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로 읽는 서양철학사
호리카와 데쓰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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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철학을 시작으로 16세기 이후의 근현대 사상가들의 삶의 배경과 그들 사상의 핵심적 사유를 개관(槪觀)한 저술이라 할 수 있겠다. 저자는 머리말에서“철학자들의 사생활을 들여다 본 책”이라 하고 있지만, 사적(私的)인 야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네들 철학의 본질을 설명하고 오늘의 시각을 담은 비판까지 더해진 현대사상 미니 사전이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 같다.

다만, 저자의 시선이 시장 자유주의적이고 미국의 실용주의 노선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어, 알튀세르, 라캉, 그람시, 알도르노, 들뢰즈, 푸코, 부르디외 등 현대 비판철학자들에 대한 어떠한 내용도 존재치 않다는 아쉬움과 도덕적 상대주의까지 더해져 불편함을 떨치기 수월치 않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잘 알려진 철학자들. 데카르트, 로크, 흄, 스피노자로부터 니체, 헤겔, 칸트, 하이데거에 이르는 근대 계몽주의 철학의 사상적 흐름을 흥미로운 일화와 쉬운 일상적 문장으로 한 눈에 조망 할 수 있게 해준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치 아니 할 수 없다.

특히 홉스와 로크의 사회계약론과 루소의 그것을 설명하는 것과 같이 철학자들의 사상적 핵심을 관련 철학자들의 사상과 비교하여 그 차이점을 명료하게 인식하게 해주는 가면, 홉스의‘자연상태’에 대한 이해나, ‘경험론’과 ‘합리론’의 극명한 배경적 해석 등 잘 이해되지 않던 철학적 용어의 정의나 이론의 중심사상을 재밌는 소설작품처럼 수용케 하여주는 것은 이 저작의 뛰어난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철학의 현실과의 괴리를 없애주려는 듯 각각의 철학이론에 대한 회의나 문제의 제기에 있어 시사성이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화두를 통해 그 이해의 접근을 더욱 편리하게 도모하기도 한다.‘사회계약론’에 대한 한 예로서, 국가가 개인에게 전쟁에 참여하여 생명을 요구할 경우, 개인은 그 계약을 철회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같다. 존 로크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그리고 흄은? 루소는 무어라 했을까? 개인의‘자유의지’를 주장한 철학자들과‘국가의 설립은 폭력’이라고 하는‘원시계약’을 주장한 이들은 분명 다른 대답을 들려준다. 이처럼 외형적으로는 동일한 이론이지만 그 이론에는 각기 다른 철학적 신념을 가지고 있음을 더 할 수 없이 알기 쉽게 설명하여 준다.

볼테르가 루소의 가식과 위선을 고발하는 이야기,  디-드-로가 볼테르의 인간 기피적 칩거생활에 대한 조롱의 편지, 루 살로메와 니체, 릴케 등등의 염문, 샤르트르와 보봐르의 계약결혼 등 숨겨진 사생활 이야기도 또 다른 대가들의 인생기로 독서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러한 이 저작의 장점들 중에서도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이들 철학자들의 대표적 저술이외에 흔히 알려지지 않은‘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칸트’의 <인간학> 과 같은 저술들에 대한 소개를 들 수 있다. “결혼한 지 일주일만 지나면 자신의 눈을 되찾는다.” “연애할 때 질투는 약이 되지만 결혼한 다음에는 독초가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을 칸트가 하였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유머와 재치 넘치는 새로운 철학자를 발견하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의미 따위는 필요 없다. 신 따위도 필요 없다. 신이 존재하든 않든, 중요한 것은 신이 없어야만 진정한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런 사람을 초인이라고 한다.”라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에 해설이나,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이성적이다.”라는 ‘헤겔’의 다분히 현실주의적인 사상의 배경, 합리적 자본주의에 대한 아담 스미스의 절묘한 해석처럼 엑기스만 기막히게 정리한 것도 또 하나의 특징이 되겠다. 
 

