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천사 1 -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1-1 추락천사 1
로렌 케이트 지음, 홍성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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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음울한 고딕의 분위기가 사랑을 더욱 애절하게 만든다.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순간 재가 되어버리는 비련의 운명. 더구나 한 사람만이 이를 알고 있다면 그 안타까움과 절망적인 고통을 무어라 할 수 있을까. 작품 속‘루신다(루스)’처럼 꿈속을 헤매는 것 같은 황홀함과 부드러운 촉감, 달콤한 사랑의 밀어가 귀가에 나즈막이 느껴지는 듯한, 진정 환상적 러브 스토리, 아니 그 이상으로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남자친구의 죽음으로 소드앤크로스(Sword and Cross)라는 감화원(reform school)으로 전학을 가게 된 17살 소녀, ‘루신다 프라이스’. 그곳에서 처음 보게 된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매혹적인 남자, 다니엘에 빼앗긴 마음으로 온통 그의 생각으로 전전하고, 그 주체할 수 없는 환상적인 전율과 그리움의 애틋함이 떨리도록 전달된다.  

그러나 이처럼 사랑하는 연인에게 왠지 알 수 없는 저주가 감도는 듯한 분위기가 한 축을 이루면서, 재활학교인 소드앤크로스의 루스 주변 인물들의 예사롭지 않은 등장이 또 하나의 긴장을 담당한다. 자신감 넘치는‘아리앤느’, 학교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펜’, 구내식당에서의 악의적인 도발로 적대감을 보이는‘몰리’, 빼어난 미남으로 루스의 사랑을 요구하는‘캠’, 그리고 미스테리한 선생들, ‘콜’, ‘소피아’...그래서 학교의 음침한 분위기는 더욱 신비롭고 기이하며 매혹적인 내음을 발산한다.
루스를 따라다니는 구름같은 검은 그림자가 하늘을 드리우고, 뜬금없는 그림자인형극을 통해 “아흐레 낮과 밤동안... 사탄과 그의 천사들은 천국에서 아래로, 끝없이 추락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피아 선생의 암시는 이들의 앞을 미궁으로 이끈다.

집요한 사랑을 갈구하는 캠과 사랑하지만 외면하는 다니엘 사이에서 갈등하는 루스의 애처로움 속에서 그녀가 위험에 휩쓸 때 마다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다니엘의 등장은 진부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결속을 기대하는 독자들의 마음을 고조시킨다. 다니엘의 비밀 장소인 호수가와 두 연인의 거칠어진 호흡이 들리는 듯한 사랑의 유영,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다니엘의 포옹에서 “그녀는 더 많은 걸 바랐다. 더 뜨겁고 더 떨리기를 바랐다. 다니엘에게서 더 많은 걸 원했다. 똑같지는 않았지만 마치...꿈속에서처럼 황홀했다. 땅에 발을 디디는 느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그의 손길이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는 그 달뜬 사랑의 감정은 여지없이 독자를 로맨틱한 불길에 휩싸이게 한다.

