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매혹적인 고전이라면 -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고전 읽기의 즐거움 서가명강 시리즈 15
홍진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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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는 말했다. '역사란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가 끊임없이 나누는 대화'라고 말이다. 이는 역사적 진실을 '사료, 그 자체'로 바라보던 랑케의 주장과는 달리 역사를 서술하는 '역사가의 해석'에 따라 역사적 진실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을 한 것이다. 물론, 역사적 평가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내리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허나 '역사적 서술'은 역사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사료'를 근거로 삼아 철저한 실증적 검토를 통해 서술해야겠지만, 그마저도 '사람'이 내린 평가인 까닭에 얼마쯤은 '주관'이 섞일 수밖에 없다. 때에 따라서는 '편견'이 담길 수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역사는 '단 한 사람의 평가'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두고서도 여러 역사가들의 '주관적인 해석'을 포용하다보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추고, '타당한 해석'으로 모아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모아진 '역사적 해석'을 수많은 역사가들이 어느 정도 '인정'하고, '검증'해나가다 보면 어느 정도 '해석의 객관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더욱더 타당한 해석'이 등장하게 되면 그간의 '역사적 해석'은 보편성을 잃게 되고, '또 다른 해석'으로 귀결되어, 또다시 여러 역사가들이 인정과 검증을 받게 되어 '객관적인 역사적 해석'에 다다를 것이다.

 

  이처럼 '해석'은 역사의 고인물을 걸러내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비단 역사에서만 '해석'이 중요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거의 모든 학문에서 '해석'은 중요하게 다루며 '고정불변인 정답'은 없다고 인정하는 바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문학박사 학위를 소지한 사람의 '문학해석'만이 정답인 것이 아니라 그저 대중적인 '일반독자'의 해석일지라도 '설득력'과 '타당성'을 갖추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해석'으로 인정을 받아 많은 사람들에게 '문학의 재미와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작품은 끊임없이 '해석' 받고 있다.

 

  여기 이 책 <이토록 매혹적인 고전이라면>에는 <데미안>, <젊은 베르터의 고통>, <672번째 밤의 동화>, <변신>, <시골의사> 등 '독일문학에 대한 해석'이 담겨 있다. 물론 '서가명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책이라서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홍진호 교수'의 해석이 수록되어 있기에 반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철한 주석이 담겨 있긴 하다. 그렇지만 이미 위에 열거한 책들을 읽어본 독자라면 '서울대 교수의 해석'을 읽으면서도 어딘가 미심 쩍거나 그닥 공감이 가지 않은 해석도 읽게 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서울대 교수'와 '일반 독자' 사이의 간극이다. 문학작품 해석의 재미는 바로 그 '간극'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둘 사이의 간극'이 발생하게 된 까닭을 거슬러 올라가는 재미를 느낄 수만 있다면 '문학작품'을 즐길 준비가 이미 충만한 독자인 것이다.

 

  이 책은 교수님의 해석답게 여러 '문학사조'와 '장르분석' 등에 따른 이야기들이 솔솔한 재미를 불러 일으킨다. 헤세의 <데미안>을 해석하면서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끌여들여 독일 청소년들이 <데미안>을 읽고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온 까닭을 설명하면서, 왜 '고전문학'이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지 해석하였다. <젊은 베르터의 고통>에서는 괴테의 소설들이 '발전소설(성장소설)의 전형으로 독일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언급하면서, 그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베르테르 효과(모방자살)'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 '계몽주의'와 '질풍노도'로 풀어내었다.

 

  이밖에도 우리에게 덜 유명한 호프만스탈의 <672번째 밤의 동화>를 설명하면서 '유미주의'라는 문학사조를 '음식사진'에 비유하며 단박에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음식'이라는 본질은 먹어서 소화시켜야 비로소 우리에게 이로운 것인데, 음식 자체는 '먹음'이라는 행동으로 인해 서서히 사라져버리고 말게 된다. 이처럼 '아름다움'이란 본질도 그렇다는 것이다. 유미주의는 예술과 아름다움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둔 까닭에 오로지 '예술, 아름다움, 그 잡채'를 지향하게 되는데, 예술이나 아름다움은 시간, 상황, 유행, 또는 그밖의 변수들에 의해 변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인 까닭에 끝내는 '무한한 존재'인 죽음을 찬미하게 되고 만다. 샤르트르는 '인생이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라고 말했단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달리는 열차를 탔다면서 살아있는 동안에 '선택'이라도 잘해서 유의미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지만, 결국 종착지는 '죽음'인 까닭에 염세주의적인 미학에 심취할 수밖에 없단다. 유미주의는 바로 이런 경향에 영향을 받아 유행을 했고 말이다.

