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지는 아이들 - 내면의 야성을 살리는 길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지음, 오필선 옮김 / 민들레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특히 오늘날 어린 아이를 키우는 대다수 부모에게서는 상황을 실제 이상으로 위험하게 지각하는 현상이 매우 두드러진다. (중략) 공포를 지각한 부모는 겁에 질려 통제 모드로 돌변하고 아이들을 가까이 잡아두려 한다. 똑같은 지각이 육아에 관한 모든 결정에 침투해서 부모는 자녀가 병에 걸리거나 다치지는 않을까, 납치되거나 학대받지는 않을까, 학업에서 뒤쳐지거나 비행청소년이 되지 않을까, 그러다가 결국 실패한 어른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낸다. (301쪽) 

한 때, 아이들을 야외에 데리고 나가면 흙도 못 만지게, 나무도 풀도 못 만지게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병균과 세균이 우글우글거리는데,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저널을 읽다가, 적당히 더러운 환경에서 아이들이 자랄 때 면역력도 생길 수 있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과보호가 아이들의 면역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 이후로, 야외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면 아이들이 흙도 만지고, 모래도 만지고, 풀도 뜯어보고 - 너무 심하지 않은 정도에서 - 나무도 만져보고, 자유롭게 놔두고 있습니다. 고궁 같은 곳에 가면, 그래서 저희 부부는 건물 구경을 하고, 아이들은 흙놀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놀이터에를 가면 풀숲에 들어가서 풀을 뜯어다가 소꿉놀이를 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부모의 자녀 양육은, 특히 사회가 점차로 정보화 사회로 진전하고 있는 것에 비해, 무지의 영역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는 듯 싶습니다. 정보가 너무 많으니, 정보가 없느니만 못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죠. 뭐가 맞고 뭐가 틀린지 알 수 없는. 과잉의 사교육 투입 현상이 이러한 과도한 정보로 말미암은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는 주체요, 주인은 학생 자신인데, 그 과정을 결정하는 것은 부모인. 


그러나 대부분의 산업사회에서는 부모의 권위가 점차 약해지면서 "타자지향형 성격"이 두드러진다. (중략) 타자지향형 '부모'는 자녀에게서 인정받으려 하고 그 자녀 또한 부모에게서 인정받으려 하기 때문에 상황을 더욱 나빠진다. 이들에게는 내부지향형 부모가 누리던 육아의 자신감이 없고 자기 확신도 부족해 급기야는 동시대 타인과 참고서적, 대중매체를 지침으로 삼는다. 여기에 더해 수시로 쏟아지는 최신 양육법에 매달리지만 결국 양육법이 전수하는 기술적 내용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부모의 불안을 아이는 고스란히 받을 수 밖에 없다. (282쪽) 

결국 아이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지만, 그것이 아이들을 심정적으로 안전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현재의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인 셈이죠. 그것이 어린 시절의 과보호로 시작하여, 청소년기의 "심리사회적 유예기(284쪽)" 내내 아이들을 보호의 울타리 안에서 양육하다가, 갑작스런 성인식을 통하여 급작스럽게 어른이 되었음을 알리고 마는, 그러한 양육 방식이 일반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의 독서에 대해서 큰 우려를 가진 지가 꽤 되었습니다. 제가 책을 좋아하는 탓인지, 저희 아이들도 책읽기를 즐기는 편입니다. 그런데, 큰 아이는 만화로 된 책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와이' 시리즈를 비롯하여 역사 만화도 좋아하고 과학 만화도 좋아합니다. 그런 탓에 글로 된 책을 잘 안 읽으려고 합니다. 아이를 위해 사놓은 비룡소 세계문학전집이니, 창비의 창작동화 대표선집이니 모두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네요. 이런 아이의 독서 습관을 고치려고 얼마나 많은 고민과 갈등을 한지 모릅니다. 아이의 글읽기 수준을 위해서 말이죠. 그러나, 그냥 놔두기로 했습니다. 


아이의 선택을 믿고 존중해주기로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웬만하면 부모가 결정하는 것에 따릅니다. 언제까지냐하면 스무 살이 되기 직전까지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스무 살이 되면,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집니다. 혹은,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청소년같은 보호받는 삶을 살다가, 대학을 졸업하면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집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선택하는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지난 번 학부모 상담 때 오셔서는, 아이를 이제 학원에 보내서 중학교 선행을 시켜야겠다는 말씀을 하신 어머님이 계셨습니다. 그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자제분께서 1학기 1차 서술형평가 반 1등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살짝 당황하시더니, 그래도 중학교 수학이 어려운데 어느 정도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자제분께서 1학기 2차 서술형평가도 반에서 1등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크게 동요하시는 틈을 타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자제분의 역량을 믿고 있습니다. 어디에 가서도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어머니께서는 자녀에 대한 믿음이 크지 않으신가 봅니다' 결국 그 어머니는, 아이를 믿기로 하셨습니다. 학원 대신, 아이의 학습 역량을 믿어주기로 하신 것이죠. 


