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독서평설 2026.1 독서평설 2026년 1월호
지학사 편집부 지음 / 지학사(잡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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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독서평설 2026년 1월호> 지학사 편집부 / 지학사 (2025)

[My Review MMCXCI / 지학사 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스무 번째 리뷰는 '고교 독서평설 2026년 1월호'다. 워낙 유명한 잡지이니 다른 소개는 하지 않겠다. 수많은 잡지들 가운데 대한민국 학생들이 꼭 하나만 읽으면 좋을 잡지를 꼽자면 바로 '독서평설'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소개를 할 수 있는 까닭은 내가 바로 '독서논술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잡지를 통해서 '최신정보'도 얻고 '신간도서'도 소개 받고, '최근이슈'와 함께 '깊이읽기'를 할 수 있는 유용한 잡지이라서 그렇다. 그런 까닭에 많은 '독서논술쌤'이 이 잡지를 '교재' 삼아서 논술수업을 하기도 한다. 나도 올해는 이 잡지로 고교생 수업을 진행할 계획을 잡았다. 그럼 '독서평설'의 진면목을 살펴보자.

<고교 독서평설 2026년 1월호> 관점 포인트 : <독서평설>로 '논술지도'를 받든, 개인적인 '독학'으로 읽든, 가장 중요한 학습 포인트는 '하루 10분, 독서 플래너'를 꼭 활용하라는 것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짜여 있는 '독서 플래너'를 참고하면 한 달치 학습 분량이 저절로 짜여지게 된다. 요즘 학생들 스케쥴이 좀 바쁜가. 학교를 파하고 나면 학원에 가야 하고, 학원을 마치고 나면 집에 가서 그날 숙제와 공부를 하면서 마무리해야 한다. 특히 '고교생' 같은 경우에는 밤늦게 학원을 마치고 나면 집에서 그저 늘어져 쉬고만 싶은 것이 굴뚝일 것이다. 거기다 침대에 누워서 너튜브와 숏츠를 넘기면서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눈을 감고 다시 뜨면 아침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바쁜 나날들을 보내다보면 '하루 10분'을 투자해서 <독서평설>의 한 꼭지를 읽을 시간도 없기 마련이다.

그럴 때 '짜투리 독서'를 하면서 학교에서나, 학원에서 <독서평설>을 읽는 것을 실천하면 좋겠다. 잡지 한 권을 온전히 들고다니는 것이 힘들다면 '하루 분량의 꼭지'를 몇 장 뜯어서 쉬는 시간이나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짬에 틈틈히 펼쳐서 읽고 밑줄을 그어가며 '요약'하면서 읽어도 무방하다. 애초에 '잡지'라는 것이 천년만년 소장할 것도 아니고 많은 독자분들이 '화장실'에 응가를 누면서 보는 용도로 쓰기도 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 잡지를 소중히 여기는 애독자가 아니라면 바쁜 일상을 살면서 자켓이나 청바지 '주머니'에 쏙 넣고 있다가 틈날 때 읽을 수 있을 분량만 들고 다니며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만큼 <독서평설>의 글 내용은 수준 높고 교양 갖춘 '좋은글'이 가득하다. 더구나 학생들이 꼭 알아두어야 할 배경지식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26년 1월호에서 눈여겨 볼만한 주제도 참 많다. 가장 먼저 '입시정보'로는 경희대학교 미래정보디스플레이학부가 소개되어 있다. 올해 새로 개정된 내용으로는 앞서 입시정보를 담아 놓은 '입시력' 코너가 있고, '문화력', '독서력', '문학력' 코너가 차례대로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맨 앞에는 '특집' 코너로 '한국 핵잠수함 보유'로 자주국방의 시대를 맞았다는 최신 이슈로 글을 열고 있다.

이런 다양한 '글'을 가지고 논술수업을 진행하게 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우리 나라 '정시'와 '수시' 논술은 지문제시형 논술을 진행한다. 대개 1000자 분량의 글쓰기를 요구하고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각각 서론-본론-결론에 해당하는 분량을 따로 요구하기도 하지만, 결국 전체적으로 논술시험을 보는 학생들에게 주어진 지문을 참고해서 '논제'로 주어진 내용에 걸맞는 글을 '1000자 내외'로 찬성이나 반대로 결론을 정리해서 서술할 수 있는 글쓰기 능력을 갖고 있는지를 평가하곤 한다. 그때 어떤 요령이 필요할까? 먼저, 지문분석에 철저해야 한다. 왜냐면 지문분석을 통해서 결론에 딱맞는 정확한 근거를 찾아내야 '주어진 분량'에 맞게 서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지문 분석에 실패하면 분량이 모자라거나 넘치는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1000자의 분량은 보통 서론 1문단, 본론 3문단, 결론 1문단으로 나누어 쓰길 요구하며, 각 문단의 분량은 약 200자(원고지 1매 분량) 정도를 서술하면 좋다. 이때 하나의 문단에는 '중심 문장 1문장'과 '뒷받침 문장 2~3 문장'을 서술하면 된다. 그럼 모두 5문단이므로 5개의 중심 문장만 잘 나열해도 한 눈에 딱 보기 좋은 '모범답안'을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독서평설>로 연습을 해보자. 독서평설의 글들을 잘 살펴보면, '서론'에 해당하는 문단과 '본론'과 '결론'에 해당하는 문단을 찾을 수 있다. 처음부터 쉽지는 않겠지만, '한 문단마다 하나의 중심 문장'이 들어 있다는 것을 간파한다면 어렵지 않게 각 문단의 중심 문장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럼 그 중심 문장에 '형광펜' 같은 것으로 눈에 확 들어오게 밑줄을 그어보자. 그럼 자연스럽게 '중심 문장'과 그 문장을 보충 설명하는 '뒷받침 문장'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각 문단의 중심 문장만 따로 읽게 되면 자연스럽게 '본문 요약'도 가능해진다. 그 문장을 '개요짜기' 삼아서 자신만의 요약글로 새로 쓸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요령으로 '글쓰기 훈련'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주제별 논술쓰기' 연습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이 직접 쓴 글들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틈날 때마다 '읽어보면서 퇴고 작업'을 실시하면 점점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방법은 혼자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므로 <독서평설>을 활용해서 논술대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나가는 글 : 좋은 글을 쓰기까지의 관건은 꾸준함이다. 고등학생 논술 과외비는 상당히 쎈 편이다. 그런데 그 비싼 돈을 들여서 고교 3년 내내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췄으면 모를까 왠지 '낭비'한다는 느낌이 강할 것이다. 실제로 논술과외는 '입시 1달 전'에 시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비싼 과외비를 내면서도 논술수업의 내용은 거의 '첨삭'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짧고 강렬한 '고액과외'이다보니 학부모들은 과외 선생의 '학벌'을 따지고, '경력'을 따지며 나름 꼼꼼하다고 자부하는 분들도 계신데, 가장 좋은 논술선생은 학생의 성향에 따라서 '원포인트'로 콕 짚어서 글쓰기 요령을 지도하는 분이 최고다. 뭐, 논술입시 최신정보를 원한다면 '대형논술학원'에 등록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지만, 논술글쓰기의 기본을 다지는데에는 고액과외보다 '꾸준한 글쓰기 연습'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면 좋겠다. 그러기에 딱 좋은 교재도 바로 <독서평설> 같은 좋은 글과 최신 정보가 알차게 담겨 있는 책을 고르는 것이 좋고 말이다.