이와 같은 16~19세기 오늘에 이르는 근현대 사상의 조류를 알차게 개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20세기 이후의 철학에 있어서는 많은 취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단지 프로이트와 하이데거, 그리고 사르트르에 대한 두루뭉술한 에피소드, 편협한 과학사고와 실용주의 노선이 빚어내는 왜곡과 편견정도이다.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는 서투르고 일천한 지식으로,‘리처드 도킨스’의‘이기적 유전자’에 대해서는 섹스기계론이라고 일방적이고 지극히 무지한 편견을 들이대는 식이다. 더구나 오늘의 사상적 조망에 이르러서는 “일단 정책을, 원리는 그다음에!”라는‘리처드 로티’의 실용주의 사상에 각성되어 특정 민족의 대량 학살과 같은 인권문제를 임신중절의 문제와 동일시하며 도적적상대주의론을 펴기도 한다. 이해의 득실로 볼 때 인종 학살도 선이라 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승리를 외치며, 역사의 종언을 외친‘프랜시스 후쿠야마’같은 근본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편협함과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은 이 저작의 큰 결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재미있고 지혜롭게 정리된 근현대 서양철학의 개관서로서 읽기에 수월한 저작임에 분명하다. 단, 경계 없는 신자유주의적 사고와 서투른 과학 지식, 도덕적 상대주의와 실용주의 등의 극히 주관적 시선이 현대사상을 잠식하고 있는 점은 보편적 철학소개서로 읽히는 것을 방해한다. 아마 이 저작의 오점이라 하여야 하겠다. 괜찮은 저술임에도 청소년에 권장하기가 선뜻 망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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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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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주의와 주자학에 경도되어 말과 법도의 이치타령만 하던 조선의 사대부들, 개인과 당파의 이해관계라는 유교의 가족 이기주의에 헤어나지 못하고, 게다가 반정이라는 불신의 탑 위에 놓인 불안한 왕권과 무능하기까지 한 왕에 이르는 비루하고 파렴치한 지배층이 만들어낸 굴욕의 역사인 삼전도 항례(降禮)이후의 이야기이다. 시기적으로‘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잇는 역사를 담고 있지만, 소설 『소현』은 사건으로서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소현세자(昭顯世子)라는 인물의 인간적 고뇌와 감상적 연민에 보다 기운 작품으로 읽힌다.

당시대를 기술하고 있는 역사서들의 시시콜콜한 내용은 항상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데, 주화론자(主和論者)냐, 척화론자(斥和論者)냐 하는 고작 사대성의 지향점에 대한 왈가왈부를 탈피하지 못하는 편협한 지배층의 시선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 작품은 소현과 봉림 등의 청에서의 볼모 기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기에 이를 외면하지 못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 즉 “성현의 도리가 모두 뜻으로 이루어지니...”하는 식의 사대부들의 더없이 좁아터진 인식론의 한계를 들추어내는 것처럼 감히 닿지 않는 그 통한의 슬픔을 이루는 뿌리들을 살피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읽을 수 있다.

한편 고단한 민중의 삶으로서 청에 끌려온 질자들과 아녀자들, 백성들의 표상격으로 소역관인‘만상’, 청의 대학사인 비파의 첩실이 된‘흔이’, 그리고 ‘막금’이라는 버려진 하층민이 등장하지만, 정작 민중의 고통, 그 속으로 침투하지 않으며, 단지 세자라는 최고 권력자의 전지적(全知的) 시선으로 논평되기에 왜곡되고 일방 된 관점으로만 기술되는 아쉬움이 있다.
그 한 예로서“배우지 못한 것이 말로만 늘었으니 그 말의 법도 없음이 차마 들어줄 지경이 아니지만...”하는 만상에 대한 세자의 외면하는 태도는 나라가 백성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오히려 버려진 백성들의 생존을 위한 비루함과 미천함만을 비난하는 것과 같이 아무런 해석도 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이러한 비난과 폄하는 도처에서 계속되는데, “조선의 피는 깡그리 잊고, 청의 세도만 살아남은 저와 같은 자들은 관소에 와서는 그 세도를 뽐내었다.”고, 무능한 권력자들이 백성의 비천함만을 겨냥하는 것은 이 작품의 안타까운 한 점 얼룩이라 할 수 있겠다.
사대부들이란 것들은 작가의 말처럼 위엄은 사라지고 위세만 남아 주둥아리와 자신의 이익만을 모색하던 시대이고 보니 볼모인 세자가 느끼는 능멸이 어찌 청의 세도 때문이기만 했겠는가!
아비인 왕 인조의 고뇌를 이해하고 나라와 백성의 자존감을 위해서도 세자 소현의 이국에서의 삶이란 순전한 고통뿐이었으리라.