이 책에서는 부모가 아이들을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아이를 믿고 아이의 선택을 존중할 것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위험할 수도 있고, 때로는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자녀를 믿어주는 것이, 결국은 자녀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과 지내보니까,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그래도 마음과 마음을 통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겉에 껍데기를 두른 채 서로의 속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한 채,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또다른 나로 서로 대하는 것과는 달리, 아이들에게는 제 진심이 통하는 그런 것들을 경험합니다. 아이들은, 제 마음을 알아줍니다. 저도 아이들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믿음을 투영한다면, 아이들은 그 믿음대로 자라갈 것입니다. 조금은 서툴고 조금은 위태로와보여도. 솔직히 어른은 안 그렇습니까? 겉 껍데기가 워낙 단단해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른도 서툴고 위태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아이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른들도 그렇게 스마트폰, 카톡을 끼고 살면서, 어린이들에게는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요 잘못이다, 어린이에게 '너희는 하면 안돼'라고 이야기하려면, 어른 먼저 절제하고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야한다고 생각한다, 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아이들의 선택을 부모로써 존중해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선택지를 자주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희 아이들에게는 일주일에 2천원씩의 용돈을 줍니다. 그리고, 사용은 마음대로 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리지만 - 초 3, 초 1 - 아이들은 자꾸 이렇게 저렇게 써 보면서 어떻게 써야할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이들을 마트에 데리고 갔는데, 큰 아이가 핫팩이 사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네 용돈으로 사라고 했더니, 아이가 살펴보고 와서는 사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 사지 않냐고 물었더니, 핫팩이 5천 9백원인데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지 않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통해 제가 아이에게 선택권을 넘긴 것에 대한 효용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저희 아이가 더 나은 독서 습관을 스스로 가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놀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요즘 어린이들은 틀에 정해진 놀이만, 그것도 몇 가지 되지 않는 놀이만, 주로 매스미디어를 활용한 놀이만 주로 하고 있다는 우려를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어릴 때 얼마나 많은 다양한 놀이가 있었는지를 예로 들면서, 아이들이 자신들 스스로에 의한 다양하고 재미있는 독창적인 놀이를 회복해야 할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이 약간은 다릅니다. 매체의 발달은, 놀이 환경 자체의 변화를 가지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놀았으니, 너희도 이렇게 놀아라, 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아동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의 변화에 맞게 아이들의 놀이 습관도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의 매체 - 스마트폰, 컴퓨터 등의 - 를 통한 놀이를 제한하는 것에는 크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 스스로가 그 놀이를 선택했다면, 그 선택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컴퓨터 게임을 하려면 얼마든지 해도 좋다, 스마트폰이나 패드를 사용한 게임도 얼마든지 좋다, 그러나, 너무 많이 하면 눈이 나빠지는데, 눈이 나쁠 때의 불편함이 너무 크니까, 눈을 위해서 시간을 제한했으면 좋겠다, 고 말합니다. 아이들의 선택도 존중하면서, 아이들의 신체적 발달도 고려한 탁월한 아이디어라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 아이들은, 매일 컴퓨터 게임도 하고, 놀이도 하고, 보드게임도 하고 그러고 있습니다. 오늘 둘째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자기가 만든 놀이가 다섯 개 있다고 말이죠. 그리고 집에 와서 공깃돌로 언니랑 자기가 만들었다는 놀이를 하더군요. 아이들의 놀이는, 아이들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낸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부모는 아이의 선택을 믿고 존중하며 아이 스스로 자신의 놀이와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하겠지만, 교사는 아이들의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사는 아이들을 이끌고 앞장서야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다양한 선택을 꿈꿀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부모가 교사를 믿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사와 아이와 트러블이 있을 경우, 부모가 아이를 받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저 아이들과 자주 이야기하되 알코올, 우울증, 폭력에 대한 화제까지, 그 범위에 제한을 두지 말라고 권고한다. 아이들은 부모가 장황하게 교훈을 늘어놓지만 않는다면 부모의 생각을 기꺼이 듣고 싶어 한다. 부모가 어떤 정보라도 아이들과 나누려 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이 기댈 곳은 친구나 미디어밖에 없게 되고 마약 중개인에 의지하는 일도 벌어질 수 있다. (326쪽) 

작년에 학부모 한 분이 불시에 학교에 찾아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아이가 집에 와서 선생님 원망을 하더라, 그래서 혹시 아이가 선생님께 학교에서 무례하게 행동하거나 함부로 굴지는 않는지 걱정이 되어서 찾아왔다. 그 아이는 저희 반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행동하고 학습하는 아이 중에 하나였고, 늘 반듯하게 활동하는 아이어서 저도 좋아하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아이의 글쓰기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교정하여주었는데, 아마 아이가 그것 때문에 약간 속상했는지, 집에 가서 선생님 원망을 한 것이었죠. 저는 그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아이가 선생님 원망을 하면 받아주십시오, 아이가 학교에서 속상한 일이 있고 바깥에서 마음 상하는 일이 있을 때 돌아가야 할 곳은 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그런 아이의 서운한 마음을 받아주시지 않으면 아이들이 갈 곳이 없습니다, 저는 괜찮으니까 아이가 담임 선생님에 대한 속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면, 너무 과하게 맞장구만 치지 마시고 받아주시고 공감해 주십시오. 


