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트리 스피박 라이브 이론
마크 샌더스 지음, 김경태 옮김 / 책세상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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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낯선 인종의 사람은 그 생김새가 같아 보인다. 한국인을 비롯한 극동에 위치한 사람들을 서구의 인간들은 다 똑 같이 생겼다고 하며, 더구나 이러한 자신의 편협한 시선에 기초하여 한국인은 성형대국답게 모두 똑같이 생겼다고 모욕을 가하기까지 한다. 인종적 우월의식에 따른 무관심과 무시해도 된다는 억척스런 무지에 토대를 둔 교만 때문이다. 어찌 모두 똑같게 생겼겠는가? 다름에 대한 차별과 배제라는 알지 않으려는, 알고 싶지 않다는 외곬의 수구(守舊)성과 타자를 알지 못하는 유아적 이기심에 터 잡은 미성숙한 자의식에 뿌리를 둔 골 깊은 맹목(盲目)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글을 쓰거나, 써진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아주 흔하게 나타난다. 유럽의 엘리트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인간들은 자신의 글이 세계 모든 지역의 인간에게도 동일한 인식으로 읽힐 수 있으며, 그렇게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시아의 한 귀퉁이 사는 농부의 아내는 아마 전혀 다른 시선으로 읽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감히 인류 보편적 진리 또는 지식이라거나, 동일한 이해를 갖는 것이 지식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읽는 이들 또한 글쓴이가 의도한 의미를 읽어내는 것, 혹은 평자가 해독한 어떤 지침적 노선을 따라가는 것을 잘 읽어 낸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한 소설에서 작가가 일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말투를 사용하며, 마치 리얼리티를 부여하려 했다고 하면, 독자는 이렇게 쓴 작가의 의도를 따라가는 것, 즉 작가의 의지를 읽는 것을 잘 읽었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그 말투를 사용한 이유, 즉 직업에 대한 오래된 편견이 내재하고 있으며, 그것을 관습적으로 되풀이하는 작가의 인식에 의문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거 계급 차별 아닌가? 인종차별 아닌가? 이 작가는 사람을 이렇게 구분하고 있구나라고 그 글의 태도를 알아차리는 읽기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태도와 상궤(常軌)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주제이자 대상 인물인 가야트리 스피박 초국가적 리터러시라고 일컫는, 여러 차이 안에서 세상을 읽는 능력을 지닌 주체로의 변화를 주장하며,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에 데리다의 해체적 시각을 도입하여, 다르게 읽기와 소외되고 무시된 이들에게 저항의 언어를 제공한 시대의 윤리학자이자 사상가이다.

 

책은 스피박의 주저(主著)포스트 식민이성 비판을 중심으로 하고, 그녀의 사상적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논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기저(基底)로 하여, 주류 세계의 잃어버린 관점과 특권의 탈중심화를 향한 지고한 윤리적, 문화적 사유를 쫓는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결여된 윤리를 가리키고, 페미니즘 전선에 뛰어들며, 뿌리깊은 언어의 오용과 문화적 폭력의 실태를 드러낸다. 저자인 뉴욕대() ‘마크 샌더스교수는 이 탐사를 꼼꼼하게 해독하고 있지만 여전히 스피박의 저술만큼 쉽지 않다.

 

그럼에도 저작들을 읽는 일반 독자에게는 접하기 어려운 스피박의 각종 발표 논문을 통해 특정 사상이나 주장의 논지를 보다 분명히 전달 받을 수 있으며, 논의의 명료성을 스피박 당사자의 답변을 통해 확인케 하는 대담으로 인해 문학과 독해, 윤리에 대한 그녀의 개념들에 상당한 이해를 갖게 된다. 스피박은 초기 탈식민분야의 시초격인 인물이다. 그녀의 행적은 민족-국가의 시민으로서 대도시와 민족-국가와 출생지 사이의 교류를 위한 조력자로서 서발턴을 비롯한 목소리를 지니지 못한 인민을 담아내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되어있다.

 

우리는 미래의 인문 교육자들이 초국가적으로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3

 

이 문장은 스피박의 연구 실천의 행적을 아마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주류의 목소리인 담론적이고 사회적, 지정학적 내재성에 대한 공모자로서의 읽기가 아닌, 스스로 다른 사람과 그 밖의 많은 타인의 입장이 되어봄, 즉 도덕적 선의 위대한 도구인 상상력을 지님으로써 세계의 특권적 해독을 피할 수 있다는 선언일 것이다. 그것은 고대 연극의 파라바시스(Parabasis)’와 말소 표기 아래에서만 번역되어야 하는 책임 불가능성의 보존이며, 존재한 적 없던 것처럼 지워버린 승인되지 않은 페제(廢除)의 흔적으로부터 말하는 주체의 상상하기 이다.