기왕이면 초등시절부터 꾸준히 글쓰기 연습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아무리 AI시대가 되어 '직접 쓰기'보다 '검색'이 훨씬 더 편하고 정확한 시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직접 글을 쓰는 학습'은 필수적인 학습으로 남을 것이다. 그래야 AI가 내놓은 결과물이 '좋은 결과물'인지 '나쁜 결과물'인지 최종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 인재만이 AI시대에서도 재능을 인정받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평생 'AI가 떠먹여주는 정보의 노예'가 되어 자기결정권조차 AI에게 통제받는 것이 편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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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세계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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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아멜리 노통브 / 이상해 / 문학세계사 (2015) [원제: Acide Sulfurique(2005)]

[My Review MMCXC / 문학세계사 6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열아홉 번째 리뷰책은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황산>이다. 뜬금없는 제목이다. 황산이라니. 내가 알고 있는 '3대 강산(强酸)'인 염산, 질산, 황산 가운데 하나인 그 황산이 맞단 말인가? 그런데 맞았다. 원제를 다시 확인해보니 딱 맞다. 그래서 줄거리에 '화학공정'이 나오거나 공간적 배경으로 '화학공장'이 나오는가 싶어서 읽었더니 작품 배경은 난데 없는 '집단수용소'였다. 그것도 21세기에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운영하던 그 집단수용소와 똑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여기서 작가 '아멜리 노통브'에 대해서 말을 꺼내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사실 아멜리 노통브의 데뷔작인 <살인자의 건강법>(1992)을 읽었을 때만해도 여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천재작가의 등장'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발한 발상이 독자들로 하여금 '식상함'을 눈녹듯 사그라들게 만들었고, 책을 읽는 내내 '반전에반전에반전'을 거듭하는 놀라운 필치에 완전히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덕적으로 매장 당해도 마땅할 '살인자'가 오래오래 장수할 비법이라도 터득한 듯 '건강법'이란 제목을 접했을 때의 충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뒤를 잇는 그녀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발칙'했고, 너무도 '발칙'했기 때문에 '괘씸'했다. 게다가 독자들을 우롱하는 것을 넘어 기만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아니 독자들을 한껏 욕보이고 조롱하는 것을 맘껏 즐기면서 자신의 소설을 읽고 기분 나빠할 독자들의 지갑조차 탈탈 털어서 제 것으로 만들려는 '오만'함마저 엿보이는 순간. 결국 그녀의 소설을 '중독'된 듯 읽기를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녀의 소설은 재밌다. 아주 기발하다 못해 독창적이라고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재밌는 소설을 읽으면서 기분까지 나빠지는 경험을 선사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소설을 꾸준히 읽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그녀의 소설에서 마주할 수 있는 '불편함'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장치로 뒤집어 생각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녀의 소설이 아주 쓰레기는 아니라는 얘기다. 단지 재미와 함께 불편함을 동시에 주기 때문에 솔직히 칭찬만 해주기 싫은 감정이 들 뿐이다. 그럼 '황산'의 줄거리 속으로 풍덩 들어가보자.

<황산> 관점 포인트 : 이야기는 느닷없이 사람들을 '집단수용소'라는 곳에 강제 이주시켜 자유를 빼앗고 억압하며 노동까지 시켰다. 집단수용소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함께 수용했으며, 이들 가운데 자신이 '이곳'에 끌려온 이유를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사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끌려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단수용소'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운영했던 방식과 똑같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처럼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것처럼 그냥 끌고와서 강제노역을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21세기에 말이다.