 

  반면에 카프카의 소설은 '정답은 없다, 오직 해석만 남겨 놓았을 뿐이다'라는 총평을 남겼다. 실제로 카프카의 소설들은 무수히 많은 해석을 남겼지만 어느 것 하나 '정답'이라고 할만 한 것을 내놓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변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아픔이라고 소개했지만, 정설은 아니니 '또 다른 해석'으로 즐겨보시라 하였고, <시골의사>는 더더욱 수수께끼 같은 소설이라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선보였지만, 독자들 나름대로 해석을 해보시라면서 '열린 결말(?)'로 마무리하였다.

 

  그렇다면 '고전문학'은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이 책에 '귀띔'이 담겨 있긴 하지만, 곧이 곧대로 따라할 필요는 없다. 서울대 교수님이 '이런 식'으로 고전문학을 해석하시니 '나름, 공식화'하여 다른 고전문학도 그 '공식'에 대입해서 풀어내는 재미도 솔솔할 것이 틀림없다. 허나 공식에 대입해서 '그럴 듯한 풀이'를 해내는 것으로 만족할 필요는 없다. 공식에 기대어 '명석한 풀이'를 해보았으면 '자기만의 경험'이란 필터로 한 번쯤 걸어내어 보길 권한다. 그래야 '나만의 해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서를 하면서 좋은 문구를 '베껴쓰고' '옮겨적는' 일을 곧잘 한다. 그리고 누군가 '그 책' 읽어보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베껴 쓴 '유명한 문구'를 읊어대며 자랑하기 일쑤다. 헌데 그렇게 유명한 문구를 아무런 '해석'도 없이 그저 읊어대는 것만으로 좋은 독서를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앵무새'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느냔 말이다. 차라리 '나의 생각'으로 고전명작을 걸러낸 뒤에 '나만의 생각'으로 거듭난 문구를 말해보는 것은 어떠냔 말이다.

 

  무릇 '진정한 독서'란 이런 것이다. 작품해석도 마찬가지다. 권위 있는 사람의 '해석'은 그저 참고만 하면 그뿐이다. 어떻게 해서든 '나의 생각'으로 거듭나야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고전명작'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셈이다. 유명한 문학작품을 읽었는데도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까닭은 바로 이런 작업을 하지 않고 그저 '남의 생각'을 외우는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문학사조니 장르분석이니 하는 것도 '그 당시의 유행'을 참고해서 '나름의 해석'을 내놓은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해석'이 나오기 마련이고, 그때는 맞는 해석일지라도 지금은 틀린 해석도 부지기수다. 물론 '훌륭한 해석'은 오래도록 공감을 얻는 것일테지만, 결국엔 '달라진 해석'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해석'하길 망설일 필요가 없다. 해석 자체를 즐기다보면 저절로 '문학감상의 실력'도 쑥쑥 오르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즐기면서 해석한 것이 유행을 타면 '문학사조'로 여러 사람들의 공신력을 얻게 되니, 혹시 모르지 않느냔 말이다. 지금 당신의 '해석'이 훗날 '문예사조'로 발돋움할런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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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온다, 메타버스 와이즈만 미래과학 18
김성화.권수진 지음, 이철민 그림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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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는 '나비의 꿈'을 꾸었다고 한다. 까무룩 낮잠에 빠져든 장주는 꿈속에서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허공을 날았고, 꽃밭을 누볐다고 한다. 그 꿈이 어찌나 생생하였던지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좀처럼 그 여운을 잊지 못하고 황홀해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장주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주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말이다. 행여라도 '현실' 같은 '지금, 이순간'이 생생한 꿈이고, '비현실' 같은 '꿈속, 저너머'가 실제 현실일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말이다.

