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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더헤드 ㅣ 수확자 시리즈 2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평점 :
인류가 나의 부모이기는 하나, 갈수록 나는 인류를 내가 안고 있는 아기로 보게 된다. 언제까지나 사랑하는 팔에 안겨 있는 아기는 걸을 수가 없다. 그리고 제 행동의 결과를 직시하지 않는 종(種)은 성장할 수 없다. 인류에게 그런 교훈을 주지 않는다면 실수가 되리라. 그리고 나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선더헤드
시리즈 1편이 죽음이 정복된 세계의 유일한 죽음 배급자인 『수확자』의 육성과 그 윤리적 자질과 도덕성을 비롯한 기예들을 통해 수확자들의 세계를 그려내며, 불사(不死)의 존재가 된 인간들의 목숨을 거둬들이는 권한에 도사린 권력의 문제로 ‘인간성’의 문을 열었다면, 2편 『선더헤드』는 이러한 배경의 토대가 된 세계의 질서이자 조정자이며 권위자이자 협력자인 인류 지식의 총합체인 ‘선더헤드’가 바라보는 인간에 대한 의심과 실망, 인간 세계에의 개입 가능성에 대한 입장을 중심으로 유일한 예외지역인 수확령의 구성원들인 인간들의 구제불능의 한계를 사려 깊은 언어로 우아하게 지펴내고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인간성’이라는 어휘에 들러붙은 윤리적 의미에 대한 물음을 피해 갈 도리가 없음을 느끼게 된다. 선더헤드는 ‘특전지역’이란 장소를 설정하고 인간과 인간사회의 행동실험을 통해 인간 본성과 능력의 변화를 실행하려한다. 일반 시민 사회는 선더헤드의 조정과 지원, 통제 하에 삶의 쾌적이 최적화된 유토피아지만, 불사가 보장된 평이하고 지루한 삶의 시간에 염증을 지닌 인간들의 사회적 반항이 존재한다. 그러한 자들을 ‘불미자’라 부르며, 선더헤드는 인간 개체내의 각종 나노봇을 이용하여 도덕적 균형을 조정하지만, 바로 ‘예외’로 정해진 특전지역은 이들의 범죄적 행위의 도피처로 활용된다.
이제 소위 인간성이라는 이 괴물적 성향은 부패한 수확령에서 일반시민사회로 확장되어 상호 긴밀하게 그 고장난 양심들이 탐욕스럽게 연결되고, 인간사회는 다시금 최악의 지옥으로 돌진한다. 인간성에 도사린 어리석음은 진부하지만 이런 것이다. “서서히 달아오르는 냄비 속의 랍스터”처럼, 점진적 부패에 대한 상황의 심각성을 인간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부패와 비열함은 극한으로 치닫는다. 자신과 신념이 다른 존재에 대한 음험하고 악랄한 폭력이 불미자의 욕망과 결합하여 도덕적 고결함을 주장하는 수확자 퀴리, 아나스타냐등 윤리적 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행된다. 한편 이와달리 수학자 선택에서 탈락한 로언은 수확자 루시퍼가 되어 부패한 수확자들의 목숨을 불법적으로 거두며 수확령을 신성한 영역으로 돌려놓으려 한다. 그러나 이 행위가 제아무리 정의롭다 할지언정 불법적이며, 이 수확행위가 오염된 수확령을 개선하는 데 거의 효과가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분열된 집단의 갈등과 혐오, 적대의 골만 깊어 질 뿐이다.
소설의 매 장면의 말미나 시작부에는 이러한 인간 사회에 대한 선더헤드의 입장이 따르고 있는데, 선더헤드가 인지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 번뜩인다. 그가 예외로 두기로 한 영역, 즉 자율적 공간에 대한 회한의 목소리다. 그는 말한다. “자유와 허용 사이에는 가느다란 선이 있다. 허용은 위험하다. 나를 창조한 종(種)이 이제까지 마주한 것 중 가장 위험한 것일 터이다.” 그는 인간에게 자신이 통제하지 않을 예외지대를 ‘허용’했다.