그런데 이곳이 나치 수용소와 다른 점은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TV'에 생중계 되고 있으며, 수많은 시청자들이 이곳에서 감금 당하고 노역을 하며 심지어 고문 당하고 죽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았다. 왜냐면 이 '집단수용소'라는 제목으로 방영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시청률 1위'를 찍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시청률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소재(!)를 방송하고 있었을 뿐이고, 시청률 1위를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집단수용소'에 감금하고 폭행하며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고, 다시 말해, 시청률을 높이는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매일매일 '처형'을 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채우고 죽여버리는 짓을 계속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시청률'로 인한 '방송국의 이득'을 위해서 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시스템'에 항거하는 영웅이 등장하게 된다. 집단수용소에는 자유를 박탈 당하고 끌려온 '죄수'도 있었지만, 이들을 감독하고 채찍을 때리며 통제하는 '간수(이들을 '카포'라고 부른다. 독일 나치에서도 똑같은 명칭이었단다)'도 함께 있다. 이곳에 카포로 취직(?)한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은 아니다. 쉽게 말해 '방송국 직원'으로 채용된 사람들일 뿐이며,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사람을 강제하고, 억압하고, 학대(!) 하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뽑힐 수 있었다. 그래서 카포들은 죄수로 잡혀온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학대하고, 때리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이걸 TV화면으로 지켜보는 시청자들은 카포들이 죄수들을 차지게 잘 때리고 교묘하게 학대하는 장면에 열광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카포들의 횡포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는 죄수가 등장했다. 이름은 CKZ 114다. 감옥이라는 곳이 늘 그렇듯 이곳에서 '본명'이 아닌 '번호'로 불릴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그게 시청자들에게 소름 돋을 정도로 '관심'을 끈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예쁜데다 당찬 모습에 호감도가 급상승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은 그녀가 매질을 당하는 것이다. 예쁜 여자의 맑은 피부에 핏자국이 생기고, 상처가 늘어나고, 그녀의 아름다움이 사그라질 때까지 때리고 또 때리는 '가학적 변태 성욕(일명 '사디즘')'을 채우는 것 뿐이었다. 그 일을 대신 하는 것은 '카포'이고 말이다. 그 가운데 CKZ 114를 맡은 카포는 '즈데나'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녀는 시청자들이 원하는대로 그녀를 때리고 또 때렸다. 그리고 즐겼다.

그런데 한창 그 일을 즐기면서 즈데나 카포는 의문이 생겼다. 보통의 죄수들은 이쯤 맞았으면 항복을 하고 더 때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거나 살려달라고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인데, 그녀는 전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때리면 때릴수록 그녀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을 발하는 듯 싶었다. 처음엔 그 빛을 꺼꾸러뜨리기 위해서 더욱 매질을 가했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저항을 하는 그녀에게 더욱 애가 닳고 궁금증이 이는 것은 오히려 즈데나 카포였다. 그러자 그녀의 이름(본명)이 궁금해졌다. 이곳에 끌여온 이유 따윈 애초에 없지만 그녀의 이름이라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심한 매질을 하고서는 살살 구슬렸다. 이름을 말하면 때리지 않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조건'을 단칼에 거절했다. 즈데나 카포는 이름을 말할 때까지 더 때리고 또 때렸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주위의 카포들이 즈데나 카포를 말릴 정도가 되었다. 매일 같이 심한 매질을 가하고 이름을 말하라고, 그러면 때리지 않겠다고, 먹을 것도 주겠다고 '유혹'을 했지만, 그녀의 이름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그럼 그럴수록 시청률은 올랐고 방송사는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TV화면이 그녀의 모습을 잡을 때면 '시청률'도 함께 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창 줄다리기를 하며 그녀와 카포 사이에 뭔가 '유대감' 같은 것이 생겼다. 먼저 즈데나에게서 '변화'가 보였다. 어느날 평소처럼 채찍으로 맞았는데 고통이 몰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알고 보니 즈데나 카포가 '맞아도 전혀 아프지 않은' 가짜 채찍을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점점 메말라가는 그녀가 안쓰러워서 아무도 몰래 그녀의 주머니에 '초콜릿'을 넣어주기 시작했다. 물론 겉으로는 여전히 폭언을 일삼고 매질을 서슴없이 했지만 말이다. 그녀도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지만 차츰 '즈데나 카포'가 주는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이름을 말해주지도 않았다. 간간히 즈데나 카포는 그녀에게 이름을 말하라고 구스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다 다른 죄수를 죽을 정도로 매질하고 '즉결처형'을 하려던 순간 그녀가 나서서 '즈데나 카포'를 만류하고, 처형을 모면하게 해주었다. "내 이름은 파노니크예요"라는 한마디로 말이다. 영웅 탄생의 순간이다.

나가는 글 : 그 뒤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되며 '시청률의 노예'가 된 방송사와 '자극적인 소재'에만 관심을 보이는 시청자의 '관음증'을 비판하는 뉘앙스를 팍팍 풍기며 아멜리 노통브의 그럴 듯한 '훈계'가 찌끄러진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불편한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감히 작가가 '자신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마구잡이로 쏘아붙이며 불편함을 선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결국 너희들도 다 똑같아! 라면서 말이다. 도대체 이런 '발칙한 작가'를 꾸준히 사랑해줘야 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그녀의 '비판의식'은 날카롭다. 품위도 없고 교양도 없는 '시청자'들의 수준을 고려해서 '방송사'들은 사활을 걸며 자극적인 소재들로 영상을 가득 채우는 저질스런 풍토를 지탄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수준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단 말인가. 재미를 위해서는 '출연자'들을 망가뜨리는 짓도 서슴지 않았고, '비도덕적'인 소재를 방영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이런 저질 방송을 즐기는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교양 있는 척 하면서 '저질 방송'만을 찾아 채널을 요리조리 틀어댈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증거들은 '시청률'로 다 드러나고 만다.

이걸 아멜리 노통브는 '관음증'이라면서 시청자들의 몰지각한 면모를 여지없이 비난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시청률의 노예'가 된 방송사들도 싸잡아서 비난의 대열에 동등하게 올려놓았다. 이런 환자와 노예 들은 비난받아도 마땅하다면서 일장 훈계를 늘어놓고 있는 셈이다. 딴에는 수긍이 가면서도 그녀의 책을 읽는 독자들은 '불편한 속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면 아멜로 노통브가 쏘아 올린 '비난의 화살'이 향하는 표적이 바로 독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너희들도 다 똑같아! 이러면서 말이다.