허나 국운이 다한 명,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세운 주화파들의 사대주의는 권력을 위한 노심초사로 청의 볼모인 세자가 청의 권력 앞 “어디서든 엎드렸고, 어떤 때는 알아서 엎어졌다.”는 그 아픈 슬픔과 위기, 능멸의 시간을 배척하고, 행동과 말, 뜻으로 대항 할 것을 말하는 것은 진정 던적스럽기만 하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지존인 세자가 “그 의로운 뜻을 대감이 나를 대신하여 저들에게 보이겠소?”하는 하문을 하겠는가.
8년간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1645년 2월 영구 환국한 후 불과 2개월 후에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불운의 세자 소현에 대한 그 외롭고 의지할 데 없었던 통한의 세월을 말하는 이 작품은 그래서 오늘의 우리들에 대한 자화상이 되어 거대한 회한(悔恨)의 르포르타주(reportage)가 된다.

한편, 소설은 청의 섭정왕 도르곤의 연경을 끝으로 하는 명의 정벌장면을 비롯한 첨예한 권력투쟁의 잔혹함에서 빚어지는 정치세계의 냉혹성, 그리고 속환사녀(士女)와 같은 청의 침략으로 인한 조선 민중들의 삶, 물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불이 함께 타서, 물이 불을 끄고, 불이 물을 말릴 정도의 여성의 몸과 같이 관능까지 채운 맛깔스러운 구성을 하고 있어 본원적인 고통을 말하고 있음에도 결코 재미를 잃지 않는 작품이다. 막금이 만상에 하는 말, “나으리 어디를 가시려 합니까? 세상이 천 번을 바뀌어도, 이승이 모두 무간지옥인데.”하는 말이 뇌리를 맴돌고, 죽음까지 농락당하며, 굴욕을 참고, 인내했던 소현의 백성과 나라를 향한 정치의 열망이 싸늘한 죽음으로 보상받을 수밖에 없었던 비극의 역사가 주는 모멸감은 오늘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아둔하기까지 한 우리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어 무참함이 되어 가슴이 치받친다. 항례에서 머리를 땅에 찢는 굴욕은 굴욕이 아니다. 그보다 더한 굴욕을 주는 우리들의 초상이 더욱 고통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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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명 앗아가주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
앙헬레스 마스트레타 지음, 강성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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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명 앗아가 주오. 내 심장을 꺼내 버려요.

내 생명 앗아가 주오. 고통이 그대에게 상처를 준다 해도.
그대 다시는 내 모습을 볼 수 가 없어요, 드디어 그대의 두 눈을 훔쳐버렸거든요, 난. 
                                - 카탈리나의 <내 생명 앗아가 주오> 노래 中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자의 아내인 한 여인의 발칙하고 철철 넘쳐나는 끼를 만끽하는 재미가 물씬하다. 절제의 위선을 벗어던지고 진솔하게 쏟아내는 감성의 향연이 더 없이 극적인 즐거움을 주고, 철모르던 소녀가 성숙한 여인으로, 남성과 정치 세계의 관찰자로서 보내는 그 시니컬한 냉소와 운명적 사랑의 전율이 야릇한 흥분으로 달뜨게 한다.

