는데 은혜 모르는 강도들이고 그렇습니다. 블랙코미디나 다름없는 상황.


그래서 [돈키호테]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계속 나옵니다. 미친 돈키호테.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편력 기사의 삶을 흉내내려는 돈키호테. 현실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돈키호테와 그의 시종 산초 판사. 돈키호테만 빼고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기사도는 소설일 뿐이고, 지고지순함은 소설 속의 미덕일 뿐인, 현실은 그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웃습니다. 돈키호테를 통해 거짓 이야기들을 비웃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들.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사람살이와는 관계없는 별종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습니다. 수백만의 적들을 무찌르고 거대한 거인들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그런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에 가려진 사람들의 허위와 위선은 어찌할 것이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돈키호테]에 나오는, 돈키호테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세속적'입니다. 비도덕적이기도 하고 몰상식적이기도 하며, 비굴하기도, 무례하기도 한 사람들입니다. 돈키호테의 편력 기사들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진짜 사람사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사는 곳을 바라보지 못하는 돈키호테를 통해서 날것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이야기는 신화와 이상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냉소어린 삶에 던지는 작은 파열음 같은 것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돈키호테를 만난 모든 이들이, 돈키호테의 장래를 궁금해하는 것은, 신화와 이상의 지고지순함 속에서 살아가는 돈키호테의 삶에 대한 동경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차갑고 냉정한 사람 삶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습니다. 신화와 현실은 레테의 강 만큼의 간극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은, 돈키호테 같은 삶이라는 이야기를 작가는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미련하고 멍청해보이지만, 미친 것 같은 삶이지만, 사람과 삶에 대한 지고지순함을 잃지 않는 태도는, 인간이 잃지 말아야 할 지향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책은 꽤나 재미나게 읽힙니다. 팔백여 쪽에 이르는 분량이 만만치 않지만,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는 탓에 쉽지 않을 듯 보였던 독서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 스무 날 정도 걸려서 읽긴 했습니다. 이야기가 옛것이라 그런지, 빡빡하게 읽히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번역으로 되살리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번역의 미숙이 아니라, '진달래꽃' 같은 시를 영어로 번역할 때, 율격이나 단어가 가진 힘까지 번역하지 못하는 그런 아쉬움이라고나 할까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배웠던 기억이 나는데... 작품이 언어를 통해 보여주는 매력까지 번역해내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움이 있겠지요. 소설 속에 나오는 여러 사랑의 소네트들을 읽으면서 드는 약간의 아쉬움은 번역본을 읽을 수 밖에 없는 독자의 처지에서는 감내해야 할 부분이겠지요. 


결국, [돈키호테]의 의미는, 현실과 별도로 존재했던 이야기를 현실 속으로 끌어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현실과 이야기사이에 어떻게 다리를 놓아 통하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화가, 기독교와 기독교적 사유의 영향으로 인간으로부터 별개의 것으로 되었다면, 그 신화를 다시 인간의 곁에 돌려준 것이 이 작품의 의미가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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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 사진과 기록으로 읽는 한글의 역사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4
김주원 지음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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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난 5월에, 민음사 패밀리 세일 당시에 구매했더랬습니다. 구매한 이유는... 6학년 국어 교과서에 훈민정음과 관련한 글들이 자주 나오기 때문입니다. 


