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맨 프로젝트 - 신자유주의를 농락하는 유쾌한 전략
앤디 비클바움.마이크 버나노.밥 스펀크마이어 지음, 정인환 옮김 / 빨간머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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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 거대기업의 자본이 세계의 권력을 좌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이해는 새로운 정보도 아닐 뿐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데 소용이 닿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거대기업의 힘과 이윤을 최대화하도록 고안된 체제를 밀어붙이는 신자유주의의 왜곡된 부정의(不正意)의 권력을 방조할 수만도 없다.
그래서 그 불공정성과 부정의를 시정해내기 위해 힘없는 시민, 제3세계의 가난한 나라는 그 반대의 의지를 시위와 자결의 행동, 시민세력의 집결, 연합 등 다양한 저항수단으로 기획하고 대항한다.

이 책자는 이렇듯 많은 시민저항 수단 중 아주 독특한 기획과 그 실화를 담고 있는데, 이들이 명명한 명의 보정(Identity Correction)'이란 해학적 접근이 그것으로, 지구촌 대다수인 시민의 권리를 짓밟고 소수의 거대기업과 지배권력의 이권만을 위해서 작동하는 못된 개인과 단체의 정체를 낱낱이 밝혀 제 이름을 찾아주겠다는 갸륵한 행동의 이름이다.
특히, 이들의 명의보정 행위는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를 관리, 집행하기위한 기구로 출범한 WTO(세계무역기구)가 애초의 취지를 상실하고, 다국적 기업을 소유, 통제하고 있는 이들에게만 좋은 일을 하는 이권단체로 전락하여 지구촌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지나치게 약자를 유린하는 정책에 몰두하는, 즉 부(富)라는 힘의 논리를 정의로 신봉하는 신자유주의의 광신자 집단의 희화(戱化)와 조롱을 타겟으로 하고 있다.

일례로 생태 주지사, 교육대통령이라고 자신을 미화시킨‘조지 W.부시’의 위선과 거짓에 대해 대대적인 명의 보정을 실시하는 것이다. GWBush.com이란 웹사이트를 개설하고 주지사시절 최악의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교육 민영화 추진 등 시민에게 상처를 주기만 했던 본색을 공개하여 탐욕스럽고 사악한 실체를 알리는 것과 같다.
사실 이 아주 영리한 사람들, 일명‘예스맨’의 활약은 세계경제의 정의를 세우고 지구촌의 균형적 발전, 부의 형평성 있는 배분, 신자유주의의 비뚤어진‘굶주림의 미덕’모델을 시정하려는 진지하고 용기 있는 것이지만, 그 천연덕스럽고 배짱두둑한 명의보정의 실천모습에서는 배꼽을 잡고 구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스맨의 활동에 감동을 받은 한 독지가가 제공한 Gatt.org 라는 웹사이트를 소유하게 되면서 WTO의 횡포 - G-8등 부국과 거대기업을 위한 일방적이고 모순된 경제정책 - 를 조롱하고 그 부정의를 시정하고자 하는 일련의 해프닝을 기획하게 된다. 사이트를 오해한 유수의 국제경제 관계자들로부터 강연의 초청, 방송 출연 등의 제의를 받고,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담아 펼치는 예스맨의 대담한 활약은 피식 피식 웃음을 그칠 줄 모르게 한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세계무역기구’소속의 경제전문가로 가장하여 「무역규제 완화와 점진적 개선이란 개념: 거버닝 측면에서 본 1790년부터 현재까지」라는 그럴듯한 강연제목을 가지고 세계의 내놓으라 하는 경제전문가들을 앞에 두고 벌이는 코미디는 또다시는 없을 것이다. 네덜란드 KLM항공과 이태리 Alitalia항공의 합병결렬은 이태리의 시에스타(siesta ; 정오의 수면)같은 문화적 후진성 때문이니 문화적 차이는 뿌리를 뽑아야 한다거나, 거대 자금으로 이루어지는 오늘날의 정치선거의 자본화를 위해 투표권은 상품화를 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을 펼치지만 이 국제회의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프랑스 CNBC방송의 대담자로 초빙되어 “힘을 가진 게 누구냐, 결국 누구의 주장이 옳은 것이냐, 그 말이죠.”하며, WTO는 힘의 논리를 중시한다고 그 실체를 까발리지만 역시 어떠한 소란도 일지 않으며, 핀란드 탐페레에서의 「섬유산업의 미래」라는 주제의 국제회의 초청강연자로서 노예제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둥 간디는 순진한 보호 무역주의자였다는 둥 헛소리를 떠들고, 빈국에 세운 원거리에 있는 노동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종업원 투시 보조기(employee visualization appendage)’ 가 부착된 경영자 여가복의“1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황금색 남근을 위풍당당하게 앞세우고”흔들어 보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그 많은 석학들과 경제전문가, 기업인들 중에서 이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본질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바로 “전문성이란 게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읽게 한다. 고작 잘난 체 하는 한 페미니스트가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한 채 “남성 중심주의적 아니에요?”라고 눈을 흘기더라니 정말 웃기는 세상 아닌가 말이다.