정녕 이토록 발칙한 소설가를 사랑해줘야 한단 말인가? 감히 이처럼 독자를 우롱하고 조롱거리로 삼는 소설가의 책을 끝가지 읽어줘야 하느냔 말이다. 이게 <황산>을 읽은 독자들이 내놓는 대부분의 목소리다. 여기까지 리뷰를 하면서도 '황산'에 대한 이야기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이 책의 제목이 참으로 뜬금 없다는 것이다. 사실 '황산'은 이 소설의 말미에 등장한다. 모든 것을 다 녹여서 없애버릴 정도의 강한 산성 용액의 등장이 이 소설의 '하일라이트'에 속한다. 그러니 '황산'에 대해 궁금증이 인다면 직접 읽어보셔도 좋다. 한편 염산이나 질산도 아닌 '황산'을 고집한 까닭도 강렬한 악취가 나는 용액이기 때문에 간택(?) 받은 듯 싶다. 색깔은 황홀할 정도로 밝은 노란색을 띄지만, 그 냄새를 맡은 코는 자기 손으로 직접 잘라내고 싶을 정도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황산'을 말이다. 너희들이 딱 그래! 코를 막고 싶은 정도의 악취를 풍기면서도 젠채하는 너희들이 딱 그정도의 수준이야! 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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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6권 -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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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6권 :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8)

[My Review MMCLXXXIX / 인물과사상사 33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열여덟 번째 리뷰는 균형 잡힌 역사서술가 강준만 교수의 <한국 근대사 산책 6권>이다. 그를 균형 잡힌 역사서술가로 소개한 까닭은 그가 쓴 책들에서 '좌표'를 찍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의 시선을 '날것 그대로' 담담하게 전달하는데 중점을 두었을 뿐,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성향을 드러내지 않고 나름 '객관적인 서술자'로 남으려 무던하게 애쓴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난 좋았다. 아무래도 '한 쪽의 관점'에 서게 되면 '다른 쪽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어떤지 전혀 알 수 없는데, 강준만 교수의 책을 읽다보면 그 양쪽의 관점을 모두 관찰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단 말이다. 거기에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적당한 해석'을 가미하고 있기에 조금 더 '객관적인 해석'으로 이해하기에도 무척 좋았다. 물론 이런 두루뭉술한 문장을 싫어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이제 막 역사에 입문하려는 독자들에게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경우에도 그랬기 때문이다.

<한국 근대사 산책 6권> 관점 포인트 : <한국 근대사 산책> 시리즈는 모두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부터 5권까지는 '개화기 시대'를 다루었고, 6권부터 10권까지는 '일제시대'를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 6권은 흔히 '일제강점기'라 불리는 우리 역사가 암울했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일제시대는 크게 셋으로 나누곤 한다. '무단통치기', '문화통치기', 그리고 '민족말살기'로 말이다. 그 가운데 6권은 '한일 강제 병합'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까지 약 10년 간을 다루고 있다. 바로 위에서 열거한 '무단통치기'에 해당한다.

'무단통치기'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강제적이고, 억압적인 통치속에 숨조차 제대로 살기 힘든 시기였다. 일제의 헌병과 순사 들은 조선인이라면 아무나 붙잡아 공개적으로 '태형'을 하던 시기였다. 한마디로 조선인과 명태는 두들겨 패야 제맛(!)이라면서 문명인이 된 일본제국인이 미개한 조선인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무진장 애를 쓰는데, 더럽고 어리석은 조선인은 일본인의 선심을 제대로 해야리지도 못하니 때려서라도 '문명개화'를 시켜주겠으니 감사히 쳐맞으라는 식이었다. 이런 무자비한 통치를 하는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만에 하나라도 조선인이 똘똘 뭉쳐서 저항이라도 할까봐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전체 인구수로 보나, 경제력으로 보나 1910년대 당시 한국은 여러 모로 일본에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강제 병합을 당한 직후였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나라 잃은 처지'로 전락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러니 기가 죽어 있을 수밖에 없고 일본의 무단통치에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한국 민중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제의 통치가 좋은 방식인지, 나쁜 방식인지조차 정확하게 인지할 수 없는 처지였다. 대다수의 민중들은 조선 때에도 '수탈' 당했고, 대한제국 때도 '수탈' 당했으며, 이제 나라를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수탈' 당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공교육이라도 제대로 받고 있었다면 '누구'에게 수탈을 당했고, 그렇게 수탈 당한만큼 '정책적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배워서 알아서 분노라도 했겠지만, 그런 기본적인 권리조차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는 민중들에게 무엇에 대한 분노를 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이놈에게 빼앗기나 저놈에게 빼앗기나 '빼앗긴 놈'은 그저 불쌍한 처지일 뿐,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1910년부터 1919년까지 일제가 악착같이 수탈해가는 꼬락서니를 보니 우리 민중들도 뭔가 다른 것을 느끼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1919년 3월에 벌어진 '3·1 만세 혁명'이 그랬다. 인간 대접 받지 못하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얻어 터지고, 기름 짜듯 쥐어짜이면서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아가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우리 편이 뺏어갈 때와 남의 편이 뺏어갈 때의 차이를 느끼게 된 것이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온몸으로 겪으며 배우는 통에 뼈에 사무칠 정도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건 바로 '자존심'을 짓밟힌 것이다. 우리 편이 빼앗아갈 때는 나중에 또 빼앗아가기 위해서라도 자존심을 짓밟지 않았고 주위에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똘똘 뭉쳐서 이겨낼 '여력'이라도 남겨두고 빼앗아갔다. 그런데 일제가 '수탈'을 할 때에는 인정사정 봐주질 않았다. 그들은 늘 '합법'이라는 허울 좋은 말과 함께 토지와 쌀 등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탈탈 털어 갔고, 수탈 당한 민중이 죽든지 살아남든지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고 저들의 목적 달성만을 위해 악착같이 빼앗아갔다.

