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4 :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4
남명심 글, 정윤채 그림, 손영운 기획,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원작 / 채우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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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솔직히 '장편소설'은 읽기 힘들다. 책이 두껍고 분량이 많은 것은 둘째치고, 이야기의 전개가 굉장히 느린데다가 인물들간의 얽히고 섥힌 복잡한 갈등 때문에 머릿속이 난삽해지기 십상인 탓이 가장 크다. 그런 까닭에 몇 주간, 길게는 몇 달 만에 '독파'한 뒤에도 줄거리조차 요약이 되지 않아 내가 읽은 책이 내용이 무엇인지, 책의 주제는 무엇이었는지 모르는 것 투성으로 책을 덮곤 했다. 내겐 그런 책이 몇 권 있는데,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다. 모두 10대에 읽다가 만 대표적인 장편소설이기도 했다. 그 후에도 바쁜 일상을 지내다가 읽다 말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래서 이 책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시리즈가 참 맘에 든다. 좀처럼 읽기 힘든 '고전소설'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을 읽은 뒤에 '원작소설'을 꼭 읽어야 제대로 완성이 될 테지만, 원작의 내용을 단편적이나마 '요약본'으로 미리 읽었으니 '원작소설'을 읽을 때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가장 맛있는 음식도 '먹어본 음식'이라지 않은가 말이다. 온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많고도 많겠지만, 내 머릿속에 기억된 맛은 이미 먹어본 것만을 떠올릴 뿐이다. 그러니 가장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아는 맛'일 수밖에 없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을 지라도 '최대한 비슷하게 흉내낸 것'을 맛보았으니 가장 맛있을 수밖에 없는 <명작고전의 맛>도 천천히 음미하며 진하고 깊은 맛이 우러날 때까지 꼭꼭 씹으며 끝까지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쨌든 그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원작소설을 읽으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린다는 대작이기도 하다. 단순히 분량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 내용의 깊이와 작가의 의도를 짚어가며 읽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그만큼 복잡한 인물구도 속에, 방대한 배경지식을 요구하며, 인간의 삶과 종교적 구원이라고 하는 거창한 주제를 읽노라면, 독자들에게 폭넓은 혜안을 요구하는 작가의 의도가 얄궂기조차 할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도대체 책 한 권(보통 2~3권 분량) 읽는데 얼마나 깊은 공부를 해야 한단 말인가?

 

  이 소설의 표면적인 사건은 '아버지 살인범 찾기'다. 작가는 살해 당해 마땅한(?) 아버지로 이야기를 설정해놓고서, 죽어 마땅한 자를 죽이는 사람을 '살인자'라고 부르는 것이 온당한 일이냐고 되묻는다. 마치 <죄와 벌>이 연상되는 설정이다. 하지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좀더 깊이 파고들어 '종교적 구원'에까지 파고 들어 질문을 퍼붇는다. "지은 적이 없는 죄로 인해 유죄판결을 받아 억울한 죄인이, 살아서 지은 모든 죄값을 치룬다면 성인이라 부를 만한가?"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살인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방탕한 삶'을 살아간 죄값을 속죄하기 위해 '살인죄'를 달게 받고, 고행을 하면서 '영혼의 구원'을 바란다면 훌륭하다 칭찬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또한, 이 소설에서는 '신의 존재'는 믿지만, '신앙은 없다'면서 기존 종교계를 맹비난하는 무신론자도 등장시킨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종교'를 마주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특히, 서구사회에서 '신의 존재'는 믿음의 차원을 넘어 종종 '사회규범'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열광적인 신자들을 배출하는 등등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드러내곤 한다. 그런 까닭에 종교를 섣불리 '어느 한 쪽'면만 바라보면서 이야기하기 곤란한 점이 없잖아 있다. 그런데도 그 다루기 곤란한 종교에 대해 가타부타 시시비비를 따지려는 세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에서나 등장하곤 한다. 이 책에서도 그렇다.