찌아찌아족과 관련한 글도 있고, 유네스코가 지정한 '훈민정음언해상'에 대한 설명과 그 상의 제정 까닭을 담은 글도 있습니다. 뉴스 방식으로 외국어 남용 사례를 소개하며 우리말을 바르게 사용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에서 한글에 대한 정체성을 강조하는 글은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한 편으로,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는 언어인 한글 - 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부연하기로 하죠 - 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부분은 분명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습득하여 사용하는 한글은,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지적 호기심의 발생이라든지, 그에 대한 의문점 등을 가지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이미 잘 쓰고 있는데, 굳이 더 알아야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보니, 우리는 한글에 대한 별다른 지식에 대한 필요성이나 호기심 없이 그냥 사용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는 다양한 글을 통해 그러한 상황을 바꾸어보려고 하는 것이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조금 더 넓고 깊게 안 연후에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책은 서울대 교수인 김주원 교수의 '서울대 인문강의'를 책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강의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들 정도로 자세하고 전문적인 내용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제가 중요하게, 인상적으로 받아들였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훈민정음'이라는 말의 뜻은 '백성을 깨우치는 바른 소리'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훈민정음은 소리는 아닙니다. 말은 아니죠. 글입니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에도 우리말은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말을 표기할 수 없는 글이 없었던게지요. 그래서 신라 시대, 설총이라는 학자는 이두문을 고안했습니다. 우리말의 발음과 같은 발음이 나는 한자를 씀으로써 우리말을 표기한 것이죠.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자주 드는 예가 하나 있습니다. 

 I love you. 를 우리는 아이 러브 유라고 말하고 I love you. 라고 쓴다. 이 때 아이 러브 유, 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고, 이것을 I love you. 라고 쓰는 것은 글이다. 전 세계적으로 말은 3천여 종류가 있지만, 그 말을 표기할 수 있는 글을 가진 것은 50여 종류 밖에 없다. 만약에 훈민정음이 창제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마 '나는 너를 사랑해'를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고 nanun nourul saranghea. 라고 썼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말은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의 말을 표기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던 것이죠. 훈민정음은 표기수단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말은 이 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어'와 '한글'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많은 경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한글을 통해서 배운다. (15쪽) 

우리는 한국어를 먼저 배웁니다. 그 수단이 되는 것이 한글인 것이죠.


이 책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에 대한 것도 위와 같습니다. 찌아찌아족은 자신들의 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표기할 글이 없으니, 한글을 이용해서 표기하기로 했다는 것이죠. 물론, 찌아찌아족의 한글 사용에 대해서는 과장되거나 왜곡된 내용의 보도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일단 찌아찌아족의 한글 사용은, 글로써의 한글 사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첨언하자면, 따라서 '훈민정음'이라는 명칭 자체도 글로써의 한글을 의미하는 바른 명칭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훈민정음은 소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런 부분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2. 

저자는 '한어 학습의 백태'라는 소제목으로, 당시 외교에 사용되었던 한어, 즉 명나라에서 사용하던 언어를 당시에 어떻게 익혔는지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영어라는 언어를 위해서 온 나라가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서 몰입하고 있지만,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의 한어는 역관이라고 하는 특수한 계층에서 담당하였습니다. 모두가 그 말을 알 필요는 없었던 것이지요. 국가의 외교를 위해서 한어를 꾸준하게 학습하였던 역관들의 학습 방법, 저자는 그것을 요약하여 주고 있습니다. 


1) 외교문서 작성이 가능한 자이면 외국인도, 포로도 중용

2) 외교문서 전문가는 부친상도 제대로 못 마친다

3) 이문(한어) 전문가는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4) 외국어 학습을 위해서는 우리말을 하면 안 된다

5) 외국어 학습은 기숙 학원 식으로

6) 외국어는 외국에서 배워야

7) 북경에는 못 보내니 요동에라도 보내야

8) 한어 학습을 평가하여 상벌을 줌

9) 외국어 공부는 젊을 때 해야

10) 언어만 배울 것이 아니라 교양도 쌓아야


이와 같은 내용 중에, 우리에게 의미있는 부분은 4), 5), 6) 정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영어 교육이 명심해야 할 부분인 것이죠. 영어 몰입 교육이 맞느냐. 그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영어 교육이 부질없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필리핀이나 인도 같이 제 1언어로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영어의 숙달을  위해서는 영어만을 사용할 수 있는 바탕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살면서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한글을 쓰는 우리나라 사람이, 도대체 영어를 그렇게 과도하게 공부할 필요는 있으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영어의 숙달이 가능하느냐는 말이죠. 영어를 쓰고 싶으면,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로 가야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영어를 사용하면서 계속 살아야죠.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사용할 필요는 극소수입니다. 그 사람들만 숙달해도 될텐데, 우리나라는 모든 사람이 영어를 숙달하기 위해서 영어에 과도한 투자를 아끼지 않으나, 문제는 영어에 숙달된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일 것입니다. 


