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통합수업, 아이들을 수업의 주인공으로! - 초등5-6학년 교육과정 재구성 길잡이
이윤미 외 11명 지음 / 살림터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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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육과정과 교과서


우리나라는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을 편성, 운영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교육과정이란, 학생들이 해당 학년에서 배워야하는 것을 명시한 것으로, 예컨대 초등학교 6학년 국어 같은 경우에는


문학(3) 작품에 나타난 비유적 표현의 특징과 효과를 이해한다. 


라는 성취 기준이 있고, 초등학교 6학년의 해당 단원을 이수한 어린이에게는 평가를 통해 해당 성취 기준을 달성하였는지의 여부를 알아봅니다. 우리나라는 교육과정을 국가 - 교육과정평가원 - 에서 편성하여 이를 기준으로 학교에서 교수-학습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교육과정이라하면, 다른 의미로는 일련의 학교/학년/학급운영 전반을 일컫기도 하지만, 명확하게는 학생들이 도달해야할 성취 기준의 목록을 교육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교육과정이 편성되면, 교육부에서는 교육과정을 실제 교수-학습 과정으로 구현한 교과서를 편찬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소위) 주지과목의 경우에는 국정으로, 예체능과목의 경우에는 검인정으로 교과서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국정은, 말 그대로 교과서를 국가에서 정하여 사용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가에서 연구진/집필진/심의진을 선정하여 교육과정에 걸맞는 교과서를 만들도록 하겠지요. 검정은,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연구진/집필진/심의진을 구성하여 교과서를 만든 후, 교육부의 인정을 얻은 경우에 일반 학교의 교과서가 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검인정 교과서는, 6~8종 정도가 있으며, 각 학교에서 교과서 선정 위원회를 열어 어떤 교과서를 사용할지 선정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는 시행하지 않는 제도이지만, 인정 교과서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국가가 중간에 개입하지 않고, 교과서를 만든 민간과 학교가 다이렉트로 연결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일본의 우익교과서가 인정 교과서로 편찬되었다고 하죠. 


요즘, 교과서에 대한 기존과는 다른 견해들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교과서는 결국 교육과정 상의 성취 기준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 학생들이 교육과정 상의 성취 기준을 달성할 수 있는 더 효율적인 도구가 있다면 그를 통하여 학생들을 교수할 수도 있다는 인식들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예전에는 '교과서 진도를 끝낸다'는 의미가 통용되었지만, 요즘은 굳이 교과서를 가지고 수업하지 않는 경우들도 점차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만해도, 2014학년도에 사회과 경제 단원을 교과서로 교수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만든 교수-학습 과정안을 가지고 학생들과 수업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교육과정 상의 성취기준을 교과서 이외의 도구로 만족시키려는 시도, 이러한 흐름에는 '학생 주도적'이라는 키워드가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2. 교육과정 재구성


교육과정 상의 성취기준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인 교과서의 경우, 가장 큰 어려움은 현장과의 괴리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명망있는 연구자들과 능력있는 교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편찬한 교과서는 그 자체로 참 훌륭한 도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시와 촌락이 다르고, 농촌과 어촌이 다릅니다. 생활 수준의 격차도 다 다른 가운데,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하나의 교과서를 가지고 성취기준을 달성한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사들은 교과 내 재구성을 시도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올해 수학 과목의 교과 내 재구성을 시도할 생각입니다. 2014학년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치룬 여러 평가 및 과제 결과물을 분석한 후, 학생들의 선수학습과정 중 주로 드러나는 결손 요소를 추출하여, 2015학년도에 가르칠 아이들에게 이를 토대로 수업을 진행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6학년 성취기준을 분석하여, 학습 요소를 도출한 후에, 선수학습 결손 요소와 결합하여, 부진 학생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교과서를 보완하는 보충지를 만들어 볼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등교사 커뮤니티인 '인디스쿨'을 살펴보면, 이미 많은 교사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학생들의 성취기준을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교과 내 재구성을 시도하고,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과 내 재구성은 이제는 어떻게 보면 교수-학습 과정의 필수적 요소로 자리매김하였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 교과 간 재구성을 목적하는 많은 교사들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교육과정 상에서는 이러한 교과 간 재구성이 이미 4차 교육과정부터 시도되어 온 바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배우셨던, '바른생활',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이 바로 그것입니다. 1982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이러한 교과서는, 국어, 수학, 사회, 과학 등 각각의 교과목에 따라 교과서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한 군데 뭉뚱그려서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교과목 별로 살펴보는 방식으로 구현되었고, 2009 개정 교육과정 아래에서는 교과서 자체가 주제별로 편찬되어 학생들에게 실제로 교수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과 간 재구성이 현재로는 초등학교 1, 2학년에게만 적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재구성을 초등학교 고학년까지 끌어올려 교과 간 '주제별' 재구성을 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번에 읽은 책, [주제 통합 수업: 아이들을 수업의 주인공으로!]는 전북의 한 학교에서 1년간 시도한 주제 통합 수업의 일련의 과정을 책으로 엮어낸 것입니다.