 

  그럼에도 '종교'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야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종교적 문제를 다룬 이야기의 결말은 대부분 '사랑'으로 끝맺기 마련이다. 그 뻔한 결말로 다가가기 위해서 그토록 이야기를 지지고 볶아대긴 하지만, '사랑'으로 끝맺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냔 말이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 중에 '사랑, 아닌 것'이 드문 것처럼, 모든 이야기의 결말은 '사랑'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이렇게나 '뻔한 이야기'인데도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가 심상찮은 까닭은 바로 '실천'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좋은 말씀(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많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 '좋은 말씀'에서 '종교적인 색채'는 쏙 빼고 담백하게 우리 사회 모두를 위해 '실천'하는 종교인은 드물다는 것을 잘 안다. <성경>에 담긴 말씀을 달달 외우는 이는 많아도 그 '말씀'을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곳에 따뜻한 마음을 담아 몸소 행동으로 옮기는 종교인은 드물다는 것도 잘 안다. 왜 '사랑'이라는 좋은 것을 배우고서 '같은' 종교인들끼리만 사랑하려고만 하는가? '다른' 종교인은 그토록 배척하라고 <성경, 어느 구절>에 적혀 있느냔 말이다. 또한, 그 많은 헌금을 걷어 으리으리한 '성전'을 쌓고, 목사의 통장잔고만 그득히 불려주고, 그리 거룩한 성전과 통장을 대대손손 물려주고, 저들끼리 해처먹으라고 말했느냔 말이다. 종교가 세속화되고 배타성을 띠게 되면 '타락했다'는 증거가 될 뿐이다. 타락한 종교는 더는 올바른 종교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올바른 신도라면 '잘못 들어선 길'에서 발을 빼서 돌려야 마땅하다. 도대체 어느 종교가 '신도'를 앞세워 성전을 수호하고 통장잔고를 사수하라 말한단 말인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까닭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전하는 '실천하는 사랑'이 가슴을 울리는 것이다. 작가가 이 책을 쓸 당시에 '러시아 민중들'도 귀족과 자본가 들의 방탕한 삶을 목도하며 온세상에 썩어들어가고 있다고 개탄했단다. 서구에서 밀려들어온 '계몽주의'로 러시아 민중들은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점점 깨우쳐가는데도 '제정 러시아'를 이끄는 지배층들의 문란한 삶은 그칠 줄 몰랐던 것이다. 그 와중에 돈을 모아 '졸부'가 된 이들이 벌이는 헤픈 삶을 보며 러시아 민중들은 서서히 분노에 차올랐다. 민중들 대다수가 굴주리는 마당에 소위 '가진자'들이 벌이는 행태가 눈꼴 시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성난 민중들의 마음을 달래주어야 할 '종교인'들조차 말로만 사랑을 입에 올리며 기득권층을 옹호하는데 앞장 설 뿐이니, 민중들은 기댈 언덕조차 없어 가난과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지식인'들이 '실천하는 사랑'을 노래하는 소설을 지어 대중들에게 선보이니 열렬히 호응받게 된 것이다.

 

  이는 '19세기 러시아'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몸소 실현하는 사랑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수록 기후변화는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으며 인류문명 전체를 위협하는 재앙은 인류 스스로 불러오고 있다. 이제 '지구온난화'는 어느 한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불행이 아니며,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점점 황폐해져만 가는 지구환경은 몸살을 앓다 못해 스스로 정화할 능력을 상실해가며 썩어가고 있다. 이런 와중에 '후쿠시마 핵오염수 방류'가 초읽기에 들어갔으니, 이젠 생태계 절멸까지 불러재끼고 있어 개탄을 금치 못할 지경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하나 뿐인 지구'를 살리기 위해 온지구를 사랑으로 가득 채울 작은 실천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무엇이라도 좋다. 내가 실천하는 사랑이 반드시 지구를 구할 것이라는 '믿음'만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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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세계사 3 - 다양한 문화권의 형성과 발전 처음 세계사 시리즈 3
초등역사교사모임 글, 한동훈.이희은 그림, 서울대학교 뿌리깊은 역사나무 감수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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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책의 시대적 배경은 '중세시대'다.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막막해지기 시작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왜냐면 서양의 중세를 배경으로 '역사'에 막 익숙해질 만하다가 이슬람제국이 등장하고, 동시대 동양에서는 중국의 분열과 통일로 한차례 난리법석을 피우다가 인도의 여러 왕조를 거쳐 동아시아 한국과 일본이 역사까지 섭렵하다보면, 그 '역사의 방대함'이 처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외워야 할 것이 많아져서 부담스럽다는 말이다.

