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서울
최종현.김창희 지음 / 동하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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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라는 공간은 우리나라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꽤나 의미있는 공간입니다. 일단 수도이고, 그 이상으로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역사가 밀집해 있는 공간입니다. 과연 서울이 한반도에서 의미있는 공간이 된 것은 언제인가요. 백제의 온조왕이 수도를 정한 AD 18년? 혹은 조선의 태조가 경복궁을 법궁으로 정하고 천도한 1394년? 책의 시작은 서울의 지금의 서울과 시공간적으로 연결을 시작하는 바로 그 시기를 밝히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책의 첫 1부는 마치 심도있는 답사기와 같은 모양새를 보여줍니다. 고지도를 들여다보고, 사료를 꼼꼼하게 복기하여, 그 길을 하나하나 차근차근히 걸어보는 것으로 서울의 시작을 반추합니다. 아니, 어찌보면 답사기를 넘어서는, 시공간을 복원하여 제시하는 듯한 입체감을 줍니다.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남경역의 위치를 추론하는 장면과, 남경역에서 남경행궁으로 들어가는 길을 추론해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은, 그 발자취를 뒤돌아보면 어디론가 사라져 온 길을 찾을 수 없는 곳입니다. 켜켜이 더께어 앉은 세월의 두께는 깊고 두꺼우나, 도대체 무엇이 앉아있는지는 알 수 없는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요즘 장안의 화제인 '꽃보다 할배'를 보면서 감동했던 부분이 있습니다. '할배'들과 '짐꾼'이 찾은 프랑스의 국경도시 스트라스부르, 그 곳의 거대한 시간과 공간을 점유해온 노트르담 성당의 입지를 보면서, 지금과 옛날이 그렇게 한 공간에 이질감없이 어울리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스트라스부르의 노트르담 성당 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지내온 서울의 옛날이 과연 지금과 어떻게 어울리고 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서울의 옛날은 마치 거대한 콘크리트의 물결 속에 외로이 서 있는 하나의 섬 같은 그런 입지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어색함 속에서, 옛것은 망가지고 묻히고 닳아서 그 위에 아주 다른 새것이 또 얹어지고, 그것이 다시 망가지고 묻히고 닳으면 아주 다른 새것이 또다시 오고... 서울의 역사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저자들은, 망가지지 않고 묻히지 않고 닳지 않은 고지도와 고문서를 가지고, 이제는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서울의 예전을 다시 우리의 일상으로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도시가, 서울이라는 오랜 삶의 터전이, 그 시공간적인 역사성을 가지려면, 지나간 것을 지금의 것에 연결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이 책은 강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저자들은 정말 큰 노력을 했고, 그것은 서울을 살아가고 있는 독자의 마음을 공명시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1부의 노정을 통해 현재의 서울에 역사적 시간을 둘러얹었다면, 2부와 3부에서는 그 중에서도 '서촌'에 주목하여 그 공간 위에 역사적 시간을 얹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안타까왔던 것은, 인왕산의 품에 넉넉히 안겨 조선의 법궁 경복궁을 내려 섬기며 지내온 '서촌'의 역사적 시공간성이, 이제 어떻게 망가지고 묻히고 닳아 없어진 후 무언가 아주 다른 새것이 얹어지게될지, 그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다가온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이전부터 북촌의 공간이 어떻게 과거와 분절되고 있는지를 익히 들어온터라, 적어도 서촌의 공간은 시공간적 과거가 현재와 어울릴 수 있는 방식으로 성숙하기를 막연하게나마 바라고 있었습니다. 책의 2부와 3부에서 저자들은 왕족의 공간으로, 벌열의 공간으로, 중인들의 공간으로, 그 공간적 연속성을 지켜온 서촌에 대해 언급하다가, '팔지 말아야 할 것'을 팔아버리고 '살 수 없는 것'을 산 몇몇 친일 인물들에 의해서 연속성을 훼손당한 이후로 계속 그 단절이 심화되어 가는 것을 안타까와하는 마음을 가득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자들의 고민은 과연 서촌이 북촌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라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들은 2부에서 서촌에서 바라본 인왕산, (폐허의) 경복궁 등을 배경으로 하는 다양한 그림들 - 특히 겸재 정선 - 의 시선을 좇으면서 서촌이 가지고 있는 고즈넉한 매력을 엄밀하게 고증하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왕족이, 벌열 양반이, 중인들이 이 곳에 터잡고 산과 내를 벗삼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왕산과의 어울림은, 결국 일제 시대에 모두 단절되고 맙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속상한 부분은, 인왕산에서 흘러나와 청계천으로 