“맑은 담갈색 눈동자, 작지만 가지런한 치열, 짙은 눈썹, 풍성한 검은 머릿결”의 ‘루스’, 근육질의 팔로 루스의 허리를 감싸고, 달콤하고 열정적인 키스로 온몸을 관통하는 뜨거운 열망을 안기는 ‘다니엘’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한 고대 전쟁(ancient war)이후, 사랑하지만 견뎌내야만 하는 저주를 받고, 지상으로 추락’한 두 연인에겐 더 이상 다가 갈 수 없는 장벽이 있고, 추락이후로 천년 동안 계속 살아남지 못한‘루스’에 대한 다니엘의 긴장과 위기에 대한 직감은 더욱 애틋하기만 하다. 이들 추락한 천사들에게 다가오는 어둠과의 불가피한 일전, 가려졌던 등장인물들의 의외의 반전 속에 이들 연인의 운명은 또다시 죽음과 재회의 반복되는 고통일지, 자못 그 궁금증이 증폭되기만 한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감촉, 터질 것 같은 강렬한 관능과 애절한 사랑의 운명이 전편을 호수처럼 잔잔히 흐르는 로맨틱 판타지 문학작품의 결정판이라 하여야 할 것 같다. 이미 디즈니사에서 출간되지도 않은 이 작품의 4부작에 대한 영화 판권을 사들였을 정도이니 사람들이 기대하는 로망의 절대적 스토리를 담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금지된 사랑에 대한 간절함은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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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무역,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공정무역,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 - 공정무역 따라 돌아본 13개 나라 공정한 사람들과의 4년간의 기록
박창순 외 지음 / 시대의창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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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동, 여성,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된 국가와 지역에서 신음하는, 또한 착취당하는 농부와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어떠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우리사회의 내부적으로는 이러한 자각이‘사회적 기업(Social Enterprise)’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빵을 팔기위해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하기위해 빵을 파는 기업” 즉, 사회취약 계층에 일자리와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비영리와 영리기업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이들 조직에 대한 관심은 모든 인간의 공존과 공영에 대한 궁극의 지향점이 되어, 물질에서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의 작은 움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자유주의와 세계주의는 남북문제로 부의 극단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미국과 유럽 등 서구의 새로운 식민주의적 자본주의 질서를 야기하는 등 그 폐해의 시정은 시급한 인류의 당면과제가 되고 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의 빈국들, 여전히 죽도록 일하여 원료를 생산하지만 그들, 빈국의 생산자들은 거기서 한 푼의 이득도 취하지 못하고 빈곤의 나락에서 헤어날 수 없다면 과연 그 거래는 공정한 것인가? 그 가난한 농부들이 이익을 얻지 못한다면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바로 이러한 불공정한 무역거래의 구조를 바로잡고 누가 이익을 얻느냐는 문제에 시선을 돌린, 나아가 그들 생산자의 노동환경을 제고하고 공정한 임금을 책임지며, 그네들 문화의 다양성을 보존하고 정신적 자산을 풍부하게 기여한다는 데에까지 이르는‘공정무역(Fair Trade)'은 그래서 중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 부분적으로 아름다운가게, 두레생협, 여성환경연대 등 사회적기업을 중심으로 공정무역의 첫걸음을 내딛고 있으나, 교역량 10위 국가로서의 위상과는 달리 이 저술의 저자가 취재 후 비로소 ‘한국공정무역연합’을 창설하였을 정도로 그 역할은 지극히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공정무역은 물질의 거래인만큼 생산자와 소비자가 존재하고, 생산자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빈국들이고, 소비자는 구미 선진 여러 나라가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만이 유일한 소비국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 한국사회는 여전히 성공과 부의 이기적 자본주의의 물질적 지향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이제 한국사회도 세계의 빈국과 그곳에 신음하는 사람들과 공존할 수 있는 나눔의 사회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생산자인 필리핀, 네팔, 스리랑카, 파키스탄, 인도, 가나와 소비자인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의 공정무역 기업들과 단체, 생산현장들에 대한 취재를 통한 생생한 공정무역의 실태를 알려주는 이 저술은 소비국으로서 바로 이러한 생산자들과 어떻게 관계를 조성하고, 수요를 만들어 내며, 사회에 어떻게 그 인식을 확산시키고 심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세심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일례로 네팔의 공정무역 주요 생산물은 봉제품, 도자기, 그릇, 목공예품, 커리, 생강, 커피, 차, 종이, 악기류임을 소개하고, 공정한 임금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공정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지, 시장확보가 얼마나 중요한 선결문제인지, 사회에 공정무역을 알리기 위한‘공정무역학교 꾸러미’, 다양한 이미지 캠페인과 마케팅 사례 등 선진국들의 노력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또한 영국의‘공정무역마을’, 네덜란드 중부지역에 위치한 모든 공정무역 수입상이 집결된 ‘센트럼 몬디얼’과 같은 집합건물, 일본의 생산지역과의 지속가능하고 효율적이며 투명하고 신뢰감 넘치는 거래현장에 대한 소개는 공정무역에 발걸음을 내딛고자 하는 이들에게 유효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준다.
특히 생산자가 직접 소비국을 찾아 직접 홍보하는 행위를 통해 생산자와 연결된 기분을 소비자에게 전달하고 자신의 소비가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기쁨을 느끼게 하여주는 캠페인은 인상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더구나 영국의 공정무역 마을인 ‘루이스’나 ‘켄트’, ‘스퀘어마일’등의 도시전체가 공정무역에 참여하는 것은 일반국민의 국제사회 문제에 대한 수준 높은 이해와 시민의식으로 부러운 느낌을 갖게 한다.