 

  물론, 역사공부에 있어서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건의 맥락과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처럼 '방대한 분량'과 맞닥뜨린 학생들이 겪는 당혹스러움은 다들 겪어보셨기 때문에 잘 아실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암기'를 하자니, 역시나 '방대한 분량'을 마주하고서는 즐거움보다 막막함이 먼저 다가오는 것을 실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까닭에 역사공부의 순서는 모름지기 [암기에서 이해로] 가는 방향이 '순리'이다. 아무리 이해가 중요하다고해도 '역사지식 암기'가 없이는 맥락과 흐름 파악도 저멀리 떠 있는 무지개와 같기 때문이다.

 

  나의 고등학교 '화학선생님'도 개학 첫날 첫수업에서 [주기율표] 암기를 숙제로 내주셨다. 다음 시간까지 원소기호 1번부터 20번까지, 1족부터 0족까지 원소들의 이름을 암기해오지 않으면 매타작을 하시겠다고 선언하셨고, 실제로 다음 시간에는 수업시간 내내 6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5초의 시간 안에 모든 것을 술술 불지(?) 않으면 어김없이 매타작을 작렬하셨다. 나는 그렇게 [주기율표]를 달달 외웠고, 거짓말처럼 '화학수업'이 너무나도 머리에 쏙쏙 이해가 되는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난생 처음 배운 과목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처럼 [암기]는 종종 '이해의 바탕'이 되며, 이해해서 지혜로 쌓여지기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한 셈이었다. 마치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연탄재를 눈밭 위에 굴리는 것처럼 말이다. 연탄재에 달라붙은 눈들이 동글동글 눈뭉치가 되고, 계속 굴리다보면 어느새 원하는 만큼의 눈덩이가 되어 어엿한 눈사람으로 완성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겨울철 연탄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암튼, '중세시대의 역사'를 다룬 이 책은 [중세유럽의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그리고 동로마제국의 번영으로 비잔티움제국이 형성되는 과정을 통해서 서유럽이 지금이 프랑스와 영국, 독일과 이탈리아로 정착되기 시작하는 초기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이슬람제국의 형성]을 다루고 있는데, 무함마드의 죽음 이후 칼리프 체제 아래 우마미아 왕조와 아바스 왕조가 형성되고 이슬람세력이 팽창하는 과정을 친절히 보여주었다.

 

  한편, 동양의 역사는 크게 중국과 인도, 동아시아 영역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서양의 중세시대와 동시대의 중국에서는 수당제국이 들어섰다 다시 분열되고 송나라로 다시 통일되기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었으며, 인도에서는 굽타왕조를 중심으로 인도의 종교와 문화를 소개하였으며, 끝으로 동아시아에서는 한국사의 삼국통일과 남북국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적 맥락과 흐름을 일본에 한반도 문화를 전파하는 과정까지 소개하며 끝마쳤다.

 

  비록, 이 책에서는 '한 권의 분량'으로 다뤘지만 실로 엄청난 분량의 세계사를 접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에 그닥 어렵다고 두려워할 까닭은 전혀 없다. 오히려 오늘날의 삶과 과거의 삶을 비교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야기하면서 세계사에서 다루는 '역사적 사건'들이 왜 다루어야만 하는 것인지 감을 잡아나가는 식으로 공부하는 것을 권한다. 또는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해보는 여유를 갖게 되는 기회로 삼는 것이 역사공부의 진짜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도 역사를 무작정 외우기만 하는 '암기과목'으로 여기고 있다면, 이번 기회에 생각을 바꿔보시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쉽게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의 나열'에 불과한 역사교과서로 공부하고 시험도 치루겠지만, 그 단순한 '지식 암기'를 넘어서 '인류의 발자취'를 통해 옛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갔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훌륭한 역사공부의 디딤돌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 뒤부터 하는 '역사공부'는 반드시 즐겁고 재미날 것이다. 그게 진짜 역사공부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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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다리 고기다리~던 <까해만 2>가 정식출시되었답니다.

재미나고 유익한 한빛비즈 교양툰 시리즈에서도 '후속작'이 나오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요.

그만큼 독자들의 열광적인 성원이 없었다면 빛을 보기 힘들다는 건데

다른 교양툰을 제치고 <까해만 2>가 당당히 출신되었습니다.