1930,40년대 멕시코 혁명기의 권력계층의 부패하고 파렴치한 실체를 깊숙이 조명하고, 민중의 시름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의 본질을 사회비판이나 정치적 작품으로 해석하는 것에는 반대하고 싶다. 주인공‘카탈리나(카티)’라는 여인의 여성이 되고, 그래서 하나의 견고한 주체로서의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 바로 그 과정에서 겪고 느끼고 갈등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슬퍼하고 사랑하는, 여자의 적나라한 내면을 읽는 것이 오히려 이 소설의 진정성이라 하여야 할 것 같다.

열다섯 살 소녀와 서른이 넘은 남자의 결혼, 혁명주체세력의 실세로 권력과 부를 쌓아가는 야심가인 ‘안드레스 아센시오’장군의 아내가 된 이 소녀,‘카탈리나’의 시선으로 본 상류사회의 위선과 폭력, 그리고 그네들의 일원이자 공범일 밖에 없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자각과 갈등, 특히 소설의 중심사건이 되는 불꽃같은 관능의 열기로 싸인 오케스트라 지휘자‘카를로스 비베스’와의 사랑을 정점으로 하는 유기적 구성과 전개는 달콤한 낭만적 쾌감에 그대로 젖어들게 한다.

권력과 부정한 부를 쌓아가기 위해 노동자와 정적을 스스럼없이 제거해대는 남편의 실상을 깨달을 정도로 성숙한 여인이 되자, “난 그 사람 아이들의 엄마였고, 그이의 집 안주인이었으며, 마누라이자 하녀였고, 그림자였고, 노리개이기도 했다.”라는 카티의 인식은 남편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자기 권력의 자각으로 나타난다. “난 다리를 계속 모으고 있었다. 처음으로 꼭꼭 닫고 있었다.”고 항변하는 모습처럼. 
 

소설의 시작부와 말미에‘뒤마’의『춘희』가 카티에 의해 인용되는데, 춘희의 주인공인‘마르그리트 고티에(Marguerite Gautier)’의 삶, 즉 사랑과 비극의 이야기를 자신과 연인 비베스의 비련(悲戀)과 슬그머니 동일시하는 것에서 이 작품의 속살을 살필 수 도 있다.
한편 남성과 배우자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없이 결혼했으나 탐욕스럽고 사악하기만 한 남편의 그늘이 오직 불행한 삶으로 느껴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의 생각을 캐고 싶어 하면서도 그가 무슨 일을 벌이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 바로 그 여자, 바로 그 카탈리나.”라고 자신의 의지를 행동으로 이행하지 못하는 그 갈등과 좌절이란 연약한 여인네로서의 한계를 시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을 방조할 수 있는 방편의 귀띔을 듣는 순간 “이상야릇하고 돌발적인 기쁨”을 느끼고 “나 자신이 생소했다.”고 평화로운 마음의 안정을 갖게 되는 구절은 자유의지의 희구라는 인간본성이 섬뜩함으로 다가오기조차 한다. 
 

