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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4 :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ㅣ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4
남명심 글, 정윤채 그림, 손영운 기획,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원작 / 채우리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솔직히 '장편소설'은 읽기 힘들다. 책이 두껍고 분량이 많은 것은 둘째치고, 이야기의 전개가 굉장히 느린데다가 인물들간의 얽히고 섥힌 복잡한 갈등 때문에 머릿속이 난삽해지기 십상인 탓이 가장 크다. 그런 까닭에 몇 주간, 길게는 몇 달 만에 '독파'한 뒤에도 줄거리조차 요약이 되지 않아 내가 읽은 책이 내용이 무엇인지, 책의 주제는 무엇이었는지 모르는 것 투성으로 책을 덮곤 했다. 내겐 그런 책이 몇 권 있는데,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다. 모두 10대에 읽다가 만 대표적인 장편소설이기도 했다. 그 후에도 바쁜 일상을 지내다가 읽다 말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래서 이 책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시리즈가 참 맘에 든다. 좀처럼 읽기 힘든 '고전소설'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을 읽은 뒤에 '원작소설'을 꼭 읽어야 제대로 완성이 될 테지만, 원작의 내용을 단편적이나마 '요약본'으로 미리 읽었으니 '원작소설'을 읽을 때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가장 맛있는 음식도 '먹어본 음식'이라지 않은가 말이다. 온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많고도 많겠지만, 내 머릿속에 기억된 맛은 이미 먹어본 것만을 떠올릴 뿐이다. 그러니 가장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아는 맛'일 수밖에 없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을 지라도 '최대한 비슷하게 흉내낸 것'을 맛보았으니 가장 맛있을 수밖에 없는 <명작고전의 맛>도 천천히 음미하며 진하고 깊은 맛이 우러날 때까지 꼭꼭 씹으며 끝까지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쨌든 그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원작소설을 읽으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린다는 대작이기도 하다. 단순히 분량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 내용의 깊이와 작가의 의도를 짚어가며 읽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그만큼 복잡한 인물구도 속에, 방대한 배경지식을 요구하며, 인간의 삶과 종교적 구원이라고 하는 거창한 주제를 읽노라면, 독자들에게 폭넓은 혜안을 요구하는 작가의 의도가 얄궂기조차 할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도대체 책 한 권(보통 2~3권 분량) 읽는데 얼마나 깊은 공부를 해야 한단 말인가?
이 소설의 표면적인 사건은 '아버지 살인범 찾기'다. 작가는 살해 당해 마땅한(?) 아버지로 이야기를 설정해놓고서, 죽어 마땅한 자를 죽이는 사람을 '살인자'라고 부르는 것이 온당한 일이냐고 되묻는다. 마치 <죄와 벌>이 연상되는 설정이다. 하지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좀더 깊이 파고들어 '종교적 구원'에까지 파고 들어 질문을 퍼붇는다. "지은 적이 없는 죄로 인해 유죄판결을 받아 억울한 죄인이, 살아서 지은 모든 죄값을 치룬다면 성인이라 부를 만한가?"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살인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방탕한 삶'을 살아간 죄값을 속죄하기 위해 '살인죄'를 달게 받고, 고행을 하면서 '영혼의 구원'을 바란다면 훌륭하다 칭찬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또한, 이 소설에서는 '신의 존재'는 믿지만, '신앙은 없다'면서 기존 종교계를 맹비난하는 무신론자도 등장시킨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종교'를 마주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특히, 서구사회에서 '신의 존재'는 믿음의 차원을 넘어 종종 '사회규범'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열광적인 신자들을 배출하는 등등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드러내곤 한다. 그런 까닭에 종교를 섣불리 '어느 한 쪽'면만 바라보면서 이야기하기 곤란한 점이 없잖아 있다. 그런데도 그 다루기 곤란한 종교에 대해 가타부타 시시비비를 따지려는 세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에서나 등장하곤 한다. 이 책에서도 그렇다.