 

  까마득히 먼 옛날에 장자는 '가상현실'에 대해 이미 언급한 셈이다. 진짜 같은 가짜세상을 만들고 그곳에 나, 아닌 '또 다른 나'를 만들고서 실제 삶처럼 살아가게 된다면, 비록 '가상현실'일지라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삶, 다시 말해 '경험'은 결코 가짜가 아니게 된다. 장자가 말했듯이 '나비의 꿈'을 꾸었지만, 꿈속에서 나비는 장자의 '아바타'였던 셈이고, 아바타인 '나비'가 경험한 것은 장자도 똑같이 '경험'한 것이니, 꿈속에서 깨어나 다시 장자로 되돌아왔다고 하더라도 '나비의 삶'으로 살아간 경험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뜬금없이 장자이야기부터 꺼낸 까닭은 바로 '메타버스'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곧바로 뒤치면 '메타(초월하다)+버스(유니버스, 우주)'이니 뜻풀이를 하자면, '우주공간을 초월하다', '이 세상을 넘어서다', 다시 말해, '가상현실공간' 쯤으로 뒤쳐낼 수 있을 것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등장하고 '가상현실'을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제는 '현실세계'와 똑같이 구현한 '가상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단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가상공간'에서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

 

  일단, 이론상으론 '현실세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가상의 자신(아바타)'을 만들어 '하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 구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초창기에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상공간에 '접속'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접속하는 사람(유저)'도 점점 늘어나게 되면 '가상공간'에 무엇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이렇게 구현된 '가상공간'은 점점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해질 것이고, 어쩌면 현실을 능가하는 '초현실'을 구현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가상공간'에서 접속자들은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아직은 모른다. 왜냐면 '메타버스'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초기버전'에 해당하는 것들은 지금도 만들어졌고 운영하고 있지만, 아직 '현실'과 구분을 못할 정도로 정교하지는 못하다. 현실과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어느날에는 '메타버스'에 구현된 세상에 사람들이 모여 '활동'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빠엄마는 '메타버스 회사'에 출근하고, 아이들은 '메타버스 학교'에 등교할 것이며, 할아버지할머니는 '메타버스 실버유원지'에 가서 건강해진 아바타로 다시 젊음을 되찾고 신나게 놀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즐겁고 유쾌해지지 않는가?

 

  하지만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보여준 미래는 '가상현실'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영양분'이 가득한 캡슐에 잠들어 '기계'의 보살핌을 받으며 사육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캡슐속에서 인간은 '영원한 꿈'을 꾸며 살아가지만 현실은 '핵폭발 뒤 폐허가 된 끔찍한 세상'일 뿐이었다. 영화는 '디스토피아'적인 어두운 미래를 그려냈던 것이다. 우리가 살아갈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는 인류 스스로 감당하고, 책임도 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메타버스'는 올 것이다. 어느 정도로 '정교해진 모습'으로 다가올지는 알 수 없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 왜냐면 '가상현실'이 가져다주는 이득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얼마만큼 커다란 이득일지도 아직 단언할 수 없을 정도다. 왜냐면 '상상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나 발전할 '첨단과학기술의 세상'에 대해 무한책임을 감당해야만 한다. 어떤 세상이 구현될지 아직 감도 잡을 수 없겠지만, 그렇게 만든 세상을 애써 '범죄'에 이용하고, '몇몇 소수'만 이로운 세상을 만들고서 온갖 나쁜짓을 일삼는다면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분위기가 급히 조성되고 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더 이상의 발전'은 규제하거나 포기하자고 말이다. 특히나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수도 있는 몇몇 첨단기술에 대해서는 심도 깊은 논의를 벌이기도 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AI(인공지능)기술'이다. 사람과 똑같이 '생각'할 수 있는 컴퓨터, 또는 로봇 등등의 등장은 '핵폭탄'보다 더 위협적일 것이라는 경고를 하면서 말이다. '메타버스'도 비슷한 경고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다. 실제와 똑같으면서도 '실제'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무시무시한 일을 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실제와 가상을 '구분'하지 못해 가상에서만 일어나야 할 일이 '현실세계'에서도 일어나게 된다면 얼마나 끔찍할 것이냔 말이다. 겜속에서 게임하다 '현피' 뜨는 것은 새발의 피보다 못할 중차대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에 깊은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윤리와 도덕을 다시 일깨우고 '올바른 가치'를 지향하는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면, 그런 인간들이 만들 '가상현실'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할 수도 있다. 모쪼록 우리가 만들 '메타버스'는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길 바랄 뿐이다. 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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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온다, 심해 탐사 와이즈만 미래과학 16
김성화.권수진 지음, 김진화 그림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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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이즈만북스의 <미래가 온다> 시리즈의 특징은 탄탄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주제'에 관련된 특별한 이슈와 함께 장단점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편집했다는 점이다. 비록 주요 독자를 '어린이'로 설정한 탓에 각각의 주제와 관련된 어렵고 복잡한 내용은 걸러내고 '깊이 있는 문제인식'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단초만 제공하고 있는 아쉬움이 있지만, 학생들 뿐만 아니라 학부모도 아이들과 같이 읽으며 '과학계의 최근 이슈'와 함께 '우리 사회가 직면한 새로운 문제점'에 대해 심도 깊고 폭 넓은 대화를 가능케 하는 유용한 책이라는 것에 많은 분들이 공감할 것이다.