들었을 시내가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모두 복개되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옛것과의 단절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자연경계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유하려는 탐욕이 그것을 심화하였으며, 이제 서촌은 옛것의 흔적을 찾으려면 고지도를 뒤지고, 폐쇄 등기부등본을 탐색하고, 발품을 팔고 경치를 내리보면서 공부해야 찾을 수 있는 그런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공부해도 찾을 수 없는 그런 공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개발과 보존의 명제는 항상 대척점에 서서 양자택일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철학이 부재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 책은, 서촌을 탐사하면서 독자에게, 과연 '너의 철학은 무엇이냐'라고 되묻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여깁니다. 책을 읽기 전, 북촌이 과거와 분절되어간다는 정도의 막연한 인식만 가지고 있던 제게, 이 책은 옛것과의 어울림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그런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서울은 매력적인 공간입니다. 아이를 낳고, 아이들과 서울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천만 인구가 사는, 활기와 생기가 넘치는 현대적인 공간인 서울을 가득 느낄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옛 공간을 찾아다니는 길은 망망대해를 헤엄치다가 외따로이 서있는 고도(島)에 정박한다는 느낌을 늘상 받아왔습니다. 이 책은 서울의 옛 모습을 저자들의 노력으로 현재에 얹음으로써, 지금의 서울에서 옛날을 오버랩할 수 있는, 그래서 서울의 의미를 중층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늘상 학교를 오고가며 지나쳐 온 '대광고등학교'가 이제는 고려시대 남경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던 '남경역'으로 그 의의를 확장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번에는 서촌이지만, 저자들은 서울의 곳곳을 둘러볼 의지를 책의 머리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서울을 발딛고 사는 처지에, 서울의 시공간적 역사성을 체화할 수 있는 또다른 기회가 저자들에 의해서 계속 만들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저자들의 에필로그처럼, 3부의 말미에는 서촌을 살아낸 인물 쪽에 치우친 감이 있습니다. 그래도 덕택에 윤동주 시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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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렉트릭 유니버스 공학과의 새로운 만남 18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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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시' 읽으려고 했던 이유는, 6월 말 실과 시간에 아이들과 전기회로 꾸미기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옛날, 제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와는 다르게, 요즘은 전기회로 꾸미기 키트가 나와서, 옛날처럼 납땜질을 할 필요없이, 블럭을 끼워서 회로를 연결하여 새소리도 나고 불도 켜지게 만드는 것이 가능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전기회로도를 배운 후에, 아이들에게 콘덴서나 트랜지스터에 대한 설명을 해줘야하는데... 콘덴서는 저장하고 트랜지스터는 증폭시킨다, 정도 말고는 지식이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은... 고등학교 다닐 때 그렇게 열심히 물리 공부를 했는데, 전류가 뭐고, 전압이 뭐고, 저항이 뭔지 배우고 V=IR 이런 것도 줄창 외웠는데... 막상 수업시간에 설명을 해주려고 하니까 기억이 가물가물... 머리가 '타불라 라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난 책이, 예전에 한창 물리/화학 기초 실험 수업을 들을 때 관심을 가지고 구매했던,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책인 [일렉트릭 유니버스] 였습니다.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책은 '생각의 나무'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네 권을 번역하여 출간했었는데, 온라인 서점에서 할인판매할 때 네 권을 한 번에 구매해서는 다 읽은 책, 중간에 접은 책, 손도 안댄 책이 있는 책입니다. '생각의 나무' 출판사 하니까... 작년 이맘때 부도가 난 출판사이죠. 요즘 한창 온라인 서점에서 할인판매하는 사이즈 좀 되는 책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같은 - 이 '생각의 나무' 출판사에서 나온 책입니다. 상당히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책들을 냈었는데... 안타깝게 부도가 나는 바람에, 많은 도전적인 출판사들을 낙담케한 일이 벌써 작년 이맘때의 일입니다. 