부모가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합니다. 아이를 믿고,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여 주는 것. 그것이 아이를 위한 길이라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존중한 자녀가, 서울대, 고연대를 못가면 어떻게하죠? 아이들의 성공이 어느 대학을 가는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벌이를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아마 이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실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네가 대학에 가면, 이 아닌, 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이라고 말입니다. 대학에 가는 것도, 저는 아이의 선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제 아이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말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적어도 아이를 키우는 것은, 아이 스스로의 힘으로여야 한다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구 이야기 - 광물과 생물의 공진화로 푸는 지구의 역사 오파비니아 11
로버트 M. 헤이즌 지음, 김미선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 근래, 도서정가제 시행과 관련하여 많은 책을 사재기한(!) 바 있습니다. 그 와중에 가장 많이 구매한 책은 과학 관련 서적입니다. 마침, 수요가 많지 않은 과학 관련 여러 교양 서적들이 저렴하게 많이 판매되었고, 그래서 아낌없이 과학 관련 책들을 샀고, 그 원흉(!)이 된 책이, 년초에 읽었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와, 바로 이 책 [지구 이야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지구 이야기]는 공진화에 대한 책입니다. 보통 진화라고 하면 생물체의 진화만을 이야기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다채롭게 소개되는 생명체의 진화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광물의 진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지구가 생겨났다고 추측하는 46억년 전부터, 지구가 우주의 여러 자극들과, 지구 속의 여러 움직임을 통해 어떻게 지구를 구성하는 광물들이 변모해왔고, 그러한 변모를 통해 지구의 생명체와 대기에 영향을 끼쳤으므로, 결국 공진화 - 공동으로, 함께 진화하였다 -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죠. 몇 억년 전에, 대륙이 이동함에 따라, 갈라진 지각 틈에서 나온 여러 생물체의 필수 원소가 조류를 번성하게 만들었고, 그러한 조류의 번성과 죽음은 조류의 몸체 속에 있는 유기 탄소가 축적되는 결과를 불러 왔습니다. 그러한 조류의 번성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소비하였고, 지구가 온실 효과의 따뜻함을 누릴 수 없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죠. 따뜻함보다는 서늘함이 많은 지구가, 해저화산들의 저밀도 대양지각의 제조로 말미암은 해수면의 상승, 그리고 그로 인한 증발과 강우의 증가로 말미암은 암석의 풍화 속도 증가, 그리고 암석의 풍화로 인해 소비되는 이산화탄소로 인해, 지구는 더더욱 서늘해지고, 결국은 얼어붙게 되어버리는 일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생물의 번성과 쇠퇴, 그리고 대기 조성의 변화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지각의 움직임과, 광물의 변화 양상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가 이야기하는 강력한 생각입니다. 



책이 어렵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꽤나 많다는 것도 시인해야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5억년으로 추정되는 지구 전체의 역사를, 생명체를 중심으로 조망해왔던 지금까지의 흐름과는 다르게, 지구를 이루고 있는 광물의 변화 양상을 중심으로, 저자의 여러 개인적인 경험들을 섞어가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꽤나 흥미있게, 또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3십 몇 억년 전까지의 이야기의 고비만 넘긴다면, 그 다음부터는 술술 읽힐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들어왔던 지구 역사의 빈 구석을 조금 더 채운듯한 느낌을 받으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책을 잘 추천 받았습니다. 어떻게 구매하게 되었는지는 생각나질 않지만... - 보통은 '시사인' 서평을 보거나, 알라딘의 메인 페이지를 통해 책을 구매합니다 -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요 근래에 몇 안 되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번역자 후기가 독특했습니다. 보통은 의례적인 인사 또는 짧은 감상이 있는데, 이 책의 번역자는 이렇게 만들어진 - 졌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 지구에게 짓는 인간의 업보(...)에 대한 회한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지구에게 조금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 후기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촌방향 -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서울 최고古의 동네
설재우 지음 / 이덴슬리벨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은 것은, 구립도서관에서 이책 저책 뒤적거리다가 문득 제목이 눈에 밟힌 까닭입니다. 제가 서촌에 관심이 생긴 것은, 북촌/삼청동 때문이라고 해야할 듯 싶습니다. 경복궁 동편에 자리잡은 북촌과 삼청동. 언젠가 지인의 안내로 삼청동 정독도서관 앞을 다녀온 이후로, 북촌과 삼청동 쪽은 자주 찾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연스레, 경복궁 저쪽 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고, 무언가 저쪽 공간에도 볼만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에, [오래된 서울]이라는 책을 만났었습니다. 서울의 긴 역사를 담담하게 적은, 꽤나 볼만했던 그 책에, 서촌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덕택에 서촌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된 후, 이번에는 [서촌방향]이라는 책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래된 서울]과 [서촌방향]을 비교해보자면, [오래된 서울]이 지적이라면 [서촌방향]은 감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서울]은 서울의, 서촌의 600년 중에서 중요한 순간을 그 인물과 사건을 통해 전달해 줍니다. 그런데 비해 [서촌방향]은 서촌의 토박이로 30여년을 살아온 저자의 삶에 묻어있는 서촌을 보여줍니다. [오래된 서울]이 머리로 읽는 책이라면 [서촌방향]은 마음으로 읽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 [서촌방향]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첫 번째 장이었습니다. 첫 번째 장에는, 저자가 어린 시절 찍었던 서촌 배경의 사진을 현재의 모습과 비교하는 이벤트가 나옵니다. 배경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사진 속 찍힌 디테일과 현재의 디테일의 차이가 드러나는 모습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오버랩되도록 하는 작업을 책의 첫 장에 소개하였습니다. 