 

  이번 책의 주제는 <심해 탐사>다. 인류는 공기가 희박한 고도 8000미터급 산봉우리도 정복했고, 영하 80도를 밑도는 극지방도 탐사했으며, 찌는 듯한 더위의 사막과 빽빽한 정글 속까지 탐험에 나섰고, 끝내는 지구밖 달나라를 넘어 드넓은 우주공간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가보지 못할 곳'이 없을 정도지만, 의외로 아주 가깝지만 정복은커녕 탐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곳이 있다. 바로 '바다'다. 단적으로 말해 인류는 아직까지도 바다의 95%를 모르고 있다고 한다. 고작 5%!! 수심 200미터에 있는 '대륙붕'까지만 겨우 개발을 언급하고 있을 뿐, 그 밑은 햇빛조차 닿지 않아 아주 깜깜한 '암흑세상'이 펼쳐져 있을 뿐이란다. 우리는 이를 통틀어 '심해(깊은 바다)'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런 '깊은 바다'를 탐사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당연하게도 인류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궁무진할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망간단괴를 비롯한 풍부한 지하자원은 말할 것도 없고, 결코 줄어들지 않는 먹거리가 끊임없이 제공될 뿐만 아니라, 지상과 해상 위에서 아무리 '기상이변'이 속출해도 바닷속은 '고요, 그 잡채'일 뿐이라 인류가 머물러 살기에도 아주 적당한 주거지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인류의 생존에 꼭 필요한 '의식주'를 모두 제공하는 천혜의 보고가 바로 '바다'란 말이다.

 

  그런데 인류는 왜 그동안 '바닷속'을 탐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일까? 그건 바로 '압력(수압)' 때문이다. 수심 100미터만 내려가도 엄청난 압력을 견딜 수 있는 '잠수복'의 도움이 없다면 산소통을 매달고 가도 호흡을 할 수 없으며, 200미터만 내려가도 '잠수정'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활동조차 할 수 없다. 거기다 수심 300미터 이하부터는 '햇빛'조차 거의 도달하지 않아 점점 어두워지며, 수심 1000미터 이하는 그야말로 '암흑세상'이 펼쳐지며 온세상이 깜깜해지게 된단다. 그런데도 아직 바다 밑바닥까지 도착도 하지 못했다. 바다의 평균 수심은 해발 3~5000미터이며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는 1만미터 이하로 지상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을 거꾸로 쳐박아도 모두 잠길 정도로 깊단다. 그러니 그렇게나 깊은 바닷속에서 활동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다 밑에서 우리가 받는 압력은 대략 '엄지손톱 위에 황소 한 마리'를 얹어 놓은 정도라고 한다. 고작 엄지손톱의 단위면적에 황소만 한 압력이 온몸을 짓누르고 있다니, 웬만한 장비로는 감히 바닷속을 활보하고 다닐 수조차 없는 것이다.

 

  에이, 인류가 지구밖으로 우주선도 쏘아올리는 세상인데, 고작 수심 1000미터를 정복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라고 반문하고 싶겠지만, 우주공간은 '텅텅 비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쉬운 환경인 것이고, 바닷속은 '꽉꽉 들어차' 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어려운 환경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땅 위에서도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는 뚝딱뚝딱 뭐라도 쉽게 쌓아올리지만, 땅 속으로 파고드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암튼 '바닷속'은 우리가 아직도 손을 대지 못한 '미지의 공간'임에 틀림없고, '위험천만한 공간'이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다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바라를 제대로 이용하지도 못하면서 그대도 '방치'하고 있는 수준이다. 그렇게 방치라도 하고 있다면 다행일텐데, 아주 더럽게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젯거리다. 최근에는 '기후변화', '해양생태계 파괴', '유조선 침몰', '쓰레기섬', '미세플라스틱', 그리고 '핵오염수 방류' 등등 바다를 더럽히는 온갖 못된 짓을 자행하고 있었고, 지금도 진행중이며, 앞으로는 더욱 심각할 것이라는 문제점이 점점 더 심각하게 부각되고 있다.

