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애나 캐번 지음, 박소현 옮김 / 민음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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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이란, 이 희미한 어스름 속에서 끝없이 앞으로 달려 나가는 이 무서운 질주 밖에 없었다.  침묵, 추위, 눈 그리고 자기 곁을 지키는 거만한 인물, 조각상 같은 남자의 차가운 눈은 바로 은백색 수은으로 가득 찬 헤르메스의 눈, 얼음의 눈, 그 여자의 영혼을 빼앗고 위협하는 눈이었다.”  -164쪽

 

이렇다 할 서사도, 구체적이거나 명료한 시간도 공간도 모호하기 그지없는, 그야말로 이 모든 것이 뒤섞인 혼돈 그 자체인 소설이다. 드러나는 소설 속, 주요 배역인 화자(話者)와 여자, 교도소장으로 불리는 남자, 이들 세 사람에 대해서도 어떤 설명이 없다. 다만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특성으로 이들의 관계를 짐작할 뿐이다. 그것도 흐릿한 안개 속의 그림자처럼.

 

소설은 화자인 남자 자신의 생각을 잠식하고 있는 여자, 여자를 찾아야 한다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충동을 처리하려는 강박적 집착으로 시작된다. 그는 분명 돌아왔다.’ 고 말한다. 예전에 그가 살던 장소였다는 의식일 것이다.   불가사의한 비상사태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있는 지역의 진상조사를 위해서 돌아왔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자를 만나야 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비이성적 행위를 인지하고 있음을 말한다.

 

자신의 행위가 비이성적임을 인지하고 있음을 말하는 이 문장의 진위는 꽤 의심스럽다. 마치 이성적 분별을 잃고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현실의 토대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여자와 자신의 지난 시절의 관계를 회상하며, 여자의 가냘프고 수동적이며 타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이 과감하게 다가서지 못했음을, 느닷없이 한 남자와 결혼을 해버린 당혹스러운 감정을 말하지만, 이것이 과연 실제였는지, 아니면 왜곡되어 혼합된 환상인지 모호하다. 어쨌든 불가사의한 비상사태란 얼음이 점점 침입해오는, 극한의 추위가 몰고 오는 황량함에 점령당하여 폐허화되는 세계임을 화자가 전하는 풍경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소설은 변주되어 유사한 상황을 반복한다. 화자의 행위는 여자가 있는 곳을 찾아내고 구원하기위한 생사를 무릅쓴 끊임없는 추적과 실패, 그리고 세계라는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억압에 굴복한 여자로부터의 신뢰 획득과 보호자로서의 인정을 향한 거듭되는 시도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교도소장으로 상징되는 여자의 남편(?), 혹은 동반자의 야수적 폭력성과 냉담함은 이러한 화자의 시도를 좌절시키는 장애로 충돌한다.

 

그런데, 이러한 충돌을 온전히 현실의 두 인간의 갈등과 마주침으로 이해하는 데 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우리 두 사람이 실상 분리된 하나의 자아가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182)”라던가,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의 모습은 서로 엉켜있었다. 나는 스스로의 반영을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233)”처럼 한 인간의 분열된 자아의 형상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화자의 여자에 대한 강박적 집착은 변질, 혹은 왜곡된 사랑의 현현인것 같다.

 

교도소장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 찾아 온 화자에게   그 여자는 죽었다.”고 말했을 때, 화자의 감정은 여자가 그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매서운 칼날이 나를 베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죽음은 내 바깥에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내 안에 있었다.(233)”  여자는 남자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 곧 여자는 화자를 이루는 하나의 육신이자 정신이다. 여기서 다시금 혼란에 빠져들었는데, 화자는 곧 구원의 대상인 여자이며, 남성적 폭력에 굴종되고 대상화되어 구원을 기다리는 여자는 화자의 또 다른 반영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자와 교도소장, 여자는 한 인물의 타자화된 여러 자아인 것이 아닐까하는 의혹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결국 나는 이 세 인물을 하나의 인물로 이해하고 읽어나갔다고 해야겠다.

 


여자는 흘러내리는 은백색 머리카락과 달처럼 창백하고, 유리처럼 부서질 듯한 존재로 반복되어 묘사된다. 또한 여자는 화자가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안전한 보호자, 진정한 삶의 구원자임을 거듭 확인하려 한다. 수동성이라는 오래된 전통적 여자상()이다. 대상화된 존재로 읽혀지기를 기다리는 여자, 그래서 여자는 더욱 화자와 교도소장이라는 남자와 동일 인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즉 여자가 기대하는 남자의 전통적 형상, 백마탄 기사이며 권력과 부를 한 손에 거머쥐고 있는 왕자님, 그러면서도 여자의 신뢰를 위해 기다리고 인내 할 수 있는 남자, 이들의 반영을 내면에 지니고 있는 여자. 이렇게 이해하면 화자와 교도소장은 여자가 욕망하는 남자의 반영일 뿐이다. 아니면, 화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분열된 욕망의 분신들일지도.

