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3 : 폭풍의 언덕 ㅣ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3
정윤채 그림, 권기희 글, 손영운 기획, 에밀리 브론테 원작 / 채우리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제인 에어>의 작가, 살럿 브론테의 동생 '에밀리 브론테'의 단 하나뿐인 명작이 바로 <폭풍의 언덕>이다. 하지만 명작이라는 명성과는 다르게 상당히 오랫동안 혹평을 받으며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했던 작품이었다. 그 까닭은 주인공인 히스클리프가 선보인 사랑과 미움, 그리고 처절한 복수극이 19세기 당시의 가치관과 사뭇 달랐던 탓이다. 영국 빅토리아시대를 시대배경으로 관통하는 <폭풍의 언덕>이 그 당시로서는 허용할 수 없던 '비윤리적'이고 '반기독교'적이라는 정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작가인 에밀리 브론테는 그런 평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가 소설속에 녹여낸 캐릭터는 '인간 본연의 감정'에 지극히 충실할 뿐이라는 이유를 들어 당시의 도덕적 가치관에 저항하길 바란다고 주장했다고 전한다. 그런 까닭에 작품의 시간적 배경인 18세기와 소설이 쓰여진 19세기 당시의 윤리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다. 그리고 주제는 두 남녀의 사랑이고 말이다. 지극히 뻔한 '여류작가의 애정소설'일 수도 있겠으나, 결코 그런 식으로 선보이길 거부했던 '브론테 자매들'이었으므로 등장인물의 성격(캐릭터)부터 파격적일 수밖에 없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남주 히스클리프는 '결코 길들여질 수 없는 야생, 그 잡채'였다. 그리고 그런 '야생의 소년'을 사랑한 여주 캐서린도 '열정적으로 사랑에 올인하는 독립적인 당찬 여성'이었다. 이런 두 남녀의 만남이 순탄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그 순탄치 못한 까닭이 고리타분하게 감히 넘볼 수 없는 '신분의 차이' 때문이었고, 또 '빈부의 차이' 때문에 주변의 반대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리라는 것도 '브론테 자매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명약관화할 따름이다.
암튼, 당시의 시대상을 봤을 때 '캐서린의 사랑'은 조신한 여성이 결코 해서는 안 될 행동을 보였으니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허나 이 소설이 더욱 심한 비난을 받은 까닭은 '야생의 남자' 히스클리프의 처절한 복수극 때문이었다. 빈민층이었던 '집시 소년'을 기독교적인 선행으로 거두어주었으면 '감사의 뜻'으로라도 주인어른(?)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순종하고, 모진 고행을 겪더라도 참고 인내하며 '권위에 복종'하는 순한 양으로 길들여져야 마땅하거늘, 히스클리프는 고마움과는 사뭇 거리가 먼 행동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주인집 도련님의 횡포를 하나하나 다 기억에 새겨두고 복수를 다짐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넘봐선 안 될 주인댁 아가씨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성공의 길'을 걷고 금의환향을 한 뒤에 자신을 폭행한 주인댁의 집과 영지를 빼앗고,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을 한 가문까지도 몰락하게 만들어 재산을 몰수하고, 엄연히 남편이 있는 캐서린과 정열적인 사랑의 감정을 나누며, 그들 모두의 2세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쳐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악마'와 다를 바 없는 소행을 서슴지 않게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기 주위의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든 주인공을 다룬 소설에 '폭풍'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이런 내용의 소설인데도 오늘날에는 '극찬'을 아끼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악마와도 같은 주인공, 히스클리프가 결코 밉게 보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극단적'으로 비칠지언정 그 자신은 '감정'에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뭐랄까? 애둘러 돌아가는 법이 없는 '직진남'이라고나 할까? 히스클리프는 '순수, 그 자체'로 사랑과 복수에 정열을 다 쏟아버린다. 그런 순수함이 자신조차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그는 멈출 줄 모른다. 한마디로 끝장을 볼때까지, 갈 데까지 다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인물인 셈이다.
이런 저돌적인 맹수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캐서린'이 유일했지만,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동가숙서가식'을 꿈꾸는 철부지였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히스클리프였지만, 그녀가 '선택'한 남자는 에드거 린튼이었다. 왜냐면 그녀의 허영을 해소시킬 수 있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부도덕한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만 '부당하게' 요구하는 정절에 반기를 들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왜 남성은 이 여자, 저 여자 맘에 내키는대로 '선택'하면서 여성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일까? 똑같이 저지른 부도덕한 행동에 대해 '사회적 관습'은 남성에게 너그럽고, 여성에겐 가혹하단 말인가.
<제인 에어>에서도 40대의 유부남이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10대 가정교사와 사랑을 나누려 한다. 소설에서는 '유부남'이란 사실을 속였다는 사실만을 거론하며 '진실한 사랑'이라면 나이 차이쯤은 아무 문제가 아니라는 듯 그려냈다. 헌데 <폭풍의 언덕>에서는 한 술 더 떠서 유부녀가 '내연남'에게 버젓이 사랑고백을 하고, 남편에게까지 '문제' 삼지 말라고 단언한다. 더 나아가 둘의 사랑을 반대하는 난관이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파괴하겠다는 망발을 일삼고 실행에 옮겨버리고 만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모든 탓을 '여성'에게만 묻고, '남성'에겐 그럴 수도 있다며 너그럽다는 점이다. 유부남이 결혼한 사실을 숨기고 젊은 여성에게 이해를 강요하거나 부도덕한 사랑에 빠진 원인 제공을 여성에게 찾으며 여자가 어떻게 행실을 했길래 남자를 망치느냐는 식의 '일방적인 여성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단 말이다. 전쟁이 벌어져도 여자가 예쁜 탓(트로이전쟁)이고, 나라가 망해도 여자가 너무 예쁜 탓(경국지색)이라고 언제까지 편견을 허용할 것이냔 말이다.
물론, 이 책은 '만화가 가진 한계' 때문에 '원작의 깊이'를 모두 감상할 수 없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배경지식'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오래된 시대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와 복잡한 인물구성과 이야기구조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독서가 될 것이다. 읽기 힘든 고전소설의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유용한 책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