페미니스트적 시각, 즉 주인공인 카탈리나의 시선이기에 남편인 주지사였고, 경제부 장관이자 대통령 고문인 안드레스의 인간적 욕망이나 내면세계에 대한 이해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죽음을 감지한 그가 마음껏 쉴 수 있는 언덕빼기가 있는 고향‘사카틀란’을 말하며, “바다는 괴로워. 조용히 있는 법이 절대로 없지.”하는 말에서 그 분주했던 삶의 소란스러움에서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니었음을, 그래서 위로받고 싶었던 외로움에 대한 연민을 통해 권력과 명예와 부의 공허함이 다가온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에 대해서 애통함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했고,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는 여인. 더구나 죽은 옛 연인을 떠올리고서야 남편의 장례에서 오열을 터뜨리는 미망인의 모습이나, “빗물 아래로 웃음을 머금었다. 내 미래를 생각하며 흐믓해 했다. 거의 행복하기까지 했다.”는 여인의 고백의 실체는 정말이지 발칙함을 넘어선다.
화려함과 욕정과 권력의 비열함, 그리고 상류계층의 허영과 부조리로 가득한 흥미만점의 이 소설의 맛을 무어라 할까. ‘아베프레보’의『마농레스코』를 떠오르게도 하고, 뒤마의 『춘희』와 같은 그 맛이라 할까? 대중성 높은 수작(秀作), 고전적 대열에 놓인 현대문학의 한 편으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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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8 제너시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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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창세기? 창세기 앞에‘새로운’이라는 수사를 하는 것이 모순이긴 하지만 이 작품은 2050년 이후의 새로운 인류에 대한 기획이기에 분명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단지 4시간의‘학술원 회원 구술시험’이라는 단순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숙연해 질 정도의 무게감 있는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세계가 있는가하면 흥미진진한 SF적 소재로 재미를 견인하고, 신(新)인류에 대한 구상의 당위를 숙고하게 할 정도로 균형을 갖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2050년부터 충돌하기 시작하여 2051년 마지막 전쟁을 벌이던 세계를 피해 해양방벽을 쌓고 세계로부터 문을 잠그는데 성공한 새로운 섬, 플라톤의‘공화국’이 건국된다. 이 이상적인 국가의 건설은‘토머스 모어’식 <유토피아>인지, ‘H.G웰스’식 <디스토피아>인지는 개인이냐 집단이냐라는 관점에 따라 달리 이해될 수 있지만, 화자(話者)인 ‘아낙시맨더’는 “개인적인 잠재력을 발휘하는데 가장 적합한 국가를 만드는데 성공했는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다고 하는 것으로 보면 디스토피아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만 같다.
부모와 떨어져 양육되고 생후 1년 뒤 검사 결과에 따라 계급 배치를 하거나 제거하는 획일적이고 냉혹한 제도나, 공포 분위기에서 공화국의 틀을 유지한다는 식의 표현은 디스토피아로서의 공화국을 확신케 한다.

이 소설의 시발은 철학자>기술자>군인>노동자로 이루어진 공화국의 4계급제도라 할 수 있는데, 사회의 안정을 위해 반란세력화 할 수 있는 하위계급인 군인, 노동자를 대체할 수 있는‘충분히 진보한 로봇’의 개발을 통한‘평등사회’를 구현한다는 배경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소설 전편을 대표하고, 내재하는 암시와 복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화자의 구술시험 시점에서의 공화국을 구성하는 존재들은 과연 누구인가? 를 이미 말하고 있음에서이다.
한편 주인공으로서의 화자인 아낙시맨더와 화자의 이야기 속 주인공인‘아담’이라는 중층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아낙시맨더의 구술시험 주제인 공화국의 역사에 있어 전환점이 된‘아담의 삶’을 고찰하는 가운데 인간과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궁극의 사유를 객관적 시선으로 그려내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낙시맨더의 구술답변이라는 형식으로 소개되는 아담의 신화적인 내용은 아낙시맨더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또한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아담, 이브, 플라톤, 헬레네, 아리스토텔레스, 페리클레스, 아낙시맨더(아낙시만드로스)와 같이 그리스 철학자와 창세기 인물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상적 원천이나 기원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엿보게 한다.
아담은 공화국의 실질적인 최초의 존재로서 이해된다. 초기 공포의 정치로부터 안정화된 공화국이 점차 “선택에 대해, 기회와 자유에 대한 말”들이 성행하기 시작되던 시대에, 외부세계를 차단하는 해안 방호벽을 지키던 아담이 국법을 어기고 해안가에 표류하는 이브를 구원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국가적 사건으로 재판이 이어지고, 아담의 행위에 연민과 동조를 하는 국민의 반란이란 압력과 타협하여 아담은 사회성 계발모델에 입각한 혼돈의 창발(創發)이라는 프로젝트하에 ‘아트’라는 안드로이드의 완전성을 위한 인간 실험자로 생활하게 된다.