이런 경험을 강제로 당하면서 우리 민족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건 바로 '안간힘'이었다. 고통이나 위기를 겪으면서도 이루고자 하는 바를 위해 무던히도 애쓰는 힘이었다. 일본놈들이 빼앗아가면서 무식해서 빼앗긴다고 하니 악착같이 학교에 가서 배우려 들었다. 미개해서 수탈을 당한다고 하면 그 잘난 문명이란 것을 배우려 들었다. 더러운 조센징이란 소리를 들으면 깨끗하고 청결하려 애썼다. 그렇다. 이게 바로 우리가 지닌 힘이었다. 오늘날 전세계가 주목하는 '한국문화에 관한 열풍'은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더 나은 것을 가지려는 악착같은 성정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우리 것'이 없더라도 언젠간 그것이 '우리 것'이 될 수 있도록 묵묵히 참고 이겨내며 결국 가질 수 있도록 안간힘을 발휘했다. 그렇기에 불과 100여 년 뒤에 우리는 선진국이 되었고, 다른 이들을 이끌어갈 선도국가가 되었다. 이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저력이다.

나가는 글 : 사실 100년 전에도 일본은 한국의 이런 저력을 감지하고 있었다. 저들이 앞선 문명과 기술, 경제력을 내세워서 세계 침략을 하면서도 유독 '한국'을 악착같이 짓밟으려 했던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저들이 잘나서 '못한 한국인'을 함부로 죽이고 때리고 빼앗고 있는데도 한국인은 순순히 순응하기보다는 '저항'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저들이 지금 당장 '소의 힘줄(일명 '소좃매')' 끝에 납과 같은 무거운 추를 매달아 공공연한 장소에서 엉덩이를 발랑 까놓고 살점이 터져나가도록 매질을 하면서도 한국인들은 비명을 지르고 숨이 넘어가면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 당장은 무서움에 벌벌 떨고 두려움에 꽁꽁 숨었지만 '우리가 잘못한 것이 없어 떳떳하고 당당하니 저들이 나쁜 놈이다. 그러니 저들을 압도할 실력을 기르자. 그래서 본때를 보여주자'하는 오기와 독기로 똘똘 뭉치게 만든 것이다. 비도덕적이고 비이성적인 상대와 대적하면서도 '도덕적'이고, '이성적' 판단을 하면서 말이다. 비겁한 반칙으로는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철저히 실력을 쌓으려 '안간힘'을 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안간힘은 신통하게도 먹혀 들었다.

당시 한국에 들어와 있던 서양인들도 의아했던 점이 있었단다. 덩치만 보면 일본인은 왜소하고, 한국인은 키도 크고 덩치도 큰데, 쬐끄만 일본인이 덩치 큰 한국인을 매질하고 수탈하는 장면을 보면서 말이다. 더구나 외모적으로도 일본인은 꾀죄죄했고, 한국인은 새하얗고 준수했단다. 그런데도 일본인에게 억압 당하고 수탈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는 소회를 밝히는 이들도 많았단다. 하지만 아시아 최초의 근대화에 성공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었다. 그런데 그들의 성정이 원래부터 '야만'스러운 탓에 잘난 자부심과 만나 '폭력적인 방식'의 통치 수단을 삼고 식민경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무단통치'가 한국인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저들이 '인류애'를 발휘하여 저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문명개화'를 우리에게 좋은 의도를 품고 친절하게 이끌어주었다면 우리는 더욱 잘 되어서 이웃나라 간에 더욱 시니지 효과를 발휘하며 전세계에 동아시아 문화를 널리 퍼뜨리는데 엄청난 성과를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잘못된 선택'을 했다. 우리를 너무 만만히 봤고, 너무 함부로 대했으며, 우리가 가진 진면목을 파악하지 못하고, 우리로 하여금 복수심에 불타는 '경쟁심'만 자극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곁눈질로만 배워서 저들이 자랑하는 문명을 따라잡을 위력을 갖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불과 100년 만에 우리는 따라잡고 말았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앞서 나갈 것이며, 저들은 왜 뒤쳐지는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호되게 당할 일만 남았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바는 '일제시대'를 암울하게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분명 그들은 우리를 억눌렀고 털었으며 짓밟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눌리고 털리고 밟히면서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들여온 '신문물'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일본제국을 위해서 들여온 모든 것들을 '눈여겨' 보면서 무섭도록 배워갔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을 위한 학교를 만들었으면 일본 학생 100명 당 한국 학생 10명 뿐이었다고 해도, '전교 1등'은 한국 학생이었고, 일본인을 위한 기업을 만들었어도 일본 근로자 월급은 100원이었다면 한국 근로자는 60원만 받았어도, 그 돈을 알뜰살뜰하게 쓰며 '공부'하는데 썼고, '독립'하는데 썼다. 그렇게 못먹고 못살면서도 '미래'에 더 나은 삶을 위해 투자하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차'가 들어오고, '영화관'이 들어오면 직접 타보고 관람하면서 흥을 내며 살아갔다. 단지 타고 보면서 즐기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비록 지금은 '남의 것'이지만 결국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읽혔다.

