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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한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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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년대 한국의 청년들, 그리고 대중의 사상적 은사였던 이영희 선생을 왜 지금 다시 논의하여야만 하는가? 다시 말해 ‘의식화’로 대변되는 정신의 혁명, 대중의 깨어남이 요구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당위의 질문에 대하여 이 저술은『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으로 상징되는 잠자던 대중을 깨웠던, 즉‘깨어난 자들의 끊임없는 증식’을 통해,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던 독재의 암흑이란 철벽을 부수고 일궈냈던 민주화의 성취가 오늘에 다시금 어떠한 의미로 다가서는지를 세대와 분야를 아우르는 인물들의 담론으로 펼쳐내고 있다.

여기에는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는 억압되었으며, 밀실로 붙들려가 폭력에 시달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가는 민주주의의 실현은 요원하기만 하였던 악독한 독재정권이 지배하던 시절, 역사의식도 없으며, 세계사적 흐름을 읽지 못하던 무지몽매한 지배계급의 폐쇄적 폭압의 시대에나 필요했지 오늘에 새삼스레 대중의 집단적 각성, ‘의식화’의 논리를 꺼내드는 것은‘꼰대’들의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냉소도 있다. 더구나 온통 물화(物化)되어버린 사회, 당장 밥벌이라는 생존의 문제에 허덕이고 있는데 무슨‘자유’타령이냐, ‘자본주의에 편입’되기 위해 발버둥치기에도 모자란 형국이란 말이다. 라는 88만원 세대의 항변도 있다.

그러나 잠시라도 소위 자기 계발이란 것을 소홀히 하면 경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으니‘자본의 도구’가 되는 종속을 택하는 것이 옳다는 이러한 단순화된 양자택일의 논리는 왠지 설득력을 갖추기엔 미흡하지 않은가? 당장은 안전한 자신의 보위가 되는 듯 보이지만, 이는 결국 부정의와 불평등, 비인간화, 인간소외를 고착화시키고 자본의 노예로 길들이려는 지배계층에 굴종하는 삶을 완성하는 것 이상이 아닐 것이다. 오늘의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라는 무한경쟁 시장의 논리, 즉 시장만능의 이데올로기는 경쟁의 원리, 약육강식의 원리, 탐욕의 원리만 작동되고, 이를 위해서는 인권, 자유, 민주주의는 기꺼이 희생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미명하에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자유를 부인하던 군부독재 시절로 역진된 형국과 한 치의 차이도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감각, 무의식을 자처하고, 지배자들에게만 가치판단을 맡길 때, 어느덧 회복할 수 없이 잘 길들여진 비인간화된 노예의 삶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불평등, 억압, 배제와 차별이 고착화된 사회, 작은 물질에 자신의 자유를 내어준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완전한 사고 정지증’에 걸린 듯한 오늘의 사람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집단적 각성, 의식화가 지닌 의미의 오늘에서의 재해석을 필두로, 신자유주의적 세속(反)윤리의 틀을 벗어나 경쟁의 바깥으로 탈주하는 것으로서의 책 읽기,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의 이해를 통한 전쟁의 파렴치한 속성들 - 권력과 민중 격차의 극대화, 제국주의의, 계급원칙의 적나라한 불평등... -에서부터 “사대주의에 기초한 허구적 주류의식과 무지몽매함”으로 한국전쟁의 참화와 분단국가의 서러움을 겪고서도 전쟁에서 완전히 벗어날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의 또다른 냉전체제의 병리현상을 지적하기도 하며, 정말 기형적인 한국 기독교의 본말이 전도된 제도 종교로서의 비판과, “예수를, 진리를 이기적 욕망충족의 수단으로 착각”하여 “욕망에 마음을 굽히고 돈에 허리를 굽히는 행위가 사실상 우상숭배라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는”종교인에 대해 생각한다.

한편, 영어를 강조하는 상상력빈곤의 이 사회의 진정한 속셈인 “지배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영어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 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라는 통찰과, 창조적 사유의 자리가 없는 실용영어가 지니는 허위, 그리고 무엇보다 원어민 교육을 받아 혀 꼬부라진 그럴듯한 발음에도 정작 “비판적이고 포괄적인 사고력이 없는” 맹탕의 영어로 일그러진 한국인의 초상을 말한다. 그럴듯한 발음의 영어를 구사하지만 사유와 지식이 없는 무식한 영어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특히, 지식인에 대한 사회적 책무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은 이 저술과 이영희 선생의‘배우게 하는 사람’이라는 스승의 개념과 연결되어, 학벌세상의 승자인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을 향해 매운 회초리를 든다. 삶과 앎이 불일치하는 한국 지식 사회의 고질병은 물론, 탈근대적 과제와, 여전히 매우 질 낮은 민주주의와 같은 근대적 과제까지 중첩된 한국사회에서의 합당한 지식인의 역할을 논의한다. “현학의 하늘에서 대중의 땅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해야 한다는 권유”는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자각한 파리아(pariah,주변인)의 관점’그것으로서, 지식인의 계몽자로서의 기능을 강조한다.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와 시장지상주의를 밀어붙이는 이 정권은 점점 대중의 사회안전망을 축소하고 개인의 행복이나 복지가 모조리 개인의 책임이 되는 사회로 퇴행시키고 있다. 또한 교육은 “‘약자를 보호하자’가 아니라, 심지어‘강자가 어떻게 약자를 더 잘 먹을 수 있을까’를 가르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옛날 옛적부터 잘 먹고 잘산 놈들이 제 권리를 잠시 빼앗겼는데 도로 찾으려 일어나는, 반동이 일어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은 역사의 경험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평등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보편적 복지가 높아지고 생산성도 높아질 수 있도록 가치관, 인간관, 세계관을 개량하는데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눈앞의 풍요 속에 매몰되어 진정한 가치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악덕한 제도, 정치, 사상에 굴종하지 않는다는 저항적 인간을 목표로 하는 자기의식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이 저술은 그래서 지금에 다시 이영희를 말하고, 집단적 깨어남을 말하여야 하는 필연적 요구를 담고 있다. 오래전 대학신문사에서 독재정권의 말로를 지켜보고, 그리고 더욱 악질의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폭력의 시대에 이영희의 저작들을 읽고, 민주화운동을 취재하며 학우들과 울분을 토해내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더 이상 이러한 집단 의식화를 얘기하는 세상이 아니기를 바랐건만 소비지상의 물화된 신자유주의라는 우상으로 바뀐 대상이 30년 전으로 사회를 역진시키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 등 다방면의‘특수 지식인’들이 바로 이러한 각성을 위해 대중을 향한 노력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변혁은 반드시 올 것이란 말을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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