그런 기대만큼이나 출판사에서도 홍보에 적극적이구요.



이번 한빛비즈 서포터즈 선발과정도 굉장히 치열했는데요.

경쟁률이 무려 6:1 이었다는 후문입니다.

그 뜨거운 현장을 뚫고 당당히 서포터즈가 된 저에게

압듈라 작가의 친필사인이 동봉된 책이 도착했네요. 영~광영광


이번 2권에서는 지난 편에서 못다한 '근육과 신경의 이야기'가 펼쳐질텐데요.

언뜻 단단한 근육과 예민한 신경은 어울리지 않는 사이 같지만

우리 몸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 둘의 캐미가 환상적이어야만 한다는 사실!!

자, 2권에서는 작가의 미친(!) 드립이 어떻게 펼쳐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큽니다.

저도 아직 읽지 못한 따끈따끈한 신간 <까해만 2권>

여러분도 함께 읽어주길 바랍니다^^


추신...저는 제가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먼저 교양을 전수할 생각입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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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리포트 하루 15분의 힘 - 일상 속 숨어 있는 시간을 발견하는
서혜윤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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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하는 삶을 살기 위해 매사에 성실하고 계획을 세우는 일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꾸준히 실천하는 습관'이다. 늘 성실한데도 뭔가 결실이 부실하고,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는데도 며칠, 몇 주, 몇 달이 지나고 나면 애초에 무얼 계획했던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흐지부지되는 일이 반복된다면, '실천 습관'을 다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하루 일과'를 꼼꼼히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고, '계획한 일'과 '꼭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도록 철저히 체크하는 습관을 들이면 누구나 성공에 다다를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몰입도'를 점검하며 반드시 해야 할 일에 얼마나 '집중력'을 발휘했는지 스스로 평가를 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애초에 세운 계획이 틀어질 일이 없고, 마음 먹은 일이 실패할 까닭이 없단다. 너무 당연한 말 아닌가?

 

  그런데 그 당연한 말을 '실천'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학창시절에 시험공부하다 공부는 뒷전이고 '시험계획'만 신 나게 세우다 밤을 꼴딱 샌 적이 있지 않은가? 혹은 맘잡고 공부하려다 책상정리만 세 시간을 하고, 내친김에 방청소를 두 시간 한 뒤에 드디어 공부 시작해야지 했다가, 스마트폰 잠깐 본다는 것이 한 시간을 훌쩍 넘겨버리고 결국 시간은 자정을 넘겨 꾸벅꾸벅 졸다가 시험을 망친 경험 말이다. 그렇게 시험을 쫄딱 망쳐버리고 '다음 시험'에는 꼭 좋은 성적을 받겠다며 '오답노트'를 작성하며 실수를 줄이는 학습법을 실천하겠다며 야심차게 공부를 시작했는데, '푸는 문제'마다 족족 틀려서 '오답노트' 작성만 하다 지쳐 버린 경험들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고, '적정수준'이 있는 법이다. 당장 내일 국어시험이라면 오늘은 국어공부에 올인해야 한다. 그런데도 책상정리, 방청소 따위나 하고 있다면 헛다리 제대로 짚은 셈이다. 또한 오답노트는 '상위권 학생'의 공부법이다. 아쉽게 한두 문제 틀리고 '틀린 이유'를 소상히 밝혀 또다시 실수하는 일이 없게 하는 공부법이기 때문이다. '중하위권 성적'이라면 차라리 개념정리나 공식암기가 딱 알맞다.

 

  이 책에서 말하는 '데일리 리포트'의 핵심은 일상적인 '하루 일과'를 꼼꼼히 정리하고, 그 일과 중에 '한 일 / 못한 일'을 구분하고, '못한 일'을 다시 일정에 추가해서 하도록 하고, '한 일'에 대해서는 '몰입도'를 체크해서 얼마나 집중력을 발휘해서 해냈는지 스스로 점검하며 매일매일의 '하루 일과'를 알차게 보낼 수 있도록 '기록'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렇게 쌓인 '하루 일과'의 기록들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거울 역할'을 하기도 하고, 목표한 일이 얼마큼 성과를 거두었는지도 '점검'하는 역할도 하며, 1년, 2년, 그리고 10년 이상 쌓이면 '자기만의 성향'을 알 수 있어 철저하고 냉정한 '자기 분석'의 훌륭한 자료로 쓸 수 있어 매우 유용한 습관이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역시 지난 '18년간의 독서기록'을 작성한 덕분에 '나만의 독서이력'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고, 리뷰를 작성한 까닭에 지금까지 책 한권한권의 내용이 새록새록하며, 1600여 권이 넘는 기록을 '분석'하니 '나의 독서취향'이 어떠한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러한 '독서기록'을 살짝 바꿔서 '일과기록'으로 남겨두면 글쓴이처럼 좀더 다양한 목표를 이루는데 효과적일 것이고, '성공하는 삶'에 부쩍 다가설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