그래서 앞으로 '일제시대'를 암울한 기분으로만 공부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고 친일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무식한 한국을 깨우쳐주려 식민통치를 무릅쓴(?) 일본제국의 호의에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는 엉터리 해석을, 난 할 생각이 없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마디로 '빵점'이다.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야욕'만 가득 담은 못난 방식이었고, 자격지심에 더 삐뚫어진 탐욕으로 점철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일제시대에 일본인에 의해 벌어진 일들을 호평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일제의 억압과 수탈과 고문 속에서도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겪고 숱한 위기에 처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한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이토록 빠른 시일에 '선진국'이 되고, '선도국가'가 되어 전세계인이 '한국문화'를 아낌없이 칭송하게 만든 위대한 발자취를 다시금 되돌아보기 위한 역사공부를 하려 한다. 이런 다짐을 하게 된 것도 역시 '균형 잡힌 역사서술자'의 도움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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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14 : 예술의 역사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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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14 : 예술의 역사> 채사장, 마케마케 / 돌핀북 (2025)

[My Review MMCLXXXVIII / 돌핀북 14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열일곱 번째 리뷰는 어린이들의 지적대화를 위해 생각을 깊고 넓게 해주는 교양책 <채사장의 지대넓얕 14>다. 그동안 '역사', '경제', '과학', '철학'을 다루었고 이번에는 '예술'을 다뤄볼 차례다. 흔히 예술은 '음악', '미술', '체육' 영역으로 나누지만 이 책에서는 '미술사', 특히 '서양미술사'를 다뤘다. 사실 '서양미술사'에 관해서는 에른스트 H. 곰브리치가 쓴 같은 제목의 <서양미술사>(예경, 2003)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어른들도 읽기 힘든 '700여 쪽의 벽돌책'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어린이가 직접 읽기에는 다소 무리일 수 있겠다. 그래서 채사장은 이 책의 내용을 어린이들도 읽기 편하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 쓴 듯 싶다. 물론 책 내용이 완전 똑같지는 않다. 채사장의 독특한 '지식 분류법'인 절대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가 이 책에서도 훨씬 더 이해를 돕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채사장의 지대넓얕 14> 관점 포인트 : 미술을 바라보는 입장은 엄청 다양하다. 하지만 크게 고대 '고전주의', 근대 '낭만주의', 그리고 '현대 미술'로 나누곤 한다. 채사장은 이를 각각 순서대로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그리고 '회의주의'로 미술을 바라보는 관점을 구분했고 말이다. 왜냐면 '고전주의'는 핵심 가치로 이성, 질서, 조화, 균형, 비례 등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흔들림 없는 진리를 추구하듯 미술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근대 이후에는 미술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 감성, 개성, 상상력, 주관성 따위를 핵심 가치의 우위를 두었다. 그래서 고전적인 아름다움과는 달리 '낭만적 아름다움'을 아주 잘 표현했고, 채사장은 이를 '상대주의'로 구분했던 것이다.

물론, 미술에서 절대주의, 상대주의로 완벽하게 구분할 명확한 경계는 없다. 왜냐면 아름다움의 '경계'는 명확히 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성이고 조화롭고 비례가 딱 맞는 균형적인 아름다움과 각자의 개성과 주관에 따른 남다른 감성으로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한 아름다움을 구분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술에서 절대적 아름다움을 논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균형미'와 '조화미'를 띠는 작품은 절대주의로, '개성적'이고 '감성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작품은 상대주의로 채사장은 나누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현대 미술은 기존 질서를 비판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며 '일정한 틀'에 구애받지 않고 초월적인 자유로움을 미술에 나타냈기 때문에 '회의주의'라고 구분했다. 그런 까닭에 현대 미술은 엄청 어렵다. 하나의 작품을 이해했을지라도 '또 다른 작품'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는 이런 현대 미술의 장르를 따로 구분하며 나름대로 '해석'을 하려 무던히도 애쓰고 있다. 그래서 현대 미술을 이해하려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플 정도로 난해하기도 한데, 그럼에도 '아름다움'을 추구한 미술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는 점에서 부담 없이 미술(예술)을 즐기면 그뿐이라는 자세로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결국 미술은 '보여지기' 위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니 '봐주는 이'가 없는 미술은 미술이 아닐 뿐만 아니라 미술의 가치를 논할 수 없다는 정도의 수준에서 미술 감상을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해석하기'에 방점을 찍었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이처럼 현대 미술은 '~하기 나름'이라는 느낌적인 느낌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그렇다고 비전문가가 엉터리로 해석하는 것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겠지만, 미술 전문가의 해석만이 '모범답안'이라는 얘기도 절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암튼 '현대 미술'에 대해서는 이 책 '15권'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나가는 글 : 14권에서는 예술의 역사 가운데 절대주의에 해당하는 미술을 주로 다뤘다. 이집트 미술과 중세 미술도 예술의 흐름상 설명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이집트와 중세의 미술은 '아름다움'은 떨어지는 대신 미술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에 충실한 예술을 드높였기 때문이다. 이집트 벽화는 이집트의 왕 파라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그리기'에 충실했고, 중세 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성서의 내용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그리기'에 철저한 방식으로 그렸던 것이다. 그렇기에 얼핏 보면 '초등학생 솜씨'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찬찬히 뜯어보면 그속에 '내용전달'에 충실한 메시지가 오롯히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셈이다. 그로 인해서 '아름다움'은 배제되었다.

