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물고기
권지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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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고, 생활인으로서 요가강사를 하는 30대의 여성,‘서인’, 여성잡지 인터뷰에서 마주한 사진작가‘선우’는 그녀에게 야릇한 인상으로 마음에 새겨진다. 어둠이 내린 호수는 이야기 주위를 항상 맴돌고, 그곳은 어둡고 깊은 인간들의 욕망을 묻는 거대한“욕망의 쓰레기장”으로 소설의 사건들을 연결시키는 지위를 갖는다.


추리적 맥락을 삽입함으로써 등장인물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가둬져 있는 지워진 기억들을 시간의 진행에 따라 복원하는 전개구조는 전형적인 심리 스릴러물을 연상시킨다. 밤이면 호수가로 나가 열락의 정사(情事)를 벌이는 엄마에 대한 기억, 마침내 자식들을 버리고 집나간 엄마를 자살이란 가상의 흔적으로 지워버린 ‘서인’의 상처는, 몽유병 증세로 그리곤 성폭행의 희생자란 정신적 외상을 남긴다. 한편 상대역인 ‘선우’또한 고아로서 프랑스로 입양되었으나 이란성 쌍둥이 여동생‘안나’의 죽음을 호수에 던져 넣고서는, 파양(罷養)되어 돌아와야만 했던 깊은 심리적 상처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이렇듯 정신적 상처를 지닌 두 사람의 사랑은 서로의 숨겨진 고독을 감지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에는‘사람을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타자를 가장 강하게 느낄 수 있다.’는 ‘레비나스’식의 타자성을 읽게 되는데, 누군가를 알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점차 알아가는 것, 즉 그 사람을 알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인데, ‘서인’이 ‘선우’의 낯선 행동에 대해 “선우에 대한 서인의 의혹이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그는 비밀이 많은 사람. ~ (中略) ~ 점점 알 수 없는 사람 같았다.”와 같은 기묘한 비대칭적 자각을 보여주는 것에서 읽을 수 있다.

이야기는 이러한 서로의 알아감, 자기만의 내밀한 것들을 드러냄으로서 사랑의 본질 속으로 향하게 되는 두 연인의 변질 될 수 없는 마법의 세계를 보여준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랑, 선과 악이라는 인간 내면의 투쟁도 잠재울 수 있는 자기희생, 이타적 사랑은 상대를 온통 이해하는 과정이고 그러함의 과실이라는 것이다.
호수에 던져진 여자들의 주검, 실종 된 여자들, 건져진 사체들의 죽음은‘선우’와 그의 또 다른 인격 ‘미카엘’을 보여줌으로써,‘서인’이라는 여인의 사랑을 숭고함의 경지로 올려놓는다.

