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자 수확자 시리즈 1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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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후로 넘어서는 문턱을 건너고 나면, 인간성은 사라지고 경박성의 시대,

유희와 조롱의 시대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행해지는 모든 것이 조금의 의미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뱅상 데콩브(Vicent Descombes), Modern French PhilosophyP31에서

 

 

인간의 모든 질문은 결국 하나의 궁극(窮極)으로 향한다. 사실 죽음에 대한 알 수 없음, 그 두려움이라는 생()의 한계가 부여하는 간절함이 인간 문명의 동력으로 작동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 무능력을 떨쳐내기 위해, 그 궁극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내기 위해 몸부림친다. 사실 이 장광설은 케케묵은 얘기이겠지만 오랫동안 반복하며 집요하게 묻는 이유는 납득할 만한 답변이 여전히 없기 때문이다. 즉 인간 그 누구도 필멸(必滅)을 피해 갈 수 없는 까닭이다.

 

닐 셔스터먼의 이 소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죽음이 해결된 세상의 이야기다. 소설의 배경은 타자에 의한 사고와 사건에 의한 죽음, 그리고 자살과 자연사()가 만연하던 사망 시대는 종결되고 누구도 죽지 않는 시대다. 초지능 선더헤드가 지구 모든 지역의 국가행정체제를 해산하고 인간 세계를 통제하는 유일한 존재가 된 세계다. 이제 거의 모든 것이 알려져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인간에게 고통, 질병, 노화, 죽음은 없다. 체내 나노봇에 의한 치유와 치료, 재생술로 아무도 죽지 않는다. 선더헤드에 의한 직업과 부의 배분이 평등하고 풍부하게 이루어지는 쾌적한 세계, 새롭게 쫓을 물음이 없는 세계이다. 프랑스 철학자 뱅상 데콩브의 말처럼 모든 것이 조금의 의미도 갖지 못하는 세계이다.


앎의 영역이 제아무리 정복될지라도 인간 본성이 암약할 수 있는 지대가 존재한다면 인간은 항시 예외와 위계 구조를 만들어 내는 종()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의미를 잃어버리면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책의 표지 그림인 낫(scythe)을 든 낯선 복식을 한 인간, 이들이 바로 예외의 존재자이다. 한정된 지구라는 공간의 불사(不死)의 존재들이 된 인구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기 위해 인간의 목숨을 거둘 수 있는, 합법적 재량이 주어진 유일한 존재자. ‘수확자라 부른다.

 


죽인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이삭을 줍듯 인간의 목숨을 거두어들이는, 즉 수확하는 것이다. 인류의 쾌적한 공존을 위하여 수확자는 중요한 사회적 봉사자로서 성스러운 임무로 이해하도록 교육된다. 문명의 성장은 완료되었고, 인간 존재에 대해 더 해독할 것이 없으니 어느 누구도 다른 인간보다 더 중요할 이유가 없는 세계, 그러니 모두 똑같이 쓸모없는 존재일 뿐이다. 이제 변화는 없다. 아이러니는 죽음을 완전히 이긴 세계인데 여전히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 세계라는 점이다.  수확자는 바로 이 죽음을 독점한 자들이며, 죽음의 유일한 배급자다.”

 

이것이 이 작품의 근간이다. 수확자들은 인구에 비례하여 우월한 도덕성과 인간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연민을 지닌 인간을 선택하여 오랜 수습훈련 기간을 통해 수확자들의 연례회의인 콘클라베에서 최종 선정된다. 소설의 서사구조를 빼 놓을 수 없겠다. 시간적 진행방식의 물 흐르듯한 통상적 이야기 서술방식에 더해, <수확 일기>라는 수확자가 의무적으로 매일 기록하게 되어있는 수확자의 일기가 자칫 가벼워 질 수 있는 담론에 진중한 철학적 무게를 부여하며 소설의 서사에 균형을 잡는다.