공정무역은 사업이지 자선이 아니다. 다만 단순히 상업적인 거래로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하고, 공정한 생산가를 책임지며, 거래자 공히 이익을 보장받는 무역거래이다.  멕시코의 착취당하는 커피농장의 농부들을 통하여 네덜란드와 공정무역거래의 모델인‘막스하벨라르 커피’를 만들어 낸‘프란시스 신부’의 “도덕적, 윤리적 관점을 가진 평행적 시장을 창조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그리고 “공정무역은 관습적인 시장체계와 경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그야말로 사회적, 생태적 경제에 기반을 둔 새로운 유형의 시장개발을 예언하는 귀중한 가치의 제안으로 마음속에 깊은 파동을 남긴다.

이제 우리의 고귀한 자아를 위해서도 취약한 사회의 약자들, 소외된 인류사회에 시선을 돌리고 발걸음을 내 딛어야 할 것이다. 사회에 공헌한다는 것은 어려운 실천이 아닐 것이다. 작게는 공정무역 제품, 사회적 기업의 제품을 구입하는 것만으로도 사회를 보다 건강하게 하여 줄 것이다. 투명하고 품위 있는 가난을 변호하는 세상, 아름다운 거래로 모두가 신뢰하는 공정한 세상으로 가는 또 하나의 길이 되지 않을까.
인도의 공정무역 생산현장인 ‘핸드크라프트’사무실 2층의 벽면에 걸려있다는 ‘헬렌 켈러’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다.”라는 현명한 말은 공허한 울림만은 아닐 것이다... 저자‘박창순’의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 그의 공정무역 가게‘울림’이 우리사회가 공정무역으로 나아가는 귀중한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

<참조> 관련 웹사이트
한국공정무역연합  http://www.fairtradekorea.net   

사회적 기업(공식) http://www.socialenterprise.or.kr
공정무역가게 울림 http://www.fairtrade.com  

아름다운가게      http://www.beautifulstor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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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플루엔자 (양장)
올리버 제임스 지음, 윤정숙 옮김 / 알마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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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국가들을 제치고 미국의 가치를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빼어난(?) 나라로 한국만한 나라가 없다. “욕구와 욕망을 만들어 내고 오래된 것과 낡은 것에 불만을 갖게 하는”그래서 소비와 시장의 힘이 인간의 각종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다는 신앙인 ‘이기적 자본주의(Selfish Capitalism)'에 경도되어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원하고, 자신의 가치를 성공, 잘 팔릴 가능성, 타인의 인정에 의존하는 자신을 상품으로 인식하는 인간들로 가득 차 버린 기이하고 추한 사회의 형상을 하고 있다.
소비를 향한 무한한 열망, 상품의 빈번한 교체, 자신과 사회에 대한 무비판, 통찰력의 총체적인 부재, 소유가 자신을 더 대단한 사람으로 만들 거라는 생각, 자신을 선전하고 광고하며, 소유물과 타인의 평가에 의해 가치가 결정되는 상품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물질주의와 권위주의에 쪄들어 내적조화가 무언지도 모르는 시장형 인간들을 양산하는 무지한 사회, 바로 한국사회의 모습이다.

‘올리버 제임스’의 이 저술은 바로 이러한 소비지상주의가 지니고있는 '몰개인화(Depersonalization)'에 어떠한 자각도 없는 인간들이 걸려든 질병, ‘어플루엔자(affluenza)'에 대한 폐해와 이를 극복하고 해소키 위한 백신에 대한 처방전이라 할 수 있다. 삶의 목표는 돈, 소유, 명성, 외모에 있고, 이의 동기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과시하려는 그릇된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들의 허위와 무지, 불행한 욕망을 영국을 비롯한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 영어권 국가들과 싱가포르, 중국, 덴마크, 러시아 등지의 상위계층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한 부자병의 실체와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한결같이 어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들은 대조효과(Contrast)에 빠져들어 자신보다 뛰어난 대상과 비교하며, 돈과 소유욕, 그리고 외모와 명성이라는 가치에 집착하고 자신들보다 더 가졌거나 더 나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현상을 나타낸다. 친구나 연인을 고를 때는 사랑보다 외모와 부, 그들의 시장가치에, 그리고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원하고,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에 빠져있으며, 자극이 삶을 지배하는 상태에 놓여있어 주의력결핍행동장애(ADHD), 양극성장애(Bipolar Disorder), 자기애적인 인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등으로 정서적인 고통을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유한 소수를 위해 부도덕하고 불평등하게 펼쳐지는 미국식 이기적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마케팅사회에 흡수되어 물질적 안락을 위해서는 어떤 인간적 희생도 무릅쓰는 불행한 시장형 인간들이 양산되고, 도달 할 수 없고 결코 채워 질 수 없는 욕망과 성공이라는 환상을 쫓는 이들의 어리석음과 고통이 다양한 양상으로 지면을 채우고 있다.