10)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뉘앙스, 라는 말이 있지요. 언어 자체의 것이 아니라, 언어를 둘러싼 환경이나 배경에 대한 것입니다. 결국, 영어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바는, 모두가 영어에 과도하게 몰입하고 있는 상황을 벗어나서, 영어를 제 1언어로 사용하지 않는 나라답게, 평상시에 영어를 쓸 일이 거의 없는 상황에 맞추어, 어느 정도의 영어 교육 정도라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처럼 아이들을 서너시간씩 붙들어두고 수십개의 영어 단어를 외우게 시키고, 실제 언어 생활에서 사용하지도 않는 문법 측면을 가르치느라 아이들을 소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의 가벼운 회화, 그리고 영어로 된 책들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환경의 조성 등, 영어의 사용을 실제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한 측면은 다시 이야기 할 기회가 있겠지요. 


3. 

이 책은 훈민정음과 관련된 다양한 배경 지식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편집 방법으로 시작하여 간송본과 상주본의 차이 및 의미까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상주본에 대해서 그렇게 크게 호의적이지는 않습니다. 일단 해례본의 앞 여덟 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낙장도 많은 상태라 완성된 문서로써의 의미는 간송본보다 덜하지 않느냐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간송본은, 발견 후에 책을 손질하는 과정에서 원본에 대한 손상 - 책의 여백 부분을 잘라내는 - 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원본의 여백에 다른 책을 필사하기도 한 까닭에 책의 상태가 깔끔하지는 않지만, 책의 빠진 부분은 앞의 두 장 뿐이라, 훈민정음 창제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보는 듯 합니다. 


빠진 책 앞 두 장을,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하여 보사 - 메꾸어 넣는 - 과정을 거쳐 조악하게나마 원형을 가진 것이 간송본이라는 설명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상주본이 지금 이권 다툼에 휘말려서 그 위치를 제대로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 아쉬움이 크지만, 저자는 간송본에 큰 의미가 있음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4. 

책에서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기록된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그 운용 원리 부분은 두고두고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부분입니다. 


5. 

훈민정음은 세종대왕 단독의 작업일 것이라는 추측을 저자는 확인하고 있습니다. 기존에는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의 공동작업, 또는 집현전 학사들의 작업을 세종대왕이 독려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세간의 인식이었지만, 저자의 주장 및 여러 주장들을 통하여, 현재는 세종대왕이 단독으로 구상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집현전 학사들이 그 사용을 테스트하였을 - 용비어천가, 삼강행실도 등의 편찬 - 것이라는 의견이 주류로 떠오르고 있는 듯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에게는, '숟가락 하나 얹는' 지도자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너무 크게 자리잡고 있는가봅니다. 세종대왕은 중국의 다양한 언어학, 철학 책을 통하여 세계의 이치와 언어 사용의 원리를 훈민정음 속에 담았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부분을 분석하여, 저자는 훈민정음을 세종대왕의 주도도 아니고, 단독으로 구상하여 창제하였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종대왕이 세째 아들이면서도 왕위에 오른 상황, 그 아버지인 태종이 거쳤던 왕권 투쟁 상황을 언급하면서, 대군의 세째 아들로 그냥 공부나 하면서 지냈을 수도 있는 왕족 한 사람이, 왕이 됨으로써 훈민정음이라는 글자 체계를 만든 것에 대한 안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역사는 위대한 한 사람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위대한 한 사람이 현재의 삶에 기여하는 부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은 저자의 표현대로,