가끔 인터넷 서핑을 하다보면, 지금과는 영판 다른 모습의 옛날 사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여기가 이런 모습이었나?' 싶은 사진들을 보면서 오묘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찌보면 지금 나의 시절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확인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서촌방향]에서는 저자의 이런 작업들이 책의 첫 장에 굉장히 인상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제가 도서관에서 책의 첫 장을 눈으로 훑고는, '이 책은 빌려야하는 것이 아니라 사야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는 결국 사게된 것은 이러한 까닭 때문이 그 뒤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커피집에 앉아 책에 꼬박 집중한 한 시간 반 후 독서를 마치는 시점에서는, 살짝, '내가 이 책을 사야했었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독서자의 취향 탓이겠지만, 제게는 [오래된 서울] 같은 책이 더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촌방향]은 삶과 일에 대한, 먹을 것과 누릴 것에 대한, 시와 곳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멋진 사진들과 함께 짜임새있게 배치되어 있지만, 이것들이 독자의 공감대를 폭넓게 불러오기에는 저자의 주관적인 감정이 진하게 배어있는 편입니다. 

저는 저자의 서촌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걸음 정도 물러나서 이야기하였으면 좋았을 것을,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에 너무 가깝게 다가서 있습니다. 덕택에 몇몇 이야기에 대해서는 독자가 다가서기 어려울만큼, 독자와 이야깃거리 사이에 저자가 끼어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런 방향을 가진 책이 가지는 어려움이겠지요. 저자의 뜨거움이 너무 심한 나머지 저자가 소개해주는 대상이 열기에 일그러져보이는. 

대신에, 한 편으로는, 책에 쏙 빠져서 읽을 수 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하는 독서는 아니지만, 오랜만에 앉은 자리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실은 그런 책을 요즘에는 거의 읽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저자의 뜨거움이, 위의 언급한 이유 때문인, 약간의 거부감을 동반하여 독자에게도 옮겨붙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그만 다 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책을 읽은 후에는, 그런데, 마음은 조금 차가와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된 서울]은, 머릿 속에 이야기를 우겨넣은 후, 서촌으로 발걸음을 옮기도록 독자의 마음을 뜨겁게 데워주는 책이었습니다. [서촌방향]은 오히려 서촌에 대한 생각보다는, 저자에 대한 생각을 해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부러움이었다고 해야하겠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곳은, 송파 인근입니다. 롯데월드 옆 아파트로부터, 주택단지들을 전전하며 살아온 제 삶 속에, 과거와 현재의 공명이 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과거는 모두 사라져 그 흔적으로 찾을 수 없어 현재만 존재하나, 현재와 닮았으나 기괴한 모습으로 커져가는 미래만을 가진 곳. 저자에 대한 부러움은, 과거와 현재의 공존함 속에서,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이었습니다. 

이 책은, 서촌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서촌을 누린 사람의 이야기라고 해야겠습니다. 참 부러운 일입니다. 그런 곳에서 과거와 현재를 보냈다는 것은 말입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반양장)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교과서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

최근에 읽었던 경제 관련 책은 [맨큐의 경제학] 이었습니다.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아 아직 3분의 1 밖에는 읽지 않았지만... 대충 경제학에서 중요하게 말하는 개념과 아이디어, 한계 등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이야기들이 무엇인지는 알게 되었습니다. 

[맨큐의 경제학]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끊임없는 사고 실험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경제학적 개념이나 양상을 소개해야되다보니, 변인을 강력하게 통제하면서 굉장히 단순화된 상황을 주고는 그 안에서 관련된 경제학적 개념을 끌어내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기억에 남는 맨큐 교수의 이야기는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리카도의 비교 우위를 소개하는 장이었는데, 미국과 일본에서 농작물과 자동차만 생산 가능하다고 할 때, 미국은 농작물에 대해서 일본에 비해 비교우위를 가지니까 일본이 자동차를 생산하게 하고 미국이 농작물을 생산하도록 해야한다는 그런 예시였습니다. 과연 현실에서도 맨큐 교수는 그렇게 이야기할까요? 아마도 아니겠지요. 아마 이런저런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현실에서도 미국이 자동차를 생산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누가봐도... 미국이 농업 국가로 머물기보다는 제조업 중심의 국가가 되길 바랄테니까요. 

그렇다면 리카도가 이야기한 비교 우위론이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경제학 관련 책은 어떤 것을 읽어야 하는가. 그에 대한 답안 중에 하나가 - 어떤 분들에게는 정답지는 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라는 책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2. 

잘 알려진대로, 장하준 교수는 제도경제학자입니다. 물론 저는 경제학 문외한이라 제도경제학이 어떤 것인지 자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장하준 교수의 신작은 제도경제학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지향점은 분명하겠지만, 이 책에서는 가급적이면 여러 경제학적 관점에서 현상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혹자는, 예컨대 제도경제학자의 시선으로 신고전학파의 논리를 말한다는데에서 불분명한 관점만 제공되지 않겠냐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그렇게 다양한 시선을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책은 없었습니다. 많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심지어는 장하준 교수의 전작들도 관점은 명확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은 다양한 관점으로 경제학적 현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편으로, 책의 두께정도의 깊이만을 기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조금 더 두꺼웠다면, 조금 더 깊이 있는 서술을 기대할 수 있었겠지요? 대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접근성을 얻었습니다. 책은 쉽게 읽힙니다. 많은 숫자들을 가지고 와서, 꽤나 어려울 이야기들을, 그래도 쉽게 쉽게 써내려갑니다. 막상 독서를 끝내고 나면, 기억 속에 남는 것은 얼마 없지만, 어쨌든, 경제학 개념과 현상을 가깝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아니겠지요. 