3. 학문의 엄밀함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은, 그러나 과연 이러한 주제별 재구성을 통한 교수-학습이 학문의 엄밀성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초등 수준에서 학생들은 여러 과목을 학습하게 됩니다. 국/도/사/수/과/음/미/체/영/실. 각각의 과목은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부터 각각의 교과로 갈라져서 교과별로 교수-학습 과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교과목의 교수-학습은 이론적인 깊이가 깊지는 않습니다. 위의 국어과 성취기준을 예로 들었지만, 작품에 나타난 비유적 표현의 특징과 그 효과를 초등학교 수준에서 배우다보니까, 은유/직유/의인법의 간단한 용례를 배울 뿐, 이를 통해 시적 화자와 공명하거나 작품 속에서의 화자의 처지를 헤아린다든지 등의 활동까지는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이를 교수하는 교사의 수준까지 초등학생의 수준일 수는 없잖습니까. 교사는 문학 작품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유의 양상을 통하여 시적 화자의 처지를 헤아리고, 왜 이러한 비유를 사용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면서, 시적 화자와의 내밀한 교감을 이룰 뿐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어느 정도의 이해의 수준에 도달해야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사회과의 경제 파트를 재구성한 부분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 부분('행복한 경제')을 보면서, 과연 이렇게 이루어진 주제별 재구성 수업이 학문적인 엄밀함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학문적으로 엄밀함을 가지고 주제별로 재구성이 되었는가. 과연 재구성에 참여한 교사들은 경제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육과정 상의 성취기준을 기초로 한 학습 요소를 추출하여 이를 효율적으로 재구성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활동 중심의 프로그램이 여럿 소개되지만, 이러한 프로그램을 과연 우리 교실에서는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습니다. 책이 '왜 이런 프로그램을 구안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은 생략한 채, 프로그램 과정만을 나열식으로 소개한 것을 보면서 이것은 우리 교실에서는 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초등학교 교사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어떤 초등학교 교사가 경제면 경제, 역사면 역사, 문학이면 문학을 체계적으로 배워서 그것을 자신의 교실에서 녹여낼 수 있겠습니까. 초등학생의 발달 과정 상의 특징을 생각할 때 초등학교 교실에서 교과 담임제를 구현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면, 초등교사의 학문적 엄밀함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초등교사는, 아이들을 학문적으로 잘 가르치는 것보다는, 아이들이 인격적으로 잘 성장하도록 안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제별 재구성은 교사의 역량에 걸맞는 정도의 최소한의 수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위에서 밝힌바대로, 요즘 초등학교 현장의 키워드는 '학생 주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의 치명적인 약점은, 활동이 학습을 담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프래그머티즘 계열에서는 학생들의 다양한 활동이 학습으로 귀결된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이 모든 학생에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학생의 학습을 담보할 수 있는 교육적 처방도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학생이 활동하는 것 자체로 의의를 삼는 우를 범치 않으려면, '학생 주도적' 교육 활동을 통해 학생들이 성취기준 상의 학습 요소를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는 확실함이 있을 때에 그러한 활동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고민이 커졌습니다. 어쨌든, 교사 주도적인 교수-학습이 학생들을 수동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분명한데, 학생 주도적인 교수-학습을 통해서 어떻게 학생들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뚜렷한 해결책이 없으니... 결국 교사의 할 일은 더 많은 공부를 통해서 교사 자신의 수준이 꽤나 높아지도록 하는 것부터 일단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인식 아래에서, 저도 2015학년도에 교과 간 주제별 재구성 수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학문적 엄밀성을 바탕으로 하여 학생 주도적 활동을 통하여 학생들이 인격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학문적 부분에서도 성장이 이루어지는 그러한 수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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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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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가 불현듯, 세월호에서 스러져갔던 학생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참사 당시 많은 이들이 더 안타까와했던 것은, 그 많은 학생들이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청소년하면 가지고 있는 일탈, 반항, 탈주, 이런 이미지들이 참사 당시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은채, 그 학생들은 그 곳에서 잘못된 지시에 정확하게 참여하고 그렇게 스러져갔던 것입니다.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청소년에 대한 이미지, '젊은이'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고정관념들. 과연 그런 것들이 청년들에 대한 적확한 이해 속에서 나온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청년에 대한 몰이해가 기성세대에 의해 만들어지고 확산되는 현상 속에서, 이미 기성세대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저의 경우에도 제가 가진 고정관념들을 깨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일본의 젊은 사회학자인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일본 사회의 '젊은이'들에 대해서 쓴 책입니다. 우선 저자의 나이가 흥미롭습니다. 1985년생인데, 아무래도 젊은이가 쓴 '젊은이론'이라는 것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의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젊은이들이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는 참 힘이 든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어른들의 야유이겠지요. '너희도 더 커서 경험해보면 생각이 달라질거야'. 굉장한 폭력이자, 젊은이들의 삶과 선택에 대한 야유라고 할 수 있지요. 젊은이들의 삶이 어른들의 말 한 마디에 무너지는 것. 그러한 현상은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책은 묘하게 계속 우리나라와 일본이 오버랩됩니다.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한 20년은 앞섰던 나라 - 도쿄 올림픽은 1964년, 서울 올림픽은 1988년 - 일본. 그 일본이 1990년대부터 장기불황에 돌입하여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장기불황의 전초가 보이는 상황에서, 일본의 젊은이들이 닥친 상황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닥친 상황과 엇비슷합니다. 가장 어두운데, 여명이 오리라는 기대는 전혀 되지 않는, 그냥 가장 어두운 그 상황. 젊은이들이 행복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을, 저자는,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없기 때문이라고 단언합니다. 지금 이 상황에 최고의 상황이니까, 젊은이들은 만족하고 있으며, 그래서 젊은이들의 행복지수가 높을 수 밖에 없다는 저자의 상황인식.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젊은이들의 불행은 앞으로 10년, 20년 뒤, 지금의 젊은이가 더이상 젊은이가 아니게 된다면 격차로써 드러날 것이라는 저자의 예언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20대의 젊은이들은, 프리터 족으로 살던, 번듯한 대기업에 취업을 하던, 큰 격차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받는 급여는 어쨌든, 프리터 족이든 대기업 신입사원이든 비슷할테니까요. 그러다가... 그들이 20년 더 그런 인생을 지속해가면, 더이상 젊은이가 아닌 시절이 오면, 그 때부터 격차가 벌어지겠지요. 지금의 젊은이들의 불행은, 더이상 그들이 젊은이가 아닐 때에야 비로소 체감할 수 있기 때문에, 현상의 개선은 요원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저자는 일본 인구 '1억명 모두가 젊은이가 되는 사회'라고 지금을 진단합니다. 기술의 발달이, 정보의 확산이, 젊은이가 선취할 수 있는 것들을 모든 인구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점차로 젊은이가 설 자리는 좁아지고 있습니다. 젊은이가 내세울 수 있는 카드도 점점 축소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 아니,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더 못한 상황이라고 봐야겠지요. 일본이 가진 사회안전망도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노인 세대를 부양해야할 몫까지 짊어져야하니까요. 


