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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종말시계 - '포브스' 수석기자가 전격 공개하는 21세기 충격 리포트
크리스토퍼 스타이너 지음, 박산호 옮김 / 시공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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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 연료인‘석유’의 고갈로 인한 인류의 암울한 미래상 또는 인류문명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2009년12월10일자 영국의 시사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 Economist』를 통하여‘국제에너지기구(IEA)’가 '피크 오일(peak oil)'이 2020년에 닥칠 것임을 공식 인정함에 따라, 우리들의 일상은 유가의 상승에 따라, 어떻게 변화 될 것인지, 경제, 정치, 사회에는 무슨 일들이 발생할지, 그래서 우리들은 어떻게 이 변화되는 환경에 대처하여야 할지, 또는 준비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미래 보고서라 할 수 있다.

기괴한 낙관론들에도 불구하고 석유는 고갈될 것이며, 그 고갈을 향한 총생산량의 감소로 가격은 불가피하게 엄청나게 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진실이다. 유가가 오르지만 저마다 자신의 경제적 능력이 수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과연 그 수용 가능한 유가의 수준이란 어느 수준일까? 이대로 가만히 앉아 지금의 10배로 뛰어오른 유가에도 우리의 산업기반과 가정경제가 버텨낼 수 있다고 보는가? 아마도 3~4배만 되어도 거의 모든 산업은 정지되고, 도로에 움직이는 차량은 극단적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물론 유가의 상승에 따라 기술, 정책, 산업 제반에서 이의 대책을 준비하고, 그 구체적 실행에 착수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싶다. (한국의 국가정책에서 이러한 대책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적이 없음) 석유의 공급부족이 결국 지혜로운(?) 인간들에게 일정한 조정기간을 거쳐 새로운 에너지 시스템과 산업을 창출할 것이고, 인류의 일상도 거기에 맞게 재구성 될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임기웅변의 대응책으로 이러한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도 터무니없거니와, 설혹 정밀하게 구성된 준비가 있더라도 오늘의 세계사회의 일상은 거의 모두 석유에 의존하고 있기에 그 새로운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간과 재원이 요구될 것이다. 아마도 기나긴 ‘조정기간’에 심각한 실업, 극심한 경제 불황, 상상을 초월하는 식량난 등 국제분쟁으로 인한 고통과 참담함은 실로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우린 이러한 예측 가능한 시련을 극복키 위해 지금이라도 준비와 실행에 착수하여야 할 것이다.

이 저술은 이와 같은 곧 다가올 위기의 가능성에 대해 갤런(gal)당 유가(油價)의 추이에 따라, 불가피하게 변화되는 상황과 그에 대한 대처방안, 실제의 움직임을 분석, 예측, 설명하고 있다. 1 갤런 당 4달러에서 1 갤런 당 20달러에 이르기까지 9단계에 이르는 유가의 단계별 상승에 따른 인류사회에 미치는 파장은 실로 가공할만한 위협이 될 것이다. (*1갤런은 3.785리터)
4달러에 이미 주요 산유국의 절반이 생산을 줄이고 있으나, 여전히 소비에 열광하는 인간들은 절제와 위기의 심각성을 체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6달러에 이르면 이러한 인간사회는 아무런 대비도 없는 상황에서 이 변화의 촉발을 감지하기 시작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물론 유가의 상승이 부정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유가가 10퍼센트 오를 때마다 교통사고 사망률이 2.3퍼센트 감소하고, 1달러 오를 때마다 비만관련 질병 사망자가 미국에서는 1,000명씩 감소할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경찰등 관용 차량의 사용은 절대적으로 감소할 것이며, 이는 시민과 경찰의 친화와 호감 증대, 범죄의 감소라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니 불행 중 다행이란 것이 이런 상황을 일컫는 것일 게다.
8달러에 이르면 드디어 석유를 이용하는 항공사 등 직접산업들의 대학살이 본격화 되고, 사람들은 이동 수단의 비용을 감당 할 수 없어 인구와 생활시설이 밀집된 도시로 집중될 것이며, 유흥과 여가시설 등은 대부분 문을 닫을 도리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개인이 사용하는 차량은 모두 멈추어 차고와 주차장에 먼지를 안고 서 있을 터이다. 대규모 실업과 석유에 기반하는 제품 물가의 기하학적 상승으로 가계가 절망에 떨 것은 자명하다.