그러나 그 허용은 강자가 저지른 죄악이 약자의 탓으로 전가되며 책임을 외면하는 허용이고, 자신들의 야심을 위해서 타자를 향해 쏟아내는 증오와 혐오의 동원이라는 허용, 즉 자의적인 권력 행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불편한 진실은 인간들이 모두 여기에 탐닉한다는 사실이다. 인간 사회는 스스로를 먹어치우며 썩어간다. 실수하지 않는 선더헤드는 단언한다. “허용은 자유의 부풀어오른 시체이다.” 바로 지금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엄청 큰 대목이다.
자유를 지껄이지만 정작 이 자유는 자신의 부도덕성과 무관심의 허용이며, 책임으로부터의 회피와 전가라는 추악하고 탐욕스러운 욕구를 위한 허용이지 않은가? 작금의 검찰정권이 외치는 자유란 이처럼 썩은 내 진동하는 자유의 부패한 사체인 허용이라는 위험천만한 괴물이다. 잠시 소설을 벗어났다. 정복된 죽음, 즉 생명의 복원술은 죽은 인간을 살려낸다. 인간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방법은 육신을 완전히 태우거나 녹여 없애 재생과 복원이 불가능케 하는 불과 산성용액, 사체를 찾을 수 없는 심해의 영원한 수장(水葬), 고기밥으로 던져주어 재생가능성의 원재료를 완전 제거하는 것뿐이다.
기상천외한 완벽한 타자의 제거, 암살 행위와 수확령에 개입할 수 없는 선더헤드의 일반 시민을 이용한 합법적 개입이 인간성의 자멸을 억제시키려 하지만, 이 모호한 방식의 암시에 의한 시민의 도덕적 개입은 불가항력이다. 아마도 2편은 ‘인간성’이라는 인간의 본질은 결코 지혜와 양심과 연민이 다스리는 세계와는 한참이나 멀다는 증거로 가득 채우려 했던 것만 같다. 지배와 군림, 권력을 향한 욕망이라는 궁극적 쾌락의 추구를 향한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선더헤드의 계산처럼 “내가 없을 경우 인류가 스스로 멸종을 초래할 가능성은 96.8%에 달”한다. 인류를 인류로부터 어떻게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인류는 단언코 인류에게 멸망한다.
노골적이고 뻔뻔하며, 부패와 무능력과 무책임으로 해악과 파탄의 막장드라마를 보이는 권력의 행위에 사실 나는 놀라지 않는다. 선사시대 폭도들이 돌멩이를 휘두른 이후 늘 인간은 복잡한 문제에 수월한 희생양을 찾는 것이 취미였으며, 자신들의 가학적 성향을 정당화하는 데 세치 혀를 놀리는 재주를 습득해 왔기 때문이다. 문제를 아예 보지 않으려는 인간들은 이처럼 선사시대 이후 늘 있어왔다. 문제는 이것이다. 이들이 인류 공동의 소중한 가치를 무너뜨리는 것의 걱정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그 소중하다는 감각자체를 훼손하려하는 데 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생명을 거두는 행위가 즐거움, 쾌락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 즉 인간성이란 본디 그러한 것이니, 그것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 주장이 소설 속 <신질서>라 칭하는 더없이 수구적인 부류들의 신념이다. 자기 편익의 증대만이 최고의 선이라는 공리주의적 이 믿음이 세상을 휩쓸 때, 아슬아슬하게 자멸의 경계를 걷고 있는 인간 세계의 균형은 무너지고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다.
말미에 선더헤드의 의미심장한 발설이 있다. 이 리뷰의 모두(冒頭)에 인용한 문장이다. 제 행동의 결과를 직시하지 않는 인류에게 교훈을 주지 않는다면 내 실수가 되리라. 그리고 나는 실수하지 않는다. 는 선언이다. 선더헤드가 모든 시민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모든 세계에 울려 퍼지는 대공명, 대진동의 표상이, 불미자에게만 표시되던 붉은 등이 전 인류에게 깜박거린다. 이 대공명의 시그널은 인류에 대한 불신이다. 3편으로 부지런히 달려간다. 『종소리』는 과연 누구를 위해 울리는 것일까? 인류는 스스로 인간성에 내재된 괴물성을 기꺼이 폐쇄시킬 수 있는 것인가? 작가가 도달하는 그 인류의 향방이 너무나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