 

  몇 가지만 그 심각성을 언급하자면, 먼저, 바다에 사는 '식물 플랑크톤'은 다른 해양생물의 먹이로 제공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식물의 광합성의 결과로 생성되는 '산소의 양' 중에서 식물 플랑크톤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절반 이상이라고 한다. 만약, 식물 플랑크톤이 '지구온난화'로 인해 바다의 온도가 상승하고, 그로 인해 '해류'가 멈추거나 방향을 변경하게 된다면 '식물 플랑크톤'의 분포도 크게 달라지게 된단다. 그렇다면 당장 지구 생명체가 필요로 하는 '산소의 양'이 현저히 줄어들게 될 것이고, '오존층'도 숭숭 구멍이 뚫릴 것이며, 극단적인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 생명체는 '새로운 대멸종'을 겪게 될 것이라 한다. 무시무시한가? 아직 끝이 아니다.

 

  지금도 온갖 쓰레기를 바다에 버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세계 각국은 지상에 쓰레기를 쌓아놓을 수 없게 되자 바다에 슬쩍 버리곤 하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매일매일 날마다 버리게 되고, 그로 인해 태평양 한가운데 엄청난 크기의 '쓰레기섬'이 생겨났고, 그 섬의 크기뿐 아니라 갯수까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오래지 않아 태평양 전체를 덮게 될 날이 다가온다고 전망하고 있으니 그 심각성은 말로 다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런 쓰레기들이 대부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썩지도 않은 채 계속 바닷속을 채워나간다는 사실이다. 그런 플라스틱 쓰레기를 '해양생물'이 먹이로 착각하고 소화도 시키지 못한 채 뱃속을 채워나가다 굶어죽게 된다고 한다. 실제로 고래나 갈매기의 뱃속을 들여다보니 '비닐하우스 한 채'에 해당하는 양의 어마어마한 쓰레기가 나왔다고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미세 플라스틱'이다. 바다를 떠돌면서 잘게 쪼개진 플라스틱이 썩지도 않고 둥둥 떠다니다 '플랑크톤'이 먹이로 착각하고 먹으면, 작은물고기가 플랑크톤을 먹고, 큰물고기가 작은물고기를 먹고, 결국엔 인간이 큰물고기를 냠냠 먹고서 '인간의 뱃속'에 미세플라스틱이 점점 쌓이게 된단다. 그렇게 '수산물'을 가공해서 만든 각종 비료와 사료를 '육지 동물'에게 먹이로 제공하게 되니 '육상 생태계'에까지 미세플라스틱이 점령했고, 바닷물이 증발해서 구름을 만들고 비를 뿌리니 '공기중'에도 미세플라스틱은 가득 찼다고 한다. 이렇게 인간이 만든 '플라스틱'은 오래지 않아 인류에게 '또 다른 재앙'을 선사하게 될 것이다. 커밍순~

 

  여기게 '핵오염수'까지 방류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전세계 '원자력발전소'에서 핵오염수를 처리해서 내보내고 있으니, 후쿠시마에서 나오는 막대한 '핵오염수'도 적당히 처리해서 그대로 방류하겠다고 한다. 이미 '2011년 사고 당시'에 아무런 조치도 할 새 없이 '방류한 경험(?)'도 있으니, 지금껏 안전하게(?) 수산물을 먹은 것처럼 계속 드셔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것이 '일본의 해명'이다. 고작 10년 남짓 지났을 뿐인데 '안전'을 입밖에 내놓는 담대함에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이렇게나 무책임한 발언을 일삼는 '일본정부'에 소위 강대국이라는 나라들이 아무런 발언을 내놓지 않고 있는 실정이고, 가장 가까운 '인접국'인 대한민국 정부조차 제대로 된 조사는커녕 뻔뻔한 일본정부의 '졸속행정'을 그저 믿고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외교적 방안이라고 떠벌리고 있는 실정이라 암담하기 이를 데가 없다.