이에 대해 이미 미국 등 선진 여러 나라들은 전기차와 전기차의 상용적 기반을 위하여 송전시스템 및 관련 기간망의 구축을 위한 실행에 착수하여 정부, 전력기관, 관련 산업분야가 일체가 되어 구체적 예산은 물론 실행일정에 따라 그 단계별 이행을 하고 있을 정도이다. 충격을 완화하고 삶의 지속성을 유지키 위한 진지한 노력을 벌써부터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10달러에 이르면 “진보와 기술에 대한 보루”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며, 플라스틱 사회는 영구히 종말을 고하게 될 것 이란다. 그러나 우매한 인간은 12달러가 되어서야“소득을 갉아먹는 에너지의 전성시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자각하게 된다니, 그 탐욕스러움은 자신들의 종말을 목전에 두고서야 깨달을 정도로 어리석은 모양이다.

교외 주택의 가치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대형할인점의 시대는 종지부를 찍고, 동네의 상점이 부활하며, 도심 주간고속도로는 영구적으로 철도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대도시는 더욱 조밀해 질것이다. 14달러에는 급증한 운임비를 감당할 수 없어 세계화는 역행하고, 해외의 생산기지는 자국으로 철수 하게 되며, 쓰레기처리 비용으로 신문지, 포장지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급기야 식품네트워크가 붕괴되고 지역농장 중심의 일상으로 회귀하는 16달러 시대, 그리고 대부분의 이동과 수송은 철도 네트워크에 의존하여야 하며,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는 미국의 군대도 전투기와 탱크, 함대의 에너지문제로 그 역할을 최소화하여야 하는 18달러 시대를 거쳐, 20달러 시대는 더 이상 석유를 이야기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두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저자는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지금이라도 이 엄청나게 긴 조정기간에 발생 할 고통과 시련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과시적 소비행위를 지양(止揚)하고, 절제의 미덕을 최선(最高의 善)으로 하는 겸허함의 자세로 전환하여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곤 석유 의존적 인류의 산업기반을 ‘전기’를 기반으로 하는 산업체제로 이전하는 준비와 실행에 착수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핵폐기물 처리에 문제를 지니고는 있지만 원자력 이상의 대안을 현재의 인류는 가지지 못하고 있는 이상 유력한 기간자원으로 육성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저술의 세부적 예측사례와 실행방안에는 미래 산업에 대한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방향들이 실재하고 있어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미래 대책을 위한 정책 컨설팅의 보고(寶庫)라고도 할 수 있다. 치솟는 유가는 분명 우리들의 집, 차, 지역, 상점, 직장 등 삶의 형태를 바꿔 놓을 것이다.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 그리고 후손들을 위해 어떤 세상을 넘겨줄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사유의 근원을 제공 한다.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임박한 우리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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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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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낯설지 않은 인물들, 뭔가 지나친 일과는 거리가 먼 우리들의 지극히 평범한 얼굴들, 바로‘나’들을 만나는 것만 같다. 그래서 수록된 작품들에서 근자의 자극성 짙은 젊은 작가들의 그것과는 다른 어떤 안식과 안도 그리고 가을 햇살이 튀어 오르는 잔잔한 호수의 물결 같은 마음의 진정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칼날 같은 비평가의 시선이 요구될 여지가 없다. 윤대녕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내 기억이고 나의 삶들이어서 긴장감을 상실한 채 나의 내면이 되어 가슴이 먹먹해져 올 뿐이다. 그렇다. 작품들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바람이 불고 있어 아프고, 하릴없이 그 바람 맞으며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이 있어 아리다.”아마 마지막 수록작인 <여름, 여행>의 話者가 “가슴 속에서 무언가 뭉텅 빠져나간”,‘밀물 같은 그리움’을 되뇌는 심정과 같은 것이리라.