3. 

다만, 이 책의 독자층이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모호한 측면이 있습니다. 저자인 장하준 교수는 이미 '진보적 경제학자'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습니다. 진보라는 의미의 적확함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대중에게 장하준 교수의 위치는 왼쪽입니다. 그런 가운데, 이 책을 '보수적'인 독자들이 찾을리는 만무합니다. 아니, 과연 일반 독자들이 이런 일반론적 경제학을 다룬 책을 읽으려고 할까요? 

결국 이 책은, 장하준 교수의 전작을 읽은, 그래도 자신의 경제 관점이 신고전주의적 관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읽게 될 책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타겟은 분명합니다.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아 경제학적 사유를 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경제 현상에 대해서 진보적 관점에서 바라보기를 원하는, 그런 독자에게는 의미있는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경제학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하고 있는 편이라, 혹여 신문의 경제란을 보면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지식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책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책은 쉽게 읽히는 편입니다. 


4. 책의 인상 깊었던 부분

보상 원칙 (...) 사회 변화로 혜택을 본 사람들의 이익 총합이 손해를 본 사람들에게 보상하고도 남을 정도로 크다면, 파레토 기준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그 사회는 개선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보상 원칙은 일부 구성원에게 피해를 입히더라도 그 피해를 완전히 보상해 줄 수 있는 변화는 지지함으로써,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파레토 기준에 따른 극단적 보수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론적 근걸르 마련해 주었다. 물론 문제는 실제로 이러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굉장히 드물다는 사실이다. (128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딱 떠오르는 부분은, 한미 FTA에서의 농업 부분과 제조업 중 자동차 부분에서의 협상 장면입니다. 농업 부분에 대해서 미국에 양보하더라도 자동차 부분에서 더 많은 수익을 거두면 국가 전체적으로 이익이다라고 했던 이야기는 바로 위의 보상 원칙에 대한 이야기이겠지요. 그런데, 과연 자동차 부분에서 거둔 이익이 어떻게 농업 부분의 손실을 만회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국가 정책적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듭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이라 부른다. 왜 그들에게 음식이 없는지를 몰으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 부른다." (341쪽)
지금 읽고 있는 책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자기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고 '밥 굶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어느 부모에게도 동일할 것이다. 이 가혹한 경쟁 구조를 고쳐서 치열한 교육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데, 실제로 많은 부모들이 그 구조를 유지시켜 자신의 부를 자식에게 물려주려 한다. - [병든 사회, 아픈 교육(조희연)] 중' 

결국 사회속에서 발생하는 격차에 대해서 구조적으로 접근하는 시선이 암묵적으로 거부되는 그런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점점 '위기의 감수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문제 상황의 해결을 개인이 하도록 등을 떠미는 사회의 모습이 점점 개인 간의 격차를 심화시키는 양상으로 드러나도록 하고 있습니다. 

헤크셰르-올린-새뮤얼슨 정리가 무역 자유화를 그토록 긍정적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은 모든 자본과 노동이 동일(전문 용어로는 '균질')하고, 따라서 어느 산업 활동으로든 쉽게 이동할 수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전문 용어로 말하면 생산 요소의 완벽한 이동성을 가정한 것이다. 
(앞부분) 그러나 현실에서는 보호 장치를 잃은 산업에 종사했던 대부분의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이 입은 피해는 복구할 수 없다. 생산 요소, 즉 자본과 노동은 그 물리적 성격이 고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중략) 제철소에서 일하다가 재훈련을 받고 반도체 산업으로 직종을 전환한 사람을 몇 명이나 보았는가?
무역 자유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저자는 노동의 유연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자유 무역을 통해 비교 우위에 놓인 산업이 자연스럽게 육성되고 반대편의 산업이 자연스럽게 도태되면서 국가는 무역 자유화를 통한 이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교 열위에 놓인 산업에 종사하던 자본가와 노동자가 비교 우위 산업으로 자신의 직을 옮길 수 있다면 국가가 가장 효율적인 산업 구조를 가지게 되겠지요.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겠냐는 것이 저자의 이야기입니다. 자유 무역이 불러올 사회적 비용 - 노동 유연화에 따르는 재사회화 비용, 직업 훈련, 실업 급여 등 - 에 대해서는 '잘 될 거야'라는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부터 벗어버려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망치를 쥔 사람은 모든 것을 못으로 본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문제를 특정 이론의 관점에서만 보면 특정 질문만 하게 되고, 특정한 각도에서만 답을 찾게 된다. 운이 좋아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가 '못'이라면 손에 쥔 '망치'가 안성맞춤의 도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양한 도구가 필요하다. (437쪽)
그래서 사람은 잡학다식해야합니다. 요즘들어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을 한 번 읽어볼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대로 된 번역본을 구할 수 있다면,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 - 한 정신 의학자의 정신병 산업에 대한 경고
앨런 프랜시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4년 전이었던 듯 싶습니다. 저는 교대 4학년이었고, 저희 집 밑에 사는 그 남자 어린이는 초등학교 2학년 생이었습니다. 그 남자 어린이는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친 후에 전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뭐, 당연하지만 개구장이였고 어른들에게 늘 혼나는, 눈치없이 행동하는 그런 어린이였습니다. 