WTO식 세계화에 대한 100% 끔찍한 이미지를 그려내자. 그 허위와 거짓, 불평등과 힘의 실체를 보여 주자.라는 이들 예스맨의 의도는 성공적이다.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라는 얼굴을 하고 “새로운 아파르헤이트(Apartheid)’를 전 지구촌으로 확산”시키는 WTO의 실체를 이처럼 명료하게 명의보정한 예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들 예스맨이 연출한 이 희화된 행위가 지배 권력자들의 위선적 정책을 바로잡거나 방향을 이동시키는데 얼마큼의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영향을 주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발칙하고 영특한 기획처럼 이러한 사람들의 노력이 우리의 음울한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킨다는 것은 확신 할 수 있다. 이 기발한 명의보정이란‘공공패러디’는 불투명성과 부정과 부패로 흐리멍텅한 우리의 정치와 경제현실의 비판과 시정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론이 될 수 도 있지 않을까? 가볍고 유쾌한 마음으로 신자유주주의의 허상을 읽어낼 수 있는 깜찍한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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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지구에서 7만 광년
마크 해던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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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우정, 의리, 호기심, 모험심, 도전과 같은 어휘들을 떠올리게 하는 환상적 모험기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무심한 듯 아이들이 던지는 어른들을 향한 시선에서 허점과 결여 투성이의 미흡한 기성사회를 보게 되고, 불완전한 어른의 세계를 뛰어넘는 또 다른 성장의 모델까지 제시하는 작품이라 하여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의미심장한 철학적 구조나 경직된 언어로 이루어진 문장과는 거리가 아주 먼 유쾌하고 발랄하며 활력이 넘치는 동화적이고 헐리웃 스타일의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의 흐름으로 한 순간에 작품에 도취될 정도로 단순 명쾌한 구성에 이 정도의 주제를 편입시킨 작가의 역량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학업에는 관심이 없는 문제아인 나,‘짐보’, 그리고 과격한 데스메탈(death metal)음악에 심취하고 가죽잠바와 오토바이족과 어울리는 누나‘베키’, 프라모델이나 조종하는 실업자 아빠, 생계를 책임지느라 바쁜 직장생활을 하는 엄마라는 가족구성처럼 소설은 전통적 성역할을 답습하지 않으며, 짐보가 아빠에게 사다드리는 <초심자를 위한 500가지 요리법>이라는 요리책처럼 엄마에게 이혼당하지 않도록 돕겠다는 의도는 물론 의기소침한 어른들에게 세상 다시보기라는 용기와 긍정의 관점을 선사하기에까지 이른다.