작품 속 인물들을 따라가다 나는 가만히 나의 기억들을 쫓는다. 아득히 돌아서 마주하는 그리움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 내 일처럼 고개를 끄덕이게 하던 <대설주의보>의 윤수와 해선에게서, 지나간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동대문 뒷길의 화랑과 아련한 한 장의 사진을 떠올리게 하는 <풀밭위의 점심>에서 평론가의 말처럼 “삶의 온갖 휘장을 걷어내고 난 뒤에 남는” 나의‘맨 얼굴’을 보게 된다.
익숙한 삶의 심리적 동요와 갈등들, 은폐되고 드러내지 못했던 그 감정의 찌꺼기들, 감히 표현되지 못했던 아련한 일상의 관계들이 애잔하게 떠돈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7편의 작품들 모두에서 진정한 원형의 사람, 삶을 구성하는 그 시시해 보이기만 하는 일상성의 진실을 읽으며, 우리 사람들의 삶을 표상하는 수많은 소설 작품들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가까이의 나와 우리를 느끼게 하는 작품은 흔치 않았다는 생각을 갖는다.
한 남자의 情婦로서의 삶을 끊어내기 위해 자해에 가까운 단절의 의식을 치루는 <보리>의 주인공, 수경의 안간 힘에서, “여름 한 낮 햇빛에 뜨겁게 타고 있는 빈 마당을”을 바라보며, 견디기 힘든 시원적 고독의 통증을 앓는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의 인물들에서 여리고, 다치기 쉬운 인간 본원의 아릿한 유대의 고통을 느낀다.

알고 있지만 비켜가던 사람들의 민낯으로 드러난 비릿한 자기연민의 사연들은, “알고 보면 서로 사정이 똑같더이다.”가 된다. 어느 한 계절이 다가 올 때면 애써 자신을 감추고 무덤덤한 낯 선 이야기만 하다 돌아서왔던 그녀에게 지금이라도 달려가고 싶고, “마음의 불이 식어가는”그래서 “나이 들어가는 남자의 떨림과 만성적 피로와 허무함”을 달래던 오랜 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도 불현 듯 가슴 가득히 그리움과 함께 몰려온다. 이별도, 해후도, 용서도, 미처 챙기지 못한 결백의 양심도, 외로움과 그리움까지도 정말의 우리의 감성과 우리의 문체로 다가온다.

우리의 지명(地名)들, 그 산하(山河)에 내린 눈과 비와 햇살을 오롯이 품고 있는 익숙한 자연의 모습들, 그 자연을 닮은 사람들, 바로 우리문학 고유의 애상과 서정성을 물씬 담고 있는 윤대녕의 이 소설집은 그대로 나와 우리와 일체가 되고, 허무와 공허, 잔인해 보이기만 하는 삶을 어루만져 준다.
한편의 이야기와 나의 회상을 반복하며 어느덧 7편을 끝낼 때의 그 휘감아 도는 적요한 느낌이 모처럼의 차분한 진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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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인간의 신비를 재발견하다 - 진화론에 가로막힌 과학
제임스 르 파누 지음, 안종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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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사회 전반의 사고를 포획하고 있는 3대 전환적 사고로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그리고 다윈을 꼽는다. 저자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이론은 부실함이 이미 입증된 것이라 단정 짓고, 21세기에도 여전히 인간을 해독하는 사고인 진화론에 대해 명백한 오류를 지닌 과학이라 지적함으로써 물질주의적 기반의 과학은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이 저술의 전체를 유유히 흐르는 핵심적 사고는‘이중 실재’, 즉 인간의 이해에 있어서는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형성력의 존재를 인정해야한다는 논리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작용을 단지 두뇌의 전기적 화학적 작용의 단순한 결과로 말하는 것은 사실을 호도하는 물질중심 과학의 오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결과론적인 내용만 얘기할 경우 마치 그럴듯한 주장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플라톤과 기독교 이원론의 부활, 그리고 데카르트의 영혼설까지를 포함하여 기독교라는 제도종교의 복권이라는 의도가 있으며, 보다 궁극적인 의지는 진화론을 대체할 수 있는 인류미래를 위한 진정한 패러다임으로서‘지적 설계론’을 내세우는 것이다.