우리나라의 청년들에 대한 이해, 그리고 장년 세대로써 미래세대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책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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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리더들을 위한 과학 입문 1 미래의 리더들을 위한 과학 입문 1
리처드 뮬러 지음, 전이주 옮김 / (주)하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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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과학을 잘 한 편입니다. 문과생이었지만, 모의고사 점수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내신도 좋은 편이어서, 대학교를 과탐 덕택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적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험 성적은 좋은 편이었지만, 지식이 축적될수록 지식간의 연계는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전 기억을 되살려보자면, 물리는 파동 파트가 나오면서부터, 화학은 여러 탄소 화합물이 나오면서부터 제정신(!)이 아닌채로, 암기에 의존하여 지식을 습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비단 저뿐이겠습니까.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이 자신이 다루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채, 시험을 위해 지식을 꾸역꾸역 넣는 것이 일반적이겠고, 고등학교를 떠나면 그렇게 넣은 지식들은 대뇌피질 어디에선가 굳어버려 끄집어낼 수도 없는 무엇인가가 되어버리겠지요. 


그렇게 고등학교를 떠나, 문과생으로 살아가던 나날에 다시 과학을 접해볼 기회를 가진 것은 교대 2학년때 수강했던 과학과교육 1 시간에서였습니다. 그 때 강의하시던 교수님께서 '열'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던 것이 기억에 납니다. '머리에서 열이 난다'라고 할 때 그 열의 정체는 뭐냐, 이런 식의 이야기였던 듯 싶은데, 그 때 그 '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열에 대한 오개념, 열과 에너지와의 관련성 - 결국 열은 에너지라고 할 수 있죠 -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식이 분절적이라면 어쩔 수 없이 조각난 지식을 머릿속에 쌓을 수 밖에 없습니다. 체계적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테니, 분절적인 지식을 최대한 구조화하여 넣어야할텐데... 구조화하기 위한 유목화를 위하여 지식간의 연관성을 따진다는 것에서 부닥칠 수밖에 없는 근원적 문제를 맞닥뜨리는 순간, 우리에게 분절적 지식은 마치 조립하기 전 레고 블럭처럼 무의미한 더미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이 책 [과학 입문 1]은 고등학교 정도의 - 저 정도되는 - 과학 - 특히 물리와 화학 - 지식을 가진 독자가, 자신의 과학 지식을 실생활에서 확인하면서, 지식간 연련성을 강화할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는 대학교에서 과학의 문외한에 가까운 학생들에게 교양 수업으로 강의한 내용을 이 책으로 엮었는데, 과학을 처음으로 접하는 이들이 읽기에는 조금 버거운 책이라는 생각이 들고,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진 독자들에게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책은 두 권으로 되어있고, 저는 1권을 먼저 읽었습니다. 1권을 읽어보고 2권을 구매할지 말지를 결정하려고 했는데, 1권의 3분의 1쯤을 읽는 시점에서 2권을 구매했습니다. 물리의 중요한 핵심지식인 일과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 화학의 중요한 핵심지식인 원자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다루고, 우리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끼치는 방사능과 핵에너지, 전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는 1권을 마무리합니다. 아무래도 숫자가 조금 벅찬 편이고, 주요 수식들이 복잡하게 엮여 있지만,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않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2권도 기대가 되네요.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기존에 알고 있던 과학 지식과는 조금 다른 방향의 이야기들도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과학 지식이 짧아서 책 속 내용 중 일부는 크로스체킹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부지런히 공부해서 여러 내용들을 명확하게 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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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주의 - 경제민주화를 넘어 정의로운 경제로 한국 자본주의 1