훈민정음이 탄생하던 시대의 전후 사정을 독자들과 공유 

하면서


(1) 시대의 요구에 의하여, (2) 하늘이 내린 성인이자, 밤낮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세종 임금이, (3) 때마침 이루어진 송의 성리학을 받아들여 (4) 당대의 언어를 철저히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글자를 창제하고 (5)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6)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나누어 (268쪽)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상 사용하는 한국어, 그리고 한글에 대한 지식을 넓히면서, 우리의 언어 생활에 대한 자긍심과 우리의 언어를 조금 더 유의미하게 사용하려는 마음가짐을 위해서라도, 이 책은 한 번쯤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조금 난해한 부분은 적당히 넘어가면서 말이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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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슬로우 라이프 - 천천히, 조금씩, 다 같이 행복을 찾는 사람들
나유리.미셸 램블린 지음 / 미래의창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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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에서는 이렇게 뒤늦게 원하는 공부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나이 제한과 같은 차별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얼마나 돌아왔는지, 몇 년이 걸렸는지보다는 그 사람이 꿈의 결승점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중략) 세상이 정한 시간표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정한 시간표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행복감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106-107쪽) 

핀란드 교육에 대한 관심은, 한 5~6년 전엔가, [시사IN]에서 커버스토리로 다루었던 한 핀란드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나서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그리고 일반화하기에는 어려운 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사교육 바운더리에 오랜동안 머무르면서, 초등학교 교사를 준비하던 제게는 눈에 띄는 커버스토리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OECD의 위탁을 받아 PISA에서 실시하는 평가에서 늘 최상위권을 달리는 핀란드. 인구 6백여만명의 작은 북유럽 국가인 핀란드가 왜 이렇게 강력한 교육의 성취를 드러내는지는, 같은 PISA 평가에서 늘 최상위권을 달리지만, 핀란드에 비하면 그 교육적 성취가 덜 돋보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주목할만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무엇이 이 나라 학생들을 똑똑하게 만드는가]라는 책을 재미나게 읽은 후에, 교보문고를 서성이다가 이 책, [핀란드 슬로우 라이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책을 고르는 패턴 중에 하나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 후, 첫 부분을 읽다가, 이거다 싶으면 책을 반납하고 사서 읽는 것입니다. 이 책도 처음에는 도서관에서 빌렸더랬는데, 첫 부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결국은 구매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소비하는지 살펴보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삶의 가치에 대해 알 수 있다. 역으로 삶에 대한 가치의 차이는 곧 무엇을 소비하는가에 대한 차이로 이어진다. (중략) 그러므로 핀란드 사람들 모두가 검소하고 소비 지향적이지 않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남의 시선보다는 자기 개인의 만족을 위해 삶의 질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취미 활동이나 여행 등의 소비에 우선 순위를 정한다는 점에서 핀란드 사람들이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는지 엿볼 수 있었다. (188-189쪽) 

그러나 막상 구매하고 읽어본 후, 빌려 읽어도 무방하였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딱히 이유는 없습니다. 섣부른 판단일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이런 류의 책은 저자의 주관에 강력하게 매여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저자가 핀란드 사회를 살아가면서 생각하고 고민한 부분에 대해서 상당 부분 공감합니다. 세상 사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저자의 생각은 제 생각과도 비슷합니다. 그런 관점으로 핀란드에서 수 년간 살아온 저자가, 핀란드 안에서 주목한 부분은 제게도 인상적이었으며 충분히 공감할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을 통하여 얻고 싶은 것은 저자와의 공감대 형성은 아닙니다. 주관성이 조금은 배제된, 그래서 날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그런 것을 얻고 싶은 것이지요. 저자가 보고 느낀 핀란드에 공감하고, 그런 생각과 문화, 삶의 방식이 가득한 곳으로 우리나라도 바뀌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러나 독자인 제게 필요한 것은 조금 덜 가공된 정보입니다. 

 

결국, 핀란드의 다양한 사람 중심의 삶은, 핀란드라는 국가 공동체가 오랜 기간동안 만들어온 결과물입니다. 그것이 좋아보이더라도, 우리 공동체에서도 그것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덜 가공된 것들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주관이 결여된 정보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정보가 선택되는 순간, 저자의 주관이 개입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저자가 핀란드라는 나라, 그 삶 속에 너무 깊이 몰입해있음을 내내 드러내는 책입니다. 책을 그저 읽으면, 핀란드에서 살아보고 싶다, 라는 그런 감정이 깊이 들어오도록 하는 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핀란드에 갈 수 없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결국 이 책을 통하여, '핀란드는 좋은 곳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런 류의 책들이 실은 다 그렇겠지요. 