전학을 오고 나서 한 달이 조금 넘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밑에 집 아이 엄마가 저희 집에 찾아왔습니다. 담임 선생님과 학부모 상담을 하고 왔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ADHD 검사를 받아보라고 말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ADHD 진단을 받아야겠냐고 묻더군요. 

당연히 저는 펄쩍 뛰었습니다. 

우선 남자 어린이의 발달과정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면 남자 아이들의 정신 사나운 면은 아이의 성장 과정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두 번째로, ADHD 진단을 받아 약을 먹는 어린이들을 보아온 결과, 혹여라도 ADHD의 진단과 약의 투여가 아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말하였습니다.

세 번째로, 아이가 전학온 지 한 달이 조금 지났기 때문에, 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으므로 조금 더 기다려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네 번째로, 선생님이 학교에서 아이를 편하게 다루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으신 것이라고 단정지어 말하였습니다. 학교 선생님이라면 ADHD 진단을 받아보라고 말하기 전에, 아이를 어떻게 케어할 것인지에 대한 교실에서의 대응 방안을 학부모에게 설명하는 것이, 전문가로서의 교사의 태도라고 말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어릴 때에는 ADHD 같은 것이 없었고, 그냥 산만한 아이들이 잔뜩 있었다는 옛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만해도, 어릴 때 생활통지표에는 '산만함'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했구요. '산만함'이라는 단어가 통지표에서 사라진 것인 중학교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되네요. 

밑에 집 아이 엄마는 제 말에 설득되어(!) 갔고, ADHD 검사는 받지 않는 것으로 했습니다. 그 아이는 지금 초등학교 5학년이고, 당연히 ADHD 증세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 때 그 일이 있고 나서, 저는 경험적으로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경험적이라는 것은 언제나 오답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제 생각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를 바랬고, 이번에 읽은 책인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은 제 생각이 그렇게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해주는 독서가 되었습니다. 


2. 

저자인 앨런 프랜시스는 미국의 정신과 의사입니다. 정신 질환을 진단하는 기준이 되는 '정신장애 진단 통계편람(DSM)'의 3판에 참여하였고, 4판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유명한 의사라고 합니다. 물론 그 유명함을 제가 확인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DSM은 미국에서 정신병을 진단할 때 주로 참고하는 색인 역할을 한다고 하니, 저자가 미국 정신의학 분야에서 꽤나 의미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런 저자가, 새로운 DSM-5의 출간을 우려섞인 시선으로 비판하는 책을 출간하였고, 그것이 바로 이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저자의 비판은 다음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진단 인플레이션

저자는 자신이 참여한 DSM-3부터 그러한 진단 인플레이션을 막기 어려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신 의학자들은 욕심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척 보면 탁하고 정신병을 진단할 수 있는 색인 목록을 만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례를 모으고 병의 양상을 모으고 처방을 모아서 '기준에 기반한 진단법'을 하나의 편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 의학 분야는, 저자의 말로는, 어떤 분명한 치료법을 가진 분야가 아니라고 합니다. 내과나 외과처럼 눈에 보이는 증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 의학 분야에서는 분명한 정신병의 원인을 찾아내기도, 그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처방하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정신병의 원인은 백인백색이라는 말입니다. 자라온 환경과, 인간 관계의 맥락과, 겪은 일들이 다 다르기 때문에 원인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정신병의 진단과 처방에서 중요한 요소로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상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병에 대한 '진단은 완전한 평가의 한 부분으로만 그쳐야 하는데도 이제 평가를 지배하게 되(117쪽)'어버린 일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의사들 - 특히 1차 진료기관의, 정신 의학을 전공하지 않은 - 은 편람을 참고하여 짧은 시간 - 책에서는 평균 7분이라고 말하고 있네요 - 이야기를 나눈 후, 뇌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정확하게 모르는 여러 항우울제, 신경약제를 처방해버리고, 그 약을 처방받은 환자들은 계속되는 약의 복용으로 심신이 망가져버리는 일이 발생한다고 저자는 꼬집고 있습니다. 

이런 진단 인플레이션에 불길을 끼얹은 것은 제약회사라고 저자는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약을 팔아 수익을 내야하는 제약회사가, 정신 의학 분야에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으며, 그것이 약의 오남용으로 번지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특히, 10대 청소년들이 이러한 진단 인플레이션의 최대 피해자가 되고 있음을 저자는 안타까와하고 있습니다.
 