한편 엉망인 학교생활이지만 마음을 흔쾌히 주고받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찰리’와 함께 겪게 되는 세상보기는 문제의 접근과 해결,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도전과 용기, 위험과 결단, 우정과 의리 등 사람의 정신과 관계에 대한 모델로서의 역할을 한다.
짐보와 찰리, 두 소년의 호기심은 우연히 엿듣게 된 두 명의 선생님이 주고받는 알 수 없는 언어의 기묘한 의혹에서 시작된다.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선생님들을 미행하고 감시하며, 급기야는 몰래 잠입한 선생님 집의 다락방에서 이상한 언어로 써진 쪽지와 용도를 알 수 없는 팔찌를 발견 한다.
그러던 중 찰리가 실종되고, 의혹의 두 선생님도 감쪽같이 사라진다. 여기서 소설은 빠른 호흡과 긴장을 높이는 추리적 요소와 서술로 전환되어 급격하게 독자의 시선을 밀착 시킨다.

이 속도는 짐보를 살해하려는 낯선 이들과의 힘겨운 격투와 누나 베키와의 긴박한 탈출의 장면, 그리고 찰리가 써 놓은 <스푸드베치!>라는 비밀의 단서가 지목하는 곳, ‘스코틀란드 스카이섬의 코루이스크 호수’여정으로 급격하게 치솟는다. 이 여정에서 견원지간처럼 으르렁대는 남매는 형제의 사랑을 새삼 깨닫는데, “나는 내가 실은 우리 누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평생 처음으로 깨달았다.”고 하는 짐보의 이 대목은 누나를 괴롭히기만 하는 내 아들 녀석이 제 누나만 없으면 안절부절 하는 모습과 겹쳐 슬며시 공감의 웃음을 머금게 된다.

쪽지의 좌표가 말하는 장소, 파란빛의 기둥, 그리고 쾅! 하며 사라지는 사람. 오직 친구 찰리를 구하겠다는 짐보의 열망은 예기치 않은 원통장치에 이끌려, 대마젤란 성운 방향으로 태양계 중심에서 약 7 만 광년 떨어진 곳인‘궁수자리 왜소 타원 은하’에 도착한다. 거기에는 알 수 없는 언어를 말하던 두 선생님, 바로 외계인를 발견하게 된다. 지구의 파괴를 기획하는 외계인의 음모와 이를 막고 지구를 구하여야하는 절대절명의 위기가 두 소년의 어깨에 지어진다.

다분히 동화적이고 몽환적 요소로 살짝 유치하기도 하지만 이야기에 내재한 어른들의 불완전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세상보기 제시라는 둔중한 주제의식은 재미를 오히려 깊게 만들어준다. 쾅! 우주여행의 시작과 도착을 알리는 굉음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정신을 구성하는 우주를 이해하고 나아가 새롭고 독창적으로 구축해 나가는 소리의 다른 형식이 아닐까? 두 악동의 용기와 사랑, 모험의 여행을 감동적이고 성공적으로 그려낸‘마크 해던’의 또 하나의 걸출한 모험 소설이다. 아이와 부모가 함께 읽으면 얼마나 다른 이해를 말하게 될지 궁금해지기도 하는 그런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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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아이, 몽텐
니콜라 바니어 지음, 유영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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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개월짜리 여아(女兒)의 해 맑은 눈망울과 천진스런 미소, 깔깔대는 그 순박한 행복의 메아리가 내 가슴속으로 밀려오는 듯하다. 인간의 발길을 허락한 적 없어 보이는 깊고 깊은 협곡과 산악, 야생의 동물들과 강과 호수와 습지, 그리고 섭씨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대 자연에 그대로 하나가 된 듯 한 몽텐, 디안, 니콜라, 이들 가족의 여정은 그대로 아름다운 시(詩)가 되고, 삶의 노래가 되며, 생생한 활력이 되어 스모그처럼 탁해진 정신과 마음을 청량한 기운으로 바꿔준다.

캐나나 북부 프린스조지에서 시작해 험준한 로키산맥을 넘어 알래스카 접경지 도슨에 이르는 이천사백 킬로미터의 대 여정은 변화무쌍한 자연이 인간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고, 혈관 속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두려움으로 심장을 옥죄는가하면, 가족의 안전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 문명으로부터의 엄청난 거리가 주는 무원(無援)의 숨막힘,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절대 고독의 조합이 된다.