 

 

다만, 저자가 소개하는 몇 가지 핀란드의 현상들 - 시간은행, 로뿌끼리, 사우나와 코티지 등 - 은 우리 사회에서도 한 번 쯤은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들을 했습니다. 특히, 사우나와 코티지가 현재 우리나라의 캠핑 문화 및 자연휴양림 등과도 매치되는 부분들도 있어서, 이에 대한 운용의 측면에서 조금 더 정책적으로 보완할 수 있다면, 우리도 조금 더 여유로운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왕따를 예방하기 위한 핀란드 정부의 노력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미취학 아동들에게 입학 전 언어 평가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중략) 핀란드 사회가 이처럼 어린아이의 언어 능력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말하기가 곧 사회성 발달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중략) 아이가 본격적으로 사회 활동을 시작하기 전인 미취학 아동기 때부터 뒤쳐지는 것을 막기 위한 이러한 제도는 왕따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방'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98-99쪽)

핀란드가 이런 곳이구나, 이런 문화와 이런 삶, 이런 생각들이 있는 곳이구나, 라는 것을, 조금은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으신 분들이 가볍게 읽을만한 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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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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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한 남자의 눈이 갑자기 멀어버렸습니다. 마치 우유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백색의 세상만을 보게 된 그 남자. 그런데 그 남자가 만난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눈이 멀기 시작합니다. 점차로 눈이 멀기 시작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전염을 걱정한 정부에서는 최초로 눈이 먼 사람들부터 폐허로 변해버린 정신병원에 이들을 차례차례 가두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서히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늘어가는 가운데, 이 세상을 여전히 볼 수 있는 한 사람, 그는 바로 첫 눈 먼 사람이 찾아갔던 병원 의사의 아내였습니다. 


곧, 모두가 볼 수 없게 되어버린 세상. 그 곳에서 유일하게 세상을 볼 수 있는 존재인 한 여자. 이 책은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눈 먼 사람들끼리 모인 격리 공간 속에서, 총을 기반으로 한 권력이 생기고 그로 인한 착취가 발생하였던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책을 너무 안일하게 읽어내려가고 있었습니다. 혹은,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눈 먼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서로가 어려운 처지 속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바깥 공간에서 전염을 걱정하며 총부리를 겨누는 군인들에 의해, 시민으로써의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필요 이상의 부당한 대우를 받는 눈 먼 사람들. 당연히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그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총을 가진 한 사람이 병실 사람들을 규합하고, 집단을 이루어서, 배급을 통제하고, 성을 착취하는 부분에서, 제가 참 안일하게 세상을 긍정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세상은 합리적인 모양새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모순이 모순을 덮어 더 큰 모순으로 돌아가는 사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일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는 바람에, 이제는 더 이상의 놀람도 사치스러운 사회. 실은 그런 사회를 이미 살아내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런 불합리와 부조리를 마치 눈 먼 사람처럼 보지 못하고 있는 모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눈을 뜨고 있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모든 불합리와 부조리를 두 눈 속에 똑똑히 담고 있는 사람에게, '장님 나라에서는 애꾸눈이 왕'이라는 말은 지나친 비아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마치 세상의 모든 눈물을 마셔버리는 왕이 되어 죽음에 이르러야 할지도. (이영도, [눈물을 마시는 새])



그러나, 한 편으로, 눈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은, 마음으로 담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 학교의 아이들에게, '10분 동안 눈을 감고 지낸 후 느낌 써보기'라는 글쓰기 주제를 내주었더랬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의 아이들에게는 10분간 눈을 감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힘들었나봅니다. 