사실 책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은 과학적 접근처럼 보이지만, ‘신비’와 ‘영혼’이라는 단어의 위력을 설득키 위한 의사과학(擬似科學;pseudo)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들은 과학을 비판할 때 항상 신비주의와 영혼을 얘기하며 본질을 흐리게 하는 일관된 패턴을 사용한다.
또한 이 책이 아주 흥미로운 것은 ‘리처드 도킨스’의 저술 중 진화론에 입각한 시정(詩情)넘치는 과학을 이야기하는 『무지개를 풀며』에 대한 모방을 하고 있다는 점인데, 특히 영국 시인‘존 키츠’의 동일한(물론 반대의 의미로서)인용에서부터 유전자와 뇌과학이라는 정확히 일치하는 소재를 이용하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속내를 감추는 저자의 광신적 의지에 실소를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다윈의 진화론이 오류로 점철된 비과학적 이론이라 비판하고 폄훼하며 조롱하는 논리는 그야말로 단순하다. 왜 진화의 과정을 볼 수 있는 증거, 즉 수 백 만년, 수 천 만년 전의 화석뼈가 발견되지 않느냐는 것이며, 또한 캄브리아기의 지층에서 발견되는 고생물 화석의 경우 전 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생물이 무진장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다윈의 점진적 진화이론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비판의 대상으로 인용하는 진화생물학자인‘스티븐 제이 굴드’는 진화양상은 대부분의 기간 동안 큰 변화 없는 안정기와 비교적 짧은 시간에 급속한 종분화가 이루어지는 분화기로 나뉜다는‘단속 평형설(punctuated equilibrium)'에서 입증하고 있음에 대해서 외면하는 것으로 대처하고 있으며, 화석뼈의 발견은 화학적, 물리적 현상을 이해하고 있다면 거의 억지에 가깝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와 같은 진화론의 공박을 지원하기위한 기반으로 게놈프로젝트와 두뇌지도가 사실상 실패한 과학으로 지금까지의 결과 이상의 과학적 성취는 불가능하다고 단언을 내리고 있다.
저자의 이 두 과학적 시도가 지니는 한계와 과학의 오만에 대한 경고가 타당성 있는 지적이라는 점에 공감한다. 인간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DNA의 서열들과 암호가 말하는 의미를 알았다고 해서 그 암호가 어떻게 인간의 개별 장기들을 만들고 영향을 주는지, 더구나 ‘조절 유전자’의 경우 파리, 쥐, 인간에게 완전히 동일함에도 다른 생물, 형태를 만들어내는 지를 설명치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뇌의 영역별 기능을 파악할 수 있다고 자만하였지만 뇌의 활성화 상태는 오히려 뇌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시스템화되어 움직이는 모습을 당혹스럽게 봐야 하는 결과거나, 동일한 사고와 판단의 상황에서 청년과 노인의 뇌 활동영역이 전혀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오히려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저작에 있어서 원형질적인 두뇌에서 일어나는 전기자극이 어떻게 엄청난 범위의 정신생활과 독특한 생각, 기억, 신념이라는 비물질적 형상화를 만들어 내는지에 대한 의문과 이를 위한 반증들은 과학으로서 보다는 철학적 숙고를 요하는 과제라 하는 것이 타당하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에 더해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 만능적 사고가 조성해 낸 오늘의 물화된 세상에 대한 폐해의 지적은 현대 과학에 대한 준엄한 비판으로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은 가설에서 출발하여 이를 입증하고 오류를 수정하며 진일보된 이론으로 정착하며, 진리로서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아닌가?