 

인간의 생명을 거두는 일에 대한 고뇌, 이를테면 고결한 수확자인 퀴리는 때로 내 직업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지면, 나는 죽음을 정복하면서 잃어버린 모든 것을 애도한다.”고 쓴다. 이와 달리 거둘 수 있는 생명의 수량을 배당하는 한계에 대해 반감을 표현하는 수확자의 일기도 있다. 독자는 생명을 거두는 이들의 성향에 매혹되어 다시금 인간이란, 인간성이란 대체 무엇인지의 세계 속으로 침잠하게 된다. 수확자 시리즈의 첫 편인 이 작품은 세계의 법령이자 인간 행동의 주제자인 선더헤드의 통제 예외지대인 수확령에 시선을 맞추고 있다. 선더헤드는 인류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힐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순수한 정의, 순수한 헌신의 존재로서 인류를 위해 일하는 지성체다. 이러한 존재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영위되는 지대가 수확령이다.

 

수확자는 여느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 단지 도덕성과 공감 능력에 의해 수확자라는 인간들에 의해 선발된 인간일 뿐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타인의 생명을 거두는 독점적 권한이 부여되었으며. 또한 이들에게는 죽음 면제권도 있다. 타인의 생사여탈(生死與奪)을 관장하는 그야말로 신이 사라진 시대의 신이다. 이런 존재들이 지녀야 할 도덕성이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까? 인간의 역사는 인간들이 사회체를 만들면 항상 위계구조를 우선 만들어낸다고 한다. 위계구조란 구성원에 수직적 계급이 주어지고 이에따른 권력이 동반된다. 또한 인간들의 모임이란 너절한 자기 이익을 위한 논쟁을 벌이고 세력을 키우며, 권력을 향한 암투가 전부이기도 하다. 아마 이러한 인간성의 적나라함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펼쳐지기에 익숙한 인간적 실상임에도 그 낯익음 때문에 더욱 이야기는 독자의 정신을 휘어 잡는다.

 

살해하기를 극도로 혐오하며 싫어하는 인간만이 수확자의 기본적 자질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모순을 떠안고 있다. 타인을 규칙적으로 할당량의 범위 내에서 죽여야 하는 수확자가 그 일을 싫어해야만 한다는 가치의 충돌, 아마 고결함이란 이러한 해결 불가능함을 극복할 수 있는 도덕적 신념에 대한 곤혹스러움의 표현일 것이다.   ‘시트라로언이라는 열여섯 살 아이들은 페러데이라는 수확자의 지목에 의해 수습생이 된다. 생명을 거두어야 하는 대상을 선정하는 일부터 그 대상을 수확하는 구체적 도구와 방법까지 도덕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또한 수확하는 일이 권력의 행사이거나 살해의 즐거움, 쾌락적 이벤트로 변질되지 않도록 자기성찰에 철저함을 실천하는 일을 배운다.

 

시트라와 로언은 일 년의 수습 기간동안 연간 세 번 개최되는 수확자들의 회의인 콘클라베에 참여하여 테스트를 받게 된다. 수많은 수확자들 앞에서 일종의 자질 검정을 받는 것이다. 생명을 거두는 일의 신성함, 그 지엄한 도덕적 요구에 대해 이러한 도덕은 사망시대에 지닌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보수적 퇴행이라 비난하는 일군의 수확자 무리가 있다. 이를 대표하는 고더드 라는 수확자는 주장한다.   수확은 상징적이어야 한다. ...필멸성에 메어두기 위해서,  지금 가장 숭고한 소명이 한때는 범죄로 여겨졌다는 사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라며 인간 살해에 도덕적 기준을 들이미는 것을 위선이라 조롱한다.