눈을 감으면, 우리는 세상과 단절되는 큰 고통을 경험합니다. 들리지 않는 것, 냄새 없는 것보다는, 경험상 더 힘든 고통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렇게 세상과 단절되는 그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볼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인이, 잿빛 세상이 아닌 우윳빛깔의 세상을 보게 되었을 때, 그 여인은 자신을 보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삶. 실은 생각보다 어렵고 슬픈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상 두리번거리면서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을 들여다볼 용기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눈을 감아도 자신을 향해서 시선을 두지 못한 채, 다음의 스케쥴을, 내일 할 일을, 오늘의 문제를,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도망가버리곤 합니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용기를 발휘하였을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용기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인의, 검은 안대를 한 노인에 대한 용기는, 자신을 솔직하게 응시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눈 먼 것 같은 우리, 우리들. 그렇게만 살아간다면 서글프니까. 그래서 우리는 모여서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습니다. 살다보면 언젠가는 모두 눈을 뜰 수 있게 되겠지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선한 마음을 잃지 않고 있다보면, 언젠가는 다시 볼 수 있게 되겠지요. 



그 동안 소설을 멀리하였습니다. 눈을 세상에만 두었지, 내 자신에게 눈을 두질 않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나를 들여다보기 위한 것. 소설을 다시 읽어내야 할 이유를 찾았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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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지는 아이들 - 내면의 야성을 살리는 길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지음, 오필선 옮김 / 민들레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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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오늘날 어린 아이를 키우는 대다수 부모에게서는 상황을 실제 이상으로 위험하게 지각하는 현상이 매우 두드러진다. (중략) 공포를 지각한 부모는 겁에 질려 통제 모드로 돌변하고 아이들을 가까이 잡아두려 한다. 똑같은 지각이 육아에 관한 모든 결정에 침투해서 부모는 자녀가 병에 걸리거나 다치지는 않을까, 납치되거나 학대받지는 않을까, 학업에서 뒤쳐지거나 비행청소년이 되지 않을까, 그러다가 결국 실패한 어른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낸다. (301쪽) 

한 때, 아이들을 야외에 데리고 나가면 흙도 못 만지게, 나무도 풀도 못 만지게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병균과 세균이 우글우글거리는데,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저널을 읽다가, 적당히 더러운 환경에서 아이들이 자랄 때 면역력도 생길 수 있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과보호가 아이들의 면역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 이후로, 야외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면 아이들이 흙도 만지고, 모래도 만지고, 풀도 뜯어보고 - 너무 심하지 않은 정도에서 - 나무도 만져보고, 자유롭게 놔두고 있습니다. 고궁 같은 곳에 가면, 그래서 저희 부부는 건물 구경을 하고, 아이들은 흙놀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놀이터에를 가면 풀숲에 들어가서 풀을 뜯어다가 소꿉놀이를 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부모의 자녀 양육은, 특히 사회가 점차로 정보화 사회로 진전하고 있는 것에 비해, 무지의 영역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는 듯 싶습니다. 정보가 너무 많으니, 정보가 없느니만 못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죠. 뭐가 맞고 뭐가 틀린지 알 수 없는. 과잉의 사교육 투입 현상이 이러한 과도한 정보로 말미암은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는 주체요, 주인은 학생 자신인데, 그 과정을 결정하는 것은 부모인. 


그러나 대부분의 산업사회에서는 부모의 권위가 점차 약해지면서 "타자지향형 성격"이 두드러진다. (중략) 타자지향형 '부모'는 자녀에게서 인정받으려 하고 그 자녀 또한 부모에게서 인정받으려 하기 때문에 상황을 더욱 나빠진다. 이들에게는 내부지향형 부모가 누리던 육아의 자신감이 없고 자기 확신도 부족해 급기야는 동시대 타인과 참고서적, 대중매체를 지침으로 삼는다. 여기에 더해 수시로 쏟아지는 최신 양육법에 매달리지만 결국 양육법이 전수하는 기술적 내용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부모의 불안을 아이는 고스란히 받을 수 밖에 없다. (282쪽) 