 

이러한 언어들은 모두 다르게 읽기, 서사의 양식 외부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읽기, 내포된 독자로 상정된 읽기로부터 비켜선 읽기를 말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자면 탈식민화된 지역의 양상을 전하는 토착정보원이 있다고 하자. 아마 그는 분명 그 지역의 지식 엘리트일 것이고, 그는 현지의 하급계급과 분리되어 있는 존재일 것이다. 즉 그 정보에는 그들이 보호하고자 하는 이들의 실제와 인식론적 불연속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역사적 진보의 주류에 결합되지 못하기에 항상 서발턴으로 남게되며 또한 서발턴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데리다의 해체는 스피박에게 중요한 해독의 도구가 된다.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영역를 하면서 스피박은 서문에 해체를 자신의 언어로 정의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기입되어 있는 재구성하기 위해 분해하는 것으로서, 결정할 수 없는 순간을 드러내고, 고유 체계를 뒤집는것이다, 또한  비평가의 통제, 텍스트의 권한을 버리는 것, 의미의 우위에 대한 확신을 저버리는 독해이다.

 

마음의 변화와 욕망의 비강압적인 재배열로서 인문학 교육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 아래로부터 배우는 것을 학습하는 것이다. 입증 불가능한 것으로부터 배우는 훈련으로서 문학적 읽기, 즉 초국가적 리터러시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모델로서 스피박의 마르크스 자본읽기나 인도의 작가 마하스웨타 데비의 소설 읽기의 사례들은 자본주의의 윤리적 결여와 페미니즘의 작동방식 및 양상을 새롭게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이를테면 데비의 벵골어로 써진 소설 Stanadayini을 스피박은 <젖어미>로 번역한다, 가능한 번역어인 <The wet-nurse(유모)>는 원어의 의미가 지닌 충격을 주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젖가슴을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이라는 기관으로, 또한 성별화된 동인의 작동방식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문학 읽기, 번역의 시선에서 이처럼 숨겨질 수 있는 것을 드러내어 해독하여 존재하지 않음을 읽는 것이 바로 초국가적 리터러시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스피박은 쥘리아 크리스테바중국 여성에 관하여를 비롯하여 데리다의 저술들에 내재된 자민족중심주의, 강박적인 자기-중심주의를 비판하기도 한다. 이러한 예시적 이야기가 있다, 백인 남성이 황인 남성으로부터 황인 여성을 구하는 스토리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것에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지 우리는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유럽 백인의 제국주의적 자비를 통해 여성 서발턴을 침묵시키게 한다. 황인 여성은 이 구원에 대해 무어라 할 말이 있겠는가? 그래서 스피박은 선언한다. 페미니스트로 발언하기 위해서는 서구 제도의 역사에서 그 흔적을 완전히 덮어버려야만 한다.”.  어떤 텍스트가 쉽게 대립적으로 보일 때 그 공모를 목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피박은 크리스테바에게 주문한다. 내가 누구인지, 다른 여성은 누구인지, 나는 그녀를 어떻게 명명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유럽중심적인 페미니즘의 타당성은 무엇인지를 자문해보라고. 부유한 국가의 여성은 통합적인 착취 체제에 객관적인 관심이 없다고 지적한다. 명확하게 억압을 작동시키는 저임금 노동의 가장 낮은 수준의 여성들에 대한 인식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나의 감상은 스피박의 사상적 논의에 대한 마크 샌더스가 쓴 해석들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스피박의 윤리적, 사상적 이해가 어떤 것인지를,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인 것인지를 수용하는 데 결코 적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읽기에 관한 직감 및 윤리적인 것에서 독자가 그러한 연결고리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단서들을 구체적 해석의 형태로 제공하는 이 책은 무수한  찢어진 문화적 직물들을 어떻게 수선(修繕)하며 해독하여야 하는지를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혹시 우리는 자애로운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로서 제3세계를 자기 이해의 수준에서 동질화해버리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의심해보아야 한다. 나는 어떤 위치에서 세계를 읽고 있는지를. 내 양식의 외부에 있는 존재에 대한 이해가 있는지를. 난해하고 독창적인 스피박에 조금 가까이 다가가는 데 아마 이 저술은 분명 긴요한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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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3-02-08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안한 질문 드려요. ˝ 데비의 벵골어로 써진 소설 「Stanadayini」을 스피박은 <젖어미>로 번역한다, 로 번역해도 충분해보이지만 충격을 주기에는 불충분한 의미를 지닌 어휘이기 때문이다. ˝ 이 부분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아서요. 젖어미가 아니라 무엇으로도 충분한가요. 뒷문장에 나오는 단어인가요?

필리아 2023-02-08 22:13   좋아요 1 | URL
‘유모‘로 번역되는 어휘이지만 스피박은 원어가 담고있는 의미의 적나라한 드러내기를 위해 ‘젖어미‘라는 여성의 신체를 포함한 단어로 번역했다는 뜻입니다...^^
즉 유모라는 단어는 사용자인 주인의 언어이고, 실제 여성의 신체를 내어주는 노동이라는 의미를 숨기고 있는 것이죠. 스피박은 이 노동을 은폐한 주류의 언어를 버리고, 보다 진실한 언어를 사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 문장 표현이 서툰 까닭인 것 같네요. 문장을 조금 수정했습니다~고맙습니다. 초원님.

초원 2023-02-09 21:22   좋아요 0 | URL
친절한 필리아님 감사해요. 촘촘한 읽기로, 세련된 리뷰로 고마운 안내자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