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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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우리 시대에 넘치는 비판주의와 회의주의와 불신주의의 종언을 고하는 신화 시대로부터의 철퇴였다. ([폴라리스 랩소디] 2권, 10쪽)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워낙에 유명한 소설입니다. 풍차와의 결투는 돈키호테 이야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에피소드이며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돈키호테]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광인 돈키호테와 맹목적인 헌신의 시종 산초 판사는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책을 읽기 전에 알고 있는 돈키호테에 대한 편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돈키호테에 대한 다른 무언가가 더 있을 것이라는 기대 - 혹은 의심 - 를 가지고 있으면서, 막상 너무 많이 들어왔고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 - 착각 - 하기 때문에 실제로 책을 읽게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겠지요. 그래서 [돈키호테]에 대해서 이것저것 주워들은 이야기가 많아서 막상 읽게 된 것은 비로소 이번에서야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어디에선가 본 이야기들이다, 라는 기시감이었습니다. 뭔가 흔한 내러티브를 지닌 이야기들,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이야기 구성들, 팔백여쪽의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들었던 생각은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모험담이 그렇다기보다는, 책 속의 또다른 이야기들인 얽히고 설킨 남여간의 이야기들이, 익숙하게 다가온다고나 해야할까요. 그래서 그 익숙함에 대해서 생각해보니, 아마도 [돈키호테]를 먼저 읽지 않고 그 이후의 이야기들을 먼저 읽게 된 까닭이 크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즉, 다른 이들의 표현대로, 


[돈키호테] 이후에 쓰인 소설은 [돈키호테]를 다시 쓴 것이나 그 일부를 쓴 것이다. -르네 지라르

와 같은 느낌인 셈이죠. 사실, 우리나라 고전 소설도 그렇지만, 근대 이전의 소설들은 틀 안의 이야기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16세기 영문학을 배울 때, 크리스토퍼 말로의 [닥터 파우스투스]를 배웠던 것이 기억 납니다. 셰익스피어의 여러 희곡들을 배웠던 것도 기억 납니다. 그런 소설들과 희곡들이 영문학사에서 의미있었던 까닭은 이야기의 틀이 예전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존의 틀 - 내러티브이든, 구성이든 - 에서 벗어난 이야기들, 그 이야기의 시초가 된 작품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이기에,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 [돈키호테]에 빚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겠지요. 


그래서, 편력 기사로서의 돈키호테의 삶은, 그 이전의 편력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무릇 편력 기사라면, 사랑의 충성(어감이 조금 이상하지만)을 맹세한 자신의 여인에 대한 지고지순함을 발판삼아, 세상과 자신에게 닥치는 거친 세파를 이겨내야하는데, 돈키호테는 그딴건 없습니다. 덤벼드는데 풍차고, 겁먹는데 물레방아고, 정의의 칼이랍시고 휘두르는데 은혜 모르는 강도들이고 그렇습니다. 블랙코미디나 다름없는 상황.


그래서 [돈키호테]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계속 나옵니다. 미친 돈키호테.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편력 기사의 삶을 흉내내려는 돈키호테. 현실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돈키호테와 그의 시종 산초 판사. 돈키호테만 빼고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기사도는 소설일 뿐이고, 지고지순함은 소설 속의 미덕일 뿐인, 현실은 그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웃습니다. 돈키호테를 통해 거짓 이야기들을 비웃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들.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사람살이와는 관계없는 별종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습니다. 수백만의 적들을 무찌르고 거대한 거인들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그런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에 가려진 사람들의 허위와 위선은 어찌할 것이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돈키호테]에 나오는, 돈키호테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세속적'입니다. 비도덕적이기도 하고 몰상식적이기도 하며, 비굴하기도, 무례하기도 한 사람들입니다. 돈키호테의 편력 기사들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진짜 사람사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사는 곳을 바라보지 못하는 돈키호테를 통해서 날것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이야기는 신화와 이상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냉소어린 삶에 던지는 작은 파열음 같은 것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돈키호테를 만난 모든 이들이, 돈키호테의 장래를 궁금해하는 것은, 신화와 이상의 지고지순함 속에서 살아가는 돈키호테의 삶에 대한 동경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차갑고 냉정한 사람 삶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습니다. 신화와 현실은 레테의 강 만큼의 간극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은, 돈키호테 같은 삶이라는 이야기를 작가는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미련하고 멍청해보이지만, 미친 것 같은 삶이지만, 사람과 삶에 대한 지고지순함을 잃지 않는 태도는, 인간이 잃지 말아야 할 지향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책은 꽤나 재미나게 읽힙니다. 팔백여 쪽에 이르는 분량이 만만치 않지만,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는 탓에 쉽지 않을 듯 보였던 독서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 스무 날 정도 걸려서 읽긴 했습니다. 이야기가 옛것이라 그런지, 빡빡하게 읽히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번역으로 되살리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번역의 미숙이 아니라, '진달래꽃' 같은 시를 영어로 번역할 때, 율격이나 단어가 가진 힘까지 번역하지 못하는 그런 아쉬움이라고나 할까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배웠던 기억이 나는데... 작품이 언어를 통해 보여주는 매력까지 번역해내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움이 있겠지요. 소설 속에 나오는 여러 사랑의 소네트들을 읽으면서 드는 약간의 아쉬움은 번역본을 읽을 수 밖에 없는 독자의 처지에서는 감내해야 할 부분이겠지요. 


결국, [돈키호테]의 의미는, 현실과 별도로 존재했던 이야기를 현실 속으로 끌어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현실과 이야기사이에 어떻게 다리를 놓아 통하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화가, 기독교와 기독교적 사유의 영향으로 인간으로부터 별개의 것으로 되었다면, 그 신화를 다시 인간의 곁에 돌려준 것이 이 작품의 의미가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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