여하튼... 분명히 읽지 않았다고 기억했던 [일렉트릭 유니버스]를 한 3분의 1정도 읽고 나니까, 읽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한 번 읽었었고, 별 임팩트가 없어서 기억을 하지 못한 채, 전기에 대한 지식을 위해 다시 책을 집어 들었고... 다시 한 번, 지식적으로 도움이 되는 책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책 읽기를 마쳤습니다. 


저자의 다른 책인 [E=mc^2] 같은 책은 상당히 괜찮았습니다. 문과생이다보니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해 이해할 기회가 없었는데, [E=mc^2] 같은 경우는 읽으면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해서 상당히 알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괜찮은 독후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책을 읽은지가 벌써 5년 전이라 지금은 다시 가물가물한 상태가 되었네요) 그러나, [일렉트릭 유니버스]는 전기에 대한 지식을 담은 책은 아닙니다. 볼트와 와트가 나오고, 라디오와 레이더가 나오며, 한 입 베어문 사과와 트랜지스터가 나오지만, 그런 것은 관련 지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서 나오는 소재일 뿐입니다. 이 책은 편안하게 전기와 관련된 여러 흥미로운 옛날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책일 뿐, 전기에 대한 지식을 전달해주는 책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전기에 대한 고등학교 물리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독자라면 상당히 버거울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이야깃책이라도, 트랜지스터에 대한 간단한 용어들 - 실리콘 - 도 나오고, 코일을 돌돌 감아서 전기를 흘려보내면 자석이 되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런 부분들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이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전기 관련 지식이 있어야 책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문외한이 읽기에는 버거우며, 지식을 갈구하는 이들이 읽기에는 저술 목적이 어긋납니다. 따라서 이 책은 누구를 초점으로 한 책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마지막 장에 나온 '뇌 그리고 그 너머' 챕터는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 신경도 전기적 신호로 제어되고 활동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저자는 그 작용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제는 엔돌핀과 아드레날린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정도는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자의 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하튼... 2학기 시작과 함께 아이들에게 콘덴서와 트랜지스터에 대한 설명을 해 주려던 제 계획은, 제게 아무런 지적 도움도 주지 못한 [일렉트릭 유니버스] 때문에 실패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한 번 책을 탐색해서 도움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저자가 군데군데 불러들이는 이야기를 통해서, 전기에 관련된 많은 발명 뒤에는 사람 사는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요. 결국 이 책은 유명한 과학자가 들려주는 이야깃책입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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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신론 - 한글판
이기백 지음 / 일조각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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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큰 마음 먹고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신론]을 사서 읽었습니다. 이런저런 역사 관련 책들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한국사 통사를 읽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전체적인 맥을 잡아보려는 생각에 두툼한 책을 골라서 읽게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배우는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고교 수준의 국사 지식만 가지고 있다면, 뼈대는 같은데 살점이 조금 더 많은 정도의 책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요컨대, 국사 교과서가 그만큼 잘 쓰여진 것이라고 봐야겠죠?

 

한편으로, 일제시대 이후의 서술이 좀 빈약한 편입니다. 특히 5.16 쿠데타 이후로는 간단간단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언급하는 수준이라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기백 교수가 이병도 교수의 제자였다고 하죠. 이병도 교수는 식민사학의 거두라고 하는데, 그 글을 읽어보진 않아서 제가 평가하긴 어렵구요. 이기백 교수는 확고하게 식민사학을 배격하는 입장을 가지고 계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책에서는 이병도 교수의 '진단학회' 이야기가 잠깐 언급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책 이후에 강만길 교수의 [고쳐 쓴 한국 근대사], [고쳐 쓴 한국 현대사]를 읽을 생각이었는데, 그 생각이 확고해졌습니다. 일제시대 이후에 대한 언급은 많이 미흡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사건 중심으로 인물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정치사 중심으로 서술해나가되, 사회적 분위기나 문화/예술 부분에 대한 언급도 충실한 편입니다. 경제사에 대한 부분은 조금 미흡한 부분이 있는데, 따로 읽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의 종장에, 한반도 사회의 지배세력에 대한 고찰, 지배세력과 민중과의 관계에 대한 간단한 글이 있습니다. 동학'운동'과 독립협회, 그리고 3.1운동과 4월혁명을 같은 선상에 두고, 민중이 민주하여야 한다는 견해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사회정의가 보장되는 민주국가의 건설로 나아가야한다는 저자의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논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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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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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대 1학년 때, 한창 미술에 관련된 책들을 읽던 그 때, 진중권 씨의 책 [서양미술사 1]을 샀더랬습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책을 읽을 기회를 가지게 되었네요. 