호반(湖畔), 악의 꽃,‘삐아졸라’의 광인을 위한 발라드, 검은 스타킹 등 암시와 복선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읽는 재미를 더한 이 또 하나의 사랑 이야기가 오늘의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들려지기를 기대해본다.
다만, 트라우마, 정체성장애를 필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작품들이 우연성을 보완하기 위한 소재로 빈번하게 사용하다보니 그 진부함을 극복하고 차별화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소재의 빈곤과 식상함이란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린 흔하디흔한 이야기들이 될 수밖에 없는 위험을 갖게 된다. 이 작품 역시 이러한 경계를 걷다보니 얼개는 부담 없이 수용되지만 세밀(細密)에서는 엉성한 거칢의 거북함이 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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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니스 Welleness - 뇌를 바꾸는 운동 혁명
박수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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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면 건강해지고 정신이 맑아진다는 것은 으레 듣는 이야기이고, 이러한 구체적 사례들은 정보오락 프로그램이나 의학전문기획 프로그램, 건강관련 기사 등 각종 미디어 매체들을 통해 그 어느 때 보다 풍부하고 다양하게 전달되고 있으나, 실제의 삶에 긴박하게 다가온 적이 없다. 일상의 번잡함에 매몰되어 감히 건강타령이나 하고 있을 경황이 아니라는 생각에 지배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운동’에 대한 편견까지 있어, 몸을 쓰는 것은 두뇌의 활용이 좀 떨어지는 사람들의 행위정도로 치부하고,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 한계에 도달한 머리를 쥐어짜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몸의 건강과 마음의 행복을 추구”한다는‘웰니스(wellness)’라는 이 파란 책 한권은 운동에 대한 이와같은 지금까지의 내 편협한 생각을 완전히 전복시켜버렸다. “뇌는 운동을 위해 태어나고 발달” 했으며, “더 정확한 몸놀림을 위해 뇌가 진화”했다는 한마디, 즉 우리 뇌가‘운동뇌(moving brain)’에서 진화 했다는 주장은 “움직일 필요가 없다면 뇌도 필요 없다”는 말과 결합하여‘사유’라는 뇌의 작용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내게는 일종의 충격이 되었다고 하겠다. 결국 두뇌의 활동은 운동에 지배되고 있다는 것이니, 진정 이렇다 할 신체의 운동이 극소화 된 나로서는 최근 겪고 있는 신체적, 정신적 침체와 위축의 원인을 비로소 규명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운동에 의해 뇌의 활동이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점은 “운동이 사고와 감정을 조절하는 신경전달 물질의 분비를 촉진하고 그들의 화학적 균형을 맞춘다.”는 뇌의 메커니즘을 통한 확인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지방연소, 혈관밀도의 제고와 신경전달물질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등의 분비를 촉진하여 감정을 조절하는 일련의 과정은 물론, ‘뇌유래 신경 성장인자’인 BDNF(brain-derived neurotrophic factor)의 분비를 통하여 기억력과 밀접한 장소인 해마 속‘치아이랑’영역에서 뇌세포로 성장할 수 있는 줄기세포가 매일 4백 개에서 1천개까지 생성된다는 사실은 정서와 신체적 건강을 넘어 우리 인간의“고도의 정신능력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한다는 의미”로서, 뇌과학의 획기적 진전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뇌가 변화된 환경의 영향을 받을 경우 스스로 구조와 기능을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뇌과학자들의 ‘뇌의 가소성’에 대한 연구결과는 운동의 역할을 더욱 확신케 한다. 이는 복습에 복습을 반복하면 뇌는 이 정보를 학습하고 기억하기 위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한다는‘장기 증강’메커니즘을 의미하는데, 일례로서 마치 길이 없던 숲속에 오솔길이 생겨나듯이, 장기증강은 시냅스에 전기신호가 반복적으로 가해져 시냅스가 지나는 정보 전달 과정이 수월해진다는 것과 같다. 특히 뇌가소성은 대뇌피질에 잘 나타나는데 이는 동작 반응을 명령하며 기억력, 학습력, 사고력, 창의력의 터전이 되는 부위라는 점이어서 운동이 뇌를 똑똑하게 만들어준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책은 이들 뇌과학의 실험결과와 이론적 연구의 규명이 보다 친근한 실례로서 다가설 수 있도록 학문, 예술 등 지적 분야의 탁월한 성취를 하고 있는 인물들을 통해 그네들의 실질적 삶의 원동력으로서 운동이 작동하는 성과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수학과 같은“새로운 상황의 요구에 맞도록 자신의 지식을 재구성하는 능력”인 ‘인지적 유연성’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의 수학교수가 축구라는 운동을 통해 쉴 새 없이 충전하는 모습이나, 허영만 화백, 음악인 용재오닐이 1~2시간에 걸친 지속적인 산행과 조깅으로 두뇌의 휴식과 활성화를 지원하는 일상적 습관에서 뇌의 가소성과 두뇌의 확장능력을 엿볼 수 있게 된다.