그래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미술은 '그리스·로마 미술'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조화미, 균형미, 비례미, 어느 것 하나 빠질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림의 주체는 다름 아닌 '인간'이다. 그리는 대상이 '신'이나 다른 '상상의 산물'일지라도 결국은 '인간의 모습'을 본떠서 완벽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이집트 미술에서 한층 더 발전된 모습처럼 보이는 까닭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중세시대로 접어들면서 '신 중심'으로 미술을 표현하면서 인간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말았다. 오로지 신을 찬양하는 것에 올인하는 바람에 말이다. 그러다 '르네상스시대'를 맞으며 미술계는 다시 '인간 중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를 '문예부흥운동'이라고 부른 까닭도 다름 아니라 '그리스·로마시대'처럼 인간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다시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니, 이를 '인본주의'라고도 부른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동시대에 살면서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런 예술이 부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바로 금융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고, 그 부로 '권력'을 사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수많은 재주 많은 예술가를 후원하여 자신의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었던 점에서 절대적인 위업을 남기기도 했다. 그 가문이 바로 '메디치 가문'이다. 르네상스 예술이 폭발적으로 발달할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메디치 가의 막대한 후원금이 있었기에 재주는 많지만 '재료 살 돈'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가난한 예술가들을 오직 실력 하나만 보고 아낌없이 투자(!)한 덕분이었다. 그런 까닭에 르네상스의 문예부흥은 메디치 가문의 막대한 후원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미켈란젤로도 모두 메디치 가의 후원 덕분에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예술적 재능을 꽃 피웠으며, 그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르네상스시대의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메디치 가문'에 대해서도 지적 탐구를 해볼 가치가 있지만,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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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교수와 함께하는 10대를 위한 교양 수업 1 - 유성호 교수님이 들려주는 법의학 이야기 서울대 교수와 함께하는 10대를 위한 교양 수업 1
유성호.박여운 지음, 신병근 그림 / 아울북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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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교수와 함께하는 10대를 위한 교양 수업 1 : 유성호 교수님이 들려주는 법의학 이야기> 유성호, 박여운 / 아울북 (2023)

[My Review MMCLXXXVII / 아울북 46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열여섯 번째 리뷰는 <서울대 교수와 함께하는 10대를 위한 교양 수업 1 : 유성호 교수님이 들려주는 법의학 이야기>란..헥헥..'어린이 교양수업' 시리즈다. 일단 눈에 들어오는 정보는 '서울대'가 보이고, '교양수업'이란 단어도 보이며, '법의학'이란 명칭도 눈에 띈다. 일단 어린이책 가운데 '서울대'가 추구하는 바는 자명하다. 일단 '학업'에 도움이 되는 책이란 얘기다. 학부모들의 눈이 번쩍 뜨이는 단어다. 하지만 '교양수업'이라는 단어 때문에 망설여진다. 왜냐면 실질적인 '내신성적'이나 '대입수능'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그리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법의학'이라는 명칭은 호불호가 갈리는 대목일 것이다. 일단 단언컨대 학부모들이 선호하는 학과는 아니다. 그렇지만 학생들에게는 좀 다를 것이다. 미드 <CSI 과학수사대>를 즐겨 본 어린 친구라면 관심이 높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보를 종합하면, 이 책은 어린 친구들이 '호기심'에 학부모들에게 졸라서 사달라고 할 책일 가능성이 높고, 학부모는 '서울대'라는 제목을 보고서 마뜩찮은 점이 없지 않지만 기꺼이 지갑을 열어서 사줄 책일 것이다. 그럼 논술쌤의 관점에서는 어떨까? 아이들에게 여러 갈래의 '학문의 길'을 넓게 바라볼 수 있는 훌륭한 '진학상담용책'으로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특정 분야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에게 권할 가능성이 높고, 자녀의 진학상담을 요청받았을 때 '고급정보'를 얻기 위해서 논술쌤이 직접 읽어볼 가능성이 높은 책이기도 하다. 실제로도 온라인 서점에서 '상식/교양' 부문에서 높은 순위에 오른 시리즈이기도 하다. 그럼 책속으로 들어가보자.

<10대를 위한 교양 수업 1 : 법의학> 관점 포인트 : 서울대 유성호 교수님은 SBS TV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자문역할'을 맡은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서울대 교양강의 가운데 가장 수강하기 힘들다는 인기 강의인 '죽음의 과학적 이해'라는 교양 강의를 맡고 있는 교수님으로도 유명하다. 강의 제목에 '죽음'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는데도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 사회가 '죽음'이라는 것에 관심이 많아지는 분위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서 '자살률'이 높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죽음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왜냐면 '삶과 죽음'은 따로 생각할 수 없을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요즘 젊은이들의 사고 방식도 '태어나는 것은 내맘대로 할 수 없지만 죽는 것은 최선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란 전환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반증하는 것이 '죽음'을 검색하는 연령이 60대 이상이 아닌 20~30대 젊은 층에게 더 많이 검색한다는 사실로 입증 되었단다. 그런 의미에서 '법의학'은 죽은 사람의 마지막 목소리를 듣는 의사라는 점에서 점점 인지도를 넓히고 있는 학문이란다.

그럼에도 우리 나라에 '법의학자'는 그리 많지 않단다. 법의학과를 물려줄(?) 제자가 없어서 난감한 교수들도 있을 정도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이유 때문에 '법의학 전공'을 선택한 분이 바로 서울대 유성호 교수님이라고 한다. 교수님 말씀으로는 아무도 지원하지 않아서 '자신이 갈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는데, 일종의 소명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을지라도 현재에는 꽤 만족한 삶을 살고 있으니 결코 후회는 없다고 한다. 이런 유성호 교수님의 노력(?) 덕분에 현재는 국내 유명 대학에 '법의학과'가 개설되어 있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먼저, 법의학을 전공하려면 '의과대학'에 진학을 해야 한다. 그리고 보통의 '의대생'과 같이 6년을 공부하고 졸업한 뒤, 전공 학과를 정하고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의 실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임상 의사'와 똑같은 과정을 거치는데 최종적으로 법의학자로 진로를 정한다면 '레지던트 과정'에서 '병리학'을 공부하고, 병리학 전문의가 된 뒤, 법의학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면 된다. 우리 나라에는 서울대, 고려대, 부산대, 건국대, 연세대, 경북대 등 6곳에 '법의학 대학원'이 있고, 이 대학원에서 '부검'과 같은 실무 경험을 쌓은 뒤에 법의학자가 될 수 있단다. 치과 의사는 '법치의학자'가 될 수 있고 말이다. 법의학자와 다른 점은 '법치의학자'는 병원에서 치과 의사로 일을 하면서 관련된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란다.