장하성 지음 / 헤이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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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장하성 교수는, 많은 분들에게는 '장하성 펀드'로 알려진, 소액주주운동을 펼친 우리나라의 경제학자입니다. 저자는 소액주주운동을 통하여, 소위 재벌이라고 불리우는 대기업군의 소유주들이 자신이 창업하거나 물려받은 회사를 개인기업인 것처럼 운영하는 것을 견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즉, 한 기업에 대하여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소액주주들을 결합하여 주주총회에서의 의결권을 실제로 행사함으로써, 기업의 창업주 또는 2세 경영인들의 전횡을 견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소액주주운동을 해나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이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분들중에, 소액주주운동이 우리나라 재벌들의 경영권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고, 이 때문에 외국 자본들이 우리나라 대기업군에 대한 적대적M&A를 시도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는 저자도 이 책의 일부를 할애하여 설명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충분히 설득력있다고 받아들여집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은 우리나라 경제상황을 사안별로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으로 할애하고 있으며, 두 번째 부분은 그러한 우리나라 경제상황 중에서 특히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주목할만한 세 가지 이슈를 자세하게 다루면서, 주주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소액주주운동의 당위성을 소액주주운동에 대한 설명 하나 없이 강화하고 있으며, 마지막 장에서는 현재 우리나라 자본주의가 드러내는 문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는지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약간씩의 의문들이 들기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경제 관련 서적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경제 현상을 바라보는 경제학자들의 이야기는 백인백색인 경우가 많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다른 학자는 저렇게 이야기하고, 또 다른 학자는 요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뉘앙스의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고, 확연하게 갈라선 견해가 대립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의 입장은 확연하게, 성장보다는 분배 쪽에 포커스가 맞추어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고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성장론자들보다는 분배론자들을 더 강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저자는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성장론자에 대한 비판적 논지 구성은 크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결국 현재 우리나라 경제 상황을 바라보는 가장 큰 대립은 성장과 분배이기 때문에, 책이 성장론자들의 논지를 주로 비판하면서 자신의 분배론적 견해를 밝혔으면 좋았겠지만, 이 책은 같은 분배론자 중에서도 특히 재벌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통해 성장 동력을 유지하면서 분배를 강화하자는 주장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한 편으로는, 같은 분배론자 중에서, 저자의 소액주주운동이 결국 우리나라 기업의 성장동력을 깎아먹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견해를 가진 분들도 있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 대해서, 소액주주운동을 통한 기업 견제가 왜 타당하며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주장을 강화하는데에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항상, 대명제보다는 지엽적 주장에 더 많은 설명을 할애하는 것을 보면서, 사실은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드는 것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현상에 대한 문외한이 보기에, 이 책은 꼭 읽어볼만한 부분을 여러 가지로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책이 잘 읽힙니다. 지금 읽다가 멈춘 책 중에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과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저의 손길을 다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책들은 읽기에 약간은 버거운 부분이 없지 않았습니다. 이론적으로도, 현상적으로도. 그런데 저자의 이 책은 우선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을 전체적으로 톺아주면서, 그런 상황에서 발생한 문제점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간결하게 붙여나가면서 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저자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런 상황이 친숙하기 때문에 책이 쉽게 읽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 주석 부분을 빼고 600쪽 - 책이 술술 읽힌다는 것은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한 짧고 간결하게 중요한 키워드를 잘 정리하여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영미형과 북유럽형의 자본주의는 둘 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지만 전자가 시장 효율성과 경쟁을 상대적으로 더 중시하는 입장이라면, 후자는 민주주의와 공정성, 연대 등을 더 중시하는 것'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기존 체제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신자유주의의 개념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중략)