한편,“고도로 집중한 상태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몰입적 사고”에 익숙한 이들의 지적 작업은 반복적이고 집중적 사고로서 “우리의 뇌는 이 문제를 생사와 직결된 문제로 판단”하여, 몸에 비상사태를 선언 하고, 신경 체제의 배선을 늘리고 강화하는 즉, 시냅스 형성 증대, 신경회로 확장을 통해 인지적 유연성의 제고를 돕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몰입’의 흥미로운 예로서, 정신 분열증이나 우울증으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뛰어난 예술성으로 역사를 바꾼 모차르트, 뉴턴, 반 고흐, 다윈, 슈만”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들에게서 발견 할 수 있는 무리한 몰입은 신경전달물질인‘도파민의 과다’로 인한 사망이라는 역설로서 운동이 지니는 뇌의 균형적 작업을 더욱 간과할 수 없게 한다.

저작의 말미에는 이러한 두뇌를 똑똑하게 하고 사고의 유연성을 높여주며, 면역체계를 강화함으로써 병세를 호전시키기까지 하는‘운동’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들을 소개하여 단지 이론적 이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바로 “진정한 건강이란 신체의 안녕을 넘어 삶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 살아가게 하는 힘이고 살아있는 느낌”이라는 웰니스의 핵심적 가치를 실현하는 내용들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빨리 걷기와 중강도 운동이란 어떤 것인지, 뇌의 용적을 늘리고 신경세포의 생성을 돕는 ‘젊음의 분수’라는 인간성장호르몬(HGH)을 대거 방출하는 강도 높은 무산소 운동과 근력운동에 대해서, 각종 질병의 예방을 위한 개별 대응 운동에 대해서, 그리고 축적 운동법에까지 이른다.

“인간이 점점 덜 움직이면서 스스로 동물 본성을 포기한 데 대한 경고”로서, ‘알츠하이머’병이 증가한다는 말처럼, 인간은 유전자에 각인된 운동 본능을 따라야 정신활동이 온전해진다는 과학적 규명은 어쩜 뒤늦은 이해와 인정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운동이 뇌 세포를 새로 만들고, 뇌를 쾌적하고 젊어지게 한다는, 그래서 삶에서 참된 지식을 발견하고 긍정하기 위한 방법으로‘운동’의 선택을 말하는 이 저작은 우울하기만 한 오늘의 사회환경을 극복하고 정체된 삶의 기운을 회복하는데 신선하고 직접적인 자극이 되어줄 뿐 아니라, 국민 건강과 정서, 지적 역량의 배양을 위한 국가 체육정책의 중요한 가이드가 되어주기도 한다. 정신근로자, 성장기의 학생을 둔 부모들, 체육교육 정책자, 중노년기에 건강을 걱정하는 모든 분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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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리전스 - 평범함과 비범함의 비밀을 밝힌 문화 지능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 지음, 설선혜 옮김, 최인철 감수 / 김영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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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생태학적 측면에서 오늘의 인간의 진화적 상태는 대개 1~3만여 년 전의 형질로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으며, 이는“지능이 인종에 따라 유전적으로 차이 나기란‘선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배경이 된다. 즉 인간의 지능이 유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 아니면 환경이 결정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론에서 케케묵은 인종적으로 지능의 차이가 있는가 없는가라는 예증은 백인중심주의라는 저변의 사고라 할 수 있다.

 

비록 이 저작이 인종 차별주의적 시각을 배제하려는 입장에 있기는 하지만, 그만큼 지능의 유전율과 환경지배력에 대한 설명으로서 환경결정론적 주장을 선명하게 입증하는 균형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이라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다만, 지능이 유전자에 의존하는 것인지, 환경에 의한 것인지의 이론(異論)은 차치하고, 지능향상법에 대한 코치나 아이들의 양육과 학습이론 측면에서는 나름 귀동냥 할 참고 요소들이 소개되고 있어 교육자, 학부모, 교육당국자등에 유용한 학습프로그램들의 사례집으로서의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하겠다.