그럼에도 '종교'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야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종교적 문제를 다룬 이야기의 결말은 대부분 '사랑'으로 끝맺기 마련이다. 그 뻔한 결말로 다가가기 위해서 그토록 이야기를 지지고 볶아대긴 하지만, '사랑'으로 끝맺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냔 말이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 중에 '사랑, 아닌 것'이 드문 것처럼, 모든 이야기의 결말은 '사랑'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이렇게나 '뻔한 이야기'인데도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가 심상찮은 까닭은 바로 '실천'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좋은 말씀(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많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 '좋은 말씀'에서 '종교적인 색채'는 쏙 빼고 담백하게 우리 사회 모두를 위해 '실천'하는 종교인은 드물다는 것을 잘 안다. <성경>에 담긴 말씀을 달달 외우는 이는 많아도 그 '말씀'을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곳에 따뜻한 마음을 담아 몸소 행동으로 옮기는 종교인은 드물다는 것도 잘 안다. 왜 '사랑'이라는 좋은 것을 배우고서 '같은' 종교인들끼리만 사랑하려고만 하는가? '다른' 종교인은 그토록 배척하라고 <성경, 어느 구절>에 적혀 있느냔 말이다. 또한, 그 많은 헌금을 걷어 으리으리한 '성전'을 쌓고, 목사의 통장잔고만 그득히 불려주고, 그리 거룩한 성전과 통장을 대대손손 물려주고, 저들끼리 해처먹으라고 말했느냔 말이다. 종교가 세속화되고 배타성을 띠게 되면 '타락했다'는 증거가 될 뿐이다. 타락한 종교는 더는 올바른 종교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올바른 신도라면 '잘못 들어선 길'에서 발을 빼서 돌려야 마땅하다. 도대체 어느 종교가 '신도'를 앞세워 성전을 수호하고 통장잔고를 사수하라 말한단 말인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까닭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전하는 '실천하는 사랑'이 가슴을 울리는 것이다. 작가가 이 책을 쓸 당시에 '러시아 민중들'도 귀족과 자본가 들의 방탕한 삶을 목도하며 온세상에 썩어들어가고 있다고 개탄했단다. 서구에서 밀려들어온 '계몽주의'로 러시아 민중들은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점점 깨우쳐가는데도 '제정 러시아'를 이끄는 지배층들의 문란한 삶은 그칠 줄 몰랐던 것이다. 그 와중에 돈을 모아 '졸부'가 된 이들이 벌이는 헤픈 삶을 보며 러시아 민중들은 서서히 분노에 차올랐다. 민중들 대다수가 굴주리는 마당에 소위 '가진자'들이 벌이는 행태가 눈꼴 시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성난 민중들의 마음을 달래주어야 할 '종교인'들조차 말로만 사랑을 입에 올리며 기득권층을 옹호하는데 앞장 설 뿐이니, 민중들은 기댈 언덕조차 없어 가난과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지식인'들이 '실천하는 사랑'을 노래하는 소설을 지어 대중들에게 선보이니 열렬히 호응받게 된 것이다.
이는 '19세기 러시아'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몸소 실현하는 사랑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수록 기후변화는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으며 인류문명 전체를 위협하는 재앙은 인류 스스로 불러오고 있다. 이제 '지구온난화'는 어느 한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불행이 아니며,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점점 황폐해져만 가는 지구환경은 몸살을 앓다 못해 스스로 정화할 능력을 상실해가며 썩어가고 있다. 이런 와중에 '후쿠시마 핵오염수 방류'가 초읽기에 들어갔으니, 이젠 생태계 절멸까지 불러재끼고 있어 개탄을 금치 못할 지경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하나 뿐인 지구'를 살리기 위해 온지구를 사랑으로 가득 채울 작은 실천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무엇이라도 좋다. 내가 실천하는 사랑이 반드시 지구를 구할 것이라는 '믿음'만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