서점진열대를 채우고 있는 미국식 긍정의 심리학이 장밋빛 허상을 만들어내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생태학적 재앙이라 할 수 있는 헛소리에 경도된 성공지향의 인간들을 이용하여 가짜 행복을 촉진하고 인지행동 치료로 인위적 자존감을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산업의 부상에 일조케 하고 있다. 바이러스 목표(돈, 소유, 외모, 명성)와 바이러스 동기(과시와 認定)에 붙들려 있는 한 삶은 고통과 불만과 불행의 영속일 뿐일 것이다.
미국적 가치는 이기적 자본주의를 대전제로 하고 있다. 내적인 공허를 외적인 수단인 소비로 고쳐질 수 있다고 거짓 약속을 하고, 성공을 쫓는 시스템 속에 가둬놓곤 성공이란 것으로 늘 동기를 부여하게 한다. 그래서 필요가 없음에도 인식하지 못하고 욕망하는 조작된 욕구에 대체된 취약한 정서는 타인이 가진 것을 자신도 가져야 한다는 공허한 과시적 소비로 끊임없이 내몰린다. 온통‘과시’라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겠다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가치로 인해 여성인구 전체가 성형수술을 받는 기괴한 나라가 되어 거짓된 자아의 잠재적 문제점에만 치중하여 자기혐오를 보상하는 자기기만과 무자각의 불행한 무뇌한들로 가득 차게 한다. 이렇게 해서 소수의 상위계층들은 더욱 부자가 되고 권력을 독식한다.

“영국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국민에게 최대한의 부가 아닌 최대한의 행복을 주는 것이다.”라는 선언과는 달리 모든 인간들을 불행과 정신적 고통으로 내모는 성장, 성공, 부(富)와 같은 바이러스 목표에 매달리는 한국사회의 낙후되고 추악하며 이기적인 반(反)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근원적 수정과 가치 전환은 시급한 과제이다. 그래서 이 저작의 말미에 덴마크와 같이 어플루엔자가 침입하지 못한 사회주의체제까지는 아니지만 이타적 자본주의를 위한 현대사회의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고 있다. 다분히 영국내의 특수성으로 인해 우리사회에는 지나치게 급진적이거나 조화롭지 못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정서적인 애착, 공동체, 효율성, 자치 등을 충족시키는 것을 목표로”하여, “당신의 욕망이 아닌 필요를 충족시켜라. 소유하지 말고 존재하라. 경쟁뿐 아니라 협동도 하라.”는 슬로건은 정서적 고통에 시달리는 한국의 시장형 인간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이제는 외부로부터 지속적인 지지를 얻고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의식하는 부서지기 쉬운 자존감에서 빠져나와 아름다움과 자기표현을 지지하는 진정한 내적 동기로 자신을 채워야 한다. 물질을 위해 노예처럼 일하는 오늘의 우리들, 시장형 인간들의 삶에는 무엇이 남아있나? 불안과 우울, 소외로 다시금 강박적인 소비에 몰리고 채울 길 없는 욕망을 위해 고통스러워 할 것인가? 환상의 세계를 꿈꾸며 삶을 낭비하는 것을 경고하는 엘리엇의 시(詩)로 마감하는 소비지상주의로 비뚤어진 현대인에 대한 신랄한 이 보고서는 오늘의 한국인, 우리들 모두에게 귀중한 거울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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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 : 정재승 + 진중권 - 무한상상력을 위한 생각의 합체 크로스 1
정재승,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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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중들의 일상을 채우고 있는 21개의 키워드를 통해 오늘의 한국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읽어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특히, 진중권은 오늘의 이 사회에‘디지털 생활 세계’라는 특징적 표현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니콜라스 네그로폰테’(Being Digital의 著者)가 정의하는 디지털사회의 특성인 탈정보화, 개인화, 다양한 감각 충족의 환경을 부여하는 호환성과 유연성의 증대, 문화변형의 극심화, 혼성문화의 발달과 같은 크로스오버 형태 등에 기인한 듯하다.

그래서 표제조차 뇌 공학자 정재승과 미학자 진중권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섭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크로스(Cross)이기까지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인식이 실질적 혼합을 이루어내는 것은 아니고, 다만 각자의 시선에서 동일한 제재를 성찰하여 독자에게 그 믹스의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 될 것이다.