저술의 전체를 지배하는 개념은 IQ라는 지능지수이다. 이 지능지수의 백인과 흑인, 유색인종 등 빈곤, 소수계층의 비교를 통해 학습의 개입이나 사회계층이 제공하는 환경여건에 따라 지능지수를 높일 수 있다는 맥락을 가지고 있다. 또한 교육은 IQ와 성취간의 인과사슬에 매우 중요한 고리라는 신념을 통해 취학 전 유아동 및 학령기 개입 등 적극적인 학습 환경의 변화가 학업과 사회진출에서의 계층적 성취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SES(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지적 자산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하면서 취학하기 전의 유아들에 대한 학습 환경의 개입프로그램 적용례와 학령기의 아이들에 대한 실험적 프로그램과 특수학교들의 개입사례를 통하여 IQ및 학업의 성취도가 신장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들 프로그램들이 소수 빈곤층의 아이들에게 커다란 효과를 나타내고 있으며, 백인계층의 아이들과 차이를 줄이기 위해 유효한 방법이라 소개하고 있다. 나아가 이들 프로그램의 수행에 있어 교사의 자질은 성취도에 높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학급이 적을수록 성취도 검사에서 수행도가 뛰어났음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사실 이러한 결론은 교육학에 있어서는 ABC와 같은 이야기이기에 새삼스럽기까지 하지만, 우리사회에 있어 낙후된 벽지나 하위계층이 거주하는 지역의 학교에 이 저술이 소개하고 있는 개입 프로그램의 도입 등은 교육적 성취의 편차가 극심한 현실을 고려할 때 사회의 건강성이나 교육환경의 질적 균형을 위해 참고할 가치가 높다 하겠다. 물론 계층에 따른 학업성취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이러한 공적 비용이 막대하지만, “특수교육, 유급, 범죄와 복지비용의 지출을 막고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소득이 증가”하여 연 17%의 투자수익에 상당하다는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인‘제임스 헤크먼’의 분석처럼 경제성 측면에서도 유효한 접근이라 하겠다. 더구나 상위 1%의 강부자들을 위한 세금감면 혜택 중 극히 일부만 축소하더라도 이러한 사회적 비용은 충분히 충당하고도 남으리라는 것이다.

한편, 저술 중 인상 깊은 용어들이 등장하는데 그 첫째는‘노력 낙관주의(effort optimism)의 부재’, 즉 “노력하면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의 부재”이다. 일종의 카스트적 소수집단의 사회에 대한 기대의 포기와 불신으로서 우리사회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하위계층에 대한 심리적 배려는 물론 학습장치의 제공의 중대성을 깊이 깨우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고정관념 위협’에 관한 연구로서, “도전을 회피하고 학업을 추구하지 않는 식으로 평가에 대한 불편감에 적응”하는 상황의 인식이다. 이 역시 사회적 편견이 특정 집단에 가하는 압력의 고착이 결국 당해 집단의 내적 심리까지 장악하여 발생하는 폭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교육은 사회의 신뢰회복과 건강성, 빈곤의 세습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풀어주는 중요한 기능임을 간과할 수 없음을 확인케 된다.

끝으로 이 저작에 대한 몇 가지 아쉬움을 담는다면, 모두에서 지적했듯이 서구 백인의 편협성을 극복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국인을 예로 하면서“IQ로 기대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과잉성취(overachievement)'가 나타난다.”고 자신들의 과소성취가 아니라면서 동아시아인의 뛰어난 성취의 해석을 축소하는 식이라든가, 지능의 개념을 정서지능이나 음악지능, 신체운동, 게다가 실용지능, 창조지능하면서 “추상적 사고, 문제 해결능력,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으로서의 지능을 과다 확장하여, 수량화 할 수 없는 인간의 지적활동을 모조리 수량화(數量化)하여 서열화하고 물화(物化)시켜 버리는 사이비 과학의 요소를 안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이 저작은 지능지수(IQ)가 양호한 양육환경이나 교육환경을 갖추면 높아 질 수 있기 때문에 소수자 및 소외계층 등 하위계층의 학부모들에 대한 교육적 각성, 다양한 학습프로그램의 실행을 위한 공적지원 등으로 교육적 형평성을 제고 시키고, 이를 통한 이들 계층의 아이들이 사회적 성취를 높이기 위한 사회적 참여의 제안이라 할 수 있으며, 부모들의 수준 높은 어휘구사나 환경 탐구 행동의 격려와 같은 아동 학습과 지능 향상을 위한 방법 제안과 같이 학업성취 제고를 위한 교육방법론의 제언이라 하겠다. 진화심리학과 사회심리학의 대결, 또는 유전론과 양육론의 첨예한 과학적 대결의 기대는 무색해진다. 유치원, 초등학교의 아동을 둔 부모님들에게는 동기의 유발이나 성취욕의 자극, 학업능력 및 지능 향상의 유효한 지침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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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프리즘>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한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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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년대 한국의 청년들, 그리고 대중의 사상적 은사였던 이영희 선생을 왜 지금 다시 논의하여야만 하는가? 다시 말해 ‘의식화’로 대변되는 정신의 혁명, 대중의 깨어남이 요구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당위의 질문에 대하여 이 저술은『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으로 상징되는 잠자던 대중을 깨웠던, 즉‘깨어난 자들의 끊임없는 증식’을 통해,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던 독재의 암흑이란 철벽을 부수고 일궈냈던 민주화의 성취가 오늘에 다시금 어떠한 의미로 다가서는지를 세대와 분야를 아우르는 인물들의 담론으로 펼쳐내고 있다.