한계와 불가능이라는 단언적 선언이나 말하지 못함을 이유로 과학을 부정하는 논리는 올바른 도리는 분명 아닐 것이다. 과학이 반성하여야 할 부분은 이 저작의 지적을 넘어 근대산업사회가 시작된 이래 작금의 시장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저지르는 인간의 상품화처럼 사고의 대전환과 진정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요구는 수없이 지적되고 시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진화론을 전면부정하고 지적설계론을 부르짖을 일은 아닌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라는 비(非)물질계에 대한 성찰, 그리고 신유전자 프로젝트들의 겸허한 되돌아봄을 생각케 하는 저술임에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배려하는 척하면서 멸시하는 사이비 과학의 대표적 방법론을 구사하며, 진정한 과학에 동기를 부여해야 할 경이로운 감정 대신 그 사생아인‘신비주의’와‘초월성’과 손잡은 음흉한 엉터리 과학을 표방하고 있는 점은 안타까운 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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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7
이국운 지음 / 책세상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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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이는 우리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 1항과 2항이다. 그러나 작금의 정치현실에서 이와 같은 내용이 실현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즉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국민으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입법, 행정, 사법부의 구성원들이 깨닫고 있는 것일까?
현실에서, 국민으로부터 주권을 수임 받은 대의정부의 모습은 점점 1인, 1정당, 1국가 독재에 귀결되는 양상을 보이며, 민주주의의 본질을 상실해가고 있다. 자유주의 또한 그 본래의 의미가 왜곡되거나 와해되어 사전적 규제의 부정을 통하여 민주적 정당성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대의정부,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적 헌정주의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당초 국민들의 “삶의 근원적 다양성을 수호하고, 동시에 삶 그자체가 다원적 이익들로 용해되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공성을 보전”하려는 헌법의 기획은 심하게 손상되고 있다.
이제 극단적 자유주의의 팽창이 낳은 화폐권력에 대해 사후적 판단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은 법률의 해석자인 법률가들에게 헌법을 판단케 하는 법률가 수호주의라는 위험한 현상까지 빚어내고 있다.
이 저술은 바로 이러한 주권과 민주헌정의 변질이라는 우려스러운 현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여야 하는가를 표상정치의 역사적 변화양상과 그 의미 해독, 근대적 헌정주의의 본질과 의의 등 배경지식의 전개를 기반으로 하여‘표상정치’와 ‘헌정권력’이라는 핵심개념을 통해 탈근대적 민주주의를 위한 표상정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아마‘표상정치’라는 어려운 어휘가 이 저술보다 쉽게 설명된 책은 없으리라 여겨지기까지 하는데, ‘호머’의『일리아드』속 인물들이기에 더욱 친근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 즉 수많은 전사(戰士)들과 시민들이 결부된 전쟁이지만 단 두 사람만의 대결로 끝내려고 한다. 바로 ‘파리스’와 ‘메넬라오스’의 대결인데, 이처럼 전쟁이나 정치를 단 두 사람의 결투로 환원하려는 것, 이런 식으로 정치를 생각하는 것을 바로 ‘표상정치’라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헥토르’의‘개입(介入)’으로 표상정치는 붕괴되고 다시금‘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또 다른 대결(표상정치)이 이루어지지만 살육전은 중지되지 않는다.