우리의 생활환경을 에워싸고 있는 현상들을 대표하는 키워드로 선정된 것들의 일면을 보면 머리가 끄덕여 질 만 한 것들이다. 소비사회의 대표적 심볼(Symbol)이 되다시피 한 스타벅스, 프라다, 생수에서부터 점점 개인화되고 나르시시즘의 다른 표현인 성형(쌍꺼풀)수술, 몰래카메라, 셀카, 그리고 디지털 문화의 구루(Guru) 스티브잡스와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제프리 쇼, 나아가 복합형 가상현실의 세계인 세컨드 라이프 등등 디지털사회의 속성들을 그대로 담고 있는 이들 어휘들은 우리들의 사회문화적 습속의 층위를 충분히 설명해 준다.

오늘을 상징하는 이들 21개의 핵심단어들 모두에 두 편의 단상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과학자의 시선에서, 미학자의 시선에서 읽힌 사회 현상들 모두에 공감하기에는 미흡한 요소들이 분명 존재한다. 때론 진중권의 읽기에 더욱 동의하기도 하고, 정재승의 생각과 지식에서 새로운 발상을 엿보기도 하지만 공히 다양한 장르의 문화들이 서로 복합하고 능동적으로 변형되어가는 정보와 대중취향의 흐름, 창의적 사고가 기초가 되는 오늘의 현실을 높은 수준의 통찰력으로 해독하고 비평한 글들이라는 점에 공감케 된다.

내게 있어서 이러한 단상들 중에 특히 재미있는 시선으로 다가온 부분은‘욕망을 찍은 사진관’으로서의‘셀카’에 대한 부분과, ‘남성 옆의 여성’이기를 거부한 ‘안젤리나 졸리’편과, ‘개그 콘서트’, 사이버 민주주의 실현장(場)인‘위키피디아’, “예술에는 근원적 시작이 있다”고 하는 ‘파울 클레’편이라 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방문이 닫힌 딸아이의 방에서 찰칵 찰칵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 아이가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찍어대는 모습이 기이하게만 여겨졌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찍어댄 모습이 모두 저장되는 것이 아니고 이내 지워져 버린다. 정확하게 자신의 모습을 찍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자신이 가장 예쁘게 나오는 사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임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바로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은 정확한 삶의 기록이 아니라 가장 예쁘게 변형되고 조작된 ‘셀카만의 이미지’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었고, 극단적으로 개인화된 현대인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의 구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진중권의 독법에서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또한 선함과 악함이라는 양극단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내재하고 있는 듯한 최고의 여배우‘안젤리나’로부터‘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善美)’, 즉 윤리와 미학의 통일, 즉 아름다운 외모와 유덕한 행위의 통합이란 이해를 갖게 되면서 새로운 경지를 이해케되기도 한다. 남의 시선이나 평가를 의식하지 않는 존재의 자연스러운 표현, “도덕을 우습게 보는 개별자의 절대적 자유를 가지고 더 높은 사회적 윤리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데 그 요체가 있다.”는 설명은 그대로 탁월한 미학강의가 된다.

한편, 사회 비평적 측면에서 다루어지는‘9시 뉴스’와 ‘개그 콘서트’에서는 웃음에 대한 과학적 신호, 새로이 도래한 구술문화의 세대에게 어필하기 위한 스탠딩코미디의 특성으로서 ‘이미지의 전복’, ‘뉘앙스의 일탈’‘의미의 전환’과 같은 특성을 해독해 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쏟아내는 말장난에는 “사회적 편견을 그대로 드러내”사회적 소수에 대한 무차별적 상해에 대한 고려도 없는 무지함이나, “교양과 반성이 없는 쓸데없이 비열해진”개그에 예리한 비평의 독설도 주저하지 않는 자신감이 있다. 특히 천편일률적으로 9시 땡 하면 시작되는 뉴스의 집단최면을 거는 정보왜곡의 장으로 변질된 현실은 MBC뉴스의 ‘클로징 멘트’를 주시하게 만들기도 한다.

“가시적인 것은 우주전체에 그저 고립된 예에 불과하다.”는 공감각적 현대미술의 거장,‘파울클레’의 말처럼 삶의 내재적 충일(充溢)성 보다는 항상 허기질 수밖에 없는 외재적이고 성공 지향적이라는 불만의 생태계를 마냥 쫓는 현대인들의 어리석음과 이를 부와 권력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계층들이 무한히 창출해내는 과대소비사회의 왜곡된 삶의 진정성을 파노라마처럼 보게 된다. 모 광고회사의 선전처럼 따뜻한 디지털세상은 가능한 것일까?