'프라사드의 주장은,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말하는 정책 프로그램은 어떤 정연하게 체계화된 경제 이론이나 원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각 나라가 처한 정치경제적 현실에서 경쟁하는 정치 세력들이 선거 승리를 위해 유권자들에게 제시했던 임의적으로 만들어진 일련의 정책 대안들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관한 많은 연구들은 신자유주의를 경제 이념으로 논의하기보다는 1980년대 초부터 미국과 영국 그리고 유럽에서 나타난 규제 완화, 개방화, 민영화, 자유화, 세계화, 작은 정부 등으로 상징되는 일련의 시장 기능의 확대와 정부 역할의 축소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경제정책들로 정의한다. (126~127쪽)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예로 들자면, 저자는 신자유주의를 개념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현상적으로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론적 바탕 위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1970년대 케인즈 식의 자본주의가 보여준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나타난 일련의 정책들을 통칭하여 신자유주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이러한 견해는 책의 이후 부분에 충분히 반영되면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는 논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조금 거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큰 줄기는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 개발 연대의 계획경제체제에 변화를 시도하고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으로 볼 수 있다. (중략) 계획경제의 마지막 단계이자 시장경제로의 전환의 일환으로 김영삼 정부는 출범과 함께 '신경제 5개년 계획'을 1993년부터 추진했지만 1996년에 조기 종료 되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의 5개년 계획은 몇 가지 의미 있는 개혁을 했다. 1993년에는 모든 금융거래에 실명을 의무화하는 '금융실명제'가 도입되었다. 1994년에는 계획경제의 상징이자 주무 부처였뎐 경제기획원이 폐지되고, 재무부와 통합되어 재정경제원으로 변신하였다.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로써 1995년부터 민영화를 포함한 시장 자유화 정책들이 추진되었다. 이렇게 보면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된 것은 1995년이라 볼 수 있다. (79~80쪽)