 

 

이 책을 쓴 진중권 교수는 미학자이지만, 실제로는 미학자로서의 존재감보다는 사회평론가로서의 존재감이 더 커 보인다는 생각을 가지게하는 인물입니다. 정치, 사회적으로 미묘하게 갈리는 부분에서 진보적인 방향에 서서 파쇼적인 주장과 행동에 대해서 분연히 발언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엄혹했던 이명박 정부의 시절동안, 100이 아니면 0이라는 그 강력했던 입장을 조금은 완화시켜나가기도 했지만, 여하튼 아직도 '싸움닭'이라는 이미지가 굉장히 강하게 남아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학자로서, 진중권 씨의 책은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정치, 사회적인 문제에서는 원칙의 편에 서서 촌철살인하는 언어를 마구 쏘아대지만, 미학자로서 작품과 작품 외적인 평론에 있어서는 절제된 언어와 표현을 통해 정확하게 이야기하려는 바를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 [서양미술사 1]은 고대 그리스 시대 이후로부터 19세기 신고전주의까지의 유파를 정리한 책으로써, 세간의 진중권 씨에 대한 평가를 잘 확인할 수 있는 책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책의 독특한 부분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미술부터 중세 시대를 거쳐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와 바로크/로코코 시대를 거쳐서 신고전주의까지, 유명한 평론가의 평론을 배경으로 하여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는 부분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평론가란, 제 생각에는, 자신이 가진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설득력있게 다가갈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결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평론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그림이나 책, 작품을 보던지간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사유하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범한 독자로서 머물수 밖에 없는 까닭은, 우리는 그러한 우리의 사유를 다른 사람에게 공명하게 할 능력이, 혹은 통찰이, 또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능력 또는 통찰, 혹은 마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런 이를 평론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학자로서, 저자는 자신의 평론가적 통찰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앞서서 평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이들의 통찰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려주는 것 정도로 만족하고 있는 모습을 책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저자가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진중권 씨 자신의 목소리로 고대 그리스부터 신고전주의까지를 훑어 내려갔어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저같은 미술의 문외한은 누가 이야기를 하더라도 수용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리하지 않고, 자신보다 (어찌보면) 더 권위있는, 먼저 통찰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평가함으로써, 문외한들이 조금은 더 관심을 가지고 작품을 쳐다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쨌든, 고전주의니, 바로코/로코코니, 신고전주의니, 모던이니 하는 다양한 미술 유파들에 대한 생각은, 이미 당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능력있는 평론가들에 의해서 샅샅이 살펴진 바 있습니다. 저자가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그런 먼저 지나간 이들의 목소리를 빌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텐데, 차라리 먼저 통찰한 글들을 베이스삼아 자신의 생각을 양념처럼 뿌려둔 글들이 저같은 이들이 차후에 다른 견해와도 조금은 쉽게 비교/대조해 볼 수 있도록 해주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책은 조금 어렵습니다. 러시아의 역원근법에 관련된 이야기는 도무지 어려워서 두어번 다시 읽은 듯 하고, 이해해내었지만, 며칠 지나니 '무슨 이야기였던가'라는 상실감이 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도화를 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조금은 친절하게, 고전주의와 바로크/로코코, 신고전주의 등을 잘 비교해 줌으로써, 낭만주의가 등장하는 시점부터 복잡다단하게 등장하는 유파를 조금은 잘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가지게 해 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은, 조금 재미없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많은 조형물들은 작품 수가 작아 그 이야기가 뻔한 구석이 있고, 중세시대에는 형이상학적이라 피상 이상으로 들어서기를 망설이게 합니다. 원래 그 시대들이 그랬나봅니다. 조금 더 다이나믹한 시대에 관한 책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하네요. 그래서 결국 [서양미술사 2]도 사고야 말았습니다. 신고전주의의 이후부터 다룬다는, 2008년 초판과는 표지가 달라진 - 구성은 그대로겠죠? - 두 번째 권도 기대를 가지고 읽어볼 요량입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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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더스번 칼파랑과 사란디테 이야기
이영도 (저자) / 황금가지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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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블로그는, 어느 때까지는 '이영도'라는 키워드로 들어오시는 분들이 가장 많았더랬습니다. 자칭, 타칭, 이영도 씨의 팬인지라, 관련 포스팅이 많았던 탓이 크겠지요. 벌써 4년하고도 7개월이 지났지만, '드래곤 라자 10주년 기념판' 출간 때 대충 추려보니 A4로 120여장 분량이 되는 글들을 이래저래 썼더랬습니다. 잡담부터 비평글까지... 정말 많은 글을 썼고, 또 그만큼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한 분이 바로 이영도 씨이죠. 