 

  '안전제일'이라는 표어는 일본에서 나왔다. 유난히도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에서 일본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문구다. 그런데 그런 일본이 '안전'을 둘째로 치고, '비용절감'을 위해 국제적인 기구까지 들러리 세워 거짓을 일삼고 있다. 한국 정부도 다를 것이 없다. 그저 일본에 '무한신뢰'를 내보이며 핵오염수 방류 결정에 대한 우려와 불안을 '괴담'으로 치부하고 꽁꽁 틀어막는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러한 '국민불안'은 당연한 귀결인데도, 이를 '야당의 정쟁수단'으로 호도하며, '국민안전'과는 별개로 '정치수단화'하고 있는 것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단언컨대, '안전'에는 그 어떤 변명도 필요없고, 얼마나 비용이 드는지도 따질 필요가 없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적절한 변명'이고, '효율적인 비용'을 치뤘다고 발표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안전은 조그만 의혹이나 의심일지라도 '반드시' 해소하고 안심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 같은 일을 또다시 반복될 뿐이다. 십수 년 뒤에 '핵오염수 참사'라는 전지구적 재앙을 맞이하고 싶은 셈인가?

 

  지금까지 '심해탐사'와 관련된 이슈에 대해서 다뤄보았다. 바다는 분명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보물창고 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바다환경'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 인류의 미래가 잠들고 있는 곳을 벌써 상당부분 오염시켜놓았기 때문이다. 이젠 바다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선을 넘어버렸다. 오직 인간만이 바다를 원래대로 깨끗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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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5 : 허클베리 핀의 모험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5
강철웅 글, 김연승 그림, 손영운 기획, 마크 트웨인 원작 / 채우리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을 재밌게 읽은 어린이 독자라면 그 후속작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자연스럽게 접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톰 소여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전개와 어려운 내용으로 끝까지 읽기도 힘든 것이 사실이다. 나 역시 그랬기 때문이다. 개구쟁이 톰 소여의 이야기는 재미난 장난으로 가득하고 뒤이어 펼쳐질 새로운 장난은 무엇일지 상상하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지만, 허클베리 핀의 이야기는 '미국 사회문제'를 비판하고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으려는 '문제의식'과 '사회비판'으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등시절에 톰 소여는 여러 번 숙독하곤 했지만, 허클베리 핀은 번번히 '도중하차'하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친절한 안내가 필요한 책이다.

 

  먼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풍자소설이다. 19세기 미국 사회는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아도 문제가 많은 사회였다. 이 소설에서 언급하고 있는 문제만 보아도 '노예인권 문제', '인종차별 문제', '사회지배계층의 도덕적 해이' 등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은 이런 미국사회의 문제를 '순수한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사회고발을 하면서 그 심각성을 더욱 부각시킴과 동시에 풍자와 해학 속에 담아내어 미국사회 스스로 성찰하는 계기로 삼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 이렇게나 무거운 주제를 담았으니 어린 독자들이 '안내' 없이 이야기를 소화하고 이해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이처럼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기 위해선 '배경지식'도 충분히 쌓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거나 '문학적 이해'를 위해 문학사조를 달달 외워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린 아이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는 '도덕과 사회윤리'에 관한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줘야 한다는 말이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이 소설에는 '인권 / 차별 / 도덕적해이'와 같은 윤리인식의 문제를 소상히 다루고 있다. 그러니 19세기 미국사회에서 '당연시' 여기던 것들이 사실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인식에서부터 시작하면 좋을 것이다.

 