 

페러데이와 고더드는 수확자의 소명에 대해 이처럼 대척점에 서 있다. 고더드는 수확행위를 왜 즐겨서 안 되는가 하고 묻는다. 어차피 일 아닌가? 인류의 무한한 삶을 돕기위한 신성한 일을 하는데 그 행위자가 그 일을 축제화하는 것이 문제가 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비()도덕적인 발언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다. 무한한 삶이 보장된 인간들이지만 우발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제시, 각인(刻印) 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삶의 동력, 삶의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망 시대(필멸 시대)에 사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죽음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억척스레 무엇인가를 성취하려 하겠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불사의 존재로 비록 인간은 바뀌었으나, 인간의 행위, 본성은 변화하지 않는다. 수확자의 십계명, 수확자에 대한 엄중한 금기와 계율이지만 그 틈새, 편의적 해석은 언제나 가능하다. 콘클라베는 두 수습생을 훈육하는 고결한 수확자 패러데이를 시기하는 세력의 주장으로 인해 두 수습생 중 한 명의 선정과 선정되지 못한 수습생은 즉시 목숨을 거두어야 한다고 의결하고, 페러데이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이 불의한 싸움에 내몰리는 결의를 무효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거둔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시트라와 로언은 각기 다른 수확자의 수습생이 되어 불가피한 대결에 내몰린다. 아마 수확자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라 해도 될 것이다. 조직 범죄자 양성소 같은 로언에 대한 고더드의 강도 높은 살인 병기로의 훈련과 수확자 퀴리에 의한 시트라에 대한 고결한 도덕적 훈육은 대비되어 각기 다른 환경 속의 인간 변화를 들여다보게 한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요소가 있다. 수확령은 자신들의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역할의 수행을 위해 선더헤드의 통제 밖에 있다는 점이다. 선더헤드는 수확자들과 수확령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는다. 선더헤드가 그네들의 행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인류 사회를 위한 숭고한 약속의 이행을 지키기 위함이다. 외부(선더헤드)로부터의 이 불간섭은 수확령의 부패성을 키운다. 계율의 위반, 더러운 것들의 합종연횡(合從連橫), 대규모로 집행되는 수확, 컬트(cult)화된 수확자 집단의 범죄조직화 등 죽음을 판돈으로 한 세력 싸움이 과연 볼 만하다.

 

또한 선더헤드로부터의 이 독립과 배제는 선더헤드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수확령 내부의 불의에 의해 위기에 빠지거나, 피살되더라도 선더헤드가 개입하지 않기에 범죄는 더 극성을 부린다. 완벽한 지성체의 통제가 미칠 수 없는 지대, 즉 무법지대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름하여 자율’, 이 얼마나 그럴듯한 단어인가! 수확이라는 신성한 언어는 살인이라는 적나라한 의미를 되찾는다. 수확자는 곧 살인병기로 둔갑하는 세계이다. 두 명의 수습생은 예정대로 한 명의 수확자로 선정되고 한 명은 탈락한다. 그러나 이 선정과 탈락은 수확자들의 세계, 수확령에 의미심장한 파장을 몰고 올 것 같다. 더구나 부패의 온상이 되고 순수하게 인간 살해의 특수 면허 집단화되는 수확령에 선더헤드가 어떠한 명목으로든, 그 초지능의 지성이 개입할 것만 같다.  ‘인간적이라는 이 해묵은 휴머니즘이라는 괴물의 탈은 벗어던질 수 없는 것일까?

 

1편은 이렇게 끝 맺는다.   우리에게 우리 자신보다 더 지독한 적이 있을까? ....수확령의 양심이 고장나고, 그 자리를 특권에 대한 탐욕이 대신한다면 우리는 다시금 최악의 적이 될 수 있다. ....부패하고 비열한 수확자들을 찾아서...불로 끝장내는 누군가...그를 수확자 루시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2선더헤드로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인간과 초지능과의 협력이 펼쳐질까? 아니면 유희와 조롱만이 쇼처럼 펼쳐지는 스텍타클한 이벤트가 점령한 쾌락의 제물(祭物)놀이 세계가 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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