여기에는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는 억압되었으며, 밀실로 붙들려가 폭력에 시달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가는 민주주의의 실현은 요원하기만 하였던 악독한 독재정권이 지배하던 시절, 역사의식도 없으며, 세계사적 흐름을 읽지 못하던 무지몽매한 지배계급의 폐쇄적 폭압의 시대에나 필요했지 오늘에 새삼스레 대중의 집단적 각성, ‘의식화’의 논리를 꺼내드는 것은‘꼰대’들의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냉소도 있다. 더구나 온통 물화(物化)되어버린 사회, 당장 밥벌이라는 생존의 문제에 허덕이고 있는데 무슨‘자유’타령이냐, ‘자본주의에 편입’되기 위해 발버둥치기에도 모자란 형국이란 말이다. 라는 88만원 세대의 항변도 있다.

그러나 잠시라도 소위 자기 계발이란 것을 소홀히 하면 경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으니‘자본의 도구’가 되는 종속을 택하는 것이 옳다는 이러한 단순화된 양자택일의 논리는 왠지 설득력을 갖추기엔 미흡하지 않은가? 당장은 안전한 자신의 보위가 되는 듯 보이지만, 이는 결국 부정의와 불평등, 비인간화, 인간소외를 고착화시키고 자본의 노예로 길들이려는 지배계층에 굴종하는 삶을 완성하는 것 이상이 아닐 것이다. 오늘의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라는 무한경쟁 시장의 논리, 즉 시장만능의 이데올로기는 경쟁의 원리, 약육강식의 원리, 탐욕의 원리만 작동되고, 이를 위해서는 인권, 자유, 민주주의는 기꺼이 희생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미명하에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자유를 부인하던 군부독재 시절로 역진된 형국과 한 치의 차이도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감각, 무의식을 자처하고, 지배자들에게만 가치판단을 맡길 때, 어느덧 회복할 수 없이 잘 길들여진 비인간화된 노예의 삶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불평등, 억압, 배제와 차별이 고착화된 사회, 작은 물질에 자신의 자유를 내어준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완전한 사고 정지증’에 걸린 듯한 오늘의 사람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집단적 각성, 의식화가 지닌 의미의 오늘에서의 재해석을 필두로, 신자유주의적 세속(反)윤리의 틀을 벗어나 경쟁의 바깥으로 탈주하는 것으로서의 책 읽기,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의 이해를 통한 전쟁의 파렴치한 속성들 - 권력과 민중 격차의 극대화, 제국주의의, 계급원칙의 적나라한 불평등... -에서부터 “사대주의에 기초한 허구적 주류의식과 무지몽매함”으로 한국전쟁의 참화와 분단국가의 서러움을 겪고서도 전쟁에서 완전히 벗어날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의 또다른 냉전체제의 병리현상을 지적하기도 하며, 정말 기형적인 한국 기독교의 본말이 전도된 제도 종교로서의 비판과, “예수를, 진리를 이기적 욕망충족의 수단으로 착각”하여 “욕망에 마음을 굽히고 돈에 허리를 굽히는 행위가 사실상 우상숭배라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는”종교인에 대해 생각한다.