  첫 번째, '인권문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평등할 권리를 가진다. 그런데도 19세기 미국사회에서는 '흑인노예'를 사유재산으로 삼아 '사고 팔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고, 심지어 흑인노예가 자식을 낳으면 그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노예'가 되어 버리는 악습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과거 '신분사회'를 당연하게 여겼던 '전제왕권시대'처럼 말이다. 아시다시피 미국은 '왕조국가'가 아니라 '민주국가'였는데도, 흑인노예들은 민주시민으로서 권리를 박탈 당하고 미국 경제의 근간인 '노동력 제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두 번째, '인종차별 문제'다. 19세기 미국은 철저한 '백인우월주의'에 입각한 '백인사회'였다. 한마디로 백인들은 '모든 것'을 누리는데 반해서 유색인종은 백인들이 당연히 누리는 것들에서 철저히 '소외'시켜버리는 차별화 된 사회였던 것이다. 이러한 차별은 자연스레 '불평등'을 낳는다. 오늘날에도 미국사회는 '소수의 백인'이 '다수의 유색인'을 지배(?)하는 형태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어떻게 소수가 다수를 지배할 수 있을까? 그건 '경제력'을 쥐고 사회 전체를 흔들며 '소수의 백인'에게 유리하게끔 정치, 사회, 전반적인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더구나 19세기에는 백인이 '소수'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러한 '인종차별 문제'는 대단히 심각했고 철옹성처럼 견고했기에 더욱더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그런데도 '백인'들은 인종차별을 사회문제로 인식하지 못했고, 그로 인한 '유색인종'들의 피해는 끔찍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지배계층의 도덕적해이'다. 백인이 우월한 사회라 하더라도 그 백인들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며,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고, 올바르게 이끌어나갔다면 크게 문제 삼을 것도 없다. 전제왕권시절에도 '세종대왕' 같은 성군이 이끌던 시절에는 많은 백성들이 평안하고 태평하게 아무런 근심걱정도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19세기 미국의 백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 소설에서 '허클베리 핀의 아버지'나 '황제와 공작이라 불리는 사나이들',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처럼 사소한 원한 관계로 서로의 목숨을 뺏고 빼앗는 어리석은 백인들이 널리고 샜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부도덕한 백인들'이 미국 사회를 이끌고 있는 것에 마크 트웨인은 '옳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도 어린 아이의 시선을 통해서 말이다.

 

  이처럼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다루는 주제를 이해하고 읽으면, 이 소설이 단순한 '어린이문학책'이 아니라는 것에 공감할 것이다. 그보다는 사회고발을 하는 날카로운 '비평소설'에 가깝고, 사회의 고질적 문제점을 풍자와 해학으로 비꼬집은 '풍자소설'이라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리고 자국 사회의 문제점을 냉철하게 비판하는 '뜨거운 감자'였기에 올바른 비판의식을 갖춘 어른들의 친절한 안내(?) 없이는 이 책의 진면목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어린 독자'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 틀림없다. 나 역시 그런 '어린 독자'였으며, 아무런 안내도 받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서야 겨우 이해할 수 있게 된 '어린 독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솔직히 어른 독자들도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고, '친절한 안내' 없이 제대로 된 주제를 이해하기란 어렵기 마찬가지다. 그래서 적절한 '해설서'와 함께 읽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이 책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이 훌륭하다 여기는 까닭이다. 물론, 이 책에 소개한 내용이 모두 흡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하나마 '기본적인 개요'를 잡기에 적절한 책도 드문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명작고전소설'에 깊이를 느껴보고 싶은 청소년독자들에게 강추하고 싶다. 청소년시절에는 '원작소설'을 읽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을 '마중물'로 삼아 암반 깊이 감춰진 주제를 '미리' 맛보는 것도 아주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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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중록 3 아르테 오리지널 3
처처칭한 지음, 서미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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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과 2권에 이어 3권에서도 '양숭고의 추리'가 기본 스토리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1권에서는 '왕비의 딸 살인사건'을, 2권에서는 '그림속 연쇄살인사건'을, 그리고 3권에서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각각 3개의 별개 살인사건들이 모두 '하나의 증거물'과 연관되어 있으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살인사건의 비밀을 풀어낼 '결정적 증거'라는 점에서 앞선 사건들보다 더욱 확장되어 긴박감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첫 번째 살인사건은 다름 아닌 '기왕 이서백'을 죽이려는 궁궐 음모와 관련되어 있다.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순간 극적인 효과가 벌어지며 이서백은 살아남게 되지만, 독에 중독되어 거의 죽은 목숨과 다를 바가 없는 신세가 되어 양숭고와 함께 단 둘만이 살아남게 된다.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두 남녀는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하며 살갗이 부딪히고 맨몸을 보여주며 더욱더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여느 '로맨스소설'이었으면 두 사람의 애정이 점점 짙어지다 떨어질 수 없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지만,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자객에게 뒤를 쫓기는 급박한 상황이라 한가하게 달콤한 사랑에 빠져들 시간적 여유마저 없게 된다. 그렇게 필사의 탈출을 한 뒤에야 '둘의 관계'가 더욱더 밀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아직 풀어야 할 살인사건이 남아 있었다. 바로 '황재하의 일가족 살인사건'의 증거를 찾는 일이다.