여기서 충분히 진화된 안드로이드, 즉 로봇인 ‘아트’와 인간인‘아담’의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의 정신이란 무엇인지, 인간과 기계의 차이를 경계 짓는 요인이란 무엇인지, 의식과 관념의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한 원초적 설전(舌戰)을 통해 인간성, 그리고 생명의 본질을 사유케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에 생명을 불어넣는 거야. 나는 사유에 대해 생각하는 사상가지, 내가 호기심이고 이성이고 사랑이고 증오인 거야...(中略)...세상은 내 안에 머무르는 거야. ~ 내가 바로 의미야.”하고, 아담이 분노하여 인간의 차별성을 주장하는 문장들은 그 어떤 철학적 강론보다 멋지다.
그러나 안드로이드인 ‘아트’의 관념과 사유에 대한 강변 또한 인간의 실체성에 대한 의문을 충분히 제기한다. “왜 진화가 육체적인 것만 적용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진화는 매개체를 가리지 않습니다...(中略)...다른 기생충과 마찬가지로, 관념은 적합한 숙주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中略)...저를 만든 건 인간이 아닙니다. 관념이 저를 만들었죠....(中略)...사유는 어느 쪽을 더 선호 할까요?”

이 작품의 위대성은 실험공간에 갇혀있던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탈출하는 장면에 있다. 과연 기계가 탈출 의지가 있을까? 즉 기계가 관념을 지닐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창발이론이 진정 실현되는 것인지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자신을 통제하려는 모든 것에 저항하게 마련”이라는 관념의 존재는 아트의 탈출로 이어지고, 이것은 곧 기계의 인간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죽어가는 아담과 아트의 마주한 시선에서 관념의 승화가 이루어지고 그 관념은 자신의 숙주가 된 프로그램을 다시 짜기 시작한다. 아담과 이야기를 하며 보내는 동안 관념의 전이가 진행되고 아트는 아담이 된다. 아담은 아트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전송하여 복제를 시작했을 때 이를 방조한다. 여기서 아낙시맨더의 구술시험 시험관은 그걸‘원죄’라고 부른다고 한다. 찬탄을 연거푸 하게 하는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랑우탄의 모습을 한 아트들, 기회와 두려움 사이의 균형을 찾고, 관념에 정면으로 맞서 그것과의 타협을 통해 지속적인 평화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인류, 그것의 힘은 ‘본성’이라 한다. 점점 근본주의화 되어가고 그래서 서로 불신이 깊어지며, 정신은 쇠퇴하고 두려움과 비관주의가 공공담론을 지배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우리 인간의 모습은 진정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생각게 하는 정말의 대단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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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 판도라의 역사와 생태에 관한 기밀 보고
마리아 윌헴.더크 매디슨 지음, 김현중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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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0년 한국 영화시장을 달군 명장‘제임스 카메론’감독의 <아바타>에 대한 관람객들의 소감은 그야말로 대단한 외침들이었다. 경이롭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색체험이고 상상력을 초월한다!.... 장장 14년간의 구상과 제작기간만 4년이 소요된 한결같이 걸작이라는 이 영화를 지지하는 저변의 사상과 스토리, 그리고 영화적 탁월함이 어떤 것인지 진정 호기심을 외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인류의 게걸스런 탐욕과 이기심, 이로 인한 지구 생태계의 파손과 자원 고갈이 몰고 온 22세기의 지구와 인간, 황폐화된 지구에서 두려움과 공포, 질병과 죽음의 초조함에 휩싸여 있을 인간 앞에‘판도라’라는 의미심장한 탄소 순화체계를 가진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을 발견케 한다는 것은 과연 인간의 자기 정화로서의 의미를 신뢰했기 때문일까.


카메론이 그려내는 인류 구원의 신세계는 태초의 지구가 그러했을 것만 같은 경이로운 원시 자연과 수렵과 채집의 자유를 만끽하는 지적 생명체로 나타난다.