한편, 영어를 강조하는 상상력빈곤의 이 사회의 진정한 속셈인 “지배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영어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 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라는 통찰과, 창조적 사유의 자리가 없는 실용영어가 지니는 허위, 그리고 무엇보다 원어민 교육을 받아 혀 꼬부라진 그럴듯한 발음에도 정작 “비판적이고 포괄적인 사고력이 없는” 맹탕의 영어로 일그러진 한국인의 초상을 말한다. 그럴듯한 발음의 영어를 구사하지만 사유와 지식이 없는 무식한 영어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특히, 지식인에 대한 사회적 책무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은 이 저술과 이영희 선생의‘배우게 하는 사람’이라는 스승의 개념과 연결되어, 학벌세상의 승자인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을 향해 매운 회초리를 든다. 삶과 앎이 불일치하는 한국 지식 사회의 고질병은 물론, 탈근대적 과제와, 여전히 매우 질 낮은 민주주의와 같은 근대적 과제까지 중첩된 한국사회에서의 합당한 지식인의 역할을 논의한다. “현학의 하늘에서 대중의 땅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해야 한다는 권유”는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자각한 파리아(pariah,주변인)의 관점’그것으로서, 지식인의 계몽자로서의 기능을 강조한다.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와 시장지상주의를 밀어붙이는 이 정권은 점점 대중의 사회안전망을 축소하고 개인의 행복이나 복지가 모조리 개인의 책임이 되는 사회로 퇴행시키고 있다. 또한 교육은 “‘약자를 보호하자’가 아니라, 심지어‘강자가 어떻게 약자를 더 잘 먹을 수 있을까’를 가르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옛날 옛적부터 잘 먹고 잘산 놈들이 제 권리를 잠시 빼앗겼는데 도로 찾으려 일어나는, 반동이 일어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은 역사의 경험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평등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보편적 복지가 높아지고 생산성도 높아질 수 있도록 가치관, 인간관, 세계관을 개량하는데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눈앞의 풍요 속에 매몰되어 진정한 가치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악덕한 제도, 정치, 사상에 굴종하지 않는다는 저항적 인간을 목표로 하는 자기의식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이 저술은 그래서 지금에 다시 이영희를 말하고, 집단적 깨어남을 말하여야 하는 필연적 요구를 담고 있다. 오래전 대학신문사에서 독재정권의 말로를 지켜보고, 그리고 더욱 악질의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폭력의 시대에 이영희의 저작들을 읽고, 민주화운동을 취재하며 학우들과 울분을 토해내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더 이상 이러한 집단 의식화를 얘기하는 세상이 아니기를 바랐건만 소비지상의 물화된 신자유주의라는 우상으로 바뀐 대상이 30년 전으로 사회를 역진시키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 등 다방면의‘특수 지식인’들이 바로 이러한 각성을 위해 대중을 향한 노력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변혁은 반드시 올 것이란 말을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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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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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이고 낯선, 게다가 추상적이기까지 해서 좀체 접근이 쉽지 않은 시(詩)를 잘 알려진 현대 철학자들이 구축해 놓은 개념을 통해 명쾌한 이해의 언어로 전달해주는 일종의 철학적 시평(詩評)이자, 또 한편은 시를 배경으로 하여 세상을 폭넓게 사유할 수 있도록 어렵게만 여겨지던 현대철학 사상을 수월하게 풀이하여 인간 본성과 사회를 통찰하는 안목을 제고시켜주기 위한 저자의 대중을 향한 배려이자 의지라 할 수도 있겠다.