겨울 여정을 위한 준비의 지점, ‘투카다시’호수로 가는 네 마리 말과의 신경전, 삶과 죽음의 경계에 맞닥뜨린 회색곰과의 아찔한 조우, 쉼 없이 내리 퍼붓는 지긋지긋한 비, 모기떼 등 타이가 여름의 고단한 걸음에서 이들 가족의 신뢰와 인내, 사랑의 숭고함, 아니 인간정신의 경외를 목격한다.

특히 일 년 여에 걸친 기나긴 이 대자연 여행기가 더욱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행복감에 도취되게 하는 것은 새의 울음소리를 따라하고, 자연의 색깔과 움직임 하나하나를 자신의 커다란 눈으로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듯한 아기, '몽텐(Montaine)'의 자연과의 닮아가는 모습 때문이며, 그저 한 편의 서정시라 하여야 할 것만 같은 “아득한 아침의 빛”과 호수와 숲과 야생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향기와 그 무수한 자연의 오묘한 색깔들의 향연이 더 없이 소박하고 감동적으로 펼쳐지고 있음에서이다.

소나무를 베어 통나무집을 세우고, 온 세상이 얼어붙는 겨울 눈썰매 출정을 준비하는 과정과 함께 수놓아지는 그 매혹적인 가족의 풍경은 문자 그대로‘태초의 풍경’이 그러했으리라 만큼 천상의 행복감을 선사한다. “숲에 사는 것이 아니라 숲과 함께 사는”사람, “나는 산 속에, 산은 내 속에 있는” 사람, 자연과 합일이 되어 있는 이들 가족의 무한한 자유와 조화는 바로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부러워지기조차 한다.

여정의 작고 소박한 느낌과 사건들에서부터 생사를 달리는 위기의 순간들, 동물과 인간의 교감을 넘어 자유의지라고 까지 판단력과 믿음을 쌓아가는 과정, 문명과 동떨어진 차디차고 고요한 눈 덮인 협곡과 얼어붙은 강위를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혹한 속 눈썰매, 그 안에 새근거리고 잠든‘눈의 공주’.몽텐의 사랑스러움에서 진정 인간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번뜩 깨우치게 된다. 어느덧 인간에게 낯 선 것이 되어버린 자연, 자연과 점점 멀어진 인간들이 말하는 진보가 얼마나 커다랗게 인간을 상심시키고 있는 것인지, 경탄과 환상의 기쁨을 앗아가 버린 것인지, 이들의 고귀한 경험이 어떠한 설득보다 강렬하게 다가온다.

 