지구보다 작은 중력과 높은 밀도의 공기, 떠다니는 동산, 자체 발광(發光)하는 생물들, 덩쿨손처럼 뻗어나온 신경계 큐(queue)를 통한 생명체들 간의 교감과 영혼의 주체자로서의 판도라 등 정교한 과학 이론과 무한한 상상력이 결합하여 이룩한 인간이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이상(理想)의 공간을 보는 순간 관객들은 입을 정말 딱 벌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가 전달하려한 그‘진중한 메시지’라고 표현하는 것들을 구성하는 식물, 동물, 장비, 판도라의 지질과 대기, 첨단 무기와 운송수단, 나비족의 문화에 대한 과학적 주석과 영화의 서사와 연결된 배경의 설명 모두가 수록되어 있는 이 저술은 그래서 더욱 매혹적인 정보이자‘자료’로서 빛을 발한다. 설혹 영화를 보지 못한 이들에게까지도 한 편의 영화가 담아내는 경외의 담론들과 찬연한 색깔들, 소재 하나하나에 까지 미친 치밀한 구성에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할 것만 같다.

인간 조종자의 유전 물질을 아바타 배아 안에 삽입하여 나비족과 동일한 육체와 정신의 복제된 나비족 인간을 만들어내는 인간은 여전히 탐욕스럽기만 하다. 최첨단 기술 없이도 자연에 순응하며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비족과 완전한 생태균형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우림으로 뒤덮여 있는 판도라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요, 모체와 같은 공간으로서의 의미로 다가온다. 여기에‘물질-반물질’ 에너지 생성에 필수 물질이라는 언옵타늄(unobtainium)의 채굴을 비롯해, 호기심의 충족을 위해서, 그리고 상품화를 위해서 다시금 판도라의 원사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의 모습은, ‘균형’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나비족과 대비되어 파멸과 생존의 극명한 대비를 만들어 낸다.

판도라 대기의 구성성분이 지니는 생태학적 이해, 자기장과 이온화된 방사능, 식물의 굴성, 식물과 동물의 특성을 동시에 가진 생명체, 자식인 머리와 부모인 몸이 결합한 공생하는 동물, 식물과 새가 함께 진화하는 공진화,  질량이 없고 운동량만 포함한 양자, 중력에 대해서 갖는 지향성이 없는 식물 등등 생명체에 대한 메커니즘,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학적 지식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전복시키는 그야말로 가공할만한 상상의 과학적 지식이 즐비하게 소개되고 있다. 어느새 즐거워하고 반짝이는 눈과, 유쾌하고 정교한 미래과학 지식의 향연에 푹 빠진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이러한 영화의 소재와 배경에 대한 세세한 물질들의 내용에 버금가는 판도라와 나비족의 정신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인류의 고대 신화와 종교와 연결되어 점점 상실되어가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부재를 일깨운다. “생존과 번영 그리고 전통의 강력한 상징”인 의식용 활, 가장 신성한 곳으로서의 ‘어머니 베틀’과 같은 나비족의 성소(聖所)에 내재한 신성한 존재, 에이와와의 영적 교감, 판도라와 나비족을 포함한 자연생태계 모두의 긴밀한 영적 유대는 인간의 그러해야 함이라는 당위를 제시하는 듯만 하다.

호기심 충족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위험으로 내몰고, 인간 자신과 자연에 위협을 가하여 자멸의 길을 내딛는 인간을 지칭하는 나비족의 단어, “얼간이, 눈이 먼 사람”만큼 바른 표현도 없을 것 만 같다. ‘절대로 열어 보지마라!’라는 판도라의 상자는 결코 열려서는 안 되었던 것일 게다. 머나먼 행성, 원시의 낙원인 행성‘판도라’는 인간에게 열려서는 안 되었을 곳인지도. 그러나 이 책은 그 열려서는 안 될 판도라의 모든 것이 그 속살을 모두 드러내어 독자를 반기고 있으니, 호기심이란 아이러니는 참으로 막아내기가 불가능한 인간의 본성인 모양이다.
“한 쪽을 구원하기 위해 한 쪽을 파괴해야 한다는 모순”이라는 이 엄청난 딜레마, 인간의 DNA가 교배된 나비족 복제인간은 어쩜 카메론이 고민하고 꿈꾸는 인간의 과제이자 신인류의 모습인지도. 참으로 많은 영감을 주는 특이한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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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4 0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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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4 18: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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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4 08: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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