결국 아이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지만, 그것이 아이들을 심정적으로 안전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현재의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인 셈이죠. 그것이 어린 시절의 과보호로 시작하여, 청소년기의 "심리사회적 유예기(284쪽)" 내내 아이들을 보호의 울타리 안에서 양육하다가, 갑작스런 성인식을 통하여 급작스럽게 어른이 되었음을 알리고 마는, 그러한 양육 방식이 일반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의 독서에 대해서 큰 우려를 가진 지가 꽤 되었습니다. 제가 책을 좋아하는 탓인지, 저희 아이들도 책읽기를 즐기는 편입니다. 그런데, 큰 아이는 만화로 된 책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와이' 시리즈를 비롯하여 역사 만화도 좋아하고 과학 만화도 좋아합니다. 그런 탓에 글로 된 책을 잘 안 읽으려고 합니다. 아이를 위해 사놓은 비룡소 세계문학전집이니, 창비의 창작동화 대표선집이니 모두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네요. 이런 아이의 독서 습관을 고치려고 얼마나 많은 고민과 갈등을 한지 모릅니다. 아이의 글읽기 수준을 위해서 말이죠. 그러나, 그냥 놔두기로 했습니다. 


아이의 선택을 믿고 존중해주기로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웬만하면 부모가 결정하는 것에 따릅니다. 언제까지냐하면 스무 살이 되기 직전까지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스무 살이 되면,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집니다. 혹은,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청소년같은 보호받는 삶을 살다가, 대학을 졸업하면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집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선택하는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지난 번 학부모 상담 때 오셔서는, 아이를 이제 학원에 보내서 중학교 선행을 시켜야겠다는 말씀을 하신 어머님이 계셨습니다. 그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자제분께서 1학기 1차 서술형평가 반 1등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살짝 당황하시더니, 그래도 중학교 수학이 어려운데 어느 정도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자제분께서 1학기 2차 서술형평가도 반에서 1등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크게 동요하시는 틈을 타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자제분의 역량을 믿고 있습니다. 어디에 가서도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어머니께서는 자녀에 대한 믿음이 크지 않으신가 봅니다' 결국 그 어머니는, 아이를 믿기로 하셨습니다. 학원 대신, 아이의 학습 역량을 믿어주기로 하신 것이죠. 