‘니콜라’의 위험한 여행 제안을 따라주고 엄청난 희생을 감수한 아내‘디안’에 대한 절절한 고마움, 자연에 대한 민감성과 감수성이라는 놀라운 유산을 갖게 된‘몽텐’, “얼굴에는 서리가 맺혀있고, 눈썹은 얼어붙은”이들이 마침내 폭설과 혹한, 영하40도의 물살과 유빙을 해치고 ‘도슨’에 “다왔다!”고 외치는 순간은 단지 독자인 나에게도 정말 환상적인 순간이 된다. 해냈다! 아기도 해냈고, 니콜라와 디안도 해냈다. 보물보다 소중하고 값진 경험, 이들이 들려주는 록키산맥의 자연과 행로, 툰드라에 울려 퍼지는 새들의 울음소리와 몽텐의 미소, 정말이지 듬직한 명견‘오춤’의 활약이 물밀듯이 감동으로 밀려온다.  눈과 얼음, 장엄한 대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감수성 높은 야생 여행기이다. 아름답다, 경이롭다, 그리고 경외의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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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결혼시대
왕하이링 지음, 홍순도 옮김 / 비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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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화, 근대화 등 서구의 자본주의적 물질주의를 단시간 내에 쉴 새 없이 흡수하고 있는 사회, 오늘의 중국이 거치고 앓아야 하는 일상의 갈등과 이해의 문제를‘결혼’이라는 화제에 담아 그 속성과 본질을 규명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삶의 성찰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유교적 봉건전통 문화와 서구의 물질적 합리주의 문화의 충돌, 농촌인구의 도시유입에 따른 사회적 갈등 등 우리의 70,80년대와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어 작품 속 인물들이 겪고 있는 홍역을 이해하는데 별도의 해석이 필요 없을 만큼 친근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배용준’, ‘김치’, 한국의 대중문화, 등속의 표현들이 잘사는 나라의 모델처럼 스치듯 지나가는 일화에서 이 작품의 통속적 취향을 엿볼 수 도 있는데, 오늘의 중국인들이 부딪는 현상이 아주 낯익은 것이라는 점에서 시시콜콜한 지나간 한국의 TV 드라마 속 장면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갈등하고 고통 받으며 때론 기뻐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언어들이 마치 한국인의 그것과 같은 동질감을 느끼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의사 엄마, 교수 아빠라는 선택된 가정에서 양육된‘샤오시’라는 도시 여성과, 오지 시골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지만 세칭 일류대를 졸업하고 잘나가는 IT기업의 촉망받는 사원인‘젠궈’와의 결혼생활을 플롯으로 하고 있다. 눈치 챌 수 있겠지만 이미 도농(都農)의 대비가 암시하듯이 이들의 일상이 순탄치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여전히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유교의 봉건적 관념이 젠궈라는 남성의 가계(家系)에 있어서는 굳건히 틀을 잡고 있다. 가부장적 질서, 남존여비, 여성의 자손번식자로서의 의무와 같은 전근대적 유산들과 관계에 의거한 청탁과 의존에 대한 의식 없음과 같은 무례함으로 대표되는 남자의 집안과 합리주의와 도시의 규격화된 일상, 근대적 이성주의에 기초한 도시 상류계층인 여자의 집안은 사사건건 마찰과 마주한다.

특히나 결혼이 사랑하는 두 젊은 남녀의 결합만이 아니라, 두 사람의 가족과의 결합이라는 인식과 대립하면서 이들 부부의 신랄한 갈등의 촉발은 끊임없이 양쪽 가계가 제공한다. 도시에서 출세한 아들이 가난한 시골의 부모와 형제, 친척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젠궈의 아버지는 사돈 집안의 도시에서의 영향력이 당연히 자신의 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샤오시는 이러한 시아버지의 무리한 요구에 반발하지만 번번이 수용하여야만 하고 고통을 감내하여야만 하는 수동적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노한다. 이야기의 중심을 관통하는 제재는 이렇듯 양가가 상징하는 도시와 농촌, 근대와 비근대의 쟁투를 담고 있지만, 이에 못지않은 또 다른 의미에서 선보이는 결혼관도 재미를 더한다.

출판사 직원인 샤오시와 그녀의 동료인‘젠자’라는 여성의 이성관과 결혼관인데, 대재벌 총수의 정부(情婦)로서 6년여를 보내지만 결코 자신과의 결혼을 거부하는 남자를 떨치고, 샤오시의 동생인 연하의 남성,‘샤오항’과의 사랑과 결혼을 향한 사회 관습과의 갈등과 이의 돌파를 위한 과정을 통해, 물질과 학벌과 같은 속물적 조건에 내둘리는 오늘의 젊은이들이 지니는 결혼관과 풍속을 해체하고, 결혼의 의미를 진중하게 정립한다. 또한 자신의 성취를 향해 철저했던 아내를 둔‘샤오시’의 아버지가 상처(喪妻)를 함으로서, 일생 한 끼의 식사에서부터 작은 보살핌등과 같은 아내로부터 내조를 받지 못했던 남자가 맞이하는 노년의 삶을 재조명함으로써 혼자된 노인들의 결혼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 감성적 접근은 물론 사회의 태도와 대중적 시선을 일깨우기도 한다.

