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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VS 철학 -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철학 대 철학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시사인]이던가 [한겨레21]이던가 - 아니면 둘 다 이던가 - 에서 서평을 통해 만나보고 나서는, 학교 도서관에서 잡고 한 3분의 1정도를 읽었더랬습니다. 마침 한창 바쁘던 4학년 1학기 시기인터라 책을 더 이상 진행시키지 못하다가, 요즘 잉여 생활 와중에 다시 책을 잡아 한 달여 정도 걸려 다 읽어 내었습니다. 



900쪽이 살짝 넘는 책의 분량, 그리고 자그마치 112명 (플러스 알파)의 동/서양 철학자들이 맞부닥치는 책의 구성, 그리고 의외로 읽기에 나쁘지 않은 저자의 필력 등이 잘 어우러져서 책을 편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책의 저자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러셀이 [서양철학사]라는 제목으로 책을 쓰기 이전만 해도, 보통 '철학사'라고 하면 서양 철학사를 일컬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두 번째 대학교 시절에 '법철학회'라는 학회에 몸담으면서 [철학과 굴뚝 청소부]라던지, 아니면 [철학 A반을 위한 philasophy] 혹은 [소피의 세계]를 읽으면서 가졌던 편견은 당연히, '철학사는 서양 철학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사실 편견이라고 하기도 뭣한 것이, 동양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할만한 학문적 고찰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인터라, 동양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여지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철학사는 서양 철학사다, 라는 인식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 [철학VS철학 (이하, VS)]의 가장 주목할 부분은, 전체 56장의 챕터 중에서 동양 철학의 사유 부분에 전체의 절반인 28장을 할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퇴계 선생과 고봉 선생의 논쟁부터,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백가쟁명 시대의 다양한 주장들을 아우르는 저자의 폭넓음은 경이로운바 있습니다. 여담으로, 저와 고작 7살 차이밖에 나질 않는데, 폭넓게 인용하면서 다양하게 주장하는 것은 저자의 그동안의 학문적 고민과 성찰을 엿볼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VS]와 같은 책에서 독자가 가장 주의하여야 할 점은, 저자의 관점이 강력하게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이러한 책의 독서에서, 저자와의 적절한 거리감을 두면서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장 속에서 독자가 나름대로의 생각을 열매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할 독서의 목적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책은, 타겟으로 삼는 독자군이 애매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원전을 상당부분 저자의 주관적 관점을 통해 압축한 후에 그것을 통해 저자의 주장을 강화하는 요소로 삼는 이러한 책에서, 철학에 입문하는 독자라면 원전의 텍스트는 놓친 채 저자의 해석을 마치 원전의 그것인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게 되고,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깊이를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이런 책이 넓으나 깊지 않아 독서가 형식적이 될 가능성이 상당하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런 책은 저같은 애매한 - 철학에 관심은 있으나 깊이 있게 아는 것은 아닌데다가, 계열성을 구축하지도 못해 사유를 조각모음해야 할 필요가 있는 - 독자에게 적절한 부분이 있는 책입니다. 게다가 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펼치기 위해 원전을 함부로 인용한다면 자칫 역사적 사유가 아닌, 저자의 사유를 받아들여 치환시켜 버릴 우려도 다분합니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애매한 독자인 제가 보기에, 인용이 적절했고, 저자가 욕심부리지 않고 가장 일반적인 철학자의 주장(?!)을 담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느껴졌다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자는 두 철학자의 주요한 주장을 하나의 챕터 속에서 VS 형식으로 대립시키면서 두 철학자의 주장을 선명하게 대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노력은 상당부분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철학자들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저자는 철학자들의 텍스트 중에서 아주 극소수의 일부 - 한 문단 정도? 많으면 두 문단 정도 - 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용이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으며, 텍스트가 어려울 경우에는 적절한 해석을 통해 철학자의 주장을 설명하고 있기까지 하므로 철학자들의 다양한 생각에 더 가까와질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책의 절반을 동양 철학의 사유를 설명하고, 서양 철학의 사유와 연게성을 부여함으로써, 서로간의 연결을 통한 이해의 확장을 돕고 있으며, 가깝지만 먼 유학이나 불교, 선종 또는 교종의 주된 흐름을 놓치지 않고 연결짓고 있는 것에서 동양적 사유를 풍성하게 만들려고 하는 시도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VS]를 읽은 후에 펑유란의 [중국 철학사]를 꼭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책의 부록에는 주요한 철학자와 철학적 개념어 사전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또한 유의미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책의 말미의 부록을 읽으면서 책 전체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철학이라는 학문은 참 어려운 학문임에 분명합니다. 철학은 내가 나를 만나는 과정에 대한 사유이며, 내가 남을 대하는 양상을 통한 사유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깊고도 넓은 철학적 사유를 하나하나의 원전을 읽기에는 어려움이 있는터라, 우리는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 정리된 사유를 만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강신주 교수의 이 책 [VS]는 독특한 시도를 통해 동/서양의 다양한 철학자들이 맞닥뜨릴 수 있는 공간을 제시하였고, 그러한 마주침을 통해 넓이 있는 사유를 이끌어 내었으며, 깊이 있는 사유를 욕망하도록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조금 더 원전을 접하면서, 나름대로의 철학적 사유를 구축한 연후에, 저자의 이 책을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으며,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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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적 찐따 2014-12-22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 잘 읽었습니다!
철학에서 ˝애매하다˝라는 말을 저렇게 쓰시면 안 됩니다 :-)
어떤 술어가 적용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나누는 기준이 부재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

