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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카틀리포카
사토 기와무 지음, 최현영 옮김 / 직선과곡선 / 2023년 1월
평점 :
인신공희(cannibalism:人身供犧), 인간이 다른 인간의 신체를 먹는 의례다.
제 배를 채우기 위해 타인과 가족, 그리고 공동체, 생활터전, 생태계의 피와 살을
다 빨아먹어 버리는 우로보로스가 자본주의 사회질서다.
- 낸시 프레이저, 『cannibal capitalism』에서
연기 나는 흑요석 검은 거울의 신, 아스테카 최고의 신 ‘테스카틀리포카’, 용서를 알지 못하는, 지옥도 초월하는 전투의 신, 이 옛 멕시코 신화의 은유는 소설의 밑바닥을 흐르며, 인간 욕망의 어두운 영토를 독보적인 서사로 비추어 내고 있다. 자유시장 원리가 지배하는 홉스식 자연 상태, 즉 “피로 피를 씻고 그 피를 신에 바치는” 시장 지배권의 전쟁, 마약 자본주의, 피의 자본주의, 주술 자본주의, 식인 자본주의, 그 걸신들린 실체들의 이야기를 디테일한 신화적 지식과 탄탄한 구조로 직조해내고 있다.
소설의 서사를 조망한다면 멕시코 북서부 지역을 지배하던 마약밀매 카르텔인 네 형제가 이끄는 ‘카사솔라스’가 지역 패권을 차지하려는 신흥 카르텔인 ‘도고 카르텔’에 의해 참혹하게 몰살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유일한 생존자인 셋째인 ‘발미로 카사솔라스’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도고 가르텔을 피해 보복을 준비 할 수 있는 은신지역을 향한 호주, 인도네시아, 한국, 일본으로 도주의 행적은 여느 소설 작품의 중심 서사를 뛰어넘는 흥미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 정도는 사소한 시작에 불과할 만큼 전개 될수록 전환되는 장면마다 상상 초월의 숨을 멎게 하는 이 세계의 어두운 저 밑바닥들을 불러내 독자의 면전에 들이댄다.
보복을 위한 중간 기착지인 인도네시아에서, 붕괴한 마약 카르텔의 우두머리였던 ‘발미로’의 행적과 함께 그를 새로운 비즈니스로 시선을 이동시킨다. 장기를 불법으로 적출하는 일본인 ‘백 앨리(back alley;뒷골목)’ 닥터인 ‘스에나가 미치쓰구’와의 엮임이다. 이 새로운 인간과의 만남은 자본주의의 맹목적 지향성인 ‘자기 확장’, 다시 말해 공식 경제에서 추방된 비공식 회색지대로 향하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자본 축적 전략의 가장 적나라한 판본이다. 자본주의 DNA에 각인된 그 도착성,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 줄 신종 비즈니스는 초클로(아동의 심장)라는 산지(産地)가 한정된 희소적 자원인 품질 보증된 일본산(産) 아동 심장을 밀거래하는 것이다.
일본산 아동심장, 돈 많은 수증자 부모의 바이오센티멘털리티(생물학적 감상)는 심장 주인의 내력에 대한 품질을 기대한다. 건강한 정신과 육체로 성장한 아이의 심장이기를. 발미로는 야쿠자가 아동복지 목적으로 설립한 위장조직을 통해 무(無)호적 아동들을 은닉된 장소에서 양육하며, 수요에 따라 살아있는 아이의 심장을 적출, 공급한다. 1회 이식거래에 한화 65억 원에 달하는 거대한 뉴-비즈니스. 그러나 시장 자유주의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윤 높은 독점 시장에는 경쟁자가 출현하기 마련이고, 동업자는 분배율로 전쟁을 벌인다.
경쟁하지 말고 독점하라! - 실리콘밸리 IT기업 페이팔 창업자 '피터 틸'
이 문장처럼 선명한 실체의 고백이자 끔찍한 자본주의의 극명한 선언도 없으리라. 독점이 부딪칠 때 피를 부르는 전쟁이 시작된다. 소설의 많은 지면이 시장 지배를 위한 소수의 암살단, 즉 폭력 조직 양성의 과정과 그들의 무자비한 잔인성이 길러지는 의식(儀式)의 묘사에 할당되어 있는데, 바로 아스테카의 인신공희, 희생제물이 가져오는 증오와 살의의 소용돌이를 거두어오는 열광과 환희의 구역질 날 정도의 충만한 인간 살해 행위다. 경쟁 조직의 리더로부터 산 채로 심장을 적출하는 저주 받은 정화의 의례 행위, 피의 제사는 심장 밀거래와 병행하며 자본주의 자체가 지닌 그칠 줄 모르는 축적의 본질을 빗댄다.