일면식도 없는 남편의 형수(손위 동서)의 친정 할아버지의 상(喪)에 곡(哭)을 위해 마지못해 오지 산골로 찾아가지만, 그 사이 친정 엄마는 과로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단지 베이징이라는 도시의 잘 교육받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변에 과시하려는 시골 형수의 체면을 위해 반드시 가야한다는 남편의 채근에 못 이겨 이루어진 여정이었으니, 이 사건이 초래한 파국은 극단을 만들어 낸다. 이처럼 이 작품을 수놓는 두 남녀와 도농 가족 간의 에피소드들, 그리고 연상연하 커플, 노년의 삶을 통해 그네들이 당면한 시대의 충돌들을 유머와 재치 넘치는 문체로 그러나 진지함을 잃지 않은 노련한 의식을 담아 대중에게 사유의 기틀을 던진다.

이해와 배려의 과정, 물질을 넘어서는 사랑의 진정성, 자본의 중용적 가치라는 결말의 시사처럼 중국사회가 안고 있는 그네들로서는‘신(新)’결혼 시대의 통증은 수습되고 안착될 터이다. 그러나 우리사회가 선택한 배제와 배타, 물질숭배, 자본지상의 조건만이 남아있는 우울한 결혼시대는 오히려 구태(舊態)스럽고 케케묵은 이네들의 티격태격하는 신 결혼시대라는 과도기의 산물을 부럽게 한다. 오늘의 중국인들을 들여다보는 모처럼의 즐거운 계기가 되어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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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큐에게 물어라
야마모토 겐이치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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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말기인‘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지배하던 16세기, 다도(茶道)의 명인인‘센 리큐’라는 인물을 통한 다도의 미학, 그리고 이에 얽힌 사랑과 삶과 죽음의 서사시라 하여야 할까. 특히나 리큐(利休)다도의 정수(精髓)에 조선 여인의“처절한 아름다움과 범접할 수 없는 위엄, 그리고 우아함”이 놓여있음은 감성의 동요(動搖)를 일으키게 하고, 작품의 몰입을 재촉한다.

또한 익숙한 시간을 역행하는 구조는 주인공인 리큐의 사사(賜死)라는 최근의 사건으로부터 과거의 시간으로 안내하여 인물의 삶과 배경을 하나씩 드러냄으로써 한 인간이 추구하였던 미(美)의 본질과 그 진실의 심원에 더욱 매혹적으로 다가서게 한다. 그리곤 바로 그 정점에 천하제일의 다인(茶人)이 그토록 도달하려한 다도의 진수인 “깊은 산골 속에 돋아난 풀, 그에 깃든 생명의 빛”이자, “자연스러운 소박함 속에서 심원한 조화의 미”의 비밀과 근원을 발견케 한다.

한 꺼풀씩 벗겨지듯 드러나는 세월의 내밀한 과정에서조차‘녹유향합’이라는 열아홉 살 마주했던 그 강렬하고 선명한 숭고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구체화 할 뿐이다. 거기에는“소박한 풍정 속에서도 관능적인 풍윤함이 있는 독자적인 다도 세계”의 실재(實在)가 있고, “사람을 죽이는 한이 있어도 갖고 싶을 정도로 크나큰 아름다움”을 말하는 리큐 다도만의 본질이 있다.
문득,‘다도(茶道)’라는 소재 하나로 이 정도의 풍미 넘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 작가의 역량에 은근히 샘이 나기도 한다. 사실 작품 속 이방인들의 일본 다도에 대한 비판처럼 다다미 2,3장에 불과한 좁디좁은 방에 모여 작은 흙덩이에 불과한 다완(茶碗)을 들고 뻔한 칭찬을 해대며 맛없는 음료를 마시는 행위에 무어 그리 대단한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할 만큼 시시한 소재에서 말이다.