왜 표상정치는 실패하는 것일까? 즉 시민과 전사들을 대표하는 자들을 내세운 합의가 번번이 깨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헥토르의 개입이나, 오디세우스의 간계처럼 바깥으로부터의 개입이 표상정치를 무너뜨리는데, 이는 탐욕과 야심, 속물근성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결국 표상정치는 다시 건설해도 곧이어 붕괴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즉 정치적 현안이 표상정치를 통해 해결 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표상’이란 것은 태생적으로 불완전 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표상정치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과 표상정치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반드시 같을 수 있겠는가? 결코 같을 수 없는 것이며, 단지 ‘닮음’의 묘사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진다.

그래서 표상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기획들이 역사 속에서 수 없이 착안되고 진전되어 왔다. 선거제도를 정교하게 설계하여 대표제를 합리화하지만 여전히 대표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궁극에는 표상정치의 동일성에 대한 보다 정밀한 접근으로서의 집착이나 아예 불가능의 인정을 통한 포기라는 딜레마의 해결방안으로서 “표상정치에 투항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기획으로서 ‘헌법’의 고안, 즉 '헌정주의(constitutionalism)'의 발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보편적 법이 존재한다는 고차법 사상의 저변이나 혼합정체의 논리, 근대적 헌정주의의 역사적 이론들의 친절한 설명이 배경지식으로 풍부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자연권의 실정화를 통해 성문헌법을, 헌법과 법률을 구조화하고 의회를 탄생시켰으며, 법의 지배를 체계화하는 식으로 표상정치를 재건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정치는 오늘날 “대중적 산업화와 이에 따른 사회내부의 계층 분화가 심화 되면서 의회주의의 전제라 할 시민적 동질성이 급격히 상실”됨으로써 민주주의가 오히려 지도자 체제로 대표되는 1인 독재주의를 초래하였으며, 자유주의는“자유에 기초한 계약적 사회 구성이 가능하다고 보고, 그 모델을 모든 대상을 화폐가치로 환원하여 개인의 선호에 따라 교환 할 수 있다는 완벽한 자유 시장에서”찾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자유가 없으면 작동 할 수 없는 비대칭성으로 인하여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따돌리고 표상정치를 넘어서는 독자적인 팽창을 먼저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화폐권력의 그림자 노릇이나 하는 근대적 헌정주의의 전제가 붕괴된 현실에서 저자는‘주권 개념해체와 재구성’을 위해‘헌정권력’의 개념에 주목한다.
이를 위해 우리헌법의 주어는 무엇인가? 고 묻는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에서와 같이 ‘대한국민’이 우리 헌법의 주어다. 바로 헌법의 발화자는‘대한국민’이다. 발화자가 있다면 수화자는 누구인가? 물론 수화자도‘대한국민’이다. 허나 저자는 “조선총독부에게는 해방의 선언이며, 미군정에는 독립선언이고, 다른 독립국가에는 평등의 선언”이듯이 수화자는 여럿이 될 수 있음과 같이 새로운 읽기를 주장한다.

이는 “헌정권력에는 다양한 차이 속에서 공통의 것을 이끌어내려는 다시 말해, 그 누구도 특권적일 수 없다는 평등한 네트워크”를 전제로 하고, “장애인, 할아버지, 주부, 아이, 여고생, 예비군, 이주 노동자 등 이들의 차이를 그대로 둔 채 그들 사이에서 공통의 것을 끌어내 그들 자신의 권력이 바로 헌정권력”이며, 이로써 헌정권력은 소통과 대동의 현장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차이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기획으로서 헌법민주주의의 강화를 통한 소수자의 정치적 기회제공과 이러한 틈새를 활용한 헌법민주주의 정당성 입증, 나아가 탈근대적 민주주의의‘차이에 대한 공적 확인’과 ‘정치화의 성취’, 다소 급진적으로 이해 될 수도 있겠으나 규범의 강약에 따른 지역공동체, 국가, 국제사회의 존재를 그리는 새로운 모델은 표상정치를 극복하기위한 단순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갖가지 시행착오와 시련을 마주하는 집단적 실천의지가 된다.

이 저술은“법치의 논리로 입법을, 민주의 이념을 밀어내는 것은 민주공화국의 본질에 부합하는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의 입법을 법률가들이 헌법해석으로 무효화시키는 것은 정당한가?”, “누가 헌법재판관이 되느냐가 어떤 법률을 만드느냐 만큼 결정적인 문제가 된 사회”의 부정의를 떠나 본질적으로 어떤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가? 에 대한 답변을 사유케 한다. 심각하게 훼손되고 비뚤어진 오늘의 헌정질서와 표상정치의 왜곡을 시정하고 근원적인 대안을 창출하기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 대한민국 헌법의 새로운 읽기는 중차대하고 우리에게 요구되는 각성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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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친 사내의 고백 모중석 스릴러 클럽 7
존 카첸바크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아! 심리스릴러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경외(敬畏)의 탄성을 절로 질러대게 한다. 단순히 인간 내면 심리묘사의 디테일이 뛰어나다거나 사실성에 있어 명료하다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으나 그 내밀함과 몽환적 비현실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기억과 상상, 그리고 현실의 구분을 경계 짓지 않은 내용과 형식에서까지‘광기’에 대한 작가적 의지를 드러내는 것, 이성과 광기라는 비이성이 빚어내는 충돌의 전개까지 작품의 견고함이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짜여 져 있다는 점이다.

정상인이라 자처하는 인간들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 그러나 자신들의 이성으로 독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격리, 이를 구분하는 담장의 폭력, 바로‘미친 사람’이라 치부하고 그들을 거부하는 바깥세상과 담장안의 세상은 어느 곳이 더 무서운 것인가?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척도는 과연 격리된 정신병동에서 어떠한 형태로 발현되는 것일까? 안 과 밖에서 달리 작동되는 이 허위의 개념이 환자로부터가 아닌 감시자인 의사, 심리치료사 등의 비이성으로 먼저 파괴되는 모순을 발견케 된다.