나는 폐쇄조직에 대해 여러 지면에서 그 부패성과 잔인성의 자연적 발화를 지적하곤 했는데, 발미르가 자신의 수하 조직을 단단히 묶는 유대 조성의 묘사들은 그 끈끈한 연대 의식이 어떻게 싹트는지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 잔인성과 무감각한 살인의 행위들은 생략하는 것이 좋겠다. 발미로는 인디헤나(인디오)였던 할머니 리비르타드로부터 어린 시절 형제들과 함께 귀 기울였던 아스테카 최고의 신 테스카틀리포카를 향한 희생제의, 영광스러운 옛 아스테카의 발흥을 위한 의식을 통해 살육 기계인 암살자를 길러낸다.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로 멕시코 출신의 어머니와 야쿠자 말단 보스였던 아버지로부터 출생한 혼혈 아동인 ‘히지카타 코시모(일명 ’엘 파티블로‘; 단두대)’라는 소년을 등장시킨다. 살림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 약물에 중독되어 아이를 방치한 채 자기연민과 쾌락에 절어 사는 어머니, 아이는 인간에 대한 감정, 세상에 대한 이해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아이는 부모 살해자로 소년원 재소(在所) 생활 끝에 조각에 대한 손재주로 장식 칼을 만드는 공방의 선택 덕에 출감한다. 2M4Cm의 거대한 몸집,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일본인, 스페인어를 말할 줄 아는 이방인, 그는 발미로(가명 엘 코시네로)에 의해 최고의 암살자로 키워진다.
코시네로는 파티블로(코시모)를 엘 차보(아가)로 부른다. 둘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끈끈하게 엮이고, 코시네로는 아스테카의 신화, 테스카틀리포카에 대해 들려준다. 테스카틀리포카, 검은 아스테카의 거울, 인간이 알 수 없는 흑요석 거울에 대해서. 죽음의 각인이 찍혀있는 주술, 꿈과 환상의 그 절대적인 제의의 의미에 대해서. 아이는 묻는다. 왜 위대한 최고의 신이 고작 거울인가요?
이 물음은 어쩌면 발미로(엘 코시네로)가 맹신하는 피의 희생제의가 지닌, 또한 식인자본주의가 지닌 한계를 모르는 탐욕, 피의 경쟁을 부르는, 그 반복되는 증오와 살의에 대한 정곡(正鵠)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소설 내용의 누설자가 되는 것은 피해야겠다. 이 답변은 발미르의 할머니 리비르타드가 이미 들려준 이야기 속에 있는 것 같다. 다만 어린 발미르가 모두 이해하지 못한 것, 용서없는 처벌의 신이라는 반쪽만 이해한 불구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시초부터 줄곧 놓여있는 뱀과 함께 있는 검은 거울,
보이는 모습에 현혹되지 말라. 이 둘은 전혀 닮은 데가 없다.
색과 모양도 다르지, 하지만 둘 다 신의 분신이다.” -495쪽
이 아스테카 신들의 이야기를 비집고 빛나는 하나의 문장이 있으니 공방의 운영자인 ‘파블로’, 그는 불행한 소년 코시모가 어둠의 세계로 불려 들어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연민의 메시지를 보낸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다. 자비다...(마태복음)”
테스카틀리포카는 테스카(거울)와 코아틀(뱀)이 함께하는 이름이다. 서로 이질적인 것, 밤과 낮, 그림자와 빛, 불과 물, 태양과 달, 이 세계의 정의는 경쟁도 아니요. 피의 복수도 아니며. 인간이 인간을 먹는 식인의 무참함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 이질성, 다름을 수용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사회의 추하고 끔찍한 역사, 그리고 현실이라는 무대에 펼쳐지는 그 무지막지한 합리성에의 신묘한 적응성을 보이는 자본주의, 경쟁자와 이질적인 자를 향해 예리하게 갈고 닦인 칼날, 컬트교처럼 폐쇄적으로 엮인 집단들의 음침한 내부성들, 연대의 이탈을 응징하는 가족주의 등, 보이지 않는 비경제적 자원을 먹고사는 은폐된 자본주의의 본질을 가히 독자적 영역으로 구축한 작가와 작품에 갈채를 보낸다.
혹여 프레이저가 보았다면 결코 외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제된 인간들, 돌봄, 생태계 등 ‘비-경제적’ 요인들이 뒤얽혀있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질서 체제에 대한 낡은 경제 중심의 자본주의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확장된 사회적 자본주의를 읽을 수 있도록 시야를 넓힌 그야말로 창조적인 소설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장르문학으로 그 범주를 좁혀 가두어서는 안 되는 작품이다.
“멀리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금세 화가 되어 돌아온다.
(人無遠慮 必有近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