 

화자는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있는 교도소장의 폭압 하에 있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거듭 마주치지만 좌절한다. 그런데 이 좌절의 계기가 여자의 미온적 거부거나, 교도소장과 화자를 위협적 인물로 동일시하며 거부하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분열된 타자상은 여자의 내적 욕망의 분신이거나 화자의 그것이거나.  결국 이 소설에 주요 등장인물이란 없다는 것이다. 오직 존재의 내면, 인간적 욕망의 현상만이 있는 것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이 모호한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데 거부감, 불편함이 해소된다.

 

여자는 교도소장을 통해서, 또는 희생제물이 되어 살해되는 것으로 묘사되거나, 실종 혹은 동행의 거부로 남겨진 채 생존 가능성이나 실존하는 장소가 불분명해지곤 한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다시금 여자를 찾아 나서고, 교도소장은 이의 방해자로 등장하며, 점점 세상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얼음, 잔혹한 빙벽의 파괴적 침입이 조여 오는 종말적 세계에 대한 엄습하는 불안감과 함께 야릇하게 뒤틀린 욕망이 병행하며 독자를 비현실적 환상의 공간으로 몰아넣는다. 이 몽롱한 감각에 도취되어 인간 심연의 그 어두운 골짜기를 거니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이 소설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화자는 말한다.  다시 처음부터 그 여자를 찾아 나서야 했다. 이러한 되풀이는 마치 끔찍한 저주 같았다.(235)”.

 

이 소설에서 어떤 사실을 확인하고, 일련의 서사적 줄거리를 찾는다는 것은 아마 넌센스인 것만 같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극지방의 빙하를 녹여, 대양에 실려 온 얼음이 반사하는 태양열로 지구가 냉각된다는 이상기후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오만을 이야기하려 한다거나, 자기 편익, 영토적 야욕과 같은 이기적 쾌락이 핵전쟁이라는 자기 파멸을 가져오는 종말론적 세계관의 예견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환상과 꿈과 같은 저 무의식과의 대면에서 오는 배경으로 읽어내면 족하지 않을까?

 

물론 헷갈리게 하는 문장도 있다.   인류라는 종족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죽음을 향한 집단적 소망, 자멸을 향한 치명적 충동이 그 지표였다. (296)”  어쩌면 이 문장 또한 현대를 사는 인간의 자기 본질과의 대면에서 해독한 인식의 하나일 것이다. 아마 소설은 공허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무용수가 공허의 가장자리를 따라 빙빙 도는 죽음의 무도에서 두 존재의 구별은 사실상 무의미했다.(368)” 는 이해처럼 여자와 남자라는 두 존재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화자의 자기 실재성을 의심하는 다음의 문장에서 확인 할 수도 있다.

 

갑자기 내가 최근까지 살아온 삶이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한마디로 그 경험의 실재성을 더는 믿을 수 없었다.”  -172

 

마침내 화자는 여자를 설득해서 보호자이자 구원자로서의 여정에 동행한다. 그러나 세계는 얼음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잔혹한 추운 세계로 점점 삶의 세계로 침입해 들어오고 있다. 아마 심연을 마주한 존재의 싸늘한 공허가 이것이 아닐까?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묵직한 권총의 무게가 그나마 약간의 안심이라 말하는 화자의 마지막 독백은 바로  달아날 수 없음, 그것 아닐까?

 

얼어붙은 세계에서 '길을 잃은 황혼의 존재',  소설의 시작 문장들에 박혀있는 이 어휘들이 어쩌면 캐번이 드러내고 싶었던 진정한 언어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라는 운전, 그리고 거의 다 떨어진 휘발유, 어둠 속에서 외로운 언덕길에 발이 묶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차를 돌릴 수조차 없는 좁은 길,...,‘애나 캐번의 지독한 현실 독백인 것만 같다. 문득  역사상 긴 자살 유서로 불리기도 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막간이 떠오른다. 이 작품 또한 캐번의 문학적 유서 아니었을까? 모두에 인용한, 위협하는 얼음의 눈의 감시 속에서 어스름한 세계를 그저 질주하는 도리 밖에 없었다는 여자의 마음을 묘사한 문장, 아마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의지였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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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얼음)에 대한 해석:  소설의 제목이자 소설 속 끊임없이 세계 속으로 침입해오는 얼음은 어쩌면 투명한 백색의 환각제 '메스암페타민' 의 속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마약의 환각성에 취한 한 인간의 고백록으로. 사방에서 조여오는 얼음, 빙벽의 여러 묘사는 환각제로 인해 신체가 느끼는 감각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작가는 이렇게 감각되는 분열된 자아를 통해 자신에게 새겨진 고통의 흔적들을 대면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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