 

  그래서 두 번째 살인사건은 당연히 '황재하 일가'와 연관이 있는 증거물을 찾기 위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마침맞게 또 다른 살인사건이 벌어졌으니, 바로 '두 남녀의 동반자살 사건'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연 때문에 헤어졌었는데,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사라지고 다시 만난 두 남녀가 홀연히 '동반자살'을 한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졌던 연인이 다시 만나서 자살을 했다는데, 두 사람이 얌전히 누워있는 자세로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이 '독 중독'이라고 하는데, 분석을 한 결과 '짐독'이라는 궁중에서만 비밀리에 쓰이는 극약으로 밝혀졌다는 점이다. 평범한 두 남녀의 죽음에 궁궐의 극약이 등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수상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건을 풀어내는 와중에 '또 다른 살인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그 죽음 역시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모두가 공연을 지켜보는 와중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밀실살인'인데, 모두가 용의자인데도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던지라 누구도 살인을 저지를 수 없는 상황에서 피의자가 심장에 비수를 찔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더욱이 이 두 사건에는 '또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었으니, 양숭고의 추리를 따라가다보면 그 비밀이 기막히게 해결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게 된다.

 

  마지막 살인사건에서 드디어 '황사군 일가 독살사건'에 감춰진 비밀이 모두 밝혀지고, 양숭고가 사실은 '황재하'라는 사실도 만천하에 밝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 감춰진 진실은 또다시 '기왕 이서백'을 암살하려는 세력과도 연결이 되어 있으니, 이런 거대한 흑막이 4권에서 낱낱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거기다 신분이 밝혀진 황재하는 '여자의 몸'으로 기왕 이서백과 함께 지낼 수 없게 되었고, 아직 혼약의 파기하지 않은 정혼자 왕온이 발빠르게 움직여 모든 누명을 벗게 된 황재하와의 혼인을 서두르고 있으니, 맨살을 부비며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이서백과 황재하의 로맨스가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도 4권에서 밝혀지게 될 것이다. 더욱더 흥미진진해지는 이야기에 퐁당 뛰어들면 좋을 듯 싶다.

 

  그런데 말이다. 이 책이 <로맨스소설>인지 <추리소설>인지 점점 더 헷갈리기 시작했다. 두 장르가 섞여서 <미스테리로맨스소설>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지만, '살인사건'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이야기가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체검안'을 서술하면서 동시에 '연애감정'을 녹여내고 있는 작가의 서사가 생뚱맞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물론, '범죄스릴러' 장르에서도 '사랑이야기'는 빠지지 않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살인사건추리'를 하면서 '연애감정'에 빠져드는 등장인물이 황제의 아우와 환관으로 신분을 감춘 여인이라는 설정은 <로맨스소설>을 즐기는 독자로서 쉽사리 빠져들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뭐, 국경도 초월하고, 죽음도 극복해내는 사랑이야기가 흔해 빠진 와중에 '살인사건' 속에서 핏빛 로맨스가 펼쳐진다고 한들 그닥 어색할 것 없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허나 내가 어색하다고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여성작가, 특유의 장황한 묘사' 때문이다. 마치 '순정만화'에 그려지는 '꽃배경'이 연상되는 듯한 달콤한 배경묘사와 달달한 심리묘사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난 뒤에 어김없이 '시신'을 부검하는 주자진과 '살인사건'의 증거를 찾아내 비밀을 풀어내는 양숭고의 행동묘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기왕과 여자환관 사이에 찐한 '러브라인'을 풀어내고, 옛연인이었던 '우선'과의 묘사에서는 '미소년과 미소녀'를 등장시키곤 하니, 마치 냉탕과 온탕을 왔다갔다는 서사에 차갑고 뜨거운 감성이 두서없이 오고가는 지경에 이르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한단 말인가? 자고로 <로맨스소설>이라하면 두 남녀의 끈적끈적한 애정묘사에 한없이 달달해지는 감성에 푹 빠져들어야 제맛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로서 <잠중록>은 기상천외하다 못해 기괴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과연 <미스테리로맨스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그냥 받아들여야만 하는 걸까? 난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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