 

  물론, 처음부터 쉬운 '습관'은 결코 아니다. 이 책의 부제처럼 '하루 15분'만 투자해서 완벽한 기록을 남길 수도 없을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초창기에는 '하루 일과'를 기록하는데만 1~2시간이 걸릴 것이며, '습관 형성'이 되지 않아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그냥 넘겨버린 나날들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고비들을 넘기고 하루의 일상이 빼곡히 차게 되고, 일주일을 그렇게 꼼꼼히 넘기고, 어느덧 한 달의 기록이 얼추 다 차버린 결과물을 보면서 굉장히 뿌듯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달려왔다는 보람도 느낄 것이다. 무엇보다 '달라진 자신'에 굉장한 만족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 그때쯤이면 '하루 15분'을 자기 습관을 '기록'하는 것에 자신감이 넘치게 될 것이다. 아니, '기록'을 넘어 '하루 일과'를 스스로 평가할 여유를 갖게 되고, 조기 목표달성을 이룰 수도 있고, 목표달성에 뿌듯함을 만끽하며 '그 다음 목표'까지 새롭게 설정하는 즐거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자, 이제 남은 것은 '자기에게 딱 맞는 기록방법'을 찾는 것이다. 글쓴이가 여러 가지 '기록방법'을 선보이고 있으니, 목표달성이 목마른 당신이 직접 살펴보고 고르는 일만 남았다. 성공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렇지만 '기록'으로 남기고 '분석'까지 한다면 더욱 확실하게 성공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하루 15분'이면 충분하다. 당신의 꿈을 실현시켜줄 마법을 선보이기까지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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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3 : 폭풍의 언덕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3
정윤채 그림, 권기희 글, 손영운 기획, 에밀리 브론테 원작 / 채우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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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인 에어>의 작가, 살럿 브론테의 동생 '에밀리 브론테'의 단 하나뿐인 명작이 바로 <폭풍의 언덕>이다. 하지만 명작이라는 명성과는 다르게 상당히 오랫동안 혹평을 받으며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했던 작품이었다. 그 까닭은 주인공인 히스클리프가 선보인 사랑과 미움, 그리고 처절한 복수극이 19세기 당시의 가치관과 사뭇 달랐던 탓이다. 영국 빅토리아시대를 시대배경으로 관통하는 <폭풍의 언덕>이 그 당시로서는 허용할 수 없던 '비윤리적'이고 '반기독교'적이라는 정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작가인 에밀리 브론테는 그런 평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가 소설속에 녹여낸 캐릭터는 '인간 본연의 감정'에 지극히 충실할 뿐이라는 이유를 들어 당시의 도덕적 가치관에 저항하길 바란다고 주장했다고 전한다. 그런 까닭에 작품의 시간적 배경인 18세기와 소설이 쓰여진 19세기 당시의 윤리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다. 그리고 주제는 두 남녀의 사랑이고 말이다. 지극히 뻔한 '여류작가의 애정소설'일 수도 있겠으나, 결코 그런 식으로 선보이길 거부했던 '브론테 자매들'이었으므로 등장인물의 성격(캐릭터)부터 파격적일 수밖에 없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남주 히스클리프는 '결코 길들여질 수 없는 야생, 그 잡채'였다. 그리고 그런 '야생의 소년'을 사랑한 여주 캐서린도 '열정적으로 사랑에 올인하는 독립적인 당찬 여성'이었다. 이런 두 남녀의 만남이 순탄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그 순탄치 못한 까닭이 고리타분하게 감히 넘볼 수 없는 '신분의 차이' 때문이었고, 또 '빈부의 차이' 때문에 주변의 반대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리라는 것도 '브론테 자매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명약관화할 따름이다.