그러나 한 다도 명인의 삶의 역정을 통해 우리네 인생사를 구축하는 다양한 모습들, 다시 말해 한 순간이 지배하는 영겁의 진실,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이란 삼독(三毒)과 같은 사람의 본성에 내재하는 그 품격들이 격돌하는 사사로워 보이기만 하는 역사의 장면들을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최고의 권력자인‘히데요시’의 다두(茶頭)로서 세상의 존경을 받는‘리큐’라는 인물의 심미안(審美眼)의 본질, 화려한 서원다도와 소박한 와비다도를 승계하지만‘소박한 초암(草庵)속의 화사함’이란 그만의 다도 정신을 구성하는 이야기 속 사건들은 삶에 대한 예리하고 풍부한 해석을 품고 있다. 그래서 작품의 탁월한 서사적 재미를 뛰어넘는 인생에 대한 고귀한 사유를 외면키 어렵게 한다.

관백‘히데요시’가 ‘리큐’의 사사를 명령하는 죄목은 사실 변명에 가깝다. 사찰에 건립된 리큐의 목상이 불경스럽다는 것과, 다완을 비롯한 다기를 미적가치라는 명목을 통해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날카롭다는 뜻, 지나치게 날카로운 사람은 배척당한다.”는‘리(利)’라는 이름자나, 히데요시가 던지는 리큐의 내면을 관통하는, “ 너만큼 욕심과 색이 강한 사내는 달리 본 적이 없어.”, “ 마음속에 감춘 교만을 용납할 수 없었다.”는 것과 같은 말들의 반복과 같이 이미 처세, 아니 진정함에 대한 삶의 진실을 어겼다는 보다 본질적인 의미의 결과라 해야 할 것이다.

한편 할거하는 지역의 쇼군들을 복속하거나,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 히데요시의 일화 등 역사적 사건들에 등장하는 행다(行茶)의 의례(儀禮)로 자연스럽게 다도의 효용이나 그네들의 삶으로 체화된 본질을 담아내는 의연한 문장들에서 절로 다도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읽게 된다. 한 낱 차를 마시는 형식례에서 사람을 꾀는 술책으로, 마음의 해방공간으로, 삶을 다스리는 호흡의 완급과, 생명의 우미한 광채까지 헤아리게 되며, 또한“아니꼬워 보이지 않을 만한 겸양”으로서의 고매함이란 어떤 것일지, “고담하고 처연할지라도 그곳에 활기찬 생명의 싹이 있어야 바람직”한 것이란 바로 무슨 형상일지, “똑같이 탐욕스러워도 사람에 따라 품성”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촘촘히 들어찬 삶의 태도와 근원을 읽게 한다.

다도와 그 다도를 일으킨 역사 속 다인(茶人)을 말하는 일본의 역사문화 소설에서 삶의 태도와 사람의 품격, 그리고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에 공감하는 것은 분명 문학이 주는 사유의 즐거움이 된다. 다만 그 역사는 특정한 하나의 민족이나 국가만의 역사일 수 없다는데 다른 시선이 놓여 질 수밖에 없다. 모두에서 언급하였듯이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히데요시가 조선정벌을 준비하던 시점이고, 더구나 조선의 다기, 조선 여인의 상품화와 약탈, 침략에 대한 향수 등이 소재로 등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다 노부나가’의 하룻밤 욕구를 채워주는 여성 역시 조선의 여인으로 설정하고 있다. 물론 문학작품에 민족주의적 보수성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편협한 비판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진정 한 편의 아름다운 회화(繪畵)같은 작품으로 그 섬세함과 수려한 문장들에 매혹되지만 한편의 씁쓸한 심정을 그저 놓아버리기만은 쉽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 될 것이다.

리큐의 아내 소온의 말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는데 몸은 달콤한 열을 띠”게하고, “그것이 더욱 서글프고 안타깝게”다가오는 작품이다. 아마 ‘탄탄한’작품이란 이 작품을 위해 만들어진 표현이리라. 삶의 열정과 이상을 다도 미학에 버무려낸 또 하나의 역사소설 걸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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