‘앰허스트 스테이트 정신병원’,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에 자리 잡은 정신병자들의 거대한 격리수용소의 다름 아니다. 작품은 내면의 여러 목소리에 시달리는 정신질환자‘프랜시스’의 버려짐과 격리, 그리고 죽음의 공포가 떠나지 않았던 정신병원에서의 기억과 현실의 망상을 교차한다. 자신을 “정상적인 세상의 가장자리에 선 인간”으로, 즉 스스로를 경계선에 위치한 인간으로 인식한다. 아마 이는 이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 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광기에 대해 이성의 폭력이 빚어내는 그 권력의 위선, 바로 그것은 또 다른 광기가 되어 수용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다. 정상과 광기의 분별없음...

‘짧은 금발’이라는 손가락이 잘린 간호사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심리 게임은 본격의 국면으로 접어든다. 종교의 권위에 숨어 아동을 상습적으로 추행하는 성직자, 이를 처단하기 위해 교회에 불을 지르고 정신이상자로 수용된 소방수‘피터’라는 지극히 정상적 사고의 인물, 그리고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대학시절 강간이라는 육체적, 정신적 외상을 지닌 여검사‘루시’를 통해, 미친 자들의 세상이라는 정신병원에 바깥세상을 이식한다. 주임의사‘걸프틸리’라는 인물은 광기에 대한 정상인의 폭력적 권력을 뚜렷하게 대변하고, 환자들의 심리치료와 감시자인‘에반스’란 인물은 환자에 대한 통제의 집착이 “어떤 고집스런 환자의 광기도” 비할 바가 못 되는 광기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첨예한 정상과 광기의 대결은 광기와 광기의 대결에 다름 아니며, 바깥세상과 바깥세상의 대결이 된다.

악마를 처단해야 한다는 천사의 목소리, 바로‘천사’로 불리는 살인자와의 게임은 물론, 모든 것을 미친것이라는 이름하에 곡해와 무책임, 뒤죽박죽의 망상으로 버무리고 말려는 의료진과의 싸움까지 해야 하는 검사 루시와 소방수 피터, 바닷새 프랜시스의 절망과 비합리, 그리고 생생하게 밀려오는 공포와의 뒤엉킴은 시종 팽팽한 긴장으로 신경을 고추 세우게 한다.

“살인이야!”라고 소리치거나 비명을 질러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세계, 그래서 악몽은 스스로 처리해야 하는 병원, 정신병을 낫게 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키는 곳, 환자의 쾌유를 위해 힘쓰는 사람이 없는 정신병원에서 살인자 천사의 숨결이 점점 이를 쫓는 루시와 피터, 그리고 프랜시스에 다가온다. 밤이면 굳게 잠기는 환자들의 방과 수없이 많은 문들이 잠겨 지지만, 이 강력한 살인자는 실질적인 힘, 접근권력인 열쇠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살인자를 찾으려는 자와 살인자의 치열한 추적과 추적의 게임, 잠긴 문의 세상에서 진정한 승자는 누가 될 수 있을까? 악마를 추적하는 수도사처럼 변해버린 여검사와 부패한 종교의 협상에 무릎을 꿇어버린 피터, 살인자의 숨결을 아는 프랜시스와 살인자 천사의 호흡을 끊어버릴 듯한 장면에 이르기까지 스릴러의 진수를 만끽하게 하여준다. 완벽하고 깨끗하고 근사하지 많은 세상. “삶이란 그런 법이야. 누군가 상흔을 남겨도 우린 계속 살아가야지, 하지만 넌 자유로울 거야. 날 믿어.”라는 피터의 격려처럼 이성과 낙관이 통하지 않는 절망적이고 섬뜩한 세상의 구속에서도 인간의 자유로움에 대한 본성은 결코 부숴 질 수 없는 것이리라. 인간 의지의 숭고함이 섬세하게 그려진 심리스릴러 문학의 정수이다. ‘존 카첸바크’의 이 작품이‘심리소설의 교본’이라함에 그 누가 저항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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