이 책에서는 부모가 아이들을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아이를 믿고 아이의 선택을 존중할 것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위험할 수도 있고, 때로는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자녀를 믿어주는 것이, 결국은 자녀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과 지내보니까,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그래도 마음과 마음을 통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겉에 껍데기를 두른 채 서로의 속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한 채,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또다른 나로 서로 대하는 것과는 달리, 아이들에게는 제 진심이 통하는 그런 것들을 경험합니다. 아이들은, 제 마음을 알아줍니다. 저도 아이들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믿음을 투영한다면, 아이들은 그 믿음대로 자라갈 것입니다. 조금은 서툴고 조금은 위태로와보여도. 솔직히 어른은 안 그렇습니까? 겉 껍데기가 워낙 단단해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른도 서툴고 위태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아이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른들도 그렇게 스마트폰, 카톡을 끼고 살면서, 어린이들에게는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요 잘못이다, 어린이에게 '너희는 하면 안돼'라고 이야기하려면, 어른 먼저 절제하고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야한다고 생각한다, 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아이들의 선택을 부모로써 존중해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선택지를 자주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희 아이들에게는 일주일에 2천원씩의 용돈을 줍니다. 그리고, 사용은 마음대로 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리지만 - 초 3, 초 1 - 아이들은 자꾸 이렇게 저렇게 써 보면서 어떻게 써야할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이들을 마트에 데리고 갔는데, 큰 아이가 핫팩이 사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네 용돈으로 사라고 했더니, 아이가 살펴보고 와서는 사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 사지 않냐고 물었더니, 핫팩이 5천 9백원인데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지 않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통해 제가 아이에게 선택권을 넘긴 것에 대한 효용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저희 아이가 더 나은 독서 습관을 스스로 가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놀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요즘 어린이들은 틀에 정해진 놀이만, 그것도 몇 가지 되지 않는 놀이만, 주로 매스미디어를 활용한 놀이만 주로 하고 있다는 우려를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어릴 때 얼마나 많은 다양한 놀이가 있었는지를 예로 들면서, 아이들이 자신들 스스로에 의한 다양하고 재미있는 독창적인 놀이를 회복해야 할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이 약간은 다릅니다. 매체의 발달은, 놀이 환경 자체의 변화를 가지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놀았으니, 너희도 이렇게 놀아라, 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아동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의 변화에 맞게 아이들의 놀이 습관도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의 매체 - 스마트폰, 컴퓨터 등의 - 를 통한 놀이를 제한하는 것에는 크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 스스로가 그 놀이를 선택했다면, 그 선택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컴퓨터 게임을 하려면 얼마든지 해도 좋다, 스마트폰이나 패드를 사용한 게임도 얼마든지 좋다, 그러나, 너무 많이 하면 눈이 나빠지는데, 눈이 나쁠 때의 불편함이 너무 크니까, 눈을 위해서 시간을 제한했으면 좋겠다, 고 말합니다. 아이들의 선택도 존중하면서, 아이들의 신체적 발달도 고려한 탁월한 아이디어라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 아이들은, 매일 컴퓨터 게임도 하고, 놀이도 하고, 보드게임도 하고 그러고 있습니다. 오늘 둘째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자기가 만든 놀이가 다섯 개 있다고 말이죠. 그리고 집에 와서 공깃돌로 언니랑 자기가 만들었다는 놀이를 하더군요. 아이들의 놀이는, 아이들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낸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부모는 아이의 선택을 믿고 존중하며 아이 스스로 자신의 놀이와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하겠지만, 교사는 아이들의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사는 아이들을 이끌고 앞장서야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다양한 선택을 꿈꿀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부모가 교사를 믿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사와 아이와 트러블이 있을 경우, 부모가 아이를 받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저 아이들과 자주 이야기하되 알코올, 우울증, 폭력에 대한 화제까지, 그 범위에 제한을 두지 말라고 권고한다. 아이들은 부모가 장황하게 교훈을 늘어놓지만 않는다면 부모의 생각을 기꺼이 듣고 싶어 한다. 부모가 어떤 정보라도 아이들과 나누려 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이 기댈 곳은 친구나 미디어밖에 없게 되고 마약 중개인에 의지하는 일도 벌어질 수 있다. (326쪽) 

작년에 학부모 한 분이 불시에 학교에 찾아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아이가 집에 와서 선생님 원망을 하더라, 그래서 혹시 아이가 선생님께 학교에서 무례하게 행동하거나 함부로 굴지는 않는지 걱정이 되어서 찾아왔다. 그 아이는 저희 반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행동하고 학습하는 아이 중에 하나였고, 늘 반듯하게 활동하는 아이어서 저도 좋아하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아이의 글쓰기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교정하여주었는데, 아마 아이가 그것 때문에 약간 속상했는지, 집에 가서 선생님 원망을 한 것이었죠. 저는 그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아이가 선생님 원망을 하면 받아주십시오, 아이가 학교에서 속상한 일이 있고 바깥에서 마음 상하는 일이 있을 때 돌아가야 할 곳은 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그런 아이의 서운한 마음을 받아주시지 않으면 아이들이 갈 곳이 없습니다, 저는 괜찮으니까 아이가 담임 선생님에 대한 속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면, 너무 과하게 맞장구만 치지 마시고 받아주시고 공감해 주십시오. 


부모가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합니다. 아이를 믿고,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여 주는 것. 그것이 아이를 위한 길이라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존중한 자녀가, 서울대, 고연대를 못가면 어떻게하죠? 아이들의 성공이 어느 대학을 가는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벌이를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아마 이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실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네가 대학에 가면, 이 아닌, 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이라고 말입니다. 대학에 가는 것도, 저는 아이의 선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제 아이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말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적어도 아이를 키우는 것은, 아이 스스로의 힘으로여야 한다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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