진중권이 우스개로 흘리는 “공동체에 원만히 입성하려면 칼의 세리머니가 필요하다.”는 성형사회, “한국의 여성은 눈두덩에 할레를 받는다.”는 표현은 정신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어딘지도 모르고 떠도는 우리사회의 일면이기에 가뜩이나 움츠려든 가슴이 더욱 시리게 느껴진다. 리이프로그시스템(Life-log system),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세컨드라이프(second life)를 즐기는 시대에 성큼 들어선 21세기 디지털 사회, 우리들, 우리사회에 대한 안목을 보다 넓고 깊이 있게 성찰 할 수 있는 새로운 한국인들로 거듭 나야 하지 않을까.
저자들의 말처럼 이 저술은 디지털 생활세계의 현상학을 구축하기 위한 첫걸음에 불과하다. 그래서 진정한 크로스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중심을 잃고 절룩거리는 우리 사회에 이 저술을 초석으로 하여 더욱 심화되고 진전된 사회통합, 학문적 통섭, 지성이 협력하는 미래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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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인간실격 - 다자이 오사무 소설선
다자이 오사무 지음, 송숙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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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간극이라 해야 할까? 작품 속 인물들은 오늘의 인간상으로는 지극히 나약하고 인간의 특질들에 대한 이해역시 새삼스러울 정도라 해야 할 것이다.  <인간 실격>은 몇 차례 읽었던 것을 세월이 지나 다시 읽게 되었지만 결국 근대화가 가져온 물질과 자본주의의 유입에 변해가는 세상과 그 갈등정도에 불과한 시대상의 엿보기라 할 수 있다.

작가가 집필할 시기에 있어서는 아마 중대한 가치의 혼란이었을 것이다. 작중 ‘요조’라는 인물이 자신을 온통 소진해버리는 모습은 1920년대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허무주의적 풍조를 닮아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신뢰의 결여, 물질사회로의 이행에 따른 전통가치의 붕괴, 이러한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근대인은 혹독한 무력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세계대전의 패전국 일본의 몰락해가는 화족(일본의 舊 귀족)의 모습을 쓸쓸한 화면에 담은 <사양(斜陽)>은 작가가 편입된 계층에 대한 안타까운 미련과 고통을 그리고 있을 뿐, 유명 소설가의 아이를 낳겠다는 ‘가즈코’라는 이혼한 황녀의 혁명 행위는 사실 대중의 보편적 공감을 획득키는 어려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 작품은 세상과는 격리된 채 가족의 보살핌 속에 생을 거두는 주인공의 어머니에게서 고고한 귀족의 품위를, 그리고 변화된 새로운 시민체제에 적응치 못하고 아편과 술로, 마침내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가즈코의 남동생 ‘나오지‘로부터 진실한 인상을 찾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한편 이 작품들을 대하면서 아시아 식민지로부터 착취한 풍요로운 물질과 서구체제의 이식으로 변모해가는 사회의 비판과 갈등이라는 가진 자의 여유로서 당시대 일본인들의 고통을 읽게 된다. 지독한 수탈에 몸서리치던 우리에게는 생존과 민족자존감의 회복이라는 고통이 있었으니, 작중 인물들의 고뇌라는 것이 얼마나 허위이며 무지하고 편협한 것인지 하는 착잡함과 분리하는 것이 그리 수월치 않음을 느낀다.

결국 부조리하지만 거대한 질서에 거스르는 개체의 최후란 참담한 삶의 위협일 뿐이라는 다소 진부한 결론을 제시한다. 정신병원으로, 자살로, 수긍해야만 하는 질서로 말이다. 다만 <사양>의 가즈코가 보여주는 신분의 궤도를 이탈하고 새로운 자신의 정체성을 향하는 발길 만이 돋보일 뿐이다. 가난의 극복과 계급간의 갈등, 민족의식으로 혼란스러웠던 당대의 우리문학에 새삼 시선을 돌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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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3-08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종의 다자이 오사무 비판론으로 제겐 읽히는데요.

다자이가 공산주의를 접하고 나름의 활동도 하지만 자신의 계급을 넘어서는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는 못하죠.

그건 다자이의 부족함이랄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 지워진 개인의 고통이 상당했고 그가 그를 벗어나기에도 역부족이었음을 알게 되는 증거도 되는 것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자민족 중심주의나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은 다자이의 딸인 쓰시마 유코에게서 잘 보여진다 생각합니다.

<불의 산>이나 <나> 등을 보며 작가의 아버지가 미처 보지 못한 경지를 딸이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