'법의관'도 법의학자와 하는 일은 비슷하다. 우리 나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서 일하는 법의학자를 법의관이라 부르는데, 법의학자는 연구와 강의를 더 많이 하고, 법의관은 국과수에서 수사에 필요한 부검을 더 많이 하는 차이점이 있다. 의대나 의학전문대학원을 가지 않고도 '법의학' 관련 일을 할 수도 있다. '검시조사관'이나 '법의간호사'가 있는데, 검시조사관은 '의료기술사 자격'을 취득한 뒤 '경찰청', '국방부', 그리고 '국과수'에서 과학 수사와 관련된 일을 할 수 있단다. '법의간호사'는 '간호사 면허' 취득한 뒤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얻어야 한다. 그 뒤에 '법의간호사 자격증 시험'을 치르면 법의간호사가 될 수 있단다.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해바라기 센터'에서 일하거나 '경찰'이나 '국과수'의 과학 수사 요원, 검시조사관으로 활약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 법의학자는 미국 드라마 <CSI>에서처럼 '과학수사대'의 일원으로 활약할 수 있는 걸까? 아쉽게도 우리 나라 법의학자는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수사관'처럼 활약할 수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드라마 <싸인>에서처럼 법정에서 필요한 의학 증거를 밝혀내서 사건의 결과를 뒤집는 결정적 한 방을 통쾌하게 날리는 역할을 할 수는 있단다. 물론 법정에서 살인사건의 범죄자가 째려보는 와중에 '증언'을 하는 살풍경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더구나 죽은 시체를 '부검'하는 일을 직접해야 하기 때문에 적성에 맞지 않는다면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법의학자가 되면 좋은 점도 있을까? 유성호 교수님 말씀으로는 "법의학자는 죽은 사람의 마지막 목소리를 듣는 의사입니다"라고 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 사망한 사람은 죽은 뒤에 직접적으로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몸 속에 '자신이 죽은 원인(死因)'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법의학자는 '부검'을 통해서 사인을 밝혀내어 이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과 까닭까지 모두 밝혀낼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1987년 서울대 박종철 군이 군사독재의 추악한 면모를 낱낱이 밝혀낼 수 있었던 것도 모진 고문으로 죽임을 당한 박종철 군의 몸을 '부검'한 덕분이었단다. 당시 경찰은 박종철이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사인을 밝혔지만, 당시 중앙대 병원 오연상 의사에게 사망 진단서를 발급하라고 강요 했음에도, 오연상은 침착하게 자신이 직접 죽은 걸 목격하거나 진료기록도 없으니 쓸 수 없다고 말했단다. 그러자 경찰은 '사체 검안서'라도 작성하라고 하자 오연상 의사는 자신이 본대로 '사인은 익사 추정, 사망 종류는 불상(알 수 없음)'이라고 기록하며 부검을 해야 한다고 요청했단다. 그래서 박종철의 시신은 국과수 황적준 법의관에게 인계되었는데, 경찰이 빨리 장례식을 치르고 시신을 화장하려 '사인을 심장 쇼크사'로 발표하라고 독촉했음에도 침착하게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라고 부검 감정서에 기록했기 때문에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은 세상에 진실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오연수 의사와 황적준 법의관이 '죽은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폭력적인 경찰의 권력에 움츠러들어 '진실 은폐'를 했더라면 6월 항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시 폭력 경찰들이 얼마나 지능적으로 고문을 했는지 겉으로는 상처가 거의 없었지만 부검을 하고 몸속을 들여다보자 '가슴과 목에 선 모양으로 피멍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가는 글 : 우리는 '죽음'과 관련해서 쉬쉬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살아간다. 죽음은 긍정적인 면은 없고 부정적 이미지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당히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이른 바 '안락사' 같이 고통스런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고통 없이 편안한 죽음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기 때문이다. 잘 사는 것을 '웰빙'이라 한다면 잘 죽는 것은 '웰 다잉'이라고 부르고 있을 정도다. 드라마 같은 데에서는 '죽는 장면'을 연출할 때 사랑하는 연인의 품에서 고개를 떨구거나 손을 늘어뜨리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며, 병원에서 심장박동이 멈추는 삐~하는 소리와 함께 가족들이 다같이 오열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는 '실제 죽음'과 상당한 차이가 있단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수많은 의사와 의료기구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환자의 비명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사투'를 벌이다 고통에 겨워 겨우 숨이 넘어가는 일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이런 고통을 알고 있는 이들은 자신은 죽을 때 '잠자듯 고통없이 편하게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할 정도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 좀 더 너그럽고 관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자살'을 권장하거나 방조하자는 이야기가 아님을 밝혀둔다. 죽음에 대해서 인지하자는 것은 '죽음'을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잘 사는 삶'을 조명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죽고 사는 문제는 '하늘'에 달린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잘 살고 잘 죽는 문제'를 고민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웰빙과 웰다잉은 '반대말'이 아니라 '같은말'일 것이다. 죽음에 대해 관심을 높이면 그만큼 '삶의 질'도 더 높일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차원에서 '법의학자'가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더 잘 들려주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적어도 우리는 끔찍한 사고로 일어난 범죄를 단속할 수도 있고,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는 법의학자가 사회를 건전하게 만드는 공헌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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