저자의 이러한 견해도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나라가 계획경제하에 있다가, 본격적인 시장경제로 전환된 시기를 1995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저자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2000년대 초반의 경제 정책을, 저자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라고 보기보다는 시장경제체제를 강화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위에 소개한 견해처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기존의 케인즈식 자본주의의 반동으로 나온 것이라고 할 때, 우리나라에서 드러난 2000년대 초반의 일련의 경제정책을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본격적으로 케인즈식의 강력한 국가 개입을 통한 분배적 경제 시스템을 구축한 적이 없기 때문에, 2000년대 초반의 경제정책을 그에 대한 반동의 의미로써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명료하게 표현하면서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경제 상황을 리뷰하고 있으며, 저자가 경제학을 연구하면서 겪었던 다양한 사례들을 예로 들면서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함으로써 편안한 독서를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저자의 결론은, 궁극적으로는 민주적 절차를 통하여 분배를 강화하여야 한다는 것인 듯 싶습니다. 저자는 존 롤스의 정의론을 가지고 와서, 사회적 약자가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이익이 분배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사회 전체의 합의 과정을 꾸준하게 거쳐야 한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결국 분배가 당위성을 얻기 위해서는, 분배의 객체인 고소득층 시민들이 당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절차를 민주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내어놓을 수 있다면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기업의 내부유보금에 대한 기나긴 설명과 문제점 지적 끝에, 초과 내부유보세를 부활하자는 견해와 함께, 누진적 직접세를 강화할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익에 대한 배당 지급 및 임금 인상을 통해서 자본의 분배를 실현하며 - 저는 의문을 가지고 있지만 - '업무 존속 기간'을 기준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자는 주장도 펼치고 있습니다. 


분량은 무겁지만, 독서는 가볍게, 그러면서도 여러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독서가 되었고, 몇몇 부분에서는 의문을 가지고 있지만, 전체적인 틀에서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거의 한 서른 부분 넘게 스크랩 해 두었습니다. 하나하나 소개하고 싶지만, 일독을 권하는 것으로 갈음하여야겠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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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깊다 -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
전우용 지음 / 돌베개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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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의 저자는 전우용 씨입니다. 역사를 전공하신, 역사학자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습니다. 저자는 이전부터 여러 현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역사학자답게 역사적 사실 속에서 반추하는 트윗으로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저자의 트윗을 다른 경로로 - 저는 트위터를 하지 않습니다 - 접할 기회를 가지면서, 저자의 탁월한 통찰에 고개를 끄덕거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서울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이 담긴 책을 여러가지로 검색하다가 이 책을 알게 되었고, 저자가 누구인지 안 후에 큰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구입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1'


이런 종류의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여행에 관심을 가지면서였습니다. 


어릴적 부모님따라 다녀왔던 동해안 해수욕장이나, 교회 수련회 등의 특수 목적의 장소가 아닌, 여행을 위한 여행을 해 봤던 것은, 결혼하기 전에는 2박 3일의 부산행이 유일한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은, 학비를 벌어서 학교를 다녀야했던 고학생에게는 너무나 사치스러운 일이었기에, 스물 다섯 살의 초여름 어느날, 동기 녀석이 살고 있던 부산에 잠시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신혼여행을 가기 전까지는 여행이라고 하는 것을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결혼을 해서도, 딱히 여행을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우선 면허가 없었고, 따라서 차도 없었습니다. 면허를 따고 나니, 학원 강사 신세라 어디로 갈만한 시간 여유가 없었고, 둘째 낳고 세 번째 대학 생활을 하고, 돈을 벌고 하다보니, 역시나 여행을 할 여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교 2학년 어느 날, 불현듯 부산에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2009년의 석가탄신일 날, 당일치기로 부산행을 감행했었지요. 아침 여덟시에 출발해서, 첫 기착지인 경남 김해의 봉하마을에 도착한 것이 오후 네 시. 자정 무렵까지 단지 여덟 시간 동안 부산 공기를 맡기 위해서 왕복 열 여섯 시간의 운전을 결행했던 그 이후로, 지금까지 시간이 되면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바쁜, 그런 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여행에 대한 의문이 든 것은, 아마도 재작년 전주 행이 직접적인 이유였다고 할 수 있겠고, 더 나아가서는 서울의 인사동, 삼청동 등지에서 느꼈던 의아함이 그 단초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두어번의 인사동 행은, 왜 여기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고, 삼청동 행은, 이 곳이 왜 이런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 당일로 다녀온 전주 행은, 그런 제 의문을 확실한 무언가로 만드는 그런 여행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한 세기 넘게 지속된 오리엔탈리즘 학습은 토속적인 역사, 죽은 역사는 즐거이 상품화하면서도 아직껏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역사는 아프고 창피하다는 이유로 감추고 숨기는 태도를 깊이 심어주었다. 어디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고 어떻게 생겼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는 대장간은 후딱 복원하면서, 난지도 역사를 살아서 증언해온 구조물들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허물어버리는 이율배반의 시대가 21세기형 '역사의 시대'요 '문화의 시대'였다. (중략)  팔리느냐 안 팔리느냐 그것이 문제일 뿐,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한다. (10~11쪽)