21명의 시인들의 시와 해당 작품이 함축하고 있는 세계를 동일 수의 철학자들이 저마다 포착한 사유의 문법을 이용하여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해석하고 있다. 즉 42명의 시인과 철학자가 만들어내는 일상적 세계의 동요(動搖)와 이성의 무능지대를 드러내는 인문학적 성찰의 만찬장이라 할 수 있다.
박노해, 기형도, 김남주 시인에서부터 유하, 박찬일, 김준태 시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들 시인들의 작품과 결합하여 네그리, 비트겐슈타인, 아렌트에서 벤야민, 호네트, 박동환이라는 걸출한 철학자들이 포획해 낸 세상 읽기의 향연이기도 하다.

가뜩이나 친숙한 세계가 아닌 원초적으로 낯선 세계를 표현하는 시를 난해한 철학으로 설명한다니 아예 도리질을 하게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철학이란, 바로 그 낯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조성해 낸 개념이기에 읽어내지 못했던 그 세계를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그래서 저자는 바로 이 철학의 새로운 개념들 하나마다 어느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상의 비유를 통해 친절한 설명을 해주고,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한 식견을 기초로 하여 낯선 언어들로 구성된 추상의 세계를 해독하게 해준다. 마치 친절한 개인교습을 받는 듯하다고 할 정도로 세심함과 독자와 밀착된 설명은 가히 이 저술의 본질이자 탁월한 장점이 된다.

인간이 지향하는 궁극적 꿈이란 무엇인가? 자유! 기쁨! 이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바로 이 자유와 기쁨의 희생이 강요되거나 억압하는 힘과 경쟁케 한다. 그것이 사랑이 되었든, 인간소외가 되었든, 정치적 박해가 되었든, 삶과 죽음의 본질이 되었든 말이다. 수록된 시(詩) 역시 사랑의 본질에 대한 탐색부터 삶의 절망, 인간자유를 구속하는 지배력의 저항, 인간의 성적 욕망, 자본주의의 속성, 타자성, 전체주의적 폭력, 물질주의의 한계성 등 원초적 본질들에 대한 다양한 구성을 하고 있어, 취향대로 골라 읽는 재미를 누릴 수도 있다.

금지와 금기, 즉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욕망을 통해 에로티즘, 존경, 결혼을 통찰한 ‘바타이유’의 철학은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빠스’를 읽으면서 ‘옥탑위의 빤스’를 떠올리는 박정대 시인의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으로 연결되고,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타자를 가장 강하게 느낀다”는 ‘레비나스’의 유아론을 넘어서 타자를 향한 철학으로 ‘원재훈’의 <은행나부 아래서 우산을 쓰고>가 설명되며, “사랑이란 그 자체가 비-관계, 탈-결합의 요소에 존재하는 이 역설적 둘의 실재성”이라고 사랑의 통념을 바꿔버린 ‘바디우’의 시선은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서 타자의 자유성으로부터 발생하는 질투의 본질을 탐색하기도 한다.

또한 근면이라는 덕목에만 충실한 개를 빗댄 김남주 시인의 <어떤 관료>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던” 인간의‘철저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가 지닌 악(惡)보다 흉악한 파멸성을 이야기하고, ‘최명란’의 <아우슈비츠 이후>라는 시를 통해서는‘아도르노’의『부정 변증법』의 핵심인‘동일성 사유’의 전체주의적 내적 논리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특히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욕망의 폐해들이 인간성의 파괴에 얼마나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는지는 ‘유하’의 <오징어>에서 발견되는 욕망의 집어등이나, ‘박찬일’의 <팔당대교 이야기>가 던지는 물화의 세계로 퇴보한 인간 상실의 처량한 현실로 대변되고 이들의 해석본인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나 ‘호네트’의 『물화-인정 이론적 탐구』는 매혹적인 읽기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렇게 시와 철학적 사유가 어울려 구성된 이 저술은 어렵게만 여겨지던 현대철학을 대중적 시선의 읽기로 친근하게 다가서게 하고, 나아가 사유의 깊이를 심화시키기 위한 관련 저술들의 소개로 인문학적 감수성을 더욱 일깨운다. 결국 어렵고 낯선 두 인문학적 가지를 기쁨과 행복, 자유라는 인간 이상으로의 접근하는 통로이자 존재로서 쉽게 이해케 해주는 장(場)이 된다.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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