십대는 낮선 나라의 낮선 사람처럼 보인다. 아니면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처럼 보인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신하는 과정에는 혼란스러운 사건이 너무나 많이, 너무나 빠르게 벌어진다. 신체적 변화, 성적 성숙, 새로운 역할,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감정, 새로운 관계, 새로운 책임, 새로운 자유, 새로운 유혹. 세상을 새롭게 마주하는 십대는 어른들이 뻔히 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심란한 질문들을 던진다. 십대는 인생의 의미와 우주의 신비를 고민하고 종종 그것을 추상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여, 다음번 주택 할부금을 걱정하느라 바쁜 부모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십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편하게 느끼지 못한다. 십대가 스스로 느끼는 정체성은 연약하고,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다. 존재론적 두려움, 기묘한 환상, 극단적인 감정, 근들거리는 자존감, 괴상한 옷차림, 일탈 행동이 넘친다. 쉼 없이 비디오게임을 하고, 음악, 영화, 취미 취향이 밉살스러울 때가 많다. 십대는 자신이 구박, 모욕, 따돌림, 오해를 받는다고 여기기 쉽다. 그들은 도움이 필요하지만, 도움을 거부한다. 친절한 관심을 적대적 간섭으로 오해한다. 부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랑스러웠던 자식을 더는 이해할 수 없어서 당황하고, 최악의 미래를 상상한다. (중략)
좋은 소식은, 십대라는 경험이 보통 자기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질병이라는 것이다. 혼란을 겪은 십대라도 대부분은 정상적인 어른으로 자란다. (291~293쪽)
어른들의 시선에, 10대는 무언가 문제가 있어 보이고, 저러면 안 될 듯 걱정하고, 근심과 갈등을 일삼다가 아이들을 어른의 잣대로 진단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실은, 어른들도 그런 10대의 시절을 보냈으면서도, 아이들의 그런 모습은 도무지 용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진단 인플레이션은 10대를 강하게 덮치고 있는 중입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학교 현장에서도 부쩍 많아진 질병들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너무나 쉽게 아이들을 ADHD로, 자폐로, 양극성 장애로 결론내리는 모습이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물론 시대가 변했긴 하지만, 30년 전, 제가 학교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만 해도, 조금 산만하고, 말썽부리고, 개구장이라는 평을 받았던 친구들이, 아마 지금 이 시대로 왔으면, 분명히 여러 진단명을 달고 학교 안에서 생활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제 친구들이, 만약에 지금 이 시대에서 초등학교 학생으로 생활한다면 심한 경우 약을 처방받고 하루 종일 맥없이 교실에 앉아 수업에 참여하는 둥 마는 둥 그러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굉장히 심각한 일입니다. 


2'

저자는 자신의 이런 견해가, 어떤 사람들에 의하여 함부로 사용되길 바라진 않고 있습니다. 즉, 그러한 정신병에 대한 진단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오용입니다. 

저자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조기 확인과 치료'를 통해, 정신적 어려움을 안고 힘들게 살아갈 수도 있는 이들의 짐을 덜어두는 것은 정신 의학의 기본적인 방향이라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 '진단 인플레이션'을 통한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병명의 남발은 위험하다는 것이 저자의 확고한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미덕은, 책의 말미에 나온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확하지 않은 진단 때문에 고통받은 사례 및 적절한 상담과 투약으로 자신의 짐을 덜어낸 사례를 통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도록 진단하고 처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저자는 독자들이 염두에 두면 좋을 지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요약하자면, 의사와 상담하되 여러 차례에 걸쳐서, 여러 의사와 하면 좋으며, 진단과 처방에 앞선 길고 따뜻한 상담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전문가가 되어 자신의 증상에 대해서 섣부른 자가 진단을 내려서도 안되지만, 의사의 처방을 스스로 살펴보고 분석하려는 태도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상 증세에 대해서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연이 치유력을 발휘할 시간을 주고' 그것을 위해서 뻔히 도움이 되는 활동 - 충분한 운동과 수면, 좋아하는 일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등 - 을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3.

이 책의 영어 제목은 Saving Normal 입니다. 정상을 구하는 것. 책의 첫머리는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상은 비정상이 아닌 것이며, 비정상은 정상이 아닌 것이라는, 그런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정의가 없는 상황에서, 계속 정상이 비정상에 의해 침식당하는 상황을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결국, 이 책을 읽어야 할 이들은 책임있는 진단을 수행해야 할 정신 의학 분야 종사자 및 제약업계 관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진단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한, 무지의 올무에 걸린 우리들은 언제라도 비정상의 경계선 안으로 깊숙이 빠져들어갈 위험이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한 편, 기왕에 이 책을 읽은 일반 - normal? - 인들은, 조금 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금 더 편하게, 조금 더 자신에 대해서 여유있게...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4. 인상깊었던 부분들

정신 장애는 증상의 표출이 선명하고, 극심하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만 진단해야 한다. 일상의 문제를 다루는 최선의 방법은 문제를 직접 해결하거나 문제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지, 정신 장애 진단으로 질병화하거나 약물로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 약품 처방에 성급하게 의존했다가는 우리의 자연적 치유력이,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 회복의 경로들이 단절된다. 가령 가족과 친구와 공동체에게 지원을 구하는 것, 인생에 필요한 변화를 가하고 지나친 스트레스를 내려놓는 것, 취미나 흥미, 운동, 휴식, 기분 전환, 속도 조절을 추구하는 것 등등. 스스로 문제를 극복하면 상황이 정상화되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게 되고,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과 가까워진다. 반면에 약을 먹으면, 설령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어쨌든 남들과 다른 사람, 아픈 사람이 되어 버린다. 진정한 정신 장애를 겪는 사람은 약품 처방을 받아야만 항상성을 되찾을 수 있지만, 일상적인 문제를 겪는 사람에게는 처방이 항상성을 훼방할 뿐이다. (69쪽)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는 부분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을 잃고 슬픔에 빠져버린 사람에게 우울증 진단을 하고 약을 처방하는 것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이 물론 크지만... 그런 슬픔과 어려움은 실은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고, 이겨낼 수 있는 그런 류의 것입니다. 물론, 이길 수 없는 슬픔이 몰려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야말로 의학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문제는 너무 쉽게 우울증 진단이 남용되고 있는 미국의 현실에 대한 저자의 비판이 잘 드러난 부분입니다. 