 

다만, 안타까운 것은, 지난 2005년에 [피를 마시는 새]의 출간이 이루어진 후에는, 중간에 [드래곤 라자] 10주년을 기념하면서 썼던 [그림자 자국] 말고는 후속작이 나오지 않는다는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독자들은 이런저런 추측을 앞세우고 있는데, 그렇게 나오는 이야기로는, 하이텔이 없어진 후에 연재 장소를 물색하는 것이 길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런 표면적인 핑계를 앞서 두고는 계속 연재를 구상하는데 작품의 전개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어쨌든, 작가 자신이 이야기하는 바는 아무 것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작품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 밖에는 없을 듯 싶기도 합니다. 

 

한편, 독자로서는, 혹여 이제는 이야깃거리가 다 떨어지지 않았나, 라는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입니다. 독자이니, 작가가 작품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런저런 쓸데없는 곳까지 그 염려가 더해지는 법이며, 그러다보니 이제 작품으로 더이상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라는 우려에까지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게 되는 것이죠. 물론, 이영도 씨는, [드래곤 라자]-[퓨처 워커]-[그림자 자국]과 [눈물을 마시는 새]-[피를 마시는 새]로 이어지는 두 곳의 다른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오버 더 호라이즌]-[오버 더 네뷸러]-[오버 더 미스트]로 이어지는 정말 매력적인 세계도 하나 가지고 있으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세계인 일곱 선장과 일곱 하이마스터들의 세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깃감이 떨어져서 이야기를 쓰지 못할 일은 없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 카쉬냅 백작 더스번 경 칼파랑(과 사란디테)의 이야기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밑으로는 당연히 이야기의 내용이 있으므로, 혹여라도 아직 이야기를 읽지 않았는데, 그 이야기의 추이 혹은 결말을 알기를 원치 않으시는 분은 이 밑으로 스크롤바를 내리시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단... [에소릴의 드래곤]은 딱히 무슨 반전이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런 판단은 독자 개개인에 따라 다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꾸벅)

 

 

 

 

 

 

 

 

이 이야기는 에소릴의 드래곤인 란세델리암이 나리메 공주를 납치하면서 시작됩니다. 공주를 구출하기 위해 왕의 기수이자 왕국의 기사인 카쉬냅 백작 더스번 경이 곡괭이 한 자루 비켜들고는 말 한 마리 거느리지 않고 홀홀단신 공주의 구출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 더스번 경은 오만가지 추문(!)을 안고 사는 천하의 무뢰배입니다. 팔비노 교의 성녀를 겁탈했으며, 평민에게는 귀족이라는 이유로, 귀족에게는 귀족 알기를 우습게 안다는 이유로 배척당하며, 반란을 처리한 후에 그 수급을 나리메 공주에게 덩그러니 보내버리는, 그러나 싸움은 또 그렇게 잘 할 수 없어서 연전연승 이기지 못하는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리메 공주는, 란세델리암에게, '나는 더스번 경의 트로피가 되고 싶지 않다'고 강변하면서, 놓아달라고 애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실은 사란디테와 조빈의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보름달을 보면 (여자) 늑대 인간으로 변하는 사란디테와 (남자) 사슴 인간으로 변하는 조빈. 그리고, 그 둘은 필연적인 사랑에 빠지지만... 조빈은 그 사랑이 변할까봐, 그 사랑이 거짓일까봐 겁을 내며 사란디테를 떠나려 하고, 사란디테는 그 사랑에 빠져 그의 상대가 누구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사랑 자체에 몰입하고 목매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더스번 경과 사란디테는 란세델리암에게 잡혀 있는 나리메 공주와 조빈을 구하려는 목적으로 의기투합 - 응? - 해서 함께 에소릴에 잠입하고, 그 무시무시한 소문과는 다르게, 더스번 경과 사란디테는 드래곤 몰래 공주와 조빈이 잡힌 공간까지 가서 그 둘을 구출해내기 직전에 이르릅니다. 