 

  암튼, 당시의 시대상을 봤을 때 '캐서린의 사랑'은 조신한 여성이 결코 해서는 안 될 행동을 보였으니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허나 이 소설이 더욱 심한 비난을 받은 까닭은 '야생의 남자' 히스클리프의 처절한 복수극 때문이었다. 빈민층이었던 '집시 소년'을 기독교적인 선행으로 거두어주었으면 '감사의 뜻'으로라도 주인어른(?)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순종하고, 모진 고행을 겪더라도 참고 인내하며 '권위에 복종'하는 순한 양으로 길들여져야 마땅하거늘, 히스클리프는 고마움과는 사뭇 거리가 먼 행동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주인집 도련님의 횡포를 하나하나 다 기억에 새겨두고 복수를 다짐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넘봐선 안 될 주인댁 아가씨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성공의 길'을 걷고 금의환향을 한 뒤에 자신을 폭행한 주인댁의 집과 영지를 빼앗고,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을 한 가문까지도 몰락하게 만들어 재산을 몰수하고, 엄연히 남편이 있는 캐서린과 정열적인 사랑의 감정을 나누며, 그들 모두의 2세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쳐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악마'와 다를 바 없는 소행을 서슴지 않게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기 주위의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든 주인공을 다룬 소설에 '폭풍'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이런 내용의 소설인데도 오늘날에는 '극찬'을 아끼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악마와도 같은 주인공, 히스클리프가 결코 밉게 보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극단적'으로 비칠지언정 그 자신은 '감정'에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뭐랄까? 애둘러 돌아가는 법이 없는 '직진남'이라고나 할까? 히스클리프는 '순수, 그 자체'로 사랑과 복수에 정열을 다 쏟아버린다. 그런 순수함이 자신조차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그는 멈출 줄 모른다. 한마디로 끝장을 볼때까지, 갈 데까지 다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인물인 셈이다.

 

  이런 저돌적인 맹수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캐서린'이 유일했지만,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동가숙서가식'을 꿈꾸는 철부지였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히스클리프였지만, 그녀가 '선택'한 남자는 에드거 린튼이었다. 왜냐면 그녀의 허영을 해소시킬 수 있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부도덕한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만 '부당하게' 요구하는 정절에 반기를 들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왜 남성은 이 여자, 저 여자 맘에 내키는대로 '선택'하면서 여성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일까? 똑같이 저지른 부도덕한 행동에 대해 '사회적 관습'은 남성에게 너그럽고, 여성에겐 가혹하단 말인가.

 

  <제인 에어>에서도 40대의 유부남이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10대 가정교사와 사랑을 나누려 한다. 소설에서는 '유부남'이란 사실을 속였다는 사실만을 거론하며 '진실한 사랑'이라면 나이 차이쯤은 아무 문제가 아니라는 듯 그려냈다. 헌데 <폭풍의 언덕>에서는 한 술 더 떠서 유부녀가 '내연남'에게 버젓이 사랑고백을 하고, 남편에게까지 '문제' 삼지 말라고 단언한다. 더 나아가 둘의 사랑을 반대하는 난관이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파괴하겠다는 망발을 일삼고 실행에 옮겨버리고 만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모든 탓을 '여성'에게만 묻고, '남성'에겐 그럴 수도 있다며 너그럽다는 점이다. 유부남이 결혼한 사실을 숨기고 젊은 여성에게 이해를 강요하거나 부도덕한 사랑에 빠진 원인 제공을 여성에게 찾으며 여자가 어떻게 행실을 했길래 남자를 망치느냐는 식의 '일방적인 여성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단 말이다. 전쟁이 벌어져도 여자가 예쁜 탓(트로이전쟁)이고, 나라가 망해도 여자가 너무 예쁜 탓(경국지색)이라고 언제까지 편견을 허용할 것이냔 말이다.

 

  물론, 이 책은 '만화가 가진 한계' 때문에 '원작의 깊이'를 모두 감상할 수 없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배경지식'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오래된 시대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와 복잡한 인물구성과 이야기구조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독서가 될 것이다. 읽기 힘든 고전소설의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유용한 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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