참고: http://textexture.tistory.com/21

하리야헌처크 2014-12-28 23:5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방문 감사합니다. (꾸벅)

알려주신 부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D 정확한 표현을 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꾸벅)
 
핀란드 역으로 - 역사를 쓴 사람들, 역사를 실천한 사람들에 관한 탐구
에드먼드 윌슨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매진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시사IN 의 소개로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책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는,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이야기 한 바, 사상, 그들의 믿음 등등등.
 
사실 지금 시대에 맑스/레닌주의는 큰 반향을 일으키는 화제는 아니죠. 구소련의 몰락과, 중국의 흑묘백묘론, 그리고 북한의 주체사상 등... 본원적인 맑스주의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편린만 들여다 보았을 뿐, 실제로 맑스/레닌주의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소개받을 기회는 없었습니다.
 
맑스/엥겔스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역시 '자본'을 읽는게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걸 바로 접하기엔 부담스러운 나머지 한다리 거쳐가려고 잡았던 책이, 리라이팅 클래식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 그리고 이 책입니다. 이진경 氏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은 결국 읽다가 접었는데, 내용의 난해함 때문이 아니라 문체의 짜증남 때문이었습니다. 적확한 표현이 아닌, 설의적인 - ... 이지 않을까? ... 라고 할 수 있지 않나? 등의 - 표현의 남발 탓에 내용에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어서였죠. 결국 다 읽게 되겠지만, 그래도 비추천하고 싶고... 그 책을 중간에 접고나서, 우연히 이 책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핀란드 역으로' 이책은 본격적으로 맑스주의와 레닌주의를 소개하고 있는 책은 아닙니다. 기대했던 바와는 달랐던 것이죠. 작가인 에드먼드 윌슨은 저널리스트라고 합니다. 저널리스트답다고 해야하나요? 번역 탓일 수도 있겠지만. 문체가 건조합니다. 입안 가득 기름을 넣고 있다가 삼키는 느낌 같은 거에요. 맑스주의를 독일사상 - 특히 헤겔 - 과 연관하여 서술하고 있고, 맑스주의를 비평하고 있죠. 그래서 아무래도 맑스와 엥겔스 본연의 모습보다는 마치 색안경을 쓰고 보는 세계처럼 작가의 생각으로 평가된 맑스와 엥겔스를 보게 됩니다. 뭐 이런 부류의 책은 그런게 당연하겠지만, 이 책은 저널리스트 작가의 책답게 더합니다. 맑스의 본모습이 잘 안보인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제가 맑스의 본모습을 보지 못한 처지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의 느낌은 알 수 있잖습니까?
 
그래서 이 책은, 맑스와 엥겔스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추천해드리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의 본연을 알고 계신 분들이, 아, 이렇게 맑스와 엥겔스를 읽을 수 있구나, 라는 느낌을 받고 싶으실 때 좋은 책일 듯 합니다.
 
게다가, 레닌에 대해서는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 갔을 뿐이지, 맑스주의가 레닌에 이르러 어떻게 구체화되는지에 대한 소개는 좀 박약합니다. 역자의 말처럼, 작가는 맑스와 엥겔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책은 1917년 3월 혁명의 초입에서 마무리됩니다. 맑스를 구현한 소비에트 연방의 모습까지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역사를 변혁하는 그 가슴뜀은 느낄 수 있습니다. 역자도, 이후의 역사는 독자의 몫이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천가가 아닌 사유자인 저의 입장에서는 사유의 거리가 하나 줄었다는데 대한 아쉬움을 가질 수 밖에 없네요.
 
 
그러나, 책은, 초기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와 그들에게 영향을 끼친 프랑스대혁명, 그리고 19세기의 국제인터내셔널과 관련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맑스와 엥겔스를 책이 아닌, 실제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구요. 맑스주의가 맑스와 엥겔스에게는 어떤 의미였는지 보여준다고 할까요? 덕택에 본연에 대한 이해는 빈약하지만, 본연을 둘러싼 삶에 대한 이야기는 풍성합니다.
 
게다가, 역자의 몫이었겠지만, 책에서 인용되는 많은 저작들이, 국내에 번역되어있는 경우라면, 친절하게 각주되어있어서,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에 접근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의외의 서비스(!)에 정말 감동했고, 각주에 언급된 책 중에 꼭 읽어봐야겠다고 체크해둔 책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넘기기 빡빡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의 팍팍한 삶에 경제적인 접근을 이루어낸 19세기와 20세기 초엽의 이론가와 행동가들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 자본주의가 보여주는 양극화 현상과 노동자/농민에 대한 과도한 착취(!)가 주는 현대적 의미에 대해 짧게나마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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