 

나리메 공주가 더스번 경을 오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만 않았다면, 조빈이 사랑에 비겁하지만 않았다면, 아마도 네 사람은 몰래 에소릴을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조빈은 사랑에 비겁하다 못해, 사람에게도 비겁합니다. 란세델리암의 설득에 실패하고 결국 잡아먹힐 지경이 되자, '몰래 다녀간 사람이 있다'라고 드래곤에게 꼰지릅니다. 명목은, 나리메 공주를 잡아먹으려는 드래곤의 시선을 뺏아보려는 처량한 시도이지만... 결국은 사랑도 배신하고 사람도 배신하는 그런 짐승같은 행동입니다. 나리메 공주는

 

'너는 후식이야.'

 

라고 그런 비겁함에 일갈합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조건을 따지고 형편을 재며 상황을 살피는 그런 것과는 정 반대의 그런 것입니다. 사랑은 조건도, 형편도, 상황도, 그 어떤 것이라고 극복할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연인에 대한 사랑이 그런 것이며, 자녀에 대한 사랑이 그런 것입니다. 사랑에는 경중이 없습니다. 나의 사랑의 양은, 실은 조건과 형편과 상황에 따라 그 모양이 조금씩 달라 보일 수는 있지만, 그 양은 변함 없습니다. 덜 사랑하는가 더 사랑하는가는 없습니다. 사랑하는가, 아닌가만 있을 뿐이죠. 조빈은 사란디테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조빈은 자신에게도 솔직하지 않았기에, 사란디테는 조빈과 함께 보낸 나날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조빈을 구하기 위해 그 험한 에소릴까지, 그 극악무도한 더스번 경과 함께 잠입하게 되지만, 실은 사란디테도 조빈에게 속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조빈은 거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사람을 배신합니다. 사랑할 수 없다고 버리는 것은 짐승이나 할 짓입니다. 우리 사람은, 비록 이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버리지는 않습니다. 혹시라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인 것이죠. 금수만도 못하다, 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입니다. 작가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하지만, 혹여라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면, 존중하기라도 하라는 것이죠. 나리메 공주는 그랬고, 조빈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더스번 경은 사란디테의 맹목적인 사랑 - 대상과 공명하지 않고 사랑 자체에만 몰입해 있는 - 의 원인이, 사란디테가 스스로를 응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조언합니다. 실은, 사란디테도 조빈과 같은 부류였다는 것이죠. 사랑을 배신하는 것과, 사랑을 맹신하는 것은, 결국 사랑의 상대편에 대해서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은 이야기라고 봐야겠죠. 결국 사란디테는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길 바라게 됩니다. 그래서 에소릴의 드래곤에게 승리한 댓가로, 사란디테는 월장석을 선택하게 됩니다. 사랑의 또다른 주체인 상대편을 쳐다보려면, 사랑의 주체인 나를 먼저 똑바로 쳐다볼 수 있어야겠죠. 그 모습이 아무리 형편없고 똑바로 응시하기에는 너무 힘든 모습일지라도 말입니다. 

 

우리의 사랑에는 월장석이 필요합니다. 나의 또다른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쳐다볼 수 있어야 하는 그런 매개물 말이죠. 누구나에게 그런 월장석 같은 것이 한 번 쯤은 있을 것입니다. 그 때를 놓치지 말고,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면, 아마 사란디테처럼 더스번 경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 또한 얻게 될 것입니다. 

 

더스번 경은 나리메 공주를, 사란디테는 월장석을 전리품으로 챙겼다면, 나리메 공주는 왜 조빈을 전리품으로 챙겼으며, 그런 조빈을 방치한 채로 그 곳을 떠나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더스번 경의 트로피 양보욕을 충족시켜 주면서도, 자신은 그런 '짐승'과 함께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라고 하면 작가의 생각을 맞게 읽은 것일까요? 하하.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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