무언가를 소비하기 위한 여행일 뿐, 그 소비의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 없는 그런 여행, 그것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를 알 수 없어서 한동안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작년 여름을 통째로 건너 뛰는 - 세째의 출산도 있었지만 - 까닭이기도 하였습니다. 


결국은, 소비하는 여행 이상을 누릴 수 있어야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다만 명소가 어디이고 맛집이 어디인지, 어떤 숙소에서 어떻게 소비하여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그런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곳이 지내온 삶을, 그 곳이 가지고 있는 속내를 읽을 수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찾는 곳은 누군가 살던 곳이고, 무언가를 하던 곳이며, 그러면서 생각과 생각이 맞닥뜨리던 그런 곳임을 발견할 수 있다면, 여행이 주는 감동은 소비 이상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런 여정을 보낼 수 있다면, 아마 다음에도 같은 장소를 한 번 더 찾을 수 있겠지요. 그 곳의 삶과 관계 속에, 그 곳을 지내온 나의 삶과 관계도 녹아들었기에, 조금 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 그 곳은, 나를 한 번 더 당겨들게 되겠지요. 조금 벅차더라도, 이런 책이 가지는 의미는, 우리의 삶을 조금 더 풍부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그런 역할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2.


이 책은, 도시로써의 서울, 농촌과 대비되는 장소의 의미를 가진 서울이 지내온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입니다. 책을 읽다가 '도시사'라는 학문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이 도시의 역사에 대한 책일 것이다, 라는 생각을 잠깐 했었는데, 마침 저자가 책 중간에 '도시사'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책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지내온 역사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 분명하여졌습니다. 그런 서울의 역사 중에서도 특히, 이 책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점, 그러나 근대로의 이행이 일제에 의해 좌절되어가던 시기인 '대한제국'기와, 1950년부터 1960년까지, 이행되지 못한 근대의 신기루를 뒤로 한 채, 탈근대 - 가져본 적 없는 시기라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 의 몸부림이 가시화되던 시기의 서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저자가 바라보는 서울은 '결핍의 공간'입니다. 


상식적으로는 도시(또는 서울)는 없는 게 없이 풍족한 공간이고 농촌(또는 시골)은 여러 가지가 부족한 빈곤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 상식은 물질의 총량에 대해서만 통용될 수 있을 뿐이다.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꼭 필요한 물질에 관한 한, 도시는 오히려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나 '결핍의 공간'이다. (중략) 앞에서 중세 도시의 크기를 규정한 여러 요인들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이 경제적으로 가치 없는 요소들의 부족을 극복할 수 있는 생산력적, 기술적 토대를 만들지 못했던 것도 도시 확장을 제약한 중요 배경이었다. (272~273쪽) 