약으로 최고의 결과를 얻는 방법이 뭔가 하면, 사실은 그 약이 필요 없는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나았을 것 같은 사람들이 최고의 플라세보 반응률을 보이기 때문이다. (중략) 볼테르의 말을 빌리자면, 가끔 의학은 자연이 병을 치료하는 동안 환자를 기쁘게 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161쪽)
플라시보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끔, 사람에게는 정신적인 만족이 육체적인 회복을 거두게 하는 부분도 있을테니까요. 감기에 대한 격언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감기약을 먹으면 7일만에 낫고, 감기약을 먹지 않으면 1주일 뒤에 낫는다'는. 물론 감기약이 플라시보는 아니겠지요. 먹으면 증세를 완화시키면서 조금은 덜 힘들게 해주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약을 먹고 나면 꼭 괜찮아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도 있잖습니까?

그러나, 정신병에서의 플라시보는 좋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플라세보 효과가 일으키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기는 하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증상에 대해서 사실은 필요하지 않은, 게다가 가끔은 해로운 약을 비싼 돈을 주고 계속 사 먹는다는 것이다. (156~157쪽)' 정신병에 쓰이는 약이 가지고 있는 부작용과 해로움은, 아마 감기약이 가지고 있는 부작용과 해로움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가 되겠지요. 먹지 않아도 나을 수 있다면, 정신적 어려움은 먹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주의력 결핍 장애가 날뛰다 (214쪽 이하)
미국에서도 ADHD의 과진단이 문제가 되고 있는 듯 합니다. ADHD에 대해 저자는 6쪽에 걸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증상은 일시적일 때도 많다. 가족, 또래 집단,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성 증상인 경우이다. 아이가 덜 성숙해서 그럴 때도 있다. 물질 남용이나 다른 정신 장애가 문제일 때도 있으므로, 그 경우에는 관찰 기간 동안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문제가 지속적이지만 손상이 심각하지 않다면, 다음 단계는 교육이나 심리 치료를 지향해야 한다. 확실한 진단과 투약이라는 최후의 단계는 이전 단계들에서 적절히 반응하지 않은 아이에게만 쓰도록 미뤄야 한다. (중략) 서둘러 진단하고 무신경하게 약을 처방하라는 제약 회사의 메시지가 논의를 압도하여, 그저 덜 자란 정상적인 아이들을 조기부터 약을 복용하는 정신 질환자로 바꾸고 있다. (219쪽)'

참... 첫 머리에 제가 겪은 사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참 화가 납니다. 멀쩡한 초등학교 2학년 짜리 남자 어린이를, 1달 조금 넘는 기간동안 겪어본 교사가,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라면 뻔히 그 결과가 예상되는, ADHD 진단을 받아보라는 말을, 학부모에게 쉽게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제가 교사라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라도 진단과 투약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할 것입니다. 진단과 투약은 아이를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스스로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낙인찍어버리는 그런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5. 정신 의학과 사교육

정신 장애에 관한 한, 지금은 최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다. 왜 최선인가 하면, 효과적인 치료법과 실력 있는 의사가 많기 때문이다. 왜 최악인가 하면, 치료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과잉 치료를 받고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치료를 못 받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실력 없는 의사가 부정확한 진단과 부적절한 치료를 제공하는 경우도 너무 많다. 여러분은 우리의 정신 보건 체계가 자동적으로 여러분에게 유효한 보살핌을 제공하리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좋은 선택지와 나쁜 선택지가 마구 섞여 제공되며, 체계 자체도 잘 조직된 상태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중략)
그렇다면 기회와 위험이 결합된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똑똑하고 정보를 많이 아는 소비자들이 으례 갖춘 회의적인 태도, 이른바 '구매자 경각심'을 권하고 싶다. 치료를 시작할 때 여러분은 자동차나 집을 살 때, 혹은 친구나 배우자를 고를 때와 똑같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중략) 절대 함부로, 혹은 수동적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333~334쪽)
위 인용부분에서, '정신 장애', '정신 보건 쳬계' 등의 단어에 '사교육'이라는 단어를 넣어 읽으면, 묘하게 우리나라의 현실과 오버랩됩니다. 

우리나라도, 실은 지금 사교육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으니까요. 사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학생은 과잉 사교육을 받고, 사교육이 필요한 학생은 사교육을 못 받는 사례가 저희 반 안에도 있으니까요. 사교육의 좋은 선택지와 나쁜 선택지가 마구 섞여 제공되고 있으며, 사교육 체계 자체도 잘 조직되었다고 보기 어려우니까요. 

그러면서, 사교육을 선택할 때에는 함부로, 수동적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지요. 아이의 이상 행동 - 점수가 조금 떨어지면 - 에 즉각 학원을 옮기는 것으로 반응하는 학부모가, 아직도 꽤나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옮기는 학원이나 과외가 오랜 고민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십 수년동안 과외를 하면서 늘상 겪었던 일이니까요. 

이 책에는 우리나라의 사교육이 처한 문제의 본질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언급이 많습니다. 현상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교육을 고민해야하는 공교육 교사로서,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는 독서가 되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