도시는 스스로 생산할 수 없는, 소비 지향적인 공간이라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견해입니다. 따라서 도시는 '생산 자체보다는 그 생산물을 분배하고 관리하는데 더 많은 신경을 쓰는(128쪽)' 인류의 모습이 드러나는 공간이며, 도시는 그러한 인류의 모습을 '지표 위에 도로와 필지, 그 위에 우뚝 솟은 건조물'이라는 '관계망이 그려낸 그림(128쪽)'입니다. 풍부하나 빈약한, 넘치는 듯 하나 메마른, 그런 공간 중에서도, 특히 서울이라는 곳은 극장 하나, 공연장 하나 없는, 유교적 사상에 의해 계획적으로 조영된 그런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도시 서울, '그 안의 사람들과 밖의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24쪽)'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는, 그러나 실은 '농촌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섬(루이스 멈퍼드, 24~25쪽에서 재인용)'하는 외로운 공간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대의식이 사라진 도시(57쪽)'을 살면서 '공간과 장소를 공유해 본 경험을 갖지 못한 채(56쪽)', 2~3m앞의 간판들에 시야를 뺏겨버려 멀리 내다볼 수 없는 그런 근시안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경박성(188~189쪽)'을 한껏 드러내며 살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지도 못한 채, 혹은 그것을 특권으로 여기면서 '서울과 시골 사이에 시간적 장벽을 쌓아가는(101쪽)' 그런 삶을 자랑스레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골 사람이 서울에 자리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졌고, 서울 사람이 아주 낙향하는 일도 드물어졌다. (중략) 이제 부의 원천은 더 이상 농토에 국한되지 않았다. (중략) 노론이니 소론이니 남인이니 하여 학연으로 혼맥으로 끼리끼리 뭉친 서울의 대관 나리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못 하는 일이 벗었고 안 하는 짓이 없었다. 특히 시골의 인재를 빨아올리는 빨판 구실을 해왔던 과거제가 심각하게 망가졌다. (중략) 17세기 중반부터 서울 문체와 시골 문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의 경화 자제들은 시골 유생들이 배우기 어려운 새로운 문체를 배웠고, 출제자들은 그에 합당한 문제를 냈다. (중략) 경화거족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급제할 수 있는 길을 넓혀주었고(후략). (100~101쪽) 


요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보면 느끼게 되는 것이, 획일적인 것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고착된 서울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온 시골의 문화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디를 가도, 거기와 같은. 풍부한 듯 보이지만, 지나치게 부족하게 느껴지는. 


아마도 서울의 특징이라기보다는, '21세기의 문화(7쪽)'가 서울을 외피로 하여 만들어낸 모습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10년 전에는 그러지 않았으니, 21세기의 문화가 분명할 것입니다. 



3. 


이 책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과 저자의 견해를 곁들여, 조금 어려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정도전과 이방원의 서울에 대해, 압구정과 석파정의 서울에 대해, 양란 후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서울에 대해, 대한제국의 수도 서울에 대해, 5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서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서울을 장소로써 주목하기보다는,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삶에 관련된 서울을 주목하여 보는 편입니다. 특히 저자가 가장 주목하는 '인물'은 고종 황제입니다. 고종에 대한 역사적인 견해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대원군의 것보다 더 많을 듯 싶습니다. 보통 고종이라면, 대원군 혹은 민비 - 명성황후라고도 하는 - 와의 연계 속에서 고찰하는 시선도 많지만, 몇 년 전에 읽었던 [고종황제 역사 청문회] 같은 책에서 드러나는 조금은 긍정적인 시각도 일부 존재합니다. 


이 책에서도 저자는 고종에 대해서, 나약하고 의존적인 군주였다기보다는, 나름대로의 합리성과 확고한 통치 철학을 가진 군주로써 인식하고 있습니다. 다만, '공간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공간을 설계한 사람의 의도대로만 움직이지는 않는(181쪽)' 탓에 고종의 의도는 그 방향을 곧 잃어버리고 만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긴 하지만 말이죠.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아마도 천지가 개벽하는 것같은 급변의 시대에, 고종이 군주로서 자신의 의지를 오롯이 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4. 


이 책은, 서울의 '역사'를 '도시'의 역사 속에서, 농촌 - 시골 - 과의 관계 속에서 비교하고 있는 그런 책입니다. 장소적으로는, 경운궁(덕수궁), 종로, 청계천, 남대문시장 등을 언급하지만, 어디를 가기 위해서 읽어야하는 답사기 격의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서울을 사는 이로써, 서울에 대해서, 근대적 의미의 도시에 대해서, 거대한 위력을 휘두르는 메가시티로써의 서울에 대해서 조금은 관심있게 바라보고 싶은 분들이 읽을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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